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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늘함

류드밀라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밖은 물론이고 황궁 후원조차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슬란은 그런 그녀를 다 이해한다는 듯이 충분히 시간을 준다.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조그만 입을 연다.

“제가 밖에 나가도 될까요? 마녀님들께서…….”

“그대는 이제 나의 보호를 받고 있어요. 마녀들이 뭐라 하든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됩니다.”

일어선 그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기울여 이마를 맞댄다. 숨결이 섞이며 달콤한 향이 피어오른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그러면 후원에 가 보고 싶어요, 루슬란 님.”

그녀는 여전히 부탁하는 게 어렵다는 듯 말한다.

“걸어가 볼까요, 아니면 바로 가 보고 싶으신가요?”

“걸어 볼래요.”

그의 손짓 한 번에 육중한 침실 문이 활짝 열린다. 조심조심 발을 떼는 그녀의 보조에 맞춰 그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길을 안내하는 손길은 섬세하고 혹여나 그녀가 비틀거릴까 봐 조심스럽다.

황실의 꼭대기 층에서 마법으로 움직이는 승강기를 타고 지상까지 내려간 그들은 뒷문으로 향한다.

“제가 예전에 보여 드렸던 언덕과는 많이 다를 거예요.”

문을 열기 전 그가 경고한다. 그녀는 마법으로 만든 풍경보다는 후원이 조금 초라할까, 생각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전 실망하지 않아요.”

“실망할 것을 걱정해서 한 소리는 아니어요.”

이렇게 말하며 그가 손을 뻗자 뒷문이 열리며 후원의 풍경이 드러난다.

“아.”

작은 탄성을 내지른 류드밀라는 홀린 듯이 한 걸음 내디뎌 밖으로 나간다.

밖은 눈이 내리고 있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은 이미 나뭇가지와 덤불 위에 내려앉아 온 데를 다 하얗게 덮어 놓았다.

고요해서 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후원으로 나아간 그녀는 맨발에 닿는 눈의 감촉이 신기해 자꾸만 아래를 내려다본다. 발자국이 남는 것도, 처음으로 느껴 보는 차가움도, 새빨갛게 변한 제 발도 다 신기하기만 하다.

“기껏 후원에 데려왔더니 발만 보고 계시는군요.”

루슬란이 농을 던지자 그제야 그녀는 주위를 찬찬히 둘러본다. 그 모든 아름다운 풍경을 아로새길 듯 꼼꼼히 본다. 보는 것만으로 부족해졌을 때, 그녀는 나폴나폴 걸음을 옮긴다.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는 나무껍질에 손을 올려 보기도 하고, 떨어지는 눈송이를 잡으려 빙글빙글 돌아 본다. 눈 사이를 헤치고 올라오는 푸른 싹을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덤불에 얼굴을 들이밀어 본다.

참새 떼가 포르르 날아가자 그녀는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면서 그를 보는데 기쁨으로 물든 얼굴에 그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은발과 하얀 가운은 금방이라도 풍경에 녹아들어 사라질 듯 가냘파 보이지만 붉게 상기된 두 뺨은 빛을 발한다. 그의 눈길이 또 다른 붉은색을 띠는 아래까지 내려가자 걱정으로 가늘어진다.

“저런, 발이 얼었군요. 이리 와 보세요.”

그제야 제 발의 상태를 알아챈 류드밀라에게 뒤늦은 통증이 밀려온다. 전에는 신나서 느끼지 못한 아픔이다. 처음 느껴 보는 생경한 고통에 끙끙거리면서 그에게로 향한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오자 번쩍 품에 안아 든 그는 후원 구석에 있는 작은 온천으로 향한다. 따뜻한 물이 가운데에서 퐁퐁 나오는 온천 가장자리에 그녀를 앉힌다.

그는 온천 안으로 들어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을 씻겨 준다. 당황해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그녀가 다리를 움츠리고 발을 치운다.

“루, 루슬란 님! 어찌 제 발을…….”

“쉿, 힘 푸셔요.”

그 음성에 담긴 단호함에 그녀는 천천히 움츠렸던 다리를 펴고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멍하니 본다. 그는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발을 꼼꼼히 씻기더니 고개를 숙인다.

그러고는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춘다.

류드밀라는 너무 놀라서 항의도 못 하고 떨기만 한다. 그러나 따뜻한 물의 감촉에 몸의 긴장은 풀리고 그녀를 올려다보는 그의 다정한 눈길에 마음의 긴장까지 풀리려 한다.

“발은 좀 녹으셨나요? 이러다 다시 몸이 안 좋아지면 어떡할지 걱정되는군요.”

“덕분에 녹았어요. 감사해요.”

은근슬쩍 발을 빼는 그녀가 귀여워 그는 그러도록 내버려 둔다. 몸을 일으킨 그가 온천 밖으로 나오자 옷을 적셨던 물들이 공중에 떠서 제자리를 찾아간다.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보다 그가 내민 것을 받아 든 그녀는 또다시 신기해서 입을 벌린다.

“신발을 어떻게 구하셨어요?”

“내가 괜히 마법사겠습니까.”

복슬복슬한 털신은 그녀의 발에 딱 맞는다. 감사히 신은 그녀가 정말 조심스럽게, 살포시 그의 손을 잡는다. 먼저 발을 빼낸 것에 대한 그녀 나름의 사과라는 것을 아는 그는 그녀를 마주 보고 미소 짓는다.

“겨울을 충분히 보셨나요?”

“무슨 뜻인가요…?”

대답 대신 그가 뭔가를 넘기듯 공중에 대고 손을 크게 가로젓자 계절이 순식간에 바뀐다. 나무와 덤불은 그대로지만 온천은 좀 더 크고 깊은 연못으로 바뀌고 눈은 순식간에 싱그러운 풀들로 바뀐다.

“봄을 그대에게 바칠게요.”

그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았던 나뭇가지에는 파릇파릇한 연초록색 잎들이 돋아나고 통통하게 살쪄 있던 참새들은 늘씬한 종달새로 바뀐다. 재잘재잘 지저귀는 소리에 류드밀라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봄에는 노란 개나리도, 분홍색 매화도, 하얀 벚꽃도, 보라색 제비꽃도 모두 피어난다. 루슬란이 손가락을 우아하게 움직이자 꽃들이 손끝에서 생겨나 앞다투어 화관을 만든다. 정작 화관을 이룬 것들은 봄에 피는 꽃이 아니라 여름에 피는 수국과 작약 꽃이지만 류드밀라는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화관을 그녀의 머리에 씌워 준 그는 만족스럽게 웃는다.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는 머리카락을 커튼 삼아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다.

“이건 너무 과한 것 같아요…….”

“잘 어울리시는데요 뭘. 그래도 싫으면 버리면 되죠.”

그가 화관으로 다시 손을 뻗자 류드밀라가 서둘러 물러난다.

“아, 아니에요. 버리기엔 너무 예뻐서요.”

“그대가 더 예쁘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그의 의중을 몰라 그녀는 입을 벌리고 당황하여 굳어 버린다. 이런 말엔 어떻게 답해야 할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나. 단 한 번도 외모에 관한 칭찬을 들어 본 적이 없던 그녀에게 그의 말은 너무나도 새롭고 달콤했다.

“이런. 칭찬에 익숙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루슬란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며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준다.

“곧 익숙해질 거예요. 제가 그리되도록 충분히 해 드릴 테니까요.”

“가, 감사해요…….”

작게 중얼거린 류드밀라는 얼굴이 빨개져서 뒷걸음질 친다.

“제 손길이 싫으신 건가요?”

처음 보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오른다. 상처 받은 기색이란 것을, 그녀는 깨닫지 못한 채 다만 낯선 표정이 무서워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인다.

