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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 발짝씩 (10/20)

8. 한 발짝씩

시내는 점점 좁아져 배가 더 이상 다닐 수 없을 정도가 된다. 정상에 가까워진 것이다. 루살카들의 배웅을 받으며 배에서 내린 그들은 깨끗한 기운이 흐르는 길을 따라간다. 다행히 그 길부터는 요괴들이 공격하지 않는다.

루슬란을 부축하면서 걷다 보니 힘들어서 자연스레 말이 없어진다. 그걸 아는 그도 다만 가끔씩 다정한 눈빛을 보내올 뿐 구태여 말을 시키지 않는다.

류드밀라는 그 눈길에 감사하며 길을 따라 그를 조심스럽게 이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길이 뚝 끊기며 바위밖에 없는 거대한 봉우리가 나타난다. 봉우리 위에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긴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바위에 손을 짚고 올라갈 수는 있는지, 왜 산신님은 저런 곳에 사시는지 호기심을 품던 그녀는 그를 돌아본다.

“길이 막혔어요, 루슬란 님. 봉우리 위로는 못 올라갈 것 같은데 어쩌죠?”

“내 손을 바위에 닿게 해 줄래요?”

그가 뻗은 손을 바위에 얹게 도와준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선다. 루슬란의 손에서 나온 새파란 기운이 바위를 물들이고 넘실거린다. 그러자 바위가 천천히 희미해지더니 어떤 공간이 열린다.

“어떻게 된 건가요?”

바다의 여신이 공중에 열었던 입구와는 또 다른 마법이 신기해서 그녀가 묻는다.

“산신님의 성역이 저를 알아본 것이죠.”

그가 내민 손을 잡고 공간 안으로 발을 들이자 그들이 들어온 입구는 다시 일렁이며 바위로 가로막힌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신기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때아닌 싱그러운 풀들로 덮인 야트막한 언덕과 그 위에 작은 돌로 만든 정자. 그리고 언덕 아래에 자리한 오두막을 본 그녀는 눈을 크게 뜬다. 오두막은 나무를 베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나무들이 살아서 뒤엉켜 있는 형상이다.

“저리로 가서 먼저 인사를 드리도록 하지요. 산신님께서는 정자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을 거랍니다.”

많이 와 본 것인지 보이지 않아도 금방 옳은 방향을 가리키며 루슬란이 말한다.

머나먼 동양에서 양식을 따와 제국식으로 바꾼 정자는 류드밀라의 눈에 새로운 것이었기에 그녀는 언덕을 올라가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다.

분명 아무도 없던 정자 안에 스르르 노인의 형상이 나타났을 때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 한다. 이제 이 정도로 신기한 일들을 많이 겪었으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도무지 그러지 못한다.

그는 그녀의 여린 성정을 달래듯이 더듬더듬 등을 찾아 쓸어 준다. 그 작은 손길로도 안정을 되찾은 류드밀라는 그의 발밑을 살펴 주며 정자로 향한다.

“왔구나.”

몸 옆에 지팡이를 놓아둔 노인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들을 맞이한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녀는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만 그를 조심조심 살핀다.

노인은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땅에 끌렸음에도 전혀 어수선하다는 인상이 아니었다. 제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입는 헐렁한 코소보롯카(셔츠)에 펑퍼짐한 샤로바리(바지)를 입고 있는 노인에게서는 신비로운 기운이 흘렀다.

지극히 소박한 옷차림이었지만 노인이 앉아 있는 자세나, 살짝 찌푸린 표정, 꿰뚫어 보는 듯한 초록색 눈동자, 머리카락 한 올, 얼굴의 주름 한 자락에서도 영험한 기운이 느껴진다. 다시금 그가 루슬란이 말한 산신이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루슬란의 인사를 따라 하려다가 그가 고개를 살짝만 기울이자 당황한 류드밀라는 황궁에서 봐 왔던 서투른 절을 해 보인다. 갈라진 목소리로 이름 넉 자를 겨우 말하고는 고개를 드는데 산신의 무뚝뚝했던 얼굴에 잠깐이나마 다른 기색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루슬란에게 향하는 얼굴은 다시 딱딱하게 굳어진다. 그녀는 불안한 기색으로 손을 꼼지락댄다. 그녀가 읽었던 동화에서 산신들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산신이 어떤 면을 그들에게 보여 줄지 모르는 일이다.

“나에게는 호언장담하더니 결국 이렇게 다쳐서 돌아왔구나. 내 땅에 악한 기운을 묻혀 오다니. 성역을 열어 주고 싶지 않았다만 네가 손님을 데려왔으니 이번 한 번만은 봐주겠다.”

“전 호언장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알고 있다고 말씀드렸었죠. 그럼에도 악한 기운을 이끌고 온 것은 저이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가 이번에는 고개를 조금 더 깊숙이 숙이고 산신은 못마땅한 한숨을 쉬더니 손짓한다.

“앉으렴. 너는 계속 세워 두고 싶지만 손님이 있으니 말이다.”

류드밀라가 루슬란을 먼저 앉게 도와주고 옆자리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는 모습을 산신은 흥미롭게 지켜본다. 계속 배배 꼬는 손가락만 내려다보던 그녀가 시선을 눈치채고 더 움츠러들자 그는 온화하게 미소 짓는다.

“강의 아이가 귀한 여인을 데려왔구나.”

“저, 저는 그저 껍데기일 뿐인데 어찌…….”

혹시 산신이 제가 껍데기인 사실을 몰랐다면, 이제 알았으니 태도가 달라질까 두려워 그녀는 소심하게 꼼지락거린다. 그러나 산신은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이를 뿐이다.

“강의 아이가 귀히 여겨 주니 귀한 여인이지. 이 아이가 누굴 마음에 품은 것은 처음이라 새롭기만 하구나.”

“그 말이 정말인가요?”

놀라서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잊고 그녀가 고개를 든다. 강의 아이라는 호칭은 그가 강 근처에서 나고 자랐으니 별 위화감 없이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루슬란처럼 아름답고 강한 이와 정을 나눈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는데, 부끄러운 동시에 기쁜 마음이 고개를 내민다.

불쑥 물어 놓고 류드밀라는 무례했다는 생각에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럼 내가 네게 거짓을 말하겠느냐.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이 있다고.”

산신은 무례하다고 여기는 기색 없이 그저 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한다. 겨우 안심한 그녀는 루슬란을 돌아본다. 별안간 그와 아주 오랫동안,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그 마음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다만 그가 무릎 위에 가지런히 포갠 손을 마주 잡는다. 그는 살포시 웃으며 손을 꼭 쥐어 그녀를 안심시켜 주고선 산신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몸이 다 나을 때까지 여기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러려무나. 네 상처는 안에 들어가서 제대로 봐주겠다.”

옆에 놓아둔 지팡이를 짚고 일어선 산신은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언덕을 먼저 내려간다. 언덕을 내려가 보니 아까 지나오면서 봤던 나무가 얽혀 만들어진 오두막이 보인다.

산신을 따라 들어간 오두막 안은 도깨비불이 둥둥 떠서 밝히고 있다. 생각보다 넓은 내부에 류드밀라가 주변을 휘휘 둘러볼 동안 산신은 루슬란을 의자에 앉힌다. 그의 감긴 눈을 한참이나 살펴보던 그가 혀를 쯧쯧 찬다.

