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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 (11/19)
  • 10장.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

    레니에는 숲속에 서 있었다.

    분명 숲의 풍광인데 희한하게도 온통 꺼먼색이었다. 달조차 구름에 가려진, 사위가 시커멓게 물든 밤의 전경.

    그녀는 그 속을 끝도 없이 헤맸다. 아무리 걸어도 이곳을 빠져나갈 출구 따위 보이지 않았다. 잔뜩 긁히고 베인 발에서 피가 조금씩 스며 나왔으나 칠흑 같은 풍경에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혈액의 흔적은 오로지 향뿐이었다.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난 피 냄새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레니에는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내달리던 그녀는 문득 숨이 가빠져 배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무언가를 욱여넣은 것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발견하고 기겁하여 소리를 질렀다. 아득한 공간에 그녀의 아찔한 비명이 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은 레니에는 주먹을 쥐어 배를 때려 보기도 했고, 제 몸에서 떼어 내려고 밀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심장 박동마저도 선연한 이 존재는 모체에 딱 달라붙어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저를 거부할수록 신랄한 기색을 뿜어내는 바람에 어느새 레니에는 고통에 절은 얼굴로 헐떡이고 있었다.

    쿵.

    박동은 갈수록 선명해졌다. 그것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요동치는 순간.

    "......헉!"

    레니에는 잠에서 깨어났다.

    잠시간 꼼짝없이 굳어 있던 그녀는 이내 퍼렇게 질린 낯으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바닥에 놓인 양동이에 한차례 토악질을 했다. 그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걸 표하듯, 역스러운 신물만 입 안에서 감돌았다. 그럼에도 속은 연신 메슥거렸다.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가슴팍을 붙잡은 채 헐떡거리던 레니에는 침대 위로 몸을 늘어뜨렸다. 이마를 쓱 쓸자 세수라도 한 것처럼 물기가 잔뜩 묻어났다. 그녀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잠깐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이 얼추 제 박자를 찾았을 즘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일어나자 낡은 침대가 삐걱삐걱, 귀를 긁는 소음을 냈다. 잠든 자리를 정돈한 뒤 레니에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통에 손을 넣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찝찝한 감촉들을 씻어 내고 싶었다.

    물을 한 움큼 떠 입 안을 먼저 헹구었다. 떫은 잔향이 차츰 쓸려 나갔다. 그 후 얼굴에 몇 번이나 물세례를 끼었고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턱에 고인 물방울이 발바닥으로 뚝뚝 떨어졌으나 그녀는 닦을 생각도 않고 거울 속의 자신만 응시했다.

    "......하아."

    허옇게 질린 낯빛,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움푹 팬 볼, 부르트고 갈라진 입술. 피골이 상접한 꼴은 자신이 보기에도 퍽 몰골사나워 보였다.

    웃겼다. 성도에 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악마의 손속에서 벗어났는데 갈수록 말라간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 이유를 헤아려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차츰 아래로 향했다. 납작하던 배가 아주 어렴풋한 등선을 그리고 있었다. 확실히 이전과는 몸태가 조금 달랐다. 꿈에서 느꼈던 요란한 심박이 떠오른다.

    레니에는 흐르는 물을 대충 닦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다행히 성도에서 무사히 벗어난 뒤, 배를 타고 이젠카에 도착했다. 게일과 그 동료 가족들의 보호 아래에서 레니에는 배 속의 생명을 한시라도 빨리 죽여 버리려고 했다. 저를 구속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제 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하얀 실을 죄 끊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낙태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배는 꺼질 일 없이 꾸역꾸역 제 존재감을 밝히려 들었다.

    '이게 가능합니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요!'

    '안에 든 것이 사람이 아닌 악마의 자식이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마력이 약효를 무효화하나 보군요.'

    한바탕 난리가 난 무리 속에서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자세히는 몰라도, 썩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기생충 같은 것을 레니에는 아직까지 달고 있어야 했다. 도무지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밀어내고 부정해도, 이것은 악착같이 제게 달라붙었다. 오히려 제거하려고 하면 할수록 반발을 일으키듯 그녀를 아프게 했다. 마치 저를 자식으로 인정하라는 것처럼 말이다.

    유산이 실패로 돌아간 날, 레니에는 잠들기 전 단검을 빼 들었다. 그것을 움켜쥔 채 거울 앞에 서서 한참이나 고민했다.

