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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빛바랜 추상 (6/19)

5장. 빛바랜 추상

고운 성복을 갖춰 입은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예배당을 울렸다.

어린아이부터 꽤 나이 지긋한 노인까지. 각기 다른 나이대의 성가대가 내는 소리는 대단히 감미로웠다. 풍성한 화음이 실내의 곳곳으로 퍼질 때마다 금촛대 위의 불빛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그들의 차례가 끝 나고, 제3 대주교 베이슨이 강단 위로 올라 본 기도문을 읊었다. 성력이 실린 그의 음성은 성가대의 찬미보다 더욱 경건하게 실내를 채웠다.

기도가 진행되는 동안 레니에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오늘, 예배를 참관하고 싶다는 명목으로 뒷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은 사내가 보였다. 보고 싶지 않아도 타인보다 월등히 큰 체구가 멋대로 시야를 침범하고 들었다.

모두가 눈을 감고 있는 상황에서 그와 그녀만 눈을 뜨고 있었다. 포개진 시선 위로 형용 못할 감정이 빠르게 오갔다.

"순리를 해치는 삿된 것을 경계하라. 달콤한 그들의 매혹을 견뎌 내라. 결코, 악마에게 현혹되지 말라."

대주교가 악마의 3대 계명을 입에 머금었을 때, 레니에의 눈가가 유약하게 떨렸다.

그녀는 더 이상 마주하지 못하고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러기 전 칸은 속내를 꿰뚫어 본 것처럼 유려한 눈웃음을 지었다. 번드르르한 웃음이 역겨웠다.

방황하던 레니에의 눈길은 곧 예배당 상방 유리창에 가 닿았다. 별이 빼곡한 밤하늘은 언제 그러했느냐는 듯 비가 뚝 그쳐 맑은 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신의 경고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으니까.

***

밤의 고요함이 내리 앉은 신전의 동녘.

레니에는 회랑을 따라 걸었다. 번민하는 그녀의 속처럼 뒤숭숭하게 번지는 달무리가 주위를 을씨년스럽게 비쳤다.

기둥의 그림자 사이로 걷는 레니에의 낮은 파도에 휩쓸린 것 처럼 무력했다. 툭 치면 그대로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를 냉혹하게 스쳤다.

"교황 성하."

문득, 등 뒤에서 저를 붙잡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리는 레니에의 눈동자에 빛이 한 움큼 고여 들었다. 암흑의 끝자락에는 성기사, 루벤이 서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의 등장에 레니에는 아무런 대꾸 없이 눈만 끔벅였다.

루벤은 조심스레 다가와 그녀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신의 거룩한 종,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1급 성기사, 루벤이라고 합니다."

그는 혹 그녀가 저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염려가 되었는지 냉큼 자신을 소개했다. 레니에는 힘없이 입꼬리를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를 모를 리가 있나요."

1급의 성기사, 루벤.

변변치 않은 평민의 신분이나 끝없는 피와 땀을 흘린 끝에 1급이란 명예로운 지위를 거머쥔 사내였다. 보통 1급은 왕도 귀족의 자제들이나 받을 수 있는 급수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대단한 성과였다.

동시에 그는 레니에와 동년배이며 한때 신학을 함께 배운 급우이기도 했다. 레니에가 교황직에 추천되기 전, 그리고 루벤이 성기사 작위를 받기 전까지 두 사람은 친우로서 나름 친밀하게 지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지향하는 바가 뚜렷해졌고, 그에 따라 서로의 관계 또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성기사가 성도에서 꽤 높은 위상을 지녔다지만, 이 땅의 집권자인 교황과 비견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피의 맹약으로 루벤은 이제 그녀에게 평생을 바쳐야 할 기사다. 레니에가 바로 그의 상관이자 군주였다. 깍듯한 주종관계인 만큼 서로 웃고 지내던 과거는 한편에 묻어 둬야 할 추억일 뿐이었다.

"일전에 지시하신 동물들은 모두 신전 외곽 숲에 묻었습니다."

페르노 사절단이 도륙 낸 동물들에 관한 얘기였다. 레니에는 그를 어렵지 않게 알아듣고 한숨처럼 답했다.

"수고 많았습니다. 그 보고를 하러 온 건가요?"

"그리고."

