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악의 기원
성도 안팎이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완연한 봄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성도에서의 봄은 성제를 뜻하기도 했다.
모든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온화한 날씨, 차곡차곡 진행된 준비, 고요한 듯하지만 군데군데 들뜬 분위기.
황금빛 장막 뒤에 앉은 레니에의 표정은 물과 기름처럼 그와 어울리지 못했다. 이질적인 낮에는 이제 익숙해진 음울함이 물씬 배어 있었다.
그녀는 일어나 장막을 걷고 나섰다.
성제를 위해 한자리에 모인 이들이 그녀를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가히 신을 영접한 것처럼 들끓는 분위기였다.
레니에는 하얀 빛깔의 연설대 위로 올라섰다. 모두가 열릴 듯 말 듯한 그녀의 입술에 집중했다. 마른침을 삼킨 후 익숙하게 기도문을 읊었다.
성력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악마에게 농락당해 심신이 더러워졌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이 속에 악마의 씨앗이 심어졌기 때문일까. 기도문이 이전만큼 경건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도의 백성은 이상한 걸 느끼지 못한 듯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신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의 곁에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이번 성제 또한 은혜 속에서 잘 마쳐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큰 소란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모두, 성제를 즐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는 이미 망조가 들었으니까.
레니에는 무신경한 낯빛으로 강단에서 내려왔다. 그러기 전, 해변의 자갈처럼 무수한 인파를 훑어보았다. 제발 게일의 무리, 이를테면 악마 사냥꾼들이 이 땅에 무사히 당도했기를 바라며.
그녀가 내려오자마자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바야흐로 성제의 시작이었다.
***
성제는 총 1주일간 이루어진다. 개중, 사흘째의 밤이었다.
먹색으로 물든 하늘 위에 달이 휘영청 떴다. 동그란 보름달 주변을 맴도는 화한 달무리를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곧 배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레니에는 느릿느릿 고개를 숙였다.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이 아직 회임한 태가 나지 않는 홀쭉한 배를 쓰다듬었다.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닌 태도는 사내가 그간 저지른 일을 꿈이 아닌가 싶게 만들었다.
배꼽 주변을 간지럽히던 손가락이 조금씩 위로 올라왔다. 그것은 둔덕을 가리는 옷자락을 들치며 젖가슴을 훤히 드러나게 했다. 운율을 그리듯 여유롭게 움직이던 손끝이 젖꼭지에 닿았다.
"으응......"
약한 비음을 내뱉자 술을 들이켜던 악마가 작게 웃었다. 그는 한 손에는 잔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유두를 살살 문질렀다. 그의 다리 위에 걸터앉은 레니에는 이젠 습관처럼 몸을 비틀며 발끝을 둥글게 굽혔다.
"좋아?"
그가 엄지와 검지로 아플 만큼 꼭지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레니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새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답이 되었다. 칸은 뭉툭한 손톱으로 정점을 비비듯이 굵어주었다.
"아하읏."
선홍빛의 돌기가 자극에 힘을 받아 서서히 단단해졌다. 그를 응시하는 칸의 눈동자는 당장 빨아 재끼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더없이 끓었다.
그는 희고 부드러운 유방을 주물러 주며 레니에에게 입을 맞췄다.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키스에 응하는 그녀의 눈꺼풀이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바르르 떨렸다.
까슬까슬한 혀가 틈새로 파고들어 레니에의 입 안을 엉망진 창으로 훑었다. 어찌나 기세가 맹렬한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입술이 타액 범벅이었다. 그마저도 그가 쪽쪽 빨아 대는 탓에 결국엔 도톰하게 부은 입술만 남았다.
그가 혀를 내밀라 종용했다. 입술이 소심하게 벌어지고 붉은 혀끝이 빼꼼 드러나자 그는 달콤한 감로수라도 되는 것처럼 세차게 빨아들였다. 입술 새로 뒤엉키는 혀는 꼭 짝짓기에 열중하는 뱀 같았다.
칸이 그녀의 혀를 깊게 빨아 주며 과실 같은 유두를 얄궂게 희롱했다. 아응, 응, 하응. 키스 속으로 레니에의 야릇한 신음이 한데 뭉쳐 흘렀다.
"하아, 요즘 왜 이렇게 말을 잘 들을까?"
만족스러울 만큼 혀를 뒤섞은 그가 촉, 소리 나게 입술을 떼어 내며 읊조렸다.
