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서서히 조여 오는 (12/20)
  • 10. 서서히 조여 오는

    폴레보이는 저를 빼다 박은 소녀의 머리에 류드밀라가 건넨 머리카락 타래를 가져다 댄다. 어느새 그의 손안에서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돌아온다.

    머리카락과 어린 정령의 머리 사이에서 빛줄기가 나오더니 머리카락이 원래 머리에서 자라난 것처럼 합쳐진다. 머리카락의 숱도 많아져서 자연스레 소녀의 머리를 다 덮는다.

    소녀는 머리카락을 만져 보고 신나서 폴짝폴짝 뛰더니 폴레보이의 목에 매달려 뭔가를 속삭인다.

    “저 아이는 누군가요?”

    류드밀라가 아이의 찰랑이는 은빛 머리카락을 홀린 듯이 보다가 자디라에게 묻는다.

    “폴루드닛사, 폴레보이의 딸입니다.”

    폴레보이는 아까와 달리 한결 느긋해진 표정으로 류드밀라를 돌아본다.

    “우리 닛사가 네게 고맙다고 전해 달래. 네 머리카락이 들판에 은빛 갈대 같다고 좋다는구나.”

    “다행이에요.”

    류드밀라는 얌전히 대답한다. 마법을 할 줄 아는 정령이면 마법으로 머리카락을 만들지 굳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져간 이유가 궁금하다. 그러다 꿈에서 들었던 루슬란의 말이 떠오른다. 이미 있는 것을 증폭시키는 것은 쉽지만 빈 그릇을 채우는 것은 어렵다는 말을. 그제야 조금씩 마법의 원리가 이해 간다.

    마법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손을 내밀어 봐.”

    그녀가 손을 내밀자 들판의 정령이 그 손을 붙잡는다. 뭘 할지 몰라서 긴장하는데 흙이 잔뜩 묻은 깨진 손톱에서 초록색 풀이 자라나 서로 얽혀 든다. 자라난 줄기는 류드밀라의 검지를 반지처럼 감싸고 든다.

    “선물이다. 남은 여행길을 지켜 줄 거야.”

    류드밀라는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드는 풀 반지를 신기하게 보다가 꾸벅 인사를 한다. 폴레보이는 장작불을 조금 더 쬐다가 딸 닛사와 함께 들판으로 사라진다. 길어지는 그들의 그림자처럼 정령을 만난 경험이 그녀의 가슴속에 드리워진다.

    그날 밤 루슬란은 그녀가 쉬게 내버려 둘 모양인지 따로 나타나지 않는다. 꿈 없이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난 그녀의 손가락에는 여전히 풀 반지가 남아 있어, 지난밤 일이 꿈이 아님을 알려 준다.

    루슬란이 찾아오지 않은 사실을 깨닫곤 류드밀라는 약간 슬퍼진다. 그에게도 다른 이유가 있겠지 하고 애써 적적한 마음을 달래 본다.

    수레에 올라서 다시 길을 떠나고 해가 점점 높이 뜰 무렵, 그들은 길가에 수레를 대놓고 잠시 쉬면서 점심을 먹는다. 자디라는 말린 고기를 뜯어 먹고 류드밀라는 산신이 챙겨 준 납작한 빵을 야금야금 먹는다. 여우들은 말의 모습으로 풀을 뜯어 먹는데 불만스러움이 크고 흰자가 거의 없는 눈동자에 다 드러나 있다.

    “지금까지 만난 정령들은 다 착한 것 같아요.”

    류드밀라가 불쑥 입을 열자 자디라가 얼굴을 찡그린다.

    “세상에 악하기만 한 이가 없듯이 착하기만 한 이도 없습니다. 어제 만났던 폴레보이는 사람을 들판에서 길을 잃게 만들어 결국 갈증과 굶주림에 죽게 만들죠. 레쉬도 비슷합니다.”

    “그건 저도 책에서 읽어서 알아요. 하지만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나그네에게 그러진 않을 거잖아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사소한 잘못을 했다고 해서 정령들 장난의 희생양이 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또 맞는 말이어서 그녀는 자디라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영물이라면 정령들의 편을 들 줄 알았는데, 서로 입장이 바뀐 것만 같다. 동화책에서는 잘못을 저지른 나그네가 벌을 받는 건 당연하다고 나와 있었는데, 자디라의 말을 들어 보니 너무 가혹한 처사이다. 이제 겨우 신비로운 세계에 대해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난관에 맞닥뜨리자 그녀는 실망스럽다.

    마법은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어렵고, 신비로운 세상에 대해서는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그녀가 한숨을 폭 내쉬자 자디라가 달래듯이 말을 건넨다.

    “정령들은 이해하기 힘든 종족입니다. 굳이 애쓰실 필요 없어요.”

    남은 고기 부스러기를 한입에 털어 넣고 일어선 호랑이가 짐을 챙기자 류드밀라도 따라 일어선다. 자디라는 그들의 대화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 짧은 대화는 류드밀라를 한동안 고민하게 만든다.

    세상에 악하기만 한 이가 없듯이 착하기만 한 이도 없다.

    수레를 타고 다음 야영지로 향하면서 그녀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자디라에 따르면 그녀를 납치했던 흑마법사에게 착한 면이 있을 수도 있고, 루슬란 님에게 나쁜 면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일 텐데.

    확실한 한 가지는 루슬란이 그녀에게 말해 주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그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까?

    전부터 그가 그녀에게 말을 아낀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실망하거나 배신감을 느꼈던 걸까. 스스로의 감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남의 선악을 판단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여러 복잡한 생각들로 인해 그녀의 시간은 금방 흐른다. 그러나 야영지를 꾸리고 난 후부터는 시간이 굼벵이처럼 가기 시작한다. 꿈에서 빨리 루슬란을 만나 복잡한 심정을 달래고 싶은 마음에, 잠들고 싶지만 먼저 주린 배부터 채우는 것이 우선이다.

    여우들은 원래 모습으로 둔갑하기 귀찮은 건지, 혹시라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보일까 걱정되는지 말의 모습을 유지한다. 아니면 토라졌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류드밀라는 내버려 두려 한다. 아직 그녀에게는 여우들을 마음 놓고 대할 만한 용기가 없다. 그저 호랑이와 대놓고 싸우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든다.

    고기 파이와 시들시들해진 채소를 넣고 끓인 스튜를 먹자마자 류드밀라는 바로 천막 안에 눕는다. 일찍 누운 탓인지 눈은 말똥말똥하니 잠이 잘 안 온다. 하루 종일 수레에 앉아 있느라 몸은 쑤셨지만 딱히 피곤하진 않은 탓이다.

    멍하니 흘려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궁금증과 고민도 많아지기만 한다. 닥쳐온 상황부터 해결하느라 물을 경황이 없었던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결국 그녀는 물음표로 가득한 잠에 빠져든다.

    오늘은 꿈속에 나와 주실까…?

    이런 생각도 잠이 들면 잊히는데 꿈에서는 류드밀라가 기대한 만큼 다정한 모습의 루슬란이 나타난다. 전날 밤 못 봐서 그런지 더욱 반갑고 애틋하다. 말없이 반겨 주는 그의 품에 파고들어 그녀는 자연스럽게 안긴 자세로 몸을 기댄다. 실제로 만났더라면 며칠 몸을 씻지 않아 그렇게 기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꿈속에서 그녀는 마음 놓고 그에게 몸을 내맡긴다.

    “어제와 오늘은 또 어떤 하루를 보냈나요?”

