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악마의 잠 (18/20)
  • 15. 악마의 잠

    “일픈하임, 악마의 잠.”

    마법사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며 황제는 몸을 움츠린다. 그러나 루슬란은 사샤를 놓아주고 그를 조용히 내려다볼 뿐이다.

    “그 말이 틀렸다면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황제 폐하.”

    이 한마디를 남긴 루슬란은 이동 마법을 쓰며 눈앞에서 사라진다. 그가 가고 나자 문을 막고 있던 경비병들의 정신 조종 마법도 풀리며 마침내 문이 열린다. 소동의 원인인 마법사가 사라졌지만 귀족들은 다들 겁을 집어먹고 연회장을 빠져나간다. 밀고 서로를 넘어뜨리고 밟으며 이기적인 공포가 소란을 피운다.

    황제는 울고 있는 사샤에게 다가가 부러진 팔을 살핀다. 정신을 차린 마녀들에게 아이의 치료를 맡기고 그는 제 죽음을 직감한다. 진실을 말했으니 마법사 놈은 그 껍데기 여인을 치료하고 복수를 위해 돌아올 것이다. 황제는 사샤에게 천천히 다가가 조막만 한 얼굴을 멍하니 쳐다본다.

    아이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사샤를 벌레 보듯 하찮게 여겼었다. 제 피붙이지만 마법을 강하게 타고났다는 말을 듣고 경멸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황궁에서 어떤 마법사의 제자가 되게 주선해 줬지만 그가 아비로서 역할을 다했다 보긴 힘들었다.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야 아들이 눈에 밟히는 건지 황제는 모른다. 죽을 때가 정말 가까워져서 그런 건지도, 하는 자조적인 생각이 잠깐 든다. 본래라면 제 계획을 짓밟고 고통을 준 버러지 같은 마법사에게 분노해야 마땅했다. 지금 몸을 감싸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죽음이 가까워진 걸 알아 든 체념일지도.

    상처는 다 나았음에도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며 황제는 사샤에게 손을 뻗는다. 마녀들은 그를 부축해 주지 않는다. 그들도 황제가 곧 죽을 사람이란 사실을 알아서이다.

    “팔은 이제 괜찮으냐?”

    아이는 겁을 집어먹고 손을 피한다. 혼란스러워하던 파란 눈동자가 순간 사나워진다.

    “누나는 어디 있어요?”

    황제는 거절당한 손을 거두고 힘겹게 대꾸한다.

    “나도 모른다.”

    “누나를 찾아야 해요. 폐하가 누나한테 나쁜 일만 시키지 않았더라도 제 곁에 있었을 텐데.”

    사샤는 다 나은 팔을 부러졌을 때처럼 끌어안고 몸을 일으키려 한다. 그러다 전에 받은 충격으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주저앉는다. 일어서려고 용을 쓰다 겨우 성공한 아이를 황제가 붙잡는다.

    “지금 네 누이를 찾으려 하면 마법사가 널 죽일 수도 있다.”

    “왜요?”

    “독을 먹이는 데 성공했으니 네 누이는 껍데기 여인의 방에 있을 터. 치료를 방해하면 무슨 일이 닥칠 줄 알고.”

    황제는 아이가 말을 알아듣고 옮기려던 발걸음을 멈추자 안심한다.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 번도 신경 쓴 적 없던 아들에게 사과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무도회장의 입구와 주변을 살핀다. 언제라도 치료를 끝낸 마법사가 나타날 것 같아 불안하다. 한편 사샤에게는 시간도 황제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필요한 사람은 제 누이뿐이었다.

    “미안하다.”

    황제가 몇 번을 고심 끝에 겨우 낸 말에 사샤는 당황한다.

    “왜요?”

    아이는 한없이 작아진 황제가 물음 하나에 찔린 듯 움찔 떠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가 사과하는 이유를 알고 싶지 않다. 그냥 나탈리아를 찾아 원래대로의 삶을 살고 싶다. 마법사와 황제가 나눈 말에서 들은 진실은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내가 모든 일을 망쳤구나. 널 돌보지도 못했고 너를 외면하기만 했어.”

    “그런데 왜 누나를 협박했어요?”

    눈앞에서 고개를 떨구는 남자는 사샤가 알던 황제가 아니다. 무섭고 악독하고 욕심 가득한 사람이 아닌 다시 태어난 생명체 같다. 황제는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죽음 앞에서, 제 피붙이 앞에서 나약해져 울음 섞인 말들을 뱉어 낸다.

    “때때로 인간은 실수를 저질러. 그게 크든 작든 저지르고 말아. 너를 내가 아끼지 않는 게 아냐. 모든 것이 실수였다.”

    아이는 어른의 눈물에 익숙하지 않아 달래 주지도 못한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싹튼 것은 연민이 아닌 분노이다. 나탈리아에게서는 아버지에 대한 어떤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을 보면서 생긴 궁금증은 슬픔으로 이어졌고 쌓아 왔던 슬픔은 어느새 분노로 변해 있었다.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잖아요. 절 아끼면 돌봐 줄 수 있었잖아요.”

    “지금이라도 그러고 싶다.”

    “못 믿겠어요.”

    사샤는 이 상황이 불편하다. 누나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붙잡혀 있기 싫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지금이 그가 아버지와 진실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사실을. 분노한 마법사 앞에서 황제의 목숨은 위태롭기만 하다.

    “왜 저를 외면했어요? 왜 제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를 버리고 내쳤나요?”

    “이유가 어떠했든 지금은 후회스러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황제는 지난날을 되짚어 본다. 그럴수록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진다.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얼마나 놀라고 화가 났을까. 얼마나 상처 입었을까. 그런데 미안한 마음과 함께 커지는 것이 있다.

    삶에 대한 집착이, 황제의 깊숙한 내면에서부터 무럭무럭 자라난다.

    ***

    루슬란은 류드밀라가 누워 있는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가 기절시킨 나탈리아가 방구석에 있지만 마녀의 존재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맥박을 확인하고 이마에 손을 가볍게 얹는다.

    “괜찮을 거예요, 안심하셔요.”

    어쩌면 스스로의 분노와 무기력함을 달래기 위해서일 수도 있는 말을 나지막이 속삭인다. 황제가 진실을 말했다면 몸만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이지 류드밀라는 깨어 있을 것이다. 부드러운 어조의 단어들을 중얼거리며 그는 손 안에 마법을 불러온다. 그리고 살짝 벌려진 류드밀라의 입 안으로 흘려보낸다.

    먼저 위의 내용물을 조심스레 꺼낸다. 위산이 식도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보호막으로 감싼 채이다. 꺼낸 후에 막을 거두고 확인해 보니 일픈하임인 것이 확실해진다. 독은 무색무취의 물질이지만 그의 마법이 닿자 회색으로 물들며 반응한다.

    욕실에 그것들을 버리고 돌아온 그는 한숨을 내쉰다. 바로 위세척을 진행했어야 하는데 순간의 분노에 사로잡혀 때를 놓치고 말았다. 무슨 독인지 몰라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자책감은 사라질 줄을 모른다.

    해독 마법을 왼손에 고여 든 물에 담아내며 그는 류드밀라를 달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녀가 먹은 독, 일픈하임이 악마의 잠이라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독은 단순히 근육을 마비시키지 않는다. 정교하게 움직이며 호흡과 순환에 관여하는 등 생명과 직결된 근육들은 내버려 둔다.

