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0/15)
  • 3.

    서진은 문득 천장 쪽으로 손을 뻗어 봤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유독 눈에 띄었다. 지환의 손가락에도 똑같은 게 있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 반지가 눈에 띄었으면 했다. 물론 고작 반지로 안전해지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지환에게 임자가 있다는 걸 가시적으로도 드러낼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반지를 받을 때는 정말 놀랐다. 지환이 취직하고 반년쯤 지났을 때였던가, 지환이 애인이 있다는 걸 숨기지 않는다는 거야 알았지만, 서진은 그걸 넘어서 지환이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지환의 애인 여부를 알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반지를 끼우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은근히 지환을 떠보던 서진에게 당시의 지환이 내어준 답이란 정말 단호하고도 명확하기만 했는데. 결혼반지 아닌 이상 굳이 왜 커플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커플링이야 어차피 애인 바뀌면 또 바뀌는 건데 뭐 그리 중요하냐고 했지. 물론, 본인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냥 드라마 속 나온 커플링에 대한 평이기는 했다. 거기다 지환은 손가락에 뭐 있으면 거슬린다고 했고.

    지환은 본인이 했던 말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분명 기억 못 하겠지. 물론, 그거야 별 상관 없었다. 그랬던 지환이 본인은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거슬리기만 한다는 커플링을 준비해서 서진에게 끼워 준 게 중요했다. 더불어 지환도 끼고 있다는 것도 정말 중요했고. 이제 처음 보는 사람들도 다 지환에게 애인이 있다는 걸 알겠지.

    서진은 제 손에 끼워진 반지 겉면을 조심스럽게 쓸어 봤다. 반지는 정말 좋았는데, 종종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반지도 주고 같이 살자고도 했는데 왜 청혼은 아니라는 걸까. 서진은 지환이 반지를 줄 때 당연히 결혼하자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청혼 반지가 아니라 커플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게 뭐가 그렇게 달라야 하나.

    나중에 꼭 할 테니 서진은 받아 줄 준비나 하고 있으라는데, 받아 줄 준비는 지금도 이미 완벽히 되어 있었다.

    제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던 서진은 이내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도 되지 않았으니 술 마시러 간 지환에게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괜히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많이 마시지는 말라고 했는데, 그걸 들을 리는 없겠지.

    서진은 핸드폰을 쥐고서도 계속 고민했다. 지환의 대학 동기들은 이제 다들 취직을 했던지라 다 같이 만나는 게 힘들어졌다고 했다. 그러니 꽤나 오랜만에 만난 자리인데, 괜히 방해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그냥, 정말 그냥 목소리만 듣는 건 괜찮지 않을까.

    [어. 예쁜아.]

    얼마간 받지 않으면 그냥 끊으려고 했는데, 막상 전화를 걸자마자 거의 바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아직 친구들이랑 있어요? 많이 마시는 건 아니죠?”

    전화를 받자마자 서진을 부르는 호칭이 심상치 않은 걸 보니 이미 취한 상태가 분명했다.

    [아직 같이 있어. 그리고 당연히 많이 안 마시지.]

    많이 마신 상태인 게 뻔했다. 그래도 아직 발음도 괜찮고 말하는 속도도 평소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심하게 취하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언제 올 거예요?”

    내일이 휴일이니 만나기야 했겠지만, 혹시 새벽을 넘길까 싶어 최대한 보채는 기색 없이 묻자 그 너머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고 싶어서?]

    맞는 말이었다. 정말 맞는 말이었는데, 그렇다고 말하면 너무 부담을 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지환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 건데. 물론, 왜 그렇게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하나 싶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환에게 중요하다면 서진에게도 중요했다.

    “그냥 궁금해서 전화했어요. 오랜만에 친구들 만난 거니까 더 놀다 와요.”

    사실 그냥 지금 오라고 하고 싶기는 했지만, 서진은 안 그래도 지환과 관련된 모든 것에 속이 좁았다. 이미 많이 들키기는 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써 노력하고는 있었다.

    [그래서 안 보고 싶어?]

    “보고 싶어요.”

    그럼에도 지환의 말에 바로 답하는 걸 보면 노력이 그리 효과적이지는 않았지만.

    [나 어차피 이제 가려고 했어. 금방 갈게.]

    그 말에 서진은 먼저 차 키를 챙기며 물었다.

    “데리러 갈까요?”

