소설리스트

4장 (17/19)
  • 4장

    학자들에게 가 보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가 보지 못할 장소는 무궁한 학구열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과제였다. 특히 신학자에게 있어서, 저들을 유혹하는 대상인 악(惡)의 세상이 그러하였다.

    마계.

    어느 신학자는 다다르지 못할 그곳에 대한 호기심의 열망을,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풀어 본 경험이 있었다.

    악마들이 다루는 흑마력은 파괴적이고 강렬하기 때문에 연상된 건 시뻘건 불바다였다. 시각을 마비시킬 만큼 선명한 혈홍. 그게 전체적인 배경이 되었다. 데일 듯한 화염 사이로 들쑥날쑥 솟은 불기둥이 그들의 터전이 되었고, 기둥에 둘러싸인 마계의 언어로 말미암아 그들은 불에 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신학자가 제 상상력을 토대로 구상해 낸, 이른바 마계 관련 서적은 꽤 불티나게 팔렸더란다. 물론 신전 측에서는 공식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는 서적이라고 못 박았으나, 인간의 관심이란 오롯한 진실보다 자극적인 상상력에 쏠리게 되는 법.

    레니에도 교황일 적 그 서적을 읽어 본 적이 있었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서 절반쯤 읽다가 덮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깊이 빨려 들어갈 이유조차 없는 일이었다.

    실제의 마계는, 그 신학자가 상상해 낸 것과는 완전히 달랐으니.

    * * *

    침대에 걸터앉은 레니에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넝쿨 같은 무늬의 양각이 새겨진 창살. 그 바깥으로 보이는 건 이제 이골이 나는 어두움뿐이었다.

    여명을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하늘에서 익숙한 음울함이 풍겨 났다. 태양은커녕 구름도, 달도, 별도 찾아볼 수 없는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레니에는 저것에 까무룩 잠길 것만 같은 아득함을 체감했다.

    헤레브를 온전히 받아들인 이후로 그녀는 끔찍하게 생각하던 바깥 풍경을 한 번씩 내다보았다. 심약해진 이성을 붙들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었다. ‘내가 조금만 약해지면 나와 헤레브는 저 어둠에 꿀꺽 삼켜져 버릴지도 몰라. 그러니 정신을 차려야 해.’. 그러한 각오와 다를 바 없었다.

    이윽고 천천히 이동한 눈동자가 침실 한편, 커다란 거울에 닿았다.

    “…….”

    레니에는 그 위로 비치는 낯선 여자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보고서야 그게 자신임을 깨달았다.

    이리저리 부딪치고 깨진 양 부식된 눈동자하며, 체중의 감소로 움푹 들어가 피골이 상접한 것처럼 보이는 광대뼈 부근하며. 부르트지 않을 때가 없어 꺼칠꺼칠한 입술하며. 겨울의 초입을 맞이한 낙엽처럼 말라비틀어진 얼굴이 따로 없었다.

    더군다나 안색은 희멀겋게 질린 데에 반하여 입고 있는 가운은 칠흑처럼 까매서 그 창백한 면모가 더욱 도드라졌다. 레니에는 느릿하게 눈가를 문지르며 거울에서 시선을 뗐다.

    그때였다.

    콩콩.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껏 햇살 한 번 받지 못해 시들어 가던 꽃잎처럼 음산함에 취해 있던 낯빛이 한순간 환해졌다.

    “어머니!”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런 건 애초에 필요 없다는 듯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레니에는 제게로 달려오는 작은 인영을 향해 팔을 뻗었다. 앙상한 팔로 들어 올리기에는 어느새 벅차진 헤레브가 그녀에게 답삭 안겼다.

    레니에는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것을 품에 안은 이처럼, 제 아들을 귀중하게 보듬었다. 말랑한 반죽처럼 부드러운 아기의 두 뺨에 입을 맞추던 그녀는 아이가 미약하게 숨을 헐떡거리는 걸 알아채고 물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뛰어오고 그래.”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었는 걸요.”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다음엔 뛰지 않고 올게요.”

    헤레브는 세상에 난 지 이제 약 2년밖에 되지 않았다.

