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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공허함 (16/20)
  • 13. 공허함

    차가운 밤공기가 드러난 맨살을 스치는 가운데 류드밀라는 눈을 끔벅거린다. 마법이라도 불러와 온기를 내어 주겠다는 뜻인가 싶다가 루슬란의 짓궂은 미소가 진해지자 말뜻을 알아차리고 만다. 그는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그녀 쪽을 보고 있어 속눈썹이 가벼이 떨린다.

    “좋아요….”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용감하게 대꾸한다. 부끄러운 마음보다 루슬란을 바라보며 이 순간의 기억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더 크다. 깍지를 풀고 한 손에 그의 얼굴을 담아 본다. 감긴 눈이 살포시 휘어지며 눈웃음을 보이자 가슴이 두근거린다. 고개를 돌려 손바닥에 키스한 루슬란이 이불을 걷고 옷자락을 푼다.

    꿈속이 아닌 현실에서 살을 맞대고 체온과 결을 느끼니 류드밀라는 행복에 겨워 달콤한 숨을 토해 낸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다. 그녀 주위에 흐드러지게 펼쳐진 루슬란의 머리카락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벗은 몸을 달래듯이 스친다. 순간을 붙잡고 싶은 마음은 그녀의 손끝으로 전해져 그의 등을 꼭 껴안게 된다.

    안을 쳐올리는 몸짓에서는 사랑이 듬뿍 묻어난다. 휘어진 허리가 아프지 않게 손으로 받쳐 주고 다른 손으로는 어느새 달아오른 뺨을 가만가만 쓸어 준다. 그의 아래에서 류드밀라는 작은 신음을 수줍어할 새도 없이 뱉어 내다 헐떡이는 숨 사이사이로 무엇인가 말을 하려 한다.

    “왜 그러시나요?”

    허리 짓을 느리게 되풀이하며 루슬란이 물어 온다. 그녀는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조그맣게 얼버무린다.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해 드리고 싶어서요…….”

    “원래 그 말이 아니었을 텐데요.”

    거짓말을 해서 화가 났나, 하고 류드밀라는 힐끔 그의 표정을 살핀다. 그러나 감은 눈 주위에는 재미있어하는 듯한 주름이 살짝 잡혀 있다. 그녀에게서 주저하는 기색이 보이자 그는 손끝으로 턱을 쥐고 자신을 똑바로 보게 한다.

    “말씀해 주셔요, 무엇이든지.”

    “아까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을 때, 대답을 못 들려 드려서요…. 저도 사랑해요, 루슬란 님.”

    류드밀라는 나른한 몸을 이끌고 그를 더 꼭 껴안는다. 힘이 세졌다는 말을 아까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강대한 마법사의 몸이 아플까 싶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루슬란은 웃음 짓는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체온과 감촉과 향으로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한편 류드밀라는 조금만 있으면 그의 반짝이는 은빛 눈을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졸린 와중에도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뛴다. 그때는 또 얼마나 다디단 말들을 속삭여 주실까. 기대를 품고 루슬란 옆에 누워 품을 파고든 그녀는 다시 잠든다.

    ***

    “일어나셔야죠.”

    으음, 하고 뒤척이며 류드밀라는 겨우 다시 얻은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머리카락 사이를 간질이는 손길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제가 눈을 뜨는 걸 보셔야 할 텐데.”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인다. 몸을 바로 일으켰다가 어지러워 이마를 짚는 그녀를 루슬란은 품에 끌어다가 옷 입는 걸 도와준다. 입히지 않으면 그녀가 다시 이불 속으로 숨어 버릴 것만 같아서이다.

    “산신님께서 고약을 다 지으셨다고 하시네요. 내려갈까요?”

    “네, 좋아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류드밀라는 그를 도와 계단을 내려간다. 아래에서는 산신이 고약이 담긴 도자기 그릇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제야 생각난 아침 문안 인사를 허둥지둥 하는데 산신은 되었다며 손을 내젓는다.

    “신들은 잠이 별로 없으니 푹 주무셨냐는 그런 말은 필요 없단다. 강의 아이나 속히 치료하고 나는 이만 너희를 보내련다. 눈을 뜨면 저 죽은 물고기 배 같은 눈동자가 다시 보일 테니 무서워서 계속 둘 수 있으려나.”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전보다 말이 많아지고 투덜거림도 심해진 산신은 루슬란을 의자에 앉힌다. 류드밀라는 제가 옆에 있어도 되는지 불안한 마음이 든다.

    “제가 이렇게 가까이서 지켜봐도 되나요?”

    “전에 했던 정화 마법과는 달라서 괜찮단다.”

    그녀를 안심시킨 산신은 고약을 조금 덜어 루슬란의 눈 위에 바른다. 꼼꼼히 약을 눈가에 모두 바른 산신이 나지막이 숫자를 센다. 얼마 뒤 그는 옆에 떠 둔 물에 천을 적셔 고약을 닦아 낸다. 너무나도 간단한 과정이어서 류드밀라는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의문이 든다. 뿔을 갈아 만든 고약도 평범한 연고처럼 칙칙한 갈색을 띨 뿐,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또다시 초조해져 그녀가 걱정을 한마디 얹으려는 순간 깨끗해진 눈가를 더듬던 루슬란이 느리게 눈을 뜬다. 은색으로 빛나는 맑은 눈동자가 오롯이 류드밀라에게로 향한다. 놀라고 기뻐 두 손을 꼭 모으고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에게 그가 다정하게 웃어 보인다.

    “눈을 다시 뜨고 나서 처음 보는 게 그대의 얼굴이네요.”

    류드밀라는 달려가 의자에서 일어난 그의 품에 안긴다. 지난밤에도, 꿈속에서도 수도 없이 안겼던 너른 품이지만 그가 이제는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와 닿는다. 정말 이제 루슬란은 볼 수 있다. 가슴팍에 기댄 그녀의 작은 머리가 얼마나 애달프게 그에게 매달리는지.

    “저를 봐 주셔요, 나의 껍데기 님.”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하고도 그녀는 그를 올려다본다. 평소 같았으면 울고 있는 게 부끄러워 얼굴을 숨길 텐데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그에게 다 내어 주고 싶다는 듯 끈질긴 시선과 마주한다. 류드밀라의 기억 속 그대로인 루슬란의 눈은 강을 노니는 물고기의 비늘도, 달의 창백함도, 검의 서슬 퍼런 광채도 모두 담은 은빛으로 일렁이고 있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루슬란 님.”

    류드밀라가 울먹이며 감정을 풀어놓자 그가 휘영청 눈을 휘며 미소 짓는다.

    “모두 그대 덕인걸요.”

    그녀가 하려던 말은 뒤에서 못마땅한 헛기침 소리가 들리자 잊힌다. 서둘러 돌아보니 산신이 뿌듯한 표정과 그렇지 못한 팔짱을 낀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간지러운 말들을 속삭일 생각이라면 위층에 올라가서 하거라.”

    류드밀라는 저도 모르게 루슬란과 한 포옹을 풀지만 기쁜 마음에 산신에게 다가선다.

    “산신님께도 정말 감사해요. 산신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전 절대로 성물을 찾을 수 없었을 거예요.”

    벅찬 목소리로 하는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받은 산신은 팔짱을 푼다. 너그러이 류드밀라의 어깨를 토닥인 산신이 남은 고약을 동그랗게 뭉친 후 하얀 천에 싸서 건넨다.

    “나중에 또 필요할지도 모른단다. 풀 반지와 함께 네 목숨을 구해 줄지도 몰라.”

