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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위험한 조우-(1) (7/20)
  • 6. 위험한 조우-(1)

    그날 저녁 피곤한 나머지 일찍 침대에 누워서도 류드밀라는 알리나가 한 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말은, 넌 황궁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소리야. 너도 가족이 있었고, 친구가 있었고, 집이 있었어. 그들이 그 모든 걸 네게서 빼앗아 버린 거야, 류드밀라.”

    그녀는 이불 속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상상해 본다. 그녀가 태어난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그녀의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자신과 닮았을까. 형제나 자매가 있었을까. 그녀의 집은 어떤 곳이었을까.

    아주 오래전 마녀들에게서 껍데기는 황궁에서 사랑 없는 교배로 태어난다는 말을 듣고 멈췄던 상상들을 다시 해 본다.

    이번에는 루슬란으로 생각이 흘러간다. 루슬란 님이라면 마법으로 그녀의 옛 집을 찾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별안간 루슬란이 지금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 줬으면. 따듯한 목소리로 아무 말이라도 건네줬으면. 부드럽게 그녀를 껴안아 줬으면.

    그렇게 그의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든 류드밀라의 꿈에는 루슬란이 나타난다.

    평소처럼 로브를 느슨하게 걸치고 머리카락은 늘어뜨린 채이다. 한없이 평화롭고 고요한 모습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준다. 다시 그의 침실의 거대한 침대에 앉아 있게 된 류드밀라는 꿈속에서 몸을 일으킨다.

    “루슬란 님?”

    커다란 침대를 본 순간 이것이 꿈임을 알아차렸지만 막상 그녀 곁에 기대앉은 루슬란을 보자 놀라고 만다.

    “그래요, 나예요.”

    그가 슬퍼하는 눈을 휜 채 나직이 대꾸한다.

    “내가 보고 싶었나요, 나의 껍데기 님?”

    류드밀라는 대답하는 대신 울음을 터트리며 그에게로 몸을 내던져 품에 안긴다. 그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마주 안아 주는 것에서 또다시 이것이 꿈이란 것을 느끼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행복하다.

    “흐윽, 네, 정말,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울지 마셔요.”

    담담하게 그녀를 달랜 그가 몸을 약간 그녀에게서 떼어 낸다.

    “그대는 정말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군요.”

    그의 착잡한 말투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그녀는 전에 하지 못했던 말을 쏟아 낸다. 이것도 다 꿈이라 여기니 말하기가 한층 편해진다.

    “제가 전에 했던 말은 루슬란 님이 밉고 싫다는 뜻이 아니었어요. 제가, 저 스스로가 밉고 싫다는 것이었는데…. 전 여전히 루슬란 님을 사랑해요. 제 마음을 다 주고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사랑해요.”

    그는 걱정스러워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왜 스스로가 밉고 싫으셨나요?”

    “전 해야 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매번 울기만 하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루슬란 님께서 오해하시게 만들었고요.”

    마침내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린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대는 대신 그런 점을 알고 고치려고 노력하잖아요. 전 그런 부분이 너무 대견하고 부러웠는걸요. 그대가 한 번 용기를 낼 때마다, 나는 백만 번 감동하고 행복해져요. 그러니 지금처럼 계속 용기를 내 주셔요.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고, 아껴 주는 법도 배워 주세요.”

    “그럴게요, 루슬란 님.”

    그가 입술을 포개 온다. 감촉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져, 꿈이라는 것이 잊힐 정도이다. 거의.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며 아무리 애달프고 기뻐도 이건 꿈이라고 되뇐다.

    꿈이어서 그녀는 자신의 거칠고 누런 옷을 벗겨 내는 손길에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오히려 옷과 비교하면 부드럽기만 한 그 서늘한 손길을 즐긴다.

    꿈이어도 부끄러운 감정이 남아 있었는지 그가 그녀를 눕히고 올라탈 때 얼굴이 빨개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복숭앗빛으로 발그레해진 얼굴을 보던 그는 웃음 짓고는 늘 그렇듯 손가락부터 넣는다.

    벌써 젖어 드는 아래와 섬세하고 긴 손가락이 마찰하는 소리가 더없이 크게 들려오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는다. 꿈속에서도 생생한 쾌락이 잔잔한 물결을 일렁이며 다가온다.