혹 그녀가 저를 물릴까 우려되었는지 루벤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다음 말은 꺼내길 주저하듯 한참 입술만 달싹거렸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스적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요즈음,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레니에의 가슴이 철렁 내리 앉았다.

"도통 낯빛이 좋지 않으셔서 염려되어 그렇습니다. 혹 지난 번, 괴한의 침입으로 정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닌지......"

1급 성기사들은 대체로 교황의 곁을 지키는 호위였다. 분명 칸에게 겁탈을 당했던 지난날, 예배당 바깥에서 루벤 또한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리하게 파고드는 의문을 모른 체하듯, 레니에는 눈길을 피했다.

"이미 말한 대로, 그날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레니에는 끔찍했던 사건이 흐리마리하다고 얼버무렸고 현재 신전은 그날 일에 관해 조사 중에 있다. 하지만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으리라. 저를 겁간하려고 마음먹은 칸에게 그 정도 뒤처리는 일도 아니었을 테니까.

레니에라고 알리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사람을 향해 목놓아 외치고 싶었다. 악마가 제 순결을 빼앗았고 그로도 모자라 여태껏 비열한 협박을 하며 자신을 농락하고 있노라고.

하지만 동시에, 절대로 그날 일이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교황인 그녀가 악마에게 으스러져 순결을 잃게 되었으며, 애초 성력조차 없던 범인이라는 것이 들통 났다가는 뭐가 되었든, 예배당에서의 일이 들키는 건 지금보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지름길일 뿐이었다.

"그러니 내게 물어봤자 기대한 답을 얻을 수는 없을 거예요."

제가 들어도 퍽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매사 온화하던 교황이 웬일로 냉담하게 굴자 루벤은 무거운 표정으로 손을 꾹 그러쥐었다.

"본의 아니게 불쾌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성하께 해를 끼친 괴한을 놓쳤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진솔한 사죄에 반하여 레니에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괴한의 정체를 알아봤자 루벤은 당해 내지 못할 터였다.

그 상대는 바로 악마니까.

저를 잔혹하게 짓뭉개던 포악한 성정이 성기사들에게 향한다고 생각해 보았다. 예상은 쉬웠다. 눈앞의 루벤을 포함한 성기사들이 마차 속의 동물처럼 피를 낭자하게 흩뿌리게 될 터.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한 악마의 두려움이 너무나 커서 그런지 굳이 겨뤄 보지 않아도 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제가 알고 있는 선은 악보다 무력하고 나약했다. 아니, 악이 그만큼 간사하고 표독스러웠다.

거북한 피비린내가 다시 코를 스치는 듯하여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루벤은 그 하얀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혹 힘든 일이 있으시다면."

그는 긴장했는지 말하던 도중 목울대를 급하게 꿀렁였다.

"언제든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건 성하십니다."

루벤의 음성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레니에가 디디고선 땅이 흔들렸다. 그건, 그녀의 맘속이 요동친 탓이었다.

모두가 제게 일어난 일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고단함. 악마의 손아귀에 빠져 도무지 헤어나오지 못하는 무력감. 언제 진실이 탄로 날지 몰라 자꾸만 전전긍긍하게 되는 불안함.

그 복잡한 속내를 알아챈 건 이곳에서 루벤이 유일했다.

외로운 땅에서 고통을 알아봐 주는 건, 언제나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과거 칸이 그렇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로 인해 이리도 낭패 어린 상황에 다다랐다는 걸 알면서도. 고난에 허우적거리는 레니에에게 루벤의 호의는 꿀처럼 다디달았다.

무감하기만 하던 레니에의 낯에 처음으로 감정이 얽혔다.

루벤은 창백한 얼굴 위로 비치는 설움을 똑똑히 목도했다. 그녀는 두 다리로 온전히 서 있는데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한없이 주저하던 그녀가 한참 만에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돌연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찬물을 확 들이부은 것처럼 갑자기 끼치는 오한에 레니에는 흠칫했다.

"성하."

별안간의 불안이 기우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묵직한 저음이 공간을 울렸다. 하나의 공명 같은 울림은 어릴 적 예배당에서 들었던 그것과 동일했다.

레니에의 목 뒤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는 더듬더듬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어느 틈에 와 있던 것인지 모를 칸이 벽에 기대선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휘어진 눈매는 부드러우나 그 속에 담긴 눈은 날붙이처럼 매서웠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둘이 있을 때는 잘만 하대하던 칸은 루벤의 존재를 의식하듯 말을 높였다.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교황을 배려하는 인자한 타국 왕의 모습이었다.