"고분고분하니까 예쁘기는 한데......"
칸이 그녀의 갸름한 턱을 그러쥔 채 말간 얼굴을 집요하게 들여다보았다. 시선은 엉겨 붙었던 타액보다 더욱 검질겼다.
레니에는 아무렇지 않은 걸 보여 주기 위해 담담한 척 그와 눈을 맞췄다. 산불 같은 적안은 역시나 진녹빛의 동공을 몹시도 쉽게 짓눌러 버린다. 그가 풍기는 음산한 위압감에 그녀는 어깨를 말았다.
작금 레니에는 정사에 있어 최대한 그의 심사에 맞춰 주고 있었다. 물론 그건 이전과는 180도 달라졌다 느껴질 정도로 판이한 수준이 아니라 매우 미미한 정도였다. 이를테면 다가오는 그의 키스에 순순히 응한다거나, 신음을 참지 않으려고 하는.
악마는 그에 대해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좋아 죽겠는지 연신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레니에의 시선이 그의 어깨 너머로 힐곳 비껴 났다. 어둠 속에 빨간 눈이 둥둥 떠다닌다. 칸의 수하, 비론이었다. 레니에가 그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칸, 저기......"
"왜."
젖가슴을 아플 정도로 세게 그러쥐며 그가 물었다. 레니에는 소심한 성정인 양 연신 우물쭈물거리며 속삭였다.
"둘만...... 있고 싶어."
가슴 둔덕을 할짝거리던 칸이 멈칫했다. 곧 그는 허리를 단단히 껴안으며 고개를 들었다. 새붉은 적안에 부드러운 기색이 물결처럼 넘실댔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도 함께였다.
레니에는 저 온화함을 믿지 않았다. 그는, 아차 하는 순간 흉포해질 금수와도 같으니.
레니에는 순종적으로 구는 아내처럼 얌전히 안겨 그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칸의 웃음기가 짙어졌다. 어제도, 그리고 그제도 이런 식으로 굴었더니 그는 순순히 비론을 내보냈다. 아마 이변이 없는 한 오늘도 그러리라.
예상대로 칸이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침실 한 편에 우두커니 자리하던 비론은 눈 깜짝할 새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검은 인영의 흔적을 더듬으며 바지런히 눈을 굴리던 레니에는 젖꼭지를 꼬집는 손길에 신음을 터뜨렸다.
"흐으......!"
"젖꼭지 발딱 선 거 보여? 귀여워. 빨아 달라고 이러는 거지?"
사뭇 거칠어진 음성으로 뇌까린 칸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가슴 끝을 답싹 물고는 깊게 흡입했다. 젖꼭지에서부터 자르르 번지는 전율에 레니에는 달뜬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젖혔다.
그는 젖 찾던 애처럼 가열하게 빨아들이며 다른 쪽 유두를 비빚거렸다. 그의 말대로 딱딱하게 발기한 정점은 지나치게 예민해진 상태였다. 건드릴 때마다 쩌릿한 전율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일직선으로 관통했다.
"시간이 지나면 여기서 젖물도 질질 흐르겠지. 그건 또 얼마나 달까."
일부러 젖무덤이 불룩 튀어나오게끔 살을 움켜쥔 채 쭙쭙 들이키던 사내가 돌기를 혀로 빙글빙글 문질러 주며 중얼거렸다.
배 속에 퍼지는 아찔한 희열에 레니에는 가까스로 그를 끌어안고만 있었다.
"애새끼한테 줄 생각하지 마. 네 젖물은 전부 다 내 거야. 알겠어?"
"응, 으응......"
신음이 꼭 대답처럼 흘러나갔다. 하지만 그 말을 다시 주워담을 정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칸은 이후로 유두를 한참이나 더 괴롭혔다. 손으로 궁굴리고, 이로 깨물고, 혀로 문지르고...... 머지않아 그녀의 젖꼭지는 건들면 쓰라릴 정도로 음탕하게 부풀었다.
그는 그것만으로 성에 안 차는지 뽀얀 가슴 둔덕을 아작아작 물고 핥아 난잡한 자국으로 뒤덮이게 만들었다. 이후 짙게 남은 흔적을 확인하고 씩 웃는 얼굴은 꽤 흡족해 보였다.