    눈을 감고 있으니 빛줄기가 깜깜한 시야에서 춤을 춘다. 그가 주는 쾌락을 시각적인 형태로 볼 수 있는 것만 같다. 마치 눈을 꼭 감고 찡그리면 햇빛이 눈꺼풀을 통과해 아른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손가락이 하나 늘어나자 퐁퐁 솟아나던 빛이 막힘없이 흐르기 시작한다.

    손가락이 빼내어지자 잠시 사라졌던 반짝임이 그의 것이 단번에 들어오자 분수처럼 폭발하듯 솟구치다 쏟아져 내린다. 그녀는 그 빛의 찬란함에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이 부셔 오자 겨우 눈을 뜬다.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친 은빛 눈동자에 장난스러운 기색이 올라온다.

    “이제야 나를 보고 싶어졌나요?”

    “전 항상…….”

    하려던 말은 황홀감에 삼켜져 더 이상 나오지 못한다. 그녀는 이렇게나 행복한데 그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을 정도로 단정하다. 그는 그녀와의 관계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다시금 그가 키스하던 금발의 마녀 생각이 난다. 불경하다고 스스로를 꾸짖어 보아도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결국 류드밀라는 울음을 터트린다. 그 울음이 기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바로 알아차린 그가 자신의 것을 빼내고 서둘러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혹시 내가 그대를 아프게 했나요? 미안해요.”

    “아니, 아니에요. 그것 때문이 아니라…….”

    고민하던 그녀는 반쪽짜리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한다.

    “저는 이렇게 행복한데 루슬란 님께서는 별로, 그러니까, 말도 막힘없이 하시고 그래서…….”

    그가 나직이 웃음을 터트린다. 순수하고 맑은 그 얼굴이 아름다워 그녀가 홀린 듯 지켜볼 정도이다. 그러다 그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내가 그대와의 관계에서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나요?”

    “네…….”

    그는 자신의 것을 다시 천천히 밀어 넣으며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남긴다. 허리 짓을 계속하며 키스는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눈꺼풀에서, 뺨으로, 턱으로, 목덜미까지.

    “난 표현이 서툴러요. 그대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도 하고요. 그대를 사랑하니까, 그래서 그대에게 내 좋은 면과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 주고 싶어요.”

    “루슬란 님은 어떤 모습이든지 아름다워요.”

    류드밀라가 조심스레 속삭인다.

    그 말에 그의 몸이 순간 가볍게 떨려 온다. 정말 그럴까. 그녀는 그의 진짜 모습을 알고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조차 꿈으로 여기는데.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대에게만은요.”

    이렇게 대꾸한 루슬란은 목덜미의 여린 살을 입에 문다. 물고 살에서 나는 향에 한껏 취한다. 그리고 목덜미에서 내려와 어깨를 부드럽게 깨문다.

    날카로운 이빨의 감촉에 놀란 그녀가 그를 붙들지만 그는 아프지 않게, 자국만 남도록 어깨를 물었다가 놓아준다. 그녀의 살에 남은 잇자국은 송곳니가 더 깊게 파고든, 맹수의 이빨 자국과 비슷하다.

    그가 아래를 뭉근하게 쳐올릴 동안 어깨를 훑어 자국을 확인한 그녀는 조금 대담해진다.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매만져 본다. 그가 피식 웃자 드러난 송곳니가 하얗고 날카로워 일순 두려웠지만 손을 떼지는 않는다.

    고양이처럼 약간 올라가 있는 입꼬리도, 보드랍고 도톰한 아랫입술도 만져 보는데 그가 고개를 조금 비틀어 손가락을 입에 문다.

    “루슬란 님……?”

    손끝에서 느껴지는 혀의 감촉이 아찔하다. 따듯하고 말캉한 입 안의 감촉이 황홀하다. 게다가 아래를 쳐올리는 속도가 빨라지며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그도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를 쓸어 준다. 그녀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그녀도 손가락을 입 안에 담는다. 입 안에서는 단단하게만 느껴지는 손가락에서는 향긋하고 다디단 맛이 난다.

