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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수상한 손님 (2) (4/19)
  • 3장. 수상한 손님 (2)

    하루가 지나면 그치리라는 예상과 달리 다음 날도 비가 쏟아졌다.

    이토록 억수같이 내리는 건 간만인지라 레니에는 눈을 뜨자마자 바깥의 경치를 관조했다. 모든 세상이 물로 씻겨 내려가는 풍경은 제법 시원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아침마다 으레 그러하듯 성서를 읽고 기도를 올린 레니에는 성복을 갖춰 입고 침실을 나섰다. 저를 찾아온 제2 대주교와 대화를 나누던 중, 회중시계를 확인한 레니에가 넌지시 물었다.

    "페르노 왕의 식사는 잘 대접했나요?"

    "저, 그것이......"

    대주교, 호센은 걸리는 게 있는지 선뜻 답하지 못했다.

    "식사를 전달하였으나 하나도 들지 않은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네? 왜죠?"

    "저 또한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어제 식사는 어떻게 했나요?"

    "어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 그분은...... 성도에 도착한 이후로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건가요?"

    레니에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호센 또한 어쩔 줄 몰랐다.

    "그런 듯합니다."

    미적지근한 대답에 레니에는 눈을 도르르 굴렸다. 일순 어젯밤 칸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인간들은, 동물을 먹지 않습니까?'

    그때는 잔뜩 들이마신 피비린내로 머리가 어질거려서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못했는데. 되새겨 보니 참으로 오묘한 질문이었다. 꼭, 칸을 포함한 페르노는 동물을 식용육으로 삼는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레니에는 또다시 쓸데없는 생각으로 빠진 자신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교황 성하."

    그때 맞은편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칸이 눈앞에 있었다.

    "조, 좋은 아침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던 차에 등장한 그를 보고 놀란 레니에가 허둥지둥 인사를 건넸다. 왠지 모르게 은밀했던 어젯밤과 달리 깔끔히 차려입은 칸은 그림처럼 근사하게 웃었다.

    "성하께서 오늘은 또 어떤 곳을 안내해 주실지 무척 기대되는군요."

    비가 오기에 신전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오늘도 성도를 구경할 생각인가 보다. 하긴, 어제 하루 돌아보기에는 턱없이 시간이 부족하기는 했다.

    귀한 손님이 원하니 마다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짧은 준비를 마치고, 그와 함께 마차에 올라탄 레니에는 뒤늦게야 대주교의 보고가 떠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맞은편의 사내를 살펴보았다. 끼니를 걸렀다기에는 퍽 쌩쌩한 낯이지만, 속사정은 또 다를지 몰라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전하. 어제도, 오늘도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창밖을 향하던 칸의 시선이 돌아왔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서 그의 눈동자만이 뚜렷하게 빛났다.

    "혹, 식사가 불만족스러우신가요? 편히 얘기해 주시면 다른.음식들로 준비하라 명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왜......"

    "저는 평범한 식사로 배를 채우지 않습니다."

    "네? 그럼 무얼 드시나요?"

    칸은 대답 없이 깍지낀 손을 꼬아 앉은 다리 위에 얹었다. 또 빤한 시선이 이어졌다. 어제 본 바로, 저렇게 사람을 지그시 응시하는 건 습관인 듯한데 동공의 색이 워낙 섬짓하여 좀처럼 편안해지지가 않았다.

    "제가 원하는 게 있다면, 성하께서 주실 겁니까?"

    대체 무얼 요구하고 싶어서 이리 까다롭게 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혹시 국가적 차원에서의 이유일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페르노 국교만의 방침일 수도 있지 않은가. 어느 나라에서는 국교를 이유로 식용육을 입에 대지도 않는다고 하니.

    레니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선에서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요."

    칸은 그 말을 의심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사내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자 긴 그림자가 바닥을 가로질러 레니에의 목과 어깨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 흔적은 마치 단숨에 명줄을 끊을 듯한 올가미처럼 보였다.