가슴을 휘주무르던 칸의 손이 위로 쓱 올라와 그녀의 입가를 매만졌다.
"자지 빨 수 있겠나?"
노골적인 질문에 레니에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아까부터 다리 사이를 끈덕지게 거슬리게 하던 거근의 존재감이 훅 커졌기 때문이었다.
"소, 손으로 하면......"
"그래, 어디 한번 해 봐."
그는 선선하게 허락했다.
정사에 임하는 레니에의 태도가 지순해지자 덩달아 그의 성교 방식 또한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이제는 그녀에게 어느정도 맞춰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마음에 찰 때까지 입 속에 박아 대던 살벌한 이전 행동과는 확실히 비교되었다.
레니에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바지춤을 끌렀다. 술을 모조리 비운 칸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간간이 은밀한 곳으로 빠져 연신 옴찔대는 구멍을 톡톡 두드리기도 했다.
이윽고 딱딱하게 부푼 페니스가 드러나는 순간 레니에는 가슴이 꽉 막힌 듯한 한숨을 흩뿌렸다. 그래도 오늘은 입으로 안 시키는 게 어디인가 싶다. 그의 것은 크기가 워낙 커서 조금만 물고 있어도 턱이 빠질 듯이 아려와 고통스러웠다.
레니에는 소심하게 기둥을 감싸 쥐었다. 어찌나 두꺼운지 한 손으로는 다 감싸지지도 않았다. 이젠 제법 능숙하게 그를 흔들자 쩍 벌어진 대가리가 쯔걱쯔걱거리며 쿠퍼액을 분출했다.
"후우......"
칸의 만족스러운 신음이 귀를 자극하듯이 울렸다. 레니에는 일전 그가 알려 준 대로 쿠퍼액을 손가락으로 훔쳐 기둥에 전체적으로 펴 발랐다. 신을 모시는 자라고 하기에는 심히 음탕하고 스스럼없는 손길이었다. 그녀는 묘한 양심의 가책에 입술을 깨물었다.
옷 아래로 탐스러운 엉덩이를 터뜨릴 듯이 주물러 대던 그의 손이 불시에 자락을 들쳤다. 그러고는 음부와 항문 사이, 회음부를 꾹꾹 눌렀다.
"아......!"
"왜?"
칸의 눈동자가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젓는 레니에에게 철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회음부 주변을 손가락으로 궁굴렸다.
"으응, 거기는."
"저번에 보니 여기가 약하던데."
보잘것없는 위치인데도 그의 손가락이 빙글빙글 문댈 때마다 아래가 속수무책으로 젖어 갔다. 보지 않아도 벌어진 다리 사이에 애액이 끈적하게 고여 드는 게 느껴졌다.
"시, 싫어......"
이상야릇한 감각에 달달 떨리는 몸을 뒤로하고 레니에는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저 손가락이 앞으로 빠지든 뒤로 빠지든, 어느 쪽이든 위험했다.
"나한테 키스해 봐."
그가 나지막이 종용했다. 레니에는 성기를 흔드는 속도를 빨리하며 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는 반기는 것처럼 번드르르한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라 관찰했다. 질끈 감은 눈, 요동치는 속눈썹, 더하여 제 입속으로 조심스레 혀를 밀어 넣은 행동이 참으로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으읏, 음, 흐."
위로는 외설적으로 혀를 섞어 대고 있고, 밑으로는 서로의 성기를 만져 주고 있다. 신이 보면 노할, 그야말로 음욕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읍!"
그의 혀를 바지런히 빨며 굵직한 살덩이를 문지르던 레니에는 돌연, 구멍 속으로 손가락이 쏙 파고드는 바람에 접질린 듯 파드득거렸다.
"아하응......!"
"이러면서 싫긴 뭐가 싫어."
그가 무얼 가리키고 있는지는 명확했다. 손가락이 두 마디쯤 파고들자마자 쿨쩍 쿨쩍거리며 물웅덩이를 헤집는 소리가 났으니까. 그건 전부, 애액으로 가득 찬 그녀의 꿀샘을 휘젓는 소리였다.
"흣, 흑, 아, 앙......!"
보지를 쑤셔 대는 속도가 빨라지자 레니에의 정신 또한 덧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느끼고 싶지 않은데 그의 손가락이 내벽을 긁으며 곳곳을 자극해 주자 온몸으로 찌릿찌릿한 감각이 퍼졌다.
