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크리스마스 외전 (12/15)
  • if 기억상실ㄹㄷㅂㅅ에서 마크다운으로 독해가 들어간 기념 겸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지환이 기억상실 올려봅니다. 시기는 지환이 졸업을 조금 앞둔 겨울방학입니다.

    (1/2)

    뭔가, 공기가 차가운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몸이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개운한 것 같기도 하고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뭐 하나 가늠할 수 없는 그 감각을 그저 내버려둔 채 지환은 다소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을 떴는데도 어쩐지 흐릿한 눈으로 겨우 초점을 맞추자 의자에 앉아 뭘 보고 있는 지혜가 눈에 들어왔다. 쟤는 왜 여기서 저러고 있지. 뭐하고 있냐고 부르려 했는데, 그보다 먼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안으로 들어오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쟤 정연우 사촌 형 아닌가. 이름이, 한서진? 서준이었나? 아무래도 서진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가 싶었는데, 정작 서진은 굳은 것처럼 아무 말도, 움직임도 없었다.

    “어, 어어,”

    그냥 그렇게 보고 있자니 문득 다른 곳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지혜가 지환을 빤히 바라보며 제대로 된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야, 왜 울어.”

    그리고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당황스러웠다. 지환은 반사적으로 지혜를 달래려 팔을 뻗었다가, 문득 뭔가가 걸린다는 걸 깨달았다. 지환은 수액을 맞고 있었다. 거기다 이제야 알아차렸는데, 자신은 병원에 있었다.

    “의사 불러올게요.”

    여전히 문쪽에 있던 서진에게서 나온 목소리에 지혜가 다급히 말했다.

    “오빠, 오빠! 이거, 이거 눌, 눌러요.”

    지환의 침대 위에 있는 호출 벨을 가리키는 지혜의 모습에 서진이 다가왔다.

    “아, 그래.”

    다들 경황이 없나본데, 지금 호출 벨과 가까운 건 지환, 지혜, 서진 순서였다. 지환은 그냥 저가 상체를 일으켜 벨을 눌렀다.

    “형, 일어나면 안 될 것 같아요.”

    겨우 상체 좀 일으킨 거 가지고 어깨를 눌러 다시 침대에 눕게하는 서진의 손길에 지환은 우선 손짓으로 지혜를 제 곁으로 불렀다. 무슨 상황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지환은 어쨌거나 놀란 것 같은 지혜를 달래려 손을 꼭 붙잡아 토닥여주며 서진을 바라봤다.

    무슨 사고가 난 건가. 만일 그렇다면 지혜야 가족이니 옆에 있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그래서 서진은 왜 여기 있지? 차라리 연우였으면 지혜 따라왔나보다 이해를 하는데, 서진은 도저히 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사고 목격자인가.

    “넌 왜 여기 있어?”

    “네?”

    안 그래도 서진은 인상이 차가운 편이었는데, 표정이 딱딱하게 굳으니 그런 기운이 더 짙어졌다.

    “너 정연우 사촌 아니야? 얼마 전에 봤잖아.”

    잊지 못할 사자대면이 이주쯤 지났으니 지환도 서진을 기억했다. 지환은 당연한 말을 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일순간 공기가 싸늘히 식었다. 심지어 지혜까지도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다가, 다급히 지환을 향해 물었다.

    “오빠, 오빠, 난 알아봐?”

    지환은 여전히 손을 꼭 잡은 채로 마침 협탁 위에 있던 휴지를 뽑아 지혜에게 건네줬다.

    “동생을 어떻게 몰라? 그런데 왜 이렇게 울어. 오빠 뭐 큰일 난 것도 아닌데, 응?”

    아니면 진짜 큰일이 났나? 일단 사지는 멀쩡한데. 그래도 우선 살살 달랬지만, 많이 놀란 모양인지 지혜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우리 지혜 왜 이렇게 울지. 지혜야, 오빠 진짜 괜찮아. 봐봐.”

