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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독이 든 성배 (7/19)
  • 6장. 독이 든 성배

    상태가 엉망이었다.

    동이 틀 때까지 침대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한 채 사내에게 시달리는 바람에 수면 부족과 피로감이 동시에 레니에를 짓눌렀다. 오늘 같은 날은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사냥 일정이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성도 외곽의 스페르 산으로 향하기 위해 신전은 꼭두새벽부터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 말인즉슨 레니에는 한 숨도 자지 못한 채 침실을 나와야 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어제 대부분의 준비를 끝마쳤기에 남은 건 이동밖에 없었다. 실 목적인 사냥이야 스페르 산에 도착해서야 할 수 있으니 일정을 거행하기 위해서는 어서 빨리 떠나야 했다.

    고역은 스페르 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벌어졌다.

    포장된 도로가 아닌 울퉁불퉁한 산길이다 보니 마차가 연신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상태가 저조한데 멀미까지 겹치다 보니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시퍼렇게 질렸다.

    결국, 그녀는 얼마 못 가 조금만 쉬었다 가자는 의사를 전했다. 저 하나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건 마뜩잖았으나 이러다가 마차 안에서 토악질이라도 하게 되면 더욱 민폐가 될 것 같아서였다.

    마차가 멈추고 레니에는 백지장처럼 희멀건 얼굴로 빠져나왔다. 그래도 안정적인 땅을 밟으니 마구 뒤집히던 속이 한결 진정되었다.

    그녀는 암흑색의 바위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에게 물을 주거나, 마차를 점검하는 둥 다들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저 멀리 말에 올라타 있는 칸이 보였다. 사냥을 위해 간편한 복장을 한 그는 제 수하들에게 무언가를 전해 듣다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그가 저를 쳐다보려는 걸 알아챈 레니에는 급히 시선을 틀었다.

    희한하게도 그를 응시하고 있지 않은데, 그가 말에서 내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칸이 제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심장이 거세게 두방망이질했다.

    "성하."

    그때,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다른 방향에서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바라본 곳에는 성기사 루벤이 서 있었다.

    그는 약식으로 간단히 인사를 올렸다.

    "경. 무슨 일인가요?"

    "이걸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가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이동할 때 가지고 다니는 수통이었다.

    "안색이 매우 좋지 않으십니다."

    "아...... 멀미가 좀 나서. 고마워요."

    예상치 못한 호의는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어두운 밤중에 저를 찾아와 진지하게 걱정거리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던.

    어떻게든 저를 챙겨 주려는 마음이 느껴져 레니에는 저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었다. 그가 건넨 수통을 열어 물을 몇 모금 마셨다. 그 덕분인지 내내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지난번도, 그리고 이번에도 지친 제 심정을 알아봐 주는 건 이 성도에서 루벤뿐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밤 너무 야멸차게 그를 돌려보냈나 싶은 후회가 들었다. 그래도 제 안위가 걱정돼 찾아와 준 사람인데.

    "......동생들은, 잘 지내나요?"

    친절에 대한 보답인 양 레니에는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녀가 알기로, 루벤은 많은 동생을 둔 집안의 장남이었다. 조금 더 상세히 말하자면, 병들어 누운 친모와 어리디어린 동생이 셋이나 있는. 그런 궁핍한 환경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1급의 성기사가 된 그이기에 신학교에서도 나름 전설적인 인물로 정평이 난 바였다.

    어쩌면 그런 가혹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왕도의 별 볼 일 없는 귀족 자제들과는 각오나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을 테니.

    그녀가 제 가족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퍽 의외였는지 루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옅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탈합니다. 오히려 너무 건강해서 문제지요. 눈만 떼면 말썽을 피우니, 원."

    여느 때건 무덤덤한 낯이 오래간만에 곤란하다는 식으로 변모했다. 껍질을 깐 속살처럼 드러나는 그 얼굴이 아마 루벤의 진면모일 터. 솔직한 토로를 듣자 하니 그가 동생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동생들을 무척이나 아끼잖아요."

    "......"

    "나중에 크면, 그들 모두 경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할 거예요."

    루벤은 그녀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런 격의 없는 대화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일 터.

    그를 마주하며 옅게 웃고 있던 레니에는 뒤늦게 제게로 다가오려던 칸을 상기했다. 급히 고개를 돌리자 칸은 예상외로 아까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만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꽂힌 채였다.

    핏빛 동공은 마치 산불 같았다. 저로도 모자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살라 먹고 삼켜 버릴. 그 위협적인 기세가 고작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느껴져서 레니에는 벌떡 일어섰다.

    "이, 이만 출발해야겠어요."

    "예. 준비하라 지시하겠습니다."

    레니에는 루벤에게 수통을 떠안기듯 건넨 뒤 황급히 마차로 돌아왔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와중에도 혹시 칸이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아닐까 싶어 속이 울렁거렸다.

    다행히 사냥터에 도착할 때까지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레니에는 역한 마음을 삼키며 칸에게 다가갔다. 어찌 됐든 이 무리의 책임자로서 사냥터나 사냥에 대해 설명을 해 줘야 할 따름이니.

    그녀가 탄 마차를 뒤따라온 칸은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였다. 레니에가 다가가자 그는 무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설명을 막 마쳐 갈 즈음 칸이 돌연 말고삐를 확 잡아당겼다.

    콧김을 내뿜던 흑마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돌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레니에는 그와 부딪칠 뻔했다.

    가까스로 물러난 레니에는 다분히 놀란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칸이 말에서 뛰어내려 그녀 앞에 섰다. 집채만한 사내가 앞에 서 있으니 태양이 가려져 사늘한 느낌이 들었다.

    "짐승이라면, 아무거나 잡아들여도 되는 겁니까?"

    잠자코 설명을 듣던 그는 그것만을 툭 물어보았다. 심상한 어조에 비해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내용이다.

    레니에는 그의 저의를 읽어 내기 위해 진한 적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켕기는 구석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떳떳하게 마주해왔다.

    두 사람이 말없이 대치하고만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주변에서 점점 웅성거리는 소음이 일었다. 레니에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칸이 씩 웃었다.

    "성하께서는 저와 함께 가시죠."

    "네? 아니, 저는......"

    거절하려는 순간 칸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난폭한 새벽의 행위를 떠올리게 하는 안광에 저절로 말문이 막혔다. 칸은 굳어버린 그녀를 안아 멋대로 말 위에 앉혔다. 갑자기 시야가 높아지는 바람에 깜짝 놀란 레니에는 허둥지둥 말의 목을 껴안았다.

    "저, 저는 말을 타지 못합니다. 전하!"

    "걱정할 것 없습니다."

    칸은 발 받침대를 딛고 올라타 순식간에 레니에의 뒤로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상체를 제게 기대게 한 그가 말고삐를 단단히 그러쥐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히이잉! 말이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미리 길을 터놓은 사냥터로 달려나갔다. 느닷없이 벌어진 일에 레니에는 제 허리를 감싼 칸의 팔뚝을 꾹 그러쥘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거야......!"

    남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눈치챈 레니에가 다급히 따져 물었다. 그는 심심산속에 다다른 후에야 말의 속도를 줄였다.

    중심을 잡지 못해 동아줄처럼 그의 팔만 꾹 붙잡고 있던 레니에는 뒤늦게 제 행동을 인지하고 뿌리치듯이 손을 뗐다.

    "내려 줘."

