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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뱀과 도토리와 소라 (9/20)
  • 7. 뱀과 도토리와 소라

    류드밀라는 꿈에서 깨어난다. 딱딱한 바닥에 앉아 잔 터라 온몸이 쑤신다.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기억난다.

    루슬란이 곧 자신을 찾으러 오겠다고 했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창문을 찾기 시작한다. 해를 봐야 그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이번에는 정처 없이 걷는 대신에 냉기나 바람을 찾으려 한다. 혹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그러나 아무리 그녀의 감각이 예민해도 그러한 것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녀가 거의 포기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창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소리지만 그녀는 홀린 듯이 그 소리를 따라간다.

    소리에 가까워지자 서늘한 기운과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녀의 몸을 할퀸다. 그러다 그녀는 멀리서 딱 그녀의 몸과 비슷한 크기의 창을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간다.

    창은 열려 있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밖을 내려다본 그녀는 곧 아찔한 그 높이에 어지러워졌지만 말이다. 창으로 탈출하기는 불가능했다. 대신 해가 어디쯤 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가능해서 그녀는 두 손을 꼭 모으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해는 하늘 중간을 넘어가 조금씩 기울고 있다. 안심한 그녀는 창틀에 걸터앉으려다 물소리의 원인을 찾아낸다.

    밖에서 들이친 눈이 창틀 홈에 쌓인 채로 녹아 흘러넘친다. 그러면서 물방울이 바닥으로 똑똑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을 손으로 퍼다 함박눈이 내리는 밖에 버린다. 그러곤 엉덩이가 젖는 것도 상관 않고 창턱에 걸터앉는다. 다행히 창은 서쪽으로 나 있어 해가 천천히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그녀 안에 눈이 내려앉듯 차곡차곡 소리 없이 쌓인다. 그녀는 애써 그 불안함을 눌러 담으며 점점 지평선과 가까워지는 해가 흩뿌리는 노을을 지켜본다.

    ***

    루슬란은 류드밀라를 찾아갔던 꿈에서 빠져나온다. 초록색 빛줄기 끝에 다다라 더 이상 갈 수가 없자 류드밀라를 만나러 갔던 것이다. 산신의 말대로 빛은 대략적인 방향만 알려 주었지 어느 순간 끝이 나 버렸다.

    이제는 빛줄기가 다시 그에게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잠시 눈을 붙였던 나무 밑에서 몸을 일으킨 그에게 나무의 정령이 말을 걸어 온다.

    “넌 누구야? 누구길래 자는 사이에 장난치려 해도 내 마법이 닿지 않지?”

    나무의 정령들은 나그네가 제 밑에서 잠이 들면 나뭇가지로 뺨을 간지럽히는 식으로 장난을 많이 쳤다. 그가 두른 방어 마법 때문에 장난이 안 먹히자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누군지 맞혀 보렴.”

    정체를 굳이 말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나무를 살펴본다. 아직 어린 떡갈나무여서 그의 곁에 존재하는 기운을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다.

    빛줄기가 왜 숲속의 많고 많은 나무들 중 이 떡갈나무 앞에서 끊겼는지는 모르지만, 이것도 인연이라 생각한 그는 나무 곁에서 잠시 있기로 한다.

    “네가 누군지 내가 맞히면 뭘 해 줄 건데?”

    호기심이 잔뜩 묻어나는 맑은 목소리는 그로 하여금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강에 존재하던 수없이 많은 어린 생명들. 그들의 호기심과 장난은 항상 그를 즐겁게 해 주었는데.

    서글퍼진 그는 해를 확인하고 다시 나무에 기댄다.

    “그 전에 맞혀 봐, 내 정체를.”

    무심히 대꾸한 루슬란이 우둘투둘한 나무껍질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그의 기운을 직접적으로 흘려보낸다.

    어린 떡갈나무가 부르르 떠는 것이 느껴진다. 그의 기운을 알게 되어 안심한 정령은 나무에서 스르르 빠져나온다.

    그는 정령이 모습을 드러낸 것에 무관심한 척 나무에 기대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정령이 몰래 그를 관찰하게 내버려 둔다. 마침내 완전히 안심하고 그의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린다.

    “네가 그 죽어 버린 강의 아이구나.”

    정령이 이렇게 말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루슬란은 조그마한 체구의 어린 소녀를 내려다본다. 갈색 머리카락으로 온몸을 감싸고 머리에는 나뭇가지가 돋아난 아이의 진한 초록색 눈과 마주한다. 죽어 버린 강의 아이. 나무의 정령들 사이에서는 그가 그렇게 불리는 모양이었다. 그가 강의 아이인 것도 맞고, 그의 강은 이미 죽은 것도 맞지만 막상 두 단어가 함께 있자 불편해진다.

    불편한 기분과 함께 기분 나쁜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의 안을 헤집던 인간들과 그런 인간들을 부추겨 더욱더 강을 오염시킨 흑마법사. 그를 괴롭히던 생명들을 앗아 갈 때 얼마나 끔찍한 동시에 행복한 해방감이 들었는지. 그는 작은 숨과 함께 기억들을 털어 낸다. 지금 와서 느끼는 후회나 슬픔은 의미가 없다.

    “맞아.”

    그래서 루슬란은 따지는 대신 순순히 인정한다. 정령은 귀에 달린 도토리 껍질이 통통 튀어오를 정도로 기뻐한다.

    “그럼 이제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글쎄. 뭘 원하니, 어린 떡갈나무야?”

    소녀는 나무껍질 같은 무늬가 있는 갈색 팔을 머리 위로 쭉 편다.

    “난 내가 엄청나게 커졌으면 좋겠어. 더 이상 다른 나무들의 그늘 밑에서 숨죽여 살고 싶지 않아. 날 커지게 해 줄 수 있어?”

    “그런 일은 해 줄 수가 없어. 대신 축복을 내려 줄 수는 있단다.”

    어린 나무의 소박한 바람에 루슬란의 마음이 움직인다.

    “축복? 그게 뭔데?”

    “네가 나무꾼에게 베이지 않고, 벌레에 파 먹히지 않고, 덩굴에 목 졸리지 않고 오랫동안 살 수 있도록 하는 주문이란다.”

    초록색 눈이 커지며 안에 흩뿌려진 황금빛 점들이 반짝거린다.

    “정말? 네가 그런 일도 할 수 있어?”

    순진한 물음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할 수 있고말고. 나무 안으로 다시 들어가 보렴.”

    소녀가 냉큼 들어가자 루슬란은 나무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리고 기운을 흘려보냈을 때처럼 한 손을 나무껍질 위에 얹고 눈을 감는다.

    “물의 힘으로 그대에게 가호를 내리니, 모든 위험은 그대를 피해 가고 모든 악한 것은 그대를 두려워할 것이며, 그대의 영이 이 세계를 떠나는 날까지 내 축복은 계속되리라.”

    그가 낮게 읊조리자 파란 빛이 나무를 소용돌이치며 휘감고 나뭇가지 끝마다, 보이지는 않지만 뿌리 끝까지 스며든다.

    원래대로라면 그의 강이 물의 힘을 발휘해야겠지만 강이 죽은 지금은 다른 물을 구해야 한다. 루슬란은 망설임 없이 제 손끝을 깨물어 피를 내고 무색의 액체는 빛과 함께 나무 속으로 사라진다.

    축복이 끝나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나무의 정령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등 뒤에 감춘 것을 꺼낸다.

    “네가 축복을 내리고 있을 때 만들어 봤어.”

    “이게 뭐니?”

    엄지손톱만 한 도토리 하나를 꿴 목걸이를 받아 든 그가 묻자 정령은 뿌듯한 표정으로 설명한다.

    “별거 아니지만, 널 보호해 줄 거야.”

