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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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은 힘겹게 일어나 거의 눈을 감은 채로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탁 앞에 서 있던 서진을 발견하고 등 뒤에서 허리를 껴안으며 그 등에 머리를 기대자 늘 그렇듯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어요?”
방학인 데다가 로스쿨은 아직 시작도 안 한 서진은 오히려 꼬박꼬박 지환보다도 먼저 일어났는데, 회사에 다니는 지환은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어.”
눈을 감고 겨우 답하며 손으로는 티 위로도 윤곽이 잘 잡힌 걸 알 수 있는 복근을 매만지자 서진이 지환의 손을 잡고 얌전히 허리에 얹기만 하도록 손 간수를 시켰다. 서진이 그대로 지환을 매달고 걸음을 옮기자 지환은 따라가며 이끄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먹여 줄까요?”
“됐어.”
서진이 쥐여 주는 대로 수저를 잡고 스스로 손을 움직이자 서진은 그저 지환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어딘가에 앉으면 맞은편에 앉기보다는 서로의 옆에 붙어서 앉았던지라 지환은 남은 오른손으로 서진의 왼손을 잡아 토닥였다.
“너도 먹어.”
입에 뭐가 들어가니 그나마 잠이 좀 깼다. 손등을 살살 엄지로 쓸어 주자 서진이 그제야 얌전히 답했다.
“네.”
지환은 슬쩍 서진을 바라봤다. 지환의 옆에서 밥을 먹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잡힌 손을 절대 빼어내지 않는 것도 사랑스럽고. 점점 잠이 깨니 제 옆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서진은 물론이고 식탁도 눈에 들어왔다. 요즘 들어 요리를 정말 열심히 하더니 아침인데도 차려진 게 꽤 있었다.
지환은 맞잡은 서진의 손을 꾹꾹 누르듯 주물렀다. 이렇게 어린애가 해 주는 밥을 먹고 있다니. 지환도 이제는 정말 서진을 위해서라도 요리를 배우려고 했는데, 막상 서진이 탐탁지 않아 했다. 서진은 정말 요리하는 게 좋다고는 했지만, 지환이 알기로 서진이 원래부터 요리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물론 벌써 사귄 지가 몇 년이니 그동안 바뀌었을 수는 있는데, 그게 온전히 지환 때문이라면 그것도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서진이 지환을 직접 챙겨 주고 싶어 하는 만큼, 지환도 서진이 굳이 번거로운 일을 하는 건 싫었다.
“오늘 저녁에는 외식할까?”
“왜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지환의 숟가락에 반찬을 놓아주며 하는 말에 지환은 살살 서진의 뺨을 쓸었다. 어떻게 이런 애를 냉큼 잡아 왔지 싶을 정도로 너무 귀여웠다.
“그런 건 아닌데 맨날 요리하니까 우리 서진이 힘들까 봐 그러지.”
“어차피 저 요즘 하는 것도 없는데.”
어째 서진은 해가 갈수록, 아니, 사실 날이 갈수록 더 귀여워졌다. 밖에서는 여전한 것 같지만, 그래도 지환의 앞에서만은 분위기가 한없이 말랑거렸다. 이제는 하고 싶은 말도 곧잘 하는 것 같고 눈치 주는 것도 잘하고.
“너 공부하잖아.”
방학임에도 로스쿨에 가서 공부할 걸 미리 알아두는 걸 뻔히 아는 지환의 말에 서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그거야 늘 하는 거잖아요.”
“이래서 모범생이 안 된다니까.”
저절로 나온 탄식에 서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지환을 바라봤다.
“매일 요리하는 거 힘들지 않아?”
“안 힘들어요.”
서진은 지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나직하고도 얌전한 그 목소리에 지환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왜 웃어요?”
그러면서도 서진은 자연스레 지환을 따라 웃고 있었다.
“귀엽다, 귀여워.”
그대로 터져 나온 진심에 서진의 눈가가 살짝 굳었다가, 빤히 지환을 바라봤다.
“형, 저 이제 스물네 살이잖아요.”
“그럼 안 귀여워?”
“그래도 스물네 살이면 어리지는 않잖아요.”
“어린데.”
굉장히 당연한 말을 내뱉었는데, 어째 서진의 그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지환은 부단히 머리를 굴렸다. 뭘 잘못했지.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애 취급 받거나, 사귀는 사람이 양심 아프다고 할 정도로 어리지는 않잖아요.”
“내가 뭘 또 잘못했나?”
방금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알 수 있는 게 없어 결국 직접 묻자 서진이 바로 답했다.
“또? 제가 언제 형한테 잘못했다고 했어요.”
“어. 그런 적은 없지.”
실제로도, 지금껏 서진은 지환에게 뭘 잘못했다고 한 적이 없기는 했다. 지환이 서운하게 하거나 섭섭하게 해도 그냥 어떤 점은 조금 싫다고 말할 뿐이지 지환이 그걸 잘못했다고 말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나이 얘기는 왜?”
“아니, 뭐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닌데.”
특별히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형이 보기에는 저 아직 어려요?”
지환은 가만히 서진을 바라봤다. 연애를 하면 종종 함정 문제를 마주하기 마련이었다. 지환은 이런 종류의 질문에 늘 약했다.
“미안한데, 이게 지금 답이 있는 거지?”
혹시 지환이 생각할 의지가 없어 보였나 싶어 지환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잠깐만 생각하게 해 줘.”
뭐라고 해야 하지. 서진이 어리기는 어렸다. 그렇다고 죄책감을 느끼냐고 하면, 정말 그랬다면 서진과 섹스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 어린애 손에 물 묻히게 했다는 생각을 하면 또 미안한 게 사실이기는 하고, 어쨌든 어린 건 사실이지 않나.
“뭘 또 생각해요.”
지환은 서진을 바라봤다. 그렇다고 어린 건 맞지 않냐고 하면 싫어하겠지. 서진은 지환이 애 취급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어리지 않다고 하기도 이상했다. 물론 지환이라고 서진이 어려서 좋아하고 어려서 귀여워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껏 계속 어리다고 하다가 이제 갑자기 어리지 않다고 하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나.
“귀여운데.”
결국 적당한 회피로 이뤄진 답에 서진은 말했다.
“그런 거 말고. 어리냐고요.”
피할 공간을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생각을 하느라 잠깐 먹는 걸 멈추자 서진이 직접 지환에게 밥을 떠먹여 줬다.
“주관적으로 보자면 어리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널 마냥 어리게 본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내가 널 어리지 않아서 귀엽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귀엽게 여기는데 그렇다고 마냥 어리게 본다는 건 아니고 어리기는 어린데 꼭 그것 때문에 귀엽다는 건 아니지만,”
“형.”
헛소리하지 말라는 목소리에 지환은 결국 짧게 말했다.
“어리지.”
그 말에 서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물었다.
“몇 살이면 안 어려요?”
“너 졸업하면?”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평생 어려 보일 게 뻔했다. 이렇게나 귀여운데.
“저 이제 졸업해요.”
“그거 말고.”
다 먹은 그릇을 대강 정리하자 서진이 바로 일어서 지환을 따라왔다.
“로스쿨?”
“어.”
언제든 안 어릴까. 늘 귀엽겠고.
“아니, 형.”
불만스러워 보이는 그 표정을 보면 특히 그랬다. 서진은 점점 더 감정 조절을 능숙하게 하며 모든 일을 무던하게 잘 처리했지만, 지환의 앞에서만은 조금 더 허물어진 표현을 보여 줬다. 귀엽지 않을 리가 없지.
“형이랑 저랑 나이 얼마 차이 안 나는 건 알죠?”
서진은 씻고 출근 준비를 하는 지환을 졸졸 따라오며 따지듯 말하면서도, 착실히 지환의 준비를 도왔다.
“좀 나기는 하지. 너 따지자면 내가 업어 키운 지혜랑 친구 할 나이인데.”
“그래서 제가 지혜랑 친구예요?”
“학교 같이 다녔잖아. 너랑 나는 나이 차로 치면 초등학교 제외하고 학교 같이 못 다녀.”
그러고 보면 정말 그랬다. 지환이 살뜰히 챙기며 자라는 걸 직접 본 지혜와 서진은 나이가 얼마 차이 나지도 않았고 실제로 학교를 같이 다니기도 했다. 그걸 깨달을 때마다 옅은 자괴감이 몰려왔지만, 지환을 빤히 바라보는 서진을 보자면 그게 뭐 별건가 싶기도 했다.
“대학 같이 다녔잖아요.”
“그건 그래.”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지혜랑 친구 하는 게 더 어울리는 서진을 잡아 왔으면 그만큼 아끼고 예뻐해 줘야지.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잖아.”
외투를 챙기며 서진의 뺨에 입을 맞추자 서진이 살짝 풀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봤자 납득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오늘 머리 말릴 때는 이 얘기를 하겠지.
“설거지는 내가 다녀와서 할게.”
지환은 현관까지 따라 나온 서진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그 입술에 꾹 입술을 맞췄다.
“네.”
서진은 이래 놓고 한 번도 그 말을 지킨 적이 없다. 지환은 서진의 곧은 콧대를 장난스럽게 손으로 쓸어 주고는 웃었다.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아니어도 연락하고.”
이제 정말 나가야 되는데 서진을 두고 가자니 걸음이 떼어지지를 않았다. 매일이 그랬다.
“저녁에 데이트하자.”
돈을 벌어서 뭐하겠는가. 다 예쁜 애인한테 쓰려고 버는 거지. 오랜만에 밖에서 외식도 하고 서진이 말할 리는 없지만, 가지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사 주고 드라이브도 해야지.
“데리러 올게. 알겠지, 예쁜아?”
서진은 방학을 하고 나서 지환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데리러 온다고 할 건 없었지만, 서진은 지환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자기가 잘 못 하면 어쩌냐고 했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이 이제 서진은 침대 위에서 아주 지환을 녹여 먹겠다는 듯이 굴었는데, 또 이런 때는 한없이 조신하기만 했다.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귀여울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 *
지환은 마침 마주친 동료의 모습에 그 앞으로 다가갔다.
“아, 지환 씨, 안녕하세요.”
“은서 씨, 안녕하세요.”
가볍게 답한 지환은 그대로 물었다.
“은서 씨, 혹시 졸업 때 선물 뭐 받았는지 물어봐도 돼요?”
지환은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서진의 졸업 선물로 뭘 줘야 할지를 물어보고 있었다. 거기다 은서는 부서는 다르지만 연수원에서부터 만난 입사 동기라 묻는 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상관은 없는데, 왜요? 누구 졸업해요?”
“애인이 이번에 졸업하는데 뭐 줘야 할지를 모르겠어서요. 꽃다발은 줄 건데 또 뭐 줄까요?”
지환은 지금껏 제게 애인이 있다는 걸 숨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지환과 그렇게까지 친하지는 않지만, 오가다 이야기 정도는 하는 은서도 모르지 않았다.
“레스토랑부터 좋은 곳으로 예약해요. 이 시즌에는 잡기 힘드니까. 사귄 지 얼마 됐다고 했죠?”
“2년 반 정도 됐어요.”
말하고 보니 어쩐지 생경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생각해 보면 지환은 제 인생에서 가장 긴 연애를 하는 중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겠고.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지환이 지금보다 더 잘해야 했다. 그러니 우선 졸업 선물부터도 잘 해야겠고.
“목걸이 같은 거 어때요? 무난하게.”
“그런 거를 안 하는 친구라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면서부터도 같이 고민했는데, 서진의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반지 같은 건?”
같이 고민을 해 주다가 나온 그 말에 지환은 되물었다.
“커플링?”
그 물음에 은서가 시선을 내려 지환의 손을 바라봤다.
“어, 그러게. 그러고 보니 지환 씨 커플링이 없었네요.”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지환은 서진을 만나기 전에도 커플링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냥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야 졸업하는데 커플링은 조금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우선은 답하자 은서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지환 씨, 결혼반지 말고 커플링.”
은서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냥 액세서리로 반지 말한 거였어요. 생각해 보니 애인이 선물해 주면 좀 의미 있어 보이기는 하겠는데.”
그것도 그렇기는 했다. 아무래도 반지는 꽤나 의미를 띄니까. 그래도 커플링 정도는 괜찮으려나. 우선 지환이야 당연히 괜찮았는데, 서진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부담스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 다 됐네. 선물 잘 고르고 나중에 봐요.”
그 말에 지환도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네. 오늘 고마웠어요.”
부담스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을 듣고 나니 계속 반지 생각이 났다. 그래도 아직은 조금 이르려나.
* * *
[반지 어떻게 생각해]
[커플링]
퇴근하자마자 밖으로 빠져나가며 대학 동기들끼리 있는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내자 다들 퇴근만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답이 떠올랐다.
[김가연: 와]
[김가연: 나 순간 쟤 돌아서]
[김가연: 스물넷한테 청혼한다는 줄 알았어]
[임동규: 타이밍이 좀 부담스럽지 않냐]
[임동규: 졸업하고 바로 커플링주면]
[임동규: 너 졸업해도 꼭 나랑 있어야된다]
[임동규: 이런 것 같잖아]
그게 맞기는 했다. 지금 당장 청혼을 할 수는 없으니 우선 그거로라도 묶어 두는 건데 너무 티가 날까. 왜 지금껏 생각을 못 했나 싶기까지 했다. 서진이 반지를 끼고 있으면 다들 서진에게 애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될 테니 그것도 좋았는데.
[부담스러워?]
[박혜린: 그냥 꽃다발 사고 레스토랑 최대한 괜찮은 곳 예약하고 선물은 무난하게 해]
아무래도 같은 회사에 다니다 보니 제일 잦게 마주친 탓에 지환의 연애 상담을 가장 많이 해 준 혜린의 답이었다.
[목걸이 같은 거?]
[근데 걔 그런 거 안하는데]
[박혜린: 향수는?]
[향수 뿌려]
지환도 향수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서진이 준 향수였다. 맨날 뿌리는 걸 잊는 탓에 자주 뿌리지도 않았고. 그에 반해 서진은 지환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도 항상 좋은 향기가 났다. 무슨 향수를 뿌리는지는 아는데.
[김가연: 그럼 그거 주면 되겠네]
[같은 거 줘야 되는 거지?]
