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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기억 상실 외전 (11/15)
  • IF 기억 상실 외전

    뭔가, 공기가 차가운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몸이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개운한 것 같기도 하고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지환은 뭐 하나 가늠할 수 없는 그 감각들 사이로 다소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을 떴는데도 어쩐지 시야가 흐릿했다.

    겨우 초점을 맞추자 의자에 앉아 뭘 보고 있는 지혜가 눈에 들어왔다. 쟤는 왜 여기서 저러고 있지. 뭐 하고 있냐고 부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안으로 들어오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쟤 정연우 사촌 형 아닌가. 이름이, 한서진? 서준이었나? 아무래도 서진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가 싶었는데, 정작 서진은 굳은 것처럼 아무 말도, 움직임도 없었다.

    “어, 어어.”

    그냥 그렇게 보고 있자니 문득 다른 곳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지혜가 지환을 빤히 바라보며 제대로 된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야, 왜 울어.”

    그러고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당황스러웠다. 지환은 반사적으로 지혜를 달래려 팔을 뻗었다가, 문득 뭔가가 걸린다는 걸 깨달았다. 지환은 수액을 맞고 있었다. 거기다 이제야 알아차렸는데, 지금 있는 장소도 병원인 것 같았다.

    “의사 불러올게요.”

    여전히 문 쪽에 있던 서진에게서 나온 목소리에 지혜가 다급히 말했다.

    “오빠, 오빠! 이거, 이거 눌, 눌러요.”

    지환의 침대 위에 있는 호출 벨을 가리키는 지혜의 모습에 서진이 다가왔다.

    “아, 그래.”

    다들 경황이 없나 본데, 지금 호출 벨과 가까운 건 지환, 지혜, 서진 순서였다. 지환은 그냥 직접 상체를 일으켜 벨을 눌렀다.

    “형, 일어나면 안 될 것 같아요.”

    겨우 상체 좀 일으킨 거 가지고 어깨를 눌러 다시 침대에 눕게 하는 서진의 손길에 지환은 우선 손짓해 지혜를 제 곁으로 불렀다. 무슨 상황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지환은 어쨌거나 놀란 것 같은 지혜를 달래려 손을 꼭 붙잡아 토닥여 주며 서진을 바라봤다.

    무슨 사고가 난 건가. 만일 그렇다면 지혜야 가족이니 옆에 있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그래서 서진은 왜 여기 있지? 차라리 연우였으면 지혜 따라왔나 보다 이해를 하겠지만, 서진은 도저히 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사고 목격자인가.

    “넌 왜 여기 있어?”

    “네?”

    안 그래도 서진은 인상이 차가운 편이었는데, 표정이 딱딱하게 굳으니 그 기운이 더 짙어졌다.

    “너 정연우 사촌 아니야? 얼마 전에 봤잖아.”

    잊지 못할 사자 대면에서 이 주쯤 지났으니 지환도 서진을 기억했다. 지환은 당연한 말을 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일순간 공기가 싸늘히 식었다. 심지어 지혜까지도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다가, 다급히 지환을 향해 물었다.

    “오빠, 오빠, 난 알아봐?”

    지환은 여전히 손을 꼭 잡은 채로 마침 작은 탁자 위에 있던 휴지를 뽑아 지혜에게 건네줬다.

    “동생을 어떻게 몰라? 그런데 왜 이렇게 울어. 오빠 뭐 큰일 난 것도 아닌데.”

    아니면 진짜 큰일이 났나? 일단 사지는 멀쩡한데. 그래도 우선 살살 달랬지만, 많이 놀란 모양인지 지혜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우리 지혜 왜 이렇게 울지. 지혜야, 오빠 진짜 괜찮아. 봐 봐.”

    지환은 지금 자신이 어쩌다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혜는 지환이 다친 게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는지 어르고 달래도 휴지에 얼굴을 묻고는 고개만 저었다. 지환은 조금 난감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넘겨 줬다. 왜 우는지를 모르니 뭐 어떻게 해 줄 수도 없고.

    그러다 문득 시선을 들어 올리니 아무런 표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서진과 눈이 마주쳤다. 얘는 또 왜 이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 * *

    의문은 길지 않았다. 그 뒤로 바로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와 온갖 걸 물어보고 검진하며 지환의 상태를 확인했고 곧이어 부모님도 급하게 도착했다. 심지어 원래 지방에서 지내는 아빠까지 있었다. 사고가 있었고 지환은 운 좋게도 그다지 다치지 않았지만, 충격 때문인지 뭔지 기억이 조금 날아간 모양이라고 했다. 그런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는 걸 듣기만 했지 직접 본 적도 없는데 왜 지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그래도 몸은 멀쩡하니 다행이었다. 거기다 대부분 기억도 금방 돌아온다고 했다. 몇 시간, 하루 만에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며 너무 걱정하지도 말라고 했고. 마취만 해도 몇 시간 정도는 일부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제 경우도 금방 돌아올 것 같기는 했다. 그러면서도 아예 안 돌아올 가능성을 말해 주는 걸 듣자면,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건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지환은 젊고 건강하니 회복이 빠를 거라고 했다.

    지환의 기억상으로는 이제야 막 제대하고 복학한 무렵이었는데, 실제로는 이제 지혜가 수능까지 봤다고 했다. 거기다 지환은 취직까지 했고. 그 중간 기억이 없다 뿐이지 그냥 자신이 이뤄 놓은 거기는 했지만, 그래도 따지자면 어느 날 일어나 보니 걱정거리가 말끔히 해결된 셈이었다.

    “그래서 한서진은 왜 거기 있던 건데?”

    퇴원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혜에게 묻자 지혜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말끔한 얼굴로 답했다.

    “오빠 서진 오빠랑 친해.”

    “내가 걔랑?”

    “응.”

    왜? 저절로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혜의 답은 자연스럽기만 했다. 지환의 기억 속의 서진은, 사실 잘 아는 것도 없었다. 딱 한 번 봤는데. 아니, 두 번 본 것 같았다. 같은 동네라 길 가다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딱히 아는 건 없었다. 학생회장 했고 공부 잘한다는 건 안다. 어렴풋이 성격 좀 안 좋은 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럼 걔는 내 병문안 온 거야?”

    “지환이 너는 하필이면 서진이를 기억 못 해서 어쩌니. 거기 병원도 서진이네 친척이 무슨 교수로 있다고 너 잘 봐주고 그랬는데. 서진이도 너 깨는 거 보겠다면서 계속 있었어. 우리가 잠깐 산책이라도 하고 오래서 잠깐 나가 있는 거 빼면 계속 있었는데, 나이도 어린데 정말 고맙더라.”

    이번에는 엄마한테서 나온 답에 지환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걔가 왜?”

    정말, 서진이 왜? 정말 친한 건가? 잘 실감이 안 나서 그렇지, 그럴 수도 있기는 했다. 어제까지 잘 지내던 애랑 오늘 술 마시고 싸울 수도 있는 거고 오늘까지 재수 없던 애가 내일 갑자기 괜찮은 짓을 할 수도 있기는 했다.

    그러니 서진과도 그런 과정을 거쳐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미안해졌다. 지혜가 우는 거에 정신이 팔려 너는 왜 여기 있냐고 했는데, 좀 잘 대해 줬어야 했던 모양이다.

    “서진이가 지환이 너랑 친하잖아. 너 시험 기간에는 거의 서진이네 집에서 먹고 자고 다 했어. 난 서진이가 너 귀찮아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내가 왜 걔네 집에서?”

    저절로 물음이 나왔다. 걔네 집이나 우리 집이나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왜 굳이? 거기다 서진은 가족들과 살았다. 지환이 왜 굳이 거기 가서? 너무 이상하지 않나?

    “서진 오빠 자취하잖아. 학교 근처니까. 둘이 같은 학교야.”

    지혜의 답에 지환은 어색하게 납득했다.

    “아, 맞다. 걔 대학생이라고 했지.”

    교복 입고 봐서 그런가, 유독 서진 하면 그 모습만 생각났다. 애초에 그거 말고 기억 속에 남은 게 없기도 했다. 지혜가 수능을 봤으니 지혜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서진이 이미 대학에 들어간 게 당연했고, 서진이 지환과 같은 대학이라는 것도 이미 들었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게 어색했다. 그때 걔가 벌써 성인이라니. 거기다 학교도 같은 학교네.

    “네 얘기 들을 때부터 생각은 했는데, 서진이가 정말 착하고 든든하더라. 인기도 많겠어.”

    “서진 오빠 인기 엄청 많았지. 지금도 인기 많을걸?”

    엄마와 지혜가 나란히 말하는 걸 듣던 지환은 그저 답했다.

    “난 기억 안 나지.”

    모르기는 하지만, 인기 많겠지. 그 얼굴 달고 살면 당연했다.

    “지환이 너는 우선 푹 쉬어. 기억이야 차차 돌아올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금껏 별말 없이 운전하던 아빠의 말에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게 많기는 했지만, 어쨌든 휴식과 안정이 가장 중요했다.

    * * *

    휴식이 최고라며 빨리 자라는 가족들의 닦달에 자고 일어나니 이제 슬슬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알아보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핸드폰은 박살 났다고 하기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핸드폰을 샀는데, 그나마 연락처는 다 연동이 되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동안의 기록을 볼 수 없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연락처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어차피 뭐 어쩌지도 못하는 거 긍정적으로 생각한 지환은 사실 어제부터 신경 쓰인 이름을 찾아봤다. 우선 연락처를 한번 쭉 훑자 그새 모르는 이름이 많았다. 그 와중에 찾으려는 이름은 찾지도 못해서 지환은 그냥 편하게 연락처 검색창에 글자를 입력했다.

    고하늘. 결과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났다고 하니 당연히 관계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애칭으로 저장해 놨을지도 모르고. 지환은 하트를 검색해 봤다. 또 결과가 없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뭐가 나오기는 했다. 그런데, 취급주의? 이게 뭐지.

    지환은 잠시간 그 저장명을 들여다봤다. ♥취급주의♥. 저 애칭이 정해진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취급주의가 지환의 여자 친구인 건 분명했다. 이게 하늘인가? 지환은 취급주의에게 연락을 해 볼까 고민했다. 지환이 다친 걸 알고 있을까. 알고 있어도 문제, 몰라도 문제였다.

    알고 있다면 지금 당장 자신은 괜찮다고 연락해야 했고, 몰랐다면 갑작스레 남친이 연락두절됐으니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그래서 지금 이게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지환은 결국 거실로 나갔다. 가족 중 누구 하나는 알고 있겠지. 애초에 지환은 제 연애를 굳이 가족에게 숨기는 편이 아니었다. 가족들이 알고 있어야 각종 기념일 때 여자 친구와 보내겠다며 빠져나가기가 쉬웠다.

    “일어났어?”

    “어.”

    다 같이 텔레비전을 보며 과일을 먹는 가족들의 모습에 지환은 엄마에게 과일을 먹여 주는 아빠를 익숙하게 무시하고 지혜의 옆에 앉았다.

    “지혜야, 너 오빠 누구랑 사귀는지 알아?”

    “누군지는 모르고 그냥 누군가랑 사귀는 것만 아는데.”

    “내가 이름은 안 말했어? 고하늘 아니야?”

    다른 얘기 하다가 이름이라도 몇 번 말하지 않았을까. 몇 번이라도 들었으면 대충 그런 이름인 것 같다고 알아차리지 않을까 싶어 물었지만, 지혜는 조금 어색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오빠 하늘 언니랑 헤어졌어.”

    아직 사귀지도 못했는데 벌써 헤어졌다니. 인생 참. 지환은 없는 기억 속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취직 해결해 놓고 연애는 망쳐 놨구나. 지환의 기억상으로 아직 썸이기는 했지만, 분명 느낌이 좋았다. 분명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헤어졌다는 걸 들으면 사귀기는 한 모양이니 나름대로 그 느낌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나. 어쨌거나 사귀기는 했으니까. 헤어졌지만. 도대체 인생이란 뭘까. 어떻게 이제 곧 사귀겠구나 싶었는데 실제로는 이미 헤어졌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이미 헤어졌다고. 도대체 어쩌다가? 내가 안경까지 쓰고 열심히 꼬시고 있었는데, 술 마시러도 안 가고 괜히 도서관 가서 책 펼치고 앉아 있었는데, 그냥 과방 가서 공부하면 될 걸 굳이 사범 대학 건물이랑 조금이라도 가까워 보겠다고 중앙 도서관까지 갔는데, 밥도 하늘이 학식 자주 먹는다고 해서 공대에서 한참 걸리는 학생 식당까지 가서 괜히 얼쩡거렸는데. 그런데 헤어졌다고? 심지어 아예 차인 것도 아니고 사귀어 놓고 헤어졌다고? 미친놈인가?

    “오빠, 근데 오빠 이제 다른 언니랑 사귀어.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랑.”

    지환이 충격 받은 게 눈에 보였는지 지혜가 지환의 팔을 잡아 흔들어 정신을 차리게 했다.

    “그럼 나랑 4살 차이네.”

    반사적으로 계산한 지환은 인상을 구겼다. 미성년자잖아. 그러고는 바로 깨달았다. 지금 지환은 몇 년의 기억을 잃었다. 그것까지 계산한다면 미성년자는 아니었다.

    “착하고 공부 잘하고 키 크고 예쁘다던데.”

    아빠에게서 나온 답에 지환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픈 지환은 안중에도 없이 오랜만에 만난 엄마에게만 신경 쓰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지환이 나온 걸 알고는 있던 모양이다.

    “그리고 운동도 잘한다고 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엄마에게서 이어진 말을 듣자면, 지환이 그동안 온갖 자랑을 다 한 게 분명했다.

    “그럼 걔는 나 다친 거 알아?”

    취급주의라는 여자 친구가 지환이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알리기는 해야 했다. 실감은 안 나도 어쨌거나 여자 친구라는데.

    “서진이가 알려 줬다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네가 직접 연락하기는 해야지. 그런데 너 기억 안 나서 어쩌니.”

    엄마의 답에 지환은 지혜를 바라봤다.

    “한서진은 내 여친 알아?”

    “그럴걸? 아마도?”

    그 애매한 답에 지환은 다시 핸드폰 연락처를 뒤적였다. 서진에게 물어보면 뭐라도 나올 테니 우선 연락할 생각이었다. 지환은 연락처를 한번 쭉 훑었다가 한 번에 이름을 찾지 못해 다시 검색창에 이름을 쳤지만, 이번에도 나오지 않았다.

    “한서진 번호 알아?”

    지혜에게 묻자 지혜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서진 오빠 번호 없어?”

    없을 리는 없다. 지혜는 아직도 연우와 사귀고 있다고 했으니,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연우 주변 사람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특히나, 서진의 번호는 첫 만남부터 저장했다. 하지만 정작 지금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사이에 많이 친해졌다던데 저장명을 바꿨나. 지환은 여자 친구와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그냥 이름으로 저장해 놓기는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기는 했다.

    “있기야 하지. 그런데 뭐라고 저장했는지 지금 못 찾겠어서.”

    “어, 잠깐만.”

    지혜는 그 말과 함께 제 핸드폰을 찾아 좀 뒤적거리더니 번호를 알려 줬다. 지환은 지혜가 불러 주는 숫자들을 제 핸드폰에 입력했다. 숫자 몇 개를 쳤을 때는 여러 이름이 나왔지만, 숫자가 많아질수록 뜨는 이름이 하나하나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연락처가 남았을 때.

    뭐야 이거?

    * * *

    지환은 조금 전 지혜의 핸드폰으로 서진에게 만날 수 있냐는 연락을 보냈고, 그 결과 서진이 집으로 찾아왔다. 일단 불러 놨으면서도 서진이 오기 전까지 별생각을 다 하던 지환은 서진이 오자 바로 제 방 안으로 들여 왔다.

    “형, 오늘은 몸 좀 어때요? 어디 아프지는 않아요?”

    문가에 가만히 선 채로 묻는 목소리에 지환은 서진을 의자에 앉혔다.

    “괜찮아.”

    부른 건 지환이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용기가 없다는 말이 더 적합했다.

    “연락처는 연동 안 돼 있었어요?”