    지환은 지금 자신이 어쩌다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환이 다친 게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는지 어르고 달래도 지혜는 휴지에 얼굴을 묻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환은 조금 난감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냥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넘겨줬다. 왜 우는지를 모르니 뭐 어떻게 해줄 수도 없고.

    그러다 문득 시선을 들어올리니 아무런 표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서진과 눈이 마주쳤다. 얘는 또 왜 이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

    의문은 길지 않았다. 그 뒤로 바로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와 온갖 걸 물어보고 검진하며 지환의 상태를 확인했고 곧 이어 부모님도 급하게 도착했다. 심지어 원래 지방에서 지내는 아빠까지 있었다. 사고가 있었고 지환은 운 좋게도 그다지 다치지 않았지만, 충격 때문인지 뭔지 기억이 조금 날아간 모양이라고 했다. 그런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는 걸 듣기만 했지 직접 본 적도 없는데 왜 지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그래도 몸은 멀쩡하니 다행이었다. 거기다 대부분 기억도 금방 돌아온다고 했다. 몇 시간, 하루 만에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며 너무 걱정하지도 말라고 했고. 마취만 해도 몇 시간쯤 일부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제 경우도 금방 돌아올 것 같기는 했다. 그러면서도 아예 안 돌아올 가능성을 말해주는 걸 듣자면,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건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지환은 젊고 건강하니 회복이 빠를 거라고 했다.

    지환의 기억은 자신이 막 제대하고 복학한 무렵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제 지혜가 수능까지 봤다고 했다. 거기다 지환은 취직까지 했고. 그 중간 기억이 없다 뿐이지 그냥 자신이 이뤄놓은 거기는 했지만, 그래도 따지자면 어느 날 일어나보니 걱정거리가 말끔히 해결된 셈이었다.

    “그래서 한서진은 왜 거기 있던 건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혜에게 묻자 지혜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말끔한 얼굴로 답했다.

    “오빠 서진 오빠랑 친해.”

    “내가 걔랑?”

    “응.”

    왜? 저절로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혜의 답은 단호하기만 했다. 지환의 기억속의 서진은, 사실 잘 아는 것도 없었다. 딱 한 번 봤는데. 아니, 두 번 본 것 같았다. 같은 동네라 길 가다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딱히 아는 건 없었다. 학생 회장했고 공부 잘한다는 건 안다. 어렴풋이 성격 좀 안 좋은 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럼 걔는 내 병문안 온 거야?”

    “지환이 너는 하필이면 서진이를 기억 못해서 어쩌니. 거기 병원도 서진이네 친척이 무슨 교수로 있다고 너 잘 봐주고 그랬는데. 서진이도 너 깨는 거 보겠다면서 계속 있었어. 우리가 잠깐 산책이라도 하고 오래서 잠깐 나가 있는 거 빼면 계속 있었는데, 나이도 어린데 정말 고맙더라.”

    이번에는 엄마한테서 나온 답에 지환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걔가 왜?”

    정말, 서진이 왜? 정말 친한 건가? 잘 실감이 안 나서 그렇지, 그럴 수도 있기는 했다. 어제까지 잘 지내던 애랑 오늘 술 마시고 싸울 수도 있는 거고 오늘까지 재수 없던 애가 내일 갑자기 괜찮은 짓을 할 수도 있기는 했다.

    그냥 그런 과정을 거쳐 서진과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미안해졌다. 지혜가 우는 거에 정신이 팔려 넌 왜 여기 있냐고 했는데, 좀 잘 대해줬어야 했던 모양이다.

    “서진이가 지환이 너랑 친하잖아. 너 시험기간에는 거의 서진이네 집에서 먹고 자고 다 했어. 난 서진이가 너 귀찮아하지 않을까봐 걱정이었는데.”

    “내가 왜 걔네 집에서?”

    저절로 물음이 나왔다. 걔네 집이나 우리 집이나 거리 얼마 되지도 않는데 왜 굳이? 거기다 서진은 가족들과 살았다. 지환이 왜 굳이 거기 가서? 너무 이상하지 않나?