    약으로 안 된다면 찔러 볼까. 그러면 얘도 죽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마 높은 확률로 나도 죽겠지. 피가 쏟아지고 고통이 범람하고...... 음울한 생각만 감탕처럼 줄줄 이어졌다.

    악독한 악마나 그가 뿌린 씨앗이나,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이 존재가 제게서 태어나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 것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감정이 몰려오고는 했다. 무섭고, 두렵고, 한편으로는 화가 나고, 역겨웠다.

    뒤엉킨 감정이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레니에는 마침내 단검을 치켜들었고, 복부를 찌르려고 했다.

    그 순간 새끼는 저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그녀에게 고통을 선사했다. 그날은 레니에가 처음으로 발작 증상을 일으킨 날 이었다. 언제나 배를 움켜쥐게 할 수준의 통증이 전부였으나 그날은 정도가 달랐다.

    '날 죽이지 마.'

    꼭 그렇게 말하듯이 레니에를 강한 힘으로 억누른 것이다.

    숨을 허덕거리며 바닥을 기다가 서서히 통증이 가라앉을 때 쯤, 레니에는 몸을 만 채 흐느껴 울었다. 성도에서 벗어났는데도 여전히 저는 제자리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많은 소중한 이들을 사지로 밀어 넣고 왔으면 적어도 상황에 진전이 있어야 하는데, 여지껏 그대로였다.

    비참하던 기억을 짧게 되뇌어 본 레니에의 눈동자가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몸을 돌려 창가로 향했다. 며칠 전까지 모래와 햇빛이 낭자하던 세상과는 퍽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막의 나라 이젠카에서 이동해 이틀 전, 새로운 도시 헤르벤에 정착했다.

    그건 즉 성도가 불바다, 아니, 피바다가 된 지 한 달 조금 넘게 지났다는 소리였다. 에브뢰 왕국으로부터 거리가 멀다 보니 소식을 전해 듣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또 어떻게 알음알음 들려왔다.

    현재 에브뢰 성도는 봉쇄된 상태였다.

    신전이 붕괴한 때를 기점으로 그 땅은 완전히 초토화가 되었으며 그건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었다.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 갈 피바람이 드세게 휘불고 있다는 말이다.

    왕도는 발 빠르게 주변국과 담합하여 성도를 봉쇄한 뒤 그곳에서 악한 힘이 빠져나오지 않도록 조치했다. 상황의 전말을 알지 못하지만, 그곳에 낭자한 암흑의 힘이 악마로부터 기인한 것을 왕국 수뇌부들은 대강 눈치챈 바였다.

    신의 사랑을 받는 땅 성도. 그곳은 이제 신에게 버림받은 땅이 되었다. 그게 불과 1주일 전에 들었던 소식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레니에. 일어났나요?"

    고개를 빼꼼 내밀며 아침 인사를 건네는 여인은 게일의 아내, 사비나였다. 레니에는 시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도에서 빠져나온 이상 그녀는 교황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저 살자고 다른 이들을 전부 죽음으로 밀어 넣은 이기적인' 교황이었다. 그 죄책감에 다른 이들에게서 차마 '성하'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사비나가 처음으로 제 이름을 머금었을 때 레니에는 조금 색다른 기분을 느꼈다. 반추해 보니 칸을 제외하고는 살면서 누구에게도 친근하게 호명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 악마에게 불리는 것이야 그저 꼼찍했기에 논외로 치고 싶었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어째 평소보다 활기찬 얼굴이다 싶더라니. 사비나가 손에 들린 것을 붕붕 흔들며 외쳤다.

    "남편에게서 서신이 도착했거든요."

    레니에의 눈동자에 찰나 생기가 스며들었다.

    그녀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사비나는 그를 이해한다는 양 활짝 웃었다. 사비나의 남편인 게일은 레니에를 배까지 데려다준 뒤 곧장 칸을 봉인하러 떠났다. 그로부터 이 무리가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한 달간 어떠한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서, 서신이 도착했다.

    모든 걸 차치하고, 게일과 그의 무리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감이 들어 레니에는 깊은숨을 터뜨렸다.

    사비나는 친화력이 좋은 여인이었다. 무엇보다 선봉자인 게일의 아내이기 때문일까, 유달리 레니에를 살뜰하게 챙겨 주었다.

    기실, 무리에는 이 사달의 중심에 있는 레니에를 언짧게 보는 시선도 분명히 있었다. 그들로서는 동료나 가족이 그녀 때문에 목숨을 건 채 전투에 임하고 있으니 고깝게 여겨질 만했다.

