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여정의 마무리 (15/20)
  • 12. 여정의 마무리

    의미심장한 은빛 신록의 말에 류드밀라는 겁부터 집어먹는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신수를 올려다보자 거대한 사슴은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한다.

    “이번 여정에서 너는 많은 걸 배웠겠지. 그러니 네가 배운 것들을 기억하며 내 질문에 답해 보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빛 신록은 수수께끼를 하나 말한다. 숲의 정령 레쉬가 물었던 것들과 비슷한 분위기여서 류드밀라는 재깍재깍 답한다.

    “이것이 없는 여정은 절대 성공하지 못하지만, 너무 많으면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이것이 무엇이지?”

    “자신감이요.”

    고개를 끄덕인 은빛 신록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가난한 사람은 이게 있단다. 부자들에게는 이게 필요하지. 이것은 너를 만들 수도, 부서뜨릴 수도 있다. 이게 무엇일까?”

    “고난과 역경이요.”

    “하나둘 우리는 천국에서 떨어져 과거의 깊숙한 곳을 헤엄쳐 다니지. 우리의 세상은 절대 뒤집히지 않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마음속에 남는단다. 우리가 무엇인지 알겠니?”

    “꿈과 포부요.”

    신수의 은은한 미소에서 이런 수수께끼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가능성이 반짝 눈을 뜬다. 류드밀라가 계속 불안해하는데 마지막 질문이 던져진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악할 수도 있고 선할 수도 있지. 이들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녀는 놀라서 눈을 천천히 깜박인다.

    “그건, 그건 질문에 답이 없어요.”

    “난 답이 아니라 네 생각을 묻는 것이란다.”

    류드밀라는 두려움에 배 속이 뒤틀린다. 레쉬의 질문처럼 이번에도 쉽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자신이 부끄럽다. 누군가가 그녀의 의견을 묻는 상황이 아직도 낯설어 대답하려면 머리를 쥐어짜야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악함과 선함을 가른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나쁜 생각을 품을 수 있고, 누구나 서로에게 안 좋은 말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악한 행동은 달라요.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것도, 쉽게 무를 수도 없으니 결심과 의지가 필요하죠. 선한 행동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선한 행동들이 모여 선한 사람을 만들고, 악함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는 너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아이야?”

    “대부분의 사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그 경계에 있어요. 저도 그 경계에 있는 것 같아요.”

    계속 망설이다 결국 애매모호한 대답을 내놓은 류드밀라는 신록의 눈치를 살핀다.

    “경계는 아무것도 아니란다. 난 네가 선하다는 걸 확인해야 내 뿔을 줄 거야.”

    “선한 사람은 스스로가 선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전 경계에 있고. 경계에서 끊임없이 선해지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여전히 공포를 다독이며 류드밀라는 용감하게 말을 이어 나간다.

    “제 선함을 확인하는 것은 신수님의 일이지 제 말로 달라질 수는 없어요.”

    마침내 신수의 맑고 지혜로운 눈길이 류드밀라에게서 거둬진다. 시험을 통과했는지는 몰라도 은빛 신록이 저를 시험해 봤다는 사실은 알아 그녀는 초조하게 신수의 다음 행동을 기다린다.

    “참 특이한 아이구나.”

    은빛 신록이 혼잣말처럼 말하며 즐거운 듯 고개를 살짝 흔들 때도 류드밀라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녀의 상태를 알면서도 즐기는 건지 신수는 잠시 침묵하다가, 시간이 또 흐른 후에야 말을 이어 나간다.

    “당연히 내 작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줄 알았단다. 여정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넌 강의 아이에게 모든 걸 의존하고 있었거든. 목숨이면 목숨, 사랑이면 사랑. 심지어는 네 감정조차 혼자 다스리지 못해 달래지길 원하며 우는 일들을 반복했지.”

    제 치부를 들킨 것 같아 류드밀라는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럼에도 정작 그녀는 스스로가 과거와 대단히 달라졌다고 느끼지 않는데, 신수가 그녀에게서 어떤 모습을 보았는지 궁금하다. 물론 루슬란과의 다툼 이후로도 여정을 계속한 것은 큰 발전이 맞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울음도 많고 애정을 그리워하는 여린 마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여정이 끝난 지금은 많이 달라졌구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도 배웠고, 자신감도 생겼어. 타인 말고 스스로를 보살필 줄 알고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할 줄도 알게 되었지. 고생했다.”

    은빛 신록은 류드밀라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콧등으로 훔쳐 내 준다. 그녀는 너무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울음을 멈춰 보려 노력한다. 신수 앞이라는 상황 덕에 울음은 금방 멈추지만 그래도 고생했다는 그 한마디가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남은 눈물을 마저 닦아 내고 다시 고개를 드는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때맞춰 왔구나.”

    누각으로 날아온 신록 두 마리가 우아하게 내려선다. 그들 사이에는 은색 빛무리로 둘러싸인 뿔 한 조각이 마법에 의해 공중에 떠 있다. 신록 둘은 신수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곤 다시 날아가지만 조각은 그대로 류드밀라 뒤쪽에 있다.

    “가져가렴.”

    은빛 신록의 허락이 떨어지자 류드밀라는 조심조심 손을 뻗어 뿔 조각을 쥔다. 차가울 줄 알았는데 뿔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다.

    류드밀라가 의문스러워서 고개를 갸웃하자 은빛 신록은 기민하게 알아채곤 소리 내어 묻지 않은 질문에 대답해 준다.

    “내 신력이란다. 네가 사랑하는 이를 치료해 줄 거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뿔 조각을 품에 소중히 쥐고 나서야 안도감이 밀려오며 류드밀라의 입에서 감사 인사가 절로 나온다. 신수의 시험을 통과한 후에도 잘 믿지 못했는데 이제야 루슬란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난다. 그녀는 옷자락을 조금 찢어 뿔을 감싸서 안주머니에 넣는다. 희미하게 피부로 전해지는 온기가 든든하고 안정감이 든다.

    “바로 돌아가겠다면 널 데려다주마. 산신이 말했을 기한은 아직 남았으니 우리와 좀 더 머물러도 되고. 숲 끝자락에서 네가 데려온 여우가 널 기다리고 있어.”

    “저, 신수님. 외람되지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힘들게 용기 내서 말을 꺼낸 류드밀라는 두 손을 꼭 마주 잡는다.

    “혹시 제가 밤에 루슬란 님의 꿈속에 찾아갈 방법이 있을까요?”

    아크로폴의 절경들,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도 그녀에게는 더욱 아쉬운 마음만을 남겼었다. 루슬란 님과 이걸 봤으면, 함께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힘들었던 시간에 그의 곁을 바랐던 전과는 달리 조금은 의젓해진 생각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의젓해진 마음으로 그에게 먼저 다가가고 싶다.

    루슬란의 꿈속으로 찾아가 그를 만난다면, 이제는 당신을 이해한다고, 그가 왜 그토록 모진 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는 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성물을 구했으니 성역으로 돌아가서 다시 만나자고 하고 싶다. 그렇게 서로를 미워하고 잔인하게 상처 줬어도 다시 사랑함을 고백하고 싶다.

    은빛 신록은 눈을 느리게 깜박인다. 여느 사슴처럼 길고 빽빽한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팔랑여서, 류드밀라로 하여금 다시 루슬란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의 속눈썹도 꼭 저렇게 그림자를 드리우곤-.

    “원한다면 해 줄 수야 있다만 너는 껍데기의 몸 아니냐. 입몽入夢 마법을 쓰게 된다면 몸이 마법에 닿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하겠느냐?”

