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은빛 신록
그들은 그렇게 산신의 오두막에 머무르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매일매일이 류드밀라에게는 새롭고 신기하다. 하루는 정자로 소풍을 나가고, 하루는 성역 전체를 둘러보고, 하루는 성역에 사는 영물들을 만나 본다.
많고 많은 산의 영물들 중에서 특히 그녀의 마음을 빼앗은 영물은 여우이다.
부풀린 하얀 소매와 황금 자수가 놓인 빨간 치마를 입고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여우들은 가끔씩 춤을 췄다. 둘씩 팔짱을 끼고 언덕 아래 풀밭에서 스텝을 밟는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이 그녀를 매혹시킨다.
방해가 될까 봐 춤을 출 때는 먼발치에서 루슬란과 함께 지켜본다. 그러다 춤이 끝나서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가 바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결국 그녀가 포기하고 루살카들과 시내에서 놀고 있으면 여우들은 보란 듯이 다시 나타나 서로의 머리를 꽃으로 장식해 주거나 저들끼리 속닥거린다.
실망한 류드밀라가 풀이 죽어 있자 루살카들은 여우에 대한 욕을 한 바가지를 쏟아 낸다. 그럼 또 기운을 차리고 루살카들과 노는 그녀지만 마음 한구석의 서운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래도 그녀에게 마음을 연 루살카들 덕분에 그녀는 매일매일을 새로운 경험을 하며 보낸다. 시내에 풀잎으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돌리기도 하고 작은 나무배를 띄워 누가 누가 멀리 가는지 보기도 한다.
하루는 제일 어린 루살카가 재밌는 생각이 있다며 그녀에게 폴짝폴짝 다가온다.
“시내에 둑을 쌓아 물길을 막았다가, 한 번에 터트리면 재밌을 것 같아.”
마침 그때는 루슬란이 산신과 이야기를 나누러 간 참이라 류드밀라는 심심하던 참이다. 흔쾌히 좋다고 한 그녀는 팔을 걷어붙이고 돌멩이를 모아 온다.
그렇게 한참이나 시내를 가로질러 돌과 흙으로 둑을 쌓고 있을 때이다. 저 멀리 정자 쪽에서 사슴의 도움을 받으며 걸어오는 루슬란을 발견한 그녀는 신이 나서 그에게로 달려가 안긴다.
성역에서 지내면서 부쩍 밝아지고 용감해진 그녀의 행동이 사랑스러워 그는 마주 안아 준다.
“오늘은 또 무얼 하고 계셨나요?”
“시내에 둑을 쌓아서 물길을 막았다가 한 번에 터트리려고요.”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다정했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겁을 먹은 류드밀라가 포옹을 풀고 그를 올려다본다. 루슬란에게선 전에 찾아볼 수 없던 날 선 분위기가 감돈다.
“루슬란 님?”
그는 말없이 손을 들어 올린다. 그의 손에서 나온 빛줄기가 시냇물까지 뻗어 나가 물길을 가로막고 있던 둑까지 닿는다. 둑을 확인한 그가 입을 꾹 다문다. 상상도 못 할 만큼의 거대한 분노를 간신히 참는 얼굴이라 그녀는 떨면서 물러난다.
“왜, 왜 그러세요…?”
루슬란은 말없이 손을 획 움직여 그녀가 고생해서 쌓은 둑을 단번에 무너뜨린다.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물들이 마구 흐르는 소리가 그들 사이를 섬뜩하게 채운다.
그 물소리를 들은 그는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사람처럼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린다. 한 번도 그녀 앞에서 흐트러진 적 없던 호흡이 가빠져서 불규칙하게 뱉어진다.
그때 그의 눈에서 새까만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류드밀라는 다가서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얼음처럼 굳어 그를 바라보기만 한다.
새까만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그녀를 바라본 그가 별안간 두 눈을 뜬다. 그러나 그 눈은 흰자위가 없으며 은빛도 아니다. 그저 끝없는 심연 두 개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류드밀라를 집어삼킬 듯이 위협한다. 새까만 구멍이 눈이 있을 자리에 뚫린 것만 같다. 그녀는 비명을 겨우 삼키며 몸을 바들바들 떤다.
루슬란의 주위에 있던 풀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듯이 말라 죽어 간다. 죽은 풀들에서 올라온 매캐한 냄새가 공기 중에 흩어지는 가운데 그녀는 천천히 뒷걸음질 친다.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그의 소름 끼치는 시선이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루슬란이 뿜어내는 악한 기운이 점점 넓어지며 그녀가 물러서는 속도를 따라잡는다. 발이 꼬여 뒤로 넘어진 그녀는 덜덜 떨면서 뭐라고 그를 진정시킬 말을 해 보려 한다. 그러나 목은 꽉 잠겨 있고 그의 기운은 점점 다가온다.
그때 초록색 빛줄기가 날아와 그의 뒷머리에 부딪혀 흡수된다. 루슬란은 휘청, 하며 잠시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진다. 눈은 다시 감긴 채이다.
“루슬란 님!”
그제야 그녀를 꼼짝 못 하게 하던 마수도 풀린다. 벌떡 일어선 그녀가 그에게 향하려는 순간 산신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는다.
“아이야, 가까이 가지 말거라. 위험하다.”
“핀 님…….”
무서우니 산신이란 말보다 며칠 전에 알게 된 그의 이름이 먼저 튀어나온다. 결국 제 몸을 감싸 안으며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를 뒤로하고 산신은 루슬란에게 다가간다.
산신은 정화 마법을 하는 듯 그의 이마와 감긴 눈가에 손을 얹고 기운을 불어넣는다. 그러고는 손수 의식이 없는 루슬란을 안아 올린 그가 그녀를 돌아본다.
“나와 함께 오두막에 가자꾸나.”
그녀가 비척비척 걸어가 그의 옷자락을 살포시 쥐자마자 산신이 이동 마법을 쓴다. 원래 쓰던 방이 아닌 비어 있었던 방 침대에 그를 눕힌 산신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류드밀라를 바라본다.
“왜 갑자기 그가 폭주했는지 이유를 아느냐?”
“제, 제가 아마 시내에 둑을 쌓아서 그런 것 같아요…. 둑이 안 좋은 기억을 불러냈을 수도…….”
그러다 류드밀라는 언젠가 그가 보여 줬던 강의 모습을 떠올린다. 인간이 쌓아 올린 댐에 가로막혀 버렸던 강. 그래서 그가 그렇게 분노했던 것이다. 정확히 어떤 안 좋은 기억을 불러냈는지는 모르지만 강 근처에서 살며 댐 때문에 화를 입었던 걸 수도 있었다.
그녀의 잘못이다. 그녀가 아무런 생각 없이 둑을 쌓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간직해 왔던 스스로에 대한 미움이 수면 위로 올라오려 고개를 서서히 든다. 지금 자책감에 빠져 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 그나마 그 우울한 감정을 내리누를 수 있다. 하지만 류드밀라는 안다. 그 감정은 애써 잊으려 해도 돌아올 때마다 더 거대한 부피로 그녀를 짓누른다는 것을.
산신도 그녀의 말을 이해했는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루슬란을 흘끔 본다.
“내가 응급 처치만 해 놓은 상처가 그의 회복력으로 저절로 치유되길 바랐는데, 더 악화된 모양이구나. 이대로 가다간 위험한 상태에 다다를 수도 있다.”
“산신님께서도 방법이 없으신 건가요?”
그녀가 걱정스럽게 묻자 산신은 고개를 살짝 젓는다.
“물론 성역에 머무르게 하면서 회복에 전념할 수는 있지만 황궁으로는 못 돌아갈 거다.”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요? 이곳에서 계속 살면 안 되나요?”
산신이 얼굴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을 한다.
“아직도 그가 네게 말을 해 주지 않았구나. 그럼 자세한 건 나도 말할 수 없으나, 그는 이그나티 제국에 묶여 있는 몸이다. 대대로 황제들과 해 온 약속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어.”