    이후로 그는 별말이 없었다.

    모호한 태도에 레니에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물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왠지 저로서는 감당치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분고분 굴어 주기에는 그가 이제껏 보인 돌발 행동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종잡을 수 없는 사내인지라 제가 나서서 일을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필요해지면 어련히 먼저 말하지 않을까. 그런 심정으로 레니에는 눈을 돌렸다.

    오늘은 어제만큼 일정이 원활하지 못했다. 이동 중 비가 심상치 않게 내리기 시작해서였다. 폭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쏟아져 시야가 터무니없이 좁아지는 바람에 연거푸 발목이 묶였다.

    하는 수 없이 얼마 돌아보지도 못하고 신전으로 귀착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성도는 원래 비가 잘 오지 않는 편인데......"

    마차 창밖을 내다보며 레니에가 중얼거렸다.

    "성하, 들어 본 적 있습니까?"

    그녀를 따라 축축하게 젖어드는 배경을 멀거니 응시하던 칸이 문득 말했다.

    "비는 주신이 내리는 일종의 경고라는 말"

    "경고요?"

    "폭풍이 치기 전 호우가 쏟아지듯이, 나쁜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피하라고 일깨워 주는 계시랄까요."

    비는 주신이 보내는 경고다.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다. 계명에서도, 성서에서도. 그 어떤 신학문에서도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금욕적인 얼굴로 저리 차분하게 읊조리는 사내를 보니, 아주 그럴싸하게 들렸다. 만약 억수같이 내리는 이 폭우가 그의 말마따나 신의 경고라면, 대체 무얼 조심하라는 뜻일까.

    "신은 이 땅을 무척이나 사랑하시나 봅니다. 이렇게 보우하시는 걸 보면."

    레니에는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데 칸은 벌써 그 일을 짐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잘게 웃었다.

    그때였다.

    번쩍, 하고 시야가 명멸할 정도로 강렬한 빛줄기가 마차 속으로 들이찼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잇따라 우르르 쾅쾅, 하고 내리친 천둥과 번개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아, 이런."

    "......"

    "피하기에는 이미 늦은 듯하네요."

    칸의 눈동자에는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사나운 날씨를 좋아하나. 그보다 늦었다는 건 무슨 소리지. 레니에는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대화를 곰곰이 되짚다가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마차 안이 추웠다. 분명 날씨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조금이라도 빨리 신전에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저녁 일정은 자유 시간을 갖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폭우 때문에 무언가 활동적인 것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당일 예정되어 있던 저녁 예배는 취소되었으나 레니에는 혹시 몰라 찾아올 신도를 위해 고해실로 향했다.

    고해실이란 신도가 자신의 죄를 허심탄회하게 고백하는 방이었다. 오로지 기도만으로는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성직자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성력을 다스리는 성직자들은 신과 가까운 존재처럼 여겨지니.

    보통은 대주교가 돌아가면서 고해실을 지키는 편이지만 오늘은 예배를 취소한 만큼 레니에가 직접 신도를 맞이할 생각이었다. 아마 아무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이 악조건을 뚫고서라도 찾아올 만큼 간절한 사람이 있을지 누가 아는가.

    예배당에 딸린 자그 마한 방안에서 레니에는 조용히 성서를 읽었다. 예상대로 고해실로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해실은 성직자가 머무는 '경청의 방'과 신도가 죄를 고백하는 '고백의 방'으로 나뉜다. 그 사이를 연결 짓는 것은 겨우 한뼘만 한 창이 전부였다. 다만 신도의 익명 보장을 위해 창은 언제나 맞은편을 엿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를 함부로 걷는 것은 금기시되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주체가 교황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누군가 고백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레니에는 읽고 있던 성서를 덮으며 보이지 않는 커튼 너머를 응시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레니에는 넌지시 운을 띄웠다.

    "신도님. 이곳은 비밀스러운 공간이니 어떤 것이든 편히 얘기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톡톡,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어떠한 죄를 지으셨습니까?"