    풀 반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려는데 산신이 그럴 틈도 없이 말을 이어 나간다.

    “호랑이와 여우들도 돌아오고 있다고 까치가 소식을 전해 줬는데, 어찌할 거냐? 그들을 보고 가련?”

    아. 이제 성역을 떠나야 하는구나. 자디라, 리사와 레사를 본 후에 떠나든 지금 떠나든 빠른 시일 내에 떠나야 하는 것이다. 낙원과도 같은 이곳을 두고 알 수 없는 공포가 기다리는 황궁으로 말이다. 류드밀라의 아쉬움과 두려움을 눈치챈 루슬란이 입을 연다.

    “호랑이와 여우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며칠은 더 머물게 해 주겠다. 하지만 잊지 말렴, 강의 아이 넌 인간들의 제국에 매인 몸이란 것을.”

    산신이 안타까워하며 경고를 남기고 돌아선다. 그 경고는 류드밀라가 잊고 있었던 루슬란의 비밀을 떠올리게 한다. 화해를 결심했을 때 물으리라 마음먹고 결국은 까먹었던 진실. 그녀가 이번만큼은 물어보리라고 마음먹는데 그가 그녀와 눈을 맞춰 온다.

    “시장하지 않으신가요? 여정을 하며 제대로 드시지 못했을 텐데요.”

    류드밀라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또다시 그의 손에 이끌려 식탁 앞에 앉는다. 사슴이 부엌이라 짐작되는 곳에서 나와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를 하나씩 내오고 앞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오두막 안이 그렇게 추운 것도 아닌데 갓 한 음식에서는 김이 폴폴 나고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난다.

    전날인지도 모를 밤에 그가 목욕을 시켜 줬던 때가 떠올라 부끄러워진 그녀는 음식만큼은 제 손으로 먹으려 한다. 그러나 바로 옆에 앉아 이것도, 저것도 먹어 보라며 권유하는 낮은 목소리에 홀려 어느새 넙죽넙죽 받아먹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 손에는 분명 수저를 들고 있는데 루슬란이 다른 수저로 떠먹여 주는 음식을 먹느라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제가 혼자서 먹을 수 있는데…….”

    “혼자 드시면 급하게 들다 체하실 것 같아서요.”

    천연덕스럽게 이유를 댄 루슬란은 류드밀라의 얼굴이 새빨개지는데도 모르는 척 수프를 떠서 입에다 대 준다. 그녀는 거부하려다가 하필이면 수프여서 아까운 국물이 흐를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받아먹는다. 숟가락을 내려놓자 이때다 싶어 그녀가 말을 얹는다.

    “이제 어느 정도 배가 차서, 혼자서도 천천히 먹을게요.”

    “더 드실 수 있겠어요?”

    놀란 듯 그가 묻자 그제야 그녀는 배가 어느 정도 찬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판판하던 배가 조금 볼록해질 정도로 많이 먹은 탓이다. 배를 쓸어 보다 버거운 한숨을 쉰 류드밀라는 눈을 흘긴다.

    “체하지만 않았지 평소의 두 배는 먹은 것 같아요.”

    “힘든 일을 겪으셨는데 빨리 몸을 회복하셔야죠.”

    “그러는 루슬란 님은요? 여기서는 마법도 잘 쓰지 않으셨을 텐데 왜 그리 여위셨나요?”

    따지듯 물은 그녀가 신나하며 안 쓴 수저로 고기 파이 한 조각을 떼어 낸다. 루슬란은 뭐라 반박도 못 하고 있다가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저는 원래 음식을 잘…….”

    “힘든 일을 겪으셨는데 빨리 몸을 회복하셔야죠!”

    눈을 빛내는 류드밀라 앞에서 그는 진실을 말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하다가 결국은 고기 파이를 입에 넣는다. 신기하다는 듯 그가 오물거리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가 귀여워, 입 안에 맴도는 쓴맛은 금방 잊을 수 있다.

    성역에 있다고 해서 제국에 매인 몸이 놓여나는 것은 아니니, 제국을 지키는 마법은 항상 써 왔다. 그래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건만. 그리고 그가 여윈 이유는 음식을 안 먹어서가 아니다. 그 많은 숨겨진 사실들을 말하지 않고 루슬란은 류드밀라의 장단에 맞춰 노닌다.

    결국 식탁 위의 음식이 거의 사라지고 나서야 만족한 류드밀라는 여전히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산책을 하겠다며 그를 잡아끈다. 오두막까지 오면서 했던, 들판을 함께 뛰노는 상상을 실현시킬 차례이다.

    루슬란이 숨기는 진실을 물어보겠다는 결심은 또다시, 그리 쉽게도 잊힌다. 그녀가 생각보다 진실을 궁금해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진실을 알기 두려워 마음에서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떻든 그녀는 그에게 물어봤어야 했다.

    그랬다면 며칠 후에 돌아갈 황궁에서 루슬란이 무슨 일을 겪을지,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마법사라는 그가 어떻게 망가질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짐작도 하지 못하는 류드밀라는 오두막 밖으로 나선다. 뒤따라 나온 루슬란이 재미있어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조심조심 언덕을 올라간다. 피로가 다 풀린 다리는 어쩐지 힘이 붙은 듯싶고 배부르고 졸린 기분은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흩어진다.

    “이리 오셔 봐요!”

    뒤를 돌아보고 루슬란을 재촉한 그녀는 언덕 위에 자란 나무 근처까지 순식간에 올라간다. 언덕 꼭대기에 서서 시원한 바람을 얼굴에 맞자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다. 힘든 여정은 끝난 데다 루슬란의 눈은 다 나았고, 황궁으로 돌아가는 일은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그 충족감은 언덕을 다 올라온 그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자 더 커진다.

    “힘도 세진 데다 발도 빨라지셨네요. 그대를 쫓느라 제가 숨이 다 차고 말이죠.”

    숨이 전혀 차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것이 웃겨 류드밀라는 미소를 입가에 건다. 이렇게 다정한 루슬란을 전에는 마냥 무서워하기만 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는다.

    그가 그녀의 허리에 두른 손은 조심스럽고 어깨에 얹은 턱은 혹여나 무게가 과할까 가벼이 있다. 그런 배려 하나하나에도 류드밀라는 어린 소녀처럼 설레 한다. 루슬란을 두려워했던 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배려가 부담스럽지도 않다. 아마 그녀가 받은 만큼 되돌려 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서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님께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장난스레 대꾸한 류드밀라는 그의 팔 안에서 몸을 돌려 마주 본다.

    “아니면 언덕을 오르기엔 너무 늙으신 건가요?”

    미처 제어할 틈도 없이 말이 입 밖으로 나간다. 티크혼과 함께 있었다고 저도 그 장난기 가득한 신록을 닮아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그녀는 루슬란의 표정이 조금도 찌푸려지지 않자 깨닫는다. 그는 그녀의 수줍어하는 모습도, 이렇게 한 모습도, 그 어떤 모습이든지 사랑해 줄 거라는 사실을.

    “제가 늙었다뇨?”

    그가 웃음을 머금고 되묻자 류드밀라는 콧등에 뽀뽀를 한번 하곤 제 추리를 털어놓는다. 오래전처럼 기억된 그날, 거미줄에 갔을 때 생각해 낸 추리를 말이다.

    “이리 영특하고 맹랑하기까지 하시니, 제가 알던 겁 많은 껍데기 님이 맞나 의심스럽네요.”

    콧등에 남겨진 뽀뽀로는 부족했는지 입술을 맞대어 오며 루슬란이 속삭인다. 숨결이 섞이자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짓궂게 대꾸한다.