가식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레니에는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짓씹었다. 결국, 터졌는지 혀끝에 비릿한 맛이 퍼졌다.

"페르노의 왕을 뵙습니다. 이 야밤에 성하와 하실 일이요?"

기척도 없이 등장한 칸을 보고 놀란 루벤은 이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할 일'에 의아함을 표했다. 그 의문에 예민하게 반응한 건 레니에뿐, 칸은 팔짱을 낀 채 태연히 웃고만 있었다.

"궁금하면 성하께 물어보지그래. 친히 알려 주실 테니."

칸이 목석처럼 굳어 버린 레니에를 눈짓하며 말했다. 레니에는 이곳이 어둠에 가려진 공간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허옇게 질린 제 낯이 가감 없이 드러났을 테니까.

그녀는 루벤을 향해 다급히 말했다.

"경.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페르노의 왕과 긴히 상의해야 할 안건이 있습니다."

본래라면 루벤에게 면박을 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1급이라고 해도 그는 한낱 기사일 뿐이다. 그런 자가 교황과 타국 왕의 만남에 의문을 품는 걸로 모자라 입 밖에까지 올리다니. 경거망동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레니에는 혹시 루벤이 그와 저의 은밀한 사이에 대해 알게 될까 두려워 루벤을 돌려보내는 데에 급급했다. 한때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순박한 이에게 난잡하고 더러운 짓거리를 들키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루벤은 그림자처럼 선 칸과 레니에를 번갈아 보다가, 제가 나설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한 발짝 물러났다. 한쪽 무릎을 끓어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 루벤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가지 마.'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소리가 입 안에서 덩어리처럼 뭉쳐 들었다.

'가지 마, 루벤.'

이 한마디만 내뱉으면 루벤은 다시 저를 봐 주겠지만, 그러려거든 모든 게 들통 날 감수를 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그런 용기는 없었고 루벤은 끝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레니에는 뒤를 돌아보기가 무서웠다. 악마가 여느 때처럼 성욕에 절은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을 게 자명해서. 그 눈빛은 그녀를 준열히 압도하며 뼈도 추리지 못할 만큼 심신을 아득아득 긁어먹으리라.

침묵이 공포심을 몰고 왔다.

이윽고 야음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월광이 내리쬐는 곳에 서 있던 레니에가 암흑 속으로 삼켜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거구의 사내가 침상에 걸터앉아 허리띠를 끌렀다.

그 앞에 망연한 얼굴로 서 있던 레니에는 바지춤이 풀리며 남자의 성기가 드러나자 시선을 피했다. 이미 몇 번이나 보았으나 습관적으로 행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검붉게 발기한 남근은 낯선 동물의 성기를 보는 것처럼 징그러웠다.

칸이 레니에를 잡아먹을 듯이 응시했다. 그녀의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새빨간 동공에 날이 섰다.

그 시선에 억눌린 것처럼 레니에는 천천히 다리를 굽혔다.

신의 앞에서만 보여야 할 자세를 악마에게 취하는 건 곤혹스러웠고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이 사내가 여차하면 저를 죽일 수도 있으리란 위협 속에서는 뭔들 못할 것이 없었다. 지난번에도 그악스럽게 목을 졸라 하마터면 숨넘어갈 뻔하지 않았는가.

그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자 칸이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눌러왔다. 새하얀 치아와 발간 점막을 드러내는 입 안을 먹음직스럽게 응시하던 칸은 곧 그 사이로 제 귀두를 물렸다.

"오늘은 잘했으면 좋겠는데."

웃음기 배인 목소리와 함께 핏발선 성기가 꾸역꾸역 디밀어졌다. 선단이 찬 것만으로 상당히 빠듯해진 입을 아예 찢을 기세로 파고드는 바람에 그녀의 눈꺼풀이 나비의 몸부림처럼 파르르 떨렸다.

저 말이 어제의 제 행동을 힐난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어젯밤 그가 침대에 눕힌 채로 입 안에 좆을 아무렇게나 처박아댔고, 숨이 넘어갈 듯한 위협감에 놀란 그녀가 펑펑 눈물을 터뜨리는 바람에 행위는 중단되었다.

"으, 읍."

"이 세우면 혼날 줄 알아."

