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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수상한 손님 (1) (3/19)
  • 2장. 수상한 손님 (1)

    대부흥의 시대.

    누군가는 현시대를 두고 그렇게 일컬었다. 무엇이 부흥기를 이루었느냐 함은 콕 짚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했다. 경제, 사회, 종교 등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각각의 영역.

    혹은 그것을 압도하는 무언가.

    레니에는 모두가 하나같이 떠들어 대는 '부흥'에 관하여 기꺼이 반대표를 던지고 싶었다. 지금, 제국을 휩쓰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대부흥이 아닌 절대 악에 가까웠다. 교황인 그녀로서는 거의 지옥이 목전에 다가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전만 해도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 어두운 마력이 힘을 떨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들은 흑마력으로 이루어진 집약체답게 밝은 것에 맥을 추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어둡고 구석진 곳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해를 거듭하며 그들은 진화했다. 오로지 생각하고, 사유하고, 골몰하는 인간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그들 또한 도약했다.

    절대 악, 악마의 시대.

    교황 레니에는 현시대를 그렇게 정정하고 싶었다.

    ***

    "교황 성하."

    "......"

    "성하?"

    "아, 그래."

    창밖을 내다보던 레니에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요즈음 조금만 한가해지면 넋을 놓고 있었다. 정확히는, 까마득한 과거의 어느 날을 상습적으로 반추했다.

    레니에는 시녀, 세실이 따라 주는 차를 들이켜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멍하니 계세요,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넌지시 물은 세실은 곧바로 손을 가로저었다.

    "무, 물론 교황님께서 가지신 고민을 미천한 제가 해결할 수는 없을 테지만요."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소녀는 스스로 주제넘은 행동을 했다 여기는지 어쩔 줄을 몰랐다.

    레니에는 자상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보다 네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니 그리 말할 것 없어."

    인자한 대답에 세실은 언제 당혹스러워했느냐는 듯 해사하게 웃었다. 찻잔을 쥔 레니에는 다시금 창가로 눈을 돌렸다. 아늑하고 평온한 성도의 분위기를 그대로 빼다 박은 후원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금 가라앉았다.

    성도로 와 본격적으로 신학을 배우며 레니에는, 왜 요즈음 각국 공통으로 신권의 위상이 높아지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아주 오래전'이라고만 기록되는 역사 속 어느 순간부터 악한 힘이 세상 속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성력과 완전히 대비되는 파멸의 힘.

    그 힘을 다루는 이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악마였다.

    악마가 보유한 흑마력을 대항할 수 있는 건 성력이 유일했고, 하여 그 힘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신전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레니에가 성도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온건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몇 년 사이에 세태는 너무나 많이 바뀌어 버렸다.

    악마들의 공격적인 침습이 시작되었다.

    매혹적이며 교활한 그들은 결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다만, 간교한 계약을 통하여 그들의 영혼을 쏙 빼앗아 가 버렸다.

    그것이 그들만의 악랄한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을 얻는다. 자금을 불리는 데에 탁월한 사업적 안목이라든가, 누구도 덤빌 수 없는 어마어마한 무력과 같은.

    악마의 힘은 평범한 인간을 꼭대기에 군림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되게 해 준다. 그리 매혹적인 힘 앞에 넙죽 엎드리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설령 그 결과로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해도 말이다.

    계약.

    느지막이 알게 된 악마의 방식을 상기할 때마다 레니에는 어릴 적, 예배당에서 있었던 기묘한 거래가 번뜩번뜩 떠오르고는 했다.

    그 목소리는 분명 자신을 신이라고 밝혔다. 또한, 성도로 와서 다시 확인한 결과 레니에의 성력은 삿된 것 하나 섞이지 않은 깨끗한 힘이라고 똑똑히 밝혀졌다.

    그러니 제게 일어났던 일은, 저를 안타깝게 여긴 신의 자비라고 치부하면 될 터인데도 자꾸만 미묘하게 찝찝했다.

    '너는 내 것이 되어야 해.'

    너무도 달짝지근하여 오히려 위험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자신을 수렁에서 건져 주는 조건으로 내밀었던 대가.

    어쩌면 그게, 악마의 속삭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니야. 그럴 리가.'

