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1. 형제단-(2) (14/20)
  • 11. 형제단-(2)

    류드밀라는 뺨을 핥는 까슬까슬하고 따뜻한 혀의 감촉에 눈을 뜬다. 바로 시야에 들어온 것이 어린 신록의 얼굴이라 그녀는 놀라서 몸을 움츠린다.

    “겁먹지 마. 나야, 티크혼.”

    여전히 조금은 몽롱한 상태로 있던 그녀는 그 말에 잠이 확 달아난다. 과연 어린 신록이 낯이 익다. 루슬란이 황궁의 신록들을 풀어 준 이후로 만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뜻밖의 재회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티크혼!”

    류드밀라가 몸을 일으켜 앉자 티크혼은 조금 물러나서 신나하며 날개를 퍼덕거린다.

    “정말 상처가 감쪽같이 없어졌네. 금방 깨어나서 다행이야.”

    그녀는 이상하게 가뿐한 몸을 조심스레 가누며 일어서서 티크혼을 돌아본다.

    “상처…?”

    “그래, 상처. 너 그 나쁜 인간이 쏜 총에 맞았잖아.”

    그러고 보니 키르가 은빛 신록을 가로막고 있던 그녀를 향해 총을 쐈었다. 몸에 맞아서 끔찍하게 아팠다가 기절했었는데. 상처가 다 나았구나. 류드밀라는 여전히 꿈을 꾸는 듯한 멍한 상태로 주위를 둘러본다.

    “티크혼, 키르랑 형제단은 어디 있어?”

    “다른 신록들이 쫓아가 죽였어. 다른 인간들에게 보일 본보기로 시체는 숲 밖에 버려둘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말을 한 티크혼은 류드밀라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워하며 다가온다.

    “안색이 창백한데, 상처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거 아냐?”

    마음이 복잡해진 그녀는 그저 고개를 가로젓는다. 키르와 형제단은 신록을 죽이려 했으니 그렇게 된 것은 어쩌면 정의롭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신록들 입장에서는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여정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하기 위해 그녀의 돈을 강제로 빼앗았다. 심지어 신록의 뿔을 얻기 위해 그녀에게 총을 쏘기까지 했다.

    분명 나쁜 사람들인데. 하지만 그들이 나쁘다고 탓할 수만은 없는 이유를 그녀는 안다. 그들의 사연을 알기에 가슴이 아프다. 이반의 아내는, 마트베이의 벌금은, 키르의 남편은 어떻게 될까. 어쩔 수 없이 나빠진 사람들이 살아남으려고,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발버둥 치다 나쁜 일을 딱 한 번 저질렀을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힘든 일을 겪었다 해도 나쁘게 되지는 않잖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누구의 돈도 빼앗지 않고, 누구를 죽이지도 않으면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어.

    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류드밀라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한 가지 두려움이 자리 잡는다.

    내가 과연 그 상황에 놓였더라도 이반, 마트베이, 키르 같은 선택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다. 자유를 억압당하긴 했지만 황궁에서 비교적 안전하고 풍요롭게 살아온 그녀에게 그들의 양심을 평가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런 질문과 두려움보다도 더 크게 다가온 것은 바로 전에 앞에서 살아 숨 쉬던 이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쉽게 스러져 간 목숨이 그녀는 안타깝다. 그들이 살아생전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상관없이 말이다.

    결국 눈물을 떨구는 류드밀라를 티크혼은 의아하고 걱정스럽게 지켜본다.

    “그 인간들 때문에 우는 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린 신록은 잠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기다란 목을 구부렸다가 편다. 하지만 류드밀라가 계속 울고만 있자 주춤주춤 다가가 코끝으로 눈물을 닦아 준다.

    “죽어도 싼 사람들이었어. 그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분명 골칫거리가 되었을 거야.”

    “세상에 죽어도 싼 사람은 없어. 다른 생명들도 마찬가지고.”

    그녀는 울먹이면서 겨우 말하곤 티크혼을 끌어안는다. 신록의 날개가 어깨 위로 덮이는 느낌이 포근해서 류드밀라는 아예 목 놓아 운다. 그녀가 그들을 설득시켰다면 결말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증표를 잃어버리지만 않았어도. 스스로를 탓하고 또 탓하다 깎여 나간 자존감이 위태로워지자 다시 채워 내길 급급해하면서 그녀는 엉엉 운다.

    괴로워하면서 풀어놓는 그녀의 넋두리를 티크혼은 의젓하게 모두 들어 준다. 류드밀라의 울음이 한참 후에야 겨우 잦아들자 어린 신록은 그제야 냉소적인 태도를 되찾는다.