[박혜린: ㅇㅇ]
[박혜린: 안맞으면 큰일이니까]
[박혜린: 안전하게 가자]
[알았어]
우선 답하면서도, 역시 반지가 아쉬웠다. 부담 가지지 말라고 하면서 주면 괜찮지 않을까. 지환이 뭐 무릎 꿇으면서 줄 것도 아닌데. 혹시, 부담 가지지 말라고 하면서 주면 오히려 더 부담스러울까.
[임동규: 최지환 너 진짜 이상한거 하지말고 기본만해라]
[내가 언제 이상한 거 했어]
괜히 찔린 지환의 답에 바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임동규: 너 가끔 급발진하잖아]
전혀 동의할 수 없어 반박하려고 했는데, 그보다 먼저 서진이 시야에 걸렸다. 지금은 방학이니 당연했고 학기 중이라고 해도 대부분 서진이 지환보다 일찍 끝났기에 서진이 종종 지환을 데리러 올 때가 있었다.
“내가 데리러 간다고 했잖아.”
우선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얼굴을 본 게 좋아 냉큼 다가가자 무표정하던 서진의 얼굴에 금세 옅은 웃음기가 돌았다.
“제가 데리러 오고 싶었어요.”
지환은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퇴근 시간이라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초반에는 서진이 회사 근처로 오면 다음 날 몇몇 사람이 지환에게 어제 그 사람은 누구였냐며 물어봤는데, 그나마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그러지는 않았다. 그래도 또 몇 명은 말하겠지. 서진은 어디에 놔둬도 눈에 띄었으니. 물론 외적 요소도 그랬지만, 서진을 둘러싼 분위기가 유독 깔끔한 것도 시선을 붙들어 놓는 데 탁월했다.
“차 가지고 왔어?”
“네.”
분명 지환의 집은 걸어서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 오늘 데이트를 하자고 했더니 그래도 차를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지환이 자연스럽게 서진을 따라 걸으며 차 앞에 도착했다가, 당연히 운전석으로 걸음을 옮기자 서진이 지환을 조수석으로 옮기더니 직접 문을 열어 줬다.
“제가 운전할게요.”
“어, 응.”
역시 오늘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마 지환이 취직한 직후였던 것 같은데, 서진은 운전할 일이 있으면 꼭 자신이 하겠다고 했다. 순순히 조수석에 타자 이어 서진이 운전석에 앉아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까요?”
“나 예약해 놨는데.”
몇 번 갔던 적이 있던 레스토랑 이름을 말해 주자 서진이 익숙하게 방향을 돌렸다. 지환은 그 옆에서 가만히 서진을 바라봤다. 이런 애를 누가 데려갈까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결국 지환이 데리고 왔다. 사람 일이라는 게 이렇게나 예측이 어려웠다.
“왜요?”
“귀여워서.”
그 말에 서진이 흘깃 지환을 바라봤다.
“오늘 많이 힘들었어요?”
매일매일 귀엽다고 했는데 서진은 매일매일 어색해했다. 그게 더 귀엽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물론, 자기가 귀여운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귀엽겠지만.
지환은 문득 핸들을 쥔 서진의 손을 바라봤다. 아무 장식도 걸치지 않고 쭉 뻗은 그 손가락을 보자니 방금까지의 고민거리가 다시 떠올랐다. 저 예쁘고 단정한 손에 반지가 있으면 잘 어울릴 텐데.
“무슨 생각 해요?”
잠깐 대답이 없었던 건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새 또 지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네 생각.”
“좋은 생각?”
“어.”
지환은 그대로 손을 뻗어 서진의 눈가를 살살 쓸었다. 지환은 종종 서진이 자랐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늘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분명 처음부터 좋아했던 건 아니다. 그때는 지환도 다른 애인이 있었고 심지어 서진은 미성년자였으니까. 분명히 그랬었는데.
“나는 네 생각 할 때 좋은 생각만 하는데.”
애초에 서진 자체가 좋은 생각이 아니던가.
“그럼 무슨 생각 했는데요?”
언제부터인가 시선이 가기는 했지만,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좋아하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깊이 빠졌다는 인식은 없었다. 스물다섯의 남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상대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애한테 인생을 쏟아부어 보겠다거나, 그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손가락이 예쁘다는 생각.”
서진을 생각할 때면 늘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어느 가을날, 사람이 없는 공원, 벅찬 숨,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 끊어지는 목소리, 남은 거라고는 지환뿐이라는 듯이 쫓아온 그 노력들.
속수무책으로 빠져 버렸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다시는 서진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려 버렸다. 다시는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그게 바로 평생을 걸어 보고 싶은 순간이 아닐까. 평생에 단 한 번이라면.
“밥 먹으러 간다며요.”
“어. 그게 왜?”
손가락이 예쁘다는 말에 왜 저런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서진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왜 손가락을.”
서서히 붉어지는 그 귓가에 지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아니, 예쁜아, 미쳤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졌다. 지환은 그 예쁜 손가락에 무언가를 끼워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서진은 그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해할 만했어요.”
언제인가는 뽀뽀는커녕 밤에 전화해도 되냐는 말이나 하더니 이제는 아주 저 좋을 대로 말을 해석하고 있었다.
“뭐가 오해할 만해.”
지환이 서진의 뒷머리에 손을 넣어 쓰다듬자 이제는 서진의 얼굴까지 붉어졌다.
“오해는 네가 해 놓고 또 부끄러운 것도 너야?”
“조용히 해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주제에 꽤나 새침한 구석이 있었다.
“이거 완전 적반하장이네.”
그 말에 서진이 조금 짜증스럽다는 듯이 지환을 바라봤다. 그래 봤자 귀엽기만 했다. 자기가 멋대로 그런 생각을 해 놓고.
“귀엽게.”
웃으며 놀리는 기색을 숨기지 않자 서진이 다시 시선을 피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는 아주 대놓고 창문턱에 팔꿈치를 세워 머리를 기대고는 계속 서진을 바라보는데도 서진은 꿋꿋이 정면만을 바라보며 운전했다. 강단 있는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내려요.”
한숨 돌렸다는 듯이 결연하게 나온 그 목소리에 지환이 결국 웃음을 터뜨리자 서진이 지환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그 입꼬리가 허물어졌다.
“너무 쉬워요.”
제 입가를 가리며 하는 말에 지환은 그 손을 내려주며 꼭 잡았다.
“뭐가?”
“제가.”
한서진은 도대체 어디까지 귀여워질 작정이지?
“우리 서진이 어려운데.”
진심이기는 했지만, 누가 들어도 놀리는 어투라 설득력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내려요.”
그 말에 웃음을 지우지 않고 내려 뒤이어 내린 서진의 곁을 바로 따라 걷자 서진이 흘깃 지환을 바라봤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너.”
그 즉답에 서진이 바로 답했다.
“저도 형 좋아요.”
서진은 그 말을 내뱉고는 문득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너무 쉽다.”
“어렵다니까.”
실제로도 지환에게 서진은 정말 어려웠다. 어디까지 귀여워질 생각인지도 모르겠고 어디까지 사랑스러워질 계획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뭐 어때.”
거기다 아닌 척 지환을 자기 뜻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건 또 어찌나 잘하는지. 서진이 그냥 가만히 보기만 하면 지환은 흠칫하며 제 행동이 뭐가 잘못됐는지를 되돌아봤다. 물론 그 모든 게 다 좋았다.
“나도 너한테 엄청 쉬운데.”
“안 쉬운데.”
서진은 종종 역지사지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럼 너도 안 쉬워.”
단호히 말했는데도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쉽죠.”
서진은 그대로 이어 물었다.
“어려운 게 좋아요?”
별걸 다 물었다. 어차피 지환의 답은 하나뿐인데.
“나는 서진이가 좋은데.”
지환은 그대로 레스토랑 안으로 서진을 밀어 넣었다.
“밥 먹자, 밥.”
하루 종일 상대방에게 쉬운지 어려운지를 논의하는 것도 충분히 재미있겠지만, 우선 애 밥은 먹이고 싶었다. 그대로 자리를 안내받아 메뉴를 고르고 주문하자 서진이 지환을 빤히 바라봤다.
“돌아갈 때는 형이 운전해요.”
술 마시고 싶다고 생각한 걸 어떻게 저렇게 빠르게 눈치챌까. 늘 감탄스러웠다.
“그거 약발 끝난 지가 언제인데.”
서진이 돌아갈 때는 지환이 운전하라고 하면 지환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서진은 돌아갈 때도 자신이 운전했다. 처음 몇 번이야 넘어갔지만, 패턴이 뻔했다.
“그래서 마시겠다고?”
서진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지만, 지환은 지레 흠칫했다.
“내가.”
쉽기는 뭐가 쉬워. 쉽기는 지환이 더 쉬웠다.
“내가 언제 그랬어.”
“왜요. 마시고 싶으면 마시지.”
“아니야. 괜찮아. 마시고 싶지도 않았어.”
서진이 지환을 유도하기란 정말 쉽기만 했다. 당연히 지환에게 넘어가지 않을 도리 같은 건 없었다. 물론, 버티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요?”
그제야 웃는 모습에 지환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층 풀린 그 분위기를 감상하고 있자 갑작스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최지환? 야, 오랜만이다!”
난데없는 그 인사에 지환은 고개를 돌렸다.
“그, 어. 안녕.”
우선 부르니 답하기는 했는데,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환은 슬쩍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은 종종 지환은 기억하지도 못하는 지환의 주변 지인들을 대신 기억할 때가 있었다. 혹시 이번에도 그럴까 싶어 구조 요청을 보냈는데, 서진도 모르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와, 어떻게 여기서 다 보네. 그런데 옆에는 친구분? 이런 곳은 여친이랑 와야지.”
우선 애인이랑 온 거기는 한데, 아니었어도 그걸 다른 사람이 상관할 건 아니지 않나.
“여친 없어? 설마 최지환이?”
누군지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어째 말하는 투가 그리 좋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처음 인사했을 때부터도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래서 누구기에?
“나 만나는 사람 있는데.”
우선은 답하자 상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가, 이내 다시 웃었다.
“그래? 그럼 여친이 바쁜가 보네. 내 여자 친구도 그래서 그 마음 잘 알지. 그래도 내 여친은 시간 나면 챙겨 주려고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좋대.”
그 말에 지환은 그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한번 쭉 훑었다. 거 뭐 얼마 되지도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라는 말을 쓰려면 적어도 서진 정도는 돼야 했다. 그 정도로는 커야 머리부터 발끝까지라는 단위에 좀 진정성이 섞이지. 정말 그 여자친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좋아한다면 그건 그다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가 의대 다니니까. 이제 인턴 할 거고.”
“아.”
지환은 짧은 깨달음과 함께 상대의 얼굴을 바라봤다. 의대라고 하니 기억이 났다.
“우리 별로, 즐겁게 대화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나? 내 기억으로는 그런데.”
새내기 시절 말 그대로 주먹질을 했던 동기였다. 왜 싸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 말하는 꼴을 봐서는 싸울 만해서 싸웠겠지 싶었다.
“형 친구분이신가 봐요.”
문득 나온 그 목소리에 상대방과 지환의 시선이 동시에 서진에게로 향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 원래 얘랑 같은 과였다가 나중에 의대 갔거든요.”
“그러셨어요? 의대 어려울 텐데 열심히 하셨나 봐요.”
서진의 체격은 물론이고 인상 자체도 서늘한 편이라 상대는 잠시 흠칫했다가도, 그 어투가 꽤나 상냥한 걸 알아차리고는 답했다.
“그렇죠. 그래도 아무래도 경쟁률 강한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도 하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지환의 옛 동기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얘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 학교 다닐 때는 장난 아니었는데.”
“저도 같은 학교에서 만났어요.”
“그럼 다 알겠네요. 얼마 없는 여자 동기들도 다 얘 좋아했어요. 동기만 좋아한 것도 아니지 선배들도 그랬는데. 너 몇 명은 사귀지 않았나?”
듣다 보니 점점 더 개소리를 했다. 성격 같아서는 당장 꺼지라고 하고 싶었는데, 서진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고 있었다.
“너 취직도 잘 했다며? 너랑 한번 자기만이라도 하겠다는 애들도 널렸을 텐데. 너 원래 그랬잖아.”
지금은 학교도 다르면서 지환이 취직을 어디 한지는 또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말하는 내용은 또 뭐고.
“야.”
그냥 몇 마디 내뱉고 알아서 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럴 기미가 없어 결국 내뱉자, 지환이 말을 잇기 전에 문득 서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말을 하네요. 그렇게 말하실 것 같기는 했는데, 정말 말하네. 그런 말 실제로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은 처음이라 신기하네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네?”
얼떨떨하게 나온 상대의 목소리에도 서진은 슬쩍 지환을 바라봤다.
“형, 음식 식겠어요. 먹어요.”
“저기, 방금 저한테 뭐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 말에 서진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그렇게 말하실 것 같았다고요.”
어조가 평탄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신 거 맞잖아요. 제가 뭐 욕이라도 한 것도 아닌데.”
“죄송한데 그게 지금 무슨 뜻,”
점점 상대의 목소리가 굳어지는데도, 서진은 상대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알아들으셨잖아요.”
지환은 꽤나 오랜만에 상기했다.
“그런데 왜 굳이 또 물으시지.”
지환이 요즘 서진의 말랑거리고 풀어진 모습만 봐서 기억을 못 했을 뿐이지, 서진도 꽤나 성격이 각별하기는 했다.
“밖으로 나가던 길이셨던 것 같은데, 안 가고 뭐 하세요?”
지환이 결국 짧게 웃음을 터뜨리자 서진이 흘깃 지환을 바라봤다가, 그제야 상대를 바라봤다.
“웨이터 부르는 건 안 좋아하실 것 같은데.”
“석민 씨, 왜 안 나오고 있나 했네. 아는 분 만났어?”
이름이 석민이었던 모양이다. 저쪽도 동료와 함께 왔던 모양인지 석민을 찾으러 온 그 목소리가 때마침 들려오자 석민은 동료 앞에서 또 헛소리를 하지는 못하겠는지 입을 닫았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단정한 그 목소리와 무감한 표정에 결국 석민이 지환과 서진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번갈아 바라보면서도, 동료를 따라 나갔다.
“왜 안 먹어요?”
그런 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지환을 향해 내뱉어진 물음에 지환은 말했다.
“너 진짜 귀엽다.”
가릴 것 없이 느끼는 그대로를 말하자 서진이 눈가를 찌푸렸다.
“먹기나 해요.”