    가끔 이렇게 고해실로 들어와서도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는 신도들이 몇몇 있었다. 이럴 때는 경청의 방을 지키는 자가 마땅히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아직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커튼을 타고 흘러나오는 음성은 깊고 아득했다.

    묘하게 익숙한 음성은, 지금 신전에서 머무는 칸의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거칠고 낮았다. 그래서 조금 긴가민가했다.

    익명이 보장되어야 하는 장소이기에 레니에는 상대방에 관하여 캐내려고 하지 않았다. 설령 이자가 페르노의 왕이라고 할지라도 레니에는 그를 모르는 척해야 했다. 그것이 고해실 안에서의 규약이니.

    그보다도 그가 불쑥 꺼낸 말이 신경 쓰였다. '아직' 죄를 짓지 않았다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직이라니."

    "모르겠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커튼 맞은편에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튼 채 도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살갖을 타고 어릿어릿한 긴장감이 흘러 레니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얼 일컫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죄가 된다면, 참으셔야 합니다."

    "그렇습니까?"

    "네. 주신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잘만 흘러나오던 대답이 뚝 끊겼다. 이어 다시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폭약이 터지기 직전의 박자처럼, 레니에의 가슴을 바짝 조이게 만들었다.

    "주신이 기뻐하지 않는다라......"

    죄를 고백하러 왔다기에는 몹시 단조로운 어조였다.

    오래지 않아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맞은편의 인영이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커튼 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분명 커튼으로 시야가 가려졌는데도 오롯이 시선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곧 인영은 고해실 바깥으로 사라졌다. 고해의 마지막은 기도로 끝나는 것이 응당 맞지만, 너무도 강렬한 존재감에 레니에는 차마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묘하디 묘한 신도 하나만을 받고 고해 시간은 끝이 났다.

    늦어진 시각, 레니에는 고해실을 정리하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사람 하나 없는 예배당에는 세찬 빗소리만이 가득 차 있었다. 이따금 귀를 스치는 소리 때문인지 꼭 바닷속을 헤엄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분주히 걸음을 옮겨 예배당을 드문드문 밝히는 촛불을 껐다. 원래라면 수습 사제가 할 일이지만 예배가 취소된 탓에 그들마저도 숙소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 굳이 그들을 부를 것도 없었다.

    후, 하고 마지막 촛불을 껐다.

    사방이 암흑으로 젖어들며 새까맣게 탄 심지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도중이었다.

    문득,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를 알아채고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어깨가 붙잡히며 몸이 돌아갔다. 깜짝 놀란 레니에는 방패처럼 껴안고 있던 성서를 떨어뜨렸다. 강한 악력이 그녀를 땅으로 밀어 눕히는 바람에 그를 주울 정신도 없었다.

    "꺅!"

    강단 계단에 드러눕듯 주저앉은 레니에는 제 위로 날래게 올라타는 검은 인영에 사색이 되었다. 심장이 철렁 내리 앉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발버둥을 치며 고개를 든 레니에는 어느 정도 눈이 익자 저를 깔아뭉갠 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당신은."

    페르노의 왕.

    칸.

    그가 한쪽 입꼬리를 야릇하게 비튼 채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짓인가요. 이게. 왕이시여, 이런 장난은......"

    "해 주신 말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성하."

    칸은 바닥을 짚은 레니에의 두 팔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를 심산인지 몰라도, 그것이 결코 이로울 리 없다는 것을 레니에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신은, 죄가 되는 행위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역시나 조금 전 고해실을 찾은 이는 그가 맞았다. 레니에는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가쁜 호흡으로 억눌렀다.

    암흑 속에서 시뻘건 동공이 희뜩거렸다.

    "그러니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

    "왜냐하면, 난 네가 믿는 신이 끔찍이도 싫기에."

    사내의 입가에 어렴풋이 밴 비소가 가슴을 요동치게 하였다. 칸이 상체를 숙여 키스할 것처럼 얼굴을 바짝 맞대었다. 그가 느른하게 혀를 내어 입술을 축였다. 꼭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보였다.

