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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형제단-(1) (13/20)
  • 11. 형제단-(1)

    류드밀라는 방금 본 것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루슬란의 옷깃을 붙잡는다. 묻고 싶다. 어찌하여 그녀를 환영으로 속이며 뒤에서 한없이 절망스러운 얼굴로 울고 있었는지. 그녀가 무얼 놓치고 있는지. 그러나 그의 냉정한 얼굴을 보자 숨이 턱 막히며 말이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차가운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손을 떼어 내는 손길은 조심스럽고 얼핏 다정하기까지 하다. 전에 알던 루슬란의 행동이 떠오르며 류드밀라는 울음을 터트린다. 눈물을 떨구느라 시선을 내리는데 그가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볍게 떨리는 주먹이 안쓰러워 쥐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 순간, 루슬란이 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인다.

    “이것 하나만 알아 두셔요. 그대는 잘못한 것이 없어요, 나의 껍데기 님…….”

    류드밀라는 당황하고 슬퍼 울음 사이사이로 가쁜 숨을 내쉰다. 여전히 굳어 있는 그의 환영 아래로 원래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아까는 그리 차갑게 대했으면서 왜 이런 말로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루슬란을 이해할 수가 없다. 비수가 되어 꽂혔던 그의 말들과 지금의 이런 말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여전히 그녀에게서 등 돌리고 싶지 않은 듯 루슬란은 마주 앉은 그대로 모습이 흐려진다. 혼란스러움 사이로 류드밀라는 잠에서 깨어난다.

    여관의 불편하고 까슬까슬한 침대에 몸을 말고 그녀는 울기 시작한다. 오만 가지 생각과 의심이 거센 해일처럼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대체 왜, 왜 그러셨나요…….”

    겨우 멈춘 울음 끝에 류드밀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녀는 누운 채로 루슬란이 왜 그랬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다 깨달음은 어느 순간에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생각이 여정을 그만둬야 되겠다는 쪽으로 흘러갔을 때였다.

    뱃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는 기분이다. 그는 그녀가 한 반항 때문에 거리를 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꿈에 찾아왔을 때부터 루슬란은 그녀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의 무심함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결과를 그가 의도했다면? 그녀로 하여금 그를 포기해서 여정까지 그만두게 만들 목적이었다면? 어쩌면 루슬란은 괜찮다는 그의 말이 통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가 직접 싫다는 말을 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루슬란은 그녀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이리 냉랭하게 변한 것이 아니었다. 류드밀라를 냉랭하게 대해 그녀가 그 사실을 깨닫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가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그는 사랑하는 이를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실천했을 뿐이다.

    손에 뺨을 담았을 때 느껴지던 물기가, 흔들리던 파란 잔상이 아프게 가슴을 후벼 판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그런 원망도 든다.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전에 루슬란이 그녀에게 들려줬던 말이 생각나며 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늘 그녀에게 상처를 줄까 걱정했었다. 그리고 그 걱정보다 더 큰 두려움도 존재했다. 류드밀라가 그 때문에 옥죄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고 루슬란이 전에 말했었다. 전에도 그가 품던 생명들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그 기억 때문에 그녀를 옭아매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이리 저를 놓아주시면…. 정말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허망하게 속삭이던 그녀의 귀에 익숙한 까치 울음이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기 전, 구출대를 따라 성역으로 돌아가라고 루슬란이 말했었다.

    류드밀라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간다. 자디라가 보냈던 새보다 조금 더 통통한 까치가 창턱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그녀가 다가가자 새가 재잘재잘 말을 늘어놓는다.

    “밖에 너를 위한 구출대가 기다리고 있어. 형제단 몰래 창문에서 뛰어내려서 빨리 가자.”

    그녀는 얕은 숨을 내뱉고는 힘주어 말한다.

    “난 여정을 계속할 거야.”

    새는 그 말에 작게 투덜거린다.

    “분명 여정을 그만둘 결심을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튼, 그럼 구출대한테 그냥 돌아가라고 말해?”

    “그래 줘.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 정말 죄송스럽지만 난 성물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순간 이동 마법으로 온 거니까 죄송해하지 않아도 되긴 한데, 위험하지 않겠어?”

    까치가 마지막으로 묻는 듯싶어 류드밀라는 새를 안심시키기로 마음먹는다.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아. 형제단이 숲으로 데려다준댔으니까 약속을 지키겠지. 그리고 리사도 내 곁에 있을 거잖아.”

    “그래 그럼.”

    여전히 걱정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한 새가 날아간 후에 류드밀라는 침대로 돌아가 풀썩 주저앉는다. 충동적으로 내린 선택이었지만, 후회되진 않는다. 그녀의 추리가 완벽하게 맞으리란 보장도, 그에게서 받은 상처가 나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여정을 계속하기로 마음먹는다.

    단순히 루슬란이 다친 이유가 그녀 때문이어서는 아니다. 그와 함께한 소중한 나날들이 그저 날 선 말 한마디에 무너져 내리게 할 수는 없다는 어떤 결심 때문이다.

    난 은빛 신록의 뿔을 찾아 산신의 성역으로 돌아갈 거야. 가서 루슬란 님을 치료하고 예전의 행복한 삶을 되찾고 말 거야. 난 해낼 거야.

    속으로 다짐하던 류드밀라에게 불현듯 루슬란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들을 따라 산신님의 성역으로 돌아가요. 가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사셔요, 나는 그곳에 없을 테니.”

    그는 성역에 없을 거라고 했다. 도끼질을 하면 한동안은 버티다가 서서히 쓰러지는 거대한 나무처럼 그녀의 다짐도 위태롭게 변한다. 그래도 뿔을 구한 후에 산신님께 그가 있는 곳을 찾아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류드밀라는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켜 본다.

    그러나 두려움은 커지고 커져 그녀의 마음을 예민하게 만들고 안 좋은 기억을 불러낸다. 루슬란이 예전의 그녀처럼 절망감에 스스로 숨을 끊으려 하면 어쩌지? 그녀가 곁에 없는 사이에, 그녀가 그를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그러면 어쩌지?

