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저주 (17/20)
  • 14. 저주

    루슬란이 한 말의 의미가 바로 와 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뜻이 물에 떨어뜨린 새까만 잉크처럼 천천히 번져 가자 류드밀라의 잠은 안타깝게도 모두 달아나고 만다.

    “마을을… 없앤다고요?”

    “황제가 제게 강요한 방식이랍니다. 슬프게도 제국은 가난한 사람들이 별로 살기 좋은 곳이 아니어요. 굶주림과 착취에 시달리던 소작농들이 때때로 지주에게 반기를 들기도 하지요.”

    루슬란은 담담한 목소리로 끔찍한 진실을 풀어놓는다.

    “보통은 반란의 주모자만 처벌하지만 지금 황제는 잔악한 사람이에요. 반란이 일어난 마을 주민은 몰살된다는 사실을 공고히 하여 소작농들이 서로를 먼저 고발하게 만들었어요. 그럼에도 폭동은 가끔씩 일어나기 마련이어서, 마법사와 마녀들이 진압하러 파견된답니다.”

    “진압이라 하면…….”

    “네, 마을에 사는 모든 이들을 살해하는 일이지요.”

    침묵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는다. 류드밀라는 차라리 물어보지 말걸 하고 후회하면서 그의 심정을 감히 가늠해 본다. 그런 일을 도맡아 하며 얼마나 참담했을까. 그리고 이 사실을 그녀에게 솔직히 말할 결심을 했을 때는 또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녀는 눈을 꼭 감고 가슴에서부터 소용돌이치는 먹먹함을 견딘다.

    “……괜찮으신가요, 루슬란 님은?”

    조심스레 눈을 뜨고 그의 표정을 살핀다. 안심시켜 주려 억지로 미소 짓는 것인지 아닌지, 전자라면 달래 주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루슬란은 다만 뜻밖이라는 얼굴로 조금씩 떨리는 그녀의 손을 잡아 준다.

    “저는 괜찮아요. 강이란 본디…….”

    별생각 없이 말하다 그가 삼킨 나머지 말을 류드밀라가 이어 간다.

    “제 품에 있지 않은 생명에게는 너그럽지 않으니.”

    루슬란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가 어린 신록을 다치게 했던 일이 또다시 떠올라 그녀는 괴롭다. 그리고 두렵다. 언젠가 그녀조차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한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닌지. 이기적인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말을 누구에게서 들으셨나요?”

    그는 별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심한 목소리로 이리 묻는다.

    “티크혼에게서요.”

    그녀가 대꾸하자 루슬란은 포개진 자신과 류드밀라의 손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속삭인다.

    “틀린 말은 아니어요.”

    “제가 만약에 루슬란 님의 품에서 벗어난다면 제게도 그리 대하실 건가요?”

    “그대는 이미 제 품 안에 있지 않으셔요.”

    예상치 못했던 말을 한 그는 생각에 잠겨 그녀의 손바닥을 뒤집고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대는 애초부터 제 품을 벗어나 있었어요. 그대가 그걸 원했고, 제가 그러길 바랐고, 원래 그래야 하니까요.”

    루슬란은 말을 마치자 원을 그리던 손도 거둔다. 그녀는 허해진 하얀 손바닥을 서둘러 쥐어 부재를 느끼길 거부한다.

    “그런데 루슬란 님은 왜 제게는 다르게 대하세요? 아까 그 남자의 목숨은 쉽게 앗아 갔으면서, 반란이 일어난 마을 사람들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시면서. 왜 저에게만…….”

    “아직도 이유를 모르시겠나요, 나의 껍데기 님. 제가 몇 번이고 그리 말해 드렸는데요. 그대를 사랑한다고요.”

    내려다보는 시선은 따스하고 애정이 담겨 있다. 류드밀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슬픔과 분노에 빠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다.

    “제가 다른 모두에게 햇살 가득한 봄날처럼 대하면 그대의 마음이 조금은 풀어질까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루슬란은 질문 하나로 이미 의심과 회의가 용솟음치던 그녀의 세상을 뒤집어 버린다.

    “그런데 제가 과연 그 후에도 살아남아서 그대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뒤집어진 세상에서 류드밀라는 바로 서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휘청거리는 가냘픈 걸음으로 다가가 세상의 벽을 두드리고, 외친다.

    “제가 납치되기 전 황궁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때, 읽은 동화책이 있었어요. 바닷가 마을에 사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착했어요, 그 소년은. 바다로 가지 못하는 친구에게 물고기를 나눠 주고 마을의 잡일을 도맡아 했죠. 소년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못마땅했어요.”

    벽을 두드리는 주먹이 아파 오고 귀가 먹먹했지만 그래도 외친다.

    “그래서 소년에게 물었죠. 네가 그래 봤자 그 친구는 평생 물고기를 잡지 못할 거고, 네가 준 물고기를 갚을 수도 없을 거야. 마을 사람들은 너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너를 하찮게 보고 일을 더 시킬 거란다.”

    나는 이곳에서 나갈 거야. 나가서 더 넓은 세계를 보고 더 많은 걸 배우고 더 행복하게 살 거야.

    “그런데 너는 왜 친절을 베푸는 거니? 소년은 곰곰이 생각했어요. 그리고 답을 했죠. 아버지, 친절을 베푼다고 세상은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고 사람들은 여전히 이기적이에요. 저로 인해 바뀌는 건 거의 없어요.”

    세상의 벽은 단단하다. 한 사람의 세상은 견고하게 쌓인 그의 모든 것이기에. 류드밀라는 포기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제가 한 선행을 믿지 않아요. 저는 제 자신을 믿어요. 그래서 모두가 저를 멍청하다고 비웃어도 친절을 베풀 거예요. 실망하지도 않고, 그만두지도 않을 거예요. 선행에 대가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우리는 친절을 베풀어야 하니까요.”

    류드밀라는 루슬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가 이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를 그가 알아채 주길 바라면서. 그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녀가 저도 모르게 꼭 쥐고 있는 주먹을 어루만진다.

    “그 동화책의 결말이 무엇인가요?”

    “결말은 읽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소년이 옳다는 건 알아요.”

    “그래서 저도 그 소년처럼 남들에게 친절을 베풀라, 그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건가요?”

    류드밀라가 초조하게 그의 의중을 읽어 내려 노력한다. 정확히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그가 알고서도 굳이 물어보는 이유가 궁금하다.

    “그건 루슬란 님의 선택이에요.”

    “나의 껍데기 님, 그대는 그 동화책의 결말까지 읽으셔야 했어요. 이야기의 마지막에 소년은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죽고, 소년의 친구는 돌봐 주는 사람 하나 없이 굶어 죽고,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을 바다로 보낸 것을 후회하며 살아간답니다.”

    “루슬란 님께서 어떻게…….”

    루슬란은 빙긋 웃는다.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는 미소가 류드밀라의 마음속에 깊숙이 새겨진다.

    “제가 그 동화책을 썼으니까요. 그대를 만나기 전, 무료한 시간을 흘려보내며 글자를 적어 내려 도서관에 꽂아 두었으니까요.”

    류드밀라는 얼굴이 화악 붉어진다. 책을 쓴 사람 앞에서 설교하듯 내용을 늘어놓았으니 어떻게 보였을까. 부끄러운 마음에도 굳은 결심은 사라지지 않아 그녀는 새빨간 얼굴로 따지고 든다.

    “그런 동화책을 썼으면서 왜 그렇게 행동하셨나요? 선행의 중요함을 아시면서 왜 그리도 잔인한 일들을 저지르셨나요?”

    루슬란이 화난 기색 없이 그녀의 주먹을 문질러 펴게 한다. 손톱이 박혀서 난 빨간 자국들을 마법으로 없애 주며 그가 다독인다.

    “그때는 살아남아 그대를 찾고 싶었어요. 생각해 보니 그 동화책은 제 행동들에 대한 반성문과도 같은 것이었네요.”