    “서진 오빠 자취하잖아.”

    지혜의 답에 지환은 어색하게 납득했다.

    “아, 맞다. 걔 대학생이라고 했지.”

    교복입고 봐서 그런가, 유독 서진하면 그 모습만 생각났다. 애초에 그거 말고 기억 속에 남은 게 없기도 했지만. 지혜가 수능을 봤으니 지혜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서진이 이미 대학에 들어간 게 당연했고, 서진이 지환과 같은 대학이라는 것도 이미 들었는데 그게 정말 사실이라는 게 어색했다. 그때 걔가 벌써 성인이라니.

    “네 얘기 들을 때부터 알기는 했지만, 서진이가 정말 착하고 든든하더라. 인기도 많겠어.”

    “서진 오빠 인기 엄청 많았지. 지금도 인기 많을 걸?”

    엄마와 지혜가 나란히 말하는 걸 듣던 지환은 그냥 답했다.

    “난 기억 안 나지.”

    모르기는 하지만, 인기 많았겠지. 그 얼굴 달고 살면 당연했다.

    “지환이 너는 우선 푹 쉬어. 기억이야 차차 돌아올 거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말고.”

    지금껏 별 말 없이 운전하던 아빠의 말에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게 많기는 했지만, 어쨌든 휴식과 안정이 가장 중요했다.

    *

    휴식이 최고라며 빨리 자라는 가족들의 닦달에 자고 일어나니 이제 슬슬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알아보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핸드폰은 박살났다고 하기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핸드폰을 샀는데, 그나마 연락처는 다 연동이 되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동안의 기록을 볼 수 없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연락처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어차피 뭐 어쩌지도 못하는 거 긍정적으로 생각한 지환은 사실 어제부터 신경 쓰인 이름을 찾아봤다. 그냥 한번 쭉 봤는데, 그새 모르는 이름이 많았다. 그 와중에 찾으려는 이름은 찾지도 못했고. 지환은 그냥 편하게 연락처 검색을 이용했다.

    고하늘. 결과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났다고 하니 당연히 관계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애칭으로 저장해 놨을 지도 모르고. 지환은 하트를 검색해봤다. 또 결과가 없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뭐가 나오기는 했다. 그런데, 취급주의? 이게 뭐지.

    지환은 잠시간 그 저장명을 들여다봤다. ♥취급주의♥. 저 애칭이 정해진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취급주의가 지환의 여자 친구인 건 분명했다. 이게 하늘인가? 지환은 취급주의에게 연락을 해볼까 고민했다. 지환이 다친 걸 알고 있을까. 알고 있어도 문제, 몰라도 문제였다.

    알고 있으면 지금 당장 자신은 괜찮다고 연락해야 했고, 몰랐다면 갑작스레 남친이 연락두절 된 것이니 상황을 설명해야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래서 지금 이게 누군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환은 결국 방 밖으로 나갔다. 가족 중 누구 하나는 알고 있겠지. 애초에 지환은 제 연애를 굳이 가족에게 숨기는 편이 아니었다. 가족들이 알고 있어야 각종 기념일 때 여자친구와 보내겠다며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일어났어?”

    “어.”

    거실로 나가자 가족들이 다 같이 티비를 보며 과일을 먹고 있었다. 지환은 엄마에게 과일을 먹여주는 아빠를 익숙하게 무시하고 지혜의 옆에 앉았다.

    “지혜야, 너 나 누구랑 사귀는 지 알아?”

    “그냥 누군가랑 사귀는 것만 아는데.”

    “내가 이름은 안 말했어? 고하늘 아니야?”

    다른 얘기하다가라도 이름 몇 번 말했을 수는 있다. 몇 번이라도 들었으면 대충 그런 이름인 것 같다고 알아차리지 않을까싶어 물었지만, 지혜는 조금 어색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오빠 하늘 언니랑 헤어졌어.”