“죄송해요.”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네요. 마지막으로 묻죠. 제 손길이 싫으신가요?”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린 그녀가 서둘러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머리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아니, 아닙니다. 아니어요.”

“그런데 어쩌나. 내 기분은 이미 상해 버렸는걸요.”

“루슬란 님…….”

그녀가 울먹이지만, 그는 짓궂은 얼굴로 성큼 돌아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다.

“잠시만 혼자 있어 봐요. 혼자서 잘 고민해 봐요. 내 기분을 어떻게 풀어 줄지.”

그리고 그는 홀연히 사라진다. 연기가 공기 중에 퍼지듯이 그녀의 시야에서 흐려져 버린다. 놀란 류드밀라는 딸꾹질을 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의 나긋나긋한 말소리가 없자 순식간에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구슬픈 종달새의 노래만 들려온다. 그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낯설어 그녀는 제 몸을 껴안는다.

기분을 어떻게 풀어 줄지 고민해 보라 하셨지. 딸꾹질로 몸이 거세게 흔들리는 가운데 눈물을 잔디에 투둑 떨구며 그녀는 꽃이 만발한 후원 가운데로 나아간다.

그러고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꽃들을 따서 그에게 선물할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한다. 루슬란이 모습만 숨기고선 그런 그녀를 귀여워하며 지켜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꽃을 모으며 후원 깊숙이 들어간 그녀의 눈에 들장미 덩굴이 눈에 띈다. 무심코 그녀가 뻗은 손이 가시에 닿을 때 그의 손이 공중에서 나타나 그녀의 손 안쪽을 감싸고 깍지를 낀다.

장미를 꺾으려던 류드밀라는 졸지에 그의 손을 꼭 쥔 모양새가 되어 버린다. 반대 손으로 한 줌에 잡히는 그녀의 허리를 다정히 감싼 루슬란은 그녀의 볼에 입맞춤을 한다.

“제가 곁을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시나요.”

“아…….”

너무 놀란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손을 잡느라 그의 손이 대신 가시에 찔렸음을 깨닫고 눈물을 흩뿌린다.

“흑, 죄송해요, 제가 부주의해서 루슬란 님이…….”

“네?”

상처가 난 것을 몰랐다는 듯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가시에 찔려 피가 흐르는 손등을 본 그가 살짝 웃는다.

“저 때문에 우시는 건가요, 나의 껍데기 님?”

루슬란 님은 우는 걸 싫어한다고 하셨지. 잡히지 않은, 꽃다발을 든 손으로 열심히 눈물을 닦는 만큼 또 열심히 눈물을 흘린다.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그는 심장이 제멋대로 날뛴다.

“그대가 날 위해 울어 주신다면 이런 가시에 천 개라도 찔릴 수 있어요.”

루슬란이 부드럽게 이른다. 그래도 그녀가 울음을 그치지 못하자 그가 손등을 그녀의 눈앞으로 가져가 보여 준다.

“그리고, 보세요.”

그의 상처에서 나온 피는 옅은 하늘빛이 돌 뿐 투명하다. 게다가 흐르지 않고 공중으로 퐁퐁 솟아올라 사라져 버린다. 상처도 빠르게 아물고 있다. 놀라서 우는 것도 잊어버린 그녀는 그를 올려다본다.

“루슬란 님은…… 인간이 아니신가요?”

루슬란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깍지 낀 손을 내린다.

“……인간에 가까운 존재라고 해 주세요. 적어도 지금은 그렇답니다.”

“그렇군요.”

류드밀라는 최대한 놀라고 두려운 티를 내지 않으려 한다. 아직 감정을 숨기는 일에는 능숙하지 못하지만 일단 노력은 해 본다.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정확히 스스로도 알지 못하지만, 그를 두려워하면 그가 싫어할 것 같아서이다.

유순하게 대꾸하는 그녀를 본 그는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도 저렇게 고운 목소리로 얌전히 답해 줄까. 그런 그녀를 보고 싶다. 그녀가 진실을 듣고서도 그의 곁에 남아 줄 거라고 믿고 싶다.

다 부질없는 꿈. 그는 슬픈 상상에서 빠져나와 다시 류드밀라에게 집중한다.

“이게 뭔가요?”

처음 봤다는 듯 그녀가 든 꽃다발을 보며 그가 묻는다. 얼굴이 한층 밝아진 그녀는 두 손으로 꽃다발을 쥐고 공손히 그에게 내민다.

“선물이에요.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받아 주셔요.”

그녀가 수줍게 말하며 털신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꽃다발을 받아 든 그는 고개를 숙여 향을 맡고 그녀는 초조하게 그를 바라본다.

뜸을 들일 대로 들인 그가 마침내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본다.

“고마워요. 소중히 간직할게요.”

눈물이 다 마른 류드밀라는 조심조심 마주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미소를 본 그가 별안간 장난꾸러기같이 눈을 새초롬히 뜬다.

“그런데, 여인이 상대에게 꽃을 주는 것의 의미는 아시나요?”

류드밀라는 난처한 상황에 빠진다. 그 뜻을 안다고 하면 그녀가 남몰래 숨겨 온 감정을 고백하는 꼴이 되어 버리고, 모른다고 하면 어차피 그가 알려 줄 텐데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결국 그녀는 인정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답지 않은 용감한 결정이다.

“네, 알아요. 전 루슬란 님을 좋아해요.”

그녀가 모른다고 발뺌할 줄 알았던 루슬란으로서는 그 말이 뜻밖이다. 뜻밖이어서 더욱더 사랑스럽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더 이상 뭐라 말도 못 하고 땅만 내려다보는 그녀를 그가 천천히 껴안는다.

가슴팍에 묻은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미소를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안 그는 고개를 새처럼 갸웃한다.

“전 그대에게 좋아하는 것 말고 다른 말을 해 주고 싶은데.”

“무슨 말을요?”

“사랑해요.”

감싸 안은 몸이 잘게 떨려 온다.

“사랑해요, 나의 껍데기 님.”

류드밀라는 행복감이 몸을 따뜻하게 덥혀 오기를 기다린다. 손발 끝까지 몽글몽글한 기분이 번지며 가슴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한번 용기를 내어 본 김에 조금만, 조금만 더 나가 보기로 한다. 지금이 적절한 때인 것 같아서이다.

“루슬란 님?”

“왜 그러시나요?”

그녀를 다정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다시 용기를 얻은 그녀가 입을 연다.

“루슬란 님께서는 제가 왜 좋으신가요?”

정확히는 왜 저를 다른 여인들처럼 해하지 않고 데리고 있어 주냐는 뜻이다. 그녀는 질문을 해 놓고 그 대답을 듣기가 무서워 발만 내려다본다. 그런 그녀의 턱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들어 올린 루슬란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러게요. 제가 왜 그대를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루, 루슬란 님도 모르시나요?”

“아뇨, 전 알죠. 다만 그대가 기억하지 못할 뿐.”

장난기 어린 미소를 거둔 그가 약간은 착잡하게 말하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별안간 불안해진 류드밀라는 두려움도 잊고 그를 빤히 바라본다.

“제가 잊은 게 뭔지 말해 주실 수 있나요?”

“음?”

그는 마치 그녀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행동하다가 갑자기 하늘을 가리킨다.

“저기, 저기 봐요.”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본 그녀의 눈에 커다랗고 갈색인 짐승이 들어온다. 날개가 달린 그 짐승은 괴성을 지르며 공중에서 몸을 뒤틀더니 곧장 후원 구석으로 떨어진다.

“저게 뭐죠?”

“가서 확인해 볼까요?”

