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6. 위험한 조우-(2) (8/20)
  • 6. 위험한 조우-(2)

    “저울질을 해 보시겠습니까? 폐하의 같잖은 자존심과 폐하의 생명, 무엇이 더 중요하십니까?”

    황제는 잡힌 머리채가 당겨져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굳이 시간을 끈다. 그는 불경한 짓을 저지른 마법사를 어떻게 할 권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이 싫다. 마법사가 이렇게까지 하도록 만든 스스로를 탓하기보단 권력의 부재와 마법사 자체를 혐오하며 속으로 욕설을 퍼붓는다. 그럼에도 제 목숨은 소중하다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허락을 해 준다.

    “사라진 여인을 찾으러 가도 좋다.”

    루슬란은 고개를 까닥하고 머리채를 놓아준다.

    “감사드립니다.”

    다음 순간 그는 연기가 흐려지듯 사라져 있다.

    황궁에서 황제가 그에게 짓밟힌 자존심을 추스를 동안 루슬란은 어느 산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디흐타우 산. 이그나티 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오르내리다 죽은 이도 여럿일 정도로 험한 산이다.

    대부분의 산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이동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마법사나 마녀가 산을 헤집고 다니며 그곳에 사는 영물을 방해하면 안 되기에 산신들이 방어막을 걸어 놨기 때문이다. 이 제약은 강대하기 이를 데 없는 루슬란의 마법에도 예외가 없어 그는 산 입구까지 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산 입구에 서서 그는 깎아지른 듯 아득한 산을 잠시 올려다본다. 디흐타우 산은 사람을 여럿 죽인 산답게 음험하고 위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겨울이라 헐벗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산 중턱과 나무가 자라지 못해 갈색으로 말라 죽은 풀이 듬성듬성 자라는 꼭대기까지. 모두 살펴본 그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쉰다.

    위압감에 사로잡힌 것도 잠시, 루슬란은 이윽고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산꼭대기에는 그가 류드밀라를 찾는 일을 도와줄 이가 있다. 이동 마법이 통하지 않아 마법을 쓰는 이들이 살길 꺼리는 산에서, 유일하게 마법을 하는 이.

    긴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흙바닥에 스르륵 끌리지만 먼지 한 톨 묻지 않는다. 사뿐히 내딛는 발걸음은 가볍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는 지치기 시작한다.

    유난히 거대한 바위에 기대서 잠시 눈을 감는 것만으로 지친 기색을 드러낸다. 그리고 눈을 감고서 그의 생각은 다시 류드밀라에게로 향한다.

    그의 껍데기 님은 대체 어디 계신 걸까. 누가 그의 껍데기 님을 데려다 숨겼을까. 짐작 가는 이가 한 명 떠오른다.

    기분 나쁜 기억에 그는 눈을 번쩍 뜬다. 그자가 류드밀라를 데려갔다면 더더욱 이 산을 올라야 한다. 그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다시 옮기는 발걸음에 조급함이 실린다. 그 조급함은 곧 두려움이나 걱정과 같은 것이어서, 악한 것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한다. 이건 루슬란의 실수이다.

    디흐타우 산에는 그가 찾으러 가는 이만 사는 것이 아니다. 이 산의 어두운 그늘에는 악한 것들도 살고 있다. 헐벗은 사람의 형체에 팔다리가 더 돋아나고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고 있는 것들. 요괴들이다.

    풀숲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심한 악취가 풍겨 와 그는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이동 마법을 쓸 수는 없어도 다른 마법은 가능하기에, 그는 물을 공기 중에서 뽑아내어 손에 담아낸다.

    요괴들은 그의 기운에 눌려 쉽게 접근하지 못하지만 끈질기게 쫓아온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길이랄 것도 없는 산속에서 그것들은 날카로운 풀과 나뭇가지에 베이고 찔려도 상관 않고 그를 따라온다.

    그게 거슬렸던 그가 물을 얼음의 형태로 바꾸어 몇 마리를 죽여도, 불편한 동행은 계속된다.

    루슬란이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밤은 이미 끝나 해가 정오를 넘어서 뉘엿뉘엿 질 때이다.

    그는 산꼭대기에 있는 넓고 평평한 바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소환 마법을 그린다. 새파란 마법진이 떠오르고 잠깐 빛이 났다가 사라진다.

    “더러운 것들을 몰고 왔구나, 강의 아이야.”

    바위 뒤편 풀숲에서 거대한 산양이 모습을 드러낸다. 소용돌이치듯 둥글게 말린 커다란 뿔과 새하얀 털을 등나무 가지처럼 늘어뜨린 산양은 곧이어 노인의 모습으로 변한다.