    “고맙구나, 어린 떡갈나무야.”

    소녀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케르쿠. 내 이름은 케르쿠야.”

    “그래, 고맙다. 케르쿠.”

    목걸이를 목에 건 루슬란은 나무로 사라지는 정령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몸을 일으킨다. 마침 시간이 딱 맞아 그의 눈앞으로 초록색 빛줄기가 뻗어 나간다.

    그는 짐승으로 변신해 달리기 시작한다. 은빛이 감도는 푸른색 털이 달린 사자와 비슷한 모습이다. 예전에는 완전한 사자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었는데, 케르쿠가 말한 대로 그의 강이 죽은 이후에는 힘들어졌다.

    이동 마법을 쓸 수 없으니 뛰는 방법밖에는 없다. 초인적인 속도로 숲을 벗어난 루슬란의 눈앞에 황량한 벌판이 펼쳐진다.

    시야가 탁 트이자 그는 날개 달린 짐승으로 다시 변신해 날아오른다. 깃털과 검은색 부리가 달린 날짐승에게도 사자와 비슷한 갈기가 있지만, 여전히 완전한 형태는 아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그를 방해한다. 그래도 다급한 날갯짓은 멈추지 않는다.

    그의 껍데기 님을 구해야 한다. 그녀가 끔찍한 일을 당하기 전에, 그녀 마음에 크나큰 상처가 남기 전에. 오로지 이 생각에만 사로잡혀 빠르게 날던 루슬란을 뭔가가 위에서부터 덮친다.

    체르노모르가 보낸 악귀이다. 박쥐의 날개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그것들은 여린 깃털로 덮인 루슬란의 날개를 찢어발긴다. 아픔을 꾹 참고 날개를 재생시킨 그는 악귀를 떨쳐 내고 다시 날아오른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그것을 죽였겠지만 지금 그에게는 낭비되는 시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변신한 몸집을 키운다. 그러자 다행히 악귀들이 달라붙어도 추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너무 몸집을 키우면 속도가 느려지기에 그는 어느 수준을 넘어 거대해지지는 못한다. 그래서 악귀들이 발톱으로 할퀴고 이빨로 깨무는 것에 괴로워한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제 자신의 감각을 닫아 버릴까 생각도 해 보지만 그러면 초록색 빛줄기를 보지도 못하기에 그저 견딜 수밖에 없다.

    결국 그는 견디지 못하고 제일 가까이 있던 악귀 하나를 부리로 물어 숨통을 끊어 놓는다. 다른 악귀들은 죽음도 겁내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든다. 루슬란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

    창가에 앉아 노을 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류드밀라의 눈에 작은 점 같은 것이 들어온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파란 점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점이 가까워지며 크게 보이자 그 주변에 달라붙어 그를 공격하는 작고 까만 것들도 보인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상처들도.

    어느 순간 점을 그, 라고 생각한 류드밀라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소리를 지른다.

    “루슬란 님!”

    그녀의 말을 들은 건지 그가 방향을 바꿔 그녀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한다. 그의 온몸에 난, 살점이 뜯긴 상처를 본 그녀는 울음을 터트린다. 그녀를 구하러 오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품어야 했을지 생각하니 겁이 나고 미안해진다.

    별안간 아주 크나큰 두려움이 그녀를 집어삼킨다. 그가 만약에, 그녀를 탓하면 어떡하지. 그가 그녀의 탓을 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가 다친 것은 오로지 그녀 때문이니 말이다.

    까만 악귀들이 그에게 달라붙어 깨물고 발톱으로 할퀴는 모습을 보자 그녀의 가슴도 같이 쓰라리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 아픔이 이기적이란 사실을 안다.

    그를 온전히 걱정해 주지 못하고 그가 자신을 탓할까 무서워하는 스스로가 끔찍이도 싫다. 부서지기 쉬운 나약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그녀는 다시 한번 울면서 그를 부른다.

    “루슬란 님!”

    새가 가까워지는 순간 갑자기 성 아래에서 거대한 땅벌레가 솟아오른다. 커다란 지렁이 같은 몸을 뒤틀며 무시무시한 이빨이 달린 입으로 새를 물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는 요리조리 비행하며 악귀들을 피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는지 더 이상 류드밀라에게 가까워지지 못한다. 결국 결정을 내린 그가 인간의 형태를 띠고 땅으로 내려온다. 솟아올랐던 땅벌레가 다시 덮치려는 순간 루슬란은 재빨리 마법진을 그리고 물러선다.

    마법진이 파랗게 빛나더니 땅벌레는 온몸의 구멍에서 액체를 쏟으며 무너져 내리고 악귀들도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 다시 새로 변신한 그는 이번에는 지체하지 않고 그녀에게로 날아온다.

    날아오면서 크기를 점점 줄인 그는 창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까지 작아진다. 슬픔과 고마움과 미안함과 안도감에 벅차올라 류드밀라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그를 향해 손을 뻗는다.

    마침내 파란 새가 그녀가 앉아 있는 창문으로 날아드는 순간, 갑자기 풍경이 바뀌며 새도 없어진다.

    흑마법사의 성이 이동한 것이다. 밖에는 전에 보이던, 눈으로 덮인 들판 대신 온통 바위와 모래뿐인 황무지가 펼쳐진다.

    놀라고 두려워 울음도 그친 채 눈을 천천히 깜박이는 류드밀라의 시야 구석에서, 어둠이 번져 온다.

    해는 져 있다.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이 류드밀라의 마음도 새까맣게 물들인다. 한참이나 망연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던 그녀는 천천히 창틀에서 내려온다.

    벽에 등을 기대고 그녀는 울고 소리를 질러서 가빠진 숨을 몰아쉰다. 울면 그 소리를 듣고 흑마법사가 찾아올까 두려워 울음을 겨우 삼킨다.

    내일 또다시 그가 다시 찾아올 거라고, 애써 마음을 달래 보지만 결국 그녀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일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쩌지. 흑마법사는 계속해서 악귀를 만들어 낼 것이고, 또 악귀들은 계속 루슬란이 그녀에게 오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그가 다른 방도를 생각해 내지 않는 이상 그는 계속해서 실패할 것이다.

    그녀의 거짓말이 끝이 나고 흑마법사가 그녀를 겁탈할 때까지. 그는 절대로 그녀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류드밀라는 루슬란을 믿어야 한다. 그가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어서가 아니라, 그라는 희망이 그녀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류드밀라는 이제 더 울지도 못한다. 울음을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슬픔이라는 진득한 감정에 집어삼켜진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그녀는 바짝 세워 팔로 감싼 무릎에 고개를 힘없이 올려 둔다.

    멍하니 있자 슬프고 공허한 기분은 점점 더 커진다. 그녀의 걱정은 제 자신에서 이제 루슬란에게로 미친다.

    그렇게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느리게 깜박이고 있을 때, 그녀 앞으로 물줄기가 흘러온다.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점점 시선을 옮긴 그녀의 눈앞에 어느 여인이 나타난다.

    피부가 햇볕에 그을려 황금빛 도는 갈색인 그 여인은 푸른빛과 초록빛이 섞인 터키석 색 머리카락을 발치까지 늘어뜨리고 진주와 조개와 산호로 이루어진 왕관을 쓰고 있다. 류드밀라가 바닷속을 설명한 그림책에서나 보았던 말미잘들이 온몸을 가리는 드레스를 장식하고 있다. 여인의 일렁이는 파란 눈동자는 끊임없이 색조를 바꾼다. 마치 바닷물처럼.

    너무 놀라 류드밀라는 여인을 바라만 본다. 입이 떼어지지 않아 차마 누구냐고 묻지도 못한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듯 여인은 샐쭉한 미소를 짓더니 자신을 소개한다.