자연스레 내밀어진 손을 주저하다가 잡은 류드밀라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급한 마음에 걸음이 빨라진다. 점점 루슬란보다도 그녀가 앞장서게 된다. 걱정과 초조함으로 뒤덮인 작은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루슬란은 옛 기억을 떠올리곤 혼자 웃음 짓는다.

전에도 꼭 저런 얼굴을 하셨지. 뒤집어진 자라를 봤을 때나, 덫에 걸린 수달을 봤을 때나, 어망에 갇힌 물고기들을 발견했을 때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자신의 껍데기 님이 한없이 사랑스러워진 그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덤불을 헤치고 후원 구석까지 가 보니 풀들이 짓눌린 자국이 보인다.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다가 우뚝 멈춰 서고 만다.

하늘에서 난데없이 나타나 뚝 떨어진 짐승은 다름 아닌 새끼 신록이다. 새하얀 깃털로 덮인 날개가 달린 갈색 사슴 꼴의 그것은 류드밀라를 보더니 눈을 희번덕거릴 정도로 겁을 집어먹고 일어서려고 애쓴다.

놀라고 두렵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이다. 신록을 처음 본 그녀는 그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놀라지만 동시에 상처를 보고 공포가 마음속에 피어오른다.

“가엽게도 다리가 부러진 모양이군요.”

루슬란이 차분히 말한다.

새끼 신록의 상처는 추락으로 깔려 부러진 다리뿐이 아니다. 날개 언저리에 푸른색 빛이 감도는 상처가 시뻘겋게 드러나 있다. 류드밀라는 그 상처를 보더니 흑, 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잘게 떨리는 두 손을 꼭 모아 쥔 그녀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를 돌아본다.

“마법으로 치료해 주실 수 있나요?”

“신록에게는 마법을 쓰면 안 된답니다. 대신 데리고 들어가서 마녀들에게 맡기도록 하죠.”

“마녀님들께서 이 아이를 죽이지는 않겠죠?”

신록의 고기가 진미로 여겨지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루슬란은 귀여운 걱정에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토닥이며 달래 준다.

“걱정 말아요. 제가 잘 말해 둘 터이니.”

류드밀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신록에게 다가가려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나 어린 신록은 겁을 집어먹고 소리 높여 울면서 뒷걸음질 친다. 그때 그녀의 팔을 단호한 손길이 붙든다.

“제가 할게요.”

그녀가 옆으로 비켜서자 그는 천천히 신록에게 다가간다. 그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힘 있고 부드러운, 리듬이 있는 말이다. 신기하게도 그 말에 새끼 신록은 얌전해진다. 그가 다가가서 안아도 더 이상 도망치려 하지 않는 짐승을 놀란 눈길로 그녀는 쳐다본다.

“어떻게, 어떻게 하신 건가요?”

“영물들은 내가 누군지 알아본답니다.”

또 그 씁쓸한 목소리. 류드밀라는 가슴 한편이 욱신거려 오는 것을 무시하고 재차 묻는다.

“루슬란 님이 누군지라뇨? 마법사라는 걸 안다는 건가요?”

루슬란이 인간이 아닌, 인간보다 더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영물들은 알아본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는 그 사실을 그녀에게 알릴 생각이 조금도 없다.

“쉿.”

한 팔로 새끼 신록을 받쳐 든 그가 다른 손의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댄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제 입을 헙, 하고 막고 그는 살짝 웃음 짓는다.

“돌아가 볼까요?”

“네, 좋아요.”

그가 신록을 들지 않은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싼다. 주문을 외우는 것도 듣지 못했는데 어느새 그들은 그의 침실 앞 복도에 도착해 있다. 류드밀라는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신록을 흘깃 보고는 조심스레 말을 꺼내 본다.

“저, 루슬란 님.”

“왜 그러시나요?”

“신록을 침실에 두면 안 될까요? 마녀님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누가 해코지를 하지 않을지 걱정되어요. 혹시 불편하시면 제가 깨끗하게 청소도 할게요. 부탁드려요.”

루슬란은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맑은 웃음을 터트린다. 그녀는 겁을 집어먹고 움찔 떨면서 두 팔로 몸을 감싼다.

“왜, 왜 그러세요?”

“그대가 지금까지 내게 한 말 중 가장 긴 말이었어요. 그런 데다 심지어 나에 관한 말도 아니군요.”

소환한 마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신록을 넘긴 그는 그녀에게 다가와 이마를 마주 대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내가 이 영물을 질투하게 만들지는 마시어요.”

은빛 눈을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동그래진다.

“……흑!! 힉!! 흐끅!”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하는 류드밀라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또 입꼬리를 휜다.

“이리 쉽게 놀라시니 내가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습니다.”

“힉, 아니어요…….”

그녀는 깍지 낀 손으로 입을 막고 딸꾹질을 멈춰 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가 떨리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고 입술에 키스하기 전까지 딸꾹질은 계속된다.

“봐요, 이제 멈췄죠?”

입술을 뗀 그가 만족스러워하며 묻는다.

“그, 그러네요.”

그녀가 더듬거리며 얼굴을 붉힌다.

그들이 그러고 있을 동안 마녀들은 재빠르게 움직여 침실 안에 신록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약초를 짓이긴 연고를 준비해 온다. 그들이 필요한 처치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루슬란의 옷깃을 그녀가 조금 잡아당긴다.

“네?”

“감사해요. 항상 도와주셔서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그에게 마음을 연 건지 평소와 같은 인사에도 말이 길어진 그녀가 사랑스럽다. 그는 한 팔을 그녀의 어깨에 두른다. 마음 같아서는 허리에 두르고 입을 맞추고 싶지만 그러면 그녀가 놀랄 것 같아 관둔다.

“말을 어쩜 이리도 어여쁘게 할까요.”

수줍어하면서 그녀는 자그마한 미소를 그에게 돌려준다.

“정말 내가 못 참게 만드시는군요.”

손짓 한 번으로 마녀들을 물린 그가 그녀를 침대로 이끈다. 침대에 살짝 걸터앉아 그녀의 가운을 부드럽게 젖힌다.

“루, 루슬란 님…… 신록이 보면 어쩌려고요…….”

“보세요, 잠들었잖아요.”

류드밀라는 옆을 돌아보고 마녀들이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그의 말대로 곤히 잠든 영물을 발견한다. 그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새끼 신록의 감은 눈 위에 이불이 덮인다.

“이제 되셨나요?”

“네…….”

뽀얀 어깨가 그의 손길 아래 드러난다. 벗겨 낸 가운을 바닥에 떨군 그는 그녀보고 올라오라는 듯 침대를 토닥인다. 얌전히 무릎을 꿇고 침대에 올라앉은 류드밀라는 고개를 좀처럼 들지 못한다.

그도 로브와 셔츠를 벗었기 때문이리라. 배 위에 선명히 자리 잡은 근육들이 부담스러워 그녀가 눈길을 내리고 있는데 그가 턱을 쥐고 들어 올린다.

“오늘도 저와 마주 보고 하는 건 어떠신가요?”

“네?”

“내 위에 앉아 보세요.”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주춤거리며 가서 쿠션에 느슨하게 기댄 그의 몸 위에 제 몸을 포갠다.

“아니, 그렇게 말고요. 다리 사이에 제 몸을 두고…… 옳지, 잘하셨어요.”

그가 뺨에 입을 맞춰 주자 얼굴이 달아오른 그녀는 그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다. 이렇게 내려다본 적은 처음이라 무섭기만 한데 또 그의 다정한 눈길과 마주하니 조금 안심이 된다.