“흑마법에 아주 단단히 맞았구나. 이 공격이 심장으로 향했으면 넌 암흑 신이 되었을 거다. 용케도 비껴 맞았구나.”

“도움을 준 이가 있었습니다.”

산신은 더 묻지 않고 류드밀라를 돌아본다.

“인간의 아이야, 조금 물러나 있으려무나.”

그녀가 들은 대로 몇 발짝 물러서자 그는 루슬란의 눈가에 손을 올린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마른 손에서 초록색 기운이 모여든다.

“예로부터 물은 온갖 더럽고 악한 것들을 끌어모았지. 산은 그걸 정화하는 역할을 해 왔단다.”

한숨처럼 말한 산신이 집중해서 산의 기운으로 눈가를 완전히 덮는다. 초록 기운은 뭔가와 싸우듯이 하얀 불꽃을 튀기며 자글자글한 소리를 낸다. 류드밀라가 초조해서 눈 깜박이는 것도 잊은 채 지켜보는 가운데 하얀 불꽃들은 작은 폭죽처럼 사방으로 튄다.

다시 그가 손을 떼었을 때, 루슬란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지만 주위에 있던 검은 흔적과 번개 모양 자국은 깨끗하게 사라져 있다.

“일단 흑마법이 더 번지지 못하도록 응급 처치는 해 놓았다만, 시력이 돌아오게 하려면 다른 방도를 찾아야 될 거다.”

“산신님께서는 시력이 돌아오게 만드실 수가 없나요?”

그녀가 걱정스레 물으며 루슬란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찾아 쥔다. 전이라면 부끄럽고 망설여졌겠지만 흑마법사와의 일을 계기로 그와 한결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진 느낌이라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이 나온다.

산신은 그들을 유심히 보다가 설명을 해 준다.

“체르노모르가 건 흑마법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저주였다. 그것도 마지막 남은 제 힘을 온전히 쏟아부어 만든 저주지. 이런 까다로운 저주는 나도 섣불리 손을 댈 수가 없다.”

류드밀라는 최대한 담담하려고 노력해 보지만 제대로 안 된다. 그럼 루슬란 님은 평생을 눈이 먼 채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입을 꾹 다문다.

“방법은 있어. 세 가지 성물 중 하나만 가져와도 이런 저주는 풀 수 있을 것이다.”

“세 가지 성물이 뭔가요?”

“황금 뱀의 비늘, 은빛 신록의 뿔, 청동 고래의 수염이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 밝아진다.

“제가 황금 뱀을 만난 적이 있어요. 루슬란 님을 소환할 수 있는 뿔소라에 대한 대가로 황금 뱀을 바다의 여신님께 드렸는걸요.”

“그럼 뱀의 비늘은 안 되겠구나. 너는 뱀으로 도움에 대한 대가를 치렀고 그것을 다시 돌려받을 수는 없다.”

산신의 말에 시무룩해진 류드밀라를 위로하듯 루슬란이 일어나서 조심스럽게 어깨에 팔을 두른다.

“괜찮아요, 눈을 못 떠도. 그대가 이제 안전하잖아요.”

그녀가 간지러운 말에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산신이 콧방귀를 뀐다.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구나. 앞으로 황궁에 돌아가서 어떻게 지내려고 그러느냐.”

“황궁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나요?”

류드밀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산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여기 있을 만큼 머물러도 좋으니 강의 아이 네가 잘 설명해 주거라. 내 역할을 다 한 듯싶으니 난 가 보마, 나중에 보자꾸나.”

그는 몸을 돌려 오두막을 나선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배웅을 하러 나간 그녀의 눈앞에는 다만 거대한 산양의 뒷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다시 루슬란을 돌아본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옆자리에 앉는다.

“황궁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자국이 사라진 그의 감긴 눈가는 평온해 보이지만 그녀는 그가 긴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언제 이런 것까지 느낄 정도로 그들의 사이가 가까워진 걸까. 작은 변화에도 감사하고 신기해하며 류드밀라는 미세하게 굳어져 있는 그의 몸에 머리를 살짝 기댄다.

“전 돌아가기 싫어요. 황궁으로도, 거미줄로도 가고 싶지 않아요. 그저 여기서 루슬란 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전 정말 괜찮으니까요.”

혹시나 망설이는 이유가 저 때문일까 싶어 말을 꺼내 보지만 그에게서는 쉬이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의 걱정이 깊어만 갈 무렵 그가 차분히 입을 연다.

“저는 안 괜찮답니다.”

“이유를 여쭈어도 되나요?”

루슬란은 뭔가를 결심한 듯 그녀 쪽으로 몸을 튼다. 비록 그녀를 볼 수는 없지만 약간 떨리는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지려 한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그녀의 얼굴에 섬세한 손끝이 닿자마자 허물어진 듯 감긴 눈으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

“미안해요, 나의 껍데기 님.”

그녀를 겁에 질리게 한 것은 흘러내리는 눈물이 너무나 익숙한 듯 동요도 없는 고요한 얼굴이나, 그토록 쉽게 거두어지는 손길도 아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후회와 옛 기억이 불러낸 고통이다.

보이지도 않는 작은 얼굴이 두려움에 떠는 것을 느꼈는지 그가 그녀의 손에 제 양손을 포갠다.

“쉬어요, 우리. 쉬고 나서 때가 오면 그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줄게요.”

그때가 언제 올지는 그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과거에 그가 앗아 간 수많은 인간들의 목숨에 대한 죗값을 황실에 매인 채 치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좋아요, 루슬란 님. 나중에, 편하실 때 이야기해 주세요.”

“고마워요.”

루슬란은 약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킨다.

“이곳까지 오느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위로 올라가서 쉴까요? 산신님께서 따로 방을 마련해 주셨을 거예요.”

“네, 루슬란 님.”

오두막의 응접실 역할을 하는 공간 뒤편에는 위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그곳으로 그를 이끈 류드밀라는 난처해서 머뭇거린다.

“저 혼자서도 발을 디딜 수 있어요. 그래도 혹시 넘어지려 하면 부축하지 마세요. 같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가 왜 머뭇거렸는지 알아차린 그가 주의를 준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계단을 무사히 다 오르고 그녀는 계단 주위의 방들을 둘러본다. 어느 방이 그들을 위한 방일까, 고민하는데 계단 오른편의 방이 눈에 들어온다. 문에 물고기와 초승달 모양의 풍경이 걸려 있는 방이다.

산신이 루슬란을 강의 아이라 불렀던 걸로 봐서 저 방이 그들의 방일 것이다. 전에 그가 그녀에게 줬었던 목걸이를 떠올리며 류드밀라는 그러한 확신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루슬란의 손을 잡고 그 방으로 들어간다.

방은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그녀에게는 존재하지도 않은 할머니의 푸근한 집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이상한 기분이다.

집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나무로 이루어진, 가구와 커튼을 대신하는 긴 덩굴줄기들, 조그마한 창과 난로 대신에 자리 잡은 도깨비불 둥지. 그녀는 인형의 집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방 안을 휘휘 둘러본다.

“옳은 방으로 찾아왔군요. 이 방에는 정화 마법이 유독 강하게 걸려 있어요.”

“루슬란 님 때문에…….”

“네, 맞아요. 제 회복을 돕기 위해서요.”

그를 침대로 이끈 그녀는 그가 편히 베개에 기대도록 도와주고 저도 옆에 몸을 누인다. 즉시 긴장이 느슨해지며 피로가 쏟아진다. 이 정도로 피곤한 줄은 몰랐는데, 그녀의 생각보다 여정은 길었다. 그래도 그가 자꾸 걱정되어 류드밀라는 루슬란을 돌아본다.