    그 마뜩잖은 눈길이 느껴질 때마다 더더욱 사비나에게 고마워졌다.

    사비나는 레니에를 침대에 앉힌 뒤 그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녀가 보물처럼 꼭 쥐고 있던 서신을 폈다.

    「악마 봉인 성공. 오늘 내 합류 예정」

    양피지에 써진 내용은 그것이 전부였다. 사비나는 그 글자를 뚫어지라 응시하다가 이윽고 해사하게 웃었다.

    "남편의 필체가 맞아요. 오늘 돌아올 예정인가 봐요! 사실, 혹시 모르니 레니에와 가장 먼저 보려고 가져온 거거든요. 어서 빨리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올게요!"

    머리칼을 휘날리며 사비나는 침실을 빠져나갔다.

    한 달 정도 같이 지내는 동안, 저렇게 밝은 그녀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늘 게일은 너무 무뚝뚝하다며 투덜거리는 그녀였으나 저런 모습을 보면 진정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쩐지 마음속이 뒤숭숭해졌다. 원치도 않은 악마의 아기를 배게 된 레니에로서는, 그녀가 참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제가 꿈꿔 오던 삶. 그건 번번이 주거지나 신원을 바꿔 가며 사는 수고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이를 만나 온전한 사랑의 결실을 본 것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레니에는 사비나가 던지듯이 놓고 간 서신을 들어 올렸다.

    살펴보는 것만으로 남편의 필체를 알아볼 정도라면 얼마나 수차례 눈에 담아 온 걸까. 그 사랑이 무척이나 애틋하고 숭고하게 느껴졌다.

    '사랑스러워, 정말.'

    불쑥, 칸이 제게 속삭였던 고백이 떠올랐다.

    '그래서 네가 더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그 음성, 그 눈빛, 그 감정은 사비나가 품은 사랑과는 달랐다.

    그건, 애초부터 사랑이 아니었다. 세상이 정의하는 '사랑'에서부터 한참 벗어난. 아니 감히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래, 집착. 색으로 따지자면 검붉은 것에 가까운. 오로지 후계를 낳아 줄 여자에 대한 집착과 고집일 뿐이다.

    그건, 절대로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서신을 내려다보던 레니에는 멈칫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사비나가 움켜쥐는 바람에 잔뜩 구겨진 구석을 폈다.

    새빨간 무언가가 흔적처럼 찍혀 있었다.

    "......피?"

    염료라기에는 지나치게 붉은 그것은 사람의 살갖을 찌르면 나오는 피의 색과 동일했다. 레니에는 잠시 눈앞이 아찔해져 입술을 틀어막았다. 칸의 곁에 있으며 수도 없이 맡았던 혈성의 혹취가 다시 풍기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아마도 난리 통 속에서 작성했고, 그래서 얼결에 묻어난 것 일 터였다. 애초 그들이 무사하지 않았다면 이곳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 서신을 보낼 리 없을 테니까. 레니에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정말 그 악마가 봉인 당한 거라면. 그렇다면......

    레니에는 차근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솟아난 배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

    언제나 긴장으로 점철되어 있던 무리의 분위기가 한결 풀렸다. 사비나가 소식을 전하며, 다들 구사일생한 가족들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레니에는 저를 향한 적대 어린 시선을 평소보다 덜 느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사비나는 재차 레니에의 방을 찾아왔다.

    평소보다 상기된 낯의 그녀는 머리 장식을 하는 걸 도와달라고 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으나, 오늘 밤 합류가 예정된 게일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 분명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남편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이 또렷이 전해져서 레니에는 기꺼이 부탁에 응했다.

    거울로 비치는 사비나의 얼굴은 싱글벙글했다. 꼭 선물을 받기전 들뜬 아이처럼 보여서 레니에는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게일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전 당연히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남편은 무척이나 강하거든요."

    사비나의 어조에는 자랑스러움이 물씬 배어났다. 그를 곱씹고 있자니 자연스레 저를 등 떠밀던 게일이 떠올랐고, 더하여 그의 입가에 깃들어 있던 기다란 흉터 자국까지 상기했다.

    "게일의 입가에 난 상처를 봤어요."

    "아, 이전에 있었던 임무 도중 입은 상처예요. 그때도 위험한 임무라고 말이 많았는데, 남편은 그 상처 하나만 입은 채로 당당히 돌아왔었죠."