그러면서도 지환이 계속 웃으며 바라보자 서진 역시 결국 헛웃음을 지었다. 서진이 너무 착해서 남한테 상처를 받을까 봐 조금 걱정했는데, 생각해 보면 서진이 상처 받고 불안해하는 건 지환과 관련된 일일 때가 고작이었으니 그냥 지환만 잘하면 될 것 같았다.
* * *
반지를 살까. 사는 거야 그렇다 치는데, 어떻게 부담스럽지 않게 전해 줄 수 있을까. 집에 돌아가는 차에 타자마자 자연스럽게 하루 종일 하던 생각을 이어 나가자 문득 서진이 물었다.
“무슨 생각 해요?”
“별 생각 안 하는데.”
“그래요.”
그 차분한 목소리 뒤로 물음이 이어졌다.
“오늘은 별일 없었어요?”
“응. 별일 없었지. 맨날 똑같은데 뭐.”
“그래도 오가다 동기 만나면 얘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확실히 서진의 말대로 지환은 원래 그런 모든 대화들을 서진에게 알려 주기는 했다. 애초에 서진이 궁금해하는데 굳이 숨길 건 아니었으니.
“아, 오늘.”
그러고 보니 오늘 은서를 만났던 걸 얘기하려다가, 같이 나눈 대화를 상기하고 지환은 말을 끊었다.
“별일 없었어.”
“네.”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역시 지환은 숨기는 데는 재능이 없었다. 애초에 서진에게 그 무엇도 숨기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이 크게 작용하기는 했겠지만.
“사실 은서 씨 만났는데 점심 먹고 들어가는데 보여서.”
“네.”
“그래서 졸업할 때 뭐 받았냐고 물어봤어. 네 졸업 선물 물어보려고. 근데 여전히 못 골랐어. 너 뭐 받고 싶은 거 있어?”
반지 얘기를 빼고 순순히 털어놓자 서진이 그제야 흘깃 지환을 바라봤다.
“없어요. 그냥 형만 오면 돼요.”
예상 그대로의 답이었다.
“사람 불안하게 하지 말고.”
서진은 지환이 뭔가를 숨기면 정작 당사자인 지환이 깨닫기도 전에 먼저 알아차렸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요즘 계속 그랬어요.”
그랬었나. 졸업 선물을 고민한 지가 꽤 되기는 했다. 반지 생각을 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꽃다발밖에 생각이 안 나잖아.”
“그거면 됐지 또 뭐가 필요해요.”
지환에게 별 비밀이 없다는 걸 알게 돼서인지 서진의 목소리가 한층 풀렸다.
“내가 불안하게 했어?”
“아니에요. 별로, 그렇게까지는.”
이제 서진과 지환이 사귀기 시작한 후로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났다. 그러니 서로의 눈에 뻔히 보이는 게 있기 마련이었다. 서로가 뻔히 안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하는 말들도 있기 마련이었고.
“응. 그렇게까지는 아니었구나.”
서진을 보며 말하자 서진이 슬쩍 지환을 바라보더니,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선물 그냥 저한테 물어보면 되잖아요.”
항복에 가까운 그 목소리에 지환 역시 말했다.
“그러게. 어차피 내가 뭘 골라도 너한테 숨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지금 알았어.”
“저는 놀라는 거 안 좋아한다고요.”
그제야 그 목소리에 투정기가 섞였다. 지환이 꽤나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할 말을 꽤나 잘하는 것 같으면서도, 지환에게만은 싫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응석이나 투정 같은 건 부리지도 못하는 서진에게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그 순간들이.
“그래, 우리 예쁜이는 그런 거 안 좋아하지.”
어르듯 말하는 목소리에 서진의 뾰족한 시선이 닿았다. 지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서진의 뺨을 콕 눌렀다. 볼에 보조개가 핀 것처럼 눌렀다 떼어내니 서진이 이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지환을 바라봤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할 것 같아?”
장난스럽게 묻자 서진이 지환을 빤히 바라봤다.
“무슨 생각 하는데요?”
지환은 흘깃 주위를 확인했다. 이제 곧 집이었다.
“우리 서진이 손이 예쁘다는 생각.”
그 말에 서진의 표정이 굳었다가, 이내 그 시선이 흔들렸다.
“이번에는 그 소리 맞아.”
“형.”
지환의 말을 이해했나 싶을 정도로 굳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짜 너무 사랑하는데.”
지환이 의아하게 그 목소리를 듣자, 서진은 그저 말을 이었다.
“그러다 사고 나요.”
“내가 뭘 했다고?”
서진은 그 말에 답하지도 않은 채로 다급히 차를 주차하고는 먼저 내린 후, 바로 조수석 문을 열어 지환을 내리게 했다.
“그래도 자주 말해 줘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초조한지 전광판을 빤히 바라보는 그 모습에 지환은 웃었다.
“사고 난다며.”
“자주 말해 줄 거죠?”
아주 자기 듣고 싶은 말만 듣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자주는.”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만 해도 다음 날이 주말이니 내뱉어 본 말이었고. 그래도 고작 말 몇 마디에 시선의 온도부터가 달라지는 애인을 보자면 그건 좀 그렇지 않냐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
그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층에 도착하자 서진은 다급히 현관을 열어 지환을 들여보내고는 이내 저 역시 그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사랑해요.”
차에서부터 집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꽤나 다급했던 것치고 현관에서의 키스는 부드럽기만 했다.
“사랑해.”
애초에 답은 하나였던지라 그대로 말하자 서진이 지환의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사랑해.”
그 말과 함께 서진은 다시 지환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 선선히 입술을 벌려 주자 그 안으로 혀를 물고 빨아 당기는 게 느껴졌다. 손을 뻗어 서진의 뒷덜미를 매만지자 서진이 아주 자연스럽게도 지환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현관에서 다 벗기게?”
익숙한 게 무섭다고, 단추를 다 푸는 게 정말 빠르기도 했다. 그만큼 입히는 것도 빠르기는 하지만.
“그럼 보는 시간이 더 길어지잖아요.”
셔츠를 벗겨 내리며 어깨를 쓰는 그 단단한 손에 지환은 서진의 뺨을 쥐고는 그 입가에 짧게 입을 맞췄다.
“수줍던 때가 있었는데.”
겨우겨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서진이 곧바로 따라 몸을 붙였다.
“그게 더 좋아요?”
그러면서도 수줍음 따위는 어디다 가져다 버린 채 침실로 유도하는 게 꽤나 자연스러웠다.
“그걸 어떻게 골라. 둘 다 좋은데.”
어느 쪽이든 서진이면 좋았다. 거기다 지금이라고 아예 수줍어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서진은 여전히 종종 별 걸 다 부끄러워한다 싶을 때가 있었다. 침대 위에서는 아니지만.
“그럼 됐어요.”
침대에 지환을 눕히며 그 위로 올라탄 서진의 티를 벗기자 선이 잘 잡힌 복근과 가슴팍이 차례로 드러났다. 그리고 완전히 티를 벗겨내자 보이는 그 어깨가, 참.
“그거 내가 그랬지.”
얼룩덜룩한 그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겨우 말하자 서진은 지환의 바지를 벗겨내며 답했다.
“네.”
지환은 원래 술버릇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어째 서진과 지내다 보니 술버릇이 생겼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게 술만 마시면 서진의 어깨를 씹어 놓는 것이었다. 지환이 원래부터도 서진의 어깨를 유독 좋아하기는 했는데, 뼈가 곧고 자세가 좋아서 그런지 괜히 씹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그래도 평소에는 그냥 입을 맞추는 정도나 손으로 만지는 정도였는데, 술을 마시면 자제력이 약해지는지 곧잘 어깨를 물었다.
“저는 좋은데.”
거기다 서진이 말리지도 않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아무리 취했다고는 해도 서진이 하지 말라고 하면 지환은 하지 않을 텐데, 서진은 지환이 물면 무는 대로 잘근거리면 잘근거리는 대로 놔뒀다. 그 흔적을 보고 민망해하는 건 술을 깬 지환의 몫이었고.
“아프지는 않아?”
“네.”
단정한 답과는 달리 지환의 속옷까지 벗겨내고는 성기를 쓰는 손은 끈적하기만 했다.
“술 마시면 진짜 개가 되나 봐.”
그게 아니고서는 서진의 어깨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다음에 또 해 주세요.”
정작 만족스러워 보이는 서진의 모습에 지환은 이제는 꽤나 익숙하게 서진의 바지 버클을 풀어냈다. 저번 언제인가는 정말 버릇을 고쳐 보겠다고 술 마시고 들어온 후에 빠르게 씻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는데, 서진은 평소에는 꼭꼭 잠옷을 입고 자는 주제에 그날만큼은 윗옷을 벗고 침실로 들어온 적도 있었다.
정말 안 물 거냐는 그 노골적인 종용에 지환은 당연히 뻔하게 넘어갔었다. 서진에게는 지환의 버릇을 고치게 할 협조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 뭐가 나아질 리가 없었다.
“말릴 생각 없나 보네.”
“네.”
그 말과 함께 맨몸이 느릿하게 맞닿았다. 짓눌리듯 느껴지는 그 무게감에 지환이 서진의 어깨를 살살 쓸자 서진이 그대로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입안을 헤집고 혀뿌리를 간질이는 행동은 꽤나 느긋했는데, 지환의 허벅지에 비벼지는 그 성기는 그렇지가 못했다.
“하아….”
나직하게 나온 그 한숨에 서진은 여전히 입을 맞추면서, 천천히 손으로 지환의 몸을 더듬듯 내려갔다. 그 손은 지환의 목선을 느릿하게 매만지다가, 쇄골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듯 훑고는 가슴팍을 넓게 쓸고 손가락을 세워 복근 선을 따라 내려갔다.
지환이 서진의 목덜미를 끌어당기던 손을 내려 그 어깨를 살짝 쓸고는 선이 잘 잡힌 척추를 훑자 손바닥 밑으로 그 등 근육의 긴장이 그대로 느껴졌다.
“형.”
지환의 성기를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자 이미 반쯤 발기했던 성기가 그 움직임에 맞춰 꺼떡였다.
“어.”
지환이 서진의 어깨 위 자신이 만든 키스 마크인지 멍인지 알 수도 없는 자국들을 바라보며 답하자 서진이 어느새 콘돔을 뜯고는 손가락에 씌웠다. 지환의 다리를 제 몸으로 벌려 그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누르는 걸 그대로 따르자 안쪽 허벅지를 타고 서진의 손이 점점 더 깊이 들어왔다.
“내일 쉬죠?”
“응.”
천천히 엉덩이 사이를 더듬던 손이 잠시 떨어졌다가, 이내 젤을 질척하게 바르고는 다시 닿아 왔다. 그대로 입술이 맞닿으며 손가락 하나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내일 할 거 있어요?”
“아니.”
그 말에 느릿하고 부드럽게 안을 더듬던 손가락이 살짝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며 내벽을 슬그머니 긁었다.
“잘됐어요.”
그러고는 웃는 그 얼굴에 지환이 정신이 팔리자, 그 사이에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서진은 추삽질 하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천천히 제 성기를 지환의 허벅지에 비볐다.
“아,”
꾹 누르며 들어온 손가락 탓에 탄식처럼 목소리가 나오자 서진이 지환의 입가에 입을 맞추고는, 그 아랫입술을 핥았다.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리자 그 사이로 혀를 빨았다. 빨고 비비며 질척한 소리가 났지만, 그게 위에서 나는 소리인지, 아니면 다른 곳인지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형.”
지환이 손을 뻗어 제 성기를 만지려 했지만, 서진은 오히려 지환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우리 시간, 많아요.”
그 말과 함께 내벽 안을 더듬던 손가락을 굽히더니 한 지점을 꾹 누르듯 비볐다.
“뭐, 으,”
뚝 끊어진 목소리에 서진은 살짝 입술을 내려 지환의 턱을 핥고는, 그대로 다시 올라와 그 속눈썹을 핥았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자 안을 헤집는 손가락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목선을 따라 내려간 입술에 그제야 눈을 뜨자 서진이 다시 짧게 그 입술을 누르듯 입을 맞추고는, 이제는 목젖을 빨았다.
“숨 쉬는 거.”
서진은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안을 비비고 긁듯 추삽질 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느껴져요.”
그럼 숨을 쉬는데 느껴지지 지환이 죽은 것도 아닌데. 서진에게 굳이 지환의 답이 필요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이제는 가슴팍에 입을 맞췄다. 지환은 그 부드럽기만 한 입맞춤과 대비적으로 점점 난잡해지는 그 손짓에 문득 깨달았다.
“너.”
섹스를 위해 안을 넓히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흥분하는 지점만을 찾아 계속 자극하고 있었다.
“뭐, 해….”
얼핏 잠긴 목소리에 서진은 슬쩍 지환을 바라봤다가, 가슴팍 중앙에 입을 맞추고는 입술을 미끄러뜨리듯 옮겨 그 유두를 입에 담았다. 혀로 살살 굴리는 게 그대로 느껴져 허리가 살짝 굳었다. 그 모든 게 느껴질 서진은 여전히 맞잡은 지환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쥐었다가, 이내 내벽을 천천히 추삽질 하던 손가락으로 그 안을 짓누르며 더욱 깊게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아내자 서진이 방금까지 물고 있던 유두에 입을 맞추고는, 조금 더 몸을 내렸다.
“손으로도,”
배에 입을 맞추느라 살짝 뭉개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갈 수 있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말이었다.
“너 지금, 무슨,”
지환이 무슨 말을 더 잇기도 전에 서진은 빠르게 지환의 성기에 콘돔을 씌우더니 그대로 고개를 내렸다. 어이가 없어 서진의 머리를 밀어내자 서진은 성기 옆면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할 수 있어요.”
“아니, 내 몸을, 아, 으… 야, 잠깐, 만,”
말하는 중인데 또 일부러 내벽을 꾹 누르며 긁자 지환은 발로 서진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서진은 밀려나지 않았다.
“내 몸을, 네가 어떻게 그렇게 단정해?”
겨우 말하자 서진은 다시 위로 올라오더니, 손목을 돌려 일부러 질척이는 소리를 만들었다.
“해 보면 알겠죠.”
지환이 반박을 하기도 전에, 서진은 다시 입을 맞췄다.
“아니,”
“네.”
“읏, 그거, 좀,”
“네.”