    “넌 너무 순진해. 껍데기로 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네 성정이 원래 그런지 몰라도. 그런 태도는 앞으로 살아갈 때 조금도 도움 되지 않을걸.”

    이렇게 많이 운 것이 창피해진 그녀는 꽉 잠긴 목소리로 대꾸한다.

    “어쩔 수 없어. 이게 내 원래 모습이야.”

    그리고 루슬란 님은 이런 내 모습까지 사랑해 주셨는걸.

    딱 이 생각이 들었을 때 류드밀라는 티크혼의 말뜻을 깨닫는다. 그런 식으로 순진한 생각만 하다간 한 주체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루슬란에게 휘둘리며 그의 예쁘장한 인형처럼 살아갈 게 틀림없다.

    루슬란은 둘의 사이가 틀어지는 일을 감수하고도 그녀에게 그 사실을 깨닫게 해 줬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평생 누리지 못했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법이란 사실을.

    류드밀라가 상념에 빠져 있는데 티크혼이 그녀를 몸으로 툭 건드린다.

    “그 사람들이 죽은 건 걱정하면서 네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안 궁금해?”

    “그러게. 내 상처를 누가 치료해 주셨어? 그리고 신록들이 왜 나를 살려 뒀어?”

    “네가 이시도라의 목숨을 구했잖아. 용감하게 총까지 막아서면서까지!”

    무슨 영웅담을 들려주듯 티크혼이 뛰어오르며 신나게 설명한다. 이시도라가 그녀 앞에 나타난 신록인가 보다, 류드밀라는 겨우 내용을 쫓아간다.

    “너는 사랑을 하고 있는 순수한 여인이어서 숲에 들어올 수 있었어. 숲은 너를 그냥 통과시켜 주기에 신수님 말고는 아무도 네가 왔다는 사실을 몰랐어. 그런데 네가 산신의 증표를 떨구고 우리가 알게 된 거야.”

    아마 은빛 신록이 신수님이겠지. 이야기를 따라잡으려 노력하면서 그녀는 귀 기울여 듣는다.

    “그래서 너를 데려오려고 이시도라를 보냈는데, 하필이면 나쁜 인간들도 있었던 거지. 결과적으론 이시도라의 목숨을 네가 구한 거야. 그래서 신수님도 네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널 돕기로 결정한 거고.”

    류드밀라는 혹시라도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 마법을 쓴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루슬란은 그녀가 강한 아이를 낳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껍데기인 몸을 지키고 싶다. 황궁에 돌아갈 일을 대비해 말이다.

    “혹시 내 상처를 치료하는 데 마법을 썼어?”

    티크혼이 그러게,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뒤에서 온화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온다.

    “내가 신력을 사용하여 네 상처를 치료했단다.”

    류드밀라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고 거대한 은빛 신록을 발견한다. 그녀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백색에 가까운 은빛 몸에 아름다운 날개가 달려 있는 사슴이다. 갈라진 황금색 발굽은 땅을 스치듯 부드럽게 움직이고 물에 닿으면 투명해지는 꽃인 산하엽이 걸음마다 피어난다. 은빛 신록이 가까이 다가오자 새까만 눈동자에 그녀의 얼굴이 비친다.

    그녀는 경외심을 삼키며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힌다.

    “상처를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수님. 신수님이 아니었으면 전 죽었을 거예요.”

    신력을 사용하니 황금 뱀처럼 신수일 터. 티크혼의 말에서 나온 짐작으로 붙인 호칭이었지만 그래도 은빛 신록의 표정을 보니 제대로 말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조금 가까이 다가와 류드밀라를 요모조모 뜯어보던 은빛 신록은 나지막한 흠 소리를 낸다.

    “피로도 함께 풀린 걸 보니 신력을 유난히 잘 받아들이는 몸이구나. 시장하지 않느냐?”

    그 질문이 던져지기 무섭게 류드밀라는 배가 몹시도 고픔을 깨닫고 얼굴을 화악 붉힌다. 그녀의 얼굴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여겼는지 은빛 신록은 뒤따르던 신록 한 무리를 돌아본다.

    “카티아, 이 아이를 태워 주렴. 아크로폴(아크로폴리스)로 돌아가겠다.”

    무리에서 나온 호리호리한 신록이 류드밀라 앞에 배를 깔고 앉는다. 그녀가 황송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자 티크혼을 닮은 장난기가 암사슴의 따스한 얼굴에 서린다.