    “지금은요?”

    “지금은 살아남아 그대를 사랑하고 싶지요.”

    몸에서 힘이 탁 풀린다. 한 질문에 대한 답을 들으면 다시 전 질문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다. 류드밀라는 쓰라린 마음을 감추고 힘없이 묻는다.

    “지금 전과 똑같은 상황인 걸 아시겠나요? 루슬란 님의 말에 대해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어요. 저를 사랑한다는 명목 아래에 잔인한 일들을 저지르지 말라고.”

    “그때도 저는 그대에게 확실한 답을 들려주지 않았지요.”

    알면서도. 알면서도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는 루슬란이 원망스럽다. 그녀의 상처를 하나하나 보듬어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무시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도 그러실 생각이신가요?”

    “아뇨.”

    그는 동화책을 썼던 날을 떠올린다. 마법으로 적기보단 잉크에 펜을 찍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던 그 순간에 루슬란은 과거를 생각하고 있었다. 강이 모두에게 너그러웠던 시절의 일들을. 그리고 그런 강에게 일어난 비극에 대해서.

    그러나 이제는 과거에서 벗어나야 할 때이다. 류드밀라의 말처럼, 바닷가 마을의 소년처럼 용기를 내야 한다.

    루슬란이 찡그리는 얼굴에 예민하게 반응한 그녀가 움츠러드는 순간 그가 말을 꺼낸다.

    “제가 바뀌려고 노력해 볼게요.”

    “정말인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여 류드밀라를 안심시킨다. 그녀는 언제 움츠러들었냐는 듯 기쁜 얼굴로 그를 끌어안는다.

    “감사해요. 사실 한편으로는 죄송하기도 했어요. 루슬란 님을 괴롭힌 사람은 따로 있는데 너무 어렵고 힘든 길을 걸으라 하는 건 아닌지.”

    “어렵고 힘든 길이라 해도 같이 걸으면 괜찮아요.”

    “그런 간지러운 말을 하시니…….”

    그녀가 몸을 떼고 입술을 삐죽이자 루슬란이 낮게 웃으며 이마를 맞댄다.

    “더 해 드릴 수도 있는데 어찌할까요.”

    “더 들으면 너무 달콤해서 이빨이 썩을 것 같네요.”

    분위기를 풀려고 부러 짓궂게 말해 놓고 류드밀라는 그가 상처 받았을까 봐 다시 그를 껴안는다. 그러나 루슬란은 더 크게 웃으며 팔을 둘러 줘서 오히려 그녀가 안긴 모양새가 된다.

    “말은 먹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니 귀가 썩는 게 아닐는지요.”

    “제가 말이 지나쳤어요. 그런 의도로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더 말하시면 제 마음이 슬퍼서 썩겠군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보라색 눈이 티 없이 맑다. 그래, 저런 분이라면 동화책 속 소년을 동경할 만하지. 조금은 납득이 간 루슬란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리라 다시금 결심한다.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류드밀라는 그가 장난치는 것을 알아도 그저 장단에 넘어간다.

    “그러면 안 돼요! 마음이 썩으시면 안 되죠!”

    “안 썩으려면 방법이 하나뿐이네요. 그대가 다시 보송보송한 말을 들려주시는 수밖에요.”

    그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류드밀라는 우물쭈물하다 결국 소심하게 웅얼거린다.

    “…사랑해요, 루슬란 님.”

    “이제는 그 말로는 부족해요.”

    루슬란이 은색 눈을 휘며 아름답게 미소 짓는다. 그녀가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서리 같은 집착이 담긴 눈길은 사랑스럽다는 듯 오롯이 류드밀라에게로 향한다.

    “그럼 무슨 말을 들려 드릴까요?”

    당돌하게 묻는 말에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담고 쓸어 주다 입가를 매만진다.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류드밀라가 더 물으려는데 루슬란은 그들 사이의 거리를 훅 좁혀 온다.

    늘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의 입꼬리가 한층 더 올라가고, 그에게서 감돌던 냉기가 다른 감각으로 뒤집힌다.

    “제가 듣고 싶은 건 말이 아닐 수도 있어요.”

    류드밀라가 뒤늦게 이해했을 때는 이미 루슬란이 입을 맞춰 온 후이다. 차가운 숨결이 그녀의 입술에 닿자마자 열기로 변하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애틋하게 그녀의 양 뺨을 감싸 쥔 그의 긴 손가락이 닿는 자리마다 달아오른 류드밀라는 눈을 감아 버린다.

    그러다 루슬란의 키스가 입술보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자 매우 당황하여 눈을 뜬다. 늑대에게 목덜미를 물린 사슴과도 같은 심정으로 그를 말리려 하는데 그가 그녀의 옷자락을 부드럽게 젖히고 가슴을 찾아 문다. 전혀 서두르지 않는 그 동작에 오히려 류드밀라는 애달픔마저 느끼게 된다.

    베개에 몸을 누이듯 기댄 그녀의 얕은 헐떡임과 이따금씩 나는 젖은 살갗의 소리가 침실을 가득 채운다. 그를 계속 보고 있기가 부끄러워 눈을 감고 싶은데 몸 주변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간지러워 자꾸 눈꺼풀이 올라간다. 그러다 루슬란이 고개를 살짝 들자 눈이 마주친다.

    커다래진 자안과 마주한 그가 입을 떼고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건다. 전에는 그저 온화하게만 보였던 웃음이 이런 상황에서는 아찔하게도 황홀하다.

    드러난 맨살에 찬 공기가 닿자 춥기도 해서 류드밀라는 그가 다시, 그렇게 해 줬으면 하고 바란다. 말로 보채기에는 너무 부끄럽고 가만히 있기에는 추위가 심해져 그녀는 대신 손을 뻗는다. 모르는 척 손만 잡은 루슬란이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다.

    원래는 쉽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줄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간지러워서 배시시 웃는 그녀에게 그는 홀리고 만다. 이번에 그가 키스한 곳은 목덜미나 가슴보다 훨씬 아래인 곳이다.

    가장 여린 부분을 건드리자 류드밀라의 입에서 절로 소리가 새어 나온다. 쾌락에 젖은 얼굴을 가엽게도 찡그리고 어여쁜 울음을 뱉어 내다 그녀는 다리로 루슬란의 어깨를 휘감는다. 불편한 기색 없이 절정에 다다르기 직전까지 그녀를 괴롭힌 그가 입가를 정돈하며 짓궂은 말을 던진다.

    “더는 제가 힘든데, 가고 싶으면 스스로 만져 보셔요.”

    “…네?”

    그녀는 당황하고 부끄러워 그를 멍하니 본다. 느슨하게 걸친 로브와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루슬란의 분위기를 더욱 색정적으로 만든다. 그가 다정히 웃으며 들으셨잖아요, 라고 짚어 주자 창피한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간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품에 안고 어르는 손길이 능숙하다.

    그 와중에 허전해진 몸이 달아 욕망이 점점 차오른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슬란은 얼굴로 내려온 머리카락 가닥을 넘겨준다. 느리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스치듯이 욕망에 불을 지핀다.

    “전에도 혼자 그러셨는데, 이번에는 하지 말란 법은 없지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기억을 상기시켜 주자 얼굴이 더 홧홧해진 류드밀라가 몸을 틀어 그를 올려다본다. 제가 만지기는 죽어도 못 하겠으니 다른 방법을 겨우 떠올린다.

    “루슬란 님께서 만져 주세요…….”

    그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하자 루슬란이 웃음 짓더니 고개를 내젓는다.

    “제가 만져 드린다면, 이렇게 할 거예요.”

    가늘고 긴 손이 류드밀라의 아래를 파고들며 느긋하게 헤집는다.

    “그대의 작은 꽃잎을 헤치고 달콤한 꿀물 속을 거닐다가.”

    그녀는 안도하며 다리를 좀 더 벌리고 그를 받아들인다.

    “애태우면서 사부작거린 후에 그대가 힘들어하시기 전에 떠날 거랍니다.”

