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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마지막 기회 (9/19)

8장. 마지막 기회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쓰러진 발루아 후작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느냐는 의원의 질문에 레니에는,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후작의 침실에 페르노의 왕이 온 사실을 아무도 몰랐으며, 다들 딸이자 교황인 그녀가 친부를 해할 리는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후작의 습격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날 벌어진 일의 내막을 아는 건 이번에도 레니에뿐이었다.

의원의 소견에 의하면, 후작은 신체 일부 손상은 물론 중추 신경계까지 해를 입어 깨어나도 이전처럼 정상적으로 살기는 힘들 것 같다고 전했다.

하지만 레니에는 슬퍼하지 않았다. 그런 감정을 가질 만큼 애틋한 부녀 관계도 아니었을뿐더러, 근래는 제 한 몸 돌볼 여력도 없었다.

그녀에게 자욱한 절망이 드리운 그날 밤, 칸의 수하 중 하나가 그의 명령하에 레니에를 진찰했다. 그녀는 인격 없는 인형처럼 칸의 품에 안겨 가만히 팔을 내밀고만 있었다.

의원이 했던 것처럼 진맥을 살피던 그의 수하는 오래지 않아 간결하게 보고했다.

'회임 맥이 잡힙니다. 3주 정도 된 듯하군요.'

'그럴 것 같았어. 내 마력에 반응하더군. 아무래도 내 힘으로부터 모체를 지키려고 한 모양이야.'

칸은 대견하다는 듯 쾌활하게 웃었다.

'이런 연유로 한동안 관계는 금하셔야 합니다.

녹녹하던 칸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은 그 대목에서였다. 그가 삐딱하게 눈썹을 치들었다.

'꼭 그래야 하나?"

'아직 초기라 아기집이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그리하시는 게 좋습니다. 자칫하면 유산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마뜩잖게 혀를 찬 칸은 눈을 도르르 굴리더니 물었다.

'삽입만 안 하면 되는 거겠지?'

그의 눈동자는 언제 신경질을 내고 있었느냐는 듯 매끈하게 반질거렸다. 예리하게 파고드는 질문에 그의 수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찰이 이루어진 후부터 칸은 삽입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삽입'만' 하지 않았다.

이제는 더욱 집요하게 아래를 빨고 손가락으로 쑤셔 대는 통에 레니에는 원치 않는 절정을 연거푸 겪어야 했다. 그리고 단단하게 발기한 제 성기를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비벼 사정하기를 반복했다. 전보다 입에 발정 난 개처럼 처박는 횟수도 늘어났다.

그러니까, 삽입만 제외하고 그에게 난폭하게 굴려지는 건 똑같았다는 말이다.

당장 지난밤의 기억만 해도 그러했다.

어두운 침실 안. 속옷을 끌어내리자마자 퉁, 튕겨 나온 거대한 성기를 그녀의 입에 물린 칸은 빨기를 종용했다.

굵직한 대가리가 입 안으로 들이차니 벌써부터 턱이 아파 왔으나 레니에는 고분고분하게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괜한 반항으로 그의 심기를 불쾌하게 만들어 일을 키우느니, 최대한 얌전히 응해 주는 것이 심신에 이로웠다. 으스러진 이성으로부터 스며 나온 무기력함이 그에게 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송두리째 앗아 갔다.

끈적끈적한 선단이 파고들어 혀에 비벼지자 반사적으로 욕지기가 치밀었다. 이어 밀려 들어오는 기둥이 목구멍을 꽉 조여버리는 바람에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귀두 좀 세게 빨아 봐."

"으응, 음......"

사내는 여느 때처럼 일말의 자비도 없는 구강성교를 진행했다. 그녀의 입 안을 뜨끈한 구멍쯤으로 여기듯 아무렇게나 처박아 대는 것 말이다. 레니에는 컥컥거리면서도 이를 세우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했다.

"윗구멍은 능숙해지려면 멀었네. 보지처럼 쫀득한 맛이 없어."

두 손으로 붙잡아도 남을 크기의 기둥을 가까스로 움켜쥔 채 안간힘을 쓰는 그녀를 무시하듯, 그가 낮게 뇌까렸다.

"그렇게 어쭙잖게 하다가는 하루 꼬박 물고 있어도 못 싸겠는데. 이로 좀 깨물어 봐."