    이미 처음 연락을 했을 때, 왜 지혜 핸드폰으로 연락했냐는 물음에 연락처를 못 찾았다는 답을 했지만, 지환은 고개를 저었다.

    “연동은 돼 있을걸. 그런데 비밀번호를 못 찾아서.”

    물론 연동도 되어 있고 비밀번호도 알았다.

    “그래요?”

    잠시간 지환을 바라보다 나온 그 평탄한 목소리에 지환도 그저 답했다.

    “어.”

    그러고는 또 침묵이 흘렀다. 역시, 그래도 일단 불렀으니 어떻게 되든 물을 건 물어야겠지. 지환은 그냥 물어보자 싶어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지환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저 할 말 있어요.”

    “뭔데?”

    “형 기억이 얼마 후면 돌아올 거라고는 해도, 그래도 몇 가지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지.”

    “형 남자랑 사귀어요.”

    말하는 투가 굉장히 자연스러워서 지환도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이렇게나 갑작스럽다니. 이렇게 강렬한 말을 이렇게 평범하게 할 필요가 있나.

    “그것참….”

    겨우겨우 충격을 가다듬은 지환은 이어 물었다.

    “언제부터?”

    “반년 정도 됐어요.”

    “그래, 그렇구나.”

    기억에도 없지만, 남자를 사귄 지 반년이나 됐구나. 그럼 하늘과는 얼마나 사귄 거지. 어쩌면 그사이에 또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또 누가 알아? 내가 남자 사귀는 거.”

    “저만 알아요.”

    “그래.”

    일단 물어보고 답을 얻기는 했지만, 답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뭘?”

    문득 나온 서진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되묻자 서진은 지금까지와 같이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남자 만나는 거, 충격적이에요?”

    “그럼 안 충격적이겠냐? 계속 여자만 만났는데.”

    바로 답한 지환은 잠시간 생각해 봤다.

    “그런데,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지환은 자신이 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게이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냥 거기에 대해서는 별생각을 해 본 적이 없고 지금까지 좋아하고 사귄 게 항상 여자였으니 그런가 보다 여기며 살았다.

    그러다 남자랑 사귄다니 생각지 못한 일이라 좀 놀라기는 했지만, 사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놀라기는 했지만,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예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을 뿐이지.

    “그게 끝이에요?”

    “그럼 뭐가 더 있냐.”

    서진은 지환에게 더 극적인 반응을 기대하는 모양인데, 딱히 그럴 것도 없었다. 지금껏 그쪽으로는 관심이 전혀 없어서 별 의견을 가져 본 적이 없었고 아는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좋아하니까 사귀겠지.

    “형, 지혜한테 형이 전 여자 친구 물어봤다는 거 들었어요. 그럼 형은 지금 기억으로는 아직도 좋아하는 거죠? 그분.”

    지환은 그 목소리만큼이나 평온한 서진의 표정을 확인했다. 지금 지환이 거기에 그렇다고 답하면 안 된다는 건 대충 알고 있다. 지환은, 결국 말했다.

    “난 일단 지금 내가 만나는 게 누군지를 알고 싶은데.”

    어차피 알아야 했다. 더 미뤄 봤자 나아지는 것도 없고.

    “형.”

    “어.”

    “연락처 확인했죠.”

    꽤나 단정적인 어조에 지환은 서진을 바라봤다.

    “취급주의?”

    왜 취급주의인지는 모르지만, 저장명 양옆에 하트가 붙어 있었다. 애인이 아닐 리 없다. 거기다 연락처를 통틀어 하트를 붙여 놓은 게 그거뿐이었으니 애인이 아니면 그게 더 문제였다. 애인도 아닌 사람한테 왜 굳이 번거롭게 하트까지 붙여 놔?

    “그렇게 됐어요.”

    이미 알고 있었다. 취급주의가 제 애인이라는 걸 알았고 번호를 확인한 결과 서진이 취급주의라는 걸 알았다. 그럼 서진이 제 애인인 게 당연했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진의 답을 듣자마자 바로 탄식이 나왔다.

    “아, 씨발, 미친.”

    좆 됐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이라고는 그랬다. 좆 됐다. 미성년자랑 사귀는 미친 새끼들은 다 감옥에 가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지환이 그딴 미친 새끼였다니. 도대체 지환은 뭘 하고 다닌 거지? 인생을 왜 그따위로 산 거지?

    지환은 겨우겨우 핸드폰을 들어 취급주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동이 울렸다. 서진의 핸드폰에서. 이게 현실일 리 없는데, 현실이었다. 정신이 있는 새끼인가? 어떻게 이렇게 어린 애를, 심지어 미성년자를….

    “미친, 돌았….”

    내가 그따위 시발놈이었다니. 지금이라도 서진에게 사과해야 하나? 그런데 사과를 듣고 싶을까? 내가 망쳐 놓은 이 미성년자의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하지? 충격에 빠져 차마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던 지환은 문득 깨달았다. 지환의 기억은 최근이 비어 있었다. 지환이 실감을 못 해서 그렇지, 서진은 이제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너 몇 살이야?”

    “스물둘이요.”

    여전히 믿기지는 않았다. 지환의 기억 속 서진은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연우와 함께 카페에 앉아 있던 모습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스물둘이라는 거지. 미성년자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서진은 키도 커진 것 같았다. 기억 속에서는 분명 지환과 비슷한 키였는데, 이제는 지환보다 확연히 키가 컸다.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반년 됐다고 말했잖아요.”

    지환은 그제야 얼마간의 안정을 찾았다. 그럼 서진이 미성년자일 때 사귄 것도 아니다.

    “그럼 너 미성년자 아니지?”

    “아니에요.”

    “너 미성년자 때 만난 것도 아니고.”

    “네.”

    그 단호한 답에 지환은 안도했다가, 이내 이런 거에 안도하는 제 도덕성에 실망했다. 감옥만 안 가면 다라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교복 입는 모습 본 애랑 사귈 수가 있지. 거기다 따지자면 서진은 거의 지혜 친구였다.

    완전 애라는 소리인데, 어떻게 그런 애랑 사귈 수 있지.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도덕성을 담당하는 뇌의 어느 부위가 망가져 있던 게 분명했다. 이번 사고로 그게 다시 돌아온 모양이고.

    저 자신에게 실망하며 도대체 어디서부터 도덕성을 서서히 버려 온 것인지 인생을 곱씹고 있자 문득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말하러 온 거예요.”

    “그래, 고맙다. 그렇지, 알아야지.”

    최대한 평온을 가장하며 답했지만,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서진은 별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가 볼게요.”

    “어어, 가라.”

    굉장히 무난한 인사였다고 생각했는데, 서진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진은 꽤나 싸늘히 굳은 얼굴로 지환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 * *

    지환은 서진이 떠난 제 방 안에서 잠시간 저 자신을 욕하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생각해 보니 서진의 잘못도 아니고 따지자면 서진은 피해자인데 오늘은 지환의 태도가 확실히 좀 아니었다. 지환도 놀라서 그랬지만, 서진은 더 놀랐을 텐데. 그런데 그럼 서진은 지환을 좋아하는 건가? 자의로?

    사과하든 뭘 하든 다시 얼굴을 봐야 할 것 같았는데, 당연하게도 지환은 서진의 집을 몰랐다. 자취한다는 거야 들었지만, 주소를 알 리가 없다. 지환은 우선 연우에게 물어보려 연락처를 뒤적였다. 지금껏 번번이 이름을 찾을 때마다 실패했던 것에 비해, 연우의 이름은 정직하게 이름 그대로 저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연우에게 물어보니 학교 근처라는 것만 알고 정확한 주소는 모른다는 답이나 들었다. 아무리 사촌이라도 거의 친형제처럼 지내는 것 같더니 왜 주소도 모르나 싶기는 했지만, 지환은 그럼 직접 물어보려 핸드폰을 들고 우선 거실로 나갔다. 일단 학교 쪽으로 가면서 전화로 정확한 주소를 물으면 되겠지 싶었다.

    “최지환, 너 아픈 애가 어딜 나가?”

    하지만 현관에서 현장 검거 됐다.

    “나 애인 만나러 가야 될 것 같아서.”

    괜히 단어가 어색했다. 지금껏 늘 여친이라고 했는데, 여자 친구가 아니었다. 차마 아빠 앞에서 남자 친구라고 할 수는 없으니 애인이라고 했지만, 그게 지칭하는 게 서진이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파렴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말고 내일 날 밝으면 만나러 가. 전화하면 되잖아. 너 아픈 애가 어떻게 밤에 그렇게 돌아다니려고 그래?”

    지환은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저녁도 안 먹은 5시 49분. 누가 봐도 밤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해 봤자 욕만 들을 게 뻔했다.

    “그래그래. 미안해. 들어갈게.”

    이미 많이 놀라게 했는데 더 속 썩이고 싶지도 않아 지환은 우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미안하다고는 해야 하는데. 사과는 때를 놓치면 안 된다. 지환은 잠시간 망설이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형, 무슨 일 있어요?]

    연결되는 동안 사과의 말을 좀 정리하려고 했지만, 신호가 몇 번 울리지도 않고 바로 연결된지라 뭐 생각 정리할 것도 없었다.

    “그런 건 아닌데, 야, 오늘은 내가 미안했다.”

    그냥 따질 것 없이 바로 사과나 하자 싶어 말하자 서진에게서는 잠시간 돌아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형이 왜 미안해요.]

    “아니, 내가 막 너랑 사귀는 게 싫고 그런 게 아니라, 당황스러워서 그런 거야. 그냥 실감이 잘 안 나서. 싫어서 욕하고 그런 거 아니라고. 진짜 그냥 말이 잘못 나왔어. 내 기억 속에는 네가 고딩이었는데 너랑 사귄다고 하니까 순간적으로 나이 계산이 안 돼서.”

    지금은 나이 계산이 됐지만, 그래 봤자 손상된 도덕성이 회복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진의 앞에서 혼란스러워할 필요는 없었으니 미안하기는 했다. 서진은 안 그래도 어린데.

    [그런 거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형은 지금 아프잖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계속 어리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지금 지환을 안심시키는 것 같은 목소리를 듣자면 나름대로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기는 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고작 자기보다 두 살 어린 사촌 동생을 수습해 주고 돌보면서 데리고 다니기도 했고. 서진은 확실히 또래보다 어른스러웠다. 그래 봤자 어리지만.

    “그래. 이해한다니 고맙다. 너 찾아가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어디 돌아다니지 말라고 해서.”

    [당연하죠. 늦었잖아요. 할 말 있으면 제가 지금 갈까요?]

    원래 사과는 얼굴 보고 해야 하는 게 맞지만, 사과 받으라고 굳이 부르는 건 이상했다. 그러려면 지환이 가야지.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방금은 미안했다고 하려고 전화한 거야. 조심히 들어가라.”

    어쨌거나 전할 말은 전했다. 괜찮다고 하는데 더 구구절절 말하기도 이상하고. 거기다 이미 구구절절 말하기도 했다.

    [네.]

    그 답에 지환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막상 끊고 나니 뭔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환은 더 할 말이 없었고 서진도 딱히 무슨 말을 더 할 기색은 아니었는데도 왜 뭔가 이상한 것 같지. 지환은 그냥 핸드폰을 대충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웠다. 정말이지, 싱숭생숭했다.

    * * *

    [서진이네 도착했어?]

    [ㅇ지금]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 엄마 걱정한다]

    [ㅇㅇㅇ]

    아빠에게 연락을 보내던 지환은 그대로 앞을 바라봤다. 역시 조금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 서진의 집을 찾아온 참이었다. 서진은 자신이 지환의 집으로 오겠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이제 할 이야기의 특성상 혹여라도 제 가족이 들으면 큰일이었다. 그런데 쟤는 왜 굳이 나와 있을까. 서진은 지환을 기다리고 있는지 건물 입구에 나와 있었다. 지환이 서진을 발견한 동시에 서진도 바로 지환을 알아차리고는 다가왔다.

    “왜 나와 있어?”

    “길 못 찾을까 봐요.”

    핸드폰도 있고 주소도 있고 건물명도 있는데 못 찾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지환은 그냥 그러냐고 하며 서진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몸 좀 어때요? 피곤하지는 않죠?”

    집 안에 들어오자 다소곳하게 차를 내오며 조곤조곤 물어오는 목소리에 지환은 다소 얼떨떨했다. 지환은 우선 내어 주는 잔을 반사적으로 받으며 서진을 바라봤다. 아직까지 지환의 눈에 서진은 그냥 고등학생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실제로는 이제 대학생이라고 했다. 대학생 남자애가 이렇게까지 조신할 일인가?

    “야, 미안한데 나 학생증 한번 보면 안 되냐?”

    역시 나이를 확실히 확인해 봐야겠다. 그 말에 서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그러고는 학생증을 가져오자 지환은 긴장하며 받아 들었다.

    “와, 학번.”

    지환의 기억 속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학번이었다. 나이처럼 딱 4학번 차이가 났는데, 지환은 자신이 군대 가기 전 저보다 4학번이 높은 선배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떠올려 봤다.

    “이렇게 차이 나면 나랑 놀기 좀 그렇지 않냐?”

    심지어 지환은 복학생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용케 사귀네. 여전히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하늘은 한 살 차이였다. 고등학생 때는 늘 친구들이었던지라 동갑을 사귀었고. 어쩌다 사귄 걸까.

    “차이 나 봤자 얼마나 난다고 그래요?”

    지환은 잠시간 학생증과 서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물론 네 살이 어려도 사귈 대상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건 둘 다 성인이 되고 만났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환은 서진이 미성년자일 때부터 봤다. 그런데 어쩌다 사귈 마음이 들었지.

    “그런데 너 나한테 말은 안 놨어? 사귄다며.”

    거기다 심지어 존댓말을 들으니 더 사귀는 티가 안 났다. 하늘과는 첫 번째 데이트를 마칠 때쯤 말을 놨다. 하늘은 오빠라고 부르기 싫으니 이름 불러도 되는 거면 말을 놓겠다고 했고, 지환은 그러라고 했다.

    하늘은 장난이었다고 했지만, 지환으로서는 사실 별 상관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한 살 차이인데 이름 부르는 거야 상관도 없는 게 당연했다. 거기다 지환은 원래부터도 하늘에게 아는 오빠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첫 데이트를 마치고 연락을 주고받고, 다음 데이트를 하면서부터는 말을 놓고 호칭도 이름을 섞어 썼다.

    그런데 서진은 사귄다는데도 아직 존대를 했다. 서진의 예의 바른 목소리는 정말 처음 교복 입은 모습을 봤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지환이 서진한테는 그냥 아는 형을 하고 싶었나. 그럼 계속 유지하지 어쩌다가.

    “사귀면 다 말 놔야 해요?”

    “그건 아니지.”

    만나면 뭐가 좀 다를까 싶었는데, 여전히 계속 기분이 애매하기만 했다. 나이를 빼놓고 생각해도, 서진은 너무 얌전했다.

    “형, 그런데 아픈데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요? 제가 가면 됐는데.”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뭐.”

    다시 학생증을 건네주자 서진이 그 학생증을 잠시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오늘도 병원 다녀왔어요?”

    다시 눈을 마주치며 나온 그 걱정스러운 어조에 지환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은 이런 타입에 익숙하지 않았다.

    “어. 보통 금방 돌아온다더라. 난 젊고 건강하니까 더 빠를 거라고.”

    분명 좋았으니 사귀기는 했겠지. 반년을 사귀었다고 하던데, 그 정도면 지환치고 꽤 길게 사귄 편이었다. 하늘과 얼마나 사귄 지는 몰랐지만, 반년이면 기억을 하는 한에서 가장 오랜 연애였다. 미성년자 때부터 봐 온, 따지자면 동생 친구를, 그런 애를 사귀며 도덕성을 버릴 정도로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아무리 뭐가 좋아도 왜 그딴 선택을 했는지.

    “다행이네요.”

    여전히 단정하고 고분고분한 그 태도를 마주하자면 점점 더 죄책감이 올라왔다. 이건 정말, 안 되겠는데. 서진이 지환의 기억보다 자라기는 했다. 앳된 티가 많이 사라졌고, 키도 이제는 지환보다 컸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교복 입은 모습이 아른거렸다. 서진과 사귀기로 한 지환은, 야자 빼고 나왔다던 그 어린 애가 생각이 안 난 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아예 안 돌아올 수도 있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지.”