    류드밀라는 주먹을 꼭 쥐고 벌떡 일어선다. 궁지에 몰린 사슴이 사자를 뿔로 찌르듯이 공포는 그녀로 하여금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녀가 문을 벌컥 열자 밖에 앉아 있던 이반이 서둘러 일어선다. 그가 방문을 막아서자 류드밀라는 험악한 표정에 잔뜩 움츠러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말이 제대로 나온다.

    “도망가려는 게 아니에요. 지금 당장 출발하고 싶어서요.”

    남자는 여전히 문을 막아선 채 툴툴거린다.

    “필요한 물품도 아직 다 못 구했고 지금은 저녁이라 너무 위험해. 단장이 올 때까지 기다려.”

    “위험해도 상관없어요. 물건 구하는 데 반나절이나 걸리지 않잖아요. 단장님께 출발하자고 부탁드려 주세요.”

    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본다. 류드밀라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고 생각보다 눈길을 견디기 쉽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루슬란의 위압감이 서린 시선도 받아 본 그녀인데, 이반의 흐릿한 파란색 눈에는 그와 같은 기운이 없다.

    “그 틈에 도망가려는 건 아니겠지, 꼬마 아가씨?”

    “아니에요.”

    힘주어 대꾸한 그녀는 이반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선다.

    “돈도 없는데 어딜 가겠어요. 정 의심스러우면 같이 가서 말씀드려요.”

    남자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다가온 그녀를 피해 한 발짝 물러섰지만 날카로운 어조는 그대로이다.

    “내가 네 말대로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지? 출발을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면, 그때는 어쩔 건데?”

    “제가 전에 거친 마을에서 신록의 숲으로 가는 사람들이 더 있었어요.”

    류드밀라는 거짓말을 불쑥 뱉어 내고 놀라서 잠시 몸이 굳어진다. 더듬거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그녀는 거짓에다 진실을 보탠다.

    “그 사람들이 제 동료를 공격해서 거의 죽을 뻔했어요. 그 사람들이 여기까지 오면 어떡하나, 그게 걱정되어서 빨리 출발하자는 거예요.”

    이반이 허리를 숙이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녀를 보다가 다시 몸을 편다.

    “좋아. 같이 가서 단장에게 말해 보지.”

    남자를 따라간 다른 여관방 모닥불 가에서 형제단의 단장 키르는 뭔가를 손질하고 있다. 길쭉한 막대기에 철로 된 원통이 달린 복잡해 보이는 물건에서 류드밀라는 눈길을 뗀다. 무기처럼 보이는 것과 한곳에 있다는 사실이 불안하고 무섭다.

    “단장, 꼬마 아가씨가 할 말이 있다네요.”

    키르가 고개를 들고 류드밀라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여전히 험악한 인상에도 용기를 겨우 내서 입을 열려는데 이반의 목소리에 묻혀 버린다.

    “순진해 빠진 아가씨가 의도가 뻔히 보이는 거짓말도 하고, 나름 절박한가 봐요.”

    남자의 말에 키르가 피식 웃으며 대꾸한다.

    “그럼 들어 봐야지.”

    거짓말인 걸 알았구나. 혼란스럽고 두려운 마음에 그녀는 첫 시작부터 말을 더듬는다.

    “아, 저,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러니까 하려던 말은…….”

    “이봐 이쁜이 아가씨, 그렇게 횡설수설할 거면 괜히 내 시간 뺏지 말고 돌아가는 게 어때?”

    다시 무기를 손질하며 돌아온 무심한 대답에 류드밀라는 옷자락을 꼭 붙들고 심호흡을 한다. 루슬란과 오랜 시간을 보내서 그렇지, 이렇게 의견이 무시당하는 일은 마녀들 아래서 살 때 많이 겪어 봤다. 이 사람들은 그들과는 달라. 자꾸 그 사실을 되새겨야지 안 그러면 주저앉을 것만 같다.

    “지금 출발했으면 좋겠어요.”

    “왜?”

    류드밀라는 루슬란을 생각한다. 꿈에서 마주했던 모습 말고, 그보다 전에 아름답고 다정했던 모습을 떠올린다. 그녀의 말에 휘어지던 입꼬리와 나른하게 뜬 은빛 눈과 그녀가 가끔씩 어루만지던 송곳니. 루슬란 님을 위해서야. 그녀는 옷자락을 놓고 손을 단정히 모은다.

    “저를 쫓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도 신록의 숲으로 향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지만, 저를 죽이려 하는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울음이 나오려 한다. 입술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눈물을 간신히 삼키며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말한다.

    “이렇게 기다리다간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지도 몰라요.”

    모닥불에서 장작이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함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는다. 어느새 떨궈진 고개를 들자 키르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류드밀라가 계속 눈길을 유지하자 그는 흠, 소리를 내더니 일어서서 무기를 벽에 기대 놓는다. 그러고는 구석에 있던 테이블에 딸린 의자 두 개를 끌고 온다.

    “앉아. 너도, 어서.”

    “하지만 지금 출발해야…….”

    “오늘 저녁에는 벨고로드 주변에 늑대 인간 경보가 떴다. 어차피 못 가는 거, 물어볼 게 있어.”

    이반이 냉큼 의자에 앉고 류드밀라는 마지못해 엉덩이를 살짝만 걸쳐 둔다. 그걸 눈치챈 단장이 안주머니에서 파이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다 툴툴댄다.

    “그렇게 불편하게 앉으면 나중에 다리가 저릴걸. 이쁜이 아가씨가 거짓말도 할 줄 아는 데다 고집까지 센 줄은 몰랐군.”

    “거짓말은 정말 어쩔 수 없어서, 그래서 한 거였어요!”

    마녀들이 가끔 피우던 파이프 담배가 냄새가 지독한 걸 알아 몸을 뒤로 빼며 류드밀라가 항의한다. 그럴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목소리를 약간 높이자 키르가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살면서 누구나 하는 거짓말 갖고 그리 유난 떨 필요 없어.”

    “물어보고 싶으시다는 게 뭔가요?”

    류드밀라는 주제를 돌리고 단장은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냥 평범한 것들. 이름, 어디서 왔는지, 뭘 하다 왔는지 그런 거.”

    탁해 보였던 갈색 눈이 순간 밝게 번뜩인다.

    “그리고 왜 신록의 뿔을 구하려 하는지도.”

    그녀는 움찔하며 의자 가장자리를 붙든다.

