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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썩은 동아줄 (8/19)
  • 7장. 썩은 동아줄

    신전의 기류가 뒤숭숭했다. 1급 성기사 루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수선한 분위기를 몰고 온 탓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교황이 아닌 밤중에 습격당했던 일 또한 오리무중인데, 실력 출중한 성기사마저 느닷없이 비명횡사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동안 레니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잠들기 전까지는 칸에게 시달렸으며, 잠들면 루벤의 머리가 싹둑 잘려 나간 참담한 그날 밤의 악몽이 되풀이됐다.

    그렇다고 낮이라고 해서 나아지는 건 없었다. 그날 이후로 칸은 낮에도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교황의 집무실을 포함하여 남들이 도처에 깔린 으슥한 곳에서 서슴지 않고 그녀와 몸을 섞으려 들었다.

    더불어 정사 또한 악착스럽고 모질게 변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반응해 주고 싶지 않아 신음을 참는 그녀의 입술을 콱 물어뜯어 피를 보기도 했고, 부러 수하를 휘장 밖에 세워 두고 정사를 진행한 적도 있었다.

    그건 누가 보아도 레니에의 숨통을 조이려고 작정한 짓거리였다. 예전이었으면 기겁했을 모든 행위가, 표독스러운 악마 밑에서는 거리낌 없이 행해지고는 했다.

    이런 연유로 그녀는 날이 갈수록 지쳐 갔다.

    작금 레니에는 공식적인 업무마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수척한 상태였다. 병색이 완연하다 싶을 정도로 초췌해진 교황을 두고 성도에서는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다만, 교황이 나서서 고통을 호소하지 않기에 괜한 간섭이 될까 싶어 다들 일단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윽고 루벤의 장례식 당일이 되었다.

    그의 어린 동생들이 장례를 위해 신전에 방문했다. 그들이 루벤의 관을 끌어안은 채 목메어 우는 걸 보며 레니에는 제 가슴이 다 미어졌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마치 구슬픈 장송곡처럼 들렸다.

    그녀는 까만 빛깔의 관을 망연히 응시했다.

    아직도 머릿속에는 의문이 선연했다. 왜 루벤이 죽었어야 했을까. 그 의문 뒤로는 언제나 죄책감이 진흙처럼 따라붙었다.

    이토록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레니에와 루벤의 관계가 정말로 떳떳했기 때문이었다. 칸이 거슬리게 여긴, 그런 남녀간의 미묘한 기류조차 없었기에.

    레니에에게 루벤은 어릴 적의 친우일 뿐이고, 저를 호위하는 기사일 뿐이었다. 그리 큰 의미를 가진 존재가 아니었단 뜻이다. 물론 그가 제 설움과 고통을 알아봐 준 것은 고마웠으나, 그로 인해 루벤이 특별하게 다가온 건 결단코 아니었다.

    차라리 남다른 의미가 있던 상대라면 그의 죽음이 이토록 허무하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의미를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관계가 그녀를 더한 죄악감으로 내몰았다.

    그가 이리 숨을 거둘 이유가 없어서. 그래서......

    "성하. 인제 그만 자리를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주교가 레니에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페르노의 사절단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좋은 모습만 보여 줘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그러니 장례식 장면은 노출하지 않는 것으로 공회의에서 결정된 바였다.

    동료의 죽음은 대단히 슬프나, 그 영향으로 공적인 업무까지 망치면 안 될 노릇이니 말이다. 이럴 때 보면 아무리 사랑과 애정이 넘치는 신전이라 해도 참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따라 슬슬 장례를 마무리해야 했다. 루벤의 가족에게는 슬픔을 충분히 느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마차를 내어 저들을 배웅해 주고, 앞으로 루벤 경 집안의 생계는 신전에서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매 때마다 자금이 부족한 신전이지만, 교황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친부인 발루아 후작이 내는 후원금이 워낙 거액인지라 감히 그 제안에 반기를 들 자는 없었다.

    떠나가는 마차를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레니에는 발을 돌렸다.

    집무실로 온 그녀는 무연한 심정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대관절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지를 돌이켜 볼 때면, 아득한 어둠 속에 갇히는 것만 같았다.

    루벤을 허무하게 떠나보낸 후, 레니에는 필요 이상으로 쉽게 곁을 내어 주지 않았다. 원래도 퍽 친화력이 좋은 성격은 아니었으나 이제는 조금의 틈도 내보이지 않았다. 또 누구와 가까이 지내다가 칸의 심기를 건드릴지 모를 일이기에.

    제가 고독하게 지내는 것으로 다른 이들을 살릴 수 있는 거라면,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게 나았다.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과도 같았던 따스한 땅, 성도. 그 속에서 레니에는 철저히 고립되고 있었다.

    문득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성하. 들어가겠습니다."

    시녀, 세실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녀의 뒤에는 의원이 서 있었다. 그가 왜 왔는지 헤아려 보던 레니에는 달에 한 번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는 날임을 상기했다.

    정사가 벌어지는 한참, 자국을 내려고 할 때마다 레니에가 발악을 하는 바람에 칸은 알량한 인내심을 발휘하듯 보이지 않는 곳에만 순흔을 새기고는 했다. 이를테면 속옷까지 다 벗어야 보이는 허벅지 안쪽이라던가, 젖무덤 주변 같은.

    그렇기에 레니에는 검진에 응하면서도 옷을 꼭 부여잡았다. 의원이 허락도 없이 제 의복을 벗길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악마의 무도함에 학습된 몸은 절로 방어적인 태세를 내보였다.

    세실이 놓고 나간 차향이 실내를 그윽하게 채웠으나 레니에의 속은 연신 메슥거리기만 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속도 함께 흔들리는 바람에 그녀는 시체처럼 의자에 기대앉아 있기만 했다.

    세심하게 그녀를 살피던 의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몇 번이나 진맥을 반복했다. 그 행동이 신경 쓰여서 레니에는 의문을b표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가요?"

    "이상하군요. 왜 자꾸 회임 맥이 짚이는지......"

    의원은 제가 내뱉고도 퍽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꼬리를 늘렸다.

    하지만 레니에는 그 말을 쉬이 넘길 수가 없었다. 한겨울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그녀의 전신이 꼿꼿하게 굳었다. 심장이 데구루루 굴러 발치까지 추락했다.

    레니에는 발발 떠는 속내를 애써 숨기며 덤덤한 척, 붙잡힌 손을 빼냈다.

    "회임 맥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요?"