    그게 또 문제였다. 그럼 서진과는 어쩌지. 우선 서진의 의견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지환은 웬만하면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지환은 분명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분명 뭔가가 있었음은 확신했다. 도덕성을 버렸는데 분명 그만한 확신이 있기는 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지환으로서는 그게 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걸 알기까지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고, 그걸 알면 어차피 헤어지지도 못할 것 같아 더 복잡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안 좋아요.”

    애초에, 지환은 이렇게 얌전한 타입과는 그리 익숙하지도 않은데. 착실한 애들은 그냥 멀리서 청소년 소설을 관람하듯 쟤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실하네, 그렇게 느낄 뿐이지 가까이서 접한 적은 많지 않았다. 그다지 상성이 맞지도 않았고.

    “그렇지. 나 입사 전까지 기억 안 돌아오면 좆 되는 건데.”

    짧게 말하자 문득 서진의 눈가가 얼핏 굳어졌다.

    “왜?”

    “아니에요.”

    점점 더 어색해졌다. 차라리 정말 서진이 동생 남자 친구의 사촌 형이었으면 이만큼 어색하지는 않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할 말이 있는데도, 뭘 묻기가 이상했다.

    “근데 우리 어쩌다가 사귀게 된 거냐.”

    그럼에도 어쨌거나 물을 건 물어야겠지 싶어 입을 열자, 서진이 잠시 침묵했다.

    “형이 전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술 마실 때 같이 있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상당히 흔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예전에도 그런 식으로 사귄 여자 친구가 몇 있기도 했고.

    “언제 헤어졌는데?”

    “그걸 지금 저한테 묻는 거예요?”

    대수롭지 않은 질문에 막상 되돌아온 건 다소 예민한 어투라, 지환은 반사적으로 답했다.

    “어, 어어, 아니, 미안.”

    전혀 실감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러고 보면 지환은 지금 서진과 사귀고 있었다. 전 여자 친구 이야기는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는데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거기다 지금껏 너무 얌전해서 떠올리지 못했을 뿐이지, 생각해 보면 기억 속 그 한 번의 만남만으로도 서진은 성격이 꽤 있는 편이었다.

    “괜찮아요.”

    “어어.”

    서진이 빠르게 어조를 가다듬기는 했지만, 지환은 여전히 조금쯤 당황스러움을 내비치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랑 얘랑 진짜 사귄다고? 그래서 전 여자 친구 이야기는 서진에게 하면 안 되는 거고? 나랑 얘랑 사귀니까?

    “아니에요. 물어볼 수도 있죠. 형은 아프고 기억도 없으니까.”

    다시 나직하고 단정해진 태도에 지환은 감을 잡지 못하며 서진을 바라봤다.

    “헤어진 건 아마, 1년 정도 됐을 거예요.”

    그리고 이어진, 지환의 물음에 대한 답에 지환은 가만히 생각해 봤다. 헤어진 지 1년, 서진을 사귄 지는 반년. 그리고 방금 본 서진의 학번. 확실히 미성년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찝찝함을 없앨 수는 없었다.

    “너 지금 만으로는 몇 살이야?”

    “스물이요.”

    “생일 언제인데?”

    “10월 1일이요.”

    그럼 그때는 열아홉이었네. 만으로는 스물도 안 된 애를.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 정상 같았다. 그때는 아마 돌아 있던 것 같은데.

    “형.”

    “어?”

    반사적으로 답하자, 서진이 꼭 무언가를 살피듯 지환을 바라봤다.

    “제 생일, 10월 1일이라고요.”

    “그래. 그럼 그때는 열아홉이었겠네.”

    열아홉. 스물도 안 된 열아홉. 한국 살아서 다행이다. 한국 나이로는 그래도 스물 넘었으니까. 스물한 살이었겠지. 그때 한국 나이로는. 지금은 스물둘이고. 한국 나이로. 이런 걸 위안 삼고 있다는 게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멍하니 한국 나이로는 그래도 스물이 넘었다며 속으로 주문처럼 외우고 있자, 서진이 지환을 빤히 바라봤다. 별다른 것도 없이 그저 볼 뿐이었는데도, 꼭 모든 잘못을 고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또 궁금한 건 없어요?”

    다시 조용히 시선을 내리며 나온 목소리에 지환은 잠시간 고민했다.

    “뭐가 궁금한지를 모르겠어.”

    궁금한 건 많지만, 뭘 물어봐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 얘기 많이 했어요. 뭘 물어보든 제가 거의 다 말해 줄 수 있어요.”

    “그래. 잘됐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 당장 무언가가 생각나는 건 아니라 대강 답하자, 서진은 시선을 내린 그대로 물었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아직 며칠 안 됐으니까. 점점 적응되겠지. 아마 그 전에 기억이 돌아올 거고.”

    “그렇죠.”

    그 순종적인 동의를 듣자니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지환이 기억을 잃고 싶어서 잃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어린 애를 데리고 있다가 갑작스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는 게 너무 파렴치하게 느껴졌다. 같이 호텔 갔다가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먼저 몰래 빠져나오면 이런 기분일까. 사실 아무리 그날 만난 상대라도 늘 다음 날 아침까지는 같이 먹었던지라 그런 기분을 잘 알 수도 없었다.

    “나 시험 기간에는 거의 여기서 지냈다며.”

    그래도 서진이 저렇게나 조신하고 얌전히 있는 걸 보자면 뭐라도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았다.

    “시험 기간 아니어도 그랬어요.”

    서진은 어째 생각보다 순했다. 기억상으로는 이야기한 게 한 번뿐이기는 했지만, 단정하기는 해도 그다지 고분고분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서진은 정말 참하기만 했다. 이런 타입을 좋아해 본 적은 없는데.

    “무슨 생각 해요?”

    그 물음에 지환은 잠시간 서진을 살펴봤다. 차분하고 반듯한 모습을 보자니 가족들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착하고 공부 잘하고 키 크고 예쁘다고 자랑했다던데. 거기다 운동도 잘한다고.

    실제 서진의 성격이 어떻든 나름대로 착하다고 생각하니 사귀기는 했겠지. 공부 잘하고 키 큰 거야 누가 봐도 그랬다. 예쁘다는 표현이 떠오르기보다는 어떤 식으로도 잘생긴 외모였지만, 가족들에게 잘생겼다고 할 수는 없으니 그건 그냥 바꿔 말한 것 같았다.

    “너 운동 잘해?”

    그럼 정말 운동도 잘하나? 뜬금없는 지환의 물음에도 서진은 의아함을 드러내기보다는 얌전히 되물었다.

    “어떤 거요?”

    “그냥 운동.”

    “남들 하는 만큼 해요.”

    잘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우리 가족들한테 너 운동 잘한다고 자랑했었나 봐.”

    “그건 몰랐는데.”

    점점 더 가슴팍이 간지러운 착각이 일었다. 미친 새끼. 어떻게 이런 애랑 사귈 생각을.

    “나는 기억이 안 났지 뭐.”

    “곧 돌아올 거예요. 마음 편하게 갖는 게 중요하다고 했어요.”

    아무리 봐도 너무 조신했다. 지환은 정말 이런 타입에는 지금껏 끌려 본 적도 없는데.

    “맞다, 병원에서도 네가 많이 도와줬다며?”

    “그냥 거기 친척 몇 명 있던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렇구나.”

    또다시 할 말이 없었다. 지환은 가만히 침묵하다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다섯 시쯤이었다. 한참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부모님이 일찍 들어오라고 했으니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기는 했다. 어제는 다섯 시 반에 어디를 나가냐고 욕을 들었으니까 오늘은 여섯 시쯤에는 들어가야 하려나.

    이제 그만 가겠다고 말하려 서진을 바라봤는데, 눈이 마주치자 일순간 서진의 시선이 흔들렸다.

    “가려고요?”

    지금까지와 같이 차분한 그 목소리에, 아, 미친, 이건 진짜, 어지간히 돌았나.

    “나 부모님이, 늦게 다니지 말라고, 해서.”

    더듬더듬 말하자 서진이 바로 답했다.

    “저녁 먹고 가요.”

    이제는 정말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일순간 깨달은 거라고는 그랬다.

    “어, 그래, 어, 나 담배 피우고 오려고.”

    왜 좋아했는지 알겠다. 뭘 좋아했는지 알겠는데, 왜 사귄 건지도 알겠는데, 진짜 미친 거 아닌가? 이건 정말 아닌데.

    “환자가 담배를 왜 피워요? 그리고 형 담배 끊었어요.”

    좆 됐다. 진짜로.

    “내가?”

    “네.”

    깨달은 진실과 자괴감에 다소 허탈하게 침묵하자, 서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녁 먹고 갈 거죠?”

    사실, 이런 타입을 좋아했던 적이 있다. 조신한 면이 아니라, 보살펴 주고 싶은 타입이라면 만나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지환은 여태껏 이런 타입과 만나서 잘 된 적이 없었다. 가장 오래 버틴 게 이 주였다. 아니, 삼 주였나. 어쨌거나 한 달은 못 버텼다. 늘 상대를 울리며 끝이 났다.

    지환은 그런 상대와 연애하기에는 너무도 세심함이 없었다. 그런데, 또? 심지어 서진이랑? 만으로 이제야 스물이 된, 심지어 얼핏 예민해 보이기까지 하는 서진이랑?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미쳤었다는 결론뿐이었다.

    지환은 이전의 처참한 연애를 교훈 삼아 그다음부터는 늘 솔직한 타입과 사귀었다. 그마저도 오래간 건 아니지만, 솔직하다고 해서 챙겨 줄 게 적은 것도 아니라 꽤 재미있게 사귀었다. 한번 그렇게 사귀고 나니 그 후로도 계속해서 끌린 건 그쪽이었고. 그런데, 이제 와서 그 교훈을 버리고 쟤를 건드렸다고?

    “근데 나, 부모님이.”

    분명 울렸을 텐데. 이건 확신이었다. 울렸을 게 분명했다. 반년이면 울려도 세 번은 족히 울렸겠지. 설마 세 번만 울렸을까.

    “제가 연락드릴게요. 그다음 제가 데려다주면 되잖아요. 싫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은근히 조급하게 나온 그 물음에 지환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지환은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기억하지 못하던 자신이 한 일이 너무 충격적이라, 단번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니면 혹시 피곤하거나 머리 아파요?”

    지환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서진의 시선에 심장이 조여들었다. 결국 현관에 다다르자, 지환은 겨우 말했다.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닌데. 나 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리고 문을 나섰다가, 삼 초도 지나지 않아 제가 스스로 닫은 문을 두드렸다. 이건, 이건 정말 아니었다.

    “야, 한서진, 진짜 미안. 나 문 좀 열어 줘.”

    다급히 말하자, 바로 문이 열렸다. 지환은 결심하듯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며 서진을 바라봤다.

    “네가 싫은 건 아니야. 불편한 것도 아니고, 그런 거 진짜 아닌데, 내가 진짜 너한테 상처를 주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야.”

    아무리 저지른 일에 혼란스럽다고는 해도, 어쨌거나 지환이 저지른 일이었다. 기억이 없다고 지환이 하지 않은 일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런 거 안 말해도 돼요. 형은 아프잖아요.”

    서진은, 방금까지, 문이 닫히기 직전, 본인이 어떤 표정을 했는지는 알고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죄책감과 더불어 양심이 매초 손상되고 있었다.

    “내가 너 꼬셨어?”

    확인할 건 확인해야지. 결연히 나온 물음에,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

    “네?”

    “너 미성년자 때는 내가 안 그랬지?”

    미성년자 때만 아니어라. 제발 그때만 아니어라. 지환이 꼬신 건 확실했다. 아닐 리가 없다. 그러니 시기가 중요했다. 제발, 제발 성인 된 이후에, 제발.

    “형은, 형, 일 년 전에 헤어졌다니까요? 저랑 사귄 지 반년이라고요.”

    얼핏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 드러나는 그 말에, 지환은 우선은 안심했다. 워낙에 당황스러운 게 많은지라 조금이라도 안심이 되는 게 있으면 크게 안심해 놓아야 했다.

    “그럼 내가 그전에는 널 불편하게 하거나, 그러지 않았다는 거지?”

    “네. 형, 왜 이래요?”

    이제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지환을 살피는 시선에 지환은 진지하게 서진을 마주했다.

    “그럼 난 네가 만 스물이 되자마자 꼬신 거야? 아니, 그때는 아니었잖아. 너 생일 10월이면, 만 열아홉.”

    다시 한번 나이를 계산하자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형, 나이에 너무 집착하지 마요.”

    “그럴 수가 없지.”

    그래서도 안 됐다. 범법의 기로인데.

    “그리고 형이 꼬신 것도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된 건데?”

    그 물음에 서진이 순간 침묵했다.

    “그게, 사정이 좀 그래요.”

    천천히 서진의 시선이 내려가자 불안해졌다.

    “뭐가? 내가 미성년자인 너한테 찝쩍거린 게 아니라면 뭐든 다 괜찮아.”

    도덕성은 이미 어쩔 수 없으니 이제는 법적으로만 괜찮으면 우선 됐다.

    “그러니까, 제가.”

    “네가?”

    조마조마하게 묻자 서진이 여전히 시선을 내린 채로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형을 좋아해서, 키스했거든요.”

    그게 뭐 별거라고. 키스 좀 할 수도 있지.

    “고백 당일?”

    “고백은 다음에 했어요.”

    듣자 하니 이건 좀 별 게 맞았다.

    “고백한 다음 키스한 게 아니라 키스하고 고백한 거야?”

    순서가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런 일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기는 했다.

    “그렇게 됐어요.”

    “그리고 내가 받아 준 거고?”

    “네.”

    하지만 지환은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지환이 먼저 꼬셨을 텐데.

    “그럼 네가 날 꼬신 거야?”

    “그건 아니에요.”

    그래도 서진이 지환을 먼저 꼬셨을 것 같지는 않았다. 사귀고 있다는 지금도 이렇게 조신한데. 먼저 키스를 했다니 의외이기는 했지만, 그렇다면 그전에 그럴 만한 신호가 있었을 게 분명했다.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대충 보기로도 서진은 신중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행동했을 리가 없다.

    “그럼 어떻게 사귄 건데?”

    “모르겠어요.”

    혹시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 숨기는 건가. 역시 미성년자 때? 하지만 막상 조심스럽게 다시 들어 올려진 서진의 시선을 보자면, 정말 자신도 모른다는 기색이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반사적으로 달래듯 답한 지환의 말 뒤로 문득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지환과 서진의 시선이 단번에 핸드폰으로 향했다.

    “받으세요.”

    “어, 응.”

    액정을 확인하니 아빠였다.

    “어.”

    [아들, 슬슬 어두워지는데 집 들어와야지?]

    “어어, 이제 가려고.”

    [그래. 지금도 서진이랑 같이 있는 거지? 너 몰래 다른 친구 만나고 있는 거면 걸리지 마.]

    “무슨 소리야. 한서진이랑 있는 거 맞아.”

    그 말에 서진이 흘깃 지환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래? 그럼 바꿔 봐.]

    “뭘 또 바꿔. 들어간다니까.”

    야자 빼먹고 다닐 때도 딱히 이런 적이 없었는데, 답지 않게 단속이 심했다.

    “형, 저 괜찮은데.”

    [옆에 서진이 맞아?]

    그 말에 지환은 결국 떨떠름하게 서진에게 전화를 건네줬다.

    “네. 안녕하세요. 네. 형이 궁금한 거 있다고 해서 이야기 좀 나누고 있었어요.”

    서진은 늘 그렇듯 공손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더니, 슬쩍 지환을 바라봤다.

    “이제 식사하세요? 아, 그럼 저 형이랑 조금만 더 대화 나눠도 괜찮을까요? 집에는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아니, 야.”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저도 본가 들르려고요. 가는 길이니까 안 그러셔도 돼요.”

    이제 정말 가려고 했는데, 서진은 멋대로 지환의 아빠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늦지 않게 도착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전화가 끊긴 모양인지 서진이 핸드폰을 다시 지환에게 내밀었다.