    말문이 트이지 않아 우는 걸로밖에 제 주장을 못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아이는 어느새 완벽한 문장 구조를 터득하여 제 뜻을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젖먹이일 적 레니에가 곧잘 이야기를 해 주던 영향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아이의 성장은 비정상적이다 여겨질 만큼 빨랐다. 레니에는 그로부터 풍기는 위화감을 번번이 무시했다. 그 점을 자세히 들여다봐 봤자 저만 낭패스러울 게 뻔했기에.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자 아이는 어미의 손길이 기꺼웠는지 까르르 웃었다. 저를 닮은 연녹빛의 눈동자를 사르르 접으며 웃는 걸 보니, 텅 비어 있던 그녀의 속으로 따스함이 밀물처럼 차오르는 듯했다.

    오로지 이 말갛고 예쁜 미소 하나만 보며 억겁 같은 세월을 견뎠다. 그리고 동시에, 견디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는 비루하게 몰락한 그녀의 생에 구심점이 되어 버렸다. 이제 레니에는 헤레브가 존재하지 아니하는 자신의 삶은 상상할 수 없었다. 아이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성장해 주고 있었다.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삿된 욕망이나 그릇된 행동은 한 번도 내보인 적이 없었다.

    순하고 무탈한 성정으로 지금껏 어미 속 한 번 썩이지 않았다. 더하여 요람을 벗어나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 다른 침실을 쓰게 되었음에도 꼬박꼬박 저를 보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오고는 했다.

    레니에는 아이를 이 침실에서 최대한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제가 보살필 수 있는 가시거리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매일마다 칸과 벌이는 낯뜨거운 행위가 문제였다. 갓난아기일 적이야 아무것도 모른다지만, 머리가 크기 시작한 아이가 행여나 그 적나라하며 파괴적인 행위를 목격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하는 수 없이 아이의 침실을 옮긴 뒤, 다른 시간에라도 꼭 붙어 있으려고 했다.

    그녀는 제 품에 안긴 아이의 차림새가 상당히 흐트러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아이를 바닥에 내려 두고 시종이 미리 준비해 놓고 간 의복으로 갈아입혔다.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라고 존재하는 게 시종이지만, 그럼에도 레니에는 언제나 헤레브의 모든 것을 제가 손수 챙기려 했다.

    벗겨 낸 옷가지를 들어 올리던 레니에는 불현듯 시야를 침범하는 흔적에 멈칫했다. 옷깃 안쪽에 잉크처럼 검은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순간 피인가 싶어 흠칫 굳었던 레니에는 제 무릎에 얼굴을 비비는 아이의 행동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눈을 깊이 감았다가 떴다.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해도 흑빛이 핏빛으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피는…… 아닌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럼에도 레니에는 가슴 안쪽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느낌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헤레브, 오늘은 무얼 하며 놀았니?”

    “새로 사귄 친우와 놀았어요.”

    “친우……?”

    저를 내려 준 어미의 무릎 위로 다시 엉금엉금 올라와 앉으며 헤레브가 해맑게 답했다.

    “새까만 친우요.”

    “…….”

    헤레브를 한가득 담은 레니에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이곳, 어둠이 팽배한 세상에서 아이를 반드시 인간으로 키우겠다고 결심했다. 그를 위해서 인간이라면 마땅히 배우고 깨우쳐야 할 감정과 관계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해 주고는 했다. 기쁨, 행복, 슬픔이라는 것.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 친우 사이……. 헤레브는 그때마다 눈을 성채처럼 빛내며 어머니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는 했다.

    아이가 제 뜻을 온전히 받아들여 호기롭게 그 존재를 만든 건 좋다. 하지만 이곳은 악마들의 세계였다. 어둠이 모든 것을 압도적으로 장악하는 이곳에서, 과연 헤레브가 삼은 친우가 그에게 좋은 영향을 줄까.

    분명 그렇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럼에도 선뜻 그러지 말라고 할 수 없는 건…… 친우를 사귐으로 말미암아 헤레브에게 생길 이타심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남을 위하는 마음. 누군가를 함부로 해해서는 안 되는 마음. 타인을 소중히 하는 마음.

    악과는 완전히 반대의 궤도를 달리는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리도 애써 오지 않았던가.

    “어머니, 안아 주세요.”

    레니에는 끝내 어느 쪽으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어머니도 저와 함께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헤레브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레니에의 품에 안길 때면, 어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는 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 손길은 꼭 애틋한 걸 만지듯 조심스러워서 그때마다 그녀는 울컥함을 느꼈다.

    레니에는 종종 헤레브가 갓난아기일 적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여 제 품에만 안겨 있으면 어디로 보내지 않아도 되니까.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안 돼요?”

    헤레브는 어미의 마음은 조금도 모를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물었다. 레니에는 혀끝이 떫어짐을 느끼며 애달픈 미소를 지었다.