    가까스로 웃음을 짓는데,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입가의 근육이 파들파들 떨렸다. 가슴은 그보다 더 심하게 쿵쿵 뛰고 있었다. 제가 숨긴 비밀을 눈앞의 상대방이 알아챌까 조마조마한 심정. 그것이 부디 티 나지 않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제가 착각을 했나 봅니다."

    의원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순결이 강조되는 성직자가 회임이라니. 더불어 그녀가 어디 일개 성직자인가? 무려 이 땅의 집권자인 교황이다.

    상상만으로도 죄가 되는 일인지라 그는 단순한 오진으로 치부하는 듯했다.

    "건강에는 별 이상이 없으십니다. 다만 기력이 쇠하신 듯하니 업무 중간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진단을 마치고 의원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레니에는 혼자가 되고서야 벌떡 일어나 집무실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불안에 찬 얼굴로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회임, 회임이라고?

    그간 열없이 늘어지기만 하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혼잡해졌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달거리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추정할 수 없었던 건, 그녀의 몸이 조금만 피로를 느껴도 달거리가 끊길 만큼 체약한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구태여 달거리에 의존하여 시점을 헤아려 볼 필요도 없었다. 그 악마가 성도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매일 밤마다 몸을 섞었으니까.

    피임약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레니에가 제 상황을 솔직히 믿고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을뿐더러, 성직자이자 교황인 그녀가 '피임'을 위한 약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더군다나 성도에서는 생명의 탄생을 대단한 축복으로 여겼다. 그러니 잉태를 인위적으로 억제하는 약 따위가 존재할 리 없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에브뢰 왕도로 가야 했다.

    회임을 막기 위해 해야 했을 행동은 모조리 위험천만했다. 이를테면, 레니에가 제 지위를 내려놓을 각오를 해야지만 행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지지부진하게 굴었고, 결국은 레니에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배를 감싸 쥐었다.

    '만약 그 악마가 알게 된다면.'

    고작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그녀는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렸다. 선녹색 눈동자가 무너진 맘속을 내비치는 것처럼 쉼 없이 요동쳤다.

    루벤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레니에는 스스로 버틸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칸이 말한 기간만 참으면 자신의 삶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니 모욕적인 취급을 당하면서도 조금만 참자, 조금만 버티자며 모든 걸 감내했다.

    어차피 평화가 돌아오게 된다면.

    제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소란을 벌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긍지나 자존감은 전부 다 짓밟혔고, 그녀에게 호의를 품고 다가와 준 기사는 무력하게 죽어 나갔다. 그 비참한 기억들이 그녀를 끝없는 사지로 내몰았다.

    이런 와중에 회임?

    그 악마의 애까지 뺐다고?

    레니에는 비참한 실소를 터뜨렸다.

    신이 제게 이럴 수는 없었다. 저를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이렇게 모질게 굴 수는 없는 법이다. 행복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그저 평범하게 살기만을 바랐다. 그게 그리도 큰 욕심이었을까.

    세상엔 무탈하게 사는 자가 한없이 많은데 왜 저만 이리도 힘겨운 걸까.

    어쩌면 신이 제게 화가 난 걸까? 악마의 힘을 이용해 교황이 되어 신을 섬겨 온 가증스러움에 대한 분노, 말이다. 그 때문에 신이 제게 이리도 혹독한 형벌을 내리는 걸까.

    뭐가 되었든, 이제는 허탈하여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똑똑.

    체념에 잠겨 반쯤 넋을 놓고 있던 레니에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급히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누구지, 누굴까. 혹시 그 악마가 저를 찾아온 거라면......

    "성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불안에 떤 게 무색하게도, 인기척의 주인은 우려하던 사내가 아니었다.

    레니에는 벽을 짚고 일어났다. 그 찰나 간, 그녀는 한껏 으그러진 감정을 대충이라도 추슬렀다. 슬퍼할 시간이 없는 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있음에도 틈 없이 저를 옥죄는 이 기분은 악마가 친히 선사한 지옥이었다.

    치미는 감정을 꾹 억누른 채 문을 열자 제2 대주교 호센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왕도에서 흠차가 도착했습니다."

    "그런가요."

    왕도로부터 사람이 도착했다. 이번 친교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인물. 그가 도착했다는 건 사절이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뜻했다. 하지만 레니에는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지금 막, 원치 않는 회임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가 있을까.

    "응접실로 가지요."

    "아, 그리고 한 분이 더 있습니다만."

    "누구 말인가요?"

    호센이 가라앉은 표정의 레니에를 향해 답했다.

    "발루아 후작께서 함께 오셨습니다."

    ***

    평소여도 반갑지 않을 상대인 아버지를 이토록 극악에 다다른 상태로 마주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레니에는 응접실로 향하는 내내 뒤숭숭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녀의 세상을 뒤흔들고 짓뭉개던 폭군. 악마는 아니나 그 존재 만큼 잔인한 사람.

    그가 성도에 왔다.

    응접실에 들어선 레니에는 왕도에서 도착한 흠차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흠차의 옆으로, 발루아 후작이 날카로운 눈초리를 한 채 그녀를 야금야금 뜯어보고 있었다.

    "페르노의 왕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사람을 보냈으니 곧 오실 겁니다."

    레니에가 흠차에게 답하기 무섭게 응접실 문이 열렸다.

    지난밤 저를 괴롭힌 칸의 등장에 그녀는 조건 반사처럼 몸을 움츠렸다.

    칸은 그녀를 보고 엷게 웃었다. 제법 살가운 태도는 두 사람을 무척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게 했다.

    레니에는 칸과 더불어 그의 뒤를 따라서는 비론을 보자 욕지기가 치밀어 시선을 피했다. 루벤의 장례를 막 치른 채라서인지, 그들이 살인자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더불어 이제는 배 속에, 저 악마의 씨앗이 있다는 걸 안다.

    레니에는 제 속에 기생충이 심어진 듯한 오한이 끼쳤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견뎠다. 여기서 칸에게 무례하게 굴었다가는 친부가 저를 어떤 눈빛으로 볼지 자명했으니.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흠차가 유들유들하게 말문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페르노의 왕이시여. 저는 국왕 전하의 명을 받고 온 흠차, 케세르 라벨이라고 합니다. 성도에서의 시간은 평안하셨는지요?"

    "무척 즐거웠소. 교황 성하께서 어찌나 극진하게 대접을 해줬는지 다음 날 눈뜨는 게 기대될 정도였거든. 안 그런가?"

    칸의 물음에 호위처럼 우직하게 뒤를 지키던 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선선한 태도에 흠차의 낮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발루아 후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왕도에서 급하게 전갈을 보내 놓은 탓에 걱정이 많았는데, 그것참 다행이로군요."