"좋아서 환장하는 건 알겠는데, 하던 건 마저 해야지?"
그가 아래를 푹푹 찔러 대며 차갑게 읊조렸다. 레니에는 서둘러 이성을 부여잡으며 그의 페니스를 고쳐잡았다. 그러나 막 움직이려는 찰나, 사내의 손가락이 예상치도 못한 부분을 푹 찔렀다가 빠지는 바람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칸이 얼른 손을 빼고 그녀의 허리를 반쯤 들어 올렸다. 그러자 벌어진 다리 사이로부터 소피라도 보는 것처럼 흥분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에 젖었는지 반쯤 걸쳐져 있던 사내의 가운 위로 물기 어린 자국이 생겼다.
"흐응, 하아......"
짧지만 그럼에도 매우 아찔한 오르가슴에 레니에는 그의 어깨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춘 칸이 여린 여체를 가볍게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얌전하게 구니까 얼마나 좋아. 응? 가만히 있어. 보지도 빨아줄 테니까."
"아, 응! 흣, 그, 그만......!"
레니에를 눕혀 놓고 양가슴에 입을 맞춘 그가 차근히 내려가 음부를 개처럼 핥기 시작했다. 얼마나 혀를 음란하게 놀려 대는지 할짝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눈앞이 몽롱하게 젖어 든 레니에는 할딱이며 간신히 그의 머리통만 붙잡았다.
"하읏, 앗, 앙, 아아!"
물로 번들거리는 질구를 꼼꼼히 핥아 주던 혀가 곧 구멍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파고들었다. 내벽이 벌어지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레니에는 아래를 꾹 조였다. 칸은 그녀의 가랑이를 쭙쭙 빨아 대며 용두질하기 시작했다.
침실에 색스러운 신음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개중에서도 끊어질 듯 말듯 아찔한 레니에의 것이 굉장히 유혹적이었다. 칸은 그를 귀담으며 수음하는 데에 집중했다. 여인의 손으로 달궈진 커다란 기둥은 금세 희멀건 정액을 쭉쭉 쏟아 내며 침대 밑을 적셨다.
그가 음탕하게 놀리던 혀를 떼어 내고 그를 대신하여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푹 무르익은 채 젖어서 구멍은 무리도 없이 야금야금 삼켰다.
"아, 카, 칸. 안 돼, 안......!"
“돼."
그는 발버둥질하는 레니에를 단단히 고정하고는 아래를 미친 듯이 헤집어 놓았다. 그새 손가락을 하나 더 추가해 세 개로 푹푹 쑤석거리다가 질벽이 비이상적으로 좁혀진 것을 느낀 그는 지체 없이 손가락을 빼냈다.
마찰로 벌겋게 부은 음부가 통째로 움찔거리더니 곧 요도구에서 투명한 액체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레니에는 까무러칠 것처럼 턱을 치든 채 온몸을 굳혔다. 소피라도 보듯 한참 쏟아 낸 그녀가 마침내 탈력감에 지쳐 늘어지자마자 칸은 음부로 혀를 내려 그 흔적을 샅샅이 핥아 먹었다.
쩍쩍거리는 노골적인 소리가 귀를 스쳤다.
"흑, 흐윽......"
난생처음 경험하는 수괴스러운 행위에 그녀는 참지 못하고 훌쩍거렸다. 허벅지 사이를 만족할 만큼 빨아 재끼다 올라온 그가 큭큭 웃었다.
"너 실례한 거 아니니까 부끄러워하지 마. 그거 다 보짓물이야."
"하윽, 하아."
"내 혀 녹는 줄 알았어. 달아서. 넌 네 물이 얼마나 단지 모르지?"
"흑, 칸......"
"알겠으니까 보채지 마."
이제 그만 하라는 만류의 의미를 담아 부른 건데, 누가 보면 그녀가 요부처럼 정사를 채근한 줄 알겠다. 칸은 그녀의 뒤로 자리를 잡고 누워 음핵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절정의 여운으로 곤죽이 되어 버린 정신이 또다시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아, 흐. 으읏."
"여기는 뭐 했다고 바짝 섰어?"
그는 건들지도 않았는데 통통해진 음핵을 갉작거렸다. 참을수 없이 간지러운 감각이 몰려와 레니에는 더운 숨을 내쉬며 몸만 떨었다.