“아직 루슬란 님의 눈이 완전히 낫지 않았잖아요. 그 성물을 구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많은 일들을 겪으셨잖아요. 며칠간은 조금만 쉬셔요.”

루슬란의 말대로 새로운 일들을 겪느라 잔뜩 굳었던 몸이 풀어지며 그녀는 노곤해져서 눈을 느리게 깜박인다. 그가 여정 시작에서 둘러 준 망토는 포근하고 침대는 뭘 깔았는지는 몰라도 푹신하다. 그녀가 꾸벅꾸벅 조는 것을 어깨에 자꾸 기대는 고개로 알아챈 루슬란이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먼저 주무셔요. 씻는 건 나중에 해도 되니…….”

류드밀라는 아차 싶다. 침대가 너무 편안하고 여정 동안 추워서 땀을 흘리지 않았던 탓인지 씻는 걸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자신을 더러운 사람으로 여기면 어떡하지, 란 생각이 들어 잠기운이 달아난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핀다.

“지금 씻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이 상태로라면 저도 피곤해서 욕조에서 깜박 잠들어 버릴지도 몰라요. 괜찮으니 자고 나서 생각하도록 해요, 우리.”

“하암, 그럴게요, 루슬란 님.”

하품과 함께 나온 그의 이름이 퍽 귀여워 루슬란은 입가에 미소를 올린다. 그도 몸이 피로해서 당장이라도 쉬고 싶지만 그녀가 잠드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잠을 청한다. 느리게 뛰는 그녀의 심장 박동 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뭔가 환상적인 꿈을 꾼 것 같은데 잘 생각이 나지 않는 상태로 류드밀라는 깨어난다. 루슬란의 침실에 처음 갔을 때는 낯선 곳이어서 악몽을 꾸기도 했었는데. 산신의 오두막은 정말 원래 살았던 곳처럼 편안하다.

그런 작은 점도 신기해하며 그녀가 몸을 뒤척여 일어나자 옆에서 루슬란이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는다.

“잘 주무셨나요?”

“네. 루슬란 님께서는요?”

서늘한 손길이 좋아서 접촉이 조금 오래갔으면 하고 바라는데 그가 손을 물린다.

“이제 적어도 목욕하다 잠들지는 않을 것 같아요.”

나지막한 웃음과 함께 이런 말을 한 그는 고개를 살짝 앞으로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한다.

“오면서 추워하시길래 또 몸살이 난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열은 없었어요. 아픈 곳은 있나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온몸이 다 쑤셔 온다. 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많이 걸어 본 그녀의 몸이 항의라도 하듯 움직일 때마다 온 곳이 다 뻐근하게 한다. 전에는 긴장으로 느끼지 못했던 피로가 쌓여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말한다면 그가 걱정할 것이 뻔하다. 그녀는 몸을 습관적으로 꼼지락거리다 아파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꾹 참는다.

“없어요, 아프지는 않아요.”

“안 아플 리가 없을 텐데요.”

그녀는 혹시나 거짓말을 해서 그의 심기에 거슬렸을까 안색을 살피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만이 실려 있다.

“같이 목욕하면서 뭉친 곳을 풀어 드릴게요.”

류드밀라는 나신으로 욕조에 함께 들어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귀까지 새빨개진다. 그의 표정이 별안간 약간 슬퍼진다.

“분명, 그대는 얼굴이 빨개졌을 테지요.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가슴이 송곳으로 쿡쿡 쑤셔지는 듯하지만 그녀는 그를 걱정하게 만들기 싫다. 그래서 그를 달래려는 듯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조그맣게 말한다.

“전 얼굴이 자주 빨개지니까…….”

“나중에 눈을 뜨고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요?”

그녀가 부끄러운 나머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주억이자 그는 금방 슬픈 얼굴을 푼다. 류드밀라는 여전히 창피한 상상이 자꾸 나와 고개를 들 생각을 못 한다. 그런 마음을 모르는 척한 그가 가벼운 목소리로 넌지시 묻는다.

“목욕물을 받으라고 할까요?”

“좋아요.”

차마 싫다고는 못 하고 그녀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이제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있는 사실도 부끄러워져 고개를 든 그녀는 그가 은종을 울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딸랑,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리자마자 방문이 열리고 젊은 여인 하나가 들어와 절을 한다.

“목욕물을 받아다 주렴.”

황궁의 시중인들에게는 쓰지 않던 다정한 목소리로 루슬란이 명령하자 여인이 고개를 슬쩍 든다. 류드밀라는 흠칫 놀라서 그를 붙든다. 여인의 눈은 따뜻한 갈색이지만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동물의 눈처럼.

“저런, 변신 마법이 조금 풀렸구나.”

루슬란은 눈은 보이지 않아도 생명체를 둘러싼 마법에 난 구멍을 느낀다. 그의 말을 듣고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매만진다. 손을 내렸을 때는 평범한 인간의 눈이 되어 있다.

여자가 다시 절을 하고 방문을 나서는데 발걸음도 약간 서툰 것이 느껴진다. 문이 닫히고 류드밀라는 궁금증에 휩싸여 그의 설명을 기다린다.

“산에 사는 사슴 영물이에요. 신록과 다르게 날개는 없지만 산신님의 은혜 덕에 마법을 쓰게 되었답니다.”

“그렇군요.”

마법을 쓸 줄 안다는 사슴이 조금은 부러워진 그녀의 서글픈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그녀의 주의를 돌린다.

“목욕을 하고 나면 무얼 하고 싶나요?”

“아 저, 저는 잘 모르겠어요…….”

“배는 안 고픈가요?”

또 그의 말을 들으니 배가 꼬르륵거려 온다. 아까는 그가 말한 후에야 피곤했었는데. 당황해서 배를 감싼 류드밀라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고픈 것 같아요.”

루슬란의 감긴 눈가가 곱게 휘어진다.

“그대의 배에서는 신기한 소리도 나는군요.”

그녀는 결국 창피함을 못 참고 울먹이면서 말을 늘어놓는다.

“죄송해요, 이런 모습이 너무 부끄러운데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괜찮아요. 정말로요.”

말소리에 섞인 울음을 알아챈 그가 그녀를 품에 안고 달랜다.

“그대야말로 이런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으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시려고.”

뒷감당이란 말에 혼란이 온 그녀가 멍청하게 안겨 있는데 사슴 여인이 와 뭔가를 알리려는 듯 입을 뻐끔거린다. 그녀의 뒤로는 건장한 사내 셋이 물통을 나르고 있다.

“목욕물이 준비되었으니 가 볼까요?”

기척을 눈치챈 그가 그녀에게 묻는다. 그녀는 좋다고 대답하곤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그를 욕실로 이끈다. 아직도 같이 목욕하는 상상만 하면 얼굴이 홧홧해진다.

영물들이 물러가고 그들은 증기가 피어오르는 욕실에 단둘이 남겨진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있는 그녀와 달리 그는 차분히 허리끈을 푼다.

저도 옷을 벗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그녀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가 전에 둘러 준 망토 끈만 만지작거린다. 그러다 막상 그의 나신과 마주하자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발끝만 내려다본다.

“끈을 풀어 드릴까요?”

