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5/15)
  • 미독

    1.

    싸늘한 공기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들뜬 분위기가 명확히 전해질 만큼 어수선한 사이로 곳곳에서 분주히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형.”

    학위복을 입고 학사모는 손에 쥔 채로 사람들 사이에 잔뜩 둘러싸여 있다가, 서진을 발견하자마자 활짝 웃으며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서진뿐이라는 듯이 걸음을 옮기는 그 모습이 보였다.

    “한서진.”

    지환의 졸업식이었다.

    “왔어?”

    지환과 학교에 다니는 건 이제 정말 끝이구나. 지환은 직장 근처로 자취방을 잡았으니 앞으로 같이 학교에 가고 수업이 끝난 후 같이 서진의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그 평범한 일상은 끝이 나겠지. 여전히 서로의 곁에 있다는 건 달라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다를 게 분명했다.

    서진은 답이 없는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지환을 조금쯤 홀린 듯 바라봤다. 빛을 받고 있는 얼굴도, 시원시원한 웃음도, 서진만을 담은 눈동자도, 낯선 학위복과 학사모도, 날씨 같은 건 상관도 없다는 듯이 부유하는 지환 특유의 청량한 분위기도, 그 모든 게 어쩐지 각인되듯 크게 와 닿았다.

    서진은 들고 온 꽃다발을 내밀며 문득 말했다.

    “같이 살아요.”

    늘 하고 싶은 말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사람과 함께 눈뜨고 싶었고, 함께 잠들고 싶었다.

    “안 돼.”

    답이 참 빠르기도 했다.

    * * *

    동거는 왜 안 되는 걸까. 같이 살자고 했다가 장렬히 차인지도 이제 곧 2년이었다. 조금 일렀다는 거야 알았다. 동거하자고 한 게 사귄 지 반년이 조금 더 넘어갔을 때였으니. 하지만, 이제는 2년 반인데, 이쯤이면 같이 살아도 괜찮지 않나.

    “그런데.”

    나란히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는 와중에 문득 나온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을 바라봤다. 여전히 스크린을 바라보는 그 옆모습은 어째 익숙해질 기미가 없었다.

    “네.”

    팝콘을 먹으려는지 서진 쪽으로 손을 뻗는 그 모습에 통을 기울여 주자 지환이 팝콘을 집어 서진에게 먹여 줬다.

    “왜, 저런 거 있잖아. 영화관에서 팝콘 먹는데 손 닿는 거. 그거 사실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

    영화를 틀어 놓기는 했지만, 서진은 사실상 지환을 보느라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는 알지도 못했다. 그제야 흘깃 화면을 확인해 보니 주인공들이 팝콘을 먹으려다가 손이 닿았는지 어색해하고 있었다.

    “보통 팝콘 먹을 때는 손 가져다 대면 방금처럼 기울여 주잖아. 사람 시야각이라는 게 생각보다 넓은데. 인기척도 있고.”

    보통 저런 장면이 나오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보지 않나. 거기다 팝콘 먹으면서 손 닿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만큼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예상치 못한 접촉이 중요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면서도, 서진은 슬그머니 지환의 손을 바라봤다.

    “그러게요.”

    그 손목을 살짝 건드렸다가, 그대로 손을 잡자 지환이 슬쩍 서진을 바라보고는 이내 웃었다.

    “형, 있잖아요.”

    서진은 그 맞닿은 온기를 내려다봤다. 지환은 주말이면 늘 서진의 집에 와서 지냈고 서진은 거의 대부분의 주중을 지환의 집에서 지냈다. 어디가 누구의 집인지도 상관없을 정도로 공간의 구분 없이 함께 지내고 있는 데다가, 둘 다 학교에 다닐 때만큼 붙어 있을 수는 없어 아침과 저녁만큼은 늘 같이 있었다.

    장소는 서진의 집일 때도, 지환의 집일 때도 있지만, 항상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는데 왜 동거는 안 되지. 그편이 훨씬 더 효율적인 게 아닐까. 물론, 서진이 지금 효율 찾고 싶다는 건 아니었지만.

    “어.”

    서진은 늘 지환에게 뭐라도 말하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익숙해지기는 했다. 그래도,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이미 한 번 거절당했던지라 더 조심스러웠다. 더불어 그때의 지환은 정말,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기만 했다. 어떻게 그렇게 한 번 고민해 보는 기색도 없이. 아마 너무 빨라서 그랬겠지.

    “저 이제 졸업하잖아요.”

