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3권) (7/15)

독해(Reading Comprehension) 3권 @czc

독해

지환은 지루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막 학기인 덕분에 겨우 들은 교양은 실상 출석만 하면 되는지라 다들 시험은 대충 보고 나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환 역시 마찬가지였고. 전공도 시험을 다 보면 그냥 나가게 해 주는데, 왜 교양이 시험 시간 30분은 채워야 한다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환은 그저 창밖을 바라봤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잡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사실, 대부분이 서진의 생각이니 잡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늘 중요한 생각이지. 지환에게는 지금 시험을 보는 교양이 마지막 시험인데, 서진은 어땠더라.

시간표를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같이 짰으니 시험 일정도 알고는 있었다. 서진도 예정대로라면 오늘 끝났겠지. 잘 봤을까. 당연히 잘 봤겠지만. 싸움 아닌 싸움을 벌인 게 바로 시험 전이었던지라, 그 이후 바로 시험이 몰아쳤다. 그나마 지환은 듣는 강의가 몇 되지 않았지만, 서진은 2학년이 되며 복수전공까지 하고 있었으니 더 바빴겠지.

지환은 한창 가을인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문득 시간을 가늠했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서진과 과외를 같이 다닐 뿐, 그다지 친하다고 할 사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귀기까지 하고 있고. 시간이 빠르다고 해야 하는 걸까.

연락을 하려고는 했다. 지환이 먼저 연락하겠다고 했으니 서진은 분명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애태우려는 건 당연히 아니었는데, 생각만 많고 결론은 전혀 나지 않아 아직도 연락하지 못했다. 그래 봤자 일주일이기는 하지만, 연인 사이에서 일주일이면 정말 긴 시간이었다.

지환은 확실히 섬세하다고 할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진이 늘 뭔가를 참고 있다는 건 알았다. 사귀고 있고, 지환은 꽤나 서진을 신경 썼으니. 지환은 분명 서진에게 뭐든 하고 싶은 말이나, 바라는 게 있다면 말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서진은 지금껏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점점 말을 숨기는 게 심해지는 것 같기까지 했다.

지환은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들을 잘 알지 못하는지라, 서진과 사귀기 시작했을 때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해 봤다. 그래 봤자 지환의 친구들은 모두 지환과 성향이 비슷했던지라 크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다들 우선은 기다려 보라고 했다. 지환은 뭐든 우선 서로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말하는 것 자체가 힘든 사람도 있다고 했다. 어쩌면 서진도 그럴지 몰랐다.

지환은 심지어 지혜에게도 물어본 적이 있다. 연우도 사람 눈치를 꽤나 보는데, 지혜는 그런 연우와 몇 년이나 연애하고 있었다. 연우가 속마음을 숨기는 것 같을 때 어떻게 하냐고 물어봤는데, 지혜는 그냥 연우가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물론, 제 동생의 인내심을 아는 지환으로서는 믿기 힘든 소리였다. 실제로도 둘이 같이 있을 때 지혜가 연우에게 입 다물지 말고 빨리 말하라고 윽박지르던 걸 몇 번 듣기도 했다. 하지만, 지환이 생각하기에도 기다리는 게 제일 나은 방법이기는 했다. 서진을 닦달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예민하고 생각이 많은데, 조심스럽게 다가가야지.

서진은 꼭 잘못 쥐면 깨질 듯 아슬아슬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지환은 아주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 조심조심 달래 주며 아껴 주고 싶었다. 지금껏 잘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지환이 그렇게 서진을 기다리고 있으면 머지않아 서진도 지환을 편하게 여기고 뭐라도 말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지만.

“다 푼 학생은 이제 제출해도 됩니다. 제출 전에 다시 한번 학번, 과, 이름 확인해 주시고 답안지와 시험지 모두 제출해 주세요. 아직 다 풀지 않은 학생들을 위해 조용히 제출합시다.”

조교의 말에 다들 이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는지 대부분의 학생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환은 어차피 제출하려면 기다려야 할 게 뻔하니 사람이 빠지면 나가려 그저 자리를 지켰다.

서진은 왜 그랬을까. 차라리 왜 만나지 말라고 했는데 만났냐면서 화를 내거나, 아예 정말 지환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인 거냐고 의심했으면 지환도 억울하기는 해도 화가 나지는 않았을 텐데. 서진은 차라리 화를 냈어야 했다. 하지만 서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사실, 지환은 그래서 서진이 뭘 한 건지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된다고. 서진은 정말 자신이 그런 취급을 받아도 괜찮다는 건가. 이해할 수 없었다. 지환을 믿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서진은 자신이 그런 취급을 받아도 괜찮다고 해서는 안 됐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그게 가장 화가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환이 화낼 일이었나 싶기는 하지만, 사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화가 났으니 어쩔 수 없다.

서진은 지환을 전혀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섭섭하기보다는, 그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었다. 지환은 서진에게 그렇게나 믿음직스럽지 못할까. 어떻게 해야 서진이 믿을 수 있게 되는지를 말해 주면 좋을 텐데, 서진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서진은 지환을 믿고 싶기는 할까. 굳이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는 건가.

서진이 지환을 좋아하는 건 안다. 모두에게 상냥한 것처럼 굴면서도, 명확한 선을 짓는 서진이 늘 지환의 앞에서만은 꽤나 풀어졌다. 아닌 척하면서도 닿을 타이밍을 재며 조심스럽게 뻗는 손도, 편한 말투도, 무른 목소리도, 말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모든 걸 들어주는 그 행동들도.

종종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붉어지는 귓가와 힘이라고는 들어가지도 않을 만큼 조심스럽게 잡아 오는 손길, 열기를 담은 시선, 수줍게 건네지는 웃음, 잔잔한 어조. 서진이 지환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다른 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서진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으니.

그래서 지환은 지금, 궁금했다. 서진은 왜 지환과 사귈까. 서진이 지환을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좋아하기만 할 거라면 사귈 필요는 없다. 사랑에 빠질 상대를 고를 수는 없겠지만, 연애할지 안 할지는 정할 수 있다. 사실 좋아하는 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게 더 편할 텐데.

하지만 서진과 지환은 사귀고 있다. 서로 일상을 공유하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더 잘 알아가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애초에 그러려고 사귀는 게 아닌가. 적어도 지환은 그렇다. 하지만 만일 서진은 그렇지 않다면, 그럼 서진은 왜 지환과 사귀는 걸까. 생각은 많았지만, 결론 내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서진이 아무것도 말해 주지를 않았으니.

* * *

적당히 사람이 빠져나가자 시험지를 제출하고 강의실에서 빠져나온 지환은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연락하려면 지금 해야 했다. 지환은 성격상 서로 떨어져 시간을 갖는 건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지금도 꽤나 오래 참은 셈이었다.

얼굴 보면 지환이 화낼 일도 아닌데 또 화를 낼 것 같기는 하지만, 참으면 되겠지. 그런데 연락을 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우선은 적당히 덮어 놓고 다시 예전처럼 지내면 되는 걸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나.

“형.”

문득 들린 목소리에 지환은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서진이었다.

“형이 연락하겠다고 한 건 알고 있는데, 연락이 없어서, 무슨 일 있나 싶어서요.”

지환은 언뜻 불안이 묻은 그 목소리를 그저 들었다. 먼저 찾아왔구나. 지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년 이맘때와는 정말 많은 게 바뀌었다. 과외를 하러 오갈 때가 아니면 연락도 하지 않던 서진과 연인 사이가 됐다.

그런데 정말, 뭐가 바뀐 게 맞나. 왜 지환은 바뀐 게 없는 것 같을까. 서진은 여전히 제 이야기라고는 하지 않았고 지환은 여전히 서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지환은 서진을 이해하지 못했고 서진은 여전히 지환에게 이해받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환은 아무런 답 없이, 그저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이 불안해 보이니 우선은 달래 주고 대강 덮어 놓으면, 그렇게 다시 예전처럼 지내면 되는 건가. 그렇게 서진은 지환이 저 자신을 아무렇게나 다뤄도 괜찮다는 생각을 계속 간직하게 되는 걸까.