갑작스러운 요구에 레니에는 우뚝 멈추었다. 설핏 굳은 행동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사내가 그녀의 입술을 살살 어루만졌다.

"턱 빠지고 싶은 거 아니잖아."

빨리 하라는 대로 안 하면 지금보다 더 포악하게 쑤셔 박겠다는 으름장이었다.

레니에는 겁이 나서 요령도 없이 아무렇게나 그의 성기를 물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유약한 성정을 뽐내듯 간지러울 정도로 사소한 수준이었다.

그를 알아챈 칸은 픽 웃으며 그녀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귀두 사이 벌어진 요도구를 핥고 간혹 이로 깨물기를 반복하자 마침내 그가 보다 깊게 음경을 밀어 넣은 채 사정했다. 삼킬때까지 빼 주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레니에는 역겨운 분출액을 모조리 목 뒤로 넘겨야 했다.

그렇게 힘겨운 밤이 지나갔다.

그 여파인지 다음 날 공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레니에는 시름없이 앉아만 있었다. 지난밤 혹사당한 목구멍이 여전히 칼칼했다. 그 외에도 여러 이유로 뇌리가 번잡하여 사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대주교들이 몇 번이나 그녀를 부르고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했다.

"그러면 성제는 일전 사항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페르노 사절단은 성제가 끝나는 시기에 맞춰 출국하겠군요."

페르노 사절단이 머무는 두 달간의 마지막 일정은 바로 성제였다. 성제란 성도의 백성 모두가 참여하는 대대적인 종교 축제였다. 그날은 성도 동서쪽의 문호가 전부 개방되어 타국인들도 별도의 수검 없이 드나들 수가 있는 자유로운 날이었다.

무슨 연유인지 칸은 돌아가기 전 유예 기간을 두었다. 성제가 끝나고 나서 그녀를 마계로 데려가겠다고 선포 아닌 선포를 한 것이다.

삽입 없는 정사가 끝나고 지쳐 누워 있던 도중, 레니에는 그 이유로 추정되는 대화를 들었다.

'......았나?'

'국경을 넘을 때마다 이름을 바꿔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간 찾기 힘들었던 겁니다.'

'쥐새끼들처럼 잘 숨었네. 딱 그 후손들다워'

레니에 한정으로 여느 때건 살가운 편인 칸의 어조에 뾰족뾰족 날이 서 있었다. 신경질적인 어투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들은 다 죽이고 가야겠어. 이대로 얌전히 돌아가기에는 괘씸하잖아!'

끈적대는 웃음기 속에 담긴 감정은 가히 신랄했다. 레니에는 저 대상이 누구인지 헤아려 보는 것만으로도 겁이 나 얼른 잠을 청했다.

어쨌든 칸과 그 일행에게는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 기간이 레니에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

아니, 자유라기에는 새장 속에 갇힌 새나 다를 바 없는 신세였다.

레니에는 하루에 수십 번씩 성도를 뛰쳐나가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 달콤하고도 아찔한 상상 뒤에는 칸의 살벌한 으름장이 뒤따랐다. 제가 도망치면 이곳을 피바다로 만들 거라는......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느냐고 믿고 싶지만, 그간 겪어 본 바로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자였다. 마차 속 동물들, 성기사 루벤, 더불어 그녀의 아버지까지. 거짓말로 치부하기에는 떠오르는 증거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후작저라면 몰라도 성도, 이곳은 그녀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어 줬던 장소다.

저를 진심으로 믿고 따라 준 대주교와 많은 사제, 세실을 포함한 친절한 시종들. 저 살자고 그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선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잔뜩 무너지고 이지러져 엉망이 된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책임감이었다.

이런 와중에 책임감 운운하며 달아나지 못하는 자신이 미련스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저 하나의 희생이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면......고민은 늘 그렇게 비참하게 끝을 맺었다.

가끔 그녀는 스스로 의식 못 하는 사이 단검을 그러쥔 적도 있었다. 하루는 그 끝이 목을 향하기도 했고, 손목을 향하기도 했다. 대체로 잘만 찌르면 한 번에 즉사할 수 있는 위치들이었다.

과감한 행동에는 언제나 '칸에게 끌려가느니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대로 그에게 사로잡혀 마계로 가게 되면 제 인생은 어찌 될지 모른다. 그 사념이 자결을 충동질했다.