류드밀라는 무슨 약속을 했는지, 젊은 그가 어떻게 대대로 황제들과 약속을 해 왔다는 건지, 왜 제국에 묶이게 되었는지 모두 궁금하다. 전부터 느껴 왔던 불안함도 커진다. 껍데기 마을에서 보았던, 똑같이 루슬란에게 보내졌다는 노파들. 루슬란이 보기보다 나이가 많을 거란 생각은 전부터 해 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나이가 많건 적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로지 그를 살리는 데 힘을 쏟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핏기 없는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흘깃 보자 질문들은 삼켜진다. 그녀는 결정을 내리고는 산신을 똑바로 본다.
“제가 성물을 찾으러 갈게요. 전에 말씀하신 대로 성물을 찾아 오면 그를 완전히 치료할 수 있는 거잖아요.”
“위험할 것이야. 너는 껍데기로 살면서 한 번도 바깥세상을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이 없지 않느냐. 게다가 너도 들었겠지만 인간들은 너 같은 껍데기에게 굉장히 가혹하다.”
“괜찮아요. 마법으로 머리카락을 바꿔 주세요. 아니면 두건으로 가리고 다닐게요. 허락해 주세요, 이 방법밖에는 없어요.”
산신은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다. 그의 결정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류드밀라는 어렴풋이 알아챈 사실을 되새긴다. 오두막에서 지내면서 배운 것인데, 신들은 인간의 운명에 직접적으로 간섭을 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다의 여신이 그녀를 성에서 직접 구해 주지 않은 것도, 산신이 직접 성물을 찾아 루슬란을 치료해 주지 않는 것도 다 비슷한 이유일 터이다.
그러기에 그녀가 이 방법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고, 또 산신이 그녀의 결정을 고려해 보고 있는 것이다. 호기심 많은 그녀의 마음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찾아 헤매다가 산신이 고개를 들자 궁금증도 산산이 흩어진다.
“좋다. 허락해 주겠다. 산신의 가호도 내려 주마. 한시가 급하니 오늘 준비해서 내일 새벽에 떠나거라.”
“왜 한시가 급하죠? 성역에 머무른다면 루슬란 님은 안전한 것이 아닌가요?”
산신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밖에 강의 아이를 찾는 방이 나붙었다. 황제가 그를 수배하고 있단 말이다. 늦게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황제의 분노는 커질 것이고, 강의 아이는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니 화를 입게 될 거다.”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류드밀라의 물음에 산신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약간 찌푸린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강의 아이는 이그나티에 묶여 있는 몸이기에 황궁을 오랫동안 떠나 있을 수가 없어. 게다가 내 성역은 요괴로부터 안전한 것이지 인간에게는 취약하다.”
류드밀라는 저도 모르게 제 몸을 껴안는다. 그녀에게 이렇게 막중한 책임이 지워졌던 때가 있었나. 그녀에게 한 이의 생명과 처지가 달려 있다는 사실에 절로 어깨가 무거워진다.
그녀의 두려움을 본 산신이 걱정스레 말을 얹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방도를 찾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거의 반쯤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을 하고선 그녀는 서둘러 돌아선다. 그러지 않으면 공포가 커져 포기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루의 나머지는 정신없이 흘러간다. 그들은 먼저 계획을 짠다. 청동 고래의 수염은 더 찾기가 까다로우니 은빛 신록의 뿔을 찾기로 정한다. 일단 숲에서 은빛 신록을 찾고, 산신이 준 증표를 보여 주며 부탁하기로 한다.
산신은 그녀에게 동행을 붙여 준다. 비상시에 그녀를 지켜 줄 호랑이 영물과 말로 둔갑하여 그녀와 호랑이를 숲까지 데려다줄 여우 둘.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호랑이는 수레 위에 타는 것이 무슨 꼴이냐고 툴툴거렸지만 산신의 엄한 눈초리에 입을 다문다. 류드밀라는 그녀와 유일하게 말을 트지 않은 동물인 여우가 동행이 된다는 사실이 불안했지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산신은 류드밀라에게 간단하게나마 인간 세상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인간인 그녀에게 산신이 인간 세상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이 퍽 우습게 여겨졌으나, 그만큼 그녀는 황궁 바깥에 대해 잘 몰랐다.
먼저 산신은 경제관념에 대해 가르친다. 물건을 어떻게 사면 되고, 사기당하지 않는 방법과 그녀에게 필요해질 물건들의 가격도 대략 알려 준다.
다음으로 그는 예절에 대해 가르친다. 이 부분은 류드밀라도 잘 아는 것이었지만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낮출 필요가 없다고 말해 준다. 여정 중 그녀의 신분은 아픈 남편을 위해 치료제를 찾아 나선 자유민의 아내이고 비렁뱅이나 술꾼에게까지 낮게 다가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 그는 옷 입는 법에 대해 가르친다. 류드밀라가 황궁에서 입었던 속살이 비치는 하얀 원피스 대신 여우들이 입던 것과 비슷한 사라판과 결혼한 여인들이 머리에 쓰는 장식인 코코슈니크도 주며 방에서 혼자 입고 벗는 법을 연습해 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신분 제도에 대해 가르친다. 영주와 귀족, 농노와 자유민, 기사와 성직자에 대해 알려 준다. 또 그들을 만났을 때 각각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물론 마법사와 마녀는 피하라고도 가르친다. 밤에 이동하는 것이 위험해 어차피 내일 아침에 출발해야 하기에, 이런 이야기를 해 줄 시간이 있다는 점이 류드밀라에게는 다행으로 느껴진다.
그 밖에도 산신은 해가 질 때까지, 류드밀라가 짐을 쌀 동안에도 계속 이런저런 인간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준다. 그녀는 귀 기울여 듣고 자세히 기억해 둔다. 그가 한 말들이 루슬란을 구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란 사실을 알기에.
이야기의 끝에 산신은 그녀에게 돌아와야 할 기한도 덧붙여 말한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한 달. 한 달 안에 은빛 신록의 뿔을 갖고 돌아와야지 루슬란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넉넉할지도 모르는 기간이지. 이곳에서 신록의 숲에 가는 데엔 낮에만 이동해도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기억하렴, 신록들은 인간들에게 사냥당한 만큼 우호적이지 않을 거다. 특히 그들의 수장인 은빛 신록은 더 호전적이고. 네가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류드밀라는 산신의 경고를 들으며 황당한 상상을 해 본다. 루슬란이 병석에서 일어나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사실 그녀를 겁주기 위해 한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상상을. 그러면 그녀는 놀라고 안심되어서 울겠지. 그가 다정히 달래 줬으면 좋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 그녀는 정신을 차린다. 그런 상상은 현실이 되지 않고, 그녀가 은빛 신록의 뿔을 가져오지 않는 이상 후에도 없을 것이다. 씁쓸한 마음과 다시 한번 드는 자책감을 억눌러 본다.
한평생 상상과 기대와 이뤄지지 않을 희망 속에서 살았다. 그런 류드밀라의 가장 황당하고 억지스러운 꿈조차 현실로 이뤄 줬던 루슬란이 지금은 그녀 때문에 아프다. 그를 구해야 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고 류드밀라는 산신이 선물한 슈바(털 코트)와 발렌키(부츠)를 침대 옆에 가지런히 모아 두고 침대에 눕는다.
이제야 그녀가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이 겨우 실감이 나기 시작했는데 내일 새벽에 출발이라니. 그녀는 두려워해야 할지 설레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은 점점 커져 간다.
‘루슬란 님만 생각하자. 그분을 위해서 해 보는 거야.’
공포가 그녀를 짓누를 때마다, 잠들지 못하게 만들 때마다 류드밀라는 이렇게 되뇐다. 그리고 결국은 단잠에 빠져든다. 험난한 세상이, 앞에 펼쳐질 내일이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는 와중에도.
***
류드밀라는 저절로 잠에서 깨어난다. 루슬란이 옆자리에 없는 침대는 허전해서 금방 눈이 떠진다. 창밖을 보니 밖은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고 있고 조금 열어 둔 창틈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잠시 이불 밖으로 내민 맨발을 스치는 서늘한 공기를 느끼며 가만히 있던 그녀에게 현실감이 닥쳐온다. 그녀는 이제 성역을 떠나서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낯선 일들. 거미줄에서 껍데기 여인들이 모여 사는 것만 보아도 겁을 먹었던 그녀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지난밤 잠들기 전까지 애써 무시했던 의문이다.