    [됐어. 귀찮잖아.]

    “그게 왜 귀찮아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왔다가 누가 너 잡아가면 어떻게 해.]

    서진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말고 멈칫했다. 그냥 듣기로는 심하게 취하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하는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지환은 논리적인 생각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취한 모양이었다.

    “진심인데 그런 거 형 말고 아무도 걱정 안 해요.”

    서진이 늦은 시간에 잘 다니지 않는 건 어두운 곳에서 사람들이 서진을 보면 흠칫 놀라기 때문이지 서진 자신을 위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잡아가기는 도대체 누가 잡아간다고.

    [내가 걱정하잖아.]

    그럼에도 나온 그 말에 서진은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지환의 말 하나하나는 모두 달기만 했다.

    “저도 형 걱정해요.”

    마주 나온 서진의 답에 그 너머로 지환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은 그 목소리 위로 지환의 표정을 덧그렸다. 수없이 마주했지만 늘 시선을 뺏기고야 마는 그 모습을 생각하자면, 역시 직접 보고 싶었다.

    [너 지금 무슨 표정 하는지 보고 싶어.]

    서진이 생각한 걸 오히려 저 자신이 말하는 그 목소리에 서진은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갈게요.”

    [조심히 와.]

    “네.”

    분명 아침에 얼굴을 봤는데도, 한시라도 빨리 그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다.

    * * *

    서진은 지환이 알려 준 술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위를 살폈는데, 지환은 없었다. 그래도 혜린과 가연이 있는 테이블은 찾았던지라 그쪽으로 다가가자 혜린이 먼저 서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맞았다.

    “어, 서진, 서진 씨, 서진아, 웬일이야?”

    당연하게도, 서진과 지환이 사귄다는 걸 지환의 친구들은 몰랐지만, 그래도 서진이 지환을 데리러 오면 종종 보기는 했다. 혜린은 아직도 호칭이 애매해 보이기는 했지만.

    “안녕하세요. 근처에 있었는데 형도 근처라고 해서 같이 돌아가려고요.”

    그 답에 가연이 서진에게로 접시를 밀어 주며 물었다.

    “맞다, 최지환이랑 같이 산다고 했지?”

    “네. 형은 어디 있어요?”

    혹시 화장실에 갔나 싶었는데, 가연이 답했다.

    “걔 애인 줄 거라고 선물 산다던데.”

    “지금, 시간이.”

    집에서 술집까지 거리가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았지만, 운전을 해서 오다 보니 거의 자정이었다.

    “그러니까. 그래도 뭐라도 사 오겠지. 걔 맨날 이상한 거 사 오잖아.”

    “여친 덕에 지혜가 풀려났지 뭐.”

    맞는 말이기는 했다. 지환은 원래 술 취하면 뭐든 사는 버릇이 있었는데, 주로 이상한 것들이었다. 예전 언제인가는 무슨 반짝이는 왕관을 사서 지혜에게 주겠다고 했던 적이 있어 서진이 정신 차리고 내려놓으라고 한 적도 있었다.

    지환은 선물 고르는 취향이 그다지 이상한 편은 아니었는데, 어째 술만 마시면 극단으로 갔다. 그게 지금은 지혜가 아니라 서진에게로 향했고.

    “혼자 갔어요?”

    저번에는 공룡 화석 발굴 놀이를 사 오더니 다 부숴 먹고 언제인가는 자석으로 하는 낚시 놀이를 사 온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또 뭘 사 올지 벌써부터 걱정됐다.

    “임동규가 여명 산다고 같이 갔는데, 뭐 시켜 줄까?”

    “괜찮아요. 금방 가야 해서요.”

    그 말과 뒤로 문득, 문 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앉은 혜린이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저기 온다. 근데 저거 뭐 산 거야? 불길하다 불길해.”

    서진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겼는데, 지환과 동규가 같이 들어오는 와중에 지환의 손에는 무슨 장난감 박스가 들려 있었다. 그렇게 크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나는 쟤 왜 안 차이는지를 모르겠어.”

    그 심드렁한 목소리에 서진은 그저 지환을 보는 채로 답했다.

    “차일 만큼은 아니지 않아요?”

    선물들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생각해서 사 오는 건데. 서진도 그 선물들 자체가 기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생각해 주는 마음 자체는 고마웠다. 술 취하면 우선 서진을 생각한다는 뜻이었으니.

