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외전 (20/20)
  • 4권

    외전

    누군가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 놓은 듯 하늘에서는 구름이 타오른다. 붉게 물든 노을을 배경으로 긴 하루가 지나고 있다. 류드밀라는 강가에 서서 결혼식 준비로 바빴던 지난 며칠을 떠올리며 혼자 뿌듯해한다. 결혼식 당일인 오늘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흘렀다.

    그녀와 루슬란의 결혼식에는 산신이 주례를 봤고 강과 산의 영물들이 참석했다. 꽃이 만발한 강가에서 낮게 드리워진 가지들 사이로 본 루슬란은 평소보다도 아름다웠다. 류드밀라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며 살며시 웃음 짓던 그 얼굴은 누가 보고 반할까 두려울 정도였다. 은빛 자수가 놓인 푸른 로브가 얼마나 잘 어울리던지.

    류드밀라 또한 그렇게 길고 화려한 드레스는 처음 입어 봤다. 속이 언뜻 비치는 튤 소재의 풍성한 소매, 레이스로 섬세하게 장식된 상의 부분, 시폰과 비단을 써서 하늘하늘한 치맛단까지. 거울로 제 모습을 보고 그녀는 기절할 듯 놀랐었다. 게다가 루살카들이 손에 들려 준 백합과 작약 꽃다발은 그 향에 어지러울 정도였다. 기다리고 있는 루슬란에게로 나아갈 때는 산새와 여우들이 꽃잎을 뿌려 줬다.

    베일을 걷어 주던 루슬란의 손길이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떠올리곤 입가에 미소를 띠는데 다정한 손길이 어깨에 와 닿는다.

    “혼자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나요? 갑자기 사라지셔서 놀랐어요.”

    류드밀라는 루슬란을 돌아보곤 어깨에 기댄다.

    “바로 옆인걸요. 노을이 너무 예쁘지 않은가요?”

    “말을 돌리시기는요.”

    투정 부리듯 대꾸한 그가 그녀에게 마주 기댄다. 머리에 가볍게 실리는 무게가 좋아서 류드밀라는 아예 품 안으로 파고든다. 루슬란은 머리에 입을 맞추고 사뭇 진지하게 말을 꺼낸다.

    “결혼식 첫날밤은 저와 보내셔야지, 이리 혼자 있으시면 안 되어요.”

    처음에는 그녀의 자유를 그리 원했으면서 가끔씩 소유욕을 드러내는 그가 그녀는 사랑스럽다고 여긴다. 그래서 부드러운 소재의 옷감에다 얼굴을 맞대며 더욱더 응석을 부린다.

    “아직 밤은 아니잖아요. 밤만 되면, 두고 보셔요.”

    “무얼 두고 봐야 하나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그가 눈을 천천히 깜박인다. 류드밀라는 묻었던 고개를 들고 혀를 쏙 내민다.

    “루슬란 님은 정말 깜짝 놀라실 거예요.”

    대담해지고 장난기만 잔뜩 는 그녀에 대한 사랑은 치명적일 정도라, 루슬란은 가슴이 욱신거린다. 그러면서도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글쎄요. 이 땅에서 저를 놀라게 하는 건 별로 없을 텐데…….”

    “두고 봐요.”

    새침함과 비장함을 동시에 품고 속삭인 류드밀라는 그를 이끌고 춤을 추러 숲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선 이미 결혼식 하객들이 현악 4중주의 반주에 맞춰 왈츠를 추고 있다. 루슬란의 발에는 풀이 짓밟히지 않고 류드밀라의 발은 거의 풀에 닿을 새가 없다. 그가 자꾸 공중으로 안아 올리는 탓이다.

    루슬란이 유난히 높게 류드밀라를 들어 올렸을 무렵, 그녀의 베일 너머로 왕관처럼 빛나던 해가 마침내 지평선 밑으로 떨어진다.

    어두운 밤이 강가에 찾아오고 하객들의 배웅을 마친 둘은 저택으로 돌아간다. 영물들이 정성 들여 꾸며 놓은 신혼 방은 포근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발밑에 밝혀 놓은 초를 따라 침대로 향한 류드밀라는 먼저 앉아서 루슬란을 잡아당긴다. 그는 못 이겨 하며 그녀 옆에 나란히 눕는다.

    약간 긴장되고 설레는 순간에, 별안간 웃긴 모순이 떠오른다. 류드밀라는 손만 잡고 자면 아기가 생긴다는 말을 믿었을 적이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손만 잡고 나란히 누워서. 마녀들과 냉혹한 현실이 깨 버린 꿈의 파편에서 그녀는 루슬란과 만나지 않았던가.

    그런 소중한 그를 위해 그녀는 오늘 밤 선물을 준비했다. 신중하게 꺼낸 말에 루슬란이 조용한 대답을 내놓는다.

    “저도 그대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어요. 그대가 먼저 선물을 받으실래요?”

    배려해 주는 말에는 조그마한 걱정이 담겨 있다. 류드밀라는 말없이 일어나 베개에 몸을 기대고 앉는다. 같이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그녀가 제지한다.

    “동시에 선물을 건네도 될 것 같아요.”

    눈썹 하나를 올린 루슬란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댄 류드밀라가 노래를 시작한다. 아무런 반주 없이 준비해 뒀던 노래를 부른다. 그동안 그 몰래 핑계를 대 가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그녀만의 소야곡을. 가슴에 품어 두었던 것을 목 안쪽에서부터 혀끝까지 끌어 올려 공기 중으로 낸다.

    처음에는 가늘게 떨리던 고운 음성이 점점 용기를 얻고 또렷해진다. 수줍게 시선을 떨구고 있다가 루슬란을 응시한다. 흔들림 없이 유지하는 눈길에서는 확신과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붉게 타오르던 노을이 싫어서

    저녁이면 창문을 잠가 두었죠

    오늘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갔구나

    안도하기만 하던 날들이 질려서

    외로움이 날 삼키게 내버려 두었죠

    코끝에 스치던 겨울 향은 처음이라

    레몬 타르트의 씁쓸함은 처음이라

    몰랐을 수도 있어요, 그대를

    소복이 쌓인 첫눈도 나날도

    강물에 퍼지는 안개도 마음도

    몰랐을 수도 있는데, 그대를

    모든 순간이 모든 하루가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살던 내게

    그대는 처음이었어요

    가벼운 손길 신중한 말들

    오래 머무는 시선과 입맞춤

    처음이었어요, 그대는

    그러니 이제 내가, 내가

    그대의 모든 처음과 함께할게요

    그러니 이제 그대는, 그대는

    내 모든 마지막을 지켜 주세요]

    노래의 후렴구가 나지막이 반복될 동안 루슬란은 소매 안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준다. 한 손에 딱 들어오는 작고 맨질맨질한 조약돌이다. 눈처럼 동그란 얼룩이 두 개가 박혀 있어 조그마한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류드밀라는 조약돌의 시원한 감촉을 살갗으로 전해 받는다.

    노래를 마친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는데 루슬란이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담는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고 그녀는 그의 눈꼬리 끝에서 반짝이는 눈물을 발견한다. 어떤 말보다도 그 눈물 한 방울이 새하얀 뺨을 타고 흐르는 순간이 그동안의 보상이 된다.

    루슬란이 그녀의 빈손을 잡고 손마디에 입을 맞춘다. 보랏빛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그가 나긋한 음성으로 말을 건넨다.

    “그 조약돌에는 그대의 어린 시절 기억이 들어 있답니다. 마녀들이 그대의 기억을 지울 때 제가 제 기억과 함께 주문을 걸어 보관해 두었어요.”

    류드밀라는 조약돌 표면을 엄지로 문질러 본다. 이 작은 돌 하나에 그녀의 기억들이 모두 들어 있다. 어쩌면 가족과 그녀의 옛 이름 또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약돌에 강물이 닿으면 그대에게 기억이 돌아올 거예요. 물을 가져다 드릴까요?”

    “아뇨.”

    말해 놓고 스스로도 놀란 그녀는 천천히 생각을 가다듬는다. 인내심 가득한 얼굴로 지켜봐 주는 루슬란에게서 용기를 더 얻는다.