꼬박꼬박 대답은 하는 주제에 또 손을 움직이고 일부러 꾹꾹 누르며 소리를 만드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솔직히 지환은, 서진과 사귀게 되며 제 몸이라는 게 생각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쾌감을 찾을 수 있었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되기는 했다. 그전까지는 시도해 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그렇기는 한데, 어째 서진은 그 몸으로 직접 사는 지환보다도 더 지환의 몸에 관심이 많았다. 아주 집요하기 그지없었고 뭐든 다 확인해 보려 굴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땠냐고 묻는다면, 나쁘지는 않았지만, 조금 더 말해 보자면 좋기는 했지만, 그래도.
“응….”
나오려던 목소리가 입술에 막혀 뭉개졌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신음이 흐른 것 같아 어쩔 수 없는 흥분 속에서도 괜히 조금 떨떠름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왜인지 지환에게 닿은 서진의 성기가 더 딱딱해진 것 같기도 했다.
처음 섹스한 지가 언제고 지금은 또 그때에 비해 별짓을 다 해 봤는데, 아직도 서진은 별 거 아닌 거에 크게 반응하고는 했다. 지환도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왜요?”
부드럽게 성감을 고조시키는 손길은 멈출 생각 없이 꾸준히 이어지기만 했다.
“형이 손 얘기 했잖아요.”
정확히는, 지환이 먼저 얘기한 건 아니었다. 서진이 알아서 착각했을 뿐이지.
“이 얘기가, 하아, 아니었잖아.”
빠르게 움직이다가, 또 천천히 매만지다가, 가득 쏟아부은 젤이 접합부에 맞닿아 질척이는 소리가 날 정도로 찌걱이는 그 손길에 정신이 없었다. 목적이 뻔한 손짓이 계속해서 안을 긁고 비비며 짓누르자 지환 스스로도 제 내벽이 움찔거리며 그 손가락을 조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만 참아요.”
계속해서 일부러 건드리던 한 부분을 손가락을 굽혀 긁어내리며 귓가에 속삭이는 그 나직한 목소리에 지환이 결국 서진의 목덜미를 잡아당겨 그 입술을 물어뜯듯 입을 맞췄다. 아, 정말, 흥분과 탄식이 동시에 들었다. 서진은 그제야 지환의 성기를 매만지며 뿌리부터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쓸어 올렸다. 명확한 의도에 결국 울컥하고 정액을 내보내자 서진은 그대로 귀두를 둥글게 문질렀다.
처음 뒤로만 갔을 때의 충격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가 벌써 일 년쯤이 지났는데, 그래도 그런 적이 많지는 않았다. 지환으로서는 왜 굳이 앞에 달린 게 있는데 비효율적으로 뒤로만 가야 하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서진도 흥분할 수 있는 게 많으면 좋은 거지 굳이 하나를 안 쓸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니 서진이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는데, 그게 고작 손이 예쁘다는 말에서 시작했다니. 어쩜 사람이 이렇게나 반응이 큰지 어이가 없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거기에 곧이곧대로 따라 휘둘리는 지환도 지환이었지만.
“했네요.”
어째 싼 건 지환인데 더 열기가 느껴지는 그 목소리였다. 지환은 탈력감에 몸에서 힘을 뺀 채로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은 그제야 여전히 내벽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을 빼내고 지환의 성기에 씌워졌던 콘돔을 처리했다.
서진은 그대로 제 성기에 콘돔을 씌우고 다시 젤을 더 바른 후 천천히 그 안으로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풀 만큼 풀었고 심지어 사정도 한 번 했는데, 부피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크기에 속이 빠듯했다.
“형, 앞으로도….”
제 성기가 들어가 있을 아랫배를 넓게 쓰는 그 손에 복근에 힘이 들어갔다.
“하아, 손 예쁘다는 얘기는,”
아직 더 들여놔야 한다는 걸 아는데, 이미 속이 꽉 찬 것 같았다.
“자주, 해 줘요.”
하겠냐. 버거운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 눈가를 찌푸리자 서진이 몸을 숙여 지환을 꼭 껴안았다. 그 탓에 안 그래도 버겁게 안을 가득 채우던 성기가 더 깊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 잠, 으, 깐만,”
“응….”
서진은 그대로 손을 내려 지환의 성기를 쥐고 부드럽게 매만졌다. 페팅만 하던 시절이 있어서 그런지 성기를 만지는 손길이 유독 자극적이었다. 어디를 어떤 식으로 만지면 제일 반응이 좋다는 걸 당연히 안다는 듯이. 어째 서진은 그런 면에서는 지환보다도 더 지환의 몸을 잘 알았다.
서진은 지환의 성기를 감싸듯 손바닥으로 비볐다가, 그대로 손가락을 내려 기둥부터 잡고 쓸어 올렸다. 그러면서 핏줄을 따라 손가락을 세워 긁자 방금 사정한 게 무색하게 아주 쉽게도 성기가 힘을 받았다. 정말, 몸이 이렇게나 유도하는 대로 움직여도 괜찮은 걸까.
여러모로 벅찬 흥분에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자 서진이 지환의 귓가에 입을 맞추는 게 느껴졌다. 귓불을 빠는 질척한 소리가 꼭 귀가 아니라 머리에 바로 울리는 듯했다. 그 열기에 점점 몸이 풀리자 서진은 지환의 목선에 입술을 묻으며 그제야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허리를 묻은 그대로 뭉근하게 돌리자 내벽이 짓눌리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허벅지가 반사적으로 떨리자 서진은 맞닿은 상체를 살짝 떼어놓더니, 지환의 한쪽 다리를 제 어깨에 올려놓은 채로 그 배를 살살 쓸었다. 서진은 접합부에서 찌걱이는 소리가 나는 걸 아랑곳하지도 않으며 지환의 다리에 입을 맞췄다.
조금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이 와중에 안을 채운 서진의 성기는 너무 버겁고, 그러면서도 느릿한 움직임이 조금 애가 타는 것 같기도 하고, 여기저기 질척거리는 소리에 괜히 더 흥분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열기에 흐릿한 눈으로 겨우 시선을 들어 올렸는데, 지환의 다리에 입을 맞추고 아프지 않게 깨물던 서진이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눈이 마주쳤다.
“아, 윽,”
지금껏 질척하고 느긋하게 움직였던 게 언제였냐는 듯이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갑작스레 강하게 이뤄진 삽입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자, 서진은 그대로 지환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으며 제게 더 끌어당겼다. 더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이미 한계까지 침입한 성기가 더 깊숙이 밀려 들어온 것 같았다.
“형,”
저 목소리가 문제였다. 평소와는 달리 흐릿한 그 눈도, 평소보다 열기가 맴도는 피부도, 지환을 따라 움직이는 시선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꽉 잡아 오는 손도, 살이 마주하는 소리도, 미끈거리는 감촉도, 모든 게 문제였다.
“좋아….”
서진의 그 목소리와 흥분에 풀릴 대로 풀렸으면서도 부드럽기만 한 시선에 지환은 결국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서진이 이러는 걸 본 게, 볼 수 있는 게, 지환뿐이라는 게 갑작스레 상기됐다. 얼굴이 붉어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형.”
서진은 지환을 깊게 껴안으며 그 손목을 살짝 깨물었다가, 그대로 핥았다. 숨을 헐떡이느라 가슴팍이 맞닿았다.
“어.”
잠길 대로 잠긴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의 한 손은 자신과 맞잡고, 다른 한 손은 겹쳐 그 성기로 내렸다. 얼굴이 드러나자 시선을 피할 곳이 없었다.
“왜?”
“응….”
지환은 그대로 서진의 어깨를 껴안았다. 제가 남겨 둔 흔적이 가득했다. 그저 그렇게 틈 없이 맞닿자 서진이 움직이는 대로 복근에 지환의 성기가 아무렇게나 비벼지며 짓눌렸다. 그만큼이나 불규칙하게 서진의 움직임대로 흔들리며 시트에 뒷머리가 비벼지자 서진은 그 머리를 제 손으로 감싸고는 제게 끌어당겼다.
“아, 읏,”
다시 입술이 겹쳐지자 가릴 것 없는 신음이 문득 흘렀다. 별것도 아닌 목소리일 뿐이었는데, 서진이 손으로 지환의 허벅지를 눌러 벌리며 더 깊이 성기를 처박았다.
“윽, 취향 참….”
그 와중에 나온 목소리에 서진이 지환과 손을 겹쳐 흔들던 성기를 손가락을 세워 긁었다.
“여유, 있어요?”
온몸이 예민한 가운데 얼핏 날카로운 자극에 저절로 뒤가 조여들자 서진에게서 나직한 신음이 들려왔다.
“아닌 거,”
더 맞닿을 곳도 없는데 조금이라도 떨어질라치면 다시 붙으며 흔들리는 게 점점 더 빨라졌다.
“네가, 더, 흐으… 잘, 알잖,”
정신없이 헤집어지고 흔들리느라 뚝뚝 끊기는 목소리에 서진은 제 허리 짓에 맞춰 지환의 성기를 흔드는 속도를 빨리하며 답했다.
“제가 더, 없어서, 잘,”
꼭 배 속이 휘저어지는 것 같았다. 내벽이 눌리고 긁히듯 비벼지며 맞닿은 모든 부분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모르겠는데….”
서진은 그대로 지환의 귀두를 꾹 눌렀다가, 그 밑 부분을 비비며 문질렀다.
“아….”
숨이 벅차 잠시 고개를 틀자 서진이 곧바로 따라와 다시 입을 맞췄다. 점점 움직임이 커지며 접합부의 질척거리는 소리와 혀를 비비며 빠는 소리가 울렸다. 거기다 서진이 지환의 성기를 훑고 흔들며 새어 나온 액체가 그 손에 비벼져 쿨척이는 소리까지.
흔들리는 와중에 허리가 살짝 들리자 서진은 더 빠르게 제 손에 쥔 성기를 문질렀다. 맞닿은 가슴팍 사이로 살갗이 닿는 그 사소함조차도 모두 견디기 힘들었다.
내벽을 빠르고 강하게 박아 넣는 것도, 빠져나가면서도 귀두로 내벽을 긁는 것도, 흔들리는 와중에도 절대로 떨어지게 하지는 않는 것도, 착실히 손으로는 지환의 성기를 매만지는 것도, 그 모든 작용에 숨이 가빴다.
“손, 읏, 서진, 아, 손,”
이제 정말 사정을 할 것 같아서 손을 떼라는 소리였는데, 서진은 오히려 손으로 넓게 귀두를 덮고 그대로 비볐다.
“응….”
숨이 너무 벅차서,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서진은 늘 지환을 배려하기는 했지만, 실상은 어떻게 된 게 한 번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 노골적인 유도에 지환이 결국 맞닿은 서진의 등을 끌어안으며 그 손안에 토정하자, 서진은 저 역시 지환의 안에 몸을 묻고 사정했다.
지환이 그대로 숨을 몰아쉬자, 서진은 지환의 안에 성기를 묻은 채로 두어 번 손에 쥔 지환의 성기를 문질러 남은 정액까지도 토해내게 한 후 성기를 빼어냈다.
여전히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기는 했지만, 그래도 헐떡이던 가슴팍이 천천히 안정되는 걸 인식하며 서진을 바라봤는데, 막상 서진은 제 손에 묻은 지환의 정액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한테도 있는 거 뭐가 신기하냐.”
“그래도 좀 다르죠.”
채 떨쳐내지 못한 열기가 묻은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얼핏 온도가 높았다.
“안 돼.”
그 단호한 말에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무튼 안 돼.”
뭘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서진은 아쉽다는 듯이 제 손을 바라보면서도 그제야 지환의 정액을 닦아내고는 제 콘돔도 처리한 후 정액이 튄 지환의 아랫배를 닦아 줬다. 다 닦아낸 지환의 아랫배에 여전히 손을 올려놓고 문지르는 그 행동에 지환은 가만히 서진을 바라봤다.
“너는, 취향이,”
특이한 건가? 지환도 딱히 가늠할 수는 없었다. 지환도 남자랑은 크게 뭘 해 본 적이 없어서 생길 수 있는 다른 취향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형이랑 같이 만들었잖아요.”
거기다 서진이 이렇게 말한다면 또 할 말이 없기는 했다.
“그건 그렇지.”
그 말에 서진은 지환의 배를 토닥이는 그대로 지환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싫어요?”
싫었다기보다는, 사람의 신체라는 게 뭘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인체의 신비라는 건 별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서진과 만나기 전의 지환이 해 왔던 섹스는 지금과는 여러 부분에서 달랐기에 조금 어색한 감은 있지만, 이러다가도 점점 익숙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거기다 이런 쪽으로는 지환도 취향이라는 게 없었으니 서진과 같이 만들어 가면 되겠고.
“그런 말은 또 안 했지.”
지환의 말에 서진이 이번에는 지환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이어 콧대에 입을 맞췄다. 지환이 그대로 서진의 뺨을 잡고 입술을 살짝 깨물어 주자 서진이 웃으며 입술을 맞췄다.
“그래서 오늘 그 사람은 누구였어요?”
지환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는 서진의 뒷머리를 주무르듯 쓰다듬자 나온 그 물음에 지환은 곰곰이 생각했다.
“나도 기억 안 나.”
그래 봤자 생각나는 게 있을 리 없다.
“이름도 걔 일행이 말해서 알았으니까, 성은 아직도 모르겠는데. 내가 새내기 때 동기랑 싸웠던 거 말했나?”
그 말에 서진이 지환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물었다.
“주먹질?”
“내가 거기까지 말했어?”
“네.”
언제 얘기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거 얘기했으면 사귀기 전에 말한 모양이었다. 별 걸 다 얘기했다 싶었다.
“아무튼 걔가 걔야. 뭐 때문에 싸웠는지는 기억 안 나고.”
말도 못 하게 계속 뽀뽀하는 걸 장난스럽게 밀어내자 서진은 그제야 살짝 떨어졌다가, 다시 바짝 몸을 붙여 오며 본인이 혹사시킨 지환의 허리를 주물렀다.
“저는 알 것 같은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일행의 말에 따르면 아마도 이름이 석민인데, 석민은 지환과도 일 년만 같이 학교에 다니다가 반수를 했던지라 서진과는 접점이 전혀 없었다.
“계속 여자 친구 가지고 걸고넘어졌잖아요. 형 동기 얘기하고. 그때도 그런 얘기 하다가 그랬겠죠.”