넘어갈 수는 있다.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를 알고 어떻게 덮을지를 안다. 그리고 다시 싸우겠지. 지환은 자신이 그 자체에 지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지환이 서진을 의심하게 되지 않을까. 서진이 지환에게는 말하지 못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지환은 서진과 꽤나 다른 사람이고 서진은 자신과 맞는 사람을 찾을 수도 있겠지.

따져 보자면 서진은 지환을 바꿀 필요도 없다. 처음부터 잘 맞는 사람을 찾으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지환은 제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서진을 보며, 언제까지나 서진을 믿을 수 있을까.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게 맞나?

지환은 그대로 서진으로부터 등을 돌려 걸었다. 괜찮을 리 없다.

* * *

지환은 자신을 따라오는 서진을 알면서도 그저 걸음을 옮기다, 점점 속도를 빨리했다. 말 한마디 없이 뒤따라오는 걸음 소리만이 들렸다. 지환은 제게 따라붙는 시선을 뻔히 알고 있었다. 지환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뛰었다.

당황한 모양인지, 아니면 그저 지환을 보낼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간 뒤따라오는 소리가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 지환을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봤자 순순히 잡혀 줄 생각은 없었다. 지환은 이를 악물고 최대한 빨리 뛰었다. 쫓아오기로 마음먹었으면 제대로 쫓아와야지. 어디서 뭐든 적당히 해 보려고.

지환은 서진이 말하지 않는다면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지환이 알아서 눈치를 챌 수도 있겠지. 지환이 서진보다 무신경하다고는 해도, 지금껏 연애할 정도의 눈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서진은 직접 말해야 한다. 아무리 지환이 스스로 알아차렸다고 해도, 지환은 그게 정말 맞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서진이 말해야 한다.

“형.”

문득 닿은 서진의 손에 지환은 바로 그 손을 뿌리쳤다. 잠시 마주한 서진의 표정이 흐려지며 지환에게서 떼어진 제 손을 바라봤다. 지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뛰었다.

사실,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서진이 만약에라도 지환을 잡는다면 잡혀 줄 생각이었는데, 서진은 예상보다 너무 쉽게 지환을 잡았다. 지환은 생각을 수정했다. 이제는 서진이 지환을 잡더라도, 얌전히 잡혀서 멈춰 줄 생각이 없다.

“아,”

다시 한번 닿아 온 서진을 뿌리치자 멍하니 나온 그 목소리에도 지환은 그저 뛰었다. 뒤에서 다시 서진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지환은 서진의 표정을 곱씹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하면서까지, 끝까지 말은 하지 못하는 거지.

서진은 적당히 끊어 낼 수도 있다. 더 쉬운 방법을 택할 수도 있고. 어차피 지환은 서진과 헤어질 생각이 없고, 실제로도 뭐가 어찌 되든 며칠 후에는 분명 먼저 연락을 했을 게 뻔했다. 하지만 서진은 직접 지환을 찾아왔다.

지금도 그렇다. 서진은 우선 지환을 보낼 수 있었다. 도망칠 정도로 지금은 얘기하기 싫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우선은 놔뒀다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진은 그 대신 지환을 직접 따라오고 있다.

그리고, 서진은 사실,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

“형, 제발.”

페이스 조절 같은 건 하지도 않고 무조건 달리고 있던지라, 숨이 찼다. 점점 뛰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는 걸 인식은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멈추지는 않았다. 목적지도 없이 무조건 뛰는 와중에 두어 번 더 서진에게 붙잡혔고, 지환은 모두 뿌리쳤다.

담배 피우지 말걸. 갑작스럽게 후회가 됐다. 체력 하나만큼은 정말 자신 있었고 뛰는 것도 그랬는데, 어째 서진은 더했다. 처음 잡혔을 때 멈춰 주지 않은 건 오기였다. 그냥 그때 잡혀 줄 걸 그랬나. 이제 슬슬 진짜 죽을 것 같았다. 저 새끼는 근데 왜 이렇게 잘 뛰지?

“형.”

다시 잡혔고.

“그러다 쓰러져요.”

또다시 뿌리쳤다. 이렇게 오래 뛸 줄 알았으면 페이스 조절이라도 하는 건데, 설마하니 서진이 이렇게 잘 뛸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페이스 조절을 하면서 뛰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지금 마라톤 하는 것도 아닌데.

숨이 너무 차서 가슴팍이 다 아팠다. 실제로 마라톤 나갔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으면서도, 서진이 지금처럼 군다면 멈출 생각은 없었다. 끝까지 가 보자는 거지. 서진이 지환을 잡을 수는 있다. 물리적으로 따라잡아서 닿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지환은 그런 방법에는 잡힐 생각이 없다.

“잡혀, 주세요.”

이윽고 헐떡임과 함께 터져 나온 그 말에, 지환은 우뚝 멈췄다. 서진은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 방법을 택해야 한다. 지금처럼.

지환은 당장에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애써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였다. 시야까지 어지러웠다. 서진이 정말 지환을 죽이려고 한 건가 싶기까지 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도망, 치지 말아, 주세요.”

얼마나 뛰었는지, 벌써 공원이었다. 그중에서도 공원 가장자리라 지금도 사람이라고는 서진과 지환뿐인 산책로에 들어와 있었다. 그 거리를 그 속도로 뛰었으니 당연히 서진도 힘든 모양인지 거친 숨소리에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겼다. 지환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서 그대로 숨을 몰아쉬었다. 사실 지금은 물리적으로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환은, 그저 서진을 달래 줄 수도 있다. 그때는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바람 같은 건 피우지 않을 테니 너도 그런 말은 하지 말라며 달래는 건 쉽다. 실제로도 그러려고 했고. 하지만, 지환은 제 뒤를 쫓아오는 서진을 알아버렸다.

뿌리칠 때마다, 서진의 표정을 봤다. 어쩌면, 서진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울면 어쩔 수 없이 넘어갈 거라고도 생각했다. 당연히 그랬겠지. 하지만, 서진은 울지 않았다. 서진은 그 대신, 겨우 닿은 손이 가차 없이 뿌리쳐질 때마다 상처 받은 게 보이는데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있는 힘껏, 성실하게, 지환만을 바라보며, 그렇게 쫓아왔다.

그러니 지환은 적당히 굴지 않는 걸 택했다. 서진 역시 그랬으니까. 그렇게 문득,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로 숨이 가쁜 가운데, 유일하게 청량한 모습이 눈에 담겼다.

이유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 대상 하나만을 눈에 담으며 끝까지 쫓아올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거부당하면서도, 포기하지는 않는 사람이 또 누가 있지. 그런데 왜, 서진은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를까.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형 기분 상하게 해서.”

한 발짝, 아주 가볍게 그 등을 밀어 준다면 서진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안다.

“제가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형 의심하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형이 다른 사람을 만날 거라든가, 바람을 피울 거라든가, 그런 거 정말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라 그냥 제가 문제였던 건데, 형을 탓하는,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렇게 들렸던 거 알아요.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서진은 지환이 그러지 않아도 스스로 앞으로 나갈 능력이 있다.

“제가 잘못,”

숨을 고르며 천천히 이어지던 목소리 뒤로 지환은 그제야 서진을 바라봤다.

“잘못했는데.”

서진의 얼굴이 천천히 찌푸려졌다. 말하는 것조차도 힘들다는 듯이. 그럼에도 지환은 가만히 있기를 택했다. 결국 걸음을 내걷는 건 서진이어야 한다. 서진은 그럴 수 있다.

“바람 같은 거 안 피웠으면 좋겠어요.”

그래, 지금처럼.

“그런데,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형이 다른 사람 좋아하게 되면, 그런데 제가 바람피우지 말라고 하면, 형은 저랑 헤어질 거잖아요.”

서진은 정말 힘들었다. 지환이 토할 것같이 뛰어야 겨우 마음을 알려 주다니, 이렇게나 사람이 어려웠다. 뭐 하나 쉬운 구석이 없어서, 지환도 모든 힘을 다 쏟아야 했다. 서진 말고 누가 지환을 이렇게까지 열중하고, 궁지에 몰리게 할 수 있을까.