    “지금의 저는 과거가 이뤄 냈지만, 제가 기억하는 과거는 황궁으로 왔을 때부터도 충분해요. 이미 한번 잃었던 기억을 굳이 되찾고 싶지 않아요. 기억을 잃었었다는 사실조차도 제 삶의 일부분이니까요.”

    그는 안타까워하며 그녀의 뺨을 손안에 담는다.

    “기억을 되찾는 일도 그대 삶의 일부분이 될 수 있어요.”

    류드밀라가 천천히 고개를 내젓는다.

    “아뇨. 기억이 사람을 이룬다면,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저는 다른 사람이 될 거예요. 전 지금의 저로 살고 싶어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고, 충분히 사랑받으면서 살고 있잖아요.”

    그제야 안심하곤 루슬란은 코끝이 스칠 듯 가까워졌던 거리를 벌린다.

    “그대의 선택을 존중해 드릴게요.”

    “감사해요. 이건 소중한 추억으로만 간직할래요.”

    머리맡 탁자에 조약돌을 올려놓은 그녀는 그가 벌려 놓았던 거리를 다시 좁힌다. 어깨에 기대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려 본다.

    “첫날밤을 보낸다면서 정작 다른 일들만 했네요.”

    “밤은 기니까 괜찮아요.”

    비단결 같은 손길이 느긋함을 갖고 옷자락 아래로 파고든다. 결혼식 후 갈아입었던 치마를 벗기는 데에 조급함도, 망설임도 없다. 류드밀라는 몸을 돌려 그의 무릎에 올라탄다. 그보다 시선이 높아지자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는 배시시 웃는다.

    “예전부터 이걸 해 보고 싶었어요. 항상 루슬란 님만 제 머리에 입을 맞추셨잖아요.”

    위에서 보아도 아래에서 보아도, 어느 구석에서 보든지 어여쁜 신부구나. 그녀가 부끄러워할까 봐 말을 아낀 루슬란이 상의 단추를 하나하나 끌러 준다.

    “하나는 이제 이루셨으니, 또 해 보고 싶으셨던 건 없으신가요?”

    “글쎄요. 루슬란 님께서는요?”

    “흐음…….”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짓궂게도 드러난 뽀얀 가슴을 입으로 문다. 송곳니에 다치지 않게 살살 물었지만 여전히 놀란 류드밀라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그녀의 집중력을 흐트러지게 만들곤 루슬란은 고개를 든다. 그의 손이 스칠 때마다 파르르 떠는 몸이 가여워도 연민은 소망을 이룬 후로 미뤄 둔다.

    “이제 호칭을 바꿔 볼 때도 되지 않았나요, 부인?”

    “흣, 네?”

    그녀는 어지러운 듯 몸을 휘청이기까지 하며 당황하고 만다. 그녀를 부르는 그의 어투에 듬뿍 담긴 애정에 당황한 것은 아니다. 서로의 사랑을 몇 번이고 확인하지 않았던가. 다만 그렇게 불릴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이유가 크다. 이제는 아예 아래까지 닿은 손길에 류드밀라는 몇 번이고 앓는 소리만 낸다.

    루슬란이 원하던 말은 따로 있다.

    “결혼식도 마쳤고, 오늘은 고대하던 첫날밤인데. 언제까지고 제 이름만 부르실 수는 없지 않나요.”

    가빠진 숨을 내쉬며 그녀는 겨우 단어들을 끌어모아 말을 이뤄 낸다.

    “어떻게, 무어라 불러 드릴까요…?”

    그는 스스로 답을 생각해 보라는 듯 말없이 아름다운 미소만 보인다. 그리고 이미 그의 손을 탄 아래가 젖어 들었을 무렵 묵직한 성기가 그녀의 안으로 들어온다. 가는 허리가 잔뜩 휘며 그의 어깨를 짚은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전부터 갑작스레 찾아온 열락에 몸을 내맡기던 류드밀라는 아예 이성을 놓아 버린다.

    입구를 꽉 채우는 것도 모자라 깊숙한 안쪽까지 닿는 감각이 황홀하다. 그렇게 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큰 갈망에 따라 몸을 움직이게 된다.

    류드밀라는 곱슬곱슬한 머리칼로 온몸을 덮은 채 신음을 작게 내뱉는다. 움직일 때마다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게다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아픔은 사라지고 쾌감이 고개를 들이민다. 시야가 흐려지며 루슬란을 부르는 제 목소리도 가물가물하다.

    구명줄인 것처럼 루슬란의 몸을 꽉 붙들고 그녀는 마침내 절정에 다다른다. 힘이 다 풀려 흐늘거리는 팔다리를 그에게 걸치는데 그가 그녀를 눕혀 준다. 이제 자리라 생각해 안심한 류드밀라의 귓가에 낮고 매혹적인 말들을 그가 풀어놓는다.

    “복숭아 속살처럼 달아오른 몸을 하고서 벌써 주무시려 하시나요? 그런데 어쩌나, 저는 아직 제가 원하는 말을 못 들었는데 말이어요.”

    부끄러운 마음은 들지만 이미 얼굴이 달아올라 있어 티가 안 난다. 류드밀라는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인 루슬란을 올려다보며 입만 벙긋거린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이럴 때면 머릿속이 하얗게 물든다.

    그녀의 둥근 어깨에 입맞춤을 남기는 루슬란은 생각을 이어 가는 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지 말씀해 주시면 안 되나요….”

    결국 포기하고 말하는 와중에 쾌락에 길들여져 있던 목소리는 울먹임이 되어 나온다. 그를 걱정시킬까 봐 서둘러 목을 갈무리한다. 우아하게 찌푸려진 짙은 눈썹을 보니 이미 늦은 것 같다.

    “이리 여려서야. 제가 순순히 말씀드리면 제게 무엇을 해 주실 건가요?”

    장난스러운 물음에 류드밀라는 진지한 고민에 빠져든다. 그동안 루슬란은 깊은 생각에 잠긴 눈망울과 금방이라도 말할 듯 달싹거리는 입술, 살짝 깨물고 있어 삐져나온 분홍빛 혀를 마음껏 감상한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그녀는 그에게 속삭인다.

    “제가 평소에는, 아침에는 힘들다고 못 하게 말렸잖아요. 그쵸?”

    “내일 아침에도 저와 정을 통하시려고요?”

    지그시 바라보는 눈길에 류드밀라가 속눈썹을 바르르 떤다. 부끄러워서 어물어물 말을 흐려 버리고 만다.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지 알려 주신다면….”

    피식 웃은 루슬란이 그녀의 손을 쥔다. 그러곤 나머지 손가락을 접게 하고 검지만 내밀게 한다. 커다랗고 새하얀 손바닥에다 그의 손에 이끌린 류드밀라의 검지가 세 글자를 적는다.

    루슬란. 그녀가 제일 잘 쓰는 글자이자 그 몰래 제일 많이 연습한 글자이다.

    “앞으로 존칭은 다 빼고 그렇게만 부르셔요.”

    루슬란은 힘주어 말한 뒤에도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먼저 고개를 내린 류드밀라가 웅얼거린다.

    “하지만 제게는 습관이 되어 있어서, 어떻게 감히 이름을 그냥….”

    다시금 꼬리를 감추는 말소리에 은빛 눈이 즐거이 휜다.

    “그럼 서방님이 부르기 편하실까요?”

    서방님…? 낯설고도 둥근 호칭이 입 안에 머무른다.

    “네, 네?”

    “왜 그러시나요. 저도 그대를 이제 부인이라고 부르는데.”

    마음이 아픈 흉내를 내며 가슴에 가는 손을 얹고 루슬란이 깊은숨을 내쉰다. 물론 연기였지만 덩달아 마음이 약해진 류드밀라가 서둘러 목소리를 낸다.

    “루슬란 님, 아니… 루슬란.”

    그의 애칭인 루샤라고 부르게까지 하였다간 여린 신부가 그만 도망치겠다고 여긴 루슬란은 머리를 토닥인다.

    “잘하셨어요. 곧잘 하시면서 왜 그리 겁먹으셨을까.”

    “갑자기 시키시니까 그렇죠.”

    조금 전의 열기가 가라앉고 제정신이 돌아오자 류드밀라가 새침하게 톡 말한다.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는 그녀에게 그가 부드러운 말을 건네며 달랜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도 내일 아침에 있을 일은 빼놓지 않는 것이, 정말 루슬란답다고 여긴다. 류드밀라는 결국 삐친 태도를 풀고 그의 품에 안겨 잠든다.