하지만 시도는 언제나 불발에 그쳤다. 악마에게 끌려가는 것 보다 죽음이 더욱 무서웠던 것이다. 이런 자신이 어이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불쌍했다. 고통 아니면 더한 고통이라는 선택지밖에 없다니. 참으로 가여운 처지가 아닌가.

집무실로 돌아온 레니에는 팔목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검불 같은 것이, 그간 제대로 먹지 못해 육안으로도 살이 빠진 걸 알아볼 정도였다.

흰 피부 안으로 펄떡펄떡 맥동하고 있는 푸른 혈관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서랍을 뒤적거렸다. 집무용 책상 세 번째 칸에 있던 단검이 붙잡혔다.

검의 뭉툭한 면을 혈관 위에 문질렀다. 찌르면 아플까. 많이 아프겠지?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일까를 헤아려 보고 있자니 어느새 팔목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결국, 오늘도 그녀의 결심은 바로 서지 못했다.

"성하."

돌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놀란 레니에가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그것을 얼른 주워 서랍 안에 넣고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성제 준비를 위하여 상단이 도착했습니다. 상단주가 성하께 인사를 드리기를 원합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에브뢰 왕국의 대제전이기도 한 성제에는 타국의 상인 단체가 무리를 지어 입국하고는 했다. 많은 인파가 몰리는 축제이니 만큼, 돈 냄새를 맡은 그들에게 성제란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들여보내세요."

술수라지만 그래도 상단이 분위기를 띄우는 데 큰 몫을 하기에 성도는 그들의 출입을 반기는 편이었다. 그를 상기하고 레니에는 선뜻 허락했다.

문이 열리고 로브를 둘러쓴 인물이 발을 들이밀었다.

왠지 모르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의 등장에 레니에는 행동을 멈췄다. 곧 그는 쓰고 있던 로브 후드를 벗었다.

뙤약볕에 그을린 듯한 까무잡잡한 피부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관자놀이부터 입 부근까지 길게 난 흉터였다.

상단이 타국을 오가며 이리저리 숨 가쁘게 산다지만, 저리 흉흉한 분위기를 내풍기지는 않았다. 특히나 저 흉터는 상단주라기보다는 상단을 약탈하는 산적 쪽으로 보기에 적합했다.

더불어, 장사치답게 언제나 번지르르 웃는 낯인 그들과 달리 눈앞의 사내는 입가에 미동 하나 없었다.

이 남자, 상단주가 아닌 것 같다.

그게 사실이라면 신분을 속여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건데, 그 수상한 점이 레니에를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단검을 넣어 둔 서랍으로 조금씩 손을 뻗으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내는 경계심 어린 레니에의 태도에 당황한 듯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반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인사에 레니에는 멍하니 눈을 끔벅거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하."

수상하지만 예의를 차리는 모습에 레니에는 긴장을 조금 풀었다.

"누구죠? 상단주는...... 아닌 듯한데."

"본의 아니게 신분을 속인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저는 게일이라고 합니다."

물 흐르듯이 입을 연 사내, 게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악마 사냥꾼, 이라고 소개를 드려야겠지요."

밤하늘을 닮은 파란 눈이 번뜩였다.

***

악마 사냥꾼.

레니에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사내를 반신반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 호칭을 처음 들어 보는 것은 아니나,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들의 기원은 신전보다도 먼저 시작되었다. 성력이 신의 힘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 그러니까, 성직자라는 개념이 없을 때부터 악한 힘과 대항해 온 자들이 바로 악마 사냥꾼이었다.

그들은 신전에 적을 올리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그 힘을 이용해 악마를 물리쳤다. 레니에가 알기로, 각국의 비밀스러운 길드를 통해 현상금이 걸린 악마를 계약한 인간에게서 쫓아내는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했다.

흑마력의 흔적을 쫓는다거나 이미 영혼이 먹힌 인간들을 정화하는 것이 임무의 전부인 신전과 달리 꽤 공격적인 행보였다.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오게 되어 사과드립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별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게일은 막 발을 들였을 때의 비장한 태세로 입을 열었다.

"찾고 있는 악마를 추적하던 중, 성하께서 그 악마와 접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접점......?"

"발루아 후작가 예배당에 걸려 있던 액자."

레니에의 눈동자가 언뜻 굳었다. 과거, 칸과 계약을 했던 때의 회상이 불시에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그녀는 속히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당신이 그 액자를 어떻게 알고 있나요?"