“그게 더 싫단 말이에요. 그래도 제가 참고 있으면 언젠가는 돌아올 수도 있잖아요. 형이 저 쉽게 보면, 그러면 다른 사람 만나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잖아요. 제가 어차피 받아 줄 거 알면, 어쨌든 헤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까.”

서진은 확실히 지환이 아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보통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게 되기 마련이고 지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을 끝까지 몰라야 하는 건 아니다. 지환은 서진을 알고 싶고, 서진은 지환에게 저 자신을 알려 줘야 한다.

“형이 그런 사람이라는 건 아니에요. 형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아니까, 그래서 한 말이었어요. 형은 다른 사람 좋아하게 되면 저랑 헤어질 거잖아요. 저랑 제대로 헤어져야, 그래야 그 사람이랑 만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러면 저는, 형한테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면,”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서진이 그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또 뭐고. 지환은 자신이라고 서진에게 충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 부족하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맞춰 나가고 싶었다. 애초에 완벽히 맞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혼란을 빚을 때가 있는데.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돼요?”

서진은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저 자신을 깎아내리며, 지환에게 자신을 함부로 대할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물어봤어야 했다.

“헤어지지 말자고 하면 돼.”

거의 죽을 것처럼 뛰고 난 뒤라 잠긴 목소리에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

“그럼 그렇게 할 거예요?”

“내가 말했지.”

서진은 도대체 지환이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넌 말만 하면 돼. 뭐든 다 들어주겠다니까.”

물론, 몇 번을 말하든 서진이 알아주기만 한다면 괜찮았지만, 이제는 정말 알아줬으면 했다. 서진 자신을 위해서.

“형이 저를 좋아하는 건 알아요. 그런데 왜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형은 저만 아니면 쉽게 살 수 있잖아요. 뭐 하나 부족한 것도 없고.”

“그럼 너는 뭐가 달라?”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서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지환은 지금껏 다수의 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서진과 사귀는 건 그 길을 벗어난 일이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고. 지환은 자신이 서진을 사귀는 게 약점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일반적 통념으로 그렇다면 그건 서진에게 역시 적용됐다.

“너도 쉽게 살 수 있어.”

서진은 좋은 대학에 다니고 집안도 좋다. 돈이 부족하지도 않고 머리도 좋다. 거기다 외적인 요소들이야 말할 것도 없으니 일반적으로 누가 봐도 부러워할 조건이었다. 남자와 사귀는 것만 아니면 서진도 그 조건들로 꽤나 쉽게 살 텐데, 왜 서진은 그게 지환에게만 실이 될 거라고 생각할까. 득이 되든 실이 되든, 둘 모두에게 마찬가지일 텐데.

“너는 그냥, 한 번이라도,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잖아.”

그 말에 서진은 가만히 지환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럼에도 떨림을 효과적으로 감추지는 못한 채로, 그렇게 말했다.

“저는, 누가 저를 필요로 하는 게 힘들어요. 거기에 맞춰야 하는 것도 싫고. 그런데, 형한테는 제가 필요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형한테는 제가 필요 없으니까. 제가 형한테 놓치기 싫을 만큼 아쉬운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마음 식어도 놓기는 아까울 만큼, 그만큼 필요했으면, 그랬으면 좋겠어요.”

서진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저한테 원하는 게 있고 기대하는 게 있어요. 지금까지는 그게 싫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형은, 형만큼은 저한테 아무 기대도 안 하는 게 힘들어요. 형은 저한테 바라는 게 없으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뭐든 말해 달라고 했잖아.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야. 그러니까 너는 그렇게 해 주면 돼.”

지환은 정말 그 외에는 서진에게 기대하는 게 없었다. 지환은 서진을 알고 싶다. 이미 꽤나 사랑스럽게 여기지만, 더 많은 부분을 알고 싶었다. 어떤 일이 있으면, 서진은 그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어떤 점을 서운하게 여기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그 모든 것들을 서진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그러니 서진은 지환에게 그토록 사랑스러운 저 자신을 알려 줘야 한다. 그리고, 지환이 사랑스럽게 느끼고 있다는 걸 알고,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러다가 제가 잘못할 수도 있잖아요.”

지환은 이제야 진정된 숨을 천천히 고르며 서진을 바라봤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지환도 아마 지금껏 여러 번 서진에게 잘못했을 테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틀린 게 있다면, 맞지 않는 게 있다면, 고쳐 나가면 된다.

“저는 제가 형한테 필요했으면 좋겠어요. 좋아하는 건 언제든지 바뀔 수 있잖아요. 하지만 필요하면, 그러면 계속 쥐고 있으니까. 형한테 필요한 게 뭔지 알고 싶어요.”

“내가 널 좋아해서 같이 있고 싶다는 거로는 충분하지 않은 거야?”

그 물음에 서진은 지환을 잠시간 들여다보다가, 이내 말했다.

“저한테 친형이 있다고 했잖아요.”

“어.”

외국에서 결혼하겠다고 집안과 연이 끊긴 형이 있다는 소리를 쉽게 잊을 리가 없다.

“부모님은 아직도 형 좋아해요. 그래도 자식이고 아끼기는 정말 아꼈거든요. 첫째에다가 저랑 나이 터울도 많이 나니까, 저 태어나기 전에는 부모님께 정말 형밖에 없었잖아요. 거기다 착하고 똑똑하기도 했고.”

그 목소리는 꽤나 담담했지만, 막상 지환을 바라보는 시선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지금 연을 끊었다고는 해도 좋아하는 거 자체가 거짓인 건 아니에요. 언제 한번은 새벽에, 아버지가 형 사진 꺼내 놓고 보는 것도 봤어요. 그래도 필요 없어지면, 말 그대로 필요 없어지는 거잖아요. 필요해서 좋아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거랑은 그냥 별개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필요 없는 건 필요 없는 거니까. 그럼 더 붙잡을 게 없어요.”

지환을 바라보면서도, 떨림을 감추지는 못하는 그 시선 뒤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형한테는 지금도 제가 필요 없잖아요.”

뚝 끊기듯 나온 그 말에 지환은 가릴 것 없이 답했다.

“필요해.”

지환은 이제야 서진의 불안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중이라, 지금 당장 거창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시간이 있다고 해도 지환이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라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는 하지 못하겠지만.

“좋아하니까.”

그래도 지환은 자신이 느끼는 걸, 제 진심을 말할 수는 있다. 필요와 좋아함의 상관관계를 알 수는 없다. 각각 별개든, 선후 관계가 있든, 어쩌면 인과관계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환은 그 하나하나를 따지기보다는, 그저 제 감정을 말하고 싶었다. 지환은 서진을 좋아한다.

“나는 너희 집안 사정 자세하게는 몰라. 그래도 나는, 네가 나한테 필요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순간을 딱 집어 꼽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지환은 첫눈에 반하기보다는, 서서히 빠져드는 사람이다. 어쩌면 첫눈에 관심이 갈 수는 있겠지만, 그 관심이 사랑으로 변하는 건 결국 시간의 힘이 작용했다. 그렇기에 사랑으로 넘어가는 그 명확한 지점을 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필요해. 좋아하니까.”

하지만, 닿는 족족 뿌리쳐지면서도, 그 불안감을 숨기지도 못하면서도, 그럼에도 지환을 몰아가며 저 역시 뒤쫓아 오는 그 모습을 보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힘든 와중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호흡을 고르는 것도 힘든 와중에, 지환은 서진 같은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이렇게나 앞뒤 가릴 것 없이, 보이는 거라고는 지환뿐이라는 듯이, 그렇게나 곧게 온 힘을 다해서 지환을 몰아세우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서진만큼 지환을 버겁게 하는 사람이, 지환을 이만큼이나 숨차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서진 말고 또 있을까.

어쩌면 흔들다리 효과일 수도 있다. 너무 뛰어서 심장이 아픈 걸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그 파장이 지나간 자리에서, 지환이 느끼는 감정은 지환의 것이다. 이렇게나 너를 사랑스럽게 느끼는 것도.

“좋아해서 필요한 것보다는 필요해서 좋아하는 게 나아요. 좋아해서 필요한 거면, 좋아하지 않으면 필요하지도 않게 되잖아요. 그럼 아예 끝인데.”