    그대로 대학원에 진학할 거라 생활 반경 자체의 변화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제 대학생은 아니었다. 그런 상징적 의미와 함께, 사귄 지도 이제 2년을 넘어 3년으로 가는 중이고. 이제 정말 같이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지금도 같이 일어나고 같이 자고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지환이 서진의 집에서, 서진이 지환의 집에서, 그런 의미가 아니라 같이 사는, 우리 집에서, 그렇게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지환은 그래도 혼자만의 공간은 필요한 걸까. 그냥 같이 지내는 거랑 아예 같이 사는 거랑은 다르니까, 그건 역시 싫은가?

    “아, 너 학위복 입을 거지?”

    같이 살면 안 되냐는 말을 어떻게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지환이 알아들을 정도로는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나온 지환의 물음에 서진은 우선 답했다.

    “네. 입겠죠.”

    “부모님 오실 거야?”

    “두 분 중 한 분은 오실걸요. 그런데 잠깐 보고 가실 거예요.”

    서진과는 대충 사진이나 찍고 본인의 친목 활동을 위해 다른 교수들을 만날 게 뻔했다. 서진도 그러는 편이 편했고.

    “끝나고 애들이랑 놀아?”

    그러자는 말이야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럴 바에는 빨리 집에 와서 지환을 기다리는 게 낫지.

    “아니요. 형은 올 거예요?”

    별생각 없이 물은 말이었는데, 막상 지환의 답은 꽤나 빠르고 단호하게 나왔다.

    “당연히 가지.”

    솔직히 서진은 졸업식이 졸업식이지 다른 건 뭔가 싶었다. 애초에 졸업식도 굳이 갈 필요 있나 싶기도 했고. 하지만 지환이 온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있는 건 좋았지만, 가뜩이나 야근이다 뭐다 바쁘게 사는데 무리하게 시간을 내는 건 아닌가 묻자 지환이 웃으며 서진의 입꼬리를 살살 매만졌다.

    “그럼 가지 마?”

    그 장난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서진은 자연스레 지환을 따라 웃었다.

    “제가 언제 그랬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서진은 말을 덧붙였다.

    “그냥,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그 말에 지환이 제 손가락으로 서진의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서진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웃었다.

    “그래도 와 주면 좋기는 한데.”

    “그래. 너무 무리는 안 하고 갈게.”

    그대로 그 입술에 꾹 제 입술을 맞추자 맞닿은 입술 사이로 지환이 웃는 게 느껴졌다.

    “못 올 때 연락만 해 주세요.”

    지환과 있으면 모순이 끝없이 늘어났다. 서진 때문에 힘든 게 싫은데, 그걸 자처하는 게 좋았다. 무리하는 게 싫은데, 그렇게 노력하는 게 좋았다. 그럴 만해서, 그럴 여유가 돼서 시간을 내는 것도 물론 좋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서 그 모든 노력을 서진에게 쥐여 주는 게 좋았다.

    “갈 때는 연락 안 해도 돼?”

    지환이 서진에게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게 좋았다.

    “그때도 해 주세요.”

    “그래.”

    그 입꼬리에 입을 맞추자, 지환이 서진의 뺨을 제 양손으로 잡고 장난스럽게 문질렀다.

    “이거 말하려고 했던 거 맞지?”

    “네?”

    방금 지환과 서진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분명 서진의 졸업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서진이 말하기 전에 지환이 먼저 꺼낸 이야기였고, 서진은 제 졸업식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는데.

    “너 뭐 말하려고 했잖아. 이거 말하려고 한 거 아니야?”

    생각해 보면 서진이 분명 졸업에 관해 먼저 말하기는 했다. 졸업식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지만, 지환의 표정이 꽤나 뿌듯해 보였다.

    “맞아요.”

    지환은 언제부터인가는 서진의 기색을 살피고 이것저것 먼저 말해 오고는 했다. 대부분 헛다리이기는 했지만, 그 모든 게 좋았다. 어쨌거나 지환은 서진을 최선을 다해서 살폈으니. 거기다 그 잘못된 결론들은 모두 사랑스러운 온기를 품고 있었다.

    “형 눈치 엄청 빨라졌어요.”

    웃으며 답하자 지환이 슬쩍 고개를 뒤로 빼며 서진을 바라봤다.

    “그건 아닌 것 같아.”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좋은 게 좋지 않게 되는 건 아니었다.

    “엄청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좀 빨라진 것 같기는 해요.”

    서진은 지환을 끌어당기고는 그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거면 됐다.”

    지환은 그대로 서진의 뒷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된 건가?”

    서진은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충분하죠.”