"그곳에 악마를 가둔 게 또 다른 악마 사냥꾼이자 제 선조셨습니다."

"가뒀...... 다고요?"

"예. 봉인해 둔 상태였습니다."

게일은 그녀가 내어 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간결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 악마는 제 선조의 시대, 그러니까 아주 옛적에 봉인 당한 악마입니다. 이름은 칸으로, 악마들의 왕이죠."

익히 잘 아는 이름의 등장에 레니에는 마른침을 삼켰다.

"당시 칸을 붙잡기 위해 동원된 악마 사냥꾼만 72명이었고 개중 반이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간신히 그를 봉인하는 데 성공한 후, 한 명의 사냥꾼이 칸을 가둔 액자를 각별히 관리했습니다."

"......"

"다만, 시대가 변하며 후손들에게는 그 악마의 위험성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고 그로 인해 관리는 점점 소홀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성력을 다루지 못하는 범인에게는 악마의 존재가 크게 와 닿지 않으니까요."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레니에 또한 신학을 배우기 전까지만 해도 악마 같은 존재가 실존하는지 몰랐으니까.

"그래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설마 그 후손이 빈궁한 형편을 해결하고자 액자를 비싼 값에 경매에 내놓을 줄은."

레니에 또한 그 액자가 어떤 식으로 후작저에 들어왔는지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경매장에서 팔린 그것이 돌고 돌아 후작저의 예배당까지 오게 된 모양이었다.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쫓고 쫓다가 최근, 발루아 후작저에 액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작님을 포함하여 가문의 일원이 아무도 계시지 않아 함부로 들여보내 줄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하여 송구스럽습니다만 몰래 잠입해 집안을 좀 둘러보았습니다."

그가 가리키는 최근은 아무래도 발루아 후작이 성도에 도착했을 즘인 듯했다. 그때부터 후작은 쭉 이곳에 머물렀으니 후작저는 현재 발루아의 이름을 가진 이가 아무도 없었다.

레니에는 무단 침입을 실토하는 게일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목구멍이 바짝 달라붙어 간신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이자가, 다음으로 꺼낼 이야기만이 중요했다.

"다행히 예배당에서 액자를 발견했으나 우려했던 대로 악마는 없더군요."

"......"

"성하께서 발루아 후작 가문의 일원이시니 아는 게 있을까 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어떤 것이든 좋으니 아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희는 반드시 그 악마를 찾아야 합니다."

고작 현상금을 얻기 위해서라기에는 지나치게 끈질긴 감이 있다. 대를 거듭하면서 까지 칸을 반드시 봉인해 두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쿵쿵 울리기 시작한 가슴께를 어루만지며 레니에는 간신히 물었다.

"왜죠?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게일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답했다.

"조부께서 말씀하시기를, 악마들의 왕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하나였답니다."

"......"

"신부를 얻기 위해서."

순간 레니에의 손이 크게 떨려 안에 담긴 찻물이 왈칵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를 닦을 정신이 있을 리 만무했다.

며칠 전, 칸이 저를 보며 '신부' 운운하던 모습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신부, 라고요?"

"왕과 인간 사이에서 잉태된 생명, 그 반인반수를 마계의 다음 왕으로 세우기 위해."

"......"

"마계에 머무는 왕이 인간계로 넘어오는 건 그 이유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반인반수는 아마 이곳과 마계를 전부 아우를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개체일 겁니다. 그러니 그를 살려 두는 건 이 세상에 필히 재앙이 될 테죠. 지금보다 더 악마가 범람하여 인간들을 현혹하고 악으로 끌고 들어갈 겁니다. 그를 막고자, 칸을 제지하려는 거고요."

반인반수. 어마어마한 힘. 세상의 재앙.

그가 내뱉은 살벌한 호칭은 전부 레니에의 배 속에 자리를 잡은 생명을 일컫는 말이었다.

쨍그랑! 그녀가 결국,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게일의 설명을 들으니 칸이 왜 제 회임을 알아채고 그리도 기뻐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환희에 젖었던 얼굴은 일순 쾌락에 가깝기까지 했다.

그건, 이 세상을 완전히 악의 힘으로 물들일 수 있다는 희열이었을까.

"그 악마, 그러니까 칸은."

레니에는 도무지 진정할 수 없어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지금 여기에 있어요. 이곳에......"

게일은 드디어 단서를 발견했다는 것처럼 눈을 번뜩 빛냈다.