    “저, 저는 신록의 뿔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숲에 가야 해요…….”

    옆쪽에서 이반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류드밀라는 또 거짓말이 들켰음을 알아차리곤 몸을 움츠린다. 키르는 전혀 친절해 보이지 않는 미소를 입가에 삐죽 올린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이쁜이 아가씨, 그 숲에 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밤마다 신록들이 인간의 피로 물든 뿔을 치켜들고 돌아다니는 데다 주변은 유령거미와 늑대 인간으로 가득하니 말이다. 신록의 뿔을 구하려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그 주위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그녀가 뭐라 항변해 보기도 전에 키르가 의자를 끌어다 그녀 앞으로 다가와 연기를 얼굴에 내뿜는다.

    “그리고 숲에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거다? 그것만큼 확실한 단서가 없지. 너도 만병통치약이라는 신록의 뿔을 찾으려는 거 아니냐.”

    류드밀라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단장은 좀 더 대답하기 쉬운 질문을 한다.

    “이름이 뭐지?”

    “……마야요.”

    얼떨결에 옛날 옛적 같은 방을 쓰던 껍데기의 이름을 말한 그녀는 이번에도 단장의 표정을 살핀다. 키르는 재밌다는 눈치를 하고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뭘 하다 왔지?”

    산신과 이런 질문에 대해 대비를 했지만 막상 거짓말을 또 하려니까 마음이 조급해지고 불안에 가슴이 조이는 것 같다.

    “그냥,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었어요.”

    “어디서 왔지?”

    “너무 작은 마을이어서 이름을 모르실 거예요.”

    그 대목에서 키르가 코웃음을 친다.

    “작은 마을에서 왔다기엔 고상한 수도 억양을 쓰고, 농부가 입기에는 너무 질 좋은 옷에 그렇게 큰돈을 갖고 다니는 아가씨가, 이제는 아예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군.”

    류드밀라는 아까와는 다르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몸을 살짝 떤다. 이렇게 쉽게 들통날 거짓말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고 싶지만 진실을 말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들킬 걸 알면서도 거짓말만 하는 자신이 너무 악하게 느껴지는 데다 서러워서 울음이 터질 것만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운다면 더 얕보일 것이니 울음만은 꾹 참고 그녀는 단장을 애써 쏘아본다.

    “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자꾸 하니까 그랬을 뿐이에요.”

    “내가 한 건 평범한 질문들이야. 내가 아가씨한테서 뭘 보는지, 그 사실을 갖고 뭘 할 수 있는지 알면 거짓말은 못 할 텐데.”

    류드밀라가 그 말을 협박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린다. 겨우 느긋한 위협을 알아차린 그녀는 의자 위에서 습관처럼 몸을 웅크리고 시선을 맞추기를 거부한다. 두려워서 차마 그럴 수가 없다.

    “무, 무엇을 보는데요?”

    “머리카락에 걸려 있는 마법. 보통 마법이 아니라 아주 강한 마법이지. 보통 사람은 알아볼 수도 없게 구성해 놓은.”

    그녀는 놀라서 고개를 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그저 아주아주 작아져서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 사실을 갖고 뭘 하실 건데요?”

    “머리카락에 마법을 걸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흔하지 않아. 정말 강한 마녀라면 미용 목적으로 그럴 수는 있어도. 하지만 넌 정말 강한 마녀가 아니잖아. 그럼 합리적인 추론을 해 보자고. 머리카락에 다른 이의 마법을 걸어서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절 그냥 내버려 두시면 안 될까요?”

    키르는 류드밀라의 힘없는 애원을 무시한다.

    “은색 머리카락을 숨기고 돌아다니는 껍데기가 있을 수 있지. 마침 황궁에서 껍데기 여인 하나가 없어졌다고 찾고 있더구나. 딱 네 또래의.”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마트베이가 들어온다. 류드밀라가 마침내 고개를 드는데 그가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댄다. 굵은 눈물방울이 류드밀라의 눈에서 솟아나 순식간에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녀가 계속 몸을 떠는 바람에 마트베이는 베이게 하지 않으려고 칼을 조금 멀리 한다.

    키르는 의자를 돌려 앉은 다음 등받이에 턱을 괸다.

    “네 머리카락에 마법을 걸어 준 사람이 누구지?”

    류드밀라는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되는 대로 마구 말을 쏟아 낸다.

    “제게 왜 이러시는 건가요? 절 그냥 보내 주세요, 돈은 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숲도 혼자서 찾아갈게요. 그러니까 제발…….”

    “난 구해야 되는 사람들이 있어.”

    울음은 계속되지만 몸의 떨림은 멈춘다. 다시 한번 자디라의 그 말이 떠오르며 류드밀라는 감았던 눈을 뜬다.

    “이반은 소작농이야. 소작료를 내지 못하니까 이반 대신 아내가 끌려갔어. 마트베이는 사냥꾼이야. 애들이 굶어서 영주의 사유지에서 사냥을 하다가 걸렸어. 귀족들에게도 버거운 만큼 큰 금액의 벌금을 내지 못하면 노예가 될 거야. 신록의 뿔을 팔면 다 해결될 일들이지.”

    키르의 어투는 담담하지만 류드밀라는 그 안에 담긴 절망과 분노를 대신 느낀다.

    “신록의 뿔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네 머리카락에 마법을 걸어 준 자라면 틀림없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겠지. 그 사람한테 네 목숨을 담보로 우리를 도와주게 해.”

    “당신은 왜 마트베이와 이반을 돕는 건데요?”

    속삭임에 가까운 물음이다. 심장이 욱신거려 더 큰 소리를 내지 못한다. 키르는 알아듣고 천천히 숨을 내쉰다.

    “나는 마법 능력을 많이 갖고 태어났어. 날 황궁으로 데려가려는 사람들을 평생 동안 피해 살다가, 이번에 들켰지. 남편이 심하게 다쳤어. 내 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신록의 뿔이나 아주 강한 마법사만이 그 상처를 치료할 수 있어.”

    류드밀라는 그 와중에도 이상한 단어를 발견하고 얼굴을 찡그린다.

    “남편이요?”

    키르가 작은 웃음을 내뱉는다.