    그가 묻자 폴레보이를 만났던 일과 수레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얼마나 신기했는지에 대해 들려준다. 루슬란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행복하다는 듯이 입가에 시종일관 차분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런 그를 보면 마음이 놓여 머리를 어지럽혔던 고민과 궁금증까지 다 털어놓을 것 같아 류드밀라는 돌연 입을 다문다. 그러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가 달라진 낌새를 눈치채곤 머리를 토닥여 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해 보셔요. 다 들어 줄게요.”

    “막 쉽게 나올 말이 아니어서 그래요…….”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설명한다. 루슬란은 무슨 일인지 짐작은 가지만 기다린다. 류드밀라가 자꾸 머뭇거리자 그가 말을 하나 얹는다.

    “내가 자꾸 말을 아껴서 걱정되신 건가요?”

    어떻게 알았냐는 듯 놀란 표정이 상상되어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린다.

    “걱정도 되고, 궁금한 것도 많을 테고, 속상하기도 하다는 것 다 알아요.”

    그녀가 소심하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리지만 그는 다 알아듣는다.

    “정말 하나도 속상하지 않았나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루슬란은 어떻게 대답해야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한다. 고민이 길어질수록 그녀가 점점 더 움츠러들 것을 알아 고민은 오래가지 않는다.

    “제가 하는 걱정은 전혀 나쁜 게 아니어요. 그대를 위한 걱정이니 그저 제 분에 넘칠 뿐이죠.”

    류드밀라가 몸을 확 펴는 것이 품 안에서 느껴진다.

    “분에 넘치다뇨!”

    이렇게 기겁하고 나서 할 말을 잃은 그녀를 위해 그가 대신 말을 이어 나간다.

    “사실을 제대로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매번 기다려 달라고만 한 것도 미안해요. 그대는 제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라, 상처 받을까 봐 차마 그러지 못했어요.”

    그 한마디에 수레를 타고 야영지까지 오면서 그녀가 가졌던 궁금증, 속상함, 어쩌면 서러움까지 단번에 날아간다.

    그가 미안해하며 짓는 마음 아픈 표정이 모든 생각을 씻어 간 가운데, 그녀는 그에게 입을 맞춘다.

    류드밀라는 이게 그저 문제를 회피하는 행동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녀의 서러움은 사라졌을지언정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또 안다. 그녀의 서러움이 차곡차곡 쌓이고 그의 달콤한 속삭임이 그걸 허물고. 이게 언제까지 반복될 수 있을까. 어느 순간 그녀의 속상함이 굳게 쌓여 허물어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러나 그녀는 물음과 걱정을 구석으로 밀어 둔다. 지금의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언제부터인가 미래를 고민하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류드밀라를 절정으로 이끄는 몸짓은 부드럽고 조심스럽다. 그가 만들어 낸 꿈속에서는 놀랍도록 감각이 생생해서 행복감은 더욱 짙어진다.

    그 행복이 그저 꿈속의 것이란 사실보다 더 중요하게 와 닿은 것은, 꿈속에서라도 그들이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슬란은 다른 걱정을 품고 있다. 언제라도 그녀의 생각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라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보다 그저 꿈속에서만 행복한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그렇게 뒤바뀐 생각이 그는 두렵다.

    그때, 몽롱해진 몸을 끌고 그의 품에 파고든 류드밀라가 이렇게 웅얼거린다.

    “루슬란 님이 매일 밤 이렇게 찾아오셨음 좋겠어요.”

    걱정과 두려움이 조금 옅어진 채 그는 밀려드는 감동에 몸을 내맡긴다. 그리고 조곤조곤 물어 온다.

    “안 피곤하겠어요?”

    “피곤하지 않아요. 밤에 루슬란 님을 보면서 내일로 나아갈 힘을 얻는걸요. 오히려 루슬란 님은 힘드시지 않은지 걱정돼요.”

    “제가 힘들 일이 뭐가 있을까요?”

    류드밀라는 조금 굳어진 그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한다.

    “꿈에 찾아오는 것도 마법이 필요한 일일 텐데, 전에도 마법을 쓰면 몸이 안 좋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게다가 지금은 다치신 상태인데…….”

    “이건 그저 꿈일 뿐이에요. 별로 힘들지도 않고, 많은 마법을 필요로 하지도 않아요.”

    더 이상 감동에 몸을 맡기면 낭만적인 말만 하게 될까 봐 루슬란이 조금은 날카롭게 대꾸한다. 여전히 몽롱한 상태의 류드밀라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 무던함은 평소의 소심한 그녀와 달라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저 꿈이 아니라, 제게는 정말 소중한 기억이에요. 루슬란 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는 꿈에서라도 루슬란 님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기만 한데.”

    “저도 똑같이 생각해요.”

    그 뒤에 따라붙을 뻔한 하지만, 이란 말을 그는 겨우 삼킨다. 귀신같이 그가 못 한 뒷말을 알아채고 왜 그러냐는 듯 올려다보는 기색이 느껴진다.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잠들어 꿈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토닥여 준다.

    ***

    텅 빈 산신의 오두막 침대에서 깨어난 루슬란은 일어나 앉는다. 베개에 기대앉아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속으로 떨어지듯 깊은 생각에 잠긴다.

    언젠가는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 언젠가가 제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기대를 해 본다. 그 기대는 이성에 의해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창밖으로 내민 손으로 시간을 확인한 그는 한숨을 푹 쉬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는다. 더듬더듬 종을 찾아 울리자 사슴 영물이 들어오는 걸음 소리가 난다.

    “핀 님께 데려다주렴.”

    영물의 걸음 소리를 따라 루슬란은 산신이 있는 정자로 향한다.

    “또 잡생각이 많아진 모양이구나. 이 새벽부터.”

    그가 정자 안에 앉자 산신은 무뚝뚝하게 말하면서도 손에 찻잔을 쥐여 준다.

    “말해 보거라.”

    루슬란이 산신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동안, 일찍 일어난 류드밀라는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점심때가 되어서야 도착한 펜자 마을은 소박하지만 밝은 분위기의 마을이다. 집들도 깨끗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얼굴도 셸라빈스크처럼 침울하지 않다. 게다가 마침 마을 장이 열리는 날이라 사람들이 북적북적하고 활기가 넘친다.

    류드밀라는 여관에 짐을 대충 두고 밖을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자디라에게 말을 건넨다.

    “이제 마을을 돌아보는 건 어떤가요?”

    “저렇게 인간들로 북적거리는 건 딱 질색입니다.”

    고개를 내저으며 말한 호랑이는 류드밀라를 돌아보곤 눈을 가늘게 뜬다.

    “류드밀라 님도 혼자 나갈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너무 위험합니다.”

    류드밀라는 여관방 창문 밖을 흘긋 내다본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상인들이 큰 소리로 호객을 하는 풍경은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불쑥 서러움이 솟아오른다.

    항의의 말을 하려는 순간 저번 일이 떠오른다. 그녀의 실수 때문에 루슬란이 폭주하게 되었던 일이. 결국 이렇게 여정을 떠나게 된 것도 그녀가 잘못해서인 것이다.

    그 생각에 다다르자 의기소침해진 류드밀라는 점심이나 먹으려고 1층 식당으로 향한다. 그런 그녀를 자디라가 불러 세운다.

    “이곳은 셸라빈스크와 달리 저희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설명은 제가 할 테니 류드밀라 님은 조용히 계십시오.”

    이번에는 류드밀라도 항의하지 않는다. 이미 작게 쪼그라든 자신감은 다시 펴질 기미가 없다. 그녀는 그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간다.