    “한서진, 벌써 왔어?”

    서진을 발견하고 반갑게 웃는 얼굴을 보면 꽤나 멀쩡해 보였는데, 웃음이 좀 헤퍼진 것 같기도 했다.

    “뭐 산 거예요?”

    분홍색 박스가 불길해 묻자 지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요술봉.”

    서진이 할 말을 잃자, 그 옆의 가연이 대신 말했다.

    “미친놈.”

    “너는 안 말리고 뭐 했어?”

    그리고 이어진 혜린의 물음에 동규가 답했다.

    “이 새끼 취해서 사겠다는데 내가 뭘 어떻게 말려? 그리고 이거 비눗방울도 나온단 말이야.”

    “얘도 취했네.”

    가연이 그대로 지환을 눈짓하며 서진에게 물었다.

    “얘랑 살 만해? 영 아닌데.”

    살 만한 정도로 표현될 게 아니었다. 원래부터도 매일매일 같이 일어나고 같이 잠들기는 했지만, 정말 같이 산다는 건 또 달랐다. 아예 지환이 일 관두고 집에만 있었으면 할 정도였다.

    서진은 지환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저 역시 기꺼이 대학원을 그만둘 용의가 있는지라 아쉬웠다. 부모님이야 뭐, 별 상관 없었다. 이미 있는 거로도 충분히 살 수 있었고 서진에게 부모님의 인정이 필요 없어진 지야 꽤 됐으니. 지환과 하루 종일 있을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형이 잘해 줘요.”

    그래도 그런 걸 구구절절 말할 수는 없던지라 결국 그 정도로 말하자 지환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얼마나 잘해 주는데.”

    “그래 봤자 요리는 혼자 할 거 아니야.”

    “그건 그래.”

    그 깔끔한 긍정에 혜린이 미적지근한 시선을 숨기지 않으며 지환을 바라보다가, 이내 서진에게 말했다.

    “다른 건 다 부려먹어요. 얘 청소는 진짜 잘하잖아.”

    “네, 그럴게요.”

    사실 부려먹기는커녕 그냥 지환이 움직이지 않고 집에만 있으면 좋았다. 청소든 뭐든 그런 거야 하고 싶은 사람이 하면 되는 거고, 지환이 그저 서진과의 집을 정말 제집처럼 편안하게 여겨 주기만을 바랐다.

    “간다.”

    지환이 서진의 어깨를 툭 건드는 행동에 서진이 일어나자 가연이 그대로 말했다.

    “최지환, 너 그거 주겠다고 애인 불러내지 말고 그냥 얌전히 서진이 따라서 집에나 가.”

    “왜?”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 나갔는데 비눗방울 요술봉 주면 좀 죽여 버리고 싶지 않겠어?”

    “내 애인은 이런 거 좋아해.”

    내가 언제 저런 거 좋아했어. 기가 찼지만, 우선은 입을 다물고 있자 그대로 혜린이 말했다.

    “서진이 힘들게 하지 말고 집에나 가.”

    “어. 나중에 보자.”

    그 말 뒤로 지환이 적당히 풀어진 분위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서진을 향해 웃었다.

    “서진아, 가자.”

    서진은 냉큼 지환의 곁을 따라 섰다가, 테이블에 남은 사람들을 향해 짧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지환을 바라봤다. 걸으면서도 계속 지환을 바라보자 의아하다는 듯이 잠깐 눈가를 찡긋했다가, 다시 웃어 주는 걸 보자니 늘 그렇듯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 우리가 같은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형.”

    차에 타며 문득 지환을 부르자 지환이 안전벨트를 하며 되물었다.

    “어?”

    “혜린 누나가 형 청소 잘하는 건 어떻게 알아요?”

    의심하는 건 전혀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지환을 미적지근한 눈으로 보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래도 궁금하기는 했다. 설마 집에도 온 적이 있을까.

    지환이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군대 가기 전까지는 자취를 했다고 했으니, 그때 친구들을 데려왔을 수도 있겠지.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서진은 지환을 알기도 전에 누구는 지환의 집까지 들어가 봤다는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과방 정리 거의 내가 했으니까.”

    그런 서진의 맥락 없는 질투와는 달리 깔끔하기만 한 말이 이어졌다.