    애초에 서진에게 지환은 모든 게 넘쳐흐르기만 했으니 충분하지 않은 게 있을 리 없다.

    * * *

    주말인데도 직장에서 전화가 왔다며 잠깐 전화를 하고 있는 지환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지환이 전화를 끊었다. 지환은 서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내 다가왔다.

    “저기요.”

    그 깔끔한 목소리와는 달리 장난기가 묻은 표정에 서진은 이번에는 또 뭔가 싶으면서도 우선은 선선히 답해 줬다.

    “네.”

    “애인 있으세요?”

    “네.”

    서진은 그대로 이어 답했다.

    “엄청 예쁜 애인 있어요.”

    그 말에 지환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가, 의아함이 깃들었다가, 이내 지금 뭐라는 거지 싶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서진은 찬찬히 그 표정이 바뀌는 과정을 지켜봤다. 솔직히, 귀여웠다.

    지환은 서진의 앞에서는 최대한 신중하게 굴려 노력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감정 표현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제가 알기로는 그 애인이 예쁜 건 아닐 텐데.”

    그러는 지환도 누가 봐도 예쁘지 않은 서진을 종종 이상한 호칭을 붙여 부르고는 했다.

    “제 애인을 왜 평가하세요? 누가 봐도 예쁜데.”

    서진의 말에 지환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아니, 내가 그쪽 애인을 아는데, 그런 형용사가, 형용사가 여러 개잖아요. 문과면 조금 더 적절한 걸 찾아야 하지 않나?”

    어느새 장난기가 사라진 그 목소리에 서진은 평온히 답했다.

    “귀엽다고?”

    “아니, 미친놈아.”

    결국 나온 그 목소리에 서진은 그저 말했다.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정말 그런데 왜 지환은 저렇게 질색을 할까. 그게 더 귀여운 건데. 처음에는 서진도 정확히는 몰랐는데, 왜인지 어색해하는 게 더 귀여웠다. 그래서 지환이 서진을 그렇게 놀리고 짜증을 내게 했다는 걸 깨달아 버렸다. 어째 이상한 것만 배우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미 귀여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됐어.”

    그 말과 함께 지환이 발로 살짝씩 건드리고 있던 축구공을 서진에게로 찼다.

    “형 회사에는 동호회 같은 거 없어요?”

    공을 받아 멈췄다가, 다시 지환 쪽으로 차 주자 지환이 공을 발등으로 올렸다가, 그대로 발등 위에서 몇 번 리프팅을 했다.

    “있지.”

    지환은 몸 가만히 놔두는 걸 상당히 못 하는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리프팅 연습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발등 정도로만 리프팅을 하다가 요즘에는 상체로 튕기는 것까지 발전했다. 서진이 보기에는 굳이 저런 걸 연습해야 하나 싶었는데, 보기는 좋았다.

    “안 해요?”

    물론 서진은 지환이 자신과만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다. 하지만 지환이 너무 서진에게 맞춰 주는 것 같아 종종 불안하기도 했다. 서진은 지환이 그다지 바른 생활과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걸 안다. 담배는 끊었지만, 원래는 피웠고 오토바이도 타지 않지만, 원래는 탔었고 술도 지금은 줄였지만, 여전히 좋아했다. 거기다 게임도 좋아하고 이것저것 사람과 어울리는 활동도 좋아했다. 단적으로는 축구나 농구 같은 것들이 그랬고.

    그런데도 지환은 서진과 사귀고 나서는 거의 모든 시간을 서진과만 보냈다. 원래 지환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는 입장에서, 지루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서진은 지환이 원래 접하던 것과 같은 자극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굳이?”

    “축구 같은 거나, 그런 거 할 수 있잖아요.”

    “너랑 하잖아.”

    그렇기는 해도, 아무래도 둘은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지환은 그런 건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뭐든 둘이면 충분하지 않나. 나는 그런데.”

    정말 평범하게, 그게 더없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미 실패한 지가 한참이었지만, 지환과는 거리감 조절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지환은 정말 서진이 뭐든 해도 괜찮다는 듯이 굴었다.

    “형이 너무 저한테 맞춰 주는 것 같아서요. 너무 착하게 사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원래 착하게 살았어.”

    둘 중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말을 한 지환은 저 역시 말이 궁색했는지 머쓱하게 웃었다.

    “그냥, 뭐.”

    발등 위에서 가지고 놀던 공을 뒤로 옮겨 발바닥 위에서 튕기던 지환은 다시 공을 앞으로 옮겨 오며 말을 이었다.