    다만 뇌와 신경계를 건드려 어둠에 가둔 후 희생자의 잊고 싶은 기억들을 불러낸다. 한마디로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을 꾸게 만든다. 암흑에 갇혀 있게 하다가 서서히 외로움과 절망에 빠트리는데, 그 무게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치료사가 실수로 근육을 마비시키는 물질부터 해독하자 정신적 괴로움에 희생자가 제 목을 졸랐다는 기록도 있다.

    루슬란은 섬세한 자수를 놓듯 마법을 구성하고 직물을 짜듯 주문을 배열한다. 그러느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류드밀라가 겪을 고통이 커진다는 것을 알기에 초조하다. 근육을 움직일 수 없어 찌푸리지도 않은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하지만 그는 일픈하임에 대한 끔찍한 기록들을 잊지 못한다.

    초조함과 두려움을 가라앉힐 여유도 없이 해독제가 완성된다. 마법과 섞인 물이 푸르스름한 빛을 발한다. 그는 해독제를 삼키고 이빨과 연결된 샘으로 보낸다. 제 몸 안에서 차가운 물질이 움직이는 기분이 불쾌하고 아프기까지 하지만 확실히 하려면 이 방법뿐이다.

    루슬란은 류드밀라의 손목을 날카로운 송곳니로 깨문다. 괴로운지 식은땀으로 가볍게 축축한 피부에 걱정은 분수를 모르고 커져 간다. 그래도 정확히 혈관을 찾아 안으로 해독제를 모두 주입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몸을 떼고 손목에 맺히는 핏방울을 바라보며 그는 멍하니 생각한다. 옛날의 그였으면 천신께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두 가지를 안다. 천신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사실이다.

    만약 그가 만들어 낸 해독 마법에 부족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아무리 천신이라도 다가오는 실패를 막을 수 없다. 오로지 실패의 책임은 그의 몫이고, 실패하지 않으리란 바람 또한 자신에게 해야 한다.

    두 번째로 그가 깨닫게 된 사실은 천신이 잔인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를 올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무관심 혹은 비웃음뿐이겠지.

    그런 이유로 루슬란은 천신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제 위로가 류드밀라의 고통을 덜어 내주길 바라며 끊임없이 말을 건네고 몸을 어루만진다. 경직된 근육을 풀어 주고 혈액 순환이 빨리 되도록 온기를 내어 준다.

    시간은 잔인하게 흐른다. 침실에는 시계가 없지만 커튼 너머로 비집고 들어온 빛의 변화가 그의 희망을 꺾어 놓는다. 이쯤 되면 해독제가 다 흡수되지 않았을까. 이쯤 되면 류드밀라가 깨어나야 하지 않나. 이쯤 되면.

    어느 순간부터 루슬란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약해진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한 가지 가능성이 지칠 줄 모르고 그의 내면을 갉아먹는다.

    어쩌면 해독 마법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황제를 고문해서 저주가 효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저주에 영향을 받은 자의 마법은 같이 더럽혀지는 법. 그래서 류드밀라가 깨어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자 추측에 불과하다. 해독제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은 수천 가지 이유가 합쳐져 만들어 낸 결과일 수도, 단 하나의 실수가 일으킨 결과일 수도 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루슬란이 생각한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그에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이유가 있었다면 말이다. 제 목숨보다 소중한 이의 고통 앞에서 루슬란은 무너져 내린다. 타인의 고통도, 자신의 고통도 방관했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어린아이의 팔도 망설임 없이 부러뜨렸다. 그런 그가 류드밀라의 고통 앞에서는 나약하고 작디작은 존재로 바스러진다.

    차라리 이 모든 게 제 망상이면 좋겠다는 황당한 생각이 떠오른다. 류드밀라는 그저 편히 잠을 자는 것뿐이고 모든 괴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슬픔에 이어진 부정 다음은 분노이다.

    루슬란은 통곡하지 않는다. 고개를 내젓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는다. 차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생각에 잠긴다.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 방법을 따르고 싶지 않다. 단지 화가 쌓이고 쌓여 거대한 눈덩어리처럼 불어나게 내버려 둔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사고이고 행동이다. 지금 화를 내 봤자 달라질 게 없다는 걸 그는 안다.

    그에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면 많은 미래가 달라졌을 것이다. 가능성이 파괴되고, 목숨이 끊어지고, 아물던 상처가 터지는 일은 없었을 터.

    류드밀라를 사랑하는 감정이 이성적이지 않듯이 류드밀라를 해칠 감정도 이성적이지 않다.

    루슬란은 조용히 일어나 류드밀라를 마지막으로 내려다본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기억에 새기고 이마에 입맞춤을 한다. 이번에 남긴 말은 다녀올게요, 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기다릴게요, 라는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잘 있어요, 나의 껍데기 님.”

    류드밀라가 후에 깨어났을 때 루슬란은 곁에 없다.

    ***

    루슬란은 황궁의 무도회장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이동 마법을 쓰지 않고 걸어간다. 그의 걸음이 닿는 곳마다 죽음과 공포가 뒤따른다.

    그는 귀빈실에 숨어든 귀족들을 끌어내어 학살한다. 어린아이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어른들만 잔인하게 살해한다. 비명과 울음으로 뒤덮인 황궁을 루슬란의 마법이 할퀴고 지나간다. 죽음에 대해 가치를 두지 않는 듯 시체들은 쌓이는 대신 사라진다.

    그렇게 그는 마법을 이용해 살면서도 전혀 존중하지 않았던 이들의 숨을 끊어 놓는다. 그들의 잘못은 그것뿐이 아니지만 그들의 죽음을 부른 잘못은 그것 하나이다.

    그 누구도 죽어 마땅한 생명일 수는 없다. 제 밑의 이들을 억압하고 괴롭혔던 이그나티 제국의 귀족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나 루슬란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다만 얼굴에 튀는 피 한 방울, 거두는 생명 하나하나가 제 육신을 시꺼멓게 물들이게 내버려 둔다.

    장마철 불어난 강물이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듯 무서운 기세로 그는 마침내 무도회장에 다다른다. 다가오는 죽음을 예견해 긴장으로 굳은 황제에게 다가가 굽어본다.

    “제 여인은 건드리지 마셔야 했습니다.”

    루슬란이 내뿜는 차가운 기운에 압도당한 마녀들이 물러난다. 그들의 보호를 바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황제는 마지막 희망을 붙든다. 그가 후회의 눈물까지 쏟으며 마련해 놨던 빠져나갈 구멍 하나.

    “그래서 어쩔 셈인가? 아들 앞에서 아비를 죽이기라도 하려고?”

    황제의 손아귀가 옆에 있던 사샤를 붙든다. 마법사가 아이를 협박의 수단으로 이용했듯이 그도 똑같이 행동한다. 그것이 바로 아들에게 미안한 척, 그동안의 행동을 반성하는 척하며 아이를 붙들어 놓은 이유이다.

    루슬란이 반응하기도 전에 사샤는 상황을 깨닫는다. 당혹감 사이에서 피워 내던 연민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어리지만 황궁에서 자라나며 눈치를 기른 아이는 황제의 손을 떨쳐 내려 안간힘을 쓴다.

    “저리 가세요! 저리 가라고요! 폐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끈질기게 매달리는 손길에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아주 잠깐은 황제를 믿었다. 비록 그의 울음 앞에서 날 서게 반응했지만 잠깐은 그를 아버지라 생각했었다. 이제 사샤는 확실히 깨닫는다. 저 사람은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대신 루슬란에게 도움을 청한다. 마법사가 제 팔을 부러뜨렸던 기억에 주저하지만 망설임은 금방 끝난다.