    레니에의 항의에도 칸은 요지부동이었다. 다그닥다그닥, 말은 주인의 뜻을 따르듯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갈수록 출발 지점으로부터 멀어지자 레니에는 점점 불안해졌다. 그곳이 어디든, 이 사내와 단둘이 놓이는 건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내려 줘, 내려 달라니......"

    뒤에서 뛰쳐나온 손이 레니에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쉿."

    사내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내리 앉았다. 그사이 말이 멈췄으나 레니에는 사슬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입을 막은 칸의 손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로브 안으로 파고든 손이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날 것 같은 손길에 레니에는 어깨를 말며 스스로를 보호하려 했다.

    순간 섬뜩한 의심이 들었다. 설마, 깊숙한 곳까지 저를 데리고 온 이유가 어젯밤의 행위를 이어 가려는 속셈은 아니겠지.

    혹시나 하면서도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

    "아까 함께 있던 기사."

    그가 옷 위로 유두를 굵으며 속삭였다.

    "이름이 뭐지?"

    레니에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안장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몸을 비틀고 싶은데 말 위에 올라타 있는 불안정한 상태라 섣불리 시도할 수 없었다. 아마 이 손을 떨쳐 내기 위해 저항을 한다면 분명 낙마하고 말 것이다.

    승마를 자주 해 본 자라면 능숙하게 착지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은 레니에에게 이 자리는 몹시나 위태로운 자리였다.

    "응?"

    "그, 그건 왜 묻는 거야......"

    음험한 그의 손길을 겨우겨우 밀쳐 내면서도 레니에의 머릿속은 더없이 혼잡해졌다.

    아까 함께 있던 기사라면 루벤을 가리키는 것일 텐데, 대체 왜 그의 이름을 묻는 거지. 이 자가 악마이기에, 제게 한없이 잔인무쌍한 악마이기에 사소한 질문에도 선뜻 답할 수 없었다.

    가슴을 노골적으로 주무르던 칸은 서서히 손을 내렸다. 배꼽 부근을 간지럽히듯 덧그린 손은 이내 안장을 사이에 두고 활짝 벌어진 가랑이에 닿았다.

    "기억하지?"

    가랑이를 부드럽게 비벼 주던 그가 손을 들어 제 중지를 길게 핥았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순식간에 속옷 안으로 집어넣어 음순 사이의 돌기를 갉작댔다.

    "읏......!"

    "밤새 여기에 내 좆을 미어터지도록 물려 준 거."

    "흐, 하지, 마!"

    "좆물도 가득 싸 줬잖아, 내가."

    저런 말을 어쩜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일 수가 있는 거지. 누가 들을까 겁날 정도로 천박한 대화였다.

    레니에는 그의 손등을 움켜쥔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제발, 여기서는. 누가 보기라도 하면......"

    "그 기사도 알고 있나?"

    바람처럼 지나간 줄로만 알았던 화제가 다시 되돌아왔다. 왜 자꾸 루벤 얘기를 꺼내는지 몰라도, 묘연한 께름칙함에 레니에는 입을 단단히 걸어 잠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와 네가 밤새도록 떡친 거 알고 있느냐고."

    조롱 어린 목소리가 등골을 떨리게 하였다. 레니에는 살짝 가빠진 숨을 내쉬며 그의 팔을 움켜쥐고만 있었다.

    "누가 죽인대? 왜 대답을 안 해."

    단조로운 음성이 그렇게 살벌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말을 않겠다?"

    그녀가 억지로 입을 다문 걸 깨달았는지 칸이 피식 웃었다.

    "하아. 짜증 나게 하네."

    어젯밤 내내 자극을 받아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음핵을 쏘삭거리던 그가 손을 빼냈다. 살짝 축축해진 손가락을 꿀 핥아 먹듯 쪽쪽 빨아 재낀 칸이 레니에의 턱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그녀의 시선이 정면에 고정됐다.

    등 뒤로 칸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방을 직시하고 있었기에 레니에는 그가 무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세찬 바람이 불었다. 싸아아. 나뭇가지에 달린 무수한 이파리가 잘게 흔들리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휘익!

    시야 측면으로 무언가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화살인줄 알았다. 하지만 날아가고서야 발견한 그것은 다름 아닌 창이었다. 창을, 화살처럼 던진 것이다. 등 뒤의 남자는.

    이 무슨 어마어마한 무력인지.

    오싹함을 느끼기도 전에 짐승의 날카로운 비명이 귀를 찔렀다. 그 소리는 한적한 산속을 쩌렁하게 울렸다.

    어느 틈에 발견한 건지 모를 사슴이 그가 던진 창에 맞아 무력하게 쓰러져 있었다. 길쭉한 창으로 꿰뚫린 몸통에서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살벌한 장면은 언젠가 꿈에도 나왔던, 마차 속의 참상을 상기시켰다.

    생명이 덧없이 스러져가는 잔악한 장면에 레니에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슴이었다.

    하지만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순간 창에 맞아 쓰러져 나뒹구는 이는 그녀가 몹시도 잘 아는 이로 바뀌었다. 순식간에 피칠갑이 되어 다 죽어 가는 대상은 다름 아닌 루벤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던 루벤은 곧 숨이 끊겨버린 양 축 늘어졌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푸릇푸릇한 잔디를 적셔 갔다.

    레니에는 해악한 마음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안 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게 수통을 건네주던 루벤이 대관절 왜 저기에 누워 있는 것인가.

    아니, 왜 죽어 가는 것인가.

    "왜, 대체 왜 그를......! 놔, 내려 줘, 당장!"

    레니에는 공황 상태가 되어 저를 붙잡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땅으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어느새 까맣게 지워진 지 오래였다. 한시라도 빨리 루벤을 구해야 한다는 간절함만이 가득했다.

    조금씩 생기를 잃어 가는 루벤의 눈동자는, 꿈에서 보았던 제 것을 퍽 닮아 있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죽어 가고 있는 게 루벤이 아니라 자신 같아서.

    "놔, 놓으라고. 이 개자식아!"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칸은 절대로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레니에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각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조금만 늦으면 루벤은 정말,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데......그의 손이 돌연 시야를 가렸다.

    레니에는 생채기가 날 정도로 그 손을 박박 긁었다. 제게서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곧 손은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

    주위가 환해지며 전경이 드러나는 순간, 레니에는 한껏 끌어모았던 숨을 겨우 내쉬었다. 처음부터 그녀가 잘못 본 것처럼, 루벤의 모습은 다시 사슴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사슴은 입에 피거품을 문 채 숨을 거둔 뒤였다. 하지만 죽어가는 루벤의 잔상을 본 다음이라서일까. 그리 충격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루벤이 죽은 게 아니라는 안도감만 가득했다.

    그 방증인 양 레니에의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하."

    뒤에서 실소가 들렸다. 그가 레니에의 턱을 아플 정도로 움켜쥐어 제게 보이게끔 돌렸다. 물기로 얼룩진 눈가와 뺨을 발견한 순간 그의 낯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뒤틀렸다.

    "울 정도로 소중한가, 그 기사가?"

    어조는 평이했으나 윽박처럼 험악하게 다가왔다. 그건, 대답에 따라 종전의 장면이 실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 터.

    레니에는 뺨을 닦으며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너무 놀라서. 그 기사가 아니었어도......"

