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나를 알아 가는 길
배고픔에 못 이겨 블루베리 한 줌을 입에 털어 넣고 류드밀라는 바구니를 든 채 밖으로 나선다. 오두막 문가에 잠시 서서 따스한 햇살로 나른한 주위를 둘러본다. 분명 정자에서 돌아올 때는 시내에 아무도 없었는데 지금은 루살카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물에 젖은 매끈한 피부가 그들의 미소만큼 눈부시게 빛난다.
시내 주변에는 거대한 호랑이와 여우들도 모여 있다. 류드밀라가 마주 손을 흔들며 다가가자 여정을 함께했던 영물들이 인간의 형상으로 변한다.
“오랜만이에요, 다들.”
영물들은 전부 여전하다. 무뚝뚝한 자디라, 새침한 리사와 까다로운 레사, 장난기 가득한 루살카들까지. 그녀는 바구니에 든 과일을 먹으며 그들과 담소를 나눈다. 정말 집인 듯 편안하다. 생의 많은 날들을 보낸 황궁도 이만큼 아늑하지는 않았는데 절로 긴장이 풀어진다.
어린 루살카가 튀기는 물을 맞고 웃음을 터트릴 때는 저주도 봉인도 모두 잊을 만큼 즐겁다. 영물들도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루슬란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해가 천천히 언덕 너머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을 둘러보다 류드밀라는 이제 가야겠다고 말을 꺼낸다.
“그럼 이제 뭐 할 거예요?”
어린 루살카가 몸을 물속에서 뒤집으며 묻는다. 자기들과 더 놀자는 투정이 잔뜩 담긴 질문이지만 류드밀라에게는 다르게 여겨진다. 루살카들의 유혹을 상냥하게 넘기고 오두막 방으로 돌아온 그녀의 머릿속에 자꾸 그 질문이 맴돈다.
어젯밤 두려웠던 시간들 후로 그녀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길 미뤘다. 101일 후 정화 의식이 있을 그날을 미리 떠올리길 멈췄다. 그런데 이제는 더 먼 훗날을 감히 그리고 싶다. 만약 모든 일이 잘 풀려 루슬란이 저주에서 벗어난다면,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사서 걱정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다. 루슬란이 저주에서 풀려나는 날. 그들이 나아갈 길에 대해 고민할 날. 함께할 날들의 방향을 걱정하는 것이 그녀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앓는 것보다 행복하다.
그래서 류드밀라는 저녁 내내 루슬란이 저주에서 풀려나는 순간을 마음속으로 그리고 또 그린다. 오전에 그녀의 몸을 훑고 빠져나간 그 산의 마법이 루슬란에게로 닿아 그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모습을 상상한다. 동화책에 나오는 숲속의 공주가 깨어나듯 그의 눈이 떠질까?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그를 안아 줄까?
그는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할까?
희망을 담은 물음표들이 가슴을 채울수록 공허해진다. 류드밀라는 방에서 멍하니 있기를 그만두고 조심스레 문을 연다. 다른 일을 뭐라도 해야 이 빈 감정이 채워질 것 같다.
사슴 영물이 차려 준 소박한 저녁을 먹고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는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루살카들이 물가에서 곱게 땋아 풀꽃으로 장식해 줬는데 이제 자려면 풀어야 한다. 벌써 시들기 시작한 꽃을 머리맡에 조심히 둔다. 그러다 생각은 다시 흘러 루슬란이 황궁의 후원에서 그녀에게 만들어 줬던 화관이 떠오른다.
계절은 봄이었는데 화관은 때 이르게 핀 여름 꽃들로 화려했다.
그때는 마냥 기쁘고 좋았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선물할 만큼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 화관만큼 제 처지를 잘 나타낸 것도 달리 없는 듯하다.
자연스럽게 난 것이 아닌 인위적인 손길로 길러진 생명. 결국은 남을 위해 꺾이고 마는 꽃들. 마녀들의 손에 길러져 교배만을 위해 살아온 그녀와 닮아 있다.
갑자기 왜 스스로의 운명을 비관하게 되었는지 류드밀라는 잘 모른다. 그저 저녁과 밤이면 늘 찾아오는 감성에 젖어서일 수도 있다. 지치고 버거운 심정에 불쑥 생겨난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다.
그날 밤을 슬프게 물들인 감정은 두려움도 아닌 우울감이다.
두려움은 무언가를 하게 만들지만 우울감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듦을 류드밀라는 안다. 잠들기 전까지 그걸 떨쳐 내려 노력해 보지만 잘되지 않는다.
***
그 후로 며칠은 물 흐르듯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이다. 류드밀라는 오전에는 산신과 마법 전달을 연습하고 오후는 영물들과 함께 보낸다. 우울함은 때때로 그녀를 찾아온다. 그러나 무력감은 온종일 지속된다. 마법 연습이 끝나면 견딜 수 없는 자괴감과 슬픔에 빠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몽유병이 시작된 것도 그쯤이다.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냇가에 팔을 베고 누워 있다. 시내에 들어갔다 나온 것인지 허리까지 젖어 있는 데다 발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다. 놀라고 추워 몸을 떠는 그녀에게 루살카들이 손을 뻗는다.
“혼자 눈을 감고 돌아다니길래 우리도 무서웠어.”
“자고 있었던 거야?”
“인간이 자면서 움직인단 소리는 못 들어 봤는데.”
달빛에 빛나는 그들의 희멀건 피부에 두려움이 왈칵 밀려와 류드밀라는 일어선다. 오두막으로 돌아가 놀란 마음을 가라앉혀 보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 일은 매일 밤까지는 아니어도 왕왕 일어난다. 몽유병을 앓은 날이면 낮에 피곤하여 현실도 꿈처럼 나른하게 흘러간다. 그래서 결국 낮잠을 깜박 졸고, 밤에는 더더욱 잠을 못 이루다 늦게 잠들게 된다.
악순환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이미 무력감에 전 몸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는 와중에도 밤마다 걷는 거리가 멀어지고 루살카들도 잠들어 있어 그녀를 깨우지 못한다. 그래도 류드밀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잠을 못 잘수록 우울함이 찾아오는 빈도는 때때로에서 자주로 변한다. 그와 함께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어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류드밀라는 평소와 다른 곳에서 깨어난다. 몸을 스치는 바람이 성역 안과는 다르게 싸늘하다. 그녀는 잠이 달아난 상태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녀가 있는 곳이 항상 달빛으로 밝던 성역이 아니란 사실이 바로 와 닿는다. 손에 닿는 흙바닥의 거침도, 우거진 나무 사이로 희미한 달빛도 모두, 그녀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려 준다.
성역 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산에는 요괴들이 살고 그것들에 대한 기억이, 다친 루슬란과 산을 오르던 기억이 떠오르며 그녀는 몸서리를 친다. 손으로 바닥을 짚고 서둘러 일어서는데 눈앞이 핑 돈다. 시야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와중에 역한 냄새가 코끝에 끼쳐 온다.
벌써 늦은 것이다. 류드밀라는 비명을 삼키며 주변을 다시 둘러본다. 요괴가 있는 방향을 모르니 어디로 도망칠 수도 없다. 성역에서 누군가 도우러 오지 않을까. 그러나 영물들은 자고 있을 테고 아무리 산신이라도 성역 밖에서 그녀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대로 죽겠다는 공포 속에서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다. 손가락을 무언가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들어 서둘러 거둬들여 매만지는데 풀 반지가 손에 잡힌다. 여정에서 들판의 정령 폴레보이가 준 반지이다. 그동안 뺀 적도 없이 차고 있어 존재감이 희미해져 있었다. 남은 여행길을 지켜 줄 거라던 정령의 말이 불현듯 떠올라 류드밀라는 숨을 짧게 들이마신다.
제발, 제발. 그녀는 사람들이 어려울 때 찾는다는 천신 대신 들판의 정령에게 부탁하며 반지를 쥔다. 역한 냄새는 점점 강해지고 거칠게 으르렁대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손이 덜덜 떨려 자꾸만 엉뚱한 곳을 잡고 만다. 식은땀으로 축축한 손가락에서 반지는 빠지는 대신 들러붙는다.
너무 무서워 눈물도 나지 않는 상태로 류드밀라는 반지를 겨우 빼낸다. 그때 무언가 덤불 사이에서 펄쩍 뛰어오른다. 반사적으로 움켜쥔 손 안에서 바스러지는 감촉이 느껴진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이번에는 울음이 터져 나온다. 뿌연 시야로 형태를 잃은 반지가 손바닥에 들러붙은 것이 보인다.