    노인이 지팡이를 탕 바닥에 내리치자 루슬란 주위에 몰려들었던 요괴들이 모두 몸을 뒤틀다 몸이 먼지처럼 바스러져 무너져 내린다. 바람이 악한 것들을 모두 실어 갔을 무렵, 노인이 다시 입을 연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거친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다.

    “사과도 않는구나. 버릇없게.”

    루슬란은 잠깐의 고민 끝에 고개를 기울이고 노인은 그래도 불만족스러운 눈치이다.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그쪽으로 다가오며 인상을 점차 찌푸린다.

    “왜 더러운 것들이 꼬였나 했더니. 어째서 두려워하고 있을까.”

    노인은 그 바로 앞까지 다가와 안색을 살핀다. 그는 노인의 눈길을 말없이 견디다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대꾸한다.

    “인간을 하나 찾아 주십시오.”

    “일단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해야지. 그래야 내가 도와주든 말든 할 거 아니냐.”

    노인이 타박하자 루슬란은 입술을 꾹 다문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은 그이지만 노인 앞에서는 그저 철없는 아이가 된 기분이 들어 정말 싫다.

    “제게 바쳐진 껍데기 여인들 중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그 사라진 여인이 어디 있는지 찾아 주십시오.”

    “넌 네게 바쳐진 껍데기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느냐. 그곳에 있는 그 많은 이들 중에서 하나가 사라졌다고 신경 쓰지도 않을 텐데. 네게 특별한 이인가 보구나.”

    루슬란은 대답하지 않는다.

    “걱정을 가득 안고 내 산을 오를 만큼 간절했다면 그 특별함의 가치도 클 터. 네게는 좋은 기회이구나. 누구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오직 네 자신만을 돌봤던 네가 소중한 타인을 잃는 경험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산신님.”

    그가 절박함을 숨기지 못한 채 뱉어 낸 그 한 단어에 담긴 수많은 감정들에 노인, 산신은 조금 놀란다.

    “강의 아이야, 그 껍데기 여인에 대해 조금 더 말해 보렴.”

    루슬란은 더 이상 다른 방도를 생각해 낼 수가 없다. 거짓말을 해서는 산신이 그를 돕도록 설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수밖에.

    “제가 사랑하는 이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제 몸을 바쳐 사랑하는 이입니다.”

    산신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지팡이로 그의 가슴을 쿡 찌른다.

    “여기도 같은 말을 하고 있구나. 그런데.”

    산신의 지팡이가 산 반대편, 공기 중을 향한다.

    “저기, 저곳에, 네가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도 같을지는 모르겠구나.”

    “그건 알고 있습니다.”

    “넌 그래도 네 마음을 온전히 다 주겠다는 것이냐?”

    루슬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산신은 허, 하고 작은 숨을 뱉어 낸다.

    “내가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강의 아이야,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했구나.”

    “그래서 도와주실 겁니까?”

    “그 버릇없는 말투는 똑같아서 그나마 너인 걸 알아보겠구나. 이 칠칠치 못한 긴 머리하고 죽은 물고기 배 같은 희멀건 눈동자 빼고 말이다.”

    그는 참을성 있게 산신의 꾸짖는 말들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그래서 절 도와주실 겁니까, 핀 님?”

    루슬란이 핀이라 이름을 부르자 노인이 재미있다는 기색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래. 도와주마.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조용히 묻는 듯한 눈길에 산신 핀은 말을 이어 나간다.

    “…….”

    루슬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산신은 또 못마땅한 듯 혀를 쯧 찬다.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것도 여전하구나. 알겠다. 우리의 약속이 성립했으니 널 도와주마.”

    산신이 손을 내밀자 루슬란은 오기 전 미리 챙겨 두었던, 침실에서 발견한 류드밀라의 머리카락을 건넨다. 산신은 지팡이의 뾰족한 가지 하나에 머리카락을 매듭지어 꽂는다.

    그러곤 루슬란에게서 조금 떨어져 지팡이를 높이 던져 올린다. 공중에서 지팡이는 떨어지지 않고 떠 있으며 어느 방향을 가리킨다. 그러며 지팡이 끝에서 뻗어 나간 초록색 빛이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 나간다.

    산신이 지팡이를 다시 내려오게 하여 잡아도 그 빛줄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팡이를 잡고 눈을 감았다 뜬 산신은 마침내 입을 연다.

    “일이 네게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구나.”

    빛줄기를 눈으로 좇던 루슬란이 황급히 산신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그자가 껍데기 여인을 데려간 것이 맞습니까?”

    산신은 루슬란이 지칭한 이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흑마법사 체르노모르. 그가 너의 껍데기 여인을 납치해 제 성에 가두었다.”