귓바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과 달리 퍽 날이 선 어조였다. 정작 레니에는 그런 발칙한 반항을 시도할 생각조차 못했다. 끈적한 쿠퍼액으로 젖은 귀두의 능선이 천장을 콱콱 찔러대는 통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입 안 곳곳이 쓰라렸다.

타액이 새는 바람에 본능적으로 들이마시자 춥, 하고 맛있는 사탕 빠는 소리가 났다. 정수리 쪽에서 만족스러운 탄식이 들렸다.

"옮지."

슬쩍 시선을 들었다. 칸의 눈에는 웃음기가 역력했다. 이후 혀를 내어 제 입술을 축이는 모습은 관능적이었다.

페니스의 크기가 평균치를 훨씬 뛰어넘는지라 물고만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머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턱이 지끈지끈 아려왔다. 창부가 아니었고, 그래서 남자를 만족시키는 노련한 기술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레니에는 성기를 반쯤 문채 어쩔 줄을 몰랐다.

"윗구멍 별로 안 써 본 거 티 내는 거야?"

목을 울려 웃은 칸이 손을 내려 레니에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물 먹은 미역처럼 열없던 그녀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입술 오므려서 빨아. 네 보지로 삼키는 것처럼."

그 방식이 머리로 잘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일단 뭐든 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입을 쑤셔 대는 이 흉기가 어느새 다리 사이를 벌리고 연약한 안을 찔러 들어올지 모르니까. 과격한 정사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를 억지로 움직이게 했다.

레니에는 그가 명한 대로 입술을 오므렸다. 한계치로 벌어진 입 때문에 턱 근육이 녹슨 고철처럼 빽뻑해져 꽤나 애를 먹었다.

"......흐."

조금 더 깊게 물려는 찰나 그가 유두를 콱 꼬집었다. 그녀가 어깨를 떨자 머리 맡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이 불안감을 고취했다.

레니에는 정신 차리고, 페니스를 목구멍에 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밀어 넣었다. 스스로에게 고문을 주는 것만 같은 수괴스러운 행동이었다.

춥. 츄읍. 그녀의 숨결 사이로 기둥을 힘겹게 빠는 소리가 배어났다. 입 안을 빼곡하게 채운 음경을 점막에 비벼 자극하다가, 가끔은 혀를 내어 귀두를 소심하게 할짝거렸다.

"내일 사냥이 예정되어 있다지."

적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가슴을 희롱하는 손길이 차츰 부드러워졌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레니에는 몸을 움찔대면서도 혀를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입이 너무 아파서 빨리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준 뒤 이 거근을 뱉고 싶었다.

"스페르 산이라고 했나."

달뜬 탄식과 함께 그가 심상히 읊조렸다.

그의 말대로 내일은 사냥이 예정되어 있다.

왕도에는 제 무예 실력을 뽐내며 으스대는 것을 좋아하는 귀족이 수두룩하여 사냥 대회가 곧잘 열리고는 했다. 그들은 저들이 잡은 짐승을 박제하고 전시하여 스스로의 위용을 과시하려 들었다. 목숨을 함부로 도륙하는 그 행위는 귀족들만의 고고한 취미였다.

그와 달리 근근이 벌어 먹고사는 평민이 대다수인 성도에서 그런 취미가 성행할 리 없었다. 오히려 성도에서는 단순히 흥밋거리로 짐승을 잡아들이고 또 죽이는 귀족의 관습을 지탄하는 편이었다.

말하자면, 이번 사냥은 오로지 페르노 사절단을 위해 마련된 일정이란 뜻이었다. 그건 성도의 뜻이 아니라 왕도에서 친히 내려온 지침이었다. 그들이 행여나 성도에서의 일정을 지루하게 느끼지 않도록 하라는, 일종의 강행과 같았다.

나흘 전 쏟아지던 폭우로 사냥은 취소될 뻔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비가 뚝 그치고 날씨가 맑아지는 탓에 일정을 거행해야 했다.

"사냥이라......"

읊조리는 어조가 의미심장했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날이 되겠어."

레니에의 심장이 꽉 굳어지며 발끝이 곱아들었다. 요동치는 시선이 칸의 얼굴에 닿았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휜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다니.

그건 아무리 들어도...... 사냥으로 눈을 가린 채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말처럼 해석돼 그녀의 가슴이 스산해졌다. 이미 일전에도 한 번 '죽이겠다'는 말을 꺼낸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레니에는 극심히 두려워졌다.