    그녀가 만족하기 직전에 루슬란은 듣기 좋은 웃음소리만 귓가에 아른거리게 해 두고 또다시 손을 뗀다. 이젠 거의 흐느끼면서 류드밀라는 몸을 바르르 떤다.

    그가 잡은 그녀의 손은 아래로 향하고 결국 낯선 촉감을 느낀다. 그가 아직은 침범하지 않았던 곳에 손가락을 넣고 빼길 반복한다.

    창피한 바람에 류드밀라는 울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린다. 그 젖어 있는 단어들 사이에서 제 이름은 놓치지 않은 루슬란이 그녀를 토닥이고 달래 주고 괜찮다고 일러 준다.

    방 안이 쌀쌀해서 차가운 손가락에 드디어 피가 돌고 여린 감각은 도무지 무뎌질 줄을 모른다. 눈을 꼭 감고 어디도 보길 거부하던 그녀는 결국 원하던 절정을 맞이한다. 그러곤 가쁜 숨을 토해 내다 힘이 풀려 루슬란의 품 안에 폭 안긴다.

    “나빴어요.”

    겨우 분명해진 발음으로 토라져서 내뱉은 말이 귀에 또렷이 박힌다. 그는 진심이 아닌 원망이 담겨서, 자신을 노려보는 눈을 지그시 보다 이마에 입맞춤을 남긴다. 자연스레 어깨에 기대 오는 머리가 참으로 가볍고 작다.

    “그래요, 제가 나빴네요.”

    류드밀라는 그가 순순히 인정해 버리자 김이 새서 괜히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아직 지난 순간의 흔적이 남은 손가락을 보다가 제 입가로 올려 깨물어 버린다.

    “아야.”

    전혀 아프지 않은 나직한 음성에 웃음기를 담고 그리 말하는 루슬란이 못내 괘씸하다. 그녀는 달달한 손가락을 입에 담고 무얼 할까 고민하다 혀로 느리게 핥아 올린다. 그제야 그에게서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그렇게 유혹하시면, 제가 못 참는다는 걸 아시면서…….”

    “저도 똑같이 해 줄 거거든요!”

    잠시 손가락을 입에서 뺀 류드밀라가 선언한다. 루슬란이 재미있어하며 빤히 바라본다. 그녀는 다시 한번 고민하다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댄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를 응시해서 꼭 톡톡히 되갚아 줄 거라고 선전 포고를 한다. 그리고 그가 했던 것처럼, 입술에서 키스는 느리게 아래로 내려가고 판판한 가슴에 다다른다.

    “하.”

    그가 열기 속에서 조그맣게 쉰 한숨에 기뻐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고 매끈한 배는 건너뛴다. 두고 봐,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부끄럼마저 없애는 가운데 류드밀라는 그의 것을 입에 담는다. 물고 있기 버거울 정도로 커서 입이 뻐근하다. 저런 것이 전에 안에 들어왔었다는 사실이 좀처럼 안 믿기는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런데 루슬란이 언제 절정에 다다를지는 어떻게 알지? 언제인 줄 어떻게 알고 입을 떼지?

    복수해 주겠다는 결심에 너무 무모하게 덤빈 것이다. 그녀의 당황함을 느낀 루슬란이 머리카락 한 가닥을 잡고 나풀나풀 흔들며 장난을 친다.

    “어쩔까요, 전 아직 그리 애가 달진 않는데.”

    이미 저지른 이상 돌아가는 길은 없다. 류드밀라는 결연하게 그의 것을 더 깊숙이 삼켜 버린다. 그렇게 그를 애태우길 얼마나 했을까. 서서히 지쳐 가는데 그가 잡고 있던 머리카락을 놓친다.

    입을 떼고 머금고 있는 모습을 류드밀라는 그에게 보여 준다. 뽀얀 액과 붉은 입술이 얼마나 색정적인지 알아 그렇게 한다. 오래전 그가 아무것도 모르던 그녀에게 시켰던 것과 똑같은 일이다.

    그때의 그도 그녀도 지금과는 다른 이였다. 그래서 루슬란은 당황스러워하는 동시에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순간의 충동에 이끌려 시켰던 일을 류드밀라가 나서서 하니 그로서는 머리가 아찔하다.

    류드밀라가 흘끔 올려다보니 이제는 그가 얼굴이 온통 분홍빛이 되어 있다.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상황을 이해해 보려다가 결국 포기하곤 그녀의 입가를 닦아 준다. 루슬란의 어벙벙하고 무방비한 표정은 처음 봐서 류드밀라는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서 그의 볼을 검지로 조심스레 찔러 보다가 그가 입을 열자 서둘러 치운다.

    “그대는 정말 대책 없고 용감하시네요.”

    “칭찬인가요?”

    “그럴지도요.”

    금방이라도 쏘아붙여 줄 준비가 되어서 획 돌아보자 그가 웃음을 터트린다. 한마디 해 주려고 했는데 곱게 접힌 눈이 예뻐서 그녀는 말을 잃는다. 그저 치웠던 검지로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질 뿐이다.

    웃음이 미소로 가라앉았을 무렵 루슬란이 그녀의 손마디에 입 맞추며 한마디 한다.

    “풀 반지가 약지에 있네요.”

    “네?”

    “약지에 낀 반지는 반지를 준 사람과 결혼했다는 걸 의미해요.”

    놀라서 재빨리 반지를 뺀 류드밀라가 더듬거린다.

    “손가락 하나에만 계속 끼고 있기 싫어서, 맨날 바꿨는데…. 절대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그럼요, 저도 알아요. 폴레보이가 준 반지죠, 아마?”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편안하게 기대 류드밀라가 뺀 반지를 검지에 끼워 준다.

    “그러고 보니 저도 정령에게서 비슷한 선물을 받은 적이 있었네요.”

    “언제요? 어떤 선물이었는데요?”

    루슬란은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그때 떡갈나무의 정령 케르쿠에게 도토리를 받았던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준다. 이야기가 거의 끝나 갈 무렵 류드밀라는 깊은 잠에 빠져든다. 새근새근 자는 숨소리를 벗 삼아 그는 그녀를 토닥여 주다 오랜만에 저도 잠을 청한다.

    ***

    항상 커튼을 쳐 놓아 어두운 침실에서는 언제나처럼 루슬란이 먼저 눈을 뜬다. 그는 눈을 감고 전혀 즐겁지 않은 헛웃음을 뱉어 낸다. 황제가 마법사들을 시켜 저를 부르고 있다.

    어깨를 부드럽게 흔들자 끔벅이다 떠진 보라색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다. 슬픈 꿈을 꿨는지, 왜 울었던 건지 묻고 싶지만 그는 그럴 여유를 빼앗겼다.

    “황제가 절 부르네요. 더 쉬고 계셔요.”

    “다녀오세요…….”

    류드밀라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흐려지며 잠꼬대로 바뀌자 루슬란은 이동 마법을 쓴다.

    황제가 그를 부른 곳은 지하 감옥이다. 마법으로 전해지는 부름을 따라갔을 뿐 목적지를 몰랐던 그는 어쩌면 그녀에게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 낸다.

    지하 감옥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에 있는 고문실에서 황제는 루슬란을 맞이한다. 옆에는 나탈리아가 불안하게 손가락을 비틀며 서 있다. 루슬란에게 마법으로 부름을 전달했던 모양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그녀의 초조함을 무시한다. 둘이 아는 사이란 사실을 황제가 알면 나탈리아를 이용할 것이다.

    “전에 그렇게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무사할 줄 알았느냐.”

    이를 부득 갈며 황제가 으름장을 놓는다. 그가 대동한 병사를 보니 평소에 휑하던 고문실 공기가 답답한 이유도 뚜렷해진다. 어지간히 겁이 났나 보구나. 루슬란의 입가에 조소가 감돌자 황제의 분노는 기다렸다는 듯이 타오른다.