    “도와주세요, 흑, 제발요 성하…. 누나한테 가게 도와주세요….”

    루슬란은 사샤에게 조용히 시선을 던진다. 류드밀라가 독을 먹은 사건의 시작은 저 아이였다. 아이가 아무런 의심 없이 황제를 따라가지만 않았어도 나탈리아가 협박당하는 일은 없었을 터이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연민 한 조각이 그로 하여금 손을 뻗게 만든다.

    그는 아이의 팔뚝을 쥔 황제의 손을 풀어낸다. 공포에 질린 황제는 마법사의 손길이 닿자마자 서둘러 사샤를 놓아주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난다. 아직 제대로 서지 못해 기다시피 하면서.

    루슬란은 빨간 자국이 남은 팔을 문지르는 아이에게 이른다.

    “내 침실로 가거라. 내 여인에게는 손대지 말고.”

    감사하다고 말할 겨를도 없이 누나를 찾으러 내달리는 사샤의 작은 뒷모습만 확인한 그는 다시 황제에게로 걸음을 옮긴다. 천으로 된 신은 대리석 바닥에서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귀족들의 피가 튄 옷자락은 이제 버석거리지도 않는다.

    “마지막까지 추한 모습만 보여 주셨는데, 폐하.”

    그가 황좌 아래의 단까지 기어가 기댄 황제와 눈을 맞춘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옆에 펼쳐진 빨간 얼룩이 묻은 옷자락이 때아니게 핀 꽃잎처럼 보인다.

    “그럼 어떻게 죽여 드릴까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죽일 거 아니냐. 내게 선택권을 주는 양 말하지 말거라.”

    공포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황제가 거칠게 내뱉는다. 등 뒤에는 황좌로 오르는 단이 버티고 있어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다. 전에 느꼈던 고통을 기억하는 몸은 덜덜 떨려 오고 마법사가 두른 기운에 기절하고 싶을 만큼 두렵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찾는다.

    “잘 아시는군요. 저는 폐하께 선택권을 드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제 물음의 이유는 폐하가 비굴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왔을 뿐이지요.”

    루슬란의 손을 타고 나온 마법이 황제의 온몸에 번지며 자리를 잡는다. 공포로 숨이 가빠져 헐떡거리는 황제의 턱을 전혀 부드럽지 않은 손아귀가 억세게 쥔다.

    “목숨을 구걸하며 기어 보세요. 그렇게라도 해서 제 분노가 약해지면,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턱을 놓고 일어선 마법사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혼이 빠진 황제에게서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고 그의 분노는 커다랗게 부피를 더해 간다. 황제가 겨우 내놓은 말은 분노를 가라앉히기는커녕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제정신이 아니군. 나를 죽이면 네놈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무슨 근거로 제가 제 무사함을 바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제야 황제는 마법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가 한 말에 놀라서, 혹은 반사적으로 마주한 눈동자는 단지 분노로 타오르고 있다는 묘사로는 부족하다. 이글거리는 은색 화염 안에 새까만 동공은 끝없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 황제를 위협한다. 넘실대는 화염이 손길을 뻗쳐 올 때 황제는 시선을 재빨리 피한다.

    “폐하께서 제 유일한 것이자 모든 것을 빼앗아 갔는데, 제가 어찌 제 안위를 살피리라 여기십니까?”

    루슬란이 고개를 바로 하자 바닥에 끌리는 머리카락이 자리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의 엇나가고 비틀린 감정은 좀처럼 자리 잡지 못한다.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저주가 닥쳐와도 좋으니, 제가 느꼈던 아픔을 그대로 돌려 드리지요.”

    악문 잇새로 느리게 나온 말들이 담은 잔혹함을 깨달을 새도 없이 황제의 몸을 옭아맨 마법이 발현된다. 푸르게 일렁이는 빛줄기에서 물이 나와 황제를 감싼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물은 천천히 양을 불리며 몸 전체를 뒤덮는다.

    “뭐, 뭔 짓을 한 거냐.”

    황제의 두려움 가득한 말들은 물에 삼켜지기 전에 비명으로 바뀐다. 마법에 의해 물이 빠르게 뜨거워지자 황제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뜬다. 그러나 얼굴까지 물은 올라오고 여린 살에 화상을 입힌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은 불에 타 죽는 거라고 하더군요.”

    루슬란은 황제를 감싼 채 끓기 시작하는 물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 안에 갇혀 고통에 몸부림치는 황제를 바라보는 눈길은 공허하다.

    “저는 불을 다룰 수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마음에 드셨길.”

    ***

    류드밀라는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정신을 차린다. 기억들은 잔인하게도 빠르게 돌아왔다. 달콤 쌉싸름했던 초콜릿과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들렸던 말들. 그 후에 이어진 고통의 시간들. 빠르게 되찾은 만큼 그 무게도 가벼워 기억은 그리 아프지 않다.

    그러나 그 외로움과 암흑의 기억을 대신 느끼는 듯 몸이 무겁다. 팔다리가 뻐근해서 일어나는 데도 한참이 걸린다.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서 앉자 축축한 것이 뺨을 타고 흐른다. 눈물이 고여 있었구나. 아파서 그랬을까. 아니면 외로워서 그랬을까. 차라리 생각나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로 그녀가 꿨던 악몽은 끔찍했다.

    그 끔찍했다는 기억만이 끈적거리는 녹은 초콜릿처럼 마음 한구석에 남는다.

    눈물을 닦아 내다 류드밀라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다. 그녀가 이렇게 멀쩡하게 깨어났다는 것은 루슬란이 치료해 줘서 가능한 일일 텐데. 그의 부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깨닫는다. 루슬란은 황제에게 간 것이다.

    “안 돼…….”

    나지막이 속삭인 그녀는 걱정을 떨쳐 내고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온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비틀거리지만 엎어질 듯 내달리며 방문으로 향한다. 그렇게 갔는데 문이 벌컥 열려 급하게 멈춰 서다 그녀는 주저앉고 만다.

    “괜찮으세요?”

    문을 연 장본인인 사샤의 얼굴 또한 눈물범벅인 점에서 류드밀라의 불안한 예감은 커져 간다. 고개만 겨우 끄덕이고 그녀는 아이의 도움을 받아 일어선다.

    “마법사님이 어디 계신지 아니?”

    황궁에는 마법사가 많았지만 어느 마법사를 일컫는지 사샤는 모를 수 없었다.

    “네.”

    “데려다줄 수…….”

    사샤의 눈길을 따라간 류드밀라는 구석에 쓰러져 있는 나탈리아를 발견하고 자그마한 비명을 내지른다. 아이가 놀랄까 봐 서둘러 입을 손으로 막지만 사샤는 신경 쓰지 않는다. 제 누나에게 서둘러 달려가 어깨를 마구 흔들 뿐. 그녀는 잠시 갈등한다. 혼자라도 루슬란 님을 찾아볼지 아니면 나탈리아가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사샤의 도움을 받을지.

    그런 갈등을 하는 저 자신이 부끄럽다. 당연히 나탈리아를 먼저 도와야 하는데 루슬란에게 그리되지 말라고 일렀던, 맹목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것만 같다. 결국 류드밀라는 착잡한 마음으로 사샤에게 다가간다.

    “많이 다치셨니?”

    “다치진 않았어요. 그냥 충격으로 기절한 것 같아요.”

    사샤는 또렷한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손을 나탈리아의 이마에다 올린다. 그렇게 주문을 얼마나 외웠을까. 초조해진 류드밀라가 손가락을 비틀며 기다리고 있는데 마녀가 눈을 번쩍 뜬다.