    여관의 식당은 북적거리고 어수선하다. 그녀가 입구에서부터 겁을 집어먹고 멈칫거리는데 자디라가 성큼성큼 앞서 나가 버린다.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종종거리면서 따라간 류드밀라는 가능하면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머리를 감싼 코코슈니크가 이렇게 안전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은빛 머리카락에 대한 생각을 물리치고 그녀는 자디라와 함께 제일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멍하니 앉아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류드밀라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제 손만 쳐다본다. 그런데 의자 끄는 소리가 듣기 싫게 울려 퍼지더니 역한 냄새가 훅 끼친다. 그 역한 냄새가 술 냄새라는 것을 모르는 그녀는 놀라서 고개를 든다.

    “딱 봐도 이곳 사람이 아닌 모양인데. 이쁜이 둘이 여긴 무슨 일인가?”

    그들의 테이블로 의자를 끌고 온 남자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는다. 루슬란 말고 다른 남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거의 처음인 류드밀라는 겁을 집어먹고 몸을 움츠린다.

    다행히 자디라가 대신 나선다.

    “그쪽 일이나 신경 쓰지.”

    그녀가 무뚝뚝하게 대꾸하곤 류드밀라에게도 남자를 무시하라는 듯이 턱짓을 해 보인다. 그러나 무례한 남자는 갈 생각이 아예 없는 듯 가까이 끌어온 의자에 편하게 기댄다.

    “허, 꽤 앙칼지네. 앙칼진 여자는 길들이는 맛이 있단 말이야.”

    류드밀라는 자디라의 눈에서 분노가 불 지펴지는 것을 보곤 겁에 질린다. 여우들과 싸울 때도 저렇게 화가 난 모습은 아니었는데. 모욕에 그녀처럼 자신감을 잃기는커녕 자디라는 넌 잘못 걸렸다는 듯 오히려 재밌어하는 태도로 남자를 똑바로 쳐다본다.

    “꽤 건방지네, 건방진 놈은 타격감이 좋단 말이야.”

    “뭐?”

    남자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자디라는 몸을 일으켜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겨 주먹을 날린다. 어찌나 주먹이 강했으면 그녀가 손을 놓자마자 남자는 식당 바닥에 털썩 쓰러진다. 류드밀라는 작게 비명을 내지르며 놀란 숨을 삼킨다.

    “내가 힘 조절을 안 했으면 네놈 얼굴은 으스러졌을 거다. 내가 손목 삔 게 다행인 줄 알아.”

    손목을 문지르며 자디라가 의식을 잃은 남자에게 툴툴댄다. 그러고는 놀라서 다가온 여관 주인에게 무신경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놈 좀 치워 주십시오. 이래서야 편히 식사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관 주인이 데려온 이들이 남자를 치우자 때에 맞춰 그들의 식사가 나온다. 방금의 사건으로 입맛을 완전히 잃어버린 류드밀라가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자디라는 평소처럼 스튜에서 고기만 빼 먹는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오히려 말을 걸기가 망설여진다.

    그러나 류드밀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연다.

    “손목은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이 몸으로 싸워 본 지가 좀 되어서 삐끗했을 뿐입니다.”

    류드밀라는 또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꺼내 본다.

    “그 남자, 괜찮을까요?”

    “괜찮을 겁니다. 제가 마음만 먹었다면 반쯤 죽여 놨겠지만 류드밀라 님 앞이어서 참았습니다.”

    과연 참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아득해진 그녀는 그릇에서 고개를 든 자디라의 눈길을 피한다.

    “그딴 놈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기회로 깨달은 바가 있을 테니 다음부턴 낯선 이에게 함부로 집적대지 않겠죠.”

    자디라가 코웃음을 치며 호전적으로 말한다.

    “걱정하진 않았어요. 다만 그냥 좀 놀랐을 뿐이에요.”

    “류드밀라 님은 폭력에 익숙하지 않으시니 놀라는 반응이 당연한 겁니다.”

    류드밀라가 계속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그녀는 나름 위로라고 이런 말을 건넨다. 그러나 자디라의 위로는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와 류드밀라가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럼 자디라 님은 폭력에 익숙하신 건가요?”

    걱정스럽게 얼굴을 찡그려 보이는 순진한 껍데기 여인을 본 호랑이는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제가 아무리 영물이라지만 이슬만 먹고 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아…….”

    그제야 자디라가 살아가기 위해 무수히 많은 동물들을 사냥하고 먹어 왔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온다. 류드밀라는 약간 창백해져서 말을 더듬는다.

    “무, 물론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자디라 님도 살아가기 위해서 필수로 취해야 하는 영양분이 있을 테니까요.”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닙니다. 인간들은 늘 살생에서 자기들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기니까요. 그러고는 온갖 고귀한 척을 다 해 대죠.”

    고기를 씹지도 않고 넘기며 자디라가 무심한 샛노란 눈동자로 류드밀라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런 인간들이 섬기는 신이 누구보다 죽음에 익숙하고 가까운 자들이란 사실이 모순일 뿐입니다.”

    “정말 그러나요?”

    그녀는 인자해 보이던 산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모든 산신들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생명들을 품어 주던 산에 태풍이 오고 번개가 치면 산사태와 산불이 그 목숨을 앗아 가는 일은 흔했다. 산은 위험한 곳이었다.

    “그럼요. 모든 신들은 생명을 쉽게 품는 만큼 쉽게 내치기도 합니다.”

    별안간 노란 눈동자에 어떤 기색이 스친다.

    “아직 진실을 듣지 못한 모양이군요.”

    그렇게 류드밀라를 한없이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영물은 말을 아낀다. 그러고는 전과 달리 그녀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준다. 단순히 기다려 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 앉은 이들에게 허튼수작 걸면 가만 안 둔다는 눈빛을 보내 그녀는 안심하고 빵과 스튜를 먹는다.

    빈 그릇을 주방 쪽에 두고 식당 밖으로 향하려는 류드밀라를 자디라가 돌려세운다.

    “어디 가는 겁니까?”

    “밖에 장이 열려 있어서…….”

    “아까 일로도 배운 게 없습니까? 밖에 나가면 저런 놈들이 수두룩할 겁니다. 게다가 서로 놓치기라도 하면 여관엔 어떻게 돌아올 셈입니까?”

    풀이 죽은 류드밀라는 사과를 웅얼거리곤 몸을 돌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이제 다시 출발할 때까지 퀴퀴한 냄새로 가득한 여관방에 갇혀 있을 생각을 하니 암담하다. 여행의 피로가 쌓여서 물론 몸은 힘들었지만 새롭고 신기한 것들이 그녀를 유혹했다.

    그러나 암담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낮잠이라도 자면 루슬란 님을 뵐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생각에 희망을 되찾은 그녀는 침대에 누워 그새 벼룩에 물린 몸을 긁는다. 여린 피부가 빨갛게 부어오른 모습이 낯설다. 여정을 떠나기 전에는 벌레에 물려 본 적도, 사치스럽게 낮잠을 자 본 적도 없다. 철저히 정제된 삶을 살아온 그녀는 벼룩조차 신기하다.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잠에 빠져든다.

    깨고 나서야 류드밀라는 루슬란이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실망하고 울적해진 그녀는 다시 잠에 들어 볼까 하다가 돌아눕는다. 누운 채로 창밖을 보니 밖은 어두워져 있다.

    그때 단단한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다. 놀라서 눈을 뜨니 자디라가 입가에 검지를 대고 있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동물의 눈을 하고선. 어두워도 잘 보기 위해 변신 마법을 눈에만 푼 모양이다.