그 의문이 해결되고 떠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그런 의문보다 루슬란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재차 다짐하던 와중, 부드럽게 노크를 하는 소리가 그녀의 걱정을 방해한다.
“들어오세요.”
사슴이 들어와 그녀의 준비를 도와준다. 성역에 사는 대부분의 영물들은 변신에도 능하고 말도 할 수 있었지만 이 사슴은 마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때문에 변신에도 서투르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그녀에게 류드밀라는 무언가 동질감을 느낀다.
그러나 마법을 아예 못 하는 저보다는 나은 처지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 괴롭다. 고개를 휘저어 울적한 생각을 털어 버린 그녀는 나갈 채비를 마치고 사슴에게 고맙다고 인사한다.
오두막 앞으로 나가 보니 말 두 마리가 끄는 짐수레와 인간의 모습을 한 호랑이가 산신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 짐을 수레에 올리고 호랑이 옆에 탄 그녀를 산신이 지켜보다 입을 연다.
“내가 준 증표는 잘 챙겼느냐.”
“네.”
류드밀라는 간밤에 소중히 품고 잤던 산양의 털 한 올이 담긴 펜던트 목걸이를 보여 준다. 산신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수레 앞에다 초록색 원을 그린다. 원 반대편은 황량해 보이는 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산 밖으로 이어지는 입구이다.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면 신록들의 숲이 나올 거다. 여우들이 방향을 알 거야.”
류드밀라는 앉은 채로 고개를 깊숙이 숙인다.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해요.”
“내 가호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산신이 말로 변신한 여우들에게 손짓하자 수레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초록빛 입구를 통과할 때 눈을 감았다가 뜬 류드밀라의 눈앞에 흙길이 펼쳐진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산의 모습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인다.
오두막의 침대에 누워 있을 루슬란이 떠올라 류드밀라는 마음이 아프다.
‘제가 꼭 성물을 찾아올게요.’
조용히 다짐하던 그때 뭔가 낯선 감정이 뱃속에서 설설 피어오른다. 설렘. 처음으로 새로운 곳에 가 본다는 붕붕 뜬 느낌. 그러나 그 설렘의 중심에는 두려움이 똬리를 틀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 준비를 하고 있다.
애써 그 두려움을 무시하고자 류드밀라는 어제 알게 된 호랑이 영물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 본다.
“자디라 님?”
“무슨 일입니까?”
진한 주홍빛이 도는 금발에 무뚝뚝한 인상을 한 여자가 고개를 그녀 쪽으로 돌린다. 그녀는 타오르는 듯한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하곤 움츠러들지만 할 말은 계속한다.
“수레는 좀 괜찮으세요? 어제 타기 싫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나서…….”
자디라는 콧잔등을 잔뜩 찌푸려 경멸 어린 표정을 한다.
“마음 같아서는 차라리 제 등에 류드밀라 님을 태우고 가고 싶습니다만……. 도무지 인간들이 만든 도구에는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거대한 호랑이일 때 그녀의 모습을 보았던 류드밀라는 그 등 위에 탄다는 생각에 별안간 아찔해진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고생을…….”
“괜찮습니다. 산신님의 부탁인데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저도 상황을 대충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자디라는 땋아서 뒤통수에 고정시킨 머리카락 묶음에서 삐져나온 가닥을 넘기며 무심하게 말한다.
“감사해요.”
이 말을 끝으로 류드밀라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한다. 최근에 그녀의 인간관계는 루슬란과 루살카들로 한정되어 있어, 호랑이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다.
침묵이 이어지고 그녀는 초조하게 제 발끝과 무표정한 자디라의 옆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머리를 계속 뒤진 후에야 다음 할 말이 떠오른다.
“계속 인간의 모습으로 있어야 할 텐데, 불편하지는 않으신가요?”
“주변에 누가 없을 때 호랑이로 잠깐씩 돌아가면 괜찮을 것 같긴 합니다. 말이 나왔으니 앞으로 셸라빈스크에 다다를 때까지는 인적이 드물 겁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산신에게서 주변 지리와 마을들 이름을 대강 들었던 류드밀라는 기억에서 셸라빈스크라는 이름을 찾아낸다. 그들이 신록의 숲으로 가기 위해 거쳐 갈 첫 번째 마을. 셸라빈스크는 디흐타우 산에서 남쪽으로 길을 따라 가면 제일 먼저 나오는 마을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수레에서 뛰어내린 자디라는 순식간에 거대한 암호랑이로 돌아온다. 선명한 검은색 줄무늬가 새겨진 아름다운 털을 지닌 그녀가 걷자 근육이 물결치듯 움직인다. 살짝 벌린 입 안에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비치고 류드밀라는 저도 모르게 루슬란을 떠올린다.
그의 송곳니도 저것보단 작긴 하지만 날카로웠는데. 정을 통할 때 만지면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짜릿했는데. 별안간 이런 생각이 들자 당황해서 혼자 얼굴을 붉힌 그녀가 괜히 헛기침을 한다. 민망한 기분에 류드밀라는 슈바를 여미며 몰래몰래 자디라를 훔쳐본다.
야생이 빚어낸 날것 그대로의 힘과 위엄을 지닌 호랑이는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더 이상 송곳니를 보아도 루슬란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자디라가 터벅터벅 걷는 모습에는 여우처럼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다.
말들은 길이 조금 넓어지자 속도를 올린다. 종종걸음을 치다가 세 박자의 걸음걸이로 달리기 시작한다.
전보다 심하게 덜컹거리는 수레에 겨우 적응한 류드밀라는 자디라 말고 주변 풍경도 둘러본다. 아직 산 근처여서 주변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앙상한 나무가 드문드문 보이고 말라 죽은 풀들이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생소한 풍경이라 열심히 구경한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해가 머리 꼭대기에서 살짝 넘어갔을 무렵 저 멀리서 숲이 보인다.
여행길을 설명해 줬을 때 산신이 한 말이 생각난다. 절대로 숲 안에서 야영하지 말라는 경고가. 그럼 오늘 저녁이 되기 전까지 저 숲을 다 가로질러야 할 터이다. 약간 불안해진 류드밀라는 자디라를 부른다.
“자디라 님.”
호랑이 모습으로 달리는 수레 위에 뛰어오른 그녀는 인간으로 변신해서 류드밀라 옆에 앉는다.
“왜 부르셨습니까?”
“해가 지기 전까지 숲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이 속도로 가면 충분합니다.”
망설임 없이 대꾸하는 모습에 조금 불안감이 누그러진다. 그러나 막상 숲에 점점 가까워지자 그녀의 불안은 점점 더 커진다. 산신이 해 준 설명과 경고들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건강하지 못한 숲속에 사는 악귀들과 악한 정령들. 건강한 숲에도 악심을 품은 존재들이 있을 수 있었다.
게다가 숲의 신의 성미는 까탈스럽다고도 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에 가능한 한 빨리 숲을 지나고 싶은 류드밀라이다. 아무리 영물들과 함께라도 인간인 그녀를 골라 괴롭히는 것은 숲의 신에게는 일도 아니다.
마침내 수레가 숲에 들어선다. 걸으면서 봤던 뱀들의 숲 풍경하고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뱀들의 숲이 어둡고 침침했다면 이 숲은 겨울이라 앙상해서 오히려 빛이 잘 들어온다. 그래서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풍겨 온다.
“원래 숲들이 다 이렇게 황량한가요?”
“아뇨, 북쪽에 있는 타이가들은 한겨울에도 푸릅니다. 다만 쿠릴레 숲은 활엽수림이라 겨울에는 황량한 편입니다.”
류드밀라는 처음 들어 보는 용어에 호기심이 생긴다.
“타이가가 뭔가요?”
“추운 기후대에 있는 침엽수림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녀가 타이가에 가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려는 순간 수레가 멈춰 선다. 앞을 보자 시내가 길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다니던 사람들은 뛰어서 건넜는지 다리도 없다.
