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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새로운 계약 (5/19)

4장. 새로운 계약

어디선가 역겨운 혈성이 풍겼다.

극악무도한 전장 속에 놓인 것처럼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는 그런 피비린내였다. 더불어 물속을 헤집는 것처럼 손끝에 무언가 질척한 게 묻어났다. 그 감촉이 너무도 소름 끼쳐서 자꾸만 손을 휘젓게 되었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 또한 심했다.

그러다가 시야가 밝아졌을 때, 레니에는 참혹한 광경을 마주했다.

성기사들의 안내로 마구간에 갔을 때 보았던 장면이었다. 활짝 열린 짐마차. 죄다 목이 잘린 채 너덜거리는 시체들. 빗물처럼 사방으로 흩뿌려진 핏자국.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동물이 아니었다.

모두 레니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성도의 사람들, 신전에 속한 자들, 그녀를 보필하는 또 다른 가족들.

'허억......!'

누누이 널린 시체들 속에서 레니에는 문득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건 바로 자신이었다.

목이 댕강 잘려 피를 흩뿌린 채 생기가 스러져 가는 눈을 한 레니에 발루아. 잘린 목으로 모자라 모든 이목구비에서 검붉은 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그것들은 우두커니 선 레니에의 발치에서 고이기 시작해 조금씩 그녀를 타고 올라왔다. 징그러운 악취가 심해지며 점점 몸이 굳었다.

그 시커먼 늪에 머리끝까지 잠겼을 때, 레니에는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찝찝했다. 더불어 누군가에게 흠씬 두드려 맞기라도 한 것처럼 전신이 아릿아릿했다. 레니에는 간신히 눈만 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익숙한 구조의 실내는 바로 그녀가 사용하는 침실이었다.

"윽......"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자 전신을 아우르는 욱신거림이 심해졌다. 개중에서도 허리는 두 동강이 난 것처럼 몹시 지끈거렸다. 배를 한 손으로 감싼 채 레니에는 마른세수를 했다.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상태가 왜 이러지.

안개처럼 뿌연 기억을 헤집던 레니에는 머지않아 악몽보다 쓰디쓴 현실을 하나둘씩 기억해 냈다.

귀를 울리는 빗소리, 천둥소리, 그리고 사내의 정욕 어린 숨소리.

'하아...... 젠장 할. 앞으로 얼마나 박아야 이 구멍이 헐거워 질까.'

바닥에 엎드린 제 위로 몸을 딱 붙여 온 사내가 찔꺽거리는 추삽질을 강행하며 속삭이던 말.

'레니에. 페르노의 의미가 뭔지 알아?'

몇 번째인지 모를 사정액을 질 안에 흩뿌리며, 사내는 바닥에 무언가를 썼다. 페르노의 철자를 세계 공용어로 써 내린 그가 키득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인 페르노(in-ferno)'

'......'

'다른 말로, 마계!'

음험한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레니에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니야."

그녀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엄습하는 고통이 그 부정을 후려쳐 갈라지게 했다. 레니에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점점 호흡이 가팔라졌다.

"아니야.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신전에 입교하는 순간부터 그자의 육신은 영원히 신에게 속박된다. 오로지 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일평생 음욕과 본능을 멀리하며, 정절을 지키기 위해 순결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성직자는 순결을 목숨처럼 간직해야 한다. 신의 종으로서, 신만을 모시는 경건한 이로서. 그건 즉 순결이 훼손당하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뜻이었다.

그리고 교황인 그녀는 어젯밤, 순결을 잃었다.

움켜쥔 시트 위로 뜨거운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단 한순간의 행위로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그녀의 시야도, 이성도, 그리고 더 나아가 미래마저도.

순결을 잃은 성직자는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언제든지 성도에서 퇴출당할 수 있다.