그러나 아래에서 느껴지는 살의 감촉이 너무나 부끄러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자 전에 그리 보기 두려워했던 근육들이 보이고 그녀는 놀라서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그는 혀를 차면서 다시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고개를 들게 한다. 울지 않으면 고개를 떨구고, 고개를 떨구면 눈까지 감는 여린 심성이 못내 안타까우면서도 귀엽다.

“나만 봐요. 다른 곳 말고 내 얼굴을 보면 무서울 것이 없잖아요, 그쵸?”

느릿하고 부드럽게 달래는 음성에 조심스레 눈을 뜬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그의 얼굴을 보자. 그가 그리 명했으니까. 그녀가 겨우 마음을 다잡는데 그가 손을 그녀의 아래로 가져다 댄다.

저번처럼 중지 하나가 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벌써 세 번째지만 여전히 생경한 느낌에 류드밀라는 몸을 꼼지락거린다. 그의 손가락은 차갑다. 차갑고 단단해서 따뜻하고 말캉한 안과는 상극이다.

그가 능숙하게 안을 파고들자 모기 소리만 한 신음이 그녀 입에서 새어 나온다. 하지만 그는 저번처럼 그녀에게 쾌락을 주는 대신 무심하게 안을 휘젓다가 만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것이다.

“스스로 움직여 봐요, 나의 껍데기 님.”

류드밀라는 당황해서 얼어붙어 버린다.

“저…… 어, 어떻게요?”

“제가 전에 움직였듯이요. 허리를 앞뒤로 아니면 위아래로 움직이면 되어요.”

“못 하겠어요…….”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려서 그녀가 웅얼거린다.

“넣지도 않고 못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나요.”

나지막이 꾸중을 한 그가 이미 젖어 있는 그녀의 아래에 제 것을 조금 밀어 넣는다. 아직 다 넣지도 않았는데 벌써 버거운 건지 그녀는 작게 헐떡이며 그에게 매달린다. 어깨에 내뱉어지는 가쁜 숨이 달콤하다.

“힘드시면 그만할까요?”

이제는 말도 못 하고 류드밀라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피식 웃은 그가 남은 것을 한 번에 밀어 넣자 그녀가 흑,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재빨리 입을 다문다.

“괜찮아요, 맘껏 우세요. 나 때문에 우는 것은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제야 조금씩 울음이 그녀의 입에서 빠져나온다. 그러면서 몸의 긴장이 풀려 그의 것을 담고 있기가 수월해진다. 변화를 눈치챈 루슬란이 귓가에다 속삭인다.

“이제 움직여 봐요, 나의 껍데기 님.”

류드밀라는 어떻게 움직이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머리로는 분명 움직여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몸은 제 말을 듣지 않는다. 그의 것은 몸의 긴장이 풀렸어도 여전히 그 크기가 버겁다.

앞뒤로, 그래, 앞뒤로 조금씩만 움직여 보자. 위아래는 너무 힘들 것 같으니. 이렇게 다짐하면서 그녀는 허리를 조금씩 움찔거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자극을 받은 아래에서 애액이 나와 움직임을 수월하게 만들어 준다.

움직임이 쉬워지자 그녀는 조금 더 용감하게 허리를 앞으로 민다. 그러다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데 그가 그녀의 손을 쥐고 제 배를 짚게 한다. 다정하게 웃어 주는 그 얼굴이 아직은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 듯싶어 그녀는 허리를 다시 뒤로 뺀다. 그렇게 밀고 빼기를 반복하자 아래에서 찌르르하며 흥분감이 올라온다.

손 아래서 느껴지는 배의 단단한 감촉도 그녀를 흥분시키는 데에 한몫한다. 그가 몸을 살짝 기울여 그녀의 어깨를 잘근 깨물자 물결치듯이 배에서 근육이 움직인다. 그녀는 손을 떼고 싶었으나 그가 깨무는 바람에 몸이 살짝 앞으로 기울여져 짚지 않으면 품에 안기는 꼴이 될 것 같다.

루슬란은 자신의 배를 짚은 그 작은 손의 꼬물거리는 감촉을 즐기면서 그녀의 살 향을 한껏 들이쉰다. 그와 함께 오래 지내 그의 겨울 냄새가 그녀에게 배었다. 하지만 안쪽 깊숙이 그녀가 간직해 온 히아신스 향이 듬뿍 난다. 그녀의 눈동자와도 꼭 색이 같은 보라색 히아신스를 떠올리며 그가 마침내 입을 떼자 타액이 은사처럼 늘어져 반짝인다.

감질나게 조금씩 움직이는 그녀를 보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 안에서 허리를 한 번 튕긴다. 예민한 그녀의 몸은 견디지 못하고 그 반동에 따라 들썩이더니 그의 품 안으로 엎어지고 만다. 조그마한 울음을 터트린 그녀는 곤란한 얼굴로 그를 보며 순한 눈을 깜박인다.

“그러지 마시어요…….”

“그럼 내가 안 할 수 있게 그대께서 좀 더 잘 움직여 보아요.”

류드밀라는 겨우 몸을 추슬러 다시 그의 배를 짚고 허리를 편다. 그러더니 아까보다는 조금 더 대담하게, 큰 폭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의 것을 제법 오래 담고 있어 이제는 그 감각에 익숙해진 아래가 더 이상은 아프지 않다. 대신 움직일 때마다 안을 찌르는 것이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좋다.

자연스레 숨이 가빠 오고 몸은 열로 들떠 뽀얀 살결에 분홍빛이 돈다. 시선은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그의 어깨 너머, 그가 기댄 침대의 머리맡 문양을 쳐다본다. 그때 그의 손길이 뺨을 감싸더니 부드럽게 그녀의 시선을 그에게로 향하게 한다.

“날 보면서 해 줘요, 나의 껍데기 님.”

당황하고 부끄러워 그녀는 자꾸 고개를 숙이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래에선 그와 그녀가 정을 통하는 부분이 보이고 더 당황해서 다시 고개를 들고 만다. 그런 그녀의 혼란스러움을 느낀 그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를 쓸어내린다.

“절 보기가 부끄러우시면 눈을 감아도 좋아요.”

그런데 그녀가 조심스레 그 손길을 치운다. 그러곤 못내 미안한지 눈썹을 기울이며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루슬란 님을 보면서 하고 싶어요.”

“그럼 그러세요.”

그가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린다. 조금씩, 조금씩 용기를 내어 준 그녀가 고맙고 사랑스럽다.

그녀는 몸을 움직이는 템포를 빨리하고 마침내 절정에 다다랐을 때는 쓰러지듯 그의 품에 안긴다.

“전부터 궁금했어요.”

노곤해져 그의 품에 기대 누운 그녀가 긴장이 풀려 쉽게 말을 꺼낸다.

“뭐가 궁금하셨나요?”

“왜 루슬란 님께서는 제게 존댓말을 쓰시고, 또 왜 이름 대신 껍데기 님이라 불러 주시는지요.”

“내가 그대를 귀히 여겨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존댓말을 쓰는 것이지요.”

“그럼 이름은 왜 불러 주시지 않고…….”

그녀답지 않은 어리광을 부리는 양이 사랑스러워 루슬란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이마에 키스한다.

“내가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내게 귀속되어 버려요. 난 아직 그대가 자유로웠으면 좋겠답니다.”

“하지만, 전 루슬란 님께 귀속되어도 좋아요. 그 말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는 마음이 따뜻해져 아무 말도 못 한다. 가벼운 충격이 몸을 통과한다. 그녀가 그를 이렇게나 잘 따르는구나. 이렇게나 그를 사랑하는구나. 그 사랑을 배로 되돌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그가 가벼이 웃음을 터트리며 머리카락을 장난스레 헝클어트린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을 묶어 두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날아다니도록 내버려 둬야 하죠.”