    "너의 신과 달리 나는 죄를 사랑해서."

    당최 알 수가 없는 말이었다. 좁쌀 같던 불안은 한계치를 뚫고 높아져만 갔다.

    "지금 무슨, 말씀을......"

    떨리는 음성으로 묻던 레니에는 얇은 성복을 헤쳐 허벅지를 움켜쥐는 손길에 혁헉, 하고 억눌린 소리를 냈다.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정말로 날 못 알아보네. 서운하게."

    험궂게 파고든 손이 속옷 위에 닿았다. 여린 안쪽 살을 천 위로 문지르는 감촉이 간지럽다. 여차하면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 듯 거침없는 손길에 레니에는 거세게 몸을 비틀었다.

    "귀찮게 하지 마."

    그 격렬한 저항이 거슬렸는지 칸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계약을 했으면 얌전히 응해야지."

    터무니없는 무력에 차마 성력을 쓸 생각도 못 하고 발버둥을 쳤다.

    아무렇게나 손을 휘적거리던 레니에는 그만 강단에 놓인 길쭉한 협탁을 쳤다. 그 위에서 위태로이 흔들리던 촛대가 추락했고, 그것이 손에 닿자마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퍽! 과격한 타격음과 함께 저를 짓누르던 육중한 체구가 주춤했다. 그가 방심한 틈을 타 레니에는 서둘러 가슴팍을 밀치고 몸을 일으켜 달아났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계단을 벗어나기 무섭게 발목을 휘감아 당기는 힘이 아니었다면.

    "아윽!"

    몸이 쿵, 하고 넘어지며 여인의 비명이 자우룩한 예배당을 울렸다. 쓰러진 레니에의 금발이 바닥으로 늘어지고, 그 위로 걸쭉한 핏물이 툭 떨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더듬더듬 위를 향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예배당 천장이 아닌, 굶주린 금수 같은 사내의 얼굴이었다. 레니에의 진녹빛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재밌네."

    쾅! 굉음과 함께 번개가 내리쳐 예배당 실내가 눈이 멀 정도로 환해졌다.

    명멸 사이로 사내의 건장한 실루엣이 망막에 쑤셔 박히듯이 새겨졌다. 머리칼을 쓸어 넘긴 칸의 이마에 긴 상처가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레니에가 휘두른 촛대에 맞아 생긴 상처리라.

    하필 날카로운 부분에 긁혔는지 벌어진 살갖 사이로 피가 흘렀다. 그 피를 보자 도륙당했던 마차 속의 동물들이 불쑥 떠올랐다.

    "나도 피 보는 거 좋아해. 레니에."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발 이것 좀......!"

    "왜 이러냐니."

    칸이 큼지막한 손으로 레니에의 턱을 그러쥐었다. 힘이 얼마나 센지 뼈가 부러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목전까지 바짝 다가온 칸의 적색 동공이 신랄하게 번뜩였다.

    "내 것이 되기로 약속했잖아."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한다는 게 이리도 두려운 일인지 몰랐다. 칸의 눈은 명료하던 평소와 달리 반쯤 초점이 나가 있었다. 정말, 사고 회로의 어딘가가 고장 나 버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다.

    레니에는 이 눈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 이런 눈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그래. 악마에게 영혼을 먹힌 자.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이지마저도 잃어버린 자들이 저런 위험천만한 눈을 하고 있었다.

    레니에는 예배당 바깥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성기사들을 떠올리고 다급히 외쳤다.

    "도와주세요! 밖에, 누구라도, 제...... 읍!"

    벌어진 입술 틈으로 사내의 혀가 우악스럽게 파고들었다. 그는 레니에가 벗어나지 못하게 턱을 단단히 움켜쥐고 말랑한 입술을 아무렇게나 쭉쭉 빨아 댔다.