    “정말 그 껍데기 님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럼 누구신가요, 그대는?”

    흔쾌히 그녀의 장난을 이어 가게 도우며 그가 의심스러워하는 얼굴로 묻는다. 가늘게 뜬 눈은 마찬가지로 장난기가 가득하다.

    “저는 말이죠…….”

    뜸을 잠시 들였다가 류드밀라는 풀쩍 뛰어올라 그의 목에 매달리듯 그를 덮친다.

    “루슬란 님을 잡아먹으려고 온 용이에요, 용!”

    즐거워하며 뒤로 쓰러진 루슬란은 그녀가 간지럼을 태우자 기분 좋게 웃는다. 정신없이 간지럼을 태우던 류드밀라는 그가 눈을 번쩍 뜨며 그녀를 붙잡고 들어 올리자 웃음을 뚝 멈춘다.

    “그런데 어쩌나.”

    바동거리는 그녀를 옆자리에 내려놓은 그가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류드밀라를 본다. 그녀가 조금은 겁에 질린 걸 알고는 가늘고 하얀 손으로 애틋하게 뺨을 감싼다.

    “저를 루슬란 님이라 부르는 이는 세상에 제 껍데기 님, 그대뿐인걸요.”

    그 말에 류드밀라는 행복에 겨워 눈을 스르르 감고 미소 짓는다. 입맞춤을 해 오는 루슬란의 입술은 살갗에 스치는 비단 이불처럼 곱고 부드럽다. 그녀는 몸이 들떠 구름 사이를 노니는 기분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두른다. 키스를 하면서도 달래 주려고 뺨을 살살 어루만져 주는데, 그 손길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천천히 입술을 뗀 그들 사이에 은사처럼 방울이 늘어진다. 그제야 어린아이처럼 굴었던 일이 부끄러워 아까도 빨개진 얼굴이 더 달아오른다. 창피함을 숨겨 보고자 류드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다른 이들은 루슬란 님의 이름을 모르나요? 단 한 명도요?”

    순진한 생각이 귀여워 루슬란은 싱긋 웃는다.

    “아는 이들이 몇 있긴 하죠. 하지만 그들이 제게 존칭을 쓰지는 않는답니다.”

    “그렇군요. 그럼, 정말로 저처럼 루슬란 님을 부르는 사람은 유일하네요?”

    “이토록 고운 목소리로, 상냥하게 저를 불러 주는 사람도 그대가 유일하죠.”

    루슬란이 전에 그랬듯이 귓가가 아닌 가슴 깊은 곳이 간질간질해 그녀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폭 대고 숨는다. 나란히 서로를 보고 누운 채 그들은 다정다감한 말들을 몇 마디 더 주고받는다.

    여전히 뭔가가 궁금한 듯 자꾸 괜히 입술을 달싹거리다 눈길을 피하는 류드밀라에게 그가 용기를 전한다.

    “묻고 싶은 것이 더 있는 얼굴을 하고 계시군요.”

    “사실은, 네…….”

    “그럼 말하셔요, 겁먹지 말고.”

    그녀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망설이다 결국은 머뭇거림을 떨쳐 낸다.

    “루슬란 님은 얼마나 나이를 먹으셨어요?”

    아마 그녀가 묻고 싶었던 것은 저 질문이 아니었으리라. 아마도 그의 정체에 관련된, 더 깊고 심각한 질문이었겠지. 여정을 하며 다른 이들에게서 그에 대해 들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짐작한 루슬란도 류드밀라의 용기를 마지막에 꺾이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저 주어진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솔직한 답을 내놓았을 뿐.

    “저도 잘 모르겠네요. 나이를 세는 일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져 어느 순간부터 헤아리길 그만두었어요.”

    “그렇군요.”

    원래 물으려던 질문이 아니었지만 그에 대한 대답도 신기해서 류드밀라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곧고 매끈한 감촉이 만지고 있으면 안정감을 준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언덕 꼭대기 나무 아래 누워 시간을 보내다 해 질 때가 되어서야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느긋하고 평화로운 나날들이 흘러간다. 황궁에 돌아갈 일을 떠올리지 않다 보니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을뿐더러 눈이 나은 루슬란은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여독이 풀린 지 이미 한참 되었어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며칠이 흐르자 발이 빠른 호랑이와 여우들도 성역에 도착하고 카티아와 티크혼은 신록들의 숲으로 돌아간다. 영물이라 상처가 금방 나은 자디라와 재회한 류드밀라는 호랑이의 무뚝뚝함에도 굴하지 않고 못다 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카티아와 티크혼을 배웅할 때는 언제 또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잠시 상념에 차 있기도 한다.

    그러나 별다른 사건 없이 일주일은 흘러가고 이제 정말로 성역을 떠나야 할 때가 온다. 시내에서 루살카와, 들판에서 아직도 새침한 여우들과, 정자에서 산신과 인사를 나눈 류드밀라는 루슬란의 손을 꼭 잡는다.

    “많이 걱정되시나요?”

    들판으로 다시 걸어가는 가운데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평온한 나날들은 그저 이 순간이 닥쳐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억지로 묻어 둔 걱정들이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새로이 샘솟는다.

    루슬란은 손을 조금 더 단단히 고쳐 잡는다.

    “그대에게 해가 갈 일은 없을 거예요.”

    “전 그걸 걱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두렵게도 그 말에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류드밀라에게는 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가 없다. 지겹게도 들은, 인간들의 제국에 매인 몸이라는 소리가 지금에서야 실감이 난다. 그녀를 찾을 때 황제를 협박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저항할 수가 없다.

    그녀가 우뚝 자리에 멈춰 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산신님께…….”

    “그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랍니다.”

    그녀를 돌아본 루슬란이 부드럽게 달랜다.

    “이 방법뿐이니 무서워도 참는 수밖에요.”

    별안간 류드밀라는 스스로가 정말 어린아이 같다고 느낀다.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위험과 공포 앞에서는 결국 루슬란에게 의존하고 만다.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게요. 제가 바보 같은 생각을 했어요.”

    “바보 같지 않아요, 충분히 두려울 만한걸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루슬란은 그녀에게 조그마한 농담도 던지고 웃음도 이끌어 내며 긴장을 풀어 준다. 성역 밖 시내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루살카의 배를 타곤 잘 수 있을 때 자 두라며 담요를 덮어 주기도 한다.

    류드밀라는 담요 안에서 몸을 움츠리며 그의 어깨에 기댄다. 쉽사리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지만 걱정을 덜어 주려고 눈을 감고 있는데, 루살카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름답고 슬픈 곡조에 잠은 더 달아나고 애타는 마음만 커져 간다. 그녀를 찾기 위해 수배령까지 내렸던 황제가 얼마나 무서울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 분노한 모습을 상상해 본다.

    결국 무서운 상상도 시내가 좁아질 무렵에는 끝이 나 체념의 단계가 온다. 산을 마저 내려가는 류드밀라의 머릿속은 긴장으로 오히려 흐리멍덩해진다. 루슬란이 요괴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두른 마법이 푸르게 빛나는 모습도 더 이상은 신기하지 않다. 멍하니 그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산을 다 내려와 있다.

    오를 때는 그리도 힘들었는데, 산기슭을 문득 올려다보다 류드밀라는 그의 옷자락을 움켜쥔다.

    “제가, 제가 무얼 하면 될까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제 황궁으로 이동하실 거잖아요. 제가 직접 황제 폐하께 사죄해야 하는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운 보라색 눈동자가 은빛 눈동자 안에서 위로와 안정을 찾아 마구 흔들린다. 루슬란은 안타까운 마음에 옷을 그러쥔 손 위로 제 손을 포갠다.

