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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1. 서막 (12/19)

에필로그 1. 서막

문뜩, 아주 문뜩이었다.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속이 뜨겁게 타올라 고통이 허덕이다가 정신을 차리니 암흑 속에 갇히게 된 것은.

칸은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때를 되짚어 보았다.

웬 요부가 저를 꾀어냈고 그 계집이 건넨 술을 마셨다. 얼마 안가 속에서 울컥, 덩이진 무언가가 치솟았다. 그건 핏덩어리였다. 그와 동시에 폐부가 견딜 수 없이 작열하며, 온몸으로 화마 같은 고통이 번졌다.

'너, 이, 계집.'

제게 술을 먹인 요부를 죽이려고 손을 뻗었다. 머리통을 잘라 내고 팔과 다리를 끊어 낸 후 그 몸통을 짐승들의 먹이로 줘야 분이 풀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력을 다해 번뜩이는 시야로 보이는 건 요부가 아닌 웬 사내들이었다.

놈들이 요즈음 제 뒤를 쫓고 있다는 악마 사냥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칸의 정신이 끊긴 뒤였다. 그러고서 눈을 뜨니 이 암흑 속의 공간인 것이다.

칸은 제가 이곳에 갇혔다는 것을 생각보다 빠르게 알아차렸다. 더불어 마지막 기억 속에서 놈들이 운운하던, '봉인' 당한 상태라는 것 또한 눈치챘다.

봉인? 가소롭다.

내가 못 나갈 줄 알고.

그는 성수로 난도질당한 상처를 제 흑마력으로 치유한 뒤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힘을 쓰면 쓸수록 이 공간을 깨뜨리고 있다는 느낌은커녕 더더욱 얽매이는 착각이 일었다. 아니, 착각이 맞기는 한가.

무언가가 제 흑마력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이봐.'

아득한 공간 속에서 칸이 입을 열었다. 갇힌 지 며칠 만에 내는 소리라 그런지, 끝이 거칠게 갈라졌다.

'여긴 어디지?'

누구라도 좋으니 대답해 줬으면 했다. 그는 악을 사랑하는 악마라지만 이처럼 듣도 보도 못한 공간에 갇히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달갑지 않은 걸로 모자라, 저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연놈들을 죄 잡아들여 주저 없이 심장을 뽑아내고 싶었다.

'이봐!'

그 분노는 이곳에 갇혀 있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짙어졌다.

원한은 모이고 모여 태초의 악심을 더욱 꿀렁이게 만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골몰히 재보지 않아 모르겠다. 하루? 1주일? 아니, 한 달? 혹은 그 이상? 얼마나 흐른 거지?

공간은 얼마나 넓은지 아무리 소리쳐도 메아리 하나 울리지 않았다. 적막은 아우성의 흔적을 모조리 잡아먹었다.

악마는 죽지 않는다. 그럼에도 칸은 어쩌면 제가 고독으로 죽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다. 그 정도로 그는 외로운 꼴로 한참이나 그곳에 감금되어 있었다. 언제나 제 곁을 따라다니는 수하들을 마냥 귀찮게만 여겼는데 처음으로 그들의 존재가 그리워졌다.

깊은 한숨을 토했다.

허기가 졌다. 불행, 비운, 애처로움. 인간의 악행이 심히 간절했다. 하루는 다 두들겨 패고 싶을 정도로 치열한 살인 충동이 일었고, 하루는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무기력이 몰려왔다. 제 감정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들쭉날쭉 날뛰었다.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어느 날, 칸은 돌연 생각했다.

평생, 여기에 갇히게 되는 건가?

여기서 나갈 수 없는 건가?

그 순간 칸은 생전 처음으로 질식할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게 압박이 맞나? 공허 같기도 하고, 싫증 같기도 했다. 혹은 권태 같기도 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은 죄 몰려들어 저를 잠식하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남을 옥좌오기만 하던 그가 직접 당해 보니 참으로 끔찍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하나 죄책감은 없었다. 그저 부아가 치밀 뿐.