    “해 봤자 하루면 끝나서 열심히는 안 했는데, 최소한 사람 앉을 자리 만들 정도는 했지. 그것도 하루면 끝이었지만.”

    정말 가볍기만 한 그 말에 서진은 지환을 바라봤다. 계속해서 서진을 바라보고 있던 모양인지, 바로 시선이 맞닿았다. 지환은 그대로 손을 뻗어 서진의 뺨을 콕 하고 눌렀다. 뜬금없기도 하고, 그러면서 웃는 게 귀여워 보이기도 해 결국 웃자 지환이 서진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었다.

    “이렇게 예뻐서 진짜 어쩌지.”

    그 말에 반사적으로 조금 떨떠름해졌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서진을 예쁘다고 하는 건 정말 지환뿐이었다. 지환 외에는 들어 본 적도 없는 말이었고. 그럼에도 지환은 참 질리지도 않고 그런 말을 했다.

    “형, 그런데.”

    지환이 서진을 건들면 건드는 대로 받아주다가 문득 나온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은 서진의 목덜미를 주무르는 그대로 되물었다.

    “응?”

    술에 취한 탓인지 꽤나 순하기만 한 그 물음에 서진은 흘깃 시선에 걸린 분홍색 상자를 눈짓했다. 요술봉이라고 했지. 그것도 비눗방울이 나오는.

    “그거 사서 기뻤어요?”

    저런 걸 사고 행복했을까. 같이 산 지가 이제 반년쯤이었는데, 지환은 생활비와는 별개로 자기는 용돈을 받아서 쓰고 있었다. 그럴 필요는 정말 전혀 없다고 몇 번이고 만류했는데도, 같이 살고 있고 자기가 일을 하니 금전적인 부분은 모두 자신이 감당하는 게 맞다면서.

    처음 그러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말 이 사람 어쩌려고 이러나 싶기까지 했다. 심지어, 지환의 말대로라면 결혼도 아니라는데 금전적인 관리를 그렇게까지 다 맡겨도 되나. 지금의 서진은 그게 정말 신혼 같아서 굉장히 만족하며 즐기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랬다.

    거기다, 서진은 당연히 용돈을 넉넉하게 주려고 했는데, 정작 지환은 대충 쪼들리지만 않는 범위에서 받아갔다. 그런데 또 종종 이런 거로 낭비를 하는 걸 보면, 큰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미묘해지기는 했다.

    용돈을 받아서 쓰면서 왜 이런 거에 돈을 낭비하는 걸까. 애초에 용돈을 받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 좀 귀하게 써야 하는 거 아닐까.

    “왜? 싫어?”

    이제 지환은 서진의 귓불을 간질이고 있었다.

    “싫다는 게 아니라, 일단 생각해 준 거 고맙기는 한데.”

    아껴서 이런 거 사지 말고 차라리 돈을 더 받아가지 그러냐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막상 지환이 서진을 보며 웃자 할 말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꽤나 예전에. 지금 생각해도 속이 아파 오는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환이 거의 한 달간 술을 마시던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주로 서진이 곁에 있었는데, 술에 취하면 지환은 꼭 작은 거라도 뭔가를 사서 집에 돌아갔다. 그냥 가족한테 돈 쓰는 게 좋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만큼이나 아끼니까.

    그게 이제는 서진이었다. 그걸 모두 알고 있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뭐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고. 서진이 생각나서 사 왔다는데. 물론, 왜 저걸 보고 서진이 생각났나 싶기는 하고 왜 서진을 생각하며 저런 걸 샀나 싶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의도는 좋았으니 그걸로 됐다.

    “네. 잘 쓸게요.”

    그 말에 웃는 지환을 보자면, 정말이지 이 사람에게는 뭐든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런 소리를 할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 * *

    서진은 지환을 집 안으로 먼저 들여보내며 물었다.

    “씻을 수 있겠어요?”

    “어.”

    알아서 욕실로 가는 걸음걸이가 조금 느릿하기는 해도, 비틀거리지는 않았다. 다행이면서도 괜히 아쉬웠다.

    “넘어지면 어떻게 해?”

    아쉽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취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말하자 지환이 욕실 앞에서 제 셔츠를 벗으며 물었다.

    “보고 싶어?”

    “그런 말은 아니었는데.”