    류드밀라는 바짝 긴장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겁에 질릴 준비를 하는데 밖에서 여러 사람이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다른 방의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아마 안에 있던 투숙객인 듯한 남자가 거칠게 항의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살기가 느껴져서 깼더니 제가 낮에 팼던 놈이 친구를 데려온 모양입니다. 지금 방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어요.”

    그들의 방은 계단에서 세 번째로 떨어진 방이다. 빠져나간다 해도 복도에서 놈들과 마주칠 게 분명했다.

    “어떡하죠?”

    “창문으로 내려가죠. 제가 먼저 내려가서 붙잡아 주겠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풀지 않았던 짐을 창밖으로 휙 던진 자디라는 망설임 없이 밖으로 뛰어내린다. 아무리 영물이라고 해도 다치진 않을지 걱정된 그녀가 서둘러 밖을 내려다보자 호랑이는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나 있다.

    이제는 그녀가 뛰어내려야 할 차례이다. 창턱에 걸터앉자 높이가 실감이 나며 심장이 두근대고 식은땀이 흐른다. 놈들이 두 번째 방을 확인하는지 이번에는 새된 비명이 들린다.

    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맴돈다. 어두워서 자디라가 그녀를 못 보면 어떡하지? 뛰어내렸는데 그녀가 받아 주지 않으면? 다리가 부러진 채 죽게 되면 어떡하지? 다리가 부러진 채 돌아가도 루슬란 님이 반겨 주실까?

    마지막 질문은 그녀가 생각했을 때도 바보 같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날뛴다.

    그때 어떤 생각이 그녀로 하여금 망설임 없이 창문에서 뛰어내리게 만든다.

    루슬란에 대한 믿음. 그녀가 어떤 일을 당해도, 어떤 꼴이 되어도 그가 와서 구해 주고 사랑해 줄 거란 믿음.

    그 믿음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쏟아부은 아낌없는 사랑이 조금씩 쌓이고 쌓여 이뤄 낸 결과일 뿐이다.

    뛰어내리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시원한 밤공기가 얼굴을 스친다.

    자디라는 약간 놀란 얼굴로 그녀를 안전하게 받아 낸다.

    “쉽게 뛰어내릴 줄은 몰랐는걸요.”

    그러다 곧 다시 현실감이 그들을 닥친다. 놈들이 세 번째 방문을 열었는지 이번에는 남자와 여자의 항의가 동시에 터져 나온다. 자디라는 류드밀라의 손목을 끌고 마구간으로 향한다.

    “수레를 준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안장을 얹겠습니다.”

    순식간에 여우들에게 안장을 얹은 자디라가 류드밀라를 안장에 올려 준다.

    “저, 저는 말을 탈 줄 모르는데…….”

    “안장 손잡이와 고삐를 꽉 붙잡고 리듬에 몸을 맡기려 하십시오. 허벅지와 종아리로 감싸듯이 힘주는 것을 잊지 말고요.”

    자디라도 막 다른 여우에게 오르려는 순간 마구간 문이 벌컥 열리고 남자 다섯이 들어온다. 그들 손에 들린 투박한 도끼날이 위험하게 번득인다.

    자디라는 망설이지 않는다. 그들이 도끼를 챙긴 순간부터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남자들은 저들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온다. 자디라는 안장에서 내려와 류드밀라에게 속삭인다. 안장주머니에 약간의 식량과 돈 자루를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벨고로드 마을까지 리사가 류드밀라 님을 태우고 갈 겁니다. 거기서 만나도록 하죠.”

    류드밀라가 미처 막을 틈도 없이 리사가 출발한다. 마구 몸이 흔들려서 무서운 와중에도 그녀는 뒤를 돌아본다. 어두운 와중에도 똑똑히 보인다. 자디라가 순식간에 거대한 호랑이로 돌아가 남자들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그녀가 변신 마법을 풀었다는 건 남자들을 단 하나라도 살려 둘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계속 뒤를 돌아보고 있자 목이 뻐근해져 온다. 그러나 류드밀라는 마구간과 살육의 현장이 아예 검은 얼룩으로 남을 때까지 뒤를 보고 있다. 자디라에 대한 걱정이 솟아오른다. 남자들은 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괜찮을까. 그러나 리사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그녀는 매달려 있기에 최선을 다하느라 걱정할 여유도 사라진다.

    자디라가 말한 대로 리듬에 몸을 맡기려 노력하며 종아리와 허벅지로 리사의 몸을 감싸려고 해 본다. 그러나 그녀의 가는 다리는 별 힘을 주지 못하고 리듬도 너무 빨라 따라가기가 버겁다. 밤이라 사람이 거의 없는 마을을 순식간에 달려 빠져나온 리사가 속도를 조금 늦춘다.

    그제야 세 박자의 리듬이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류드밀라는 다리에서 힘을 풀다가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떨어질 뻔한다. 게다가 허둥대다 고삐마저 놓친다. 마구 펄럭이는 고삐를 다시 잡을 용기는 없어 안장 손잡이만을 꼭 붙든다. 리듬에 몸을 맡길 수 있기는커녕 위에 앉아 있는 것만 해도 버겁다.

    그러나 잔뜩 긴장한 몸은 처음 타 보는 말 위에서 어찌어찌 견딘다. 떨어지면 정말 목이 부러져 죽을 것 같아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버틴다.

    전에 말을 탄 기사들을 방 창문에서 내려다봤을 때는 정말 멋졌다. 어두운 들판을 달리는 지금, 말을 타는 일은 전혀 낭만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리사가 수레를 끌 때는 그저 역동적으로 느껴졌던 움직임이 이제는 그녀의 다리에서부터 척추를 따라 몸으로 전해진다.

    처음에는 자디라의 말대로 몸통을 감싼 다리가 저린다. 다음으로 안장 손잡이를 부서져라 움켜쥔 손과 팔이 아파 오기 시작한다. 반동이 전달되는 목과 어깨도 불안한 기미가 보이더니 뻐근해진다. 계속 흔들리는 허리도 부서질 듯 쑤시면서 결국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지금까지 얼마나 편한 여행을 해 왔는지 뼈저리게 깨닫는 시간이었다. 수레를 탔을 때 느꼈던 덜컹거림으로도 불편했던 몸이 한없이 부끄럽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을 잘할 수는 없는 법이지만 그녀에게 꼭 필요한 순간에 스스로의 한계가 느껴지자 실망스럽기만 하다.

    항상 그녀가 바라는 모습과 그녀의 실제 모습은 일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차이가 그녀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았었다. 지금은 말에서 떨어지면 죽을 거란 두려움 때문에 그 차이가 너무나도 싫고 원망스럽다.

    나는 왜 이 정도까지밖에 못하는 걸까. 나는 왜 여기까지인 걸까.

    그렇게 자괴감에 빠져들다가 류드밀라는 결국 포기하고 만다. 아프고 힘들어서, 그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탓하는 것조차 사치라고 느껴진다.

    여우에게 그만 멈춰 서 쉬자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예전의 그녀라면 견디지 못하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 문득 든 생각이 입을 닫게 만든다.

    여기서 그녀가 쉬었다가 혹시라도 자디라에게서 벗어난 남자가 그녀를 쫓아와 해친다면. 루슬란 님의 시력을 되찾을 기회를 영영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번 다쳐서 돌아온 그녀가 다시 여정을 떠나도록 허락해 줄 리가 없다. 그러면 루슬란 님은 영영 앞을 보지 못하는 채로 살아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류드밀라는 이를 악물고 참는다. 창문에서 뛰어내렸을 때와 똑같이, 어떤 의지가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그녀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은빛 신록의 뿔을 얻어 돌아가리라.