    “원래 연애하면 다 바뀌는 거 아닌가.”

    지환은 원래라는 말이 서진에게 얼마나 안정감을 주는지 알까.

    “맞춰 가는 거지. 익숙해지는 거고”

    서진은 그저 지환을 바라봤다. 날이 얼마나 춥든 답답한 건 견디지 못하는 지환은 어차피 움직일 거니 괜찮다며 안에는 대충 티 하나를 입고 위에는 패딩을 걸친 채였다. 그러면서도 같이 나온 서진에게는 너는 추위 잘 타니까 잘 입어야 한다며 옷을 겹겹이 입게 하고 목도리에 장갑까지 다 착용하게 했고.

    찬바람에 귀 끝이 조금 붉어진 채로도 공을 바라보며 집중하는 그 얼굴을 보자면, 지환이 지난 몇 년간 가장 집중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서진이라는 게 낯설어졌다.

    “너도 원래 네 얘기 하는 거 잘 못 하잖아. 그런데 지금은 하고.”

    지환이 그만큼이나 서진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서진은 지환이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 주고 싶었고, 숨기는 건 지환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나는 이렇게 너한테 익숙해지는 게 좋은데.”

    지환은 그대로 공을 멈춰 바닥에 내려놓은 채로 서진을 바라봤다.

    “너는 혹시 힘들어?”

    그러면서도 힘들다고 말한다 한들 굳이 봐주겠다는 태도는 아니었다.

    “안 힘들어요.”

    지환은 서진에게 한없이 무르게 굴면서도, 절대 봐주지 않는 선이 있었다. 서진은 정말, 지환의 그 어떤 사소한 부분이라도 사랑하지 않을 힘이 없었다. 그걸 종종 상기하게 될 때마다 나날이 아주 깊은 곳부터, 서진이 제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부분에 무언가가 천천히 쌓여 가는 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실상 지환은 선을 그어 놓을 필요도 없다. 원래 지환은 그 선을 그어 놔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환은 굳이 서진을 위해 선을 그어 놨다. 서진이 쓰러지지 못하게 만들 방어막을 대신 만들어 줬다는 걸 안다.

    “아예 안 힘든 건 아닌데.”

    서진이 지환과 같은 사람을 잘 모르는 만큼, 지환도 서진과 같은 사람은 잘 모른다는 걸 깨달은 지야 오래다. 하지만 지환은 알기를 택했고, 서진도 그래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그러니 그 과정이 싫을 리 없다. 어렵지 않다는 건 아니다. 늘 불안하기는 했다. 뭔가를 말할 때마다, 늘 지환이 어떤 반응을 할지 무서웠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그런 반응이 늘 이어지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지환은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몇 번 정도는 싸우고 화내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솔직히 서진은 아직도 싸우는 건 싫고 화내는 것도 싫다. 참아서 넘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지만, 지환은 그러고 싶어 하지 않다는 걸 아니까.

    “말하는 게 더 좋아요.”

    지환은 늘 간지러운 말들을 숨 쉬듯 내뱉었는데, 어째 서진은 그만한 말도 아니면서 종종 말을 내뱉는 자체에 숨이 막혔다.

    “형이 들어주니까.”

    별것도 아닌데 너무 유난스러워 보였을까 싶어 지환을 바라봤는데, 지환은 언제부터 그러고 있던 건지 서진을 정말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서진이 언제 이렇게 귀여워졌을까.”

    지환은 웃음기도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원래도 귀엽기는 했는데 날이 갈수록 더 귀여워지네. 큰일이다, 큰일이야.”

    그 심각한 어조에 품고 있던 모든 긴장이 어이없을 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저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지.

    “우리 서진이 귀엽다고 누가 뭐 사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돼. 알겠지?”

    “형, 정신 차려요.”

    서진은 지환에게 다가가 지금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도 다 풀어헤치고 있던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워 줬다. 추워서 제대로 된 생각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형은 강아지 보여 주겠다고 하면 따라갈 거잖아요.”

    “내가 왜 따라가. 거기서 만져도 되냐고 허락받아야지.”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한창 공 가지고 놀 때는 괜찮았다가 이제야 추운 모양인지 주머니에 손을 넣는 지환의 모습에 서진은 미리 가져온 장갑을 그 손에 끼워 주고 핫팩을 목에다 가져다 대 줬다.

    갑자기 온기가 닿자 움츠러드는 그 모습에 서진은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짧게 입을 맞췄다. 바깥에서는 거의 스킨십을 하지 않는지라 지환은 약간 놀랐는지 서진을 바라봤다가, 이내 웃으며 서진에게 입을 맞췄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그랬으면 우리 까다로운 서진이가 뽀뽀 안 했지.”

