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이곳은 살아서 맞이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레니에는 제 앞에 대령된 그릇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은색 수저를 휘저으니 묽은 액상의 표면이 파동 일으키듯 흔들렸다. 칸의 수하가 친히 공수해 왔다는 인간 세상의 음식임에도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이런 걸로 반가워하기에는 제 처지가 그리 우스울 수가 없을뿐더러, 이젠 일일이 그런 걸 느낄 만큼의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속은 톡 두드리면 공명이 울릴 만큼 텅 비어 버린 지 오래였다.
“욱!”
토기는 불시에 치밀었다.
쨍그랑, 쿵! 레니에는 그릇이 올려진 금반을 침대 밖으로 던지듯이 밀치며 입술을 틀어막았다. 막달에 다다랐음에도 속을 배배 꼬아 대는 욕지기는 도통 나아지지가 않았다.
요 며칠 먹은 게 없어서인지 역류하는 것이라고는 시큼한 위액이 전부였다. 그녀가 안간힘을 다해 구역질을 간신히 참아낼 때, 휘장 바깥에 서 있던 시종들은 은밀히, 그러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바닥에 흩뿌려진 잔해를 치웠다.
그들의 동작에는 소리가 없다. 그림자도 존재하지 아니했다.
처음, 이곳에 와서 그들을 보았을 때 무얼 느꼈더라. 정확히 정의를 내릴 수는 없으나 기겁에 가까운 경기를 일으켰다는 건 분명했다. 그들이 가진, 시각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질적인 특징을 보고 나서였다.
그들은 이마에 새까만 뿔이 박혀 있거나 눈이 흰자 검은자 구분 없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 그 모습이 흐리멍덩한 레니에의 정신을 깨워 차디찬 현실 속에 메다꽂았다.
정녕 악독한 악마의 보금자리까지 끌려오게 되었다는, 지독히도 비현실적인 현실을.
탁.
레니에가 등을 보이고 누운 협탁에 무언가 놓이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지 않아도 뻔했다. 칸의 명령에 의해 엎어진 것을 대신한 새로운 식사가 대령된 것일 테지. 레니에는 그 정성을 무시하듯 이불을 끌어 올려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문이 닫히는 소리는 났다. 그럼에도 이불 속에 웅크린 레니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식사를 거르고 있다 보면 칸이 언제 쳐들어와 입에 음식을 쑤셔 넣을지 몰랐다. 이미 여러 번 전적이 있는 일이었다. 그걸 알지만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심장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렸다. 레니에는 그것이 자신의 심장 박동이 아니라는 잔인한 진실을 깨달은 후였다. 그녀를 야금야금 곪게 만드는 절망, 그러나 그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악(惡)이 그녀의 배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 심박은 그 존재를 또렷이 드러내는 증거였다.
레니에는 손을 들어 두 귀를 틀어막았다.
누가 제발 제 양쪽 귀를 뜯어내 주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아니, 기왕이면 심장을 꺼내 갈기갈기 찢어 버려주길 원했다. 그녀는 이미 죽음의 자유마저 박탈당한 지 오래였으니까. 이 보잘것없는 생명은 저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범인의 손에 저당 잡혔다.
그러니 레니에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을 타락시킬 악을 잉태하고 있는 이 몸뚱어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 * *
산통은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공기가 조금 경직되었을 뿐, 레니에가 죽은 듯 살아가던 하루처럼 평탄하고 순조로웠다. 왕의 후계를 밴 여자가 이곳으로 온 후부터, 칸의 지시에 따라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던 덕택이었다.
“아아악!”
땀으로 물씬 젖어 비명을 지르는 레니에는 이곳이 진정 지옥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꾹꾹 씹어 삼켰다.
원치도 않는 해산에 임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 속을 헤집었고, 주변에 즐비한 뿔 달린 악마의 존재가 그녀의 심장을 콱 움켜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기 직전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격통이 그녀를 무참히 난도질했다.
발목에 채워진 족쇄가 상처를 인지하고 멋대로 마법을 부리기는 하였으나, 그래서 더욱 죽을 맛이었다. 너무나 아팠다가, 갑자기 나아졌다가, 또다시 아파졌다가. 그 기이한 현상이 반복되니 오히려 고통은 적응될 새도 없이 그녀를 파도처럼 거푸 잠식했다.