    “오늘만큼은 너도 고통과 굴욕을 피해 갈 수 없을 거다.”

    황제의 지시에 병사들은 루슬란의 손목을 벽에 연결된 쇠사슬에 묶는다. 그런 쇠붙이에 속박되지 않는 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인간들이 열심히 쇠고랑을 채우는 꼴을 그는 지켜본다.

    “시작해.”

    겨우 쇠사슬 몇 가닥으로 안심했는지 황제가 한결 여유로워진 어조로 명령한다. 나탈리아가 머뭇거리다가 앞으로 나서는 걸 루슬란은 안타까워한다. 겨우 생각해 낸 대단한 방책이 마법을 마법으로 물리치는 수라니.

    “죄송합니다, 성하.”

    두려워하던 나탈리아가 중얼거리곤 손에서 화염을 불러낸다. 새파랗게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이 루슬란에게 쏟아져 내린다.

    황제는 나탈리아의 불이 마법사에게 위해를 가할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다만 그의 기를 죽이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물 속성 마법사와 불 마법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 그런 개인적인 호기심도 있다.

    결과적으로 황제의 오만함과 호기심은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게 되는 원흉이 되었다.

    루슬란은 방어 마법을 쓰지 않는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순식간에 타서 잿더미가 되었을 화염을 고스란히 받아 내고도 그는 멀쩡하다. 오히려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쪽은 나탈리아의 불이다.

    처음에는 기세등등하게 타오르던 불은 그의 몸에 닿자마자 꺼져 버린다. 그와 함께 어마어마한 양의 김이 생성되며 루슬란 주위를 감싸 시야를 가린다. 당황한 나탈리아는 마법을 계속 유지할지 황제를 돌아보다가 결국은 힘에 부쳐 그만둔다.

    새하얗게 피어오르는 김 사이에서 루슬란이 걸어 나온다. 그를 속박했던 쇠사슬은 힘없이 벽을 따라 늘어져 흔들리는 가운데 조금도 다치지 않은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황제는 기대도 않았으니 실망도 않겠다는 심정으로 그를 노려본다.

    “제게 해를 끼치고 싶었으면 더 좋은 꾀가 필요할 텐데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나른한 음성이 황제에게는 비웃음이 섞여 들린다. 잔뜩 예민해진 감정이 날카로워져 황제는 전날부터 고심했던 방책을 급하게 꺼내 든다.

    “네놈은 어차피 내 명령을 따라야 하는데, 좋은 꾀를 내고 말 것도 없지.”

    이르게 뽑았더라도 칼은 칼이라고, 황제는 이번에 마련한 복수는 성공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황제가 손짓하자 병사 하나가 허리에 찬 단도를 뽑아 마법사의 발치에 던진다.

    “저걸로 네 몸에 상처를 내거라. 난 네놈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

    루슬란은 천천히 몸을 숙여 단검을 집는다. 그리고 제 맨살에 가져다 댄다. 투박한 칼날이 살갗을 파고들고 투명한 피가 흘러나온다. 도무지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몸에 점점 더 많이 흐르는 피를 황제가 놀라 지켜보는데 그가 싸늘하게 말한다.

    “이런 쇠붙이가 낸 상처는 제가 지난 세월 동안 겪은 고통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그 고통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니 폐하가 어떤 꾀를 내셔도 저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는 없을 겁니다.”

    병사들과 마녀가 공포에 질려 있을 때 황제는 분노에 휩싸인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병사의 검집에서 단도를 뽑은 황제가 마법사를 정확히 겨냥해 던진다. 그러나 살을 파고들고 박혀야 할 칼은 그의 어깨에 맞고 튕겨 나온다.

    단도를 살에서 떼고 고쳐 잡은 루슬란이 고개를 기울이며 싱긋 웃는다.

    “쇠붙이도 내가 허락할 때만 내 몸에 상처를 낼 수 있지요. 놀이를 하시는 겁니까, 폐하? 그럼 이제는 제가 이 단도를 던질 차례겠군요.”

    “네놈은 날 죽이지 못해. 그 저주가…….”

    “기억력이 안 좋으시군요. 전 저주 따위 상관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류드밀라가 살아 숨 쉬는 한 그에게 저주는 발을 끈질기게 휘감는 덫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루슬란은 황제를 위협하길 망설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황제의 분노는 오로지 자신을 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는 황제에게 성큼 다가가 굽어보며 나지막한 협박의 말을 입에 담는다.

    “저주가 뒤틀리는 순간, 폐하를 어떻게 죽여 드릴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제 고민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마법사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짓눌린 황제는 이를 악물 뿐 말을 하지 못한다. 루슬란은 미소를 차분히 유지한다.

    “얇은 피부를 벗기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길 기다리며 바닷물을 뿌릴지, 손톱부터 시작해 아주 작은 부분을 잘라 내다 결국엔 목을 칠지, 아니면 온몸이 아주 오랫동안 불에 타게 내버려 둘지. 말해 보세요, 폐하. 어떤 죽음이 가장 구미가 당깁니까?”

    “네가 말한 모든 일을 죽기 전까지 네놈에게 해 주겠다. 내가 어디 못 할 줄 알고!”

    몸을 떨면서도 용감하게 으름장을 놓는 황제를 마법사는 흥미롭다는 듯 지켜본다. 어리석고 오만함이 대물림 되어 내려온 핏줄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젊은 남자의 용기는, 그에게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그래도 어쩌면 쓸모가 있지 않을까. 루슬란은 잠시 고민하다 위협적인 기운을 거둔다.

    “그럼 해 보세요. 제 피부를 벗겨 내고 사지를 잘라 내고 불에 태워 봐요. 이번에 저를 고통스럽게 하는 대신, 다시는 저를 사적으로 불러내지 마세요. 제국을 위한 일은 다 할 테니. 폐하가 원하는 내 절규를 들려줄 테니.”

    “네놈이 뭐라고 감히 짐과 거래를 하려 들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구미가 당긴 것은 사실이라 황제는 망설인다. 마침 황궁에는 실력 좋은 고문 기술자가 여럿 있었다. 전과 달리 그들을 쓰면 마법사의 약속대로 그의 쓰디쓴 고통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머리를 굴리는 황제를 루슬란은 느긋하게 기다린다.

    그에게는 황제가 다짐하는 하찮은 고통보다 류드밀라와 오롯이 보내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 반란을 진압하거나 마물들을 처리하지 않을 때를 온전히 그녀를 위해 쓸 수 있다면야. 루슬란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기꺼이 내놓는다.

    “고문 기술자들을 데려와라!”

    병사에게 명령을 내린 황제가 루슬란을 보고 이죽거린다.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는 널 불러내지 말라 했지. 안심하거라, 이번 일을 겪으면 넌 걸어 다니지도 못할 테니.”

    의뭉스러운 미소로 비열함에 답한 루슬란은 다른 병사들이 의자를 가져와 저를 앉혀도 순순히 내버려 둔다. 마침내 고문 기술자들이 도착했을 때, 그는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나 늘 두르고 다니는 방어막을 내린다. 그는 신중히 급소에만 방어막을 유지하느라 나탈리아가 황제 몰래, 아무도 모르게 고문실 구석으로 몸을 숨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마법사의 고문이 시작된다.

    ***

    잠에서 깨어난 류드밀라는 빈 옆자리를 발견하고 기억을 더듬어 본다. 황제가 부른다며 루슬란이 나간 기억이 돌아오자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침실을 서성인다. 혹시 몰라 건드린 방문은 잠겨 있지 않다. 그런데도 나가지 않는 이유는, 전과 같은 광경을 볼까 두렵기 때문이다.

    계속 욕실 가운을 입고 있긴 추워서 침실에서 발견한 원피스로 갈아입고, 엉킨 머리카락도 빗고, 커튼을 살짝 열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초조하고 걱정되는 바람에 기다리는 일이 너무 힘들다. 무기력하고 울기만 하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기도 하다.