너의 불안조차도 사랑스럽게 여기지만, 그 불안이 너를 힘들게 한다면 아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너는 내가 필요해?”

“네.”

“나를 좋아해서 내가 필요한 거야?”

생각해 보면 전에도 이런 대화를 나눴다. 그때는 아마, 지환이 왜 서진을 좋아하는지 이유를 물었던가. 확실히 서진과 지환은 달랐다. 지환이 이유를 찾을 생각을 하지도 않는 모든 것들에, 서진은 이유를 찾았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지환은 명확히 답할 수 없다. 이유 같은 건 없으니.

“아니면 내가 필요해서 나를 좋아해?”

“모르겠어요.”

얼마간의 침묵 끝에 나온 얼핏 끝이 흐린 그 목소리에 지환은 그저 답했다.

“알 필요도 없어. 어느 쪽이든 너한테 내가 필요하고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조금 더 부드럽게 말했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서진이 드디어 제 마음을 말해 주기 시작한 시점에 굳이 말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서진이 자신이 느끼는 걸 말해 주는 만큼, 지환도 자기 생각을 말해 주고 싶었다. 다른 게 있다면 조정하면 됐다. 그러기 위해 대화하는 것이었고.

“그래도 저는, 그래도 형이 저를 필요로 해서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저한테는 형을 묶어 둘 게 많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지환은 서진이 왜인지 잦게 불안해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불안해한다는 건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그게 안타까웠다. 사람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의 대우를 받으려 유도하는 구석이 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본인의 가치보다 높은 대우를 받으면 불안해하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던데, 서진도 그럴까. 그렇다면 서진이 생각하는 본인의 가치는, 얼마 전 말했던 것처럼 좋을 대로 이용당하는 걸까.

“그게 사랑이면 안 돼?”

만일 안 된다고 해도, 지환은 그 이외의 답을 찾을 수 없으니 그건 서진이 알아서 익숙해져야 했다.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모든 건 지환이 서진을 좋아하기 때문에 생긴 이유다. 이미 좋아하게 된 이후에는 왜 좋아하게 됐는지를 꼽을 수 없다. 어디를 둘러보든, 네 모든 부분을 다 좋아하니까. 이미 그렇게 됐으니까.

지환은 서진이 자신의 가치를 어떤 식으로 평가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환에게는 지환이 생각하는 서진의 가치가 있다. 이미 객관성을 잃어버린 지가 오래라 객관적인 평가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면 주관적으로 평가하면 된다.

애초에 지환이 정말 서진을 객관적으로 보고 싶다면, 사귀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지환은 서진의 옆에 있다. 주관적인 시선만이 남은 채로.

그러니 지환은 그렇게나 더없이 주관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서진의 가치처럼 서진을 대우할 것이다. 예쁘게, 그렇게 아끼기만 할 테니 그건 서진이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만큼은 조정할 생각이 없으니.

“내 생각에는 말이야, 필요한 건 어디서든 찾을 수 있어. 굳이 하나를 둘 필요도 없고. 말 그대로 필요한 거면 여분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렇게 지환이 아끼고 소중히 여길 서진은, 그런 대우를 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좋아하는 건, 나는 한 번에 한 사람만 좋아할 수 있어.”

왜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알지 못할까. 지환은 그게 괜히 서러웠다. 서진은 서러워할 줄도 모를 테니, 지환이 대신해 줘야겠지.

“그리고 그건 너잖아.”

굳이 원석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원석을 갈고 닦아 다이아몬드가 된다는 말보다는, 인식하지 않으면 그게 뭐든 상관없다는 말에 더 공감한다. 아무리 귀하고 비싼 물건이 있다고 한들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발견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에 마음을 쏟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가치를 지녔다.

“그래서 나는 필요한 것보다는, 좋아하는 게 훨씬 소중해.”

소중하다는 건 그렇게 이뤄지는 게 아닐까.

“서진아, 나는 네가 말만 해 주면, 정말 열심히 노력할 거야. 네가 나한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하면 고치려고 할 거고 바라는 게 있으면 들어주려고 할 거야. 하지만,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몰라.”

소중하다는 건 감정이라, 어떤 형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의 것은 각각의 의미가 있겠지만, 지환은 그 의미를 더 나아가게 하고 싶었다. 더 소중히 여기고 싶었고 지환이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을 서진도 함께 소중히 여겼으면 했다.

“그러니까 네가 뭘 느끼든, 말해.”

서진이 참는 것에 훨씬 익숙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서진의 감정은 분명 존재한다. 없는 척한다고 존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사라지게 할 생각도 없고. 그러니 없는 것처럼 매몰시킬 수는 없다.

“네가 바라는 게 뭔지, 뭐 때문에 불안한지,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하는지, 하다못해 지금은 말하기 힘드니까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말이라도.”

사실 지환이 서진에게 듣기를 기다린 말도 그랬다. 지금은 힘드니까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겠냐고 한다면, 지환은 당연히 그러겠다고 할 텐데. 하지만 기다려 달라고 하지 않으면 서진에게 정말 시간이 필요한 건지, 그냥 지환이 싫은 건지는 알 수가 없다.

“네가 직접.”

서진이 더 많은 걸 바랐으면 했다. 함부로 다뤄지기를 부탁하는 게 아니라, 소중히 여겨지기를 요구했으면 했다. 지환은 얼마든지 들어줄 텐데.

“제가 말하면.”

서진은 사랑받는 법을 모른다는 듯이 굴었다. 이미 받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그래서 불안한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 봤자 지환은 계속해서 건네줄 테니, 그 역시 서진이 익숙해져야 했다.

“정말 들어줄 거예요?”

“어.”

아무런 고민도 없이 단호하게 나간 답에 서진은 그대로 잠시간 지환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렸다.

“제가 필요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 좋아하지 마세요.”

그 목소리가 찬찬히 이어졌다.

“바람도 피우지 말고.”

“그래.”

끝이 살짝 떨린 서진의 목소리와는 대비적으로 깔끔하기만 한 지환의 답에, 서진이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정말 안 돼요. 다른 사람 좋아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저만 좋아해야 돼요.”

“알았어.”

연인끼리 당연히 할 만한 대화였는데도, 서진은 꼭 말해서는 안 될 금기를 말하는 것처럼 굴었다.

“헤어지자고 하는 것도 안 돼요.”

또 헤어지는 걸 생각하네. 생각해 보면 지금껏 말한 게 다 엇비슷하기는 했지만.

“안 그럴게.”

답은 빨랐다. 지환은 사귀며 헤어지는 걸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 당연히 답은 하나뿐이었다.

“봐.”

지환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말 잘하잖아.”

지환은 그제야 웃었다. 너무 몰아붙였나 싶기는 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결국 그 걸음을 옮긴 건 서진이었으니.

“서진아, 너 진짜 손 많이 간다.”

지환과 서진은 다른 점이 많다.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도 많겠지. 하지만, 차라리 그게 좋았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보다는, 어떤 부분에서 서로의 생각이 다른지를 아는 게 더 좋았다. 어차피 사람은 평생 저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아가려는 노력조차도 필요 없다는 건 아니지 않을까.

서진은 사귀기 전부터도 헤어지면 어떻게 될지를 고민하는 사람이지만, 지환은 사귀는 사람과의 헤어짐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서진은 사랑에 필요를 붙이기를 바라지만, 지환은 사랑하니 옆에 있고 싶다는 말로 필요를 정의한다.

아마 어떤 부분은 계속해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공감은 더욱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지환은 서진을 알고 싶다. 맞춰야 하는 부분은 맞추고, 맞출 수 없는 부분은 그대로 아끼면서.

“그래도 잘했어. 앞으로도 숨기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바로 말해.”

서진은 그렇게나 손이 많이 가서, 그게 좋았다. 손이 많이 간다는 건 결국 서로 닿을 날이 많다는 게 아닐까. 지환은 서진을 통해 더 세심히 신경 쓰는 법을 배우게 될 테니.

“형은, 저랑.”

이번에는 무슨 말이 나올까 기다리는데, 문득 그 눈가가 얼핏 일그러졌다.

“헤어지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나온 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저한테 실망해서, 그래서 얼굴도 보기 싫었던 거죠.”