    “밥 먹고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서진이 말하니 이렇게나 쉽게 허락하다니. 지환이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겠다고 했으면 분명 못 믿는다며 빨리 들어오라고 했을 게 분명했다. 제 과거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왔다.

    “밥을 뭔 다섯 시간 동안 먹는 것도 아닌데 데려다줘.”

    “형 아프잖아요. 길 가다가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시선이 정말 적응되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

    “그럼 택시 타고 갈게. 가는 길에 부모님이랑 전화하면서 가면 되잖아. 뭔 고딩 때도 안 해 본 짓을.”

    사실 그런 짓은 중딩 때도 안 해 봤다. 지금 나이가 몇인데 집 가는 길 위험하다고 부모님께 전화하면서 돌아가야 한다니.

    “형. 그냥 제 말 좀 들어 주면 안 돼요?”

    하지만 문득 나온 그 말에, 갑작스레 심장이 덜컹거렸다. 지환은 순간적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서진을 바라봤다. 얼핏 간절함이 돌던 눈동자가 빠르게 식으며 체념이 대신 자리했다.

    “야, 나가자.”

    여기 쟤를 혼자 놔두면 안 되겠다.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왜요?”

    “밖에서 먹어.”

    일단 공간을 좀 바꿔야 했다. 여기 있다가는 정말 싸울 것 같은데, 고딩이랑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싸우기나 하면 다행이다. 지금 봐서는 서진은 싸우기는커녕 혼자 속만 썩을 게 분명했다.

    “제가 만든 건 먹기도 싫다는 거예요?”

    “너 혹시 피해망상 같은 거 있냐?”

    지환은 바로 다시 문을 열며 서진을 바라봤다. 그러자 서진이 머뭇거리면서도, 겨우 걸음을 떼 현관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나서도 또 눈치를 보며 흘깃거리는 걸 보자니 속이 답답해졌다. 이 어린애랑. 절로 한숨을 내쉬자 서진은 기가 죽은 것처럼 시선을 내렸다. 이 어린애랑?

    지환은 서진을 밖으로 내보내고 저 역시 밖으로 나온 후 문을 닫았다. 공간을 바꾸는 것도 중요했지만, 더불어 사람이 좀 있어야 했다. 그래야 주위 눈치도 보면서 남이 들었을 때도 괜찮은 이야기만 하지. 지환은 사람이 없으면 지금 당장 서진에게 내가 너를 어디까지 건드렸는지, 너는 자의였는지, 무섭지는 않았는지, 당시 네 의견을 존중했는지, 그 외 기타사항을 물어볼 것 같았다.

    “형, 저랑 저녁 먹어 줄 거예요?”

    먹으면 먹는 거지 먹어 주는 건 또 뭔지.

    “어. 뭐 먹을래?”

    애써 착잡함을 내리누르며 엘리베이터를 잡자 서진이 자연스레 지환의 옆에 붙었다가, 살짝 다시 떨어졌다.

    “죽 먹으러 가요.”

    정말, 이해할 수도 없었다. 저 나이에 왜 이렇게 조신하지? 지환의 주변에는 다들 비슷비슷한 사람들뿐이었던지라, 이런 애는 정말이지 낯설었다. 심지어 저 얼굴에, 저 몸을 가지고. 그냥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서진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서진은 지환을 차에 태우더니 정말 죽집에 데려왔다. 그사이 용케 차 키는 또 챙겼네.

    “죽으로 외식하는 거 처음이야.”

    방금은 우선 자리를 바꾸는 데 급해서 그냥 서진이 뭘 말하든 그러자고 했지만, 정말 제 앞에 놓인 죽을 보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플 때도 딱히 죽을 먹어 본 적은 없는데. 애초에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아파 본 적도 거의 없었고.

    “아프잖아요.”

    “그래. 그렇지.”

    위장은 멀쩡했지만, 어차피 여기까지 온 데다 죽까지 받았으니 지환은 그저 긍정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하고 싶은 말 해 봐.”

    그나마 좀 움직이고 사람들이 얼마간 있는 곳으로 오자 서진과 지환 둘 다 꽤나 침착해졌다. 지금이라면 둘 다 적당히 말을 고르며 침착하게 대화라는 걸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에요. 저도 형 아프다고 하니까 좀 예민해졌던 것 같아요.”

    서진의 어조는 단정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계속 눈치를 보는 기색은 아니었다.

    “너 병원에 계속 있었다며. 그거 제대로 고맙다고도 안 했네.”

    “저는 정말 괜찮아요. 한 것도 없고. 저도 형 깨어날 때까지는 옆에 있고 싶었어요.”

    “너 우리 부모님 잘 알지도 못할 거 아니야. 그런데 거기 껴 있느라 고생했겠지.”

    “아니에요. 정말 잘 챙겨 주셨어요.”

    차분히 대화를 나누자니 현실감이 드는 동시에 현실감이 없었다. 지환은 지금껏 여자 친구들과 이런 분위기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다 고등학생 때라서 그런지 이렇게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조금 더 붙어 다니기도 했다.

    지환은 환자도 아니면서 굳이 지환 때문에 죽집에 와 제 몫의 죽을 얌전하게 떠먹는 서진을 잠시간 바라봤다. 내가, 얘랑. 지환은 한숨을 억누르며 다시 제 죽이나 떠먹었다.

    * * *

    어쩐지 계속 착잡했던지라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의 분위기도 꽤나 가라앉아 있었다. 지환이 그저 창밖을 바라보자, 운전을 하던 서진이 흘깃 지환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피곤해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지환은 고개를 돌려 서진을 바라봤다.

    “괜찮아.”

    그 고딩이 언제 이렇게 커서 이제는 운전을 하는구나. 지혜도 운전하려나. 정말 별생각이 다 들었다.

    “야, 너는 나 안 어색해?”

    결국 묻자, 정면을 바라보던 서진의 시선이 다시 지환에게로 닿았다.

    “형은 제가 어색해요?”

    “그런 뜻이 아니라,”

    하지만 지환이 말을 더 잇기 전 바로 서진의 목소리가 나왔다.

    “당연한 거니까 괜찮아요. 혼란스럽겠죠. 생각해 본 적 없을 테니까.”

    “그런 거 아니라니까. 넌 뭐 쓰레기랑 사귀냐?”

    얘는 생각할 시간을 많이 주면 안 되는구나. 서진과 대화할 때는 그냥 빨리빨리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 깨달음과 함께 지환은 바로 덧붙였다.

    “넌 괜찮냐고.”

    “저요?”

    조금쯤 얼떨떨한 듯이 나온 그 물음에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설마 내가 너 꼽 주려고 말 꺼냈겠냐.”

    반년이면 서로 성향 알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서진은 여전히 지환의 성격을 잘 모르나? 지환은 말을 돌려 할 줄을 몰랐다. 그러니 말하는 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내가 지금 너랑 사귈 때처럼 굴고 있지는 않을 거 아니야. 내가 이러는 거 좀 어색하고 섭섭하지는 않냐고.”

    물론, 현재 지환의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서진에 대한 기억이 없었으니 사귄다는 게 실감 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섭섭하게 하고 있겠지. 기억이 없으니 그걸 단번에 고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지환은 실수한 걸 사과할 정신머리는 있었다.

    그런 거 가지고, 심지어 애 상대로 자존심 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몰라서 잘못한 거 사과하는 게 뭐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도 되나.

    “괜찮아요. 형은 아파서 그런 건데 제가 왜 섭섭해요.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그런데 서진은 또 왜 죄송할까. 지환은 물끄러미 서진을 바라봤다. 기억이 돌아온다고는 했다. 하지만 안 돌아올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럼 나는 얘랑 헤어지나? 우선 사귀는 것부터도 전혀 현실감이 없었지만, 그래도 헤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막연하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너 원래 이래?”

    “저 이상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바로 나온 그 물음에 지환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내 이었다.

    “내가 혹시 너 때렸어?”

    그게 아니고서야 왜 이렇게 기가 죽은 것 같지.

    “네? 아니요. 왜 그런 말을….”

    그래도 서진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자니 그건 아닌 모양이라 다행이었다. 지환은 이런 타입과는 우선 상성이 맞지 않는다. 거기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류라 낯설기도 했다. 심지어 미성년자 때부터 봐 왔다는 게 계속 신경을 거슬리게 했고.

    그런데도 왜 헤어질 것 같지는 않을까.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정말 헤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계속 교복 입은 모습이 겹쳐져서 서진을 다시 그런 식으로 좋아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데, 그런데도 서진과는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한서진, 내가 너한테 잘해 줬어?”

    물끄러미 바라보며 묻자, 서진이 바로 답했다.

    “네. 엄청 잘해 줬어요.”

    다른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저 그대로 딱 떨어지는 답이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정말 그나마 다행이었다. 양심을 팔아먹었으면 잘해 주기라도 해야지.

    “정말, 너무 잘해 줬어요.”

    서진은 그대로 슬쩍 지환을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그래서, 정말 많이 좋아해요.”

    그래 보였다. 아닌 척 천천히 달아오르는 귓바퀴를 보자면 더 그랬다.

    “내가 너 많이 좋아했나 봐.”

    그 모습을 보자니 든 생각이라고는 그랬다. 아마 지환은 서진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서진은 지환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꽤나 익숙해 보였다. 짧게 보기로도 서진은 상대의 반응을 많이 살피는 편이다. 지환이 먼저 많이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네. 그랬어요.”

    그리고 서진도 그걸 알고 있고. 서진은 지금껏 조금씩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면서도, 지환의 마음을 확인하는 말은 한 적이 없다. 어차피 그런 걸 물어봤자 명확한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사실 믿음이었다. 그래서 지환도 서진과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의심스럽지는 않았다. 서진은 지환의 마음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귀는 것도 말했겠지.

    처음부터 그 대상을 말한 건 아니지만, 애초에 지환이 남자와 사귄다는 말을 먼저 꺼낸 것도 서진이었다. 지환이 취급주의의 정체를 스스로 눈치채지 않았더라도 서진이 알려 줬을 걸 알아채기 어렵지 않았다.

    “사실 제가 형 속 많이 썩였거든요. 힘들게 하고.”

    아마 반대였을 것 같은데. 그래도 지환은 모르는 일이니 그저 들었다. 분명 지환도 그 원본을 함께 갖고 있었겠지만, 지금의 지환은 그 원본을 잃었다. 그와 더불어 저 자신의 해석까지도 잃었던지라 지환은 청자의 입장으로 내려와 그저 서진의 해석을 들었다.

    “그런데도 형은 계속 제 옆에 있으면서, 좋아한다고 해 줬어요.”

    왜 좋아했는지는 알겠다. 서진은 깨끗하다. 사고하는 방식이 특히 예쁜 구석이 있었다. 당연히 그걸 좋아했겠지. 이런 사람은 절대 흔치 않다. 거기다, 저 자신이 불안하다 하더라도 상대를 위해 똑바로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드물다. 그건 다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나 냉큼 잡아채 오다니.

    “그래서 이제는 저도 형이 저 많이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대로 어느덧 부드럽고 조용히 안정된 시선이 지환에게로 닿았다.

    “그러니까, 형.”

    옅게 무언가를 숨길지 말지 고민하는 기색이 살짝 떠올랐다가, 이내 맑게 걷혔다.

    “제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도대체 지환은 무슨 짓을 한 걸까.

    “예전에 형이 그랬어요. 저도 저를 걱정해야 한다고.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그래도 이제는 제가 안 그러면 형까지 힘들어지는 거 알아요. 형은 저 많이 생각해 주니까.”

    순간 휩쓸리듯 시선이 얽혔다.

    “그리고 저는 형이 저 많이 좋아하는 거 알아서, 이제는 정말 괜찮아요.”

    이건 정말, 꽤 큰일인데.

    “그러니까 지금은, 형은 형만 걱정하면 돼요.”

    부드럽게 말한 서진은 또 금세 살며시 지환의 표정을 살폈다.

    “그래도 형 부담 주는 건 아니에요. 형이 제일 힘들 텐데. 마음 편하게 갖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

    지환은 서진이 보지 못하게 손을 꽉 쥐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기억이 빨리 돌아와야만 했다. 지환은 기억상으로 연애한 지가 이미 한참이었다. 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저 정도로, 이렇게 애를 잘 구워삶아 놓을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래.”

    그 답을 한 지환은, 서진의 조심스러우면서도 무르지는 않은 그 확신을 곱씹었다. 그러고는 치밀어 오르는 탄식을 겨우 집어삼켰다. 하, 씨발, 진짜 건드렸구나. 그래. 반년인데 안 건드렸을 리가 없지. 이미 예상은 했지만, 정말 예상을 벗나가지를 않는 깨달음에 속이 다 쓰렸다.

    * * *

    그대로 집으로 돌아온 지환의 꿈에는 교복 입은 서진이 나왔다. 처음 봤을 때처럼 지환과 눈높이가 비슷한 꿈속의 서진은 언제부터 자신을 그딴 더러운 눈으로 봐 왔던 거냐고 싸늘히 물었다. 그 동시에 지환은 잠에서 깼다.

    지환은 쿵쾅거리는 제 심장 박동을 느끼며 천장을 바라봤다. 꿈을 꾼 걸 보면 분명 방금까지 잠들어 있었을 텐데, 지금은 잠기운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꼭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을 때 같이 가슴팍이 아릿하게 심장이 뛰는 와중에도, 저를 바라보던 서진의 싸늘한 시선이 아른거렸다.

    죽자, 죽어. 지환은 몸을 돌려 엎드린 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답답하게 숨이 막혔지만, 지환은 지금 개운할 자격이 없었다. 만일 지환이 과거의 저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우선 한 대 치고 대가리에 뭘 넣고 다니는 거냐며 욕을 한 다음에, 그다음에, 그다음은….

    책임지고 잘해 주라고 해야겠지. 분명 그만큼 좋아하기는 했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교복 입는 시절을 지켜본 애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 애랑 사귈 용기를 내는 게, 그게 용기가 맞기는 한가 싶지만, 어쨌든 가벼운 마음은 아닐 게 분명했다. 양심을 버려야 하는 일인데 가벼우면 안 되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건 정말, 모를 수가 없었다.

    삼 초쯤 죽고 싶었다.

    * * *

    [데이트할래?]

    [네]

    답이 빠르기도 했다. 지환은 바로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하고 싶어요.]

    전화가 걸리자마자 받고, 받자마자 나온 그 말에 지환은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가 컴퓨터를 켰다.

    “요즘은 데이트하면 뭐 해?”

    지환의 기억은 제대 직후쯤에 머물러 있었다. 기억상으로는 고등학교가 마지막 연애라, 연애를 한 지가 꽤 됐다. 그 이후로는 쭉 연애고 데이트고 하지 않으며 가볍게 지내다가, 제대 후에야 하늘과 세 번쯤 데이트했다.

    중간중간 우연을 가장하며 일상적으로 만난 것까지 하면 더 되기는 하지만, 정식으로 약속을 잡은 거라고 하면 세 번이었다. 아마 다음번이 고백이었겠지. 기억상으로는 굉장히 최근의 일인데도, 어째 굉장히 오래된 일 같기도 했다.

    [형은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요?]

    그렇게 물어도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지환은 그냥 서진과 데이트든 뭐든 해야겠다 싶어서 하자고 한 거지, 구체적으로 뭘 하고 싶은 건 없었다. 서진과 같이 있으면 뭐라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자신이 서진에게 너무했다 싶은 것도 있었다. 조금이나마 잘해 주고 싶었다.

    “너는? 원래 우리 데이트하면 뭐 했는데?”

    하늘과의 첫 데이트에는 전시를 보러 갔다. 어디서 전시 표를 얻었는데, 그렇게 말을 걸었다. 물론 얻지 않았고 샀다. 현정에게서 하늘이 그 전시회에 관심이 있지만, 같이 갈 사람 구하기 귀찮아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거짓말하기는 싫어 데이트가 끝날 때쯤 사실 우연은 아니었고 그냥 지환이 하늘과 함께 오고 싶었다고 밝히기는 했다. 당연히도, 하늘도 알고 있었다고 했고. 정말 오랜만의 데이트라 꽤 어색하게 굴었던 것 같은데, 용케 두 번째 데이트를 약속받기는 했다.