맞붙은 허벅지 사이로 무언가 딱딱한 것이 쑥 파고들었다.
그 존재감이 어찌나 큰지 레니에는 순간 그가 삽입을 한 줄 알았다. 칸은 허벅지 사이에 페니스를 끼운 채 익숙하게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요 며칠 내내 이런 식으로만 몸을 맞댔으니 익숙해질 만도 했다.
찰싹찰싹. 살갖이 쫀득하게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뒤에서 어찌나 세게 들이박는지 실제로 섹스를 하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의 기둥이 음부에 비벼지는 탓에 감촉마저도 꽤 그럴듯했다.
칸은 레니에의 허벅지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움켜쥔 채 유연하게 허리를 놀렸다. 귀두가 하얀 허벅지의 틈새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에 묻어 있던 쿠퍼액은 이미 레니에의 허벅지를 엉망진창으로 적신 지 오래였다.
"제기랄, 박고 싶어."
"흐, 흐으."
"여기가 아니라 네 구멍 속에 처넣고 싶다고. 레니에."
그가 베개만 간신히 움켜쥔 레니에의 입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너도 그렇지? 자지 먹고 싶어서 죽겠지, 응?"
"하아, 아, 응, 천천히......"
"안정기만 접어들면, 하아, 밑이 헐 때까지 몇 번이고 뚫어 줄게."
"흑, 하응."
그가 불시에 몸을 일으켰다. 레니에를 아예 엎드리게 누운 상태로 만든 그가 허벅지 사이를 구멍 삼아 미친 듯이 내리찧기 시작했다. 사내의 옹골찬 치골과 그녀의 하얀 엉덩이가 몇 번이나 맞닿았다가 떨어지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읏, 칸, 칸......! 배, 배 아파......"
졸지에 엎드려 누워 있던 레니에는 배에 압박이 가해지자 갑자기 통증이 느껴지는 것도 같아 덜컥 겁이 났다. 그녀의 조막만한 신음 한 번에 칸은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일순 긴장한 것 같기도 한 그는 뜻 혀를 차더니 레니에를 정자세로 눕혔다.
그는 그 상태로 젖은 구멍에 기둥을 빠르게 비볐다. 핏줄이 울퉁불퉁하게 돋아난 성기가 꽉 조여든 입구를 자극할 때마다 레니에는 얕은 교성을 터뜨렸다.
"못 참겠어, 귀두만 넣으면 안 돼? 응?"
반쯤 정신이 나간 눈으로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잔 키스를 뿌리던 그가 애달은 음성으로 졸랐다. 하지만 얼마 안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는지 그녀를 꽉 껴안은 채 페니스를 비비적거렸다.
레니에는 제발 빨리 끝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허리를 다리로 꽉 감싸 안았다. 그녀의 귓속으로 혀를 집어넣어 축축하게 유린하던 그가 곧 가열차게 행하던 허리 짓을 멈추었다.
오래지 않아 음부 위로 뜨끈한 점액이 투둑 쏟아졌다. 찐득찐득하고 질척해서 불쾌한 감촉이다.레니에가 한 거라고는 그저 가만히 누워 있었던 것뿐인데도 희한하게 숨이 찼다.
심장이 고동은 잠시 원박자로 돌아오는 듯하다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레니에의 시선이 얕게 요동쳤다. 쿵쿵. 혹 이 박동이 그에게 들릴까, 속내를 들킬까 겁이 났다.
'왜 하필 나일까요.'
'......'
'왜 하필 칸은 나를...... 고른 걸까요?'
게일에게 했던 질문이 떠오른다.
어쩌다가 제가 그 사악한 악마의 선택을 받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그간 그녀 스스로는 차마 답을 내리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악마 사냥꾼이자 오래도록 칸을 추적해 온 게일이니 혹시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심코 물었다.
게일은 생각해 보는 기색도 없이, 답은 너무도 확고히 정해져 있다는 것처럼 말했다.
'악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대체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의 시선이 깊이 가라앉았다.
'불우한 자.'
'......'
'마음속에 맺힌 악하디악한 불운이 본능적으로 악마들을 이끄는 것입니다. 그게 그들에겐 더없이 훌륭한 먹이가 되니까요.'
결국은 제가 불행했기 때문이었다.
신의 자비보다도 악마의 이목을 먼저 끌어 버릴 만큼 불쌍해서. 그래서......