안에서 황금색 마법이 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희미해지는 마법을 움켜쥐려 노력한다. 산신이 강조했던 평온한 상태이긴커녕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 뛰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마법을 담아내려 해 본다.
덤불에서 튀어나온 요괴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어둠 속에서 보인다.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악취가 폐를 따끔거리게 만든다. 류드밀라는 눈을 감는다. 이젠 아무에게도 빌지 않고 저 자신에게 부탁한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눈을 뜨고 손가락을 편다. 찬 공기에 순식간에 말라 버린 반지 부스러기가 손가락에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간다. 어두운데도 그 조각들만은 잘 보인다. 요괴의 눈이 바로 근처에서 빛나서 그렇다는 걸 그녀는 알지 못한다.
대신 류드밀라는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는 걸 지켜본다. 바람이 불어 그녀의 몸 쪽으로 부스러기가 달라붙은 그 순간, 마법이 몸 안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녀는 분명히 느낀다. 들판의 풀을 흔드는 바람, 황금빛의 바다를 물들이는 석양, 허리께에 닿는 풀을 헤치고 걷는 폴레보이의 발걸음이 느껴진다.
마법은 그녀의 안을 가득 채우고 류드밀라는 처음으로 충만함을 경험한다. 마녀들이, 루슬란 님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이렇게 신비롭고 강함을 느꼈을까? 마법이 제 목숨을 구하리란 걸 앎에도 그녀는 마법이 몸을 떠날 때 아쉬움을 느낀다. 가슴 안쪽이 아끼는 이를 잃은 듯 저릿하다.
황금빛이 류드밀라의 주위를 감싸고 커다란 구체를 형성한다. 불에 덴 듯 놀라 도망치는 요괴들의 모습이 구체가 발하는 빛에 비춰진다. 주위가 고요해지고 악취마저 밤바람이 실어 갔을 무렵, 류드밀라는 뜻밖의 아늑함을 느낀다. 황금색 구체는 꿈에 나오는 듯한 빛무리를 두르고 일렁인다.
언제 마법이 사라질지 모르니 성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류드밀라는 흙바닥에 다시 몸을 누인다. 며칠간 시달린 심신이 잠을 간절하게 원한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구체가 내뿜는 마법의 온기를 즐긴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악몽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잠에 빠져든다.
그녀가 꾸는 꿈은 아른거리는 황금빛과 마른 풀의 다정한 냄새로 가득하다.
***
류드밀라는 오두막의 침대 위에서 깨어난다. 지난밤 일이 다 꿈이었나 싶다. 그러나 전에 풀 반지를 보고 꿈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듯이, 이번에는 풀 반지의 부재를 보고 꿈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반지 자국이 남은 손가락을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비춰 보는데 아래에서 쿵쿵대는 소리가 들린다.
산신이라면 바로 들어올 텐데. 의아하게 여긴 그녀가 아래층으로 나가 문을 열자 잔뜩 화나 보이는 자디라가 앞에 서 있다.
“대체 제정신입니까? 어젯밤에 성역 밖에서 잠드셨다면서요!”
류드밀라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시선을 잠시 내린다.
이어지는 자디라의 잔소리와 걱정에 류드밀라는 한동안 어쩔 줄 모르고 얌전히 있다. 드디어 호랑이의 거친 타박이 끝나자 그녀가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묻는다.
“혹시… 산신님은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자디라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아주 할 말이 많아 보이지만 호랑이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갯짓을 한다.
“언덕 위 정자에 계십니다.”
감사 인사를 하고 서둘러 언덕을 오르는 류드밀라의 뒷모습이 멀어진다. 지금 그녀에겐 어떤 말을 해도 안 먹히리란 것을 알아 자디라는 붙잡지 않는다.
언덕을 오르며 류드밀라는 전날 밤 일을 다시 떠올린다. 손 안에서 바스러지던 반지의 감촉이 생각나자 그때의 두려움이 생생해 다리가 절로 떨린다. 그러나 후에 몸을 뒤흔들어 놨던 바람과 석양과 걸음의 황금빛이 그녀로 하여금 설렘을 품게 한다.
마법이 그녀의 안에서 자라나고 소용돌이치는 것을 다시 느끼고 싶다. 아주 오랫동안 해소하지 못한 결핍이 채워지길 바랐다. 그래서 그녀는 들뜬 마음을 품고 거의 뛰듯이 오르막길을 오른다.
정자에 다다르기 직전, 류드밀라는 깨닫는다. 요 며칠간 옷에 밴 탄내처럼 주위를 감싸던 우울감이 사라졌음을.
정자 안 의자에 앉아 있던 산신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변함없이 인자한 얼굴에도 류드밀라는 뒤늦게 초조해진다. 성역 밖에서 일어난 일을 이미 알고 있을지, 자디라처럼 타박하지 않을지 걱정된다.
“내가 어젯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모험을 겪고 왔더구나.”
재미있어하는 어투여서 그녀는 일단 안심하고 본다. 당장은 뭐라 꾸짖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산신이 권한 맞은편 자리에 걸터앉은 그녀가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인다.
“어젯밤 어디를 다녀오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산의 동굴에 다녀왔다. 봉인된 강의 아이를 확인하러 갔었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눈을 천천히 깜박이다 그녀는 시선을 내린다. 궁금증보다 그간 겪었던 마음고생이 더 심해 차마 더 자세히 묻지 못하는 얼굴이다. 그 심정을 헤아리고 산신은 말을 아낀다.
“들판의 정령이 준 풀 반지를 잘 활용했는데, 그보다 내 마법이 더 전달하기 쉬울 거다.”
대신 대화 주제를 돌린 산신은 류드밀라를 유심히 바라본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한 것과 지금 노력하는 것은 다를 수 있어. 그럼에도 이미 성공한 경험이 생겼으니 한 단계 발전한 거라고 볼 수 있다.”
류드밀라의 표정이 밝아진다. 바로 하루 전까지만 해도 뚜렷이 그녀를 뒤덮었던 무기력감 대신 다른 감정이 보여 산신은 미소 짓는다. 그는 손을 내밀어 류드밀라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늘 했던 것처럼 반대 손을 포개 산의 마법을 그녀에게로 흘려보낸다.
그녀는 전날 밤을 떠올리며 집중하려 해 본다. 그러나 기대로 부푼 마음은 오히려 산만하게 흩어진다. 마법 또한 샘물의 달콤함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그 후로도 류드밀라는 여러 번 시도하지만 매번 실패하고 만다. 분명 산신은 산의 마법을 전달하는 것이 더 쉽다 했는데 실망감이 무겁게 그녀를 짓누른다.
그날도 류드밀라는 성공하지 못한 채 연습을 마무리한다. 혹시 몰라 조금 더 하면 안 되냐는 말에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무리하지 말라며 산신이 덧붙여 이야기해도 그녀의 울상인 얼굴은 펴지지 않는다. 평소처럼 오두막으로 돌아가려다 결국 그녀는 산신을 돌아본다.
“뭐가 문제인 걸까요? 어젯밤과 오늘이 뭐가 다른 거죠?”
힘없는 목소리에 산신은 고개를 천천히 내젓는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거라.”
“조급해하는 게 아니에요. 벌써 이걸 배운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저는 산신님의 마법을 조금도 전달할 수가 없어요. 첫 단계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정말 어쩌면 좋아요?”
류드밀라는 산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마구 쏟아 낸다. 감정을 이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이성을 잃을 것만 같다.
“평온한 마음이 부족해서라기엔, 어젯밤엔 전혀 평온한 상태가 아니었어요. 간절함이 부족하다고 하기엔, 제가 살아오며 이토록 간절했던 적이 없다고요. 저는 루슬란 님을 구하고 싶어요. 저주를 풀고 그분을 다시 보고 싶어요. 그냥 그거 하나를 바랄 뿐인데, 이게 이렇게 힘들어도 되나요?”
“네가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힘들지 않아. 넌 언제든지 포기하고 네 삶을 살아갈 수 있어. 내가 말해 주고 싶은 건 그 사실 단 하나이다.”
산신의 차분한 대꾸에 그녀는 온몸을 바르르 떤다. 슬픔이 분노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다.