    그렇게 서로의 손가락을 애무해 주면서 그들은 동시에 절정에 다다른다. 아까의 말을 염두에 뒀는지 그는 그녀에게 나지막한 신음을 들려주고 그 야한 소리에 빨개진 그녀의 귀를 만지작거리기도 한다.

    류드밀라-.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녀는 열기 속에서 깨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가 슬픈 미소를 입가에 띤다.

    “갈 시간이 되었군요. 나중에 다시 찾아올게요, 나의 껍데기 님.”

    그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지고 류드밀라도 잠에서 깬다. 약간 촉촉한 아래가 꿈을 떠올리게 하는 유일한 흔적이다. 그가 남겼던 키스 자국도, 어깨에 깨문 자국도 다 사라져 있다.

    정말 꿈이었어. 서글프게 생각한 그녀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스베틀라나가 있는 문가로 향한다.

    “잠을 제대로 못 잤니?”

    여인이 걸어가면서 물어도 그녀는 그저 고개를 젓는다. 그러다 문득 복도에 난 창문을 바라보는데 밖이 컴컴하다.

    “왜 깨웠어? 지금은 밤이잖아.”

    “첫날밤의 의식을 치러야지. 전에는 엄청 궁금해하더니 그새 까먹었나 보구나?”

    의식. 사실 그녀는 의식에 대해 들은 게 하도 없어 궁금해할 여력도 없었다. 그러나 막상 그 의식이란 일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궁금증이 불쑥 치솟는다.

    하지만 물어보지 말란 것을 캐묻는 건 그녀 성격이 아니었고 그녀는 그저 조용히 스베틀라나 뒤를 따라간다.

    그들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식당만큼이나 거대한 홀에 들어간다. 식당이 아닌 것을 그녀는 바로 깨닫는데, 테이블과 트레이 대신 껍데기 여인들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여기는 행사동이야. 연례 축제나 첫날밤의 의식 같은 중요한 일들을 여기서 하지.”

    홀의 가운데로 그녀를 이끌며 스베틀라나가 설명한다.

    가운데에는 거대한 수반(水盤)이 놓여 있고 그 주위를 빨간 옷을 입은 거미들이 둘러싸고 있다. 수반이 놓인 단 네 귀퉁이에는 커다란 횃불이 밝혀져 있어 신비롭고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거미들한테 가. 난 여기서 지켜봐야 해.”

    스베틀라나는 그 말을 남기고 인파 속으로 사라져 어느새 그녀는 홀로 걸어가게 된다. 다른 껍데기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를 향하고 류드밀라는 움츠러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수반이 있는 단에 다다르자 거미 옆에 있던 한 여인이 빨간 망토를 입혀 준다. 벨벳인지, 면인지 부드럽고 무거운 천은 그녀 몸에 감긴 채로 바닥까지 끌린다. 횃불에 비친 망토 색이 핏빛 같아 섬뜩하다고 여긴 그녀는 무심코 수반 안을 들여다보고 기절할 듯 놀라고 만다.

    수반 안에는 끈적한 붉은 피가 얕게 출렁이며 차 있다. 마법으로 상하지 않게 보존되고 있는지, 검붉게 말라붙은 대신 방금 뽑아낸 것처럼 새빨간 색이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그녀가 휘청이자 거미 하나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아이야, 너도 마녀들이 우리 껍데기들에게 하던 말을 기억할 거야. 마법이 몸에 닿으면 강한 자손을 낳지 못하게 된다고.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억압받으며 살아왔단다. 마법을 행하지도, 만지지도 못하니 말이야.”

    거미의 손에는 날카로운 단도가 들려 있다.

    “이제는 그 굴레에서 널 벗어나게 하고자 오늘 밤의 의식을 치르는 거란다.”

    류드밀라는 도망치고 싶다. 이제 이곳은 활기차고 그녀를 환영해 주는 곳에서 끔찍하고 무서운 곳으로 바뀌었다.

    칼날이 횃불 아래서 섬뜩하게 번뜩인다. 거미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을 다시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손을 내밀거라, 아이야. 마법이 걸린 칼이 네 손을 베면 넌 해방될 거란다.”

    그녀는 온몸을 덜덜 떨면서 고개를 흔든다.