    “누나!”

    안도한 사샤가 와락 품에 안기고 나탈리아는 동생을 마주 안아 준다. 류드밀라는 제 이기적인 불안함을 숨기려고 가만히 있다가 마녀와 눈이 마주친다. 누나의 시선을 알아챈 사샤도 그녀를 돌아본다.

    “마법사님은 무도회장에 계실 거예요.”

    “그곳으로 보내 드릴게요.”

    죄책감에 평소 같은 미소도 지어 주지 못하는 나탈리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건강을 먼저 챙기라고 하고 싶지만 류드밀라는 어느새 손을 내밀고 있다. 둘 사이에 접촉이 이뤄지자마자 그녀는 이동 마법에 휩쓸려 황궁의 연회장에 도착한다. 고맙다는 말도 못 했다는 후회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밀려난다.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모습의 황제는 일렁이는 물 안에 갇혀 있고 루슬란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 류드밀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아무 소리도 못 내고 덜덜 떨면서 흐느낌이 새어 나가는 입을 틀어막는다. 루슬란이 새로운 기운을 느끼고 돌아선 순간, 그 은빛 눈 안에서 류드밀라는 한 가지 사실을 본다.

    저 눈빛이 절대로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 루슬란이 겪은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 지독한 상처로 남아 절대 은색 눈을 맑고 따스하게 빛나게 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그녀가 그리 생각할 동안 루슬란은 분노를 한순간에 거둔다. 슬픔과 후회를 담아 그가 입을 열려 할 때, 황제의 숨이 끊어진다. 그래서 류드밀라는 보지 못한다. 어쩌면 그녀가 본 사실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못 보고 지나친다.

    그녀를 발견한 순간 불길이 꺼지고 아름다운 총기가 돌아오려던 눈이, 황제의 죽음과 함께 새까맣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동공과 색의 구분이 거의 없이 까맣게 변한 눈동자가 류드밀라를 응시한다. 루슬란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기침을 하며 무너져 내린다.

    “루슬란 님!”

    정신을 차린 류드밀라가 위태롭게 일어나 그를 향해 달려간다. 몸을 웅크리고 잔기침을 뱉어 내는 모습이 가슴을 할퀴어 놓는다.

    “가까이 오지 마셔요.”

    겨우 고개를 든 그가 다급하게 경고한다. 서둘러 멈춰 선 그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또다시 한차례 기침이 몸을 뒤흔든다. 입을 막은 손 사이로 새까만 액체가 흘러나오는 걸 본 류드밀라는 날카로운 숨을 들이켠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힘없이 고개를 떨군 루슬란은 땅을 짚은 손으로 주먹을 꼭 쥔다.

    “저주가 발현되었어요. 저와 황제를, 이 제국을 묶고 있는 저주가.”

    “제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어요. 이그나티 제국에 잘못한 일이 있으시다고. 그래서 황제가 죽고 저주가 내려진 것인가요?”

    그녀는 옷자락을 불안하게 비튼다. 아직도 두려움 가득하고 가냘픈 목소리로 질문과 걱정을 늘어놓는 것밖에 못 한다. 그 생각에 미치자 자괴감이 불쑥 들어서 뒷말을 덧붙인다.

    “저번처럼 성물로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몰라요. 방법이 있을 거예요, 틀림없이.”

    그가 고개를 천천히 젓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다. 별안간 무서운 생각이 떠올라 류드밀라는 가슴이 답답하다. 그날, 유난히 추운 겨울날 후원의 연못으로 발을 들이던 자신이 떠오른다. 그녀가 죽은 줄 알았던 루슬란이 그런 기분 아니었을까. 복수를 하고 저도 숨을 끊으려고 이런 일을 벌인 건 아닐까.

    루슬란은 몇 번을 콜록거리다 입가를 매만지고 힘들게 입을 연다.

    “그런 방식으로 풀 수 있는 저주가 아니어요. 게다가 지금은 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저주가 제 몸을 물들이면서 그러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그대는 산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요.”

    “안 돼요.”

    음울한 생각에서 헤엄치던 류드밀라가 서둘러 대꾸한다. 그녀는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무의식적으로 다가서려다 멈춰 선다. 그를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한 채 우뚝 서서 제 진심이 닿기를 바라본다.

    “지금 산에 돌아가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전 루슬란 님을 돕고 싶어요.”

    그러나 애처롭게 나오는 말들은 떼쟁이 아이가 된 듯한 기분만 남기고 아무런 변화 없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지금 황궁에 머무르셔도 아무것도 못 하긴 마찬가지여요.”

    단호한 대답에 류드밀라는 몸을 바르르 떤다. 이번에는 그의 수에 말리지 않으리라. 그녀에게 상처 줘서 밀어내려는 말들에 다치지 않으려고 그녀는 노력한다.

    “저주는 루슬란 님께만 해당되는 거잖아요. 제가 곁에 못 있을 이유라도 있나요?”

    “저주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모르셔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제가 더 늦기 전에 이동 마법과 보호 마법을 써 드릴 테니 산으로 가셔요. 제가 모든 걸 해결할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시면…….”

    “싫어요.”

    루슬란의 창백한 손등을 타고 흘러내린 검은 액체가 바닥에 투둑 하고 떨어지며 고이기 시작한다. 류드밀라는 애써 시선을 떼고 고개를 숙인 그를 똑바로 응시한다.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용기를 내야 했는지 그가 알아줬으면 한다.

    “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제가 곁에 있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지 않나요. 슬프더라도 함께 울고 화나더라도 함께 쏟아 내기로, 약속하지 않으셨나요.”

    아까 보여 줬던 단호함을 누그러뜨리고 그가 나직이 이른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요. 그대가 저 때문에 다칠 수도 있어요.”

    그녀는 턱을 조금 치켜들고 용기를 더 끌어모은다.

    “두렵지 않아요. 흑마법사의 저주에 걸리셨을 때도 제가 곁을 지켰는데 별일 없었죠. 모두가 말렸던 여정을 떠나고도 살아 돌아왔죠. 저는 루슬란 님의 생각보다 강한데, 왜 아직도 그걸 모르시나요.”

    “그때와는 달라요.”

    루슬란은 잠시 숨을 고르며 심호흡을 한다. 그 뒤에 말문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날 서 있고 차갑다.

    “이해하지 못하시면 제게는 강제로 그대를 보내는 방법도 있어요.”

    낮은 협박의 말들은 의도대로 류드밀라의 여린 마음을 파고든다. 여전히 상처 받고, 여전히 울먹임이 올라오지만 이제는 주장을 밀고 나가는 법을 배운다. 그 울먹임을 이용하는 법을 알게 된다.

    “제게 그 눈을 보여 주기 싫으셔서, 그래서 고개를 계속 숙이고 계시면서… 그렇게 저를 배려해 주시는 분이 왜 제게 그토록 상처를 주려고 하시나요.”

    루슬란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짙은 암흑이 번지고 스며든 눈은 달 없는 밤의 스산함을 품고 있다. 류드밀라는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물러나고 그 즉시 후회한다. 걸음을 되돌릴 수는 없다.

    “더 큰 상처를 주기 싫어서. 전 돌이키지 못할 상처로 그대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아요.”

    “대체 무슨 저주길래 그러세요?”

    그는 눈을 감고 한숨을 푹 쉰다. 그녀에게 실망했다는 그 태도가 얼마나 아프도록 시린지 알기나 할까. 류드밀라는 힘들게 똑바로 선 자세를 유지한다.