    선득한 가정에 레니에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듣자 하니 성력이라는 것은 원래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보다 갑자기 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그간 잠재되어 있던 레니에의 성력이 어머니의 죽음을 목전에 둔 간절한 상황에서 발현했다고 보면 되는 일이다.

    애초 악마의 것이었다면 제게 주어진 힘이 이리도 깨끗할 수 있었을까. 보조 주교가 과연 이 힘을 신의 힘이나 다름없는 '성력'이라고 명명했을까.

    더불어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오랜 시간 동안 레니에의 성력은 멀쩡했으며 그와 관련하여 기묘한 일이 일어난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 목소리가 내걸었던 조건 중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다.

    그때, 목소리가 실살려 주겠다고 했던 레니에의 어머니는 끝끝내 돌아가셨다. 그래도 주치의가 선고를 내린 때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으니 모두가 그만하면 호상 아니겠느냐고 저들 좋을대로 평가했다.

    어찌 됐든, 이러한 연유로 먼지 묵은 옛적의 거래는 이미 틀어진 셈이었다.

    더하여 후작가에서 벗어났을지언정, 레니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수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거지가 달라지고 거리가 멀어졌으나 발루아 후작은 아직도 그녀를 쥐락펴락하려 들었다.

    이를테면 제 사업을 위해 교황이란 번듯한 지위가 필요할 때.

    아버지만 생각하면 입 안이 써지고는 했다. 레니에는 결국 차를 다 비우지 못한 채로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복잡한 생각을 밀어내며 세실에게 물었다.

    "공회의까지 얼마나 남았니?"

    "20분 정도요."

    "이만 출발해야겠구나."

    공회의란 1주일에 한 번, 교황과 세 명의 대주교 그리고 높은 급수의 주교들이 모여 성도의 문제에 관해 토의하는 자리였다. 에브뢰 왕도에서 건너오는 귀족 후원금과 성도 안팎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주요 안건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발루아 후작가에서 대단히 큰 후원금을 모금해 주셨군요."

    공회의 도중, 후원금 목록을 살펴보던 제2 대주교 호센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혼잣말 같아도, 그게 레니에를 향해 하는 말임을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레니에는 늘 그러했듯 야트막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마쳤다.

    성도는 왕도에서 건너오는 자금으로 운용되기 때문에 각 귀족의 후원금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발루아 후작은 레니에가 교황의 자리에 앉은 뒤로 매년 거액의 후원금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레니에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후작이 지금껏 야망과 탐욕으로 아득바득 긁어모은 재산 중 절반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불린 것이었다. 욕심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의 표본이 바로, 교황인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런 식으로 남에게서 탈취해 온 자금을 신을 모시는 재화로 쓰겠다니. 이리도 모순적인 것이 있을까 싶어 레니에는 번번이 허탈해졌다.

    더불어 그녀는, 이것이 제 멱을 틀어쥐는 방식임을 모르지 않았다.

    후원금의 수준은 각 시대의 교황이 가진 일 처리 능력을 평가하는 주요 척도가 되었다. 아무래도 왕도와 자금 문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교황이 뛰어날수록 후원금 액수가 높아진다고 믿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발루아 후작의 막대한 후원금은 교황으로서 레니에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수단과도 같았다.

    하나 이런 식의 원치도 않은 정당성은 그녀의 역겨움과 부담만 부추길 뿐이었다. 더하여 여태껏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 시시각각 목을 조였다.

    공회의는 자그마치 두 시간 동안 이어졌다. 성도에서 끊이지 않는 기근 문제와 각 구역에서 심심찮게 발생하는 흑마력의 술수에 대응책을 세우느라 그러했다.

    얼추 회의가 마무리될 즈음, 제1 대주교가 중요한 보고를 잊고 있었다는 듯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성하. 어제 왕도로부터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조만간 페르노 왕국의 사절단이 우리 에브뢰에 도착한다는데 왕도가 아닌 이곳에 머물고자 한답니다."

    문서를 정리하던 레니에가 멈칫했다.

    신전의 역할이 막중해지며, 성도 또한 하나의 독립 국가라도 봐도 될 정도로 번성하고 영화로워졌다.