그제야 칸의 말이 이해가 갔다. 너의 불행이 사랑스럽다는 그말. 과거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들었던 괴이하고 악랄하기 짝이 없는 고백. 그가 악마이기에 품을 수 있는 모순적이고 이율 배반적인 감정.
"레니에."
순간 정신이 훅 들었다.
시야가 바로잡히자 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볼을 깨문 뒤 천천히 내려가 레니에의 배에 입을 맞췄다.
칸은 또다시 더없이 자상한 미소를 지은 채로 배를 어루만지고 있을 것이다. 정말 사랑으로 아이를 가진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를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이 자가 저를 단번에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원인인 이상,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직 그에게 성수를 먹일 방법을 찾지 못해 초조하고 불안했다. 레니에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며 더듬더듬 상체를 들었다.
"나 목, 목말라......"
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협탁 위에 놓인 수통을 가리켰다. 칸은 그녀의 콧등을 잘근 깨문 뒤 일어났다. 그는 제법 순순하게 수통에서 물을 따라 건네주었다.
레니에는 잔을 움켜쥔 채 가만히 있었다. 이걸, 그에게 어떻게 먹이지.
칸은 예상했던 대로 성도의 음식 그 무엇도 입에 대지 않았다. 더군다나 게일이 전해 준 성수의 양이 터무니없이 적다 보니 아무것에나 넣어 놓을 수도 없었다.
그녀가 노릴 수 있는 틈은 칸의 기분이 유달리 좋은, 정사가 끝난 후가 전부였다. 그를 위해 수통에 성수 반절을 섞어 두었다.
시기는 이때로 잡아 두었으나 구체적인 방법까지는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막막했고, 두려웠다.
침대에 걸터앉은 칸이 안 마시고 뭐 하느냐는 듯 물끄러미 응시했다. 레니에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천천히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대로 그의 입술을 억지로 벌려 먹이게 할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제가 먼저 그의 손아귀에 틀어 잡혀 무슨 꿍꿍이였느냐고 추궁당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마지막 기회는 싱겁게 날아가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레니에는 물을 꼴깍 들이켰다. 목울대가 한 번 울렁이는 사이 심장은 폭주하는 것처럼 발광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칸과 눈이 마주쳤다. 제 발 저린 양 놀란 레니에는 그만 물을 잘못 삼켰고 그대로 '콜록콜록!' 거센 기침을 토해 냈다.
당황하여 그만 잔이 엎질러졌고 입가부터 시작하여 가슴 아래까지 물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
"뭐 하는 거야?"
칸은 기가 차다는 듯 웃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빈 잔을 가져다 협탁에 내려놓았다. 레니에는 혹시 그가 제 이상한 점을 알아챘을까 봐 흘린 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칸만 주시했다.
멀어졌던 그의 머리통이 쑥 다가왔다. 그가 뽀얀 살결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을 혀로 길게 핥았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쇄골에 움푹 고인 물을 쭙 들이킨 그가 그대로 배꼽까지 내려갔다. 레니에의 손은 그를 끌어안지도, 시트를 움켜쥐지도 못한 채 허공에 뜬 채로 덜덜 떨렸다. 진녹빛의 동공이 정처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녹녹하게 혀를 굴리던 칸이 멈칫한 것은 그때였다.
"......큭."
돌연 그가 목을 움켜쥔 채로 질식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던 낯빛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그가 조금씩 시선을 들었다. 저를 무형의 감옥 속에 가두는 적안을 보는 순간, 레니에는 그를 세게 밀쳤다.
칸이 처음으로 무력하게 밀려났다. 레니에는 쏜살같이 협탁 맨 아래 칸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반절의 용량이 남은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은 그녀는 칸 위로 올라타 그에게 입술을 맞췄다.
눈이 마주쳤다.
칸의 동공은 마치 가장 신뢰하는 이에게 배신을 당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일순,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반면, 언제나 유약하게 흐려져 있던 레니에의 동공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땅처럼 견고했다.
입술이 벌어진 틈새로 성수가 쫄쫄 흘러갔다. 그녀가 자그마한 혀를 밀어 넣어 한 번 휘젓자 칸은 꼼짝 못 하고 그를 꿀꺽 삼켰다. 그걸 알아채자마자 레니에는 상체를 바로 세우며 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컥!"