    분위기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그 평화 속에서 레니에만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작금 들어 저를 못살게 구는 악마와 일평생 저를 가학한 아비가 코앞에 있었다. 피부 주위에 가시가 포진하고 있는 것처럼 사지가 불편했다.

    그때, 칸이 발루아 후작을 돌아보았다.

    "이쪽도 왕도에서 온 일행인가?"

    내내 차만 마시던 발루아 후작은 갑작스러운 지목에 당황한 듯 멈칫했다가 조용히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인사드립니다, 페르노의 왕이시여. 왕도에서 온 것은 맞으나 저는 전하께서 보내신 게 아니라 딸아이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

    "딸아이?"

    이 자리에서 그런 호칭으로 불릴 만한 인물은 단 한 명이었다. 레니에는 제게로 쏠리는 이목에 침을 꿀꺽 삼켰다.

    "흐음."

    마찬가지로 그녀를 돌아본 칸은 주변의 반응으로부터 답을 얻은 듯했다. 새붉은 적안이 아주 짧은 순간 매섭게 냉각했다. 그 변화를 알아챈 건 시선을 포개고 있던 레니에뿐이었다.

    칸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발루아 후작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별말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눈치를 보는 건 레니에의 몫이었다.

    "그러면 협정을 시작해 보도록 할까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렸을 즈음, 흠차가 넌지시 본론을 꺼냈다.

    협정에는 흠차와 페르노 사절단만 참가할 수 있기에 레니에와 발루아 후작은 응접실을 나서야 했다.

    "오랜만이구나."

    단둘이 남겨지고서야 발루아 후작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속 보이는 태도에 레니에는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만약 칸이 흠차의 질문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면, 그는 제게 말 거는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당장 아무도 없는 곳으로 끌고 가 '대우를 어떻게 했길래 저런 미흡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냐.'며 손찌검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벌어지지 않은 일이다. 레니에는 음울한 상상을 애써 쫓아냈다.

    "네, 그러게요."

    공읍한 레니에는 말을 고르는 것처럼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버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레니에는 이것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악마의 손속에서 달아날 기회.

    레니에가 마지못해 칸과의 새 계약에 응하고, 지금껏 그에게 넙죽 엎드린 건 전부 교황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였다.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면 이곳 성도에서도, 그리고 아버지도 저를 받아 주지 않을 테니까.

    그를 위하여 참고 또 참았으나 그녀의 인내심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저로도 모자라 저를 감싸 준 누군가가 죽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이 더 죽어 나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제 주변을 이 이상 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은 제 편이 아니었다. 칸에게 농락당하는 걸로 모자라 회임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를 들키면 분명......

    그런 와중에 발루아 후작이 기별도 없이 성도로 왔다. 그 뜬금없는 타이밍은 그녀에게 기회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저를 도구로만 보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천륜지정이란 단번에 끊기 어려운 것이었다. 누가 무어라 해도 저와 친부는 짙은 핏줄로 맺어져 있다.

    그간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무척이나 열심히 살지 않았는가. 그러니 아버지가 한 번쯤은 제 결정을 존중해 주지않을까.

    단 한 번은.

    기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자존감을 훼손당하고 루벤을 잃은 뒤, 완전히 망가져 버린 정신은 평소 반 만큼의 판단력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안간힘을 다했다.

    아버지만 설득하면 교황직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더는 그 악마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썩은 동아줄이었다. 저를 기꺼이 수렁에서 건져 줄 것이라고 기대하면 안 되는 그런 선택지. 흑백논리처럼 아버지의 손아귀에는 구원 아니면 파멸. 둘 중 하나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치면 칸은 불타는 동아줄이었다. 저를 구해내리라는 확률은커녕 아예 고통으로 집어삼켜 버릴. 두렵고 공포스럽기만 한...... 나락.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줄을 잡을 바에야 썩은 동아줄을 당기는 시늉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머물고 가실 공간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래."

    호락호락한 태도를 보니 역시나 오늘은 여기서 머물고 갈 계획이던 모양이다. 레니에는 지금 당장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조금은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저녁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레니에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소매 밑으로, 손등에 새겨진 울퉁불퉁한 흉터가 만져졌다. 어릴 적 후작이 망설임 없이 내리친 매로 생긴 자국이었다.

    성력으로 이 흉터를 지울 수도 있었으나 레니에는 그러지 않았다. 삐끗하는 순간 끈 떨어진 인형이 될 자신의 처지를 염지하고 있기에, 이따파금 마음을 다잡는 용도로 남겨 둔 것이었다.

    "그래, 알겠다."

    아버지가 양심이 있다면 이번만큼은 제 결정을 존중해 주리라.

    아무리 성정과 행동거지가 악하다고 해도 그는 악마가 아닌 사람이다. 정말 모질고 잔혹한 악마를 경험해 보았기에 아비가 이전만큼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벼랑 끝에 다다랐기에 눈에 뵈는 게 없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이제 레니에가 매달릴 수 있는 건 아버지가 가졌을지 모를 티끌만 한 양심이 전부였다.

    저녁 식사를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거의 먹은 게 없었다.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기에 마음이 초조해 무얼 먹어도 모래 씹는 맛만 났다.

    오후에 접어들 무렵 시작된 협정은 다행히 원활하게 끝났다.

    이제 에브뢰와 페르노는 친교 관계로 맺어진 우방이었다. 그 보고를 들은 레니에는 기분이 묘해졌다.

    페르노가 그저 기세 강렬한 신생국이 아닌, 악마들의 소굴임을 알기에.

    마계와 인간 국가의 우방. 그만큼 의미 없는 친교가 있을까.

    어찌 보면 고양이와 쥐 같은 관계가 아닐까 싶었다. 잠시 한눈을 파는 순간 맥없이 먹혀 버릴......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레니에는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악마에게 먹히기 일보 직전인 제가 대체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늘이 어둡게 물들었을 즈음, 레니에는 후작이 머무는 침실로 찾아갔다. 시종이 두 명분의 차를 내어 주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둘만 놓인 공간에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그간 무탈히 지내셨어요?"

    한참의 침묵을 이겨 내고 그녀는 간신히 말을 꺼냈다.

    "뭐 별일이야 있었겠느냐. 늘 똑같은 일상이지."

    화젯거리가 없는 건 피차일반인지 연신 차만 들이켜던 후작이 여상히 대꾸했다. 대답 하나마저도 자상한 일이 없는 후작은 예의 오목조목 뜯어보는 눈길로 레니에를 훑어보았다.

    "그나저나 안색은 왜 그 모양이더냐."

    레니에는 제 몰골을 꼬집는 친부를 살짝 놀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간 벌어진 일로 낯빛이 수척해졌다는 건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친부가 그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 여간 놀라운 게 아니었다.