옷가지를 욕실 벽에 걸고 난 그가 그녀를 돌아본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부끄러움을 꿰뚫어 보고, 아직 그녀가 옷을 벗지 않았음을 안 것이다.

“그래 주세요…….”

“제가 보지도 못하는데 이러시면 전에는 어떻게 벗었나요.”

끈을 한 가닥씩 풀어 망토가 흘러내리게 한 그가 안에 입은 거친 옷도 벗겨 내주며 말을 건넨다.

“그러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지막이 웃은 그는 속옷은 그녀가 직접 벗게 기다려 준다. 추워져서 오들오들 떨며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욕조로 들어간다. 그녀의 상상에서 욕조는 좁아서 살이 민망하게 부대꼈건만 현실에선 공간이 너무 남는다.

하지만 그는 떨어져 있을 마음이 전혀 없는 듯 그녀 바로 옆에 기대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준다.

“조금 있다가 머리카락도 감겨 줄게요. 춥진 않죠?”

“네, 춥진 않아요…….”

왜 바로 머리카락을 감겨 주지 않으시는지 의문이 든 그녀는 그가 다른 뜻을 품었음을 꿈에도 모른다. 그저 그를 만나 함께 목욕하고 있는 것이 꿈만 같고 행복할 따름이다.

목욕물은 뜨듯한 것이 기분이 좋아 몸의 긴장이 풀려 오고 자꾸만 나른함이 밀려온다. 따뜻한 물에 온몸이 휘감아져 있자 그와 그녀 둘 다 나신이라는 사실도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간다.

어느새 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가 옆에서 계속 속살거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대로 잠들었을 것이다.

“자면 안 되지요. 우리가 할 일이 있을 텐데요.”

느리게 말한 루슬란이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가둔다. 말랑하던 유두 끝이 그의 몸에 자꾸 스치자 뾰족하게 선다. 제 몸이 예민해진 것도 모르는 류드밀라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무, 무슨 할 일이요?”

대답 대신 그는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 온다. 체취와 느낌만으로 입술을 찾아낸 그는 안식처를 찾은 사람처럼 편안하게 그녀를 탐한다. 아랫입술을 지분거리다 망설임 없이 혀를 밀어 넣어 안을 훑는 것이 느긋하기 짝이 없다.

한편 그녀는 순간 얼어붙어 있다가 결국 그에게 몸을 내맡긴다. 혀가 들어올 수 있게 입을 살짝 벌리고 있다가 손톱만큼 용기가 생기자 제 혀는 가만가만 그의 송곳니에 대어 본다.

허리를 휘감아 제 무릎 위에 앉히는 손길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녀가 언제 그를 거부할 만한 용기를 낸 적이 있었냐마는 아래에 뭉근히 닿는 감촉은 그런 위험한 생각이 들게 한다.

토끼처럼 겁이 많은 그녀가 달아나지 않게 그는 그녀를 살살 달래며 달콤한 말들을 속삭여 준다. 겨우 정신을 추스른 그녀가 몸을 움직여 그의 것을 안에 담을 때까지.

루슬란의 것은 여전히 버거운 부피로 그녀 안을 침범한다. 류드밀라는 놀라서 숨을 헉 들이쉬고 불규칙하게 내뱉는다. 그가 다시 키스하지 않았다면 혼자서는 긴장을 절대로 풀지 못했을 것이다.

조이던 아래의 힘이 약간 풀어지며 그의 중심은 조금 더 그녀의 안으로 파고든다. 그렇게 아픔은 점점 더 쾌락에 가까워진다. 그의 위에 앉은 자세에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앞뒤로 움직이며 그에게 매달린다.

마침내 그에게서 입을 뗀 그녀가 잠시 얕게 헐떡이다 그가 허리를 튕기자 억누른 신음을 뱉어 낸다.

“으읏, 흣…….”

여린 몸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휘청이다가도 황홀감에 젖어 허리를 팽팽하게 휜다. 눈으로 보지는 못해도 그는 허리를 감싼 손으로, 어깨에 닿는 숨결로, 달콤한 신음으로 그녀를 느낀다. 물론 아래로도.

오랜만에 한 만큼 그녀를 놔주고 싶지 않다. 그녀가 전에 애원한 대로 그의 이름만 겨우 부를 수 있을 때까지 괴롭히고 싶다. 다른 한편으로는 혹여나 깨질까 세상에서 가장 조심스레 아껴 주고 싶기도 하다.

모순적인 감정에 휩싸인 루슬란은 허리를 한 번 더 튕긴다.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만 그녀의 등과 뒷목을 떠받치고 가슴 끄트머리를 잘근 깨물어 보기도 한다. 손 아래서 작은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꼿꼿이 서 있는 유두를 장난스레 혀로 갖고 놀다가 젖무덤을 아프지 않게 물자 류드밀라가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신음을 그에게 들려준다. 그의 이름도 함께 부르며.

“흐읏, 루슬란 님…….”

가슴에서 입을 뗀 그가 그녀의 귀에 속삭인다.

“왜 부르시나요?”

그녀가 대답하려는 순간 그는 허리를 다시 한번 튕기고 그녀는 엉망이 된 발음으로 엉킨 말과 함께 울음을 토해 낸다.

“너, 너무 짓궂으셔요…….”

겨우 목을 가다듬고 그녀가 칭얼거린다.

“제가 어떻게 했길래 그런 말을 하나요.”

“허리를, 이렇게, 막 하셨잖아요…….”

류드밀라가 그가 했던 것처럼 허리를 확 움직이자 그는 아찔해져서 작은 웃음을 터트린다. 쾌락에 취해 조금은 대담해진 그녀는 몸을 더 과감하게 움직인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채워지지 않았던 빈 곳이 차는 듯하다. 새로운 기쁨을 발견한 그녀는 욕조의 물이 기분 좋게 제 몸을 스치는 것도 즐긴다.

누군가 그들을 봤다면 그 모습에 홀렸으리라. 류드밀라의 긴 곱슬머리는 물에 젖어 더 찬란한 은빛으로 빛났고 온몸에 섬세한 거미줄처럼 달라붙어 있다. 창백했던 가녀린 몸은 복숭아처럼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열기를 더하고 있었고 몸의 부드러운 곡선은 유려했다.

평소에는 발치에 끌리던 루슬란의 긴 머리카락은 이제 욕조 안에서 짙푸른 해초처럼 넘실거린다. 감긴 눈가 위 드리운 속눈썹에는 욕조에서 튄 물방울이 보석처럼 매달려 있다. 단단하고 조각 같은 하얀 몸의 근육이, 그가 몸을 좀 더 일으키자 물결치듯이 움직인다.

둘은 절정에 함께 다다르고 류드밀라는 기진맥진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저, 궁금한 게 있어요.”

그렇게 평온한 침묵이 이어지다 그녀가 문득 입을 연다.

“무엇인가요, 나의 껍데기 님?”

그의 따스한 목소리에도 한참을 망설이다 류드밀라는 겨우 말을 꺼낸다.

“전에 함께 목욕을 했을 때, 오해 때문에 저를 놓아주셨잖아요.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하셨어요?”

그녀의 말이 어떻게 들릴지 깨닫자 순간 두려움이 너울거리는 파도처럼 그녀를 덮친다. 그녀는 황급히 말을 더한다.

“루슬란 님을 탓하려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냥 평소에는 제게 그리도 다정히 대해 주셨으면서 왜 제 말 한마디 때문에 저를 놓아주셨는지, 그게 궁금했어요. 혹시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 해도 돼요.”