    얼마나 달렸을까. 이 정도 달렸으면 안전하다고 여긴 건지 리사가 속도를 늦춘다. 류드밀라는 거의 반쯤 정신을 놓고 안장에서 내려온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들어 올려 몸통 반대편으로 넘긴 그녀가 뛰어내리자 그 작은 충격으로도 몸이 부서질 듯 아파 온다.

    결국 주저앉은 그녀가 끙끙거리는데 섬세한 손이 그녀를 일으켜 세워서 부축해 준다. 오랜만에 보는 리사의 인간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원피스 대신 가죽을 덧댄 조끼와 어두운 색의 바지를 입은 그녀는 류드밀라를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변신하면서 떨어진 안장을 가져와 주머니에서 모포와 식량을 꺼낸다. 류드밀라가 웅크리고 떨고 있을 동안 그녀는 분주하게 움직여 나뭇가지와 마른 풀을 모아 온다. 약간의 마법으로 쉽게 불을 지피고 불가에 딱딱하게 언 육포를 녹인다.

    “괜찮으세요?”

    언제나처럼 새침한 목소리로 물은 리사에게 류드밀라는 고개를 저어 보인다.

    “난생처음으로 말을 탔으니 그럴 만도 해요. 힘들어도 이것 좀 드세요.”

    육포를 건네받으려고 무심코 팔을 뻗다가 그녀는 신음을 삼킨다. 그 간단한 동작도 못 해서 아파하는 스스로가 못내 한심스럽다. 결국 리사가 가까이 다가와 웅크린 그녀의 손에 육포를 쥐여 준다.

    류드밀라는 입맛이 없다고 투정 부리지는 않는다.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 오늘과 내일을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억지로 육포 한 조각을 다 먹은 그녀는 리사를 돌아본다. 목이 또 욱신거리지만 무시한다.

    “자디라 님과 레사 님은 괜찮으실까요?”

    리사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깟 도끼 든 인간은 호랑이의 적수가 되지 못해요. 괜찮을 거예요.”

    류드밀라의 걱정은 그런 무심한 말로 달래질 크기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혹시라도 부정 탈까 봐 말을 아낀다. 그녀가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리사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모포를 깔 테니 그 위에서 주무세요. 내일 해가 뜨면 바로 벨고로드로 갈 거예요.”

    말의 땀 냄새가 밴 모포 위에 누워 류드밀라는 잠을 청한다. 잠들기 전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과연 내일도 말을 탈 수 있을까, 이다.

    그날 밤에도 루슬란은 그녀를 찾아오지 않는다. 류드밀라는 잠에서 깨어난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닫지만 슬퍼할 겨를이 없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만 같다.

    몸이 산산조각이 나서 서로 달라붙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누군가가 그녀를 주먹으로 차고 발로 때리는 듯 정말 숨 쉬는 것조차 아파 온다. 일어나는 것도 겁이 나서 그녀는 가만히 누워 있는다.

    “깨어나셨으면 출발해야죠.”

    리사의 샐쭉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류드밀라는 숨도 작게 쉬면서 고통을 이겨 내 보려 한다. 숨을 쉴 때마다 배와 가슴과 옆구리 근육이 당겨서 미칠 것만 같다. 그래서 여우가 말했을 때 놀라서 숨을 크게 들이쉬곤 바로 끙끙거린다.

    리사는 멀쩡한 모습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는다.

    “아플 만도 해요. 그래도 일어나야죠.”

    류드밀라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킨다. 후들후들 떨리는 팔로 몸을 지탱하고 잠시 앉아 있다가 천천히 서 본다. 다리가 비명을 지른다. 리사를 돌아보자 여우는 뜻밖에도 측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류드밀라 님이 껍데기만 아니었어도 당장 회복 마법을 쓰는 건데. 저에게도 방법이 없네요.”

    “괜찮아요.”

    애써 말해 보지만 움직일 때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리사는 여전히 인간의 모습으로 그녀 주위를 서성거리며 지켜본다.

    “제가 말로 변하면 굴레도 씌우고 안장을 얹어야 하는데, 하실 수 있겠어요?”

    “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리사는 아기 걸음마를 지켜보는 엄마의 눈빛을 마침내 버리고는 방법을 설명해 준다. 쉽게 복대를 매는 요령까지 가르쳐 주고 나서야 여우는 말로 변신한다.

    안장을 매는 일은 복대를 맬 때 힘이 들긴 했지만 그나마 쉬웠다. 류드밀라가 헤맨 부분은 굴레에서이다. 재갈까진 리사의 입에 넣었는데 끈이 꼬여서 몇 번이고 다시 해야 된다.

    그래도 마침내 뺨 끈과 턱 끈도 제대로 매고 귀가 집히지도 않게 끈을 넘겨준다. 약간의 뿌듯함도 잠시 다시 저 등 위에 올라가 벨고로드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낯빛이 파리해진다.

    예상대로 말 위에 올라가는 것부터가 끔찍이도 아프다. 앉아 있을 때는 또 그나마 괜찮았는데 리사가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전날의 고통이 돌아온다.

    리사는 그녀를 배려해 주려는 듯 속보로 천천히 뛰어갔지만 그 통통 튀는 2박자 리듬에 몸이 더 불편하다. 전날 밤에는 3박자의 부드럽고 역동적인 리듬이었는데 지금 속보는 구보보다 반동이 더 심하다.

    “리사님, 혹시 더 빨리 가면 안 될까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류드밀라가 조심스레 부탁한다. 리사가 완전히 구보로 달리기 시작하자 그제야 약간 반동이 부드러워진다. 자디라가 말했던, 리듬을 느끼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최선을 다해 매달려 있었던 전날 밤과는 달리 이제야 류드밀라는 승마에 적응해 간다.

    그녀는 물론 천재와는 거리가 멀기에 여전히 몸이 쑤시고 자세는 어색했다. 그래도 나아지는 스스로의 모습이 그녀는 조금이나마 만족스럽다.

    리사는 점심을 거르고 최대한 빨리 벨고로드에 도착할 생각인지 가끔씩 속도를 늦춰 평보로 걷는 것 외에는 쉬지 않는다. 입맛이 없었던 류드밀라도 그 결정에 나름 만족한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마침내 저 멀리서 마을의 네모나고 뾰족한 실루엣이 보인다. 벨고로드 마을이다. 그들이 신록들의 숲을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를 마을이다. 숲과 벨고로드 마을 사이에도 다른 마을이 많았지만 모두 작고 여관조차 없는 그런 곳이었다.

    항상 자디라가 알려 준 여관에 머물었던 류드밀라는 마을 안에 도착하자 어디로 향할지 걱정부터 든다. 다행히 리사가 길을 알아 그녀는 여우가 향하는 대로 내버려 둔다.

    잊지 않고 자디라가 챙겨 준 돈주머니를 안장주머니에서 꺼내 방 값을 치른 그녀는 2층 방에 올라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진다.

    피로감과 함께 약간의 뿌듯함이 밀려온다. 자디라 없이도 그녀는 말도 타고, 마을에 무사히 도착하고, 여관방까지 빌린 것이다. 이제 쉴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그녀는 금세 잠에 빠져든다. 여관방 문을 잠그는 것을 까먹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이번에도 그녀의 낮잠에 루슬란은 찾아오지 않는다. 잠에서 깬 그녀가 대신 맞닥뜨린 것은 방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오던 남자 셋이다.

    류드밀라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른다. 남자들도 그녀가 깨어날 줄은 몰랐는지 잠시 당황한 눈치였다가 정신을 차린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달려와 입을 틀어막는다.

    더 놀라서 그녀가 바동거리자 그는 손에 힘을 더 주더니 달래듯이 낮게 말한다.