    “나는 나이나, 바다의 여신이란다.”

    “저, 저는…….”

    “네가 누군지는 알고 있단다, 껍데기 아이야. 두려워 말렴. 난 너를 도와주러 왔어.”

    류드밀라는 눈을 멍하니 깜박인다.

    “저를 루슬란 님께 데려다주실 건가요?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죠?”

    “그건 불가능하단다. 대신, 네가 내 시험을 통과한다면 강의 아이를 이곳으로 소환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 널 돕는 이유는 내 이해관계도 걸려 있기 때문이야. 그러니 너무 고마워하지는 말거라.”

    류드밀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비록 머릿속에서는 만약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 불안한 물음들이 맴돌지만 그녀는 마음을 다잡는다.

    여태껏 그녀는 루슬란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녀에게 루슬란을 돕기 위해 뭐라도 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어떤 시험인가요, 여신님?”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바다의 여신은 공중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린다. 은색 빛을 내며 타오른 원은 점점 커지며 다른 곳으로 통하는 입구가 된다. 원 너머에는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은 즈메야카, 뱀들의 숲이란다. 오직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는 인간 여인만이 들어갈 수 있다.”

    류드밀라는 축축한 물비린내가 풍겨 오는 어두운 숲속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쩌면 저 안으로 들어가 숲 밖으로 나가면 흑마법사의 성을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바다의 여신이 경고를 덧붙인다.

    “내가 낸 과제를 완수하지 않고 숲 밖으로 나가려 한들 소용없을 거다. 이 숲 주위에는 뱀들이 나가는 것을 막는 영원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으니 말이다.”

    침을 꿀꺽 삼킨 그녀는 억지로 숲에서 눈을 떼고 여신을 돌아본다.

    “제가, 숲에 들어가서 뭘 하면 될까요?”

    “숲의 심장부에는 황금 뱀 영물이 살고 있을 것이야. 그 뱀을 잡아서 내게 주렴. 그게 네 과제이자 시험이다.”

    류드밀라는 아랫입술을 불안하게 깨문다.

    “마법도 못 쓰는 제가 과연 할 수 있을까요?”

    “내 도움에는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고 했잖니. 내가 너를 도와주려는 이유 하나로, 네 쓸모가 입증된 것 아니니?”

    류드밀라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숲으로 발을 들여놓는데 여신이 그녀를 불러 세운다. 그러고는 알이 굵은 소금이 담긴 유리병을 건네준다.

    “과제를 끝마쳤거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이어서 돌아오고 싶으면 이 유리병을 깨트리거라.”

    “네, 여신님. 감사합니다.”

    유리병을 공손히 받아 들고 소매 안에 소중하게 넣은 류드밀라는 다시 걸음을 뗀다. 숲으로 양발을 들여놓고 뒤를 돌아보자 은빛 원은 이미 사라져 있다.

    그제야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밀려오며 그녀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갑자기 그녀 앞에 나타난 바다의 여신과 그녀가 낸 불가능해 보이는 시험.

    순진해서 사람을 잘 믿는 류드밀라는 그녀를 도와주러 왔다는 여신의 말을 철석같이 믿지만, 그런 그녀도 한편으로는 속상한 마음이 든다. 그녀를 도와줄 수 있으면, 이렇게 다른 곳으로 향하는 입구를 만들 수 있으면 성 밖으로 빼내 주지. 왜 과제를 내서 그녀를 시험해 보는 걸까.

    여신의 마음이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두렵지만 그녀는 억지로 숲속 더 깊숙한 곳을 향해 걷는다. 아까 들었던 생각처럼 마침내 그녀에게 루슬란을 도와 저 스스로를 구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맨발로 밟는 숲길은 이상하리만치 보드랍다. 마치 누군가 그 길을 걸을 사람을 위해 돌 조각들과 나뭇가지들을 다 치워 놓은 듯하다. 게다가 애초에 뱀들의 숲인 곳에 인간이 걸을 만큼 넓은 길이 나 있는 것도 이상하다.

    보슬보슬한 흙과 부드럽게 썩어 가는 나뭇잎들을 밟으면서도 그녀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다. 숲을 걸어 보는 것이 처음이니 그럴 만도 하다.

    두려움에 젖어 주위 풍경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지만 그녀의 예민한 코는 처음 맡아 보는 축축한 숲속 공기가 낯설어 숨을 자꾸 더 깊이 들이마신다. 발가락은 흙의 감촉이 신기해 자꾸만 꼼지락거리게 되고, 시선은 산만하게 흐트러진다. 그리고 귀는 활짝 열어 두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귀 기울인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흙 위를 스치는 그녀 자신의 발소리와 숨소리를 빼고 숲은 고요하다. 숲에 처음 와 보는 그녀도 책에서 읽어 숲이라면 응당 벌레와 새소리로 가득 차 있어야 함을 알고 있는데. 이곳은 섬뜩하리만치 조용하다.

    그때부터 류드밀라의 공포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기 시작한다. 기괴하게 비틀린 나무도, 잎사귀가 드리운 삐죽삐죽한 그늘도, 은빛 자국을 남기며 기어가는 커다란 민달팽이도 모든 것이 다 공포스럽다. 전에는 신기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그녀를 두려움으로 짓누른다.

    이곳은 왜 이렇게 조용하고 축축할까. 여기는 왜 이렇게 어둡고 뒤틀려 있을까. 뱀의 숲이라는데, 뱀이 왜 없지?

    그녀의 공포가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낮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곤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아니,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였나? 류드밀라가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두리번거리자 소리들은 희미해진다.

    그녀가 마구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존재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서 도망치듯 걸음을 옮기자 다시 웃는 소리가 난다.

    류드밀라는 뛰기 시작한다. 중간에 얕은 시내를 건너느라 발이 젖는 것도 모른 채 허겁지겁 달린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 눈앞에 작은 공터가 나타난다.

    우뚝 멈춰 선 류드밀라는 갑작스레 내리쬔 햇살에 눈이 적응할 때까지 기다린다. 서서히 시야를 뒤덮은 빨간 점들이 걷히고 공터가 제대로 보인다. 숲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짐짓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한 공터 가운데에는 늙고 기울어진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그리고 그 나무 둥치를 휘감고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것은, 태양을 닮은 색의 거대한 뱀이다.

    그녀는 안 그래도 전부터 후들거리던 다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 황망하게도 처음 든 생각은, 무섭다거나 그런 것이 아닌, 저걸 어떻게 여신님께 가져가지란 생각이다. 그만큼 절박했던 류드밀라는 황금빛 뱀이 녹황색 눈동자를 저에게로 돌릴 때까지 넋을 놓고 있다.

    숨을 헐떡이면서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와중에 녹황색 눈과 마주한 그녀는 얼어붙고 만다. 진한 초록색 바탕에 찬란한 황금이 흩뿌려져 있는 아름다운 눈. 그러나 세로로 찢어진 동공은 그 눈이 다른 짐승도 아닌 뱀의 것임을 알려 주고 있다.

    루슬란이 별안간 떠오른다. 공포가 극으로 치닫는 순간 그가 그녀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생각이 든다. 그러나 뱀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자그마한 소망도 흩어져 버린다.

    류드밀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천천히 나무를 타고 땅으로 내려온 뱀은 그녀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면 그것을 자극할까 제 입을 틀어막는다. 그러면서 일어서려 하는데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뱀은 점점 가까워진다.

    뱀은 하도 길어 그 머리는 그녀에게 거의 다 왔는데도 꼬리는 아직도 나무에서 내려오고 있다.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이제 없어진 그녀는 결국 눈을 감고 품에서 소금 병을 꺼내 내던진다. 뱀에게 물려 허무하게 죽는 것보단 차라리 성에서 루슬란이 구하러 오길 기다리는 편이 낫겠지 싶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소금 병이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이동하는 느낌도 없다. 그렇다고 뱀에게 물리는 느낌이 든 것도 아니어서 류드밀라는 한쪽 눈을 슬며시 뜬다.