    체르노모르란 이름을 듣자마자 루슬란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그러나 곧 감정을 다스리고 담담히 빛을 바라본다.

    “저 빛줄기 끝에 제 껍데기 님이 계시는 거군요.”

    “지금은 그렇지.”

    그가 눈썹을 한데 모아 찡그린다.

    “지금은 그렇다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시간이 흐르면 성의 위치가 바뀌는 겁니까?”

    산신은 고개를 주억인다.

    “여기서 지금 나타난 빛줄기로는 자세한 길은 알 수 없다. 그걸 알고 싶다면 해가 지기 1시간 전까지 기다려야 해. 게다가 해가 지면 성의 위치가 바뀌기에 서둘러야 한다.”

    “그 1시간 이내에 성이 있는 곳까지 가야 하는군요.”

    “분명 성 근처에는 내 산처럼 순간 이동 마법이 무력화될 것이다.”

    산신의 무뚝뚝한 목소리에서 걱정이 약간 묻어난다.

    “그녀를 찾아도 흑마법사 몰래 데려오는 것은 또 다른 문제고.”

    루슬란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저는 몰래 데려올 생각이 없습니다. 제 사람을 건드렸으니 그자도 배우는 게 있어야겠죠.”

    “체르노모르는 까다로운 상대야. 물과 성질이 비슷한 축축하고 형태가 자유자재인 암흑을 다루기 때문에 네가 상대하기 어려울 거다.”

    “그건 저도 압니다.”

    산신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루슬란에게 다가온다.

    “그러다 네 껍데기 여인을 구하기는커녕 너까지도 그 녀석에게 휘말릴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어둠으로 널 물들이기라도 하면…….”

    “그러면 저도 암흑 신이 되어 모든 걸 파괴하겠죠. 저도 알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제 암울한 결말을 이야기하고 산신은 더 이상 경고를 해 주지 못한다. 루슬란이 이미 결정을 내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럼 내 역할은 여기서 끝이구나, 강의 아이야.”

    “감사했습니다.”

    꾸벅 인사하곤 루슬란은 몸을 돌려 전과 똑같은 사뿐한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간다. 목표를 찾은 그의 걸음은 전과 다르게 차분하여 요괴들이 따라붙지 않는다.

    ***

    류드밀라는 걷고 또 걷는다. 몸이 피로해 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멈추지는 못한다.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멈추지 못한다. 멈추는 순간 이곳에서 벗어나길 포기할 것만 같다.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루슬란에게 돌아가야 한다. 루슬란에게 돌아가서 오해를 풀어야 한다.

    오직 이 생각만이 그녀의 발을 움직이게 만든다. 맨발바닥이 아파 오고 막막한 두려움에 무릎이 후들거려도 그녀가 계속 나아가는 이유이다.

    언제부터 그가 이렇게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을까. 언제부터, 어떻게, 왜. 그런 것들을 그녀는 모르지만 이것 한 가지는 안다. 그는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고 그녀도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란 사실을.

    그래서 그녀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긴다. 제발 여기서 나가는 길을 찾게 해 주세요. 제국의 모든 이들이 힘들 때 찾는다는 천신께 기도하며 말이다.

    그녀의 기도가 무색하게도 신은 길을 보여 주지 않는다. 다만 시련을 내릴 뿐이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지?”

    루슬란의 목소리와는 너무나 다른, 거칠고 쇳소리가 섞여 들어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차마 뒤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아까처럼 도망쳐 봐야 소용없을걸. 이 궁전은 오직 나에게만 나가는 길을 보여 주거든.”

    그녀가 벌벌 떨면서 꼼짝도 못 하고 있자 등 뒤의 남자는 오싹한 웃음을 터트린다.

    “내가 굳이 걸음하게 만드는군, 껍데기 아가씨.”

    이동 마법을 썼는지 그녀 눈앞에 키 큰 사내가 나타난다. 짧게 자른 새까만 머리카락에 마찬가지로 까만 눈을 가진 마법사이다. 입고 있는 제복을 보아 그가 마법사란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색깔이 마녀가 입는 자주색도, 마법사가 입는 초록색도 아닌 검은색이어서 그녀는 공포에 질린다.

    소문만 무성하던 흑마법사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당장 까무러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겁에 질린 그녀는 남자를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그에게 자신을 왜 데려왔는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묻고 싶지만 돌아올 대답이 두려워 차마 입이 떼어지지 않는다.