    지금, 입을 맞춘 거야. 이 남자......?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진득한 행위에 굳어 있던 레니에는 곧 정신을 차리고 그를 거부했다. 어깨에 손톱을 세우고 가슴팍을 거칠게 밀었으나 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끼 고양이의 앙탈쯤으로 여기듯 픽 웃으며 더더욱 깊숙이 혀를 밀어 넣을 뿐이다.

    포식자 같은 침범에 레니에는 숨이 막혔다.

    "으응, 흣...... 우읍......!"

    아무렇게나 꿈틀대던 레니에의 혀가 그의 혀와 스쳤다. 칸은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틈 없이 혀를 옭아매 혀뿌리까지 뽑을 기세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입술 사이로 타액이 새며 젖은 소리가 흘러넘쳤다.

    입 안에 고여 있던 숨결을 온통 사내에게 빼앗겼다. 호흡이 딸려 레니에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거렸다. 날렵한 칸의 콧대가 레니에의 뺨에 아무렇게나 비벼졌다. 옅은 피비린내가 났다. 그의 이마에서 흐른 피로 인해 그녀의 뺨 또한 붉게 젖어 갔다.

    "시, 싫어!"

    겨우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그녀는 몸부림을 쳤다. 칸은 손쉽게 우위를 점령한 후, 레니에의 양 손목을 바닥으로 고정했다.

    남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어둡게 빛나는 칸의 눈동자는 늪처럼 질척했다.

    "오랜만이야, 레니에"

    거친 행위와 몹시도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인사였다. 레니에는 아까부터 저를 아는 것처럼 구는 그를 아연히 응시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아까부터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내는 자꾸만......

    "그간 내 힘으로 잘 살았나 보네."

    "내, 히, 힘이라니......"

    "기억 안 나나? 우리의 계약."

    그는 레니에의 양손을 머리 위로 결박하고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성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레니에가 거부감에 몸을 비틀었으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로 취하는 저항은 하나 마나였다.

    "내 덕분에 교황 노릇을 하고 있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경악으로 굳어진 레니에의 뇌리로 찰나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발루아 후작가. 낡은 예배당. 저를 따스하게 위로하던 목소리. 빛바랜 초상화. 새빨간 동공.

    레니에가 성도로 온 내내 가장 신경 쓰던 과거의 파편.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를 보고 드디어 떠올린 걸 알아챈 듯 칸이 킬킬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꼭 질 낮은 우롱 같아서 레니에는 어깨를 둥글게 말았다.

    싱겁게 풀린 앞섶으로 그의 손이 막무가내로 파고들었다. 슈미즈 위로 젖가슴을 움켜쥐는 손길에 레니에는 불에 덴 듯 펄쩍 뛰었다. 칸은 이 상황이 재밌는지 연신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 태도가 레니에의 두려움을 한껏 부추겼다.

    우리의 계약.

    혼란한 와중에도 그 말만이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그럼 정말, 그녀가 내내 품고 있던 선득한 의심이 사실이었다는 말인가.

    그때 예배당에서 마주한 건 자비로운 신이 아니라......

    "당신, 설마......"

    그녀가 무얼 짐작했는지 깨달은 칸은 야릇하게 눈꼬리를 접었다. 그게 꼭 제 짐작을 시인하는 것만 같았다.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무서웠다. 일단 이 예배당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성기사를 부른 뒤 조금이라도 빨리 대주교들을 소집해서......

    레니에는 젖가슴을 아무렇게나 주무르는 그의 손을 쳐내며 잽싸게 몸을 비틀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달아나기 위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가는데, 당연히 칸이 곱게 보내 줄 리가 없었다.

    그는 초식동물을 궁지까지 밀어 넣봉는 야수처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가 불시에 몸을 억눌러왔다. 체구 차이가 월등하여 꼭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힘겨웠다.

    "왜 자꾸 도망을 가, 레니에."

    "놔. 이, 이거 놔......!"

    "계속 이러면 예쁜 발목을 망가뜨려 버릴지도 몰라."