    아기가 태어난 지 약 2년. 그건 칸과의 기묘한 동침 또한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을 뜻했다. 물론 침실을 함께 사용한 건 그에게 끌려 이곳에 당도한 순간부터였지만, 그 시절의 레니에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아니한 시간이었던지라 따져 물을 필요도 없었다.

    사람과 악마.

    두 존재의 관계는 변화가 있는 듯 없는 듯 미묘했다.

    그녀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착취하듯 앗아 간 후로 칸은 매일 밤마다 그것을 반복적으로 요구했다. 거짓이라도, 빈껍데기라도 좋다며 저 혼자 사랑놀음에 빠진 꼴은 견딜 수 없는 혐오와 증오를 자아냈다.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역겨움을 참아 내며 그것들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로지 헤레브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인형사의 줄에 매달린 목각 인형처럼, 그가 지시한 바를 이행한 결과로 레니에는 여전히 헤레브를 아무런 제지 없이 만날 수 있었다.

    만약 괴로움을 무릅쓰고 그것들을 행하지 않았다면, 헤레브는 지금쯤 다른 악마 아래에서 악한 본성을 깨우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으세요?”

    헤레브가 고개를 떨구며 물었다. 레니에는 아이가 제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나가고 싶지 않느냐고……. 그녀의 심정은 고작 그 정도로 표현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려고 했을 만큼 이곳에서, 그의 곁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문득 아이의 말문이 떼일 무렵의 일이 떠올랐다. 옹알이의 수준을 넘어 여기저기 새는 엉성한 발음을 거듭하던 헤레브가 처음 호기롭게 꺼낸 질문은 그것이었다.

    <이거 뭐야?>

    만개한 꽃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은 채 꼬집는 물건의 정체는 바로 족쇄였다.

    레니에는 순간 견딜 수 없을 만큼 숨이 막혀서 제대로 설명도 해 주지 못하고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숨을 죽인 채, 얼마나 뜨거운 눈물을 흘렸는지. 겉으로는 눈물일지언정 속에서는 피눈물이 나는 심정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그녀는 되도록 발목까지 가려지는 가운을 입고는 했다. 그래 봐야 침대 기둥으로 이어지는 쇠사슬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으나, 헤레브의 시야에서는 어떻게든 그것을 감추고 싶었다.

    어미의 슬픔을 인지하기라도 한 걸까, 헤레브는 그날 이후부터 한 번도 족쇄 이야기를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았다. 남의 기분을 헤아리며 눈치를 보기에는 퍽 어린 나이였다. 그러니 그건 단순히 그녀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왠지 제 예감이 맞을 듯하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

    그때가 아마, 제 나이답지 않은 아이의 영민함을 처음으로 체감한 때였다.

    “엄마도, 나가고 싶지…….”

    죽을 자유마저도 박탈당한 인생에서 무얼 하고자 하는 욕구는 사치였다. 그걸 증명하듯 그녀의 말꼬리에는 조금의 기력도 없었다.

    헤레브는 그런 어미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와 닮은 눈동자가 자신을 볼 때마다 레니에는 위안을 얻는 듯하였다. 물론 제 씨만 타고난 게 아님을 증명하듯 아이의 머리칼은 흑요석처럼 새까맸지만, 레니에의 시선은 늘 페리도트 같은 녹안에 한정되어 머물렀다.

    “그럼 저와 함께 나가요.”

    “응?”

    그녀는 헤레브가 제 뺨을 쓰다듬으며 건네는 말에 의아함을 표출했다.

    그 순간이었다.

    발목 쪽에서 묘한 바람이 느껴지나 싶더니 절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생경한 소음을 따라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을 때, 레니에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칸이 그녀를 이곳에 가두기 위해 채워 둔 족쇄의 쇠사슬이 뚝 끊어져 있었다. 자그마치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녀를 옥죄던, 마의 쇠사슬이.

    멀쩡한 시각마저 의심하게 만드는 장면에 레니에는 한참이나 굳어 있었다. 그러다가 종전, 종달새처럼 제게 묻던 아이의 음성이 떠올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헤레브는 여전히 활짝 웃고 있었다.

    “이제 나갈 수 있잖아요.”

    “헤레브, 너, 이걸, 어, 어떻게…….”

    아이가 손 하나 까딱이지 않고 마법을 사용했다는 걸 깨달은 레니에는 등줄기를 핥고 올라오는 오한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단지 쇠사슬이 끊어졌을 뿐이므로 그녀의 발목에는 여전히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이동의 제한을 받지는 않았다.