    “해명하는 것도, 사죄하는 것도 모두 제가 할게요. 그대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앞으로의 일은 모두 제 몫이지요.”

    그녀가 황궁에서 본 높은 사람이라곤 상급 마녀들과 루슬란이 다였다. 황제를 지칭하는 것도 아직은 어색한데 직접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큰 부담으로 느껴진다. 그러다 아까 한 다짐을 떠올린 류드밀라는 용감하게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제가 잘못한 부분도 있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 사죄해야 하는데…….”

    “황제는 진실을 들을 필요가 없답니다. 그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동안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말한다 해도 믿어 줄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제가 황제에게 설명하고 용서를 구할게요. 저를 믿어 주시면 안 될까요?”

    루슬란이 그렇게 말해 오니 그녀는 반대할 말을 찾지 못한다.

    “전 당연히 루슬란 님을 믿어요.”

    말없이 류드밀라의 손등에 입을 맞춘 그가 공중에 크게 원을 그린다. 손이 지날 때마다 생겨난 푸른 빛줄기가 이어져 커다란 구멍을 만들고, 그 너머로는 익숙한 무늬의 바닥 타일이 보인다.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함께 그 빛무리로 들어가 황궁 알현실에 도착한다.

    알현실처럼 거대한 실내 공간을 류드밀라는 처음 본다. 거대한 샹들리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져 산산조각 날 듯 위태로워 보였고 천장에는 어지러운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공기는 텁텁하고 건조하다. 벽과 기둥의 장식들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번쩍거렸으며 바닥은 미끄러워 걷기 불편하다. 그러나 그녀를 제일 겁먹게 한 것은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다.

    화려한 옷을 입고 반짝거리는 가루를 뿌린 머리 장식을 하고서 눈가와 입술을 칠한 귀족들. 매섭게 올라간 눈꼬리와 호의라곤 찾을 수 없이 비틀어진 입꼬리가 그녀를 두렵게 만든다.

    루슬란과 함께 류드밀라가 빛무리에서 걸어 나오자 놀라서 부채를 확 펼치며 얼굴을 가리는 동작들도 낯설고 무섭기만 하다. 놀람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그 빈자리를 적대감이 대신 채우는 것이 느껴져, 언제 제가 이렇게 다른 이들의 감정에 예민했나 싶다. 그러나 둔한 사람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그들을 향한 감정의 종류는 분명하다.

    정상이 규정된 제국에서 허용된 범주를 벗어난 이들을 향한 적개심이다. 마법 능력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정상이 아니라 결론 내려 싫어하고 무시하는 어리석음이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불쾌하게 커졌다가 작아지길 반복한다. 걸음을 옮기는 루슬란을 서둘러 따라가며 류드밀라는 귀족들이 그들을 구경하러 앞으로 나왔다가 거리가 좁혀지자 더러운 것을 피하듯이 물러서는 꼴을 보고 만다. 마녀와 마법사들 사이에서 루슬란은 마법 능력만으로 인정받았었는데, 이제는 그 능력이 그를 멸시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모순에 억울함을 느낄 새도 없이 류드밀라는 루슬란이 어디로 향했는지 발견하고 공포를 억누른다.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황좌 바로 앞이다. 까마득한 계단 끝에서 그들을 굽어보는 형체가 보인다.

    “드디어 돌아올 마음이 생겼나 보군, 마법사.”

    젊은 황제가 이죽거리면서 루슬란을 내려다본다. 류드밀라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그 옆에 바싹 붙어 있다.

    “폐하.”

    고개를 까닥한 루슬란은 그녀에게는 절대 보여 주지 않았던 냉랭한 얼굴로 황제를 올려다본다. 그들이 싸울 때조차 저렇게 무시무시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었는데. 류드밀라는 두려운 동시에 그의 용기와 올곧음이 부럽다.

    “그동안 무얼 하느라 해야 할 임무를 내버리고 있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겠다. 그 이유가 뻔히 네 옆에 달라붙어 있구나.”

    황좌를 중심으로 모여든 귀족들 사이에서 숨죽인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류드밀라가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자 쏘아보는 눈초리와 불결하다는 듯 다시금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손짓들이 이어진다. 그녀는 최대한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있으려 노력한다. 적대감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날아와 꽂히는 가운데 호흡을 유지하기도 버겁다.

    “의무에 충실하지 못했던 점은 사과드립니다. 하나, 제가 데려온 껍데기 여인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평소 그의 목소리가 어떤지 아는 류드밀라는 지금 루슬란이 얼마나 날이 선 상태인지 알 수 있다. 느리고 위험하게 울리는 낮은 목소리가 경고를 보낸다. 감히 제 짝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황제와 귀족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왜 잘못이 없나, 당연히 잘못이 있지. 네 녀석을 홀려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만들지 않았느냐.”

    “그럼에도 제 잘못이지 저 여인은…….”

    손을 휘저어 루슬란의 말을 더는 듣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계단을 위엄 있게 내려오는 제 모습에 심취한 듯 옷자락을 끌며 루슬란 앞에 선다.

    황제가 저보다 키가 큰 루슬란의 뺨을 후려갈기자 류드밀라는 움찔한다. 그녀에게서 고개가 반대로 돌아가 루슬란의 표정을 볼 수가 없는데 차라리 그게 다행인 것 같다. 전에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 하셨지. 마음이 아파 그녀는 손을 잡아 주려다 마음을 다잡는다. 저들 앞에서 그를 위로해 주면 오히려 조롱만 살 것이다.

    루슬란은 화가 난 기색이 없다. 주먹을 쥐거나 분개한 말을 내뱉지도 않는다. 그저 화낼 가치도 없다는 듯, 아니면 이런 취급이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바로 했을 뿐이다. 황제는 그 태도에 더 분노한다.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짐을 보는 것이냐. 제국의 개가, 주인을 그렇게 대해도 되나?”

    으르렁거리며 내뱉은 모욕에 루슬란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전 개가 아니니 폐하도 제 주인이 아니지요. 전 다만 저주에 묶여 있을 뿐이고 폐하는 그 저주에서 맡은 역할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느긋한 미소를 내보인다. 그렇게 힘을 과시해서라도 황제가 섣불리 류드밀라를 해치지 못하게 만들려 한다. 불행히도 황제는 쉽게 물러설 이가 아니다. 마법사에 대한 증오와 멸시로 뭉친 자는 분노를 삼킨다.

    그리고 마법사를 가장 상처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그래. 내가 네 주인은 아닐지 몰라도 저 여인의 주인은 맞는데. 황궁의 껍데기이니 황실의 소유물일 텐데 멋대로 돌아다니기나 하고 말이지. 아무리 죄가 없다고 마법사 네놈이 주장해도 어쩌나. 껍데기에게 죄를 물어야겠는걸.”

    루슬란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그 변화가 황제의 목적인 걸 알아 내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악몽이 맴돌고 있다. 류드밀라가 흑마법사에게 납치당했을 때가 떠오르며 그는 조용히 이를 악문다. 이미 그의 곁에서 그의 잘못 때문에 충분히 고통을 겪은 그녀이다. 더는 그녀가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흑마법사에 비하면 한낱 인간의 몸으로 이리 기어오르는 황제는 우습지만 그들 사이에 얽힌 저주가 그는 두렵다. 그 저주 때문에 황제를 어찌할 수가 없어 더욱. 그는 황궁에 류드밀라와 함께 돌아가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것이 그녀에게 가장 상처를 덜 남기는 방법이다.