    “비명만 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이걸 놔줄게.”

    그녀는 패닉에 빠져 한동안 버둥거리다가 겨우 말을 알아듣고 몸에서 힘을 푼다. 그제야 남자가 손을 내린다. 류드밀라는 그가 어느새 제 머리맡에 있던 돈주머니를 슬쩍 가져간 것을 눈치챈다. 용기를 있는 것 없는 것 다 끌어모아 그녀가 입을 연다.

    “도, 돈을 돌려주세요.”

    “글쎄다, 이쁜이 아가씨.”

    제일 먼저 행동에 나선 만큼 아마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녀의 침대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돈주머니를 연다. 안에 든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그는 손바닥에 동전을 쏟아 하나씩 세어 본다.

    “이렇게 큰돈을 갖고 혼자 여행하다니. 순진한 건지 간덩이가 부은 건지.”

    “고, 곧 있으면 일행이 올 거예요.”

    최대한 위협적으로 들렸으면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에 더듬기까지 해 버렸으니 그렇게 들리기는 실패한 거나 다름없다. 류드밀라는 절망감에 눈물을 투둑 흘린다. 리사는 마구간에 있으니 도와주러 오지 못할 거고, 자디라는 아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 것이다.

    자디라가 딱 맞춰 도착하여 영웅처럼 나타나 줬음 좋겠지만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는 것을 그녀가 제일 잘 안다. 그녀의 울음에서 진실을 읽어 낸 남자들은 눈빛을 교환한다.

    “일행이 늦는 것 같은데? 그동안 우리랑 잠깐 얘기 나눠도 나쁠 건 없잖아.”

    남자들이 또 무얼 하려는 건지, 뭘 원하는 건지 류드밀라는 공포에 질린다. 돈을 다 세어 본 대장이 일행을 돌아보더니 씨익 웃는다.

    “이렇게 큰돈을 그냥 훔쳐 가면 형제단의 도리가 아니겠지. 우리 이 불쌍한 아가씨를 돕는 게 어떻겠어?”

    “좋습니다, 단장.”

    “괜찮은걸요.”

    남자 둘이 답하자 그들의 단장은 다시 류드밀라를 빤히 쳐다본다.

    “어디로 향하는 중이지, 이쁜이 아가씨?”

    거짓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곳이 마을 중 마지막 행선지인 만큼 다른 마을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류드밀라는 울음을 삼키며 대답한다.

    “신록들의 숲이요.”

    “오!”

    단장이 숱 많은 눈썹을 꿈틀하며 눈을 크게 뜬다.

    “우리도 마침 그곳으로 향하던 중이었어.”

    그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류드밀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그럼 이렇게 하지. 우리가 숲까지 아가씨를 안전하게 데려다줄 테니 그 대가로 우리에게 그 돈을 주는 거야.”

    “저, 저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어요. 그러니 돈을 돌려주세요.”

    남자가 순간 표정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린다.

    “자, 이쁜이 아가씨 너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돈을 내고 우리의 보호를 받든지 아니면 돈만 털리고 알거지가 되든지.”

    류드밀라는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린다. 그의 말과는 달리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다. 알거지가 되는 것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여관에서도 쫓겨나고, 자디라가 올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고 기다려야 하는 데다 자디라가 온다 해도 뾰족한 방법이 없다.

    원래 이곳에서 숲까지 가는 데 필요한 여분의 식량과 물품을 사기로 했었는데 무슨 수로 그걸 구한단 말인가. 그녀는 결정을 빨리 내린다.

    “돈을 내고 보호를 받을게요.”

    “좋은 생각이야. 이제부터 신록의 숲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 형제단이 널 책임지고 보호해 주겠어.”

    류드밀라는 고마워해야 할지 말지 모르겠는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저 남자들이 후에 과연 어떤 본색을 드러낼지 두렵다. 한편으로는 돈만 뺏긴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펜자 마을에서 만났던 자들보다는 적어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마음 깊숙이 자리 잡는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말은 타고 왔겠지, 이쁜이 아가씨?”

    “네, 타고 왔어요.”

    설마 남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말까지 훔쳐 돈을 들고 이대로 가 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 류드밀라는 덜컥 불안해진다. 그러나 형제단의 단장은 손을 불쑥 내민다.

    “난 키르라고 한다. 저쪽은 마트베이와 이반이고.”

    놀라고 경황이 없어 다른 남자들의 존재도 거의 잊고 있었던 그녀는 옆을 돌아본다. 둘 다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한 것은 똑같지만 마트베이는 건초 같은 금발에 이반은 갈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다. 머리카락 말고 눈을 보니 그들의 무뚝뚝한 시선에 움츠러들고 만다.

    헛기침 소리에 화들짝 놀란 류드밀라가 일전에 배운 대로 상대의 손을 살짝 쥐고 흔든다. 그러고 무얼 해야 될지 몰라 멀뚱히 키르를 쳐다본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연다.

    “지금은 일단 방에서 쉬고 있어. 우리가 식량과 물품을 살 테니까. 출발할 때가 되면 다시 찾아오지.”

    방을 나서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난 키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돌아본다.

    “혹시라도 몰래 빠져나갈 생각은 마. 네 방문 앞에 이반을 남겨 둘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고.”

    사실상 바로 앞에서 감시하겠다는 말과 다름없어 류드밀라는 하얗게 얼굴이 질린다. 나중에라도 자디라가 그녀를 찾아온다면 남자들과 싸워야 할 것이다. 펜자 마을에서 다치지 않았더라도 먼 여행길 후에 또다시 험한 일을 해야 하는 호랑이가 걱정된다.

    그녀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형제단의 단장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부하들을 데리고 방을 나선다. 그 머뭇거림을 살피기에 류드밀라는 놀라고 두려운 상태였지만 무의식에 단장이 아주 나쁘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는 인식이 남는다.

    다시 방에 혼자 남은 류드밀라는 몸을 웅크리고 다리를 감싼다. 앞으로의 일이 걱정된다. 전에 갖고 있던 의심이 스스로에 대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형제단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는다. 다른 사람을 이런 식으로 못되게 생각해 본 적은 처음이라 그녀는 당황스럽다.

    펜자 마을에서 그들을 공격했던 사내들은 그저 순수하게 악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별로 마음에 두지 않고 넘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돈을 빼앗고 그저 그녀를 내버릴 수도 있을 텐데 같이 가자고 나서 준 상황이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디라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세상에 악하기만 한 사람이 없듯이 착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자꾸 류드밀라를 괴롭힌다. 형제단의 남자들은 완전히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전에 만났던 폴레보이와 레쉬도 그녀를 도와주긴 했지만 완전히 착한 이들도 아니었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루슬란 님도 어딘가 악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녀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그러는 것이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이야, 류드밀라는 늘어지기만 하는 생각을 끊어 버리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그녀는 그저 은빛 신록의 뿔을 받아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 뿔로 루슬란 님을 치료해 주고 다시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아무런 걱정 없이.

    그러나 다른 의문이 그녀를 또다시 거슬리게 만든다. 다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을까? 루슬란 님이 그녀에게 숨기는 것이 있음을 명확히 아는데도 평소처럼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그 의문이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는 사실이 무서워 류드밀라는 몸을 움츠린다.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다. 그녀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과분하고 고마운 일인데 어떻게 감히 그런 걱정을 할까. 스스로가 약간 더 미워진 류드밀라가 한숨을 폭 내쉬는데 까치가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밖에서 운다면 이렇게 크게 나지 않을 텐데. 그녀는 놀라서 창가를 돌아본다. 열린 창문 앞에는 정말로 까치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고 까치는 도망가지 않는다. 그저 까만 구슬 같은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소식을 대신 전하러 왔어.”