“그대가 물어보는데 대답을 해 드려야죠. 걱정하지 말아요,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몇 번이고 후회했으니까요.”

류드밀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가운데 루슬란은 생각에 잠겨 물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린다.

“그날 그대가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고, 전부터 가져온 두려움이 더 심해졌던 것 같아요.”

그녀는 어깨에 기대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 그 말 없는 응원에 그는 용기를 내어 더 말을 이어 나간다.

“저는 예전에 제가 아끼던 이들을 참혹하리만치 잔인하게도 잃었답니다. 그래서 한동안 복수심에 사로잡혀 제게 상처를 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다녔죠. 그것이 물건이든, 생명이든, 자연이든 상관 않고요.”

류드밀라는 그의 말에 담긴 처절한 슬픔에 몸을 가볍게 떨며 그를 꼭 끌어안는다. 고맙게 그 포옹을 받아들인 루슬란은 한숨을 폭 내쉰다.

“그런데 그런 행동들이 오히려 제게 더한 상처를 안겨 주더군요. 제 손짓 한 번에 이렇게 쉽게 바스러질 것들이 내게 이토록 큰 상처를 남겼다니, 이런 생각이 들자 더 비참해졌어요.”

손길이 조금 느려지며 그가 먹먹하게 잠긴 목소리로 말한다.

“그때 해친 생명들의 절규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 신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게 벌을 내렸어요. 저를 이곳에 묶어 두고 자유를 앗아 갔죠. 절망과 슬픔과 분노가 저를 좀먹어 가서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였어요.”

이제는 뜨지 못하는 감긴 눈으로도 그녀를 바라볼 수 있다는 듯이 그는 그녀의 턱을 가벼이 쥐고 들어 올려 눈을 맞춘다.

“그대가 제 삶에 들어왔답니다, 나의 껍데기 님.”

그녀는 그의 하얗고 매끄러운 얼굴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그가 작은 미소를 보여 주곤 고개를 돌려 그 손끝에 입을 맞춘다.

“그대는 내가 잃은 소중했던 것들을 조금씩 내게 되찾아 줬죠. 나는 그대를 보며 인내하는 법을 배웠고, 배려하는 법을 배웠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답니다.”

어느새 류드밀라의 눈가는 젖어 들어 있다. 그녀도, 그녀도 그랬다고 그에게 말해 주고 싶다. 그녀도 그와 함께하며 용기를 내는 법을, 두려움을 이겨 내는 법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고. 그러나 그녀는 가만히 듣고 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보다 그의 말을 들어 주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그래서 그대마저 잃을까 봐 항상 두려웠어요. 하지만 되풀이되는 악몽처럼 그 두려움 끝엔 언제나 같은 결말이 있었죠. 내 두려움 때문에 그대를 옥죄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또 다른 두려움이란 결말이. 그래서 스스로 약속했어요. 그대가 절 두려워하게 되면, 싫어하게 된다면 망설임 없이 놓아주기로. 그대는 내 이기적인 두려움보다 소중했으니까요.”

루슬란은 그녀가 우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눈가에 맺힌 방울을 검지로 조심스레 닦아 낸다.

“그 이유 때문에 그대를 그토록 쉽게 놓아줬었어요. 절대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어요. 내가 그대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워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제가 이렇게 용기가 없답니다.”

“아니에요. 루슬란 님은 충분히 용감하신 분이세요.”

그녀가 여전히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힘주어 말하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다. 하고 싶었던 말이, 느꼈던 감정들이 너무 많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횡설수설 온갖 말들이 다 튀어나올 것만 같다.

“저도 그랬어요. 저도 루슬란 님과 함께하면서 움츠러들지 않는 법을, 소중한 사람에게 표현하는 법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요.”

“그랬다면 다행이에요. 제가 처음 만났을 때는 작고 어리기만 했던 그대가 이런 어여쁜 말도 할 줄 알고. 행복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그 말에서 묻어나는 사랑은 아주 예전부터, 그녀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서 류드밀라는 잠시 혼란스럽다. 그 혼란 가운데서 그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들이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이.

알리나, 인형을 색칠하던 껍데기 여인의 말도 떠오른다. 어릴 적 그녀에게도 평범한 삶과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다는 말이.

그녀는 다시 그의 어깨에 기대며 그의 도드라진 쇄골을 조심조심 쓸어 본다. 무의식중에 나온 그런 행동들에서, 그녀가 그를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저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하셨죠.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제가 겨를이 없어 마음에 담아 두고만 있었어요. 이제는 그 말뜻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루슬란의 표정이 살짝 굳어진다. 그가 팔을 올려 그녀를 감싸 안자 몸의 근육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쇄골에서 손을 뗀 그녀도 그를 마주 안는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요, 나의 껍데기 님. 더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어쩌면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루슬란은 슬퍼진 목소리로 부탁해 온다. 그녀가 상처받을까 봐 약간은 겁에 질려 있는 음성이다. 그런 그의 청을 어떻게 그녀가 들어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기다릴게요.”

“고마워요.”

그제야 안심한 그가 포옹을 풀고 그녀의 손을 찾아 손등에 키스를 남긴다. 그러고는 욕조 안에서 그녀를 부드럽게 돌려 앉힌다. 머리를 감겨 주려는 것임을 깨달은 류드밀라는 그의 손길에 몸을 내맡긴다.

향유까지 써 가며 깨끗하게 씻고 나온 그녀가 수건으로 몸을 닦으려는 순간 그가 손을 부드럽게 움직인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 묻었던 물들이 얌전히 욕조로 되돌아간다. 루슬란은 그녀의 놀란 얼굴이 짐작이 간다는 듯이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는다.

어느새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여전히 나체인 그녀에게 어디서 가져왔는지 고이 접힌 옷 한 벌을 내민다.

“목욕을 하는 사이에 사슴이 욕실 앞에 두고 갔더군요.”

“어떻게 아셨나요?”

목욕을 해서 그런지 몽롱한 기분에 휩싸여 그녀가 멍하니 묻는다.

“저는 귀가 밝답니다.”

이렇게 대답한 루슬란은 그녀가 옷을 입기를 기다려 준다. 소박한 갈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치맛단을 만지작거리며 하품을 억누른다.

“몸이 피로하면 식사를 들기 전에 한숨 더 잘까요?”

“그러면 좋겠어요.”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침대로 바로 이동한다. 나른하게 누워 류드밀라는 머리를 토닥이는 손길에 맞춰 숨을 쉬다 잠이 든다.

그날 목욕을 하며 그가 들려준 대답들이 그녀의 마음을 행복하게 물들인다. 아직 하지 못한 질문들이 많이 남은 게 기쁘게 여겨질 정도로. 그 질문들에 대한 답도 분명 이처럼 예쁠 것이라고 그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는다.

***

이번에 자면서 꾼 꿈을 류드밀라는 기억해 낸다. 그녀가 동화책에서나 보던, 그리고 산을 올라오며 처음으로 직접 본 루살카들과 함께 시내에서 물장구를 치며 노는 꿈이다.

행복한 꿈이었지만 뭔가 가슴 한구석에 아릿함을 느끼며 깨어난 그녀를 루슬란이 웃으며 맞아 준다. 달라진 심장 박동과 숨소리만으로도 일어났다는 사실을 안 것이 신기해 그녀는 그가 볼 수 없는 미소를 되돌려 준다.