    그러나 왕국은 왕도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성도가 암만 평화롭고 온화한 분위기라고 하더라도 이곳은 신분보다는 자비가 강조되는 곳이었다. 귀족보다도 평민을 위한 땅이라는 말이다.

    법도, 규례 등 나라를 이루는 기율은 권력을 소유한 왕실과 일부 귀족 중심으로 돌아간다. 성도는 오직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만 주관하나, 왕도는 성도를 포함하여 나라의 총체적인 사안을 관리했다. 그것만 봐도 왕도의 위상이 더욱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타 왕국의 사절단이 온다면 성도보다도 왕도로 향하는 게 당연지사였다. 대우 또한 그곳이 훨씬 걸맞게 해 줄 테고, 무엇보다도 그곳에 '왕'이 존재하니 말이다.

    신권과 왕권이 비등해졌다고 하나 왕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높은 집권자라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왕의 허용 아래에 신권이 재망을 떨치는 것이기도 하니.

    "특별한 연유라도 있나요?"

    "잘은 모르겠으나, 듣기로 페르노의 왕이 그를 고집한답니다. 몇 번이나 설득해 보았지만, 워낙 뜻이 강경한지라 이쪽에서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 주었으면 한답니다."

    "페르노 왕국이라면, 그 신생국 말이지요."

    페르노 왕국.

    일반적으로 나라의 개국이란 그 근간이 뚜렷하여 역사로 세세히 기록되는 바였다.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에브뢰 왕국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페르노 왕국은 근간이 불분명했다.

    그 왕국은 어느 날 문득 존재하기 시작하여 조금씩, 조금씩 주변의 패권을 장악했다. 신생국이기는 하나 어마어마한 군세로 굴복시킨 인접국만 벌써 세 곳이 넘었다. 그 강렬한 맹위는 이제 페르노를 오로지 신생국으로만 대하기 어려운 위치로 올려놓았다.

    "방문 목적은요?"

    "우방을 맺고자 하는 친교랍니다."

    대외적으로 내세우기 위한 명분일지 몰라도 일단 나쁜 목적은 아니었다. 소문 자자한 저돌적인 기세가 상당히 우려되기는 하나 그를 적이 아닌 아군 삼을 수 있다면, 에브뢰 왕국에도 필히 좋은 기회가 될 터.

    "그렇다면 왕도에서 원하는 대로 성대하게 준비하는 것이 좋겠군요."

    언제나 평화롭기만 하던 성도에 낮선 손님이라니.

    어째 썩 달갑지만은 않았으나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레니에는 담담히 지시를 내릴 뿐이었다.

    ***

    공회의 다음 날.

    페르노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한 대대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다. 성도 전역을 깨끗하게 관리한 후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올만큼 호화로운 장식품이 도시 곳곳에 걸렸다.

    그렇게 2주가 빠르게 지나가고, 드디어 페르노 사절단이 성도에 당도하는 날이 다다랐다. 오늘도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성복을 갖춰 입은 레니에는 성도의 입구로 향했다.

    문호 위에 걸린 새하얀 깃발이 손님의 도착을 알리듯 펄럭펄럭 휘날렸다. 황금 틀의 문이 조금씩 열리며 뿌연 모래가 잘게 휘날렸다.

    다그닥 다그닥.

    흐트러지는 시야 사이로 거대한 흑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리의 선두에 선 이는 투구부터 갑옷까지 완전 군장을 한 채였다.

    그를 시작으로 군마 다섯 마리와 마차 두 대가 안으로 들어섰다. 마차에 걸린 새까만 깃발이 인상적이었다. 뒤로 비치는 성도의 하얀 깃발과 대비를 이루어서 더 그랬다.

    위세가 대단한 신생국이라기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까딱했다가는 칼부림이 날 듯한 감사나운 등장에 레니에는 손을 꾹 그러쥐었다.

    선두에 선 사내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이윽고 목전까지 다가왔을 때 레니에는 용기를 내 고개를 들었다. 내리쬐는 역광으로 인영이 흐릿했으나, 투구 사이로 드러나는 날렵한 눈매와 그 속의 피처럼 고인 진한 동공은 똑똑히 보였다.