“루슬란 님은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건가요?”

“그럼요.”

그 말을 듣고는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는 마침내 잠에 빠져든다.

“다녀올게요, 나의 껍데기 님.”

잠결에 이런 속삭임이 들려온 것도 같았는데 류드밀라는 다음 날 아침까지 곤히 잔다.

일어나서 제일 먼저 옆자리를 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루슬란의 부재를 알고 있다. 그가 있었다면 그녀가 깨는 순간 잘 주무셨냐고 물어 왔을 테니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적적해서 그녀는 무기력해진다. 침대에서 벗어나기가 싫어 한참을 그녀답지 않은 늦장을 부려 보고 뒹굴거린다.

그러다 아침 식사가 담긴 쟁반이 침실 구석 탁자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킨다. 후원을 갔다 오고 나니 입맛이 돌아온 듯싶다.

쟁반에는 수프와 빵 대신 짭짤한 닭고기와 양파로 채워진 파이인 쿠르닉과 그녀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치즈와 크림이 들어간 동그란 파이가 있다. 물론, 레몬 타르트도. 샐러드와 함께 파이를 야금야금 먹던 그녀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길을 느끼고는 옆을 돌아본다.

새끼 신록이 잠에서 깨어나 그녀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도 좀 줘.”

갑자기 들려온 어린 소년의 목소리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는다. 옛날부터 그녀는 동물과 영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비록 영물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지만 전에는 마녀들이 부리는 영물이나 황궁에 사는 잡스러운 동물들과도 잠깐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있었다.

동물과 처음 대화를 해 봤을 때는 이것도 혹시 마법인가 싶어 잔뜩 들뜬 채로 마녀에게 말해 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마법이 아닌 주술 같은 것으로, 어렸을 때 누군가 그녀에게 건 주문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란 사실이었다.

그 말은 어린 류드밀라의 호기심을 더욱더 키워 놨지만 결국 어느 날 그녀는 제 몸에 걸린 주술에 대해 알아보기를 포기했다. 그저 그 주술이 마법이 아니어서, 그녀가 아직 마법사의 태를 받을 그릇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샐러드에서 소스가 덜 묻은 양상추를 빼내 신록에게 내민다. 오물거리며 잘도 받아먹은 녀석은 불만스럽게 고개를 푸르르 내젓는다.

“나도 드레싱 소스쯤은 먹을 수 있는데.”

“그러니?”

이번에는 소스가 조금 묻은 당근을 내밀자 신록의 눈이 약간 커진다.

“너, 내 말을 알아듣는구나?”

“응.”

아예 샐러드 접시를 통째로 신록 앞에 내려놓은 류드밀라가 의자에서 내려와 쪼그리고 앉는다.

“입에 잘 맞니?”

“음, 딱 좋아. 너 아주 귀한 대접을 받는 모양이구나. 채소가 겨울인데도 아주 싱싱해. 온실에서 자란 모양이야.”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고개를 푹 숙여 발끝만 내려다본다.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 귀한 대접을 받으시는 거야. 나는 그냥 껍데기일 뿐이야.”

신록이 불만스럽게 코를 찡그린다.

“아, 그 나쁜 놈?”

“응? 루슬란 님 말하는 거니?”

“그래, 네 옆에 있던 긴 머리 남자. 그 남자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신록은 코끝으로 붕대로 감싼 날개를 가리킨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다.

“아냐. 그분께서 그럴 리가 없어.”

“이봐 너, 아니, 너 이름이 뭐지?”

“류드밀라. 성은 없어.”

약간 창피해하며 그녀가 뒷말을 덧붙인다.

“참고로 난 티크혼. 이봐 류드밀라, 네가 루슬란 님이라 부르는 그 남자, 아주 나쁜 사람이야.”

“아니라니깐. 루슬란 님은 함부로 영물을 다치게 하는 분이 아니야.”

그녀는 단호하게 부정하지만 자꾸만 어떤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그가 그녀에게 보여 줬던 마법과 티크혼의 날개 상처에서 일렁이던 빛. 둘 다 푸른빛이었다. 점점 더 무서운 상상이 그녀 머릿속에 펼쳐질 동안 티크혼, 신록이 중얼거린다.

분명 그녀는 신록이 다칠 때 그와 함께 있었다. 그를 믿어야 했지만 도리어 무서운 상상이 펼쳐지는 이유는, 아마 그녀도 그가 손짓도 말도 없이 마법을 행할 수 있다는 걸 알아서가 아닐까.

“강은 원래 제 품에 살지 않는 이들에게 잔인한 법이지.”

“뭐?”

“너 설마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르는 거야? 그럼 알 거 없어. 모르는 게 좋아. 아무튼 이것만 알아 둬. 그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날 다치게 했어. 난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 그런 그가 너에게는 다르게 행동한다? 그리고 그걸 넌 감사히 받아들인다? 그건 그 때문에 희생된 나 같은 이들에게 모욕인 거야.”

류드밀라는 그가 끔찍한 짓을 하고 죽였다는 다른 껍데기 여인들을 생각한다. 티크혼의 말이 맞다. 지금까지 그녀는 제 안위만을 생각해 왔다. 그녀가 살아남는 것. 그녀가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 그것들만이 그녀의 최우선 순위였다.

그러나 신록이 다치는 걸 보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그가 좋아도, 그에게 마음속 깊이 연정을 품고 있다고 해도 이제는 그가 두려운 마음이 더 커진다.

“너도 그 소문을 아니, 티크혼?”

“뭔 소문?”

그녀는 주저주저하다가 겨우 입을 연다.

“루슬란 님께서 전에 자길 찾아온 껍데기들에게 끔찍한 짓을 하고 죽인다는 소문 말이야.”

티크혼은 따분한 눈초리로 고개를 돌리고 제 앞발에 기댄다.

“난 황궁에 안 살아서 잘 모르겠네. 그런데 그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해. 그건 그렇고.”

“응?”

“날 대체 언제 내보내 줄 셈이야? 이런 방에 갇혀서 무슨 애완동물처럼 지내는 건 딱 질색이라고.”

걱정스러워하며 그녀가 신록의 날개와 다리를 흘긋 본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잖아. 지금 나갔다간 사냥꾼들에게 변을 당할 거야.”

“사냥꾼들이 요새 어디 있다고. 황실에서 법적으로 영물 사냥을 금지시켰어. 황실 사유지를 제외하곤.”

“그런데 너는 황실 근처로 왜 날아온 거야?”

어린 신록의 맑은 눈이 순간 흐려진다.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티크혼은 투덜투덜하더니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엄마를 찾으러 왔어. 너도 알다시피 황실에서는 영물을 기르잖아. 사육, 이 더 맞는 표현이지만. 내가 더 어렸을 때 난 몸집이 하도 작아서 우리 틈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어. 그래서 엄마가 날 탈출시킨 거야. 그래서 이번에는 나도 엄마를 탈출시키려고 찾아왔어.”

“하지만 지금 넌 다쳤잖아. 상처가 나을 때까지는 여기서 지내면서…….”

그녀가 조심스럽게 제안하자 티크혼이 작은 뿔이 돋아난 머리를 흔들면서 성을 낸다.

“너는 황실에서 영물을 기르는 이유를 몰라? 우리 고기를 인간들이 먹잖아. 더 기다리다간 엄마가 잡아먹힐 수도 있는데, 아니 어쩌면 이미 잡아먹혔을 수도 있는데. 난 최대한 빨리 엄마를 탈출시켜야 한다고.”

“내가, 내가 루슬란 님께 말해 볼게. 그분이라면 명령을 내려서 신록들을 풀어 주실 수 있을 거야.”