    그가 내풍기던 흉흉한 인상이 어제 본 양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를 되새기고 있다 보면, 강하다는 전언이 허풍 아닌 진실로 다가오고는 했다. 굳건한 사비나의 믿음 또한 그에 신빙성을 더하는 데에 큰 몫을 했다. 그 믿음의 기반은 당연하게도 사랑이었다.

    레니에는 대답 대신 쓱 웃어 준 뒤, 머리 장식을 마무리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 사비나는 거울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빤한 시선은 쳐다본다기보다는 살피고 있다는 편이 옳았다.

    "다 됐어요."

    이윽고 레니에가 두 손을 들며 말했다. 사비나는 턱을 요리조리 돌려 보더니 제법 맘에 드는지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곧 몸을 돌려 레니에를 마주 보았다.

    "그러니까, 레니에."

    "......"

    "다 괜찮아질 거예요."

    사비나는 무리 중 레니에의 사정에 가장 환한 자였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에 가득 찬 먹구름을 실로 잘 인지하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안쓰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전해 듣기로 벌어진 모든 사태에 있어서 그녀의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 레니에 또한 악마의 무력에 휘둘릴 대로 휘둘리고 이용당한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것에 대한 심심한 위로를 건네자 레니에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내 그녀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정말...... 괜찮아질까요?"

    "그럼요."

    구체적인 계획도, 구상도 없는 위로였으나 그게 레니에의 맘 속 깊은 곳 어딘가를 콕 건드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부닥쳐 왔고, 그래서 최근 들어 레니에는 금방이라도 발밑이 꺼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기류를 왕왕 느꼈다. 혹시 내일 당장 칸이 저를 찾아오는 건 아닌가 싶은 두려움에 다음 날 눈을 뜨는 게 무서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말 다 괜찮아질까.

    게일이 돌아오면, 모든 걸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까.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비나의 말을 믿어 보고 싶었다.

    "고마워요, 사비나."

    기어들어 가는 음성이었으나 그래도 일말의 의지 정도는 느껴졌다. 꽉 막혀 있던 맘속 공간에 바늘 구멍만 한 틈이 생겼다.

    그 약소한 틈새로 간신히 호흡하며, 레니에는 그녀 말대로 이겨내고자 마음을 먹었다.

    "아 참, 그리고 그거 들었어요?"

    사비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이 숙소 내에 예배당이 있대요. 몰랐는데 이곳도 국교가 있나 봐요."

    "예배당요?"

    "네. 누구든 이용할 수 있도록 상시 개방되어 있대요. 레니에는 아무래도 성직자였으니까 혹시라도 가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교황직을 내팽개치듯이 뒤로 한 채였으나 10년간의 버릇이 남아서일까. 레니에는 한 달간의 여정 동안 여러 차례 성서를 읽고 기도를 올렸다.

    그를 습관처럼 행하면서도 악마에게 농락당한 자신을, 과연 신이 바라봐 주기나 할까 하는 의구심은 선연했다. 그런 연유로 기도의 끝은 언제나 미로 속에 갇히는 답답함만 남았다.

    어느 날 방을 찾아온 사비나는 그녀가 기도하는 장면을 목격했었다. 아마도 그때의 기억이 남아 이 말을 전해 주는 듯했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사비나는 오히려 머리 장식을 도와주어 제가 더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 뒤,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싸늘한 적막이 다시금 실내를 덮쳤다. 이 비좁은 곳에 홀로 놓이면 자꾸만 칸이 제게 선사했던 악몽이 떠오른다. 그것이 감당하기 버거워 입술을 깨물던 레니에는 문득 사비나가 말한 예배당이 떠올랐다.

    '가 볼까.'

    마지막으로 예배당에 갔던 게 언제인지 헤아려 볼 수 없을 만큼 까마득했다.

    장소가 주는 무게감이 있어서 그런지, 레니에는 예배당에서 기도를 올리는 걸 좋아했다. 고요한 적막이 아우르는 공간 속에 있다 보면 차마 드러내지 못한 제 속내까지 완연히 마주할 수 있기에.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성서를 들고 방을 나섰다.

    예배당을 찾는 일은 쉬웠다. 숙소 주인장에게 물으니 단번에 알려 주었다. 그녀는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걸어 예배당에 도착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끼이익, 경첩의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니에는 아무 곳에나 앉아 성서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들자 목재로 만든 경건한 십자가가 보였다. 신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보다는, 십자가가 나았다. 그 조각상과 마주할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리 앉는 가책을 느끼고는 했으니까.