    ***

    “일어나셔야죠, 부인.”

    다정히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손길이 류드밀라를 잠에서 끌어낸다. 꿈에서도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루슬란의 짓궂은 장난에 휘말렸던 그녀는 속은 느낌이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그의 장난에 놀아나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러나 꿈속에서 느꼈던 분통함은 아른아른 빛나는 은색 눈동자를 보자 다 풀린다.

    강을 되찾은 후 더욱더 밝아진 은빛은 류드밀라를 다시 한번 홀린다.

    살갗이 엮인 자리에서 핀 열기가 아침의 선선한 공기를 덥힌다. 몸을 섞을 때면 여전히 수줍어하는 그녀가 눈을 감아 버린다. 그러면 감각이 더 예민해지는 걸 모르고 눈꺼풀이 떨릴 정도로 꼭 감는다.

    눈을 뜨셔요, 스치듯 어르는 목소리에 용기를 얻었다가 그녀는 흠칫거린다. 고개를 떨군 채 눈을 뜬 바람에 가장 여린 살끼리 맞닿은 부분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은 언제나처럼 옅어진다.

    몽롱한 정신을 붙들고 류드밀라는 이불을 끌어당긴다. 보드라운 천 안에 파고들어 영원히 이 순간에 머무르고 싶다는 만족감에 젖어 있다.

    그 후로 여러 날이 지나도록 루슬란은 류드밀라를 밤마다 안으며 귀히 여긴다. 그의 태도와 행동은 변함없지만 류드밀라는 제 몸이 변하는 것을 눈치챈다. 벌써 월경을 하지 않은 지도 두 달이 다 되어 간 것이다. 하필이면 그녀의 작은 의심이 고개를 들 무렵 루슬란이 바빠진다.

    이그나티 제국이 와해된 후 인간들은 쇠퇴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어려움을 루슬란이 해결하고 올 것이란 말을 그녀는 개구리에게서 전해 듣는다. 어렸을 적 류드밀라의 도움을 받았다는 개구리는 루슬란이 없을 때 그녀의 훌륭한 말동무가 되어 준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동무라 해도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되는 말이 있는 법. 류드밀라는 작은 의심을 혼자서만 간직한다. 언제 루슬란에게 말해야 될지 모르는 탓이다.

    그래서 어느 날 밤 그가 돌아와 이런 말을 했을 때,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아요. 산신님이 만들어 주신 고약을 드셔 보지 않으시겠어요?”

    임신을 하면 음식도 가려 먹어야 할 뿐 아니라 약도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고 들었다. 류드밀라는 걱정에 휩싸여 방 서랍에 고이 모셔 뒀던 고약을 떠올린다. 루슬란의 의중을 몰라 불안하기도 하다. 보통 때처럼 평온한 안색을 살피며 그녀가 묻는다.

    “왜 제게 고약을 먹으라고 하시는 건가요?”

    “병에 걸린 사람이 고약을 바르면 낫고, 건강한 사람이 고약을 환으로 만들어 먹으면 불로불사의 몸이 된답니다.”

    “아….”

    루슬란이 손을 뻗자 서랍이 절로 열리고 고약 꾸러미가 둥실둥실 떠서 온다. 그녀 생각보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된 대꾸도 하지 못한다.

    “원래 식을 올리고 바로 드시게 하고 싶었는데, 놀라실까 봐 걱정되었어요. 그대가 불러 주신 노래에 심신이 흔들린 나머지 잊은 것도 있고요.”

    류드밀라는 그가 꾸러미를 풀고 고약을 조금 떼어 동그랗게 빚는 모습을 지켜만 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느낌 자체가 오랜만이다. 아이를 가져서 약을 못 먹는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그런 말을 해도 될까?

    예전과 달리 그가 혹시라도 싫어할까 하는 걱정은 들지 않는다. 대신 그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었듯 그녀 또한 이 순간을 그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 그런 욕심 때문에 류드밀라는 루슬란에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녀의 불안이 루슬란에게도 전달된다. 또 다른 비밀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한 그가 나직이 그녀를 어른다.

    “쉬운 선택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요. 영원히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면 분명 어려운 점도 많겠죠.”

    “그 때문이 아니에요.”

    그를 안심시키려고 류드밀라는 서둘러 말을 꺼낸다. 일단 그러긴 했는데 대화를 이어 나가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모습에 그는 눈썹 하나를 치켜뜬다. 입만 벙긋거리던 그녀가 결국에는 눈을 살포시 내리깔며 수줍어한다.

    “제가, 제가 아이를 가졌어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류드밀라가 눈길을 조심스레 올린다. 강의 신이라면 온갖 일들을 겪었을 텐데도 그는 놀라서 한동안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다 작은 숨을 내쉬며 눈을 부드럽게 휜다. 기울인 고개에 머리카락이 마구 쏟아져 내려도 얼굴은 평온해 보인다.

    “전 그대가 모르실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그 세월 동안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 행복이 그대 덕에 온 것이라, 정말 기쁘답니다.”

    잔잔하고 깊은 감정에 젖은 루슬란이 미소를 짓는다. 그녀가 품에 안겨 오며 밀어를 속삭이자 미소는 한층 짙어진다.

    “그리 어여쁜 말을 하시면, 제 마음이 견디지 못하겠어요.”

    그들은 밤이 깊어 가도록 다정하고 설레는 말들을 서로에게 속삭여 준다.

    다음 날부터 루슬란의 극진한 보살핌이 시작된다. 곁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자리를 비워도 개구리와 강의 영물들을 시켜 그녀를 살피게 만든다. 계단 하나 혼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극성에 류드밀라는 앞날이 아득해진다.

    그녀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다. 이러다간 식사도 제 손으로 못 하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 몇 번 항의해 보기도 한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애정으로 가득해 결국은 류드밀라의 체념 섞인 한숨으로 끝난다.

    그래도 그녀는 소일거리를 찾아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루슬란이 가져다준 책을 읽거나 그림도 그리며 전에 누리지 못했던 여유를 즐긴다. 어느 때보다도 평온한데 그는 임산부에게 좋다는 호흡,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는 운동, 깊은 수면을 유도하는 음악 등등 온갖 지식들을 알아 와 그녀에게 알려 준다. 전의 차분한 면과는 반대로 유난을 떠는 그가 새로워 그때부터 류드밀라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떠날 새가 없다.

    “혹시 부인, 수영도 배워 보시겠어요? 산책도 너무 오래 하면 무릎이 아프시다고 하셨잖아요.”

    하루는 루슬란이 색다른 제안을 한다. 얕은 물에서 물장구를 치거나 사자로 변한 그를 타고 다녔지, 류드밀라는 혼자 헤엄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될까요? 물살에 휩쓸리거나, 자갈에 다치면….”

    이번에 그녀의 걱정은 기우이다. 괜찮다는 듯 따스하게 웃어 준 그가 손을 잡아끈다.

    “제가 다스리는 강인데 무얼 염려하시나요. 흐르는 물이 싫으시면 갈래로 뻗어 나온 연못이 하나 있어요.”

    “그럼 좋을 것 같아요.”

    그가 류드밀라를 데려간 연못은 물도 적당히 깊고 바닥에도 모래가 깔린 곳이다. 물에 뜨는 나무토막을 잡고 발차기부터 연습하고 나자 숨도 차고 산책보다 훨씬 몸이 피로하다. 그럼에도 어느 하나 쑤신 곳이 없는 게 신기하다. 그렇게 발을 통통거리며 연못을 돌아다니는데 문득 궁금증이 인다.

    “루슬란 님?”

    눈을 가늘게 뜨는 루슬란에게 류드밀라는 똑같은 표정을 지어 준다. 웃음을 터트리고 마는 그가 사랑스러워 끝내는 호칭을 고쳐 부른다.

    “루슬란, 이 연못에도 누군가 사나요?”

    “작은 민물고기랑 개구리, 우렁이도 살고 가끔 왜가리도 찾아온답니다.”