    루슬란의 각오를 모르는 황제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황좌 아래를 지키던 근위병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저 여인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고 제 죄를 반성하게 하거라.”

    말없이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류드밀라는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한다. 제가 옥에 갇히면 루슬란의 마음은 또 얼마나 무너져 내릴지 참담한 심정으로 제게 다가오는 병사들을 바라본다. 무력해지는 그가 안타까웠고 그를 도울 수 없는 자신이, 이리될 걸 알면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다. 루슬란에게서 화가 비껴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이라고 다독여 주고 싶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실망한 그녀는 다만 몸을 가벼이 떨며 분노와 슬픔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루슬란은 병사들을 흘긋 본다. 눈이 스르르 미끄러지는 순간 그들 주위를 얼음 장벽이 둘러싼다. 일순간 공기가 전보다 더 무겁고 텁텁하게 느껴진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가 공기 중에 떠도는 수증기를 끌어다 썼기 때문이다. 주문을 외우지도 않고 마법을 쓰는 마법사에게 귀족들이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다.

    루슬란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는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망토 자락처럼 주위에 내려앉고 그는 누구에게도 조아린 적 없던 고개를 깊숙이 숙인다.

    “제가 대신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간결한 한 문장보다 황제는 마법사가 무릎을 꿇은 것에서 희열을 느낀다. 웃는 낯을 감출 생각이 없어 큰 소리를 낸 황제가 그의 머리카락을 밟으며 주변을 천천히 거닌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일이 생각나는군. 내가 처음 황위에 오르고 네놈이 날 협박했을 때가 말이다. 내 아버지, 내 할아버지, 선대 황제 모두에게 그랬듯이 네놈은 날 무릎 꿇리고 기억에서 차마 지우지 못할 치욕을 줬다.”

    머리카락이 덮은 손을 밟자 발에 부러 힘을 준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마법사? 언젠가 네가 내 발아래를 기게 만들 거라고. 네놈은 내 말을 비웃었지만, 이제 어떻게 되었는지 똑똑히 보라지.”

    루슬란은 모욕을 잘 참아 내지만 류드밀라는 그러지 못한다. 제가 무수히 많은 조롱을 받는 건 견딜 수 있었는데, 상급 마녀의 겁박과 평범한 시녀들의 괄시는 모두 다 참아 냈었는데. 차마 그러지 못한다.

    그때 마법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한다. 닫힌 입술이 서러움에 일그러지며 류드밀라는 분노에 차 황제를 노려본다. 두려움도 잊은 그녀는 말을 못 하게 되었으니 황제의 목이라도 조를 셈으로 움직인다. 또다시 그의 푸른 기 도는 마법이, 그녀를 가로막는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후회할 행동을 하려는 그녀를 막았을 뿐이지만 그에 대한 원망도 생긴다. 저리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얻는 게 무엇일까. 루슬란이 무릎을 꿇은 모습이 그가 흑마법사에게 다쳤을 때보다 더 참혹하게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판다. 저렇게 보잘것없고 악한 자에게 다른 이도 아닌 류드밀라의 안전을 구걸해야 하는 상황이 역겹고 끔찍하다.

    류드밀라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황제는 루슬란이 했던 행동을 똑같이 돌려준다.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채를 휘어잡아 고개를 들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죗값을 어떻게 치를 셈인가?”

    “그 전에 약조해 주십시오. 제가 죗값을 치르면 더는 껍데기 여인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약속하십시오.”

    “네놈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이지?”

    황제가 못마땅해하며 되묻는다. 루슬란의 고고함이 조금도 상처 입지 않아 불만이었지만 반드시 깨트리리라고 다짐하며 말이다.

    “제 여인에게 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폐하의 명령을 모두 따르겠습니다.”

    잔악무도한 기쁨의 미소가 젊은 황제의 입가에 번진다. 원하던 바이다. 애초에 껍데기는 마법사를 자극할 수단으로 이용할 목적이었으니, 머릿속으로 온갖 잔혹한 상상을 뒤지며 황제는 몸을 일으킨다.

    “좋다. 짐이 네놈에게 약속하마. 내 명령을 따르면 저 비천한 계집은 내버려 두겠다.”

    루슬란도 일어서서 류드밀라를 돌아본다. 그녀를 잡아 두고 있던 마법이 풀린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류드밀라가 그토록 그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을 그가 입 모양만으로 속삭인다.

    “괜찮아요.”

    대체 황제가 루슬란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괜찮다고 하는 그를 보니 그녀는 눈물이 터져 나오려고 해 숨을 참는다. 숨을 참고 이미 고이기 시작한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기를 빈다. 지금 그녀의 눈물은 조롱거리가 되리란 사실을 알아 그렇다.

    한편 황제는 그들이 마음 놓고 있길 바라지 않는다.

    “누가 일어서도 좋다고 하였지?”

    황제가 부른 다른 근위병들이 루슬란의 어깨를 잡아 눌러 무릎 꿇린다.

    “강대하다는 마법사가 한낱 계집 때문에 이리 쉽게 굴복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귀족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황제는 마침내 첫 번째 ‘죗값’을 결정하곤 시종을 불러 명령을 내린다. 그러곤 귀족들에게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내보인다.

    “물 속성 마법사는 얼마나 불을 잘 견디나 보자고.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 경들에게 의자를 마련해 줘야겠다.”

    알현실이 다시 한번 웃음바다가 된 가운데 루슬란은 류드밀라를 돌아본다. 그들을 비웃는 소리 속에서도 묻히지 않고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사과한다.

    “미안해요.”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그녀가 물어볼 틈이 없다. 다음 순간 그녀는 알현실에서 사라졌고, 다음 순간 깨달았으니. 류드밀라가 마법에 휩쓸려 도착한 곳은 익숙한 루슬란의 침실이다.

    망연히 침대 위에 앉아 있던 그녀는 서둘러 방문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침실 문은 잠겨 있다. 루슬란과 그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던, 그녀가 두려움을 품고 건드렸을 그때처럼 손잡이가 은빛 문양을 발하며 열리기를 거부한다.

    제 안위만을 두려워하던 류드밀라는 이제 두려움의 원인이었던 루슬란을 걱정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성장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저 달라진 줄 알았던 스스로의 무력함에 다시금 절망하고 분노할 뿐, 류드밀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한편 류드밀라를 안전한 곳으로 보낸 루슬란은 마음이 착잡하다. 혼자 남겨져 두려움과 슬픔에 잠길 그녀가 걱정된다. 아무리 몸이 안전해도 그녀를 지킨다는 목적으로 또 다른 상처를 안겨 준 것 같아 전에 들은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화해를 하러 찾아온 류드밀라가 울분에 차 내뱉었던 말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하기 싫다. 그저 이런 그라도 그녀가 후에 용서해 주길 실낱같은 희망에 몸을 내맡긴다. 그리고 황제의 명령을 받든 시종이 다시 나타난 순간, 류드밀라를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종 뒤를 따르는 병사들은 화로를 황제 앞까지 옮겨 온다. 노예들에게 낙인을 찍을 때나 쓰는 도구가 화로에서 달궈지고 있는 와중에 황제의 의중을 짐작한 루슬란은 안도감밖에 들지 않는다. 그의 선택이 옳았다. 류드밀라가 남아 있었으면 그가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네놈은 제국의 개가 아니라 했지. 반항하는 짐승에게는 뭐가 돌아오는지 이제 똑똑히 알게 될 것이야.”