꽤나 그럴듯한 추론이기는 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을 듣고 나니 점점 더 기억이 되살아났는데,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아마 박혜린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좋아하면 그냥 좋아할 것이지 꼭 되지도 않게 걸고넘어지는 새끼들이 몇 있었다. 아니, 김가연이었나.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그런 놈이 몇 있었고 석민도 그중 하나였다는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갑작스레 떠오른 좋지 못한 기억에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자 서진이 다시 지환의 입가에 입을 맞췄다.
“첫사랑이 누구였어요?”
“갑자기?”
“네.”
사실 그렇게까지 갑작스러운 일도 아니기는 했다. 언제부터인가 서진과 지환은 서로에게 뜬금없는 것들을 묻고는 했다. 사소하게는 좋아하는 색 같은 것도 물었고 음식, 취미, 예전의 이야기들, 그런 것들을 문득문득 물어보고는 했다.
“기억 안 나.”
사실 조금 기억이 나기는 했지만, 우선 그렇게 말하자 서진이 지환을 빤히 바라보더니 주무르던 허리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아마 유치원 때였을걸.”
결국 순순히 답하자 서진이 그제야 답했다.
“엄청 빨랐네요.”
“그쯤에 하는 사람도 많지 않나? 그냥 가볍게 좋아하는 거니까.”
당연하게도, 자세히 기억나는 건 아니었다.
“왜 좋아했는지 기억나요?”
초등학교도 아니고 유치원인데 뭘 기억할 리가 없다.
“기억 안 나는데. 무슨 색을 좋아했던 것 같아.”
그럼에도 단편적인 기억이 조금 떠올라 말하자 서진이 물었다.
“그 사람이요?”
“어. 왜, 간식 시간이나 그런 때 과자 같은 거 나눠 주잖아. 포장도 다를 수 있고 여러 캐릭터 있고. 그런데 그게 자기가 받고 싶은 색을 받는 게 아니라 그냥 나눠 주면서 무작위니까. 근데 걔는 꼭 자기가 좋아하는 색을 받으려고 했던 것 같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주 울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좋아했어요?”
“호불호가 명확하잖아. 바라는 거 확실하고. 내가 걔 좋아하는 색 받으면 걔한테 주고 아니면 친구들한테 달라고 하고. 그냥 처음에는 걔가 울면 귀찮으니까 그랬던 것 같은데, 그렇게 계속 신경 쓰이고 챙겨 주다 보니 좋아하게 된 거 아닐까.”
사실 딱히 좋아했다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대충 처음 이성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부분을 꼽자면 그쯤이 아닌가 싶기는 했다. 막상 지금은 동성과 연애를 하고 있지만.
“네 첫사랑은?”
“형이요.”
고민도 없이 단번에 떨어진 답에 지환은 탄식했다.
“이거 완전 본전도 못 건졌네.”
지환도 어떻게든 잡아뗐어야 했는데. 물론 서진이 첫사랑이라고 하는 편이 제일 나았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서진도 이미 알고 있으니 차라리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빠져나갔어야 했다.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유치원 때의 첫사랑에 대해서는 뭐라고 못 하죠.”
정말 그렇기는 한 듯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에 지환이 안심하자, 서진이 지환의 턱을 살짝 깨물고는 이어 물었다.
“첫 연애는?”
“이건 말 안 할래. 난 네 첫 연애 알잖아. 주고받을 게 없는 질문이야.”
그 콧대를 살살 쓸어 주며 말하자 서진이 답했다.
“사람이 참 계산적이에요.”
그러면서도 곧바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이상형.”
“없어.”
사실 이건 서진이 지금껏 몇 번 물어본 질문이었다. 그간 지환은 한 번도 말해 준 적이 없고. 그런데 아직도 그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이상형이랄 게 없으니 말할 것도 없었는데.
“진심이에요?”
“어. 난 그런 거 생각하고 사람 만난 적 한 번도 없어.”
서진을 조금쯤 벅차게 끌어안으며 말하자 지환의 품에 구겨져 안긴 서진이 슬쩍 지환을 바라봤다.
“지혜는 다르게 말하던데.”
“너는 도대체 내 동생이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많이 했냐.”
지혜는 서진이 그냥 지환과 많이 친한 모양이니 이것저것 얘기를 하는 모양인데, 사실 그 친분 관계의 정체가 연인 관계였기에 지환은 제 밑천을 꽤나 많이 털려 버렸다.
“그럼 네 이상형은 뭔데.”
“형이요.”
그 단호한 답에 지환 역시 바로 말했다.
“나도 너.”
“거짓말하지 말고.”
“진짜야.”
그냥 그렇다고 하면 좋아하면 그만인데 서진은 꼭 진실을 밝히려 했다. 이렇게 서진이 연애 처음 하는 티를 낼 때면 정말 귀여웠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왜?”
“저같이 번거로운,”
또 무슨 귀여운 소리가 나오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다지 귀여운 소리는 아니라 지환은 바로 서진에게 입을 맞추며 그 말을 막았다.
“응?”
지환은 그대로 서진을 다시 끌어안았다.
“아무튼 제가 이상형 아니잖아요.”
얌전히 지환에게 안기면서도 나온 그 목소리에 지환은 답했다.
“맞다니까.”
껴안고 있는 탓에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납득하는 얼굴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럼 너는 내가 왜 이상형인데?”
“그건.”
고민하는 기색이 목소리로도 전해졌다.
“잘생겨서?”
“그것도 그런데 그거 때문은 아니고.”
평소처럼 타박을 하거나, 어이가 없다는 기색을 보일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커녕 순순히 인정하는 서진의 태도에 지환은 서진을 잠시 제 품 안에서 떼어내고는 바라봤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장난으로 한 말인데 진지하게 받아들이니 도리어 지환이 민망했다. 하지만 서진은 지환의 민망함 같은 건 알 바도 아닌지 그저 고민하는 듯 지환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대로 말했다.
“다 좋아요. 전부 다. 그러니까 이상형인 거 아니에요?”
딱히 지환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말도 아니라는 듯이, 그저 담백한 어조에 지환은 잠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래서 연하를 사귀는 걸까. 하지만 어떤 어린애들도 서진처럼 사랑스럽지는 않았다.
결국 지환이 제 감정을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다시 서진을 꼭 껴안으며 그 머리를 쓰다듬자 가만히 지환을 마주 껴안았던 서진이 다시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근데.”
그래, 한창 궁금할 거 많을 때기는 했다.
“나는 이상형은 특별히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사람 좋아하게 될 때 자주 보게 되는 것 같아.”
지환은 정말 다른 사람들과 같았다. 첫눈에 호감이 간 적은 있지만,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을 붙일 만큼 처음부터 깊게 빠졌던 적은 없다. 그냥 몇 번 마주치다가 눈길이 가고 그러다 호감이 생기면 사귀고. 그렇게나 평범했다.
“왜, 뭔가 챙겨 줘야 될 것 같은 사람들 있잖아. 어떤 의미로든. 그냥 그러면 시선이 가고 그러다가 관심도 가지고 그렇게 되는 것 같은데.”
챙겨 줄 게 많아서 눈길이 가는 건지, 눈길이 가서 챙겨 줄 게 보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챙겨 줄 게 많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걸 깨닫고 보니, 만약 그런 게 이상형이라면 서진은 완벽한 지환의 이상형이었다. 손이 정말 많이 가고 그게 모두 다 굉장히 사랑스러웠으니.
“특이하네요.”
“왜?”
“굳이 번거로운 걸 좋아하잖아요.”
“번거롭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지환은 웃으며 서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좋아하니까 챙겨 주고 싶은 거야.”
“선후 관계가 다르잖아요.”
확실히 지환이 바로 방금 말했던 것과는 선후 관계가 다르기는 했다. 하지만 감정에 선후 관계를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지 않나 싶었다. 적어도 지환은 그랬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좋아하는데.”
지환은 쓰다듬던 서진의 머리칼을 헤집으며 말을 이었다.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좋아. 솔직히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면 이거 엄청 사랑하는 거다. 수치적으로도.”
그 말을 마치자마자 서진이 고개를 들어 올려 지환의 목에 입을 맞췄다가, 입술에, 콧등에, 눈꺼풀에, 뺨에, 턱에, 대중없이 드문드문 입술을 찍듯 입을 맞췄다.
서진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며 그 귀를 만지작거리자 이번에는 서진이 귓가에 입을 맞췄다. 괜히 간지러워서 웃으며 고개를 살짝 피하자 서진이 마주 웃으며 이번에는 느릿하게 입술을 벌리고 들어와 부드럽게 혀를 섞었다.
“내일 쉬잖아요.”
“어.”
어째 껴안고 토닥이듯 닿아 있던 손이 점점 더 의도를 가지고 지환의 몸을 쓸었다. 등허리쯤에 있던 그 손이 더 아래로 내려가는 걸 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 시간도 있고.”
지환이 그 말을 들으며 서진의 손을 깍지 껴 맞잡자 서진은 맞잡은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지환과 시선을 마주했다. 안 그래도 풀려 있던 그 얼굴에 사르르 피어나듯 온기가 감돌더니, 이내 부드러운 웃음이 매달렸다.
지환은 다시 겹쳐오는 입술을 선선히 받아들이며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줬다. 그저 겹쳐 깍지 낀 이 손가락에 반지가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지환은 그대로 서진을 끌어당겨 안았다. 역시, 반지를 사야겠다.
* * *
결국 또 하고 난 후 오늘은 잠이 정말 잘 오겠다는 생각이나 하며 침대 위에서 서진과 노닥거리고 있는데, 문득 서진이 말했다.
“맞다.”
그대로 서진을 바라보자 서진이 대충 가운을 주워 입었다.
“왜?”
“잠깐만요.”
그 말과 함께 서진이 잠시 침실 바깥으로 나갔다가, 이내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서진이 마사지를 해 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뻐근한 허리를 부여잡고 상체를 일으킨 지환은 상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말을 잃었다.
“너 취향이 이래?”
수갑과 안대가 있었다.
“아니요. 근데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하면 질릴 수도 있대요.”
그거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벌써 질리기에는 좀 이르지 않나. 아직 3년도 안 됐는데. 거기다 질린다기에는, 서진은 너무 열중하던데.
“질려?”
“그럴 리가 있어요?”
하지만 정작 나온 서진의 말은 빠르고 단호하기만 했다. 심지어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이 눈가를 찌푸리기까지 했다. 자기가 먼저 말해 놓고서는. 지환은 잠시 가만히 상자 안을 바라봤다. 그럼 이건 지환이 질릴까 봐 준비했다는 건가.
“그럼 나는 이런 거 좋아할 것 같아?”
도대체 서진은 지환을 어떻게 보는 걸까.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알고 비난하지도 않았지만, 지환의 취향은 아니지 싶은데.
“해 본 적 있어요?”
그 물음에 지환은 생각할 것도 없이 빠르게 답했다.
“아니.”
있어도 없다고 답해야 했는데, 실제로도 없었다. 사실, 엇비슷한 건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제대로 준비해서 한 적은 없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세이프 워드라는 걸 정해야 한대요. 분위기 깰 수 있는 걸로.”
뭘 많이 알아본 모양이었다. 정말 새로운 시도를 해 볼 때가 된 건가 싶어 지환은 우선 답해 줬다.
“그런 게 뭐가 있지.”
“섹스 중에 할 말은 아닌 걸로 해야 된다는데.”
“사과?”
대충 오늘 아침에 먹었던 걸 말하자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걸로 해요.”
그 말에 지환은 수갑을 꺼내 들었다.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던 가죽 수갑이었다.
“그럼 네가 묶일래?”
서진이 어느 쪽을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물어보자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
“저를.”
시선이 마주한 채로 그대로 목소리가 이어졌다.
“묶고 싶어요?”
“너 진짜 나 파렴치하게 만들래?”
자기가 이런 걸 가져왔으면서 상황에 맞지 않게 조신한 게 아주 인지부조화를 일으켰다.
“그럼 넌 나 묶고 싶어?”
“그런 건 아니에요.”
직접 가져온 것 치고는 답이 빠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왜 가져왔어.”
그 물음에 서진의 시선이 살짝 내려갔다.
“2년에서 3년 넘어갈 때가 위험하대요.”
“또 도파민 그 새끼냐?”
서진은 언제부터인가 지환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겠다며 과학 서적을 보기 시작했는데, 저번 언제인가는 어디서 이상한 뇌 과학책을 읽고 와서는 오래 사귀면 호르몬이 뭐가 어떻고, 세라토닌이 어쩌고 도파민이 저쩌고 그런 소리를 하며 속이 터지게 했다. 애초에 그런 건 지환의 분야도 아니었는데.
지환으로서는 현실감도 없는 권태기를 서진이 꽤나 두려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책을 보고 나더니 이제는 실체까지 생겼다.
지환은 뭘 더 묻는 대신, 안대도 꺼낸 후 수갑과 함께 물끄러미 바라봤다. 못 할 건 아니었다. 서진의 말대로 이제 주말이라 시간은 많았으니. 체력이 조금 문제이기는 했지만, 한 번 정도는 더 할 수 있었다.
“그럼 네가 묶여.”
그편이 낫겠다 싶어 말하자 서진이 고분고분 답했다.
“네.”
그 얌전한 태도에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분명 가져온 건 서진인데, 꼭 지환이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지환은 우선 서진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이 정도면 되나?”
적당히 조이며 묻자 서진이 제 손목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런 것 같아요.”
“근데 가죽이네.”
“쇠는 쓸리면 아프잖아요.”
별걸 다 신경 썼다. 세이프 워드니 뭐니 하는 걸 보니 잘 알아 오기도 한 모양이었지만.
“눈 가린다?”
“네.”
지환은 그 눈에 안대를 씌워 주며 말했다.
“무서우면 말하고.”
“네.”
서진에게 안대까지 씌운 지환은 잠시간 그대로 서진을 바라봤다. 손은 묶여 있고 눈까지 가려진 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 참, 그 몸집에 맞지 않게도 뭔가 청순하기도 하고, 왜인지 위험해 보이기도 해서 구해 주고 싶기는 한데, 묶어 놓은 게 자신이었다.
우선 느슨하게 매여 있던 서진의 가운 매듭을 풀고 그대로 젖히자, 눈이 보이지 않는 탓에 긴장한 모양인지 지환의 손길에 따라 근육이 움츠러드는 게 보였다. 지환은 우선 달래 주듯 서진의 턱에 입을 맞췄다가, 손으로 그 가슴팍을 넓게 쓸었다.