    “무, 무슨 소식이니?”

    황궁에서 몰래 쥐나 고양이와는 말해 봤지만 새와 말해 보는 것은 처음이라 류드밀라가 어색하게 묻는다.

    “난 펜자 마을에서 날아오는 참이야. 호랑이가 다쳐서 너와 여정을 함께할 수가 없다네. 상처가 낫는 대로 따라갈 테니 먼저 갈지 기다릴지 알려 달래.”

    류드밀라는 입술을 꼭 깨문다. 조금은 예상했던 일이지만 막상 사실로 전해 들으니 두려움이 커진다. 이제 정말 형제단과 남은 여정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자디라가 오고 모든 상황이 해결되길 바라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어졌다.

    “먼저 출발할 테니 따라오더라도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고 해 줘. 그럼 위험해질 수도 있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다니게 되어서 앞으로 소식은 더 전해 듣지 못할 것 같아.”

    까치는 꾸르륵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부리를 연다.

    “무슨 상황인데? 호랑이가 궁금해할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이라니 누구?”

    “나 형제단에게 돈을 뺏겼어. 그 사람들이 날 신록의 숲에 데려다주기로 해서 그러는 거야.”

    자디라가 걱정하고 무모한 행동을 할까 봐 사실을 말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거짓말을 즉석에서 꾸며 내는 것은 그녀의 특기가 아니다. 하는 수 없이 털어놓자 새는 다시 한번 꾸르륵거린다.

    “호랑이가 또 난리를 치겠네. 알겠어, 그럼.”

    까치는 날개를 펴고 순식간에 창가에서 멀어진다. 그 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던 류드밀라는 별안간 배가 아파 와 허리를 굽히고 겨우겨우 침대까지 간다. 한꺼번에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지 복통이 점점 심해진다.

    그녀는 누워서 눈을 감고 울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자디라는 다쳤고, 돈은 빼앗겼고, 완전히 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악한 사람들에게 그녀의 운명이 달려 있다. 루슬란 님의 운명조차도.

    그 사실이 서러워서 결국은 울음이 터진다. 한참을 울다가 지쳐 류드밀라가 잠이 들었을 때, 이번에는 루슬란이 그녀의 잠에 찾아온다.

    “울다가 잠이 드셨군요.”

    오랜만에 본 루슬란은 다정한 목소리로 걱정을 건넨다. 아직도 울음의 여파가 남아서, 그리고 오랜만에 그를 봐서 벅차오르는 마음에 류드밀라는 고개만 끄덕인다.

    “무엇 때문에 그리 슬피 우셨을까요.”

    조곤조곤 묻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지만 분위기가 달라져 있다. 비록 며칠 보지 못했어도 그가 달라짐을 느낀 류드밀라는 바짝 긴장한다. 그 묘한 기시감의 원인이 무엇일지 열심히 고민하며 그녀는 그간의 이야기를 띄엄띄엄 풀어놓는다.

    류드밀라는 이야기 중반쯤 그의 어디가 달라졌는지 알아챈다. 이야기를 끝마치기 전까지, 그리고 그가 한마디를 건넬 때까지 그녀는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차분한 목소리로 이르는 루슬란의 목소리에는 거리감이 담겨 있다. 여전히 다정하지만 상냥하지는 않은, 차가운 단절이 느껴진다.

    “이제 여정을 그만두고 돌아오셔요, 나의 껍데기 님.”

    당황한 류드밀라가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루슬란을 바라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신록의 뿔을 구해야 루슬란 님의 눈을 치료할 수 있잖아요.”

    “제 눈은 뜨지 못해도 괜찮아요. 저는 이대로 살아도 정말로 상관없어요.”

    그가 한 조용한 대꾸는 그녀를 더욱더 애가 타고 슬프게 만든다.

    “제게는 상관있어요. 저는 안 괜찮아요. 루슬란 님께서 황궁으로 돌아가셔야 한다면서요. 저를 구하려다 이렇게 되었는데, 제게는 루슬란 님의 눈을 치료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루슬란의 입매가 조금 더 굳어진다. 제가 한 말은 그를 위해 주는 말일 뿐인데, 그가 그녀에게 더 거리를 두는 까닭을 모르는 류드밀라는 의아한 마음밖엔 들지 않는다. 그녀는 초조해서 말을 더 얹으려고 하지만 루슬란이 먼저 입을 연다.

    “앞을 못 봐도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게요. 그대는 아무런 걱정 말고 그저 제 곁에만 있어 주면 되어요.”

    아, 이 말을 언제인가 들었었는데. 순간 류드밀라의 의아함이 사라진다. 그를 위해 주는 말을 했음에도 루슬란이 거리를 더 두는 까닭은, 그녀가 그에게 저항해서이다. 그의 말에 반대해서이다.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이 더욱더 뚜렷해진다. 그가 마치 예쁘장한 인형과 같이 그녀를 여긴다는, 묘하게 불편한 감정. 그녀를 아껴 주긴 하지만 사람 대 사람이 아닌 제 뜻대로 휘두를 수 있는 새장 안의 새처럼 대한다는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 생각을 한 후로부터 류드밀라는 예전처럼 그의 말을 감사히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그저 곁에만 있어 달라는 말에 안도하지 못하고 아무런 걱정 말라는 말에 시름을 놓지 못한다.

    그녀에게로 향하는 걱정이 더 이상 고맙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가 무서워 몸을 살짝 떨면서도 류드밀라에게 든 의심이 있다. 어쩌면 루슬란의 걱정이 이기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녀를 붙들고 있으려는, 눈이 닿는 곳에만 두려는, 성장을 막고 순종을 강요하는 이기심에서 말이다.

    류드밀라는 왼손 아래에 덮인 오른손으로 주먹을 꼭 쥔다. 손이 너무 작아 주먹 쥔 모습이 루슬란에게 보이는 것도 모르고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종류의 배신감과 회의감에 힘들어한다. 정말 그가 이기심에 그런 말을 한 것인지 궁금한 동시에 자세히 알고 싶지 않다.

    변화한 그녀는 진실과 마주한 후에 닥칠 일이 두렵다. 예전의 류드밀라라면 진실과는 상관없이 그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의 애정을 받을 수 있다면 만족했을 것이다. 거짓된 사랑이라도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좋았고 다정한 시선에 행복해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기심에서 비롯된 사랑이 그녀에게 루슬란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면, 받고 싶지 않다. 스스로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뚜렷이 알듯, 달라진 이유도 그녀는 안다.

    류드밀라는 원래 주문에 걸려 정해진 대답만 할 줄 아는 도자기 인형처럼 고운 모습만을 보여 주며 그의 곁에 머물러야 했다. 그렇게 그의 아이를 잉태해 제국의 발전에 기여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발상이 잘못되었다고 루슬란이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이가 있으면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강요받았던 일들은 옳지 않다고, 가장 어려울 때 내는 용기의 중요함을 그가 알려 주지 않았던가.

    모두 그의 말이었다. 류드밀라를 성장시킨 건 모두 루슬란의 다정함과 친절이었다.

    느슨하게나마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끈을 놓치고 추락한 기분에 불안하다. 류드밀라는 분명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

    내가 용기를 낼 수 있게 도왔던 이가 왜 내 신념을 가로막는 벽이 되었을까? 나에게 울어도 괜찮다는 말을 해 준 이가 왜 나로 하여금 눈물을 참게 만들지? 처음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 방법을 가르쳐 준 이가, 왜 내 앞에 열쇠를 들고 있을까?