    아직 사귀지도 못했는데 벌써 헤어졌다니. 인생 참. 지환은 없는 기억 속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느껴야할지도 알 수 없었다. 취직 해결해놓고 연애는 망쳐놨구나. 지환의 기억 상으로 아직 썸이기는 했지만, 분명 느낌이 좋았다. 분명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헤어졌다는 걸 보니 사귀기는 한 모양이니 나름대로 그 느낌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나. 어쨌거나 사귀기는 했으니까. 헤어졌지만. 도대체 인생이란 뭘까. 어떻게 이제 곧 사귀겠구나 싶었는데 실제로는 이미 헤어졌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이미 헤어졌다고. 도대체 어쩌다가? 내가 안경까지 쓰고 열심히 꼬시고 있었는데, 술 마시러도 안가고 괜히 도서관 가서 책 펼치고 앉아 있었는데, 그냥 과방 가서 공부하면 될 걸 굳이 사대랑 조금이라도 가까워 보겠다고 중도까지 갔는데, 밥도 하늘이 학식 자주 먹는다고 해서 공대에서 한참 걸리는 학생식당까지 가서 괜히 얼쩡거렸는데. 그런데 헤어졌다고? 심지어 아예 차인 것도 아니고 사귀어 놓고 헤어졌다고? 미친놈인가?

    “오빠, 근데 오빠 이제 다른 언니랑 사귀어.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랑.”

    지환이 충격 받은 게 눈에 보였는지 지혜가 지환의 팔을 잡아 흔들며 정신을 차리게 했다.

    “그럼 나랑 4살 차이네.”

    반사적으로 계산한 지환은 인상을 구겼다. 미성년자잖아. 그리고는 바로 깨달았다. 지금 지환은 몇 년의 기억을 잃었다. 그것까지 계산한다면 미성년자는 아니었다.

    “착하고 공부 잘하고 키 크고 예쁘다던데.”

    나름대로 아픈 지환은 안중에도 없이 오랜만에 만난 엄마에게만 신경 쓰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지환이 나온 걸 알고는 있던 모양이다. 아빠의 답에 지환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엄마가 말했다.

    “그리고 운동도 잘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걔는 나 다친 거 알아?”

    취급주의라는 그 지환의 여자친구가 지환이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알리기는 해야 했다. 실감은 안 나도 어쨌거나 여자친구라는데.

    “서진이가 알려줬다고 하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네가 직접 연락 하기는 해야지. 그런데 너 기억 안 나서 어쩌니.”

    엄마의 답에 지환은 지혜를 바라봤다.

    “한서진은 내 여친 알아?”

    “알겠지? 아마도?”

    그 애매한 답에 지환은 다시 핸드폰 연락처를 뒤적였다. 서진한테 물어보면 뭐가 나올 테니 좀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냥 한번 쭉 훑었다가 한 번에 이름을 찾지 못해 다시 검색창에 이름을 쳤지만, 이번에도 나오지 않았다.

    “한서진 번호 알아?”

    지혜에게 묻자 지혜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서진 오빠 번호 없어?”

    없을 리는 없다. 지혜는 아직도 연우와 사귀고 있다고 했으니,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연우 주변 사람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특히나, 서진의 번호는 첫만남부터 저장했고. 그런데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많이 친해졌다던데 저장명을 바꿨던 건가. 지환은 애인과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그냥 이름으로 저장해 놓기는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기는 했다.

    “있기야 하지. 그런데 뭐라고 저장했는지 지금 못 찾겠어서.”

    “어, 잠깐만.”

    지혜는 그 말과 함께 제 핸드폰을 찾아 좀 뒤적거리더니 번호를 알려줬다. 지환은 알려주는 대로 제 핸드폰에 입력했다. 숫자 몇 개를 쳤을 때는 여러 이름이 나오다가 숫자가 많아질수록 하나하나 뜨는 이름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연락처가 남았을 때,

    뭐야 이거?

     60회

    if 기억상실(2/2)

    2.

    지환은 지혜 전화로 서진에게 만날 수 있냐는 연락을 보냈고, 그 결과 서진이 집으로 찾아왔다. 일단 불러 놨으면서도 서진이 오기 전까지 별 생각을 다 하던 지환은 서진이 오자 바로 제 방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형, 오늘은 몸 좀 괜찮아요? 어디 아프지는 않죠?”