    즉, 레니에는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몸이 되었다.

    어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예전이었다면, 출산하기 전이었다면 그녀는 주저 없이 창밖으로 몸을 내던져 어떻게든 이생에서 도망치려 했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제 품에 안긴 이 작은 생명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해진 헤레브가 그녀에게 희망처럼 등장한 이후로 목숨을 버리는 선택지는 저 뒤로 밀려 버린 지 오래였다.

    그 대신, 목숨을 버리는 대신…….

    레니에는 헤레브를 껴안은 채 다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급히 문가로 향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끼이익.

    제 손으로는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문고리의 감촉이 낯설었다. 때아닌 현실성은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뒷골로 파고들었다.

    <도망갈 생각하지 마.>

    <…….>

    <네가 도망가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여 버릴 거니까.>

    코앞까지 다가온 탈출을 주저하게 만든 건, 별안간 뇌리를 헤치며 등장한 목소리였다.

    벌벌 떨며 절망의 수렁 속으로 차츰 기어들어 가는 저를 눈앞에 둔 채로, 모질디모진 악마가 했던 말이 다시금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쇠사슬은 끊었을지 몰라도 족쇄까지는 풀 수 없다는 듯, 그 묵직한 무게감이 그녀의 신경을 알알이 압박했다.

    레니에는 요동치는 눈동자로 제 품에 안긴 헤레브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멋대로 굴었다가 헤레브가 위험에 처하게 되면 어쩌지. 또다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자신의 과오로 아기가 행여나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칸은 자식에게 큰 미련이 없어 보였다. 회임을 알았을 때 왜 그리 기뻐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집착하는 건 언제나 그녀 하나뿐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섣불리 굴 수 없었다. 제 행동으로 인한 피해가 아이에게 돌아가는 꼴을 그녀는 죽어도 보지 못하리라.

    “어머니가 살던 곳으로 가고 싶으세요?”

    본능적인 두려움에 발을 내디뎌 보지도 못하고 슬금슬금 물러나는데, 별안간 헤레브가 살그미 속삭여 왔다.

    “……뭐?”

    그 질문은 꿈으로도 꾸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레니에는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제가 보내 드릴 수 있어요.”

    아기는 여전히 입꼬리를 부드럽게 휜 채로 말했다. 어릴 적부터 한결같던 어미 바라기의 면모가 그 웃음 속으로 은밀히 드러났다. 레니에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헤레브. 너…….”

    언제부터 마법을 사용하게 된 거니.

    질문이 혀끝에 이슬처럼 맺혔으나 차마 내뱉진 못했다. 그런 낌새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는 정말 평범한 인간처럼 매사 그녀의 품에 안겨 자거나, 놀거나, 이야기꽃을 피우기만 했으니까.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에 이어 아이의 마법 사용 여부가 그녀의 기도를 꽉 조여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오히려 그 사실이 레니에를 조급하게 몰아세웠다.

    역시 여긴 아니었다. 이곳에서, 오직 저만의 노력으로 그를 인간으로 키우기에는 벅찼다. 악마들의 틈이 아니라 인간들의 사이에서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지만이, 그는 완벽히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정말, 엄마를 보내 줄 수 있니?”

    이 아이가 정녕 마법을 쓸 수 있다면 허무맹랑하게 치부할 제안이 아니었다. 그 증거처럼, 헤레브가 입가에 미소를 단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엄마와 함께 갈래?”

    “어디를요?”

    “엄마가 살던 세상으로.”

    질식할 것만 같은 어둠이 팽배한 이곳이 아니라, 태양과 달의 등장으로 하늘색이 변하는 그 오색찬란한 곳으로.

    헤레브는 머뭇거리지 않고 다시금 고개를 주억거렸다. 레니에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문틈 새로 바깥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침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정경이었다. 망설임은 잠시였다. 그녀는 내내 갈등하던 문밖으로 기어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고작 한 걸음.

    누군가에게는 사소할 그 전진이 레니에에게는 몹시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평생 나가지 못할 것만 같았던 감옥에서 스스로 벗어난다는 사실이 그녀의 심장을 쥐고 마구 뒤흔드는 느낌이었다. 그녀에겐 그토록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

    살풍경한 성의 복도는 틈새로 엿보았던 그대로 황량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창이 있었으나 어차피 온 세상이 동굴 속처럼 꺼맸기에 굳이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중간중간에 시종들을 맞닥뜨릴 뻔했으나 기둥이나 곳곳의 장식물 뒤로 숨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처음엔 주춤거렸으나 어느새 그녀는 내달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수월한 느낌이지?