    루슬란의 흑발이 별이 빛나는 밤하늘처럼 군데군데 빛을 반사한 부분이 은빛으로 빛났다면 흑마법사의 머리는 모든 빛을 흡수하듯 그런 부분이 하나도 없다. 그 기이하고도 섬뜩한 모습만 그녀를 겁에 질리게 한 것은 아니다.

    남자의 검은 눈은 사악한 장난기로 가득하다. 사람 표정을 읽는 데 능숙하지 않은 그녀가 알아차릴 정도로 말이다.

    불쌍하게 흐느끼는 류드밀라의 어깨에 흑마법사가 다정한 척 팔을 둘렀다.

    “울음 그쳐. 아무리 울어 봐도 그 녀석은 널 구하러 오지 못해.”

    그 녀석이 누군지 깨달은 그녀는 더 서럽게 운다. 루슬란, 루슬란 님께서 그녀를 구하러 오지 못한다니. 이 흑마법사가 그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 녀석이 네게 왜 빠졌는지 정말 모르겠군. 이렇게 형편없이 질질 짜는 여자를 누가 원한다고.”

    흑마법사는 이렇게 투덜대더니 어깨를 두른 팔을 내리고 강압적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래도 복수는 해야 하니까. 옷 벗어.”

    “네, 네……?”

    “귀머거리 아니잖아. 옷 벗으라니까.”

    복수라는 말에, 또 옷을 벗으라는 말에 그녀는 창백해져 뒷걸음질 친다. 흐느낌이 더 심해져서 딸꾹질이 나오며 말이 제대로 나오지 못한다.

    그때 흑마법사가 그녀의 뺨을 세게 후려갈긴다.

    “어디서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내 명령을 지체해? 옷 벗으라니까.”

    뺨을 맞자 머리가 웅웅 울리고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다정한 보살핌만 받아 와서인지, 이런 취급이 익숙하지가 않다. 울음을 서둘러 삼킨 그녀는 거짓말을 생각해 낸다. 당당하게 저항하고 싶지만 거짓말이라도 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만큼 절박하다.

    “그, 제, 제가 지금 워, 월경 중이라서… 제 미천한 몸으로는…….”

    흑마법사가 불결한 말을 들었다는 듯 침을 그녀 발치에다 퉤 뱉는다.

    “재수 옴 붙었잖아. 여기 더 잡아 두긴 싫은데 하는 수 없군.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널 겁탈하고 다시 돌려보내야겠어.”

    거짓말이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앞으로 그녀에게 닥쳐올 일을 떠올리며 다시 울기 시작하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흑마법사는 공중에서 사라져 버린다.

    흑마법사가 사라지자 그제야 온몸의 힘이 풀려 류드밀라는 털썩 주저앉는다. 주저앉은 김에 지친 몸을 거대한 대리석 기둥에 기댄 그녀는 결국 무릎을 끌어안고 운다.

    절망이 끝없이 해변가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밀려와 용기를 모래처럼 쓸어 가져간다. 월경을 한다고 거짓말할 수 있는 시간은 많아 봤자 일주일. 그동안 그녀는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그런데 마법도 쓸 줄 모르는 그녀가 흑마법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흑마법사는 그녀를 겁탈하고 나면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루슬란에게 상처를 줄 생각인 모양이지만 사실 그 행동은 그녀에게 더한 상처를 안길 것이다.

    차라리 편안하게 숨을 끊어 주지. 다른 사내에게 몸이 더럽혀진 그녀를 루슬란이 다시 받아 줄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에게서 버려질 생각을 하니 그녀는 차라리 그러기 전에 숨이 끊어졌음 하고 바라본다.

    그칠 줄 모르던 울음은 마침내 그녀의 지친 몸이 깨어 있기를 포기했을 때에야 잦아든다.

    그녀의 꿈에는 루슬란이 나온다. 꿈인 줄 알면서도 류드밀라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에 안긴다. 이번에는 그도 조용히 울고 있다.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요히 뺨을 타고 미끄러지는 눈물에는 죄책감이 담겨 있다. 처절한 슬픔과 미안함이 그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서 보여 류드밀라는 마음이 아프다.

    “미안해요, 나의 껍데기 님. 내가 그대를 지켰어야 하는 건데, 그대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해요.”

    그녀는 그의 가슴팍을 붙들고 매달린다.

    “그런 건 정말이지 괜찮으니 절 찾으러만 와 주세요, 제발요.”

    다른 때라면 차마 용기도 내지 못했을 부탁까지 할 정도로 그녀가 절박함을 알아차린 그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찾고 있어요. 흑마법사의 위치를 해 지기 한 시간 전에만 알 수 있어서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내가 정말…….”