“흐으으…….”
몇 번이나 숨이 넘어갈 뻔하였다. 웬 흉포한 짐승 한 마리가 제 가랑이를 벌리고 튀어나오려고 혈안이 된 것만 같았다. 배 속 가죽을 박박 긁어 대고 질 입구가 한계치로 벌어진다. 눈앞이 핑그르르 돌지 않는 게 이상할 일이었다.
칸은 그녀가 한참 고통의 수렁을 헤맬 때쯤 등장했다. 재 같던 증오심은 화산처럼 터져 올라 그에게로 쏠렸다.
나를 이렇게나 힘들게 만든 원흉, 무한한 통증의 바닷속에서 연신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죽일 놈. 마음 같아서는 이 살기 어린 마음을 담아 그를 노려보고 싶었으나 그럴 만한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억겁 같은 순간도 결국 끝이 오기 마련이었다.
가랑이 사이를 무식하게 비집어 벌리던 기생충 같은 것이, 드디어 제 몸에서 빠져나갔음을 레니에는 그 순간에 바로 알아차렸다. 땀으로 푹 젖은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바짝 경직되어 있던 전신이 사력을 다한 양 축 늘어졌다.
응애!
아득하게 흐려지는 정신 너머로 아기의 울음소리가 퍼지는 것도 같았다. 저 소리가 현실 같지 않았다. 악마의 핏줄인걸. 그런데 저렇게 사람처럼 운다고?
“보고 싶나?”
칸이 물었다. 레니에는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내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행동으로 표현하는 거부였다. 몸짓한 그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인간 같지 않을 게 뻔했다. 머리에 뿔이 박혀 있거나 눈이 피처럼 벌겋거나. 이곳에서 무수히 보아 온 시종의 외양과 다를 바가 없을 게 자명했다. 그것들이 아니라도 분명,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괴기한 면이 존재하리라.
인간과는 다른 징그러운 형상. 그걸 제 눈으로 담았다가는 정말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형편없이 무너진 정신이 완전히 짓이겨져 부스러기가 될 게 빤했다.
“보는 게 좋을 텐데.”
녹녹한 웃음기 어린 음성이 그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또 나를 어느 참혹한 진창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그런 무자비한 의미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제안이었다.
하여 레니에는 추가 얹어진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박거리기만 했다.
그녀가 막 출산한 아기를 거부함에 따라 산실로 변한 침실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레니에는 제 다리 사이로 서슴지 않고 들어서는 손길에도 무력하게 늘어져 있었다. 기력이 쇠한 지금으로서는 평소 질색하던 악마들의 손길을 마다할 정신도 없었다.
그러던 찰나였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뜨고 있는 시간보다 감고 있는 시간이 길었다. 그럼에도, 그 짧은 순간에도 그 존재는 시야에 깊숙하게 틀어박혔다.
우연이었다. 여시종의 품속에 있는 아기가 눈에 들어온 것은.
전체적인 모습을 발견한 건 아니었다. 온통 시커먼 이곳에서는 이질적이라 여겨질 만큼 하이얀 속싸개. 그 사이로 빼꼼 드러난, 단풍잎처럼 자그마한 손이 눈에 띄었다.
“……잠깐만.”
그걸 응시하자마자 레니에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실처럼 가녀린 음성이 칸의 명에 따라 아기를 얼른 데리고 나서려는 여시종의 걸음을 막아 세웠다.
‘보면 안 돼.’
가슴 속에 깃든 절망이 그녀에게 속살거렸다.
봐서 무얼 하려고. 손은 사람 같을 수도 있지. 저 악(惡)한 것들이 얼마나 교묘한 방식으로 사람을 속이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천을 걷은 후 드러난 외형은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만큼 끔찍할 수도 있어.
그러니 보지 마. 그냥 내보내. 눈에 담지 말고 보내 주란 말이야. 신경 꺼. 외면해. 무시해!
“가까이…….”
잔뜩 내질러 쉰 음성은 녹슨 쇳소리 같았다. 여시종이 가까이 다가왔다. 평상시 질겁하는 그녀의 뿔마저 개의치 않을 만큼 레니에의 온 신경은 속싸개에만 쏠려 있었다.