    대답을 들은 류드밀라는 물에 얼굴을 넣고 눈을 크게 뜬다. 안타깝게도 시야가 흐려 주변이 잘 보이진 않는다. 더욱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그는 자신이 말했던 생물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보여 준다. 루슬란이 신중히 손바닥에 올려놓은 우렁이가 움직이자 그녀는 탄성을 내지른다.

    “더듬이가 수염처럼 생겼네요. 너무 귀여워요!”

    한낮의 해가 내리쬐어도 시원한 물속에 있으니 기분이 좋기만 하다. 왜가리도 어쩌다 만나고, 얕은 물가에서 발로 모래도 휘저으며 장난치다 류드밀라는 그에게 기댄다.

    “아가도 자라서 같이 이곳에 왔으면 좋겠어요.”

    “그럼요. 시간이 흐르면 그럴 수 있겠죠.”

    잠시 말이 없던 루슬란은 그녀의 손을 찾아 쥔다. 앞으로 할 얘기에 당황하지 말라는 그만의 신호이다.

    “그런데 부인, 곧 태어날 우리 아가도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동그랗게 뜬 보라색 눈이 루슬란의 말을 듣고 더 커진다.

    “그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그러고 보니 항상 아가라고 부를 수도 없을 텐데요.”

    류드밀라는 그에게 기댔던 몸을 조금 떼고 제 배를 내려다본다. 저 안에서 생명 하나가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가끔씩 태동을 느낄 때면 실감이 났지만 대부분의 순간에는 낯설기만 하다.

    “혹시 마음에 둔 이름이 있으신가요?”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조심스러운 의견을 낸다.

    “강과 관련 있는 이름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작은 흠 소리와 함께 루슬란이 류드밀라에게 기대 온다. 한참 높이가 낮아 불편할 텐데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그대로 있는다. 평화롭고 여유로움이 스치고 둘은 각자 생각을 흘려보낸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가장 알맞은 이름은 무엇일까. 행복한 고민으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

    “이나.”

    방긋방긋 웃는 아기의 이름을 류드밀라는 한 번 더 불러 준다.

    “이나, 이나야.”

    제 이름을 알아듣는지 그녀 쪽을 보고 아기는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이나, 거친 물결이란 뜻이다. 이름과 어울리게 아이는 벌써 활동량이 엄청나다. 우는 데도 지치지 않고, 먹는 것도 거침없는 데다 몸동작도 요란하다.

    그래도 류드밀라는 아이가 잘 자라나서 기쁘기만 하다. 검은 곱슬머리가 하루가 다르게 치렁치렁해지고 보라색 눈이 반짝이는 걸 보면 안 먹어도 배부를 때가 태반이다. 전에는 포대기에 싸여 얌전히 자기만 했는데 이제는 팔다리도 바동거릴 줄 안다.

    루슬란도 딸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좋은지 하루 종일 곁에 붙어 있으려고 한다. 강의 신이니 강을 돌봐야 할 텐데 그는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류드밀라에게 쫓겨나고 만다. 아기를 낳은 후에 그들 사이는 스스럼없어져 자그마한 장난도 오고 갈 정도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강의 저택 밖으로 끙끙대며 밀어낸다.

    “전에도 개구리 씨가 제게 불평을 해 왔다고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해 주셔야 강이… 루샤, 루샤 제 말 듣고 있어요?”

    완강하게 버티던 루슬란이 들으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쉰다. 그가 아무리 억울하고 슬픈 눈을 해도 류드밀라는 적응이 되어 있다. 그녀가 적응을 할수록 그는 더더욱 눈을 아련하게 뜨는 데 도가 터 간다.

    “제가 어여쁜 따님을 곁에서 보고 싶다는데, 그게 그렇게 못마땅하신가요….”

    “강을 돌보고 오셔도 볼 시간은 충분해요! 이나가 하루 종일 아빠만 찾는 것도 아니고. 잠시 떨어져 있어도 괜찮잖아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은 눈을 하고 그가 고개를 기울인다.

    “우리 따님은 아직 말을 못 해서 그렇지 하루 종일 제가 보고 싶을 텐데. 그대도 예전에는 매 순간 제가 보고 싶으시다고….”

    “어휴! 낯간지러운 소리 그만하시고 빨리 가셔요.”

    그녀가 루슬란의 등짝을 팡팡 때리자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하는 수 없이 밀려난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뽀뽀하려고 수를 쓰는 그에게 마지못한 척 응해 준 류드밀라는 손을 흔들어 준다.

    문을 닫고선 혼자 투덜거리고 싶어도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혹시 이나가 자는 시간과 루슬란의 외출이 겹치면 이리 큰 소리도 내지 못할 텐데 걱정도 된다. 그때는 또 그의 주책을 어찌 말린담. 나중 일은 나중에 해결하자고 미뤄 두곤 류드밀라는 아기 방으로 향한다.

    가끔 울곤 하는 이나는 그녀가 들은 것에 비하면 까다롭지 않은 아기이다. 울면 루슬란과 수도 없이 연습했던 대로 안아 달래 주고 기저귀와 배고픈 상태나 불편한 곳을 확인한다. 그런 일들이 일상이 되어 가며 류드밀라는 천천히 육아에 적응해 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적응되지 않은 것은 루슬란의 주책맞은 모습이다. 저런 존재를 왜 처음 만났을 땐 그토록 무서워했는지 의문이 든다. 어둠 속에서 빛나던 은색 눈은 이제 그녀와 이나만 보면 다정하게 휘어지기 일쑤이다. 서늘한 감촉의 머리카락은 이나의 좋은 장난감이 된다. 단정하던 입매는 실없는 소리를 내다 류드밀라의 타박에 툭 튀어나오곤 한다.

    낯간지러운 말들을 들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변한 그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웃기고 또 좋았다.

    루슬란이 이나가 자다 깨어날 때마다 놀아 주고 먹이고 다시 재우고를 반복하면 하루는 금방 간다. 그날은 그녀도 덩달아 노곤해져 류드밀라는 아기를 등에 업은 채 방석 사이에서 잠이 든다. 침대에서 재우면 뒷머리가 눌린다는 말에 굳이 업고 달래는 중이었다. 이나도 곤히 잠든 후에 몽롱해져 있는데 누군가 부드럽게 어르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부인, 잠시 쉬셔요.”

    “으음….”

    분명 그래야겠어요, 라고 말하려 했는데 류드밀라의 입에서는 만족스러운 웅얼거림만 나온다. 등에 실리던 무게가 가벼워지고 수달 여인이 이나를 잠시 맡아 주는 기척이 느껴진다. 수달이 아기와 나가면서 문이 닫힌다. 루슬란이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머리카락이 뺨을 스친다.

    류드밀라는 번져 가는 감각을 따라 손을 뻗다가 돌연 깨닫는다. 간질거리는 기분은 더 이상 머리카락 때문이 아니다. 그의 입술이 살결을 스치며 불러일으킨 것일 뿐. 느리게 곡선을 타고 유영하던 루슬란이 그녀와 눈이 마주치곤 맑게 미소 짓는다.

    “이건 쉬는 게 아니잖아요….”

    툴툴거려 보지만 몸이 달아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의 옷자락을 뒤덮은 강의 물 내음이 좋아 류드밀라는 모르는 척 그를 끌어당긴다. 겹겹이 입은 옷을 벗기고 살의 시원함이 열기로 오르는 것을 즐긴다.

    여전히 그녀가 아파할까 루슬란은 주의를 기울인다. 그의 자제력은 볼 때마다 신기했는데 지금은 그저 자제력의 한계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류드밀라는 그가 그녀를 유혹할 때 그랬듯이 눈을 나른하게 뜬다.

    “눈이 부신가 봐요.”

    어디로 햇살이 들어올까, 하고 루슬란은 창문을 보며 딴청을 부린다. 신중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에서 동전 뒤집듯 장난기 가득한 면이 나온다. 류드밀라는 그가 괘씸해졌지만 유혹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저를 봐 주세요, 루샤.”

    “왜 그러시나요, 얼굴에 뭐가 묻었을까 봐요?”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어 눈을 가늘게 뜨는데 그가 헤실헤실 웃으며 이마를 맞댄다. 마치 화 풀라고 달래듯 내리깐 눈썹을 파르르 떤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할, 조각 같은 얼굴에 그녀의 화가 풀린다.