    “네.”

    류드밀라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힘주어 대꾸한다. 루슬란을 떠올리자 가슴이 시큰거리고 아릿한 것이 새삼 그의 부재가 느껴진다. 그에게 진심을 말하면 이 슬픔도 덜어지지 않을까. 그녀는 다시 사랑받고 싶기보단 루슬란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다. 그가 더 이상 그녀 때문에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는 이제 자유롭고, 그에게서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류드밀라의 보라색 눈에서 그 결심이 엿보였는지 은빛 신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일으킨다.

    “해가 지면 티크혼과 카티아가 길 안내를 해 줄 거란다. 지금은 편히 쉬다가 때가 되면 찾아오렴.”

    신수가 거처로 날아가기가 무섭게 티크혼이 류드밀라에게 조르르 다가온다. 풀로 만든 방석을 물어다 그녀 옆자리를 꿰찬 녀석은 접시마다 음식을 권하기 시작한다.

    “이건 꽃을 넣은 블리니고, 이거는 싱싱한 양배추 샐러드. 여기 절인 오이도 있고 딸기를 넣은 파이도 있고. 이건 해초말이.”

    “해초를 여기서 구할 수 있어?”

    해가 진 후의 시간을 기대하며 멍하니 듣다가 류드밀라가 이상해서 묻는다. 티크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보송보송한 솜털 꼬리를 파르르 흔든다.

    “흥, 제대로 듣고 있지도 않았으면서.”

    “미안해.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나 봐.”

    “그 남자 생각하는 거지?”

    그녀가 고개를 주억이자 티크혼은 콧바람을 흥 뀐다.

    “난 그 사람 마음에 안 들어. 아무리 사과한 다음에 나랑 다른 친구들을 다 풀어 줬어도, 나한테 공격 마법을 썼다고.”

    “루슬란 님께서 네게 사과하셨어?”

    강대한 마법사가 어린 신록에게 사과하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아 류드밀라가 살짝 미소 짓는다. 티크혼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앉은 채로 가슴 털을 뻣뻣하게 세운다.

    “그럼! 아주 미안해하면서 제발 용서해 달라고 빌던데? 내가 이래 뵈어도…….”

    그녀가 아예 웃음을 터트리자 티크혼은 성질을 내더니 날개를 마구 푸드덕거린다.

    “너 좋을 대로 생각해.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그러던데? 그 남자는 별거 아니라고.”

    류드밀라는 한숨을 푹 내쉰다. 웃음기가 사라지며 기분이 약간 가라앉는다.

    “나 때문이야. 나를 구하려다가 흑마법사에게 공격당하셨거든.”

    “아니, 그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강 밖의 영물들은 다 그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힘을 잃은 데다 제 것을 지키지도 못했는데 뭘.”

    그렇게 실컷 다 말하고선 티크혼은 그녀가 자세히 물어보려 하자 말을 아낀다. 씁쓸함과 궁금증이 뒤섞인 채 류드밀라는 결심한다. 밤이 되면, 루슬란에게 모든 것을 다 물어보리라.

    티크혼과 다른 신록들 모두와 한 번씩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흘려보내니 마침내 지하로 들어오던 약간의 햇볕마저 사라진다. 기다렸다는 듯 티크혼은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류드밀라는 엉덩이에 묻은 이끼와 마른 풀을 떼어 내며 티크혼을 따라 카티아에게로 간다.

    카티아의 등 위에 올라타 날아가며 본 밤의 아크로폴은 낮과는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둥지와 동굴, 누각들을 밝히는 도깨비불들이 동동 떠다니고 반딧불이들이 온 곳에 있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발하는 신록의 날개와 뿔들은 마치 천사가 날아다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후의 일들은 긴장과 설렘으로 순식간에 지나간다. 은빛 신록의 거처로 안내받은 류드밀라에게 신수는 입몽 주문을 걸어 준다. 이끼 둥지 안에 누워 잠에 빠져들 때, 그녀가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다.

    ***

    루슬란의 꿈속은 평화롭다. 아마 숲속인 듯한 풍경에 딱 적당한 봄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온다. 류드밀라의 지금 심정이 슬프고 두려워서인지는 몰라도 바람에 실려 오는 새소리는 구슬프게 느껴진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할 말을 정리한다. 그녀가 찾는 이는 눈에 금방 띈다. 밝은색의 로브 자락이 나무 밑에 하늘거리며 펴져 있다.

    나무 밑에서 한 팔을 베고 자고 있는 루슬란의 새하얀 얼굴은 한없이 연약해 보인다. 감긴 눈 끝이 반짝이는 이유가 고여 있는 눈물 때문이란 것을 깨달은 류드밀라의 마음은 난도질당하는 듯하다.

    역설적이게도 그와 함께 그동안 품었던 두려움이 조금은 옅어진다. 루슬란이 그녀에게 했던 모진 말들이 진심이 아니라 연기였고 그가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로 다가온다. 류드밀라는 그에게 다가가 옆에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는다. 수려한 얼굴을 가까이서 보게 되니 준비했던 말들은 다 사라지고 감상적인 생각만이 남는다.

    루슬란의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곁에서 자는 걸 지켜보다 깨어나면 달콤한 말을 속삭여 주고 손길을 먼저 건네던 쪽은 그였는데. 꿈속에 찾아오는 것도 항상 그의 역할이었다.

    부탁할 때를 제외하곤 그에게 먼저 말을 꺼내 본 적도, 나서서 행동한 적도 없던 류드밀라이다. 그랬던 그녀는 이제 그를 깨워 화해의 손을 내밀 생각을 하곤 가슴이 두근거린다. 루슬란이 바랐던 대로 그녀는 놓여났고, 류드밀라가 갈망했던 대로 그녀는 삶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이제는 그를 깨워야 한다. 사람은 석상이 아니기에 일단 그를 깨우고 나면 그녀가 하고 싶은 말만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준비한 말들이 달라질 거란 사실을 안다. 그래도 류드밀라는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두려움은 여전하지만 그건 전과는 다른 감정이다.

    항상 스스로가 상처 받을까 두려워했다. 이제는 그녀도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는 루슬란의 처연하고도 고요한 낯을 가만히 살펴본다. 가지런한 눈썹과 익숙한 듯 낯선 감긴 눈, 높은 콧대와 반듯한 이마. 늘 살짝 올라가 있는 입꼬리는 여전하지만 어딘지 아련한 미소를 품고 있다.

    문득 그의 말이 떠오른다. 그들이 전에 만난 적이 있다 하였지. 그때를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류드밀라는 홀린 듯이 손을 뻗어 고인 눈물을 닦으려 한다. 그녀가 잊은 기억을 오늘은 되찾고 싶다. 루슬란이 숨기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 나눴으면 했다. 이기적이지만 그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그녀의 상처도 치료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손을 거둔다. 화해를 하러 온 것이지 비밀을 캐내러 온 것이 아님을 되새기며 입을 조심스럽게 뗀다.

    “루슬란 님.”

    작게 불렀는데도 그는 움찔하며 꿈속으로 깨어난다. 아직 상처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하지만 놀라서 눈썹이 치켜 올라가 있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향하고 몸을 반쯤 일으킨 그가 감정을 가다듬는다.

    “그대가 왜 제 꿈속에서…….”

    “루슬란 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입몽 마법을 썼어요. 이제는 몸에 마법이 닿아도 상관…….”