    이런 잔혹한 환시를 보여 준 그에게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그는 너무 잔악했고 그녀는 너무 연약했다. 불길한 환시를 몇 번이고 현실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어떤 발악을 해도 그의 손바닥 위에서 내려갈 수 없음을, 레니에는 일찌감치 깨달은 바였다.

    "누구였든 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야. 진심이야."

    루벤이 죽어서 운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속히 읊조렸다. 왠지 모르게 저 빨간 눈동자가 오늘따라 냉랭하게 보여서. 그가 또 무슨 해괴한 짓을 벌일지 몰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칸은 느릿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

    "......"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나지?"

    입가는 미소를 띠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눈빛은 차디찼다. 그는 흥이 팍 식었다는 얼굴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날, 페르노 사절단의 사냥은 사슴 하나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끝이 났다.

    잔악무도한 대학살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우려하던 것과 달리 썩 다행인 결과였다. 동물들은 악마의 무자비함 속에서 목숨을 건졌으며, 스페르 산 또한 태초의 모습 그대로 자연 특유의 풋풋한 내음을 잃지 않았다.

    그럼에도 레니에는 묘한 불안감을 쉬이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찝찝한 사냥이었다.

    ***

    레니에는 고대 신어가 양각으로 새겨진 황금빛 문을 열없이 올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발을 돌려 제 침실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당장 내일부터 그녀의 인생이 곤색해질 게 눈에 선했기에.

    지금도 녹록지 않은 인생인데, 이보다 더 힘들어진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혀와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밤에 내 침실로 와.'

    사냥터 안전 지점에 다다랐을 때 칸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그리 명령했다. 그리고 쌀쌀맞은 손길로 그녀를 내치듯이 말에서 내려 주었다.

    직후 신전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건 아무리 봐도 화가 난 태도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어제오늘 연달아 시달리는 바람에 상당히 지친 상태였고, 그래서 신전으로 돌아오자마자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명을 거부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사태라도 벌어질까 두려워 결국 억지로 걸음할 수밖에 없었다.

    낮, 산 내에서 보았던 장면이 뇌리에서 연거푸 되풀이됐다.

    피거품을 문 채로 경련을 일으키다가 끝내 숨이 멎어 버린 사슴...... 그게 제 꼴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은 그녀의 발목을 사신의 낫처럼 붙불들어 맸다.

    동그란 모양의 문고리를 위로 들었다가 문과 부딪쳐 노크 소리를 냈다. 똑똑. 아무도 없는 복도에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냉혹한 바람이 그녀의 곁을 쓱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사내의 허락처럼 느껴져 레니에는 조심조심 문을 열었다.

    안은 조금 추웠다. 그런데 동시에 더웠다. 사내가 있는 공간은 늘 양가적인 두 감각을 거뜬히 해내고는 했다. 아마도 악마란 존재 자체로부터 풍기는 요사스러움 때문일 터.

    그녀는 제 침실보다 넓은 안으로 발을 욱여넣었다. 실내는 조용했으나 완전한 적막은 아니었다. 간간이 체가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좀도둑처럼 살금살금 발을 옮기다 창가 앞 테이블에 앉은 칸을 발견했다. 그의 손에는 투명한 크리스털 유리잔이 들려 있었다. 보랏빛 액체가 그 안에서 연신 출렁거리는 걸 보니 의문스러운 소리의 범인은 저것인 듯했다.

    운치 있는 후원을 멀거니 응시하던 칸이 어둠 속에서 나타난 레니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서 와."

    번드르르하게 곧잘 웃고는 하는 평소와 달리 오늘은 입가에 요동 한 번 없었다. 그 반응이 심기가 퍽 언짢다는 방증 같아 레니에는 침을 꼴깍 삼켰다.

    칸은 나이트가운 하나만을 걸친 채였다. 벌리고 앉은 다리사이로 이미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것이 윤곽을 선명히 드러냈다. 그는 남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느른하게 손을 까닥거렸다. 다가오라는 손짓이었다.

    "앉아."

    레니에는 힐끔거리는 곁눈질로 눈치를 살피며 맞은편에 앉으려고 했다. 그러자 칸은 가소롭다는 듯 웃더니 손을 휘저었다.

    "누가 거기 앉으래?"

    "......"

    "네 자리는 거기가 아니지."

    술잔을 입가에 댄 칸은 여상하게 바닥을 눈짓했다.

    레니에의 손끝이 움찔 말렸다. 그러니까 지금, 땅바닥에 앉으라는 거야? 저를 개만도 못하게 대하는 그의 처우에 화가 났지만 늘 그랬듯이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평소엔 이렇게까지 야박하게 굴지 않는 걸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 기분이 별로라는 증거였으니까.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고, 그래서 레니에는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자 칸이 칭찬이라도 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니에는 모멸감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짓씹어야 했다.

    별안간 코앞으로 잔이 내밀어졌다.

    레니에는 얼결에 건네받았으나 마시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느릿하게 턱을 괸 칸은 반응을 구경하는 것처럼 그녀를 빤히 직시했다.

    시선이 참으로 무거웠다. '안 마셔?' 꼭 그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난 술은......"

    음욕과 마찬가지로 음주 또한 계명으로 금지된 사항이었다.

    이미 사내와 저지르면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그건 신에게 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성직자로서의 양심이었다.

    하지만 악마의 눈빛이 속 뒤틀린 사람처럼 흉포해지는 걸 관망하며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입가에 댔다.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액체를 조심스레 입 안으로 흘려보냈다.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술의 맛은 쓰고 떫었다.

    그는 진정 악이었다. 신을 기준으로 세운 모든 적정선을 스스로 넘게끔 하며, 결국엔 타락의 색으로 물들이고 마니.

    "다 마셔."

    칸이 레니에의 귓바퀴를 문질렀다.

    그의 강압적인 지시에도 레니에는 처음 접한 쓰디쓴 맛에 반도 마시지 못하고 포기했다. 절반 넘게 남은 보랏빛 액체가 출렁거렸다. 칸은 쯧, 혀를 차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잔을 뺏어 제 입으로 털어 넣었다. 그러더니 레니에의 목덜미를 휘어잡아 입술을 맞췄다.

    "읍!"

    입이 강제로 벌어지며 맞물린 사이로 술이 끈적하게 쫄쫄 넘어왔다. 그는 혀를 휘저어 억지로 술을 삼키게끔 했다. 레니에는 저도 모르게 그것들을 꼴깍꼴깍 받아 마셨다.

    양껏 빨아 물던 입술이 떨어지며 그가 레니에를 바라봤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어느새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혀를 내어 입맛을 다시던 사내는 레니에를 끌어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마치 관계할 때처럼 그의 위에 다리를 활짝 벌리고 걸터앉은 자세는 심히 민망했다.

    칸은 그런 자세를 취한 상태로 잘만 술을 마셨다. 여전히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주무르고 있어서, 제삼자의 눈엔 레니에가 교황이 아닌 사내의 흥을 돋우는 창부로 보일 듯했다.

    "......흣."

    어떻게든 자세를 추스르려고 아등바등하던 레니에는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번지는 이상야릇한 전율에 급히 숨을 들이켰다.

    부지불식간, 배 안쪽이 뜨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벌어진 다리 사이 내밀한 곳이.

    레니에는 당혹스러워 눈을 도르륵도르륵 굴렸다. 칸은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양 엷게 웃으며 레니에의 엉덩이 골을 문질렀다. 그 질척한 손길을 떼어 내고 싶은데 갑자기 이상 반응을 보이는 몸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술, 때문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이제 음욕의 맛을 깨달은 그녀는 제 몸이 흥분하고 있음을 기가 막히게 인지했다.