    “얼굴에 뭐가 묻어 있긴 하네요.”

    늘 때를 잘 맞추는 루슬란은 이번에도 류드밀라가 방심한 틈을 노린다. 그래도 이번에 그녀는 예쁨이 묻어 있다든지와 같은 말을 기대해 본다.

    “너무 푹 주무셨나 본데요? 입가에 하얀 자국이….”

    “루샤!”

    몹시 놀라고 당황한 그녀가 외친다. 좋았던 분위기를 망친 것도 모자라 소중한 휴식 시간을 이런 시답잖은 장난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짜증 난다.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오늘 정사를 나누긴 글렀다고 류드밀라는 굳게 다짐한다. 결심 끝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루슬란이 어깨를 부드럽게 밀친다.

    그마저도 아프지 않게 등에 손을 받쳐 준다.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그가 한숨을 폭 내쉰다.

    “제가 삐진 티를 내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대가 삐지게 만들어 버렸네요.”

    뜻밖의 말에 그녀는 다짐도 잊고 걱정스러워한다.

    “왜, 왜 처음에 그러셨는데요?”

    “아침에 절 쫓아내셨잖아요.”

    또 장난인가 싶어 그런 기색을 찾는데 루슬란은 진지하다.

    “제가 이나를 돌봐도 되는데, 돌아오면 그대는 늘 지쳐 있고 밤에도 항상 먼저 잠드시니….”

    진정으로 슬퍼하며 그가 말꼬리를 흐린다. 류드밀라는 어째 저에게 칭얼대는 아기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의 뺨을 어루만진다.

    “하지만, 그러면 강은 누가 신경 쓰나요?”

    제 뺨을 쓰다듬던 그녀의 손을 가져가 입 맞춘 루슬란이 눈썹 하나를 치켜올린다.

    “신의 반려인 그대도 강을 돌볼 수 있어요. 제 권능을 똑같이 사용할 수 있답니다. 모르셨나요?”

    “네, 몰랐어요.”

    안타까워서 대꾸하다 류드밀라는 별안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제가 언제든 도왔을 텐데, 아무 말도 안 해 놓고선 삐진 척을 하다니요.”

    “아니 부인, 전 삐진 척을 한 게 아니라….”

    루슬란의 변명은 듣기 싫다는 듯 그녀는 뾰로통 입술을 내민다. 그는 짧게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만다.

    “알겠어요. 제가 다 잘못한 거네요, 그렇죠?”

    “그럼요.”

    더 토라져 있으려다 체념 섞인 다정한 말에 류드밀라는 그의 웃음을 돌려준다.

    “제게 권능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제가 그럼 강을 봐주고 올게요.”

    “좋아요. 그래도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싶은데.”

    대답 대신 그녀는 그와 입을 맞춘다. 아까 밀쳤던 게 못내 미안한지 루슬란은 그날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아껴 준다. 안 그런 적이 없었긴 하지만 말이다.

    길고 긴 전희 끝에 그녀 안으로 그가 들어온다. 매번 할 때마다 익숙해지지 않은 크기가 류드밀라의 이성을 위협한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가녀린 몸에서 분홍빛 열꽃이 피어오른다. 버거워서 신음을 뱉어 내면서도 그녀는 그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긴다.

    “흐읏, 으응….”

    류드밀라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언제나 그녀에게 부끄럽고 언제나 루슬란을 미치게 만든다. 거칠게 안을 긁으며 쳐올리자 그녀는 그를 붙잡았던 손도 떨구고 몸을 바르작거린다. 몸을 의탁할 것 하나 없이 거센 물살에 휩쓸리는 기분이 들어 무섭다. 멈춰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만 한가득이다. 그러나 넘실거리는 파도에 내맡기고 싶은 욕망도 존재한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류드밀라를 이미 몇 번이나 절정까지 끌고 간 그가 몸에서 힘을 뺀다. 이슬이 내려앉은 듯 땀방울이 맺힌 피부를 닦아 주고 바들바들 떨리는 가는 다리도 정돈해 주고. 열락에 취해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 다음번엔 보약을 달여 먹여야겠다고 루슬란은 결심한다.

    그의 곁에 누운 류드밀라는 잠꼬대를 종알거리며 아기 고양이처럼 웅크린다.

    “매번 제가 멈추라고 해도 계속하시니, 고약하기도 하셔라….”

    정작 멈추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그는 들은 것이 없다. 루슬란은 그녀가 그런 말을 마음에 담아 두었으니 인내심을 더 길러야겠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지 아득하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것도 없으니. 아니면 그녀를 유혹하는 법을 더 고민해 볼까. 생각을 뜬구름에 흘려보낸 뒤 그가 잠에 빠져드는 류드밀라에게 속삭인다.

    “이 고약한 강의 신을, 그래도 그대가 보듬어 주시잖아요.”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딸 이나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난다. 처음엔 몸을 뒤집고, 일어나 앉을 수도 있게 되더니 능숙하게 기어 다니기도 한다. 류드밀라가 강을 돌아다닐 때 루슬란이 엄마라는 말을 가르쳐 놓아 그녀를 행복하게 만든다. 부작용으로 루슬란에게도 엄마라고 부르긴 하지만 말이다.

    “엄마가 아니라 아빠라고 해야지.”

    “엄…마!”

    힘들게 말한 이나가 루슬란에게 기어가 머리카락을 붙잡으려 한다. 기어코 성공하고 머리카락의 감촉이 신기한지 만지고 논다. 아기가 잡아당기는 게 아프지도 않은지 그는 그저 웃음을 터트린다. 행복한 오후이다. 루슬란에게서 배운 대로 강을 돌보고 온 류드밀라도 그들의 놀이에 동참하고 이나는 더욱 신나서 그녀에게 기어간다.

    색깔은 다르지만 자기 것같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에는 아기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똑같이 엄마라고 외칠 뿐이다. 류드밀라가 강가에서 갖고 온 반들반들하고 큰 조약돌들을 품에서 꺼낸다. 너무 작으면 아기가 삼킬 수 있어 부러 큰 것들로 골라 왔다.

    류드밀라가 지켜보는 와중에 혼자 옹알거리며 이나는 조약돌을 갖고 논다. 루슬란에게 어김없이 엄마거리며 조약돌을 집어 보여 주기도 한다.

    일주일 중 두 번은 류드밀라가 강을 돌보고 다섯 번은 루슬란이 돌보는 생활은 여유롭고 평화롭게 흘러간다. 그러다 가끔은 이나를 데리고 가족 다 같이 강으로 나간다. 자연스레 강의 생물들을 끌어들이며 권능을 쓰는 아기가 그녀는 신기하다. 그런데 제 손짓에 따라 움직이는 송사리 떼가 신기하긴 이나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자꾸 밖으로 나가자며 아빠란 말보다 밖을 먼저 배워 버린다.

    그러던 아이가 이제는 단어도 다섯 개-고작해야 엄마, 밖, 아빠, 맘마, 아니야 정도이다-나 말할 수 있게 되고 일어서기도 한다. 물론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나가 툭하면 아니야라고 떼를 쓰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루슬란도 난감한 상황에 처한다. 아빠라고 말하길 거부하는 것은 덤이다. 발음이 어려운지, 단어의 어딘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나는 아빠라는 말을 싫어한다.

    처음에는 아바, 아바 하며 어설프게 말하고 웃던 순진한 아이는 이제 “아빠, 아빠 아니야!”라며 고개를 마구 내젓는다.

    “왜 아니야?”

    류드밀라가 달래려고 손을 뻗어도 바동거리고 뿌리친 이나가 루슬란을 가리킨다.

    “아빠 아니야!”

    이해할 수 없는 투정을 부리다가 이나는 섭섭해하는 루슬란의 얼굴과 마주한다. 그제야 죄책감이 들었는지 이번에는 아니야, 라고 조그맣게만 말한다.

    아이가 부리는 짜증의 원인을 알아내려 류드밀라는 그날 밤이 늦도록 고민한다. 슬퍼하는 루슬란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정의 근원지는 다음 날 예상치 못하게 발견된다.

    그날은 루슬란이 강으로 나갈 차례여서 류드밀라가 이나에게 동화책을 읽어 준다. 단순한 어휘로 이루어진 그림책에서 아기 주인공의 아빠와 엄마를 가리키며 그녀는 각각 말해 준다.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듣는 이나가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순간, 뭔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책이 문제였어요!”