    그녀의 눈앞에는 뱀 대신 낯선 사내가 서 있다. 비늘이 촘촘히 박힌 망토를 두른 그 남자는 손에 소금 병을 들고 찬찬히 살펴본다. 긴 손톱은 위협적으로 보였고 피부는 칙칙하고 반짝임이 죽어 있다.

    “도, 돌려주세요…….”

    류드밀라가 약하게 말하며 용감하게도 남자의 옷깃을 잡는다. 그가 눈길을 그녀에게로 돌리자 아까 그 뱀과 똑같은, 녹황색 눈에 담긴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그녀를 바라본다.

    어떤 영물들은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다고도 했다. 책에서만 읽었던 이야기를 문득 떠올린 그녀는 서둘러 붙들었던 옷깃을 놓고 뒤로 물러난다. 저 남자는 뱀이 둔갑한 모습이다.

    “누가 이걸 너한테 줬지?”

    남자는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불쑥 들이민다. 인간의 얼굴에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눈동자와 마주한 류드밀라는 덜덜 떤다.

    “바, 바다의 여시, 신님께서요.”

    “그럴 줄 알았어. 도무지 포기를 모른다니까.”

    한숨을 푹 쉬면서 샛노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남자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한 얼굴로 그녀를 본다.

    “본보기를 보여야 다신 인간 여자애들을 내게 안 보낼 텐데. 널 어쩌면 좋을까, 응?”

    도무지 감정을 짐작할 수 없던 창백한 얼굴에 불현듯 위험함이 짙게 깔린다.

    “그 잘나신 여신님이 들을 때까지 비명을 지르게 해 줄까, 아니면 찢어발겨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줄까?”

    얼굴이 사색이 되어 류드밀라가 아무 대꾸도 못 하고 있자, 남자는 씨익 웃는다.

    “농담이야, 농담.”

    들이밀었던 얼굴을 조금 뗀 그는 그녀를 찬찬히 살펴본다.

    “그래서 너는 뭣 때문에 여신의 과제를 이행하게 되었지?”

    그녀는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어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고 대답을 쥐어짜 낸다.

    “제, 제가 지금 흑마법사에게 납치당해 있는데, 과제를 완수하면 여신님께서 도와주시겠다고 하셔서요…….”

    “여신은 물 바탕 마법을 써서 그 작자에게 정면으로 대항할 수 없을 텐데, 무슨 수로? 물과 암흑은 성질이 비슷해서 옮기도 쉬워. 아무리 여신이라 해도 너 따위 때문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거다.”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인 그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린다.

    “과제를 완수하면 네가 흠모하는 이를 소환해 주겠다고 했구나. 네가 이 숲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가 있어서이지. 나이나, 못 본 새에 꾀가 많아졌군.”

    아무리 영물이라 하여도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을 텐데 류드밀라는 황금 뱀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누구신데 여신님을 잘 알고 계시는 건가요?”

    “내가 나이나를 잘 알고 있다고?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 앙숙이야, 앙숙. 나이나는 내 독과 비늘을 탐내고, 난 그런 나이나를 피해 다니지.”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짜증에 움찔 놀라면서도 이어지는 말을 기다린다.

    “난 네가 알다시피 황금 뱀이야. 그것 말곤 알려 줄 게 없네.”

    류드밀라의 궁금증은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런 것보단 여신님께 뱀을 데려가는 일이 더 급하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저와 같이 여신님께 가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원하시는 걸 들어 드릴게요.”

    머리를 한참 혹사시킨 끝에 그녀가 겨우 생각해 낸 제안이다. 그런 말을 하기까지는 크나큰 용기가 필요했다. 황금 뱀이 무엇을 요구할 줄 알고. 하지만 그녀는 다른 내놓을 것이 없어 그저 그의 소원이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는다. 끝이 뾰족하게 두 갈래로 갈라진, 이상하리만치 붉은 혀가 입술을 적신다.

    “길을 오기 편하도록 닦아 놓은 보람이 있군. 이런 깜찍한 제안도 할 줄 알고.”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류드밀라의 귓가에다 속삭인다.

    “네 피, 네 피를 마시게 해 줘.”

    생각보다 끔찍하거나 어려운 요구가 아니라서 그녀는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그를 돌아본다.

    “고작 제 피만으로 괜찮나요?”

    남자는 잔인한 미소를 입가에 건다. 바늘처럼 뾰족하고 가는 송곳니가 위험하게 번뜩인다.

    “아니. 보다시피 난 독사야. 내가 네 피를 마시면, 넌 기절하게 될 거다. 깨어나기야 하겠지. 그렇지만 네 몸에 서서히 나의 독이 퍼져 갈 거야. 그리고 널 아주 끔찍한 방식으로 괴롭힐 거야.”

    “어, 어떻게요?”

    류드밀라는 침을 꿀꺽 삼키고 떼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묻는다.

    “첫 삼 일은 물을 마시지 못할 거야. 네가 갈증으로 죽어 갈 때쯤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지만 그다음에는 잠을 자지 못하게 되겠지. 이 주일 동안. 네가 병자처럼 걸어 다니게 될 때쯤 잠은 잘 수 있겠지만 깨어 있는 동안은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온몸에서 느끼게 될 거야.”

    그가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 히죽거린다.

    “아마 한 달은 고통스러울걸? 그러고 나서 넌 죽겠지. 해독제는 못 구할 거야. 내 독은 신들도 죽일 수 있거든. 무슨 짓을 해도 고통과 죽음은 네게 찾아올 거란 절망이, 내 독의 가장 핵심이야. 어때, 이래도 내게 피를 주겠어?”

    그녀는 공포에 질린 흐느낌을 참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다. 그래야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당신에게 물려도, 한 달하고 이 주일하고 삼 일 동안은 살아 있는 거죠?”

    “그래.”

    남자가 약간 놀랐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리고 눈에는 거짓을 말하는 기색은 없다. 안심한 류드밀라는 조심스레 손목을 그에게 내민다.

    “그거면 됐어요. 흑마법사에게 겁탈당하고 그의 눈에서 슬픔을 보는 것보다, 서서히 죽어 가더라도 그와 온전한 시간을 보내겠어요.”

    그녀의 나약한 성정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민 손은 덜덜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끊임없이 차오르지만 그녀는 용감한 선택을 한다.

    고민한 시간은 짧았지만 예전의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용감한 선택이다. 귀하게 길러지진 않아도 보살핌을 받고 자라 고통이라곤 모르는 그녀가, 그가 설명한 만큼의 고통을 겪을 생각을 했다는 것이 말이다.

    루슬란은 그녀를 구하러 오며 살점이 뜯기는 고통도 감내했는데, 그녀라고 이런 위험을 감수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녀는 상상도 못 할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이지만 실낱같은 뿌듯함을 느낀다. 그를 위해 그녀가 무언가를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그를 돕고 있는 것이다. 그 작은 뿌듯함이 공포를 이겨 내고 선택을 하게 만든다.

    황금 뱀은 그 용감한 선택을 조금도 존중해 줄 생각이 없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류드밀라의 손목을 쳐 낸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당겨 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는다.

    “아.”

    나지막한 앓는 소리를 낸 류드밀라의 눈이 멍해진다. 송곳니에서 먼저 나온 마취 물질이 온몸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그가 본격적으로 피를 빨아 먹으며 독이 혈관으로 들어온다.

    그때 갑자기 뱀이 그녀의 목에서 입을 뗀다. 그러곤 콜록거리면서 피를 뱉어 내며 욕설을 뇌까린다. 그의 성난 얼굴이, 그녀가 기절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이다.