    "레니에."

    칸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자위해 본 적 있어?"

    "뭐, 뭐? 읏."

    "네 손으로 가랑이 사이를 쑤셔 본 적 있냐고."

    엉덩이골을 집요하게 문지르던 손가락이 더더욱 밑으로 빠져 옴찔대는 구멍을 톡톡 두드렸다. 옷으로 가려진 채였으나 그 단순한 손짓에도 몸이 옴츠러들었다. 민감해진 아래로 무언가 닿을 때마다 발끝이 오그라들며 저절로 달뜬 호흡이 샜다.

    그 때문에 대답은커녕 몸을 움찔움찔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정신이 멀쩡하다고 해서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기도 했다.

    칸은 그녀를 안은 채 침대로 향했다. 레니에를 던지듯이 내려놓은 그가 술을 완전히 입에 털어 넣은 후 잔을 휙 집어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귀를 버겁게 찔렀다. 사내의 적안이 더욱 농홍해졌다.

    그녀 위로 올라탄 칸은 여유로운 손길로 가운을 벗었다. 암흑 속에서도 손목부터 어깨 밑 두툼한 가슴까지 섬세하게 수놓아진 검은 문신이 또렷이 보였다. 그건 그의 사나운 분위기를 더욱 고취하는 역할을 했다.

    "혼자 얼마나 잘 쑤시는지 볼까?"

    어쩔 줄 모르는 레니에를 금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만든 칸은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도록 오금을 단단히 잡아 벌렸다. 물씬 젖은 속옷으로 이미 알아챘듯, 질구는 물기로 번들거렸다.

    그가 찰싹, 소리 나게 음부를 내리쳤다.

    "아흐응!"

    레니에는 저도 모르게 아래에 힘을 꾹 줬다. 나체가 바르르 떨 때마다 소피라도 보는 것처럼 애액이 주룩주룩 솟아올랐다.

    기다렸다는 양 그의 손길에 반응하는 몸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었다.

    그는 시트를 움켜쥔 레니에의 손을 잡아다가 침수한 음부로 이끌었다. 무심코 음핵을 만진 그녀는 저를 훅 씹어 삼키는 불같은 쾌락에 기겁하며 손을 떼려고 했으나 칸이 그를 두고 보지 않았다.

    "흣, 아응......"

    그녀의 눈시울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점점 거세지는 열기로 무어라 설명 못 할 답답함이 치솟았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데 그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는 바람에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도 조금 전 클리토리스를 건드렸을 때 등줄기를 적신 쾌락이 간절했다.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연신 헐떡이기만 하던 레니에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본능에 이끌려 슬쩍 손을 움직였다.

    갈라진 음순의 위쪽, 충혈된 돌기를 아주 소심하게 건드리자 바로 등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흐읏!"

    "구멍 벌렁거리는 거 봐라. 자지 먹여 달라고 조르는 거야?"

    흥분액이 울컥 쏟아져 구멍을 적시는 걸 목도하며 칸이 저속하게 뇌까렸다.

    지금만큼은 그 우롱을 인지할 새도 없었다. 음핵을 만지는 순간 온 열기가 싸하게 흩어지며 평소와 차원이 다른 희열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찰나 동안 벌어져 더욱 애끓는 감각이었다.

    "아, 하아...... 으응!"

    이 남자가 먹인 술에 무언가 있었음을 직감하면서도 레니에는 그 어떤 항변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벌겋게 달아오른 음핵과 음부를 문지르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다. 발끝이 곱아들며 레니에는 자지러지듯 몸을 비틀었다. 교황으로서의 체통은 이미 저 바닥까지 추락해 먼지와 함께 나뒹굴게 된 지 오래였다.

    사내가 음부에 시선을 꽃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수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완전히 무아지경이었다. 맞붙인 손가락 두 개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연신 질구를 자극했다. 헐떡이는 교성이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져 침실을 뜨겁게 덥혔다.

    "손가락도 넣어 보지그래?"

    그가 쾌락을 갈구하는 레니에의 손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읊조렸다.

    이성이 모조리 날아가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차지하고든 본능은 그가 하라는 바를 착실하게 이행했다. 위아래로 가열하게 비비대던 손가락 하나를 말랑하게 풀어진 구멍 속으로 쑥 집어 넣었다.

    "흐, 응......!"

    쯔걱쯔걱, 안이 얼마나 물로 가득 찼는지 손가락을 두 마디쯤 넣자 축축한 소리가 흘러넘쳤다. 쫀득한 속살은 낮선 침입을 환영하듯 그녀의 손가락을 맛있게 조여 물었다.

    칸은 교황이 제 아래를 스스로 달래는 음탕한 장면에서 조금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색욕의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그가 그토록 바라던 모습인지라 연신 웃음이 났다.

    이제야 쾌락에 솔직해진 몸이 그를 몹시도 흡족하게 만들었다.

    레니에는 어느새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어 질벽을 빠르게 긁었다. 그의 성기가 질 안을 후벼 파 줄 때를 상기하며 그를 흉내 내려 애썼다. 입술에서 앙앙대는 야릇한 교성이 그칠 새가 없었다.

    "이 모습을 신도들이 봐야 하는데."

    방탕한 자위 행위를 끈적한 눈으로 지켜보던 칸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지엄하신 교황 성하께서 남자 자지를 못 먹어서 제 손으로 보지를 쑤시는 이 천박한 모습을."

    "읏, 아앙, 응......!"

    "아, 종교에 미친놈들이니 이것마저 신의 뜻이 아니냐며 네 보지를 개처럼 핥아 주는 거 아니야? 이 물이 성수일 거라고 확신해서는."

    상스럽게 낄낄대던 칸이 불시에 상체를 숙였다. 열기로 점철 된 가랑이에 숨결이 닿자 레니에는 헉, 하고 몸을 경직시켰다.

    "그렇겐 안 되지. 다 내 건데."

    칸이 입술을 음부 위로 박은 채 더없이 맛있게 빨아들였다. 레니에는 다리를 오므리지도 벌리지도 못한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쭙쭙거리며 액을 감로수처럼 모조리 빨아들인 그가 물컹한 혀로 음핵을 방빙글빙글 궁굴렸다.

    "응, 아아!"

    민감한 감각이 한데 뭉친 돌기를 혀로 비빛대고 치아로 꽉 깨무는 감각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황홀했다.

    그는 어찌할 줄 모르는 그녀의 다리를 제 어깨에 걸친 채로 음부을 헤집어 놓았다. 손가락으로 굵어 주고 혀로 비벼 주고 이로 물어 주며, 그녀를 차분히 녹여 갔다.

    물에 빠진 소금 덩어리처럼 그녀는 전신이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어느새 가랑이 사이는 물을 한 바가지 들이부은 것처럼 질퍽해진 상태였다.

    문득 휘장이 쳐진 침상 바깥으로 인기척이 느껴진 것도 같은데, 정신이 혼잡하여 그를 확인할 계를도 없었다. 레니에는 파도에 휩쓸린 조약돌처럼 칸이 건드리는 대로 무력하게 반응했다.