    설명을 멈추고 류드밀라는 몸의 떨림을 숨기려 주먹을 꼭 쥔다. 잠든 그를 볼 때와 같이 마음을 잘 갈무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그의 맑은 목소리를 듣고 당황한 표정을 보자 결심한 대로 되지 않는다.

    몸을 한참이나 파들파들 떨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이 습관처럼 달래지길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정황을 짐작하게 된 루슬란은 자세를 고쳐 저도 무릎을 꿇고 바로 앉을 뿐이다. 류드밀라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 눈치챘을 텐데도 달래 주려는 기색은 조금도 없다.

    나는 무엇을 예상했을까. 류드밀라는 제 몸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대체 무엇을 기대했길래 혼자 이토록 실망한 것이지? 나를 위해 내게 모진 말을 할 정도로 마음을 단단히 먹은 분께서, 그저 꿈에 나타났다고 나를 반겨 주길 기대했던 걸까. 나를 위해 사람과 사람의 연을 끊어 낼 각오까지 한 분이, 그렇게 쉽게 바뀌리라 기대했던 나의 잘못이야.

    그런 생각들이 휘몰아칠 때 그녀는 예전처럼 절망에 빠져 있지 않는다. 은빛 신록의 말이 떠오르며 용기가 새로 생긴다. 그녀는 변했다.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루슬란에게 다가가 그의 걱정을 덜어 내고 상처를 덮으면 된다.

    그럼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류드밀라는 자신감과 막연한 희망을 갖고 말을 시작한다.

    “루슬란 님, 저는 여정을 마쳤어요. 은빛 신록의 뿔을 구했으니 이제 돌아갈 거예요.”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그녀의 마음은 그 말에도 루슬란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실망한다. 그래도 류드밀라는 말을 이어 나간다.

    “며칠 전 제 꿈에 찾아와서 하신 말씀이 루슬란 님의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요. 단지 제가 여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하셨을 뿐이라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전 여정을 계속했고 루슬란 님을 위해 성물을 구했어요. 그리고 전 변했어요. 돌아가기 전에 화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꿈속에 찾아온 거예요.”

    아직 할 말은 많이 남았다. 그러나 감정이 벅차올라 계속하기가 힘들다. 그걸 알아챈 것처럼 루슬란이 차분히 목소리를 낸다.

    “고마워요, 나의 껍데기 님. 그대가 저를 위해 겪은 위험과 모든 수고로움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대가 저와 할 것은 화해가 아니랍니다.”

    그의 목소리는 류드밀라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와 비슷하다. 서로 날 선 말을 주고받던 그때가 아닌, 푸른 잔상이 남아 있다가 그가 그녀에게로 몸을 숙였을 때의 목소리. 잘못이 없다고 안심시켜 주던 그 목소리와 닮아 있다.

    “우리는 싸우지 않았어요. 제가 일방적으로 그대를 내쳤을 뿐이니까요. 그러니 제가 용서를 구해야지, 그대는 사과할 필요가 없답니다. 제 사죄가 끝나면 그대의 마음도 조금은 풀리겠지요. 그럼 그대 갈 길을 가셔요. 가고 싶은 곳으로 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셔요. 전에 그대가 말했잖아요, 저와의 연을 끊을 거라고.”

    루슬란은 전혀 원망하는 기색 없이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남아 있는 감정의 응어리를 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제가 말했다시피 그대는 잘못한 것이 없어요. 그러니 자유로운 삶을 누리셔요.”

    “제가 그러기 싫다면요?”

    류드밀라가 참지 못하고 내뱉는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더는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런 그녀의 기운이 벅찬지 루슬란은 고개를 떨군다.

    “연을 끊겠다는 말이 당시에는 진심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저는 달라졌어요. 더 이상 루슬란 님에게 의존하지도 않을 것이고, 루슬란 님의 걱정도 이해가 가요. 하지만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어요. 절대요.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다시, 다시 일상으로 회복된 원래대로의 삶을 원해요, 저는.”

    류드밀라의 정리되지 않은 말들은 절박함을 띠고 쏟아져 나온다. 말하고 나서 그녀도 후회한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렇게 떼 부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전하고 싶었던 진심은 이것보다는 고귀하게 느껴졌었는데. 입 밖에 내놓은 단어들은 너무 초라하다.

    오랫동안 침묵이 흐른 끝에 루슬란이 자그마한 한숨을 폭 내쉬며 숙였던 고개를 든다.

    “달라졌다고 말하면서 예전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 그건…….”

    말문이 막힌 류드밀라는 입을 벌린 채 눈을 멍하니 깜박인다. 결국 이번에 시선을 내리깐 쪽은 그녀이다.

    “잘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지금 그대의 상황은 갑자기 키가 자란 어린아이와도 같으니까요. 스스로는 꽤 힘도 세지고 좋아졌다고 여기는데 주변의 것들에 발이 차이고 팔이 걸릴 거예요. 마찬가지로 마음은 쑥 커 버렸는데 생각이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것뿐이어요.”

    그녀를 탓하거나 채근하는 기색 없이 루슬란은 조곤조곤 설명해 준다.

    “은빛 신록이 그대에게 여정을 거치며 많이 자랐다고 이야기해 줬죠? 그 말에 그대는 안심하고 저를 찾아온 것이고요. 고마워요, 그렇게 용기를 내줘서. 하지만 제 생각은 변하지 않아요. 제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어도, 그래서 더더욱, 그대는 제 곁이 아닐 때 더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거예요.”

    류드밀라는 고개를 획 든다. 답답한 마음에 차라리 제 생각이 그대로 그에게 전달되었으면 한다. 그녀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알면 그도 이런 식으로는 말하지 못할 텐데. 한편으로는 루슬란이 마법사여도 생각을 읽을 수 없어서 다행이다. 그녀가 얼마나 처절하게 그를 원하는지 알면 그는 더 밀어낼 테니 말이다.

    “왜 그러시는 건데요? 마치 제가 루슬란 님 곁에서 보냈던 지난날들이 행복하고 안전한 삶이 아니었던 것처럼. 물론 예전과 똑같은 삶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적어도 저를 이렇게 내치시는 이유는 알고 싶어요.”

    “상황이 달라졌어요, 나의 껍데기 님.”

    루슬란이 슬픈 목소리로 대꾸한다.

    “이제 돌아가면 황제가 그대를 해치려 들 거예요. 껍데기 여인 수배령도 내린 만큼 그대가 황궁을 벗어난 이유를 따지려고 할 거예요. 저는 이그나티 제국에 매인 몸이라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고요.”

    “그래서 전에 그렇게 모진 말로 저를 밀어내셨나요? 그 모진 말도 통하지 않으니 이제 와서 상냥하게 타이르는 건가요? 저를 위한다는 이유로, 상처 주기 싫다는 이유로 또 다른 상처를 후벼 파는 건가요? 정말 이기적이세요, 루슬란 님.”

    예전 같았으면 그런 말을 뱉고 자신에게 실망하여 겁부터 집어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류드밀라는 이를 악물고 한 자 한 자 또렷이 힘주어 말한다.

    “제발 그만두세요. 루슬란 님 때문에 다른 이가 다치는 상황이 싫으면 곁에서 떼어 놓으려고 하지 말고 옆에서 최선을 다해 지키면 되잖아요. 더 큰 상처를 예방한다는 목적으로 작은 상처를 수백 번 내지도 마세요. 아예 상처를 안 받을 수는 없어도 저는 제 상처 하나 돌볼 줄 모르는 아기가 아니에요.”