    얼마 후 돌아온 그에게 류드밀라는 잔뜩 흥분하여 말소리를 높인다. 그러다 낮잠 자는 이나를 깨울세라 서둘러 목소리를 낮춘 뒤 열심히 설명을 해 준다.

    “책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다 아빠가 머리가 짧고 엄마가 머리가 길어요. 이나가 책을 혼자서도 막 펴 보길래 그냥 좋아하는구나 싶었는데, 제 딴에는 이상했던 거예요.”

    “제가 책 등장인물에 밀렸군요.”

    허탈해하던 루슬란이 그럼 머리카락을 자를까요, 라고 넌지시 말을 건넨다.

    “절대 안 돼요!”

    류드밀라가 저도 모르게 다시 소리를 내지른다.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루슬란의 흑발은 정말 아름답고 또 자르기엔 너무 아깝다.

    “읽히는 그림책을 바꾸고, 계속 아빠라는 말에 익숙해지게 하는 수밖에요.”

    “따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안 돼요.”

    그가 또 무서운 말을 입에 올릴까 싶어 그녀가 아예 못을 박는다. 루슬란은 그녀가 제 머리카락을 지켜 준 게 내심 좋은지 허리에 팔을 두른다.

    “밤에 머리카락이 피부를 스치는 게 좋으셔서 그렇죠?”

    설마 했는데 그걸 또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할 줄은 몰랐다. 잔뜩 당황한 류드밀라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다.

    “그것 말고도….”

    “머리가 짧아도 저는 여전히 저일 텐데요.”

    콧방귀를 뀐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그의 애칭을 부른다.

    “루샤.”

    “왜 그리 부르시나요, 부인?”

    다정하게 눈을 맞춰 온 루슬란은 그가 들을 말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다.

    “저도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기 전에 장난 그만 치셔요.”

    “제 머리카락에 그 정도로 진심이신 줄 몰랐네요.”

    지지 않고 투덜거리지만 그는 그 후로 머리카락을 자르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자 이나도 머리카락이 긴 아빠를 받아들이며 사건은 일단락된다.

    이나는 그림책도 혼자 넘기고 도와주면 옷을 벗을 수도 있을 정도로 자라난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는 걸 지켜보는 게 류드밀라의 소소한 행복이다.

    더 큰 행복은 아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루슬란이 가져다준다.

    “따님, 콩도 먹어야지요.”

    “싫어!”

    이나는 큰 소리로 외치고선 류드밀라의 눈치를 본다. 큰 보라색 눈을 데룩 굴리는 눈치가 심상치 않다. 주로 혼내는 사람이 그녀여서 그런지 아이는 루슬란을 만만하게 본다. 그녀는 교육적인 측면에서라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당황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 웃겨 아무 말도 안 한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도 아니었는데 루슬란은 여전히 딸 앞에서 쩔쩔맨다.

    “몸이 튼튼해지려면 채소도 잘 먹어야 해요.”

    그가 애써 달래자 이나가 몸을 마구 뒤튼다. 아기용 의자가 마구 덜거덕거리는 바람에 루슬란이 행여나 떨어질까 의자를 붙잡는다.

    “싫어요?”

    싫다고 더 말하려다 루슬란의 다급한 표정을 본 아이는 당황한다. 입을 벌리는 순간 류드밀라가 잽싸게 콩을 얹은 숟가락을 넣는다. 일단 입에 뭔가 들어오자 이나는 오물오물 씹어 넘긴다.

    “아이구, 잘했어요.”

    볼 살이 통통하게 올라 얼굴이 파묻힌 아기가 귀엽기만 한지 루슬란은 행복해한다. 이나가 입가에 묻힌 소스를 닦아 주는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내려갈 새가 없다.

    식사를 마치고 약속한 대로 그들은 이나를 연못으로 데려간다. 류드밀라가 수영을 배웠던 바로 그 연못에서 이나는 물장구를 치며 논다. 벌써 많이 기른 곱슬머리가 물미역처럼 퍼지는데 그걸로 또 제 몸을 감싸고 까르르 웃는다. 그러던 중에 좋은 생각이 났는지 루슬란의 머리카락을 물에 담갔다 빼며 장난친다.

    나중에는 아예 물에 몸이 뜨는 그의 배 위에 올라가 기묘한 뱃놀이를 즐기는 이나이다. 류드밀라는 어쩌다 강의 신이 이렇게 됐는지 걱정되지만 공교롭게도 그 걱정을 하는 사람은 그녀 혼자인 듯하다. 아이가 가자는 대로 연못에 누운 채로 헤엄치는 루슬란은 진정으로 즐거워 보인다.

    물 위에 떠서 배에 이나를 태운 그의 모습을 그녀는 영원토록 기억해 두고 싶다.

    이나는 무럭무럭 자라 이제는 끊임없는 질문으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류드밀라보다 루슬란이 질문을 받아 주는 데 능숙하자 그만 골라서 괴롭히기까지 한다.

    “강물은 왜 파래요?”

    빛의 서로 다른 파장 길이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해 주는 루슬란을 이나가 빤히 바라본다.

    “빛이 뭐예요?”

    어려운 질문이 아니라 그가 대답해 주자 아이는 손바닥에서 파란 마법을 만지고 논다.

    “그럼 이것도 빛이에요? 그런데 빛이 왜 제 손에서 나와요?”

    “그건 마법이란다.”

    루슬란이 훨씬 밝은 마법을 제 손에 띄우자 이나가 탄성을 내지른다.

    “아빠 마법은 엄청 예뻐요.”

    류드밀라는 아이가 벌써 마법을 쓰는 것이 신기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본다. 그때 이나가 눈썹에 힘을 주더니 제 마법도 밝게 만들려고 애쓴다. 얼굴이 찡그려지고 몸이 떨리는 양이 불안해 그녀가 다가올 그때 아이의 손 안에서 마법이 폭발한다.

    루슬란은 이나를 감싸 안고 폭발하는 마법을 다 제가 흡수한다. 무서워하는 이나의 감정이 마법을 더욱 증폭시키다가 겨우 제 풀에 지쳐 가라앉는다.

    그날은 울음을 쉽사리 그칠 줄 모르는 이나를 달래랴, 놀라서 창백해진 루슬란을 돌보랴, 류드밀라에게 하루가 바쁘게 흘러간다. 고민 끝에 그들은 이나를 산신에게 소개시키기로 결정을 내린다. 일주일에 한 번 성역으로 보내 마법을 배우게 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둘만 있는 시간도 늘어난다. 류드밀라는 이나를 낳은 후 거의 처음으로 루슬란과 단둘이 긴 시간을 보낸다.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변화한 삶이 얼마나 좋은지 도란도란 말을 나누다 보면 어느새 이나가 돌아올 때가 다 되어 있다.

    “이나에게 동생이 필요해 보이지 않나요?”

    하루는 이나가 성역으로 떠난 후 류드밀라가 말을 꺼낸다. 루슬란은 강물이 넘실거리는 창에 마주 앉아 몸을 기대 온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냥 이나가 아니라 제가 그랬던 걸 수도 있어요. 전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마법에 걸려 저택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물에 손을 넣고 그녀가 장난친다. 제게 튀기는 물방울들을 족족 공중에 띄워 흘려보내던 그는 그녀의 귀에 밀어를 속삭인다.

    귀까지 달아오른 류드밀라가 밀어내려 하자 조금 더 순한 말을 흘린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따님에게 동생이 생기려면 그래야 하는걸요.”

    귓바퀴를 날카로운 송곳니로 안 아프게 깨물다 그의 키스는 아래로 내려간다. 류드밀라를 창가에 앉혀 놓고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젖힌다. 그녀가 정신을 차려 보니 속옷은 어느새 바닥에 떨궈져 있다.

    “아, 읏….”

    혀가 아래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고 그녀는 다리로 그의 어깨를 휘감는다.

    “전부터 젖어 있던 것 같은데, 설마 아까 제 말 때문에….”

    류드밀라는 짓궂은 미소를 그대로 돌려주며 말을 가로챈다.

    “아기를 만드는 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루샤.”