    사내가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말에서 내렸다. 안장에 앉아 있을 때부터 느꼈지만 어지간해서는 타인에게 뒤처지지 않을 만큼 체격이 건장한 사내였다.

    사내를 마주한 레니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희한했다. 오늘 날씨는 온화한 편인데, 사내가 등장하니 왠지 모를 한기가 등줄기를 쭉 가로질렀다.

    이윽고 악수해도 될 만큼 거리가 밀접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페르노 사절단이시여. 저는 에브뢰의 교황, 레니에 발루아라고 합니다."

    레니에는 가슴에 한쪽 손을 올린 채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분주히 눈을 굴려 페르노의 왕을 찾아 헤맸다.

    이번 여정에 동행한다고 들었으니 분명 이들 중 하나일 터. 일단 코앞에 있는 사내는 아니리라 짐작했다. 왕은 신변의 위협 문제로 보통 선두에 서지 않으니까. 지금으로서 가장유력한 건 군마가 이끄는 마차 속이었다.

    그쪽을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으나 시야를 가로막고 선 사내 때문에 무리였다. 레니에는 하는 수 없이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다.

    타오르는 불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긋한 시선의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사내가 손을 움직였다.

    투구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칠흑빛 머리칼이 햇살에 부딪혀 반짝거렸다.

    환한 빛 아래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레니에는 잠시 말을 잃었다. 검을 휘두르는 기사라기에는 사내의 외모가 지나치게 출중한 탓이었다. 이목구비를 이루는 선이 워낙 반듯하여 일순 금욕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천천히 입꼬리를 휘어 올린 그가 불시에 레니에의 손을 끌어당겼다. 새하얀 손등 위로 사내가 신사처럼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피부가 덴 것처럼 후끈했다.

    "반갑습니다, 교황 성하."

    "......"

    "페르노의 왕, 칸이라고 합니다."

    치뜬 눈동자가 찬연했다.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쿵, 저 먼 바닥까지 추락했다가 겨우 끌어 올려졌다.

    왕.

    왕이라고? 이자가?

    단언컨대 아닐 것이라 생각한 대상이 제가 찾던 이라는 것을 깨닫자 레니에는 조금 아연했다. 그러다가 주위에 이목이 많음을 상기하고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 왕이시여. 제가 해망쩍어 미처 알아보지 못했군요."

    "사과는 되었습니다. 그보다, 내가 반갑지 않습니까?"

    느릿느릿 상체를 드는 사내의 그림자는 시커멧다. 그것은 꼭 검은 잉크처럼 레니에의 말간 얼굴부터 흰 눈 같은 성복까지 전부 다 짙게 물들였다.

    레니에는 눈을 끔벅거렸다.

    반갑지 않으냐니. 왜 저런 걸 묻지?아무리 봐도 공적인 관계에서 오갈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 준, 더군다나 작금 기세난당한 신생국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그녀는 선뜻 답했다.

    "기별을 받고 무척이나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여 그런지, 굉장히 반갑게 느껴집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퍽 가식적인 대답이었다. 그러나 페르노의 왕, 칸은 흡족했는지 입꼬리를 더욱 훨 뿐이었다.

    저를 본 순간부터 연신 웃음을 그치지 못하는 사내의 표정은 부드러웠으나 왠지 묘하게 흉흉하게 다가왔다. 감히 마주하지 못할 위압감이 짙게 풍기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레니에는 시선을 피할 요량으로 몸을 반쯤 틀었다.

    "이만 이동하시지요. 여기까지 오시는 길이 고되었을 듯하여 식사를 준비해 두었는데......"

    페르노부터 이곳까지 말을 타고 밤낮으로 달려도 족히 1주일은 걸린다. 굳이 묻지 않아도 고단했을 여정일 게 뻔하여 정성스러운 오찬과 이후 휴식을 취할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식사는 됐습니다."

    "네?"

    그러나 칸은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주변을 쓱 둘러보며 호의를 싹둑 잘랐다.

    "하지만 시장하지 않으신가요?"

    "배가 고프기는 한데...... 아마도, 내가 원하는 식사는 준비되어 있지 않을 듯해서."