    꼭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아버지가 저를 구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레니에에게는 그런 신호 하나하나가 유독 특별하게 다가왔다.

    "의원에게 검진은 받고 있는 것이냐?"

    "네, 그럼요."

    "네가 그렇게 야위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굴면 아비인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 네게 관심도 없는 냉혈한처럼 보일 것 아니냐. 내게 피해가갈 것 같은 행동은 알아서 자중하도록 해."

    하지만 대화가 조금 깊어지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착각인지 깨달았다.

    발루아 후작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본인의 안위뿐이다. 늘 그러했듯, 쓸데없다고 여기는 딸아이의 건강 따위 그는 알 바가 아니었다.

    냉혈한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그는 실제로 냉혈한이었다. 피가 섞인 딸을 저리 차갑디차가운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게 냉혈한이 아니라면 대체 무얼까.

    기대감으로 팽창했던 가슴이 푹 쪼그라들며 레니에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허망한 마음에 소리조차 나지 않은 힘 빠진 웃음이었다.

    "왜 그렇게 실없이 웃어?"

    하지만 그 웃음조차도 후작의 차가운 일갈에 금세 자취를 감췄다.

    기대가 실망으로 젖어 들며 꺼내려던 말도 목구멍 안쪽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칸에 대한 두려움은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듯 그녀를 한사코 재촉했다.

    입이 무거웠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말이라도 해볼걸.' 하는 후회로 마음이 무거워질 게 분명했다.

    레니에는 입술을 오래도록 짓씹다가 마침내 용기를 냈다. 그 소리는 힘에 부쳐서, 꼭 혁헉대는 것처럼 들렸다.

    "아버지."

    실로 오래간만에 꺼내는 호칭이었다. 교황에 오른 후부터 레니에는 그를 가족 간 호칭이 아닌 후작님이라고 불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와 저를 선 긋듯 꼬박꼬박, 그리 불렀다.

    먼지가 켜켜이 묵은 호칭을 입에 담는 순간, 그것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었다.

    "저 이제, 이 자리 내려놓고 싶어요."

    차를 홀짝이던 발루아 후작이 멈칫했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일순 레니에는 살갗이 다 아파질 지경이었다. 그만큼 후작의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

    "뭐?"

    "교황직,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녀는 떨리지만 그럼에도 확고한 목소리로 제 의사를 똑똑히 전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더냐?"

    "네."

    "네가 정녕 미쳤구나."

    발루아 후작은 사뭇 거칠게 손을 놀렸다. 잔과 차탁이 맞닿는 소리가 꼭 뇌음처럼 들렸다.

    그는 어느새 이글이글 점화하는 눈동자로 여식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기대했던 일말의 양심 따위는 발견할 수도 없을 듯한 감사나운 낯이었다. 그에 레니에의 마음 안쪽이 조각조각 갈라져 나갔다.

    사랑 따위 없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는데, 나는 도대체 무얼 기대한 걸까.

    "그딴 군소리를 지껄일 줄 알았다면 네가 청한 대화에 응하지 않았을 거다."

    "아버지."

    "그 자리가 누구나 될 수 있는 자리인지 알아? 복에 겨운 줄도 몰라서는."

    예상했던 것보다 모진 냉대에 레니에는 입술을 감쳐 물었다.

    온몸에 힘이 꼿꼿이 들어갔다. 조금만 힘이 풀렸다가는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후작은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레니에는 급히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버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저 이제 성도에 있고 싶지 않아요."

    "내 말이 그리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냐?"

    "......"

    "넌 죽기 전까지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해! 하여튼, 쓸데없는 것. 네 자리가 이 아비 사업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생각해 본 게냐? 보나마나겠지. 조금 힘들다고 이런 방자한 식으로 보채기나 하고."

    마뜩잖은 눈빛이 온몸에 가시처럼 달라붙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쓸데없는 것'이라는 말이 화살처럼 박혔다. 순간 숨 막힐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대체 왜, 아버지는 왜 이렇게 제게 야멸찬 걸까

    검게 썩은 동아줄은 이미 끝이 거의 다 닮아 있었다. 터럭 정도로 남아 간신히 달랑거리는 상태였다. 그걸 레니에만 몰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품은 저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게 느껴졌다. 정말 아비가 운운하는 대로 스스로가 쓸모없게끔 다가와서.

    울컥, 맘속에서 무언가 치밀었다.

    "제가 그만두고 싶다는데 아버지께서 어쩌실 건가요?"

    등 돌려 걷던 후작이 멈칫했다. 이윽고 돌아오는 눈빛은 그야말로 한밤의 폭군처럼 흉흉했다.

    "뭐?"

    "아버지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희생당하는 거, 이제 그만 하고 싶어요."

    처음부터 아버지가 문제였다.

    그의 학대에 어머니가 병들었고, 어머니가 죽을까 두려운 제가 예배당을 찾았고, 그래서 악마를 만났다. 나약해진 마음이 칸과의 계약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원인은 저일지언정 그 원인을 제공한 이는 바로 아버지였다.

    얼굴 옆으로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바닥으로 추락해 '쨍그랑!' 하고 요란한 파열음을 냈다. 발루아 후작이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집어던진 것이었다.

    "희생? 네가 대체 무얼 희생했단 말이냐. 그간 교황으로서 무얼 한 게 있다고!"

    레니에는 이번에야말로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교황으로 한 것. 그건 적어도 아버지보다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대다수였다. 악마처럼 남의 등골을 파먹는 아비의 과실에 대해 속죄하듯 제 삶을 꾸역꾸역 신에게 바쳤다.

    그런 그녀가 한 게 없다고......

    신학의 길로 들어선 건 그녀의 의지라기보다는 아비의 흉포함 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였으며, 교황이 된 뒤 열심히 봉사한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온통 다 그였다.

    단 한 번도 그의 수마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제게

    어떻게 저리 말할 수가 있을까.

    설움이 괴어올라 뜨거워졌던 레니에의 가슴은 불식간 싸늘하게 식었다. 심장이 차가운 얼음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 덕분에 그녀는 흥분하는 일 없이 담담하게 말문을 열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제가 이 자리를 계속 지키길 바라셔도, 무리예요."

    "뭐야?"

    "전 이제 성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성력을 사용하지 못하면 교황은커녕 신전에서 일하기도 힘 들어질 거예요."

    "너, 너......"

    "그러니까, 후에 이 사달을 들켜 아버지의 명예를 먹칠하느니 저 스스로 일찌감치 내려놓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 멍청한 계집!"