    서진은 셔츠 사이로 서서히 드러나는 그 몸을 바라봤다. 사귄 지도 이제 삼 년이 조금 더 됐는데, 왜 전혀 익숙해지지가 않을까. 근육이 잘 잡힌 몸에는 서진이 남긴 얼룩덜룩한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조금.”

    사실 조금 정도가 아니었다. 그 말과 함께 다가가자 지환이 대수롭지 않게 욕실 문을 눈짓했다. 서진은 바로 지환의 남은 옷을 벗겨 주며 욕실로 들여보냈다. 물을 틀어 온도를 맞추고 그 머리와 몸을 적셔 주면서도 계속 입을 맞추자 지환은 조금 거치적거리는지 두어 번은 성의 없이 피했다가, 이내 그냥 잡혀 줬다.

    서진은 지환의 몸을 타고 거품이 씻겨 내려가는 걸 보며 그 눈가에 입을 맞췄다. 지환은 술기운이 뒤늦게 올라와 졸린 모양인지 씻으면서도 거의 눈을 감고 있었다. 분명 눈썹 뼈나, 콧대가 뚜렷해 눈을 감으면 크게 순한 인상은 아니었는데, 졸음이 묻은 그 얼굴이 유독 순해 보였다. 귀여워.

    “졸려?”

    “아니.”

    다 씻고 이제 그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 주는 와중에 나온 목소리는 전혀 신뢰할 만하지 않았다.

    “진짜?”

    “아니.”

    그냥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는 모양이었다. 최대한 느리게 잠옷까지 입혀 주자 서진이 하는 대로만 움직이던 지환이 그제야 살짝 눈을 떠 서진의 소매 끝을 건드렸다.

    “너도 다 젖었다.”

    “갈아입으면 돼요.”

    꽤 젖은 게 사실이라 우선 윗옷을 벗고 지환을 침대에 앉혀 주자 지환이 바로 누우려 했다. 서진이 다시 지환의 상체를 일으켜 주며 머리를 말려 주자 그 고개가 자꾸 숙어졌다. 정말 졸린 모양이라 안타까웠다.

    “오늘 재밌게 놀았어요?”

    “어.”

    서진은 조심스레 지환의 머리를 말려 주며 그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제 주말이었는데, 지환은 늘 주말만큼은 서진과 함께 있었다. 서진과 지환은 서진이 원래 살던 학교 근처의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사실 서진은 지환의 회사 근처로 가고 싶었다. 그게 지환에게 더 편할 테니. 하지만 지환은 회사 근처에서 살면 주말에도 출근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도 회사 근처에서 살 때는 주말에 급한 일이 터지면 늘 불려가는 건 지환이었고.

    어쨌거나, 이제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는 덕에 지환은 주말이면 늘 서진과 함께 있었다. 이번 주말 역시 마찬가지겠지. 정말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 있을 예정이었다.

    “넌 뭐 했어?”

    “저는 복습 좀 하고 예습도 하고. 그냥 공부했어요. 운동도 하고.”

    얼마 전부터 방학이라 별로 할 것도 없었다. 지환이 거의 자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지라 조심조심 말한 서진은 그대로 드라이기를 끄고 지환을 눕혀 줬다.

    서진은 그 옆에 따라 누워 가만히 지환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떻게 이렇게 봐도 봐도 늘 보고 싶을까. 서진은 살며시 지환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고는, 곧은 콧대를 옅게 쓸었다. 눈을 떴을 때와는 인상이 또 달랐다.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은 게 신기해 부드럽게 그 뺨을 쓸자, 지환이 그대로 손을 뻗어 서진을 끌어당겼다. 당연하게도 끌려가며 지환을 끌어안자 지환이 서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마주 안았다가, 이내 어깨를 깨물었다.

    서진은 그냥 어깨를 내어준 채로 지환의 머리칼을 토닥였다. 지환은 제 술버릇을 고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서진으로서는 지환의 술버릇이 오히려 더 심해졌으면 했다. 뭐든 지환에게 서진과 관련된 버릇이 남는 게 좋았다. 거기다 서진에게 지환의 자국이 남는 것도 좋았고.

    한 번 깨물었다가, 이내 살을 빨아 당기고는 달래듯 핥는 행동에 어느덧 느릿한 한숨이 흘렀다.

    “하아, 형….”

    졸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느긋하게 페팅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취한 사람 씻기면서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사실 욕실에서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환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어차피 이제 주말이니 늦게 일어나도 괜찮고.

    “형?”