    “난 여자야. 목에 상처가 나서 목소리가 걸걸하고, 싸울 때 유리하려고 머리를 잘랐어.”

    류드밀라는 겨우 정신을 차리곤 목을 가다듬는다. 안타깝지만 그들의 희망을 저버릴 수밖에 없다.

    “제 머리카락에 마법을 건 사람은 인간이 아니고 당신들을 죽일 거예요. 당신들을 도울 수 있고 그만큼 자비로운 사람은 많이 아파요. 그래서 제가 은빛 신록의 뿔을 찾으러 가는 거예요.”

    키르는 한참 동안 그녀를 응시한다. 그러곤 손짓 한 번으로 마트베이의 칼을 치우게 한다.

    “이쁜이 아가씨가 오랜만에 진실을 말했는데, 별로 달갑지 않은 진실이군.”

    어느새 마르기 시작한 눈물을 닦으며 류드밀라가 단장을 흘끔 본다.

    “이, 이제 절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내가 약속했잖아. 널 신록의 숲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겠다고. 형제단은 그 말을 지킬 거다.”

    “당신은 여자인데 왜 형제단이에요?”

    이번에는 키르뿐 아니라 이반과 마트베이도 함께 웃고 류드밀라는 움찔하며 놀란다.

    “내가 우리를 형제단이라고 소개한 사람들은 다 내가 남자인 줄 알거든. 조그만 머리에 질문만 차 있나 보군. 오늘은 푹 자 둬, 이쁜이 아가씨. 아침이면 늑대 인간들이 사라질 테니 그때 출발하자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다시 앉는다. 이반이 간식거리를 가져오겠다며 나가는데 류드밀라는 정작 나가지 않자 키르가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 그게 오늘 밤은 혼자 있기가 좀 무서워서요…….”

    나가려던 이반까지 자칭 형제단 셋이 크게 웃어 대자 그녀는 제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깨닫고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정말 무서워서, 무서워서 그런 것이었어요.”

    “늑대 인간 때문에 겁을 단단히 먹은 모양인데 이쁜이 아가씨, 그것들은 마을 안으로 못 들어와. 그래도 정 무서우면 우리랑 떠들다 자자고.”

    “좋아요…….”

    여전히 화도 나고 창피해하며 말꼬리를 흐린 류드밀라는 의자 위에서 책상다리를 한다. 이반이 아래층에서 간식거리를 가져오는 동안 그녀는 키르에게 이것저것 물어본다.

    “제 돈으로는 당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나요?”

    “턱없이 부족해. 큰돈이지만 내 남편을 치료하지 못할뿐더러 마트베이의 벌금보다 작은 액수거든.”

    “이반은 그럼 제 돈만 갖고 돌아갈 수 있지 않나요?”

    키르는 재밌어하면서 마트베이를 돌아본다.

    “거짓말만 못할 뿐 이기적인 아가씨였잖아?”

    “아, 아니 그게 당신들이 함께 여행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요. 형제단이란 게 뭔지도 잘 모르겠고, 오히려 경쟁할 수도 있는데 서로 돕는 게 잘 이해가 안 갔어요.”

    류드밀라의 속뜻은, 그들이 악한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서로 다투는 것이 맞는데 왜 돕냐는 뜻이다. 그렇게 물어서라도 여전히 자디라의 말을 이해해 보려 노력한다.

    “돕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같은 목표로 향하고 있는데 서로 도와서 목표로 가는 길이 좀 더 수월해진다면, 돕고 살아야지. 게다가 우리는 같은 마을 사람이야. 정말 너야말로 모를 조그맣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마을이지. 그런 마을일수록 유대감이 돈독해. 이웃끼리는 도와야 한다고 배우면서 자랐다고.”

    “어떤 마을인지 궁금해요.”

    그녀는 이웃끼리 도와야 한다는 말에 매력을 느낀다. 황궁의 껍데기들 사이에서는 그런 유대감이 없었다. 껍데기 마을에서 잠깐 느껴 보았을 뿐, 사랑이 아닌 우정으로 행하는 일들이 그녀에게는 생소했다. 키르는 어깨를 으쓱하곤 허리를 펴며 기지개를 켰다.

    “남동쪽에, 해안선과 맞닿은 곳이야. 말라 버린 강이 예전에 바다와 만났던 곳이지.”

    “말라 버린 강이요?”

    류드밀라가 놀라서 묻자 단장은 고개를 주억인다.

    “그래. 말라 버린 강. 상류에 댐을 쌓으면서 바다로 향하는 물길이 정말 죽었어. 여기에 관련된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 보겠어?”

    “무서운 이야기는 싫어요.”

    이반이 간식 바구니를 들고 돌아온다. 류드밀라는 소젖, 나머지 형제단은 맥주를 마시고 함께 빵을 먹으며 잠시 말이 없다. 그러다 키르가 류드밀라의 반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강을 마을 사람들은 쳐르나야 강이라 불렀다. 검은 강이란 뜻으로.

    “예전에는 분명 다른, 조금 더 강다운 이름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 강이 검다는 이름을 갖게 된 것에는 사연이 있어.”

    키르의 이야기는 초반부터 무서운 흡입력을 가지고 류드밀라를 끌어들인다. 무서워서 듣고 싶지 않았지만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

    “무슨 사연인데요?”

    그녀가 참지 못하고 이렇게 묻자 키르는 기다리라는 듯 눈을 찌푸려 보인다.

    “들어 봐. 그 강의 상류의 댐은 처음 지어진 댐이 아니야. 맨 처음 지었던 댐은 무너졌거든. 듣기론 그 첫 번째 댐이 물길을 막아 강이 병들었대. 상류에서는 비만 오면 홍수가 나고, 하류는 점점 메말라 가고. 갇힌 물에는 녹조가 끼고 병이 들어 강은 썩어 갔지.”

    류드밀라는 숨 쉬는 것도 거의 잊고 몰입해서 집중한다.

    “그래서 뭔가 이상하게 느낀 사람들이 댐을 무너뜨리려고 하는데,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상류 마을에 찾아왔대. 피부는 창백하고 눈동자는 마른 우물보다 까만 데다 흑마법을 몰고 다녔다지. 그 남자는 댐을 무너뜨리면 아래가 홍수에 잠길 거라고 경고했대. 또 그 댐을 이용해서 부를 누리게 해 주겠다고.”