    레니에는 급히 발을 떼면서도 의아한 느낌을 떨쳐 내지 못했다. 수월해도 이렇게 수월할 수가 없었다. 평상시에도 이렇게 인적이 드문가? 은밀히 몸을 숨겨 따돌린 시종 몇몇을 제외하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는 의문이다. 이곳으로 끌려와 침실 밖을 나서 본 게 오늘이 처음이었으니.

    ‘대체 입구가 어디야……!’

    내내 최상층의 침실에서만 갇혀 있었기에 그녀는 지리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막는 이 하나 없음에도 헤매고 또 헤맸다. 침실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레니에의 심장은 거칠게 맥동하고 있었다. 그 심장과 연결된 혈관들은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마비라도 된 것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그렇게 발을 헛디디진 않을까 두려울 만큼 까마득한 계단을 밟고 또 밟고, 간간이 몸을 숨기며 분주히 이동하기를 한참.

    어느새 지면과 맞닿는 1층에 다다른 듯했다. 그 복도의 끝자락, 구석에 위치한 쪽문을 하나 발견했다. 레니에는 헤레브를 고쳐 안으며 조심스럽게 그 문을 열어 보았다. 덜덜 떨리는 손끝처럼 가슴이 험하게 울렁거렸다.

    “아……!”

    휑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어둠에 반쯤 취한 바람이 연약한 살갗을 에일 듯 불었다. 레니에는 결연한 표정으로 간신히 발을 내디뎠다. 눈을 괴로이 만드는 살풍경은 성이나 외부나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바깥은 가려 주는 것이 없어서 그 악한 기운이 더더욱 물씬 와닿는 듯했다.

    뚜벅 걸어 나온 레니에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사방이 암흑이라 나아갈 방향을 잃었다. 오지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방랑자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레니에는 제 품에 안긴 헤레브의 머리를 껴안으며, 이제 막 탈출한 성을 올려다보았다. 스산한 기운을 스멀스멀 발하는 그곳의 전경을 눈에 담으니 역겨움이 절로 치솟아 올랐다.

    잠시 멈추어 선 발은 어느새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크고 웅장하다기보다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느낌이 강한 흑성(黑城)의 입구는 오직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길이었다. 평평한 외딴길 하나를 두고 양옆으로는 암석이 뾰족하게 깎인 채로 이리저리 튀어나와 있었다. 만약 발을 헛디뎌 떨어졌다가는 그대로 즉사하고 말 위험천만한 풍경이었다.

    그 초입에 서서 레니에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제게 안긴 헤레브가 머리칼을 움켜쥐는 걸 알아챈 순간, 그녀는 용기를 내어 힘차게 걸음을 뗐다.

    “헉, 헉…….”

    한동안 격하게 움직일 일이 없었어서 그런지,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체력이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팔다리는 벌써부터 후들거렸다. 힘이 부친 심장이 방망이로 내리치는 것처럼 쿵쿵 발광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고. 조금이라도 멀리 저 성에서, 아니, 그 악마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꺅!”

    별안간 바람이 강하게 부나 싶더니 푸드덕거리는 무언가가 얼굴 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내달리던 걸음을 절로 한 발 뒤로 물리며 레니에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폐하고 메마른 이 풍경에 걸맞는 박쥐 떼가 어느새 하늘에 잔뜩 떠다니고 있었다.

    성서에서 박쥐는 불길한 징조나 다름이 없었다.

    키이이익…….

    키이이…….

    그 증거처럼, 어깨 너머에서 귀를 따갑게 긁는 기이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고개를 뒤로 돌렸을 때, 레니에는 제가 밟아온 절벽 길 아래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생명체를 발견했다.

    아니, 그것을 생명체라고 할 수 있을까. 곰팡이 빛깔로 물들어 눈과 코, 등등 이목구비가 뻥 뚫린 해골들을 말이다.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기괴한 생물. 그 존재를 눈에 담으며 레니에는 이곳이 정말, 악의 세상이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의 속도는 너무도 느렸다. 그래도 쉬지 않고 내달린 덕분에 어느새 아슬아슬한 길목의 끝자락에 다다라 있었다. 레니에는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하아, 하아.”

    이윽고 낭떠러지기를 끼고 난 길을 벗어나 평지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니, 힘드세요?”