지환은 그 쇄골을 살짝 빨았다가, 그대로 제가 짓씹어 놓은 어깨에 달래듯 입을 맞췄다. 지환은 잘 다듬어진 서진의 활배근과 옆구리를 슬쩍 손으로 쓸며 다시 서진의 표정을 확인했다. 눈가가 안대로 가려져 있어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조금 찌푸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우선 복근을 부드럽게 쓸며 모양이 유독 예쁜 배꼽을 살짝 간질이자 바로 근육이 꽉 조여졌다. 분명 다른 사람이랑 똑같은 운동을 하는데 왜 서진의 몸은 유독 이렇게 근육이 예쁘게 잘 잡힐까. 볼 때마다 감탄스러웠다.
지환은 다시 서진의 표정을 살폈다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우선 안대를 풀어 줬다. 얌전히 묶인 서진의 모습에 전혀 흥분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무래도 죄책감이 더 큰 것 같았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애를 데리고 이상한 짓을 하는 것 같았다.
“나 못 하겠어.”
수갑까지 풀어 준 지환은 수갑을 그대로 서진에게 건네주며 제 손목을 내밀었다.
“네가 묶어.”
“그래도 괜찮아요?”
“어.”
실제로도 괜찮았다. 그냥 처음부터 이럴 걸 싶어 침대에 눕자 서진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내 지환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이건 하지 말까요?”
안대를 손에 들고도 하는 말에 지환은 평온히 답했다. 역시, 이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왜. 일단 해 봐.”
그 말에 서진이 안대까지 씌워 주자 단번에 시야가 막혔다.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그제야 괜히 긴장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상태로 가만히 서진이 뭘 할지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서진이 부드럽게 입을 맞춰 왔다. 가만히 입술을 벌려 주는 게 어색했다. 원래는 같이 껴안아 줘야 하는데, 손목이 묶여 있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만히 받아 주는 게 고작이었다.
혀뿌리를 살살 간질이듯 건드리는 채로, 서진의 손이 지환의 목에 닿았다. 목선을 살며시 쓸고는 어깨로 내려간 손을 예상치 못해 반사적으로 조금 움찔하자, 서진이 달래듯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입술이 턱에 닿았다가, 미끄러지듯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보이는 게 없다 보니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지환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이내 허벅지를 손에 쥐고 살며시 벌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어색했다.
“무슨 생각 해요?”
“이 상황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겠냐.”
애초에 뭐 생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서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그저 지환의 허벅지 안쪽을 매만지다가, 안대 위로 입술을 맞췄다.
“눈까지 가리는 건 좀 심한 것 같아요.”
그 말과 함께 안대가 벗겨졌다. 갑작스레 빛이 들어와 눈가를 찌푸리자 서진이 눈가에 잘게 입을 맞췄다.
“눈 보는 게 더 좋아요.”
지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조금 더 마주 보는 게 좋았다. 서진의 시선이 얼마나 무방비하게 벅차오르는지를 아는데.
“이거 우리랑 잘 안 맞는 것 같은데.”
서진도 동의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운 듯 수갑이 채워진 지환의 손목을 매만졌다.
“손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그래, 뭐.”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싶어 답하자 서진이 지환의 수갑 위로 입을 맞췄다.
“불편해요?”
그러면서도 서진은 이제 지환의 팔꿈치를 깨물었다.
“편하자고 하는 거 아니지 않아?”
애초에 섹스 자체가 그랬다. 편하려고 섹스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다고.
“그건 그렇죠.”
그 말과 함께 서진이 지환의 뺨에 입을 맞췄다. 상황에 맞지 않게 귀여워 웃자 서진이 따라 웃으며 입꼬리가 휘어진 자취를 따라 잘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서진은 그대로 목선을 핥았다가, 목울대를 빨았다.
“하아….”
나른하게 터진 한숨에 서진이 가슴팍에 입을 맞추고는, 여태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지환의 성기를 손에 쥐자 그 손길에 따라 성기가 꺼떡였다.
남들은 회사 다니느라 체력이 약해진다는데, 지환은 서진의 살뜰한 관리를 받아서 그런지 학생 때랑 비슷한 것 같았다. 가끔씩은 서진이 지환의 체력을 그렇게 신경 쓰는 게 침대에서 열심히 굴려 먹으려고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지환은 천천히 제 몸을 따라 입술을 내리는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제 손목이 묶여 있다는 걸 깨달으며 그저 서진을 바라봤다. 언제 봐도 보기 좋은 등 근육이 움직이는 걸 홀린 듯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서진이 지환의 허벅지 안쪽에 입을 맞췄다.
“야, 잠깐, 뭐,”
지환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도 전에 서진은 그대로 지환의 허리를 제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러고는, 핥았다. 그러니까, 성기가 아니라 그보다 더 밑을.
“아니, 야, 하지, 읏,”
바로 받아들이기 힘든 당황스러움에 잠시간 굳어 있다가 겨우 나온 그 말에도 서진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회음부에 입을 맞췄다가, 다시 그 밑의 구멍을 빨았다.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하고 그보다는 조금 더, 인정하기는 싫지만 쾌감과 비슷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 같기는 했는데, 지금 서진이 뭘 하고 있는지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저걸, 도대체 왜.
“그, 아, 그만, 아…!”
심지어 혀가 들어온 것 같았다. 차마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자 지환의 허벅지를 단단히 벌리던 서진의 손이 그대로 성기를 잡아 왔다. 너무, 이상했다. 핥고 빠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종종 꾹 누르듯 혀를 움직이는 것도. 버티기가 너무 힘들었다.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어서 벅찼는데, 서진은 이제 그 안으로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기까지 했다. 이만큼 놀랐으면 성기가 좀 죽어도 될 것 같았는데, 오히려 더 꺼떡이고 있는 게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신음이 흘러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있자,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왜 벌써, 좁아요.”
별소리를 다 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그럼 그냥 적당히 그만하라고 하려 했는데, 서진은 손가락으로 내벽을 익숙하게 비비며 그 접합부를 빨았다.
“아, 읏….”
참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오자 서진은 손바닥으로 지환의 귀두를 넓게 문지르던 손을 내려 제 성기를 스스로 흔들었다. 저걸 핥으면서 섰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왜.
“으, 뭐, 하는,”
이 와중에도 손가락으로는 내벽을 누르며 핥는 게 너무 생생했다. 뭉근하게 손목을 돌려 안을 매만지면서, 핥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는데 손목이 묶여 있어서 뭘 어쩔 수도 없었다.
거기다 지금 지환이 그만하라는 말도 몇 번이나 했는데 서진은 들어먹지를 않았다. 어째 손목은 남겨 두자더니, 이러려고 그런 모양이었다.
“하지, 마.”
그래도 말을 좀 들어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굴었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 더 심했다. 분명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서진은 오히려 보란 듯이 내벽을 꾹 짓누르듯 비볐다. 그 와중에 또 젖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라는 걸 분명 아는데도, 소리가 꼭 귓가에 바로 울리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귓가까지 다 붉어졌을 게 뻔했다.
따뜻한 숨이 닿는 게 소름이 돋았다. 겨우 덜덜 떨리는 다리를 들어 서진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는데, 서진은 오히려 그 다리를 제 어깨 위에 올려놓아 지환의 허리를 더 들어 올렸다.
서진은 이제 안을 비비며 추삽질 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접합부를 핥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서진의 어깨에 걸쳐진 다리가 불규칙하게 떨렸다. 아, 제발, 좀. 당황스러움과 열기가 한데 섞여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만, 윽… 그, 아, 그, 만,”
이제 정말 한계였다. 그렇게 몰고 간 서진도 알고 있는지, 스스로 성기를 흔드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 지환이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겨우 신음을 참으며 사정하자, 서진은 덜덜 떨리는 안을 슬쩍 눌렀다가, 손가락을 빼며 그대로 지환의 성기를 잡았다. 채 나오지 못한 것들마저 내보내겠다는 듯이 누르듯 매만지자 그 손 안에 남아 있던 정액이 뱉어졌다.
어쩐지 현실감이 없어 멍하니 그 손을 바라보고 있자, 서진은 지환의 정액이 묻은 손으로 제 성기를 매만졌다. 거의 정액을 펴 바르는 꼴이었다.
“아….”
나직한 한숨과 함께 다시 스스로 성기를 흔드는 걸 멍하니 바라보자 서진도 이미 한계였던 모양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손안에 정액을 토해냈다.
스스로 성기를 흔들면서도 지환을 빤히 바라보던 시선, 방금까지 뭘 물고 핥았는지를 아는 입술, 평소보다 상기된 피부, 근육이 잘 짜인 몸, 저게 들어갔다는 게 늘 신기한 성기, 그리고 그 위에 잔뜩 섞인 서로의 정액. 어째 조금 허망하기까지 했다. 취향이 참, 만만찮았다.
* * *
그러고도 또 이어진 삽입을 마치고 앓듯이 엎드린 지환의 모습에 서진이 걱정스러운 기색 그대로 지환의 허리를 주물렀다.
“자국 남았어요.”
지금은 그 자국을 확인하러 고개를 돌릴 힘도 없었다. 그렇게 허리를 꽉 붙들었으니 당연히 남았겠지. 허리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허벅지를 비롯한 다른 곳에도 종종 손자국이 남았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겠고.
“하루 이틀이야?”
조금 넋이 나간 목소리에 서진도 자신이 과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지환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조심스레 옆에 누우며 지환을 껴안았다. 뭐 어떻게 피할 기력도 없어 그냥 안겨 있던 지환은, 문득 서진을 바라봤다.
“야, 너, 내가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냥 멍하니 있었는데, 문득 그게 생각났다. 지환은 분명 하지 말라고 했고 그만하라고 했는데, 서진은 계속했다.
“네?”
제가 해 놓고 모르는 척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정작 서진의 어조에는 정말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세이프 워드 말하기로 했잖아요.”
“아, 씨발 맞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런 플레이였지. 빠르게 내뱉어진 탄식에 서진도 그제야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진짜 싫었던 거예요?”
서진을 탓할 게 아니었다. 그냥 지환이 잘못했지. 왜 그걸 정해 놓고도 써먹을 생각을 못 했을까.
“아니, 그냥, 앞으로는 하지 마.”
사람 기억력이 왜 그런가 싶어 자괴감과 함께 떨어진 답에 서진이 지환을 빤히 바라봤다.
“왜요?”
지환이 인체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 볼 동안, 서진은 좋았던 모양이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싫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좀 그랬다. 그걸 왜. 아무튼 그랬다.
“왜?”
하지 말라고 하면 웬만하면 그냥 그러겠다고 하는 서진에게서 벌써 같은 물음이 두 번이나 나왔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데,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가늠할 수도 없었으며, 가늠하고 싶지도 않았다. 서진은 제 취향을 모두 지환과 함께 만들었다고 하던데, 지환은 저런 걸 만들어 준 기억이 없었다.
서진에게도 콘돔 씌울 타이밍을 보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정액을 펴 바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시간이, 이게 시간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하지 마.”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결론만큼은 뚜렷한 목소리에 서진이 지환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딴에는 본인도 인식하지 못하는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데, 그럼 당연히 넘어가야 했다. 그냥 서진을 빤히 바라보자, 서진이 옅게 웃었다. 본인도 웃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게 뻔했다.
애가 어쩌다 이렇게 변했나 잠깐 고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언제나 사랑스러웠다. 심지어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나날이 더 사랑스러워졌다. 지환은 어쩔 수 없이 마주 웃으면서도, 다짐했다.
실제 사실이 어떻든 앞으로 서진에게 손이 예쁘다는 말은 못 해 주지 싶었다.
* * *
온갖 고민을 한 게 무색하게도 반지를 사는 건 꽤 쉬웠다. 백화점에 가서 주위에서 추천해 준 브랜드를 찾고 사이즈를 말한 후 구입하는 게 끝이었다. 사실 지환이 보기에는 디자인을 전혀 구별할 수 없었던지라, 차라리 친구를 하나 데리고 올까 싶기도 했는데, 서진에게 줄 반지인데 다른 사람이 고르는 건 좀 아니지 싶어 점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골랐다. 고르는 과정이 심히 험난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사고 나니 도대체 사기 전에 왜 그렇게 많은 고민을 했나 싶을 정도였다.
거기다 생각해 보면, 지환이 지금껏 맞춰 본 적이 없을 뿐이지 남들은 사귀고 일주일 만에도 맞추는 게 커플링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어떻게 주는가의 문제가 남았다.
“형.”
“어?”
“입맛 없어요?”
“아니. 맛있는데.”
지환은 그 말과 함께 찬찬히 식탁을 살폈다. 뭔가, 상차림이 점점 과해지는 건 지환의 착각일까. 서진은 요즘 하는 일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태생이 착실한 탓인지 서진은 하루의 일부분은 꼭 앞으로 배우게 될 것들을 공부했다. 그런데 요리할 시간은 또 어디서 나는지.
“오늘도 늦어요?”
얼마 남지 않은 서진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조금 열심히 일하고 있기는 했기에 지환은 답했다.
“아마도. 그래도 어제만큼 늦지는 않을걸.”
요즘 아침을 제외하고는 서진과 시간을 잘 보내지 못한 게 사실이기는 했다. 거기다 아침이라고 해도 딱히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고.
“미안.”
“형이 왜 미안해요.”
“그래도 네 졸업식은 갈 수 있어.”
사실 그걸 위해서 시간을 미리 선불로 당겨쓰는 형편이기도 했다.
“어려우면 안 와도 돼요.”
“안 어렵고, 갈 거야.”
단호한 지환의 말에 서진이 살며시 웃었다.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자 문득 바로 어제 친구들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지환이 하도 커플링을 가지고 이것저것 물어본 게 많았던지라, 드디어 커플링을 샀다고 하자 애인은 좋아했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지환이 아직 주지 않았다고 하자 다들 의아함을 표했는데, 커플링은 같이 사는 거 아니냐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제야 지환도 자신이 중요한 문제를 빼먹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보통 커플링은, 같이 고르지 않나.
“서진아, 너는.”
이제라도 떠봐야 하나 싶었는데, 지환은 은근히 떠보는 걸 정말 못했다.
“네?”