    사내의 낮은 뇌까림에 레니에의 움직임이 뺏뻣해졌다. 경고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는 것처럼 칸이 복사뼈 부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겁을 한 움큼 집어먹은 레니에는 상체를 웅크리며 헐떡거렸다.

    "어색해서 그래? 그때처럼 해 줄까?"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나와 거래를 하자."

    고막을 파고드는 음성은 틀림없이 어렸을 적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칸의 새빨간 혀가 레니에의 귓바퀴를 할짝거렸다. 솜털이 쭈뼛 설정도로 소름 끼치는 감각이었다.

    상의 안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크림처럼 말랑한 유방을 주물러 대다가 가운데 자리한 유두를 따갑게 긁었다.

    "흣!"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니?"

    그저 부드럽기만 하던 과거와 달리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몹시도 음험했다. 그가 레니에의 귓구멍 속으로 혀를 쑤셔 넣어 괴롭혔다.

    "싫어, 하지 마......!"

    "이 상태로 박아 줄까? 뒤로 하는 거 좋아해? 아, 교황이니 이런 쪽으로는 경험이 전혀 없으려나."

    엎드린 레니에를 깔아뭉갠 그가 저속하게 뇌까렸다. 감당치 못할 힘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을 떠올리게 했다.

    "왜, 왜 신인 척을 한 거야. 왜......"

    "몰라서 물어? 그 편이 너 같은 인간을 홀리기 쉬우니까."

    키득거리며 지껄이는 음성은 그가 악마임을 일깨워 주는 방증이었다.

    악마라면, 정말로 이자가 악마라면 성력에 반응할지도 모른다. 상대가 페르노의 왕인지라 조심스러워야 할 필요성 따위는 이미 내던진 지 오래였다. 그를 밀쳐 내지 않으면 제 목숨이 위험해지게 생겼으니 당연했다.

    레니에는 힘 빠진 몸을 추스르려고 노력하며 저를 억압한 그를 향해 성력을 쓰려고 했다.

    "......!"

    하지만 실패했다. 그보다도 이상했다. 언제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도는 신성한 힘이 지금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강탈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성력 쓰려고 했지?"

    무언가 숨이 막할힐 정도로 목덜미를 강하게 옥죄어 왔다. 칸의 손아귀였다.

    "쓸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건 내 힘이니까."

    기꺼이 부정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로 성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애초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그런 힘을 가지지 못한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제야 이 남자를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한다는 사실이 우레처럼 와 닿았다.

    벗어나기 위해 하복부를 비틀던 레니에는 엉덩이를 쿡 찌르는 단단한 것에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엄지와 검지로 그녀의 젖꼭지를 희롱하던 칸은 그녀의 엉덩이에 맞닿은 아랫도리를 느릿하게 비볐다.

    "아까도, 당장 들어가 덮치고 싶은 걸 참느라 죽을 뻔했어."

    그건 누가 보아도 흥분한 수컷의 애끓은 몸짓이었다.

    "자지가, 제기랄, 아플 정도로 서서."

    "흑, 핫, 싫......!"

    "네 구멍에 당장 처박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고. 응?"

    '응?' 하고 물으며 젖꼭지를 아플 정도로 잡아당기는 바람에 레니에의 입술을 타고 뭉텅이진 신음이 흘렀다. 칸은 유륜을 덧그리다가 민감해진 유두를 까득까득 긁어 대며 성난 바지춤을 그녀의 엉덩이 골에 문질렀다.

    그의 아래에 피식자처럼 깔린 레니에가 할 수 있는 건 파르르 떠는 게 전부였다.

    이상하게 아까부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힘을 쓰기는커녕 사내의 집착 어린 손길 아래에서 물먹은 솜처럼 몸이 축축 늘어져 갔다. 흐릿해지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 힘에 부쳤다.

    "흣, 으응, 흐."

    칸은 그녀의 반항이 미약해진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가 레니에의 뺨을 핥으며 소곤거렸다.

    "조금 있다가는 좋다고 울면서 더 박아 달라고 하는 거 아니야?"