    칸은 그녀의 두 다리를 붙인 채 위로 들어 올렸다. 틈 없이 맞붙은 허벅지 밑으로 통통하게 다물린 음순이 보였다. 그는 중지로 질구를 아래에서 위로 쓱 쓸어 올렸다. 손가락이 물기로 번들번들해졌다. 그것을 혀로 쪽 빤 칸은 다시 삽입해 안을 푹푹 찔렀다.

    "하응, 앙, 아!"

    평소보다 달아오르는 속도가 배는 빨랐다. 내벽을 갉아먹는 쾌락이 파도처럼 솟구쳐 그녀를 무력화시켰다. 거의 절정에 다다르기 직전 그가 깊게 밀어 넣어 둔 손가락을 확 뺐다. 레니에는 안타까움에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칸은 그런 식으로 절정 코앞에서 추삽질을 관두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열락에 절은 몸이 달대로 달아 레니에는 신경질적인 어투로 따졌다.

    "뭐, 흑, 뭐 하는......"

    "왜, 자지 먹고 싶어서 근질근질해?"

    이제 내성이 생길 때도 되었으나 여전히 적나라한 말투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물론, 적응은 둘째 문제였고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 주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미 당할 대로 당해 놓고 무슨 자존심을 세우느냐 할지 몰라도, 그래도...... 이 음탕한 행위에 취해 이성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몸 상태가 그 자존심을 아작아작 어그러뜨렸다. 불이라도 삼킨 것처럼 속이 활활 탔다. 아뜩한 답답함에 당장 냉수를 들이켜고 싶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그게 아님을 익히 아는 바였다.

    쾌락. 쾌락이 필요했다.

    그를 증명하듯 질구는 굵고 단단한 몽둥이를 찾아 연신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었다.

    "먹고 싶으면 이리 올라와."

    칸이 그녀의 상체를 일으키더니 대신 제가 등을 대고 누웠다. 탁탁 두드리는 허벅지 위로, 사람의 성기라기에는 심히 커다란 살덩이가 하늘로 고개를 쳐든 채 덜렁거리고 있었다.

    레니에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식도에 불덩이가 쑤셔 박힌 것처럼 자꾸만 속이 바짝바짝 끓었다. 그녀가 고민하자 칸은 느른한 손길로 성기를 붙잡아 위아래로 흔들었다. 불그스름하게 물든 귀두가 꿈틀거리며 쿠퍼액을 질질 쌌다.

    "보지에 원 없이 박아 줄 테니까."

    채근하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붉디붉은 눈을 보자 이성이 몸집째 붙들려 끌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홀리는 듯한 기분.

    "어서. 여긴 우리 밖에 없잖아. 아무도 몰라. 우리가 무얼 하는지."

    칸이 야릇하게 유혹했다.

    레니에는 넋을 놓은 채 더듬더듬 기어 그에게로 향했다. 순종적으로 구는 게 만족스러운지 칸이 다가온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건 아무리 봐도 사람보다는 말 잘 듣는 짐승을 대하는 태도였다.

    "......흐으."

    칸이 저를 등지게끔 그녀를 제 허리 위에 앉혔다.

    그는 탐스러운 엉덩이 사이에 페니스를 욕심껏 문지르다가 질구에 조준한 후 자비 없이 허리를 잡아 내렸다. 맥동하는 거근이 한순간 비좁은 내부로 쑥 밀려 들어왔다.

    "아앙!"

    평소라면 아파서 말도 못 했을 텐데, 오늘은 간지러워 미칠것 같은 곳을 긁어 주는 쾌락만이 선연했다. 불붙은 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처럼 온몸이 자릿자릿했다.

    칸 또한 아플 정도로 성기를 물어 조이는 속살에 묵직하게 신음했다.

    "큿...... 좆을 그냥 쥐어짜네."

    "아응, 하......아!"

    "그렇게 좋아? 응? 밑구멍으로 자지 빠니까 좋아 죽겠어?"

    칸이 레니에의 허리를 움켜쥔 채 강제적으로 들썩이게 만들었다. 기둥이 뻐금거리는 구멍에서 반쯤 빠졌다가 깊숙이 치들어올 때마다 물기를 헤집는 축추근한 소리가 났다.

    누워만 있던 그가 상체를 일으키자 너른 가슴팍과 나뭇조각처럼 마른 레니에의 등이 찰싹 맞닿았다. 악마의 체온은 열상이라도 입힐 것처럼 뜨거웠다.

    칸은 제 것을 움찔움찔 조여 무는 구멍을 손가락으로 더듬다가, 음모를 헤치고 클리토리스를 비볐다. 그의 허벅지를 붙잡고 있던 레니에는 버티지 못하고 상체를 뒤로 기울였다. 그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벅찬 쾌감에도 허리를 흔드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휘장 위로 그녀의 음탕한 요분질이 검게 비쳤다.

    "응, 앙, 아, 흐읏, 헉......!"

    눈앞에서 별이 튀며 시야가 쾌락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미칠것만 같았다. 쾌락을 제어하는 이성이 허물어진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의 것이 쑤걱쑤걱 안을 찔러 올릴 때마다 전신에 오돌토돌한 소름이 돋았다.

    별안간 칸이 웃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유독 깊숙이 박히는 웃음이 불안하게 느껴진 찰나, 그가 갑자기 손을 뻗어 휘장을 걷었다.

    침대 바깥을 향해 가랑이를 훤히 벌리고 있었기에, 나체와 더불어 그와 성기가 음탕하게 붙어먹고 있는 교접 장면이 가려질 일 없이 드러났다.

    아무도 없다면 상관없을 테지만, 어둠 속에 누군가 있었다.

    "......!"

    암흑 속에서 불이 밝혀졌다.

    누군가 켠 등불로 드러난 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루벤이었다. 입가에 밧줄이 물리고 바닥에 무릎을 끓은 채인 루벤과 레니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그와 그녀가 동시에 굳었다.

    "......아! 흐, 웃, 그만, 아아!"

    하지만 레니에의 망부석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칸이 성기를 빠른 박자로 필러 올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칸은 루벤에게 더 노골적으로 보이도록 레니에의 허벅지를 위로 들어 올렸다. 덕분에 울퉁불퉁한 사내의 자지가 비좁은 구멍을 가열하게 쑤셔 박는 장면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흑, 싫어, 으응!"

    대체 언제부터 본 것일까. 그의 아래에 깔려 제 손으로 가랑이 사이를 쑤실 때? 아니면 창녀처럼 스스로 그에게 기어갈 때?

    언제부터일지 몰라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들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난잡한 것들뿐이었다.

    "그, 그만, 제발, 아, 아아......"

    이곳에서는 절대 마주치면 안 되는 이의 등장에 온몸을 달구던 흥분이 물에 씻기듯 사라졌다. 아니, 배 속은 여전히 뜨거우나 머릿속은 더없이 차갑게 굳어 버렸다. 불쑥 찾아든 당혹과 혼란은 열기를 빠르게 종식했다.

    레니에는 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럼에도 칸은 암컷과 교미하는 짐승처럼 검질기게 달라붙어 우람한 성기로 내벽을 들쑤셨다.

    몸이 흔들리며 시야가 비틀렸으나, 충격에 젖은 루벤의 다갈색 눈동자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그래서 더욱 비참했다.

    경악하여 굳어 있던 루벤은 그녀의 저항을 인지하고 당장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를 본 칸이 조소를 터뜨렸다.

    "비론. 놈이 이리로 오면 네가 뒈질 줄 알아."