“전 그러기 싫어요! 포기하고 제 삶을 살라고요? 그건 제 삶이 아니에요. 노력하지도 않고 포기해 버리면 전 영영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마지막 한 번만 더 해 볼게요. 오늘을, 오늘을 이대로 보내긴 싫어요.”
이번에 산신은 그녀를 말리지 않는다. 일어서서 정자 밖으로 나온 산신이 그녀의 손 위에 마디가 불거진 손을 포갠다. 산의 마법은 다시 한번 류드밀라의 몸을 훑고 그녀는 어느새 나온 눈물이 뺨 위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낀다.
전에 연습하던 내내 그녀는 바스러진 풀 반지의 감촉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전날 밤, 성공했던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려고만 했었다. 이번에는 축축함이 뺨 아래로 번지는 감각을 곱씹는다. 감정의 부산물인 눈물을 느끼자 역설적으로 잡생각이 사라지고 마음이 안정을 찾는다.
그리고 마법이 류드밀라의 몸을 타고 흐른다. 산이 그녀와 함께 살아 숨 쉰다. 거대한 흙덩이 사이를 파고든 뿌리처럼 혈관 곳곳으로 맥이 뛴다. 그녀의 손끝에서 익숙한 초록색 빛줄기가 처음에는 가늘게, 점점 밝아지며 나오기 시작한다.
빛줄기를 받아 다시 흡수시킨 산신이 만족스러워한다. 류드밀라는 부족한 숨을 크게 들이쉰다. 성공하면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아직도 평온함이 유지된다.
“평온을 찾는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란다. 네 경우에는 한 가지 감각에 집중하며 과정이 촉진되는데, 때마다 감각이 달라질 거야. 어느 상황에서도 너만의 감각을 찾을 수 있게 내일부터 연습하자꾸나.”
류드밀라는 아직도 산의 정기에 휩싸인 기분으로 인사를 한다. 그러곤 산양의 모습을 하고 정자에서 멀어지는 산신의 모습을 지켜본다. 제 감정을 폭발시킨 것이 산신이 준 단서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몇 주 동안 매일같이 마주하며 조금 덜해졌던 신이라는 거리감이 다시 생겨난다.
잠시 든 거리감과 경외심도 잠시, 그녀는 오두막으로 향하며 산신의 말을 곱씹는다.
처음으로 다음 날 아침 하게 될 연습에 대한 기대감이 피어오른다. 몇 주간 잊고 살다 어젯밤 오랜만에 되찾은 희망이 조금 더 진해진다. 이대로 가면 루슬란을 다시 보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 류드밀라는 영물들을 보러 가지 않는다. 대신 혼자 들판을 거닐며 산신이 말한 감각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풀 반지가 바스러지던 감촉과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축축함. 다음번에는 또 어떤 것이 촉진제가 될지.
고민을 거듭하였지만 잠들기 전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결국 루슬란이다. 검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머리칼과 온 세상의 은빛이 일렁이던 눈이 류드밀라의 꿈을 어지럽힌다.
***
아침 공기가 기분 좋은 꿈을 걷어 가 류드밀라는 눈을 뜬다.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언덕을 올라 정자로 걸음을 옮긴다. 여느 때처럼 산신이 그녀를 반겨 준다. 그들은 마법의 종류를 달리해 가며, 감각을 달리해 가며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난 어느 시점에 산신이 진지한 음성으로 류드밀라에게 말한다.
“이제 네가 전달하는 마법의 양을 늘려 보자꾸나.”
그때부터 산신은 영물들에게 말해 류드밀라의 몸도 단련시킨다. 처음 해 보는 동작들을 따라 하고 나면 온몸이 쑤셔 침대에서도 뒤척이는 것이 일상이 된다. 게다가 옮기는 마법의 양이 늘자 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피로감이 생긴다. 마법이 몸을 훑고 간 후유증은 몸이 건강해질수록 적다고 산신이 설명한다.
그러나 겨우 몸이 적응하기가 무섭게 마법의 양이 늘어 피곤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대체 양을 이렇게 늘리면, 처음 시작할 때 느꼈던 것은 마법이 맞는지도 의문이 든다. 그건 마법이 아니라 마법의 쪼가리가 아니었을까.
절망과 무기력감에 빠져 지냈던 제가 아주 옛날에 존재했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무렵엔 세 달이 흘러 있다.
“얼마 안 남았네요.”
그날도 아침에 연습을 하러 간 정자에서 류드밀라가 산신에게 말을 건넨다.
“보름하고도 일주일이 남았구나.”
얼마 안 남았다고 했을 뿐이지 정확한 날짜를 같이 세고 있던 그녀는 한숨을 푹 쉰다. 정말 산신의 말대로 보름하고도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날짜는 날짜일 뿐이고 연습에 집중하면 되는 것인데 그날따라 유독 마음잡기가 힘들다. 산신은 집중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며 그녀를 정자 밖으로 내몬다. 등 떠밀려 나온 류드밀라가 정자 안을 돌아본다.
“핀 님?”
“왜 그러냐.”
“루슬란 님을 보고 싶어요. 동굴로 가는 길을 알려 주세요.”
말려도 그의 말을 들을 것 같지가 않아 산신은 몸을 일으킨다.
“내가 데려다주마.”
“감사해요.”
싱긋 웃은 류드밀라가 산신 옆으로 가 선다. 용기 있게 미소를 띠었지만 그녀가 이 부탁을 하기까지는 많은 두려움의 방해를 받았었다. 봉인된 루슬란은 어떤 모습일지부터 안 본 지 오래되어 그를 향한 감정이 더 이상 들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는지까지. 온갖 공포가 날뛴다.
그래도 그녀에겐 세 달 동안 배운 것이 있었다. 감정을 다스리고 잠재우는 방법도 그중 하나였다. 류드밀라는 제일 최근에 마법을 전달하며 느낀 감각을 떠올린다. 맨발을 찌르는 잔디의 부드러운 따끔거림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산신을 따라 이동한 곳은 거대한 동굴 안이다. 커다랗게 자라난 종유석 사이로 걷다 보니 빛이 천장에서 들어오는 호수가 펼쳐진다. 아무런 의심 없이 산신을 따라 호수 가장자리에 선 류드밀라는 날카로운 숨을 들이켠다.
호수 가운데에 루슬란이 가라앉아 있다. 물이 맑아 훤히 보이는 호수 바닥에 눈을 감고 손을 모은 채 누워 있는 모습은 평화로워 보인다. 물속에서 퍼진 머리카락이 얼굴과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어 누가 보면 잠든 물의 요정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슬란의 주위에는 초록색과 파란색 마법이 칭칭 감겨 있다. 물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발하는 마법들은 아름다운 동시에 위험해 보인다.
류드밀라는 한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울고 싶어져 시선을 억지로 뗀 그녀가 나지막이 묻는다.
“말소리가 안 들리시겠죠?”
“봉인으로 의식이 없으니, 그럴 거다.”
무얼 바라고 루슬란을 보고 싶다고 했는지 류드밀라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를 보자 한꺼번에 덮친 우울함이, 그를 보기 전 느꼈던 걱정을 더욱 키워 놓는다. 현실적인 감정이 뭉뚱그려진 의도를 압도하는 순간이다.
결국 봉인되어 있는 그를 보고서 이렇게 우울해질 거면서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산과 바다의 마법에 감겨 의식도 없는 루슬란의 모습에 먹먹한 슬픔이 밀려온다. 가슴 부근에서 시린 무언가가 퍼지듯 후회가 밀려와 그녀는 몸을 움츠린다.
산신에게 부탁할 때는 싱긋 웃을 용기까지 있었다. 그 용기가 나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모두 그녀의 착각이었다. 류드밀라는 눈을 감고 감정의 소용돌이를 진정시키려 해 본다. 꿈에 나왔던 은빛 눈동자와 매끄러운 흑발이 떠오른다. 후회는 그리움으로, 슬픔은 희망으로 바뀌어 갈 무렵 그녀는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온다.
전보다 울지 않고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 쉬워졌다. 웅크렸던 고개를 펴고 류드밀라는 다시 한번 루슬란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닿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쪼그려 앉아 호수 가장자리에 손을 담근다. 냉기가 피부를 파고들 정도로 시원한 물속에서 손가락을 소심하게 움직이다 그녀는 팔을 거둔다. 그러곤 산신을 돌아본다.
“이제 된 것 같아요.”