혹 그 대상이 저를 가리키는 것일까 봐.

"하아."

서슬 퍼런 말을 꺼낸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펠라티오를 즐겼다. 그녀의 머리통을 살살 어루만져 주던 칸은 다른 손을 기어이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성복 위로 구겨지듯 선이 생기며 그가 유방을 주물럭거렸다.

"혀로 귀두 더 문질러 봐."

여유롭기만 하던 사내의 목소리에 후덥지근한 열기가 배이기 시작했다. 레니에는 이 역스러운 행위를 빨리 끝내고 싶어 서둘러 혀를 휘저었다. 반으로 쩍 갈라져 끈끈한 점액을 토해내는 귀두를 살살 핥자 혀끝으로 비린 맛이 물씬 느껴졌다.

"흐응, 응, 읏......"

벌어진 레니에의 입술 사이로 야트막한 신음이 샛다. 그가 구강성교를 받는 내내 젖꼭지를 유린한 탓이었다. 아까부터 집요하게 건드리는 바람에 무릎을 꿇고 앉은 레니에는 연거푸 엉덩이를 들썩였다.

애를 먹으며 가까스로 성기를 쪽쪽 빨기를 한참.

가슴에서 손을 뗀 칸이 불시에 그녀의 머리를 움킨 채 성기를 처박기 시작했다.

"......! 읍! 읏, 응, 웁......!"

레니에는 목구멍을 홧홧하게 찔러 욕지기를 유발하는 추삽질에 굵직한 허벅지를 급히 움켜쥐었다. 칸은 아예 침상에서 일어나 그녀의 입을 구멍 삼아 격렬하게 허리 짓을 했다. 귀두가 여린 점막을 검 끝처럼 뾰족하게 굵어 대는 바람에 그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흐응, 응......! 웁 , 읍!"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 뒤통수를 강하게 옭아맨 손길 때문에 무리였다. 사내의 추삽질을 견디다 못한 레니에가 결국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으나 그는 악착같이 따라와 발정 난 짐승처럼 입 안을 꿰뚫었다.

여차하면 목구멍이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레니에는 덜컥 두려워졌다. 다급히 그의 허벅지와 복부를 두들기고 밀어냈으나 칸은 사악하게 웃으며 더 깊게 밀어 넣을 뿐이었다. 간간이 윗구멍은 뜨거워서 좋다는 둥, 혀를 더 써 보라는 둥 태연하게 난잡한 소리를 지껄였다.

마침내 그가 뒷덜미를 잡아당기며 둔탁한 침음성을 냈다. 가장 깊숙이 들어와 있던 귀두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끈한 액을, 레니에는 그대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후 피어오르는 역겨운 비린내는 다음 문제였다.

그가 입에 물린 것을 천천히 빼냈다. 빠져나가는 성기의 선단과 레니에의 입술 사이로 희멀건 액체가 은실처럼 길쭉하게 늘어났다.

"컥! 큿, 콜록."

칸은 목구멍이 따가울 정도로 기침하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어 제게 보이게끔 들어 올렸다.

초점이 나간 동공 하며 잔뜩 상기된 낯, 더불어 제 점액질로 번들번들해진 입가가 몹시도 야했다. 심히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그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페니스가 비벼져 후끈한 감촉이 만연한 입속으로 말캉한 혀가 파고들었다.

무자비한 피스톤질에 반쯤 넋이 나가 있던 레니에는 그 키스에 정신이 확 돌아왔다.

"으응, 흡......"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릴 만큼 혀를 휘저은 칸이 만족스레 입술을 뗐다. 그는 레니에를 일으키더니 침대 위로 집어 던졌다. 레니에는 곧바로 발목이 붙잡혀 다리가 벌어지는 바람에 구명줄처럼 시트를 움켜쥐었다.

칸은 하얀 성복을 찢어발기듯 벗겼다. 성복 안에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아 바로 속살이 드러났다. 당연하게도 속옷을 입지말라는 사내의 지시였다.

탐스러운 젖가슴부터 옅은 색소의 음모가 자리한 삼각지까지, 그는 음험한 눈길로 훑어보았다. 곧 칸은 끈적끈적하게 젖어든 가랑이를 발견하고 픽 웃었다.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밑구멍은 이렇게 좋아하고 있었어?"