지환을 바라보는 그 의문이 섞인 눈동자에 지환은 어떤 식으로 떠봐야 할지를 생각하다가, 빠르게 포기했다. 뭘 말해도 이상해 보일 게 뻔했다.
“아니야.”
애매하게 떨어진 그 말에 서진이 지환을 빤히 바라봤다가, 잠깐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지환을 바라봤다.
“왜요?”
그냥 반지를 지금 줄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래도 반지인데 그건 좀 그렇지 않나. 졸업식이 바로 며칠 뒤인데 역시 그때 주는 편이 낫지 않나. 그런데 사실, 청혼 반지도 아니고 커플링인데 지금 줘도 괜찮기는 할 텐데. 하지만 어차피 그렇다면 졸업식에 줘서는 안 될 이유가 있나.
“너 진짜 졸업 선물로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말을 돌리는 건지 아니면 오히려 직설적으로 물어본 게 된 건지는 지환도 알 수 없지만, 그 물음에 서진이 말했다.
“아직도 그 얘기 해요?”
오히려 되물어진 그 물음에 지환은 슬쩍 발을 들어 서진의 다리를 건드렸다.
“이제 진짜 며칠 안 남았잖아.”
어째 서진의 졸업식인데 당사자는 아무런 감흥이 없고 지환이 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지환의 졸업식도 비슷한 양상이기는 했지만.
“졸업식에는 온다면서요. 그거면 됐어요.”
시간 없는데 이럴 거냐는 듯이 서진이 지환의 발을 얌전히 제자리에 놓게 하자, 지환은 서진의 손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너 입학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벌써 졸업이라니.”
“입학하던 거 보지도 않았잖아요.”
그거야 그랬다. 그때는 별다른 친분도 없었고. 지금이야 그때와는 정말 많은 게 달라졌지만.
“그래도 졸업하는 건 보잖아.”
그렇게 바뀐 것들을 생각해 보자면, 문득 서진의 시간이 실감 났다. 물론 지금도 정말 어리지만, 아예 미성년자 때부터 봐서 그럴까. 지환은 서진의 곁에 있으며 종종 서진이 자랐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그걸 실감할 때면 왜인지 얼핏 서운해졌다. 아직도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한데. 더 자라지 않았으면 하기도 하고, 그래도 역시 이어질 서진의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나 양가적인 감정이 저 자신도 조금쯤 어이가 없어서 웃자, 지환을 빤히 바라보던 서진이 자연스럽게 따라 웃었다. 왜 웃는지도 모르고 지환이 웃으니까 그냥 마주 웃는 그 사랑스러움에 지환은 서진을 끌어당겨 눈가에 짧게 입을 맞췄다.
“왜요?”
“귀여워서.”
예쁘게 끌려 올라갔던 서진의 입꼬리가 그 말에 애매하게 굳었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서진은 여전히 그런 말들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언제쯤 익숙해질까. 익숙해질 때까지 수도 없이 말해 줘야지.
“어디까지 사랑스러워질 거야?”
이러다 정말 누가 서진을 잡아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누구든 잡아가고 싶을 텐데. 진심이 가득한 말에 서진이 지환의 손에 수저를 꼭 쥐여 줬다.
“시간 없으니까 먹기나 해요.”
지환은 웃으며 서진의 뺨을 살살 쓸었다. 조금만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부쩍 커가는 것도 좋고. 뭐든 서진이면 안 좋겠나 싶었다.
* * *
지환은 미리 회사 근처 꽃집에서 예약해 받아 온 꽃다발을 손에 쥐고 차에서 내리며 대강 머리를 정리했다. 지환과 서진은 따로 살기는 하지만, 거의 같이 사는 것처럼 매일 봤기에 대부분 지환의 출근 준비는 서진이 도와줬다. 옷이나 머리 정리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오늘은 어떻게든 졸업식이 끝나기 전에 오기 위해 이르게 출근했던지라, 서진을 깨우지 않고 먼저 나왔다. 한동안 서진이 챙겨 주는 대로만 살던 지환은 지금 제 꼴이 괜찮은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어, 너 이번에 졸업하냐?”
꽤나 오랜만에 캠퍼스에 들어왔는데, 난데없이 아는 얼굴이 보여 다짜고짜 묻자 후배도 놀랐는지 흠칫하더니 지환을 알아보고 바로 다가왔다.
“형은 누구 보러 왔는데? 꽃다발?”
그 물음에 지환은 한번 꽃다발을 살짝 흔들며 웃었다.
“끝났어?”
후배는 학사모를 들고 학위복을 입고 있는데도 수여식이 이루어지고 있을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나와 있었다. 그 물음에 후배는 슬쩍 학위수여식이 이루어지고 있을 건물 쪽을 눈짓했다.
“아마? 나는 안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지환도 제 졸업식 때 굳이 연설을 듣고 지루하게 앉아 있기보다는 사진이나 찍는 걸 택했기는 했다. 그래도 서진은 착실하니 아마 아무도 듣지 않는 그 연설을 얌전히 듣고 있을 텐데.
“지금 들어가도 되나?”
그 물음에 후배가 시계를 들여다봤다.
“이제 곧 끝날걸.”
“이번 총장은 좀 일찍 끝내?”
지환이 졸업 후 총장이 바뀌었다는데, 우선 지환이 있던 때의 총장은 한 번도 연설 시간을 맞춘 적이 없었다.
“아니. 이제 30분 지났으니까 끝내 주겠지.”
이번 총장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몇 시쯤에 도착할 것 같다고 미리 서진에게 연락은 해 놨는데, 어쩌다 보니 그 시간 보다 일찍 도착한지라 지환은 다시 서진에게 연락을 할까 고민했다.
“그런데 너는 왜 여기서 혼자 이러고 있냐.”
“아빠 담배 피운다고 해서 형이 흡연 구역 찾아주러 같이 갔어. 그래서 형은 왜 왔는데?”
“졸업식에 오기는 왜 오겠냐. 졸업하는 애 보러 왔지.”
그게 바로 지환의 애인이었지만, 대강 생략했다. 알려지면 그게 누구냐며 얼굴을 보려 할 게 뻔했다. 역시 늦었지만, 그래도 학위수여식 장소로 가는 게 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건물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이제 끝난 모양이었다. 지환은 후배의 어깨를 툭 두드려 주며 말했다.
“졸업 축하한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자 웅성거리며 빠져나오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왜인지 정말 쉽게도, 서진을 찾아냈다. 사실 고만고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머리통 하나는 가뿐히 크니 당연히 눈에 띄었지만.
알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인기가 많은 서진은 건물을 빠져나오는 중에도 아마도 같은 과로 보이는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아 사람이 조금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싶었는데, 이야기를 듣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서진이 문득 고개를 들더니, 정말 그만큼이나 예상치 못하게, 눈이 마주쳤다.
그나마 서진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던 지환과는 달리 서진은 정말 예기치 못했는지 놀란 것 같다가, 이내 주위에 뭐라고 짧게 말하고는 바로 지환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건 모두 마찬가지였던지라 주위에 사람이 정말 많았는데, 어째 서진이 걷는 대로 조금씩 길이 트였다. 저건 무슨 모세의 기적인가.
다들 서진이 가는 길을 조금씩 터주며 흘깃거리는 그 시선들을 보자면 참 대단하기는 대단했다. 그 대단한 서진이 지환의 애인이었고.
“빨리 왔네요.”
“신호가 잘 뚫려서.”
서진의 손에 들려 있던 학사모를 가져와 그 머리에 씌워 주자 서진이 지환을 빤히 바라봤다. 서진의 손을 하루 안 탔다고 그새 꼴이 거지 같았나 싶어 뒷머리를 대충 눌러 보자 서진이 조금 비뚤어져 있던 지환의 넥타이를 똑바로 고쳐 줬다.
“사진 찍을 거지?”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흘깃거리는 시선에 물어보자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나랑은?”
그 말과 함께 웃자 서진이 자연스레 따라 웃었다.
“찍어요.”
마침 주위를 지나가던 학생 하나를 붙잡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자 그냥 두어 장 찍으면 되지 싶었는데도 핸드폰을 쥔 학생이 자꾸 각도를 달리하며 사진을 찍었다. 어쨌거나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핸드폰을 받아드니 연속 촬영도 있었다.
“사진 많이 찍었네.”
“그러게요.”
잠시 감탄한 서진과 지환은 그대로 서로를 바라봤다가, 이내 슬쩍 이제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근데 너 진짜 나랑만 찍어도 돼? 안에서 찍었어?”
“몇 장은 찍었어요.”
서진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싶어 학위복을 반납하러 같이 걸음을 옮기는데, 어째 서진의 걸음이 평소보다도 더 빨랐다.
“저녁 예약했는데 집에 좀 있다가 가야겠다.”
아무래도 예약 시간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 있었다.
“취소해요.”
그 말에 지환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왜?”
레스토랑에서 밥 먹고 커플링을 줘야 했다. 지금을 놓치면 또 언제 줘야 하는데. 무엇보다, 지환은 더 이상 서진에게 뭐라도 숨기고 있는 게 힘들었다. 사실 이 경우는 숨기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형.”
어째 내뱉는 목소리가 답지 않게 조금쯤 다급했다.
“어차피 그때까지 못 끝내요.”
“뭘?”
학위복을 반납하고 온 서진의 곁을 다시 따라 걸으며 물은 지환은, 문득 서진을 바라봤다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아니, 왜?”
그러니까, 지금 서진이 이렇게 서두르는 건 하고 싶은 게 있어서고, 그건 아마도 섹스고, 그래서 레스토랑은 취소해 달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왜 갑자기?
“형이 너무 예쁘게 입고 왔잖아요.”
지환은 시선을 내려 제 옷차림을 확인했다. 특별한 거라고는 전혀 없었다. 정말, 전혀.
“회사에서 바로 왔는데?”
“그러니까.”
그 말과 함께 차에 오르는 서진의 모습에 지환은 이제는 꽤나 익숙하게 조수석에 따라 탔다. 차에 타면서도 방금까지 나누던 대화가 조금 웃겨 지환은 웃으며 그제야 서진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주지도 않고 있었다.
“졸업 축하해.”
지환은 운전을 하느라 받을 손이 없는 서진의 얼굴 옆에 꽃다발을 가져다 댔다.
“우리 서진이랑 같이 있으니까 꽃이 안 보이네. 이러다 꽃이 부끄러워서 시들겠어.”
“형, 아저씨들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요. 자꾸 이상한 걸 배워 오고 있어.”
그 와중에도 아닌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내뱉어진 귀여운 말에 지환은 몸을 기울여 그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아, 형, 진짜.”
서진이 갑작스레 차를 갓길에 멈춰서 당황했는데, 막상 서진은 지환이 당황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지환의 뺨을 제 손으로 감싸고 입을 맞췄다. 주저 없이 끌어당긴 것치고는, 입술을 빨아 당기고 그 사이를 살살 핥아 입을 벌리게 하는 행동은 부드럽기만 했다.
“취소할 거죠?”
짧게 입술을 눌러 마무리하는 가볍고 얼핏 귀엽기까지 한 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그 낮은 목소리에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차피 지금 서진의 상태를 봐서는 느긋하게 밥이나 먹을 정신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럼 반지는 언제 주지.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는데, 서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차를 하고 지환을 이끌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지환을 벽에 밀어붙이고 입을 맞추는 그 행동에 지환은 우선은 선선히 응하면서도, 뭔가 거슬림을 느꼈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몸 붙이고 옷 벗기는 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는데, 단순한 흥분이라기에는, 어째 지금 서진은 조금 불안해하는 것 같지 않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잠깐만.”
지환이 고개를 틀어 서진을 피하자 서진이 다시 지환에게 붙어 왔다.
“왜?”
그 물음에 지환은 서진의 뺨을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예쁜아, 너 무슨 일 있었어?”
어제도 야근을 하느라 서진을 자기 전에 잠깐만 보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그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서진이 지환의 시선을 마주했다.
“일이 있었으면.”
그 목소리가 그대로 나직하게 이어졌다.
“형한테 있었겠죠.”
“나?”
무슨 소리인가 싶어 물어보려고 했는데, 서진이 다시 입을 맞췄다. 지환은 서진의 뒷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이내 입술을 떼어내고 그저 서진을 꼭 끌어안았다.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러지 않으면 계속 입을 막으려 드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뭐가,”
그 등을 토닥이며 뭘 물어봐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서진이 살짝 지환을 떼어놓으며 말했다.
“느껴지는데.”
그 말과 함께 서진이 지환의 재킷 위로 가슴팍을 눌렀다. 그 행동에 지환은 순간 굳었다. 거기, 거기 반지 케이스 있는데. 안았으니 당연히 그게 느껴졌겠지. 왜 미리 깨닫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말라고,”
이 와중에도 귀찮다고 모든 걸 주머니에 대충 쑤셔 놓고 다니는 지환의 습관을 이야기하던 서진은, 그 말과 함께 이번에는 뭘 넣고 있었는지 확인하려는지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안의 물건을 꺼냈다가, 이내 그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설마 싫은 건가? 역시 커플링은 같이 사야 하는 건데, 아니면 그냥 반지 자체가 싫을까? 커플링도 부담스러운가? 지환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스러워 서진을 살폈는데, 서진은 다시 반지 케이스를 지환의 재킷 안주머니에 들여놨다. 그렇게까지 싫다고?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면서도, 막상 직접 확인받자 충격적이었다. 지환이 아무 말 없이 서진을 바라보자 서진이 꾹 눈을 감았다가, 겨우 뜨며 조금 떨리는 시선으로 지환을 바라봤다.
“지혜? 아니면.”
여기서 지혜가 왜 나오지?
“아니면.”
안 그래도 굳은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지자 지환은 대충 서진이 무슨 오해를 했는지 눈치챘다. 정말 상상력이 좋았다. 지환은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반지 케이스를 꺼내 서진에게 건네줬다.
“네 거 맞아.”
그런데 막상 서진은 케이스를 열 생각도 없이 가만히 쥐고만 있었다.
“제 거라고요?”
그제야 한번 제 손 안의 케이스를 바라보고는 또다시 지환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지환은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어.”
“뭔데요?”
웃고 있는 지환과는 달리 서진은 이제 그 목소리까지 굳어 있었다.
“뭐겠냐.”
“커프스.”
서진에게도 그게 필요한 날이 오기는 하겠지만, 아직은 몇 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넥타이핀?”