    와중에 저를 향한 희롱만큼은 깊게 박혔다. 레니에는 바닥을 박박 긁던 손을 꾹 그러쥔 채 앙칼지게 소리쳤다.

    "흑. 절대 안, 그래. 이 미친 새끼......!"

    "우리 교황 성하께서 욕도 하시네."

    이런 식으로 남자와 접촉한 적이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레니에의 거부가 잇따르는 지금 이 상황은 겁탈을 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공포심은 엉덩이에 노골적으로 비벼지는 것이 커질수록 비대해졌다.

    신학도적 차원에서 사내의 신체구조나 남녀 간 벌어지는 정사에 대해 무지한 레니에에게는 이 모든 것이 생소했다. 낯선 상황으로부터 오는 질겁을 감추기 위해 무심코 욕지거리가 뛰쳐나간 것이었다. 물론, 칸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 듯하지만.

    "젖 빨아 달라고 바짝 섰네."

    내내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읊조렸다. 노골적인 말에 수치심이 확 몰려왔다. 레니에는 입술을 짓씹어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자극으로 뾰족하게 선 돌기를 굳은살 박인 손끝으로 할퀴던 칸은 불시에 그녀의 몸을 휙 돌렸다.

    "읏, 뭐 하는......!"

    갑자기 그를 마주 보고 눕게 된 레니에가 경악실색했다. 칸은 서둘러 앞섶을 여미려는 그녀의 손을 쳐 내고, 드러난 젖가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선홍빛으로 발갛게 물든 꼭지부터 그보다 연한 색의 말랑한 유륜, 흔적을 남겨놓고 싶은 보들보들한 둔덕.

    그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칸의 눈동자가 더없이 작열했다.

    "아응!"

    그가 상체를 숙여 붉은 유실을 입에 담았다. 아예 풍만한 살을 쥐어 올려 젖무덤이 볼록 튀어나오게 만들어 쭙쭙 빨아 댔다. 젖 찾는 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흡입이었다.

    레니에는 발버둥을 치며 그를 밀었으나 당연하게도 밀리지 않았다. 돌기가 물컹한 점막 속에 같혀 빨리는 느낌에 등줄기를 타고 지르르한 소름이 돋았다. 레니에의 허리가 곡선 모양으로 꺾였다.

    칸은 젖꼭지를 가열하게 빨며 손으로 반대편 젖무덤을 우악스럽게 주물러댔다. 그가 깊이 흡입할 때마다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간지러움이 온 신경을 아작아작 긁어 먹었다.

    칸은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풀어지다 만 그녀의 성복과 속옷을 함께 벗겨 냈다. 레니에의 정신이 번쩍 든 건, 가려 주는 것 하나 없는 다리가 활짝 벌어지며 씻을 때조차도 잘 건들지 않는 밀부에 뭉툭한 무언가가 닿았을 때였다.

    끈적끈적했고 미묘하게 뜨거운 감촉이었다. 그러면서도 단단한 그것은......

    "아, 안 돼, 잠...... 헉!"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그녀는 창백해진 낯으로 황급히 말렸으나 이미 늦었다. 어느 틈에 우람하게 모습을 드러낸 성기의 대가리가 닫힌 비부를 강제로 파고들었다.

    "아...... 아!"

    무언가를 넣어 본 적이 없어 조개처럼 딱 다물린 구멍을 억지로 여는 행위는 가혹했다. 아래가 벌어지는 게 아니라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건 레니에가 처음이라서기도 했지만 사내의 성기가 터무니없이 큰 탓도 있었다.

    "아, 아파, 아파!"

    최소한의 전희도 없는 삽입은 그녀의 아래를 엉망으로 난도질하기에 충분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목이 꺾일 것처럼 젖혀졌다. 화마와도 같은 고통에 그녀의 눈이 크게 떠지며 동공이 흐릿해졌다.

    "아, 흑, 아아......"

    레니에가 손톱으로 바닥을 아무렇게나 박박 긁었다.