    이번에는 말이 제대로 나온다. 류드밀라는 울분에 차 쌓아만 뒀던 말들을 마구 토해 낸다.

    “제게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죠? 사랑하는 이를 놓아줄 줄 알아야 한다고. 그런데 제 생각에 루슬란 님은 평생 그런 이유로 놓기만 한 사람 같아요. 붙잡고 있을 때 겪을 고통이 무서워서. 그런데 저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전 나락까지 떨어져서도 루슬란 님을 붙들고 있을 거예요.”

    울음이 터져도 그녀는 마구 흐느끼며 하고 싶은 말은 다 해 버린다.

    “루슬란 님까지 절 붙잡고 있는 건 바라지 않아요. 그러니 도망치려고 하지만 말아 주세요. 제발요. 한 번만 더 그러면 정말, 정말 때려 줄 거니까요.”

    한참을 울다 겨우 이성을 되찾은 그녀는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뭐라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에게 꾸짖듯이 말을 한단 말인가. 자존심이 상해서 그녀를 겁박하고 다시 상처 줄 것을 각오하고 한 말이었다.

    그때 루슬란이 처음으로 다정하게 손을 뻗는다. 내민 손은 마치 허락을 구하듯이 류드밀라에게 닿지 않고 공중에 조심스레 머물러 있다.

    “제가 오만했어요. 평생을 제 생각만이 옳다고 살아오다 그렇게 영원히 살 수도 있었는데. 그대를 만났네요, 제가.”

    루슬란의 손이 가벼이 떨린다. 그럼에도 그는 슬픔 속에서도 미소 짓는다.

    “저를 계속 붙잡고 있어 줘요, 함께 나락으로 떨어져도 저는 행복할 거예요. 저도 그대를 붙잡을게요.”

    류드밀라는 루슬란이 내민 손을 잡는다. 부드럽고 시원한 촉감이 위안을 주는 동시에 안도감에 눈물이 더 나온다. 루슬란은 무너져 내리듯 안겨 오는 그녀에게 품을 내어 준다.

    훌쩍이는 류드밀라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 주며 그는 속삭인다.

    “미안해요, 나의 껍데기 님. 제가 생각이 짧아 그대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군요. 정말 미안해요.”

    루슬란의 사과를 받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녀는 전처럼 그저 괜찮다고 할 수가 없다. 너른 품에 안겨서 그토록 그리던 겨울 향에 파묻혀 있자 그동안의 고생과 두려움과 걱정이 떠올라 차곡차곡 쌓인다.

    “제가, 제가 루슬란 님 때문에 얼마나, 흐윽…….”

    울음이 거세지며 더 말을 잇지 못하는 류드밀라를 토닥이며 그는 그녀가 감정을 다 쏟아 내게 도와준다.

    “그래요, 저 때문에 많이 힘드셨지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대를 그렇게 밀어내고 외면하면 안 되었던 건데.”

    “흑, 당연히 그럼 안 되었죠! 전 너무 걱정되어서, 그런데 아무 것도 못 하니까 정말로…….”

    목 놓아 울며 그녀는 루슬란에게 매달린다. 새로 힘이 붙은 팔이 아파 올 정도로 꼭 껴안는다. 그래도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 즈음에는 몸에서 힘이 풀려 그에게 기댄다. 그러고 엉망이 된 얼굴에서 눈물을 훔쳐 주는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는다. 혹시라도 피부가 상할까 소매로 톡톡 두드리는 몸짓이 조심스럽다.

    “미안해요. 제가 정말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대가 틀린 걸 틀리다고 말을 해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제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정말 헤어질 생각이셨나요?”

    무서운 질문이지만 류드밀라는 물을 수밖에 없다. 그 질문에 루슬란은 소매 대신에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건드린다. 어딘지 모르게 애달픈 동작이라 그녀는 그의 손을 찾아 쥔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고백한다.

    “네, 그럴 생각이었어요.”

    “영원히요? 다시는 안 볼 결심을 하셨었나요?”

    루슬란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고 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든다.

    “아니요. 아마 그럴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대는 내게 너무도 소중한 연이라, 아마 제가 저지른 일을 후회하며 다시 찾아갔을 것 같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절 내치려 하셨어요…….”

    한숨을 쉬며 류드밀라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본다. 원망하는 말인 줄 알고 루슬란이 당황하여 서둘러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싼다. 그러나 그가 말을 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제가 붙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녀가 제 뺨을 쥔 손을 다시 내려서 모아 잡는다. 그렇게 루슬란의 길고 가는 두 손을 붙들고 조심조심 만진다.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해 그는 안심하곤 살짝 미소 지으며 류드밀라의 이마에 입맞춤을 남긴다.

    “붙잡아 줘서 고마워요.”

    스스로도, 남이 보기에도 많이 달라졌다고 인정하는 류드밀라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애정 표현을 받으니 수줍어서 말도 잘 나오지 않는다. 그를 설득시킬 때에는 스스럼없이 말을 했는데 입맞춤 한 번에 머리가 달콤하게도 아찔해진다. 어차피 빨개진 얼굴을 못 보겠지만 숨고 싶은 마음에 그녀는 루슬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 버린다.

    그러고 나서 작게 웅얼거리는데 때마침 바람에 흘러온 새소리에 묻혀 버린다.

    “다시 말해 주셔요.”

    고개를 겨우 든 류드밀라가 부끄러워하면서도 티 없이 맑은 미소를 루슬란에게 보인다.

    “사랑해요, 루슬란 님.”

    말해 놓고 무언가 벅차오르는 기분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다. 조금은 어지럽고 조금은 들뜬 단어들이다. 그에게 처음 하는 말은 아니다. 이제야 온전히 그 의미를 알게 된 것 같아 새로운 느낌이 들 뿐이다.

    “저도 사랑해요.”

    그도 따스한 어조로 같은 말을 돌려준다. 아마 루슬란이 아는 그 말의 의미는 그녀가 깨달은 것과 다를 것이다. 류드밀라는 그래서, 그 말이 더욱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다르게 알고 있어도 같은 말을 하며 다른 부분을 맞춰 나가는 과정이니 말이다.

    이 다툼이 그들 사이에서 마지막일 거란 순진한 생각을 더는 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는 먼저 손을 내미는 법을 배웠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될 것이다. 이런 진지한 생각들에 파묻혀 있는데 루슬란이 그녀를 꿈속으로 다시 불러낸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시나요?”

    “먼저 손을 내미는 법을 배웠다는 생각이요.”

    어찌 보면 엉뚱하기도 한 대꾸지만 그는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대는 항상 제가 감탄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식으로 내면이 성장하지는 못하는데, 인간들은 늘 발전을 이뤄 내곤 하더군요.”

    이상한 말에 의문을 갖던 류드밀라가 조금 더듬거린다.

    “루슬란 님께서는 전에… 인간과 비슷한 존재라고 하셨죠?”

    “그랬었죠, 네.”

    “그래서인지 가끔은 멀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루슬란이 픽 웃는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그들이 다퉜을 때의 기억이 갑작스레 떠오르며 그녀는 움찔 놀란다. 잔인하게 그녀를 짓밟으려 비웃던 웃음이 겹쳐 보여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류드밀라의 표정이 굳어지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미소를 거둔다.

    “제가 무얼 잘못했나요?”

    “그저, 그냥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어요.”

    솔직하게 털어놓은 그녀는 루슬란의 안색을 살핀다. 그는 착잡해 보인다. 시선을 조용히 떨구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들 사이에 남은 나쁜 기억이 행복해야 할 순간마저 더럽히는 것이 싫어, 류드밀라는 그를 끌어안고 안심시킨다.