    용기가 정해져 있는 선을 넘었구나. 내 눈물이 그에게 내리는 비가 되었구나. 열쇠가 없어도 열리는 문을 다시 잠그려고 왔구나.

    어디가 언제부터 엇나간 것일까.

    루슬란이 류드밀라에게 굴레를 건넸을 때부터,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엇나갔다.

    배신감 대신 우울한 의문과 잔인한 답들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그녀가 오랫동안 대답을 안 하자 루슬란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데도 그렇다. 그의 반응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할 이유를 더는 못 느껴서 그렇다. 류드밀라는 오랜 고민 끝에 조그맣게 한마디를 한다.

    “제가 그저 곁에만 존재하길 바라신다면, 제 존재는 루슬란 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의도와 다르게 말이 날카롭게 나간다. 대신 울지 않고 말을 했지만 뿌듯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소리 내어 우는 것보다 속으로 삼키는 울음이 몇 배는 더 비참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루슬란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절제된 음성으로 대꾸한다.

    “어떤 대답을 듣고 싶으셔서 제게 이런 질문을 하시나요? 제가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전에도 수없이 확인시켜 드렸는데 말입니다.”

    그도 알아챘구나. 전처럼 안심시켜 주지 않고 이리 대하며 말하는 걸 보니 그녀가 그의 통제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구나. 씁쓸함을 삼키며 류드밀라는 몸을 곧게 펴고 조금 더 당당해지려 노력한다.

    “제가 듣고 싶은 대답은 진실이에요. 서로 거짓됨 없이 대하기로 약조하셨잖아요.”

    “그대가 제 진실을 감당하지 못할 걸 알기에 말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똑같은 바람을 가지실까요?”

    “네.”

    망설임 없이 한 대답에 루슬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담담한 말로 류드밀라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을 뿐이다.

    “저는 그대를 사랑해요. 하지만 이리 구는 모습을 보고 나니, 제 사랑을 그대가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이제는 잘 모르겠군요.”

    그녀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짓씹는다. 각오했던 마음은 그의 소름 끼치도록 무감정한 말 앞에서 무너진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류드밀라는 내버려 두고 하고 싶은 말에만 집중한다.

    “루슬란 님께서 제게 사랑이 뭔지 가르쳐 주셨잖아요. 제가 배운 사랑은 상대의 자격을 따지는 사랑이 아니었어요.”

    “제가 그대에게 사랑을 가르쳤다면, 상대에게서 벗어나려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진 않았을 거예요.”

    류드밀라는 방금 들은 말이 정말 그의 입에서 나왔는지 의심할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흐느낌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터져 나와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다. 몸을 가누기 힘들어 손을 짚었는데도 깊숙한 안쪽에서부터 아픔이 올라온다.

    “전 루슬란 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어요.”

    진실이 그녀의 신념에 그릇되면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진실과 마주하면 옛날의 그가 가르쳐 줬던 용기를 품고 떠나려 했다. 진실만 아니라 그녀의 판단도 그릇되었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오만과 오기라는 것을, 왜 집어삼켜진 후에야 깨달았을까.

    그럼에도 뒤로 물러날 수는 없어 류드밀라는 힘들게 그 한마디를 토해 낸다. 많은 것이 담겨 있는 말이다. 전 루슬란 님으로부터 벗어나려 한 것이 아니에요. 루슬란 님이 만든 새장 안이 갑갑하다고 느꼈을 뿐이지, 루슬란 님이 미운 것이 아니었어요. 그저 루슬란 님께서 알려 준 대로 했을 뿐인 저를, 왜 틀렸다고 하시는지 궁금했어요.

    어느새 그녀는 울음 사이사이로 생각을 말로 빚어내고 있다. 생각이 말로 이루어져 방울방울 입 밖으로 나온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단어의 덩어리들이다.

    “그러니 제발 제가 들은 말이 진실이 아니라고 해 주세요. 실수였다고, 또 다른 지독하리만치 짓궂은 농이었다고 말씀해 주세요. 제게 낯선 모습을 보이는 걸 그만둬 주세요. 저는 정말로 루슬란 님의 뜻을 거스르려던 의도가 아니었어요.”

    그때 루슬란이 픽 웃는다. 원래도 약간 올라가 있어 친절한 상을 띠던 입꼬리를 끔찍한 의도를 담아 휜다. 상대를 한없이 하찮게 여기는 그 미소에 류드밀라의 몸이 차갑게 식는다.

    “제가 그렇게 하길 바라시면, 사과하셔요.”

    그가 그녀에게 원하는 사과에 담긴 모든 것이 류드밀라는 혐오스러워진다.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인정하고 옳다고 믿는 뜻을 굽히길 그녀는 거부한다. 루슬란이 그녀를 무참히 짓밟으려 지은 미소가 그녀의 결심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싫어요.”

    이번에는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 반응을 두려워할 새도 없이 류드밀라가 말을 쏟아 낸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어요. 저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고 루슬란 님의 반응을 보니 제 신념이 옳았네요. 저는 의지와 생각을 가진 인간이고 루슬란 님이 가둬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생명이 아니에요. 처음으로 의견을 내 봤고, 그 의견이 틀리길 간절히 바랐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울음도 거의 가신 목소리가 힘 있게 들렸으면 한다. 아마도 그들의 마지막 기억일 이 순간에 자신 있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가는 대에 얹어져 휘청거리는 들꽃과도 같다. 거센 바람은 놀랄 만큼 잘 견디다 짓밟혀 발자국과 함께 남아 버리는 그런 들꽃 말이다. 루슬란의 말은 이제까지 바람이었을 뿐이다. 그의 발걸음은 가볍고 무자비하다.

    “그래요. 그대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고 그 신념은 옳았어요. 그런데 그 신념은 누가 가르친 것이지요? 그대가 행동할 수 있게 누가 도와줬나요? 의견을 내는 법은 혼자 알았을 리가 없는데 말이죠.”

    류드밀라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또 다른 진실을 그가 너그러운 미소와 함께 친히 입에 올린다.

    “제가 그대를 가르쳤지 않나요. 그대를 돕고 모든 것을 알려 줬는데, 이리 깜찍한 말로 대드니.”

    작은 한숨을 지은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그대는 제 사랑을 물었는데 먼저 거둬진 쪽은 그대의 사랑인 것 같군요.”

    그녀는 두려움을 꾹 억누르고 한참 동안 쥐고 있었던 주먹을 편다.

    “아뇨, 저는 루슬란 님을 여전히 사랑해요. 그래서 놓아 드릴게요.”

    류드밀라가 그 말을 하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뭔가가 일렁인다. 흐릿한 자국과도 같은 푸른빛이 남는다. 그녀는 고르지 못한 숨을 얕게 쉰다.

    “여정을 그만둘게요, 루슬란 님이 바라신 대로요. 그리고 루슬란 님과의 연도 그만두겠어요.”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심신이 이상하게 편해진다. 류드밀라는 마지막 인사라 마음먹곤 손을 뻗는다. 그가 그녀에게 해 왔듯 루슬란의 뺨을 한 손에 담는데 익숙한 물기가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푸르른 잔상이 나타난다. 무표정한 얼굴 대신 눈물이 가득 고이다 흘러내려 엉망인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진다.

    그녀가 놀라서 서둘러 손을 떼고 물러난 순간 다시 루슬란의 냉랭한 표정이 돌아온다.

    “그렇게 해요. 잠에서 깨면 구출대가 도착해 있을 거예요. 그들을 따라 산신님의 성역으로 돌아가요. 가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사셔요, 나는 그곳에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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