“너는 차라리 땅을 파라.”

거의 허망하게 나온 목소리 뒤로 지환은 서진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예민하고, 쉽게 불안해하고, 생각도 많고, 손이 참 많이 가고,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고, 말해 주지 않는 것도 많고, 어리고, 별것 아닌 일에도 수줍어하고, 좋아하는 시선을 숨기지도 못하고, 겁은 많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좋아하는 건 겁내지 않는, 그런 다양한 너를. 그렇게 예쁜 너를, 나는.

“기다렸어.”

알고 싶었는데.

“네가 나한테 오기를, 그래서 너를 알려 주기를.”

네가 직접 알려 주는 너를 알고 싶었다.

“잘했어, 서진아.”

지환은 웃으며 그 뺨을 살짝 쓸었다.

“고마워.”

말할 용기를 내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버거웠을까. 가만히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자, 서진이 눈을 꾹 감았다.

“사랑해요.”

그 억눌린 목소리에 지환은 마주 답했다.

“나도 사랑해.”

지환은 눈을 감은 서진의 얼굴을 그대로 바라봤다. 웃지 않고 있으니 차가운 인상이 두드러졌지만, 어쩐지 눈을 감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리기는 정말 어렸다.

지환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서진 역시 지금껏 살아온 날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더 기니 앞으로는 매일매일 좋은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럼 서진은 예쁜 말을 들은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더 많은 인생을 살게 될 테니까. 당연히, 지환의 옆에서.

지환은 몇 살이 되든 여전히 잘생겼을 서진을 얼핏 덧그려 보며 그 뺨을 살살 쓸다가, 그 속눈썹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근데 지금 힘이 잘 안 들어간다. 두 번 싸웠다가는 진짜 죽겠네. 수명 닳은 것 같아.”

한계까지 뛰어서 그런지 조금 쉬었는데도 다리를 움직이는 게 어쩐지 어색했다. 힘이 잘 안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걷는 건 할 수 있는데, 어디 헛디디기라도 하면 바로 넘어질 것 같기도 했다.

서진도 같이 뛰었으니 서진은 괜찮으려나 싶었는데, 다시 한번 그 단정한 입술에서 모든 감정이 꾹꾹 눌러 담긴 것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랑해요.”

문득 그 눈가에 닿아 있던 손가락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지환은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처음 그대로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지환은 그대로 서진의 손을 잡고 근처 벤치에 앉혔다. 그러고 보면 힘들어 죽겠는데 왜 계속 서 있었나 싶었다. 어디 앉을 곳 찾을 정신이 아니기는 했지만.

“불안해서가 아니라, 안심해서 그러는 거면.”

지환은 제 옆에 얌전히 앉은 서진을 바라봤다.

“그러면 울어도 돼.”

어떤 이유이든 서진이 울면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안심해서 우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안 울어요.”

그래 봤자 눈가에 그저 옅게 묻어 있던 물기가 그제야 그 눈동자 가득 들어찼다. 서진은 그 눈망울에 물기를 가득 채우고서도 지환을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에 지환은 웃으며 서진의 눈가를 살짝 쓸었다.

“눈 깜빡여. 아프겠다.”

그 말에 그제야 그 눈꺼풀이 살짝 떨리더니, 한번 눈을 깜빡였다. 그대로 툭 하고 떨어진 눈물을 닦아 주기가 무섭게 곧이어 그 투명하고 검은 눈동자에 다시 물기가 맺혔다. 그러고는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떨어지며 그 속눈썹이 젖었다. 지환은 서진의 젖은 속눈썹이 떨리듯 오르내리며, 그 안의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는 걸 그저 마주했다.

서진이 결국 고개를 숙이고 제 손에 얼굴을 묻자, 지환은 그 옆에 가만히 앉은 채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올려다봤다.

“솔직히 나는 네가 나 못 잡을 줄 알고 처음에는 네가 나 잡으면 멈춰 주려고 했거든.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잡더라.”

그 덕에 몇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거의 뵙고 왔다. 그 덕에 이렇게 다 털어놓을 수 있게 됐고. 물론, 앞으로 더 많은 대화를 나눠 가야겠지만.

“너무 잘 뛰었어요. 없어질 것 같았단 말이에요.”

지환은 고개를 돌려 제 옆의 서진을 바라봤다. 사실 잘 뛰기는 서진이 더 잘 뛰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지환이 볼 수 있는 건 서진의 머리뿐이었는데, 그 둥글고 예쁜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결 좋은 머리칼이 얼핏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살랑거렸다.

“그랬어?”

“그랬어요.”

조금 더 투정을 부려도 좋을 텐데, 막상 서진의 목소리에는 그런 어조가 없었다.

“더 말하고 싶은 거 있어?”

그 물음에 서진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지환을 또렷이 직시하는 그 시선 속에서, 천천히, 어쩌면 조금 머뭇거리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는 없어지지 마요. 저도 뭐든 바로 말하는 게 좋아요. 혼자 생각 정리하고 그러는 건, 안 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그런 건 지환도 무리였다. 이번만 해도, 솔직히 이건 혼자 생각 정리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해서 서진에게 잘 전달하기는커녕, 정말 물리적인 의미로 숨넘어갈 때까지 뜀박질이나 하다가 서진을 종용해서 원하는 걸 얻어냈지.

“그래. 앞으로는 얼굴 보면서 바로 풀자. 대신 너도 그래야 돼.”

“네.”

더 이상 흘러내리는 눈물은 없었지만, 살짝 건드려 보자 파르르 떨리는 젖은 속눈썹이 빛을 받아 얼핏 반짝였다. 그 속눈썹을 옅게 간질이자 서진이 눈을 감았다. 지환은 가만히 그 모습을 눈에 담듯 응시하다가, 이내 천천히 그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지환은 지금, 자신이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할 것을 안다.

드디어, 곁에 있었다.

* * *

딱 씻을 기력까지만 남아 있던 지환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침대에 아무렇게나 늘어졌다. 그 모습에 먼저 씻었던 서진이 지환에게 다가왔다. 지환은 그대로 시선만 옮겨 서진을 바라봤다. 지환은 지금까지도 이렇게 힘든데 어째 서진은 여전히 눈가가 조금 붉은 걸 빼면 꽤나 멀쩡해 보여 억울해졌다.

역시 담배 탓인가. 설마하니 나이 탓은 아닐 텐데. 이십 대 중반부터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는 말이 사실이었을까.

“머리 안 말려요?”

“그럴 힘 없어.”

그 말에 서진이 지환의 젖은 머리를 살살 매만졌다.

“말려 줄게요.”

서진의 말에도 지환이 그저 누워 있자 서진이 드라이기를 가져왔다. 지환이 겨우겨우 상체만 일으켜 앉자 서진이 드라이기를 들어 지환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서진은 아무래도 누구 머리를 말려 보는 게 처음인지, 이건 말리겠다는 건지 뭔지 머리를 쓸어 주는 손에 힘이라고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예쁜아, 사람 머리라는 게 말이야, 네가 좀 힘준다고 어떻게 되지는 않아. 푸딩도 그렇게 만지면 멀쩡하겠다.”

나른함에 눈을 감은 채로 말하자 그제야 지환의 두피를 슬쩍 매만져 보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지환도 미용실을 제외하고는 누가 머리를 말려 주는 게 처음이기는 했다. 저번에는 지환이 서진의 머리를 말려 줬는데.

“내가 너 머리 말려 줄 때 했던 말 기억나?”

그때의 지환은 늘 서진에게 하던 말을 했었다. 뭐든 말하고 싶으면 말하라고.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는 조금 더 쉽게 이야기를 하기 마련이니.

“네.”

그래 봤자 서진은 지금껏 그런 적이 없지만, 이제부터는 조금 달랐다. 지환은 서진이 큰 한 발짝을 내디딘 건 알지만, 그래도 조금 더 말해 줬으면 했다.

“지금은 상황이 반대기는 하지만, 그래도 더 하고 싶은 말 없어?”

지환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그저 말을 이었다.

“네가 그것만 담아 두고 살았을 것 같지가 않아서 그래.”

“형은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요?”