    “괜찮아요. 항상 좋은 기억만 갖고 살 수는 없잖아요. 행복한 날들도 시간이 흐르면 슬프고 아련해지듯, 기억은 반대로도 변할 수 있어요. 지금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이따금 욱신거려도, 게다가 흉터도 지겠지만 나중에는 나아질 거예요.”

    루슬란의 은빛 눈에 눈물이 차오른 것을 오해한 그녀는 더 힘주어 덧붙인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흉터를 보며 그땐 그랬지, 이렇게 웃을 수도 있을걸요.”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지만 류드밀라가 닦아 내자 눈 밑에 얼룩을 남긴다. 그녀의 손길을 고맙게 받던 그는 고개를 기울여 이마를 마주 댄다.

    “그대가 말해 주는 단어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소중해서, 귓가에 계속 아른거려요. 제가 걱정할 뻔했는데 이리도 속 깊게 위로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녀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아름다운 말에 류드밀라는 얼굴이 다시 한번 붉어진다.

    “루슬란 님께서 먼저 그러셨잖아요. 제가 겁먹고 주저할 때, 제게 용기를 주셨잖아요.”

    “그래도요, 그대가 이리 달라진 게 얼마나 제게 큰 선물인지 그대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감사해요, 루슬란 님.”

    이마를 떼고 그의 품에 나른하게 기댄 그녀는 순간이 주는 행복에 영원히 몸을 내맡기고 싶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번에는 루슬란의 고운 결을 가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든다.

    “혹시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전까지는 숲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지금은 산신님의 성역에 돌아와 있어요. 그대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이번에도 역시나 다퉜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가 말꼬리를 흐린다. 류드밀라는 자연스럽게 넘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면 제가 성역으로 돌아갈게요. 기다려 주세요, 금방 뿔로 치료해 드릴 테니까요.”

    “꿈 밖에서 기다릴게요, 나의 껍데기 님.”

    늘 기다리겠다는 말을 듣다 직접 하니까 기분이 묘하다. 루슬란은 좋은 변화라고 여기며 꿈에서 깨어나고 류드밀라도 잠으로 빠져든다.

    ***

    류드밀라는 푹 자고 이끼 둥지 안에서 깨어난다. 잠들 때와 달리 곁에 아무도 없어 그녀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 그러다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퍼뜩 차린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온몸에 붙은 이끼 조각들을 떼어 내며 밖으로 나와 본다. 거대한 동굴 입구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보니 지하 도시 아크로폴에는 어느새 아침이 찾아와 있다. 때맞춰 은빛 신록이 날아들어 온다.

    “잘 해결했느냐?”

    “네, 덕분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류드밀라를 인자하게 바라보던 신수가 뒤에 따르는 신록들에게 눈짓한다.

    “이제 껍데기 아이가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숲의 입구에서 여우를 데리고 성역까지 바래다주렴.”

    다가온 신록은 낯이 익은 걸로 보아 티크혼의 어머니, 카티아이다. 류드밀라가 또 인사를 하는데 신수를 뒤따르던 신록들 무리에서 티크혼이 불쑥 튀어나와 솜털 꼬리를 흔든다.

    “여우는 몸집이 작으니 제가 태우고 갈게요!”

    “그러려면 여우가 생쥐로 둔갑해야 될 텐데 말이다.”

    카티아가 말하자 주변 신록들이 키득거린다. 은빛 신록마저도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티크혼은 부루퉁해져서 발을 굴러 댄다.

    “여우가 말처럼 크지 않은 이상 제가 태울 수 있다니까요!”

    “어떡하니, 지금 그 여우는 말의 모습을 하고 있을걸?”

    엄마의 놀림을 계속 받자 티크혼은 완전히 토라져서 류드밀라에게 다가온다.

    “차라리 내가 널 태우고 갈게. 다른 신록들은 필요 없어!”

    그녀는 당황해서 어린 신록을 토닥이며 다른 신록들의 눈치를 살핀다.

    “네가 여우를 태울 수 있게 해 줄 테니 고집 부리지 말렴. 내가 아크로폴 입구까지는 배웅해 주마.”

    은빛 신록의 중재로 상황은 일단락되지만 티크혼은 신수가 같이 미소 지은 것이 못내 화가 난 듯 콧방귀를 흥 뀐다.

    “혹시 모르지, 아이야. 성역까지 간다면 산신님이 널 조금은 머무르게 해 줄 수도 있을 거란다.”

    신수가 너그러이 티크혼을 다독일 동안 카티아가 류드밀라 옆으로 걸어와 앉는다.

    “올라타렴. 저번처럼 그렇게 황송해하지 말고. 내가 다 부끄럽잖니.”

    장난기가 여전한 그녀의 등에 조심스레 올라탄 류드밀라는 날씬한 목덜미를 꼭 감싸 안는다. 품 안에 느껴지는, 신수가 준 뿔의 감촉이 불편하면서도 그 온기에 마음이 놓인다. 마침내, 마침내 루슬란을 정말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동굴 입구의 가장자리까지 걸어간 은빛 신록, 카티아, 티크혼 그리고 다른 신록들은 모두 날개를 퍼덕여 공중에 몸을 띄운다. 바로 아래에 펼쳐진 아찔한 풍경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훌쩍 날아올라 깨어나는 지하 도시를 한 바퀴 돈다. 다른 신록들도 배웅을 위해 모여들고 다 함께 지상으로 향해 날아가는 동안은 꿈같은 시간이 흘러간다.

    약간의 두려움과 불확실함을 품고 온 아크로폴을 류드밀라는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떠난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입구 바로 앞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은빛 신록의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

    류드밀라를 태우고 아크로폴 밖으로 나간 카티아와 티크혼은 나무들 위로 날아오른다. 숲 위의 풍경이 펼쳐지자 그녀는 넋을 잃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물론 아직도 발밑을 볼 때면 머리가 아찔하고 배 속이 울렁거리긴 하지만 두려움이 잊힐 정도로 숲은 아름답다.

    지하에 있어 몰랐는데, 밤사이 내린 눈이 잎을 다 떨군 가지를 장식하고 있다. 류드밀라가 설경을 구경하는 동안 순식간에 숲의 가장자리까지 날아간 신록들은 리사를 곧장 찾아낸다. 주변에 들킬 사람이 없어 여우의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던 리사의 주변에는 안장과 마구가 늘어져 있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꼬리로 몸을 덮은 여우 주변에는 눈으로 덮인 작은 둔덕들도 있다.

    “리사 님!”

    기척에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든 여우를 향해 류드밀라가 달려간다. 카티아의 등에서 내려올 때 발을 잘못 디뎠는지 발목이 욱신거려 오지만 무시하고 당황해하는 리사를 꼭 껴안는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여우는 그녀를 조금 밀어낸다. 그렇게 적절한 거리가 유지되자 잔뜩 들뜬 류드밀라에게 새침한 질문을 던진다.

    “살아 있었네요. 그래서 성물은 구했어요?”

    “네, 신수님께서 주셨답니다.”

    리사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어 의아하게 여기는데, 그제야 류드밀라는 주변에 솟은 작은 둔덕들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소복이 쌓인 눈으로 덮여 있어 전까진 몰랐을 뿐, 형제단의 시체가 그들 주변에 흩어져 있다.

    신록들이 그들을 죽여 숲 가장자리에 버리고 왔다고 했었지.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 광경을 직접 보는 것은 달라 그녀는 비틀거리다 주저앉는다. 아까 접질린 발목에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한다.