    문가에 가만히 선 채로 묻는 목소리에 지환은 서진을 의자에 앉혔다.

    “어. 괜찮아.”

    부른 건 지환이었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용기가 없다는 말이 더 적합했다.

    “연락처는 연동 안 돼 있었어요?”

    왜 지혜 핸드폰으로 연락했냐는 물음에 지환은 이미 연락처를 못 찾았다는 답을 했지만, 지환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연동은 돼 있을 걸. 그런데 비밀번호를 못 찾아서.”

    물론 연동도 되어 있고 비밀번호도 알았다.

    “그래요?”

    잠시간 지환을 바라보다 나온 그 여상스러운 목소리에 지환도 그저 답했다.

    “어.”

    그리고는 또 침묵이 흘렀다. 역시, 그래도 일단 불렀으니 어떻게 되든 물을 건 물어야겠지. 그냥 물어보자 싶어 마음을 다잡았는데, 막상 지환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서진이 입을 열었다.

    “형, 저 할 말 있어요.”

    “뭔데?”

    “형 기억이 얼마 후면 돌아올 거라고는 해도, 그래도 몇 가지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지.”

    “형 남자랑 사귀어요.”

    말하는 투가 굉장히 자연스러워서 지환도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이렇게나 갑작스럽다니. 이렇게 강렬한 말을 이렇게 평범하게 할 필요가 있나.

    “그것 참,”

    겨우겨우 충격을 가다듬은 지환은 이어 물었다.

    “언제부터?”

    “반년 정도.”

    “그래, 그렇구나.”

    기억에도 없지만, 남자를 사귄지 반년이나 됐구나. 그럼 하늘과는 얼마나 사귄 거지. 어쩌면 그 사이에 또 다른 사람이 있을 지도 몰랐다.

    “또 누가 알아? 내가 남자 사귀는 거.”

    “저만 알아요.”

    “그래.”

    일단 물어보고 답을 얻기는 했는데, 사실 딱히 뭐 답할 말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뭘?”

    문득 나온 서진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되묻자 서진은 지금까지와 같이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남자 만나는 거, 충격적이에요?”

    “그럼 안 충격적이겠냐? 계속 여자만 만났는데.”

    바로 답한 지환은 잠시간 생각해봤다.

    “그런데,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게이가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냥 거기에 대해서는 별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지금까지 좋아하고 사귄 게 항상 여자였으니 그런가보다 여기며 살았다.

    그러다 남자랑 사귄다니 생각지 못한 일이라 좀 놀라기는 했지만, 사실 많이 놀라기는 했지만,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예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게 끝이에요?”

    “그럼 뭐가 더 있냐.”

    서진은 지환에게 더 극적인 반응을 기대하는 모양인데, 딱히 그럴 건 없었다. 지금껏 그쪽으로는 관심이 전혀 없어서 별 의견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아는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좋아하니까 사귀겠지.

    “형, 지혜한테 형이 전 여자친구 물어봤다는 거 들었어요. 그럼 형은 지금 기억으로는 아직도 좋아하는 거죠? 그 사람.”

    지환은 그 목소리만큼이나 평온한 서진의 표정을 확인했다. 지금 지환이 거기에 그렇다고 답하면 안 된다는 건 대충 알고 있다. 지환은 결국 말했다.

    “난 일단 지금 내가 만나는 게 누군지를 알고 싶은데.”

    어차피 알아야 했다. 더 미뤄봤자 나아지는 것도 없고.

    “형.”

    “어.”

    “연락처 확인 했죠.”

    꽤나 단정적인 어조에 지환은 서진을 바라봤다.

    “취급주의?”

    왜 취급주의인지는 모르지만, 저장명 양 옆에 하트가 붙어 있었다. 애인이 아닐리 없다. 거기다 연락처를 통틀어 하트를 붙여놓은 게 그거뿐이었으니 애인이 아니면 그게 더 문제였다. 애인도 아닌 사람한테 왜 굳이 번거롭게 하트까지 붙여 놔?