    서진과의 첫 데이트는 어땠을까. 서진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서진은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지환이 먼저 좋아한 것 같으니 미리 취향이라도 어느 정도 알아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의 지환은 정말이지 서진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보통은 그냥 집에 있었어요.]

    “그런 거 말고. 데이트 어디 갔을 거 아니야.”

    [우리는 보통 집에 있었어요.]

    남자 둘이서 어디 갈 곳이 많지는 않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장 최근 데이트가 어디였어?”

    잠시 서진에게서 아무 말도 없었다. 아마 꽤 전인 게 분명했다.

    “내가 너한테 잘했다며?”

    그런데 데이트도 그렇게 드물게 했다고?

    [네. 꼭 밖에서 많이 만나야 잘하는 건 아니잖아요. 집에서 매일 같이 있으면 되는 건데.]

    그거야 그랬다. 하지만, 그러면 상대가 느끼는 게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지환은 고등학교 때 여자 친구와 그렇게 지내다가 넌 내 몸만 보고 만나냐며 뺨을 맞아 본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을 발판 삼아 그 이후로는 적어도 주말에는 바깥으로 나가기도 하고 그랬는데.

    “한서진, 넌 밖에 나가는 거 안 좋아해?”

    [싫어하는 건 아닌데, 저는 그냥 형이랑 있으면 다 좋았어요.]

    잘해 준 거 맞나?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혹시 서진에게 연애 경험이 얼마 없어서 잘해 주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를 모르는 거 아닌가 싶었다. 지환이 애를 속여 먹이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한서진, 너 연애 좀 해 봤지?”

    [네? 왜요?]

    “아무튼, 좀 해 봤지?”

    이건 현재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서진도 스물 넘은 남자에다가 인기도 많았던 게 분명했고 지환과 사귄 지 반년이라고 했으니 이전에 몇 번의 연애를 거쳤을 게 분명했다. 그러면 서진이 적어도 잘해 주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구별하고 있겠지.

    [형이 제 첫 연애예요.]

    아니었다. 서진은 구별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왜?”

    [네?]

    왜 지환이 첫 연애지? 그 얼굴에 그 몸을 달고 어쩌다가?

    “내가, 알았지? 너 처음인 거.”

    [네.]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게, 말이 되나. 양심이, 말이 되나. 지환은 상대의 경험 여부를 전혀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안이 달랐다. 도대체 어쩌다가. 그것도 미성년자 때부터 봐 온 애를. 아무래도 지금 기억을 잃어 도덕성이 돌아온 틈을 타 서진을 지환에게서 벗어나게 해 줘야 하는 건 아닐까. 혹시 세상이 지환에게 바른 일을 할 기회를 준 게 아닐까.

    [부담스러워요?]

    지환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너한테 잘해 줬다고?”

    [네. 형, 저 때린 적도 없고 욕한 적도 없어요.]

    확실히 바로 얼마 전에 지환이 서진에게 그런 걸 묻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잘해 주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야, 그건 씨발 새끼고 잘해 주는 건 다르지.”

    씨발놈과 잘해 주는 연인 사이에는 수많은 중간지점이 있다. 지환은 그럭저럭한 개새끼였을지도 모른다. 서진의 첫 연애 상대가 지환이니, 뭐든 지환의 기준으로 맞춰 놓고 그게 잘해 주는 거라고 세뇌했을 수도 있다. 역시 기억을 잃은 건 옳은 일을 하라는 계시가 아닐까.

    [정말 잘해 줬어요.]

    “뭘 잘해 줬는데?”

    [그냥, 다 잘해 줬어요. 정말이에요.]

    믿지 못하는 기색이 전화 너머로도 전해지는지, 서진이 말을 이었다.

    [늦으면 늘 집도 데려다주고 항상 좋은 말 해 주고 생일에는 선물도 주고 생일 아니어도 늘 뭐라도 해 주려고 하고,]

    “그건 존나 당연한 거지.”

    그것도 안 하면 그걸 애인이라고 부를 이유가 있나? 지환은 저거 못 했다가 헤어진 경험이 몇 번 있었기에, 이제는 그게 필수적이라는 걸 잘 알았다. 거기다 사실 서진이 늘어놓은 것들은 애인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좋은 말 뭐 했는데?”

    [그냥, 그냥.]

    어째 서진의 목소리에 머뭇거림이 담겨 있는 게 더 의심스러웠다.

    “뭐 해 줬냐고.”

    [저보고 맨날, 그랬어요.]

    “뭘?”

    그 물음에 서진이 잠시 침묵했다. 좋은 말이라면서 말 못 할 이유는 뭐지? 좋은 말이라는 게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말하기 조금 그래요.]

    결국 나온 그 말에 지환은 눈가를 찌푸렸다.

    “좋은 말이라며?”

    [형한테는, 형 생각에는 좋은 말이었던 것 같아요.]

    “그럼 너한테는?”

    [저한테도, 좋은, 좋은 말은 맞는데.]

    역시 도망가게 도와줘야 하나 싶었다.

    “한서진, 뭐였냐니까?”

    또다시 묻자, 서진이 고민하는 기색이 전화 너머로도 그대로 느껴졌다.

    [그냥 저한테 맨날, 예쁘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어진 말에, 지환은 반사적으로 답했다.

    “아, 예쁘다고.”

    예쁜가? 물론 서진은 잘생겼다. 아무래도 남자 얼굴이라 큰 감흥은 없을지언정, 처음 봤을 때부터도 그거야 알았다. 그래도 그거랑 예쁜 거랑은 다르지 않나. 물론, 분위기가 단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쁘장한 부류는 아닌데.

    그러고 보니 가족들에게도 서진을 예쁘다고 말해 놨다고 했다. 잘생겼다고 말하기가 힘들어 그렇게 말해 놓은 줄 알았는데, 서진한테도 예쁘다고 했었다니. 지환은 곰곰이 서진을 떠올려 봤다. 예쁜가?

    [저도 아닌 거 알아요. 그냥, 그랬다고요.]

    그 낮고 차분한 목소리를 듣자면 더 그랬다. 아무래도 예쁜 타입은 아닌데. 키 크고 몸 좋다고 예쁘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만, 서진은 선이 뚜렷하고 인상이 차가웠다. 거기다 지금은 지환의 기억보다 시간이 지난 탓인지 앳된 기가 사라져 그나마 유한 기운까지도 다 없어졌고. 목소리까지도 고운 기색 하나 없이 잘생기기만 했는데.

    [아무튼 항상 잘해 준 거 맞아요.]

    “그런데 너는 내가 그런 말 하는 거 싫어했던 거 아니야?”

    서로 아닌 거 뻔히 아는데도 그랬다는 게 이상했다.

    [싫어한 건 아닌데, 민망하잖아요. 아닌 거 아는데.]

    “그럼 네가 싫다고 하는데도 내가 계속 말한 거잖아.”

    괴롭힌 거 아닌가 싶었다. 서진도 예쁘다는 말이 민망해서 말하기 머뭇거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지환이 직접 서진에게 했다니. 그때도 서진은 민망해했을 게 분명했다. 그걸 다 알면서도 계속 말했다는 건 역시 괴롭힌 게 아닌가.

    [그런 거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정작 서진은 어색하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형이, 원래 사귀면 다 그런다고, 다 예뻐 보이는 거라고 그랬어요.]

    그러고는 그 목소리가 잠깐 끊겼다, 이어졌다.

    [저도 안 예쁜 거 알아요.]

    조금쯤 머쓱한 그 어조에, 지환은 바로 답했다.

    “야, 왜, 예뻐 보일 수도 있는 거지.”

    [저 지금 그런 말 바라는 거 아니니까 굳이 할 필요 없어요.]

    어느덧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에, 지환은 애매하게 말했다.

    “아니, 나도 딱히 위로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좀, 예뻐 보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좋아하면.”

    예쁜가 하고 생각해 보면, 예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진이 말한 대로, 지환이 말했다는 대로, 좋아하면 예뻐 보일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지환은 자신이 한 말에 조금 민망해졌다.

    사귄다고는 해도, 지환의 기억으로는 아니었다. 그래서 동생 남자 친구의 사촌으로 만난 남자애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어색했다. 그건 서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전화 사이로 머쓱한 침묵이 흘렀다.

    “데이트는 어떻게 할래?”

    겨우 침묵을 끊고 묻자, 서진이 답했다.

    [형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요.]

    역시나 얌전한 답이었다. 지환은 컴퓨터에 앉아 데이트 장소를 검색해 봤다. 뭐가 많이 바뀌었을까 싶었는데, 검색 결과를 보자 딱히 바뀐 것도 없었다.

    “요즘에는 데이트 잘 안 한 거지?”

    [바빠서 그런 거예요. 형 졸업해야 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기는 했다. 그 와중에 취업은 한 걸 보니 꽤나 바쁘게 보냈을 것 같기도 했고.

    “그럼 전에는 어디 갔는데?”

    하지만 이번에도 잠시간 답이 없었다.

    [그냥, 그때그때 가고 싶은 곳 갔어요.]

    어지간히 집에만 있었던 모양이다.

    “영화관 갈래?”

    아무래도 예나 지금이나 무난한 장소였다. 영화 보고 나면 이야기할 화제도 자연히 나오고.

    [가고 싶어요? 지금 상영 중인 영화 보고 싶은 거예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싫어?”

    [그런 건 아닌데, 스트레스 받으면 어떻게 해요? 밀폐되고 어두운 공간이잖아요. 거기다 소리도 큰데. 사람도 많고.]

    그런가. 아무래도 서진이 걱정하니 다른 곳이 좋을 것 같았다.

    “너 전시회 같은 건 좋아해?”

    [형은 안 좋아하잖아요.]

    반년을 사귀었다더니, 아무래도 취향을 어느 정도 알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너 좋아하냐고. 너.”

    묻기는 했지만, 서진도 전시회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서진이 전시회를 좋아했다면 지환도 그런 척을 했을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그 정도 내숭은 필요한 법이었다. 거기다 지환도 굳이 찾지 않을 뿐이지 전시회 자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고.

    [저는 형이 좋은 게 좋아요.]

    지환은 그 이후로도 검색 결과를 참고해 온갖 곳을 다 물어봤다. 공원, 식물원, 놀이공원, 실내 스포츠, 게임, 고궁 등등을 언급한 결과 지환은 아무래도 집에만 있던 게 제 잘못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야, 왜 우리가 집에만 있었는지 알겠다.”

    어째 서진의 눈에는 뭐든 다 위험한 모양이었다. 거기는 사람이 많고 그러다가 다치면 어쩌고 거기는 또 이래서 위험하고.

    [영화관 가요.]

    지환의 말에 서진이 바로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던 영화관을 말하자, 지환은 데이트 장소들을 검색했던 걸 지우고 핸드폰 GPS 내역을 확인하며 답했다.

    “아니야. 나도 영화 보고 싶었던 거 아니니까. 그냥 데이트 어디 갈지 몰라서 그랬어.”

    거의 집 학교 집 학교 집 학교였다. 그 와중에 또 매일 서진의 집에도 갔다. 사실 머무른 시간을 보자니 꽤 오래 있기도 했다. 정확히 확인해 보려 아무 날이나 골라 봤지만, 고를 때마다 늘 서진의 집에 갔고 오래 있었다. 사이는 좋았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이렇게 머무른 시간까지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 기술이 많이 좋아져 있었다. 사생활 침해와 유용성 사이를 생각하고 있자, 문득 서진이 물었다.

    [지금 뭐 해요?]

    “예전 기록 좀 보고 있었어.”

    [뭐 나왔어요?]

    “너랑 사이좋았던 것 같다는 거.”

    [말했잖아요.]

    “그러게.”

    듣기는 했지만, 실제 데이터로 확인받자 어째 기분이 미묘했다.

    [형.]

    “어?”

    자연스레 되묻자, 서진이 이어 물었다.

    [우리 데이트는요?]

    “해야지.”

    [저는 형이랑 있기만 해도 좋아요. 괜히 무리 안 해도 돼요.]

    무리는 안 해도 되지만 같이 있기는 하자는 소리구나. 아마 집 데이트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새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져 있는 것도 같았다. 하긴, 반년이면 한창 좋을 때기는 했다. 사실 지환은 이전에 반년 이상 연애해 본 적이 없어 저 자신의 경험은 아니었지만, 다들 그렇다고들 했다.

    “너희 집으로 갈게.”

    [제가 데리러 갈게요. 형 부모님께 허락도 받고.]

    또 무슨 허락인가 싶어 떨떠름해하며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서진은 끝까지 지환 혼자 움직이게 할 수는 없으며 더불어 부모님 허락도 받아야 한다고 단호히 나왔다. 지환은 결국 그러기로 하고 전화를 끊으며 서진이 언제쯤 올지를 가늠해 봤다.

    그러다 지환은 문득 핸드폰을 확인했다. 연동 시스템은 잘 작동하고 있었다. 그사이 클라우드 시스템이 이름을 바꾼 모양인데, 그래도 기본적인 건 같았다. 핸드폰이야 당연히 이미 확인했지만, 핸드폰에 서진의 사진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클라우드까지 더하면 시간의 흔적에 따라 정보가 더 많을 것 같았다.

    사실 지환은 꼼꼼한 편이 아니라, 전 연애의 흔적을 다 지우지는 않았다. 그래도 전 여자 친구 전화번호를 그대로 놔뒀다가 당시 여자 친구에게 걸려 싸운 이후로는 전화번호 정도는 지웠지만, 다른 것들까지 다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러니 아마 클라우드에는 그 시절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 조금 걱정되기는 했다.

    지금은 워낙에 현재 저와 사귀는 사람의 의외성 때문인지 하늘의 생각이 크게 나지는 않았지만, 사진을 보면 또 떠오르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막상 클라우드를 들어가도, 하늘의 사진은 없었다.

    그리고 날짜를 확인하니 거의 통째로 없어진 기간이 있었다. 약 1년 반에서 2년 정도. 아마 이 기간이 하늘과 사귄 기간인지도 몰랐다. 그 추측이 사실이면 생각보다 오래 사귀었네. 그런 짧은 감상과 함께, 아무래도 지환이 서진을 정말 많이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환은 원래 전화번호나 정리하면 꽤 신경을 쓰는 건데, 굳이 클라우드 백업까지 다 없앨 정도라면 지환 딴에는 상당히 섬세하게 처리한 셈이다. 이런 건 보통 한참 뒤에 여기에도 남아 있었구나 하고 발견하게 되는 건데.

    지환은 그대로 지난 반년여의 사진을 확인했다. 확실히 핸드폰보다는 많은 사진이 있었지만, 여전히 드문드문하기는 했다. 그런데 어째, 사귄 건 반년이라더니 실제 기간은 그보다 더 되는 것 같았다.

    그보다 몇 달 전부터 계속 서진 같은 사진이 보이고는 했다. 서진이 완전히 나온 건 아니지만, 예를 들면 맞은편의 손이라든가, 아니면 뒷모습이라든가, 저건 서진이지 싶은 단편적 모습이 계속 나타났다.

    계속 사진을 찍으며 귀찮게 했는지 주변이 연속적으로 찍히다가 결국 손으로 카메라가 가로막힌 사진도 있었다. 사진 하나는 노트 같은 걸 찍었기에, 수업 내용 중 하나인가 하고 보니 ‘가만히 있어요’라고 적힌 글귀를 찍어 놨다. 이것도 아마.

    지환은 제 연애를 점점 더 알 수 없어졌다. 예전부터도 서진을 꽤 귀찮게 한 증거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괴롭힌 거 맞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점점 더 기분이 모호해져 지환은 가만히 화면을 바라봤다. 서진이 사귀기 시작했다고 말한 반년보다 조금 더 전, 이미 지환이 찍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그게 거슬린다는 듯이 눈가를 찌푸리고는 노트북을 보고 있는 서진의 옆모습을.