    그녀는 지울 수 없는 죄를 너무도 많이 지었다.

    이기적으로 굴어 소중한 이들을 사선으로 밀어 넣었고, 강제였다고는 하나 음욕을 저질러 새끼까지 뱄다. 죄로 물들어 버린 삶. 한때의 성직자라기에는,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는 결과였다.

    창문에 토도독 무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젠카에서도 그렇고 여기에서도, 한 번도 비가 내리지 않았기에 제법 간만이었다.

    세상이 물로 젖어 들고 있을지언정 예배당 안은 그저 적요했다. 레니에는 손을 마주 잡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 때문에 자꾸만 기도가 뚝뚝 끊어졌다.

    기도를 대신하여, 부러 머릿속 한 편에 묵혀 둔 어느 날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성도를 빠져나오기 전, 게일과 대화를 나눌 때였다.

    '그럼 이...... 생명은.'

    아기라고 칭하고 싶지도, 악마라고 칭하고 싶지도 않아서 레니에는 배 속에 품은 것을 그리 불렀다. 사뭇 삭막한 호칭이었다.

    '악마인 건가요......?'

    게일은 그녀를 잠시간 들여다보았다. 오래지 않아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아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악마이기도 하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반반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으니까요. 우리가 태어나 자라며 환경의 영향을 받듯이 그것도 그러할 겁니다.'

    '......'

    '다만 태어난 이상 반드시 칸이 손에 넣으려고 할 테니 모쪼록 지우셔야 한다는 겁니다.'

    레니에는 차근히 눈을 떴다.

    생명체는 어미를 따라하듯 심장 박동을 함께하고 있었다. 꼭,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내던 칸처럼 말이다. 퐁, 퐁. 터질 듯이 발광하던 꿈속과 달리 지금은 물가에 조약돌을 던지는 것처럼 아주 작은 울림만 있을 뿐이다.

    약을 먹어도 제거할 수 없다. 검으로 찌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널 받아들여야 할까?"

    출산하여 기르는 것.

    "게일은, 어떻게 키우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어. 그럼 사람처럼만 키우면, 너도 악마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배 안쪽에서 기포처럼 태동이 일었다. 꼭 대답하는 것처럼 말이다.

    레니에는 무기력한 낯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이것은 마냥 징그러웠다. 생각할 때마다 발끝에서부터 벌레 수십 마리가 기어오르는 듯한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도 온기를 품고 있기 때문일까. 가끔은, 아주 가끔은 굉장히 따스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혼자이던 레니에에게 그 정도의 온기는 지극히 큰 의미로 다가왔다. 루벤이 다가왔던 때처럼, 그녀가 디디고 선 땅을 요동치게 할 정도의 의미. 누군가는 미지근하다고 여길지 몰라도 그녀에게만큼은 데일 듯 뜨거웠다.

    그 온기는 결핍으로 텅 빈 레니에의 속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이것을 낳아 사람처럼만 키우면, 더는 혼자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할 정도로.

    "내 가족이 될 수 있을까......"

    가족이란 따스하다고들 하는데, 레니에가 속한 범위는 언제나 혹한기의 바람처럼 차가울 뿐이었다. 탐욕에 눈이 먼 아버지, 병든 어머니. 그리고 사랑스럽다고 지껄이며 저를 시도 때도 없이 핍박하던 악마, 칸.

    그런 것들을 원한 게 아니었다. 그건 제 가족들이 아니었다.

    저를 위해 주던 살가운 성도의 사람들처럼, 서로를 진솔하게 사랑하는 게일과 사비나처럼. 그들과 같은 형태의 가족을 가지고 싶었다. 안온함과 평화로움, 그러니까, 살아가고 있다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울타리.

    그 악마가 정말 사라졌다면.

    칸이 없어졌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내가 잘 키우면 되니까. 내가, 악마가 아닌 사람처럼 키운다면......

    쿵! 갑자기 예배당 문이 부서질 듯이 열렸다.

    "레니에! 어서 나오세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웅크린 레니에는 저를 찾는 목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문을 연 건 꽤 낯이 익은 사내였다. 함께 이동해 온 무리 중 한 명이었다.

    레니에는 얼결에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요?"

    "도망쳐야 합니다. 지금 당장이요!"

    "네?"