하지만 레니에는 그저 우울하기만 했다. 아직 그가 알아야 할 무거운 현실이 남아 있으니.

"그리고 아무래도 그 악마가 점찍은 신부가...... 나인 듯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면 바로 질문을 던질 태세를 보이던 게일이 경직됐다. 그의 눈동자가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레니에는 어렸을 적 벌어진 계약부터 칸과 재회한 순간까지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 기저에는, 혹시 이자가 암담한 제 상황에 빛이 되어 줄지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건 그간 어둠 속에만 갇혀 있던 그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변화였다.

"도대체 어떻게 봉인을 풀었나 했더니......"

"그렇게 따지면 시기도 얼추 들어맞겠군요. 갑자기 어느 날을 기점으로 세상에 악의 힘이 강해지지 않았습니까? 왕이 봉인에서 풀려났기에 악마들의 기세 또한 사나워진 겁니다."

턱을 어루만지며 고심에 잠겨 있던 게일이 한숨을 흘렸다.

"액자에 걸어 둔 조건은 흑마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악마들이 사용하는 어두운 힘 말이죠. 그 힘을 가진 채라면 절대로 나갈 수 없게끔 만들어 두었는데, 아무래도 계약을 통해 그 힘을 전부 성하께 옮긴 모양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오는 건 쉬운 일이었겠지요."

"그건 결국, 나와의 계약이......"

"예. 칸이 빠져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겁니다."

그날, 달콤한 음성에 녹아든 제 마음이 결국 이 비극적인 사달을 만든 것이었다. 세상에 도래한 절대악의 시초가 결국, 저 자신이기에 레니에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녕 놈이 성하를 신부로 삼을 계획이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만약 회임이라도 하게 된다면......"

게일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마치 세상이 무너지려는 신호처럼 느껴져 레니에는 심장이 철렁 내리 앉았다.

이제껏 잘만 대답하던 그녀가 아무런 답이 없자 게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레니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배를 감싸 쥐었다. 그 행동만으로 기민하게 알아챘는지 게일의 낯이 차츰 굳어 갔다.

"설마, 성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창백하게 질린 낯빛이 얼마나 불안에 떨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덩달아 어두운 얼굴이 된 게일은 차마 예상치 못한 사태에 마른세수를 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지우셔야 합니다."

"......알아요."

"아니,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한 번 신부로 점찍은 이상 놈은 어떻게든 성하를 마계로 끌고 가려고 할 겁니다. 애초 한 시라도 빨리 도망을 가셨어야죠, 대체 왜 계속 여기 계셨던 겁니까!"

"나라고 그러고 싶지 않았을 것 같나요?"

레니에는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악마는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내 곁의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어요. 실제로 죽은 사람도 있다고요. 죽을 이유도 없는데, 너무 허무하게! 이제는 내가 도망가면 이곳의 사람들까지 죄다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는데, 내가 어떻게......!"

힘에 겨운 목소리가 집무실에 웅웅 울려 퍼졌다. 그녀의 항변을 들은 게일은 잠시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툭, 말했다.

"성하. 지금 대체 누굴...... 걱정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 말이 창처럼 레니에의 가슴을 쓰게 관통했다. 흠칫 굳은 그녀의 얼굴이 머잖아 종잇장처럼 조금씩 일그러졌다.

아아, 그래.

그의 말대로였다.

레니에는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남들의 처우보다 그녀의 안위를 급선무로 두어야 했다. 한가로이 남에게 자비를 베풀 때가 아니란 말이다.

내가 살아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우레처럼 훅 파고든 사실은, 그녀의 속을 엉망으로 뒤흔들었다.

한동안 많이 울었고, 그래서 이제는 눈물샘이 바짝 마르기라도한 줄 알았다. 최근에는 그에게 휘둘리는 내내 전혀 눈물이 나지 않았으니까. 요즈음엔 모든 일이 꿈인 양 어렴풋하고 무감동했다.

그러나 게일의 말을 듣는 순간, 허상뿐이던 두려움이 실재가 되어 그녀를 해일처럼 덮쳤다.

그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던 건,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여기에 있기에, 이곳 성도에, 제가 익히 잘 아는 공간 속에 있기에 마계로 끌려간다는 것이 와 닿지 않은 것이었다.