    그런데 만약 루슬란이 황제의 명에 따라 다른 일에 갔으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류드밀라를 괴롭히는 것은 다른 가능성들이다. 전날 봤던 잔인한 광경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그녀가 그렇게 방 안을 서성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노크 소리가 들린다. 순간 루슬란일까 기대로 부푼 마음은 금세 위태로워진다. 그라면 자신의 침실에 노크를 할 필요가 없지 않나. 황제가 사람을 보내 그녀를 잡아 오라 한 건 아닌지 두려워하면서도 류드밀라는 목소리를 약간 높여 대답한다.

    “누구신가요?”

    “저에요, 나탈리아.”

    안도한 류드밀라는 서둘러 문을 열어 준다. 그러나 마녀의 창백하게 질린 낯빛을 보자 얄팍한 안도가 모두 사라진다.

    “무슨 일이죠?”

    “황제가 성하를 고문했어요. 제가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올 때에 고문이 끝났으니, 지금도 안 돌아와 계신 걸 보면 갇혀 있으신 모양이에요.”

    나탈리아는 류드밀라가 휘청거리자 서둘러 팔을 잡아 준다. 걱정스러운 마녀의 물음에 겨우 괜찮다고 답한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고 옷자락을 손으로 꼭 쥔다.

    “지하 감옥까지 몰래 갈 방법이 있을까요?”

    “이동 마법으로 보내 드릴게요. 준비되셨나요?”

    처음부터 그녀를 루슬란에게 보내려는 마음을 먹고 왔는지, 나탈리아가 바로 묻는다. 고개를 끄덕인 류드밀라가 눈을 감는다. 마녀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와 루슬란의 이동 마법과는 달리 따뜻한 기운이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진다. 붕 떠오르는 기분과 배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한차례 지나간다.

    소리도 기운도 희미해지다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류드밀라는 다시 눈을 뜬다. 어두침침하고 습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벽에 박힌 횃불에선 진짜 불이 타오르고 있다. 이곳까지 관리할 마녀나 마법사가 없는 탓이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 창살 너머에 있는 새하얀 형체를 발견한다.

    류드밀라는 한동안 루슬란을 부르지 못한다.

    그는 벽에 기대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다. 눈을 감고 있는데 속눈썹이 가늘게 떨려 그가 깨어 있음을 알린다. 그녀를 충격에 빠트린 부분은 따로 있다.

    힘없이 늘어진 손에는 손톱이 하나도 없다. 손톱이 모조리 뽑힌 자리에는 투명한 피가 푸르스름하게 말라붙어 있다. 발에도 비슷한 짓이 저질러진 듯 천으로 된 신은 파랗게 물들어 있다. 찢긴 옷자락 사이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자상이 보인다. 크고 작은 칼자국들 위에는 고운 눈송이 같은 것이 뿌려져 있었는데, 류드밀라는 그것이 소금임을 깨닫고 분노를 삼킨다.

    어디 그뿐인가. 루슬란의 다리에는 뭔가가 안에서부터 살을 뚫고 나온 듯한 상처와 멍 자국이 가득하다. 드러난 가슴팍에서 열기에 흉측하게 타 버린 살을 발견한 류드밀라는 결국 가까이 다가가 울음을 터트리며 그를 부른다.

    “흑, 흐윽… 루슬란 님…….”

    흐려진 시야로 루슬란이 놀라 고개를 바로 하는 모습이 보인다. 정면으로 바라보는 얼굴을 본 그녀는 주먹을 꼭 쥔다. 누군가 은안 하나를 뽑아냈다. 푸른 피딱지로 주위가 덮인 빈 구멍과 아직 멀쩡한 은안이 류드밀라를 응시한다. 서둘러 올라와 다친 눈을 가리는 그의 손길에는 다급함과 애절함이 담겨 있다.

    “죄송해요, 이런 모습을 보이려던 것은 아닌데. 괜찮으세요?”

    그를 껴안아 주고 싶다. 그러면 더 아프겠지만 안고 괜찮다고, 저는 정말이지 괜찮으니 그 몸부터 살피라고 말하고 싶다. 류드밀라는 흐느껴 울면서 가슴 앞에 두 손을 꼭 모으고 비튼다. 차라리 제 눈이 뽑혔으면 이보다 덜 아팠으리라.

    “다 치료하고 멀쩡한 모습으로 그대에게 갈 생각으로,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어쩔 줄 몰라 하며 루슬란은 다치지 않은 쪽 눈을 내리깐다. 류드밀라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최대한 또박또박 단어를 내뱉는다.

    “들여보내 주세요. 그러실 수 있잖아요.”

    망연한 표정이던 그가 손을 휘젓자 자물쇠가 부서지고 감옥 문이 열린다. 바로 앞에서 기다리다가 자물쇠 파편에 맞아 살이 찢기지만 류드밀라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에게 달려간다.

    “죄송하다고 하지 마요. 그럴 기운이 있으면 스스로를 돌보세요.”

    제 옷자락을 찢어 소금을 닦아 내주며 그녀는 다시 울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더 미안해하고 후회할 것이다. 울음을 참느라 말투가 거의 윽박지르듯이 된다.

    “심각한 상처도 아니고 그저 보기 흉한 것일 뿐이어요.”

    루슬란의 대답에 류드밀라는 울컥 화가 치솟는다.

    “아프셨을 거잖아요. 이런 잔인한 일을 겪고도 왜…….”

    “황제와 거래를 했어요. 이제는 제국을 지키느라 나가 있을 때를 제외하곤 그대와 시간을 온전히 보낼 수 있어요.”

    류드밀라가 걱정되어 여전히 얼굴 반쪽을 가리고 있는 루슬란이 힘겹게 미소 짓는다. 그녀는 소금을 닦아 내던 손을 바들바들 떨다가 결국은 울음을 터트린다. 아까도 울었는데, 울면 스스로가 너무 비참하게 느껴져서 이러기 싫었는데, 결국은 울고 만다.

    “그래서 황제가 이리하도록 내버려 두신 건가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묻자 그는 미소를 거두고 달래 주려 손을 뻗는다. 류드밀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쏟아 낸다.

    “왜 그렇게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구시나요? 루슬란 님께서 다치신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은 갈가리 찢기는데, 아무 도움도 못 되는구나 싶어 무기력한데, 차라리 다친 사람이 저였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데.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래서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대가 걱정하고 힘들어할까 봐. 그런데 굳이 찾아오셔서 그리 말하시니,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루슬란은 지쳐 보인다. 뻗었던 손을 치운 그는 대신 마법을 둘러 눈부터 치료한다. 류드밀라는 파란 기운이 피딱지를 닦아 내고 새살을 돋게 하는 걸 지켜보다 시선을 내린다. 그의 지친 표정에 숨이 턱 막혀 울음도 이제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만약에 제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다쳤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생각이셨나요?”

    “말이야 해 드렸겠지만 그대의 충격은 덜했겠지요.”

    가리고 있던 다친 눈에서 어떤 마법이 작용했는지, 순식간에 멀쩡해진 두 눈으로 루슬란이 그녀를 응시한다. 그녀는 싸울 때가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 착잡하게 대꾸한다.

    “저는 상관없어요. 아니, 오히려 이편이 나아요. 루슬란 님께서 절 위해 무얼 희생하셨는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전 희생한 것이 없답니다. 이런 상처들은 제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가 몸을 펴고 가슴팍 위를 손으로 한번 쓸어내리자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한다. 류드밀라에게 다행이란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녀가 걱정한 것은 상처가 나며 그가 겪었을 고통이지, 상처가 낫기 힘들지도 몰라서가 아니었다. 단지 무심한 루슬란의 모습이 낯설다.

    “그럼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요? 루슬란 님을 위해서 울고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대신, 무얼 했으면 좋겠나요?”

    류드밀라는 그의 무심함에 상처를 입은 자신이 싫다. 왜 그토록 약해야만 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그에게 물은 것이다. 루슬란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그의 무심함이 사라질 것 같은 역겨운 희망이 들어서.