"흑, 아니,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의 손바닥이 음부 전체를 덮어 문질렀다. 젖은 질구부터 클리토리스까지 알게 모르게 건드려지는 통에 레니에는 허리를 비틀었다. 그는 점점 흥건해지는 아래를 집요하게 비벼 주다가 돌연 찰싹찰싹 내리쳤다. 입구에 아슬하게 고인 애액이 튀어 올라 칸의 다리며 참침대 시트며 할 것 없이 질척하게 적셨다.

"하응, 읏......!"

"이렇게 질질 싸면서."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비아냥거렸다.

레니에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자존심이 상해서 이런 반응은 보이고 싶지가 않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며칠간 그에게 굴려지며 오직 고통만 존재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은 분명 고통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갈수록 발정 난 금수처럼 혼자 즐기는 게 별로였는지 그녀를 저와 같은 상태로 달구기 시작했다. 하루는 레니에의 음핵을 가열하게 빨아 주다가 쑤셔 박았고, 또 하루는 교미하는 개처럼 뒤로 흘레붙으며 연신 젖꼭지를 애무한 적도 있었다.

오늘도 그러했다. 구강성교를 하는 내내 유두와 귀를 끈질기게 건드리지 않았는가. 두 부위는 레니에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감대였다.

처음 강간을 당할 때만 해도 쾌락을 모르던 레니에의 몸은 어느새 조금씩, 그 두려운 감각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에 물이 들수록 왜 성직자에게 이런 음욕 어린 행위가 금기시되는지 알 수 있었다.

몹시 달콤하고 매혹적인 행위는 주신마저 뒤로 미뤄 버릴 정도로 중독적이었다.

"흐으응......!"

그가 질구 위의 돌기를 꽉 꼬집었다. 쾌락이 한 데 뭉친 예민한 곳을 건드리는 바람에 그녀는 파들파들 떨며 허리를 휘었다.

"여기 빠졌다간 죽겠어, 레니에."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가는 걸 확인한 칸은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읊조렸다. 레니에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그러자 칸은 오므라든 다리를 단단히 붙잡고는 축축하게 젖어든 아래로 귀두를 문질렀다.

"흑!"

단단한 선단이 입구의 표피를 유순하게 자극했다. 하지만 이후 구멍을 헤집어 들어오는 기세만큼은 유순하지 못했다. 아래가 흠씬 젖어도 받기 힘든 크기의 성기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두 동강 낼 것처럼 진입했다.

"허윽, 하아, 아......"

"후우, 입보다 잘 삼키네. 윗구멍은 연습 좀 더 해야겠더라. 내 수하들 좆도 물려 볼까?"

그가 레니에의 뺨을 깨물며 소곤거렸다. 수하들이라는 말에 그녀의 전신이 통 나무처럼 뻣뻣하게 경직됐다.

그의 나라 페르노가 사실은 인간의 왕국이 아닌 마계란 것을 깨달은 뒤 레니에는 몹시도 절망했다. 그건 칸뿐만 아니라 그를 보필하여 여기까지 온 모두가 악마라는 증거였으니.

악마가 주신의 땅인 이곳에 난입했다는 건 망조나 다름 없었다.

이 사내에게 시달리는 것만으로 죽을 듯이 힘든데, 이리도 자존심이 아스러지는데 어떻게......

"흑, 싫, 싫어......!"

물씬 드는 거부감에 조급히 고개를 저었다. 다리를 고쳐 안은 칸이 반쯤 삽입해 둔 것을 뒤로 물렸다가 푹, 박아 넣었다. 질안이 후끈거릴 만큼 찔러지며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범람했다.

"하으응!"

"보지는 좋다고 빨아 먹는데?"

난리가 난 레니에와 달리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그는 여유롭게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귀두가 질 어귀에 걸릴 정도로 빠졌다가 애액이 흠뻑 흐를 만큼 찔러 들어오며, 내벽을 야릇하게 할퀴었다.

등줄기를 쭉 타고 흐르는 찌르르한 전율에 몸을 떨면서도 레니에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그러니까 잘 좀 굴어 봐. 아양도 좀 떨고. 내가 다른 새끼 부를 마음 안 들게."