“그 남자가 왜 우릴 도와주는데? 오히려 나한테 공격 마법을 날려서 상처 입힌 게 누군데. 날 방해하면 방해했지 절대 도와주진 않을 인물이라고.”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방법을 생각해 낸다.

“루슬란 님께 정말로 널 다치게 했느냐고 여쭤 볼게. 그분도 죄책감이 드시면 널 도와주지 않을까?”

티크혼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본다.

“넌 정말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느끼지 못하는 기운을 느꼈는지 신록이 몸을 움츠린다.

“헙, 그 남자가 온다. 난 자는 척할 거야.”

류드밀라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다.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그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때 뒤에 서늘한 기운이 일렁인다. 류드밀라가 그 기운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돌아온 루슬란이 그녀를 뒤에서 다정하게 껴안는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다정함이 감사했겠지만 지금은 무섭기만 하다. 그녀의 허리에 두른 저 손이, 신록을 죽일 뻔한 손이다. 그녀는 몸을 가볍게 떤다.

“추우신가요?”

류드밀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로브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준다. 바깥의 향기가 배어 있다. 피 냄새도. 예민한 그녀의 감각은 그 비릿한 내음을 놓치지 않는다. 더욱더 겁에 질린 그녀는 그를 돌아보지 못하고 시선을 들지 못한다.

그러다 잠든 척하는 티그혼이 보이며 날개에 감은 피로 물든 붕대가 눈에 들어온다. 속이 울렁거리지만, 그녀는 마음을 다잡는다. 루슬란에게 말해야 한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다.

몸을 돌린 그녀가 꼼지락거리는 제 손만 내려다보며 말문을 연다.

“저, 루슬란 님…….”

“왜 그러시나요?”

사실을 물어보는 순간 맑은 은빛 눈동자에 드리울 그림자가 두려워 그녀는 차마 올려다보지 못한 채 급하게 말을 뱉어 낸다.

“혹시 루슬란 님께서 저 신록을 다치게 하셨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날개에 난 상처가 마법에 의한 것이었어요. 푸른 기가 도는 마법이요.”

그가 전에 그녀에게 보여 줬던 마법과 똑같은 색깔. 그러나 말해 놓고 보니 이유가 너무나 유치해서 그녀는 그가 저를 비웃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에도 그를 흘깃 올려다본다.

다행히 루슬란은 비웃지도,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는다. 그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녀를 따스하게 내려다본다.

“세상에 물 속성 마법을 쓰는 사람은 많답니다.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나요?”

더 자신감을 잃은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마지막까지 남겨 두려 했던 이유를 꺼내 든다.

“신록이 그랬어요. 후원을 가로질러 날아가는데 어느 여인과 함께 서 있던 긴 머리 남자의 몸에서 공격 마법이 나와 저를 다치게 했다고요.”

“그대도 신록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나요?”

살짝 놀랐다는 듯 그가 묻는다. 그 목소리에는 죄책감도, 당황함도, 두려움도 없이 깨끗하다. 다만 약간의 놀람만이 수프에 넣은 파슬리 양념처럼 곱게 뿌려져 있을 뿐.

만약 신록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정말로 신록을 다치게 한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류드밀라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자신에게 보여 줬던 다정한 모습이 정말로 다 가짜였구나. 그녀는 그에게로 향하던 마음을 접어 버린다. 그러자 침착하게 대답하기가 한층 쉬워진다.

“알아들을 수 있어요. 동물과 영물의 말을 알아듣는 이건 마법도 아니라 그저 하찮은 껍데기의 재능이라고 하더군요.”

“그랬군요.”

여전히 고민이 끝나지 않은 듯 생각에 깊이 빠진 얼굴로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 별안간 그녀를 똑바로 응시한다.

“내게 화나셨나요?”

황급히 눈길을 내리깔며 그녀는 그에게 약속했던 대로 진실을 말한다.

“네.”

“왜 화가 나셨을까요. 내가 그대를 다치게 한 것도 아닌데.”

알면서도 묻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건지. 어느 쪽이든 그녀는 그가 끔찍이 무서워진다. 새삼 그가 여인을 여럿 죽인 마법사란 사실이 기억난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명을 앗아 가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어쩌면 그의 뜻을 거스르다가 그녀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도 떠오른다.

그러나 다정한 말을 듣고 따스한 손짓을 받는 그의 품 안에서 연기하며 살아가는 것보단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그렇게 여긴 그녀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약간 높인다.

“신록이 다쳤잖아요. 귀한 생명이 죽을 뻔했는데 루슬란 님께서는 대체…….”

“난 내 마법을 잘 조절한답니다. 그 신록이 죽을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럼 정말로 그가 한 것이 맞구나. 그의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목소리, 여전히 다정한 어투, 그 모든 것이 공포를 불러와 그녀는 휘청거린다. 그가 부축해 주려 손을 뻗는다.

“소, 손대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그 말에, 그 공포가 어린 말에 그의 눈빛에 상처 받은 기색이 떠오른다. 물론 류드밀라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다만 그의 시선이 조금 더 날카로워지고 그의 표정이 조금 더 딱딱해진 것이 두려워 조용히 울기 시작한다.

“대체 왜 그러셨어요? 왜 죄 없는 신록을 다치게 만드셨나요?”

“그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으니까요.”

뜻밖의 대답에 그녀는 놀라서 울음마저 그친다. 루슬란은 고개를 내리며 혼자 웃음 짓는다.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들을 다 한데 모아 보니 결국 이 이유더군요. 그대가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서. 그때 그대가 잊은 게 무엇인지 물어봤었죠? 대답하면 그대가 상처 받을까 봐 주의를 돌리고 싶었어요. 그대는 상처 입은 동물들을 치료하는 걸 좋아하시죠? 그대가 신록을 보살피며 나 때문에 잃은 웃음을 되찾길 바랐어요. 미소 말고, 진짜 웃음을요.”

“전 루슬란 님 때문에 웃음을 잃은 게 아니어요…….”

그를 달래 보려고 꺼낸 말이지만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거둬진다.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나와 약속하지 않으셨나요?”

“거짓말이 아니라…….”

“거짓말이 아니면 무엇이지요? 제가 그랬죠, 저 영물을 제가 질투하게 만들지 말라고요. 저 영물이 뭐길래 나와 한 약속까지 어기면서 따지려 드나요? 그래요, 그대 때문에 나는 영물을 다치게 만들었어요. 그걸 그리 나쁘게 여기시는 그대는 날 위해 뭘 하실 수 있지요?”

예전이라면 망설임 없이 모든 것, 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다정하게 대해 준 사람. 그녀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 그녀를 한없이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그에게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다고 답했으리라. 그러나 그의 본성을 알게 된 류드밀라의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화가 불쑥 솟아오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화이다. 그녀는 그저 영물이 다친 게 안타깝고 슬퍼서 그를 추궁했을 뿐이다. 그가 잘못한 건 사실이지 않은가. 온갖 나쁜 생각이 머릿속에서 범람하자 그녀는 당황해서 제 몸을 끌어안는다. 그러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 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적어도 저라면 영물을 다치게 하는 짓은 안 할 거예요!”

제 스스로도 놀란 그녀는 서러운 울음을 터트린다. 그는 그녀를 달래 주지 않는다. 다만 더 차가워진 눈길로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 성큼 다가온다.

“감히 그대가 자신의 주제를 잊은 것 같아 말씀드릴게요.”

턱을 쥐고 들어 올리는 손길이 거칠고 아프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초라해 보일까 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는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그녀의 작은 가슴은 이런 일을 견디기엔 너무나 여리다. 그의 무시무시한 은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녀는 다시금 흐느낀다.