    황제가 기대감에 손을 비비며 루슬란을 붙잡고 있던 병사들에게 손짓한다. 그들은 루슬란의 옷을 찢어 내고 맨 등을 드러낸다. 흉터 하나 없이 매끄럽고 잔 근육이 물결치는 등을 본 황제는 밤사이 내린 눈밭을 더럽히는 즐거운 기분으로 명령을 내린다.

    “낙인을 찍거라.”

    루슬란은 스스로의 몸에다 고통을 줄여 주는 주문을 걸려다 만다. 고통이 흐려지면 정신까지 같이 흐려질 텐데, 황제가 후에 마음을 바꿔 류드밀라를 해치려 해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희박한 가능성이 걱정되어 그는 살이 타고 일그러지는 끔찍한 아픔을 견딘다. 이를 악물고 눈을 조용히 감는다.

    황제는 루슬란에게서 비명이나 신음을 듣지 못해 실망한다. 주변의 귀족들도 김이 샌다는 표정으로 무릎 꿇려진 마법사를 보며 저들끼리 수군거린다. 재밌는 놀잇감이 될 줄 알았는데. 이럴 바에는 차라리 짐승을 데려다 놓고 싸우게 하는 편이 더 신나겠다는 말까지 한다.

    그 한마디에서 황제는 영감을 얻는다.

    “감옥에서 아무 죄수나 데려오거라! 데려와서 내 앞에 세워.”

    병사들이 신속히 명령에 따를 동안 황제가 루슬란 바로 근처에 다가간다. 고개를 숙인 채 고통과 굴욕을 말없이 삼키는 마법사는 황제에게 묘한 기대감을 안겨 준다. 마치 제가 선대 황제들의 복수라는 과업을 짊어진 듯한 비장함도 느낀다. 저 마법사 한 놈 때문에 황권은 짓밟혔었다. 제국을 지키는 무기나 도구 이상의 가치는 지니지 못한 주제에 비정상적인 힘으로 황제들의 굴종을 받아 낸 놈이었다.

    “기분이 어떠냐? 노예의 낙인이 찍힌 채 네놈이 얕봤던 내 발치에 꿇어앉아 있는 기분이?”

    루슬란은 고개를 들지 않는다. 아파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고통은 파도처럼 그의 몸을 휩쓸고 이제는 지나갔다. 분노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황제의 말은 그가 영겁의 세월 동안 품어 온 분노와 설움을 건드릴 수 없다. 다만 그는 걱정할 뿐이다. 반응을 하면 황제의 심기를 건드릴 텐데, 황제가 마음을 바꾸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다.

    지루해진 황제는 발로 그를 툭툭 건드리다가 죄수가 이송되자 반색한다.

    “이제 일어서. 일어서서 저 녀석을 죽이거라. 네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잔인하게.”

    루슬란은 황제의 말대로 일어난다. 찢긴 옷자락이 등에서 돋아났지만 꺾인 날개처럼 흔들리는 가운데 그의 귀에다 황제가 속삭인다.

    “네놈이 얼마나 끔찍한 괴물인지 모두에게 보여 주거라.”

    흥분이 알현실을 가득 채운다. 귀족들 중에선 함성을 지르거나 기대감에 목을 쭉 빼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루슬란이 천천히 황제를 돌아본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떠올라 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고 있는데 눈은 은빛으로 번뜩이며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황제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그제야 자세히 본 루슬란의 입 안에 난 날카로운 송곳니만큼, 밤에 본 맹수의 눈처럼 빛을 발하는 눈동자만큼, 그의 손에 천천히 모여드는 파란 기운만큼.

    “그럼 보십시오, 황제 폐하. 제가 얼마나 잔혹하게 태어난 생물인지를. 폐하께서 원하는 괴물이 되어 드리지요.”

    루슬란은 망설임 없이 죄수에게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간다. 자신의 운명을 알고 죽자 살자 달려들던 남자는 루슬란의 손짓 한 번에 공중으로 끌려 올라간다.

    공중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남자의 피부가 울룩불룩하게 일어나며 고통스러운 절규가 알현실에 메아리쳐 울려 퍼진다.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조종하듯 유연하게 움직이던 루슬란이 천천히 주먹을 만든다. 손가락을 조금씩, 조금씩 가깝게 하며 모은 그의 눈은 이제 완전한 은빛으로 변해 있다. 멀리서도 죄수의 몸이 이상하리만치 창백해졌음이 보인다.

    황제는 불안해하면서도 멈추란 말은 하지 못한다. 공포를 드러내며 명령을 번복할 수는 없다. 두려움에 빠진 황제와 더불어 귀족들을 하나하나 둘러본 루슬란이 마침내 주먹을 완벽하게 쥔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그 순간에, 인간의 공포를 먹고 자란 생물처럼 해사하게 웃는다.

    그리고 주먹을 편다.

    남자의 몸이 폭발한다. 피와 살점은 루슬란의 조종 아래 그를 제외한 알현실의 모두에게 비처럼 흩뿌려진다.

    저보다 낮은 이들을 깔보던 귀족에서 순식간에 공황 상태에 빠진 평범한 사람으로 변한 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비명을 지르다 기절하고, 또 도망치려 한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황제는 서둘러 정신을 차린다. 그도 그럴 것이 루슬란이 황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또 뭐를 하면 됩니까, 황제 폐하?”

    느리게 물으며 루슬란이 다가가자 황제는 풀썩 주저앉는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가 뿜어내는 기운에 눌려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다짐은 공포에 마구 뒤엉킨다. 다행스럽게도 그 와중에 병사들이 황제를 부축해 일으켜 세운다.

    “나가자, 나가야 한다.”

    멀쩡한 알현실에서 도망치는 제국의 주인이 된 자신의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도 모르고 황제는 그렇게 도망친다. 모두가 도망치려 하느라 전쟁터가 된 문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루슬란은 그저 서서히 침묵이 내려앉는 것으로 제가 불러낸 공포의 부피를 실감한다.

    그때 붉게 끈적거리는 공기를 가냘픈 목소리가 가른다.

    “루슬란 님.”

    루슬란은 심장이 꺼져 내려가는 듯한 두려움을 안고 고개를 떨군다. 저 목소리를 지금 여기서 듣느니 차라리 살갗을 망가뜨리는 인두가 낫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고통 따위는 지금 겪는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보셨습니까.”

    “전부 보지는 못했어요. 죄수가 들어왔을 때 같이 들어왔으니까요.”

    울음이 섞인 말이 가슴 저 깊은 곳을 도려낸다. 루슬란은 눈을 질끈 감는다.

    “어떻게 침실을 나오셨나요.”

    “나탈리아가 와서……. 나탈리아 덕에 문을 열 수 있었어요. 그녀가 빌려준 마녀 옷을 입고 숨어들었어요.”

    루슬란은 숨을 한 번에 내뱉지 못한다. 슬픔이 그를 무겁게 짓눌러 그렇다. 류드밀라는 화를 내야 했다. 멋대로 침실에 자신을 가둬 버린 루슬란에게, 잔인하고 역겨운 짓을 저지른 그에게 화를 내고 혐오라는 감정을 드러내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는 다른 이유로 겁에 질려 있다.

    “다친 곳은 괜찮으신가요? 왜 계속 제게 묻기만 하시나요. 왜 계속 제게서 등 돌리고 계시나요. 제게, 저를 봐 주세요.”

    “다친 곳은 괜찮아요.”

    루슬란이 문 쪽으로 돌아선다. 알현실 문 앞에는 그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류드밀라가 서 있다. 나탈리아에게서 빌린 마녀 제복을 입고, 창백하게 질렸지만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얼굴로. 가녀린 몸을 가볍게 떨면서 팔로 어깨를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그 작은 몸에는 피가 튀어 있다.

