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레니아 발루아
발루아 후작가의 후계는 오로지 딸, 레니에 발루아 하나뿐이었다.
여러 까닭이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후작 부인이 건강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레니에를 낳기 전에도 썩 신통찮던 그녀의 몸 상태는 출산 후 산욕열을 앓게 되며 극악으로 치달았다.
사실, 건강과 관련된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레니에의 동생이 생기기란 무리에 가까웠다.
후작 부인은 후작가로 시집오기 전까지는 꽤 건강한 편이었다. 그녀가 심약해진 계기는 바로 발루아 후작과의 결혼 생활이었다.
발루아 후작은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신사적이고 귀족적이나 실상은 다혈성에 필요 이상으로 탐욕이 넘치는 자였다.
안타깝게도, 후작 부인이 남편의 본색을 알게 된 것은 결혼 후였다.
그는 사업이나 국무 회의 등등 여러 방면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저택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푸는 편이었다. 욕설부터 시작하여 끝끝내 서슴 없는 폭력까지. 대외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의 잔혹한 일면은 언제나 저택을 살얼음판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후작 부인은 그 살얼음판 아래에 갇혀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본색이 완연히 까발려지기 전에 그의 후계를 가진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레니에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어릴 적 모습은 늘 침상 위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게 전부였다.
레니에는 어렸지만, 어머니가 아버지를 두려워한 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병상 중 간혹 정신을 차려 눈을 뜨면 친모는 언제나 두려움에 떨었다. 특히 발루아 후작를 닮은 딸을 볼 때면 그 정도가 극심해졌다. 어머니의 곁을 틈틈이 지켜 왔기에 그 공포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두려움이 레니에라고 비켜나지는 않았다. 출타하고 돌아온 아버지를 마중 나가면, 언제나 살뜰한 인사 대신 싸늘한 눈초리가 돌아왔다.
아버지의 눈은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쓸모없는 것.'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이따금 그리 불렀다.
레니에는 태어나서 아버지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바로 그것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어쩌면, 손수 붙여 준 이름보다도 그 따끔한 칭호로 일컬어질 때가 더 많았다.
'쓸데도 없는 계집애를 낳아서는.'
그녀는 아버지가 저를 마뜩잖게 보는 이유를 꽤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아들이 아니라서였다. 이 가문, 발루아 후작가를 대대로 이어야 할 남아가 태어나지 않아서. 그래서 아버지는 저를 그렇게나 기꺼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계란 딸도 이을 수 있는 자리니 어찌 보면 참으로 시시한 이유였다. 물론 그건 굉장히 이례적이며 희귀한 경우였으니, 후작처럼 고리타분한 귀족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상황일지 몰랐다.
레니에는 아버지가 저를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랑받는 딸이 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아버지가 붙여 주는 가정 교사들과의 수업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귀족적 품위를 익히는 데에도 굉장히 노력했다. 제 나이대의 애들과 달리 떼 한 번 쓰지 않고 늘 인내하며 살았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기대에는 발끝만치도 미치지 못했다.
아니, 그는 애초부터 다른 것을 기대한 듯했다. 이를테면 미래 발루아 후작의 굳건한 버팀목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줄 사위.
후작이 그 비틀린 기대를 품는 즉시 레니에는 스스로를 위한 게 아닌, 누군가의 완벽한 아내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발루아 후작은 하나뿐인 딸을 제 기대에 부합하는 '쓸모 있는 자'로 만들기 위해 그녀에게 길고 굵직한 매를 드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말대꾸하지 않을 것. 어떠한 경우에도 언성을 높이지 않을 것. 자세를 바르게 할 것. 시선 처리를 조심할 것. 그 일련의 것들은 발루아 후작에게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은 귀족 부인으로서의 행동 규정이었다.
자칫 말대꾸를 하면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맞았고, 자세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허리를 꼬집혔다. 식사 시간에 나이프와 포크를 잘못 사용했다가 손등에 붉은 생채기가 실처럼 죽죽 그어지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럼에도 아픈 소리 하나 낼 수 없는 건, 그래 봤자 또 따끔한 매질이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어린 그녀는 꽤 이르게 고통을 삭이는 법에 대해 배웠다.