    “사과는 하지 마세요. 루슬란 님께서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대신 이것 한 가지만 대답해 주세요.”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한다. 흑마법사에게 겁탈당하고 루슬란에게서 버려지더라도, 그래서 숨이 끊어지더라도 그래도 이것 한 가지는 알고 싶다.

    “무엇인가요, 나의 껍데기 님?”

    그가 걱정스러워 인상을 살짝 찡그리자 덜컥 겁부터 질리는 그녀이지만 이번만큼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어 나간다.

    “제가 거미줄로 보내지기 전날, 어디서 무얼 하고 계셨나요?”

    “그 전날이라면, 황제의 명에 따라 원정을 나갔었죠.”

    담담히 내놓은 그의 대답에 더욱더 두려워진 그녀는 그를 꼭 붙들고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전 사실을 말했는걸요. 왜 그러시나요?”

    결국 겁에 질려 울음 사이사이로 그녀가 두서없이 단어를 뱉어 낸다.

    “흑, 그날 후원에 나갔었는데, 흐윽, 루슬란 님을 보았어요. 루슬란 님께서, 다른 여인과…….”

    “다른 여인과요?”

    그녀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 주던 그의 손길이 잠시 멈칫한다. 마치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래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군요. 제가 원망스럽고 싫다고요.”

    “네, 네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제가 주제넘게…….”

    그녀는 울기만 하는 자신이 너무 싫다. 자신감 없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도 싫다. 그래서, 그래서 용기를 내 올려다본 얼굴인데 그 얼굴이 차가운 분노로 가득 차 있는 걸 발견한다.

    순간 그 분노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너무나 놀라고 공포에 질려 우는 것도 잊어버린다. 그리고 눈을 떼지 못한다. 루슬란의 저런 얼굴은 처음 봤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화를 참는 모습. 눈이 서늘하고 위험하게 번뜩인다. 내리쳐지기 직전인, 달빛을 받아 높게 뽑아 든 검처럼.

    한편 루슬란이 분노에 휩싸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체르노모르의 환영에 속았을 뿐 아무런 잘못도 없는 류드밀라를 껍데기 여인의 마을로 내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황궁보다는 마법 결계가 약해 침범하기도, 데리고 나오기도 쉬운 껍데기 마을로 류드밀라를 보내 그녀를 위험에 빠트린 것이다.

    그가 조금 더 신중했다면. 조금만 더 그녀를 믿었다면. 그들의 사랑에 확신이 있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그는 잔뜩 겁에 질린 그녀의 얼굴과 마주한다. 그제야 제가 지금까지 잘못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깨달은 루슬란은 말없이 슬퍼하며 표정을 부드럽게 푼다. 그리고 그녀를 천천히 껴안는다.

    그가 겨우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후회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나의 껍데기 님, 전 그대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어요. 그저 이 상황을 초래한 흑마법사와 제 자신에게 화가 났을 뿐이랍니다. 그대가 본 것은 흑마법사가 만들어 낸 환영이었어요. 전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아요.”

    “그래도 루슬란 님을 믿지 못하고 피해 버린 것은 저예요.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요. 정말이지 괜찮으니 울지 마셔요.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답니다.”

    안심한 류드밀라의 울음이 잦아들기까지는 긴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녀에게서 딸꾹질도 가져가 버린 그가 몸을 약간 떼고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다.

    그 맑고 처연한 보랏빛 눈동자를 보자 겨우 추슬렀던 마음이, 겨우 정리했던 말들이 산산이 부서져 내린다.

    결국 루슬란은 울기 시작한다. 흐느끼는 소리도 없이 굵은 눈물방울만 뚝뚝 흘리는 그가 너무도 안타까워 그녀는 그의 양 뺨을 손에 담는다. 그러나 그녀도 감정에 북받쳐 제대로 말을 못하긴 마찬가지이다.

    “미안해요. 내가 한 말들이, 내가 쏟은 사랑이 부족해서 그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면 정말로 미안해요. 내가 더 노력할게요. 그대가 더 이상 나를,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까지 내가 그대를 보듬어 줄게요. 그대를 구해 줄게요.”

    정작 그는 그녀를 잃을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마음이 고맙고 미안해서 류드밀라는 뺨을 놓고 그를 꽉 끌어안는다. 꿈인데, 분명 꿈인데 그가 정말로 곁에 있는 느낌에 위로가 된다.

    “전 정말로 괜찮으니까 안심하세요. 이제 루슬란 님께서 그런 게 아니란 것도 알았고, 루슬란 님께서 저를 구하러 오신다는 걸 아니까…….”

    자꾸만 그녀 앞에서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그가 마침내 조그맣고 조심스러운 미소를 내비친다.