    루슬란은 비틀거린다. 그렇게 조금 드러낸 나약함에 놀라 달려오는 류드밀라가 안타깝다. 그녀는 그를 부축하려 하지만 같이 주저앉고 만다. 그는 멍한 와중에도 손을 움직여 그녀의 몸에 묻은 핏자국을 없애 준다. 공기 중의 수분으로 깨끗이 닦아 내 본다. 그녀의 마음에 남은 상처는 닦아 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상처를 돌보기 싫다.

    “그대는 왜 저를 사랑하셨나요.”

    루슬란은 보랏빛 눈동자에서 뭔가를 읽어 내려 한다. 그가 찾는 건 보이지 않고 대신 눈물이 가득 차올라 방해만 한다. 그가 찾았던 혐오, 경멸, 두려움은 없다. 눈물 사이에서도 맑은 애정이 엿보이지만 그는 믿기를 거부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지금도 루슬란 님을…….”

    “왜 저를 사랑하셔서, 왜 그렇게 고통 받고 아픔을 겪으면서도 제 곁에 머무르셨나요.”

    류드밀라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건드리면 아플까 봐 조심스레 부축을 풀고 그를 물끄러미 볼 뿐이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가 되묻는다.

    “루슬란 님은 왜 저를 사랑하시나요? 그러는 루슬란 님은 저를 위해 스스로를 내버리면서까지 희생하셨는데, 왜 그러셨죠?”

    “제가 말했었죠, 인간에 대한 증오와 불신으로 뭉쳐 있던 제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그대라고. 그래서 그대가 좋았어요. 제게 아무런 기대 없이 다가와서 제 기대만 키워 놓는 모습이. 다음 날 찾아와 수줍게 선물을 내밀고 부끄러움에 도망쳐 버리는 모습이. 그대는 제게 처음으로 타인을 아끼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어요.”

    루슬란은 결국 놓아 버린다. 제 일부를 포기하고 류드밀라에게 다시 안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녀의 상처를 돌보기 싫은 마음은 제 상처까지 활짝 여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조용히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과거의 일이죠. 그대를 다시 만나서 똑같은 걸 바란 제가 옳지 않았다는 것은 알아요.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기억을 잃은 채 지낸 시간 동안 그대는 달라졌으니. 전 그 달라진 모습조차 좋아했어요. 두려움에 떠는 걸 달래 주는 순간이 소중했고 그대가 내게 마음을 여는 걸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으니까요.”

    류드밀라는 숨죽여 그의 말을 듣는다. 숨소리조차 방해가 될 정도로 약하고 바스러질 듯한 말들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대가 점점 용감해지고 굳세어지는 걸 보고는 감탄스러웠어요. 제 도움 없이도 그대가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했지만 스스로 성장한 그대의 모습이 너무나도 어여뻐, 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침내 그녀를 응시하던 시선을 푼 루슬란이 조용한 단어들을 공중에 하나씩 건다.

    “그래서 그대에게 물은 것이에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대는 왜 저를 사랑하냐고. 마지막으로 묻고 싶었어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꼭 애틋한 과거가 필요하진 않아요.”

    류드밀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한다. 루슬란이 상처 입고 마음을 다친 지금, 어느 때보다 더 간절하게 그녀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본다.

    “저는 비록 예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다시 만났을 때 본 모습 때문에 루슬란 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루슬란 님께선 제게 처음으로 다정히 대해 준 분이시라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요.”

    “제가 그리하는 걸 보셨는데도 변하지 않으셨나요.”

    힘없이 내뱉는 말에는 자조가 섞여 있다. 류드밀라는 그의 얼굴을 감싸고 들어 눈을 마주 본다.

    “네. 변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예요.”

    루슬란이 붙잡고 있던 작은 희망 한 줄기를 류드밀라가 창문을 열어 쏟아져 내리는 빛으로 바꿔 놓는다. 그는 아직 완전히 안도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걱정은 조금 던다. 제 상처를 숨기고 그녀의 상처를 보듬어 주다 오히려 위로받은 루슬란은 고마워하며 그녀의 손길을 얌전히 받는다.

    “미안해요, 나의 껍데기 님. 그대를 침실에 가둔 것도, 이런 모습을 보인 것도 모두요.”

    “괜찮아요. 물론 멋대로 절 침실에 보낸 일 때문에 조금 화가 나긴 했어요. 그래도 어떡하나요, 루슬란 님께서 이리 다치는 모습을 직접 봤으면 황제를 때려 주다가 감옥에 갇혔을지도 몰라요.”

    류드밀라가 힘주어 말하지만 루슬란은 농담에도 웃지 않는다. 그녀가 내세운 가능성에 작은 두려움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리라. 그는 대신 그녀를 끌어안는다.

    “화 푸셔요, 응?”

    루슬란이 애달프게 이른다.

    “풀렸어요, 풀렸으니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셔요.”

    그를 마주 안다가 맨 등에 손이 닿자 그녀는 화들짝 놀란다.

    “상처! 상처를 치료해야 해요.”

    “침실로 돌아갈까요?”

    류드밀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슬란은 이동 마법을 쓴다. 피로 물든 알현실을 빠져나와 그녀가 안도하고 있는데 그가 옷을 벗는다. 새하얀 피부와 자잘하게 잡힌 유연한 근육들을 보곤 부끄러워 새빨개진 얼굴을 본 그가 그제야 짤막한 웃음을 터트린다.

    “옷이 못 쓰게 되었으니 버려야겠지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저, 저도 알아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더 창피해진 류드밀라는 침대에서 서둘러 내려온다.

    “마녀님을 불러올까요? 상처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저는 몰라서…….”

    “괜찮아요.”

    루슬란은 더는 그녀를 걱정시키기 싫어 서둘러 손에 마법을 불러낸다. 어깨로 손을 올려 등까지 푸른 기운이 흐르게 하고 집중해서 상처 주위를 덮는다. 류드밀라는 차마 상처를 자세히 보지 못하지만 푸른 기운은 신기해하며 지켜본다. 마법으로 상처를 완전히 아물게 한 루슬란이 되었다며 그녀에게 손짓한다.

    “올라오셔서 쉬셔요. 많은 일을 겪었는데 피곤하시겠어요.”

    “먼저 씻고 싶어서요. 근데 루슬란 님께서 다 나은 건지 모르겠어서, 씻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상처는 다 나았답니다. 제가 마법으로 치료했어요.”

    류드밀라는 놀라서 그가 뒤돌아서 보여 준 하얀 등을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쓸어 본다. 상처가 있어야 할 자리는 새살이 돋아 다른 곳과 거의 분간도 가지 않는다.

    “이리 쉽게 상처를 낫게 할 수 있군요…….”

    별안간 형제단이 떠오른다. 루슬란의 능력이면 그들의 남은 가족들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방금 전 황제가 하는 짓거리를 보고 온 터라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다. 마법 능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하다는 이유로 저렇게 무시당하는데, 그가 과연 황궁 밖에서 무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녀는 슬픔을 떨쳐 내고 걱정스레 돌아보는 눈길과 마주한다.

    “왜 그러시나요?”

    류드밀라의 얼굴에도 슬픈 감정이 드러났는지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의 안색을 살핀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서둘러 욕실로 향한다. 빈 욕조가 낯설어 생각해 보니 항상 누군가 그녀를 위해 목욕물을 준비해 줬었다. 루슬란에게 시녀를 불러 달라고 말하려 하는데 그가 공중에 손을 내젓는다. 마법으로 순식간에 따뜻한 물이 차오른 욕조가 신기하기보단, 그 손동작에 류드밀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펴던 그에 대한 피로 얼룩진 기억이 선명하다.