그러다 그가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떠오르자 류드밀라는 망설인다. 긴 망설임은 그가 잘 잤냐는 인사를 하고 그녀가 대답한 후에도 계속된다.

겨우 용기를 쥐어짜 낸 그녀는 길고 긴 망설임 끝에 그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남긴다. 그리고 그가 뭐라고 하기 전에 재빨리 덧붙인다.

“아침 인사예요.”

얼굴이 새빨개져서 그녀가 우물거린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그가 다정히 몸을 감싸 안는다.

“지금은 아침이 아니어요, 나의 껍데기 님.”

그의 말을 듣고 내다본 창밖은 어둑어둑하다. 그녀는 당황해서 루슬란의 품 안에 갇힌 몸을 꼼지락댄다.

“내일 아침에도 그대의 인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다려지는걸요.”

사랑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로 속삭여 준 그가 별안간 걱정스레 얼굴을 찌푸린다.

“오래 잤으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네요. 배가 많이 고프시죠.”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대가 잘 때 식사를 준비하라고 일렀으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루슬란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렴.”

사슴 여인이 들어와 방 안 탁자에 식사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 물러간다. 그와 함께 탁자 앞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마친 그녀는 그의 눈치를 가만히 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언제나처럼 그는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물어 온다. 그녀는 고민 끝에 어렵게 말을 꺼낸다. 그에게 뭘 부탁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두렵게 느껴진다. 그가 거절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아도 그렇다.

오히려 그 사실을 알아서 더 두렵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다 그가 속으로 정을 끊으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은 매번 존재해 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조심스레 청하려 입을 연다.

“저, 아까 그 시내에 다시 갈 수 있을까요? 여기 데려다준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아요.”

감사 인사는 고심해서 생각해 낸 핑계였을 뿐 사실 류드밀라는 꿈에서 깬 후 느꼈던 그 아릿함의 원인을 찾고 싶다. 시내에 가서 다시 한번 그 은빛 물살을 본다면, 차가운 물이 손을 스치게 한다면 아릿함도 다시 느껴지지 않을까.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그 시내는 성역 밖에 있어서 위험해요. 겨울이라 날이 춥기도 하고요. 이 안은 항상 봄이니 이곳에 있는 시내로 물놀이를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요? 그대가 고마움을 느낀 아이들은 원래 이곳에 산답니다.”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루슬란 님.”

“조금 쉬다가 나갈까요, 아니면 바로 나가 볼래요?”

그녀는 그 작은 선택에도 머뭇거리다가 조그맣게 의사를 밝힌다.

“바로 나가고 싶어요.”

“그럼 그러도록 해요.”

자리에서 일어난 루슬란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와 일어나는 것을 도와준다. 눈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도 다른 감각만으로 자연스레 움직이는 그가 류드밀라는 신기하기만 하다. 그 신기함은 그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냇가로 이동하자 더 번져 간다.

성역에 들어올 때는 지치고 긴장한 상태라 제대로 느끼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보니 언덕과 시내는 새롭기만 하다. 그녀가 거의 처음 나가 본 황궁 밖이라 할 수 있는, 뱀들의 숲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발목을 스치는 부드러운 풀과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봄바람. 환한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길과 어두운 풍경 속에서 따스한 빛을 내뿜는 저 멀리의 오두막. 그리고 허리를 단단히 감싼 그의 손길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녀는 꿈이 준 아릿함을 잠시 잊고 그 순간에 취해 본다.

루슬란은 그녀를 기다려 준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인내심이 많다.

행복에 취한 류드밀라가 조심스레 그를 돌아보며 이렇게 제안한다.

“시내로 내려가 봐도 될까요? 루살카 님이 계시는지 보고 싶어요.”

아무리 나그네를 홀리는 물의 정령이라지만 루슬란 님이 계시는데 해를 끼칠까 싶다. 그도 루살카가 위험하다고 여기지는 않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요.”

성역에 처음 들어올 때처럼 그의 발치를 살피며 류드밀라는 그를 조심조심 이끈다. 혹시나 루살카들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그녀가 시내에 가까이 가자 물에서 여인들이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것이다.

루살카들이 모여들자 그녀는 시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을 건넨다.

“저, 일전에 저희를 데려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안전하게 올 수 있었어요.”

저들끼리 한참 동안 키득거리던 루살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얹기 시작한다.

“에이 뭘요.”

“덕분에 우리도 재밌었는걸.”

“오랜만에 인간을 보니까 신기했어요.”

“말도 참 예쁘게 하네.”

“강의 아이님이 좋아하실 만하겠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 류드밀라의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가 바로 뒤에 있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참으로 짓궂으신 분들이라 생각하며 그녀가 제 뺨을 감싸는데 루살카들이 깔깔거리며 즐거워한다.

“뺨 쥐는 거 봐봐.”

“엄청 부끄러워하네.”

“귀여워요.”

그 말을 불쑥 내뱉은 제일 작은 루살카가 류드밀라의 옷자락을 잡고 끌어당긴다.

“이리 들어와서 함께 놀아요.”

루살카들이 나그네를 꾀어 물에 빠트려 죽인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던 그녀는 겁에 질려 루슬란을 돌아본다.

“루슬란 님……?”

“물놀이를 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었나요? 저도 같이 들어가서 장난이 심해지면 구해 드릴게요. 너무 걱정 말고 같이 노셔요.”

그녀가 여전히 망설이자 그는 픽 웃더니 시내로 먼저 걸어 들어간다. 그의 옷자락이 물 위에 날개처럼 퍼진다. 그가 몸을 완전히 담갔다가 다시 바로 서자 우아한 몸 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덕분에 류드밀라의 얼굴에 붉은 기는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들어와요, 들어와.”

“우리랑 놀자.”

루살카들이 더 보채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시내에 한 발을 담근다. 물은 시원하게 발목을 간질이고 그녀는 용기를 내서 더 깊이 들어간다.

루살카들은 잠수해서 그녀의 발목을 건드리거나 옷자락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일부러 요란하게 물을 튀기며 옆을 지나가기도 한다. 어두워서 약간은 무서운 데다 그 손길에 깜짝깜짝 놀라던 그녀는 그가 뒤에서 끌어안자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다.

“괜찮아요. 내가 곁에 있으니 저들도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 못해요. 그러니 마음 놓고 실컷 놀다 들어가도록 해요, 알겠죠?”

다정하게 달래는 말들에 그때부터 그녀는 서서히 걱정과 두려움을 내려놓는다. 저에게 물을 뿌리고 지나간 루살카에게 물을 조금 떠다 흩뿌릴 정도까지 용기를 내어 본다.

그걸 시작으로 루살카들은 그들에게 물세례를 퍼붓기 시작한다. 얼굴에 물을 맞아도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고 그녀는 마구 물을 뿌리기 시작한다.

제일 작은 루살카가 도망가는 것을 뒤쫓다 그만 발이 미끄러져 철퍼덕 주저앉아 버린 류드밀라는 크게 웃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뜻하지 않게 큰 소리로 나온 제 웃음소리에 놀랐으나 곧 그 웃음소리도 웃겨져 더 크게 웃는다.

루살카들도 넘어진 그녀 주위로 몰려들어서 함께 웃는다. 그녀가 걱정되어 서둘러 다가왔던 루슬란도 부드럽게 웃음 짓는다. 이렇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다면 손발이 붇도록 물놀이를 올 수 있을 것만 같다.