    “그대가 괜찮아서 다행이에요. 많이 놀라셨죠, 제가 울어서. 미안해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번에도 우셨으니 전 놀라지 않았어요.”

    그는 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부끄러워한다. 그제야 그가 저번에도 운 것을 언급하지 말걸 하고 그녀는 실수를 되새긴다. 그러는데 그가 별안간 귓가가 간지럽게 속삭여 온다.

    “그래요. 전 저번에도 울었죠. 그러니 달래 주실래요, 울보 마법사를?”

    얼굴이 새빨개진 류드밀라는 그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린다.

    “어, 어떻게 달래 드릴까요?”

    “글쎄요.”

    루슬란이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스레 그녀를 본다. 마음 같아서는 오히려 그가 그녀를 달래 주고 싶지만, 그녀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평소처럼 장난기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

    비록 그가 그녀를 찾아온 꿈속이어도 흑마법사가 물러간 틈을 타 조금이라도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해가 지기 한 시간 전에만 성의 위치를 알 수 있는데, 아직 해가 지기 전까지는 오랜 시간이 남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두른 거칠고 누런 옷의 어깨 부분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다가 살짝 내린다. 그녀는 바로 얼굴이 빨개져서는 고개를 푹 숙인다. 그리고 우물거리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을 수가 없다.

    “뭐라고 하셨나요, 나의 껍데기 님?”

    “이래도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그가 끌어 내린 옷깃을 다시 올린다.

    “꿈을 깰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어요. 그래도 싫으시면 하지 않을게요.”

    그의 손길이 사라진 후에야 이 다정함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깨달은 그녀는 고개를 든다. 잠시 고민하다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싫지 않아요.”

    이번에는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잡고 끌어당긴다. 무엄한 짓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황급히 손을 내리긴 했지만.

    “죄송해요. 제가 무례하게 행동했어요.”

    그는 베개에 기댔던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로 다시 손을 뻗는다.

    “제 자제력을 시험하지 말아요, 나의 껍데기 님.”

    혼나고 있다고 여긴 류드밀라는 두렵고 죄송한 마음에 눈을 내리깔고 손을 불안하게 비튼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내리깐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이럴 때마다 그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고는 계신가요?”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과 너무 다르다. 게다가 그녀의 뺨을 감싸는 손길은 더없이 부드럽다. 간사하게도 그녀의 가녀린 마음은 말과 손길에 쉽사리 안심하고 몸과 마음을 모두 내맡긴다. 흑마법사와는 달리 루슬란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주고 류드밀라는 그 안정감을 흡수하며 마음을 놓을 만큼 순진하다.

    스스로 옷을 벗은 그녀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의 품에 안긴다.

    그녀를 제게 기대게 한 채로 위에 걸친 로브와 바지, 속옷까지 벗은 그는 셔츠의 단추도 풀어 버린다. 마법사의 완전한 나신은 처음 보는지라 그녀는 물결치는 근육을 넋을 잃고 지켜본다.

    그의 어쩌면 병약해 보이기까지 한 새하얀 피부와 우아한 몸 선 때문에 생긴 편견이, 자잘하게 자리 잡은 근육들을 보고 몽땅 깨지고 만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홀리고 있다는 사실에 무지한 듯 크게 뜬 눈과 마주하고 그저 미소 지어 줄 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미처 감탄의 말을 할 새도 없이 입을 맞춰 와,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익숙한 겨울 내음이 입 안에 가득 퍼진다. 말캉한 혀의 감촉은 언제 느껴도 질리지 않는다. 보드라운 입술도. 차가운 그 주위와는 달리 그의 입 안은 따스하고 그녀는 몸의 긴장이 풀어진다.

    그의 손이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고 다른 손은 뒤로 넘어가려는 목덜미를 받쳐 준다. 그러다 목덜미를 받치던 손이 사라지고 대신 다리 아래서 그 손이 느껴진다.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와 그녀에게 쾌락을 가져다주는 손길은 조심스럽다.

    그래서 더욱 감질이 난다. 그가 항상 이렇게 조심하는 것 말고 그날, 그녀가 몸살감기로 앓아눕기 전날처럼 거칠게 다뤄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잠깐 생긴다.

    아직은 그 마음이 말로 이뤄지지 않는다. 가슴 깊은 곳에 부끄러워 꽁꽁 숨겨 놨을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마법사에게도 마음을 읽는 기술은 없어 그 숨겨 놓은 마음을 모른다. 루슬란은 손가락을 빼고 여전히 좁은 그녀의 안이 제 것을 품게 한다. 엄청난 자제력으로 신중히, 그녀가 겁에 질리지 않게 천천히 말이다.