“별로 안 깊으니 그냥 건너자!”
자디라가 외치자 말들은 알았다는 듯 푸르르 콧소리를 내고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딘다. 말들은 무사히 건넜지만 수레가 시내로 덜컹거리며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순간, 그만 바퀴가 시내 폭에 딱 맞게 걸려 버리고 만다.
한참 용을 쓰던 말들이 도와 달라는 듯 뒤를 돌아본다.
“류드밀라 님도 내려와 주세요. 수레를 들어야 될 것 같습니다.”
말은 호기롭게 했지만 막상 그녀가 내려와 자디라와 함께 힘을 써 봐도 수레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자디라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관자놀이를 문지른다.
“이제 어떡하죠?”
“보통 이런 종류의 장난을 치는 정령들은 호기심이 많은 법입니다. 우리에게 누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수레가 걸린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자디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류드밀라는 더 불안해져서 주위를 휘휘 둘러본다. 아직까지 누가 다가오는 낌새는 없다. 그녀가 막 그렇게 생각할 때 조금 떨어진 마른 풀숲에서 거대한 형체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낸다.
머리에 버섯과 솔방울이 매달려 있고 수염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얼굴은 핏기가 없고 머리카락과 눈이 초록색인 중년의 남자이다. 다만 키가 삼나무만 한 거인이라는 점이 그녀를 겁먹게 만든다.
“레쉬입니다.”
자디라가 옆에서 걱정스레 속삭인다. 동화책에서나 보던 숲지기를 실제로 보게 되다니. 하지만 지금 계절은 겨울…. 류드밀라가 더 겁에 질린 이유는 그녀가 아는 레쉬가 겨울에는 사라져서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레쉬가 나타났으니 뭔가 심각한 일이지 않을까.
레쉬는 이끼로 덮인 몸을 이끌고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멍청한 건지 용감한 건지, 겨울 숲에 발을 들이다니.”
레쉬의 목소리에는 마치 오래된 나무가 말하듯 주변을 우르르 울리는 묘한 힘이 실려 있다. 숲의 신이 보낸다는 숲지기인 만큼 오래된 그 목소리에는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꼭 지나가야 해서 그랬습니다.”
자디라는 용감하게 대꾸하고 레쉬의 눈길이 그녀에게 잠시 머무른다.
“디흐타우 산의 호랑이구나, 너는.”
시선은 말들에게로 향한다.
“너는, 디흐타우 산의 여우이고.”
마지막으로 초록색 눈 한 쌍은 류드밀라에게로 온다. 주먹 두 개만 한 눈동자가 무서워서 그녀는 침만 꼴깍 삼킨다. 그래도 눈길을 피하지는 않는다.
“요상한 기운이 있는 인간이구나, 껍데기인데. 산과 강의 기운이 섞여 있어, 너에게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녀가 덜덜 떨고만 있는데 레쉬는 고민하는 눈치이다. 산의 영물과 기묘한 느낌을 주는 인간을 그냥 보내 줄지 아니면 이대로 밤까지 붙잡아 두어 악귀들에게 넘길지.
마침내 결정을 내린 레쉬가 털썩 주저앉자 땅이 울린다.
“모두 맞힌다면 보내 주마, 너희들에게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낼 테니.”
어순을 반대로 말하는 레쉬의 어투에 신기해할 겨를도 없이 류드밀라는 긴장한다. 황궁에서 같은 방을 쓰는 껍데기들과 심심하면 수수께끼 놀이를 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긴장되는 상황에서는 처음이었다.
레쉬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다. 마침내 입을 열자 나무처럼 결이 있는 이빨이 드문드문 비친다.
“상상해 보거라, 아주 어두운 방을. 무엇이지,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이건 쉽다. 류드밀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아주 어두운 방을 그만 상상하는 거예요.”
레쉬의 숱 많고 긴 눈썹 하나가 치켜 올라간다. 생각보다 그녀가 쉽게 맞혀서 그런 모양이다. 레쉬는 이번에는 바로 다음 문제를 낸다.
“모두가 특별해지려고 이걸 원하지. 그러나 이걸 가질수록 너는 네가 덜 특별하다고 여길 것이다.”
류드밀라는 생각에 잠긴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정신이 또렷해진다. 그녀는 이 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황궁에서 보낸 나날 동안 그녀에게 위안이 되었던 책 속에 들어 있는 것. 그녀의 위태로운 자존감을 유지시켜 준 것이자 한없이 깎아내리기도 한 것.
“지식입니다.”
지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제가 그저 우주를 이루는 한없이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에, 그래서 스스로가 덜 특별하다고 여기게 된다. 지식이 많을수록 오히려 제 지식이 얼마나 작은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류드밀라도 지식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얻게 되는 우울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레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흠, 소리를 낸다.
이제 마지막 수수께끼이다. 류드밀라는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라고 그녀의 재치에게 속삭이며 마지막 문제를 기다린다.
“무릇 생명들이란 이걸 가지고 있으면 나누고 싶고, 이걸 나누면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게 된다. 무엇이지, 이것이?”
당황하고 두려운 상태에서 그녀의 쿵쿵 뛰는 심장만이 느껴진다. 이건 모르는데. 어쩌지. 손에서 땀이 나고 다리에서 힘이 풀린다. 그녀가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인데, 옆에서 약간 슬픈 목소리가 들려온다.
“비밀입니다.”
자디라가 대답한 것이다. 레쉬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더니 말없이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순간 류드밀라는 레쉬가 약속을 어기고 그들을 해치러 오는 줄 안다. 그러나 레쉬는 수레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려 길 위로 옮겨 준다.
“바라겠다, 평온한 여행길이 되길.”
“감사합니다.”
천천히 형체가 흐려지며 모습을 숨기는 레쉬에게 꾸벅 인사를 한 류드밀라는 다시 수레에 오른다. 자디라는 호랑이 모습으로 변해 수레 옆에서 달린다. 숲을 벗어날 때까지는 침묵이 흐른다.
숲 끝자락을 겨우 벗어나자 해가 진다. 해가 진 후에는 이동하지 말라던 산신의 말을 충실히 따라 류드밀라는 수레에서 내려 자디라와 함께 야영지를 준비한다.
자디라가 고삐와 마구를 풀어 준 덕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여우들은 사냥을 하러 간다. 야영지 준비가 거의 끝났을 무렵 여우들은 각각 입에 토끼와 들꿩을 물고 돌아온다.
류드밀라는 축 늘어진 동물을 보고선 어쩔 줄 몰라 한다.
“저, 이제 뭘 하면 되죠?”
“저와 여우들이 저녁을 준비할 테니 쉬고 계십시오.”
그녀는 결국 간이 천막 앞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자디라가 불을 피우고 인간의 모습을 한 여우들이 사냥감을 손질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럴 거면 그녀가 이 여정에 왜 따라왔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차라리 영물들이 산신의 증표를 갖고 은빛 신록을 찾으러 가는 것이 더 빠르지 않았을까.
그러나 산신이 좀 더 편한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굳이 그녀가 가는 것을 허락해 준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루슬란의 일인데 은빛 신록에게 그녀가 직접 부탁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해가 떨어지자 날씨가 점점 더 추워진다. 슈바 속에서 웅크린 그녀는 불가로 주춤주춤 다가가서 모닥불에서 번져 오는 열기에 몸을 녹인다. 그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는 들꿩 고기의 냄새는 역하지 않을 정도로 딱 좋다.
손질을 마친 토끼는 이미 날것으로 자디라와 여우들이 나눠 먹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양이 부족한지 들꿩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수레에 실린 짐 꾸러미에서 호밀 빵을 꺼내 권해 보지만 그들은 손사래를 치며 거부한다.
“리사 님, 레사 님, 자디라 님, 양이 부족하지 않으시겠어요?”
“저런 걸 먹을 바에는 차라리 배고픈 게 낫습니다.”
호랑이는 무뚝뚝하게 대꾸하곤 다시 들꿩으로 눈길을 돌린다. 여우도 한마디 얹는다.
“맞아요.”