    지환은 세심한 편은 아니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호감을 알아차리는 것에는 탁월했다. 누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저를 바라보는 눈이 어떤지는 늘 어렵지 않게 즉각적으로 알아차렸다. 짧지만 많은 연애 경험 덕일 수도 있고, 그 덕에 짧지만 많은 연애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굳이 제 일이 아니더라도, 쟤가 쟤 좋아하는구나 싶은 건 빠르게 느낌이 오기도 했다.

    그런 지환의 시선으로, 그 사진은 친구 같지 않았다. 사실 그 이전부터도 조금씩 그런 기색이 보였다. 친구를 이런 식으로, 이런 시선으로 담지는 않는다. 그만큼이나 서진을 나타내는 사진들은 조금 더 가깝고, 사적이고, 보고 싶은 부분을 담아냈다. 자신이 보고 있는 부분을.

    서진은 그냥, 괜찮았다. 기억보다 착하고, 예상치 못하게 예민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괜찮았다. 왜 좋아했는지도 알겠다. 하지만 그건 머리로 아는 부분이다. 지금의 지환이 진심으로 느끼기에 서진은 그저, 괜찮다. 그래서 기분이 미묘했다.

    지환이 기억을 되찾지 못하면, 그래도 이 애를 다시 좋아할까. 다시 한번 예쁘다고 여기게 될까. 또 사진 속의 이런 시선으로 보게 될까. 잘 알 수가 없었다.

    * * *

    서진은 확실히 애가 참 괜찮았다. 조신하고 얌전한 게 누구나 제 딸이 이런 애와 사귀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을까 싶었다. 첫인상이 싸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만 조금 섞어 보면 서진이 정말 괜찮다는 거야 금방 알 게 분명했다.

    지환은 늘 남자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여자 보는 눈에는 사례가 좀 부족할지언정 남자 보는 눈만큼은 정말 확실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자 없는 남자란 없다는 전제를 깔고 간다는 게 증거였다. 그 덕에 친구들이 남자 친구를 사귀고 조금 애매하다 싶으면 지환에게 데려올 때도 있었다. 그런 지환의 눈에도 서진은 정말 괜찮았다.

    아무래도 첫인상이 강렬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면 뭐, 이해할 범위였다. 앞에서든 뒤에서든 그보다도 더 노골적이고 음습한 이야기를 하는 놈도 많았다. 아무래도 그때는 서진이 고3이라 예민했던 것 같기도 했고.

    서진 정도면 친구들이 남자 친구라고 데려와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말해 줄 범위였다. 눈치를 좀 보기는 해도, 지환이 병원에 있을 때의 이야기를 듣자면 일이 나도 침착한 모양이었다. 애가 참 괜찮지.

    하지만, 지환은 그런 거 생각하고 누군가를 사귀어 본 적은 전혀 없었다. 보통 어떤 사람을 사귀게 될 때는, 괜찮다는 생각보다 끌린다는 느낌을 받지 않나.

    “형.”

    “어.”

    결국에는 서진의 집에서 데이트인지 뭔지를 하는 참이었다. 서진은 지환의 취향을 정말 잘 알았다. 그 증거로 지환과 서진은 지금 강아지 영상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 취향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지, 알고리즘보다 지환의 선호도를 잘 맞췄다. 어째 틀어 주는 영상마다 귀여웠다.

    “지루해요?”

    “아니. 귀여운데.”

    서진과 아무것도 안 하며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기우였다. 심지어 기억은 잃었어도 몸은 기억하는지 분위기도 편안했다.

    “너도 강아지 좋아해?”

    “네. 형이랑 나중에 키우기로 했어요.”

    “그래?”

    “그랬어요. 저도 강아지 정말 좋아해요.”

    그런가. 잘 상상이 안 됐다. 서진의 집은 너무 깔끔했다. 이런 공간이 어질러진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됐다. 본인도 그런 거 안 좋아할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은 동물 키우면 스트레스가 크다고 했다. 그래도 사랑으로 어떻게 되려나.

    “너도 원래 이런 거 자주 봐?”

    “그렇기는 한데, 사실 이것들은 형이 좋아하던 영상들이에요.”

    “취향 여전하네.”

    어째 너무 완벽히 지환이 좋아할 만한 영상들이다 했다. 사실, 서진이 그냥 지환의 선호도를 완벽히 알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지금도 놀라웠다. 이런 지나가는 영상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주고 있었다니. 이건 또 다른 의미로 신기했다. 확실히 서진은 세심한 구석이 있었다.

    “오늘은 몸 괜찮아요?”

    “응. 그러니까 왔지.”

    기억을 잃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은 있다. 강아지는 여전히 귀여웠다. 지환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화면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너무 화면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실감은 나지 않지만 나름대로 데이트인데.

    지환은 조금 더 성의 있는 답변을 위해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은 영상을 틀어 주고 나서도 지환을 종종 살피고 있었는지, 마침 딱 눈이 마주쳤다. 서진이 슬그머니 다시 시선을 돌리자 지환은 제 등허리쯤을 짚었다.

    “나 멍도 거의 없어졌어.”

    사고당하며 외상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몇 군데 타박상이 있기는 했다. 지환은 확인시켜 주듯 제 티를 걷어 올려 저 역시 멍을 확인했다. 아직 며칠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워낙에 회복력이 좋은지라 벌써 멍이 점점 빠지고 있었다.

    “아프지는 않아요?”

    “어.”

    원래도 운동 같은 걸 좋아해 자잘하게 멍이 들고 빠지기를 반복했던지라 지금도 생활하는 데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다. 지환은 제 허리쯤을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서진의 시선을 바라봤다가, 문득 주섬주섬 옷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사귀는 사이였다.

    지환은 남자끼리 이 정도 몸 보여 주는 걸 정말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사귀는 사이였다. 그럼 혹시 조금 더 조심스러워야 하나. 거기다 서진은 처음이었다는데.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닌가 싶었다.

    서진 역시 일순간 머뭇거리는 지환의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하지만 이 상황에는 딱히 어떤 말을 하기도 이상했다.

    “한서진.”

    “네.”

    여전히 조신한 그 답에, 지환은 머뭇거렸다. 이걸 물어도 될까.

    “그러니까, 내가 너랑….”

    “네?”

    지환은 의아함이 묻어나는 그 목소리에, 결국 물었다.

    “잤지?”

    만일 기억이 아예 돌아오지 않는다면, 언제고 알기는 해야 했다.

    “싫어요?”

    그렇다, 아니다의 답은 아니었지만, 잤다는 건 알았다. 그런데 싫냐는 물음은 또 뭘까. 그건 지환이 물어야 했다. 더불어, 자의였는지, 충분한 동의를 얻었는지 역시도.

    “싫고 말고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그냥 모르는데.”

    “그래도 지금 느끼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어떻게 생각해요?”

    현실 같지 않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았다.

    “별생각 안 해.”

    지환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서진을 살폈다.

    “너도 휩쓸린 건 아니지?”

    “네. 저도 하고 싶었어요.”

    그나마 서진의 답이 즉각적이고 단호해 다행이었다.

    “그래, 그러면.”

    어째 허탈했다. 이미 그럴 거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그랬다니.

    “좀, 내가 너무 이르게 그런 건 아니지? 너 준비 안 되어 있는데.”

    이어서 물어보자, 서진이 찬찬히 답했다.

    “조금 이르기는 했는데, 준비 안 되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언제였는데?”

    “사귄 지, 한 달 좀 넘었을 때요.”

    안 빠른데. 빠르다기에 지환은 혹시 사귄 첫날 했나 싶었다. 그런데 한 달이면 충분히 시간을 둔 셈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게 안 빨라요?”

    그런 지환의 기색을 알았는지, 나온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은 되물었다.

    “적당한 거 아니야?”

    지환의 기준에서 한 달이면 긴 편이었다. 한 달을 못 간 연애도 있는데. 그래도 서진이 처음이라니 배려한 모양이었다. 그나마 그 정도 정신머리는 있었다는 게 위안이었다.

    “그래요.”

    차분하게 떨어진 답에 지환은 잠시 여전히 귀여운 강아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서진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신경 쓰였던 걸 말해야지 싶었다.

    “한서진, 그런데 너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뭘요?”

    “내가 너랑 자는 거 어떻게 느꼈을지, 그런 거.”

    왜 바로 싫냐는 소리가 나왔나 했다. 설마 지환이 눈치를 준 건 아닐 텐데. 그럴 리는 없다. 씨발놈, 그랬으면 죽여 버려야지. 어린애를 벗겨 먹고 어디 감히.

    “나는 잘 모르잖아. 그런데 그때 내가 너랑 잤으면, 그건 분명 네가 좋아서 그런 거야.”

    정말 좋아했지 싶었다. 사실, 자는 데 반드시 사랑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물론, 어느 정도의 호감은 있어야 했지만 지환의 그 기준은 꽤나 낮았다. 하지만 서진에게만큼은 다르다. 서진과는, 정말 많이 좋아해야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양심이 너무도 크게 걸렸다.

    지금도 지환은 서진과 사귀는 것 자체는 실감이 나지는 않아도 싫은 건 아니었다. 다시 좋아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과연 서진과 잘 수 있을까 싶은데, 이전에는 이미 그랬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건 분명 많이 좋아했다는 뜻이다.

    지환은 호감 정도면 잘 수 있지만, 서진에게는 그거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잤다는 건 분명히 좋아한다는 뜻이고, 서진 역시 지환이 자신을 많이 좋아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또 잤을 거 아니야. 싫었으면 왜 그랬겠어.”

    서진이 협박한 것도 아닐 텐데. 거기다 만일 지환과 서진 사이의 섹스가 조금이라도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면, 그건 전적으로 모두 지환의 탓이었다. 그렇게 굴러먹고도 처음인 애 하나 만족을 못 시켜 줬으면 그 새끼가 시원찮은 새끼인 게 당연했다.

    지환은 그대로 물끄러미 서진을 바라봤다. 지환이 표현을 많이 안 했나. 그래서 이러는 건가.

    “너도 그랬잖아. 내가 너 많이 좋아했다며.”

    “네.”

    하지만 그렇다기에 서진은 지환이 자신을 좋아했다는 걸 정말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네. 그럴게요.”

    그러고는 다시 시선이 살짝 내려갔다. 이건 방금이랑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지환은 저도 모르게 서진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이윽고 살며시 시선을 올리던 서진과 또 눈이 마주쳤다. 다시 서진의 시선이 슬그머니 내려갔다. 이건, 부끄러워하는 거지. 조금 수줍어하는 기색인지도 몰랐다.

    그걸 깨닫자 작게 웃음이 흘렀다. 어리긴 어리네. 그러고는 바로 표정이 굳었다. 그런데 잤네.

    “야.”

    “네.”

    조신한 답에 지환은 서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 왜 아직도 나한테 존댓말 해?”

    바로 어제도 이런 말을 했는데, 그때는 워낙에 당황스러워서인지 바로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런데 정말 서진이 계속 존댓말을 하는 걸 들으니 더 죄책감이 올라오고는 했다. 차라리 말을 놓으면 나을 텐데.

    “천천히 놓기로 했어요.”

    “너 그러고 안 놓을 거잖아.”

    서진이 하는 말을 듣자면, 사귀면서도 이미 이런 대화를 해 본 것 같았다. 그런데도 반년인데 여전했다. 더 지난다고 놓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 서진의 표정이 살짝 굳자, 지환은 황급히 말했다.

    “야, 아니, 아니야. 싫으면 하지 마. 하지 말자.”

    서진의 표정에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는데도 어쩐지 빨리 달래야 할 것만 같아 다급히 말하자, 서진의 표정이 어느새 차분히 돌아왔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말 놓겠다고?”

    “지금 당장은 말고, 천천히 놓을게요.”

    방금 했던 말과 같았다.

    “그럼 이름 불러 봐.”

    그 말에 서진이 지환을 가만히 바라봤다.

    “원래 사귀면 나이 좀 달라도 이름 부르고 그러잖아.”

    지환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되새겨 봤다. 딱히 말을 잘못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저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까.

    “불러 봐.”

    그나마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지만 그 말에도 서진은 그저 가만히 지환을 바라봤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서진은 살짝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고도 그 안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지환아.”

    이윽고 나온 작은 목소리에, 지환은 순간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한 채 서진을 바라봤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모든 게 밑으로 쓸려 내려간 것처럼 일순간 속이 싸늘했다. 무언가 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가만히 서진을 바라보자, 문득 서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한서진?”

    그 갑작스러운 행동과 영문 모를 사과에 얼떨떨하게 서진을 올려다보자, 서진은 바로 답했다.

    “죄송해요, 잠깐만.”

    지환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서진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바라봤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정말로.

    * * *

    서진은 굉장히 금방 방에서 나왔다. 거기다 방에서 나온 얼굴도 평소처럼 차분하기만 했다. 그다음은 당황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한 후,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지환도 거기에 할 말은 없었다. 그 이후로도 모든 건 평범하고 평온했다.

    저녁 시간이 돼서는 서진이 차렸다는 음식을 먹었다. 요리도 잘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지라 정말 네가 했냐고 물어봤는데, 그렇다는 답을 받았다. 실제로도 맛있어서 놀랍기도 했다. 그냥, 그렇게 나머지 시간을 보냈다. 정말이지 별일 없이.

    서진이 데려다주는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지환은, 평온히 데이트를 마쳤음에도 계속해서 찝찝함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고작 이름 부르라는 말이 어쩌다 잘못됐을까. 서진은 왜 그랬을까. 거기다 지환은 또 왜 그렇게 기분이 이상했을까.

    사실 그 기분은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서진에게 티를 내지는 않으려 했지만, 성공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진이 집 있다가 왔어?”

    현관을 열자마자 나온 물음에 지환은 대강 답하며 신발을 벗었다.

    “어.”

    “너 여자 친구는? 그 친구한테도 잘 말했지?”

    지환이 그간 정말 서진이라고는 밝히지 않아도 서진의 이야기를 많이 하기는 했는지, 가족들은 지환의 여자 친구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

    “서진이랑 아는 사이라며.”

    “어.”

    서진과 아는 사이가 아니라 서진이었다. 그러니 따지자면 아는 사이도 되겠지. 자신이 자신을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최지환.”

    “어.”

    지환은 멍하니 방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멈춰 부모님을 바라봤다.

    “내가 내 애인 자랑 많이 했어?”

    “엄청 했지. 아빠한테도 전화로 맨날 자랑하고.”

    “그랬겠지?”

    그래, 그랬을 것 같았다. 이미 그랬다고 들었다. 심지어 예쁘다는 말도 정말 많이 했다고 했다. 예쁜 얼굴도 아닌데. 그런데, 그런가? 안 예쁜가?

    “얘가 또 왜 이래. 너 혹시 또 어디 아프니?”

    지환은 곰곰이 바로 방금까지도 봤던 서진을 떠올려봤다. 딱히, 예쁘지 않다고는 못 하지 않나. 좀 예쁜 구석이 있지 않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역시 예쁘기는 하지.

    “저녁 먹었지?”

    “어. 한서진이 만들어 줬어.”

    “서진이 요리도 잘하니?”

    “어. 걔….”

    실제로도 서진은 요리를 잘했다. 그래서 그저 답하던 지환은, 문득 굳었다. 그런데, 예뻐? 한서진이 예쁘다고?

    “잠깐만.”

    이상한데. 지환은 바로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켰다. 그러고는 오늘 아침에 보다 싱숭생숭함만을 쌓았던 클라우드에 다시 접속했다. 그때는 분명 서진의 사진이 드문드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상은, 기시감이 들었다. 지환은 빠르게 사진을 훑었다.

    이거 다 한서진이랑 관련된 것들이잖아. 이건 서진이 드물게 디카페인을 주문해서 기념으로 찍은 커피였다. 서진은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면 지환도 카페인을 줄이지 않을까 싶었다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건 서진의 방에서, 이건 서진과 걷다가, 이건 서진에게 주기 전, 이건 서진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이건, 모든 게 그랬다.

    지환은 다급히 방 밖을 나갔다. 완전히 모든 게 기억나지는 않았다. 사진에 담긴 이야기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지금 서진에게 가야만 했다.

    “지환아?”

    “최지환, 너 이 늦은 밤에 어딜 나가.”

    “어? 오빠.”