    낮게 뇌까리는 음성이 막사리처럼 사나웠다.

    그 명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루벤을 억지로 끓어 앉혔다. 어느 정도 눈이 익자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언제나 칸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는 보좌관이었다.

    칸의 보좌관이 여기 있다는 것. 그로도 모자라 루벤이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지키고 서 있다는 것. 그건 지금 벌어지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오롯이 칸의 의도란 뜻이었다.

    타인에게 정사의 장면이, 그것도 원치 않았던 섹스 장면이 실시간으로 드러나는 건 끔찍했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유일하게 저를 챙겨 주고 걱정해 준 기사였다. 더 나아가자면,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한때의 친우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으그러진 자존심이, 지금 이 순간 완전히 박살나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레니에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만해 달라 간곡하게 빌었다.

    "으응, 하, 아, 제발, 제발, 칸......"

    그러나 칸은 들은 체도 않고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비빚대며 희롱했다. 흐윽, 흐으윽. 레니에의 입술에서는 절망 어린 흐느낌만 흘러나왔다.

    그 전경을 빠짐없이 담는 루벤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그의 전신은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격분을 참지 못해 몸을 들썩이던 그는 도저히 못 보겠는지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봐, 경. 제대로 봐야지."

    칸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이자 그의 수하인 비론이 루벤의 머리통을 붙잡아 정면을 응시하도록 했다. 몰인정한 손길이었다.

    "네가 그토록 경애하는 교황이 나한테 따먹히고 있는 모습을."

    “시, 싫어, 보지 마, 제발, 앗 으응!"

    "너희의 계명 중 음욕을 금하라는 사항이 있다지. 근데 그게 의미가 있나? 교황부터가 이렇게, 후우, 남자한테 박히면서 암캐처럼 질질 싸는데."

    레니에는 필사적으로 결합부를 가리려고 했다. 그러나 칸이 그 손을 탁 쳐 내고는 도리어 음핵을 살살 긁어 주었다. 짜릿한 희열에 그녀가 턱을 치든 채 고양이처럼 헐떡거렸다. 야릇한 여성의 비음이 끝없이 울렸다.

    "그렇게 좋아, 레니에?"

    "흐응, 앙, 아, 안 돼......"

    "매일 밤마다 박아 줬는데 아직도 빠듯해. 얼마나 더 박아 줘야 헐거워지려나. 아니면, 저 새끼 좆도 같이 먹여 볼까? 그럼 좀 늘어나지 않겠어?"

    칸이 레니에의 턱을 고정한 채 귓바퀴를 핥으며 소곤거렸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루벤에게 꽂힌 것을 알아채고 그녀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칸은 악취미적인 면모를 내비치며 킥킥거렸다. 이 진저리 나는 상황을 즐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새끼 발기한 거 알아? 네가 나한테 보지 뚫리는 거 보고."

    직접 보라는 듯 그가 콕 짚어 일컬었다. 물기로 젖은 레니에의 눈동자가 저도 모르게 미끄러져 루벤의 바지춤에 닿았다.

    칸의 말대로였다. 정말로 그 바지춤은 무언가를 쑤셔 넣은 것처럼 불룩하게 솟은 채였다. 아마도 그 안에는...... 레니에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거부감에 질끈 눈을 감았다.

    "마냥 충성심인 줄 알았더니 연심이라도 있었나 보지. 아니면 나한테 밑구멍 따먹히는 걸 보고 구미가 당겼나?"

    "흑, 흐윽......"

    "그도 아니면 원래부터 둘이 천박하게 붙어먹었어? 응? 금기된 계명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이 구멍으로 저놈 자지를 맛있게 삼켰느냐고."

    "아냐! 그,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러니까 제발......"

    사냥터에서 루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때 알아챘어야 했다. 집요한 질문을 피한 결과가 고작 기분이 나빠진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눈치챘어야 했다.

    그러나 레니에는 이번에도 멍청하기 짝이 없게 굴어 상황을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 악몽이라 해도 끔찍할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저 새끼 내보내고 싶나?"

    칸이 가슴을 주무르며 물었다. 레니에는 세상 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레니에의 골반을 붙잡아 이번엔 저를 바라보게끔 몸을 돌렸다. 안에 깊숙이 박힌 성기가 내벽을 촘촘히 긁으며 돌아가는 바람에 그녀는 힉, 하고 억눌린 신음을 터뜨렸다.

    그가 제 허벅지와 맞붙은 레니에의 엉덩이를 툭 쳤다.

    "그럼 네가 내 기분을 잘 풀어 줘야지."

    "......"

    "알랑거려 봐."

    "어, 어떻게......"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난 상관없어. 여기서 우리가 밤새도록 떡 치는 걸 저 새끼가 보든 말든."

    레니에는 입술을 감쳐 물었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휘장이 걷어진 채였으니 제가 뭘 하든 루벤에게 훤히 보일 것이다. 실로 치욕스러운 상황에 눈물이 차올라 그녀는 훌쩍거렸다.

    "안 해?"

    칸은 그녀가 망설이고 있음을 깨닫고 험상궂게 읊조렸다. 레니에는 얼굴을 대충 문질러 닦은 뒤, 소심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요분질하는 행위는 루벤에게 죽어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수치심보다도 일단은 그를 여기서 내보내는 게 급선무였다. 칸이 대체 그를 왜 여기까지 끌고 온 지 몰라도, 루벤이 계속 여기 있다가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직감이 날리는 경고였다.

    무엇보다도 루벤의 무력한 모습이 그녀의 불안을 끝없이 증폭시켰다.

    루벤은 성도의 1급 기사다. 그런 자가 포로처럼 저리 꼼짝없이 잡혀 온 걸로 모자라 힘 하나 쓰지 못하고 억눌려 있다니. 그건 루벤이 약한 게 아니라 페르노인, 아니, 이 악마들이 터무니 없이 강하다는 증거였다.

    그런 자들의 수장이 바로, 제 아래에 깔린 이 남자였다.

    "흐으, 아응."

    루벤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달뜬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레니에는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감탕질에 성심성의껏 임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내려다본 칸의 동공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교접의 흥은 이미 깨졌으나 그녀가 어찌 나오는지 보기 위해 정사를 진행하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칸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한 번씩 휘장 밖을 쳐다보았다.

    그게 꼭 루벤의 목숨을 앗아 갈 사신의 손짓처럼 보여 레니에는 그때마다 아래에 힘을 꽉 주었다. 그 갈급한 몸짓을 알아챈 양 칸은 피식피식 웃었다.

    애먹으면서도 나름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길 한참.

    그녀의 교태가 썩 나쁘지 않았는지 칸이 한결 풀린 낯빛으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의 가슴팍에 동그란 레니에의 젖가슴이 닿아 짓뭉개졌다. 그녀가 팔을 들어 굵직한 목을 얼싸안자 그의 미소가 진해졌다.

    "귀엽게 굴긴."

    "흣, 그를, 내보내 줘......"

    "젖꼭지 빨아 줄까? 좋아하잖아."

    "칸, 제발, 제발 루벤을...... 으응."

    "보지에 힘 좀 줘 봐. 아 그렇게. 하아, 제기랄."

    칸은 레니에의 간청이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제할말만 하며 추삽질을 재개했다. 그녀를 침대 위로 눕히고 가는 다리를 제 허리에 두른 칸이 성기를 아래로 빠르게 내리찧었다.