여우들이 그녀에게 말하는 소리를 처음 들어 본 류드밀라는 몸을 움찔한다. 그 반응이 재밌었는지 두 여우는 서로에게 속닥거리며 생글생글 웃는다. 여리고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오랫동안 귓가에 여운으로 남아 그녀는 한동안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다 익었습니다.”
자디라는 뜨겁지도 않은 건지 들꿩을 꿴 나뭇가지를 잡고 다른 꼬챙이로 살을 뜯어낸다. 제일 큼지막한 덩어리를 주려 하는 것을 극구 사양한 류드밀라는 고기 약간을 받아 후후 불어 가며 먹는다.
아무런 양념도 없어 조금 누린내가 나긴 하지만 빵에 육즙을 적셔 먹자 정말 맛있다. 수레에 앉아 있기만 했어서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허기가 져 그녀는 제 몫을 다 먹는다.
대화도 없이 막 먹은 것 같아 자디라와 여우들의 눈치를 보는데 그들도 먹느라 정신이 없다. 뼈를 우아하게 빨아서 살점을 다 떼어 먹은 리사가 그녀가 쳐다보는 걸 눈치채곤 싱긋 웃는다.
“류드밀라 님은 전부터 저희에게 관심이 많으셨죠?”
“앗, 그, 그게…….”
류드밀라의 얼굴이 빨개진다. 그녀가 이렇다 할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자 레사가 손가락을 쪽쪽 빨아 먹으면서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여우들의 그런 모습까지도 고혹적이게 여겨져서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궁금한 것을 물어봐도 돼요. 우리가 제대로 답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류드밀라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는지 여우들은 깔깔대고 저들끼리 웃어 댄다. 그럼에도 전혀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녀가 그들의 웃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자디라가 끼어든다.
“여우들에게 홀리지 마십시오. 짓궂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들입니다.”
매우 못마땅한 목소리에 웃음소리가 뚝 그친다.
“뭐, 도움이 안 된다고? 그러는 호랑이 너를 여기까지 태우고 와 준 몸이 누군데 그래?”
리사가 앙칼진 목소리로 묻자 자디라는 무신경하게 귀를 후벼 판다.
“어디서 여우가 캥캥거리는 소리가 거슬리네.”
류드밀라가 어떻게 할 새도 없이 호랑이와 여우들은 말싸움을 벌이기 시작한다. 몸은 피곤한데 자러 가지도 못하고 그들의 다툼을 지켜보는 그녀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진다.
이러다가 둘 중 하나가 못 해 먹겠다고 산으로 돌아가면 어떡하지. 여우들이 없으면 수레는 누가 끌고, 호랑이가 없으면 밤마다 야영지 마련은 누가 한단 말인가.
그 생각에 미치자 그녀의 자존심은 뚝뚝 깎여 나간다. 수레를 끄는 것은 여우고, 잡다한 일을 하는 것은 호랑이라면, 정말 그녀는 이 여정에서 쓸모가 없는 존재구나.
한참을 싸우던 그들이 동물의 모습으로 돌아가 서로에게 덤벼들자 그제야 류드밀라는 상황이 심각해졌음을 깨닫는다. 이러다간 성물을 찾기는커녕 신록의 숲에 도착하기도 전에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 그녀와 이들이 루슬란의 유일한 희망인데. 별안간 느껴진 책임감과 전에 했던 다짐에 대한 기억은 우울감을 물리치기에 충분하다. 서둘러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눈을 딱 감고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른다.
“다들 그만하세요!”
목소리가 작았던 것인지 여우와 호랑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한데 뒤엉켜서 싸우기 시작한다. 체급 차이가 났지만 여우들이 요리조리 공격을 잘 피하면서 호랑이의 약을 올린다.
“그만하시라고요!”
류드밀라는 투닥거리는 소리가 조용해지자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뜬다. 자디라는 리사의 목덜미를 입에 물고, 레사는 자디라의 몸을 할퀴던 중에 셋 다 굳어 있다.
자디라가 리사의 목덜미를 툭 놓자 레사도 자디라에게서 조금 떨어진다. 먼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자디라가 멋쩍은 듯 머리를 벅벅 긁는다.
“죄송합니다, 류드밀라 님. 여우들이 하도 성가시게 구니까…….”
“우리가 뭘 했다고? 호랑이 네가 거만하게…….”
인간의 모습이 된 리사와 레사가 이구동성으로 소리치자 류드밀라는 또다시 짜증과 우울함이 울컥 치솟는다.
“제발 그만하세요!”
그녀가 화를 낼 줄은 몰랐는지 영물들은 조용해진다.
“여러분들은 제게 꼭 필요한 분들이에요. 여러분이 없으면 전 아무것도 못 한다고요. 그러니까 제발 싸우지 마세요.”
“싸운다고 하더라도 류드밀라 님을 버리고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걸 걱정하시는 거라면 말입니다.”
“저희들은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리사가 부루퉁하게 말하지만 자디라가 노려보자 레사는 류드밀라를 향해 애써 웃어 보인다.
“물론 류드밀라 님이 이렇게 부탁하시는데 당연히 끝까지 함께해야겠죠.”
“그래 주세요. 부탁이에요.”
힘없이 말한 류드밀라는 털썩 주저앉는다.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더니 몸에서 힘은 다 풀리고 그저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울고 싶은 마음만 든다. 그 누군가가 루슬란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지만 얼굴을 붉힐 기운도 없다.
어느새 그는 그녀가 힘들 때, 슬플 때, 위로를 받고 싶을 때 떠올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그녀의 곁에 없어서 그런 것이다. 떠올리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갑자기 우울해진 류드밀라는 제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는다.
그녀의 눈치를 보던 영물들은 주위에 모여들어 어색하게 꼼지락댄다. 자디라가 먼저 손을 뻗어 그녀의 등에 가만히 손을 얹는다. 여우들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괜찮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성물을 찾아내면 되죠.”
레사가 부드럽게 말한다.
“맞아요, 우리가 싸우지 않도록 노력을 해 볼게요. 물론 저 호랑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만.”
리사가 툴툴거리다 자디라가 다시 쏘아보자 흥, 하고 코웃음을 친다.
류드밀라는 고개를 들고 여우들과 호랑이와 눈을 맞춘다.
“감사해요.”
어느새 영물들이 간이 천막 안에 자러 들어갔을 때에도 류드밀라는 불가에 남아 있다. 아침까지 탈 불을 지켜보며 약간은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
아까는 정말 피곤하고 자고 싶었는데. 막상 자야 할 때가 되니 잠들기 전까지 그녀를 괴롭힐 무서운 생각들이 두렵다.
그렇게 불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자디라가 나와서 옆자리에 앉는다.
“왜 나오셨어요?”
“저도 잠이 잘 안 와서 그렇습니다. 류드밀라 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기도 하고요.”
“무엇인가요?”
자디라는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무뚝뚝함이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아까 저희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말했잖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류드밀라는 여전히 풀이 죽어 조그맣게 대꾸한다.
“하지만, 사실인걸요. 저는 이 여정에 짐만 되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류드밀라 님이 걸고 계신 산신님의 증표, 저희는 이걸 손댈 수도, 나를 수도 없습니다.”
놀라서 불가를 향하던 시선을 돌린 그녀를 보고 자디라는 설명을 더 해 준다.
“산신님은 산 그 자체이십니다. 산에 속한 영물들인 저희가 증표에 손을 댄다면 산은 그저 저희가 살아가는 평범한 터전이기에 증표는 효력을 잃습니다. 그래서 산신님께서 증표를 류드밀라 님께 드린 겁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자디라는 또 그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고 류드밀라는 왜 호랑이의 잔머리가 그렇게 많이 삐져나온 것인지 깨닫는다.
“물 한 줌을 떠서 그게 증표라고 한다고 쳐 보십시오. 손안에 담고 있으면 그 물은 특별한 것이지만 그 손을 치우면 물은 원래 있던 강에 떨어져 많고 많은 강물에 합쳐지거나, 흙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지요. 류드밀라 님이 그 손인 겁니다.”
“그렇군요.”
“결론은, 류드밀라 님이 이 여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았단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감사해요.”