    그녀가 벙벙하게 구는 사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깥에서 무언가 휙 날아들었다. 날붙이처럼 번뜩거린 그것이 사내의 목덜미를 쓸고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다급하던 외침이 멎으며 사내의 목이 서걱, 잘려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빗물 튀듯, 핏자국이 예배당 바닥을 끈적하게 적셨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레니에는 눈앞에서 벌어진 참경을 한순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곧, 제게 소리치던 남자의 목이 데구루루 굴렀다. 그것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순간, 레니에의 눈동자가 질겁으로 뒤덮였다.

    그녀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다급히 물러났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동공이 열린 예배당 문에 꽂혔다. 살찬 비가 쏴아아, 끝없이 들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검은 안개가 짙게 일렁였다.

    송곳으로 어딘가를 찌르는 듯한 불쾌한 기류가 온몸을 뒤덮었다. 그건, 섬뜩한 불안감이었다. 뼈 마디마디가 아릿하게 저려왔다. 몇 미터를 내달린 이처럼 호흡이 점차 가빠져 왔다. 믿고 싶지 않은 시야를 어떻게든 가리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눈앞은 지나치게 명료했다.

    굵직하게 내리는 비, 불온하게 하느작거리는 안개, 그 사이로 조금씩 선명해지는 윤곽......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던 그것은 어느새 하나의 인영이 되었다. 레니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했다. 쿵, 쿵, 쿵. 바닥이 흔들리는 게 아닌가 착각이 일 정도였다.

    이내 인영이 예배당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뚜벅. 그 소리가 가슴 안쪽에 콱 박히자 전신이 써늘하게 식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칠흑 같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반듯한 이마 아래로 드러나는 적색의 안광은 이 어두운 실내 속에서도 루비처럼 고고히 빛났다.

    "찾았다."

    피를 토하며 보았던 그때와 한치도 다를 바가 없는 강렬한 눈빛. 그를 인지하자마자 몸이 반사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안녕, 레니에."

    파리하게 질린 그녀의 안색을 악마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안 본 새에 적색이 더 진해져 있었다. 그게 꼭 그가 지난날 흘린 피를 보여 주는 것만 같아서 오금이 잔뜩 얼어붙었다.

    레니에는 제가 저지른 짓을 실로 잘 알고 있었다.

    "그간 잘 지냈어?"

    칸이 공기를 헤치며 거침없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해. 그걸 아는데도 몸이 경직되어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잘린 사내의 머리통이 보였다. 여기서 그에게 등을 보이는 순간, 자신도 저 무참한 꼴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망설이는 사이 칸은 지척에 다다랐다. 그가 발발거리는 레니에의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우악스럽게 그러쥐었다.

    "부디 잘 지냈어야 해, 너는."

    "무, 뭐......"

    "그게 네가 마지막으로 누릴 수 있었던 자유니까."

    칸, 약 한 달 반 만에 보는 사내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신랄하게 번뜩이는 안광은 가히 미친 자의 것을 보는 듯했다. 사랑과 애정이 아닌 집착과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이었다.

    "이쯤 되면 너 스스로도 인정해. 넌 날 미치게 하는데 재주가 있다는 거. 설마 그딴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까딱하면 정말 죽을 뻔했다는 거 알아?"

    "......"

    "아, 이건 재회 선물."

    칸이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걸 그녀의 발치로 휙 던졌다. 무심코 눈을 내리깐 레니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자 기겁하여 비명을 질렀다.

    게일이었다. 다만, 몸 없이 머리통만 있었다. 핏발이 잔뜩 선 눈동자가 숨을 거둘 당시 그의 고통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았다. 저 시체의 머리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발버둥을 치던 레니에는 그만 미끄러져 주르륵 주저앉았다.

    '남편에게서 서신이 도착했거든요!'

    반가운 소식에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사비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발랄한 그녀의 음성이 되풀이될수록 레니에의 가슴은 견딜 수 없이 무거워져만 갔다. 마음의 짐은 또 이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무연함에 레니에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속이 벌레에 파먹힌 사과처럼 썩어 문드러져 갔다.

    결국, 이들은, 전부......

    "일어나."

    칸은 일말의 자비도 없는 손길로 그녀의 머리채를 휘감아 당겼다.

    "꺄악!"

    두피가 뽑힐 듯한 통증에 그녀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고작 한 달 반 사이, 사내의 손속은 더욱 잔악해져 있었다.

    "넌 이제 다신 나한테서 도망 못 가."

    그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댄 채, 이죽거리듯 속삭였다.