    서진은 어느덧 지환의 움직임이 없다는 걸 깨달으며 지환을 바라봤다. 제발.

    “형.”

    아니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예상하기는 했던 대로, 역시나 이제는 완전히 자고 있었다.

    “지환아.”

    그럼에도 사람을 그렇고 물고 빨며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는 자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환은 미동조차 없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종종 이랬던지라 새롭지는 않았다. 늘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서진은 결국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이마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잘 자.”

    서진은 다시 지환을 끌어안았다.

    * * *

    지환의 옆에서 눈을 뜬 서진은 얼마간 가만히 제 곁에서 잠든 지환을 바라보다가, 이내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를 생각해 봤다. 채워 넣어야 하는 게 몇 개 있었다. 자고 있는 지환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서진은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우선 계좌에 돈을 옮겨 놨다.

    지환이 서진에게 제 월급을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서진은 그 돈을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따로 계좌를 만들어 지환이 마음에 드는 일을 한다거나, 좋은 일을 할 때마다 그 목록의 이름으로 일정 금액씩 옮겼다. 아마 계좌 내역을 보면 지환이 언제 어떤 일을 했는지를 다 알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굉장히 사소한 것 가지고도 돈을 보내 놨던지라 주로 월이 끝날 때쯤에는 원래 금액보다 많이 쌓였다. 지환이 알면 뭐라고 할 게 뻔했지만, 그래도 나중에 강아지 키울 거 미리 모아 둔다고 하면 변명도 해결이었다.

    보통 아침에 잘 일어나서 밥을 제대로 먹었다거나, 웃는 게 사랑스러웠다는 게 주된 이유였는데, 어제는 먼저 보고 싶다고 해 줬으니까. 요술봉을 보고 서진을 생각했다는 게 이상하기는 해도, 술 마시는 와중에도 서진의 생각을 잊지 않은 것도 고마웠고.

    나가기 전 다시 한번 찬찬히 거래 내역을 훑어보며 지환을 생각하던 서진은 그대로 지환이 깨기 전에 장을 보고 돌아오다가, 도착한 편지를 발견했다.

    2년 전 지환과 함께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1년 뒤에 편지를 보내 준다는 느린 우체통이 있기에 편지를 쓴 적이 있다. 그 편지를 받고 또 한 번 가서 편지를 썼으니 지금 온 편지가 벌써 두 번째 편지였다.

    첫 번째로 갔을 때는 그간 잘못했던 점들과 미안했던 점들을 적었는데, 막상 받아 본 편지에는 지환이 서진에게 좋았던 점들과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 쓰여 있었다. 그제야 이런 편지를 써야 하는구나 싶어서 다음번에 갔을 때는 서진도 지환의 좋은 점들을 가득 썼다. 그러다 보니 정말 편지지가 모자랐는데.

    서진은 우선 장 본 것들을 대충 정리하고 편지를 열어 봤다. 이번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까 싶었는데, 서진은 찬찬히 그 글자들을 읽다가 결국 웃었다.

    이건 거의 참회록 수준이었다. 술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마셔서 미안하고, 늦게 가려고 한 건 아닌데 회식 붙잡혀서 미안했고, 요리 잘 못 해서 고생시키는 것 같고.

    둘 다 첫 번째로 받은 상대방의 편지를 보며 다음에는 저렇게 써야겠다고 생각한 후 실제로 두 번째 편지에서는 그렇게 했던 모양이었다. 지환이 이번 연도에 받게 될 편지에는 작년에 지환이 서진에게 썼던 것처럼 온갖 사랑 고백이 가득한데.

    서진은 거의 반성문 수준인 내용 가운데도 결국 끝에 남은 그 사랑한다는 말을 손으로 쓸어 봤다. 서진은, 지환을 만나기 전까지는 외로움을 알지 못했다. 혼자가 좋았고 더 편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환이 없으면 외로웠다. 몇 시간 뒤면 만나게 될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리고 만약, 지환이 없어진다면 서진은 평생을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게 되겠지. 제게 있는지도 몰랐던 감정을 알려 준 지환으로 인해.