산신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고 그 찰나에 그들은 성역 안으로 돌아와 있다. 산에서 오직 산신만이 쓰는 이동 마법의 흐름이 느껴지다가 순식간에 희미해진다. 그럴 정도로 류드밀라는 마법에 민감해져 있다. 성역 안의 바람이 처음으로 차게 느껴져 그녀는 제 몸을 감싸 안는다.
“괜찮느냐?”
산신의 어조는 담담하다. 류드밀라는 고개를 천천히 내젓고는 입을 뗀다.
“왜 루슬란 님을 보겠다고 제가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성역의 가장자리에서 오두막까지 걸어가며 그녀가 한숨을 내쉰다.
“순간 두려움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졌던 것 같아요. 더 이상 제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을까 봐. 그런데 루슬란 님을 보고 나니 다른 것이 무서워졌어요.”
“무엇이?”
느린 걸음에 풀잎이 발목을 부드럽게 스친다. 그녀는 산신을 보지 않고 말한다. 항상 산신의 인자한 얼굴을 보면 미래에 대한 공포가 옅어졌었다. 지금은 그 공포를 조금 더 간직하고 싶다. 마음에 두고 보다 근원을 찾아 없애고 싶을 뿐이다.
“제 마음은 변치 않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실패하면, 마음은 변치 않는데 제가 실패해서 다시는 그분을 볼 수 없다면. 그럼 저는 어찌해야 될까요?”
“변치 않는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아. 마찬가지로 비통함 또한 영원하지 않다. 넌 언제나처럼 선택을 할 것이고 그 선택에 따라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이야.”
“남은 생이 전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러면요?”
깊숙이 숨겨 왔던 무서운 질문을 류드밀라는 한다. 그와 함께하는 삶을 그리며 희망을 찾았듯이, 그만큼 쉽게 그가 없는 삶도 그려진다. 그 유연함이 두렵다.
“감정은 양면이 아니다. 강의 아이 곁에서 슬픈 때도 있었듯이, 그가 없어도 넌 행복할 수 있어.”
산신은 오두막 앞에 멈춰 서서 류드밀라를 돌아본다.
“강의 아이도 네가 행복하길 원할 거다.”
류드밀라는 목이 잠긴 채 감사 인사를 겨우 한다. 오두막으로 돌아가서 산신이 언덕 너머로 걸어가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본다. 산신이 그녀에게 해 준 말들은 전혀 특별하지 않은 말들일 뿐이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날 밤 그녀의 꿈에는 은빛 눈동자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나오지 않는다. 성역에 도착했던 첫날처럼, 그녀는 꿈을 꾸지 않고 깊이 잠든다.
그 후로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보름은 아름다운 달을 보여 주고 지나갔으며 일주일은 불안감과 점점 숨을 옥죄어 오는 긴장으로 정신없이 지나간다.
마침내 정화 의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다. 산신의 설명에 따라 류드밀라는 몸을 씻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그리고 오전 수업 대신 정자에서 명상을 한다. 허기짐도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긴장이 심하다.
“정화 의식은 동굴에서 하나요?”
“봉인된 상태에서 더 움직이는 건 위험해서, 그렇다.”
그녀는 뜸을 들이다 긴장을 없애기 위해 묻어 뒀던 질문들을 조금씩 푼다.
“왜… 왜 다른 신들이 참석하는 건가요?”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지.”
류드밀라가 인상을 찌푸리자 산신은 차분히 한마디를 더 얹는다.
“더 자세한 이유가 궁금하면 강의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렴.”
“산신님은 제가 성공할 거라고 믿으세요?”
막을 새도 없이 그 질문이 튀어 나간다. 산신과 지낸 시간이 오래되어 그녀는 그의 대답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성공 여부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그런 현명하고 고리타분한 답을 기다린다. 그러나 산신은 고개를 천천히 주억인다. 주름진 얼굴이 확고하다.
“그래.”
정자의 기둥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전부터, 정확히는 동굴의 호수에 손을 담근 후부터 성역의 바람은 시리게 느껴진다. 습관적으로 제 몸을 감싸 안던 류드밀라는 산신을 의식해서 손을 내린다. 얌전히 무릎 위에 포갠 손의 피부에는 그간 밖에서 보낸 시간 때문에 주근깨가 올라와 있다. 살이 타는 대신에 붉어지고 잡티가 생겨났었다.
감촉으로는 느낄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을 바라보던 그녀가 몸을 일으킨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너도 푹 자거라.”
류드밀라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 빠져든다. 그러고도 눈은 아침 일찍 떠진다. 공기 중을 떠도는 새벽 먼지 냄새가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느리게 만든다. 매캐하고 고소하고 건조한 향 속에서 그녀는 나갈 채비를 한다. 의식을 위한 새하얗고 단순한 원피스를 걸친다.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그때 황궁에서 루슬란이 줬던 목걸이도 한다.
빈속이 뻐근하게 아파 오는 대신 정신이 맑다. 아직까지도 방문 앞에 걸려 있는 물고기와 달 모양 장식을 만지작거리다 그녀는 밖으로 나선다.
류드밀라가 산신과 함께 성역을 가로지르자 영물들이 모두 나와 배웅해 준다. 아무도 말이 없는 와중에 조용히 흔드는 손과 지켜보는 시선들이 꿈속을 걷는 것만 같다. 아침 해가 드리운 창백한 햇살을 등지고 선 영물들을 지나 그녀는 햇빛이 향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성역 가장자리에는 자디라가 기다리고 있다. 의식 전에 마법을 사용하는 일을 줄이기 위해 그녀가 류드밀라를 실어 날라 줄 것이다. 호랑이의 등에 올라 목을 끌어안은 류드밀라는 긴장으로 반쯤 넋이 나가 있다. 길도 없는 산길을 호랑이가 날듯이 달린다.
“잘하실 겁니다.”
동굴 입구에 도착해서 자디라가 사람의 모습을 한다. 류드밀라가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이자 호랑이는 어깨를 꽉 잡아 준 후에 몸을 돌린다. 주홍빛 얼룩이 멀어진다. 그녀는 얕은 숨을 뱉어 내다 그대로 동굴로 발을 들여놓는다. 이대로 도망쳐서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고 생을 마치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아까부터 쓰리던 속이 이제는 아예 뒤틀리는 가운데 걸음 하나하나가 저를 지옥으로 이끄는 기분이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류드밀라는 이미 동굴 안쪽까지 다다라 있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산신과 바다의 여신이 그녀를 호수로 이끈다. 이제는 못 하겠다는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어지러워서 잠시 멈춰 서 있다가 류드밀라는 바로 후회한다. 그러는 동안 호수 가장자리에 늘어선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정화 의식에 참석한 신들일 것이다. 그들의 존재감은 익숙해져 있던 산신의 기운과 너무도 다르다. 가지각색으로,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색의 눈동자 쌍들이 어둠 속에서 형형한 빛을 발한다.
눈에 보이는 연령대도 뚜렷이 드러난 외형도 모두 다른 신들은 거의 스무 명이 넘어 보인다. 류드밀라는 걸음을 다시 떼지 못하고 얼어붙는다. 마치 곰을 만난 나그네처럼 공포에 압도당한다.
“의식을 치러야지.”
산신이 부드럽게 이르는 말이 멀리서 들려오는 듯하다. 바다의 여신이 내쉰 짜증 섞인 한숨은 너무 크게 들려온다. 그녀를 지켜보기만 하는 눈동자들은 깜박이지도 않는다.
악몽 같은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류드밀라는 시선을 떨군다. 그때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루슬란이 보인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잔뜩 경직된 몸을 움직인다.
잔잔한 호수 표면에 그녀가 발을 들이자 잔물결이 인다. 루슬란의 모습을 본 순간 무언가가 환상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몸을 움직일 수는 있게 되었고 그거면 충분했다.
루슬란의 머리 쪽에 류드밀라가 서 있는 동안 그의 오른편에는 산신이, 왼편에는 바다의 여신이 다가선다. 그들은 봉인 마법을 한 겹씩 벗겨 낸다. 정화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루슬란은 의식이 없을 거라는 설명을 듣긴 했지만 그녀 안에 불안감이 자리 잡는다. 황궁에서 루슬란이 폭주했을 때의 모습을, 정말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마침내 그의 주변을 감은 마지막 마법 한 꺼풀이 벗겨지는 순간, 그녀는 숨을 참는다. 새까만 눈동자의 악몽이 떠오르고 저도 모르게 깨문 입 안에서 피 맛이 느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이제 그녀의 차례라는 사실이, 쏠린 시선들의 감각으로 느껴진다.