    “어떻게요?”

    “그 검은 옷의 남자는 신기한 걸 많이 알고 있었어. 댐에서 물을 떨어뜨려 전기란 것을 생산했는데, 그게 있으면 마법이 없어도 불을 밝힐 수 있고 철로 만든 기계들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지.”

    “흑마법, 흑마법이야.”

    옆에서 마트베이가 중얼거리자 류드밀라의 몸이 서서히 굳어진다. 이야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묘한 익숙함이 들어 기분이 이상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남자의 말대로 했지. 댐을 무너뜨리지 않고 내버려 둔 거야. 그런데 어느 날 검은 옷의 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대. 그 후에도 댐은 그대로 우뚝 서 있었고 강은 여전히 병들어 갔지. 그때부터 강 주변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어.”

    키르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류드밀라와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상류에서는 물고기가 떼로 죽어 있질 않나. 어느 날은 하늘에서 초록색 비가 내렸지. 녹조로 가득한 비가 말이야. 내가 살던 하류 마을에서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고래가 올라와 죽어 있기도 했지. 그런데 사람들은 멍청했어. 강의 신이 노했다고 생각해서 제물을 바치기로 했지.”

    류드밀라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쉰다.

    “혹시 껍데기 여인을 제물로 바쳤나요?”

    “아니, 그때는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이었어. 껍데기가 이렇게 멸시당하지 않았던 시기였지. 대신 상류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서 제일 예쁜 처녀를 잡아다가, 댐에 갇힌 강 한가운데로 가서 빠뜨렸지.”

    키르의 이야기는 점점 더 끔찍하게 변해 가고 있었고 류드밀라는 그녀를 막지 못한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처녀를 닮은 여인이 강가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 처녀가 도망쳤다고 생각해서 괘씸하게 생각했지. 그래서 그 여인을 끌고 가 죽였어.”

    류드밀라는 작게 비명을 지르곤 제 입을 틀어막는다. 여린 마음에 사람들의 절박함과 잔인함이 참 무섭게 느껴진다.

    “그런데 죽인 후에야 발견한 거야. 사실 그 여인은 물의 정령인 루살카였어.”

    “강의 신이 더 노했겠네요.”

    이 이야기를 많이 들은 듯 적당한 자리에서 이반이 말을 얹는다.

    “그래. 무고한 인간의 피로 강이 더럽혀진 데다 물의 정령까지 죽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두려워졌어. 그런 마을 사람들 앞에 다시 한번 검은 옷의 남자가 나타났지. 그 남자는 강의 신이 노해서 모두를 죽이려 한다고 경고했어. 공포에 휩싸인 상류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막을 수 있냐고 물었지.”

    키르가 넌더리가 난다는 듯 파이프 담배 연기를 휘저으며 한숨을 쉰다.

    “남자는 강의 신의 힘은 강물에서 나온다고, 강에다 독을 풀라고 했어.”

    “그 말을 사람들은 믿었어요?”

    “이쁜이 아가씨, 사람들은 원래 잔인해. 겁에 질린 사람들은 특히 더하지. 그래서 사람들은 상류에다가 오물과 독을 풀었어. 이미 병들어 있는 강에 온갖 더러운 것들을 다 집어넣었지. 그러자 강의 신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어.”

    류드밀라는 마른침만 삼키며 초조하게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그런데 더 이상 그건 신의 모습이 아니었어. 거대한 야수의 모습을 하고 새까맣게 물든 마법을 온 데 흩뿌리고 다니며 사람들을 학살했지. 마을이 초토화되었을 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힘에 산은 깎여 나가고 숲의 나무들은 모두 뿌리째 뽑혔어. 그 지옥 같은 일이 일주일 동안 벌어지며 야수는 점점 강의 하류로 내려왔어. 사실상 지금 제국을 이루는 모든 땅을 야수가 지나다니며 사람들을 죽였지.”

    키르의 눈이 그녀도 이야기로만 들은 그때의 공포를 떠올리듯 약간 탁해진다.

    “일주일의 마지막 날, 내가 살던 마을도 파괴되려는 순간 야수가 사라졌어. 두려움에 떨며 집 안에 숨어 있었는데, 그냥 사라진 거야. 그래서 우리가 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거지. 상류와 중류에 살던 모든 이들은 죽었고 아이들은 이상하게도 이 일을 기억하지 못했거든. 우리의 할머니의 할머니, 조상들만이 이 일을 알고 있어.”

    이야기가 끝나도 류드밀라는 몸의 긴장을 풀지 못한다. 그 이야기는 그녀가 들어왔던 다른 이야기들과 닮은 구석이 조금도 없다. 괴물을 물리치는 영웅도, 납치당한 귀족 아가씨도, 주인공을 도와주는 마음씨 착한 노인도 없다. 그저 공포에 질려 악해진 사람들과, 그들을 부추긴 더 악한 남자와, 무시무시한 분노를 품은 자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젠가 다른 이의 입에서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류드밀라는 아까와도 같은 묘한 기시감을 떨쳐 내곤 궁금했던 점을 물어본다.

    “야수는 왜 사라졌을까요? 무찌른 사람도 없었는데, 그냥 사라졌다고요?”

    “그래. 그게 참 이상한데, 내 생각에는 결국 강의 신이 자비를 베푼 것 같기도 해. 하류 사람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까.”

    고개를 주억이던 류드밀라는 더 묻고 싶은 것이 많다. 그래도 밤이 늦어 지금 자야 한다는 말에, 험한 여정이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질문을 삼킨다.

    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꿈에 루슬란 님이 나올까 잠시 의문이 든다. 그러나 바로 그들이 싸웠음이 실감나며 그녀가 성물을 구해 그를 찾아가지 않는 이상, 지금도 앞으로도 꿈에서 그들이 만날 일이 없을 것임을 깨닫는다.

    기분이 울적해지며 눈물이 또 나려 한다. 형제단과 함께 있으며 잡생각을 털어 내려 했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더욱더 싱숭생숭해진 느낌이다. 류드밀라는 울지 않기 위해 결심을 다시 해야 한다.