    갑자기 두피가 찢어질 듯 아파졌다. 쿵쿵, 하고 땅을 울리며 다가온 후작이 그녀의 금발을 죄 뽑아버릴 것처럼 휘어잡은 탓이었다. 레니에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휘청거리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뭐? 성력을 사용할 수 없어?"

    얼얼한 두피의 고통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레니에는 손등을 콱 찍는 아비의 발질에 비명을 질렀다.

    "대체 행동거지를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그딴 일이 벌어진게냐!"

    학대의 증표가 남겨진 손등이 새까만 구둣발에 무참히 짓밟혔다.

    "이제야 조금 쓸모가 생겼나 했더니만."

    발루아 후작은 정말로 열이 잔뜩 오른 사람처럼 씨근덕거렸다.

    문밖에서 다급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차마 허락 없이는 문을 열지 못하는 시종이 무슨 일 있느냐고 소리쳐 물어왔다. 그녀가 내지른 날카로운 비명을 들은 모양이었다.

    "허락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우레와 같은 후작의 호통에 정신을 차린 레니에가 힘겹게 눈을 들었다.

    제 괄기를 이기지 못한 후작이 노기에 찬 얼굴로 커프스를 풀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리 앉았다. 저 거친 행동은 그녀에게 퍽 익숙했다. 이제부터 물불 가리지 않고 그녀에게 손을 대겠다는 신호와도 같기에.

    저를 무지막지하게 때리던 잔악한 아비의 과거가 잔상처럼 눈앞을 스쳤다.

    안개 같은 두려움이 뇌를 잠식했다. 레니에는 턱을 발발 떨며 몸을 옹송그렸다. 도망가고 싶었으나 어릴 적부터 각인된 공포심이 그녀를 망부석처럼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네가 교황을 그만두면 그간 내가 바친 후원금은? 그건 전부 땅에 버리라는 이야기냐? 그 액수가 얼마인지는 알고 있어! 이 어리석은 것."

    "제가,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네가 뭘 어쩌겠다는 게냐. 음침한 신전 놈들이 그걸 두고 볼 것 같아? 신전만큼 들어간 돈 내뱉지 않는 탐욕스러운 놈들을 내 여태껏 본 적이 없다. 그래도 너를 그 자리에 오래 앉혀 두기 위한 투자라 생각하며 그리 거액을 갖다 바친 건데. 뭐? 이젠 성력을 사용할 수 없으니 내려오겠다고?"

    발루아 후작이 레니에의 가슴팍을 세게 걷어찼다.

    인정사정없는 발길질에 그녀는 잠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간 심리적으로 몰아붙여져 나타난 증상과 달리, 정말 폐부 어딘가 망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호흡이 버거워졌다.

    그가 다시 발을 뒤로 뻗는 것을 본 레니에는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 쥐었다.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행동이었다. 그에 놀란 건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었다.

    분명 칸을 마주했을 때 그가 싸질러 생긴 이 생명이 마냥 기생충 같았다. 원한 적도 없는데 제 몸에 달라붙어 영양분을 뺏어 가는 끔찍한 존재.

    그렇게 넌더리가 나는 존재를 보호하려고 들다니.

    레니에는 고통에 허덕이면서도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넋을 놓고 있다가 그만 다가오는 발에 무력하게 얻어맞았다. 몸이 흔들리며 가까이 있던 탁자의 다리를 쳤다. 그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쨍그랑!' 하고 산산이 조각났다.

    비처럼 쏟아지는 아비의 폭력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그만 날카로운 조각에 여기저기가 긁혔다. 개중 큰 조각의 모서리에 찢겼는지 이마를 타고 무언가 질척한 게 흘렀다.

    그것을 닦아 내기도 전에 멱살이 붙잡히며 상체가 억지로 끌어 올려졌다.

    제가 자라나는 동안 아버지도 똑같이 나이를 먹었을 텐데 그는 여전히 정정했다. 더불어 그녀를 기죽이려는 저 감때사나운 성정마저 그대로였다.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후작은 눈물을 줄줄 흘리는 레니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넌 평생 나를 위해 삶을 바쳐야 해."

    "......"

    "그 정도로 쓸모는 있어야, 내 자식이 될 수 있지. 안 그러니?"

    끝이 썩어 들어간 동아줄이 마침내 뚝 끊기는 순간이었다.

    레니에의 마음속 무언가가 참혹하게 뭉그러졌다. 아주 잠깐 허황한 꿈을 꾸었다. 자신은 대체 무얼 기대하고 아비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은 걸까. 천륜지정마저도 폭군 같은 아버지의 성정을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비가 아니면 저를 구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칸의 살벌한 감시망 아래 유일하게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결국, 레니에는 철저히 혼자였다.

    이미 녹슬 대로 녹슨 그녀의 눈동자는 끝끝내 빛을 잃었다.

    그때였다.

    돌연, 누군가가 발루아 후작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예기치 못한 기척에 놀란 후작은 레니에를 내팽개치듯 놓았다.

    "누가 허락도 없이 멋대로...... 컥!"

    엎드린 채 힘겹게 기침하던 레니에는 아버지의 신음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는 쓰라린 목을 움켜쥔 채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시선의 끝에는, 저보다 더 나약한 모습으로 쓰러진 아버지와 그 앞에 우뚝 선 칸이 있었다.

    칸은 웃음기 하나 없이 후작과 레니에를 번갈아 보았다. 특히, 창백하게 질린 레니에의 얼굴 위에 시선이 유독 길게 머물렀다.

    살벌하던 분위기 속으로 소슬한 적막이 내리 앉았다.

    "딸아이를 보러 친히 성도까지 왔다며.”

    오래지 않아 칸이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페, 페르노의 왕이시여."

    "그런데 왜 여식에게 손찌검을 하고 있지?"

    "예까지는 어쩐 일로......"

    "귀가 먹었어?"

    낮게 뇌까린 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네 딸을 개 패듯이 패고 있느냐고."

    그건 필시 레니에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언제나 웃거나 무덤덤한 표정이 전부였던 그가 처음으로 그녀 앞에서, 솔직한 민낯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생소함이 지금 이 순간만큼 불길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가 넘어진 발루아 후작의 어깨를 지그시 밟아왔다. 당장 반격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포악한 기세를 떨치던 후작은 어찌할 바를 몰라 굳어 있었다.

    레니에는 그런 아비의 모습이 퍽 우스웠다. 피가 섞인 딸은, 칸의 표현을 빌려 개 패듯이 깼으면서, 신생국의 왕에게는 꼼짝도 못 하는 모습이 그리도 우스꽝스러울 수가 없었다. 전형적인 약자 앞에서는 강자, 강자 앞에서는 약자가 되는 꼴이었다.