억지로 끌어안고 있던 갖가지의 감정이 봇물 터지듯 치솟아 올랐다.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쥔 채로 목메어 울었다. 눈물이 비처럼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나, 나 좀, 살려 주세요......"

"성하."

"그자는 날 마계로 데려가겠다고 했어요. 싫어요. 가고 싶지 않아요. 싫단 말이야. 내가, 내가 왜 가야 해. 내가 왜 죽으려고 해야 해! 왜, 왜......"

그의 눈에 들어 마계로 끌려가는 것도, 그를 막고자 스스로 그의 눈에 들어 마계로 끌려가는 것도, 그를 막고자 스스로 목숨을 내다 버리는 것도, 전부 싫었다. 레니에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이렇게 아득한 진창으로 기어들어 가게 되는지.

게일은 안쓰러울 정도로 떠는 레니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악마에게 시달릴대로 시달려 모든 이지가 무너진 이들이 그녀와 같은 불안정한 태세를 보이고는 했다. 그간 그녀가 악마에게 혹독하게 시달렸다는 게 절실히 느껴졌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오열하던 레니에가 더듬더듬 고개를 들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성하를 찾아온 겁니다. 그 악마를 처리하기 위해서. 그자는 놔둬 봤자 해악밖에 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

"그러니까, 지금부터 성하께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셔야 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성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으니까요."

"무슨......"

"칸을 다시 한번 봉인할 생각입니다."

상상도 못 할 일을 대면한 이처럼 레니에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게일은 제 계획을 차근히 털어놓았다.

"지금 왕도에, 함께 다니는 사냥꾼 무리가 도착해 있습니다. 다들 예전 칸을 봉인하는데 힘쓴 사냥꾼의 후대들이죠. 검문 때문에 일단 저만 이곳으로 온 겁니다. 조만간 성제가 예정되어 있으니 그들 모두 인파에 섞여들어 자연스레 성도로 들어오도록 조치를 취해 두겠습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가능성이 바닥을 기는 희망뿐이었다면 이번에는, 그보다 조금 밝은 형태였다. 어쩌면, 어쩌면. 덧없이 쓰러지기를 반복하던 레니에의 희망은 그렇게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대신, 성하께서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게일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유리병이었다. 그 안에는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건......"

"성수입니다."

물기로 번들거리는 레니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수라고요?"

성수.

그것은 세계수로부터 나는 성스러운 물로, 악마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독이었다. 다만, 악마들이 이 땅에 침범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세계수를 무너뜨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제 성수를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성수의 효력은 성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하게 작용한다고 들었다. 아마도 그렇기에, 악마들이 가장 먼저 세계수를 처단했으리라고 신학자들은 추측했다.

"선조께 물려받은 것입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한번도 쓰지 않았고요. 아주 오래전, 칸을 봉인할 때도 성수는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거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봐야지요."

게일은 그녀에게 유리병을 건넸다.

"성하께서 해 주셔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을 칸에게 먹이는 겁니다."

"......!"

레니에는 순간 유리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하지만 매우 귀한 동시에 저를 구해 줄 유일한 동아줄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간신히 그를 움켜쥐었다.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전부 다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한 방울, 단 한 방울만이라도 먹여야 합니다."

"그, 그자는 눈치가 빨라요. 혹시라도 들키게 되면......"

"제게 살려 달라고 하셨지요."

"......"

"이걸 먹이는 것이 놈에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방법이 아니라면 저희도 더는 도울 수 없습니다. 아니. 도울 테지만, 가망이 극히 희박해지겠지요."

게일은 다른 수는 없다고 무척이나 단호하게 말했다.

칸은 성도에 온 뒤로 그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다. 악마라는 것을 밝히기 전에도 그러했고, 밝힌 후에는 두말할 것 없었다.

그는 되레 식사를 하는 것처럼 꾸준히 레니에와 몸을 섞었다. 일전에, 악마의 허기는 인간의 음기로만 채워진다는 것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그 어떤 음식을 준비해도 먹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을까.'

레니에는 아뜩한 심정으로 유리병을 내려다보았다.

곧 생각은 바뀌었다.

'아니, 해야만 해.'

이제 남은 선택지는 없다. 이마저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레니에는 꼼짝없이 악마에게 잡아먹히게 될 터. 그러니까, 어떻게든 칸에게 이 성수를 먹어야 한다.

다부지게 쥔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으로 점철된 레니에의 동공은 아주 오랜만에 결연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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