    “아, 아…….”

    카티아와 티크혼이 다가와 그녀의 시야를 몸으로 가려 준다. 그럼에도 충격을 받은 류드밀라는 벌벌 떨며 말을 잇지 못한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함께 간 인간들은 죽어서 돌아왔는데, 그 시체를 가져온 사슴 녀석들은 물어도 별다른 말도 안 해 주고!”

    류드밀라와 달리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이는 리사가 분통을 터트린다. 얼마나 춥고 힘들고 배고팠는지, 그리고 정말 답답했다고 여우가 한참 성을 낼 동안에도 류드밀라는 아무 말도 못 한다.

    “이봐요, 말 좀 해 보라니까요? 게다가 산신님께서 주신 증표는 잃어버렸잖아요. 생각이 있는 건지…….”

    “입 좀 다물지 그러니, 여우야. 아이가 힘들어하잖니.”

    카티아가 싸늘하게 한마디 하자 리사는 안 그래도 큰 눈을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뜨고 신록을 노려본다.

    “사슴 네가 뭘 알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정말!”

    “우리는 널 디흐타우 산으로 데려다주려고 온 건데, 계속 그러면 네 발로 직접 가야 될 거란다.”

    주먹을 꼭 쥔 여우가 발을 쾅 구른다.

    “사슴의 도움 따윈 필요 없어! 기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나 혼자 가고 말지!”

    “리사 님, 죄송해요…….”

    겨우 입을 연 류드밀라가 티크혼의 도움을 받아 일어선다. 자디라와 여우들이 싸웠을 때가 다시 떠올라 리사가 여우로 돌아가 신록들에게 덤빌까 겁이 난다. 그때처럼 그녀가 소리라도 지르고 울어야 이 긴장된 분위기가 깨질까 싶다. 그녀는 고민 끝에 조심조심 단어를 입 밖으로 낸다.

    “기다리고 걱정하게 만들어서 정말 죄송해요. 저를 이곳까지 데려다준 것도 정말 감사한 일인데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죄송해요.”

    단순한 말에 풀릴 만한 성격이 아닌 여우는 그래도 사슴에게서 류드밀라로 눈길을 돌린다.

    “신록이 데려다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가 부탁이 있어요. 펜자 마을을 지나가며 자디라 님과 레사 님께 제 소식을 전해 줄 수 있나요? 그분들이 걱정하고 있을 것 같아서요.”

    리사가 신록을 타고 가도록 설득하긴 힘들 것 같아 류드밀라가 내놓은 방안이다. 이렇게 말하면 리사가 신록을 타지 않을 이유도 생기고 그 이유가 류드밀라의 부탁이니 자존심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여우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 흔쾌한 동작은 아니지만 고비는 넘긴 것 같아 류드밀라는 속으로 한숨을 쉰다. 아직도 형제단의 시체를 본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리사와 신록의 다툼마저 말리고 나니 진이 쪽 빠진다.

    “그래요, 그렇게 할게요.”

    도도하게 고개를 까닥한 리사가 여우로 둔갑한다. 꼬리를 살랑거리다가 마을로 난 길을 따라 민첩하게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카티아가 류드밀라의 어깨를 건드린다.

    “우리도 출발해야지.”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무얼 하게?”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카티아에게 상황을 설명한다. 신록의 못마땅한 표정을 보니 겁이 덜컥 났지만 이게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결국 카티아는 티크혼을 불러 숲으로 돌려보내고 시체들 곁으로 다가간다.

    “내가 구덩이를 만들 테니 네가 시체를 안으로 넣으렴. 난 저놈들에게 털끝 하나도 닿기 싫어.”

    “네, 감사해요.”

    류드밀라의 안색이 밝아지는 걸 본 카티아는 꼬리를 몇 번 튕기다 발굽을 구른다. 그럴 때마다 마법으로 땅이 울리며 시체들 곁에 깊은 구덩이가 생겨난다. 겨울이어서 딱딱하게 굳은 흙을 류드밀라가 파려 했으면 몇 시간, 아니 하루도 넘게 걸렸을 것이다. 그녀는 카티아에게 감사한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신록들을 지하 도시로 몰아넣은 인간의 장례를 돕게 하는 일이, 어쩌면 시체를 내버려 두고 가는 일보다 더 옳지 않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류드밀라는 언젠가 신록과 인간이 화해하길 바란다. 신록들도 자유롭게 숲 밖에 나와 살고 인간들도 질병과 착취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그 순진하고도 어리석은, 그럼에도 소중히 품은 소망을 알기에 카티아는 마지못해 그녀를 돕는다. 마법 능력도 가지지 못한 작은 인간일 뿐인 저 여인이 품은 생각들이 신록에게는 신기하기만 하다. 마법으로 구덩이를 다 만들고 카티아가 류드밀라를 말없이 돌아본다.

    이제 시체를 구덩이로 밀어 넣어야 한다. 류드밀라는 손에 닿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촉감을 무시하려고 노력하며 시체를 하나하나 구덩이 안으로 떨어뜨린다. 키르, 마트베이, 이반.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겪은 슬픔을 기억해야 했다. 그녀에게는 그들의 가족까지 도울 능력이 없어 닥쳐올 불행을 막지 못하겠지만. 둔탁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씁쓸함을 삼킨다.

    “봉분은 만들지 않을 거야. 그럴 가치가 없는 자들이니까.”

    “그래도 묻는 걸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파리하게 질린 채 힘없이 대꾸하는 류드밀라가 안쓰러워 카티아는 곁에 다가가 손을 씻겨 준다. 마법으로 불러낸 물은 얼지도 않고 그녀의 손에 닿았다가 땅을 적신다. 단호한 말투와 다르게 배려가 담긴 행동에 그녀는 다시금 이 신록이 좋아진다.

    때맞춰 그들이 있는 곳으로 도착한 티크혼의 입에는 산하엽 세 송이가 물려 있다. 류드밀라가 달려가 꽃을 받아 들자 어린 신록은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는다.

    “신수님께서 밟으셨던 자리를 찾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게다가 꽃이 얼어서 그대로 있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다 말라서 바스러졌을 거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깨끗이 씻은 손으로 꽃들을 새로 흙이 드러난 곳에 하나씩 놓은 류드밀라는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짧았지만 그녀의 여정을 함께해 준 이들에게 마지막 인사와 함께 고마움을 전한다. 각자의 절망과 울분이 섞인 이유로 신록의 뿔을 찾았던 절박한 이들은 그래도 어딘가에서 편히 쉬고 있을 거라고 그녀는 믿고 싶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이반, 마트베이, 그리고 키르. 편히 쉬세요 이제.’

    묵념을 마친 류드밀라는 여전히 슬픔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그들의 남겨진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 걱정되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더 답답할 뿐이다. 축 늘어진 기분으로 카티아 등 위에 올라 공중을 나는데 신록이 한마디를 한다.

    “원래 그런 거란다, 아이야.”

    “네?”

    바람 소리 때문에 목소리가 흘러가 류드밀라는 되묻는다. 카티아는 날개를 퍼덕이며 숨이 차지도 않는지 편안하게 설명해 준다.

    “원래 다 그런 거라고.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삶이 원래 그래. 저 사냥꾼들의 남겨진 가족을 걱정하고 있었지?”

    “네…. 어떻게 아셨어요?”