    칸은 한참 기다려도 답이 없는 그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딸이 그대의 심기를 거슬렀나?"

    일그러졌던 표정은 어느새 반듯하게 펴진 지 오래였다. 그것이 제 말에 귀를 기울일 신호처럼 느껴지기라도 했던 걸까, 후작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 부녀 간의 사소한 의견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사소하다고 하기에는 한쪽이 심히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던 모양새였으나, 후작은 태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뻔뻔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말했다.

    칸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를 본 레니에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악마인 그가 저리 웃을 때면 늘, 견디기 힘든 소란이 벌어지고는 했기에......

    그 불안을 인지하기도 전에, 발루아 후작이 아래턱을 얻어맞으며 나가떨어졌다.

    완악한 레니에가 숨죽이며 몸을 웅크리는 사이, 칸의 무자비한 폭력이 시작되었다. 과격한 타격음이 실내를 버겁게 채웠다.

    레니에는 칸의 발길질에 나동그라진 아버지를 망연히 응시했다. 종전의 저처럼 둥글게 몸을 만 아버지는 그야말로 약자였다. 언제나 제 위에 군림하여 저를 있는 대로 쥐고 흔들던 그 폭군이, 저리도 위태로운 모습을 내비치고 있었다.

    칸의 폭력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더군다나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로 발질을 하고 있기에 그 행위에 힘을 들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지 않았다. 아주 손쉽게 친부를 압제하고 있는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마냥 악마 같던 아버지가 결국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 순간이 돼서야 절실히 깨달았다.

    악마는,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 붙을 게 아니었다. 태연자약 한 낯으로 친부를 답새고 있는 저 사내 정도는 되어야 붙을 수 있는 호칭이었다.

    칸은 불현듯 모든 행동을 멈추더니, 졸도 직전에 다다른 후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선연한 적안이 피가 몰린 것처럼 더더욱 시뻘겋게 번들거렸다. 그 안에는 폭거에 가까운 흉흉한 기운이 날뛰고 있었다.

    "커허억!"

    이윽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축 늘어져 있던 후작의 관절 여기저기가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꼭 목각 인형을 아무렇게나 비트는 것처럼 그의 사지육체가 뒤틀리고 꺾이며 기이한 형태를 내보였다.

    몸속의 뼈가 살갖을 뚫고 나올 정도로 꿈틀꿈틀대는 장면은 심하게 기괴했다.

    자세히 보니 후작의 몸을 검은 안개 같은 무언가가 뒤덮고 있었다. 그제야 레니에는 칸이 마법을 부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칸은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인 후작의 팔뚝을 가늠하듯이 응시하며 뜸지근하게 짓밟았다. 그러고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두운 기운이 그의 손에 몰려드는가 싶더니 이윽고, 검처럼 끝이 날카로운 형체가 나타났다.

    "널 손찌검한 게 어느 쪽 손이지?"

    시선은 후작에게 꽂혔으나 그의 질문은 명백히 레니에를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석에 틀어박힌 채 아뜩해진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그녀가 그를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칸은 어느 쪽이든 어떻냐는 심정이 되어 첨예한 날붙이로 후작의 오른손을 힘 들이지 않고 잘라 냈다.

    실내에 뇌성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른 바닥에 칸의 눈동자를 닮은 적색 핏물이 착, 튀었다. 칸은 눈알이 뒤집힌 후작의 반응에도 꿋꿋이 반대쪽 손까지 잘라 냈다. 후작은 순식간에 두 손을 잃었다.

    어느새 실내에는 지독한 성혈이 낭자했다.

    "더 족쳐 봤자 못 들을 것 같고......"

    들고 있던 날붙이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칸의 시선이 구석으로 향했다. 레니에는 제게 닿은 눈길에 맥을 못 추듯 흠칫 떨었다.

    "자, 레니에. 말해 봐."

    "......"

    "이놈이 왜 네게 손을 대고 있었는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다가온 건 아주 간단한 질문이었으나, 답을 잘못하는 순간 목이 댕강 잘려 나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저 사내가 이렇게 공포 어린 긴장감을 유발할 때면 레니에의 심장은 늘 짓이긴 찰흙처럼 쪼그라들었다.

    칸이 그녀에게 시선을 꽃은 채 발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후작이 컥컥대며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사지를 뒤틀었다.

    "이유 없이 널 때리지는 않았을 것 아니야."

    친부를 무지막지하게 구타하던 행동과는 판이한 곰살맞은 어조. 하지만 그 대비가 레니에에게는 더욱 무섭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일전에 루벤도, 저런 식으로......

    "답하지 않으면 이놈을 죽일 거야."

    지난한 상황에 기시감을 느끼기 무섭게 그가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발로 후작의 목을 지근거렸다.

    칸은 어느새 피거품을 문 채 기절한 발루아 후작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두드려 쨌더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보아하니 정신을 차려도 이전처럼 멀쩡하게 살기는 힘든 모양새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렇게 놔두고 싶지도 않고.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네 아비는 죽어. 대신 이쯤에서 그치면, 뭐, 불구 정도는 되려나."

    그의 음성에는 온도가 없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저 평이할 뿐이었다. 그건 루벤을 죽였을 때처럼 이번에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인을 행할 수 있음을 뜻했다.

    레니에의 눈가가 바르르 요동쳤다.

    그녀의 시선이 더듬더듬 내려가 축 늘어진 후작에게 닿았다.

    기실, 그토록 죽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살갑게 안아 준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저를 도구로만 보던 아버지. 후작저에 머물며 그에게 학대를 당할 때면 항상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

    나이프를 쥐는 식사 자리에서 수천 번도 넘게, 아버지의 목을 찌르는 상상을 했었다. 스스로를 괴이하게 여길 정도로 난폭한 상상이었다. 그 정도로 레니에는 그가 미웠고, 무서웠고, 싫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상상에 그칠 뿐이었다. 어린아이인 제가 아비 없이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없다고 여겼기에.

    내 자존심의 도둑. 내 자긍심을 박살 내온 악한.

    그런 아버지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다르니 참으로 어이없게도 망설여졌다. 그건 객체가 아버지라서가 아니었다. 친우였던 루벤이 숨을 거둔 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 누군가 저 때문에 또 죽는 꼴을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었다.

    이제는 피비린내가 지겹고, 매일 밤 찾아오는 악몽이 지긋지긋했다.

    이번마저 살리지 못한다면, 저 때문에 또 누군가 죽는다면, 이후로는 정말 아무것도 지켜 내지 못할 것만 같아서. 설령 그게 아버지라고 해도 그녀의 맘속 무언가 와르르 무너질 듯해서.