    ***

    고통 속에서 눈을 뜰 줄 알았는데. 류드밀라는 제법 편안한 상태에서 의식을 되찾는다. 그가 말한 대로 갈증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고, 목에 난 상처는 어느새 사라져 있다.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 그에게로 조심스레 다가간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몸이 비정상적으로 가뿐하다. 가까이 가 보니 그는 그녀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들었던 그 욕설을 중얼거리고 있다.

    “젠장, 젠장, 젠장, 내가 미쳤지…….”

    “저, 저기…….”

    그녀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그가 그녀를 획 돌아본다. 얼굴이 분노로 가득 차 있어 류드밀라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물러난다. 그러나 분노는 놀랍게도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허탈함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너, 나한테 왜 그놈 이야기를 안 했냐?”

    “네, 네……?”

    “네가 루슬란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왜 말을 안 했냐고!”

    자신 말고는 다른 이가 그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는 탓일까. 뱀의 입에서 나온 그의 이름은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당황한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 그게…… 말할 기회가 없어서, 그리고 알고 싶으실 것 같지도 않아서…….”

    “하. 내가 나이나의 꾀에 놀아났구나. 나를 한낱 너를 시험하는 도구로 쓰다니.”

    이마를 짚은 남자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쉰다. 그 풀 죽은 모습이 아까와는 딴판으로 안쓰러워 보여서 류드밀라는 그를 토닥여 주고 싶다는 충동을 잠시 느낀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여신은 처음부터 알았어. 내가 루슬란의 보호 아래 있는 생명은 절대 건드리지 못할 거란 사실을. 그래서 단지 너의 용기와 사랑을 시험해 보려고 널 이곳에 보낸 거야.”

    그녀는 눈을 멍청하게 끔벅이며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루슬란 님을…… 아시나요?”

    “그럼 알고말고.”

    코웃음을 친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선다.

    “제일 비천한 영물에게 신수란 자리와 숲까지 준 미친놈인데, 내가 모를 리가.”

    류드밀라가 그의 욕설에 몸을 가볍게 떨자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린다.

    “난 그냥 영물이 아니라 신수야. 황금 뱀 신수. 자세한 사정은 말해 줄 마음이 없다만 그 자식은 자기가 빚진 사소한 은혜를 내게 필요 이상으로 갚았고 난 그 후로도 그 돌려받은 은혜를 다시 갚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 중이지.”

    황금 뱀은 느릿느릿 그녀에게로 다가오며 말을 이어 나간다.

    “네 피에 스며든 그의 기운을 느끼자마자 뱉어 낼 수밖에 없었어. 은혜를 갚는 중인데 그의 보호 아래 놓인 생명을 해칠 수는 없지. 네게 해독제인 내 비늘도 먹였고. 내 독 때문에 고통 받을 일은 없을 거야.”

    류드밀라는 다시금 겁에 질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눈을 한다.

    “그,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가 피곤한 듯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어색한 표정을 한다.

    “어이, 울지 마. 그건 나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번 한번은 나이나의 꾀에 놀아나 주기로 했어. 루슬란이 널 아낀다면 내겐 널 도와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그 말씀은…….”

    “그래. 너와 함께 가 주겠어. 네가 여신이 낸 과제를 완수할 수 있게.”

    그녀는 얼굴이 환해져 허리를 깊숙이 숙인다.

    “감사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신수님.”

    “뭘, 나한테 감사해할 필요는 없지.”

    그녀 바로 앞까지 온 남자는 망토를 여민다.

    “내가 뱀의 모습을 해서 네 몸을 휘감을 테니 그때 소금 병을 던져. 그럼 같이 이동할 수 있을 거야.”

    “네.”

    망토로 몸을 감싸고 어깨를 움츠린 그는 스르르 거대한 황금색 뱀으로 변한다. 크기를 점점 줄여 평범한 뱀 정도가 된 신수는 그녀의 다리를 감싸고 혀를 날름거린다.

    류드밀라는 안도감에 숨을 몰아쉬며 소금 병을 바닥에 있는 힘껏 집어 던져 깨트린다.

    펑, 하고 연기가 소금 병에서 피어오르더니 그녀와 뱀의 몸을 감싼다. 연기가 걷힐 무렵 그들은 더 이상 숲에 있지 않다.

    흑마법사의 성안, 나이나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임무를 완수했구나.”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짤막하게 말한 바다의 여신은 품 안에서 뿔소라를 꺼낸다. 작아진 황금 뱀이 제 팔을 휘감게 한 그녀가 설명한다.

    “이 소라를 불면 강의 아이가 소환될 거란다. 그럼 짧은 시간이었지만 재밌었구나, 껍데기 아이야.”

    바다 안개가 주위에 일고 여신과 뱀은 마치 꿈처럼 사라진다. 그들이 꿈이 아니란 증거는 그녀의 두 손 안에 놓인 뿔소라 하나뿐이다.

    류드밀라는 그것을 잠시 쳐다보기만 한다. 마음속에서는 온갖 두려움이 번진다. 이걸 불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쩌지?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그녀는 소라에 입을 대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소라를 있는 힘껏 불려고 폐에 채운 공기처럼 그녀의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어떤 기분이 있다.

    이번에도 그녀는 그녀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못했다. 그녀 자체가 아니라 루슬란의 보호 아래 놓인 존재인 걸로 인정받은 이 기분. 그래서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류드밀라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 불편함을 떨쳐 버린다. 그게 나중에 어떻게 그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질지 꿈에도 모른 채.

    적막한 흑마법사의 성안에서 뿔소라의 힘찬 소리가 울려 퍼진다.

    뿔소라를 불자 끝에서는 소리와 함께 바다 거품이 뿜어져 나온다. 바다 거품은 뭉치고 뭉쳐져 사람의 형상을 이루고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그리고 살짝 당황한 기색의 루슬란이 류드밀라의 눈앞에 나타난다.

    “루슬란 님!”

    그녀는 매달리듯이 그를 껴안는다.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이것이 꿈이 아니길 기도한다.

    꼭 마주 안아 준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남기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목소리에서는 당혹스러움이 묻어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의 품은 따스하다.

    “무사해서 다행이어요, 나의 껍데기 님.”

    그 말을 듣고 그녀는 서둘러 그를 살핀다. 분명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몸에 상처가 가득했었다. 다행히 지금은 멀쩡해 보여 겨우 안심하곤 다시 안겨 든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안도감에 다리가 휘청거린다. 그의 품에서 이제 그녀는 안전하다. 그와 함께 몰래 성을 빠져나가 황궁으로 돌아가면 전과 같은 달콤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의 고생과 두려움은 없다.

    어느새 그녀는 울고 있다. 그동안 겪었던 공포가 막상 그를 만나게 되자 너무 하찮고 보잘것없게 느껴져 억울해서이다. 지금은 이렇게 안전하게만 느껴지는데, 나는 왜 그토록 두려워했던가. 이런 분을 내버려 두고 왜 나는 그를 믿지 못했을까.

    루슬란은 안타깝다는 듯 그녀를 오랫동안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울지 말아요, 이제 그대는 안전해요.”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니에요…….”

    약하게 흐느끼며 품에서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본 류드밀라는 그와 눈을 맞춘다.

    “보고 싶었어요. 그날 루슬란 님을 보내 버린 이후 쭉.”

    “저도 그대가 보고 싶었답니다.”

    그저 되받아 주는 말일 뿐이지만 그보다 더 그의 감정을 절절하게 녹여 낸 말은 없을 것이다. 그의 가볍게 떨리는 음성, 물기 어린 눈과 가슴에 기댔을 때 마구 뛰던 심장. 이 모든 것이 그가 겪었던 공포와 이제 느끼는 안도감을 말해 주고 있다.