류드밀라는 루슬란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호수의 물은 더 이상 차갑지도 않다. 산신과 바다의 여신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녀는 그의 이마에 한 손을 올린다.
잠시 후 산과 바다의 정화 마법이 어깨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류드밀라는 그간 수도 없이 연습했듯 감각을 찾아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전날 생각해 뒀던 대로 루슬란에 대해, 그를 위해 전달하려 해 본다.
다정한 미소, 부드러운 입술의 촉감, 머리를 어르는 손길. 그와 그녀 사이를 이루는 모든 감각을 되살린다.
마법은 증폭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데 그것 하나만 확연히 느껴진다. 전달을 배웠던 첫날 그랬듯이 산과 바다의 감정이 느껴지다 그대로 희미해진다.
류드밀라는 당황하지 않으려 마음을 다스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제 몸이 버거워하는 기색이 강해진다. 몸이 욱신거리고 관절 사이가 시리다. 산신이 그만두려는 기색이 보여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젓는다. 입 모양으로 조금만, 조금만 더, 라고 속삭인다.
마법이 많아지며 시야가 흐려지고 귓가에 이명이 감돈다. 그녀는 그 많은 양의 마법을 모두 놓쳐 버린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분노가 솟구친다. 고개를 뒤로 홱 젖히는데 동굴 천장에서 들어온 강한 햇살이 닫힌 눈꺼풀에 붉은 얼룩을 이룬다. 그로부터 이미지 하나가 떠오른다. 초록빛 풀숲으로 사라지던 주홍색 털. 자디라이다. 호랑이가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던 손길이 생생하다.
여우들의 드레스에 놓인 붉은 자수. 그들의 새침한 어조가 귀를 간질인다. 루살카들의 웃음소리. 어린 루살카의 즐거운 비명이 튀어 오른 물방울에 반사된 빛에 눈이 부시다.
폴레보이, 마녀, 은빛 신록, 황금 뱀, 황제, 껍데기 여인들, 연속된 이미지와 향과 감각이 한데 뭉치기 시작한다. 그녀의 삶과 그녀라는 인간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을 위해 귀결된다.
루슬란. 류드밀라는 그를 어둠 속에서 더듬어 천천히 끌어 올린다.
어둠 속에서 빛나던 은빛 눈동자 한 쌍을 류드밀라는 기억한다. 목 안쪽에서 턱 걸리던 단어들과 두려움의 씁쓸한 맛도 기억한다. 나긋한 음성과 다정한 손짓. 루슬란이 선물한 드레스의 버석거림. 살갗을 스치던 검은 머리카락 타래. 기억은 단편적으로 흩어지지 않고 연속된 흐름을 이뤄 낸다. 그를 기억하는 그녀가 그에게로 손을 뻗는다.
산신과 바다의 여신의 마법이 더 이상 번지지 않고 류드밀라의 몸을 타고 흐른다. 마법은 그렇게 전달자가 스스로에 대해 자각한 후에야 대상으로 넘어간다.
뒤로 했던 고개를 숙이고 루슬란을 내려다본 류드밀라는 흐름이 순간적인 것일까 봐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마법은 멈추지 않는다. 이에 용기를 얻어 그녀는 눈꺼풀을 살짝만 들어 올린다.
그녀의 손에서 나온 산과 바다의 마법이 루슬란에게로 향한다. 봉인 마법과 달리 그것들은 몸을 얽매지 않고 피부에 닿자마자 흡수된다. 류드밀라는 그 모습을 넋을 잃고 지켜본다. 루슬란의 몸에 잃은 줄도 몰랐던 색이 돌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에 그녀가 봤던 그는 사실 빛이 바랜 그림처럼 희끄무레했었다. 물과 빛의 장난에 제대로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마법이 닿는 곳마다 되살아나는 생기를 보니 변화가 선명하다.
가라앉아 있던 루슬란의 몸이 표면으로 올라온다. 자연스레 그녀의 무릎에 그의 머리가 닿게 된다. 류드밀라는 그가 눈을 뜨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손끝과 발끝부터 돌아온 생기가 얼굴과 몸의 중심까지 다 퍼졌을 무렵, 희미한 빛줄기가 루슬란의 몸을 뒤덮는다.
그 빛이 무엇인지 알아본 류드밀라는 가는 숨을 내뱉는다. 루슬란이 늘 쓰던 푸른빛 마법이 돌아온 것이다.
깃털의 한 가닥처럼 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꺼풀이 위로 올라간다. 아래 덮여 있던 눈이 세상의 모든 은빛을 품고 그녀를 올려다본다.
얼마나 이 순간을 그렸는가와는 상관없이 안도감은 그대로 전해진다. 바라고 또 바랐어도 빛바래지 않은 행복이 류드밀라를 휘감는다. 그녀가 떨군 눈물이 반듯한 찰랑이는 물가에 동심원을 이룬다. 루슬란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입술을 달싹인다. 그녀는 그의 손을 마주 잡고 흐느껴 운다.
오래 쓰지 않아 잠긴 루슬란의 목이 풀렸을 무렵엔 류드밀라 또한 밀려들었던 행복감에서부터 정신을 차린 후이다. 그녀는 눈물을 겨우 닦아 낸다. 그러곤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그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준다. 다음에 무얼 할지 몰라 주위를 둘러보는데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다. 주위를 둘러싼 신들의 반응이 이상하다.
축하를 바라진 않았어도 적어도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루슬란을 향한 싸늘하고 경멸하는 시선들이 날아와 꽂힌다. 마치 정화 의식이 실패하길 바랐다는 듯 모여든 신들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다. 전에는 긴장된 시야가 좁아 그들의 적대감을 알아채지 못했었다.
류드밀라의 당황스러움이 짙어져 가고 있을 무렵 루슬란이 그녀의 손을 찾아 쥔다. 산신과 바다의 여신도 그들에게 다가온다.
“해낼 줄 알았다.”
산신이 류드밀라를 대견해하며 이른다. 그는 루슬란을 돌아보고 언제나처럼 못마땅해한다.
“네 연인을 이렇게 고생시켜서야. 앞으로 내 지켜보겠으니 잘해 주거라.”
루슬란은 산신의 타박에도 빙그레 미소만으로 답한다. 봉인에서 풀려난 그가 낸 첫마디는 류드밀라에게 향한다.
“고마워요.”
조용히 말을 건네며 그는 몸을 기울여 류드밀라의 어깨에 턱을 가벼이 얹는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게 내버려 두고 빨개진 얼굴을 어루만진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전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간지러운 말들을 더 속삭이며 루슬란은 주변에 다른 이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류드밀라는 그럴 수 없어 괜스레 시선을 피하다 어느 신과 눈이 마주친다. 매우 심기가 상해 보이는 그 신은 시선이 교차되자 기회라고 여겼는지 상스러운 욕을 뱉어 낸다. 루슬란을 향한 듯한 욕이 들리자 류드밀라는 얼굴이 창백해진다.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신에게 다가간다. 어떻게 해서 지켜 낸 소중한 이인데 분노로 속이 들끓는다. 똑같은 욕을 들려주고 싶어 막 입을 떼려는데 루슬란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나선다.
“그러지 않아도 되어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그가 달랜다. 한편 문제의 신은 인간이 제게 저항하려 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한 듯 마법 기운을 몸에 두른다.
“어디서 한낱 인간, 거기다 껍데기 주제에 내게 대들고 나서지?”
류드밀라는 일렁이는 기운에 겁을 먹고 물러난다. 그럴수록 그 신은 그녀에게 윽박지르며 다가온다. 샛노란 마법이 눈을 멀게 할 듯 번뜩인다. 놀라서 다시 한번 중재하려던 루슬란에게 그녀는 눈을 찡긋한다. 동시에 공격 마법이 날아오고 그녀는 손으로 받아 마법이 몸을 타고 흐르게 내버려 둔다. 공격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마법 상태 그대로 움직인다. 당황한 신이 머뭇거리는 틈을 타 류드밀라는 한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신의 몸에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잠재되어 있던 공격 마법은 그대로 근원지로 돌아가 발현된다.
아예 그녀를 죽일 셈은 아니었는지 마법은 신을 멀리 날려 보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른 신들이 비웃음을 흘릴 동안 루슬란에게 욕을 뱉어 냈던 신은 동굴 반대편을 뒹군다.