나가고 싶다. 나가고 싶어.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 나갈래. 나갈 거야. 내보내 줘, 내보내 달라고. 나를 놓아줘. 내보내 줘. 내보내. 내보내 달라고!

고통 어린 호소가 입 안에서 뭉텅이진 채로 연신 맴돌았다.

그를 대신하여 욕지거리만 연신 흘러나갔다.

그러던 중, 그가 갇힌 세상이 흔들렸다.

구명줄을 붙잡은 이처럼 아무 말이나 외쳐 보았으나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세상은 자꾸만 흔들렸다. 무너질 듯, 깨질 듯 그렇게 요동치고 뒤틀렸다. 그러나 암흑은 여전히 그를 감싸고 있었다.

짧게 고개를 든 희망은 얼마 안 가 덧없이 사라졌다. 지진이 멈추고 다시 빌어먹을 평화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몇 년을 버텼는지 알 수 없다. 칸은 죽지 않았으나 죽은 것처럼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또다시 영겁 같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불현듯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동화된 것처럼 침잠한 칸의 적안은 그를 기가 막히게 인지하고 번뜩 빛났다.

다디단 냄새.

몇십 년을, 혹은 그 이상을 굶었을 칸의 허기를 극강으로 자극하기에 충분한 냄새. 폐부를 향기롭게 채우는 냄새와 더불어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서러운 눈물 사이로 여린 미성이 섞여 들었다.

'두려워요. 매 맞는 것도 싫어요. 아픈 것도 싫어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신을 찾는 간절한 음성. 그만큼이나 불우하고도 낙척한 자.

기회다.

'우는 소리가 몹시도 구슬프구나.'

자비로운 척은, 수십 번도 넘게 인간을 홀려 잡아먹은 솜씨를 내비치듯 그럴싸했다.

'누가 너를 그리도 힘들게 하는 거니'

여린 미성이 뚝 그쳤다. 칸의 심박 수가 차츰 높아져 갔다. 언제나 여유를 즐기는 성정답지 않게 긴장감이 치솟았다.

곧, 여린 미성은 대답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저는 영영 혼자가 돼요. 그러면 아버지는, 아버지가 저를......'

설움이 섞인 불우지탄.

걸려들었다. 그의 목소리에 응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성이 보였다. 오랜 시간 끝에 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굶주림이 심하게 자극되어 그는 저절로 입맛을 다셨다.

'이리로 다가오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묘한 인기척이 느껴진다. 막막한 공백 속에 처음으로 타인의 자취가 섞여든 것이다.

'그래. 내게로, 내가 있는 곳으로.'

칸의 목소리는 점점 애가 타기 시작했다.

드디어 끝이 보인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더, 더 오도록 해.'

마침내 칠흑처럼 캄캄하기만 하던 세상이 일순 환해졌다. 안개를 헤친 것처럼 밝아진 풍경 속에서, 푸릇한 숲을 떠올리게 하는 녹안이 보였다.

'나와 거래를 하자, 아이야.!'

칸은 깊고도 청명한 진녹빛 눈동자에서 조금도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악업이 쌓여 이미 마모되고 닳아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심장이 쿵, 뛰었다.

저 또렷한 눈동자를 당장 정신 나갈 만큼 엉망으로 이지러뜨리고 싶었다. 외로이 홀로 나동그라져 다 죽어 가던 본성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신이다. 네가 원하는 바를 이뤄 주는.'

인간을 속이기 위해 신을 사칭하는 일쯤은 악마에게 지이했다. 하물며 그 악마가 그들의 수장인 왕이라면 더더욱......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니?'

아이의 속내에 그득그득 배인 비극은 가히 충만했다. 한입에 삼키면 이 허한 공복을 모조리 채울 수 있을 듯했다. 보고 있기만 해도 포만감이 들 정도로 불행했고, 그래서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래, 딱, 제 신부로 삼고 싶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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