    전에도 그랬듯이 류드밀라는 그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는다. 서서히 그쳐 드는 울음에 숨을 삼키며 그에게 기대 본다.

    등을 조심스레 토닥이는 손에 마음 놓고 있는데 일순간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고개를 들어 본 그의 눈동자에는 한겨울의 서릿발처럼 매서운 기색이 감돈다.

    그 시선의 끝에는 흑마법사가 서 있다. 그의 흑색 눈에 담긴 증오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체르노모르.”

    루슬란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흑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네놈은 내 이름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어. 멋대로 내 성에 들어오다니,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자격이 없는 건 내가 아니라 네 쪽일 텐데. 내 이름도 모르는 가엾은 체르노모르야, 감히 내가 품은 이를 납치하고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루슬란의 소름 끼치도록 가라앉아 있는 비웃음을 들은 류드밀라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이곳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만 한다. 살면서 이렇게 무시무시한 음성은 처음 들어 본다. 그의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 것을 알지만 겁이 난다. 그가 짓는 표정, 몸짓 하나하나에서 나오는 지독한 차가움이 온몸을 얼어붙게 만든다. 게다가 흑마법사가 그들을 순순히 놔주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기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기만 하다.

    “터전을 잃은 신의 이름을 불러서 뭐 하게, 굳이 알 필요도 없지 않아?”

    입꼬리를 비틀어 올려 한껏 상대를 비웃은 흑마법사는 류드밀라를 흘깃 본다. 루슬란의 약점을 하나하나 찾아내려는 수작이다.

    “이쯤 되니 저 계집이 뭐라고 이렇게 싸고도나 궁금해지는데. 네놈이 터전을 잃고 제국에 묶이게 만든 것이 바로 인간들이야. 그런 인간이 뭐가 좋아서 구하러 친히 걸음을 하시나. 물론 강을 망가뜨리도록 인간을 부추긴 것은 나지만, 그래도 네놈은 원래 인간을 싫어하지 않았나?”

    “그런 연유나 궁금해하고 있는 걸 보니 내가 네게 퍽 너그러웠나 보구나.”

    류드밀라를 품에서 떼어 놓은 루슬란이 주먹을 쥐었다가 확 펼치자 파란 비누 거품 같은 구체가 그녀를 삼켜 안에 가둬 버린다.

    “이곳 안에서는 안전할 거예요. 그러니 절대 나오지 말아요.”

    부드럽게 이른 그가 손을 거두자 거품이 둥실 떠오른다. 그녀는 푸른 기가 돌며 투명한 거품 벽을 손으로 짚고 코를 바싹 댄다. 밖에서는 루슬란이 다시 흑마법사를 돌아본다.

    “난 내 것을 건드린 책임을 네게 묻고 싶은데, 어떻게 하겠느냐?”

    “어떻게 하긴. 난 네 앞에 비굴하게 길 생각이 없어.”

    “그게 네가 내린 결정이라면, 존중해 주겠다.”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한 루슬란은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리고 왼손 위에 파란 불길을 띄운다.

    “내 것에 손을 댄 이상, 너는 이곳에서 살아 나가지 못할 거다.”

    “내 성에 제 발로 들어온 네놈이 할 말은 아니지.”

    체르노모르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바닥에서 악귀들을 끌어 올린다. 대리석 바닥이 나뭇조각처럼 부서지며 솟아오른 악귀들은 루슬란을 둘러싸고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뒤틀린 다리와 시꺼먼 몸을 가진, 악한 것들이다.

    한 마리가 공격을 개시하려는 순간 그가 펼친 손을 공중에 든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하나씩 천천히 접는데, 손가락 하나가 접힐 때마다 굳어 버린 악귀들의 몸이 일그러진다. 그것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이 구겨지는데도 저항조차 못 한다.

    공기 중에 있던 수분이 루슬란의 명령에 따라 공기와 함께 움직여 압력을 형성한 것이다. 마침내 그의 손가락이 다 접히자 악귀들의 몸이 으스러지며 안에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온다.

    흑마법사는 악귀의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가 힘주는 신음과 함께 바닥에서 더 거대한 것을 불러낸다. 땅벌레와 같은 온갖 것들이 루슬란에게 달려든다. 그 끔찍한 광경에 거품 안에서 류드밀라는 나지막한 비명과 함께 몸을 휘청이지만 루슬란은 그녀를 대할 때와 같은 차분함으로, 그러나 전혀 다른 매서움으로 그것들을 무너뜨린다.

    그가 주먹을 쥐었다가 손을 펴자 땅벌레의 몸에 있던 수분들이 밖으로 터져 나오며 피가 장대한 기갑 비늘 틈으로 쏟아져 내린다. 땅벌레보다 작은 것들은 손에 얼음 칼을 만들어 베어 낸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는 흑마법사와 가까워지고 거품에서도 보이는 루슬란의 옆얼굴은 여유롭고 잔인한 미소를 띠고 있다.

    “이런 것들을 불러내 봤자 네 말로를 늦출 뿐이란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야. 아직도 모르나?”

    흑마법사가 더 많은 악귀를 소환하고 루슬란은 시간을 들여 그것들을 해치운다. 그러는 동안 그는 체르노모르가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로서는 그의 악한 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다.

    류드밀라는 비누 거품 안에서 루슬란이 악귀들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러나 뭔가가 잘못되었다. 죽어 가던 악귀 하나가 그의 옷자락을 낚아채고 그가 휘청이는 순간, 땅벌레가 꼬리로 그를 후려친다.

    다행히 그는 허리를 뒤로 젖혀 꼬리를 피하지만 균형이 무너진다. 그때부터 악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달려들고 그는 전과 달리 힘겹게 공격들을 막아 낸다. 그러나 숫자로 밀어붙이는 악귀를 당해 낼 새가 없고 결국 그는 악귀들에게 파묻혀 시야에서 사라진다.

    류드밀라는 루슬란 위에 악귀가 이룬 작은 언덕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른다. 그렇게 초조하고 두려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악귀들이 물러나며 바닥에 쓰러진 루슬란이 모습을 드러낸다.

    창백한 얼굴에 감은 눈, 온몸에 난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 힘없이 옆으로 돌아간 고개.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하지 못한다. 거품 벽에 손을 대고 온 힘을 주어 밀자 벽이 스르르 사라진다. 그녀가 거품에서 나와 루슬란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뛰어가려는 순간 풍경이 스르르 바뀐다.

    그와 동시에 달려가는 그녀를 잡아채는 단단한 손아귀가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멀쩡한 모습의 루슬란이 몹시도 화난 얼굴로 서 있다.

    “제가 절대 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 하지만, 방금까지도…….”

    류드밀라는 루슬란이 쓰러져 있던 자리와 지금 그녀를 붙잡고 있는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며 혼란스러워하다가 눈물을 떨군다. 그녀가 속았구나. 환영 속 그의 상처에서 맑은 물이 아니라 붉은 피가 나올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바보처럼 흑마법사의 환영에 또 속아 그의 엄중한 경고를 어긴 것이다. 그녀가 사과하려는 순간, 그가 다시 그녀를 거품에 넣으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흑마법사가 공격을 해 온다.

    왼팔로 류드밀라의 허리를 감싸고 제 몸으로 보호하듯 끌어안은 루슬란은 오른손으로 공격을 막아 낸다. 공중에서 만난 새까만 암흑 덩어리와 파란 빛줄기는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서로 엉켜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루슬란의 손에서 나온 빛줄기가 오염되기 시작한 것이다.