칸이 그녀의 젖꼭지를 꼬집으며 타박했다. 물기 가득한 눈으로 레니에는 씨근덕거렸다. 찔꺽찔꺽, 아래서 성기가 서로 좀먹는 천박한 소리가 끝없이 났지만, 그를 귀에 담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설마, 싶었으나 그가 정말 갑자기 마음이 돌변해 다른 악마들을 부르면 어쩌지. 그런 걱정만 들었다.

혹 그들에게 다 같이 범해지게 되는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꼼찍한 결과였다. 쾌락에 저린 와중에도 겁이나 와들와들 떨던 레니에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가 꺼낸 '아양'에 대하여 그녀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해답이었다.

느닷없는, 어린애 수준의 키스에 눈을 끔벅이던 칸은 곧 야발진 시도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빙글거리던 그가 레니에의 엉덩이를 짝 내리쳤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알랑거릴 줄도 알아?"

아까보다 거칠어진 음성으로 읊조린 칸은 결합한 하복부를 조금 들어 올려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리찧었다.

"응, 앙, 아, 아......!"

철벅철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 골을 타고 찐득한 애액이 줄줄 흘렀다. 하필이면 그가 반복적으로 때리는 곳이 가장 느끼는 부분이라 달아오른 신경이 자르르 녹아내렸다. 페니스를 한가득 문 구멍이 연신 옴찔옴찔댔다.

"흑, 으응, 응...... 아앙!"

내장이 짓눌릴 듯 버거운데 그만큼 쾌락 또한 선연했다. 그의 것이 내벽을 거칠게 문질러 줄 때마다 신경을 타고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레니에는 까무러치듯이 몸을 떨었다.

속이 더부룩할 정도로 거근이 들이찰 때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시트를 쥔 그녀의 손마디가 새하얗게 질렸다. 깊은 물 안을 헤집듯 첨벙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배 안쪽에서 휘몰아치는 요의에 미칠 것만 같아서 그녀는 골반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 반항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칸이 흐벅진 엉덩이를 찰싸닥 내리쳤다. 파드득거리면서도 참을 수 없는 희열에 그녀는 사지를 뒤틀었다.

"아흑, 그만, 그...... 흐읏!"

"제발 말과 행동을 좀 맞춰 봐. 그만 하라면서 내 걸 너무 맛있게 삼키잖아."

조롱조로 뇌까진 칸은 그녀를 옆으로 눕힌 채 골반을 크게 튕겼다. 성기를 빼배냈다가 쑥 집어넣으며, 그 박자에 맞춰서 커다란 손바닥이 레니에의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그때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엉덩잇살을 조이며 그의 성기를 쫀득하게 자극했다.

페니스가 마침내 자궁에 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치들어 온 순간, 그녀는 교성을 내지르며 전신을 빳빳하게 굳혔다. 그녀의 절정으로 내벽이 꽉 조여들며 마찬가지로 칸의 성기 또한 더욱 단단하게 팽창했다.

그 또한 사정이 임박했다는 걸 깨달은 레니에는 머릿속을 아우르는 불안감에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말렸다.

"안, 안에 안 돼, 하응, 응, 제발......"

하지만 듣는 척도 안 한 그는 끝내 묵직한 탁음을 내며 레니에의 안에 정액을 사출했다. 그녀가 아예 벗어나지 못하도록 아랫배를 바투 감싼 채 결합부를 꽉 맞물렸다.

"여기에 싸야지, 그럼 어디에 싸. 레니에."

들뜬 숨을 내쉬던 그가 그녀의 귓불을 쭉쭉 빨며 읊조렸다.

레니에의 얼굴이 좌절로 물드는 것을 낱낱이 응시하며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다른 새끼들은 싫다며. 그럼 이건 내 전용 구멍이잖아."

손을 내린 칸은 마찰열에 후끈 달아오른 질구를 예뻐해 주듯이 쓰다듬었다.

"윗입이 영 힘을 못 썼으니 아랫입이라도 나를 만족스럽게 해 줘야지 않겠어?"

머리칼을 쓱 쓸어 올린 칸은 그 말을 기점으로 다시 허리를 추켜올리기 시작했다.

걸쭉하게 액을 토해 낸 성기는 처음부터 줄어든 일이 없었다는 듯 크고 딱딱했다. 내벽을 가득 채운 정액에 불안을 느낄 겨를도 없이 레니에는 얼마 안 가 다시 자지러지며 교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러운 열락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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