    바람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류드밀라가 또 묻는다. 목숨을 온전히 이 신록에게 내맡기고 있는 상황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하다. 바람은 살갗을 할퀴고 찬 공기가 폐를 찌르는데, 말을 탈 때처럼 힘들지 않다. 이것도 마법일까. 문득 딴생각을 하다가 서둘러 그녀는 카티아의 말에 귀 기울인다.

    “제정신인 사람이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겠니. 욕심에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신록의 뿔을 찾으려고 오는 저런 사냥꾼들은 다 각자의 사연이 있고 슬픔이 있어. 그 사연을 너는 알고 있겠지?”

    “네, 저분들이 이야기해 줬어요.”

    “나는 궁금하지 않으니 전하진 말렴. 네가 느끼는 연민은 이해한다만, 저들은 잘못된 길을 택했어. 그래서 목숨을 잃었을 뿐이란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들이 불쌍한 건 당연한 일이지. 아프고, 병들고, 쫓기는 이들. 네가 해결할 수 없으면 잊어버리는 게 최선이란다.”

    류드밀라는 목 안쪽에서 뭔가가 울컥, 하고 솟아올라 힘들게 침을 삼킨다. 눈물이 조금씩 나오는데 바람 때문에 눈이 아려서 그런지 정말 슬퍼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지만 제가 바꿀 수 없다고 해서 잊으면 안 되지 않을까요. 뭐라도 조금씩 노력해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네가 그런 이들을 하나씩 돕는다고 쳐도 인간들의 제국에서 비극은 언제나 존재할 거야. 하물며 신이 다스리는 산에서도 산사태가 일어나고 바다에서도 화산이 폭발해 생명들이 죽는데.”

    카티아가 옆에서 날던 티크혼을 흘긋 본다.

    “남겨진 생명들은 그저 자기 차례가 오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슬픔은 잊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단다.”

    “루슬란 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류드밀라가 불쑥 말한다. 카티아가 음, 하며 궁금증을 표시하자 서둘러 말을 고쳐 덧붙인다.

    “강의 아이님이요. 그분은 제국에 매인 몸이라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노력하셨다고요. 껍데기 여인들을 살려 주고 신록들도 풀어 주셨잖아요. 저도 그렇게라도 뭔가를 하고 싶어요.”

    카티아는 그녀의 말을 비웃지도 그냥 넘기지도 않는다. 다만 차분히 회의감을 표시해 류드밀라를 불안하고 슬프게 만든다.

    “그래서 그 강의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렴. 인간에 대한 연민이, 제 생명들을 지키려던 발버둥과 충돌하여 그가 어떻게 추락했는지 보렴. 삶은 그런 거야. 남을 오랫동안 지켜보다 보면 제 발도 진창에 빠져 있다는 걸 잊게 되지.”

    류드밀라는 키르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다. 루슬란의 꿈에 찾아갔을 때 그녀의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의문을 해결하는 일이 더 이상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가 짐작하는 상황과 루슬란의 과거가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다.

    무엇보다 그의 과거가 어떻든 그녀는 루슬란을 사랑할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들어 류드밀라는 카티아의 말에 대신 상처 받지 않는다.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모르지만 그래도 저는 루슬란 님을 믿어요. 그분께서 옳은 일을 하셨다고, 항상 바른 길을 찾아낼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그분처럼 노력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지 다른 뜻은 없어요.”

    “네 믿음은 맑고 진실되었지만 순진하기도 한 것이란다. 그걸 명심하고, 더는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카티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조용히 날아간다. 류드밀라는 그들이 한 대화를 곱씹으며 발아래 펼쳐지는 풍경을 지켜본다. 가끔씩 티크혼이 걸어 오는 장난에 맞춰 함께 놀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어딘가 익숙한 들판 위를 지나면서 류드밀라는 문득 폴레보이가 생각난다.

    류드밀라가 어린 요정에게 머리카락을 주자 답례로 풀 반지를 선물했던 들판의 요정. 그랬던 시간들이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그때는 칼로 제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도 겁내할 만큼 여린 그녀였는데. 지금도 그 여린 성정은 그대로지만 내면은 성장한 채로 같은 길을 날아가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다.

    정말 은빛 신록의 말처럼 그녀가 성장했는지는 아직 잘 모를 일이다. 적어도 류드밀라 자신은 그렇게 느낀다. 여러 복잡한 고민과 루슬란에 대한 걱정, 자디라에 대한 걱정, 그리고 다른 모두들에 대한 걱정에 파묻혀 있으니 시간은 금방 흐른다.

    멀리서 보이던 높은 디흐타우 산이 점점 가까워져 온다. 우뚝 솟은 산 주변의 숲을 지나며 레쉬도 기억나 류드밀라는 살포시 추억에 젓는다. 두렵고 긴장되었던 순간인데 지금 기억 속에서 수레가 빠진 일과 수수께끼 시험은 아련한 빛을 띤다.

    “산에서는 이동 마법이 통하지 않아서, 걸어가야 할 거예요.”

    다시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친 류드밀라가 걱정스레 알린다.

    “우리가 나는 것은 이동 마법이 아니란다. 아까 빨리 나는 마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산 정상까지 문제없이 날아갈 수 있을 거야.”

    그녀를 안심시킨 카티아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고도를 천천히 낮춘다. 뒤늦게 산에 사는 요괴들을 생각해 낸 류드밀라가 새로운 걱정을 할 동안 신록은 우아하게 바위 옆에 내려앉는다. 날개를 요란스레 파닥거리면서 착륙한 티크혼이 신나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요괴들을 볼 수 있는 거야?”

    “내려가 보다가 요괴들한테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하렴.”

    카티아가 바위로 다가서며 말을 툭 던지자 어린 신록은 활기차게 뛰어오르며 콧방귀를 뀐다.

    “요괴 따위 뭐가 무섭다고. 나한테 다 덤벼 보라 그래.”

    류드밀라는 뭐라 대꾸해 줘야 할지 모른다. 철없음에 놀라 지켜보고 있는데 카티아가 눈짓을 하며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마주칠 일이 없으니까 저러는 거란다. 바로 성역으로 들어갈 걸 알고.”

    “엄마, 내 욕 했지!”

    조금 떨어져 있던 티크혼이 서둘러 달려와서 칭얼거린다. 카티아는 대답하지 않고 바위 앞에 다가선다. 저번에 왔을 때 루슬란이 성역을 연 기억이 나 류드밀라는 그녀 옆에서 기다린다.

    신록의 뿔이 바위에 닿자 저번처럼 표면이 일렁이며 성역으로 들어서는 입구로 변한다. 두 번째로 보아도 그 광경이 신기하기만 해 류드밀라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는다. 반면 티크혼은 어느새 그녀를 지나쳐 한참 앞서 달려 나간다.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어린 신록의 뒤를 따라가며 그녀는 익숙한 풍경을 둘러본다.

    싱그러운 풀 내음이 번지는 들판이 펼쳐진 언덕들과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오두막과 이국적인 정자. 그녀가 루살카들과 장난을 쳤던 시내까지. 모든 것이 류드밀라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날아오는 내내 소중히 쥐고 있던 신록의 뿔 조각은 여전히 따스한 기운을 내며 품속에 있다. 그 온기가 설레는 가슴을 조금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가 싶더니, 오두막 문을 열고 나온 하얀 형체가 눈에 띄자 그것도 다 소용없어진다.

    산신이 뒤따라 나오는 건 류드밀라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끌리고 전보다 어쩌면 조금 수척해져 있는 남자가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달리기 시작한다. 앞서가던 티크혼도 지나쳐, 팔을 벌려 품을 내어준 루슬란에게로 안긴다.