진심을 담아 그 말을 건넨 류드밀라는 생각에 잠긴다. 투박하고 말주변도 없는 호랑이의 말이 정말 위안이 된다.
그날 밤 잠들기 전, 류드밀라는 더 이상 의문과 두려움을 품지 않는다. 여전히 불안했지만, 밤마다 그녀를 괴롭히던 무서운 생각들은 더 이상 들지 않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류드밀라는 야영지를 정리하고 자디라는 여우들에게 마구를 채운다. 호랑이와 여우 사이에는 어젯밤에 싸우고 난 여파가 남아 있는지 어색함이 감돈다.
그래도 소리 지르면서 싸우지 않는 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자디라는 류드밀라 옆자리에 인간 모습으로 앉고 수레가 덜컹거리면서 남쪽으로 출발한다. 길은 점점 넓어지고 가끔씩 다른 나그네들도 지나간다. 모두가 제국 최남단에 위치한 신록의 숲으로 향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동병상련이라고 하였던가. 류드밀라는 나그네들에게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낀다.
그들은 류드밀라 일행에게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마십시오.”
자디라가 한번 주의를 줬지만 류드밀라는 시선을 떼지 못한다. 나그네들은 황궁에서 보던 이들이나 껍데기 여인의 마을에서 본 이들과는 또 다르다. 약간 허름한 차림새에 단출한 짐만 싸 들고 어디론가 느긋하게 향하는 모습이 어딘가 자유로워 보인다.
저들은 어디로 향할까. 어쩌면 자기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걸음을 옮기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자기 발길이 이끄는 곳으로 가게 되면 정말 자유로운 기분이 들까?
그녀가 그런 감성적인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수레는 착실하게 달려 저녁때가 가까워질 무렵 그들이 지날 첫 번째 마을이 가까워져 온다.
“셸라빈스크 마을입니다.”
자디라가 알려 준다.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멀리서 봐도 마을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허름한 외관에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물들. 마을 주변에 펼쳐진 밭도 텅 비어 있어 황폐한 느낌을 더한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모습도 마을의 첫인상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칙칙한 옷을 걸치고 잔뜩 움츠린 몸으로 느릿느릿 걸어 다닌다.
마을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류드밀라는 그 우울한 분위기에 덩달아 휩쓸린다. 마을에서 유일한 여관을 찾아 들어가 자디라가 주인과 이야기할 동안 그녀는 창밖을 흘깃 본다.
제집 앞에 앉아 하염없이 파이프 담배를 뻐끔거리는 노인. 굳은 얼굴을 한 채 창밖으로 오물을 버리고 다시 집 안으로 사라지는 아낙. 그리고 검댕이 얼굴에 묻은 초췌한 아이들.
뱃속이 음울하게 뒤틀리는 기분은 여관방에 올라가 씻고 침대에 몸을 뉠 때까지 지속된다. 불편한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다 배가 고파지자 자디라와 함께 여관 식당으로 내려간다.
자디라는 그날 저녁으로 나온 보르쉬(양배추 수프)를 깨작거리다가 잘게 찢은 고기만 건져 먹고 자리를 뜬다. 밖이 위험하니 돌아다니지 말라는 경고만 남기고. 반대로 배가 고팠던 류드밀라는 혼자 남아 뒤에 나온 빠스찔라(익힌 사과를 둥글게 만 과자)까지 먹는다. 다행히 이번에도 그녀를 신경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까처럼 창밖을 내다보니 으스스한 공기가 열린 틈으로 들어온다. 음울하고 기운 없던 마을의 밤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괜히 무서워진 그녀는 이 층의 방으로 돌아간다.
침대가 아무리 불편해도 야영지에서 자는 것보단 편안했기에 그녀는 곧잘 잠에 빠져든다.
***
한편 성역 안.
루슬란이 꾸고 있었던 악몽이 산산조각이 나며 그는 눈을 뜬다. 어떤 악몽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래도 뻔했다. 또 그날의 꿈을 꿨을 테지. 그가 지켜 왔던 모든 것들을 잃었던 그날의 악몽을.
누운 채 이마에 손등을 댄 그는 기억을 되짚어 본다. 산신과 이야기를 하다 그의 껍데기 님을 찾으러 나갔었지. 그런데, 그걸 발견했고, 그 뒤로……
기억이 한꺼번에 돌아온다. 그에게 스며든 암흑의 영향으로 그가 폭주했던 것과 산신이 그를 진정시키기 전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공포에 질린 그가 벌떡 일어나 앉는데 문가에서 산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깨어났느냐.”
“그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혹시 저 때문에 다쳤습니까?”
“다치지는 않았다.”
루슬란의 몸에서 긴장이 한꺼번에 빠져나간다. 산신은 강의 아이가 저렇게 취약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오랜만에 본다. 다시금 껍데기 여인에 대해 호기심이 인다.
한편 루슬란은 여전히 약간은 불안해한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제가 가서…….”
“성물을 찾으러 떠났다.”
왜 그러도록 허락해 줬냐는 물음이 그의 입 밖으로 나오려다가 만다. 루슬란의 얼굴이 약간 굳어진다.
“황제 때문이군요.”
“그래. 그가 너를 찾는 수배지를 내붙였다. 하루빨리 치료받고 황궁으로 돌아가야 해.”
그가 짜증스레 고개를 획 돌린다.
“만약에 그녀가 위험에 처하면 제가 구하러 갈 것입니다.”
“그 아이가 숲 밖에 있을 때는 그럴 수 있어도 신록의 숲에 들어가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곳은 인간들에게 묶여 있는 네가 침범할 수 없는 또 다른 성역이야.”
“저를 걱정으로 말려 죽이려는 셈이군요.”
루슬란은 한숨을 푹 내쉬고 방에 난 창밖으로 손을 내민다. 그렇게 해서 햇살을 느껴 때를 확인한다.
“시간은 왜 확인하는 것이냐?”
“밤이 되면 제 껍데기 님을 찾으러 가려 합니다.”
“고집 하나는 여전하구나. 그래, 직접 볼 수 없으면 꿈속에서라도 봐야겠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신선이 방을 나가자 루슬란은 베개에 기댄다. 먼 곳에서 닥쳐온 일들을 잘 헤쳐 나가고 있을지, 그의 껍데기 님이 걱정이 된다. 제발 그녀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그는 밤이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
여관의 침대에서 푹 잠든 류드밀라의 꿈속에 루슬란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그의 침실이 아니라 산신의 오두막 침대가 배경이다. 류드밀라는 바뀐 장소를 눈치채지도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겨 든다.
“루슬란 님! 이제 괜찮으신 건가요?”
“완전히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괜찮아졌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보다, 그대도 처음 밖으로 나가 보셨는데 어떠셨나요?”
류드밀라는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이다. 그럼에도 루슬란이 걱정했다는 듯 눈을 살짝 찡그리자 안심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그녀는 신기하고 새로웠던 점이 많았다며, 그를 걱정시킬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의 단단한 품속에 안겨 포옹을 받고 있자니 류드밀라는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다. 꿈속에서라도 이럴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하다.
루슬란은 그녀의 고운 목소리를 듣자 미안한 마음이 자꾸 든다. 그녀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다 저 때문인데, 원망하는 기색 없이 맑기만 한 것이 안타깝다. 그는 그가 미안해하면 그녀가 마음이 안 좋을까 싶어 다시 입을 연다.
“제가 없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길을 떠난 첫 시작부터 숲에서 레쉬를 만난 것, 영물들이 싸운 것과 여관에 도착한 것까지 류드밀라는 조잘조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깊게 들은 그가 대견한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힘들었을 텐데 잘 헤쳐 나갔네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앞으로 남은 길은 평화롭기를 바랄게요.”
“감사해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춘 그녀는 부끄러워서 움츠러든다.
“고작 이런 것 가지고 수줍어하시면 제 마음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나의 껍데기 님.”
조곤조곤 달콤한 말을 이어 나가며 루슬란은 그녀의 옷을 벗긴다. 순순히 손길에 몸을 내어 준 류드밀라가 꼼지락거리다가 괜히 그의 앞섶을 풀어 버리자 그가 픽 웃는다. 그럴 용기가 작은 몸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하고 귀여운 마음에 웃은 거지만 그녀가 혹시나 또다시 겁먹을까 웃음기를 거둔다.