    “올라타렴, 껍데기 아이야. 우릴 기다리게 하지 마.”

    “네, 실례할게요.”

    류드밀라가 날개에 발이 걸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올라가 앉자 카티아는 가뿐히 다리를 펴고 일어선다. 티크혼이 응석을 부리며 그녀의 다리에 몸을 비비는 것에서, 자연스레 둘의 관계를 짐작한 류드밀라는 신기하기만 하다. 그렇게 헤어지고 난 후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어느새 티크혼의 어머니까지 만나게 된 것이다.

    오늘 그녀에게 일어날 신기할 일이 그것으론 부족한지 무리의 선두에 선 은빛 신록이 고개를 가벼이 흔든다. 가지가 여러 갈래로 뻗은 화려한 뿔에서 은빛 눈송이 같은 것이 나와 커다랗게 소용돌이치다 어떤 공간으로 향하는 입구를 만든다. 그동안 류드밀라가 봐 왔던 입구들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바닥에 생긴다.

    은빛 신록은 그 입구로 우아하게 뛰어내리고 다른 신록들로 망설임 없이 그녀를 따른다. 카티아가 뛰어내렸을 때 류드밀라는 배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작은 비명을 지르며 신록의 목을 꼭 끌어안는다.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신록들보다 더 그녀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눈앞에 펼쳐진 아크로폴의 전경이다.

    굳이 비교할 곳이 있다면 동화책에 가끔 나오던 난쟁이들의 지하 광산이었지만, 신록들의 지하 마을은 그곳과는 차원이 다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툭 튀어나온 둥지와 반대로 움푹 들어간 깊은 동굴들이 자리 잡았고 천장에서 자란 덩굴에 대롱대롱 매달린 튼튼한 누각들도 있다.

    아득할 만큼 먼 아래에는 맑은 지하수가 흐르는 데다 바닥에서 높이 솟은 암벽들에 빼곡히 온갖 과실나무와 화초가 자라고 있으니, 그야말로 절경이다. 게다가 그들 말고도 날아다니는 신록들이 아래에 조그맣게 보여 눈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그녀가 신록을 타고 날고 있다는 사실 또한 경이롭기 그지없다.

    류드밀라가 절로 조그마한 탄성을 내지르는데 티크혼이 옆에 바싹 붙어 조잘조잘 떠들어 댄다.

    “원래 우리는 숲의 나무에 둥지를 짓고 살았어. 근데 인간들이 순수한 여인을 이용해 자꾸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사냥했지. 다 큰 신록들이야 도망치면 되었지만 알이랑 어린 새끼들을 훔쳐 가는 거야. 그래서 보다 못한 신수님이 이렇게 지하로 거처를 옮기셨어.”

    “그렇구나. 정말 멋진 것 같아.”

    류드밀라는 잔뜩 들떠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바빠 건성으로 대답한다.

    “아니, 별로야. 지하에서 마시는 물은 시냇물보다 못한 데다 신수님은 과실나무를 위한 햇빛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시거든.”

    그녀가 말이 없자 티크혼은 구시렁대더니 속도를 높여 앞질러 간다. 류드밀라는 그의 부재를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아크로폴의 경치에 푹 빠져든다.

    은빛 신록이 이끄는 신록 무리는 곧 제일 크고 화려한 누각에 도착한다. 무려 굵은 덩굴 5개와 어림잡아 100개는 넘어 보이는 가는 덩굴이 지탱하는 그 누각에는 잔칫상이 마련되어 있다.

    류드밀라는 낮고 긴 탁자에 의자 대신 풀잎을 엮은 방석으로 이루어진 식사 자리로 안내받는다. 요정 나라에 초대받은 동화 속 소녀가 된 기분으로 그녀는 은빛 신록 옆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온통 채소와 과일과 곡물로 이루어진 잔칫상에 눈이 절로 휘둥그레진다.

    주린 배를 붙들고 다른 신록들이 먹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은빛 신록 신수가 별안간 눈을 맞춰 온다.

    “많은 것이 궁금할 텐데, 그 전에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느냐?”

    “네, 물론이에요. 생명의 은혜를 입었는데 당연히…….”

    편하게 몸을 늘어뜨리고 다른 신록들에게는 먹으라 고갯짓한 은빛 신록이 다시 그녀를 유심히 지켜본다.

    “내 뿔을 원해서 여기까지 나를 찾아왔을 테지. 그러니 내가 물을 수밖에 없구나. 성물을 가져가면 네가 사랑하는 이는 치료할 수 있겠지만 대신 대답해야 할 질문이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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