    ‘내가 지금 울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하루빨리 루슬란 님을 위한 성물을 구해 돌아가서 찾아뵙는 것밖에, 해결책이 없는 거야. 울지 말고 내일을 위해 체력을 아껴 두자.’

    그러나 그 결심은 마음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슬프게만 만든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그녀 자신에 대한 원망이 지독히도 기구한 그녀의 운명에 대해, 나아가 루슬란에게까지도 향한다. 결국 베개를 눈물로 적신 류드밀라는 늦게까지도 잠들지 못한다.

    다음 날 아침 거뭇거뭇해졌을 눈 밑을 문지르며 류드밀라는 아침을 대충 먹고 마구간으로 향한다. 까치가 리사에게도 소식을 전했는지 형제단을 보고도 말로 둔갑한 여우는 별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각자 말에 오른 키르, 이반, 마트베이가 류드밀라에게 이상한 눈초리를 보낸다.

    “마구를 얹어야지 맨 등에 탈 셈이냐?”

    그 말에 류드밀라는 퍼뜩 정신을 차린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는 서투르게 안장을 채우고 재갈을 물린다. 다행히 리사가 얌전히 있어 줘서 과정은 쉬웠지만 이미 준비를 마친 이들의 눈길이 소심한 그녀에게는 거북하기만 하다.

    겨우 채비를 마치고 출발한 그들은 마을의 남측 입구로 향한다. 말을 오랜만에 타는 것처럼 느껴져 적응을 다시 해야 하는 류드밀라는 불안해진다. 마을 안에서 평보로 걷느라 편할 때 미리 물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녀는 입을 연다.

    “신록의 숲은 이렇게 가면 얼마나 가야 하나요?”

    “마을을 벗어나서 습보로 달린다면 하루면 가능해. 중간에 쉬어 간다면 하루하고도 반나절.”

    류드밀라와 가장 가까이에서 말을 타는 이반이 답해 준다. 문득 든 불길한 예감에 류드밀라는 다시 묻는다.

    “야영을 안 할 건가요?”

    “숲 근처에서 야영을 하긴 싫을걸. 말했잖아, 신록들은 인간의 피가 묻은 뿔을…….”

    “그렇군요.”

    별안간 두려워져 서둘러 대답한 그녀는 벌써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말을 타야 한다니 걱정이 마구 샘솟는다. 그런 그녀를 안심시켜 줄 의도는 조금도 없는지 마트베이가 과묵하게 말을 덧붙인다.

    “네가 탄 말은 수레용 짐말이라 반동이 더 심할 거야. 허벅지가 좀 아프겠군.”

    “여기까지 저 말을 타고 온 거면 그래도 익숙해져 있겠는데?”

    맨 앞에서 키르가 류드밀라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진다. 결국 그녀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 전까진 수레를 타고 이동했었어요. 이전에 들렀던 마을에서 공격받는 바람에 저만 도망쳐 나온 거고요.”

    “그럼 그렇지. 이쁜이 아가씨의 가늘가늘한 몸으로 어떻게 고된 여행길을 견뎠나 궁금했어.”

    키르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가씨의 말을 놓아줘도 괜찮다면 내가 앞에 태우고 가도 되는데. 그 편이 좀 더 편할 거야.”

    “아, 이 말은 잘 길들여져 있어서 제가 안장에 없어도 저희를 따라올 거예요.”

    이반과 마트베이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키르는 별 토를 달지 않고 류드밀라를 앞에 태운다. 그녀의 앞에 앉으니 류드밀라는 조그마한 아이처럼 보인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키르는 말에게 박차를 가한다. 앞으로 튕겨져 나가듯 순식간에 속도를 올린 말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허리를 꽉 붙잡은 손길에 조금은 안정감을 느낀 류드밀라는 안장 손잡이를 꼭 붙든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이 두려워 눈을 감을까도 고민해 보지만 잠시 그랬다가 더 큰 공포를 맛본다.

    계속 신록의 숲을 향해 나아가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남부 지방은 여전히 춥지만 북부 지방에 비해 습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었나 보다고 류드밀라는 신기해한다. 눈으로 덮인 후원의 풍경도 그리 예뻤는데 눈이 내리는 모습을 온전한 밖에서 보니 정말 아름답다.

    이런 풍경을 루슬란 님과 함께 봤어야 했는데. 갑자기 든 생각에 난 눈물은 어는 대신 흘러내리고 아무도 보지 못한 그것을 류드밀라는 서둘러 감춘다.

    그렇게 씁쓸함과 슬픔으로 가득 찬 여정은, 계속 이어져 나간다.

    한참을 달리다가 잠시 물을 마시며 쉬는데 키르가 별안간 말을 꺼낸다.

    “아, 생각났다. 쳐르나야 강의 원래 이름이.”

    “원래 이름이 뭔가요?”

    “푸른 사자의 강이었어.”

    류드밀라는 수통 마개를 닫고 키르에게 돌려주며 고개를 갸웃한다.

    “그게 갑자기 왜요?”

    “네가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서.”

    전날 푹 빠져서 이야기를 들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류드밀라가 얼굴을 붉힐 동안 키르는 어깨를 으쓱한다.

    “뭐, 아님 말고. 다시 출발하자.”

    류드밀라는 이번에도 한층 편하게 말을 탄다. 다리에 힘을 많이 주고 있지 않아도 키르의 팔이 그녀를 안장 위에 붙들어 놓아서 그렇다. 그럼에도 잠깐씩 쉬는 걸 제외하고 계속 구보로 달리자 몸이 피로하다. 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형제단의 괴물 같은 체력에 대한 절실한 부러움으로 바뀔 무렵 해는 거의 져 가고 있다.

    불타오르는 듯한 석양이 오른편에서 보인다. 황금빛 노을이 벌판을 따스하게 물들이지만 류드밀라에게는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 대신 손에 잡힌 물집이 터진 바람에 너무 아파 제정신이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안장 손잡이에는 그녀가 흘린 땀의 소금기가 말라붙어 있었고 터진 부위에 닿을 때마다 미칠 것같이 따끔거린다.

    해는 금방 수평선 밑으로 넘어가고 어둠이 사방에 깔리기 시작한다. 손이 고통으로 거의 마비되어 이제는 안장 손잡이를 잡고 있는 건지 최선을 다해 달라붙어 있는 건지 모를 정도이다. 터진 곳의 고름이 굳어 아픔이 사라졌을 무렵 이제는 졸음이 그녀의 짐이 된다.