침대에 엎드린 칸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 사이로 덩어리진 피가 울컥 터져 나왔다. 의자에 걸린 그의 가운을 아무렇게나 걸친 레니에는 창문이 있는 쪽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침대의 하얀 시트가 붉은 물로 젖어 간다. 악마의 주변에는 언제나 피가 낭자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악마가 타인에게서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악마 본연의 것이었다.
그가 흘린 피는 빨간 색이 아닐 줄로만 알았다. 너무도 악독하여 찌르면 시꺼먼 피가 나오지 않을까 의심했었다. 하지만 그는 인간과 한치도 다를 바 없는 선혈을 쏟아 냈다. 그것마저도 사람을 홀리려는 위선과 가식으로 보여 레니에는 치가 떨릴 뿐이었다.
무언가 창문을 톡 두드렸다. 레니에는 지체하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세찬 바람이 솟구쳐 들어와 그녀의 금발을 엉망으로 흩날렸다. 정면으로 성도 곳곳에 불이 들어온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다. 밤이 되면 고요해지는 평소와 달리 성제 때만 볼 수 있는 화려한 전경이었다.
이제 곧, 이 풍경은......
"레니에!"
뇌성과 같은 묵직한 고함이 침실을 울렸다.
레니에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뒤를 돌아보자 칸이 겨우 상체를 버티고 선 채 그녀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온갖 선혈이 낭자하는 곳에서 그의 적색 안광만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은 마치 그녀에게 얘기하고 있는 듯했다. 넌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넌 영원히 내 거야, 라고......
목이 조이고 심장이 뒤틀린다. 아주 짧은 눈 맞춤이었음에도 억겁의 시간이 둘을 감싼 것만 같았다.
레니에는 그와 대면하는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이제 단번에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몸의 구멍이라는 구멍에서 죄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레니에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피비린내가 짙게 풍겼다. 그것을 폐부에 가득 담음과 동시에 레니에는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실상은, 창틀에 묶여 있는 천을 꽉 움켜쥐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이었다.
손에 힘이 빠져 그대로 쭉 미끄러졌으나 다행히 추락하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게일의 동료가 그녀를 받아 준 덕분이었다.
"성수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먹였어요."
"양은?"
"절반 조금 넘게요."
게일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 만하다는 의지가 가득 찬 눈빛이었다. 곧 그의 지시 아래에 동료들이 흩어지고, 레니에는 게일을 따라 신전을 나섰다. 성제 중에는 따로 호위를 서지 않기 때문에 신전은 인적이 드물었다.
"제가 성하를 에브뢰 밖까지 모시고 갈 겁니다."
게일이 신전 밖에 묶여 있는 말 위로 그녀를 태웠다. 이어 '히이잉!'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말은 힘차게 뛰어나갔다.
"어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사냥꾼의 가족들이 있는 나라로 갈 겁니다. 저희는 악마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고자 한 달 내지는 3주에 한 번씩 거처를 옮기고 신원을 바꿉니다. 그러니 한 번 숨으면 찾기 힘들어질 겁니다."
게일의 설명 사이로 바람이 숴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말이 빠르게 달려나가고 있었다.
"이동 수단은요?"
"항구까지 가면, 배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일단은 이젠카로 갈 예정입니다."
이젠카라면 사막의 나라로, 말을 타고 에브뢰로부터 족히 1주일은 걸리는 곳이었다. 바다를 통해 간다면 그보다는 짧게 걸릴터. 어쩐지 에브뢰를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서 레니에는 망연한 상태가 되었다.
사실은, 종전 침실에서 보았던 칸의 무시무시한 눈빛만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그에게서 벗어난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를 대변하듯 심장이 함부로 주물러지는 것처럼 쿵쾅쿵쾅거렸다. 미처 닦지 못한 그의 정액이 여전히 배와 음부 사이에 묻어나 끈적끈적했다. 레니에는 가운 위로 손을 올려 그를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았다.
나무로 빽빽이 찬 숲길을 5분 정도 멈춤 없이 달렸다.
그러던 중 ‘쿠쾅!' 하고 상상도 못 할 굉음이 뒤에서 울려 퍼졌다. 순간 세상이 무너지나 착각이 들 정도로 굉굉한 소리였다.
다급히 뒤를 돌아본 레니에의 녹빛 눈동자가 일순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건, 그녀가 바라보는 전경이 벌건 불로 뒤덮여 있던 탓이었다.