    “시, 싫어요! 전 마법에 닿기 싫어요. 그러면 아이를 낳아도…….”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는 강력한 마법 능력 따위, 갖지 못할 게다. 우리도 안단다.”

    그녀가 손을 내밀지 않자 거미는 칼 손잡이가 그녀 쪽으로 향하게 돌려 잡고는 들이민다.

    “이 칼로 네 손바닥을 긋거라. 칼에 걸려 있는 마법이 네 피에 닿으면서 널 옥죄는 굴레가 풀릴 것이야.”

    “싫어요.”

    류드밀라는 아직도 마녀들이 주입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껍데기 여인에게 마법이 닿으면 그들만이 가진 순결이 더럽혀진다는 생각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다. 강한 마법 능력을 지닌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다는 것에 거부감이 든다. 그녀가 황궁에서 갖는 유일한 존재 이유를 부정당하는 것만 같다.

    지시를 항상 따르기만 했던 류드밀라에게 이런 식으로 거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꾸만 목소리가 흐려지고 내밀어진 칼을 받으려고 손이 올라가려 한다.

    루슬란 님도 상관없다 하시지 않으셨나. 루슬란 님께서 그녀가 강한 아이를 낳지 못해도 상관없다시는데 그녀가 이런 일을 거부할 권리가 있을까.

    그러나 그녀는 돌아가야 했다. 만약 마법에 닿아 몸이 더럽혀지면 황궁 입구를 통과하지 못하고 마녀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류드밀라는 평생 살아오며 두 번째로 지시를 어기고 도망친다.

    스베틀라나가 인파 속에서 나타나 그녀를 잡으려 하지만 요리조리 여인들 사이를 피해 달린 류드밀라는 행사동을 벗어난다. 스베틀라나는 거미들에게 소리 높여 묻는다.

    “따라갈까요?”

    “아니, 내버려 두거라. 이곳을 나가는 입구가 없다는 걸 깨달으면 우리에게 돌아오겠지.”

    ***

    류드밀라의 꿈에 들어갔다 나온 루슬란은 넓은 방을 휘휘 둘러본다. 그녀가 없는 방은 그에게도 넓고 허전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녀를 데려오기가 망설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오해는 풀렸더라도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과연 그의 곁에 있는 게 그녀에게 최선인 걸까. 그의 곁을 떠나 다른 껍데기 여인들과 함께하는 것이 그녀에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러나 꿈에서 찾아갔을 때 울면서 제 품에 안기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마침내 결정을 내린다. 이기적인 자신을 그녀가 용서해 주길 바라며 그는 몸을 일으킨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그녀를 소환해 오고 싶지만 그러면 그녀가 놀랄 것 같아 직접 데려오기로 한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는 것으로 이동 마법을 실행한 그는 껍데기 여인들이 모여 사는 건물에 도착한다.

    다른 건물도 아니고 거미들이 사는 곳에 들어온 그는 경악한 표정인, 아직 의식이 끝나지 않아 여전히 붉은 옷차림인 거미들을 천천히 본다.

    “마, 마법사 님……?”

    젊은 축에 속하는 거미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몇십 년 전에 본 얼굴이지만 조금도 바뀌지 않아 바로 그를 알아본 것이다. 다른 거미들은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한다.

    “제일 최근에 이곳에 온, 류드밀라라는 아이는 어디에 있지?”

    루슬란이 부드럽게 묻자 거미들은 서로를 돌아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주고받는다. 제일 연장자인 거미가 천천히 일어서서 루슬란의 질문에 대답한다.

    “류드밀라의 행방은 저희도 모릅니다, 마법사 님. 그 아이는 첫날밤의 의식을 치르는 도중에 도망쳐 버려서, 저희도 돌아오길 기다리는 중입니다.”

    새처럼 겁이 많고 놀라기도 잘 놀라는 그의 껍데기 님이 도망쳤다니. 걱정을 서둘러 숨긴 루슬란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알기를 기대하고 물은 질문은 아니었으나, 찾는 데 조금의 도움도 못 되어 주는구나.”

    거대한 공간을 탐색하는 것은 그라도 일이 피곤해 실마리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거미들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한 그는 한숨을 쉬며 건물 전체에 대한 탐색 마법을 실현시킨다.