    바다의 여신 나이나가 체르노모르를 정면 상대하길 꺼렸던 이유와 산신 핀이 루슬란에게 경고했던 이유가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암흑과 물은 그 성질이 비슷해 옮기가 너무나 쉽다.

    순식간에 암흑이 그의 빛줄기를 거슬러 올라와 손에 닿고 루슬란은 얕은 신음을 뱉으며 순간적으로 손을 거둔다. 오롯이 그들을 향한 공격이 방해물이 사라지자 뻗어 나가고 그는 등을 돌려 그걸 온몸으로 받아 낸다. 류드밀라가 다치지 않도록.

    그녀는 그가 막아 준 덕분에 다치진 않지만 충격에 밀려 뒤로 넘어진다. 의식이 없는 그의 몸에 깔린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든다.

    “루슬란 님, 루슬란 님, 제발 일어나세요! 제발, 제발요……. 흐윽…….”

    흑마법사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고 다가오는 것이 뿌예진 시야에서 보인다. 그가 그녀 코앞까지 다가와 의식이 없는 루슬란의 몸을 발로 밀치고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때 뒤쪽에서 새파란 빛줄기가 흑마법사를 향해 날아오더니 그의 몸을 관통하여 들어 올린다. 그리고 류드밀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내던진다. 의식이 없던 루슬란의 몸은 어느새 사라져 있다.

    당황하여 빛줄기가 나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오른팔이 새까맣게 물들었을 뿐 곧게 서 있는 루슬란을 발견한다.

    “네가 부린 꾀를 나라고 못 부릴 줄 아느냐. 나의 껍데기 님이 날 걱정하는 모습이 어여뻐 네 꾀에 잠시 놀아나 주었다만 더 이상은 못 봐주겠구나.”

    물이 암흑에 옮을 수 있다면 암흑도 물에 동화될 수 있는 법. 루슬란은 파랗게 빛나며 소멸해 가는 흑마법사에게 다가가 그를 굽어본다. 그의 차갑기만 한 표정이 문득 약간 슬퍼진다.

    “내가 너를 여태껏 살려 둔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구나. 내버려 뒀을 때 가만히 살아가지 않고 기어코 일을 저지른 걸 보면 말이다.”

    “네놈은, 네놈은 날 몰라. 내가 너를, 너를…….”

    “체르노모르. 그때 일을 후회하느냐? 인간을 부추겨 내 삶을 망가뜨리고, 결국 나로 하여금 인간을 학살하게 만든 것이 후회되느냐?”

    루슬란이 조용히 묻는다.

    “아니.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야.”

    “그럼 됐다.”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흑마법사는 소멸하기 직전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그를 공격한다. 루슬란은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공격을 막지만 이미 암흑에 물들어 있는 탓에 공격 마법은 그대로 통과한다.

    곧장 루슬란의 심장으로 향하던 마법은 그가 목에 걸고 있던 도토리를 맞고 비껴 나간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양쪽 눈에 박힌다.

    그 공격을 끝으로 체르노모르는 소멸한다.

    “루슬란 님!”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류드밀라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루슬란을 향해 달려간다. 서서히 주저앉은 그는 눈가를 손으로 덮고 있다. 공격이 빗나가게 한 도토리는 한 줌 재가 되어 흩날린다. 재 가루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 옆에 무릎을 꿇은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려 한다.

    “루슬란 님, 괜찮으신가요?”

    “제가 그만 옛 기억에 사로잡혀 방심하고 말았군요.”

    약간 허탈한 목소리로 말한 그는 눈가를 덮은 손을 치우지 않아 류드밀라의 초조함은 커져만 간다.

    “많이 아픈가요? 상처를 보여 주세요. 그래야 어떻게 된 건지…….”

    “미안해요, 보기 흉측할 거랍니다.”

    그가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얼굴을 숨긴다.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스스로가 부끄럽고 한심해 견딜 수 없다는 듯 울음을 참는다. 꼭 예전의 자신을 보는 듯해 류드밀라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흉측해도 괜찮아요. 무서워하지 않을게요.”

    마음이 너무나도 아파 그녀는 그의 손목을 붙잡는다. 머릿속에서는 무례하다는 생각만이 떠돌지만 단호하게 그의 손을 눈가에서 치운다.

    그의 눈가는 새까맣게 물들어 있다. 보랏빛 도는 흰색 번개 자국이 감긴 눈꺼풀 위를 가로지른다. 암흑 마법의 흔적이다.

    “눈을, 뜨실 수는 있나요?”

    “못 뜨겠네요.”

    한숨처럼 조그맣게 말한 그가 고개를 떨군다.

    류드밀라는 그의 양 뺨을 조심스레 감싸 쥔다. 그가 그녀를 보려는 듯 고개를 다시 들지만 흑마법에 물든 눈은 뜰 수가 없고 다만 눈물만이 흘러내린다.

    “그래도 제 곁에 계실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나지막이 말한 그녀는 엄지로 눈물을 닦아 내준다. 손길에 몸을 가만히 내맡기고 있던 그가 말을 꺼낸다.

    “이 상태로는 황궁에 갈 수 없으니 디흐타우 산으로 가도록 해요. 제 마법이 그곳으로 길을 인도해 줄 거예요.”

    “좋아요. 일어서실 수 있겠어요?”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산으로 간다는데도 그를 온전히 믿어 그녀는 다만 담담히 이렇게 묻는다.

    류드밀라가 먼저 일어서고 루슬란도 그녀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일어난다. 눈에 스며든 암흑 마법이 몸 전체에 영향을 끼쳤는지 간단한 동작에도 그는 힘겨워 한다.

    “산 안에서는 이동 마법이 통하지 않아 산신님의 거처까진 걸어가야 할 거예요.”

    “산신님이요?”

    그녀가 의아한 듯 묻자 루슬란이 안심시켜 준다.

    “그분이 누군지는 만나 보면 알게 될 거랍니다. 산 근처까지 이동 마법을 쓸게요. 저를 붙잡고 있어 줘요.”

    류드밀라는 들은 대로 그를 꼭 붙들고 그는 더듬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찾아 눈을 감게 한다.

    그녀의 눈가를 가린 손이 치워졌을 때 그들은 산 입구로 이동해 있다.

    험준하고 황폐한 겨울의 산을 본 류드밀라의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그녀는 자신에게 약간 기댄 루슬란을 돌아본다.

    “산신님의 거처는 어디에 있나요?”

    “산 정상에 있어요. 아무래도 가기 어려울 것 같죠.”

    길도 보이지 않는 산을 다시 돌아본 그녀는 다 사라져 버린 용기를 다시 끌어모은다.

    “시도는 해 봐야죠. 그런데 왜 이 상태로 황궁에 가면 안 되는 건가요?”

    루슬란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나마 제일 온순한 대답을 내놓는다.

    “내가 약해진 모습을 황제가 보면 안 되기 때문이어요.”

    왜 황제가 보면 안 되는지 그것도 궁금했지만 류드밀라는 물음을 조용히 삼킨다.

    “그렇군요.”

    얌전히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은 궁금증을 알아챈 그는 살포시 미소를 짓는다.

    “나중에.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지금은 일단 산을 오를까요?”

    “네, 루슬란 님.”

    그녀는 그의 팔을 제 어깨에 둘러 부축하면서 걸음을 조심스럽게 뗀다.

    “잠시만요. 신발을 만들어 드릴게요.”

    뒤늦게 그녀가 맨발임을 떠올린 그가 멈춰 서서 마법으로 폭신하고 두꺼운 털신을 만들어 낸다. 이어서 그녀가 춥지 않도록 망토도 만들어 서투르게 둘러 준다.

    준비를 마친 그들은 산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한다. 길이 없어 수풀을 헤치고 바위를 기어올라야 했지만 류드밀라는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때론 최선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겨우 산짐승들이 다니는 좁은 길을 발견해 가는데 악한 기운이 그들을 감싼다.