그때 조그마한 손이 그의 입가를 어루만진다.
“다시 웃어 주세요…. 웃을 때 정말 아름다우셨어요…….”
놀리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무표정을 하려는데 웃음이 다문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결국 활짝 웃고 만 그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겨 품에 안는다.
류드밀라는 그의 웃음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가 이끄는 대로 품에 안긴다. 엉덩이 부근에서 느껴지는 그의 것의 감촉에 얼굴이 빨개지지만 그의 웃음의 잔상이 머리에 남아 행복하다. 새하얀 치아와 벌어진 분홍빛 입술, 감겨져 있어도 곱게 휘어진 눈가가 너무 어여쁘다.
“제가 행복하게 해 드릴 테니 그대도 웃는 모습을 보여 줘요.”
그가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지 몰라 그녀는 얌전히 기다린다. 그러다 낯설지만 한편으로 아주 낯설기만 한 것도 아닌 것이 들어오는 감각에 약간 놀란다.
무릎의 힘이 풀리며 더 깊숙이 앉아 버린 그녀는 신음을 얕게 뱉어 낸다. 안쪽을 찌르는 부피감은 몇 번을 그와 정을 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류드밀라는 저도 모르게 그 익숙하지 않음을 바꾸려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불편함은 사라지고 행복감이 밀려온다.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위에 앉아 그의 것을 담아내고 있다는 현실 감각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이다. 그저 이 짜릿한 느낌을 더 강하게, 더 오래 느끼고 싶다는 욕망만이 그녀를 지배한다.
루슬란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가는 허리를 살살 쥐어 붙잡아 준다.
전에는 항상 그의 행복보다는 그녀의 기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흐트러진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류드밀라가 몸을 스스로 움직이자 약한 모습을 내비칠 것만 같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실망하면 어떡하지. 걱정이 마구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 그녀가 본능적으로 위아래로 몸을 움직인다. 고운 얼굴은 분홍빛으로 물들고 눈은 감은 채 행복해하며 말이다.
“하아…….”
작은 숨을 내뱉으며 루슬란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전에는 그녀가 그랬었는데. 그렇게 약한 모습을 먼저 내비쳤었는데, 이제는 그가 그러고 있다.
쾌락 속에서도 그런 변화를 알아챈 류드밀라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다. 마치 그가 약한 모습을 보여도 그녀는 그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알려 주듯이. 조심스럽고 따스한 손동작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고개를 조금 든 루슬란은 그녀의 목덜미를 살짝 문다. 물고 빨면서 혀끝으로 살살 문지르는 것이, 마치 어떻게 해야 그녀가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마침내 함께 절정에 다다른 류드밀라는 바르르 떨면서 그를 꼭 껴안고 무너져 내린다. 루슬란도 베개에 기대고는 그녀의 정수리에 입맞춤을 남긴다.
나란히 기대 누워 잠에 빠져들려고 하는데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이제 여기서 잠에 빠지고 다시 깨어나면 그가 곁에 없을 거란 사실을. 그래서 이 순간을 이어 나가고자, 그에게 말을 건다.
“저, 루슬란 님?”
“왜 부르시나요?”
“궁금한 것이 있어요.”
루슬란은 호기심과 졸음으로 가득할 보라색 눈동자를 보고 싶어 못 견디겠는 마음을 참고 대꾸한다.
“말씀하세요.”
“제가 흑마법사의 성에 갇혔을 때, 루슬란 님을 소환할 수 있도록 바다의 여신님께서 도와주셨어요.”
“그랬군요. 저도 그 뿔피리가 어디서 생겨났는지 궁금했답니다.”
류드밀라는 그때 두려웠던 기억에 몸을 살짝 떤다.
“네, 근데 그 전에 여신님이 낸 시험을 치르러 뱀들의 숲에 갔어요. 거기서 황금 뱀 신수를 만났고요. 그 신수님과 루슬란 님이 무슨 사이신지 궁금해요.”
루슬란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왜 그게 궁금해졌나요?”
그래서 류드밀라는 그에게 뱀들의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남김없이 들려준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생각에 잠긴다. 그의 껍데기 님에게 과연 어디까지 말해 줄 수 있을까. 요즘 들어 부쩍 질문이 많아지고 궁금한 것도 많아진 그녀가 신기하다. 전에는 사소한 부탁에도 쩔쩔매었는데 지금은 주저하긴 해도 조심스레 말하는 그 질문들이, 그는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일단 그렇게 여기고 나자 그녀에게 진실을 숨긴 것이 미안해진다. 그러나 미안해도 어쩔 수 없다. 그는 이 순간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 나가기 위해, 스스로를 다독이고 만다. 괜찮을 거야.
“그대가 들은 대로 즈메이를 제가 예전에 구해 주고 신수로 만들어 줬답니다.”
짧게 대꾸한 루슬란은 머리카락에서 뗀 손을 그녀의 아래로 가져다 댄다.
“아직 자고 싶지 않으시면, 한 번만 더 할까요?”
“네, 그런데…….”
그가 손을 제대로 움직인다면 평온하게 이야기할 자신이 없어 류드밀라는 몸을 뒤로 뺀다.
“왜 그러시죠?”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수 있다는 듯이 느긋한 얼굴을 보며 그녀는 용기를 얻는다.
“어떻게 영물을 신수로 만들 수가 있나요?”
그건 제가……라는 말을 서둘러 삼킨 그가 그저 엷은 미소를 입가에 건다. 진실을 숨기기로 마음먹었기에 지을 수 있는 태연한 표정이다.
진실을 그녀가 알게 되면 이어지는 다른 사건들의 전말도 알게 되겠지. 단 하나만 밝혀도 꼬리에 꼬리를 물, 대답해야만 하는 질문들이 두렵다. 그래서 루슬란이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그 태연자약한 얼굴을 하고 류드밀라를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조금만 싫은 티를 내어도, 조금만 뭐라 해도 그녀의 소심한 변화는 사라질 것이다. 그는 제가 편하자고 그녀에게 티끌만큼이라도 상처를 주기가 싫다. 그래서 더욱더 신중히 말을 고르고 어투를 부드럽게 한다.
“너무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예요. 자기 전에 듣기에는 지루하실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류드밀라는 잠시 갈등한다. 그녀도 눈치가 있어 그가 자세한 정황을 말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캐묻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만약 영물을 신수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루슬란에게 있다면, 그녀가 마법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그만큼 그녀는 절박하다. 마음속에서 자라난 결핍이 지독한 갈증으로 그녀를 괴롭혀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연다.
“혹시 영물을 신수로 만드셨다면, 제가 마법을 쓸 수 있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녀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다행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몹시도 안타깝다. 그는 장난스럽게 아래로 향했던 손을 거두고 그녀를 조금 더 단단히 안는다.
“영물은 원래 마법을 타고난 짐승이에요. 그들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아예 빈 그릇을 채우는 것은 힘들 거예요. 미안해요, 저도 할 수만 있다면 그대가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예상치 못한 말에 류드밀라의 자존감은 더욱더 어두운 곳으로 움츠러든다. 루슬란 님도, 그도 마법을 할 줄 아는 그녀를 더 좋아하는 걸까? 그녀가 마법을 할 줄 알면 지금보다 더 사랑해 줄까? 그런 우울한 생각들에 갇혀 그녀는 잠시 말을 이어 나가지 못한다.
겨우 입을 떼었을 때에는 루슬란도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후이다.
“왜 제가 마법을 쓰게 만들고 싶으신 건가요?”
그녀에게는 정말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을 그는 안다. 그러나 신중히 말을 고를 필요도 없이, 그의 대답에서는 그녀를 향한 진심이 묻어 나온다.
“저는 그대가 좀 더 세상을 당당하게 마주했으면 좋겠어요. 지레 겁먹지 않고,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요. 마법이 그대를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마법을 하길 바라는 것뿐이에요. 그대가 바라는 모든 것을 주고 싶은데, 마법 능력은 그러지 못하니까 슬펐답니다.”