    어쩌다 보니 바닥에 두 발이 닿은 헤레브가 레니에의 볼가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불이 붙은 것처럼 고통스럽게 타는 목 안쪽을 느끼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진이 빠졌는지 힘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이곳에서의 이질적인 것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더욱이 애가 탔다. 어서 빨리 헤레브를 이 세상에서 탈출시켜야만 했다. 이곳은 그를 타락시킬 것들 천지였다. 오히려 침실 안에 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을 제 두 눈으로 하나둘씩 마주하며 그 절실함은 더더욱 비대해졌다.

    “이제 어머니의 세상으로 가요?”

    “그래, 조금이라도 빨리…….”

    조곤조곤 묻는 헤레브를 다시 안아 올리던 레니에는 별안간 말문이 턱 막혔다.

    “……헤, 헤레브.”

    심호흡으로 간신히 안정을 되찾았으나 그녀의 심장은 다시 기묘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언제나 저를 향해 싱그러운 빛을 내던 녹안 속에 또렷한 붉은 기가 넘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발에 적안.

    그 끔찍하게 신물 나는 색채감으로부터 오는 공포심이 레니에의 등줄기를 아스스한 오한으로 물들였다. 그런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는 아이의 손길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전히 따스하고 보드라웠다.

    “어머니의 세상은 이곳과는 너무나 달라요. 어디를 돌아봐도 예쁘게 반짝거려요.”

    “…….”

    “그래서 궁금해져요.”

    아이의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뒤바뀐 색이, 더하여 그 안에 감도는, 정도를 넘어선 안광이 평소와는 다른 느낌을 자아냈다. 헤레브의 선득한 적안은 단순히 상대방을 쳐다본다기에는 너무나 깊고 아득했다.

    꼭 그녀의 눈동자가 아닌, 그 너머를 응시하듯…….

    “그곳도 여기처럼 변하면 어떨지.”

    이상해. 왜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들리지. 꼭, 레니에가 살던 평범한 세상을 온통 어두운 이곳같이 물들이고 싶다는 것처럼.

    착각이리라. 순하고 무딘 제 아이가 그런 파멸적인 생각을 품을 리 없었다.

    착각일까?

    착각이…… 아니면?

    그를 깨닫는 순간, 그녀는 다리에 재차 힘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뜀박질은 이미 멈추고도 남았는데 어찌하여 심장은 다시 이렇게 두방망이질하고 있는 것일까. 아, 뒷골을 얼얼하게 만드는 소름이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헤레브를 다급히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른 아이의 손을 붙잡으며, 갈급하고 성마른 낯빛으로 말했다.

    “헤레브, 아냐. 넌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돼.”

    “왜요?”

    헤레브의 눈동자는 투명한 유리알처럼 순진하게 빛났다. 다만 그 겉에 발라진 핏빛 색깔은 결코 좋은 변화가 될 수 없었다. 지금 표출하는 아이의 호기심은 명백히 악(惡)에 가까웠으므로.

    아이의 속에, 날 적부터 품은 악심이 내재되어 있다는 건 진즉 알고 있던 일이다. 반절의 피는 인간일지 몰라도, 남은 반절은 악마의 것이었다. 그것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갈무리하는 것이 자신이 역할이라는 걸, 레니에는 실로 잘 알고 있었다.

    “넌 악마가 아니니까. 엄마의 배 속에서 나온, 누가 뭐래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이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뭐……?”

    아이의 천진난만한 질문이 그녀에겐 꼭 귀를 찢는 우레로 들렸다. 그건, 속내 아주 깊은 곳을 비수처럼 찔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헤레브는 어미에게 단단히 붙잡힌 손을 빼내어 다시 레니에의 뺨을 어루만졌다.

    “절 죽이려고 하셨잖아요.”

    “…….”

    “검으로 찌르려고 하시고, 저를 없애기 위한 약도 먹으시고.”

    “…….”

    “악마의 자식이라고, 끔찍하다고 하셨으면서.”

    레니에는 차마 눈도 감지 못하고 헤레브를 응시했다. 꼭 절벽 너머로 밀쳐진 듯, 창백하게 질린 안색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헤레브가 언제를 꼬집는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가능했다.

    회임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칸에게 그의 존재를 들켰을 때, 끝내 그에게서 벗어나서, 눈앞의 생명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하려고 했을 때.

    “그게 정말, 저를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이셨나요?”