    현관으로 나서자 나란히 나온 부모님의 목소리 뒤로, 바로 문이 열리며 지혜가 들어왔다.

    “지혜는 일찍 들어왔네? 연우랑 있었니?”

    “응.”

    정신없는 와중에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지환에게는 이 늦은 밤에 어딜 가냐고 하면서 지혜한테는 일찍 들어왔다니.

    “연우한테 들어왔다 가라고 하지.”

    “뭐 다 큰 남자애를 들어오라고 해.”

    “왜. 연우 귀엽잖아.”

    “맞아. 연우 귀엽지.”

    아빠의 말 뒤로 나온 엄마와 지혜의 말에, 지환은 반사적으로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걔가 뭐 귀엽다고. 귀엽기는 한서진이 귀여운 거지.

    “그 다 큰 게 귀엽기는 무슨.”

    “순하니 착하던데.”

    “그래 봤자 다 큰 남자애인데. 최지환 너도 들어와.”

    그러고는 다시 제게로 닿은 목소리에, 지환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며 답했다.

    “나 지금 진짜 심각해.”

    “오빠 또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기억 돌아온 것 같아.”

    그 답에 단번에 지환을 제외한 모두가 당황했다.

    “어, 어, 그럼 빨리 병원 가자.”

    “그래, 지금 병원 문 닫았나? 응급실? 응급실 가야 하나?”

    “나 괜찮아.”

    주섬주섬 차 키를 챙기는 아빠에게 단호히 말한 지환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애인한테 전 여친 얘기 했어.”

    심각한 목소리에 아빠에게서부터 목소리가 나왔다.

    “어이구, 얼른 가 봐라.”

    어쩌다가 그렇게 됐냐는 듯한 목소리 뒤로 바로 엄마가 말을 이었다.

    “병원 열면 바로 갈 거니까 아침에는 오고.”

    “어.”

    “오빠, 택시 타고 가!”

    문고리를 잡자 나온 그 목소리에 지환은 문을 열며 답했다.

    “알았어.”

    “그런데 너 또 뭐 스트레스 받고 그러는 거 아니니?”

    그제야 다시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지만, 지금은 빨리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지환은 그저 답하며 문을 닫았다.

    “전화할게.”

    지금은 정말,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 있다.

    * * *

    어차피 이런 상태로는 운전하지 못할 것 같아 지혜의 말대로 택시에 올라탄 지환은 초조하게 창문 밖을 바라봤다. 한번 떠오르기 시작하자 점점 더 많은 기억이 드문드문 밀려들었다. 어디가 여전히 비어 있고 어디가 채워지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서진을 만나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지환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서진에게 했던 말들을 되새겨 봤다. 무슨 헛소리를 했더라? 자세히 되새길 필요도 없었다. 그냥 많이 했다. 상처를 줬나? 그랬다. 울렸나? 어쩌면. 무신경한 태도는? 많이.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는 없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지환의 입장에서 서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친한 후배도 아니었다. 딱 한 번 얘기해 본 동생 남자 친구의 사촌 형이었으니. 그렇기는 한데, 심지어 지금도, 기억이 되돌아오는 와중에도 정말 그랬나 싶은 비현실감이 없어지지 않기는 했는데, 그래도 그러면 안 됐다.

    아, 미친, 진짜, 그러면 안 됐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리 기억이 없어도 그러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냥 좀 잘해 주지. 기억 없어도 애인이라는 거 알았으면 그냥 닥치고 잘해 주지. 뭐 궁금한 게 그렇게 많아서.

    심지어 의심한 것도 아니다. 서진이 제 애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냥 믿고 잘해 주기나 하지. 미성년자든 뭐든 꼬셨으면 그렇구나 하고 잘해 주기나 하지. 왜 양심의 가책이든 뭐든 갖기는 너무 늦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괜히 애한테 더 상처를 줬지?

    그래도 서진이 나름대로 괜찮아 보이기는 했다. 애초에 서진은 그렇게 연약하지 않다. 지환이 의식이 없을 때도 침착하게 있었다고 했고 지환이 의식을 차리고 헛짓거리를 할 때도 그랬다. 그렇기는 했다. 불안한 기색을 자주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기는 했는데.

    지환은 어느덧 서진의 집 앞에 도착하자 바로 택시에서 내렸다. 손이 기억하는 대로 자연스레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눌러 안으로 들어간 지환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도 없이 계단을 올랐다.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심장이 더 크고 둔탁하게 뛰었다.

    지환은 드디어 서진의 집 문에 다다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서진은 바로 거기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서진은, 가만히 거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지환이 나가기 전, 함께 보던 영상을. 서진은 좋아하지도 않는 강아지가 뛰어놀고 있는 그 영상을.

    “형?”

    지환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곧바로 서진에게 다가가, 바로 그 뺨을 감싸 입을 맞췄다.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지환은 손 아래로 당황했는지 굳은 서진을 느꼈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지환은 정말이지, 지금 제 손에 얌전히 감싸여 있는 이 애를 너무 좋아했다. 정말 사랑하고, 걱정했다. 지금껏 엉망진창으로 밀려들어 오던 기억들이 서진을 마주하니 이제야 받아들여졌다. 아는 게 아니라, 이제야 느껴졌다.

    “아, 진짜 미안해.”

    지환은 그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그저 말을 이었다.

    “서진아, 정말, 정말 미안해.”

    서진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지환은 서진이 얼마나 섬세하고 예민한지 안다. 혼자서도 잘 버텼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래도, 많이 힘들었을 것도 안다.

    “돌아왔어요?”

    살짝 떨리듯 나온 그 목소리에, 지환은 고개를 들어 서진을 바라봤다.

    “응. 그런 것 같아. 서진아, 많이 힘들었지.”

    그저 무작정 서진을 만나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움직인 터라, 사실 지환 자신도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겨우 답하자, 서진이 차분히 지환을 바라봤다.

    “괜찮아요.”

    “서진아, 내가 제정신 아닐 때 한 말 신경 쓰지 마.”

    그게 너무 마음에 걸렸다.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하나 되새길 필요도 없이, 모든 말이 그랬다. 입 좀 닥치고 살지. 그냥 서진이 하는 말에 무조건 그렇구나 하며 살지. 기억도 없는 놈이 뭐 그리 잘 안다고.

    “안 그래요. 형은 아팠잖아요.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환은 잠시 눈을 꾹 감았다. 서진은 너무, 차분했다.

    “아침에 가기로 했어. 너한테 먼저 오고 싶어서.”

    지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얌전히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서진의 손을 잡았다.

    “우리 서진이 힘들었겠다. 어쩌지.”

    “보호자가 마음을 굳게 가져야 한다고 했어요.”

    가만히 바라보자, 서진이 말을 이었다. 역시나, 차분히.

    “그래야 환자가 안심할 수 있다고.”

    서진은 정말 그랬다. 병원에서도 오히려 제 가족을 달래 준 모양이었다. 지환이 깨어나고 난 이후로도 그랬다. 지환이 서진을 알아보지 못하자 당황스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지환에게까지 제 감정을 크게 티 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괜찮았어요.”

    서진은 그랬다. 지환을 위해서.

    “서진아.”

    “형, 저 정말 괜찮아요.”

    “미안해.”

    “괜찮아요.”

    “서진아.”

    다시 한번 서진을 부르자, 서진이 가만히 지환을 바라봤다.

    “정말 다 돌아온 거예요?”

    그 물음에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환에게도 급작스러워 아직 상황 정리가 다 된 건 아니지만, 이 말을 뱉을 정도로는 충분했다.

    “미안해.”

    그러자 서진의 차분한 시선이 얼핏 내려갔다.

    “힘들었겠다.”

    가만히 말을 잇자, 서진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지금은,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밤이니까 카페인은, 그리고 환자니까.”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기만 했다. 지환은 부엌으로 향하는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서진아.”

    “저 정말….”

    뚝 끊긴 목소리에, 지환은 몸을 일으켜 서진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서진아.”

    “그만해요.”

    그 목소리는 무겁고 단호했지만, 지환은 그저 말했다.

    “혼자 무섭게 놔둬서 미안해.”

    가만히 놔두면 금세 갈무리할 걸 알았다. 바로 오늘 낮, 혼자 방에 들어가 빠르게 제 감정을 추스르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던 것처럼.

    “형, 그만….”

    지환은 다시 서진의 손을 잡았다. 혼자 그러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괜찮다고 했잖아요.”

    지환은 문득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이랬던 적이 있다. 이 부엌에서, 서진을 달랬던 적이 있다. 그때도 지환이 잘못했다. 울지도 못하는 서진을 결국 울리며 다시는 울리지 않으려 했는데.

    “안 괜찮아도 돼.”

    그렇다고 지금 서진이 울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별 다를 바는 없었다. 안타까움에 심장까지 저릿했다.

    “형은 그냥 아픈 거였고….”

    “미안해.”

    또다시 사과하자, 서진의 목소리가 점점 허탈한 기색으로 떨어졌다.

    “미안할 거 없는데.”

    “미안해.”

    지환은 조심스레 서진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다 돌아왔어요?”

    “응.”

    “정말로, 이제는 다 기억나요?”

    “기억나.”

    지환은 조심스레, 조금쯤 머뭇거리며, 서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서진아.”

    그제야 서진이 지환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나는 정말, 너랑은 평생 같이 있을 것 같아.”

    어떻게 그런 확신을 하게 됐냐고 한다면, 사실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지환은 서진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서진과는 괜찮을 거라고. 지환은 서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딱히 사람에게 확신이랄 걸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냥 어련히 잘 되겠지 싶었다.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해 보고 안 되면 마는 거고. 그 과정에 뭔가가 많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힘든 연애를 한 적도 없다. 좋아서 사귀었다. 그 감정이 가벼울 수는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그저 하루하루가 즐거웠을 뿐이지, 굳이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곁에 있는 누군가와의 오늘이 즐겁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사람과의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막연히 결혼을 생각하면서도, 곁에 있을 누군가는 명확히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진은, 서진과 있으면 조금 더 먼 미래를 떠올리게 됐다. 지환은 늘 서진과 함께할 것만 같았다. 내일이 와도, 1년이 지나도, 졸업을 해도, 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냥, 그럴 것 같았다.

    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힘들더라도, 이 애랑은 괜찮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지환에게 그건 정말 자연스러웠다. 왜냐하면, 지환은 안다. 서진은 관계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다. 잘못된 게 있으면 고칠 능력도 있고 그럴 의지도 있다. 서진은 아무리 힘들더라도 결국 한 걸음을 내디딘다. 아무리 무섭고 불안하더라도, 서진은 그렇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확인받고 싶었던 건 아니다. 이렇게까지 서진을 힘들게 하면서, 이렇게 그 생각을 확인받고 싶었던 건 절대 아니었다.

    서진은 지환과의 관계를 정말 소중하게 여겨서, 혼자 결론 내리지도 않는다. 뭐든 지환에게 물어보고, 뭐든 함께하려고 했다. 그래서, 뭐든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둘 다, 이 관계를,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나아질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환은 아니었다. 잠시나마. 잠시나마, 소중하지 않았다. 잠시나마,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잠시나마, 그랬다.

    “그렇게 해요.”

    그래서 지환은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서진은 지환과의 관계에 늘 헌신적이었다. 행동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꼭.”

    서진으로서는, 사랑을 한다는 자체가 큰 노력을 요구했다. 그걸 안다. 열중한다는 건 그만큼 크게 다칠 가능성을 내포하는지도 모른다. 서진은 방어적인 사람이다. 그걸 다 알면서, 그런데도 서진이 방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지환에게만큼은 그러지 않는다는 걸 아는데.

    “꼭 그렇게 해요.”

    자의는 아니었지만, 그런 서진에게 상처를 줬다는 게 저 자신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사귀다 보면, 어쩌면 상처 주게 되는 날들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서진은 상처 받지도 못했다. 서진도, 지환의 잘못이 아닌 걸 아니까. 어쩔 수 없었다는 거야 안다. 아는데, 그래도 그러면 안 됐다. 서진을 그렇게 놔두면 안 됐다.

    “미성년자 때부터 봐 온 어린애 데려갔으면 꼭 그렇게 하라고요.”

    하지만 그 말에는, 단번에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서진아, 정말.”

    정말 그냥 아무런 생각도 들어오지 못했다.

    “우리 서진이, 하, 스물.”

    만으로는 여전히 스물이었다. 사귈 때는 만으로 열아홉. 솔직히 그때는 그다지, 교복 입은 모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에 반해 기억이 없을 때는, 마지막 기억이 서진이 교복을 입은 모습이었고 그 외에는 아는 모습이 없었다. 그래서 계속 그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기억이 있는 상태라고 한다면, 지환은 계속해서 서진을 봤다. 계속 친하지는 않았지만, 고등학생인 모습은 정말 몇 번 보지도 않았고 그나마 자주 본 건 서진이 대학생이 되면서였다. 사회봉사를 같은 기관에서 하고 같이 과외를 하면서 그제야 좀 자주 봤다.

    쭉 이어진 시간 사이로는, 사실 교복 입은 모습은 그다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보다는 조금 더 대학 후배나 친구 같은 느낌이 강했다. 실제로도 지환에게 서진은 거의 그랬고. 하지만 한번 기억을 잃어 보니, 그랬다. 지환은 서진이 미성년자일 때부터 봤다. 그때는 맹세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기는 봤다. 알기는 했다.

    “나 먼저 눕힌 건 형이잖아요.”

    지환은 저를 꽉 끌어안는 손을 느끼며 눈을 꾹 감았다.

    “콘돔 얘기하고….”

    방금까지는 심장이 크게 뛰었는데, 지금은 조금 다른 의미로 크게 뛰었다.

    “형이 먼저 그랬으면서.”

    그랬다. 지환이 그랬다. 콘돔 생각은 하지도 못하던 애한테 콘돔 있냐고 물어봤다. 없다기에 지환에게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나는 그럴 생각 없었는데, 그런데 형이 콘돔 있냐고 그랬잖아요.”

    “그래. 내가 먼저 그랬지.”

    이제는 정말 가슴팍이 저릿했다. 그랬다. 정말 그랬다. 당시 챙기지 못한 양심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때 서진이 너무 예뻐 보여서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변명이다.

    “그때 우리 한 달도 안 됐었는데.”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그때 안 했잖아.”

    침묵 속에서 애써 슬그머니 말하자, 서진이 바로 물었다.

    “그게 중요해요?”

    “아니, 아니지, 절대 아니지. 안 중요해.”

    다급히 말하자 서진이 지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로 말했다.

    “그때 형은 하려고 했잖아요. 그냥 못 한 거잖아. 내가 그냥 형이 하자는 대로 했으면 했을 거잖아요.”

    그랬다. 지환은 당연히 제게 익숙한 방식으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게 아니었다. 서진이 지적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래도 그날 했을 것 같았다.

    “미안해. 미안해, 서진아, 미안해, 정말 미안. 형이 잘못했어.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어. 미안해.”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얼마 안 지나서 결국 했잖아요.”

    “맞아. 그랬지. 우리 서진이한테, 내가, 정말 미안. 미안해. 진심이야.”

    삽입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섹스를 하기는 했다. 머뭇거리는 서진에게 조금만 하자고 꼬셨다. 하지만 서진이 너무 귀여웠다. 물론 이 역시 변명이다.

    “왜 미안해요.”

    “빨랐어?”

    이제야 묻기에는 정말 많이 늦었다. 그럼에도 기억도 새로 돌아왔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물어보자, 서진이 고개를 젓는 게 느껴졌다.

    “그건 아니에요.”

    서진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저는 형이 첫날에 하자고 했어도 좋았을 거예요.”

    지환은 서진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애매하게 답했다.

    “그건, 아니지. 첫날은 좀.”

    애초에 지환은 딱 하루만 만나는 사이가 아닌 이상에야 첫날에는 얌전히 지냈다. 아무래도 첫날부터 그러는 건 너무 속이 보이지 않나 싶었다. 다 알아도 좀 덮는 노력은 해야 했다. 지환은 그대로 살살 서진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정말 괜찮아요?”

    지환은 살짝 시선을 내린 서진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 내일 병원 가 보기는 할 건데, 내가 느끼기에는 완전히 괜찮아.”