    “밤에 야영하면 위험하다는 걸 아가씨도 알잖아. 조금만 참아.”

    류드밀라의 몸이 휘청이자 키르가 무심하게 달랜다. 그녀는 겨우 정신을 붙들고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있다. 말도 지쳤는지 구보의 리듬이 계속 바뀌어서 마음 놓고 졸 수도 없다. 보폭이 점점 느려지다가 키르가 성을 내며 발로 차면 빨라지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키르가 그녀의 잠을 싹 달아나게 만드는 말을 내뱉는다.

    “뭔가 우리에게 따라붙었어.”

    류드밀라는 뒤를 돌아보려다가 포기하곤 속삭여 묻는다.

    “뭐가, 아니 누가요?”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도 해 주듯 뒤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네 발 짐승의 발소리와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린다.

    “늑대 인간이에요?”

    키르는 대답 대신 상스러운 욕을 내뱉으며 류드밀라를 붙잡고 있지 않는 손으로 품 안에서 칼을 꺼내 든다. 그 틈에 용기를 내서 뒤를 돌아본 류드밀라는 마트베이는 활을, 이반은 도끼를 꺼내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들의 짐 꾸러미가 컸을 때 예상을 했지만 생각보다 무기들이 평범해서 그녀는 의문이 든다.

    “그 벽난로 앞에서 손질하던 무기는 왜 안 쓰고요?”

    “그건 신록을 잡을 때 써야 해.”

    무뚝뚝하게 대꾸한 키르는 말을 재촉한다. 안 그래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말은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엉덩이가 주체할 수 없이 튀어 오르자 키르가 그녀의 몸을 앞으로 숙이게 한다.

    “허벅지로 버티면서 몸을 기울여서 일으켜. 말갈기를 붙잡으면 좀 더 편할 거야.”

    류드밀라는 키르의 말대로 하고 다행히 잔뜩 긴장한 상태인 몸은 생각대로 움직인다. 허벅지 아래서 말의 걸음 하나하나와 근육의 움직임이 느껴져서 낯설다. 땀으로 엉겨 붙은 갈기를 짧게 잡으니 과연 조금은 버티기가 수월해진다.

    그렇게 달리는데도 불구하고 보통의 늑대보다 신체 조건이 월등히 좋은 늑대 인간들은 그들을 금방 따라잡는다. 키르는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이반과 마트베이에게 소리쳐 앞질러 가게 만든다. 바로 옆까지 붙어 달리는 늑대 인간들의 까만 털과 새빨간 눈을 보고 공포에 질린 류드밀라가 무슨 계획이냐고 물으려 하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말에서 떨어지지 마.”

    이 경고만 남긴 키르가 몸을 돌려 허공에다 칼을 휘두른다. 그러자 새빨간 불덩어리가 칼끝에서 나와 늑대 인간들에게로 향한다. 그것들은 요리조리 몸을 움직여 피하지만 몇몇의 털에 불똥이 튀고, 평범한 불과는 다르게 금방 온몸으로 옮겨 붙는다.

    기세가 죽어 몇 마리가 도망가고 류드밀라가 안심하려는 그때, 제일 근처에 있던 녀석이 키르의 말에게 달려든다. 그녀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린다. 다행히 키르가 불을 방패막이처럼 만들어 늑대 인간을 막지만 반동으로 인해 말이 비틀거린다. 류드밀라는 비명과 울음을 삼키며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려 있다.

    지옥과도 같았던 순간은 금방 지나가고, 그들은 털과 살이 타는 냄새를 뒤로하고 말을 달린다.

    그 후로도 늑대 인간들이 몇 번씩 공격해 오는 일이 벌어지고 그때마다 키르는 불 속성 마법으로 막아 낸다. 류드밀라의 공포도 서서히 무뎌져 간다. 숲에 도착하면 그들 앞에 무슨 일이 닥칠지 전혀 모른 채 말이다.

    늑대 인간들은 첫 새벽 빛이 비추자 다신 나타나지 않는다. 지평선 너머로 천천히 떠오르는 해가 그리 반가울 수 없다고, 류드밀라는 지친 심신을 달래며 생각한다. 늑대 인간이 없자 말들이 달리는 속도도 조금 느려지고 마음도 여유로워진다. 그리고 그들 앞에 보이기 시작한 초록색 얼룩도 기분을 들뜨게 한다.

    드디어 목적지가 가까워진 것이다. 다시 선두 자리로 온 키르 덕에 류드밀라는 온전한 숲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이번에는 아무리 몸이 지치고 힘들어도 제 눈동자 색으로 물든 하늘 아래 펼쳐진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다.

    어스름한 새벽에 어느새 들판의 풀잎들에 내려앉은 서리. 길가에 쌓인 눈은 말이 달릴 때마다 바람에 흩날리고 맑아진 하늘에는 보랏빛이 감돈다. 먼 곳에 자리 잡은 울창한 숲은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숲에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것이 느껴진다. 이상한 마법에 걸려 있는 것처럼 그 숲은 사람을 묘하게 밀어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말을 계속 달리자 초록 얼룩은 착실하게 커져 가고 그들 넷은 마침내 숲의 가장자리에 도착한다. 다만 사람을 밀어내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들은 기다리게 하고 걸어가야 해.”

    키르가 류드밀라를 먼저 말에서 내리게 하며 설명한다. 류드밀라는 계속 사람을 태우지 않은 채로 그들을 따라왔던 리사를 흘끗 돌아본다. 말로 둔갑한 모습의 리사는 그녀보고 안심하라는 듯 푸르르, 콧소리를 한번 낸다.

    “왜인가요?”

    “거추장스러운 데다, 말을 탄 채로 총을 쏠 수는 없어.”

    산신의 설명에서 얼핏 들은 무기로밖에 총을 알지 못하던 류드밀라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뜬다. 그 벽난로 앞에서 손질하던 무기가 총이었구나. 정말 불꽃을 뿜으며 쇳덩어리를 발사한다는 것이 사실일까. 그런데 별안간 무서운 생각이 든다.

    “총을 누구에게 쏘려고요?”