    눈을 반짝이며 저를 놀리는 모습이 숨 막히도록 아름답다. 루슬란은 고혹적인 미소로 장난을 여유롭게 넘긴다. 몸을 일으키곤 그가 잔뜩 성이 난 제 것을 꺼낸다.

    “제가 그만 정을 통하는 법을 다 까먹었나 봐요.”

    성의 없이 쓸어 올려도 루슬란의 것은 거대해진다. 류드밀라는 그의 입가에 묻은 애액을 닦아 내며 한마디 던진다.

    “거짓말.”

    “어떻게 아셨죠?”

    그가 그녀의 안으로 들어오며 대답은 신음과 섞인다. 대신 다른 말들이 거친 숨과 함께 톡톡 튀어나온다.

    “더, 더 해 주셔요. 더 깊숙이요….”

    그 후로 루슬란은 한 번은 침대로 데려가, 한 번은 잠들려는 류드밀라를 달래 두 번이나 더 정을 통한다. 녹초가 된 그녀에게 이불도 꼼꼼히 덮어 준 그는 이나를 마중하러 나간다.

    “엄마는 어디 계시나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이나는 류드밀라부터 찾는다.

    “피곤해서 주무시고 있답니다. 오늘은 산신께 무얼 배웠나요?”

    “보여 드릴까요?”

    루슬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나는 잔뜩 신이 나 그를 저택 밖으로 잡아끈다. 아이가 손에서 마법을 불러내자 민물고기들이 잔뜩 모여든다. 개중에서는 지느러미를 다친 녀석도 있다. 이나가 고사리 손으로 다친 물고기를 감싸자 파란 기운이 더욱 밝아지며 상처가 아문다.

    뿌듯해하며 올려다보는 아이의 머리를 그는 다정히 토닥인다.

    “나중에는 아빠와 함께 강을 돌보아도 되겠는데요?”

    “정말요?”

    놀라서 올려다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잔뜩 커져 있다. 루슬란이 고개를 끄덕여 주자 이나는 제자리에서 핑그르르 돌 정도로 좋아한다. 강물 속이라 뛰어오르는 대신 그러는데 시간이 지나도 아이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는다. 산신이 혹시 단 과자를 먹이진 않았는지 의심하던 그는 일단 저택에 데리고 돌아간다.

    저녁 늦게까지 떠들고 뛰어다니다 지친 이나가 마침내 잠이 든다. 낮에 자서 잠이 오지 않는 류드밀라는 루슬란과 정다운 시간을 보내고 새벽에야 침대로 향한다. 그렇게 이나의 동생이 생기기에 전혀 부족함 없는 시간이 흐른다.

    열 달을 꽉 채워서 태어난 아기는 은발에 은색 눈을 하고 있다. 남동생을 보고 이나는 상당히 얌전해진다. 작게 꼬물거리는 손과 앙증맞은 발이 신기한 듯 한참이나 보고 있는다. 저 작은 손에도 다섯 손가락이 다 있네요, 라는 말로 지쳐 있던 류드밀라에게 웃음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얘는 이름이 뭐예요?”

    류드밀라가 쉴 동안 아기를 안아 든 루슬란이 이나에게로 고개를 돌려 싱긋 웃는다.

    “알릭이에요. 수호자라는 뜻으로, 알릭.”

    아이는 신기하다는 듯 얼마 자라지 않은 아기의 머리털을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엄마 머리카락이랑 같은 색인데 달라요.”

    “곱슬기가 없는 건 아빠를 닮지 않았나요? 눈도 그렇고요.”

    “눈을 아직 제대로 못 봤어요. 자는 것밖에는 못 봐서요.”

    대답 대신 루슬란은 새근새근 자는 아기를 안고 창가로 간다. 류드밀라가 침대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창을 열고 강물 한 줌을 떠다 아기의 이마에 문지른다. 이나가 태어났을 때도 똑같이 했던 의식이다. 찬 기운에 아기가 깨어나 칭얼거리자 이나는 탄성을 내지른다. 맑은 은빛 눈이 아빠를 닮은 게 예쁘다고 아이는 생각한다.

    알릭의 이마에 닿은 강물은 파란 문양을 남기며 반짝이다가 흐려진다. 핏줄로 이어지는 마법 능력 말고도 제 권능을 아기에게 나눈 루슬란은 류드밀라를 돌아본다.

    “우리 아드님이 부인을 똑 닮았네요. 제가 좀 더 안고 있을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이나 때와 다르게 좀 힘드네요.”

    그는 침대 가로 가서 류드밀라 옆에 걸터앉는다. 이나도 침대에 올라와서 궁금한 듯 루슬란의 옷자락을 잡아끈다.

    “아빠, 저는 그럼 누구를 닮았나요?”

    그가 답하기 전에 류드밀라가 살포시 웃으며 딸의 반대 손을 잡아 준다.

    “우리 따님은 아빠를 닮았죠. 눈썹도 진하고, 입술도 웃는 상이고.”

    “그럼 아빠는 누구를 닮은 거예요? 아빠한테도 아빠가 있어요?”

    그 문제에 관해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그녀는 당황한다. 이번에는 루슬란이 나선다.

    “직접 낳아 주신 건 아니지만 제게도 부모가 있답니다.”

    “저도 처음 듣는 사실이에요, 루샤….”

    약간 미안해하는 고운 목소리에 그가 류드밀라의 이마에 입맞춤을 남긴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으니까요. 산신님이 제 아버지이고 바다의 여신님이 제 어머니랍니다. 전 강이니, 산과 바다에서 태어난 것이 맞지요.”

    “한 번도 그리 부르는 걸 듣지 못한 것 같아요.”

    “신들이니 저도, 그분들도 그런 호칭을 어색해한답니다.”

    신기해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류드밀라는 곧 지쳐서 잠에 빠져든다. 아기와 함께 이나를 데리고 루슬란은 침실을 나온다.

    “아기가 정말 얌전해요.”

    “따님은 아기 때 이러지 않았어요.”

    장난스레 대꾸한 루슬란을 보고 이나가 눈썹을 찡그린다.

    “정말요?”

    “네, 어찌나 성질을 부리고 떼를 써 대던지. 게다가 짓궂은 장난도 많이 쳤답니다.”

    흠, 소리를 낸 아이는 팔짱을 끼고 알릭을 올려다본다.

    “제 남동생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글쎄요. 우리 따님도 아빠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야 할 텐데.”

    루슬란이 한쪽 무릎을 꿇고 이나에게 아기가 더 잘 보이게 해 준다. 이나는 아기의 가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겨주며 진지한 말을 건넨다.

    “알릭, 너는 절대로 말썽 부리면 안 돼, 알겠지?”

    아까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려 하던 참이던 아기는 누나를 보고 손을 뻗는다. 검은 머리카락 타래를 잡아당기는 게, 꼭 이나가 어렸을 때 하던 짓이랑 똑같다.

    “아야야!”

    루슬란과 달리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이나가 아기의 손을 뿌리친다. 짜증 내지도 않고 알릭은 그저 울먹거리기만 한다. 그런 남동생이 불쌍해져 아이는 머리카락을 다시 순순히 내어 준다. 남매의 그런 양을 지켜보던 루슬란이 이나를 부른다.

    “따님, 동생을 안아 볼래요?”

    “네!”

    그 말이 나오길 고대했다는 듯 아이가 팔을 내민다. 잘 안는 방법을 가르쳐 준 루슬란이 알릭을 넘긴다. 이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 안듯 아기를 둥기둥기 어른다. 류드밀라가 그 모습을 보면 참으로 좋아하겠다고, 그는 그녀가 깨어나면 이 일을 말해 줄 것을 다짐한다.

    “아까 강물은 왜 이마에 묻힌 거예요?”

    이나가 알릭의 이마에 입을 쪽 맞추더니 물어 온다. 루슬란이 이유를 설명해 주자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마에서 다시 그 문양을 찾으려 해 본다. 그러다 포기하곤 알릭을 다시 그에게 넘겨준다.

    “아빠가 강의 신이면 그럼 엄마는 무슨 신이에요?”

    “엄마는 신이 아니랍니다. 인간인데, 아빠와 연이 닿아 이렇게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거예요.”

    이나가 갑자기 다 안다는 듯 의젓한 얼굴을 한다.