    류드밀라는 베개에 기대 누워 조금씩 신음과 울먹임을 뱉어 낸다. 그러다 이곳이 꿈속임을 다시금 떠올리고 조금 더 대담해진다. 가슴 깊은 곳에 꽁꽁 숨겨 놓았던 말을 꺼내 본 것이다.

    “이제 안 아프니까, 조금 더 거칠게 하셔도 되어요.”

    “난 그대가 다칠까 봐 겁이 나는걸요.”

    단정한 목소리로 그가 대꾸하며 눈썹을 살짝 찡그린다. 저런 단정함 말고 그의 안에 숨겨진, 본능을 따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녀를 끝까지 몰아붙이고 나락으로 함께 떨어질 그런 모습을. 그가 자제력을 잃었다는 것은 취약해졌다는 뜻이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때문에.

    그녀는 이런 생각을 가진 스스로가 창피해 견딜 수가 없는 동시에 욕망에 이끌린다. 그래서 팔을 뻗어 그의 목을 휘감고 몸을 더 끌어당긴다. 가슴 끝에 닿는 그의 조각처럼 단단한 몸이 그녀를 이성의 가장자리로 내몬다.

    “루슬란 님이 기쁘다면 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요. 그리고, 루슬란 님이 행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라도 전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

    “제가 두렵지 않다고요?”

    그가 느릿하고 위험한 미소를 짓자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난다. 은빛 눈이 지독한 갈증을 담고 번뜩인다. 전이라면 기가 눌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몸이 단 그녀에게는 그 모습마저도 아찔하게 매혹적이다.

    “루슬란 님은 숨이 멎을 것같이 아름답기만 하시지, 무섭지는 않아요.”

    그는 그녀를 겁주는 것이 먹히지 않자 그 변화가 고맙고 재미있어 작은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요, 그럼 숨이 멎을 것같이 아름다운 제가 뭘 어떻게 해 드리면 될까요?”

    마지막 순간에 부끄러워지고 만 류드밀라는 소심하게 몸을 비튼다. 말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부드럽게 아래를 치대고 있던 그가 허리 짓을 멈춘다.

    “말씀해 주셔요.”

    움직임이 사라지자 그 허전함에 애가 탄 그녀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그의 귀에다 속삭인다.

    “절 범해 주세요. 제가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루슬란 님 이름만 입에 담을 때까지요.”

    “그대는 이런 모습이 절 얼마나 미치게 하는지 아시나요.”

    한숨처럼 이런 말을 흘린 그가 허리를 뒤로 뺐다가 그녀의 안을 단번에 파고든다.

    “흐윽!”

    울음을 토해 내며 그녀는 그에게 매달린다. 이제 그는 조금의 배려도 없이 그녀를 마구 다룬다. 아래를 유린하면서도 위에서는 어깨를 깨물고 눈동자에서는 광포함마저 일렁인다.

    하지만 그녀의 뒷머리를 다시 받쳐 주는 손길은 여전히 다정해 그녀는 안심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른다.

    둘 다 절정에 다다르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은 옷을 다시 입고 서로를 꼭 안고 있다.

    그의 품 안에서 그녀는 우울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지막하지만 또렷하게, 차분하고 느릿하게 고백한다.

    “꿈에서 깨어나기가 싫어요, 루슬란 님. 영원히 꿈속에 있고 싶어요.”

    “두렵겠지만 그대는 깨어나야 해요. 저를 믿어 주세요, 제가 찾으러 갈게요.”

    그가 몸을 살짝 뒤로 빼려 하자 그녀는 다급히 옷자락을 그러쥔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마구 뒤엉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저번과 같은 오해가 생길까 봐 그녀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입을 뗀다.

    그때까지 그는 기다려 준다.

    “루슬란 님, 흑마법사가 저를, 저를…… 해치겠다고 했어요.”

    차마 겁탈이란 단어를 쓰지 못하고 울먹이는 그녀의 얼굴은 처연하다. 흑마법사가 무얼 하려 했는지, 그녀가 어떻게 그의 손아귀를 벗어났는지 정황은 모르지만 루슬란의 가슴은 난도질당한 듯 너덜너덜해진다.

    그는 죄책감을 꾹 삼키며 마음을 다잡는다. 이런 상황일수록 더더욱 그녀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자신이 받는 상처에 신경 쓰기보다는 그녀의 마음을 치료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안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그의 상처와는 달리 인간의 마음에 남는 아픔은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대한 마법사의 깊은 내면에 숨어 있는 두려움이 불쑥 고개를 쳐든다. 그는 전에도 소중한 이들을 지키는 데에 실패했다. 이번이라고 그러지 않을 수가 있을까?