아니, 사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신전에 입교하게 된 계기였던 성력 자체가 악마의 것이었다. 지금껏 교황이라는 명목으로 지켜 온 자리가 사실은 악마와의 계약으로 얻은 것이란 뜻이다.

레니에는 어젯밤, 성력을 다루지 못하던 순간을 절실히 기억하고 있다. 끔찍했고 그래서 더없이 두려웠던 순간이었다. 성력이 사라진 자신은 이곳에 머무를 자격이 없는 위선자였다.

무엇보다도 페르노의 왕, 아니. 그 악마.

저를 짓뭉개고 겁탈한 악마가 있는 이곳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참망한 어젯밤의 기억이 자꾸만 그녀를 안절부절못하게 하였다.

'도망가야 해!'

레니에는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디디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으나, 그녀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몇 개 없는 제 물건을 챙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얼마 안가 멈췄다.

'어디로?'

갈 곳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갈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교황직을 내려놓고 발루아 후작가로 돌아가게 되면. 그러면 아버지가 저를 받아 줄까? 아니, 이제는 후작가의 완전한 흠집이 되어 곧바로 내쳐질 것이다.

그 후에는 어떡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에브뢰 왕국에 있을 수 있을까? 다른 나라로 가야 하나? 아니면 다시 성도로? 하지만 그때쯤이면 그녀는 이미 악마의 힘을 이용해서 교황직에 오른 기만자가 되어 있을 텐데.

아니, 애초에 그 후가 있을까.

후작가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어 버렸다는 것만으로 아버지가 제 목숨을 끊을지 모른다. 탐욕에 눈이 먼 그는 기꺼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도움이 되지 않는 여식의 목숨 따위 없느니만 못한 것이라 치부할 분이니 이번에야말로 정말 저를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해서......

"세상에. 성하!"

레니에는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 떨었다. 트레이를 든 세실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왜 이러고 계세요. 괜찮으세요?"

세실은 넘어진 그녀를 일으켜 침대까지 부축해 주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가요? 의원을 부를까요?"

당장 사람을 부를 듯한 세실의 질문에 레니에는 심장이 덜컹 흔들렸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가로젓고는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 세실 내가 어제 어떻게 돌아온 거니?"

마지막 기억은 비가 쏟아지는 예배당에서 뚝 끊겼다. 그 후로 제가 침실까지 어떻게 돌아온 건지 당최 알 길이 없었다.

"기억 안 나세요? 어젯밤, 예배당에 괴한이 급습했다고 들었어요."

"괴한......"

"네. 성하께서 고해실을 나오던 중 습격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기억나지 않으시나 봐요. 다행히 페르노의 왕께서 성하를 발견하고 구해 주셨다고 해요. 성하를 이곳으로 데려다주신 것도 그분이시고요. 바깥에서 지키던 성기사님들도 무척 놀라셔서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니까요."

세실의 설명에서 '페르노의 왕'이라는 말만 잔상처럼 남아 레니에를 괴롭혔다.

페르노의 왕이 괴한의 습격으로부터 저를 구해 주다니. 그 악마가 남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그딴 허황한 거짓말을 한 듯했다.

습격을 당한 건 맞다. 하지만 범인은 괴한이 아니라 바로 그 페르노의 왕이었다. 그를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는 노릇인지라, 레니에는 떨리는 손을 이불 아래로 간신히 숨겼다.

"땀을 왜 이렇게 많이 흘리세요? 정말 의원을 부르지 않아도 괜찮으신가요?"

제 몸에 남은 상흔은 성폭행의 흔적이 전부일 것이다. 만약 의원에게 그를 들키게 되면...... 레니에는 아플 정도로 입술을 짓씹으며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어린 눈을 한 세실이 그녀의 이마에 난 땀을 정성스레 닦아 주던 차였다.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조르르 문가로 향한 세실은 곧 반가운 소식을 들은 양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하. 페르노의 왕께서 오셨습니다."

레니에의 전신이 경직됐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공포심이 그녀를 짓이겼다. 숨이 꽉 막혔다.