    건물 사이사이를 거미줄처럼 엮은 복도, 거대한 홀들, 자그마한 방들. 모든 곳을 다 찾아봤으나 류드밀라는 없다.

    불안한 마음이 뱃속에서 꿈틀거리지만 그는 숨을 고르고 다시 한번 마법을 실현시킨다.

    그래도 없다. 그녀는 정말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루슬란의 불안감이 전해지자 거미들의 표정이 더 어두워진다. 한 거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아이가 이곳에 없습니까, 마법사 님?”

    “없구나.”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이곳은 적당한 허락 없이는 타인이 들어올 수도, 안에 있는 사람이 나갈 수도 없게 만들어졌는걸요.”

    루슬란은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긴다.

    “나도 안다. 어쩌면…….”

    혹시 모르니까. 다른 곳도 찾아봐야 한다. 이 생각에 다다른 그는 손을 뻗어 공중에서 뭔가를 움켜쥐는 듯한 동작을 한다. 그렇게 거미들의 기억을 모두 지운 그는 다시 제 침실로 이동한다. 류드밀라가 도망쳤다는 사실도, 류드밀라가 왔었다는 것도 그들이 기억하지 못해야 한다. 누군가 마을을 도망쳤다는 소문이 퍼지면 결국 불안감만 커질 것이다.

    황궁 안을 살펴보고, 수도를 살펴보고, 제국을 살펴봐야 한다. 이 작업에는 힘이 많이 들 테니 쓰러지더라도 침대에 쓰러지겠다는 마음으로 루슬란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한다.

    껍데기 여인들의 마을에서 류드밀라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는 불안한 기색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다. 감정을 소모하는 일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낭비이다.

    그는 먼저 황궁을 살펴본다. 지하 5층 저장고부터 시작하여 그가 있는 꼭대기 층까지 모두 샅샅이 훑어본다. 마법진이 작동하며 푸른색으로 빛나는 침대에서 황궁의 쥐구멍부터 황좌까지 그의 머릿속을 거쳐 간다. 눈이 푸르게 변한 그는 바쁘게 걸어가는 궁인들의 발걸음 하나하나, 무료한 귀족들의 숨결 하나하나를 느끼고 생각하고 확인한다.

    모두 류드밀라가 아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수도를 찾아본다. 새하얀 건물들과 잿빛 반듯한 돌들이 깔린 거리를 모두 찾아본다. 지나가는 행인과 물건 파는 잡상인과 집에 안락하게 몸을 숨긴 모든 이들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이번에도 모두 류드밀라가 아니다.

    그는 마침내 제국으로 마법이 닿는 범위를 넓힌다. 수도 근처 지역을 살펴보고 더 넓히려는 순간, 머리가 핑 돌며 몸에서 힘이 빠진다. 침대에 풀썩 쓰러진 그는 누워서 한숨만 뱉는다.

    나비의 날갯짓 같은 걸음걸이와 히아신스처럼 달콤한 숨결을 내쉬던 그의 껍데기 님은 정말 사라진 것이다.

    마치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랫동안 이어진 기분 좋은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망연자실한 루슬란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에 빠진다.

    현실감이 닥치며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의 껍데기 님이 어디론가 사라져 다치지는 않았는지, 배를 곯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그가 보낸 껍데기 마을에도 없고, 황궁에도 없고, 수도에도 없다면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혹시나 행방의 묘연함이 자의가 아니라 타의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까지 들자 저절로 몸이 일으켜진다.

    혼자만의 힘으로 안 되었으니 불편하더라도 다른 이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그는 손가락을 튕겨 마녀를 소환한다. 곧바로 상급 마녀가 나타나 고개를 공손히 조아린다.

    “무슨 일입니까, 성하?”

    “내 씨를 품었던 아이가 사라졌다. 그 아이를 찾아 주렴.”

    “찾는 범위는 어디까지로 하길 원하십니까?”

    “제국 전역. 그래도 찾지 못하면 온 세상.”