    “산으로 돌아가셔요, 나의 껍데기 님.”

    그녀는 천천히 물러났던 걸음을 되밟는다. 그에게 멈추지 않고 다가가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녀를 피해 물러서려다 휘청이며 주저앉는 루슬란의 모습에 다시 한번 슬퍼지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고 힘주어 말한다.

    “전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예요.”

    “……괴물로 변하는 저주랍니다. 시간이 흐르면 전 암흑에 물든 괴물로 변해 주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종말을 가져오려 하겠죠.”

    저주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뒤늦은 답을 내놓은 그가 눈을 뜬다. 기침이 또 한 번 몸을 뒤흔들고 지나가고 류드밀라는 힘겹게 떨리는 어깨가 가엾어진다. 괴물로 변한다는 말과는 상관없이 그를 안아 주고 싶다. 목소리에 담긴 불안함과 슬픔이 가시도록. 누군가는 어리석고 순진하다 할지 몰라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한다.

    “상관없어요. 제가 죽는다고 해도 루슬란 님의 곁을 지키다가 죽을래요.”

    “그런 말은 쉽게 내는 것이 아니어요.”

    “제가 깨어났을 때 루슬란 님은 곁에 없으셨어요.”

    그 말에 루슬란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쥐고 만지작거린다. 이번에는 그도 몸을 피하지 않는다.

    “답을 찾아내기 전까지 그 짧은 순간 동안 온갖 생각이 다 들었었는데. 다시는 그런 두려움을 느끼고 싶지 않아요. 무가치한 존재라는 허망함. 외로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루슬란 님을 만나기 전에는 항상 그런 감정들에 둘러싸여 살았어요. 왜 제가 겨우 이겨 낸 것을 되돌리려고 하시나요?”

    류드밀라는 손을 편다. 손가락 사이로 결 고운 머리카락들이 흘러내린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하자 그가 힘들어하는 것이 느껴진다. 입가에 번진 새까만 얼룩들이, 가늘게 떨리는 팔이 말을 막으려 들지만 그녀는 억지로 입을 뗀다.

    “왜 제 선택을 존중해 주시면서 저보다 제 안전을 중요하게 여기시나요?”

    저주가 스며든 몸에 고통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다. 그것과는 별개로 루슬란은 대꾸하지 못한다. 누구보다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데 이 순간은 그저 흘려보내고 싶다.

    류드밀라는 그에게 더 다가가 아예 끌어안는다. 이성이 있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느끼는 것이 그녀의 품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어느새 떨군 눈물이 그의 어깨를 적시는데 처음으로 그의 포옹이 따스하다. 저주 때문인지 그가 몰고 다니는 냉기와 물 내음이 가셔 있다. 가까이 있으니 아파서 그가 숨을 몰아쉬는 것까지 들린다.

    “……그대는 견디지 못할 거예요.”

    “무엇을요?”

    루슬란은 그녀를 밀어내지 않지만 마주 안지도 않는다.

    “괴물로 변한 제 모습을, 제가 그대에게 안길 고통을. 아무것도 견디지 못하실 거예요.”

    “단언하지 마세요.”

    류드밀라가 힘 있게 말해도 그는 작게 웃는다. 전혀 즐거운 웃음이 아니다.

    “그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어요. 그대의 선택을 후회하라고 드리는 말씀도 아니고. 다만, 그대의 두려움에 죄책감을 느끼지 마시라고 하는 말일 뿐이에요.”

    무슨 뜻인지 되묻기도 전에 루슬란은 나직이 말을 이어 나간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두르는 기색 없이 그녀와의 대화를 서서히 매듭지어 간다.

    “아까 질문을 하셨죠. 답을 해 드릴게요.”

    “네?”

    “이기적인 바람이었어요. 제가 없어도 그대가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한없이 이기적인 바람.”

    루슬란은 눈을 감고 슬프게 미소 짓는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다 마지막으로 속삭인다.

    “사랑해요, 나의 껍데기 님.”

    류드밀라가 사랑한다고 답하기도 전에 그의 고통스러운 헐떡임이 멎고 루슬란은 의식을 잃는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를 놓아 버린 그녀는 서둘러 늘어진 어깨를 흔든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손을 거둔다. 저주의 진행 과정은 모르지만 다시 깨어난 그가 그 자신이 아닐까 무섭다.

    그의 곁에서 죽겠다는 다짐은 끝났지만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든다. 전부터 천천히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더욱 거세진다. 아예 목 놓아 울면서 제 몸을 끌어안는데 흐릿한 시야로 새까만 기운이 뻗어 나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루슬란의 몸에서 나온 검은 액체들과 합쳐져 꿈틀거리는 것들이 바닥을 뒤덮고 벽을 타고 천장까지 올라간다.

    그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저주는 벽 틈을 파고들고 균열을 벌려 놓는다. 돌들에 금이 쩍쩍 가고 바닥이 통째로 흔들린다. 류드밀라는 비명을 삼키며 곳곳에서 튀기는 돌조각들을 피해 몸을 웅크린다.

    마침내 류드밀라의 위에서 천장이 끔찍한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린다.

    다가올 고통을 기다리던 류드밀라는 순간 주위가 고요해지자 당황한다. 돌가루가 섞여 탁한 공기를 마시느라 목이 아픈데, 방금 일어난 일이 꿈처럼 느껴진다. 굉음과 끔찍한 저주의 모습마저 이리 생생한데 말이다.

    움츠렸던 고개를 펴자 무너져 내리던 돌조각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초록빛 마법이 온 사방에서 저주를 제압하고 루슬란의 몸 안으로 돌려보낸다. 두리번거리며 서둘러 마법의 근원지를 찾은 류드밀라는 안도감에 몸을 떤다.

    산신 핀이 그들 뒤편에 노인의 모습을 하고 서 있다. 긴 지팡이에서 나온 산의 마법이 연회장을 원상태로 돌려놨을 무렵 산신이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산신님!”

    갈라지는 목소리가 나와 류드밀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흐느끼면서 그녀가 겨우 몸을 추스르자 산신이 이리 오라고 손짓한다.

    “네가 물러서야 강의 아이를 봉인할 수 있다. 그러니 이리로 오려무나.”

    “봉인…이라뇨?”

    불길한 예감이 몸을 휩쓴다. 조금 전의 충격을 가라앉히려고 애처롭게 노력하던 류드밀라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뱃속에 돌덩어리가 하나하나 쌓여 간다. 산신은 단호하지만 무뚝뚝하지는 않은 목소리로 설명한다.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란다. 저주를 당장은 풀 도리가 없어.”

    “안 돼요. 그렇게 봉인을 하면, 그러면 루슬란 님을 가둬 두겠다는 말씀이신데…….”

    “어쩔 수 없다.”

    류드밀라는 제 몸을 끌어안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버티고 선다. 걸음은 한 발짝도 옮기지 않는다.

    “안 돼요. 제발 다른 방법을 찾아 주세요.”

    그때 산신 근처에서 물이 퐁퐁 솟아나온다. 바닥에 갈라진 틈 사이로 점점 양이 불어나는 물에서 키 큰 형체가 솟아오른다. 초록색과 파란색이 섞인 머리카락과 온몸을 뒤덮은 말미잘. 바다의 여신 나이나이다. 분명 그녀는 방금까지 이 자리에 없었지만 산신과 오간 대화를 다 들은 듯 류드밀라에게 한심한 눈빛을 던진다. 무심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여신은 산신이 놓친 저주 한 자락을 발로 꾹 밟는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말렴. 다른 방법은 없어.”