"어제 일로 염려가 되어 찾아왔다고 하시는데, 어쩔까요?"

의향을 물으면서도 세실은 그녀가 마다치 않으리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문을 활짝 열었다. 그녀야 간밤의 진실에 대해 알리가 없으니 그 행동을 탓할 수도 없었다. 세실에게 칸은 그저 간밤 곤욕을 치를 뻔한 교황을 구해 준 은인일 뿐일 터.

세실이 닦아 준 것이 무색해질 만큼, 레니에의 얼굴은 다시 땀범벅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만나고 싶지 않아.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할까. 이미 늦은 건 아닐까? 어떻게 해야...... 어떡해......

거부감이 치밀지만 차마 티 낼 수 없는 억겁의 고민 이어지는 동안 '그'가 침실에 멋대로 발을 디밀었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세실은 제가 방해가 될 거라고 여겼는지 트레이를 챙겨 얼른 침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졸지에 침실에는 그와 그녀만 남겨졌다.

레니에는 침대 구석으로 더듬더듬 물러나며 칸을 노려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에 두려움이 물씬 배어 있었다.

한결 흐트러짐 없이 차려입은 칸의 이마에는 쓰라린 상흔이 그려져 있었다. 그 흉터는 머리칼에 살짝 가려졌으나 레니에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그게 어젯밤을 되뇌게 하는 장치가 되어 온몸을 쑤시는 고통이 한결 심해졌다. 특히나, 허벅지 사이의 내밀한 곳이.

그가 뚜벅, 한 걸음 다가왔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웅얼거리듯 뇌까린 레니에는 서둘러 성력을 사용하는 데 집중했다. 역시나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니 그간 자유자재로 운용했던 성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스로 무력한 인간이 된듯한 기분은 비참했다. 어릴 적부터 '쓸모 있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세뇌에 걸린 것처럼 했기 때문에 그녀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공포심이 더 극심했다. 간밤 악마가 저지른 악행이 되풀이될 것만 같아 레니에의 턱이 달달 떨렸다.

그녀의 만류를 가벼이 무시하고 칸은 침대까지 다가왔다. 이제 물러날 구석도 없어진 레니에는 시트를 움켜쥔 채 그를 쏘아 보았다. 마주한 핏빛 눈동자가 심기를 마구 헤집어 놓았다.

칸은 맹수를 앞에 둔 소동물처럼 발발거리며 구석에 콕 박힌 그녀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경계할 것까지야."

"당신이라면, 안 그러겠어?"

레니에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반문하며 기회를 엿봤다. 이자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사소한 틈 정도의 기회.

설령 여기서 벗어나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고 해도, 그 무지 때문에 계속 꼼짝하지 않는 것 또한 아둔한 짓이었다.

그는 이미 한 번 저를 겁탈한 자였다. 그러니 이제 거리낄 건 없을 터.

"또 도망칠 궁리를 하네."

적을 궁지로 몰아넣기 직전의 짐승처럼, 칸은 여유롭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틈을 타 레니에는 잽싸게 침대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사지를 찌르는 고통이 선연해 원활하게 움직일 수 없었고, 그래서 속도가 더뎌 침상에서 내려오기 직전 발목이 콱 붙잡혔다.

몸이 기울며,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는 이미 그가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흐릿한 예배당에서의 악몽이 상기돼 레니에는 다급히 몸부림쳤다.

"이거 놔! 싫어, 싫다고! 놓으, 읍!"

"쉿."

칸은 눈물이 잔뜩 고인 레니에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더니 달래듯이 허리춤을 살살 어루만졌다. 하지만 전혀 달갑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그 노긋한 손길이 역겨워 죽을 것만 같았다.