지환이 여전히 답하지 않자 서진은 가만히 지환을 바라보다가, 이제는 불안하게 떨리는 시선을 가다듬지도 못하며 말했다.
“반지.”
싫은 걸까. 제대로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선 고개를 끄덕이자 서진이 바로 물었다.
“제가 뭐 잘못했어요?”
“뭐?”
이번에는 또 무슨 소리지.
“저는 다 이해할 수 있으니까, 뭐든 괜찮아요. 이거 주는 건 이제 안 그러겠다는 거죠?”
어째 하는 말이 조금 이상했다.
“뭔 개소리야?”
가다듬을 것도 없이 나간 물음에 서진은 한번 꾹 눈을 감았다가, 떴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사이로 다시 그 눈동자가 드러났다.
“잘못한 거 있을 때 잘해 준다고, 죄책감 때문에, 갑자기 특별히 잘해 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어느 개새끼가 그래?”
답지 않게 드문드문 떨어지는 그 목소리를 더 들을 것도 없이 끊어내자 서진이 겨우 답했다.
“책에서, 심리학,”
서진은 정말, 도대체 무슨 책을 보고 다니는 걸까.
“너 진짜 그런 책 그만 봐.”
어이가 없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지환의 목소리와 표정에 서진은 그제야 찬찬히 지환과 제 손 안에 들린 반지 케이스를 바라봤다.
“그럼 다른 사람은….”
“나는 하루가 36시간이냐? 너랑 계속 있다가 회사 갔다가 너랑 또 계속 있는데 다른 사람을 어떻게 만나? 이건 심정적은 물론이고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해. 그리고 그러면, 그러는 너는?”
“제가 뭐요?”
서진이 인기가 많다는 거야 알고 있었고 그거야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직접 보는 거랑은 조금 달랐는데, 서진이 어련히 잘할 걸 알지만 그래도 막상 서진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하자 기분이 조금 미묘했다.
“너도 다른 사람 만나려면 만날 수 있잖아. 동기나, 뭐.”
지환은 애초에 회사, 집, 회사, 집 딱 두 장소만 오갔으며 이제 만나는 사람도 회사 사람이 고작이었다. 누구를 만나긴 어떻게 만나겠는가.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가능성이 있는 건 서진이겠지.
“저는 하루 종일 형만 기다려요.”
그 단호한 목소리를 듣자니 애초에 한 적도 없는 의심이 이렇게 빨라도 되나 싶을 정도의 속도로 모두 사라졌지만,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나도 하루 종일 너한테 돌아갈 시간만 기다려.”
서진이 그랬다면 당연히 지환도 그랬겠지. 서진은 종종 그 당연한 걸 모른다는 듯이 굴었다.
“서진아, 너는 책을 읽을 게 아니라 써야겠다. 소설 같은 거.”
여전히 현관에서 별소리를 다하고 있던 지환은 그대로 현관문에 등을 기대며 팔을 벌렸다.
“그리고 내가 항상 너한테 잘해 줬지 무슨 갑자기야?”
그 물음에 서진은 조금쯤 머뭇거리면서도, 결국 지환의 양팔 밑으로 팔을 넣어 안겼다.
“반지 준 적은 없잖아요.”
“그럼 반지를 매일 줘? 이게 무슨 사탕 반지야?”
거기다 그거 사기까지 지환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결혼할 때가 되면 별생각이 다 난다던데, 지환은 결혼할 것도 아니고 반지 하나 사는 데 온갖 생각을 다 했다.
“그럼 잘못한 거 없어요?”
“어.”
“죄책감 느껴서 잘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래 그렇게 못 했어?”
조금 억울해서 묻자 지환의 등을 꼭 끌어안고 있던 서진이 살짝 몸을 떼어냈다.
“그럼 이건 왜 줘요?”
“주고 싶어서.”
여전히 케이스는 열지도 않고 그저 바라보며 하는 그 물음에 그저 그대로의 진심을 말하자, 서진은 한참 케이스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뚝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말도 없이, 그저 눈물만 뚝뚝 떨어지는 그 모습에 지환은 생각을 거칠 것도 없이 말했다.
“내가.”
뭐지, 왜, 왜 울지. 울 만큼 싫었나. 지환이 뭘 잘못했나.
“어, 그, 미안해.”
서진이 우는 걸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뭘 어떻게 상황을 판단할 정신도 없이 바로 사과가 이어졌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안절부절못하는 게 그대로 드러나는 그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다시 지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잘못 안 했다면서요.”
“으, 응.”
저절로 더듬거리면서 나온 말과 함께 머뭇거리며 서진을 감싸 안자 서진이 덥석 지환을 끌어안았다.
“놀라는 거 싫다고 했잖아요.”
지환은 서진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등을 토닥였다.
“놀라게 한 거 아닌데.”
거기다 반지를 이렇게 줄 생각도 아니었다. 레스토랑 예약도 해 놨으니 우선은 거기서 요즘 바빠서 못 한 대화도 많이 하고 분위기를 많이 푼 다음에, 그다음에 반지를 주려고 했는데. 설마하니 한번 껴안았다가 안주머니의 반지 케이스를 들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제가 뭐 잘못한 줄 알았어요.”
“왜?”
“형이 요즘 계속 말도 잘 안 하고 다른 생각 하는 것 같았는데, 무슨 생각 하냐고 해도 말 돌리고.”
어째 불안해 보인다 했더니 그게 맞았구나. 아마 지환이 계속 반지 때문에 정신이 팔려 있던 게 서진에게도 보였던 모양이다.
“잘못했어. 미안해. 반지 고르는데 전혀 모르겠어서.”
좋아하기를 바라서 한 일인데, 그 과정에서 서진을 불안하게 만든 게 안쓰러웠다.
“계속 늦고.”
점점 그 목소리에 투정기가 섞였다. 이제야 안심을 한 모양이었다.
“야근한다고 했잖아. 오늘 반차 내려고 그런 거야.”
“알아요. 아는데, 그래도, 그냥.”
서진은 종종 자신의 감정을 자신도 모른다는 듯이 굴 때가 있었다. 지환이 보기에는 그건 그냥 사랑이었는데. 사랑하니까 아니라는 걸 다 알면서도, 별 거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불안해지는 게 아닌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럴 일도 없겠지만, 사랑하니까.
“이게 뭐야.”
한숨처럼 터져 나온 그 목소리에 지환은 저도 모르게 조금쯤 웃었다.
“왜 웃어요?”
목소리에는 서러움이 담긴 것 같기도 하고.
“형이 울렸으면서 왜 웃는데.”
뒤늦은 짜증스러움이 담긴 것 같기도 했지만.
“달래 주란 말이에요.”
결국 그 속에 담긴 건 지환이 제 요구를 들어줄 걸 아는 사랑스러움이겠지. 지환은 서진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 나 너한테 뭐 숨기는 거 엄청 못 하잖아. 그래서 언제 줘야 하는지 숨기느라 그랬나 보다.”
반지를 사고 어떻게 전해 줘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지환은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지환은 원래 생각이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 아마 생각 많은 애인을 둔 탓에 조금 옮았을지도 모른다.
타이밍이 좋았다는 거야 안다. 그렇다고 그 타이밍이 전부라는 건 아니지만, 타이밍에 맞춰 서진을 냉큼 데려왔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다. 운이 좋았다는 것도 안다. 어쩌다 보니 서진이 약할 때를 잘 건드렸다.
그렇게 지환은 서진의 수없이 많은 것들을 선점했다. 첫사랑, 첫 키스, 첫 섹스,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수많은 처음들을, 그리고 그 이외의 많은 것들도. 지환은 앞으로 서진이 만날 그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유리했다.
지환이 첫사랑의 강력함을 그다지 믿는 편은 아니지만, 주위를 보면 확실히 어떤 면에서는 첫사랑이 대단하기는 했다. 거기다 지환은 서진의 생활을 거의 함께하기도 했다. 서진이 아주 나중에라도, 대학 시절을 되돌아볼 때 지환을 제외하고 생각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런 것들과 함께, 서진의 선택권을 생각했다. 서진에게는 정말 지환이 전부였다. 지환이 주는 건 고작 커플링이기는 했지만, 지환에게는 그것보다 더한 의미가 있었다. 서진에게 벌써부터 그런 의미를 공유하자고 해도 괜찮은 걸까. 어쩌면, 서진은 조금 더 많은 걸 경험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냥 주면 되잖아요.”
“부담스러울까 봐 그랬지.”
그러다 지환의 졸업식이 생각났다. 서진은 함께 살자고 했고 지환은 물론 그러고 싶었지만, 거절했다. 서진은 아무것도 경험해 보지 않았고 지환은 자신이 서진을 더 가두고 싶지는 않았다.
“부담스러워?”
조심스러운 물음에 서진은 지환을 꼭 껴안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틈 없이 맞닿은 사이로 벅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결론적으로, 이것저것 생각이 많기는 했지만, 지환은 반지를 샀다.
“너무 좋아요.”
지환은 서진만큼 제게 몰두해 주는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걸 안다. 설령 만날 수 있다고 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인생에 한 번뿐인 기회라면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당연히 붙잡아야지.
“그럼 받아 줄래?”
“네.”
그 답과 함께 서진이 지환에게서 살짝 떨어지고는, 케이스를 지환에게 건넸다.
“끼워 주세요.”
지환은 눈물이 번진 서진의 눈가를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쓸었다. 서진에게 자신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지환에게만 얽매이기에 서진은 너무 좋은 사람이고 앞으로 더 좋아질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환이 서진을 보내 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래야 한다고 해도 그러지 않을 거고.
“요즘 다 큰 것 같아서 섭섭했는데 이제 보니 아직도 아기네.”
어쩌면 많이 부족하겠지.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 한들 지환은 서진에게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라며 놓아주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머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닌데 설마 그러겠는가.
지환은 그 대신, 서진의 곁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려 할 것이다. 더 좋은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그렇게 서진에게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서진이 원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되어 나가겠지.
서진이 행복했으면 했고, 그 행복은 지환이 책임지고 싶었다.
“아니야.”
그래 봤자 그 목소리에는 여태 울음기가 남아 옅게 잠겨 있었다.
“울보야.”
“아니라고.”
슬슬 목소리가 뾰족해지는 와중에도 서진은 지환이 쥐고 있는 반지 케이스를 빤히 바라봤다. 사실 실제로도 서진은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거기다 원래 사람들은 다 눈물이 쉽게 나오는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지환의 경우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강아지가 함께 나오는 다큐를 보면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울었다. 하지만 서진은 감수성이라는 게 아예 없나 싶을 정도로 그런 것들에는 울지 않았다. 다만, 지환과 관련된 일에만 울었다. 그러니, 울지 않게 할 수 있는 것도 지환이겠지.
“응. 예쁜아.”
지환은 그 젖은 눈가에 입을 맞추고는, 이내 케이스를 열었다. 지환이 서진의 곁에서, 서진에게 충분한 사람이 된다는 건 과하게 낙관적인 부분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어차피 세상에는 비관적인 사람이 넘쳐났다. 거기다 지환도 어느 면에서는 어느 정도 비관적이었으니, 서진에 관해서는 낙관적이어도 괜찮지 않나 좋을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좀 세상의 균형이 맞지. 논리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바꿀 생각은 없으니 별 상관은 없었다.
지환은 그대로 서진의 손을 잡았다. 곧고 쭉 뻗은 손가락 중 네 번째 손가락에 천천히 반지를 끼우는 게 괜히 긴장됐다. 사실 처음 살까 고민할 때도, 사려고 마음먹었을 때도, 어떻게 줘야 할지를 생각할 때도, 계속해서 긴장하지 않았던 적이 없지만.
“좋아서 우는 건,”
겨우 그친 눈물을 어느새인가 또 떨어뜨리고 있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지환이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서진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그 말에 지환은 서진의 젖은 뺨을 제 손으로 감쌌다.
“응. 그건 괜찮아.”
서진이 경험한 게 얼마 없는 게 문제라면, 같이 경험하면 됐다. 선택권이 없었던 게 문제라면, 지환이 다른 어떤 선택권이 생기더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가장 나은 선택지가 되면 됐다.
“서진아.”
그러니 지환은 괜히 다른 사람에게 서진이 이렇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려 줄 생각이 없다. 지환도 아까워서 제대로 못 보겠는데 다른 사람한테 알려 줄 리가 없지.
“나랑 같이 살래?”
“좋아요.”
조금쯤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정말 묻자마자 답이 나왔다. 그리고 바로 지환을 꽉 껴안자 지환은 조금 숨이 막혔다. 사실 조금 많이. 심리적인 의미와 더불어 물리적으로도.
“너무, 너무 좋은데. 너무 좋으니까, 나중에 말 바꾸면 안 돼요. 진짜 안 되는 거예요.”
그래도 서진이 좋아하니 좋았다.
“말 절대 안 바꿔.”
그럴 여유는 전혀 없었다.
“사랑해.”
그러니까, 지환은 서진의 많은 것들을 선점했다. 그러니 서진도 제게서 그만큼의 것들을, 어쩌면 더 많은 것들을 가져가게 하고 싶었다. 서진이 가져가고 싶은 만큼, 모든 걸.
“사랑해요.”
서진은 말을 함부로 하는 법이 없었다. 늘 신중했는데, 사랑을 말하는 것만큼은 이렇게나 즉각적이었다. 그렇게나 늘 간직하고 있는 마음이라 그렇겠지. 지환은 결국 웃으며 서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앞으로 같이 살면서 내가 뭐 잘못해도 조금만 봐줘.”
“이제 와서?”
이미 집만 옮길 뿐이지 항상 같이 일어나고 같이 자는 생활을 하고는 있던지라 서진의 말이 맞기는 했다.
“그래도. 마음가짐 측면에서.”
“형이면 뭐든 좋아요.”
서진은 눈물에 젖어 반질거리는 눈동자로 지환을 바라보다가, 이내 점점 그 얼굴이 풀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오직 지환을 위해서만 내어지는 표정, 목소리, 시선, 어조, 그리고 사랑. 그 모든 것들을 보자면, 지환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서진은 정말, 지환의 모든 걸 다 가져가도 괜찮다. 지환은 이미 서진이 제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어주는지를 알고 있었으니.
“늘 그랬어요.”
지환은 시선을 빼앗긴 듯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제게 다가오는 입술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늘 그랬듯이, 모든 감각 속에 서진만이 남았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너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