    “대답을 아시잖아요. 전 오히려 대답을 아는 질문을 왜 하시는지 묻고 싶네요.”

    이제 그의 다리도 나아가고 있지만 둘 사이에 남은 상처는 아물 기미가 없다. 한번 어그러진 감정은 점점 뒤틀리고 말라붙는다. 루슬란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황제의 고문 기술자들이지만 정작 그가 아파하는 상처는 류드밀라가 남긴 것이다.

    “루슬란 님께서는 제가 행복하길 바라시겠죠. 대답을 알아도 여쭌 이유는 그저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그대가 잘못 알고 있군요. 저는 그대의 행복을 바라지 않아요. 그대가 제 곁에 있기를, 슬프더라도 저와 울고 화나더라도 저와 쏟아 내길 바랄 뿐이지요.”

    “루슬란 님은 제 힘들고 추한 모습을 모두 보듬어 주려 하시면서, 왜 루슬란 님의 아픈 모습은 숨기려고 하시는 건가요?”

    기다렸다는 듯 조심스레 꺼낸 류드밀라의 말에 루슬란의 몸이 굳어진다. 손끝까지 치료하던 그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와 마주 본다. 기력을 너무 많이 소모해서 창백해진 얼굴에서 무심함이 서서히 거둬진다. 그녀가 이 모든 말을 꺼낸 이유가 그에게 화가 나서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두려웠어요.”

    한숨처럼 딱 한마디를 내놓은 루슬란은 더는 말하지 않고 치료에 집중한다. 류드밀라도 옷자락으로 그의 몸에 남은 핏자국을 닦아 내준다. 그리고 그의 모든 상처가 나은 순간, 아직도 아플까 봐 조심스레 껴안는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제가 루슬란 님 곁을 떠날 일은 없을 거예요. 저도 똑같은 걸 바라요. 루슬란 님께서 다친 걸 탓하려는 게 아니었어요. 너무 슬프고 억울해서 말이 날카롭게 나갔을 뿐이에요, 죄송해요.”

    핏자국을 닦을 때 몇 번이고 정리한 말이지만 막상 말해야 할 순간이 닥치니 두서없이 나온다. 그래도 그녀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루슬란은 작은 등을 토닥여 준다.

    “괜찮아요, 나의 껍데기 님.”

    그러다 그의 손길이 아까 자물쇠 파편에 맞아 난 상처에 스친다. 움찔하며 작게 앓는 소리를 낸 류드밀라는 어색하게 몸을 조금 뗀다.

    “어쩌다가 상처가 났나 봐요.”

    걱정스러운 눈길이 찢어진 옷과 붉게 물든 언저리에 꽂힌다.

    “치료해 드릴게요.”

    “여기서, 여기서는 보이기가 부끄러워서…….”

    기력이 없을 텐데 루슬란은 순식간에 이동 마법을 써서 침실로 그녀를 데려온다. 여전히 부끄러워하며 그녀가 옷자락을 들추자 그가 이번에는 진짜 한숨을 폭 내쉰다.

    “생각보다 깊네요.”

    류드밀라가 놀라서 상처를 보려 하지만 제가 걷어 올린 옷자락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정말요?”

    심각하게 찌푸려진 얼굴로 루슬란은 손에 파란 기운을 불러낸다.

    “네, 이런 상처라면 제가 치료해 드려도 한 며칠은 침실에서 안정을 취하셔야 할 텐데.”

    “그, 그럼 어떡해요? 그렇게 시, 심한 상처일 줄은 정말…….”

    너무 놀라 더듬거리다가 그가 웃음을 터트리자 그제야 상황을 짐작한 류드밀라는 화가 나서 입술을 앙다문다. 루슬란이 그녀를 침실에만 붙들어 놓으려고 수작을 부린 것이다. 닥칠 일도 모르고 그저 천진한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어떻게 혼쭐을 내줄까 고민한다.

    “안 되겠어요. 며칠 동안 갇혀 있기는 싫으니 이번에는 루슬란 님께서 성물을 구해 와 주세요. 청동 고래의 수염이었나요? 그게 있으면 싹 나을 것 같네요.”

    웃음을 뚝 그친 루슬란이 그녀를 향해 눈을 흘긴다. 요사스러운 눈빛에 또 홀릴 것 같아 류드밀라는 시선을 피한다.

    “정말 저를 보내시려고요?”

    “침실에 갇혀 있긴 정말 싫은데, 별수 있나요?”

    “제가 오진을 내린 것 같네요. 말끔하게 낫게 해 드릴 테니, 청동 고래는 내버려 두는 걸로 하지요.”

    그녀는 그제야 싱긋 웃으면서 화난 표정을 푼다. 안심한 루슬란이 파란 기운을 그녀의 상처로 흘려보내자 간지럽고 아주 조금 따끔거리는 기분이 번진다. 무서워서 흐린 눈으로 보아도 찢어진 살 밑으로 뽀얀 새 살이 올라오는 게 신기하다.

    “다 되었어요. 다른 곳은 안 다치셨나요?”

    손을 거둔 그가 옷자락을 정돈해 주며 묻자 류드밀라는 이마를 짚는다.

    “아뇨, 근데 어지러워요…. 그 상처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봐요.”

    장난스럽게 휘청이다 그녀는 루슬란에게 힘없이 기대는 척하며 안긴다. 그는 그녀를 기꺼이 품에 안고 어화둥둥 어르다가 베개에 기대게 도와준다.

    “씻고 올게요. 핏자국이 다 안 닦여서 보기 불편하실 거예요.”

    침대에서 내려오던 그가 순간 휘청인다. 서둘러 다가와 부축해 준 류드밀라에게 루슬란이 멋쩍어하며 미소 짓는다.

    “아까 다리가 부러진 후로 걷는 일이 처음이라…. 금방 적응될 거니 안심하셔요.”

    “다리가…….”

    그래서 안에서 뭔가가 살을 찢고 나온 상처가 있었구나.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뼈가…. 류드밀라는 아까 장난을 쳤던 것을 후회한다. 고작 베인 정도의 상처로 어지럽다고 했다니. 그가 겪었을 고통을 감히 상상하다 아찔해진 그녀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뜬다.

    “혼자 씻기 힘드시면 도와 드릴게요.”

    “그러실래요?”

    산신의 오두막에서 눈을 다친 루슬란을 씻겨 줬던 일이 떠올라 류드밀라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에 다시 시도해 보면 저번처럼 욕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저걸 누가 다 치울 수 있을까요?”

    가운을 두르고 나와 욕실의 풍경을 본 루슬란이 고개를 내젓는다. 금방 적응될 거란 말을 뒷받침하듯 그는 류드밀라의 부축 없이도 곧잘 걸어 침실의 탁자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욕실을 힐끔 본 그녀도 서둘러 그를 따라간다.

    “황궁의 시녀들이라면 가능할걸요.”

    탁자 주위에 놓인 의자에 느긋하게 앉은 그가 확신에 찬 류드밀라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제가 마법으로 모두 정리해 놓을 수도 있어요.”

    “전 사실 시녀를 골려 주고 싶어요. 매번 제게 못되게 굴었었거든요.”

    껍데기를 지독히도 무시하던 시녀들을 떠올리며 그녀가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대가 그런 생각도 품으실 줄은 몰랐는데요.”

    그제야 류드밀라는 제 시커먼 속내를 들킨 기분으로 아차 싶어 얼굴이 빨개진다. 하지만 루슬란은 귀엽다는 듯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지켜볼 뿐이다.

    “제가 가서 더 어지럽혀 놓을까요? 같이 복수해요, 저도 제 담당 시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더 어지럽힐 구석이 있을까요?”