    끔찍한 부피와 무게를 지니고 그를 덮쳐 오는 공포마저 억누른 그는 그녀를 다시 껴안는다. 이렇게 전해지는 온기만으로 그녀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온기가 얼마나 그녀에게 위로가 되는지 그는 모른다. 그녀 앞에서 그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 되었으니.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노력한다. 공포를 억지로 내리누르느라 목소리가 갈라질 것을 알아도 상관 않고 입을 연다. 그녀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았다. 항상 완벽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지만 이렇게 무너진 모습도 그녀가 사랑해 줄 거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라면, 그녀의 망가진 모습도 사랑할 테니까.

    “제발,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셔요. 그가 해치기 전에, 해가 지기 전에 제가 그대를 찾으러 갈게요.”

    이제 곧 해가 진다. 이 시간을 놓치면 다시 하루를 기다려야 한다. 마음이 급해진 그가 꿈에서 나가려고 다시 몸을 조금 빼자 이번에 공포는 그녀에게로 옮아간다.

    루슬란 님이 저를 구하러 오겠다는 말엔 믿음이 간다. 그러나 혹시라도 흑마법사가 마음을 바꾼다면 어떡할지 두렵다. 흑마법사에게 겁탈 당하고 그에게서 버림받으면 어떡하지. 버림받을 순간이 상상이 되어 류드밀라는 여린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도록 주먹을 꼭 쥔 채 흐느낀다.

    방금 전에도 받은 그 다정한 손길과 따스한 눈빛이 차갑고 경멸 어린 비수가 되어 꽂힐 거라고 생각하니 몸이 덜덜 떨려 온다.

    처음 그에게로 보내진 순간보다 더 두려운 때는 다시 없을 거라 여겼는데. 비록 오해였지만 그가 다른 여인과 있는 모습을 봤을 때보다 절망스러운 때는 다시 없을 거라 여겼는데.

    두려움과 절망이 그녀를 거친 밧줄처럼 옭아매어 천천히 가라앉는 배 기둥에 묶어 놓는다.

    그녀는 입 안에 들어오는 것은 짠 바닷물이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숨을 들이켜는 익사하기 직전의 사람처럼 절박하게 그를 붙잡는다. 그리고 말을 쏟아 낸다.

    “흑마법사는 저를 겁탈할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루슬란 님께 보낼 거라고요. 저는 루슬란 님께 버림받기 싫어요. 그러니 저를 그 전에 구하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죽여 주세요. 제가 절망과 아픔을 겪기 전에, 스스로 죽는 죄를 루슬란 님께 저지르기 전에 제 숨을 끊어 주세요.”

    루슬란은 몸이 굳어 아무 말도 못 한다. 해가 곧 진다는 다급함이 머리에서 사라진다. 그녀가, 그가 사랑하는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급함이 사라진 자리를 또 다른 다급함이 채운다. 그녀를 어떻게든 안심시켜야겠다는 다급함이.

    그러나 슬픔에 사로잡힌 그는 많은 감정이 담긴 딱 한마디만을 겨우 말할 수 있다.

    “제가 왜 그대를 버릴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당황한 류드밀라는 눈물을 훔치며 그의 눈을 조심스럽게 마주한다.

    “제 몸, 제 몸이 더럽혀진 거잖아요. 그런 몸으로는 루슬란 님 곁에 머무를 수 없어요. 다른 남자에게 겁탈당해서 몸이 더럽혀졌는데 그걸 어떻게 다시 품으시려고요…….”

    마주한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차올라 있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여전히 그대의 몸이고 그대인데. 흑마법사가 무슨 짓을 하든 저는 그대를 절대 버리지 않을 거예요.”

    그가 입술을 달싹여 하는 말이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믿기지가 않아 그녀는 숨을 참는다. 그녀가 숨을 내쉬는 순간, 그 숨결이 닿는 순간 비누 거품처럼 그녀가 들은 말이 터져 버릴 것만 같다.

    그녀의 불안함을 알아차린 그가 그녀의 손을 쥐고 손마디에 입을 맞춘다.

    “저를 믿기 어려우면 이 말을 기억해 줘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몸을 가까이 한 그가 그녀의 귓가에다 속삭인다.

    “제 온몸을 다 바쳐 사랑해요, 나의 껍데기 님. 전 그대를 구할 거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를 거둬 보살필 거예요. 두려워해도 좋고 걱정해도 좋지만, 제발 기다려 주세요.”

    마침내 그러쥐었던 그의 옷깃을 놓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말대로 여전히 두렵고 걱정스럽지만 그녀를 괴롭혔던 음울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는 탈출한 기분이다.

    “기다릴게요, 루슬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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