학대의 고통 속에서 레니에가 유일하게 삼을 수 있는 휴식처는 바로 아픈 어머니의 곁이었다.
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몸져누운 어머니가 꼴 보기 싫다며 부인의 침실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니에는 유일하게 그곳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 여기서는, 침 한번 쉽게 삼키지 못할 만큼 긴장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그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하나뿐인 딸을 위로해 주려는 것처럼 겨우겨우 버티던 어머니의 생명이 스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치의와 하인들이 침실 문턱이 닳을 정도로 분주하게 드나드는 것을 보며 레니에는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건, 어머니의 죽음보다 제 스스로에 대한 위협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어머니가 죽으면 나는 이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거야. 그러다가 아버지의 눈밖에 들면, 정말로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진,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리면. 그때는, 그때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레니에는 도무지 저택 안에 있을 수 없어서 본관을 뛰쳐나왔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을 빙글빙글 돌아도 진정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속은 더욱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너른 땅을 밟고 또 밟다가 문득, 처음 보는 장소에 도달했다. 그곳은 선선대 후작이 집권할 당시 지어 놓은 허름한 예배당이었다.
이곳, 에브뢰 왕국은 왕권과 신권이 비견할 정도로 종교의 힘이 강한 나라였다. 왕도와 구분되는 별도의 성도까지 존재할 정도였다.
비단 에브뢰 왕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이르러 종교에 대한 권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묘한 현상 때문이라는데 평범한 귀족 영애인 레니에로서는 그 연유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여하간 그런 이유로 귀족의 저택에 예배당이 설치된 것은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나무로 조각된 십자가를 올려다본 레니에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마른 문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관리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된 것을 증명하듯 뿌연 먼지가 가득한 실내는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하지만 예배당 특유의 거룩하고 고결한 분위기는 쉬이 녹슬지 않았다.
레니에는 눈치를 보듯 살금살금 걸어 예배당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라는 것을 해 보았다. 에브뢰 제국에서는 매년 거룩한 성제가 열리지만, 딸을 자식이 아닌 결함으로 여기는 후작은 당연스럽게도 그녀를 동반하지 않았다.
그러니 레니에에게 신을 믿는 종교란 퍽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낯선 것밖에 기댈 게 없었다.
'신이시여, 부디 자비를 내려 주시어 어머니를 살려 주세요.'
평생의 소원인 양 그것만을 바라던 욕심은 점차 커졌다.
'아버지가 두려워요. 매를 맞는 것도 싫어요. 아픈 것도 싫어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누군가에게 집은 굉장히 따뜻하고 안락한 공간이라고 하는데, 레니에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언제나 덫에 걸린 짐승의 심정처럼, 맥없이 숨통을 죄는 장소였다.
서툰 바람들이 웅얼거리는 태세로 머릿속에 고였다가 사라졌다. 썰렁한 예배당의 적막은 곧 다가올 지옥처럼 무거웠다.
훌쩍. 레니에는 눈물을 삼키며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조심스레 벗었다.
본디 장갑은 연회에 참석하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착용하지, 평상시에 착용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레니에가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조숙한 감이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레니에는 그것을 거의 매일 착용했다.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손등 위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서 였다. 모두 다, 친부가 남긴 학대의 증거였다.
찢겨 갈라진 채 생살이 돋아난 살갖은 울퉁불퉁했다. 이건 그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는 트라우마와 같았다. 이걸 들여다보고 있자니 막연한 두려움이 몸집째 불어나 결국 눈물이 비죽 솟았다.
그때였다.
'아이야.'
그 목소리는 불현듯, 갑자기 다가왔다. 그건, 목소리라기보다는 하나의 공명이었다.
'우는 소리가 몹시도 구슬프구나.'
레니에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놀란 그녀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왜냐하면, 장소가 주는 무게감 탓인지 몰라도 그게 꼭 주신의 음성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누가 너를 그리도 힘들게 하는 거니.'