    아파, 끔찍해...... 고간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후끈거리는 통증이 있을 수가 있나. 태어나서 이런 격통은 처음이었다. 그 반동인 양 차마 다물지 못한 입술 사이로 침이 질질 샜다. 눈물 또한 펑펑 흘러 시야를 잔뜩 이지러뜨렸다.

    그러나 칸은 봐주지 않았다.

    레니에의 앙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성기를 마저 삽입했다. 큼지막한 귀두부터 파고든 페니스가 이어 삐걱대며 안으로 전진했다. 그럴수록 레니에는 죽을 듯이 흐느끼며 경련했다. 불에 달군 꼬챙이로 내장을 마구잡이로 쑤셔 대는 것만 같았다.

    "그만, 흑, 아, 파, 으......"

    "좆 처음 물어 보는 구멍이라 그런가, 엄청 조이네. 힘 좀 빼 봐."

    레니에의 거부에도 그는 꿈쩍하지 않고 폭력적인 정사를 강행했다. 어린아이의 팔뚝만 한 것이 틀어박힌 아래에서 무언가 흐르는 듯 질척질척했다. 어디선가 다시금 비릿한 피 냄새가 내 풍겼다. 격통으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겨우 남은 레니에의 이성은 사내가 허리를 흔들기 시작하면서 조각조각 박살 났다.

    "헉, 그만, 제발, 제...... 아윽!"

    "보지에...... 큿. 힘 풀라니까, 레니에."

    칸이 양 젖꼭지를 빙글빙글 유린하며 허리를 강하게 추켜올렸다. 퍽, 하고 깊숙이 들이차는 것에 질 안 점막이 꽉 조여들며 레니에의 등줄기를 타고 알싸한 통증이 쇳독처럼 번졌다.

    그녀의 눈물이 한층 더 범람했다. 칸은 상체를 숙여 그 구슬픈 눈물을 모조리 핥아 먹었다.

    "그간 내가 뭘 먹고 사는지 궁금했지?"

    "흑, 아, 아......! 읏, 응......"

    "나는, 아니, 악마는 인간의 음기를 섭취해야만 허기가 해결되거든. 인간의 음식 따위는 먹지 않아."

    푹푹. 아랫도리를 상스럽게 처박아 대며 읊조리는 말투가 이질적일 만큼 친절하다. 칸이 무어라 말하는데 억센 고통으로 완전히 심신이 무너진 레니에가 그를 제대로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교황인 자신이 그간 악마와의 계약으로 힘을 보전하고 있었다는 것이나, 지금 악마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현실만이 그녀의 뇌리를 에워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사내의 어깨 너머 천장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이 희미했다.

    짝!

    그녀가 넋이 나간 걸 눈치챈 칸이 흐벅진 엉덩이를 찰싹 내리쳤다.

    "하읏!"

    "한눈팔지 마. 기분 더러워지니까."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하자 하얀 살결 위로 붉은 자국이 짙게 그려졌다. 후끈한 마찰음이 울릴 때마다 레니에는 작살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파르르 떨며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 제법 즐겁겠어."

    "싫어, 흐, 아아, 제발, 아, 파...... 흑."

    "다시 만나게 돼서 기뻐, 레니에."

    사내의 웃음이 환청처럼 귓가를 울렸다.

    허리춤을 바투 움켜쥔 칸은 아까보다 더 속력을 올려 골반을 튕기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이 거칠어질수록, 레니에의 입술에서 괴롭게 뭉친 신음이 처절하게 터져 나왔다. 고통으로 온몸의 근육이 팽창하며 식은땀이 났으나 살벌한 교접에서 도무지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문득,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신의 형상을 본뜬 조각상이 보였다.

    자신을 인자하고 자애롭게 내려다보는 신의 얼굴이 엉망으로 이지러졌다. 제 시야가 물기로 젖어서 그런지 신은 마치 우는 것 처럼 보였다.

    서늘한 번개가 쳤다.

    예배당 밖으로 폭우가 끝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