    간단한 대답이지만 마녀는 놀라고 두려운 기색을 삼킨다. 성하의 마음에 차는 아이를 마침내 보냈다고 마녀들끼리 자축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 아이가 사라졌다니. 찾지 못하면 그녀들에게 무슨 화가 내릴지 걱정이 된다. 사라져 버린 하찮은 껍데기보다 자신의 안위를 더 걱정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마녀는 묻는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수색을 명하시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잃어버린 아이는 찾아야지. 당연한 이치 아닌가.”

    루슬란의 의아한 은빛 눈길이 내리꽂히자 그녀는 움찔하면서도 한 번 더 입을 연다.

    “하지만 황궁에는 다른 껍데기도 많은데 굳이 그 아이를 찾으려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마녀의 의문을 자신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지만 쉽게 답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상실감, 두려움, 류드밀라를 찾으려는 행동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진다.

    “넌 사랑을 해 본 적이 없구나. 오직 마음속에 스스로에 대한 사랑만이 가득할 뿐이야. 그러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겠지. 이해하려고 하지 말렴, 넌 그저 그 아이를 찾아 주기만 하면 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한 가지만 더. 너희들이 탐색 마법을 할 때 나도 그 자리에 있겠다.”

    마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든다. 마법사와 마녀의 마법은 정말 다르다. 그 원리는 똑같지만 불멸의 존재와 필멸의 존재가 다른 만큼의 차이가 있다. 아주 큰 차이가. 그가 마녀들의 마법 근처에 있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돕고 싶구나.”

    루슬란이 그 의아함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덧붙인다. 그게 그 나름의 부탁하는 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마녀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물론입니다, 성하. 그럼 마법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마법장은 황궁 옥상에 넓게 깔린 광장 비슷한 곳이다. 제국에서 유일하게 루슬란의 거처보다 높은 곳. 마법을 하다 실수해도 건물 벽이나 기둥에 피해가 가지 않게 탁 트인 공간을 선택한 것이다.

    띄엄띄엄 떨어져 마법을 행하던 다른 마녀들이 물러나고 루슬란과 함께 온 마녀는 동료 상급 마녀들을 부른다.

    13명의 마녀들이 둥글게 모여 마법진을 그리는 동안 그는 침착함을 가면처럼 쓰고 기다린다.

    마침내 거대한 마법진이 만들어지자 마녀들은 서로 손을 잡고 한 발짝 앞으로 갔다 뒤로 물러나기를 반복한다. 그들이 낮게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린다. 마침내 마법진이 발동되며 자줏빛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러기를 몇 시간을 했을까.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들이 조금 쉬었을 무렵 마침내 탐색 마법이 끝난다. 탈진한 몇몇이 주저앉아 버린다.

    루슬란이 소환했던 마녀가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그에게 다가온다.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온 세상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다면 누군가 아이를 데려가 숨긴 것이다. 너희 잘못이 아니야.”

    조용히 대꾸한 루슬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수고했다.”

    마녀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마법사는 홀연히 공기 중에서 사라진다.

    황제의 알현실에선 한창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평소처럼 회의에 참석한 귀족과 대신들, 황제를 지키기 위한 경호원들과 중급 마법사 몇몇이 넓은 홀을 채우고 서 있다. 돌연 그들 사이로 푸른빛이 일렁이더니 루슬란이 나타난다.

    열띤 토론이 오가던 알현실에 순간 정적이 내려앉는다. 정적은 위태롭게 균형을 잡는 탁자 끝 유리병처럼 기우뚱거리다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다.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며 루슬란에게로 두려움과 경멸이 담긴 시선들이 던져졌다.

    “저들을 물리시지요. 단둘이서 할 말이 있습니다.”

    루슬란이 말을 꺼내자 황제는 손을 휘저어 회의 참석자들을 내보낸다. 마지막 사람이 나가고 경비병들이 밖에서 문을 닫자 황제는 황좌에 기대앉아 왼쪽 다리를 꼰다.

    “무슨 일이지?”

    이그나티 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하나같이 오만했고 마법을 멸시했다. 온 나라 자체가 마법으로 유지되고 있는데도 그랬다. 마법을 경시하면서도 마법을 쓰지 못하는 껍데기들을 벌레 취급하는 모순을 만들어 낸 것도 그들이었다. 마법을 무시함에도 마법이 주는 안락함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하는 인간들.