귓가를 부드럽게 쓰는 그 손길에 지환은 어쩔 수 없이 살짝 웃으며 답했다.

“나는 할 말 다 했어. 앞으로 담아 두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 너는 굳이 말할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는 있는데, 그래도 나는 듣고 싶어.”

실제로도 지환은 그 외에는 서진에게 바라는 게 없었다. 지환이야 성향상 오히려 담아두는 게 더 힘들기도 했고.

“우리 서진이 분명 혼자 삽질한 거 더 있을 텐데.”

실제로 땅을 파면 운동이라도 되지, 서진은 보이지도 않는 삽질을 했다. 그 내용을 말해 준 적이 없으니 지환이야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그 깊이가 꽤 된다는 건 알았다.

“기다리고 있으면 돼?”

지환은 그런 서진이 답답한 게 아니라, 안쓰러웠다. 지환은 서진이 말해 주기만 한다면 기다릴 수 있다.

“그냥, 형이 기다리고 말고 할 정도로 별 게 있는 건 아니에요.”

기다려 달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온 서진의 말이 그랬던지라 지환은 그저 물었다.

“어. 그래서 그게 뭐라고?”

뭐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말해 준다면 잘된 일이었다. 서진은 혼자서 또 뭘 담고 있었을까.

“그냥 저는, 별거 안 바라는데. 정말로.”

“그래서 우리 서진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그런데 어째 나오는 답이 없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서진을 바라보자 왜인지 그 표정이 꽤나 미묘했다.

“형은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온 적 없어요?”

“너랑 사귀면서?”

“네.”

“없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지환이 빠르고 단호하게 말하며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자, 서진이 이제 거의 다 마른 지환의 뒤통수를 조심조심 매만졌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형 좋다고 하면 형도 그럴 마음이 들 수도 있잖아요.”

그럴 마음이라는 건 또 뭘까.

“바람피울 마음?”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냥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까지 안 가도 눈길이 가거나 신경 쓰일 수는 있잖아요.”

서진이 진지한 답을 바라는 것 같아서 지환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지환은 연애 중이라면 상대방 외에 다른 사람을 성애의 대상으로 보는 게 불가능했다. 지환은 멀티태스킹과는 유구하게 거리가 멀다.

“나는 그렇게 못 해.”

“그럼 형은, 혹시.”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형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항상 형을 좋아했으면 하고 그래요?”

“그건 너도 아니라는 거 알지 않아?”

그거야 서진도 꽤나 잘 알 텐데.

“그건 그런데, 그럼 왜 다른 사람한테 잘해 줘요? 좀, 오해하게.”

“내가?”

서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어서 서진을 바라보려고 했는데, 서진은 지환의 뒤통수를 살며시 눌러 뒤돌아보지 못하게 했다. 그리 큰 힘은 아니었지만, 의도 전달은 충분히 됐다. 지환은 그저 정면을 바라본 채로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형 아는 사람이, 저번에 그랬잖아요. 형한테 인사하면서 자기 이름 아냐고. 그러면서 자기 이름 말해 주려고 했는데 형이 원래 알고 있었다면서 대신 그 사람 이름 말했던 거.”

언제를 말하는 건지도 잘 알 수 없었다. 지환이 언제 그랬지? 그때 뭘 잘못했나?

“그런 거 안 했으면 좋겠어요.”

“어, 그래. 그런데 왜?”

서진이 하지 말라면 안 할 수는 있는데, 이유는 궁금했다.

“그 사람은 형이 자기한테 관심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겨우 이름 가지고?”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알고 있던 거니까.”

“겨우 이름인데?”

그 말과 함께 서진을 돌아보자 서진은 이미 다 말린 머리에 한참 가져다 대며 머리카락이나 뒤섞고 있던 드라이기를 끄며 시선을 내렸다.

“음료수 같은 거 같이 살 때,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거 고른 다음 그 사람이 형도 그거 좋아하냐고 하면. 이건 네가 좋아하지 않냐고, 그런 말 하는 것도 안 했으면 좋겠어요.”

바라는 게 없다는 게 무색하게 쌓여 있던 게 정말 많아 보였다.

“그런데 걔가 뭐 살지 어차피 알면 그냥 한 번에 가져오는 게 낫지 않아?”

“그래도 물어봐요. 왜 굳이 아는 척해요. 형이 뭘 아는데.”

서진도 말하다 보니 그때가 생각났는지 어조가 서서히 싸늘해졌다. 그랬구나. 지환이 아는 척해서 서진이 싫었구나.

“그 사람들은 형이 자기 취향 기억해 줬다고 설렌단 말이에요.”

“너도 설레?”

뭐 그런 거 가지고 설레나 싶으면서도, 갑자기 궁금해져서 묻자 서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지환을 바라봤다.

“형이 해 주면 설레죠.”

지환은 그 말에 웃으려다가, 웃을 분위기가 아니라 애써 참으며 서진을 제 옆에 앉혔다.

“그리고?”

“그리고.”

서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말했다.

“프로필 사진 같은 거 있잖아요. 그거 특이한 거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 목소리에 지환은 정말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스물 넘은 남자애가 이렇게까지 귀여운 게 가능한 일인가.

“강아지 사진 같은 거 하니까 사람들한테서 연락 오잖아요. 강아지 귀엽다고, 강아지 키우냐고. 그런데 그거 그냥 말 걸 구실 만든 거잖아요. 진짜 강아지 귀여워서 연락하는 거 아니란 말이에요.”

지환은 저도 모르게 서진을 빤히 바라봤다. 강아지가 귀여워서 연락한 게 아니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런 지환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서진의 표정이 빠르게 식었다.

“사람이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짜증 나게, 진짜.”

억울함까지 느껴지는 그 어조에 지환이 결국 웃었지만, 서진은 마주 웃어 주는 법 없이 그저 지환을 응시했다. 지환은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래, 이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서진은 그런 지환을 얼마간 더 응시하더니, 이내 천천히, 그만큼이나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밥도 좀 자주 같이 먹으면 안 돼요?”

지환은 가만히 서진을 마주했다. 이런 걸 숨겨 두고 있었구나. 지환이 느끼기에는 그냥 바로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은 것들이 서진에게는 힘들기만 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서진은 말하면서도 계속 지환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힘겨워 보이기도 했고.

“섹스만 하고 그냥 가는 건 조금, 그런 것 같아요. 시간 없어서 그러면 차라리 그 시간에 밥을 같이 먹어요.”

당당히 요구해도 괜찮을 텐데, 서진의 목소리는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저 이제 요리도 잘하는데.”

그 시선이 잠시 떨리듯 내려갔다가, 다시 지환에게 닿았다.

“형 먹이려고 연습 많이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형이 안 먹잖아요.”

화를 내도 괜찮은데, 그건 조금 더 지켜봐 줘야 할 것 같았다. 이 정도로도 서진이 정말 큰 용기를 냈다는 걸 알았다.

“미안해. 그건 내가 진짜 잘못했네. 앞으로는 같이 먹자.”

“형이 잘못한 건 아닌데, 그냥.”

서진은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이내 말했다.

“어쨌든 형이 잘못한 건 아니에요.”

어느덧 차분한 어조가 그대로 이어졌다.

“사실 지금 말한 것 중에 형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잖아요.”

어쩐지 시무룩한 것 같기도 해 지환은 서진을 끌어당기며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내가 널 서운하게 했으면 잘못한 거지.”

“아니에요. 저는 그냥, 형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가만히 바라보자 시선이 떨리면서도, 서진은 지환을 피하지 않았다.

“제가 이런 말 한다고 귀찮게 생각하지는,”

끝이 흐린 어조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지환이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귀찮아할 수가 있지. 지환은 이렇게나 서진을 더 알고 싶은데.

“저도 제가 이렇게 번거로운 거 싫어요. 그런데, 그래도 어떻게 해요. 형이 말하라고 했잖아요. 그렇다고 형 탓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귀찮게 여기면 안 돼요.”

그 말에 지환은 서진의 눈가를 살짝 쓸었다.

“왜 귀찮아. 나는 네가 말해 주는 거 다 좋은데.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다 좋으니까, 너는 뭐든 말해 주기만 하면 돼.”