    “그래도 다른 방법을 찾을 때까지라도 기다려 주세요.”

    여신이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예민하고 그만큼 쉽게 상처 받는 류드밀라는 이 상황이 죽을 듯이 괴롭다. 루슬란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도, 그를 위해 그녀를 도와줬던 이들에게 반항해야 한다는 사실도, 모든 것이 버거울 뿐이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네가 사랑하는 그 녀석을 봉인하지 않으면 저주에 물든 힘이 이 땅을 파괴할 거다.”

    류드밀라가 움찔하며 고개를 떨군다. 저주의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무서운 의미와 차가운 어조에 자신감을 잃어 간다. 그런 그녀를 보고도 바다의 여신은 다가와서 묻는다.

    “네 사랑이 이 땅의 모든 생명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니?”

    “아뇨.”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여신은 만족하곤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그럼 비키거라.”

    “약조해 주세요.”

    “뭐?”

    고개를 든 류드밀라가 여신을 똑바로 응시한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일도 막상 실천하려니 온몸이 두려움과 긴장으로 덜덜 떨린다. 하도 비틀어 대서 손마디도 아파 온다.

    “봉인 마법을 구현하려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절 설득하려고 하신 거잖아요.”

    마녀의 방에 드나들던 생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녀는 조심스레 꺼낸다.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 또 한 번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여신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래도 류드밀라는 불안하게 비틀던 손을 등 뒤로 숨기고 말을 계속한다.

    “동의할 테니 약조해 주세요. 저주를 풀 방법을 찾게 도와주시겠다고요.”

    작게 흠, 소리를 낸 여신의 얼굴이 별안간 비웃음으로 물든다.

    “내게 거짓말을 했구나. 네 사랑이 이 땅의 모든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냐. 그러니 이런 가증스러운 짓을 벌이지.”

    결국 다리에서 힘이 풀린 류드밀라는 비틀거리다 주저앉는다. 서둘러 무릎을 꿇은 자세로 고쳐 앉은 그녀가 두 손을 꼭 맞잡는다.

    “어떻게, 어떻게 생각하시든지 상관없어요. 제가 동의할 테니 약조해 주세요. 제발요.”

    여신은 우아하게 코웃음을 친다. 고혹적일 만큼 아름다운 손짓으로 류드밀라의 턱을 쥐고 긴 손톱으로 살에 생채기를 낸다.

    “어디서 주워들은 사실을 빌미로 삼아 감히 신과 거래를 하려 들다니. 멍청한 건지, 무모한 건지.”

    “간절한 거예요.”

    류드밀라가 힘없이 낸 말에 손아귀 힘이 강해진다.

    “죽은 자는 반대하지 못하지. 이 자리에서 널 죽이면 일이 참 간단해질 텐데 말이다.”

    “전 두렵지 않아요. 다만 루슬란 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일이 무서워요.”

    바다의 짠 내와 산호처럼 알록달록한 숨결이 어지럽게 주위를 휘감는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여신의 말들은 차가운 깊이로 류드밀라의 가슴을 도려낸다.

    “의존적이고, 무능력하고, 자존감마저 낮은 네가 도움이 되었던 적이 있었을까? 네 두려움은 타당한 것이구나. 두려워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아이야.”

    “저는, 저는 루슬란 님을 사랑해요. 쓸모없어도 그게 제 유일한…….”

    손톱 하나가 깊숙이 살을 파고들자 류드밀라는 견디지 못하고 여신의 손을 뿌리친다. 그러나 손이 밀리기는커녕 제 몸이 뒤로 내동댕이쳐진다. 위압감에 짓눌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원망하는 시선을 올린다. 시선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게 널 뭐라도 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니? 네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단다. 그의 사랑만이 의미 있지. 그를 향한 네 사랑이 아닌, 너를 향한 그의 사랑이 비천한 네가 가진 전부니까.”

    꺾이고 만 고개 위로 여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포기하렴. 너를 향한 그의 사랑은 끝났고 곧 봉인당할 저주만 남았지. 이제 넌 전부였던 것을 잃고 진정한 껍데기가 된 것이란다.”

    “아뇨, 전 텅 비어 있지 않아요. 절 채웠던 것은 루슬란 님의 사랑만이 아니니까요. 그분께서 주신 사랑이 절 변화하게 만들었어요. 전 단순히 사랑에 보답하려 이러는 것이 아니에요. 변한 저 자신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내렸을 뿐.”

    또 한 번 모진 말이 쏟아지길 기다리는 류드밀라 주변에서 그림자와 위압감이 천천히 걷힌다. 조심스레 연 시야엔 바다의 여신이 산신을 돌아보는 것이 들어온다.

    “마침내 껍데기 아이가 인정했네.”

    산신의 인자한 미소와 다시 그녀를 내려다보는 여신의 새침한 얼굴에 류드밀라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잔뜩 굳어 있던 팔다리를 펴고 힘들게 일어선 그녀에게 산신이 고개를 끄덕여 준다.

    “너를 조금 몰아붙일 필요가 있었다. 저주를 풀 방법에 네가 포함되어서 말이다.”

    여신의 팔에는 작은 크기의 황금 뱀이 스르르 나타난다. 송곳니에서 떨군 독 한 방울을 공중에 띄운 채 여신이 엄숙하게 말한다.

    “약조하지. 봉인에 동의하면 우리가 널 도울 거란다.”

    아직도 무슨 일인지 완벽히 이해 못 한 류드밀라는 그저 감사하다고만 하며 연신 허리를 꾸벅인다. 그러는 사이에 독 방울은 여신의 움켜쥔 손 안에서 사라진다. 약간 정신없어 하는 그녀를 물러서게 한 바다의 여신과 산신이 봉인을 시작한다. 두 신이 맞잡은 손에서 복잡한 형태의 마법이 솟아오른다.

    그렇게 합쳐진 마법 갈래가 끊임없이 저주의 중심에 닿기를 몇 시간. 초조하게 기다리던 류드밀라가 피로에 못 이겨 잠들고 다시 깬 후에도 봉인 마법은 이어지고 시간은 흐른다. 잠기운이 남아 졸던 그녀는 하마터면 봉인 순간을 놓칠 뻔한다.

    전보다 훨씬 옅어진 검은 저주는 루슬란의 몸을 휘감고 들어 올리고, 회색빛 마법이 누에고치처럼 주변을 완전히 감싼다. 루슬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든 구석이 마법으로 감기고 나자 산신이 산양의 모습으로 뿔로 공중에 떠 있는 고치를 건드린다. 뿔 끝에 닿는 순간 봉인된 루슬란은 사라진다.

    “산의 제일 깊은 동굴로 보냈다. 그곳이면 산의 맥이 정화에 도움을 줄 거야.”

    산신은 노인의 형상으로 돌아온다. 류드밀라는 강이 더러운 것을 모아 오면 산이 정화해 준다는, 예전에 들은 그의 말을 기억해 낸다. 고개를 주억이는 그녀에게 산신이 따라오라 말한다.

    “나와 걸음을 같이 옮기자꾸나. 성역으로 데려다주마.”

    ***

    변함없는 봄날의 성역을 마주한 류드밀라는 시큰거리는 가슴에 손을 가만히 올린다. 이곳에서의 기쁜 추억도, 슬픈 기억도 모두 루슬란과 함께했는데 지금 그는 곁에 없다. 루슬란에게서 시작해 저주까지 뻗어 나간 생각은 그녀로 하여금 산신에게 조심스럽게 묻게 만든다.