    루슬란에게 대하는 태도에서 그 경멸과 오만함과 두려움이 내비친다.

    그는 버릇없이 찍 내뱉는 말에도 동요 없이 대꾸한다.

    “일전에 제게 보내졌던, 제 씨를 품은 여인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녀를 찾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존댓말을 쓰고 있음에도,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음에도 루슬란에게서는 고요한 위엄이 느껴진다. 그러나 황제의 취미는 그 위엄을 깨트리는 것으로, 아주 고약한 취미라 할 수 있다.

    “왜 고작 껍데기 하나에 집착하지? 황궁에 널린 게 껍데기일 텐데.”

    “제게 그 여인은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입니다.”

    자신이 위대한 마법사의 약점을 잡았다 생각한 황제는 비웃음을 마음껏 흘린다.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라. 언제부터 마법사가 그런 감정을 느낄 사치를 가졌다고 그러느냐?”

    황제가 팔걸이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실실 웃는다. 그 무례한 태도에 분노를 느끼기에 루슬란은 그런 일을 너무도 많이 겪어 왔다. 그래서 그는 화를 내는 대신 방법을 바꾼다.

    “결정을 내리시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전 그 여인을 사랑합니다. 폐하는 아십니까?”

    한 단 한 단 황좌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서며 루슬란이 나직이 말을 이어 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어디까지 감수하고 갈 수 있는지를?”

    황좌 바로 앞에 선 그가 황제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고 들어 올려 눈을 맞춘다. 황제의 비웃음이 대번에 사라지고 분노가 빈자리를 채운다. 표정만 보면 네가 어떻게 감히, 란 말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모양이지만 당겨진 머리가 아파서 이를 악무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만약 폐하가 허락을 못 하시겠다면, 나는 나와 이그나티를 묶는 굴레와 저주는 생각 않고 폐하를 살해하겠어요. 물론 저주에 따라 나도 타격을 입겠지요. 그럼에도 죽지는 않을 겁니다.”

    루슬란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려 잔인한 미소를 짓는다.

    “저울질을 해 보시겠습니까? 폐하의 같잖은 자존심과 폐하의 생명, 무엇이 더 중요하십니까?”

    ***

    류드밀라는 껍데기 마을 안을 정신없이 달린 것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막힌 곳에 다다랐고, 다른 껍데기 여인들이 돌아다니는 소리에 한 좁은 방으로 들어와 숨었었다.

    그리고 기억은 거기서 끊겨 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녀는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몸을 겨우 일으킨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오며 느린 깨달음이 전해져 온다.

    이곳은 거미줄의 방이 아니다. 화려한 부조가 새겨진 벽과 장식이 감고 있는 거대한 기둥들. 대리석 바닥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며 그녀는 겁에 질려 주위를 허겁지겁 둘러본다.

    새하얀 대리석과 황금색 장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사치스러운 성 내부가 보인다. 그러나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 그녀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섬뜩하게만 느껴진다. 공포가 서서히 그녀를 잠식해 온다.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심장이 막무가내로 파닥거리기 시작한다. 두려움이 섞인 질문들이 머릿속을 마구 맴돈다. 여긴 어딜까? 누가 그녀를 여기에 데려왔을까? 왜 여기로 데려온 것일까?

    혹시나 루슬란 님일까…?

    그러나 결이 고운 흑발이나 은빛 눈동자의 그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류드밀라는 고개를 잠시 내젓는다. 그래, 루슬란이라면 그녀를 이렇게 겁먹게 했을 리 없다. 그런 이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를 기대했다. 헛된 바람이 실망을 안겨 주었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그녀가 마법을 쓸 줄 아는 누군가에게 납치당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루슬란 님은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신데 누가 그의 보호 아래 놓인 그녀를 납치했을까.

    납치. 그 단어는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잠자리 동화와 같은 어감을 지니고선 무섭도록 피부에 와 닿는다.

    만약 누군가가 작정하고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왔다면, 그리고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녀는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생각에 미치자 겨우 몸을 일으킨 류드밀라는 눈에 들어온 아무 회랑이나 선택해 비척거리며 걷기 시작한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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