    서진이 지환과 만나며 좋은 것만 알게 되지는 않았다. 외로움도, 질투도, 모순도, 그 이외의 다른, 어쩌면 부정적이라고 칭해질 것들도 많이 알게 됐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지환을 향해 있다는 게 어쩔 수 없이 좋았다. 그러니까,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걸 알았다. 하나하나 알아가게 되겠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그대로 침실로 들어간 서진은 여전히 자고 있는지, 이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지환의 모습에 침대 맡에 앉아 조심스레 그 이불을 내렸다. 빛이 들어오는 게 거슬리는 모양인지 눈가를 찌푸리는 걸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자 다시 표정이 풀어졌다.

    “일어났어요?”

    손을 뻗어 서진을 끌어당기는 걸 끌려가 주자 지환은 서진의 목덜미에 대충 손을 댄 채로 물었다.

    “몇 시야.”

    졸음이 가득한 그 목소리에 서진은 부드럽게 그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귓불을 매만졌다. 여전히 확신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이제는, 바로 내일이면 지환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꼭 신혼 같은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신혼 같은 생활이 아니라, 실제로 결혼을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결혼을 해 봤자 결국은 이혼하면 끝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결혼을 사랑의 최종 목적지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결혼의 그 어디에서도 안정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서진은 지환이 뭘 신중하게 여기는지를 안다.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도. 지환이 서진에게 건네준 것들은 지환이 더없이 중요하게, 그만큼이나 신중하게 여기는 부분이었다. 같이 살고 결혼을 생각하는 건, 지환에게 정말 중요했다. 지환은 그걸 서진에게 건네줬다. 그 누구도 아닌 서진에게.

    “아직 점심은 안 됐어요.”

    그 말에 지환이 다시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쓰려는 걸 서진이 대신 그 머리를 끌어안아 빛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 지환이 서진의 등을 토닥였다.

    “더 자려고?”

    “조금만.”

    가라앉은 목소리에 서진은 그 뒷머리에 입을 맞췄다. 본인이 의도하는 건 아닌 모양이지만, 사실 지환은 알맞다 싶은 때에 맞춰 사는 사람이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좀 놀아보다가, 제대 후에는 마음잡고 진지한 연애를 해 보고, 어쩌면 지환은 스물여덟에서 서른쯤을 제 곁에서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서진이 아니더라도 결혼을 생각해 봤을 수도 있다.

    타이밍이 좋았던 거야 안다. 마침 그때 지환의 곁에 있는 게 서진이었으니. 운이 좋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그건 서진이다. 지환의 스물다섯도, 스물여섯, 스물일곱도 모두 서진과 함께했다. 스물여덟의 남은 나날들도 서진이 있을 것이고, 스물아홉, 서른, 그 이후의 나날들도 모두 그랬다.

    그 이전의 시간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었겠지만, 앞으로의 시간은 서진의 것이다. 늘 그렇게 바랐다. 그런 바람과 함께 지금처럼 잠든 지환을 끌어안고 있자면, 일어나 웃어 주는 얼굴을 보면, 보고 싶다고 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함께한 시간들을 깨달을 때면,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이 사람의 시간이 제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제 시간을 이 사람에게 온전히 줄 수 있지 않을까. 서진의 시간은 지환의 것이 된 지가 오래인데, 지환도 그렇게 느껴 주지 않을까. 어쩌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귀여워.”

    문득 서진의 뒷덜미를 살살 주무르며 웅얼거리듯 나온 그 목소리에 서진은 인식할 틈도 없이 웃었다.

    “머리카락.”

    두서없이 이어진 그 목소리에 서진은 끌어안은 지환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서진은 이번 연도의 편지를 읽으며 작년의 편지를 생각하다가 이제 곧 또다시 편지를 쓰러 갈 계획을 짰다. 그리고 내년에 받게 될 편지는 어떨지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사실 근거도 없지만, 어쩌면 그저 서진이 그렇게 바랄 뿐이겠지만, 어쩌면, 이런 나날들이 앞으로도 계속되지 않을까.

    지환이 술을 마시면 데리러 가고, 쓸데없는 선물을 받고, 같이 잠들고, 일어났으면서도 서로를 끌어안고 침대를 벗어나지 않고. 어쩌면, 그런 나날들이 끝도 없이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작년의 편지에서 끝나지 않고 올해의 편지를 받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년에 받을 편지를 생각하는 것처럼, 어쩌면, 후년에도, 내후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끊이지 않고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지 않을까. 서로가 쓴 편지를 확인하고 다음에는 서로의 방법대로 편지를 쓰기도 하고, 이번에는 어떻게 써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그렇게 이어지지 않을까.