“그대의 목숨 줄은 내가 쥐고 있어요. 지금 이대로, 내 씨 없이 밖에 내쳐지면 마녀들이 그대를 발견한 즉시 그대의 사슴 같은 목을 비틀겠지요. 그렇게 되고 싶나요? 난 이보다 더한 협박도 할 수 있어요. 내가 그렇게 하길 바라시나요?”

“흐윽, 아니, 아니어요…… ”

울면서 류드밀라는 피부에 와 닿게 느낄 수 있다. 루슬란이 그녀를 살려 두는 이유는 그저 그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해서, 이 이유 한 가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의 마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그게 지금이 될 수도 있다.

그는 그녀를 그저 잘 대해 줄 수 있는 인형처럼 곁에 두는 것이다. 그에게 그녀는 말을 잘 들어 가지고 놀기 좋은 예쁘장한 인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답을 들은 그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턱을 놔준다. 먹잇감을 제 발아래 놓은 사자처럼 가르랑거리는 목소리로 그는 명령한다.

“그럼 내게 애원해 봐요. 그대에게 씨를 남겨 달라고, 그대가 죽게 내버려 두지 말라고 애원해 봐요.”

류드밀라는 이 모든 일이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신록을 다치게 한 사람이 루슬란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막상 진짜 그가 신록을 그녀 때문에 다치게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할지도 모르겠다. 미안함? 배신감? 놀람? 그러나 그저 슬픔과 두려움밖에는 느껴지지 않고 그녀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사과의 말을 웅얼거린다.

“흐으…… 죄송해요…….”

“죄송하단 말은 애원이 아닌데 말이에요.”

그 말을 듣고 그가 한 말을 되짚어 본 그녀는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다. 그녀가 어떻게 감히 루슬란 님께 그런 천한 애원을 할까. 차라리 내쳐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아직까지는 수치심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제 안에, 흑, 루슬란 님의 씨를 남겨 주셔요…….”

픽 웃은 루슬란은 그녀를 감싸 안는다. 얼핏 보면 다정한 동작이지만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손은 처음으로 우악스럽게 느껴진다. 지독한 집착이 담긴 은빛 눈동자가 반짝이는가 싶더니 그들은 어느새 침대에 느슨하게 기대앉아 있다.

“옷을 벗어 봐요.”

그의 말은 비단 혼자 옷을 벗으라는 뜻만이 아니다. 옷을 벗고 스스로 안겨 보라는 의미이다. 그걸 알아챈 그녀는 그가 덮어 준 로브와 가운을 내리면서 더 심하게 울음을 쏟아 낸다. 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았던 그의 다정한 말과 손짓이 이토록 그리울 수가 없다.

지금 그의 목소리는 겉으로는 다정하지만, 속에는 날카로운 칼날을 숨기고 있다. 전보다 그를 잘 알게 되어 이런 변화에 민감해진 그녀로서는 너무나도 두려울 따름이다.

옷을 다 벗은 류드밀라가 천천히 그 위에 올라타려는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단호한 손길이 그녀를 막아 세운다. 그러더니 그녀를 밀어 넘어뜨리고는 몸을 획 뒤집게 만든다.

“늘 그대의 얼굴을 보면서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질질 짜는 양이 정말 보기 싫군요.”

그가 보이지 않자 더 겁에 질린 그녀는 벌벌 떨면서 뒤를 돌아보려 한다. 그러나 그의 손이 머리채를 붙잡고 고정시키고 침대에 눌린 뺨에 강한 압박이 전해져 온다.

“그, 그만…… 아흑!”

애원하던 말은 그가 그녀의 안을 거칠게 파고들자 신음과 비명으로 바뀐다. 거의 쑤셔 넣듯이 좁은 안에 들어온 그는 단번에 허리 짓을 하고 그녀는 정신을 붙들고 있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온몸이 불타는 쇠꼬챙이에 꿰어지는 듯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그의 변한 모습에 목에 메어 소리도 잘 나지 않는다.

그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내리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한 주먹에 들어오는 그녀의 허리를 잡은 채 안을 치댄다. 살과 살이 마구 부딪히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류드밀라는 더 이상 흐느끼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다. 그저 이곳을 벗어나 다른 곳에, 다른 시간에 있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그가 다정하게 대해 줬던 일들이 다 꿈같이 느껴진다. 그래, 원래 이랬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여인들이 똑같이 당했듯이 그녀도 이렇게 다뤄져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천하디 천한 껍데기니까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든 다 인내해야 한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제게 주어진 벌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전혀 저항하지 않는다. 한 번의 저항도 안 하는 그녀가 안타까운 마음이 그의 깊숙한 내면에 자리 잡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한다.

류드밀라가 마침내 공포와 피로로 혼절할 때까지 루슬란은 그녀를 고통 속에서 헤매게 한다.

***

류드밀라가 겨우 일어났을 때 이번에도 그녀는 혼자다. 신록은 루슬란이 어떻게 했는지 사라져 있고, 물론 루슬란도 곁에 없다. 하지만 그녀는 신록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온몸이, 특히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파 오며 전날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그 끔찍한 기억들을 억누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만 고민하도록 노력한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였으니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이렇게 될 줄은 알았다. 루슬란이 그녀를 다르게 대하게 만든 무언가가 그녀에게서 사라져, 그가 무섭게 변할 거란 사실을 그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그녀에게 맞지 않은, 과분한 것이었으니까. 다만 이런 방식으로, 그녀가 파멸을 자초하리란 것은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괴롭고 스스로가 한심스럽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흐느낀다. 산소가 부족해 머리가 아플 때까지 운다. 절망이 작은 마음을 가득 채운다. 앞으로 그녀는 끔찍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정말 그의 교배용으로 바쳐진 껍데기의 삶을.

과연 그녀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그의 다정함을 받지 못하고 대신 그의 차갑게 변한 모습을 견딜 수 있을까?

마침내 어떠한 결심을 내린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살짝 연다. 밖을 살피는데 아무도 없다. 게다가 아직 그녀의 안에는 그의 씨물이 남아 있다. 마녀들도 그녀를 함부로 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류드밀라는 얇은 가운 한 자락만 걸친 채 맨발로 한번 갔던 익숙한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황궁의 후원에 다다른다.

후원은 원래 날씨대로 겨울이다. 눈이 소복이 쌓인 아름다운 풍경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녀가 걸음을 옮긴다. 온천 반대편에 있는 커다랗고 깊은 연못으로.

다행히 연못은 얼어 있지 않다. 그리고 충분히 깊어 보인다. 그녀의 결심을 실행하기엔.

류드밀라가 연못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올린다. 균형을 잃은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안아 든 사람에게 매달리고 루슬란의 조각 같은 하얀 얼굴을 발견한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그만 얼어붙어 버린다. 자그마한 울음이 흑, 하고 튀어나오자 서둘러 입을 막고 벌벌 떠는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그렇게 떨고 정신을 붙잡고 있기에 여념이 없어 그의 표정이 한없이 다정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를 안아 든 그는 연못 밖으로 나와 그녀를 바닥에 내려 주려 한다. 그러나 땅에 발이 닿자마자 그녀는 다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만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다시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손길이 혹여나 그녀가 넘어져 다칠세라, 다급한 것을 거친 것으로 착각한 그녀가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루, 루슬란 님, 죄송해요…….”

그가 손을 거두자 다시 주저앉아 버린 그녀를 그는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 눈길이 어떤지 보지도 못하고 그녀는 급히 머리를 조아린다. 그렇게 가장 낮은 자세를 하고 그에게 애원한다.