    "마계로 가서 나와 함께 아기를 키우는 거야."

    "싫, 어, 싫어, 싫어!"

    미칠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죄어들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무뎌졌다 여긴 피비린내가 다시금 후각을 뒤흔들며, 간담을 서늘하게 적셨다. 심장이 입 밖으로 뛰쳐나올 만큼 과격하게 요동쳤다.

    폭우가 신이 흘리는 눈물처럼 끝없이 퍼부었다.

    "놔, 이거, 이거 놔!"

    레니에는 저를 그악스럽게 예배당 밖으로 잡아끄는 칸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칸은 조금도 밀려나는 기색 없이, 아니, 오히려 더 억센 힘을 가하며 그녀를 질질 끌고 갔다.

    외곽을 지나 후원에 다다른 레니에는, 그곳에 펼쳐진 광경에 급히 숨을 들이켰다. 핏물이 비에 섞여 초록색의 잔디를 적셔갔다. 그 피는 헝겊 인형처럼 몸이 조각조각 도륙 난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바닥을 나뒹구는 얼굴들은 모두 그녀가 몇 번이나 대면했던 자들이었다. 비단 그뿐인가, 몇 시간 전만 해도 평온하게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었던 이들이다.

    다수히 널린 시신들 사이에서 눈에 익은 머리칼이 보였다.

    레니에의 것보다는 탁하지만, 금발에 가까운 색. 그건 사비나의 것이었다. 물론, 남편의 뒤를 따라가듯 그녀 또한 머리통만 똑 떼인 채였다. 사비나라는 걸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레니에가 손수 꽃아 준 꽃 모양의 머리 장식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샛노란 빛깔의 꽃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화가 되어 버렸다.

    레니에의 숨이 맥이 끊기기 전의 짐승처럼 거칠어졌다. 시퍼렇게 질려 가슴을 들썩거리던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퍽석 주저앉았다. 독처럼 알싸하게 번지는 냄새가 오감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마비시켰다.

    생기를 찾아가던 녹안은 의지가 뚝 꺾인 것처럼 한순간 시들었다.

    칸은 주변을 허망하게 응시하는 그녀의 앞에 다리를 굽혀 앉았다. 쥐 죽은 나락 같은 광경을 자아낸 이치고는 너무나 차분한 낯이었다.

    지금까지 저지른 일만으로도 충분히 미치광이 같았기에 더 이상 소름 끼치게 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내는 언제나 그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네가 발칙한 짓을 저지르고 나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가 레니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렁을 목전에 둔 이처럼 레니에의 전신이 쩍 굳었다. 손가락이 땅을 굵어 파고들 정도로 손등이 퍼들퍼들 떨리고 있었다.

    "화가 많이 났단 말이지."

    "......'

    "그래서 널 다시 만나면."

    기름한 손가락이 레니에의 목덜미를 톡 건드렸다. 그게 꼭 검 끝이 겨눠진 것처럼 느껴져서 그녀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니, '처럼'이 아니었다. 그의 손은 정말 저를 순식간에 난도질할 검이었다.

    "죽여 버리고 싶어지지 않을까 했거든."

    타인의 피가 묻은 손가락이 맥동하는 그녀의 혈관을 따라 덧그렸다. 질척한 감촉이 느껴졌다. 레니에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두 눈을 질끔 감았다.

    "그런데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네."

    한참 동안 레니에의 얼굴에 집요한 시선을 던지던 그가 심상히 읊조렸다.

    "이런 게 사랑인가?"

    레니에의 눈이 부릅떠졌다. 경악으로 물든 눈동자는 제가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느냐는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비론은 왜 네게 이리도 집착하느냐고 했어. 신부야 뭐, 아무 여자나 새끼를 배게 해서 끌고 가면 그만이니까. 그러면서 묻더군. 혹시 널 사랑이라도 하느냐고. 그 질문을 들을 때만 해도 네 사지를 찢어발기고 싶은 생각밖에 없어서 잘 몰랐는데......"

    당황과 난색에 젖은 눈빛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칸이 천천히, 입꼬리를 휘었다.

    "응. 사랑인 것 같아."

    그는 해묵은 난제에 대한 답을 얻은 것처럼, 상당히 명쾌한 어조로 말했다. 시체가 널린, 흩뿌려진 피가 낭자한, 이 불구덩이 같은 상황 속에서 사랑 고백을 한 것이다.