예상치 못한 따스한 말에 그녀의 우울했던 마음이 풀린다. 그래도 응석을 부리고 싶어서 그녀는 루슬란에게 기대 그의 날렵한 턱을 만지작거린다.
“제가 지금처럼 매일같이 겁먹고, 울고, 슬퍼해도 저를 사랑해 주실 건가요?”
“그럼요. 그대가 겁먹으면 용기를 주고, 울면 달래 주고, 슬퍼하면 같이 우는 것이 제가 그대 곁에 있는 이유인걸요.”
원하던 대답을 듣고 마음이 완전히 풀린 류드밀라는 그의 손을 잡고 깍지를 낀다. 그가 손바닥을 간지럽히자 나지막이 웃어 보기도 한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그가 곁에 없고, 험난한 여정을 계속해야 하지만, 그녀는 행복하다.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면 그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힘을 얻는다.
“완전히 주무셔요, 이제. 피곤할 테니 더 이상 괴롭히지는 않을게요.”
루슬란이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며 속삭인다.
“제가 보채도 그러실 건가요?”
이불을 폭 덮고 그의 몸 위에 올라탄 류드밀라가 용감하게도 이런 말을 꺼낸다.
“뭐라고 보챌 건가요?”
이 질문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당황한 그녀의 표정을 상상하며 그가 다시 달래려는데 그녀가 불쑥 말한다.
“저를 괴롭혀 달라고 보챌 거예요.”
당돌한 말에 오히려 그가 약간 당황해서 있는데 류드밀라가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꿔 그 위에 올라탄다. 루슬란은 그녀를 말리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한 번 더 정을 통하고 이번에 류드밀라는 그가 재워 줄 틈도 없이 꿈도 꾸지 않는 잠으로 헤엄쳐 간다.
***
다음 날 여관방에서 깨어난 류드밀라는 1층 식당으로 내려온다. 기다리고 있던 자디라가 수프와 빵 접시를 밀어 주고 볼일 다 봤다는 듯이 짐을 챙기러 가 버린다.
또 혼자서 허겁지겁 빵을 수프에 찍어 먹은 류드밀라는 누가 말을 걸까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온다. 다행히 짐을 챙기고 여관을 떠나는 동안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
수레가 지나가자 마을 아이들이 먹을 거나 돈을 달라며 따라붙었지만 다른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저들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 그 음울한 마을은, 오직 꿈속에서만 행복한 곳이었다.
“다음 마을은 펜자입니다. 그 마을을 지나면 이제 정말 남부 지방이 시작되죠.”
덜컹거리며 달리는 수레 위에서 자디라가 설명한다.
“남부 지방은 뭐가 다른가요?”
“제국의 동서가 다른 것보다는 덜하겠지만, 적어도 아까 지났던 셸라빈스크만큼 비참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행이에요.”
조그맣게 중얼거린 류드밀라는 풍경을 구경한다. 변화가 없고 단조로운 벌판이 똑같이 반복됐지만 봐도 봐도 신기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읽었던 동화책 내용도 떠올렸다.
심술궂은 난쟁이, 욕심꾸러기 곰, 눈알을 파먹는 부엉이, 지혜로운 까마귀. 들판에 가끔씩 나타나는 자유민의 오두막을 보곤 젖소를 괴롭힌다는 요정과 집안일을 도와주고 물건을 빌려 간다는 집 요정도 생각난다. 그렇게 들뜬 몽상으로 흘려보내자 시간은 금방 간다.
“오늘과 내일은 야영을 해야겠군요. 아마 모레 점심쯤이 되어야 펜자에 도착할 겁니다.”
주인 없는 들판 나무 밑에 또 야영지를 꾸린 그들이 쉬는데, 어두운 그림자가 들판 한가운데서 걸어 나온다. 모닥불 가로 다가오기 전까지 류드밀라는 그가 또 다른 나그네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모닥불 빛으로 본 그 형체의 피부는 흙처럼 갈색이었고 군데군데 돌도 박혀 있다. 마른 풀처럼 탁한 노란색 눈동자의 동공은 세로로 찢어져 있다.
류드밀라가 겁을 집어먹고 벌떡 일어나려는 것을 자디라가 붙잡는다.
“폴레보이입니다. 두려워할 것 없어요.”
낯익은 이름이다. 동화책에서 봤던 이름인데, 무슨 정령이었지 하고 고민하다 류드밀라는 마른 풀에서 단서를 얻는다.
“왜 두려워할 게 없다는 거지?”
폴레보이, 들판의 정령이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툴툴대더니 모닥불 가에 털썩 주저앉는다.
“나도 여름이면 너희 같은 나그네는 손안에서 가지고 놀았다고.”
“지금은 겨울입니다.”
“산 호랑이가 겁도 없네.”
정령들에게는 정체를 들켜도 되는 건지, 류드밀라는 불안하게 몸을 뒤튼다. 레쉬도 그렇고, 정령들은 다들 영물을 알아보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껍데기란 사실도, 루슬란 님에 대해서도 알까? 자신들이 성물을 찾는 걸 방해하지는 않을까? 걱정에 휩싸인 그녀는 폴레보이가 자길 유심히 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뚫어져라 보지 마요, 닳을라.”
대신 그녀를 위해 나서 준 여우들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지만 폴레보이는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제야 그 눈길이 거북해진 류드밀라는 더 불안해진다.
“정말 특별할 것 없는 껍데기인데. 흠흠.”
그 말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에 와 박힌다. 그 말 뒤에 정령이 하지 않은 말이 들리는 것만 같다. 그런데 왜 위대한 마법사의 사랑을 받을까. 정말 이해가 안 되네.
너무 내가 나약한 생각만 하는 거야. 류드밀라는 새롭게 만난 정령이 무섭고 신기했던 마음도 다 사라진 채 자괴감 속으로 잠수한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텐데, 산신님과 영물들이 날 특별히 여겨 준다고 내가 착각했던 거야.
그렇게 그녀가 한없이 움츠러드는데 폴레보이가 말을 툭 던진다.
“뭐 겉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니까. 다 내가 모를 사정이 있겠지.”
정말 쉽게 상처 받고 쉽게 위로받는 그녀는 조금 용기를 내서 정령을 쳐다본다. 그러자 손을 내밀어 모닥불을 쬐던 폴레보이가 눈을 부릅뜬다.
“죄, 죄송해요. 무례하게 굴려던 건 아니었어요.”
“놀리는 거였어.”
킬킬거리고 웃은 폴레보이는 풀처럼 버석버석한 머리카락을 긁적인다. 류드밀라는 소심하게 꼼지락거리면서 고개를 더 푹 숙인다.
“그건 그렇고, 그 머리카락이 참 예뻐 보이는구나. 조금만 잘라 줄 수 있겠니?”
“네?”
“들었잖아.”
머리에 쓴 코코슈니크 너머로 머리카락을 본 걸까. 당황해서 머리 장식을 매만지던 류드밀라는 여전히 허둥거리면서 자디라를 돌아본다.
“호, 혹시 칼이 있나요?”
“류드밀라 님, 부탁을 다 들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요…. 저희가 지나는 들판의 정령이신데…….”
겨울의 들판을 무사히 지나는 일에 비하면 머리카락은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대가인 것 같다. 결국 한숨을 푹 쉰 자디라가 허리띠에 차고 있던 단도를 꺼내 건네준다. 류드밀라는 코코슈니크를 벗고 긴 머리카락 끝 조금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르려 해 본다. 칼을 한 번도 쥐어 본 적이 없어서 무서운데 머리카락은 잘 잘리지도 않고.
보다 못한 자디라가 나서서 가는 타래 하나를 잘라 내준다.
이 모든 상황을 즐겁게 지켜보던 폴레보이는 류드밀라가 공손하게 내민 머리카락 타래를 받아 든다. 그러고는 어두운 들판을 돌아보며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분다.
잠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풀숲 사이로 폴레보이를 빼다 박은 소녀 하나가 통통 튀어나온다. 조금 더 진한 흙빛 피부에 세로로 찢어진 동공까지 똑같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버석버석한 머리카락마저 아예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