    마법 능력이 없어도 그 악취와 더러운 기운을 느낀 류드밀라가 불안하게 두리번거린다.

    요괴들은 루슬란의 기운이 약해지고 더럽혀졌다는 것을 안다. 그의 두려움과 좌절도 느낀다. 그래서 덤불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을 둘러싸고 거리를 좁혀 온다.

    “루, 루슬란 님…….”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이미 아는 그는 왼손을 바닥에 대고 마법진을 그린다. 그리고 마법진을 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려 그들을 감싸는 커다란 돔을 형성시킨다.

    평소와 같이 마법을 사용했는데도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이 느껴진다. 돔을 완성한 그는 휘청거리다가 한계 이상으로 류드밀라에게 기대게 되고 둘은 같이 넘어진다.

    그녀는 루슬란을 신경 쓰느라 제 손이 돔 밖으로 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는데, 요괴들은 기민하게 알아채어 틈을 노린다.

    그때 제일 가까이 있던 녀석 하나가 달려들어 그녀의 손을 덥석 물고 돔 밖으로 끌어당긴다. 류드밀라의 비명을 들은 그는 다급히 잡고 있던 다른 손을 통해 그의 기운을 그녀에게 흘려보낸다.

    영험한 기운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흐른다. 불에 덴 듯 그녀의 손을 놓고 물러선 요괴는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며 괴로워한다. 손끝까지 루슬란의 기운이 흐르며 요괴가 낸 상처는 순식간에 치유된다.

    제 실수를 알아채고 안전한 돔 안으로 완전히 몸을 숨긴 류드밀라가 제 손을 살핀다.

    “똑같은 방식으로 루슬란 님의 상처도 치료할 수는 없는 건가요?”

    “물과 어둠은 성질이 비슷하여 어렵답니다. 다른 이의 기운을 빌려야 해요.”

    “그래서 산신님께 가는 것이군요.”

    고개를 살짝 끄덕인 그는 몸을 힘겹게 일으킨다. 전에도 몸이 약해져 있었던 데다 기운을 그녀에게 나눠 주며 더 움직임이 힘들어졌다. 게다가 돔을 유지하는 데에도 힘이 들었으니. 그는 자신이 정상까지 버틸 수 있을지 두려움이 인다.

    그래도 지금으로선 달리 방법이 없다. 그는 제 두려움보다는 그녀가 더 중요하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입을 연다.

    “다시 이동할까요?”

    “좋아요.”

    전보다 제게 더 몸을 내맡기는 루슬란이 걱정스러워 그녀는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돔은 그들을 감싸고 함께 움직이며 보호해 준다. 한 마리가 당하는 꼴을 본 요괴들은 그들을 따라오기만 할 뿐 섣불리 공격하지 못한다.

    “정상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이 속도라면 며칠은 소요될 듯싶네요.”

    류드밀라는 덜컥 겁에 질린다. 며칠이나 걸린다면 그동안 루슬란의 기운은 더 약해질 것이다. 그 틈을 노려 요괴들이 공격해 오면 어떡하느냐는 말이 혀끝에서 맴돈다. 게다가 물과 음식은 어떻게 구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그는 조곤조곤 그녀를 달래 준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물은 가다 보면 냇가가 나올 것이고, 음식은 나무 열매를 먹으면 되죠. 요괴들이 두렵다면 제가 밤에 깨어 있을게요. 그리고 어쩌면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요.”

    “루슬란 님, 죄송해요…….”

    그녀는 뒷말은 흘려들은 채 몸을 움츠린다. 그녀가 껍데기만 아니었더라도 물과 음식은 마법으로 구하여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마법에 직접적으로 닿으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두 배로 고생하는 것만 같다.

    “사과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때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으니, 요괴가 그녀의 손을 물었을 때 그가 흘려보낸 기운이 떠오른다.

    “루슬란 님, 그, 아까 제 몸에 보내 주신 그 기운…… 마법이었나요?”

    혹시나 제 몸에 마법이 닿았을까 겁을 집어먹은 그녀가 안타까워 그는 서둘러 설명해 주려다가 멈칫한다.

    그가 그녀에게 흘려보낸 기운은 신력이었다. 그걸 곧이곧대로 말해도 되는 걸까.

    “마법은 아닌 다른 것이었어요.”

    두루뭉술하게 대답한 그는 주제를 돌릴 것을 찾다가 공기 중에서 희미하게 번진 물 내음을 알아챈다.

    “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마침 시내가 흐르고 있군요. 목을 좀 축일까요?”

    “좋아요.”

    루슬란이 방향을 찾고 류드밀라가 발밑을 살피면서 그들은 냇가로 향한다.

    그들이 발견한 시내는 아직 산 중턱도 아니어서 그런지 꽤나 넓다. 게다가 겨울인데도 얼지 않아 있다. 마셔도 해롭지 않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그는 주인이 있는 산에 흐르는 물이어서 괜찮다고 대답한다. 그의 대답대로 아래 깔린 자갈이 보일 정도로 물은 맑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을 손으로 떠 마시고 잠시 냇가에 앉아 쉬며 류드밀라는 그에게 계속 질문을 한다.

    “산신님과 친하신가요?”

    “친하진 않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 의지할 분은 된답니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그분께 오르는 것을 도와 달라 할 수는 없나요?”

    “모든 산의 신들은 제 산을 오르는 이를 도와줄 수 없어요. 그분을 따르는 정령이라면 또 다르겠지만…….”

    루슬란이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흐리기가 무섭게 시내 한가운데에서 보글보글 거품이 솟아난다.

    “마침 알맞게 도착했군요.”

    말뜻을 묻기도 전에 거품 사이에서 잉어들 수백 마리가 끄는 하얀 배가 나타나자 류드밀라는 작은 비명을 삼킨다. 배 안에 홀로 서 있는 여인을 보고선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지금껏 살아오며 봐 온 이들 중 루슬란 님 다음으로 아름다운 데다 비정상적으로 새파란 눈은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흑단같이 새까만 머리카락은 젖어 있어 더욱더 청초한 매력을 뽐내는 것 같았고 그들을 향한 손짓은 마치 나비의 날갯짓같이 우아했다.

    “루살카에게 홀리지 마세요.”

    귀에 장난스러운 속삭임이 들려오고 나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린다. 루살카가 호수에 살며 지나가는 나그네를 홀려 익사시킨다는 물의 정령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떠오른다.

    “루살카라는 걸 어떻게…….”

    “산신님이 냇가에 있는 저희에게 보내는 이라면 뻔하지요.”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그녀도 따라 일어선다. 루슬란을 도와 배에 오르자 루살카는 그들을 반기는 듯 은은한 미소를 띠고는 잉어들을 채근한다.

    “산신님께서 기다리신답니다.”

    “가는 길을 편히 해 주어서 고맙구나.”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 루살카의 미소가 짙어진다. 물의 정령은 그들 맞은편에 앉아 흥미롭다는 눈길로 하고 지켜본다.

    그녀의 시선을 신경 쓰다가 배에 오르느라 다리까지 적신 류드밀라가 덜덜 떨자 루슬란은 한 팔을 다정스레 감싼다. 그가 말없이 따뜻한 기운을 마법으로 불러내 오자 그녀는 그의 품에 더 파고든다.

    루살카가 빤히 쳐다보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너무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는 그런 그녀의 어리광을 너그러이 품어 주고 물의 정령이 뭐라 짓궂은 말을 하려 하자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댄다.

    토라진 루살카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배를 따라오는 제 자매에게 무언가를 투덜거리며 기분을 달랜다. 그렇게 남은 여정은 루살카들의 키득거림과 속살거림을 제외하곤 조용히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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