입이 막힌 레니에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남들이 다 올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칸이 눈꼬리를 접으며 묻는 말에 레니에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만약 누군가 이 장면을 보게 된다면. 교황인 자신이 침대 위에서 타국의 왕에게 깔린 이 모습을...... 레니에는 눈물을 머금은 채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고분고분한 태도가 맘에 든다는 듯 칸이 물기 어린 뺨을 쓰다듬었다. 거부감이 들어 그녀는 턱을 비틀었다. 그의 손이 불시에 가랑이 사이로 쏙 파고들었다. 레니에의 전신이 고철 덩어리처럼 경직됐다.

"이런 박대는 너무한걸. 내게 따먹혔다는 게 들키면 안 될 것 같아서 정액도 손수 긁어서 빼 줬더니. 안 그랬으면 네 시녀가 이미 알아챘을 텐데 말이지."

그는 기억하라는 것처럼 속옷에 가려진 음부를 톡톡 두드렸다. 레니에는 가랑이를 파고든 두툼한 팔뚝을 간신히 밀어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사나운 눈초리를 뻔뻔하게 마주하며 칸은 기분 좋게 웃었다.

"어제 거칠게 군 건 미안해. 네가 날 알아보지 못하니 조금 심술이 났거든."

"......"

"그보다 우리, 할 이야기가 많잖아. 안 그래?"

칸의 손이 천천히 레니에의 턱을 그러쥐었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아챘으니 우리의 거래도 기억이 나겠지?"

"나는, 난 당신의 거래에 응한 적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네가 지금껏 사용해 온힘이 전부 내 것인데."

침을 꿀꺽 삼킨 레니에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거래는 애초부터 틀어졌어.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원하는 걸 이루어 주지 않았으니까. 어머니를 살려 주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돌아가셨......"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레니에."

잠자코 듣던 칸이 말을 툭 끊었다. 그는 어제 잔뜩 짓씹어 부르튼 레니에의 아랫입술을 느른하게 쓰다듬었다.

"악마가 주는 건 기회지, 결과가 아니야."

"......"

"내 힘을 줬으니 그걸 이용하는 건 너의 몫이라고, 결과적으로 너는 어릴 적의 그곳에 남아 어미를 살리는 쪽이 아닌, 아비에게서 벗어나는 쪽을 택했잖아? 그래서 여기로 온 거고."

칸을 올려다보는 레니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반대로 그를 들여다보는 사내의 입꼬리는 점점 휘어졌다.

"넌 네가 살자고 병든 어미를 외면한 거야."

"아니야. 나는......!"

"계속 곁에 있었다면, 네 어미는 지금까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

"너 살자고 친모를 버린 거잖아. 안 그래?"

대수롭지 않은 말투가 비수처럼 박혀 가슴을 난도질했다. 반박하고 싶은데 목구멍이 조여들어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어쩌면 사내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서.

10년간 무사히 보전해 온 사내의 힘이었다면, 그걸 이용해서 어머니의 곁을 지켰더라면 어머니는 여태껏 명맥을 유지했을지도 몰라서. 하지만 당시의 레니에에게는 아버지의 수마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중요해서......

그녀를 교황직에 올린 것은 발루아 후작의 힘이 컸으나 그에 레니에의 뜻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수마 아래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했으니까.

"나는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었어. 힘을 빌려주어 죽기 직전의 어미를 살려 주었고, 네가 지옥이라 여기던 곳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지."

칸이 상체를 수그렸다.

"그러니 우리의 계약은 유효해."

숨결이 낱낱이 느껴질 정도로 입술 사이가 밀접해졌다.

"물론, 네가 내 것이 되어야 한다는 대가 또한."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적안이 반질거렸다. 그 안으로 일렁이는 것은 분명한 욕정이었다. 고작 눈빛만으로도 목이 졸렸다.

레니에는 질식할 것 같은 심정으로 간헐적인 숨을 토해 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네. 레니에, 내가 무서워?"

"......또, 어제 같은 짓을 벌일 셈인가?"