    "읏, 아, 아아, 흐응!"

    그가 페니스를 길게 뽑아냈다가 붉은 살점이 짓이겨질 정도로 깊숙이 삽입했다. 힘이 어찌나 센지 한 번 들이찰 때마다 자궁이 찢어질 것처럼 쿵쿵 울렸다. 그러면서 젖무덤을 샅샅이 핥는 통에 레니에는 교성을 내지르며 자지러졌다.

    하지만 완벽히 정사에 빠질 수는 없었다. 침실 한 편, 루벤의 존재가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아응! 앙, 아, 흑, 칸. 루, 루벤은......"

    “기분 다시 잡치게 하고 싶은 거 아니면 입 다물어."

    부드럽게 허리를 놀리던 칸이 별안간 흉흉하게 눈을 뜨며 레니에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한동안 정상위로 박아 대던 그가 입꼬리를 비틀더니 돌연 레니에의 몸을 옆으로 돌렸다. 갑작스러운 체위 변경에 시트를 꾹 움켜쥐던 레니에는 곧, 이 방향에서 루벤이 정면으로 보임을 깨닫고 기겁했다.

    "싫어! 하지 마, 하, 으응, 하지...... 아!"

    "큿, 보짓살 들러붙잖아...... 이러면서 싫기는 뭐가 싫어?"

    몸이 뒤흔들리는 와중에 루벤과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야말로 루벤의 시선이 정확히 보였다. 당황, 놀라움, 그리고...... 경멸. 그녀의 심장이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저를 걱정해 준 유일무이한 사람에게 그런 눈길을 받는 건 단연 감당키 힘들었다.

    "싫어, 정말...... 싫다고!"

    그래서 의도치 않게 이전과는 다른 격렬한 저항이 튀어 나갔다. 앙칼진 목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발악을 해도 놔주지 않을 것처럼 허리를 붙잡고 아랫도리를 비벼 오던 사내가 우뚝 멈췄다.

    "......싫어?"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레니에는 덜덜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즐거운 기색이 완연히 사라진 낯으로, 칸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저놈이 우리를 쳐다 봐서?"

    손길은 자상한데 희한하게도 겁만 들었다.

    "비론."

    칸이 그녀의 턱을 그러쥐어 저만 보게 한 뒤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기사 눈깔 도려내."

    순간, 레니에는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알 수 없어 정신이 아찔해졌다. 머릿속에 울리던 이명이 그치며 한발 늦게 이해한 그녀가 황급히 몸을 비틀었다. 가슴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아, 안 돼...... 안 돼!"

    루벤은 검을 휘두르는 기사다. 그런 자가 시력을 잃는다는 건 번듯한 생업과 창창한 미래를 동시에 잃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레니에는 저를 결박하는 칸을 뿌리치려고 애쓰며 침대 바깥으로 손을 뻗었다.

    마찬가지로 칸의 지시를 들은 루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빛이 두려움에 흔들리는 찰나, 무언가 어둠 속에서 빛보다 빠르게 서걱, 움직였다.

    "아아악!"

    잠시 후, 침실 안에 루벤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고통과 절망, 믿을 수 없는 현실 부정이 섞여 든 비명이었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소리에 레니에는 진정 모골이 송연해졌다. 짙은 암흑 속에서 액체가 후두두 쏟아졌다. 잠시 후, 혈성이 악취처럼 지독하게 풍겼다.

    상체를 옹송그린 루벤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가 고개를 숙인 바닥으로부터 핏물이 조금씩 번져 나갔다.

    레니에는 덜덜거리며 입술을 틀어막았다. 산속에서 보았던 장면이 망막 위로 스쳐 지나갔다. 창에 관통당한 사슴이 루벤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사슴이 되었던 그 아찔했던 장면.

    그건 환시였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건 현실이었다.

    해백해진 레니에는 그의 가슴팍을 밀치고 할퀴다가 기어이 발로 차기까지 하며 발버둥을 쳤다. 코앞에서 벌어진 잔혹한 참상에 낯빛이 시퍼렇게 질린 채였다.

    "이거 놔!"

    "레니에."

    "이 미, 미친 새끼야. 무슨 짓이야. 대체 이게, 왜, 왜......, 이거놔, 놓으라고!"

    칸은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슬쩍 손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레니에는 당장 침대에서 벗어나 루벤에게 달려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으나 옷을 챙겨 입어 가릴 정신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루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양쪽 눈을 질끈 감은 채 극렬한 통증에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이 피로 물든 게 훤히 보였다.

    "경. 고개, 고개 좀 들어봐요. 흑, 루벤, 눈, 눈이...... 어떡해......"

    악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상황에 몇 년 간 입에 올리지 않았던 이름까지 절로 튀어나왔다. 공황에 빠진 레니에는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가 제 손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피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그녀는 서둘러 성력 운용을 시도했다. 제가 다루던 성력이 알고 보니 악마의 힘이었고, 애초 제 것이 아님을 이젠 알지만, 워낙 급박한 상황인지라 무어라도 해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성력이 시현되면 조금이라도 빨리 눈을 치유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력은 조금도 발휘되지 않았고 그의 상처는 그대로였다.

    다친 건 루벤인데, 그녀의 모든 게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성기사로서 전도유망한 그가 이런 일을 당한 건 모두 저 때문이었다. 저와 그 사이의 교류가 칸의, 저 악마의 심기를 건드려 버려서. 그리고 그건 누가 보아도 명백히 레니에와 관련이 있어서.

    이대로는 안 된다.

    "의원, 의원에게 가야 해. 빨리, 루벤. 정신 차려 봐요. 제발......"

    흡사 빌기라도 하는 것처럼 레니에가 빠르게 뇌까렸다. 간헐적인 숨을 토해 내는 기사를 붙잡아 일으키려는데 불현듯 다가온 손이 레니에의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겼다.

    "가긴 어딜 가."

    그녀를 따라 침상에서 내려온 칸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루벤을 붙잡은 레니에의 손을 떼어 내고 침대로 다시 질질 끌고 갔다. 그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저항하던 레니에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 모든 상황에 악에 받친 소리를 냈다.

    "대체 왜 이래, 왜!"

    "......"

    "나만 괴롭히면 됐잖아, 나만 힘들게 하면 됐잖아. 왜...... 왜 그에게 손을 댄 거야. 왜......"

    "몰라서 물어?"

    눈물 젖은 얼굴로 소리치는 레니에를 응시하는 칸의 시선이 첨예했다.

    "네가 저 새끼 보고 웃었잖아."

    "......"

    레니에는 저도 모르게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한 거지?

    웃어서? 웃어서...... 그랬다고 했어? 알아듣기에 무리가 없는 아주 쉬운 문장이었는데도 납득하기에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머지않아 그를 이해했을 때, 진정 모든 게 아뜩해지는 심정이었다.

    레니에의 얼굴이 구겨진 종잇조각처럼 완전히 일그러졌다. 대중없는 그의 도덕성이 그녀의 인내심을 한계에 다다르게 만들었다.

    그녀가 경악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친, 미친놈...... 당신은 정말로 미쳤어."

    칸은 계속해 보라는 것처럼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태평한 태도를 보자 이제는 다른 의미로 열이 올랐다. 태어나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부아가 치밀었다.

    그간 켜켜이 쌓인 울분이 속에서부터 괴어올랐다. 레니에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어떻게 그따위 이유로 사람을 저렇게 만들어. 이 성격파탄자야! 넌 제정신이 아니야!"