    “그렇게 됐어요.”

    이미 알고 있었다. 취급주의가 제 애인이라는 걸 알았고 번호를 확인한 결과 서진이 취급주의라는 걸 알았다. 그럼 서진이 제 애인인게 당연했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진의 답을 듣자마자 바로 탄식이 나왔다.

    “아, 씨발, 미친.”

    좆 됐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이라고는 그랬다. 좆 됐다. 미성년자랑 사귀는 미친새끼들은 다 감옥에 가야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지환이 그딴 미친새끼였다니. 도대체 지환은 뭘하고 다닌 거지? 인생을 왜 그따위로 산 거지?

    지환은 겨우겨우 핸드폰을 들어 취급주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동이 울렸다. 서진의 핸드폰에서. 이게 현실일 리 없는데, 현실이었다. 정신이 있는 새끼인가? 어떻게 이렇게 어린 애를, 심지어 미성년자를,

    “미친, 돌았,”

    내가 그따위 시발놈이었다니. 지금이라도 서진에게 사과를 해야 하나? 그런데 사과를 듣고 싶을까? 내가 망쳐놓은 이 미성년자의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하지? 충격에 빠져 차마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던 지환은 문득 깨달았다. 지환의 기억은 최근이 비어 있었다. 지환이 실감을 못해서 그렇지, 서진은 이제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너 몇 살이야?”

    “스물 둘이요.”

    여전히 믿기지는 않았다. 지환의 기억 속 서진은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연우와 함께 카페에 앉아있던 모습이었는데. 그래도 어쨌거나 스물 둘이라는 거지. 미성년자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서진은 키도 커진 것 같았다. 기억 속에서는 분명 지환과 비슷한 키였는데, 이제는 지환보다 확연히 키가 컸다.

    “사귄지 얼마나 됐다고?”

    “반 년 됐다고 말했잖아요.”

    지환은 그제야 얼마간의 안정을 찾았다. 그럼 서진이 미성년자일 때 사귄 것도 아니다.

    “그럼 너 미성년자 아니지?”

    “아니에요.”

    “너 미성년자 때 만난 것도 아니고.”

    “네.”

    그 단호한 답에 지환은 안도했다가, 이내 이런 걸로 안도하는 제 도덕성에 실망했다. 감옥만 안 가면 다라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교복 입는 모습 본 애랑 사귈 수가 있지. 거기다 따지자면 서진은 거의 지혜 친구였다.

    완전 애라는 소리인데, 어떻게 그런 애랑 사귈 수 있지.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도덕성을 담당하는 뇌의 어느 부위가 망가져 있던 게 분명했다. 이번 사고로 그게 다시 돌아온 모양이고.

    저 자신에게 실망하며 도대체 어디서부터 도덕성을 서서히 버려온 것인지 인생을 곱씹고 있자 문득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이 알고 있어야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말하러 온 거예요.”

    “그래, 고맙다. 그렇지, 알아야지.”

    최대한 평온을 가장하며 답했지만,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서진은 별 말을 하지 않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가볼게요.”

    “어어, 가라.”

    굉장히 무난한 인사였다고 생각했는데, 서진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진은 꽤나 싸늘히 굳은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

    지환은 서진이 떠난 제 방 안에서 잠시간 저 자신을 욕하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생각해보니 서진의 잘못도 아니고 따지자면 서진은 피해자인데 오늘은 지환의 태도가 확실히 좀 아니었다. 지환도 놀라서 그랬지만, 서진은 더 놀랐을 텐데. 그런데 그럼 서진은 지환을 좋아하는 건가? 자의로?