    헤레브의 손은 여전히 레니에의 뺨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단지 어미를 애틋하게 보듬는 습관이라 여긴 그 행위의 정체를, 그녀는 이제야 제대로 눈치챘다.

    “너…….”

    이곳과는 판이한 다채로운 인간들의 세상. 배 속의 자신을 어떻게든 죽이려던 행동. 아이로서는 절대로 알 수가 없는 일을, 이렇게나 똑똑히 알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헤레브는 접촉을 통해 레니에의 기억을 읽고 있었다.

    “너는…… 대체 무얼…….”

    무얼 보고 있는 거니.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거니.

    아니…… 그걸 들여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깊어져만 가는 상념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 레니에는 이제 해묵을 대로 해묵어 빛바랜 어느 날의 대화가 떠올랐다.

    <성하. 가령입니다.>

    스스로를 상단주라 속여서까지 저를 만나러 온 게일이, 성수를 건넨 뒤 꺼냈던 말이었다.

    <정말로 가령…… 끝내 지우지 못하고 그 배 속의 존재가 태어나게 된다면.>

    <…….>

    <적어도 이곳 세상으로 오는 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기필코, 결단코요.>

    강조에 강조를 더하는 그의 태도는, 지금의 레니에처럼 절실하기 짝이 없었다.

    <저희는 이번 일,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임하고 있습니다. 악마와의 전쟁에서 인간들의 승리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죠.>

    <요원하다니…….>

    <보십시오. 저희는 칸의 봉인이 성공적으로 마쳐진 줄 알았으나 결국 시간을 좀 벌었을 뿐, 끝내 실패로 돌아간 겁니다. 그 악마는 봉인을 풀고 나와 이처럼 세상을 활보하며 악을 흩뿌리고 있으니까요.>

    <…….>

    <악과의 전쟁은 끝없는 방어일 뿐입니다. 막고, 막고, 또 막고……. 조금이라도 악이 새어 나오지 않게 막는 수밖에 없습니다.>

    게일은 그때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건가. 그걸 알고 또다시 제게 이런 부담감을 지운 것일까. 적어도 칸의 후계가 태어나게 된다면, 그 곁에 자신이 있으리라는 걸 예측한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레니에가 이렇게 마계로 끌려와 산송장처럼 살게 되는 걸…….

    그의 말대로였다. 악과의 전쟁에서 승리는 없었다.

    헤레브의 속에 악마의 피가 흐른다는 건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여타의 인간과는 다른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부터가 범인(凡人)이 될 수 없다는 뚜렷한 증거였으니까.

    그런데도 그걸 모른 체하고, 충분히 인간으로 키울 수 있다 고집을 부린 건.

    레니에가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제 편으로만 자라 준다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이곳에서 벗어나 저와 같은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칸, 아이의 친부인 그 존재가 징그럽고 넌더리가 나서.

    하지만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이의 속에 깃들어 있던 악심은 저 같은 인간이 막아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증거인 양 헤레브는 제 정체성을 스스럼없이 정의 내렸다. 자신은 게일이 일컬었던 그 재앙이자 악이 맞다고, 어머니 당신이 기필코 죽이려고 했던 그 존재라고. 제가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 하던, 악마의 붉은 눈을 한 채로…….

    그녀의 망막 위로 에브뢰 성도가 벌건 불에 꿀꺽 집어 삼켜진 지난날의 기억이 일렁였다.

    헤레브가 없다면 제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 그러나 헤레브와 함께하면…… 그녀는 끝내 돌아갈 곳마저 영영 잃어버리게 되리라. 그곳도 이곳도 결국 파멸일 뿐이다.

    “흐으윽…….”

    그 까마득한 절망을 다시 한번 가슴으로 체감하며, 레니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희망은 어찌하여 내게 이런 형태로만 찾아오나.

    이런 덧없는 형태로만…….

    <이곳 세상으로 오는 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좌절의 파도가 되어 들이치는 말을 곱씹는 그녀의 흐느낌은 커져만 갔다.

    한편.

    잿빛의 암석 길을 꿋꿋이 넘었으나, 결국 그 끝에 있는 건 또 다른 지옥임을 인지한 것처럼 휘늘어진 그녀를 응시하는 진득한 눈길이 있었다.

    “지시하신 대로 이곳에서 나가시는 데에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말라 명했습니다. 절벽 아래에서 기생하는 마물들 또한 제멋대로 굴지 못하도록 최대한 움직임을 묶어 두었고요.”

    “그래, 이제 다시 데리고 와.”