    “신록을 죽여야지. 그럼 신록에게 뿔을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할 생각이었냐?”

    그러고 보니 그들이 어떻게 뿔을 얻으려 할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류드밀라는 목에 소중히 걸고 있던 산신의 증표를 떠올리며 입을 열려다 다문다. 거짓말을 할 바엔 아예 말을 안 하는 것이 낫다. 만약 형제단이 총을 정말 쏘려고 하면 말려야 했다. 살생을 저지르는 사람들과 함께 가서 뿔을 부탁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될 뿐더러, 어떻게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있을까.

    류드밀라의 표정에서 거부감을 읽었는지 키르는 숲으로 들어가 걸으며 불만스러운 투로 그녀를 설득하려 한다.

    “신록을 죽이는 게 싫으면 고기도 먹지 말아야 하고, 생선도 먹지 말아야 해. 심지어 식물조차 나름의 생명인데 그럼 아예 굶을 수밖에. 필요에 의한 살생은 어쩔 수 없는 거다.”

    “그건 그래요.”

    류드밀라는 조용히 수긍한다. 지금 와서 키르를 말릴 수는 없다. 이미 그들의 절박하고 슬픈 상황을 다 아는 마당에 그녀에게 그들을 말릴 용기는 없다.

    키르는 마침내 설득을 멈추고 총을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한다. 의문스럽게 바라보는 류드밀라에게 언제든 쏠 수 있게 장전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제 숲을 돌아다니면서 신록이 있나 수색해야 해.”

    키르가 호기롭게 말한다. 그러나 숲은 그들이 신록을 발견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지 그들을 헤매게 만든다. 마트베이가 떨어뜨린 나무껍질에 해 놓은 표시를 세 번째로 발견하자 결국 키르가 물이 흐르는 소리를 따라가자며 꾀를 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는 물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해는 정오를 지나 빠르게 져 가고 있는데 그들은 신록을 잡기는커녕 털 한 오라기도 보지 못한다. 울퉁불퉁한 숲에서 몇 번을 넘어지고 나서야 겨우 조심스레 걷던 류드밀라는 어느 순간 제 목이 허전함을 발견한다.

    목걸이 줄은 그대로지만 고리가 풀려 있다. 며칠의 험한 여정으로 인해 헐거워진 고리에서 산신이 준 증표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절망감이 뱃속 아래부터 천천히 차오른다. 눈물이 눈에 조금씩 차오르는 걸 몰래 닦아 내며 그녀는 심호흡을 한다. 폴레보이가 그녀에게 겉으로 판단할 수 없다 했으니 신록도 그녀 내면에서 뭔가를 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도 품어 본다. 그러나 낙천적이기만 한 성격은 아니어서 앞길이 막막하기만 하다. 정말 신록을 총으로 쏴야 하나 그런 나쁜 생각도 머릿속을 맴돈다.

    털어놓을 사람도 없어 슬픔을 꾹 눌러 참던 그녀는 이제 차라리 같은 곳을 빙빙 도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진다. 돌다 보면 언젠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바닥만 보고 걸어가다 류드밀라는 그만 형제단과 떨어지고 만다. 물소리 때문에 아무리 외쳐 봐도 대답이 잘 들리지 않는다. 그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한참을 걷기만 하다 그녀는 또다시 나무뿌리에 걸려 풀썩 엎어진다. 땅을 짚은 손바닥에 흙과 낙엽 부스러기가 묻어 떼어 내며 몸을 일으키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류드밀라는 놀라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

    그녀의 앞에 아름다운 신록이 가늘가늘한 다리를 굳힌 채 뾰족한 뿔을 높이 치켜들고 서 있다. 호기심 어린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이고 촉촉한 검은 코가 그녀를 탐색하듯 벌름거린다. 새하얀 날개는 몸통 양옆에 곱게 접은 채 잠시 류드밀라를 바라보던 신록은 말없이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온다.

    신록이 내딛는 걸음은 낙엽 위임에도 불구하고 바스락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류드밀라에게 천천히 다가와 다시 한번 냄새를 맡은 신록은 아주 신중하게 머리를 가까이 들이민다. 신록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긴 데다 너무 놀란 그녀는 움직일 엄두조차 못 내고 가만히 있다.

    황궁에서 읽었던 동화책이 떠오른다. 순수한 아가씨가 숲속에 들어가면 유니콘이 무릎을 베고 잠든다는 이야기를 읽었었다.

    ‘하지만 난 순수하지 않아. 방금까지도 신록을 죽인다는 생각을 했었잖아.’

    그 생각을 마치 읽은 것처럼, 아니면 그녀에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었는지 신록이 귀를 쫑긋 세우며 류드밀라의 뒤를 응시한다. 그녀도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나무 사이에서 형제단이 나타난다.

    키르가 신록을 보더니 망설임 없이 총을 꺼내 든다.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자각도 없이 류드밀라는 벌떡 일어선다.

    “안 돼요!”

    키르 앞을 가로막고 신록이 도망가길 바라며 돌아보지만 신록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얼어붙어 있다. 류드밀라는 키르에게 제게 신록을 설득할 방법이 있다고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증표를 잃어버렸다. 어떻게 증표 없이 키르를, 그리고 신록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비켜.”

    류드밀라가 망설이는 사이 키르가 위협적으로 총대를 들이민다.

    “싫어요. 키르, 제발…….”

    그러나 키르는 두 번 망설이지 않는다. 신록이 조금 움직이자 도망친다고 생각했는지 방아쇠를 당긴다.

    어마어마하게 큰,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나고 류드밀라의 기억은 거기서 조각난다. 나머지 부분은 그저 파편으로 떠오를 뿐이다. 어디에 세게 부딪친 것처럼 충격에 뒤로 쓰러졌고,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고통이 온몸을 휩쓸고, 뜨뜻한 액체가 손에 묻어나는데.

    류드밀라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녀에게 다가오는 다른 신록이다. 아까 다가온 녀석보다 더 크고 온몸이 은빛으로 빛나는 신록이다. 뾰족하게 갈라진 황금색 발굽이 땅에 닿을 때마다 썩은 낙엽 위로 투명한 산하엽 꽃이 피는 걸 보다 그녀는 정신을 잃는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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