    사과를 하든 뭘 하든 다시 얼굴을 봐야할 것 같았는데, 당연하게도 지환은 서진의 집을 몰랐다. 자취한다던데, 주소를 알 리가 없다. 지환은 우선 연우에게 물어보려 연락처를 뒤적였다. 지금껏 번번이 이름을 찾을때마다 실패했던 것에 비해, 연우의 이름은 정직하게 이름 그대로 저장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연우에게 물어보니 학교 근처라는 것만 알고 정확한 주소는 모른다고 했다. 아무리 사촌이라도 거의 친 형제처럼 지내는 것 같더니 왜 주소도 모르나 싶기는 했지만, 지환은 그럼 직접 물어보려 핸드폰을 들고 우선 거실로 나갔다. 학교 쪽으로 가면서 전화로 정확한 주소를 물으면 되겠지 싶었다.

    “최지환, 너 아픈 애가 어딜 나가?”

    하지만 현관에서 현장검거 됐다.

    “나 애인 만나러 가야 될 것 같아서.”

    괜히 단어가 어색했다. 지금껏 늘 여친이라고 했는데, 여자친구가 아니었다. 차마 아빠 앞에서 남자친구라고 할 수는 없으니 애인이라고 했지만, 그게 지칭하는 게 서진이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파렴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말고 내일 날 밝으면 만나러 가. 전화하면 되잖아. 너 아픈 애가 어떻게 밤에 그렇게 돌아다니려고 그래?”

    지환은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저녁도 안 먹은 5시 49분. 누가 봐도 밤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욕만 들을 게 뻔했다.

    “그래그래. 미안해. 들어갈게.”

    이미 크게 놀라게 했는데 더 속 썩이고 싶지도 않아 지환은 우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미안하다고는 해야 하는데. 사과는 때를 놓치면 안됐다. 지환은 잠시간 망설이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형, 무슨 일 있어요?]

    연결되는 동안 사과의 말을 좀 정리하려고 했는데, 신호가 몇 번 울리지도 않고 바로 연결된지라 뭐 생각 정리할 것도 없었다.

    “그런 건 아닌데, 야, 오늘은 내가 미안했다.”

    그냥 따질 것 없이 바로 사과나 하자 싶어 말하자 서진에게서는 잠시간 돌아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형이 왜 미안해요.]

    “아니, 내가 막 너랑 사귀는 게 싫고 그런 게 아니라, 당황스러워서 그런 거야. 그냥 실감이 잘 안 나서. 싫어서 욕하고 그런 거 아니라고. 진짜 그냥 말이 잘못 나왔어. 내 기억 속에는 네가 고딩이었는데 너랑 사귄다고 하니까 순간적으로 나이 계산이 안 돼서.”

    지금은 나이 계산이 됐지만, 그래봤자 손상된 도덕성이 회복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진의 앞에서 혼란스러워할 필요는 없었으니 미안하기는 했다. 서진은 안 그래도 어린데.

    [그런 거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형은 지금 아프잖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계속 어리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막상 지환을 안심시키는 것 같은 목소리를 듣자면 나름대로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기는 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고작 자기보다 두 살 어린 사촌 동생을 수습해주고 돌보면서 데리고 다니기도 했고. 확실히 또래보다는 어른스러웠다. 그래봤자 어리기는 했지만.

    “그래. 이해한다니 고맙다. 너 찾아가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어디 돌아다니지 말라고 해서.”

    [당연하죠. 늦었잖아요. 할 말 있으면 제가 지금 갈까요?]

    원래 사과는 얼굴 보고 해야 하는 게 맞지만, 사과 받으라고 굳이 부르는 건 이상했다. 그러려면 지환이 가야지.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오늘 미안했다고 하려고 전화한 거야. 조심히 들어가라.”

    어쨌거나 전할 말은 전했다. 괜찮다고 하는데 더 구구절절 말하기도 이상하고. 거기다 이미 구구절절 말하기도 했다.

    [네.]

    그 답에 지환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막상 끊고 나니 뭔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환은 더 할 말이 없었고 서진도 딱히 무슨 말을 더 할 기색은 아니었는데도 왜 뭔가 이상한 것 같지. 지환은 그냥 핸드폰을 대충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웠다. 정말이지, 싱숭생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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