    머릿속이 뿌옇게 물들었다가 곧 서서히 걷혔다. 지금껏 손가락 하나 꼼짝 못 하던 레니에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아니야......"

    "맞아."

    "아니야! 사랑이 아니라고! 그, 그딴 게 어떻게 사랑이야. 어떻게, 어떻게 그런......"

    레니에가 아는 사랑은 그와 판이했다. 외형적으로도 본질적으로도. 그녀가 아는 사랑이란 포근하고, 풋풋하며, 따스하고, 편안하다.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걸 해 본 적도, 받아 본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칸이 제게 품은 감정이 사랑은 아니라는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와 있을 때 저는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아득하고 힘만 들었다. 결코 사랑받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가 저를 사랑한다면, 실로 그렇다면.

    "넌 내게 이럴 수는 없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그 애처로운 움직임을 따라 레니에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칸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사랑에 푹 빠진 이처럼, 퍽 자상한 손길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사랑이 뭐지?"

    이번 질문에는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레니에도 모르니까.

    적어도 그가 품은 감정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정의를 속 시원히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사랑이란 이상이자 몽매에 가까웠다.

    칸은 제 손에 묻은 피로 벌겋게 번져 가는 그녀의 얼굴을, 낙락하게 응시했다.

    "나를 배신하고, 내게 해를 끼치기도 한 널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 걸 보면."

    "......"

    "적어도 내겐 이게 사랑이야."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그녀와 달리 그는 너무나 명쾌하고 단호하게 답을 내렸다. 그게, 사랑이라고. 사랑인 것이라고.

    "......하."

    레니에는 무심코 실소를 터뜨렸다.

    이 정신 나갈 것 같은 곳에서, 저를 질식하게 하는 고백을 들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여겼는데도 아직 멀쩡한 부분이 남아 있었나 보다. 그렇지 않다면 또다시 이성 어딘가가 으끄러지는 이 거지 같은 기분을 느낄 리 만무하니.

    "하하, 하......"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실성한 듯한 웃음을 연발했다.

    싸한 분위기 속에서 그 소리만이 울렸다. 웃음인데도 꼭 숨을 버겁게 헐떡이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다가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아주 사소한 찰나였다. 그녀는 눈 깜짝할 새에 상체를 틀었다. 무리 중 누군가가 떨어뜨린 단검을 쥐는 데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레니에는 그것으로 주저 없이 제 손목을 찔렀다.

    첨예한 검 끝이 살갖을 푹, 뚫는 게 느껴졌다. 몰아칠 고통에 대비해 눈은 질끈 감은 채였다. 하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찔렀는데, 제 손으로 찔렀는데 왜......

    이윽고 눈꺼풀을 든 레니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검은 관통했다. 대신 그녀의 손목이 아닌, 그 위를 감싼 칸의 손등에.

    "여전히 수가 훤해, 일전에 속은 게 기가 막힐 정도로."

    이 악마 앞에서는 죽음마저도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를 깨닫자마자 악질적인 절망이 찾아들었다.

    신은, 저를 버린 게 분명하다는 절망이.

    "그것만 알아 둬. 넌 설사 숨이 끊기더라도 내게서 못 벗어나. 사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세상으로 끌고 갈 거니까."

    이제는 눈에 뛸 정도로 떠는 그녀를 껴안으며, 칸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사랑해, 레니에."

    입가에 걸린 웃음기가 녹녹하다. 손등에 검이 꽂혀 피가 줄줄 새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은 것처럼 태평한 모습이다. 그건, 레니에가 무슨 짓을 해도 그에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다는 방증 같았다.

    레니에의 몸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결코 고독해 보이지 않았다. 그를 감싸는 검은 안개가 터무니없이 짙었기에.

    ***

    빗물이 채찍처럼 들이치는 예배당 안에는 두 사내의 머리통만 참렬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비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로 흠뻑 젖은 커튼이 너울 치듯 흩날렸다. 물기로 번들거리는 바닥에는 낡은 성서가 펼쳐져 있었다.

    맨 앞장, 빨간 서체가 핏물처럼 번져 가고 있었다.

    「순리를 해치는 삿된 것을 경계하라.

    달콤한 그들의 매혹을 견뎌 내라.

    결코 악마에게 현혹되지 말라.

    그 끝엔 오직 나락만이 있으리라.

    -성서 1장 기록, 악마 삼대 계명」

    천둥 번개가 쳤다. 예배당 안에 번지는 서늘한 분위기는 꼭 악이 사랑하는 재앙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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