    조심조심 뺨을 감싸고 말하자, 예쁘기만 한 속눈썹이 살며시 들어 올려졌다.

    “정말 다 기억나요?”

    지환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기분이 됐다. 정말, 너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환은 저를 바라보는 그 눈가를 살며시 손으로 쓸며, 애써 웃었다.

    “어. 심지어 아직도 너 교복 입은 거 기억난다.”

    그런데 이게 아닌 모양이다.

    “그거 말고….”

    나름대로 긴장을 풀어 주려 한 말인데. 서진이 헛웃음이라도 지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서진의 맑은 눈동자에는 예고도 없이 물기가 차올랐다.

    “미안해. 미안, 미안해. 서진아, 미안해. 예쁜아, 미안. 미안해.”

    황급히 사과하며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자, 서진이 지환을 빤히 바라보는 채로 말했다.

    “그 중간이 기억나냐고요.”

    “어, 당연하지. 다 기억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진짜, 정말, 엄청, 잘못했어. 진심이야.”

    “형 저한테 정말 잘해 줬어요.”

    문득 나온 그 말에 잠시간 가만히 서진을 바라보자, 서진이 여전히 지환을 곧게 바라보는 채로 말을 이었다.

    “항상 잘해 주기만 했다고요.”

    그와 함께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음에도 뚝 떨어진 눈물은, 꼭 분하기라도 한 기색이었다. 어쩌면 조금 서러웠는지도 모른다. 서진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데, 기억을 잃었던 지환은 그다지 동의하는 기색이 아니라서.

    “데이트가 뭐가 중요해요. 매일 만나기만 하면 됐지 어디 가는지가 뭐가 중요한데.”

    서진이 겨우 눈을 깜빡이자,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방울이 맺힌 속눈썹이 다시 위로 올라오며, 잔뜩 젖은 아래 속눈썹이 물기를 머금어 더 짙어졌다.

    “왜 꼭 밖에 왜 나가야 해요. 전시회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영화관도, 거기 가면 형 얼굴 못 보잖아요. 같이 있는 걸로는 부족해요?”

    젖은 속눈썹이 살짝 떨릴 때마다 지환의 가슴이 크게 떨렸다. 지환이 죄인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지환이 울렸다. 지환은 슬금슬금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서진은 그런 지환을 뻔히 아는지 지환을 끌어 올려 무릎을 꿇지 못하게 했다.

    “하지 마.”

    어째 서진은 이렇게 울면서도 목소리에는 그다지 잠긴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살짝 떨리기는 했던지라, 그게 더 안쓰러웠다.

    “제가 그렇게 어려요?”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아무래도 무릎을 꿇어야 할 것 같은데, 서진이 그러지를 못하게 해 더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었다.

    “잘못 안 했어요. 아파서 그런 건데 왜 그런 소리를 해요.”

    “미안해.”

    잘못을 했든 안 했든 서진이 운다면 무조건 지환의 잘못이었다. 그냥 그런 셈 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랬다. 서진은 지환과 관련된 게 아니라면 전혀 울지 않았다. 서진이 운다면, 그건 모두 지환과 관련 있었다.

    지환은 서진의 뺨에 묻은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며, 살며시 그 눈가에 입을 맞췄다. 서진이 멈칫 굳은 게 느껴졌다. 서진과 지환의 사이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인 접촉이었는데도, 고작 며칠간 지환이 헛짓거리를 한 것 때문인지 반사적으로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을 알아차리자면 손끝까지도 저릿했다.

    “예쁜아.”

    조심스럽게 서진을 부르자, 서진의 시선이 살짝 떨리며 꾹 눈을 감았다.

    “안 예쁜 거 알아요.”

    그 말과 함께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지환은 그 사이로 다시 입을 맞췄다.

    “아니야. 그때는 아팠잖아. 눈도 어떻게 된 거야. 예쁜아, 너 엄청 예뻐. 우리 서진이 진짜, 정말, 너무 예뻐.”

    서진은 정말 세상에서 제일 예뻤다. 기억만 잃은 게 아니라 눈도 어떻게 됐던 게 분명했다. 이렇게 예쁜데. 서진은 너무 예뻤다. 속눈썹 한 올 한 올까지 예뻤다. 거기다 마음도 얼마나 예쁜지, 정말 접어서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못한다는 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가슴이 아픈 것과는 별개로, 서진은 눈물까지도 예뻤다. 눈물 흘리는 모습이야 말할 것도 없으니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정말 떨어지는 눈물까지도 예뻤다. 그냥 흐르는 모습도 그렇고 또르르 굴러가는 것도 그랬다. 서진에게는 예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정말 다 예뻤다.

    “아닌 거 안다고.”

    이제 그 목소리에는 옅은 짜증기가 담겨 있었다. 슬슬 안심되는 모양이었다.

    “정말, 형, 이제는 괜찮아요?”

    다시 마주한 시선은, 제대로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예쁘기만 했다. 서진은 어떻게든 지환을 걱정했다. 이렇게, 늘 예쁜데. 아무래도 기억을 잃은 지환은 보는 눈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애를 그냥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지.

    서진은 하나뿐이다. 이런 사람은 또 없다. 정말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지. 이렇게 착하고 사랑스러운데. 정말이지, 모든 게 다 예쁘기만 한데. 목소리마저도, 시선조차도, 모든 게.

    “괜찮아. 정말로.”

    가만히 답하자, 서진이 지환을 향해 물었다.

    “어디 안 아픈 거죠?”

    유독 색이 짙은 눈동자에 물기가 막을 입힌 듯이 반질거리며 지환에게 닿았다.

    “어.”

    지환이 어떻게 또 서진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자기가 힘든 건 뒤로하고 무조건 지환을 먼저 생각해 주는 사람을.

    지환은 어느덧 눈물을 그치고 저를 찬찬히 살피는 그 시선을 받으며, 여태 물기가 남은 그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서진아, 네가 그랬잖아. 우리 어쩌다가 사귄지 모르겠다고. 그냥 네가 먼저 키스했다면서.”

    “죄송해요.”

    지환의 목소리에는 그 어디에도 탓하는 투가 없었는데, 정작 서진에게서는 빠르게 사과의 말이 나왔다. 그래서 지환은, 저 역시 사과했다.

    “나도 미안해.”

    아마, 원래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는 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분명히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말할 기회가 없어서 굳이 대놓고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아마도, 내가 먼저 꼬신 게 맞는 것 같거든.”

    아무래도 이번에는 정말 꿇어야 하나 싶어 지환은 슬그머니 서진의 눈치를 살폈다. 서진은 그저 지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때는 몰랐는데,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아.”

    당시에는 몰랐다. 서진은 남자고, 지환도 남자고, 당시의 지환은 이미 자신이 남자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이 서진을 왜 그렇게 신경 쓰는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상은, 지환은 서진을 신경 썼다.

    계속 밀어내는 서진에게 괜히 다가가고 늘 귀찮게 한 건 그런 이유였다. 깊은 마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지환은 아무런 상호 작용도 없이 첫눈에 반하는 부류는 아니다. 그러니 거부의 뜻을 명확히 표현하는 서진에게 혼자 사랑을 느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관심은 있었다. 그랬던 것 같다.

    “형은 그걸….”

    서진의 눈가가 찌푸려지더니,

    “그걸 이제야 알았어요?”

    다시 뚝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형은 관심 없는 사람한테 그렇게 먼저 연락하고, 기다리고, 데려다주고, 밥 사 주고, 안 그런단 말이에요.”

    당연히, 서진도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럴 것 같기는 했다. 지환은 제 친구들과 서진이 함께 있거나 할 때, 누가 자신에게 현재 연애를 물어보며 누가 먼저 꼬신 거냐고 할 때마다, 애매하게 말을 돌렸다. 직접 그게 지환이라고 말하기에는 서진에게 너무 미안했다. 지환조차도 그걸 몰라서 서진을 울린 전적이 있어서 더 그랬다. 그런데 지금 또 울리고 있었다.

    “형 그렇게, 아무한테나 그럴 정도로 가볍지 않다고요.”

    “미안해.”

    “그걸 어떻게 이제야 알아.”

    “정말 미안해.”

    “그래도, 저도 그때 키스 먼저 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아니야.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그 외에는 할 말이 없어서, 계속 계속 미안하다, 내가 다 잘못했다, 그 말을 반복하고 있자니 서진이 평정을 되찾으려는 듯 심호흡을 했다. 같은 공기를 마시는 건데도 서진이 마시는 공기는 유독 상쾌할 것 같았다. 깨끗하고 하얀 피부와 짙고 검은 머리칼이 대비되는 탓인지, 서진은 유독 분위기가 깨끗했다.

    이렇게 예쁠 필요가 있나? 어째 서진은 계속, 날이 갈수록 더 예뻐졌다. 하루가 다르게 더 예뻐졌는데, 기억을 잃은 며칠간 놓쳤을 모습을 생각하니 속이 다 아팠다. 확실히, 서진은 지환이 사고를 당하기 바로 전에 봤던 모습보다 훨씬 더 예뻐져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예뻐지기만 할 수 있는지.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정말, 이렇게 예뻐서 어떻게 밖에 내놓고 다녔지.

    “그만 사과해요.”

    서진이 숨 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문득 나온 그 말은 어느덧 꽤나 차분해져 있었다. 지환은 저를 바라보는 서진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 정말 괜찮아요?”

    그 눈망울에는 이제 물기가 사라진 상태였지만, 여운이 남아 눈가가 얼핏 붉었다. 그 탓에 꼭 품에 안고 지켜 주고 싶은 청순한 분위기가 짙어졌다.

    “응.”

    그 답에도 서진은 걱정스럽게 지환을 살폈다.

    “이제 아프지는 않아요?”

    “안 아파.”

    몸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냥 가슴이 너무 아팠다. 서진은 너무 착했다. 지환이 너무 파렴치한 것 같았다. 물론, 기분 탓만은 아니고 실제로도 일정 정도는 그랬지만, 울리기까지 하니 정말 죄책감이 들었다. 이 와중에도 서진이 우는 모습이 예쁘다고 느낀 게 가장 슬픈 점이었다. 저 자신에게 배신감이 들 지경이었다. 물론 가슴이 아프기는 했다. 정말 안타깝고 슬펐다. 하지만, 예뻤다. 기억이 돌아오며 정신머리가 나간 모양이었다.

    그래도 역시, 울 일은 없었으면 했다. 가슴이 아픈 게 더 컸으니. 서진이 울면 지환은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었다. 예쁜 것과는 별개로, 그 눈물을 그치게 할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환은 서진이 웃는 게 가장 좋았다. 서진은 웃을 때 가장 예뻤다. 웃는 모습이 정말 예뻐서, 늘 웃게 해 주고 싶었다.

    “다행이에요.”

    한숨처럼 나온 그 나직한 목소리에는 옅은 떨림이 담겨 있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지환이 다시 서진을 안자, 서진이 지환의 등을 끌어안았다. 목소리와 표정은 차분했지만, 실상 등에 와 닿은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 이제는….”

    그 목소리는, 그대로 이어졌다.

    “이제는, 저 사랑해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형도 다시….”

    그러고는 다시 물음이 이어졌다.

    “저 사랑해요?”

    지환은 문득 울컥했다. 다시. 서진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면 안 되는 건데. 다시 사랑하냐니. 계속 사랑했어야 했는데. 서진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 만들면 안 됐는데.

    “응. 사랑해.”

    “정말로, 저 사랑해요?”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지환은 눈을 꾹 감았다.

    “미안해.”

    지환은 정말, 서진을 계속해서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자의는 아니었다지만, 아무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지만, 고작 며칠이었다지만.

    “그런데 나는 정말, 서진아, 너 정말 사랑해.”

    그 말에 서진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려 지환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형.”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지환도 눈을 떠 서진을 바라봤다.

    “형은 안 운다.”

    울컥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도 눈물이 난 건 아니었다. 그래도 티 날 정도였나 조금 머쓱했는데, 정작 서진은 그런 기색도 없이 가만히 지환을 바라봤다.

    “알아요.”

    서진은 그대로 다시 지환을 안았다.

    “저는 형이 건강하기만 하면 돼요.”

    지환은 가만히 서진을 안고 있다가, 이내 그 귓가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미안해. 앞으로 진짜 네 말 잘 들을게.”

    “형이 다치려고 다친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아무튼 무조건 네 말 잘 들을게.”

    아무래도 뭐든 서진이 하자고 하는 대로 하고 하라는 대로만 하는 게 가장 낫다. 그게 뭐 힘든 일이라고, 기억 좀 없다고 그렇게 애를 힘들게 했을까.

    “네가 하라는 대로만 할게.”

    다시 한번 말한 지환은, 아주 살며시, 그만큼이나 조심스럽게 서진의 뺨을 감싸고 저를 바라보게 했다.

    “사랑해.”

    옅게 입을 맞추자, 서진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지환을 바라봤다. 물기는 사라졌지만, 그 잔재가 남은 탓인지 유독 짙은 속눈썹이 빛을 받아 얼핏 반짝였다.

    “고마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서진과 함께라면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 서진은, 혼자서도 이만큼이나 버텨 줬다. 힘들고 불안했을 게 뻔한데도 지환에게는 티도 내지 않으며. 그게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다. 혼자서 울었을까. 그러지도 않았을 걸 알아서, 그게 더 안타까웠다. 서진은 실상 눈물이 많은 편도 아니지만, 이번에는 달래 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울지도 못했을 걸 안다.

    “사랑해.”

    그 눈가를 조심스레 쓸자, 서진이 부드럽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그 시선이 떨리듯 떨어졌다가, 이내 다시 얼마간의 온기를 담고 마주했다.

    “사랑해요, 정말.”

    지환은 그저 답했다.

    “알아.”

    서진이 지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서진은 무섭다고 했었다. 자신은 지환을 좋아하는데, 지환은 아니면 어떻게 하냐고. 그래도 서진은 지환과 함께,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대로, 사랑하는 건 사랑하는 대로, 그렇게 이어 나가기로 했다.

    “서진아.”

    지환이 서진을 좋아하는 이유가 없어서, 그게 서진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서진은 결국 지환의 방식을 받아들여 줬다. 그저, 좋아서 좋아하는, 그런 마음을.

    “정말로.”

    그건 서진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네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지환은 그 문장을 잇지 못했다.

    “나도 알아.”

    지환은 그저, 서진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서진아, 나도 너 많이 사랑해.”

    지환도 서진을 많이 사랑해서, 그래서 알았다. 서진이 지환을 사랑한다는 걸.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겨우 와 닿은 그 목소리에 지환은 서진의 뺨을 감싸 그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기억은 기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무수한 노력이 담겨 있다. 네가 나를 변화시켰던 많은 나날이, 자연스레 너를 살피게 됐던 익숙함이, 그저 예쁘게만 여겨지던 시선이, 그리고, 서툴게 쌓아 놓은 사랑이.

    서툴다는 게 꼭 연약하다는 말은 아니다. 서진의 사랑은 연약하지 않다. 서진은 섬세해서, 모든 걸 공들여 쌓고는 했다. 저 스스로 무너뜨리기도 어려울 만큼 단단하게. 그래서 종종 일부분은 효율적으로, 혹은 요령으로 결과를 보려 했던 지환도 서진의 옆에 있으면 그렇게 되고는 했다.

    언젠가에는 엉망이었던 날이 있었겠지만, 그 언제도 느슨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 모습은 서툴러 보일지언정, 쉽게 무너질 만큼 엉성하지는 않다. 지환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사랑의 모습은 그렇다.

    그래서 지환에게는 서진과의 미래를 떠올리는 게 자연스럽기만 했다. 그 어느 날에도 느슨해지는 법 없이, 성실히 쌓아 갈 사랑을 믿는다. 그런 서진을 믿는다. 그래서 지환은, 어느덧 살며시 눈을 감은 서진에게 입을 맞췄다.

    어리지만, 여리지는 않은 사랑에게. 어려움을 견뎌 준 믿음에게. 함께할 미래에게. 내게 그 모든, 느리고도 견고한 마음의 가치를 알게 해 준, 너에게.

    <독해(Reading Comprehension) IF 기억 상실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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