겨우 웃음을 그친 그녀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곤 그에게 달려가 안긴다. 꿈에서는 그가 없었는데 현실에서는 그가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과 함께 그녀가 궁금해했던 아릿함도 함께 느껴진다.

“저, 루슬란 님과 이랬던 적이 전에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해 놓고 그녀는 그 말이 아니면 아릿함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루슬란을 올려다보니 뜻밖에도 그의 얼굴은 기쁨에 물들어 있다.

“맞아요, 나의 껍데기 님.”

“왜 그 사실이 지금에서야 기억나는 거죠?”

그는 차마 말하지 못한다. 마녀들이 그녀에게서 빼앗아 갔던 기억을 그가 간직하고 있음을. 그 기억을 온전히 돌려주면 그녀가 그를 무서워할 거라는 두려움이 그를 잠식하고 있다. 그래서 다만 행복한 추억만 골라서, 잘 정제해서 돌려주고 싶을 따름이다.

“그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었어요. 마녀들이 앗아 간 기억을 제가 보관해 왔답니다.”

한순간 슬픔이 번져 버린 그의 얼굴을 보니 그녀는 더 캐묻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인다.

“한 번에 모든 기억을 돌려주면 그대가 다칠 수도 있어서, 그래서 조금씩 돌려주기로 마음먹었어요.”

반쪽만이 진실인 그 말을 류드밀라는 완전히 믿는다. 그녀는 그가 더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비빈다.

“기억을 오랫동안 갖고 있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천만에요. 그대를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는걸요.”

함께 시내 밖으로 나온 그들의 몸에 묻어 있던 물이 방울방울 공중에 떠서 시냇물로 되돌아간다. 몸이 완전히 마르자 류드밀라는 루살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루슬란에게로 가 품에 안긴다.

“이제 오두막으로 돌아갈까요?”

“좋아요, 루슬란 님.”

***

오두막에서 침대에 누운 그녀는 지친 몸을 쭉 펴며 기지개를 한번 켠다. 다른 이들은 일어날 때 기지개를 켠다지만 그녀는 잠들기 전에 켰다. 그래야 몸의 피로가 조금 가시며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주무시려고요?”

옆에 모로 누운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장난스레 물어 온다.

“그럼 안 자고 무얼 하고 싶으신가요?”

큰 보라색 눈을 깜박이며 묻는 얼굴이 분명 사랑스러울 것이라 생각하며 루슬란이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댄다.

“순진하기도 하셔라. 한 침대에 누웠는데 긴긴 밤을 그저 흘려보낼 수는 없지 않나요.”

“아.”

귓가에서 움직이던 입술이 귓불을 깨물자 그녀는 놀라 숨을 참는다. 이제 내려온 보드라운 입술이 목덜미를 스치자 기분 좋은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한 손은 그녀의 가슴팍에 가벼이 올려놓은 채 목덜미를 물고 빨자 빨라지는 심장이 손 아래서 느껴진다. 참았던 달큰한 숨을 내쉬는 것도 그리 귀여울 수가 없다. 그는 가슴팍에 올려놓았던 손으로 원피스를 쉽게 벗겨 낸다.

알몸이 된 류드밀라는 가는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감싼다. 그의 키스가 목덜미에서 점점 아래로 향하며 팔은 자연스레 풀리지만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수줍음을 애써 달래 보려 한다.

마침내 그의 혀가 아래에 닿았을 때, 그녀는 숨을 작게 헐떡이며 허리를 휜다.

부끄러움을 달래 보기 위해 만지작거리던 머리카락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루슬란이 혀를 도톰하게 세워 안 깊숙한 곳을 침범하자 류드밀라는 몸을 뒤튼다.

안에 구름이라도 낀 듯 머릿속이 흐려지고 비 오기 전 텁텁한 공기가 대기를 압박하듯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누군가 팔다리를 부드럽게 짓누르는 것만 같다.

마침내 먹구름이 내린 단비가 토독토독 떨어지며 그녀의 몸에도 간질거리는 기운이 올라온다.

류드밀라가 몸을 꼼지락대자 그걸 느낀 그는 고개를 들고 살짝 웃어 준 후 그녀의 안으로 들어온다. 언제나 낯선 크기로 침범한 그의 중심은 처음에는 천천히, 이내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안을 헤집는다.

그녀는 부끄러워서 어깨 옆에 짚은 그의 손만 빤히 쳐다본다. 그러다 그가 그녀를 못 보는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고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예전에 그렇게도 그녀를 걱정시켰듯이, 정을 통하는 중에도 루슬란의 얼굴은 고요하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한없이 차분하고 따스한 표정이다. 단정하게 다문 입술과 가지런한 속눈썹. 찡그림 없이 평온한 눈매와 땀 한 방울 없는 반듯한 이마. 그럼에도 가끔 찡그리는 미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이 그가 이 행동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녀는 전처럼 그의 본능을 자극하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인다. 아래에서 점점 더 큰 쾌락이 올라올수록 그 욕망은 부풀어 오른다.

이런 변화가 두려웠지만 류드밀라는 그 욕망에 몸을 내맡기기로 한다. 그녀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 주고 큰 기쁨을 주는 그인데, 그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려 하자 그가 뒤로 살짝 물러난다. 난처해하는 미소가 그녀로 하여금 상처 받지 않게 도와준다.

“미안해요, 방금 그래서…… 맛이 없을 텐데요.”

“상관없어요.”

루슬란은 두 번 망설이지 않는다. 그가 그녀의 어깨 옆에 짚었던 손을 들어 뒷머리를 감싸고 키스를 해 온다. 류드밀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혀를 넣자 놀라서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에게서 마침내 다른 반응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 뿌듯함도 잠시, 그가 허리를 거칠게 움직이자 기껏 세웠던 계획이 다 흩어져 버린다. 머리가 새하얗게 되고 숨도 저절로 가빠진다.

그녀가 헐떡거리자 입을 뗀 그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다. 그러나 류드밀라는 그런 매혹적인 미소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다급한 울음을 삼키며 저도 모르게 애원의 말을 입에 담는다.

“루슬란 님… 더, 더 깊이…….”

“더 깊이 무엇을 할까요?”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자유로워진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쓸어 주며 그가 느긋하게 묻는다.

“흑, 더 깊이… 넣어 주세요…….”

루슬란이 허리 짓을 멈춰 애가 탄 그녀는 몸을 사부작거린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허리를 움직이지 않은 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무엇을 넣어 드릴까요, 나의 껍데기 님?”

“루, 루슬란 님의 것을요…….”

그렇게 말하고 류드밀라는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그의 것을 담고만 있자 뭔가 허전한 느낌에 겨우겨우 눈을 떠서 본 얼굴은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 장난에 휘말렸다는 사실이 억울해서 그녀는 잘게 흐느낀다.

그저 그를 즐겁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도 몰라주고, 아니면 모른 척하면서 그녀가 부끄러운 말을 입에 담게 만든 그가 밉다. 그런 미운 마음은 처음이라 더 속상하다. 그런데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아서 당황스럽다.

감정의 홍수 속에서 가엾게도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의 이마에 루슬란이 입을 맞춘다. 허리도 다시 움직이며 그녀를 다정하게 절정으로 이끌어 준다.

“미안해요, 이렇게 귀엽고 아름다운 그대에게 장난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랬어요.”

쾌락의 끝을 맞이하고는 이내 울면서 축 늘어진 류드밀라에게 그가 옆에 누워 속삭인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도 떼어 내주고, 눈물도 닦아 내주지만 그녀의 울음은 쉬이 멈출 줄을 모른다.