의연한 척 묻고 싶었으나 꼴사납게 목소리가 떨렸다. 이 남자, 아니, 이 악마에게 또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할지 모르기에.

제 아래에 갇혀 발발 떠는 레니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새로운 계약을 맺었으면 하는데."

나지막한 음성은 십여 년 전 예배당에서 들었던 그것처럼 달큰했다. 레니에는 제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에 흠칫했다.

"무슨......"

"내가 바라는 건 너에게서 내 힘을 되찾는 거야. 과거의 계약으로 현재 내 힘이 전부 너에게 가 있는 상태거든. 네가 힘을 못쓰게 조절할 수는 있지만, 그걸 내게로 반환시킬 수는 없어."

그 말을 들은 레니에는 페르노의 왕이 꼭 성도로 오기를 고집했다던 대주교의 보고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이를 위하여 저를 찾아온 걸까.

"힘을 되찾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개중 제일 간단한 건 바로 몸을 섞는 거야. 어제 그랬던 것처럼."

"......"

"내 힘을 되찾게 되면, 너도 이후 성력을 계속 쓸 수 있도록 해 주지. 이게 바로 새로운 계약의 조건이다."

칸은 과거의 그날처럼 선택권을 주었다. 하나 그게, 이후 일어날 모든 책임을 인간에게 떠넘기려는 악마의 교묘한 속셈임을 모르지 않았다.

"......내가 그 계약에 응하지 않겠, 다면?"

"계약에 응하는 건 순전히 네 맘이겠지만, 뒷일을 책임질 자신은 있는 거겠지?"

"뒷일?"

"성력을 쓰지 못하는 교황이라. 그것참 볼만하겠군."

칸은 그녀가 심히 우려하던 일을 일컫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성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교황이란 '볼만하다'로 치부될 정도로 우스운 꼴이 될 게 뻔했다.

이게 모두 악마의 속셈임을 알지만 적어도 지금, 그녀는 그 속셈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었다. 그를 깨달은 레니에의 눈동자에는 아득한 절망만 가득했다.

"내가 가진 패가 그것뿐만은 아니지. 에브뢰의 교황이 경망하게 굴어 친교를 어그러뜨렸다 "

"......"

"......라고, 왕도에 전하면 어떻게 될까?"

하나하나 떠먹여 주듯 묻는 어투는 다정했으나 실상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레니에가 제 뜻에 따르지 않겠다면 이번 친교를 기꺼이 엉망으로 만들겠다는 저열한 협박.

그로 인하여 생길 왕도와의 언쟁은 둘째치고, 레니에는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두려웠다. 제가 사절단 하나 제대로 맞이하지 못해 국가적 문제를 야기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녀에게 있어 폭군이나 다름없는 아버지는 가까이 있으나 멀리 있으나 공포심을 일으키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어렸을 적부터 받아 온 냉대와 학대가 그 두려움을 깊이 새겨 놓았다.

그럴듯한 자리에 올랐으나 그녀에게 아버지는 여전히 집채만한 산이었다. 모진 고난과 역경을 아무리 견뎌도 넘을 수 없는 산 말이다.

앞에는 악마, 뒤에는 악마 같은 아버지가 있다. 그 사이에 갇힌 레니에는 앞으로 나아가나 뒤로 물러나나 파멸에 빠질 뿐이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손을 쳐 냈다. 하지만 덜덜 떨리고 있어서 쳐내는 게 아닌 고작 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내가 응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힘을 찾을 수 없는 거잖아."

"힘을 되찾는 방법이 섹스뿐이라고 한적 없는데."

허공으로 밀려났던 그의 손이 다시 다가왔다. 기름한 검지가 그녀의 목덜미에 닿더니 곧 칸은 사슴처럼 곧고 가는 목덜미를 꽉 움켜쥐었다.

"널 죽여도."

"......흑."

기도가 막히는 탓에 레니에는 억눌린 신음을 토해 냈다.