    “아빠가 엄마를 많이 좋아했나 봐요.”

    뜻밖의 말에 루슬란은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럼요, 그럼. 지금도 사랑하고 있지요. 우리 따님도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거예요. 그때는 아빠가 엄마에게 했듯 많이 아껴 주고 행복하게 살면 되어요.”

    “꼭. 꼭 그럴 거예요.”

    이나는 아빠의 다리에 매달려 미래를 그려 본다. 그녀가 아빠만큼, 엄마만큼 커져서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는 미래를. 지금도, 그때도 정말 행복할 것 같다.

    ***

    하루는 루슬란이 류드밀라가 알릭과 쉴 동안 이나를 데리고 강가로 산책을 나온다.

    “따님, 나온 김에 강 구경을 더 하다 갈까요?”

    딸을 더 데리고 다니고 싶은 그가 욕심을 부린다. 이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낸다. 루슬란은 아이를 데리고 강 물살을 따라가며 이것저것 설명해 주고 질문에도 답해 준다. 사람 사는 마을을 지날 때에는 모습을 숨기는 마법을 쓰는 것도 잊지 않는다.

    바다로 통하는 강 하구에 다다르자 이나는 신기한지 말이 없어진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기억해 두려는 듯 집중하기도 한다.

    “아빠, 여기는 물이 달라요!”

    “바다라서 그런 거예요. 바닷물은 염분이 녹아 있어….”

    루슬란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이나가 얕은 물가로 가더니 순식간에 모래사장을 내달린다. 걱정이 된 그가 따라 나가며 보호 마법을 두르는데 아이의 발밑에서 모래 소용돌이가 작게 일어난다. 새하얀 모래가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이나를 홀려 버린다.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소용돌이를 지켜보던 이나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진다.

    “따님!”

    소용돌이에서 뭐가 나타났는지 보지도 못하고 바로 딸을 감싸 안은 루슬란의 귀에 짓궂은 키득거림이 들려온다.

    “너도 딸이 어지간히 걱정되긴 하나 보구나, 응?”

    바다의 여신 나이나가 모래로 뒤덮인 황금색과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다. 그녀의 손목에는 아까 이나를 놀랬던 황금 뱀이 감겨 있다.

    “그걸 아시면 이런 장난은 안 해야 맞는 거 아닙니까?”

    날 선 목소리에도 나이나는 꿈적도 안 한다.

    “그냥 네 딸을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야. 나도 손녀를 봐야 하지 않겠어?”

    혈연이 아닌 신들의 관계로만 모자라고 엮인 그들이지만 나이나는 이나를 흥미로워 한다. 루슬란의 품에 안겨 딸꾹질을 하는 아이에게 여신이 장난스레 눈을 찡긋한다.

    “손녀는 무슨 손녀입니까. 관심 끄시죠.”

    무뚝뚝한 대꾸에도 나이나는 이나를 요모조모 뜯어본다. 그러다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짝 친다. 계속 히끅거리는 아이에게 여신이 고개를 들이민다.

    “우루루, 까꿍!”

    “그거 할 나이는 지났습니다.”

    “매몰차긴. 네 아비도 도통 손녀를 볼 시간이 적다고 투덜대던데.”

    여신이 긴 손톱으로 긁히지 않게 이나의 뺨을 콕 찔러 본다. 젖살이 빠지지 않아 폭 들어가는 피부가 신기한 모양이다.

    “산신이 강의 딸을 오래 봐서 뭐 어쩌려고 그런답니까.”

    모처럼 딸과 보내는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인다. 루슬란의 빈정 상했다는 태도는 이나의 질문 하나에 무너져 내린다.

    “할무니예요?”

    잠시 정지한 상태로 있는 여신의 팔에서 황금 뱀이 스르르 몸을 푼다. 류드밀라가 나이나에게 넘긴 이후로 얌전히 지냈건만 이 말만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황금 뱀이 박장대소를 하며 바닥을 굴러 댄다.

    다시 놀라고 만 이나가 딸꾹질을 뚝 그치고 루슬란의 눈치를 살필 동안 황금 뱀은 바닥을 마구 두드린다. 모래가 폴폴 날리며 루슬란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럼요, 따님. 할무니지요.”

    “난 할머니가 아냐. 할무니는 더더욱 아니고.”

    치사하고 더러운 말을 들은 듯 나이나가 인상을 구긴다. 입 안에 들어간 모래알 하나를 거슬려하는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여신은 턱을 높이 든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좋자 이나는 모래 바닥을 뒹구는 황금 뱀에게 손을 퍼덕인다.

    “아조씨다, 아조씨!”

    숨이 턱 막힌 황금 뱀은 똑바로 일어서서 눈을 부릅뜬다. 이미 그들이 악의가 없다는 걸 알아챈 이나는 그래도 즐거워하며 웃을 뿐이다.

    “표독스러운 것 같으니라고.”

    황금 뱀이 독니를 드러내고 쏘아붙인다. 이미 루슬란의 송곳니에 익숙해진 이나는 손을 뻗고 기겁해서 입을 다문 쪽은 오히려 황금 뱀이다.

    하루 사이에 이나는 바다의 여신을 충격에 빠트리고 황금 뱀 신수를 당황하게 만든다. 슬슬 배가 고파 와 그만 가자고 루슬란을 조르는 아이에게 여신과 뱀은 이미 관심 밖이다. 그러던 와중에 눈에 뭔가가 들어온다.

    화려한 가시가 달린 소라고둥이 해변에 밀려와 있던 것이다.

    “아빠! 아빠 저거요!”

    마법으로 가져오려고 애를 쓰다 포기한 이나가 루슬란의 귀를 대충 잡고 흔들어 주의를 돌린다. 그 모습이 고소하다는 듯 나이나는 웃지만 무시당한다.

    “가져와 줄까요?”

    “네, 네! 엄마께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기특하기도 하여라.”

    아이의 품에 소라고둥을 안겨 준 루슬란이 나이나를 돌아본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엔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네 바람은 하등 중요치 않다는 걸 알고 있잖니.”

    다정한 작별 인사를 나눈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를 노려보다 멀어진다.

    루슬란과 이나는 강을 거슬러 저택으로 돌아간다. 깨어난 류드밀라가 저녁을 같이 먹으려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푸짐한 저녁을 먹은 후 숨겨 놨던 소라고둥을 이나는 자신만만하게 류드밀라에게 건넨다.

    “엄마께 드리려고 바다에서 가져왔어요!”

    놀라서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소라고둥을 받아 든다. 옛 기억을 떠올린 류드밀라가 눈물을 글썽이자 이나가 당황한다.

    “좋아서 그래요, 좋아서. 우리 딸이 다 컸구나 정말.”

    “그럼 다 컸죠.”

    말과 달리 엄마 품에 안겨 얼굴을 부비며 이나는 어리광을 부린다. 그들을 지켜보는 루슬란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어려 있다.

    이나가 잠들고 난 후에도 류드밀라는 소라고둥을 생각에 잠겨 어루만진다. 침대 옆자리에 기대앉은 루슬란이 그녀를 유심히 보다 말을 꺼낸다.

    “예전 일이 생각나서 그러셔요?”

    “네, 잠시 생각이 많아졌어요.”

    “어떤 생각이요?”

    마침내 그를 돌아본 그녀가 눈을 천천히 깜박인다.

    “전에 다른 소라고둥을 불었을 때, 그때는 제 미래를 상상도 못 했어요. 한 치 앞도 두려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었죠.”

    안타까운 마음에서 출발해 어깨에 둘러진 손을 꼭 잡고 류드밀라는 말을 이어 나간다.

    “그런데 지금은 루샤와 함께할 미래가, 진심으로 기대되어요.”

    조심스럽지만 구김살 없이 활짝 웃는 얼굴이 행복해 보인다. 루슬란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쇄골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그녀만 들을 수 있게 속삭인다.

    “저도요. 그대와 함께할 억겁의 세월이, 정말로 소중한 걸요.”

    루슬란과 류드밀라, 이나와 알릭 넷은 그 후로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강가의 윤슬처럼 반짝인다. 즐거운 나날들이 물살을 거스르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빛날 모든 때에,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아껴 주고 사랑할 것이다.

    -다정하지만 상냥하지는 않은 그대에게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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