    항변 도중 칸의 손이 다가왔다.

    또다시 저를 무력으로 잡아끌려는 걸 눈치채고 레니에는 날카롭게 깎인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짝!

    손바닥과 뺨이 마찰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격분으로 가득 차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가 설령 지난번처럼 목을 조른다고 해도, 오늘만큼은 이 분노를 결코 참아 넘길 수가 없었다.

    반쯤 돌아간 칸의 얼굴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느른한 행동이 레니에의 가슴을 꽉 옭아맸다.

    "말은 바로 해야지. 레니에."

    "......"

    "내가 언제 널 괴롭혔어?"

    그가 불시에 레니에의 가랑이 사이로 손을 뻗었다. 레니에는 흠칫 놀라 몸을 퍼드덕거렸다. 아직 젖어 있는 구멍 속으로 손가락 두 개가 파고들어 안을 휘저은 뒤 빠져나갔다.

    칸이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을 코앞에 들이밀며 속삭였다.

    "이렇게 예뻐해 주는데."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입꼬리가 역겨웠다. 그사이 피 냄새가 더 진해졌다. 어느새 루벤의 비명은 멎어 있었다. 그를 깨닫자마자 등줄기가 써늘하게 얼어붙었다.

    다급히 고개를 돌리려는데 칸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저 새끼를 두둔하면."

    "......"

    "다음엔 모가지야."

    금욕적인 낯이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는 것처럼 반반하게 웃었다.

    "너 말고, 저놈 모가지."

    그가 아르르 떠는 레니에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악독하다. 그것 말고는 표현할 수가 없는 사내였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의 인생을 한순간 시궁창에 처박아 놓고 저리 태연하게 웃을 수가 있지? 자신이 지닌 인간으로서의 윤리가 완전히 박살 나는 기분이 들었다.

    곧 레니에는 제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놈은 사람이 아닌 악마다. 그런 악한 존재를 제 기준으로 재단하고 있으니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지독하다고 여겨질 뿐이었다.

    칸이 손목을 끌어당겼다. 침대로 재차 이끌려는 몸짓에 레니에는 창백해진 얼굴로 무춤거렸다.

    그럼 지금 루벤을 저런 상태로 두라는 건가? 저렇게 다친 상태로? 제정신인가? 조금이라도 빨리 치료하면 눈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칸과 이렇게 옥신각신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목을 도려낼 거라는 잔혹한 경고가 행동을 주저하게 하였다. 일각이 급한 상황이라는 걸 아는데도 더 심한 화를 자초하게 될까 봐 두려워 망설여졌다.

    이대로 칸의 요구에 부응해 주는 게 상황을 가장 빨리 진정시키는 방법일 터.

    그러나, 이대로 루벤을 내버려 두기에는 고민은 깊었고, 결정을 내리는 데까지의 시간은 짧았다.

    레니에는 그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손을 뿌리쳤다. 칸의 아스스한 시선이 돌아오기도 전에 그녀는 바닥에 넙죽 엎드려 애원했다.

    "제발, 제발."

    맹세코 주신에게도 이토록 빌어 본 적이 없건만.

    하나 늘 그랬듯 극한으로 치달은 상황 속에서 자존심은 조금도 내세울 수 없었다. 이 자존심을 버리는 게 누군가를 살리는 길이라면 백번이고 그래야 했다.

    "루벤은 보내 줘, 제발......"

    그의 딱한 가정사를 알고, 그가 저 자리에 얼마나 힘겹게 오른 건지를 알기에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자신이 그를 외면하게 된다면 그의 삶은 진정 끝이었다.

    처음부터 루벤의 호의에 반응하는 게 아니었다. 교황과 성기사라는 사무적인 주종 관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됐다. 애초 자신을 신경 쓰지 못하도록 딱 잘라 선을 그었어야 했다. 저를 위해서라도, 그를 위해서라도.

    바닥에 얼굴을 묻은 상태라 칸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실내의 온도가 훅 낮아진 것이 살 끝으로 세세히 느껴졌다. 싸늘함에 피부가 깎이는 것 같았다.

    그건 진짜로 추워졌다기보다는,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의 기색이 눈에 띄게 흉포해졌음을 뜻했다.

    "하아."

    머리 위로 짙은 한숨이 내리 앉았다.

    "레니에."

    저를 부르는 음성에 그녀는 기름칠하지 않은 기계처럼 삐걱삐걱 고개를 들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애처로웠다. 다리를 굽혀 앉은 칸이 한결 풀린 낯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넌 정말, 날 미치게 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어."

    자상하던 손길은 순식간에 강압적으로 돌변해 그녀의 턱을 매섭게 그러쥐었다.

    "아둔한 계집 같으니라고."

    잿불 같은 눈동자가 위협적이었다. 그에 바르르 떨고 있자니, 칸이 그녀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제 뒤에는......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깨닫고 레니에가 급히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를 시도하기 전에 날붙이가 생살을 싹둑 자르는 소리가 들렸다. 등 뒤로 무언가 추락해 데구루루 구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눈에 담고 있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가히 짐작됐다. 끔찍한 상황에 오금이 얼어붙었다. 칼바람 부는 혹한 속에 놓인 것처럼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엔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그게 무얼 뜻하는지 깨달은 순간, 레니에의 몸이 이성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제 잔혹한 상상이 결국 현실이 되어 버린 듯해서.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오열했다. 아주 오래전, 이제는 까마득한 루벤과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왜 울어?"

    하지만 칸은 그 슬픔을 느낄 잠깐의 틈도 주지 않았다.

    억센 악력이 그녀를 막무가내로 끌어당겼다. 눈앞이 정신없이 뒤흔들리며 레니에는 어느새 침상 위에 누운 채였다.

    "사람 하나 죽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 말은 확인 사살이 되어 레니에의 가슴을 버겁게 찔렀다.

    진짜 죽었다고? 루벤이?

    왜 그가 죽어야 했던 거지. 왜, 나는 멍청하게 굴어서......

    충격과 죄책감에 그녀는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시야가 뿌였다. 이 와중에도 휘장 바깥에서 피비린내가 끝없이 풍겨 왔다. 그 혹취가 루벤의 말로를 도무지 잊을 수 없게끔 머릿속이 꾸역꾸역 새겨 넣었다.

    다리가 벌어지며 비좁은 틈새로 거근이 재차 밀려 들어왔다.

    그 뒤로 이어진 정사는 완연한 폭력이었다. 달뜬 열기는 싹 가라앉고 고통만이 선연했다.

    칸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제가 흡족할 만큼 그녀를 탐했다. 어쩔 수 없는 생리적 반응으로 간간이 교성을 터뜨리면서도, 레니에는 비극적인 눈물을 삼키지 못했다.

    달마저도 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새벽녘.

    정사가 끝나고, 땀에 전 레니에의 알몸 위로 이불이 얹어졌다. 그녀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를 느리게 깜박거렸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핏줄기처럼 흘러내렸다.

    침실에는 피 향과 밤꽃향이 버무려진 역스러운 냄새가 진동을 했다.

    몸을 섞는 내내 칸은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정녕, 죄 없는 루벤을 단칼에 죽인 것에 대해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웃음소리가 내내 레니에의 가슴을 할퀴었다. 끔찍하고 참렬했다.

    레니에는 눈을 감은 채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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