    칸은 제 말이 틀리지 않을 거라는 듯, 별 기대감 없는 눈빛을 했다. 식사로 뭐가 준비됐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왜 저런 마뜩잖은 반응을 보이는 거지. 정중하던 첫인사에 반해 전혀 예상치 못한 무례에 레니에는 당황해서 잠시 말을 골랐다.

    "페르노 사절단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신중하게 엄선한 재료로 마련한 식사입니다. 요리사 또한 왕도에서 온 실력자이고요. 그러니 분명 마음에......"

    "그보다."

    "......"

    "성도를 구경시켜 줄 수 있습니까?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무척이나 궁금했거든요."

    열심히 준비한 식사를 고작 두 마디 정도로 내친 사내는 몹시도 태연자약하게 굴었다. 번드르르 웃는 낯이 어찌나 뻔뻔한지 사내가 제멋대로 굴고 있다는 사실마저 망각하게 했다.

    주저하던 레니에는 잘 보여야 할 손님이니 어찌 됐건 의견을 맞춰 주는 게 좋을 듯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면 저를 따라오시지요."

    사내를 뒤에 두고 걸으며 레니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창하던 하늘 위로 컴컴한 먹구름이 꼈다. 평소보다 강하게 부는 바람이 성복을 구기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성난 것처럼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그게 왠지 오싹하게 느껴져서, 그녀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칸은 성도의 이곳저곳을 제법 흥미롭게 둘러보았다.

    그의 곁에서 안내를 해 주면서도 레니에는 내내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혹시 그가 식사를 단번에 물린 것처럼 어떤 돌발 행동을 보일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구경을 마치고 해가 저무니,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스스 내리는 물방울이 진녹빛 잎사귀에 맺혔다가 땅 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빗소리가 자아내는 서늘한 분위기가 성도 전역을 감쌌다.

    페르노 사절단은 성도에서 머무는 동안 신전에서 지내게 되었다. 왕도에서 친히 기별까지 넣으며 환대를 해 주라 부탁한 이들이었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신전의 종들이 그들을 각각의 방으로 안내해 주는 동안 레니에는 침실로 돌아왔다.

    종일 긴장 상태로 빳빳하게 쳐들고 있던 목 뒤가 뻐근했다. 세실이 피로를 풀어 주는 차를 내왔다. 그를 마시며 레니에는 오늘의 일정을 반추해 보았다.

    썩 나쁘지만은 않은 첫날이었다.

    페르노 사절단은 두 달 정도 이곳에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칸이 이곳에 있기를 고집했기에 결국, 왕도에서 직접 흠차를 보내겠다고 했다.

    '오늘처럼만 보낸다면...... 괜찮을 것 같아.'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다가 왕도의 사람이 도착하면 저는 빠져 주면 되는 일이다. 흠차와 페르노 사절단 사이에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면 양측에게 모두 이로운 결과가 도출될 테고, 그럼 페르노 사절단도 별문제 없이 돌아갈 터.

    레니에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침실로 돌아오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칸을 떠올렸다.

    사내는 마치 아는 사이인 것처럼, 아니, 굉장히 반가운 사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시종일관 저를 보며 웃었다.

    성도의 명소를 소개해 주다가 그를 돌아보면 집요한 시선과 마주치고는 했다. 그건 왠지 모르게 그가 성도를 구경한다기보다는, 교황인 저를 구경한다는 느낌을 들게 했다.

    '그럴 리가. 내가 말을 하고 있었으니 그런 거겠지.'

    평소였으면 신경도 쓰지 않을 일을 이상하게 여기는 건 필히 피곤하기 때문일 터. 레니에는 얼른 잠자리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찻잔을 비우기 무섭게 누군가 알현을 요청한 탓이었다.

    "저, 성하. 성기사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문지기가 전하는 소식에 레니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관절 무슨 일인지 몰라도, 늦은 밤 저를 찾아온 것을 보면 예삿일이 아닌 듯하여 그녀는 얼른 침의 위로 로브를 걸쳤다.

    침실 밖으로 나오니 정말 성기사들 몇 명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의 거룩한 종,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선두에 선 갈색 머리칼의 성기사, 루벤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레니에는 그를 알아보았지만 구태여 아는 체하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이죠?"

    "성하께서 확인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의 낯에는 긴장감이 켜켜이 어려 있었다.