    “나의 껍데기 님.”

    그가 나지막이 속삭이며 조심스레 그녀를 껴안는다. 류드밀라는 목이 메어 말을 못 하는 대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세게 그를 껴안는다. 다시는 놓을 수 없을 만큼 꼭 안고서 울음을 터트린다.

    “못 뵌 사이에 힘이 많이 강해지셨군요.”

    루슬란이 웃음기를 약간 담아 말을 건넨다. 그러고도 엉엉 우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몇 마디를 더 해 주지만 류드밀라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 놓치고 만다. 그를 마침내 보면 아무 걱정 없이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울음이 왜 먼저 나오는지 스스로도 의문이다.

    “울음 뚝 그치시고 저를 봐 주세요. 제가 곁에 있잖아요. 더는 울지 마셔요, 응?”

    부드럽게 속삭이는 말들이 다시 귓가에 맴돈다. 곁에 있다는 말에 울음이 더 심하게 나와 품을 파고들다 류드밀라는 딱딱한 것에 찔려 몸을 서둘러 뗀다. 은빛 신록의 뿔 조각이 품에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그녀를 껴안는 순간부터 내내 그것에 찔렸을 텐데, 아무 말도 없었던 루슬란에게 고마워 그녀는 좀 더 훌쩍거린다.

    겨우 울음을 그치고 심한 딸꾹질도 마법으로 해결한 후에, 그녀는 뿔 조각을 꺼내 루슬란에게 건넨다. 손가락으로 더듬어 무엇인지 확인한 그가 미소를 입가에 띤다.

    “이건 산신님께 드려야죠. 제가 저 자신에게 정화 마법을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네요.”

    그녀가 머쓱해하며 산신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다정한 손길이 턱을 잡고 돌린다. 마주한 루슬란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고운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전보다 야위었는지 조금 꺼진 뺨도 그렇게 퇴폐적일 수가 없다. 전보다 날카로워진 광대뼈 선을 눈으로 좇다 보니 그가 입술을 느리게 휜다.

    “오랫동안 못 보다 만났는데, 제 품에 안겨 울기만 하면 어떡하나요. 전 그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데.”

    류드밀라는 당황하여 아무 말도 못한다. 꿈속에서 봤을 때보다 더 숨이 가빠 오고 심장이 마구 두근거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다. 루슬란의 손은 이제 그녀의 목덜미에 닿아 있어, 그 불규칙한 호흡을 그대로 느낀다.

    “고마워요, 나의 껍데기 님. 그리고 사랑해요.”

    마지막 단어는 그녀도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속삭여 준다. 입을 먼저 맞춰 와서 그렇다. 입술이 맞닿기 직전까지 말하느라, 어쩔 수 없이 보기 좋게 둥그런 귓가를 간질이게 된 것이다.

    눈을 감고 말캉한 혀와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에 정신을 내맡긴다. 뒷목을 받쳐 주는 손길에 몸을 웅크리고 자고 싶다. 한편으로는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그 손길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애가 단 류드밀라가 그에게 몸을 기대는데 천방지축 말썽꾸러기가 따로 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둘이 뽀뽀한대요, 뽀뽀한대요!”

    류드밀라는 얼굴이 확 붉어져 정신을 차리고 몸을 뗀다. 주변을 뛰어다니던 티크혼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그녀의 다리에 몸을 비빈다. 루슬란의 기운에 약간 겁을 먹었는지 그쪽으로는 가지 못하면서 류드밀라만 실컷 괴롭힌다. 그러다 카티아가 부르자 어린 신록은 둘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내버려 두고 훌쩍 가 버린다.

    “저, 음….”

    “산신님께 가도록 할까요? 아마 오두막에 다시 들어가 계실 거예요.”

    루슬란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안하자 류드밀라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소리 내어 대답한다.

    “네, 좋아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정자로 이끌며 그녀는 그제야 배시시 웃는다. 뒤늦게 찾아온 행복감에 몸이 공중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기분이다. 절로 류드밀라의 걸음이 빨라져 불편할 법도 한데 루슬란은 듣기 좋은 웃음소리로 그녀를 더 즐겁게 해 준다.

    “그렇게 좋으신가요, 아이처럼 뛸 정도로요?”

    “아이처럼 뛰진 않았어요. 그럼 루슬란 님은 기쁘지 않으세요?”

    “물론 저도 기쁘죠.”

    간단하지만 진심을 담아 대꾸한 그가 그녀의 손을 고쳐 잡는다. 반대로 잡아 그녀가 앞에서 이끌기 편하게 해 준다. 그 세심한 배려에 저도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에 류드밀라는 보조를 늦춘다. 루슬란의 눈도 나으면 이제 함께 들판을 뛰어다닐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황당한 상상도 하며 그녀는 오두막에 도착한다.

    오두막은 바뀐 것 없이 그대로이다. 노인의 모습을 한 산신이 문가까지 나오자 류드밀라는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진 서툰 절을 선보인다.

    “그동안 평안하셨나요?”

    “네가 그토록 위하는 강의 아이 덕에 평안할 날이 없었지. 너를 걱정하느라 나까지 고생시키기 일쑤였단다.”

    그녀는 놀라 루슬란을 올려다본다.

    “정말 그러셨나요?”

    말없이 멋쩍은 듯 싱긋 웃은 그를 보니 사실인 듯하여 류드밀라는 산신에게 대신 사과한다. 괜찮다고, 농이었다고 손을 휘저은 산신은 그녀에게서 성물을 받아 들더니 오두막 안쪽으로 향한다. 저주를 풀 고약을 만들러 간 거라고 설명을 들은 류드밀라는 고개를 갸웃한다.

    “얼마나 걸릴까요?”

    “아마 반나절 정도 걸릴 거예요. 그동안 여독을 푸셔요.”

    루슬란에게서 그 말을 듣자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며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쉰다. 길고 긴 여정이 드디어 끝났다. 루슬란의 손에 이끌려 욕조로 들어가 씻는 동안 그녀는 피로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신록의 숲에서 피로는 다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카티아를 타고 오면서 저도 모르게 긴장한 모양이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니 황홀하다. 온몸이 노곤노곤해지며 근육이 흐물거리는 느낌이다. 루슬란은 같이 들어가는 대신 옆에서 씻겨 주고 향유를 듬뿍 써 가며 머리를 감겨 준다. 마법이 풀려 원래 색으로 돌아온 엉킨 은발에서 이끼와 나뭇잎과 먼지들을 다 씻어 내고 바람을 불러와 말리니 한결 가벼워진 느낌마저 든다.

    “감사해요.”

    욕조에 기대 비몽사몽간에 류드밀라가 웅얼거린다. 루슬란이 앞을 보지 못하는 채로 씻기는 바람에 욕실은 난장판이 되어 버렸지만 새 옷을 주러 온 사슴은 죄송해하는 그녀에게 괜찮다는 듯 웃어 준다.

    사슴이 준 편한 원피스로 갈아입고 그녀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인다. 이번만큼은 루슬란도 침대에서 그녀를 내버려 둬 류드밀라는 깊은 잠에 빠져든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나자 밖은 어두워져 있다. 약간 서늘한 기운이 올라와 이불을 찾아 더듬거리는데 루슬란이 손을 잡아 깍지를 껴 온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에 비친 얼굴은 다정하면서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루슬란은 깍지 낀 손을 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춰 온다.

    “나의 껍데기 님, 몸이 추우시면 제가 덥혀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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