“더 일이 꼬이기 전에 이만 빠져나갈까요?”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이는 루슬란이 장난스럽게 제안한다. 류드밀라가 대꾸하기 무섭게 그들은 산신의 성역으로 들어와 있다. 해가 지기 시작한 넓은 벌판에서 루슬란은 그녀를 들어 올려 한 바퀴 돌린다. 세상을 향하는 시선이 갑자기 높아져 류드밀라는 즐거운 비명을 내지른다.
“정말 완벽하게 골칫거리를 처리하셨네요. 언제 이렇게 용감하고 씩씩해지셨는지요.”
그녀를 마침내 바닥에 내려놓은 그가 환히 웃는다. 오랜 시간 동안 봉인되어 있었음에도 그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변한 쪽은 저 자신이라고, 류드밀라는 약간 쓸쓸히 생각한다. 그 변화의 시간 동안 루슬란도 함께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한편으로는 루슬란이 존재했으면 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는 대답하는 목소리에서 쓸쓸한 기색을 읽어 내고 그녀를 끌어안는다. 류드밀라는 넓은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작은 한숨처럼 말을 흘린다.
“보고 싶었어요.”
“저도 그대가 보고 싶었어요. 저주에 물들어 의식 없이 그저 존재 자체로만 있었을 때에도, 항상 그대를 그렸어요.”
나직한 목소리로 루슬란이 들려주는 말들은 그녀가 소원했던 그 어떤 꿈보다 더 아름답고 다정하다.
“저주가 몸을 타고 흘러 고통만이 감각을 지배했는데도, 그대의 모습과 소리와 감촉이 사무치도록 그리웠어요. 봉인되어 잠들어 있었을 때에는 그대와 다시 만나는 순간의 꿈을 꾸고 또 꾸었어요.”
루슬란의 음성이 그녀의 혀에 닿는다면 달콤하지 않을까. 류드밀라는 그의 서늘한 체향을 마시며 그토록 그리던 안정을 느낀다.
“그때는 무슨 말을 해 드릴까, 어떻게 안아 드리고 행복하게 해 드릴지. 그대는 또 어떤 모습으로 저를 반겨 줄까. 그 순간이 현실로 오기만을 너무도 바라고 있었기에… 오히려 현실감이 더 떨어져 버리기도 했지요. 막상 눈을 뜨고 그대를 보니 그 고민도 꿈도 다 부질없어졌어요. 그저 행복했으니까요.”
“저도요. 지금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
몸을 조금 뗀 루슬란이 류드밀라의 눈을 들여다본다. 엄숙해진 은색 홍채에선 황금빛 노을이 타오른다.
“그대의 행복을 방해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말씀드릴 것이 남았어요.”
류드밀라가 예상하고 있던 것이다. 처음으로 그녀는 두려움 없이 되물을 수 있다. 그가 어떤 말을 해 주든 그녀의 사랑은 변치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슬란에게는 끝도 없이 두려운 순간이다. 그에게는 확신이 없고 처음으로 그는 그녀에게 그의 감정과 자유를 내맡긴다.
루슬란은 잠시 침묵한 끝에 진실을 털어놓는다.
“저는 강의 신이었어요. 인간들의 횡포에 분노해 생명을 학살하듯 거두고 천신께 벌을 받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아주 오래전 일이에요.”
류드밀라는 은빛 신록의 뿔을 찾으러 갔을 때, 형제단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해 낸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루슬란이었구나. 강에 독을 풀라고 사람들을 꼬드긴 남자는 흑마법사였다.
이상하게도 충격은 그녀를 찾아오지 않는다. 루슬란과 발레를 보러 갔을 때처럼 먼 곳에서 공연을 보는 것만 같다. 루슬란이 느꼈을 분노와 절망도, 댐을 쌓은 인간들의 공포와 상처도 모두 이해가 간다. 모든 것이 각본대로 벌어지는 일인 듯 자연스럽다.
류드밀라의 아무렇지도 않은 반응을 본 루슬란이 눈썹 하나를 올린다. 그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 류드밀라는 말없이 그의 뺨을 쓸어 준다. 봉인에서 풀려난 그가 그랬듯이. 용기를 얻은 그는 이야기를 이어 간다.
“모든 권능을 빼앗기고 아주 작은 시내에 은거하던 중, 그 시절에 바로 어렸던 그대를 만났답니다.”
“네?”
류드밀라가 저도 모르게 속삭인다. 루슬란은 그녀의 동그래진 눈빛을 받아 주며 입꼬리를 우아하게 휜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시겠죠. 마녀들이 그대의 기억을 앗아 갔으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그대와 저의 연은 그때부터 시작됐었는지도 몰라요.”
그는 그녀가 놀람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다른 놀랄 거리를 던져 준다.
“그리고 정화 의식을 하며 그대가 저주를 없애 주셨으니, 제 신으로서 권능도 돌아왔어요. 산신께 인사만 드리고 함께 제 강으로 가요.”
류드밀라는 어안이 벙벙해 입만 뻐끔거리다가 겨우 대꾸한다. 좋다는 말에 루슬란은 얼굴이 밝아지고 전에 있던 걱정마저 말끔히 걷힌다. 그런 그의 얼굴이 한순간 너무 아름다워 보여 그녀는 홀린 듯이 말을 꺼낸다.
“루슬란 님.”
“왜 그러시나요?”
“다른 중요하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루슬란이 고개를 내젓자마자 류드밀라는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춘다. 전에 그의 말을 혀로 담으면 달달할까 했었는데 그때 상상한 단맛이 우스울 정도의 아찔함이 온몸을 휘감는다.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뒷목을 받쳐 주는 손길이 황홀하다. 거리를 더욱 좁혀 오며 몸을 붙여 오자 열기가 피부를 간지럽힌다.
그녀가 그에게 매달리려는 순간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화들짝 놀라 몸을 뗀 그들이 돌아보자 산신이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 있다.
“일부러 늦게 왔건만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
류드밀라는 바로 옆에서 루슬란의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볼 수 있다. 그는 산신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인다.
“아뇨, 방금 시작한 참이었습니다.”
산신은 혀를 차며 다가와 루슬란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강의 아이야, 힘을 되찾았다고 오만해지지 말거라. 강으로 돌아가 네 연인과 소박한 행복을 즐기며 살아.”
“그럼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물 흐르듯 대꾸를 내놓는 그를 산신은 못 미더운 듯 보다 류드밀라에게도 덕담을 해 준다.
“처음 성역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려 보니 많이 성장한 것이 보이는구나. 앞으로도 그렇게 굳센 마음을 갖고 살거라.”
“감사합니다. 산신님께서도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류드밀라가 대답하며 주위를 흘긋 보자 성역의 생명들이 모두 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어슴푸레한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냇가에서는 루살카들이 손을 흔들고 있고, 자디라와 여우들을 비롯한 다른 영물들도 배웅 나와 있다. 마주 손을 흔들어 주고 있는데 루슬란이 다가와 어깨에 팔을 두른다.
“떠나 볼까요?”
“좋아요, 루슬란 님.”
그녀는 미소 지으며 어깨로 걸쳐진 그의 손을 잡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너른 강가이다. 마지막 햇살이 물에 은빛 윤슬을 떨구고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온다. 류드밀라는 그렇게 큰 강을 살면서 처음 본다. 그림책에서만 봤지 낯선 광경에 그녀는 입을 벌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현실이 조금씩 와 닿기 시작한다. 바로 전 루슬란이 진실을 말했을 때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그의 아름다움에 홀려 그랬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에 홀려 그녀는 온갖 궁금증을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굴려 본다. 루슬란이 저런 강의 신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녀와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그가, 바로 그가 인간이 아닌 신이었다니. 그래서 피가 투명했고 그래서 그렇게 말을 아꼈구나. 궁금증이 풀린 만큼 더 많은 호기심이 일어 그녀는 그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본다.
자신의 강을 지켜보는 루슬란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의 감정은 환희에 찬 아이에게서나, 추억에 젖은 노인에게서도 보일 법한 것이다. 반갑고 슬프며 행복하고 서러운. 온갖 격렬한 감정의 흐름이 그에게서 느껴진다. 그때 가라앉은 은빛 눈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류드밀라는 루슬란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그를 알고 지낸 지 꽤 되었는데도, 그가 입을 열기 전 찰나의 순간은 항상 설레고 긴장된다. 그렇게 말을 기다리던 그녀는 그가 품으로 끌어당기자 살짝 놀란다.