    “편지 왔어요.”

    조용히 내뱉어진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이 서진에게 맞닿은 그대로 말했다.

    “내 것도 도착하면 여기로 보내 달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회사 근처에서 살고 있던지라 그 주소로 보냈었는데, 이후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미리 말을 해 놓은 모양이었다.

    “지금 사는 사람한테?”

    “응.”

    이제 슬슬 잠이 깨는지 서진의 목덜미에 있던 지환의 손이 슬그머니 올라와 서진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곧 오겠네요.”

    그 말에 지환이 그제야 눈을 뜨며 서진을 바라봤다.

    “뭐라고 썼어?”

    서진은 그 눈가를 부드럽게 제 손으로 쓸었다. 속눈썹을 어루만지자 반사적으로 지환의 눈이 감겼다. 서진은 그대로 그 눈꺼풀 위로 드러난 점에 입술을 문질렀다. 간지러운지 입술 밑으로 살갗이 살짝 떨리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직접 봐요.”

    그 말에 지환이 고개를 틀더니, 서진의 턱을 살짝 깨물었다. 서진은 그대로 지환의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지환은 꽤나 시기를 맞춰서 사는 사람이다. 청혼을 하겠다고 했으니 아마 하겠지만, 예상하기로는 서진의 졸업에 맞춰서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 서진이 그전에 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것만큼은 먼저 하고 싶었다. 사실, 동거하자는 것도 서진이 먼저 말해 놓고 우선은 거절당했다가, 지환이 다시 말한 거기는 했지만. 설마 청혼까지 거절하지는 않겠지.

    “서진아.”

    서진의 콧대를 손가락으로 덧그리듯 쓸며 나온 그 말에 서진은 제게 닿은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응.”

    그 네 번째 손가락에 잘 끼워져 있는 반지에도 입을 맞추자 지환이 웃으며 서진의 입가를 매만졌다.

    “어쩌려고 이렇게 귀여워.”

    “잠 덜 깼네.”

    아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입을 맞추자 맞닿은 사이로 웃음소리가 흘렀다. 결국 서진 역시 마주 웃자 지환이 서진의 뺨을 제 손으로 감쌌다.

    “형이, 저를….”

    서진은 늘 자기만의 것이 가지고 싶었다. 그렇다고 지환이 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환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환을 중심으로 채워 가다 보면, 지환도 서진을 온전한 제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까. 서진은 정말, 지환의 것이 되고 싶었다. 당신만의 사람이.

    “형 거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조금 부담스러웠을까 싶었는데, 막상 지환은 서진의 코끝에 짧게 입을 맞췄다.

    “내가 네 거지.”

    지환은 정말 그렇다는 듯이, 서진을 더없이 아낀다는 듯이, 그렇게나 무르게 서진을 바라봤다.

    “그래서 내가 너한테 꼼짝을 못 하잖아.”

    지환이 서진을 아끼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사랑하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늘 견디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지환이 서진을 바라보며 웃는 걸 보자면, 마주 웃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서진은 저를 끌어당기는 손에 선선히 끌려가며 맞닿은 몸을 더욱 깊게 껴안았다. 언제고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랑해요.”

    지환과 함께하는 건 늘 그랬다. 지환은 자신이 얼마나 손쉽게 서진을 들었다 놨다 하는지를 알고 있을까.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도 이런 나날을 보내지 않을까. 주말 아침이면 별다른 의미도 없이 서로를 껴안은 채 시간을 보내고, 매년 한 번씩은 작년의 편지를 받고, 어쩌면 청혼을 하고. 뻔한 일상을 보내거나, 예상치 못한 하루를 보내거나, 그 모든 걸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당연히 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든, 아무리 평범한 것이라고 해도 서진은 지환에 관한 거라면 그 어떤 것도 익숙하게 여길 수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평범하면서도 낯설고 늘 새로운 나날들을, 함께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서진은 미래를 생각할 때 늘 계획을 했지 그 곁의 사람을 떠올려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제는 지환이 생각났다. 그게 그저 서진의 바람일 뿐이 아니라, 정말 늘 함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지환이 늘 얘기해 주던 대로 마당 있는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고, 당신의 이상을 함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당신이 정말 나를 당신의 것으로 생각해 준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함께하지 않을까.

    “나도 사랑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독해(Reading Comprehension)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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