    레니에는 이제 사내의 기분을 맞추는 방법을 알고 있다. 참으로 간단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면 되는 것이다.

    "내, 가......"

    "......"

    "교황직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어."

    "......"

    "여기서, 나가고, 싶어서......"

    칸의 미끈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못 마땅하게 느껴지는 그 신호를 보자 몸이 덜덜 떨렸다. 잠시 침묵 어린 시선이 이어졌다.

    곧 그는 약속대로 후작에게서 발을 떼어 냈다.

    칸은 시체처럼 널브러진 후작을 훌쩍 넘어 레니에에게로 뚜벅뚜벅 다가왔다. 실내에 울려 퍼지는 공음이 꼭 괴물이 제게 다가오는 소리 같았다. 레니에는 저도 모르게 구석으로 비실비실 숨었다.

    금세 목전에 다다른 그가 다리를 굽히고 앉아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칸이 손을 뻗었다. 이마에 닿는 감촉에 레니에는 주춤거렸다.

    "왜?"

    그는 살갗이 찢어져 흐른 피를 부드럽게 문질러 닦았다.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목구멍이 아교를 바른 것처럼 달라붙어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질겁으로 뒤덮인 얼굴만 봐도 답을 알겠는지 칸이 비릿하게 웃었다.

    "왜 이렇게 떨어, 레니에."

    "......"

    "내가 무서워?"

    이마에서 서성이던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신기하네. 널 평생 학대해 온 아비보다 내가 무섭다고?"

    그가 불시에 레니에의 손등을 그러쥐었다. 강한 악력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상처. 전부 다 저놈이 만든 거잖아."

    칸이 무얼 일컫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손등에 깊이 새겨진 흉터일 터.

    그가 시선을 포갠 채로 혀를 내어 레니에의 손등을 핥았다.

    오래된 상처라 고통이 느껴질 리 만무한데도, 그의 혀가 쓸고 지나간 자리가 이상하게 따끔거렸다.

    "그런 아비를 택할 만큼, 나한테서 도망치고 싶었다는 건가?"

    그의 동공이 흉포해진 짐승의 것처럼 길쭉하게 좁혀들었다. 날 선 눈동자가 지나치게 선뜩해 레니에의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생각할수록 짜증 나네."

    그의 음성이 불시에 훅 가라앉았다.

    "역시 죽여 버리는 게 낫겠어."

    억세게 붙잡고 있던 레니에의 손을 내려놓은 칸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일말의 선택지도 남겨 두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태도였다.

    돌변한 그가 쓰러진 친부에게로 향하려는 걸 깨달은 레니에는 가슴이 스산하게 내리 앉았다.

    "안 돼!"

    다급히 그의 바지춤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기 전, 불현듯 배 안쪽에서 거센 통증이 몰아쳤다. 알싸하게 번지는 감각에 헉, 하고 숨을 죽인 레니에는 그대로 상체를 축 늘어뜨렸다.

    누군가 칼로 배 안쪽을 마구 쑤셔 대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허덕거리자 이상함을 감지한 칸이 뒤를 돌아보았다. 배를 감싸 쥔 채 쓰러진 레니에를 본 그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흔들리는 시야로 칸이 급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건 누가 보아도,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마치 쓰러진 그녀를 걱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뭐야, 갑자기 왜......"

    급히 레니에를 살펴보던 칸이 멈칫했다.

    간신히 심호흡하던 레니에는 그의 시선이 제 배에 꽂힌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조알 같은 소름이 돋았다.

    "......너."

    새빨간 눈동자가 레니에와 시선을 맞췄다.

    "회임한 건가?"

    기껍게 휘어지는 입꼬리를 보는 순간 레니에의 마음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기세가 누그레러지자 마찬가지로 배의 통증 또한 점점 가라앉았다. 하지만 레니에는 대겁하여 그 변화를 눈치채지도 못했다.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벌벌 떨며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 아냐. 아니야......"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처럼 레니에는 조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짓말."

    "아니야. 아니라고!"

    칸이 그녀의 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미 들킨 듯했으나 레니에는 최후의 발악으로 그의 손을 밀쳐 냈다. 하지만 결국 정해진 결과처럼 그의 손은 레니에의 배를 틈 없이 덮었다.

    칸은 잠시간 손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검은 빛이 잿더미처럼 일렁거렸다. 그러자 아까의 첨예한 통증이 되살아나 레니에는 낯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녀의 얼굴이 땀으로 물씬 젖었다.

    그 반응을 확인하자 마자 손을 뗀 칸은 이윽고 환하게 웃었다. 조금 전만 해도 분노로 냉해졌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매사 잔잔한 웃음이 전부이던 그가 저리도 환희에 찬 미소를 지은 건 처음이었다.

    정말로, 행복에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드디어 내 새끼를 뺐구나."

    찢어지게 벌어진 입술이 기괴했다.

    이상해. 왜 이렇게 기뻐하지. 마치 이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레니에는 후들거리면서도, 환열하는 그의 낯에서 조금도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저 음흉한 미소가 자꾸만 그녀의 속 어딘가를 불쾌하게 긁었다.

    "비론."

    그의 부름 한 번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칸의 수하, 비론이었다.

    "마계로 돌아갈 채비를 해야겠다."

    칸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의 뺨을 만지며 덧붙였다.

    "그리고...... 신부와 아기도 함께 간다고 전해라."

    그의 시선이 저와 제 배를 번갈아 보는 것을 눈치챈 레니에는 넋을 잃었다. 칸은 한시가 급한 이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그의 바짓단을 움켜쥐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하면서도, 저 '신부'를 가리키는 게 저인 것만 같아서 그녀는 진정 아뜩해졌다. 이대로 까무러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장이 쿵쾅거렸다.

    칸은 이번엔 선선히 잡혀 주었다. 그로도 모자라 상체를 기울여 레니에의 뺨을 감싸 쥔 채 입술을 겹쳤다. 꼭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키스는 이미 신물이 날 만큼 겪어 봤는데도 등줄기를 타고 희한한 오한이 끼쳤다. 그래서일까, 비론이 입맞춤을 목도하고 있다는 인식마저 하지 못했다.

    타액이 섞이지도 않을 만큼 담백한 키스 뒤로 그가 미소를 그렸다.

    "넌 나와 함께 마계로 가는 거야."

    그의 동공이 기묘한 이채를 뿜었다. 고작 기쁘다고 표현하기에는 심히 찬연한 감정이 파도처럼 깊게 일렁였다.

    얼 빠져 있던 레니에는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어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회임하기만을 기다렸어.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겠군."