다시 한번 파고들게 된 너른 품에서 류드밀라에게 루슬란은 가장 달콤한 말을 들려준다.
“사랑해요, 류드밀라.”
그의 입에서 처음 듣는 제 이름이 낯설다. 그녀는 그에게 들었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은 이유를 떠올리다가 살포시 미소를 짓는다.
“저도 사랑해요, 루슬란 님.”
류드밀라는 얼굴이 달아올라 크게 말하지 못한다. 휘영청 웃음을 입가에 건 그가 이마를 맞대어 온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답지 않게 수줍어하며 내리깐 눈을 하고 루슬란이 속삭인다.
“이 모든 게 전부 그대 덕분이에요. 아직도 잘 믿기지 않으시죠? 제가 강의 신이라는 사실이.”
“네, 그런 것 같아요.”
“다른 신들은 예전 일 때문에 저를 싫어하지만, 그대만은 받아들여 줘서 다행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대꾸를 웅얼거린다. 말도 잘 나오지 않고 생각이 뒤죽박죽이 된다. 머릿속에서는 루슬란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순간이 자꾸 되풀이되고 있다. 붉게 달아오른 뺨에 손등을 대며 식히는데 그가 한 발짝 물러선다.
“강의 신일 때의 제 모습을 보면 조금 실감이 나시려나요?”
“네?”
당황한 류드밀라가 눈을 크게 뜬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이 루슬란은 검지를 입술에 댄다. 그러더니 강가로 내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손으로 강에게 인사하듯 한번 훑어 올린 그가 강물을 마신다.
익숙한 푸른빛 마법에 은빛이 더해져 그의 몸을 휘감더니 어느새 류드밀라의 눈앞에는 거대한 사자가 나타난다. 푸른 갈기에 은빛 눈을 가진 사자는 터벅터벅 걸어 그녀에게로 다가온다. 무서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까의 설렘만 커질 뿐 위협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거미줄처럼 곱고 윤기가 흐르는 갈기에 손을 넣어 쓸어 주다 사자를 껴안는다.
루슬란에게서 나던 체향과 똑같은 물 내음이 나서 더욱 안심이 된다. 이게 강의 신 본모습이라니. 이름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강에서 어떻게 헤엄치는 걸까, 의문이 든다. 그런 그녀의 호기심에 답이라도 하듯 푸른 사자가 한 발짝 물러서서 몸을 낮춘다. 마치 제 등에 타라는 듯이 말이다.
조심스레 등에 올라가 목덜미를 끌어안자 사자는 망설임 없이 강으로 들어간다. 사자의 첫 걸음이 강물에 닿은 순간 강 전체가 푸른빛이 돌며 반짝거린다. 정화 의식을 치렀을 때의 루슬란처럼 강에 생기가 돌아온 것이다. 사자 주위로 모여드는 물고기를 지켜보다 류드밀라는 점점 물이 깊어지는 것도 잊고 있다.
어느 순간 몸에 물이 닿게 되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참는다. 맑은 물이어서 바닥에 깔린 모래와 자갈까지 보이고 무심한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뺨을 스친다. 잔뜩 굳어 있는 얼굴을 돌아본 사자가 그녀의 얼굴을 핥는다. 까끌까끌한 혀가 닿자 놀라서 숨을 들이쉬는데,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운다. 분명 물속으로 들어와 있는데도 그렇다.
숨을 참아야 한다는 긴장과, 사자가 헤엄을 치는 것에 대한 걱정이 해결되자 그때부터 류드밀라는 강 구경을 즐긴다. 밖은 어두워도 사자의 몸에서 나오는 빛으로 충분하다. 얼룩덜룩한 물고기부터 수달이 날쌔게 지나가고 자라도 가끔씩 보인다. 위를 올려다보자 새까만 하늘을 배경으로 수면까지 닿은 별빛이 어른거린다.
그러는 동안 루슬란은 강의 깊숙한 곳까지 그녀를 태우고 내려간다. 갈기를 꼭 붙잡은 손에서 류드밀라가 겁을 먹었음을 알아 그는 한 번씩 뒤를 돌아보고 안심시켜 준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 보인다. 끝을 모르고 깊어지는 강에 두려운 마음이 조금 든다. 그러다 마침내 건물의 형체가 저 아래에서 보이자 안심한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저택의 창문마다 주황색 불이 밝혀져 있다. 다가갈수록 주변의 물이 빛을 발하며 주변 풍경을 더 잘 보여 준다. 연한 푸른색 지붕에 새하얀 석조 벽과 은빛 장식들이 돋보이는 저택이다. 주변으로는 거대한 켈프 식물들과 나무뿌리들이 뒤엉켜 있어 육상의 숲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루슬란은 물과 어우러져 있는 듯 힘들이지 않고 나아간다. 류드밀라는 그의 움직임 덕에 물속이란 사실도 잊고 한 팔을 뻗으려다 저항감이 심해 놀라기도 한다. 그래도 의도했던 대로 켈프의 잎사귀에 손가락이 스친다. 도톰하고 미끌거리는 촉감이 오래 남는데 다시 고개를 돌리니 저택에 거의 도착해 있다.
은빛 막이 반구 형태로 건물을 감싸고 있어, 그 안으로 들어가자 물 대신 마른 공기가 젖은 머리칼을 간질인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루슬란이 그녀를 보고 살짝 웃는다.
“가만히 있어 보셔요. 이마에 물이끼가 붙었네요.”
초록색 덩어리를 떼어 낸 그가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남긴다. 오랜만에 받는 소소한 애정 표현에 류드밀라가 기뻐 그의 손을 찾아 쥔다. 그렇게 둘은 사이좋게 손을 꼭 잡고 저택의 입구로 향한다.
“이곳이 원래 루슬란 님이 살던 곳인가요?”
“네, 산신님의 성역처럼 제게도 머무는 거처가 있답니다. 다만 저주 때문에 강이 폐쇄되어 돌아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어요.”
“그래도 지금 이렇게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럼요, 다행이지요.”
루슬란이 다가가자 거대한 저택의 정문이 천천히 열린다. 맑은 하얀색으로 빛나는 등불을 들고 하인들이 마중 나와 있다. 툭 튀어나온 눈과 납작한 코를 본 류드밀라는 무언가 떠오를 듯 아리송하다. 그런 그녀에게 개구리 영물들이에요, 라고 조용히 일러 준 그가 앞서 나간다. 그녀는 꿈속을 걷는 기분으로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그는 행렬의 맨 뒤쪽, 가운데에 있던 제일 큰 개구리 영물에게 인사를 건넨다. 절을 하는 개구리를 일으켜 세워 안아 준 루슬란이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개구리의 눈이 커지더니 류드밀라를 보고 더 동그래진다. 당황한 류드밀라의 반응을 확인한 그는 개구리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입술에 댄다.
“무슨 일인가요?”
루슬란은 느긋하게 웃으며 그녀를 자연스레 안으로 이끈다.
“그러게요. 저도 영문을 모르겠네요.”
몸이 젖어서 추우시겠어요, 등의 말로 그는 그녀와 궁금증을 서로 멀리 떨어뜨린다. 저택 안쪽까지 들어가자 우렁이를 닮은 여인들이 류드밀라를 다시 더운 물로 씻기고 몸을 말려 준다. 끊임없이 새로운 영물들이 그를 찾는 바람에 바빠진 루슬란이 잠시 떠나 있을 동안 류드밀라는 옷을 갈아입고 식사도 한다.
그제야 어마어마한 피로가 밀려온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가 깨어난 후로 무얼 먹은 적도, 잠을 잔 적도 없다. 정화 의식을 치르며 분명 몸에 무리가 갔을 텐데 말이다. 그녀는 루슬란이 급한 일을 해결하고 올 동안 눈이나 붙일 생각으로 침실을 찾는다. 우렁이 여인들이 알려 준 대로 방을 찾아간 그녀는 작은 탄성을 내지른다.
넓은 창문 밖으로 아까 보았던 켈프 숲이 펼쳐져 있다. 해초의 기다란 가지 사이에 군데군데 달린 등이 어두운 강도 환상적으로 만들어 준다. 게다가 문을 열자 창가에 모여 있던 파란 불빛 덩어리들이 그녀에게로 온다. 성역에서 본 도깨비불과는 뭔가 다른, 자그마한 갑각류의 모습을 한 빛들이다.