"......불.'
신전의 첨탑 지붕이 자각자각 갈라져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그 주위로 폭발적인 불길이 낭자했다. 실로 불바다가 되어 버린 현장이었다. 그를 눈에 담자, 다잡고 있던 레니에의 각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 잠깐, 잠깐만요."
"멈추면 안 됩니다."
"하지만 저러면, 저기에 있는 이들이 다......!"
게일은 어떻게든 말을 멈춰 세우려는 그녀를 꽉 붙잡았다.
"제발 마음 단단히 먹어 주십시오! 성하께서 그 악마에게 붙잡히면 지금 보고 있는 풍경보다 수십 배는 끔찍한 세상이 도래할 거란 말입니다!"
그리 외치는 게일에게 어떻게 말을 세우라고 하겠는가.
레니에의 뺨을 타고 비참한 눈물이 흘렀다. 볼 안쪽 살을 아프도록 짓씹은 레니에는 다시 고개를 원상복구 시킬 수밖에 없었다. 대주교와 세실, 그 외에 잘 알고 지내던 이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쯤 되면 악이 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던 루벤, 그녀와 피로 얽힌 아버지, 그로도 모자라 그녀에게 친절했던 성도의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레니에와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득한 시궁 속으로 처박히게 됐으니까.
악마의 관심을 끄는 바람에, 레니에는 악의 기원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를 염오감이 치솟아 주먹을 꾹 그러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으나 고통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도, 제가 알고 있는 이들이 죽어 가고 있을 생각에 마음이 몹시도 미어졌다.
하지만 슬픔에 잠길 시간이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꺄악!"
갑자기 숲속에서 검은 불똥 같은 게 날아왔다.
"젠장. 벌써 따라붙었나."
게일은 노련한 승마 솜씨로 그를 날래게 피했다. 그것이 바닥에 내다 꽃히자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하며 움푹 팻다. 파멸적인 힘이었다.
그가 손바닥을 펴자 새하얀 방어막이 그들을 포함하여 말을 감쌌다. 성력이었다. 그 덕분인지 사방에서 날아오는 검은 공격은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입힐 수 없었다.
하지만 공격이 계속되자 방어막에 조금씩 균열이 갔다.
"꽉 잡으세요, 성하."
이를 악문 게일이 읊조렸다.
레니에는 그의 충고대로 안장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가 말의 옆구리를 연달아 걷어차 속력을 끌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방어막을 걷으며 대신 그들 주위를 감싸고 있는 적들에게 성력을 쏘아 보냈다.
성직자들과는 다른 성력 운용법. 이건 악마 사냥꾼만의 전투 방식이었다. 정확히 타격했는지 비처럼 쏟아지던 공격이 멎었다. 그 틈을 타 게일은 서둘러 말을 몰아 항구에 다다랐다.
말에서 내린 레니에는 게일이 이끄는 배로 향했다. 생각보다 컸다. 선상에 올라탄 레니에는 저를 내려 준 뒤 다시 말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게일을 붙잡았다.
"당신은요?"
"저는 동료들에게로 돌아가야죠. 그 악마를 봉인해야 하니까요."
게일은 레니에의 눈동자에 깃든 죄책감을 또렷이 읽어 냈다.
"성하께서는 무사히 도망치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
"아까 말했듯이, 성하가 그 악마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이 저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젠카에 도착하면 곧바로 낙태약을 드셔야 합니다."
신신당부한 게일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레니에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속히 그를 붙잡았다.
"조심하세요."
"......"
"부디, 부디...... 죽지 마세요."
게일은 잠시 그녀를 직시했다. 그 얼굴에 깊게 새겨진 간절함을 읽은 건지, 그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게일이 달려나가는 숲길 너머에는 어느새 집채만 하게 번진 불이 성도를 꿀꺽 삼키고 있었다.
망조, 제대로 망조였다.
이미 준비를 하고 있던 배는 지체하는 일 없이 서둘러 출항했다. 고요한 새벽 바다의 수면 위로 불길이 거칠게 일렁였다. 바닷물이 전부 다 피로 물들어 버린 것만 같았다.
레니에는 선실로 들어가 두 귀를 틀어막았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비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환청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었다.
자신의 박동이 아니었다.
배 속에 자리한, 이 기생충 같은 것의 심장 박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