여시종은 눈치껏 보드라운 천을 걷어 냈다. 그 움직임은 무척이나 느릿하게 레니에의 망막에 새겨졌다. 이윽고 바깥으로 빼꼼 내민 손을 연신 휘적거리던 존재가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
그것은, 그 생명은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
레니에는 막달에 다다르며 잠들 때마다 흉측한 악몽을 꾸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봉분처럼 부푼 배를 끌어안은 채 쓰러진 제 다리 사이에서는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철철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다리 사이에 앉은 자그마한 괴물이 있었다. 그건 단순히 그녀가 상상하는 정도를 넘어선 수준의 기괴한 생김새였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기우일 뿐임을 증명하듯 아기는…… 아기는…….
‘사람…… 같아.’
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가물거리는 눈동자, 오뚝한 코, 오물대는 입술. 뽀얀 피부. 자그마한 손과 발. 그녀가 치를 떠는 검은 뿔이나 시뻘건 눈은 발견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채를 방벽처럼 휘두른 동공은 그녀의 배를 빌려 태어난 걸 증명하듯 청명한 녹색이었다.
다른 어떤 이상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단지, 이제 막 세상 빛을 본 아기였다.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터질 듯 부풀었던 폐부가 푹 사그라들었다. 그게 그녀의 속에 또 다른 공포심을 낳았다. 레니에의 동공이 하릴없이 요동치더니 이내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상태로 이불을 가까스로 끌어 올려 뒤집어썼다. 그건 이곳에 와서 생긴 습관이었는데,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할 때 나오는 무의식적 반응이었다. 지금도 그러하였다.
레니에는 가슴 속에 피어나는 묘한 감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침실 한 편에 우두커니 선 칸은 그 일련의 광경을 모조리 지켜보고 있었다. 번뜩거리는 붉은 눈길이 어떠한 꿍꿍이를 내포한 양 사뭇 오싹했다.
* * *
왕과 그의 신부만이 사용하는 침실에 색다른 변화가 생겼다.
바로 넝쿨이 타고 오르는 듯한 뱀 장식이 박힌 금빛 요람이 한편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어둑하기만 한 이곳에서 유리된 물건처럼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하였다.
하지만 레니에의 신경을 건드리는 건 반짝거리는 요람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 꼬물거리는 자그마한 것.
제 배 아파 낳았으나 단 한 번 품에 안아 보지도, 자세히 들여다본 적도 없는 아기가 그녀의 신경 줄을 매번 불편하게 건드렸다. 제발 다른 곳으로 보내라는 레니에의 말에도 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매일매일을 저 작은 생명체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기는 다음 왕의 후계자답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그림자도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여시종이 언제나 요람 곁에 상주하며 부족한 것이 없도록 돌보았다.
레니에는 매번 요람으로부터 등을 보인 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제 뒤로 쏠려 있었다. 죽어 가는 듯 가늘게 이어지는 제 숨소리를 대신하여 쌔근대는 아기의 숨소리가 그녀의 심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꼭 끊어질 듯한 그녀의 숨결에 보태 주려는 양 세차고 활력적이었다.
그래서 거북했다. 신경이 쏠린다는 건 마음이 향한다는 증거와도 같으니.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응애애!
아기의 울음소리가 적요한 침실을 강렬하게 뒤흔들었다. 그녀는 언제나와 같이 두 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울지 마, 좀, 울지 말라고…….’
해산 전엔 자궁 속의 심장 박동이 그녀를 좀먹었다면, 이제는 저 아기의 기척이 그녀를 곤궁으로 내모는 느낌이었다. 이미 칸에 의해 한차례 내몰렸기에 레니에가 디딘 현실의 땅은 아찔한 절벽이나 다름없었다. 아기는 그런 그녀에게로 몰아치는 모진 바람과 같았다.
한데 이상했다.
평소라면 아기가 칭얼대기 시작할 즈음 연기처럼 나타난 여시종이 그를 어르고 달래고는 했다. 그러면 괴괴한 적막을 깨뜨리는 보챔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꼭 정해진 순서처럼 행해지는 일련의 상황이 오늘은 좀처럼 벌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시종의 부재 때문이었다.