사실 울음을 그치라면 그칠 수는 있지만 그가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몽롱해서 대담해진 상태에서 그녀는 그리 생각한다. 그 때문에 그녀가 속상했으니 그도 그녀 때문에 속상해했으면 좋겠다, 라고.

그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루슬란은 그녀가 귀여워 몰래 웃음을 참는다. 웃음을 잘 참아 낸 목소리는 흐트러짐이 없다.

“이리 슬프게도 울면 제가 마음이 아파요. 달래 드릴 테니 왜 우는지 말해 주셔요.”

그를 좀 더 애태우겠다는 결심과는 다르게 마음이 아프다는 소리에 류드밀라는 덜컥 겁부터 먹는다. 너무 울어서 그에게 부담을 준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그러나 바로 울음을 그치면 이상하게 보일까 봐 그녀는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태에 빠진다.

돌아오는 대답이 조금은 잦아든 울음 말고는 없자 그는 그녀의 머리를 토닥인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슬프실까. 제가 한 장난 때문에 우는 건가요?”

말없이 끄덕이는 고개를 손 아래서 느끼고는 루슬란이 픽 웃음 짓는다. 그저 사랑스럽다는 듯한 그 웃음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그녀가 마지막 울음을 삼키고선 입을 조심스레 연다.

“장난 때문에 운 것도 있지만, 전에도 말씀드렸었는데… 루슬란 님께서는 별로 행복하신 것 같아 보이지 않아서 속상했어요.”

그가 입가에서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류드밀라를 내려다본다. 뜰 수 없는 눈은 감겨 있지만 그의 다정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제가 표현이 서툴렀군요. 속상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괜히 저 때문에 사과하지 마세요…….”

머리에 있던 손이 내려와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쥔다. 그의 웃음에 울음이 그쳤듯이, 그 손길에 서러웠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그대가 울었으니 괜찮지 않은 거죠. 정말 미안해요. 저는 정말 행복했는데, 마음먹은 만큼 표현이 안 되었나 봐요.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었잖아요, 그대에게 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두렵다고.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루슬란 님이 어떤 모습이든 저는 루슬란 님을 사랑할 거예요.”

“고마워요. 저도 다음번에는 조금 더 용기를 내 볼게요.”

그의 감긴 눈이 둥글게 휘자 그녀는 새삼 그가 햇살을 받은 서리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찌 보면 유약해 보이는 새하얀 피부와 전혀 유약해 보이지 않는 근육들. 그럼에도 섬세한 외모가 서리를 꼭 닮았다.

서리가 햇볕을 받고 아름답게 빛났다가 결국 녹아 사라지듯 그도 그녀의 곁에 오래 머물지 않으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이 불쑥 든다. 그러나 류드밀라는 두려움을 곧 쫓아낸다. 이렇게 그의 손길을 받고 있으니 그런 소심한 공포 따위는 우습게 여겨진다.

“다음번이 지금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직 루슬란 님께서는 그, 그렇게 하지 못하셨잖아요.”

수줍게 속삭이는 그녀 옆에서 루슬란은 걱정스러워한다. 그녀가 더듬은 말이 사정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또 그도 한 번 더 한다면 좋겠지만 그녀의 몸에 무리가 갈 것 같다.

그가 자신의 걱정을 조곤조곤 전하자 그녀는 씩씩하게 대꾸한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제는 그래도 많이 익숙해졌어요.”

“그대는 방금 전에 절정을 겪었잖아요. 다시 넣으면 예민해서 아플 수도 있어요.”

류드밀라는 아플 수도 있다는 말에 약간 망설인다. 제 아래는 평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느낌인데. 정말 아플까. 결심을 내린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우물거린다.

“루슬란 님의 것을 넣는 거라면 아파도 괜찮아요.”

차마 제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말이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 주저할 것 같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그대는 정말 저를 홀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아요.”

그녀가 적당한 대답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리는데 루슬란이 그럴 필요가 없게 만든다. 입을 맞춰 오면서 허리를 잡아 그녀를 제 몸 위에 태운 것이다.

그는 누워 있고 그녀는 그 위에 앉아 있는 자세가 된다. 류드밀라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그가 더 경악할 만한 말을 입 밖에 낸다.

“스스로 제 것을 그대 안에 넣어 보셔요.”

그 말은 그는 넣어 주지 않겠으니 그의 것을 잡고 제 아래에 가져다 대란 소리이다. 그녀는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새빨개져서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호, 혹시 그냥 전처럼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바로 넣으면 그대가 아플까 봐 그래요.”

루슬란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당황함과 부끄러움을 다 알아챘으면서 모르는 척 이렇게 말한다. 그러고는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제 중심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닿는 감촉이 느껴진다.

얼굴 표정을 볼 수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쉬움에 더 빠져 있기도 전에 따뜻하고 좁은 구멍이 그의 것을 담아낸다. 그는 만족스러운 사자의 미소를 입가에 걸고 그녀가 그랬듯 은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아프지는 않아요?”

“……네.”

“이제 움직여 봐요.”

아까의 대담함은 다 사라지고 그의 것이 손에 남긴 감촉만 생생하게 류드밀라를 괴롭힌다.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의 미소가 짙어진다.

생각해 보면 루슬란은 항상 그녀와 정을 통할 때 비슷한 표정이었다. 차분하고 여유롭거나, 아니면 느긋하게 미소 짓거나. 그의 미소를 보자 그녀는 다시금 결심한다. 저 미소가 바뀌는 걸 보고 싶다. 미소가 다른 무언가로, 신음하는 일그러진 입술로 변하는 걸 보고 싶다.

색욕이 가득한 제 욕망이 무서워졌지만 류드밀라는 허리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왜 이런 욕망에 사로잡혔는지, 왜 이런 결심을 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른다.

그렇게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상태에서 그녀는 뜻밖의 쾌락을 겪는다. 전에는 완전히 즐기지 못했던, 그녀가 움직이고 그녀에게 주도권이 있는 상황에서 행복을 찾은 것이다.

그녀로서는 굉장히 큰 한 발자국을 내디딘 것이나 다름없다.

류드밀라는 아예 그의 가슴팍을 손으로 짚고 허리를 마음껏 움직인다. 그러다 점점 무아지경에 빠져들며 그 리듬에 중독된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혀 맨 등에 닿는 머리카락의 감촉도 즐겨 본다.

마침내 어느 순간 루슬란이 한숨 같은 신음을 토해 내며 그녀 안을 가득 채운다. 그와 동시에 팔에서 힘이 풀리며 그녀는 그의 품 안으로 쓰러지듯 안긴다.

기진맥진하지만 류드밀라는 행복해져서 미소를 입가에 살짝 올려 본다. 그가 신음을 흘릴 때 예쁘장하게 벌어지던 입술이 눈을 감아도 시야에서 아른거린다.

“사랑해요, 루슬란 님.”

그녀가 속삭인다. 항상 받기만 했던 말을 먼저 하니까 기분이 묘하다.

“저도 사랑해요.”

그가 마주 속삭인다. 항상 건네기만 했던 말을 먼저 받으니 행복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그녀는 미끄러지듯 그의 옆으로 내려와 그가 해 준 팔베개를 벤다. 그는 몸을 조금 움직여 다른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싼다.

그렇게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서로를 꼭 안은 채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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