    지환은 그 말과 함께 제게 대 줬던 핫팩을 서진의 귓가에 댔다.

    “우리 서진이 추워? 집 갈까?”

    자기가 추운 모양이었다. 그러게 목도리 하라니까 말도 안 듣더니. 그렇다고 서진이 제 목도리를 건네주면 그건 또 절대 안 할 게 분명하니 서진은 다시 지환에게 핫팩을 건네줬다.

    “가요.”

    춥기는 추웠던 모양인지 조금만 더 놀다 가자는 말 없이 지환이 바로 함께 걸음을 옮겼다. 서진은 괜히 지환의 뒷머리를 살짝 건드렸다. 어쩌지. 머리카락이 너무 귀여웠다.

    지환은 바로 고개를 돌려 서진을 바라봤다가, 그만큼이나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웃었다. 서진에게는 지환의 자연스러움이 늘 낯설기만 했다. 싸늘하고 건조한 공기 속에서도 지환을 감싼 분위기만은 생기를 머금고 밝게 빛나기만 했다.

    “왜? 많이 추워? 오늘 나오지 말 걸 그랬나?”

    본인이 더 추워 보이면서도 걱정스러운 그 목소리에 서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형이 더 추워 보여요.”

    집에 들어가면 우선 지환에게 먼저 씻으라고 해야지. 이 날씨라면 당연히 따뜻한 물로 씻겠지만, 지환은 귀찮다며 차갑거나 미지근한 물로 씻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꼭 따뜻하게 씻어야 한다고 하면 말은 또 잘 들으니까.

    씻고 나오면 이불로 몸을 감싸 주고 머리를 말려 줘야지. 몸이 완전히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뜻한 차라도 마시게 하고. 지환은 뭐든 따뜻한 것보다는 차가운 걸 좋아했고 얼어 죽어도 커피는 아이스로 마셨지만, 그래도 또 따뜻한 걸 만들어 주면 토 달지 않고 얌전히 잘 먹기는 했다. 지환은 확실히 본인이 장담한 대로, 말을 잘 듣기는 정말 잘 들었다.

    “난 별로 안 추워.”

    거짓말인 게 뻔했다. 서진이 그저 웃자 지환이 서진을 따라 웃었다. 방학인 데다가 로스쿨에 들어가기 전이라 시간이 꽤 남아서 요즘은 이것저것 요리를 꽤 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사실 조금 추워. 근데 괜찮아.”

    지환이 씻고 몸을 데우는 동안 간단하게라도 먹을 수 있는 걸 만들어야지. 시간이 꽤나 남는 덕에 요즘의 서진은 종종 지환의 회사에서 지환을 데리고 오기도 했는데, 적성에 이렇게 맞아도 되나 싶기까지 했다. 지환을 데리러 가고 기다리고 함께하는 그 순간들이 모두 그랬다.

    “어쩐지 밖에 사람이 너무 없더라. 추운데 너 괜히 데리고 나왔나 봐.”

    “괜한 게 어디 있어요.”

    지환과 관련된 것 중 괜한 건 전혀 없었다. 추운 것도, 더운 것도, 그 외의 것도 뭐든 지환과 함께라면 좋았다. 추운 날도, 더운 날도, 그 외의 날들에도 모두 지환이 생각날 테니.

    서진은 그저 지환의 곁을 함께 걸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직장에 다닌다고 늘 단정한 머리칼과 그 사이로 보이는 추위에 붉어진 귓가, 종종 마주치는 시선들까지, 여전히 익숙한 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우리 예쁜이 점점 더 예쁜 말만 하네.”

    이런 건 별로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기는 했다.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지환은 왜 저 호칭을 버리지를 못하는 걸까. 물론, 몇 년이 지나도 그 호칭에 익숙해지지 않는 서진이라고 나을 건 없었지만.

    “우리 손잡아도 될 것 같지 않아?”

    확실히 날이 춥기도 했고 원래부터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은 아니었던지라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꼭 강아지한테 손을 달라는 것처럼 당당히 서진에게 손을 뻗은 지환의 모습에 서진은 선선히 그 손을 잡았다.

    지환은 자연스럽게 손을 뻗고 서진을 잡았지만, 사실 서진에게는 그 모든 게 늘 생경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건 아닐 테니까, 서진은 맞잡은 그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쥐었다. 지금과 같이 더없이 낯선 나날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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