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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2. 폐허 (13/19)
  • 에필로그 2. 폐허

    "헉!"

    레니에는 번쩍 눈을 떴다.

    만지지 않아도 온몸이 땀범벅인 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동안 천장만 올려다보며 가슴을 들썩거렸다. 폐부가 깔아뭉개진 것 처럼 숨을 쉬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곧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느다란 눈매를 따라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숨통을 조이는 칸의 고백 뒤로 마지막 기억이 뚝 끊겼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으나 알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알아봤자 어차피, 제게 희망이 될 장소도 아닐 것 같아서.

    도망가는 것도 실패, 자살하는 것도 실패.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가니 이제 무언가를 해 보자 하는 의욕조차 들지 않았다. 바닥을 나뒹굴던 게일과 사비나의 머리통이 가슴 속을 쓰라리게 헤집었다.

    꾹 감고 있던 눈꺼풀을 조금씩 들어 올렸다. 난생처음 보는 구조의 방이었다. 시선이 차근히 돌아가 방 한편의 창문에 가닿았다. 그 순간 레니에는 제 시야를 의심했다.

    열없이 늘어져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오로지 창문, 정확히는 창밖의 풍경에 눈을 꽂은 채 레니에는 침대에서 내려갔다.

    하지만 철컹, 하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발이 묶였다. 창가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했다. 정확히는,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적합했다.

    시린 무력에 풀썩 주저앉은 레니에는 더듬더듬 고개를 돌렸다. 제 발목에 족쇄가 조금의 틈도 없이 딱 맞게 채워져 있었다. 꼭 레니에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그것은 침대의 기둥과 연결되어 절대로 침대에서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날 수 없게끔 했다. 차디찬 쇠사슬을 보자 저것에 목이 조이는 것처럼 갑갑해졌다.

    레니에는 족쇄를 풀려고 아등바등했으나 그것은 꿈쩍하지 않았다. 애초 두께가 얼마나 두꺼운지 검이나 창 등, 무기가 있어도 해체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결국, 족쇄는 그대로고 발목에는 공연히 손톱에 긁힌 생채기만 났다. 녹조 같은 눈동자는 체념을 담은 채 창문을 향했다.

    세상은 온통 꺼멧다. 그녀가 잘 아는 푸른 하늘도, 쨍쨍하게 작열하는 태양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검은 잉크를 풀어 뒤덮은 것처럼 그저, 칠흑빛이었다.

    누군가에게 듣지 않았지만, 저것만 봐도 여기가 어디인지 답이 나왔다.

    "뭐 해?"

    돌연, 음산한 어조가 귀를 찔렀다.

    레니에는 소침해진 눈으로, 어느새 등장해 문가에 서 있는 악마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제 고향을 찾은 이처럼 제법 편안해 보이는 낯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가 제 앞에서 편안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성수를 먹였을 때를 제외하고 그는 언제나 먹이사슬 위에 군림하는 포식자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는 저를 옭아맨 채 한입에 삼킬 포식자가 맞았다.

    뚜벅뚜벅 다가온 그가 레니에를 가볍게 안아 침대 위로 앉혔다. 그리고 다리를 굽혀 앉아 그녀의 무릎 위에 얼굴을 기댔다.

    유려한 입꼬리가 점점 휘어진다.

    "네가 여기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한걸."

    웃음기를 머금은 그와 달리 레니에의 얼굴은 희멀걸게 질려 있기만 했다.

    "마계에 온 걸 환영해, 레니에."

    그의 손가락이 옷자락을 들치며 파고들었다. 움푹 파인 오금을 안마하듯 주무르다가 천천히 허벅지 안쪽을 그러쥐었다. 칸은 여유로운 태세로 상체를 들었다. 그 때문에 레니에 또한 덩달아 하체가 들려, 그녀는 자연히 침대 위로 누울 수밖에 없었다.

    "너와 내 아기는 무사해."

    "......"

    "그리고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더군."

    허공에서 발이 허우적거리자 철컹철컹거리며 족쇄의 사슬이 당겨졌다 풀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꼭, 후려 맞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리였다.

    "그건 즉, 오늘부터 네 보지에 맘껏 박을 수 있다는 거지."

    엉덩이를 터뜨릴 것처럼 주무르던 그가 속옷을 가볍게 끌어 내렸다. 이후 저를 들쑤시던 포악한 남근이 거칠게 밀려 들어왔다. 레니에의 호흡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배인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 그를 면밀히 들여다보던 칸은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느릿하게 혀를 축이며 레니에의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살짝 부푼 배가 그리도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 흑, 흐윽......"

    "넌 내 거야."

    유일하게 저를 진구렁에서 발견해 줬을 때부터.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울념을 속에 그득그득 가지고 있을 때부터.

    "영원히."

    그녀는, 완벽한 제 신붓감이었다.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 완>

    (공금)ⓒ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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