지금쯤이면 들려야 할 문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기는 어서 빨리 저의 불편함을 알아 달라는 듯 빽빽 울어 댔다. 외면하며 등진 채 누운 레니에의 야윈 몸태가 움찔했다. 저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끝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상체를 일으킨 후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레니에는 침대 위였고, 바닥을 향해 발을 내디디는 건 무척이나 요원한 일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 행동을 벌이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
그녀의 안색처럼 허옇게 질린 두 발이 카펫 깔린 바닥에 닿았다.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는 과정이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그 방증인 양 그녀는 한 발을 내디디자마자 풀썩 넘어졌다. 다리 전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살갗 속에 자리한 근육이 꼭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곳에 갇힌 후부터 움직임이 극도로 적어졌으며 출산 전후로는 아예 누워만 있어서 다리 근육이 퇴화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레니에의 발목에 채워진 수갑이 철겅, 하고 스산한 소음을 발산했다. 이제는 그 시린 감촉마저도 익숙해진 건지 그녀는 덤덤하게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에 절그럭. 또 한 걸음에 절그럭.
죄수가 철장을 향해 나아가는 기분이 이러했을까. 레니에가 행하려는 행동에 경고를 하듯, 그녀의 족적을 따라 서늘한 흔적이 남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넌더리 나는 쇠사슬의 소음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저 요람이 존재한 순간부터 레니에의 온 신경은 아기에게만 꽂혀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침대 근처를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제한된 쇠사슬의 길이가 어느새 미묘하게 늘어난 것 또한 알아챌 도리가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건 억겁처럼 느껴졌으나 요람에 도달하는 건 금세였다. 어쩌면 레니에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잿빛으로 물들어 박동을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심장이 그토록 세차게 뛰어 댔다.
으아아앙.
요람 앞에 서자 내내 흐릿하던 눈앞이 조금은 선명해졌다.
레니에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꿈 같았다. 출산 당일 말이다. 제 배 속에 터를 잡고 몇 달간 숨 쉬어 온 건 명백한 악마의 자식이었다. 관계를 가질 때마다 제 핏줄이라 들먹이던 칸의 낄낄대는 음성이 여전히 귓가에 선했다. 그러니 그건 적어도 칸만큼이나 추악할 존재일 게 빤한데.
우연치 않게 들여다본 아기는 악마가 아닌 사람에 가까웠다. 그게 도통 믿기지가 않아서 꼭 꿈이라도 꾼 것처럼 어렴풋했다. 처음에는 놀라움이었다면 다음엔 얼떨떨함이었고 다음엔 부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칸이 내 속에 심어 놓은 해악이 어찌…….
“……아가.”
그렁그렁한 눈물을 단 채 목놓아 울던 아기는 저를 부르는 음성을 들었는지 멈칫했다.
생기가 있었을 적, 레니에의 그것을 닮은 눈동자가 요람 바깥의 어미를 물끄럼말끄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생후 단 한 번밖에 보지 않았음에도 제 어미를 알아보듯 방싯방싯 웃었다. 꼭 지금껏 울던 게 어미가 저를 한 번이라도 봐 달라 성화를 부린 거란 증거처럼.
지난번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으나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반의반도 안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아기에게서 질색을 표할 끔찍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평범해서 눈을 비비고 싶을 지경이었다.
“흐윽…….”
저를 태양 보는 꽃처럼 응시하는 아기를 가만 내려다보던 레니에는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주저앉았다.
<왕과 인간 사이에서 잉태된 생명, 그 반인반수를 마계의 다음 왕으로 세우기 위해.>
<그 반인반수는 아마 이곳과 마계를 전부 아우를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개체일 겁니다. 그러니 그를 살려 두는 건 이 세상에 필히 재앙이 될 테죠.>
재앙…….
이 사랑스러운 게 어떻게 재앙일 수가 있는 거지.
재앙은커녕 눈 한 번 돌릴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올망졸망한 이목구비. 아기자기한 손발, 바동거리는 몸짓, 그 모든 게 시선을 꼼짝없이 사로잡았다.
저와 같은 사람이 이 어둑한 세상에 존재한다는 반가움, 제가 낳은 아기가 징그러운 외형을 가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문드러진 속내로 격랑처럼 스며 올라왔다. 이제는 더 이상 느낄 수 없으리라 생각한 다채로운 긍정의 감각들이었다.