“약조를 어, 어겨서 죄송해요. 그, 그 방에 혼자 있기 너무 무서워서… 그러니 부디 제발…….”

“또 거짓말을 하시는 군요, 나의 껍데기 님.”

담담히 그녀의 말을 자른 그는 여전히 높은 곳에서 그녀를 굽어보고 그녀는 자신의 추악하고 더러운 실체가 낱낱이 까발려지는 느낌에 몸을 가냘프게 떤다.

“죄, 죄송해요…….”

“사실을 말해 보세요. 왜 이 추운 날, 혼자서 후원으로 왔죠?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니고 왜 연못에 발을 들이려 했나요?”

“흑, 흐으, 흐윽…….”

아무 말 못 하고 그저 애처롭게 우는 그녀 앞에 그가 몸을 낮추어 앉는다. 그의 길고 푸른, 사자의 발톱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에 닿는다. 그 끝이 그녀의 목에 가벼운 생채기를 내자 새빨간 피가 상처에 방울방울 맺힌다.

“말하세요.”

하지만 류드밀라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그녀가 하려던 짓을 그에게 밝히는 것이, 죽음보다 두렵기 때문이다.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손을 거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그대를 죽이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알고 이러시는 건가요?”

“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그녀가 공포도 잊고 되묻는다. 마침내 그녀에게서 울거나 떠는 것이 아닌 반응을 이끌어 내자 그는 이 실낱같은 희망을 간절히 붙들어 본다.

“난 그대를 사랑해요. 그대는 내게 거짓말을 하고 도망쳤을지 몰라도, 그대는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증오할지 몰라도. 그래서 난 그대에게 더는 해를 끼칠 수가 없어요. 그날, 내가 그대를 끔찍이도 괴롭게 했던 날 깨달았거든요. 그대 없이는 나도 살 수가 없다고. 그대에게 해를 끼치면 나는 그 배로 고통스럽다고.”

류드밀라는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그 말뜻을 이해해 보려 노력한다. 그녀는 그와의 약조를 두 번이나 어겼고 그에게 저항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는 손톱이 원래대로 돌아온 손으로 떨궈진 그녀의 턱을 가볍게 쥐고 들어 올린다. 그 손길에 담긴 조심스러움과 다정함에 그녀의 혼란스러움도 가라앉는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 대체 왜일까. 그 의심을 거두지 못해 그녀는 다시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거두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그대여, 말해 봐요. 왜 나를 피해 도망쳐 온 곳이 이곳인가요? 왜 차디찬 연못에 빠져나올 생각 없이 발을 담갔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더 심하게 운다. 그 이유만은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다. 대신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고 싶었던 질문을, 그녀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질문을 던진다.

“루, 루슬란 님…… 루슬란 님께서는 대체 왜 저를 사랑하세요?”

전과는 달리 루슬란은 그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턱을 놓고 양 뺨을 제 손안에 가둔다.

“그대는 기억하지 못하실지 몰라도, 우리는 전에 만난 적이 있답니다. 그 옛 기억이 내가 가진 인간에 대한 유일하게 아름다운 추억이에요. 그것 말고도 이유는 많답니다.”

처음으로 살짝 미소 지으며 그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대가 성인이 된 후 우리가 첫 번째로 만났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그대는 겁에 질린 나머지 노크도 안 하고 제 방으로 들어오셨고, 제가 그대의 목소리를 빼앗았었죠. 사실 그건 핑계였고,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그대와의 옛 추억 때문에, 내가 울 것 같아 그랬답니다.”

류드밀라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그의 말에 듬뿍 담긴 사랑에 당황하면서도 마음이 조금은 풀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그녀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으며 그녀는 두려움을 이겨 내기 시작한다.

“그대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는, 연민의 감정이 먼저 들었어요. 그대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런 엄한 교육을 받게 하여 내게 보내졌는지. 그대가 떠는 모습을 봤을 때는, 너무 어여뻐 안아 주고 싶었답니다. 그대가 나를 성하라고 불렀을 때는 안타까웠어요.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세월을 탓해 보기도 했지요.”

루슬란이 그녀의 뺨을 놓아주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그대가 도망쳤을 때는, 재밌었어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몇 없는데, 그중 하나가 그대라는 사실이 신기했거든요. 그 후로도 나는 그대에게 정말 여러 번 반했어요. 그대의 순한 모습에, 그대의 눈물 많은 모습에, 그대의 얌전한 모습에, 그대의 당돌한 모습에, 그대가 용기 내어 말한 그 한마디에도 내 심장은 몇 번이고 가슴을 울렸어요.”

그녀는 그녀도 그랬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도 루슬란의 다정한 몸짓 하나하나에 반했고 그의 한마디에 가슴이 부서질 듯 심장이 쿵쿵 뛰었다고. 그러나 안도감에 입이 떼어지지 않는다.

“이 추억과 연민과 어여쁨과 안타까움과 재미와 그대의 순하고 아름다운 모습 모두가, 나로 하여금 그대를 사랑하게 만들었답니다. 이제 그대의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되었나요?”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큰 소리로 엉엉 울면서 제 손에 얼굴을 묻는다. 그런데 잘게 떨리는 몸을 그가 감싸 안고 품에 머리를 기대게 한다.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은 그녀가 침실에 혼자 남아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 다정함을 품고 있다.

그 후로도 한참을 그의 품에 안겨 울고 난 류드밀라는 결심한다. 고민은 끝났다. 그녀는 그에게 진실을 말할 것이다. 이렇게나 자신을 사랑하고 위해 주는 그에게 사실을 숨기는 것은 못 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실을 말하고, 그의 처분을 달게 받아들일 것이다.

“루슬란 님, 왜 제가 연못으로 나왔는지 물어보셨죠.”

그녀가 가냘픈 목소리로 말문을 연다.

“그랬지요.”

“루슬란 님께서 안 계신 방에 혼자 남아 있으니 너무나도 두려웠어요. 앞으로 벌어질 일이. 앞으로 제가 어떻게 될지. 루슬란 님의 분노를 받아 낼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차라리 숨을 끊으려고….”

이 대목에서 그녀는 다시 울먹인다. 굳은 결심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하는 순간 그가 자신을 얼마나 한심하게 여길지 두려워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흐른다. 그는 그걸 닦아 주는 대신 흐르게 내버려 두곤, 그녀를 꼭 껴안아 준다.

“흐윽,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루슬란 님께서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데, 루슬란 님께서 절 어떻게 대해 주셨는데 그런 생각도, 행동도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맞아요. 그대는 그런 생각도, 행동도 하면 안 되었어요. 하지만 내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그대께서 그리되도록 만들었으니 말이어요.”

“네?”

그녀가 조그맣게 되물으며 그를 올려다보고, 그의 눈에서 흐르는 맑은 액체를 넋을 잃고 응시한다. 그도 울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가 조용히 흐느끼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내가 그대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잖아요. 그대가 이렇게 무서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은 다 내 탓이어요. 그러니 사과하지도 말고, 미안한 감정도 털어 버려요. 내가 오히려 그대에게 사과해야 할 사람이니 말이에요.”

그가 우는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어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가 했던 것처럼 등을 토닥여 주면 너무 무례하려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고 온 힘을 다해 그를 껴안는다.

“죄송해요, 나의 껍데기 님. 그대가 나 때문에 입은 상처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지만, 그대가 그 상처를 잊고 지낼 수 있다면 난 무엇이든 할 거예요. 내 사과를 받아 주실 수 있나요?”

“네.”

그녀는 작지만 힘 있게 대답하곤 가는 손가락으로 그를 꽉 그러쥔다. 겨우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든 그는 힘들게 웃어 보인다.

“고마워요, 나의 사랑하는 껍데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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