    "가긴 어딜 가! 안 가, 절대로 안 가!"

    레니에는 악을 쓰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눈물이 물씬 차올라 시야를 적셨다. 이렇게 발버둥을 쳐도 결코 이 사내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스스로가 몹시도 잘 알기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칸이 제게서 멀어지려고 몸을 비트는 그녀를 꽉 껴안았다. 큼지막한 손이 사랑스러운 암컷을 대하는 수컷처럼 레니에의 배를 진득하게 쓰다듬었다.

    "나는 인내심이 약한 편이야, 레니에."

    "......"

    "그러니 한 번만 더 내게서 도망치려고 하면, 다음엔 이 땅을 피바다로 만들지도 몰라."

    귓바퀴를 잘근 깨문 그가 느른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레니에의 몸이 삽시에 돌덩이처럼 굳었다. 일순 초토화가 된 성도의 모습이 상상이 된 탓이었다. 역겨운 혈성과 싹둑싹둑 잘려 낭자한 시체. 그 악몽 같은 풍경 속에 서 있는 저. 그야말로 욕지기가 치밀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겠지."

    그는 진정하라 타이르는 것처럼 부드럽게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레니에는 가빠진 호흡으로 외쳤다.

    "계약은 분명, 네가 돌아가기 전까지 힘을 되찾게 해 주는 거였잖아. 날, 날 데려가겠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아!"

    그래.

    그 계약의 내용을 믿고 지금까지 버텨 왔다. 제가 가지고 있는 그의 힘만 건네주면 계속 교황 노릇을 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칸이 직접 말한 바였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참자고, 루벤이 죽기 직전 그리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인가. 저를 마계로 데려가겠다니.

    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귀를 울리는 소리에 가슴이 바짝 조였다. 그가 레니에의 턱을 쥐어 들어 올렸다. 그의 시뻘건 눈알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아 저항하던 레니에는 그만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칸이 잽싸게 위로 올라타 그녀의 양손을 바닥에 고정했다.

    "처음부터 너와 새 계약을 맺은 적 없어, 레니에."

    발버둥질하던 레니에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뭐?"

    "우리의 계약은 네가 어렸을 적 맺었던 그때의 계약뿐이지. 나는 이미 너에게서 내 힘을 되찾은 지 오래야."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예배당에서 겪었던 계약과는 조금 달랐다. 그때는 액자를 만졌고 그녀의 손끝에 무언가 느껴졌었다.

    그러니까 모종의 '접촉'이 있었단 거다. 하지만 이번 계약에는 그런 게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새로운 계약은 없었단 말인가 ?

    "......왜."

    그게 사실이라면, 처음부터 덧없는 희망이었던 것이다. 교황직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이 시기만 버티면 평화로워질 거라는 것도!

    그간 버텨 온 모든 인내가 와르르 무너지며 그녀는 진정 이성을 잃었다.

    "그럼 왜 계약 이야기를 꺼낸 거야, 대체 왜! 왜 나를......"

    "재밌거든."

    "......뭐?"

    "인간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

    "......"

    "굳이 계약으로 널 붙잡아 두지 않아도 충분히 회임시킬 수 있었어. 다만, 희망을 심어 주니 너 스스로 내게 안겼잖아."

    레니에의 마음속 무언가 와그작 일그러졌다. 악질적인 그를 대하기에는 몹시도 심약한 그녀의 정신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꿇으라니까 꿇고, 알아서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흔들고, 좆물을 삼키고."

    "......"

    "과연 강제로 했다면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아니,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굴 바에야 자살을 택하는 게 낫다고 여겼겠지."

    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그가 일일이 짚고 있는 기억들은 머릿속에서 알아서 재생되었다. 자존심이며 긍지며 다 뒤로한 채 그에게 매달렸던 자신의 굴종 어린 모습에, 속에서 덩어리진 감정이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

    눈시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울음 섞인 목소리는 형편없었다.

    "도대체 왜......"

    이제는 앙칼지게 따져 물을 여력조차 없었다.

    고난을 넘기면 더 큰 고난이, 절망을 넘기면 더 거대한 절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망을 품은 게 웃기다는 것처럼, 그녀의 인내를 비웃는 것처럼 그렇게 그녀를 호되게 고문했다.

    어느샌가 눈물이 줄줄 흘렀다. 시야가 부열게 흐려졌으나 닦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 머리를 내려쳐 죽어 버리고 싶다는 암울한 생각만 들었다. 그 정도로 그녀는 끝의 끝자락까지 내몰린 상태였다.

    "말했잖아."

    번민과 고초로 빛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칸은 느른하게 혀를 축였다. 꼭 입맛을 다시는 듯한 행동이었다.

    "너의 불행이 몹시도 사랑스럽다고."

    그녀의 양 볼을 감싸 쥔 그가 근사하게 웃었다. 새빨간 동공이 처음으로 꿀을 녹여 만든 것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진정 어여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 그리 느껴지게끔 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되는 레니에는 그저 덜덜 떨기만 했다. 달곰한 눈빛이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전부 아차 하는 순간 목을 찌르고 들어올 검처럼 다가올 뿐이라서.

    그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언제건 섬뜩한 적안이 늪처럼 끈적끈적했다.

    "사랑스러워, 정말."

    "......"

    "그래서 네가 더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악마. 악을 먹고 사는 존재.

    그들에게 인간의 불행은 다디단 사탕과도 같으리라. 아니, 사탕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계속해서 구미를 당기게 하는 매혹적인 것일 터.

    더 불행해졌으면 좋겠다는 잔인한 말에 레니에는 짙은 탄식을 토했다. 이제 '왜 하필이면 나일까.'라는 의문을 품을 시기는 지났다. 애초 그 의문에 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몇 번이나 제 기준을 훌쩍 넘어선 그를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해 성도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이 남자와의 계약이 끝나 평온한 삶을 되찾는 것도. 모든 게 그저 한여름 밤의 꿈처럼만 여겨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깃드는 단념을 읽었는지 그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는 헝클어진 금발을 귀 뒤로 쓸어넘겨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도망갈 생각하지 마."

    "......"

    "네가 도망가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여 버릴 거니까."

    오늘따라 적안이 한층 더 섬짓하게 다가왔다. 허울뿐인 협박이 아니었다. 이 간악한 사내는 정말로 그리할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많은 사람의 목숨이 살거나 죽게 되는구나.

    레니에는 차츰 눈꺼풀을 내렸다. 믿기 힘든 현실로부터 눈을 가리려는 것처럼.

    발밑에 고여 있던 어둠의 늪은 결국, 그녀를 잠식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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