칸은 정말로 그녀의 숨을 끊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레니에가 손톱으로 그의 팔뚝을 박박 긁었으나 소용없었다. 목이 졸리는 바람에 점점 호흡이 딸리며 정신이 흐트러졌다. 그녀의 눈자위가 아슬아슬하게 뒤집어지려는 찰나, 칸이 힘을 풀었다.

"헉......!"

불시에 들이차는 공기로 레니에는 거센 기침을 토했다.

"힘은 되찾을 수 있어."

죽이려고 했어. 이 악마, 방금 나를, 진짜로.

그녀는 공황 상태에 젖어 거칠게 헐떡거렸다.

"하지만 그러긴 싫으니, 기회를 주는 거야."

십여 년 전 저를 달랠 때와 다를 바가 없는 목소리였다. 우스운건 레니에의 처지가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그가 준 악마의 힘을 가지고서도 그녀는 홀로 이뤄 낸 것이 없었다. 간신히 꿰찬 교황직은 악마의 힘이 없다면 버틸 수 없는 자리였고, 유일한 구원 줄인 아버지는 여전히 그녀를 도구로만 보고 있으니.

깊은 바닷속에 풍덩 빠진 것처럼 가슴이 갑갑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레니에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어렸을 적부터 학대를 받아온 레니에는 이제 물리적인 폭력에서 벗어났을지언정 늘 습관처럼 숨쉴 틈을 하나는 마련해 놓고는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저 자신이 있을 곳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교황에 오른 뒤로, 제 주제에 과분한 자리라 여기면서도 마땅한 성력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다고 합리화를 했다. 그게 그녀의 숨구멍이었다. 제 몫의 값을 한다 여김으로써 자신을 보호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악마의 알량한 수마였을 뿐이었다. 자리에 대한 정당성마저 잃은 지금, 숨쉴 틈을 만들 수 있는 건 사내의 제안에 따르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완벽한 포식자였고 레니에는 그가 친 거미줄에 붙잡힌 나비와도 같았다. 몸에 묶인 모든 것을 끊고서야 도망칠 수 있는, 아니, 어쩌면 그걸 끊고서도 벗어날 수 없는 과거로 돌아가면 절대로 응하지 않을 것이다. 목소리를 따라 장막을 걷어 보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배당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저 '쓸모없는 것'으로 그렇게 죽은 듯이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 하등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악마를 코앞에 둔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니까.

이 계약에 응하면, 적어도 교황처럼은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지금까지 배워 온 것은 누군가의 아내가 되는 법과 교황의 자리에 오르는 법뿐이었다.

'레니에'로 살아가는 법 따위 배운 적이 없다.

교황이 아니라면, 한낱 귀족 영애일 뿐인 레니에 발루아. 그런 그녀가 가문에서마저도 외면당하여 '레니에'가 된다면, 분명 길바닥을 전전하다가 비참하게 죽으리라. 그녀에게 홀로 살아갈 힘 같은 건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침잠하는 걸 주시하는 칸의 낯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입가에 달린 미소가 산 증거였다. 차마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그녀의 심정을 실로 잘 아는 것일 터.

"기한은 페르노 사절단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정도면 되려나."

"......"

"그 기간이면 힘을 되찾기에 충분하겠지. 아, 물론 시도 때도 없이 네 구멍에 박는다는 조건으로 말이지."

레니에는 결코 자신의 행복한 미래를 그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걸 그리기에는 그녀의 인생이 평탄치 못했으니까.

어릴 적의 기억은 학대뿐이며 크고 나서의 삶은 위태로울 뿐이었다. 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처지인지라, 다복한 미래를 꿈꿀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은연중에 기대를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칸이 뇌까리는 것을 듣는 순간 가슴 속에서 무언가 쩌적, 하고 금이 가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평화로운 미래. 안온한 훗날.

아무래도 그건, 레니에에게 평생 다가오지 않을 꿈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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