그대로 침대 위에서 팔을 뻗어 툭 치고는 서진을 바라보자 서진이 멀뚱히 지환을 바라봤다. 결국 지환이 직접 그 머리를 끌어당겨 팔 위에 놔줬는데, 어째 무게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서진아, 형 피곤하다. 얌전히 누워 주라.”

그 말과 함께 지환이 서진의 머리를 꾹 누르자 그제야 무게가 느껴지면서도, 서진은 불편하다는 표정이었다. 서진이 언제 또 이런 걸 해 봤겠나 싶기는 해 그 이마로 넘어온 머리칼을 살살 쓸어 주자 서진이 지환을 가만히 바라봤다.

“형은 정말 저한테 서운했던 거 없어요?”

지환은 서진의 코끝을 깨물어 주려고 하다가, 참아냈다. 이러다 불이 붙으면 큰일이었다. 지환은 지금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온갖 정신력을 다 쓰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다른 신체적 행위를 할 힘이 없다.

“말 안 해 주는 게 서운했지. 그거 말고는 딱히 없어.”

그런데도 불만족스러운지 그저 지환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지환은 결국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니까 말하고 싶은 게 있기는 한데.”

지환은 그대로 서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네가 오늘 서운했던 거 말해 줘서 좋았어.”

점점 서진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릿해졌다.

“그렇게까지 잘 뛸 줄은 몰랐는데 잘 뛰는 거 본 것도 좋았고. 예전부터 느끼기는 했는데, 너 우는 것도 진짜 예쁘게 울더라. 눈물만 예쁘게 굴러가서.”

소리 하나 없이 우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반질거리는 눈동자와 젖은 속눈썹, 얼핏 상기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그래도 우는 거 보는 건 힘든데, 아무튼 예쁘기는 해. 네가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잡은 게 나라는 것도 좋고. 아무튼 네가 말해 준 게 좋았어.”

가까스로 참아내고는 있었지만, 피곤함과 더불어 점점 더 밀려오는 졸음에 두서없는 목소리가 나른하게 풀렸다.

“그런데 네가 하는 말 들으니까 내가 너 너무 서운하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고 앞으로는 고칠 건데, 그래도 내가 생각지 못한 부분은 네가 말해 줘야 돼. 그래야 고치지. 나는 너 서운하게 하는 거 싫으니까.”

서진이 지환의 콧대를 조심스럽게 쓰는 손길이 느껴졌다.

“형이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돼요.”

그래도 지환은 정말 그런 거 말고는 서진에게 할 말이 없었다. 서진이 지환에게 하나하나 말하는 걸 보면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서진 본인은 정말 그렇게 철벽을 치고 사는 모양이라 지환이 굳이 나서서 질투 비슷한 걸 할 거리도 없었고.

“서진아, 너 아직도 다 말 안 한 거 알아.”

거기다 앞으로도 말할 게 쌓일 것도 안다. 같이 있는다는 게 그랬으니. 그러니 말하지 않은 게 있는 건 괜찮다. 앞으로도 말할 게 쌓여 있다는 뜻이니 그만큼이나 서로를 잘 알게 되겠지.

“천천히 말해도 돼. 언제가 되든, 다 말해 주기만 하면.”

시작은 이미 했으니, 앞으로가 기대됐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그건 괜찮아.”

지환은 서진이 제 입가에 옅게 입을 맞추는 걸 느끼며, 결국 그 부드러움 속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 힘들고, 그만큼이나 충만했다. 바로 제 곁의 서진처럼.

* * *

지환은 과제 식이 계속 엉킨다며 제게 들러붙은 태건을 매단 채로 지친 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이미 들은 지가 오래인 전공이라 기억도 나지 않는데 도대체 뭘 바라는 건지.

“형, 저분 형 친구지.”

문득 나온 그 말에 숙였던 고개를 들자, 건물 바깥에 서진이 서 있었다.

“어. 나 쟤랑 약속 있어서 간다.”

핸드폰을 보고 있는 그 모습에 지환은 얼른 태건을 가차 없이 떼어놓고는 서진에게로 다가갔다.

“안녕.”

아침에 같은 침대에서 눈을 떠서 같이 학교에 왔는데도 수업 때문에 고작 잠깐 떨어져 있던 게 뭐라고 반가웠다. 어차피 정문으로 나가려면 지환이 경영관을 지나야 했기에 보통 지환이 서진을 데리러 갔는데, 왜 오늘은 서진이 여기 있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웃으며 괜한 인사를 하자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 제 앞에 선 게 지환이라는 걸 인식하자 무표정하던 그 얼굴에 온기가 퍼지듯 웃음이 담겼다. 가만히 있어도 번듯한 얼굴에 부드러운 온기까지 돌자 주위에서 흘깃거리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인간의 몰골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사는 공대에서 서진은 과하게 번듯했다.

“가자.”

지환이 얼른 서진을 끌고 걸음을 옮기자 서진이 의아한 듯 지환을 바라봤다. 모자를 쓰고 있었으면 그거라도 덮어 줄 텐데, 아쉽게도 오늘은 모자가 없었다. 서진이 공대에 온 날이면 어떻게 알았는지, 사실 눈에 띄니 알았겠지만, 종종 후배나 동기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분과 친구냐, 누구시냐, 소개해 주면 안 되냐, 그런 연락을 받는 게 떨떠름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게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당연히 그것도 문제이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안 그래도 예민한 서진은 다른 사람 시선을 받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런 게 더 신경 쓰였다.

“오늘은 왜 여기까지 왔어?”

“그냥 형 빨리 보고 싶어서요. 강의도 일찍 끝났고.”

하는 말마다 귀여웠다.

“그래도 어차피 내가 네 쪽으로 가야 하니까 앞으로는 내가 갈게.”

그 말에 서진이 지환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살짝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반응이 어째 탐탁지는 않았지만, 지환은 우선 넘겼다. 나중에 말해 주겠지. 이제는 꽤 잘 말해 줬으니.

“아, 맞다. 너 이거 먹을래?”

지환은 갑자기 생각난 김에 가방을 뒤적여 사탕 껍질을 까고 서진에게 먹여 줬다. 답도 듣지 않고 그냥 그 입가에 가져다 대자 서진이 얼떨결에 받아먹으며 지환을 바라봤다.

“애들 머리 안 돌아간다면서 당 충전한다고 가지고 다니는 거 몇 개 받았거든.”

가방을 다시 닫으려고 했다가 그 속에서 버리려 하다가 깜빡했던 빈 물병을 꺼내자 서진이 지환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쓰레기 주세요. 버리게.”

그 말에 지환은 자연스럽게 서진에게 물병을 건넸다가, 문득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의 쓰레기통을 보며 서진을 잡았다.

“너 그거 던져서 들어가면.”

지환이 그대로 말을 잇자 서진이 지환을 멀뚱히 바라봤다.

“소원 하나 이뤄지는 거로 하자.”

“왜 굳이 던져요?”

“그냥 해 보는 거지.”

원래 이런 건 별 이유가 없지 않나. 그냥 들어가면 기분 좋으니까 해 보는 거지. 원래 비과학적인 행위에는 그 이외의 이유가 붙지 않는 법이다.

“그럼 안 들어가면요?”

“그걸 왜 굳이 생각해?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

애초에 지환은 굳이 안 들어갈 경우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냥 해 봐. 안 돼도 별거 없고 잘되면 소원 이뤄지잖아.”

그럼에도 탐탁지 않은 서진의 표정에 지환이 말을 이었다.

“소원 빌어 빨리.”

“왜 굳이.”

그 떨떠름한 반응에도 지환이 부추기듯 서진을 바라보자, 서진이 결국 쓰레기통을 향해 병을 던졌다. 궤적을 보아하니 당연히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짧은 순간에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물병이 쓰레기통 가장자리를 맞고 튕겨 나갔다.

운이 안 좋네. 별 상관은 없지만. 지환은 얼른 물병을 주워 쓰레기통에 집어넣고는 서진을 바라봤다.

“들어갔네.”

그 말에 서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짓자 지환은 마주 웃으며 서진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우리 서진이 좋겠다. 소원도 이뤄지고.”