레니에는 내내 이 감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제 희망을 품는 것 자체가 공포스러웠다. 그 희망이란, 칸에게 내보이는 순간 저를 또 다른 식으로 옭아맬 도구가 될 게 자명했기에. 죽지 못하고 그에게 평생 얽매여 살게 된다면 적어도 희망은 품지 않은 채 살고 싶었다. 기대하는 바가 없으면 더 이상 절망에 빠질 일도 없을 것 아닌가.
그럼에도 그것은 죽을 때까지 겪어야 할 고문처럼 그녀에게 줄기차게 주어졌다.
레니에는 별안간 움찔했다. 요람의 틀을 붙잡은 그녀의 손에 따스한 무언가가 닿았기 때문이었다. 다급히 시선을 들어 올린 그곳에는, 어느새 몸을 뒤집은 채 저를 붙잡고 있는 아기의 손이 있었다. 그건 그녀의 속에 내재된 혼돈을 한순간이나마 날려 버릴 만큼의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내 가족이 될 수 있을까……?>
비가 오던 날. 피의 예배당이 되기 전.
심박수로나마 제 존재감을 알리던 아기에게 은밀히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레니에가 ‘가족’이라는 의미로 정의했던 온기. 그것을 눈앞에 있는 이 아기가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이나 원하던 그, 온기를.
어느새 일어나 요람 속 아기를 향해 뻗는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아기는 드디어 제게 관심을 보이는 어미가 기꺼운지 종달새 같은 목소리로 까르르 웃었다. 레니에는 겨드랑이에 손을 밀어 넣어 그 자그마한 몸을 천천히 안아 올렸다.
“아…….”
놀라웠다.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지금껏 기를 쓰고 피하던 게 무색해질 만큼 아기는 너무나 소소했다. 그리고 동시에 따스했다. 레니에가 그렇게나 원하던 온기를 품은 채 아기는 그녀에게로 꼬물꼬물 파고들었다. 앙증맞은 태도는 결코 그녀에게 어떠한 위협도 될 수 없었다.
레니에는 다시금 풀썩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품에 껴안은 아기는 단단히 안고 있었다. 놓칠 수 없었다. 아니,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 생명은…… 악마인 건가요?>
<악마이기도 하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반반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으니까요. 우리가 태어나 자라며 환경의 영향을 받듯이 그것도 그러할 겁니다.>
칸의 손아귀에서 싸늘한 절명을 맞이한 게일과의 대화가 불시에 떠올랐다. 당시 게일의 결연한 음성이 귓가에 이명처럼 울렸다.
“……내가.”
그녀는 저를 올려다보는 싱그러운 녹안에서, 교황직에 막 오를 무렵의 자신을 보았다. 이 아기는 그녀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내가 널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야.”
이제 두려워해도 소용없었다. 레니에의 속에서 새싹 같은 희망은 이미 자라난 후였다.
“네가 그런 존재가 되는 걸 막을 거니까.”
인간이라면 응당 느낄 기쁨과 행복, 배려와 이타심을 가르칠 것이다. 칸처럼, 잔혹한 악마들처럼 오직 타인의 불행만을 바라며 그것을 먹고 자라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리라.
“내가 꼭, 꼭…….”
아기를 꽉 끌어안은 채로 레니에는 머리끝까지 차오른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싱글싱글 잘도 웃던 아기는 어미의 눈물을 달래 주듯 뺨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는 따듯한 기운이 충만한 그 손등을 틈 없이 감싸 쥐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지어도 상관없어.>
칸은 아기의 존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 중요시할 뿐, 대체적으로 이 작디작은 생명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다행이었다.
“헤…… 레브.”
“…….”
“네 이름은 헤레브란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 헤레브.
그는 악의 유혹으로 타락하지만, 참회하며 주신께 용서를 구하여 끝내 죄업을 씻는 인물이었다. 악을 접하며 질 나쁜 길로 빠질 수는 있지만 끝끝내 빠져나왔다는 점에서 그는 대표적인 교화의 인물이었다.
레니에는 이 아기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설령 태초의 악심이 반이나 깃들었을지라도, 그 욕망과 직결되는 호기심을 품더라도, 나머지 절반의 인도적인 면모가 그를 붙잡아 주길 바랐다.
아비가 아닌 어미를 닮은 근성이 맘속에 살아 있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뭣보다 자신의 역할이 막중했다. 아기, 헤레브를 끌어안은 레니에의 눈동자에는 아주 간만에 생기 있는 광채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