    창 앞에 선 칸은 무너진 레니에를 보고 한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비가 오던 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허옇게 질린 그녀를 보며 자신이 사랑을 속삭이던 순간이었다.

    그때도, 레니에는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깨달았겠지.”

    “…….”

    “참 아둔해. 설마 한낱 인간의 노력으로 우리의 본성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뭐, 언제나 그랬듯 그러한 점이 사랑스러운 거지만.

    칸은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뒷말을 속으로 꿀꺽 삼키며 비론이 건네는 잔을 받았다.

    “헤레브의 인간성은 이미 악심에 죄다 잡아먹혔을 텐데. 그래도 희망을 품을 만했어. 내가 봐도 아주 감쪽같이 제 어미를 속이더군.”

    아이는 사랑하는 어미의 앞에서라면 제 악(惡)을 감출 만큼 영악했다. 하지만 아무리 영악하다고 해도 아직은 미숙한 나이였다.

    악마의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파괴하고 부서뜨리는 데에 바탕을 둔다. 어린 악마가 코앞에 먹잇감을 둔 채로 그 본능을 능숙하게 감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를테면, 반짝거리는 레니에의 세상을 이곳처럼 엉망으로 파괴하고 싶은 본능을 말이다.

    그렇게 은밀히 새어 나간 진실된 면모를, 레니에는 이제야 제대로 목도했다.

    금빛 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쓸던 칸은 ‘헤레브’라는 이름을 느릿하게 되뇌었다.

    “비론, 그거 알고 있나?”

    “…….”

    “인간계에서 통용되는 성서는 말이지, 인간을 교화시키는 게 주목적이라 무조건 좋은 소리, 입발림 소리로만 쓰였다더군.”

    비론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으나 시선을 맞춤으로서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피력했다.

    “그들의 서적에서 ‘헤레브’는 교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로 나와. 그게 참 재미있는 점이지. 실제로 악에 물든 헤레브는 주신에게로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돌아가지 않았다는 말씀은.”

    “헤레브는 이름이 두 개였다. 인간으로서의 이름과 악으로서의 이름. 인간의 이름은 당연히 헤레브고, 악으로서의 이름은…… 루키페르라고 하지.”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던 비론의 미간이 움찔했다. 그가 꺼낸 이름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챈 눈치였다. 그 반응에 확신을 더하듯 칸은 입꼬리를 슬쩍 휘었다.

    “그래, 겨우 영혼으로만 떠돌던 악과 최초로 결합하여 이 마계를 세운 첫 번째 왕의 이름 말이야.”

    그렇게나 타락한 자의 이름을, 악이 되지 않길 바라는 제 새끼에게 붙이다니. 칸은 순진하고도 어수룩한 제 신부를 떠올리곤 큭큭대는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헤레브는 이미 내 힘을 뛰어넘었어. 왕의 재목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는 실력이지.”

    “…….”

    “이제 레니에를 왕비의 자리에 앉힐 때가 온 것 같군.”

    “오늘 식을 거행하실 예정입니까?”

    칸은 어두운 술병에 든 술을 잔에 적당히 따른 뒤,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허공에서 휙, 하고 무언가 일더니 곧 판판한 손바닥 위로 붉은 줄이 그어졌다. 살집이 벌어지며 그 사이로 검은 안개와 함께 핏물이 방울방울 스며 나왔다. 그는 손을 꽉 그러쥐어 잔 위로 제 선혈을 짜냈다.

    “그전에.”

    “…….”

    “아직도 발칙한 생각을 품고 있는 건 단단히 혼을 내야지.”

    헤레브가 만약 사랑하는 어미를 위해 힘을 쓰게 된다면 이런 상황이 오게 될 거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그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기분이 걷잡을 수 없이 더러웠다.

    그녀가 알량한 간계로 제게 성수를 먹인 뒤 붙잡을 새도 없이 달아났던 과거의 파편. 그것이 칸의 가슴속에서 험하게 굴러다닌 까닭이었다. 레니에가 제게서 벗어날 시도를 했다는, 피가 끓는 건지 식는 건지 분간할 수 없는 거북한 심정은 언제 겪어도 개 같았다.

    술잔에 피가 담기며 내용물이 적흑색으로 뒤바뀌었다. 그는 그것을 잘 챙겨 놓으라 지시한 후 이내 발을 돌렸다.

    제가 친히 가둬 놓은 새장에서 도망친 신부를 다시 만나러 가는 걸음이 사뭇 조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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