    “아까 여신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여쭈어도 될까요?”

    “저주를 풀 방법에 네가 포함된다는 말에 대해 묻는 것이냐?”

    류드밀라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모질게 그녀의 마음을 파헤치던 여신의 태도가 변한 이유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신이 저를 시험해 본 것은 알았지만 이유를 모르니 걱정되기만 한다. 산신이 내쉰 깊은 한숨에 불안함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함께 성역의 오두막으로 향하는 걸음이 약간 느려진다.

    “강의 아이가 받은 저주는 일종의 벌이다. 과거에 한 잘못의 책임을 묻는 것이지. 오직 인간만이 그 저주에서 그를 해방시킬 수 있어서, 그에 대한 네 마음을 나이나가 시험해 본 것이란다.”

    저주를 풀 수 있다는 뜻이니 마음이 놓일 법도 한데, 류드밀라의 좁혀진 미간은 쉬이 펴질 줄을 모른다.

    “루슬란 님께 벌을 내린 사람은 누군가요? 그리고 과거에 무슨 잘못을 하셨길래 그런 저주를 받은 건가요?”

    산신이 허탈하다는 듯 잠시 멈춰 서 이마를 짚는다. 노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한층 짙어진다.

    “아직도, 아직도 강의 아이가 알려 주지 않았구나. 그의 온갖 모습을 지켜봐 온 너에게도.”

    예전 같았으면 그저 다 이유가 있겠지, 하며 체념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우려 섞인 궁금증이 앞선다. 답답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 보아도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그분께서 저주에서 놓여나시면 그때 들을게요. 말하지 않으셨던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진실을 모르면서 저주를 풀려 할 수는 없다.”

    짤막한 대답을 내놓은 산신이 문이 활짝 열린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다. 기억과 그대로 아늑하고 나무 냄새가 밴 공간이다. 산신이 권한 의자에 앉아 류드밀라는 힘겨운 갈등을 계속한다. 진실을 산신에게서 들으면 당장은 궁금증이 풀릴 것이다. 그러나 궁금증이 풀려도 마음이 편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루슬란이 숨기고 싶었던 사실을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이 그녀를 더 괴롭힐지도 모른다.

    어떤 대꾸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산신은 마법으로 달군 물을 찻잎 주머니 사이로 흘려보낸다. 도자기 찻잔에 고운 색의 물을 담아 산신이 그녀 쪽으로 밀어 준다. 마녀들이 마시는 것만 봤지 값비싼 차를 마실 엄두도 내지 못했던 류드밀라는 눈을 느리게 깜박인다.

    “딱 적당한 온도니 식기 전에 마시거라.”

    차에 잠시 마음을 빼앗긴 류드밀라가 방심한 새에 산신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길고 긴 말을 짧게 하자면 이건 네가 생각한 것처럼 강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란다. 너에 대한 이야기지.”

    “네?”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던 류드밀라가 손을 멈춘다. 마시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한 모금 머금었으면 볼썽사납게 뿜었으리라. 그녀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 한마디에 온갖 불안한 궁금증이 인다. 그와 함께 그녀가 묻어 두려던 오래된 질문들도 함께 떠오른다.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그때에 껍데기 마을에서 들었던 진실. 그녀에게도 황궁 밖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말. 설마 그와 관련된 것일까.

    눈을 동그랗게 뜬 껍데기에게 산신은 인자한 미소를 내보여 안심시킨다. 그러나 산신의 속도 복잡하긴 매한가지이다.

    “네가 들었던 말과 달리 껍데기들은 황궁에 길러지지 않았단다. 어렸을 때는 가족과 살다가 나이가 차면 기억이 지워진 채로 황궁으로 오게 되지.”

    “그 부분은 들어서 알고 있어요.”

    류드밀라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그렇게라도 해 산신의 얼굴에서 그녀가 듣게 될 이야기를 짐작하려 한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순간이 길고도 무겁게 느껴진다.

    “네가 어렸을 때 강의 아이와 연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느냐?”

    “네, 그것도 루슬란 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산신은 한숨을 푹 내쉰다. 아예 아무것도 모르면 오히려 설명하기 쉬울 텐데, 말을 이어 나가기가 이렇게 힘든 적이 없다. 어디까지 들었고 어디를 모르는지 알아야 제대로 말을 할 수 있으련만. 어려워하는 기색이 전해졌는지 류드밀라가 걱정스럽게 눈을 올려 뜬다. 산신은 저도 모르게 찌푸렸던 인상을 펴고 헛기침을 잠시 한다.

    “그때의 강의 아이가 내게 말해 준 것이 있단다.”

    이제 류드밀라의 속마음은 마구 날뛰고 있다. 상상 속에서 산신은 그녀가 사실은 껍데기가 아니었다고 알려 주며, 정화 마법을 가르쳐 줄 테니 루슬란을 구하자고 말한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껍데기의 은발이 아닌 달의 키스를 받은 은발이라, 힘을 두려워한 마녀들의 저주에 걸려 마법을 못 썼던 것이라고. 황궁에 있을 적부터 비밀스럽고 소중히 간직해 온 소망이 되살아난다.

    밤에 잠들기 전 웅크려 누워 떠올렸던 온갖 황당하고 애처로운 상상들이 현실이 될 것만 같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질문을 한다.

    “무얼 말씀해 주셨는데요?”

    산신은 생각에 잠긴 눈치로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한다.

    “껍데기 여인이 마법사의 씨를 품으면 더욱 강대한 자식을 낳는다는 말은 알 것이야. 마법을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는 것도. 그런 특성을 정화 마법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의 아이가 알아냈다.”

    류드밀라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려고 최선을 다한다. 부풀던 환상은 한순간에 터져 버리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초라한 꿈의 조각들이다. 애초에 헛되었을 뿐이라 여기며 그녀는 시선을 내린다.

    “저는 마법이 몸에 닿아서 더는 그럴 수 없게 되었어요, 핀 님.”

    “마법사의 아이를 낳는 일과 달리 정화 마법에선 그래도 상관이 없어. 강의 아이가 알려 주지 않았느냐?”

    “저는 제가 정화를 도울 수 있다는 것도 지금 알았어요.”

    산신이 못마땅한 쯧 소리를 낼 때 류드밀라는 예전 일을 떠올린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녀의 걱정과 강박을 달래 주던 루슬란의 다정한 말이 귓가에 희미하게 맴돈다. 그녀는 가슴이 헛헛해져 찻잔을 입에 대고 기울인다. 따뜻한 음료가 속을 달래 줄 줄 알았으나 오히려 안정감에 대한 갈망만 키워 놓는다. 그래도 산신의 성역에서 만들어진 차라 몸의 긴장이 한결 풀어진다.

    마음에 진 응어리는 차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루슬란이 숨겼던 사실들이 하나둘 밝혀짐에도 진실과 가까워지기는커녕 답답하기만 하다. 깜깜한 밤에 등불을 홀로 켰는데, 약한 빛에 어둠이 더욱 선명히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빛은 어둠을 더욱 기괴하게 일그러뜨린다.

    류드밀라는 과연 진실을 알고 싶은지 고민하다 결정을 내린다. 그들은 서로에게 숨김없는 사이가 되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 이유 말고도 루슬란에 대해 더 알게 되는 일이 관계에서 발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번에 저주를 풀게 된다면 꼭 진실에 대해 물으리라. 그녀가 어렸을 적 정확히 어떤 연이었고, 루슬란이 저주받게 된 정확한 이유도, 이그나티 제국에 저지른 잘못은 무엇인지, 모두 들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고 류드밀라는 산신을 똑바로 바라본다.