    그녀가 되묻자 그가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눈을 휜다. 류드밀라도 함께 웃음을 터트린다. 힘들게 얻은 달콤한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린다. 루슬란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연 이는 다름 아닌 나탈리아이다. 여러 번 도와줬던 마녀에게 고마웠던 류드밀라는 달려가 그녀를 맞이해 준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이걸 전해 드리려고요. 마음이 놀라셨을 때는 단것이 최고예요.”

    나탈리아가 내민 것은 정성스레 포장된 선물 상자이다. 열어 봐도 된다는 말을 듣자마자 류드밀라는 들떠서 리본을 푼다. 한 팔로 상자를 받치고 분홍색 뚜껑을 열어 보니 한입 크기의 초콜릿들이 예쁘게 배열되어 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있는 루슬란을 돌아보며 손짓한다.

    “이리 와서 보셔요, 초콜릿이에요!”

    “빨리 드셔 보세요. 제가 특별히 황실 쇼콜라티에에게 부탁한 것이에요.”

    마녀가 덩달아 들떠 재촉하자 류드밀라는 제일 작은 것 하나를 골라 집는다. 모양과 생김새를 들어만 봤지 처음으로 보는 초콜릿이 신기하여 매끈하고 어두운 표면을 살핀다. 희미하게 나는 쓴 향이 매혹적이다.

    “잠시만요, 먹지 마셔요.”

    루슬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을 때 류드밀라는 이미 초콜릿을 입에 넣은 후이다.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라 다 넣고 씹고 있다 그의 반응이 이상해서 그녀는 돌아본다. 놀라서 부서진 몇 조각을 삼킨 그때 눈앞이 핑 돈다. 어지럽고 입 안이 쓰라려서 그녀가 비틀거린다.

    어느새 다가온 루슬란이 그녀를 안아 올린다.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로 류드밀라는 그가 나탈리아를 푸른 구에 가두는 것을 본다. 그러지 말라고 하려는데 마녀가 그녀에게 건 마법이 풀린다. 들뜨고 설레어 하던 표정은 어디 가고 나탈리아는 눈이 벌게진 채 흐느끼고 있다.

    “무슨 독이지?”

    싸늘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무서워 류드밀라는 그의 품을 파고든다. 귓가가 웅웅 울리고 자꾸만 잠이 쏟아진다. 그러나 밤에 졸린 느낌하고는 확연히 다른, 뭔가 께름칙하고 두려운 졸음이다. 이렇게 잠들면 다시는 못 깨어날 것 같아… 루슬란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녀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든다.

    “황제가, 황제가 시켰어요…. 그가 사샤를 죽이겠다고 협박해서….”

    정신없이 울며 나탈리아가 구 안에서 털썩 주저앉는다.

    “네 이유는 궁금하지 않아. 무슨 독이냐고 물었다.”

    “저도 몰라요, 성하… 정말 죄송해요….”

    나탈리아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뚝 끊긴다. 주변이 새까매지고 달이 없는 밤 호수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숨이 막혀 와 버둥거리던 류드밀라는 정신을 잃는다.

    류드밀라가 갇힌 어둠은 완전하지 않다. 처음에는 완전한 암흑과 고요가 그녀의 세상을 뒤덮었다가 파란 아지랑이가 희미하게 나타나 일렁인다. 루슬란이 저를 치료하려 하고 있구나. 빛줄기는 오래 못 가 사라지고 대신 아주 멀리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안 됩니다, 성하 …셔도 달라지는 건….”

    “…놓거라 …에 다시 가두기 전에….”

    뚝뚝 끊기는 대화를 들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류드밀라는 더 깊은 어둠으로 빠져든다. 어디가 아프지는 않다. 오히려 소름 끼칠 정도로 몸에 아무런 감각도 없다. 물에 잠겨 있는 기분으로 그녀는 몸을 움직이려 해 본다. 감각이 없어서 제가 지금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 게 맞는지, 대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죽는 걸까? 아니면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는 걸까? 이상하게 두렵지는 않다. 독에 취한 정신은 멍해서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그냥 이대로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편안하게 둥둥 떠서.

    그때 날카로운 감각이 손끝에서 피어오른다. 누군가 송곳니로 그녀의 손가락 끄트머리를 깨물었다. 류드밀라가 뒤척였는지 달래는 소리와 이어지는 말이 가늘게 들린다.

    “피를 봐도… 독인지 모르겠… 그래야 해독제를….”

    감각이 또 사라진다. 평안한 몸 상태와 달리 이번에 류드밀라의 생각들은 뒤엉킨다. 아까 들은 루슬란의 목소리에 담긴 처절한 절망이 와 닿은 탓이다. 깨어나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괜찮다고 해 주고 싶다.

    류드밀라는 암흑에 잠긴 채로 버둥거린다. 어떻게든 무감각한 백지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몸은 지쳐 가고 어둠은 너무 유혹적이다.

    ***

    루슬란은 침대 위에 눕혀 놓은 류드밀라를 망연하게 바라본다. 얼핏 보면 그저 편안하게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안다. 황제가 쓴 독은 몸을 망가트리거나 고통을 주는 종류가 아니란 사실을. 그의 목적은 둘을 영원히 갈라놓아 루슬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었고, 류드밀라를 죽이는 대신 무의식의 세계에 가뒀다.

    문제는 그의 추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과 류드밀라가 먹은 독을 정확히 모르니 섣불리 치유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루슬란은 판단을 빨리 내린다.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성하.”

    굳은 얼굴에서 그가 향하려는 목적지를 알아차린 나탈리아가 비틀거리며 막아선다. 루슬란의 곧은 눈썹이 찌푸려진다.

    “비켜라.”

    “전에도 말씀하셨잖아요, 전 자세히는 모르지만 저주에 대해 들은 적은 있어요. 성하께서…….”

    그는 손을 가볍게 움직여 나탈리아를 방 반대편으로 보낸다. 그리고 비척거리며 일어서던 그녀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이동 마법을 사용한다. 이번에는 황실 연회가 열리는 중인 무도회장으로.

    바닥부터 벽을 지나 천장까지, 어느 구석 하나 사치스럽지 않은 부분이 없는 무도회장은 이그나티 제국의 귀족들로 가득하다. 떵떵거리는 공작가의 일원부터 지방의 한미한 남작가의 사람들까지 모두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와 있다. 샴페인 잔을 부딪치고 우아하게 담소를 나누며 춤추는 젊은이들을 구경하는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도 잡지 못한다.

    벨벳과 비단과 시폰의 무리 한가운데 소박한 하얀 로브를 걸친 마법사가 나타나자 귀족들은 불쾌감을 표시한다. 저들끼리 즐기려고 연 연회에 웬 불청객이람. 그들이 하는 행동이야 뻔해서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리고 수군대며 마법사를 조롱한다. 누구는 아까운 샴페인을 귀신 쫓듯 마법사 쪽으로 휙 뿌리기도 한다.

    그런데 마법사에게 쏟아지던 샴페인이 공중에서 얼어붙는다. 황금색의 반짝이는 얼음이 공중에서 그 자태를 뽐낸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샴페인을 뿌린 백작가 영애에게 도리어 날아든다. 상황을 깨닫고 물러서던 영애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온몸에 얼음 조각이 박힌 채로.

    멀리서 달려오는 백작 내외를 제외하곤 같이 춤추던 그녀의 파트너조차 겁에 질려 물러난다. 백작가의 영애는 목에 박힌 얼음이 새빨갛게 변할 때까지 울컥거리며 피를 쏟아 내다 부모의 품에서 죽는다. 그녀가 마법사의 첫 번째 희생자이다.

    마법사는 이제는 알아서 비켜 주는 귀족들을 무시한 채 무도회장 안쪽으로 나아간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본 사람들은 나중에 증언하길, 은색 눈에서 짐승에 가까운 이상한 광채가 돌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다른 이들이 뜯어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딸을 붙들고 있던 백작이 루슬란에게 달려든다. 백작은 공중으로 끌어 올려져 연회장 벽에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혀 온 곳을 피범벅으로 만든다. 어떤 투명한 손이 남자를 벽에 내던지는 듯이 말이다. 결국 숨이 끊어진 백작은 천장에서 떨어지다 샹들리에에 몸이 걸린다.