    어깨를 다정히 감싸는 손길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린다. 눈을 질끈 감는데 루슬란의 음성이 들려온다.

    “미안해요. 아까 그대가 있는 줄도 모르고…….”

    “제가 그곳에 없었으면 그 일을 후회하지 않으실 건가요?”

    류드밀라가 불쑥 묻는다. 못할 짓인 걸 알면서도 그리 굴어 본다. 그 일을 보고 나서도 여전히 루슬란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궁금하고 무서운 것은 사실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걸 알아도 매서운 질문을 던져 답을 갈구한다. 결국 그래서 상대를 상처 입히고 저도 상처 받고 만다.

    “지금도 그 일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대에게 보인 것을 후회할 뿐이지.”

    질문에 기분 나빠할 줄 알았던 루슬란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스하다. 눈을 뜨고 보니 그녀를 살피는 갸름한 얼굴은 어쩐지 처연하기까지 하다. 유려한 미간이 살짝 좁아지고 눈동자 위에 드리워진 새까만 속눈썹이 느리게 팔랑인다.

    “제가 그래서 싫어지셨나요? 인간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고 다른 이들을 잔혹함으로 짓밟아서?”

    “……아뇨.”

    한숨처럼 대답을 내쉰 류드밀라는 마녀 제복을 벗고 혼자 욕조에 들어가 앉는다. 심경이 복잡하여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는다. 루슬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일은 더더욱 못 하겠다. 그가 티크혼을 다치게 만들었던 그때와 이번 일을 비교하며 그녀는 멀게만 보이는 해답을 궁리한다.

    그럴 동안 루슬란은 같이 욕조에 들어가 그녀의 몸을 정성스레 씻겨 준다. 값비싼 향유로 머리를 감겨 주고 바다에서 캐 온 보들보들한 해면에 비누를 묻혀 몸도 깨끗이 한다. 가끔씩 그를 향해 고마워하는 미소를 내비칠 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류드밀라가 걱정스럽다. 저 생각의 끝이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혼자 생각해서 혼자 판단하는 것은 모두 류드밀라의 몫이다. 그렇게 결정 내린 그는 미소에 미소로 화답해 주며 다만 그녀가 호사스러운 목욕을 누리게 도와준다.

    루슬란까지 씻고 나서 그가 그녀에게 가운을 입혀 주고 실내용 슬리퍼를 신겨 주던 때, 류드밀라가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어 위태롭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다.

    “루슬란 님.”

    무언가 결심한 듯한 목소리에서, 드디어 길고 긴 생각이 끝났음을 깨달은 루슬란은 태연하게 답한다.

    “왜 그러시나요?”

    “제가 잘못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해 놓고, 또 투정을 부리고 말았네요.”

    왼발에 신길 슬리퍼를 들어 올리던 루슬란이 멈칫한다. 그가 품었던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저런 말을 들으리란 예상은 없었다. 그래도 슬퍼하는 말들에 마음이 아파 그는 조곤조곤 대꾸를 조심스레 풀어놓는다.

    “얼마든지 투정 부려도 되셔요. 제가 다 받아 주고, 그대에게 부족한 모든 것을 채워 드릴 테니까요.”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다음에 이런 일이 제가 없는 곳에서 생기면, 제게 말씀해 주시기로요. 아무리 무섭고 끔찍한 일이라도, 제가 상처 받을지 몰라도 그냥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루슬란은 류드밀라의 발등에 작은 키스를 남긴다.

    “약속할게요.”

    손에 잡힌 발의 발가락이 부끄러워서 꼼지락거리다가 움츠리는 게 느껴진다. 고개를 다시 드니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류드밀라가 그를 탓하듯이 은근히 쏘아보고 있다.

    “눈을 다쳤을 때 그대가 부끄러워하는 걸 못 봤잖아요.”

    루슬란이 반대쪽 발에 신발을 마저 신기곤 일어서서 미소 짓는다. 그녀는 매일 보던 미소인데도 매번 홀려서 삐친 것도 잊고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본다.

    “그게 그리 마음에 남으셨나요.”

    “그럼요, 그대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대가 알면 그런 말은 못 하실 거예요.”

    욕조에서 내려오게 도와준 그를 그녀는 여전히 얼굴이 붉어진 채로 침대로 이끈다. 따뜻한 말들을 들으니 잔인한 기억들이 조금 흐려진다. 그래도 여전히 고민은 남는다. 비정상이라 규정지은 이들에게 이토록 냉혹한 황궁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녀가 침실로 찾아온 첫날 루슬란이 했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 말이 아직도 유효하냐고 그에게 묻고 싶지만 침대에 몸을 누이니 노곤하게 잠이 밀려온다. 류드밀라는 이불을 세심히 덮어 주는 루슬란을 빤히 올려다본다.

    “어쩌다 계속 잠만 자는 것 같아요.”

    “산을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드셨을 텐데. 쉬셔야지요.”

    몸은 나른하지만 막상 눈을 감으려니 걱정들이 거름종이를 적시듯 천천히 밀려온다.

    “루슬란 님, 황제가 계속 루슬란 님을 괴롭힐까요?”

    베개에 기대앉아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던 그의 얼굴이 슬퍼진다.

    “한동안은 안 그럴지도 몰라요. 혹여나 다시 악한 마음을 품어도, 이 제국에는 제가 반드시 필요하니 심하게 다루지는 못할 거예요.”

    “왜 이그나티 제국에 루슬란 님께서 필요한 거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쩌면 그를 알기 전부터 품어 왔던 의문을 류드밀라가 풀어놓는다. 마법사와 마녀들은 대체 무얼 위해 존재할까. 그리 무시하고 핍박할 거면서 황립 학교에서 그들을 양성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질문에 루슬란이 한층 더 속상한 표정을 짓는다.

    “제가 황제의 명에 따라 하는 일이 궁금하신 거군요.”

    “말하기 부담스러우시다면…….”

    “부담스럽지 않아요. 서로에게 진실되기로 약속했으니, 저도 그 약조를 지켜야지요.”

    이제 완전히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린 그는 잠자리 동화를 들려주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잠자리 동화로는 부적절할지도 모르는 조금 슬프고 잔인한 이야기를.

    “그대는 가 본 적이 없어 모르시겠지만 제국 밖은 위험한 곳이랍니다. 남쪽 국경 지대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나오는 울창한 밀림은 마물들로 가득해요. 남쪽에 있던 왕국들, 제후국들은 모두 그 마물들이 멸망시켰지요. 인간들이 세운 나라 중 살아남은 곳은 이그나티보다 북쪽에 위치한 하타림 왕국과 제아난 왕국뿐이에요.”

    “전 몰랐어요. 제국 밖의 지리나 제국 남쪽이 위험하다는 사실은요.”

    “모르실 수밖에요. 평범한 제국민들도 모르는데 더군다나 껍데기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 줄 리 만무하니까요. 제가 하는 일은 남쪽의 마물을 처리하고 국경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일이에요. 결계나 방어막을 쳐도 항상 빈틈이 생겨 피해가 발생하니까요.”

    류드밀라는 집중해서 듣다가 말을 얹으려 한다. 그러나 루슬란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다음으로 한 말이 그녀를 충격에 빠트린다.

    “하지만 그뿐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주로 하는 일은 반란이 일어난 마을을 없애는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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