    기사들이 그녀를 이끈 곳은 신전의 마구간이었다. 어두운 곳에 희미한 불빛이 어룽거렸다. 히이잉. 말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도착한 곳에는 마차 두 대가 놓여 있었다.

    레니에는 저도 모르게 소매로 코를 틀어막았다. 마구간에 발을 들이민 순간부터 심각한 악취가 풍기기에 마구간의 냄새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코를 따갑게 만들 정도로 독한 냄새는 다름 아닌 마차에서 풍기고 있었다.

    "오늘 도착한 페르노 사절단이 가지고 온 짐마차입니다."

    그녀는 그제야 기사들이 저를 찾은 이유를 깨달았다.

    저 안에 무어가 들었기에 이리 악취가 심하게 나는지 몰라도, 타국이 손수 준비해 온 물건인 이상 멋대로 손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절단의 허락 없이 저것에 손댈 수 있는 자는 성도에서만큼은 레니에가 유일했다.

    그녀는 두려움을 떠안고 마차로 걸어갔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성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그녀를 원호했다.

    이윽고 레니에가 문고리를 붙잡았다. 철컥. 서늘한 소음과 함께 거대한 문이 끼익 열렸다.

    순간, 벌어진 문틈으로 주르륵 쏟아지는 핏물에 레니에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 성기사들이 검 끝에 성력을 주입하며 잽싸게 그녀를 호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마차 안 쪽에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박수가 점차 빨라졌다.

    "열어 보세요."

    레니에의 명령에 성기사 루벤이 검으로 마차의 문을 조심히 열었다. 악취가 한층 심해졌다. 이윽고 안으로 드러난 전경에 레니에는 입술을 틀어막았다.

    "욱......"

    노루, 양, 돼지, 소, 등등.

    온갖 목 잘린 동물의 주검이 마차 안에 널려 있었다. 역겨운 혹취는 뿜어져 나온 그들의 혈액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친 레니에는 허옇게 질린 낯으로 숨을 쉬지 못했다. 대체 이 무슨 끔찍한 장면인지,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였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르는 신자들에게, 마차 속 참혹상은 여간 충격적인 장면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것이 페르노 사절단이 가져온 짐마차라는 보고를 상기했다. 분명 성도로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마차에서 이런 지독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게다가 바닥과 벽에 낭자한 피가 아직 제대로 마르지도 않은 걸 보면, 이 참상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무참히 죽어 나간 동물들 위로 환각처럼 칸의 웃음이 옅게 스쳐 지나갔다.

    "페르노의 왕을...... 만나 봐야겠습니다."

    경직된 낯으로 읊조린 레니에는 곧장 칸의 침실로 향했다.

    시각이 늦어 결례인 줄 알지만, 그럼에도 제가 본 충격적인 장면에 대하여 이유를 들어야지만 오늘 밤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니 침실 문이 열리고, 이내 나이트가운 하나만을 걸친 칸이 팔짱을 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차림새가 달라져서일까, 완전 군장을 하고 있을 때처럼 포악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성하께서 직접 오신 줄 몰랐습니다."

    "......?"

    "여독을 풀라고 창부라도 보내 주신 줄 알았는데."

    매끈하게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이 몹시도 도발적이며 노골적이었다. 뻔히 제가 찾아온 걸 확인하고도 창부를 운운하다니. 일순 조롱을 당한 것만 같은 불쾌감이 들어 레니에의 눈가가 움찔했다.

    그녀는 굳어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가다듬으며 답했다.

    "전하. 에브뢰의 성도에는 유곽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창부도 존재하지 않고요."

    "그렇습니까?"

    남의 복장을 뒤집어 놓고서는 잘도 태연하게 반문한다. 레니에는 인내하자는 심정으로 그 점을 애써 문제 삼지 않고 넘겼다.

    "네. 저, 늦은 시간에 찾아뵙게 되어 정말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쭤볼 게 있어서요."

    "무엇입니까?"

    "지금 막, 페르노 사절단이 가지고 온 짐마차를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만......"

    레니에는 제가 보고 온 참혹한 광경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감쳐 물었다. 하지만 차마 숨길 수 없는 거북한 감정이 표정에 켜켜이 배여 있었다.