    위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사람들에게 알현실에서 있었던 날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번에는 밖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창검을 들고 무도회장으로 뛰어 들어온다. 하지만 그들은 뒤를 돌아본 마법사와 마주하곤 다리를 덜덜 떨면서 물러난다. 그리고 밖에서 무도회장을 걸어 잠그고, 도리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밖으로 나가려던 귀족들은 평생 다쳐 본 적 없던 손톱만 부러뜨리고 만다.

    마법사는 계속 나아간다. 남편과 딸을 한날한시에 잃은 백작 부인의 절규와 공포에 질린 수군거림, 더 나아가 도망치려는 사람들의 외침에도 그는 방해받지 않는다.

    루슬란의 목적지인 황좌 주위는 마녀들이 둘러싸고 있다. 연회 내내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상급 마녀들이다. 자줏빛 제복들 뒤에 숨은 황제는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다. 제아무리 강대한 마법사라도 상급 마녀 열 두 명은 이기지 못할 터. 적어도 황제는 그렇게 믿는다.

    “비키거라.”

    “돌아가십시오, 성하.”

    황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히죽이는데 마법사가 손을 올린다. 그러고는 마녀들이 미처 반격할 틈도 주지 않고 그들의 정신을 빼앗는다. 견고한 자줏빛 장벽이 그렇게 간단하게 허물어진다. 워낙 힘이 압도적이라 마녀들은 바로 의식을 잃는다.

    “대, 대체 어떻게….”

    마법사는 황좌로 향하는 계단을 천천히 오른다. 도망칠 곳도 없는 황좌에서 일어선 황제가 분노에 차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그는 한 칸, 한 칸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에 갇힌 양을 손쉽게 사냥하려는 사자처럼 제 소리를 숨기지도, 제 체취를 감추지도 않는다. 오히려 먹잇감이 내는 공포의 냄새보다 더 강하게 제 기운을 흩어 놓는다.

    도망치려던 귀족들의 공포는 호기심이 이긴다. 그들은 문을 두드리던 손길을 멈추고 무도회장 안쪽을 돌아본다. 마법사의 분노가 저들은 피해 갔다는 생각에 약간은 안도하며 황제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궁금해서 바라본다. 잔인한 궁금증이다.

    마법사가 황제의 멱살을 틀어쥐고 한 손으로 들어 올린다. 그는 숨이 막혀 와 발버둥 치며 컥컥거리는 황제를 저 아래, 높이도 자리 잡은 황좌 아래로 내던진다.

    “네놈이 이런다고 내가 무슨 독인지 말해 줄 듯싶으냐!”

    어깨가 부러져 고통에 비명을 지르다 황제가 악다구니를 쓴다. 침까지 튀기면서 발악하는 황제를 내려다보다 루슬란은 황좌에서 우아하게 뛰어내린다. 욕심 많고 거만한 남자의 반지 낀 손을 짓밟아 준 그는 느리게 위험한 말들을 입에 올린다.

    “아직 제 협박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걸요. 겨우 이 정도에 폐하가 말해 주리라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쥐뿔만큼 남은 충성심으로 주춤주춤 다가오던 무도회장 내부 경비병들이 기절한다. 루슬란은 다시 황제에게 관심을 돌린다.

    “전에 말했던 고문 방법들을 제게 쓰셨는데, 그거 아십니까?”

    오만하고 잔혹한 눈빛을 그대로 황제에게 돌려주며 마법사는 그 주위를 한없이 느긋한 걸음으로 거닌다.

    “제가 말하지 않은 방법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요.”

    황제가 뭐라 대꾸할 틈도 없다. 루슬란이 허리를 굽히고 놀리듯이 코를 톡 건드리자 손가락 끝에서 물이 나와 몸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위장까지 내려간 물은 얼음이 되어 내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그 바람에 위산도 섞여 나와 주변 장기들을 녹인다.

    “걱정 마셔요, 죽지는 않을 테니. 폐하의 목숨은 제가 허락하기 전에는 끊어지지 않을 거랍니다.”

    황제에게는 마법사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배를 끌어안고 상상도 못 할 고통에 몸부림치다 기절하고 다시 억지로 깨어나길 몇 번을 반복했을까. 녹은 물은 순식간에 내장을 치료하여 원 상태로 돌려놓는다. 배 속에서 다시 물이 서서히 어는 게 느껴지자 황제는 끅끅거리며 바닥을 긴다.

    “차라리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

    “그런 희극 같은 대사를 내뱉으면 제가 순순히 죽여 드릴 줄 아십니까?”

    루슬란은 몇 번이고 황제에게 새로운 고통을 안겨 준다. 얼었던 물은 끓기도 하고 팽창하기도 하며 황제의 몸속을 망가뜨리고 치료하길 반복한다. 기절할라치면 고통을 줄여서 깨우고 섬세한 조절을 하는 루슬란의 손길은 그의 자상에 소금을 뿌리던 고문 기술자와 닮아 있다.

    “내가 네놈에게 잘못한 것이 뭐길래! 왜 그렇게 전대 황제들을 괴롭히고 나까지도, 컥…….”

    물이 위산과 함께 역류하여 쏟아져 나오자 황제는 몸을 마구 뒤튼다. 참혹하게 일그러진 루슬란의 얼굴에 노여움이 번지다가 일순간 고요해진다.

    “그럴 수도요. 폐하와 이그나티를 다스렸던 모든 황제들은 내게 잘못한 게 없을지도 모릅니다.”

    차분한 고백에 황제는 대체 왜, 라고 말하려 하지만 제가 쏟아 낸 액체가 얼음이 되어 살갗에 박히자 비명을 내지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지요.”

    얼음을 무심하게 조종해 다시 살에서 떨어져 나가게 한 루슬란이 나지막이 속삭인다.

    “강이란 본디 제 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너그럽지 않으니.”

    눈을 질끈 감고 떠는 황제 옆에 그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는다.

    “이제는 말할 마음이 생겼나요, 폐하? 제 껍데기 여인에게 먹인 독이 무엇인지.”

    “루베라, 악몽의 꽃. 그걸 먹였다.”

    흠, 하고 고민하던 루슬란이 고개를 비딱하게 새처럼 기울인다.

    “그 말을 하고 나면 제가 폐하를 죽이고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줄 알았나요? 더 늦기 전에 진실을 말하셔요.”

    “늦고 말고 할 것도 없지. 내 고통 말고 넌 가져갈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용기는 가상하지만 폐하는 또 틀리셨군요.”

    이를 악물고 다시 올 고통을 기다리던 황제가 눈을 떴을 때 루슬란은 일어서서 다른 이를 끌고 온다. 귀족들 무리에 숨어 있던 마법사의 제자 제복을 입은 꼬마, 사샤이다. 잔뜩 겁에 질린 그 아이는 제 누나가 협박당할 때부터 무도회장에 붙들려 있었다.

    “나탈리아의 어머니에게 사생아를 남기셨더군요.”

    “난 저 아이의 목숨에는 신경 안 쓴다. 애초에 저 녀석을 갖고 그 마녀 계집을 협박한 것도 나였…….”

    루슬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샤의 팔을 부러뜨린다. 영문을 모르는 소년이 울음을 터트리자 황제의 얼굴이 구겨진다.

    “저는 망설이지 않고 이 아이에게 폐하께 드렸던 고통을 똑같이 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상관없다! 저 아이와 나는 관련이 없어!”

    마법사가 주저앉은 소년을 거칠게 일으켜 세워 단단히 붙들고 코로 물을 흘려보낸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짐작만 하는 아이가 악을 쓰며 저항해도 손은 풀리지 않는다.

    루슬란의 얼굴에 서리처럼 날카로운 미소가 감돈다.

    “무슨 독을 먹였는지 말해.”

    황제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다가 겨우 진실을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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