    “제가 무얼 하면 될까요?”

    “성역에 머무르면서 정화를 돕는 방법을 배우거라. 후에 나이나와 내가 강의 아이를 정화할 때 네 역할이 클 거야. 오늘은 많은 일이 있었으니 쉬다가 내일 아침에 보자꾸나.”

    “네, 알겠어요.”

    예의 바르게 대꾸한 류드밀라는 머뭇거리다가 전에 머물던 방으로 향한다. 그때 오두막 문가에서 산신이 뒤를 돌아본다.

    “루살카와 영물들이 널 보고 싶어 했었다. 내일 낮에 나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산신의 뒷모습과 함께 문이 닫히는 것까지 보고 그녀는 방으로 올라간다. 전과 다름없이 포근한 분위기가 류드밀라를 반긴다. 말 없는 사슴이 받아다 준 물로 씻은 그녀는 침대에 눕는다.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눈을 감자 황궁에서 봤던 장면들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새까맣게 변해 버린 눈동자, 입에서 쏟아 내던 저주의 흔적과 피로 물든 옷자락까지. 그녀는 기억들을 물리치려 몸을 잔뜩 웅크린다. 품 안에서 축 늘어지던 감촉과 무게에까지 기억이 다다르자 작게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간다. 어느새 눈구석에 고인 눈물을 훔치다 류드밀라는 차마 산신에게 묻지 못한 질문들을 되새김질한다.

    정화 마법으로 정말 저주를 되돌릴 수 있는지. 배우는 데 얼마나 걸릴지. 그녀가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

    마지막 물음에서는 몸서리 쳐질 정도로 두려워져 그녀는 돌아눕는다. 루슬란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여정 중에 그가 그녀를 밀어냈을 때 잠시 각오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제 겨우 이뤄 낸 행복을 빼앗아 버린 황제도, 저주를 내린 미지의 인물도 모두 밉기만 하다.

    억울함과 분노로 바뀐 감정은 일시적이었는지 금세 새로운 절망이 그녀를 찾아온다. 온갖 의심과 공포 속에서 잠 못 이루다 류드밀라의 지친 몸이 먼저 항복한다.

    ***

    시간이 순식간에 쪼그라든 느낌으로 류드밀라는 눈을 뜬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밖은 벌써 환하다. 웅크리고 자서 뻐근한 몸을 펴다 그녀는 아침에 보자던 산신의 말을 떠올린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자고 싶은데 해가 뜬 걸 가늠하니 안 될 것 같다.

    벌떡 일어나 앉은 그녀는 서둘러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몸을 움직이니 배가 꼬르륵거려 오지만 무시하고 계단을 총총 뛰어 내려간다.

    오두막 지상 층에는 벌써 산신이 와 있다. 류드밀라가 아침 인사를 건네자 산신은 손짓한다.

    “따라 나오거라. 공복에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을 거다.”

    먼저 앞장선 산신을 따라 그녀는 언덕을 오른다. 들판에 흐르는 루살카들의 시내와 부드러운 풀들을 보니 지난밤의 걱정이 한결 가신다. 그래도 산신이 정자까지 다다라 앉고 반대편 자리를 건드리자 밀려오는 긴장은 어쩔 수가 없다. 이제 정말로 정화 마법을 돕는 일을 배우는 것이다.

    류드밀라가 정자 의자에 앉자 산신이 설명을 시작한다.

    “저주에 걸린 이들에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강의 아이에게 주어진 기회는 101일 후에 열릴 정화 의식이야. 그 자리에는 의식을 주도할 나와 나이나 말고 다른 신들도 참석할 것이다.”

    산신의 설명은 온갖 궁금증들을 다 불러일으키지만 그녀는 얌전히 경청한다.

    “의식에서 네 역할은 일종의 확산 매개체, 증폭기다. 나와 나이나의 마법을 받아들여 강의 아이에게 더 강한 형태로 전달하는 것이지. 보통 사람들은 각자의 마법을 갖고 있기에 정화 마법이 섞이거나 흡수된다. 너는 마법이 닿았어도 껍데기이기에 이 역할이 가능해.”

    산신은 언덕을 올라올 때 짚었던 지팡이를 옆에 기대 세워 놓는다. 그리고 손에서 초록빛 마법을 불러낸다.

    “산과 바다의 기운이 너를 통과할 때, 너는 어느 것도 욕심내지 말아야 하며 누구보다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 유혹을 이겨 내고 의식과 마법을 견디는 연습을 오늘부터 할 거다.”

    류드밀라는 설명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한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날의 막연한 두려움보다 산신의 말을 들은 후 느끼는 두려움이 더 크다는 사실이다.

    다른 신들이 참석한 대단한 자리에서 한낱 인간에 불과한 데다 껍데기인 그녀가 중요한 역할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부담감이 벌써부터 뱃속에 똬리를 튼다. 하지만 산신에게서 조언은 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위로를 바랄 수는 없다. 류드밀라는 절실하게 루슬란의 존재를 바라 본다. 그가 곁에 있었으면.

    그 간절함의 크기만큼 부담감이 옅어진다. 숨을 천천히 들이쉰 그녀가 산신이 내민 손에 제 손을 얹는다.

    “내가 아주 작은 양의 마법을 네게 줄 테니 그대로 흘려보내 보거라. 숨을 고르게 쉬면서 집중해야 한다. 내가 마법을 줄 때는 네 내면으로 받아들이고, 그 후에는 외부 환경을 의식하거라.”

    “네, 핀 님.”

    산신은 류드밀라의 대답 후에도 준비할 시간을 준다. 그리고 반대 손을 포개며 녹색 마법을 그녀에게로 보낸다.

    말은 분명 알아들었는데 막상 마법이 제 피부 안으로 희미해져 가는 걸 보자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번진다. 류드밀라는 용케 손을 빼지 않지만 그렇다고 산신의 말대로 집중하지도 못한다.

    산의 시원한 바람이 몸 안을 스치는 느낌이 난다. 같은 바람이 나뭇가지를 뒤흔들고 잎사귀가 박수를 치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샘물의 개운한 단맛이 혀끝에 맴도는 순간, 초록빛이 그대로 옅어지더니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잘, 잘 안 된 거죠?”

    산신을 올려다보자 무언의 끄덕임이 돌아온다. 풀이 죽은 류드밀라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치맛자락에 닦는다.

    “처음에 성공하는 사람은 없어. 만약 성공하면 내가 마법을 보낼 때와 똑같이 빛줄기가 나올 게다. 네 의식을 내면에서 외면으로 이동시키는 연습부터 해 보자꾸나.”

    그렇게 류드밀라는 점심때까지 명상을 하고 마법을 몇 번 더 사라지게 만들며 시간을 보낸다. 확산시키는 일은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그래도 거듭된 명상 덕인지 정자에서 내려갈 때에는 마음이 한결 가볍다. 전날 밤의 불편함을 떨쳐 낸 것 같아 그녀는 만족한다.

    오두막으로 돌아와 보니 산신과 이야기를 나눴던 긴 탁자에 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다. 류드밀라가 좋아하는 산딸기와 블루베리는 물론이고 온갖 과일과 꽃이 바구니를 가득 채운다. 그 가운데에는 덩굴로 글씨가 써져 있다.

    ‘우리를 찾으러 와요!’

    글을 읽지 않은 지 오래되어 그녀는 더듬더듬 읽어 낸다. 그리고 루슬란이 봉인된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입가에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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