    "봤습니까?"

    여기까지 오는 내내 혹시 페르노 왕국을 모함하기 위한 누군가의 술수는 아닐까, 라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왕국과 작금 기세등등한 신생 왕국의 결합이 당사자들에게는 좋을지언정 주변국들에는 충분히 위협이 될 수 있으니.

    하지만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태연한 칸의 낯을 보니, 아니, 그보다 먼저 '봤느냐'고 묻는 걸 보니 그 생각은 속절없이 흔들렸다.

    정말 이자의 무리가 한 짓이라는 말인가?

    "대체 왜, 동물들을......"

    "친절한 환대에 대한 보답입니다."

    보답이라고? 동물들의 목을 죄다 잘라 죽인 것이?

    종전의 참경을 상기한 레니에는 사내를 아연히 응시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칸이 픽 웃었다.

    "인간들은, 동물을 먹지 않습니까?"

    휘어 말린 입꼬리가 일순 선뜩하게 다가왔다. 레니에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하여 살아 있는 생명을 저리 도륙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본의 아니게 불쾌하게 만들었나 보군요. 하지만 저것이 페르노만의 방식인지라."

    짐승들의 피가 웅덩이를 이루던 장면이 심기를 어지럽혔다.

    페르노는 성의를 보이기 위해서 살아 있는 생명을 저리 무자비하게 짓밟는가. 어쩌면 그렇게 잔악한 성정을 지니고 있기에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정도로 웅렬한 기세를 떨치는 걸까.

    저들만의 방식이라는 대답에 레니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왕도에서 거는 기대가 큰 만큼 교황으로서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있는 바였다. 하여 페르노와 관련해서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괜히 딴죽을 걸었다가 이번 친교를 어그러뜨리게 되면 실로 낭패였다.

    막말로,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니 그를 문제 삼기도 조금 애매했다. 계명으로 얽매이는 건 성도에 사는 이곳의 백성이지, 페르노 사절단이 아니었다.

    결국, 레니에는 치미는 감정을 삼키며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마음은 감사히 받겠으나, 성도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계명이 있기에 동물들은 모두 땅에 묻도록 하겠습니다."

    칸은 이마저도 별 관심 없다는 양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이토록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내는 그녀의 인생 속 처음이었다. 레니에는 어쩐지 아까보다 더욱 피곤해진 기분이었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늦은 밤 찾아뵈어 실례를 끼쳤습니다."

    계속 함께 있기가 거북해 바로 몸을 트는데, 무언가 시야로 불쑥 튀어나왔다. 칸이 팔을 뻗어 레니에의 앞을 막은 것이었다. 소매가 걷어지며 드러난 팔뚝에는 그의 흑발처럼 새까만, 기하학적 무늬의 문신이 곱게 수놓아져 있었다.

    저런 건, 극악무도한 산적 혹은 해적이나 새기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억센 인상이 조금 흐려졌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다시 사내에게서 흉포한 기운이 풍기기 시작했다.

    "들어왔다 가지 않는 겁니까?"

    동굴 같은 웃음소리가 귀를 스쳤다.

    레니에는 설핏 굳은 눈동자로 그를 돌아보았다. 목전에서 마주한 적안은 매혹적이되 실로 위험해 보였다. 금욕적인 분위기가 자각자각 금가며, 그 사이로 결코 넘보아서는 안 될 은밀한 면이 비쳤다.

    들어오지 않느냐니. 어디를. 설마 그의 침실을?

    "......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담소는 내일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그녀는 칸이 건넨 말의 뜻을 건전하게 해석하는 것으로 그치며 물러났다.

    미묘한 긴장감을 끌어안고 있기를 잠시.

    다행히 칸은 팔을 치워 주었다. 시야를 어지럽히던 문신 또한 사라졌다. 레니에는 차분한 척, 그러나 날랜 걸음으로 그의 곁을 서둘러 벗어났다. 심장은 여전히 세차게 뛰고 있었다.

    레니에는 침실로 돌아가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며칠간 맑던 날씨를 비웃는 것처럼 비가 끝없이 쏟아졌다.

    폭풍전야처럼, 괴이하리만치 차분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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