피부에 닿자 미끌거리는 감촉에 류드밀라는 웃음을 터트린다. 바로 침대에 누울 거란 다짐은 어느새 사라지고 강이 다시 한번 그녀를 매혹시킨다.
“형광 옆새우들이에요.”
따스한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문가에 루슬란이 기대서 있다. 그는 물 없이도 살 수 있게 마법을 걸어 놓았다고 덧붙인다. 그러곤 짓궂게도 손짓 한번으로 옆새우들을 문밖으로 흘려보낸다. 순식간에 어슴푸레해진 침실에서 그가 그녀에게로 다가와 끌어안는다.
“설마 그냥 주무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너무 피곤해서…….”
전과는 다른 의도를 갖고 허리를 감싸는 손길에 그녀는 말끝을 흐린다. 목덜미를 부드럽게 물고 혀로 살살 문지르는데 그와 닿는 모든 피부에 열기가 피어오른다. 쏟아 내린 새까만 머리카락을 손으로 훑다가 류드밀라는 결국 부끄러운 마음에 그에게 몸을 기댄다.
“침대, 침대로 가서 해요…. 피곤하니까 조금만….”
“글쎄요.”
침대로 가자는 말은 선뜻 따라 루슬란은 그녀를 눕혀 준다. 그러면서도 조금만 하자는 말은 못 들은 척 입꼬리를 우아하게 휜다. 기껏 입은 옷을 끌어 내리고 뽀얀 어깨에 붉은 자국을 남기던 그가 지그시 그녀를 응시한다. 붉어진 입술 안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이는 모습이 지독히도 색정적이다.
“아직도 주무시고 싶나요?”
“그건 아니지만…….”
루슬란이 로브를 벗자 류드밀라는 할 말을 잃는다. 홀로 지새우던 밤에 슬픔과 배덕감을 무릅쓰고 떠올리던 그의 몸은 상상보다도 아름답다. 저도 모르게 그녀는 손을 뻗어 날렵한 쇄골과 탄탄한 가슴에 댄다. 강의 저택으로 오는 길에 만졌던 켈프 잎사귀의 촉감도 오래 남았는데, 이제는 손끝에서부터 기분 좋은 긴장이 타고 흐른다.
“절 이렇게 애태우시니….”
한숨과도 같은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침실은 얕은 숨소리와 몽롱한 신음으로 덮인다.
***
그 후로 류드밀라는 루슬란과 함께 강의 저택에 머무른다. 낮에는 그와 함께 강 구경을 다니고, 밤에는 그의 사랑 속에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다. 가끔씩 루슬란은 강의 일을 해결하러 저택 밖으로 나갔다 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그녀는 우렁이들과 그림을 그리거나 켈프 숲에 등을 다는 개구리들을 돕는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어느새 창밖으로 하늘이나 마을이 아닌 강 속 풍경이 보이는 것에도 익숙해진다.
밖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질 때도 있다. 황제는 죽고 귀족들도 모두 학살당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궁금증과 걱정은 아주 먼 나라의 일처럼 현실감이 없다. 그녀는 문득 든 생각을 아주 드물게 이어 갔고 행동으로 구체화되는 일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
강의 저택에서 지내는 모든 시간이 꿈결처럼 흘러가 그녀 또한 꿈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잦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날들은 깃털처럼 가볍고 거품처럼 형체가 없다. 류드밀라는 그 비현실적인 권태감과 오묘한 불안감의 원인을 찾지 못한다.
하루는 루슬란이 잠을 자던 그녀를 깨운다. 다정한 말로 투덜거림을 달래고 얼러 옷을 입힌다.
“이러, 이렇게 일찍부터 무얼 하시려고요?”
잠에 취해 웅얼거리며 본 창밖은 아직 어두컴컴하다. 잠을 조금 더 자면 지난 저녁 시달린 몸의 피로가 풀릴 것도 같은데. 류드밀라는 눈을 비비며 가운의 엉뚱한 곳에다 팔을 넣는다.
“보여 드리고 싶은 곳이 있답니다.”
더 이상의 단서는 주기 싫다는 듯 루슬란은 그 후로 입을 꾹 닫는다. 류드밀라는 그에게 이끌려 비틀비틀 복도를 가로질러 저택 대문으로 나온다. 사자로 변한 그에게 올라타 수면까지 가는 내내 그녀는 꾸벅꾸벅 존다. 루슬란이 그녀가 숨을 쉴 수 있게 얼굴을 핥아 줄 때도, 마찬가지로 졸고 있던 민물고기와 부딪혔을 때도 류드밀라는 졸음에 취해 있다.
만약 깨어 있었다면 저택에서 바로 수면으로 올라가는 길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챘으리라. 루슬란은 그녀를 태우고 미끄러지듯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강의 상류로 향한다.
“도착했어요.”
고개를 든 류드밀라는 그새 눈곱이 달라붙은 눈을 마구 비빈다. 그러고 겨우 뜬 눈에 들어온 광경을 그녀는 처음에는 잘 믿지 못한다.
그들이 다다른 강의 상류에는 온갖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꽃잎을 겹겹이 두른 작약부터 풍성한 수국, 소박한 데이지, 우아한 초롱꽃, 화려한 색색의 장미까지. 게다가 강가에 가지를 드리운 아카시아 나무와 등나무에서는 아찔하도록 단 향기가 풍긴다. 어슴푸레 밝아 오는 새벽하늘은 분홍빛과 하늘빛으로 물든다. 얕은 물가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옆으로 흩어진다.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류드밀라를 이끌고 루슬란은 강 상류에서 갈라져 나온 시내로 그녀를 이끈다. 이제 날씨도 꽤 더워져 춥기는커녕 시원한 바람이 반갑기만 하다. 젖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그녀는 제때에 맞춰 핀 꽃들을 하나하나 본다. 유난히 등나무가 가지를 낮게 드리운 냇가에 멈춰 선 루슬란이 그녀와 마주 본다.
류드밀라의 눈 색을 닮은 꽃송이 주변으로는 통통하고 명랑한 호박벌이 붕붕 날아다닌다. 그들이 눈을 맞추자 눈치껏 벌은 물러나고 어지러운 향 속에서 루슬란은 처음으로 초조해 보인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 두리번거리는 류드밀라의 뺨을 그가 양손으로 쥔다.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시선에 그녀는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그가 말을 시작하려는 순간은 언제나 설렜지만 지금은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떨린다. 강을 되찾은 후로 더 밝고 맑아진 은빛 눈이 느리게 깜박인다. 마침내 숨을 천천히 들이마신 그가 입을 뗀다.
“류드밀라, 제 신부가 되어 주시겠어요?”
그녀는 긴장해서 미처 다물지 못한 루슬란의 입술을 본다. 그 사이로 엿보이는 새하얗고 가지런한 치아와 오뚝한 콧등, 움푹 들어간 눈우물과 긴 속눈썹이 드리운 흐릿한 그림자를 본다. 정화 의식 때처럼 그의 구석구석에 담겨 있는 그와의 기억을 더듬는다.
그녀는 이제 안다. 그동안의 권태로움과 비현실감은 그저 이 순간을 위한 전 단계였음을. 그녀가 사랑하는 그의 모든 것을 이제 온전히 받아들여야 함을 말이다.
류드밀라는 해사하게 웃는다. 더 이상 구름 사이로 숨은 해처럼 수줍게가 아닌, 한낮의 쨍한 햇살처럼 활짝 미소 짓는다. 그리고 부드럽지만 확실한 답을 내놓는다.
“좋아요, 루슬란 님.”
그리고 까치발을 하고 루슬란을 당겨 입을 맞춘다. 등꽃과 아카시아의 무도회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사랑에 취한다.
루슬란은 안다. 먼 옛날 그와 마주친 정 많은 소녀가 그에게 아주 특별한 연으로 다가왔음을. 그 연이 운명과 고난과 그의 사랑 속에서 수줍게 고개를 들고 마침내 그에게로 활짝 피었음을 안다.
류드밀라는 안다. 그날 어두운 침실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눈을 빛내던 이가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음을.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줘도 부족할 사랑을 그녀가 하고 있음을 안다.
그들은 안다. 해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그들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영원할 것임을. 그들의 사랑은 바다로 향하는 강처럼 빛날 것을 안다.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찬란한 아름다움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다정하지만 상냥하지는 않은 그대에게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