달래 주는 듯한 어투였다. 정체를 알 수 없음에도 그 안에서 스며 나오는 따스한 온기에 레니에의 속에서 무언가 울컥 괴어올랐다. 아버지는 흉포하고 어머니는 아파서, 부모에게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위로였다.
목소리가 닿은 것은 귀인데도 마음이 어루만져진 것만 같았다.
고작 저 세 마디에, 어린 레니에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울었다. 그간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울분이 끝없이 솟아났다. 그동안 목소리는 연거푸 그녀를 자상하게 타일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저는 영영 혼자가 돼요. 그러면 아버지는, 아버지가 저를......"
투정은 두서없이 흘러나갔다. 어디서 들려오는지도 모를 목소리를 향해 레니에는 일러바치듯이 고했다.
잠시 후, 목소리가 무척이나 달콤하게 물었다.
'어머니를 살리고 싶니?'
눈을 휘둥그레 뜬 레니에는 대답만 하면 그리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급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리로 다가오렴.'
"이리?"
'그래. 내게로, 내가 있는 곳으로.'
레니에는 홀린 듯이 일어나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더, 더 오도록 해.'
조금 전만 해도 레니에를 살살 달래던 목소리에 조금씩 애타는 기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 음성은 설탕을 녹여 만든 것처럼 달았다. 꼭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는 사탕을 몇 개나 입에 넣은 듯하여 레니에는 두려움을 삼키고 더듬더듬 걸어 나갔다.
단상 위로 올라가 장막을 걷었다. 그곳에는 네모난 그림이 놓여 있었다.
'나와 거래를 하자, 아이야.'
레니에가 그림과 가까워지자 목소리는 뚜렷해졌다. 그림은 초상화인지 누군가가 어렴풋이 그려져 있었다. 빛이 바래 확실히 알아볼 수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그 대상의 동공이 농홍하단 것이었다.
'내가 네 어미를 살려 주고 너를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마.'
"정말요?"
'그래. 하지만 대가가 있다.
“대가?"
'너는 내 것이 되어야 해.'
순간 초상화의 새붉은 눈빛이 번뜩이는 것도 같았다. 어린 레니에는 ‘누군가의 것'이 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서 우물쭈물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너는 너를 힘들게 하는 것들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거야. 대신, 그 대가로 내게 빚을 지는 거지.'
"빚은...... 나쁜 거라고 했는데."
'갚을 수 없는 빚은 온당치 않으나, 갚을 수 있다면 그만큼 탁월한 거래가 또 있을까.'
어둑한 목소리는 그녀를 살살 꾀어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는 신이다. 네가 원하는 바를 이뤄 주는.'
드높은 자는 자신의 존재를 밝히지 않기 마련이지만 레니에는 홀딱 매료된 심정에 그를 기민히 알아채지 못했다.
"왜 제게 이런 거래를 제안하시는 건가요?"
'너의 불행이 몹시도 사랑스러워서.'
모호한 대답이었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니?'
흔들리던 레니에의 심정은 그 달큰한 질문 앞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기실, 조금만 더 머리가 자란 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거래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레니에는 아직 미성숙한 아이였다. 그러니 막연한 미래보다 당장 다가올 아버지의 매가 두려운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어떤 식으로 이곳을 벗어나게 될지 몰라도, 왠지 매혹적인 목소리는 반드시 그것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기이한 확신을 들게 했다.
레니에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로 손을 뻗으렴.'
잠자코 따랐다. 레니에의 가녀린 손끝이 그림 위로 닿자 화한 빛이 달무리처럼 번졌다.
그녀는 무심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속으로 시린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심장이 꼭 조각나려는 조짐처럼 쿵, 하고 강렬하게 뛰었다. 왠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배당은 언제 빛이 퍼졌느냐는 것처럼 종전의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로 돌아왔다.
꼭 요물에 홀린 기분이었다. 멍멍한 상태로 본관으로 돌아온 레니에는 저를 찾는 하녀와 마주쳤다.
"어디 계셨어요, 아가씨! 마님께서 상태가 좋지 않으세요. 어서가 보셔요."
하녀의 보고대로 어머니는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겨우 맥을 이어 가듯 헐떡헐떡거리는 어머니를 보자 흐릿하던 레니에의 이성은 황급히 현실로 돌아왔다.
"어머니, 안 돼요! 어머니!"
레니에의 눈동자에 촉촉한 물기가 고였다. 제발 살아 달라고, 죽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그녀의 애처로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어머니의 손등으로 떨어지는 순간, 종전 예배당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찬연한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시야가 명멸할 정도의 발광에 모두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어안이 벙벙한 낯으로 눈을 떴다.
현상을 일으킨 레니에마저도 놀라서 멍하니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대관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 정적이 흐르던 침실에서,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후작 부인의 상태를 확인하던 주치의였다.
"맥이......"
분명 꺼질 듯 말 듯 하던 후작 부인의 맥이 갑자기 되살아난 것처럼 정상적으로 뛰었다. 더불어 헐떡이던 숨소리도 단순히 잠이 든 것처럼 유순하게 변했다.
"마님의 맥이 돌아왔습니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방금 그 빛은......"
기이한 회복에 우왕좌왕하던 이들 사이로 웬 하녀가 외치듯이 물었다.
"아가씨께서 성력을 가지고 계신 건가요?"
그래, 성력.
세상의 삿된 것을 물리치는 그 성스러운 힘이 발현되는 장면을 목격한 것만 같았다. 그것을 마냥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는 건, 다 죽어 가는 생명이 소생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수런수런하는 사이 꾹 닫혀 있던 침실 문이 열리며 후작이 등장했다. 다들 급히 자리를 정돈하고 예의를 갖추었으나 미묘하게 배인 어수선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웬 소란이더냐."
"저, 주인님. 그것이, 아가씨께서 방금......"
처음부터 상황을 지켜보던 하녀장은 조금 전의 일을 발루아 후작에게 상세히 고했다. 잠자코 얘기를 듣던 후작은 '성력'이라는 말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드러나는 동공이 신랄하게 번뜩였다.
발루아 후작은 곧장 성도로 기별을 넣었고, 보조 주교가 저택에 당도한 것은 시일 내였다.
"대단히 곱고 맑은 성력이군요. 마치 선대 교황님의 어릴 적을 보는 듯합니다."
레니에를 살펴본 보조 주교는 감탄 어린 어조로 말했다.
"후에 성도로 오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이 정도 성력이면 대단히 귀한 재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성도로 연통을 주시기를."
그간 벌어지는 일을 꼭 남의 일 대하듯이 어리둥절하게만 여기던 레니에는 그제야 예배당에서의 묘한 순간을 상기했다. 그녀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제 귀를 스치던 음성이 귓가에 연거푸 맴돌았다.
어쩌면 이게 목소리가 일컬은 방법일까.
신권이 왕권에 비견하는 에브뢰 제국에서 성도의 주인이 된다는 건 대단히 영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발루아 후작은 그 기회를 놓칠 만큼 아둔한 자가 아니었다.
후작의 눈동자는 탐욕스럽게 번들거렸다. 그건, 옛적에 부러져 버린 물건이 드디어 다른 쓰임새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눈빛이나 진배없었다.
발루아 후작은 차근차근, 그리고 은밀하게 일을 준비했다.
보조 주교를 보증인으로 레니에를 신전에 입교시키고, 그녀 위를 차지한 방해물을 전부 치워 하나뿐인 딸을 영광스럽고 고귀한 자리에 앉히는 것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모든 것은 발루아 후작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후작은 신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나,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시기가 지나치게 잘 들어맞은 덕분이었다. 마침 적절한 이를 찾지 못하여 교황의 자리가 공석이었다는 점과 레니에가 가진 성력이 선대 교황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성결하다는 점이 그러했다.
그렇게 그녀는 11세의 나이에 후작저를 나서 성도로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