던져서 들어가면 이뤄진다고 했지 다른 조건을 덧붙인 적은 없다. 어쨌든 서진은 던졌고, 결과적으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으니 만족한 셈이다. 서진이나 지환이나 이런 걸 믿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기분은 좋지 않나 싶었다.

“무슨 소원 빌었어?”

지환의 물음에 결국 서진도 웃으며 답했다.

“그런 거 알려 주면 안 되잖아요.”

“너 어차피 소원 안 빌었잖아.”

그 정도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는 한데.”

그냥 지금 지어서 대충 말해도 되는데 그러지는 않는 게 또 성실했다.

“그럼 지금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합쳐서 써.”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서진의 집 앞에 거의 도착했다.

“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갈 테니까 너 먼저 들어가 있어.”

담뱃갑을 꺼내며 걸음을 옮기자 서진이 지환을 따라왔다.

“형, 있잖아요.”

“어.”

서진은 흡연자도 아닌데 지환이 담배를 피울 때 곁에 있고는 했다. 이번에도 그럴 모양인가 싶어 답하며 담뱃갑에서 한 대를 꺼내자 서진이 슬쩍 말을 이었다.

“형, 담배 피우는 거.”

“어?”

한번 죽을 듯이 뛰고 나서는 그래도 서진도 꽤나 하고 싶은 말을 잘 해 줬다. 그런데 담배는 왜? 지환이 어정쩡하게 담배를 손에 쥔 채로 서진을 바라보자 서진이 머뭇거렸다. 서진은 말을 하면서도, 늘 조심스럽게 굴었다. 막상 서진이 말하는 걸 보면 다 마땅히 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도.

“질투하는 건 아닌데.”

질투하는구나. 하지만 그 외에는 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담배 얘기 하면서 질투할 게 뭐가 있지.

“전 여자친구분이랑 사귈 때는 그분이 무슨 말도 안 했는데 그분 건강 상할까 봐 끊었다고 했잖아요.”

그 말에 지환은 바로 꺼냈던 담배를 담뱃갑 안에 집어넣었다.

“굳이 제 건강 걱정해 달라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형 건강 생각하면 안 피우는 게 좋잖아요. 그래도 피우고 싶으면 피우는 건데, 형도 스트레스 꼭 담배로 푸는 건 아니라고 했고.”

지환은 이제 아예 담뱃갑을 통째로 서진에게 건넸다.

“끊을게.”

지환은 얌전히 담뱃값을 받아드는 서진을 향해 말을 이었다.

“미안해. 생각이 짧았어.”

어째 지환은 늘 생각이 짧았다. 이제라도 서진이 말해 줬으니 다행이기는 했지만.

“꼭 끊으라는 건 아니에요. 형이 피우고 싶으면 피우는 건데.”

담배를 피우지도 않을 테니 서진의 집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이어진 그 말이 왜인지 조금 안쓰러웠다. 서진은 뭔가 요구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다. 지환이 그 요구를 쉽게 받아들여도 꼭 그러지는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덧붙였고. 조금 더 멋대로 굴어도 괜찮은데.

“아니야. 나도 끊으려고 했어.”

“정말 끊을 거예요?”

아마 지환도 시간만 조금 더 있었으면 알아서 끊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안 그래도 담배를 피우지도 않으면서 지환이 피울 때 옆에 있는 서진이 신경 쓰이기는 했으니. 거기다 간접흡연도 큰 문제고. 이미 꽤나 망해 버린 지환의 폐야 몰라도, 어리고 건강한 서진의 폐에 문제가 생기는 건 절대 안 됐다.

“어. 들어가자.”

그 말에 서진이 현관문을 열어 지환을 먼저 들여보내고는, 저 역시 따라 들어왔다.

“형, 근데,”

여전한 그 목소리에 지환은 대강 신발을 벗으며 서진의 입을 막듯 입을 맞췄다.

“진짜 피우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돼요.”

기껏 입을 막은 보람도 없이 나온 목소리에 지환이 웃자 서진은 잠시 지환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저 역시 웃었다. 서진은 종종 눈치를 보면서도, 그래도 지환이 웃으면 우선 따라 웃고는 했다. 지환이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거짓말하지 마.”

꽤나 사랑스러운 궤적을 그리며 올라간 그 입꼬리를 살살 매만지자 서진이 그대로 말했다.

“거짓말 아닌데.”

그 말을 할 때마다 움직이는 입술에 다시 한번 짧게 입술을 맞춘 지환은 말했다.

“그냥 좋다고 말해 주면 되지 않나.”

지환은 답이 나올 틈도 없이 다시 그 입술을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그 말에 서진이 그대로 지환에게 입을 맞췄다. 다급하기만 한 움직임에 얼떨결에 뒷걸음질 치자 서진은 그대로 밀어붙이듯 지환을 침실로 몰았다.

“좋아요.”

서진은 지환을 침대 위로 눕히며 그대로 티를 벗겨냈다. 분명 서진이 먼저 천천히 해 보자고 할 때가 있었는데, 그게 언제였냐는 듯이 빠르기도 했다.

“형이 저 때문에 노력하는 게 좋아요.”

지환은 서진의 티를 벗겨내며 그 등을 쭉 쓸었다. 손 아래로 단단한 근육이 그대로 느껴졌다. 언제 봐도 잘 다듬어진 몸이었다.

“그럼 앞으로도 좋겠네.”

노력이야 앞으로도 계속할 테니.

“귀찮거나 번거로우면 꼭 말해야 돼요.”

지환의 바지를 벗기면서도 착실한 목소리에 지환은 서진의 바지 버클을 풀며 답했다.

“그래.”

그래 봤자 그럴 날이 올 리는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면 서진이 오히려 믿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지환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괜찮은 거야.”

“네.”

그 말과 함께 맨몸이 다시 맞붙었다. 살짝 허리를 치대는 그 행동에 안 그래도 오르고 있던 열기가 갑작스레 확연히 차올랐다. 지환이 살짝 상체를 일으켜 콘돔을 뜯자 서진이 그 손에 제 손을 겹쳐 지환의 성기에 콘돔을 씌우더니, 이내 제 성기에도 콘돔을 씌우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성기를 맞닿게 한 채로 두어 번 더 비비던 서진은 그대로 지환에게 짧게 입을 맞추고는, 이번에는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왜인지 서진은 유독 지환의 점이 있는 부분을 좋아했다. 턱을 살짝 핥고 이번에는 목선에 입술을 지분거리고 있는 걸 보자면 그 생각에 더 확신이 갔다.

지환은 목선을 살짝 핥고 쇄골을 빨아 당기는 서진의 머리칼에 손을 가져다 대고 살짝 주무르듯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문득 서진이 고개를 들어 올려 지환을 바라봤다. 늘 단정하고 차분한 눈동자에 열기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당연하게도, 지환을 향해.

서진은 그대로 젤을 손에 부어 적당히 체온으로 데우고는 지환의 아래에 부드럽게 펴 발랐다. 어째 이건 계속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지환이 저도 모르게 조금쯤 움찔하자 서진이 그런 지환을 달래듯 가슴팍에 입을 맞추며 콘돔을 뜯어 제 손가락에 씌웠다.

지환은 제 몸 이곳저곳에 꽤나 익숙하게 입을 맞추는 서진을 바라봤다. 어째 기분이 조금 묘했다. 서진은 자기가 먼저 입술 맞대고도 아무것도 못 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꽤나 자연스럽게 지환을 밀어붙였다. 서진은 이런 것까지 학습 능력이 빨랐다.

“아,”

문득 손가락 하나가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져 저절로 몸을 굳히자 서진이 지환의 배에 입을 맞췄다.

“아파요?”

“아니.”

워낙에 젤을 들이부은 탓에 아픈 건 아니었는데,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다 알면서도 어색해서 흠칫한 탓이었다. 아마 언제고 익숙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서진에게 익숙해질 일은 없었다. 가만히 숨이나 제대로 쉬려 노력하자 서진이 지환의 복근이 갈라진 자국대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지환은 흘깃 서진을 바라봤다. 지환의 몸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지라 그 어깨와 등 근육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저러면 몸 정도는 대강 적당해도 충분한데, 서진은 어째 머리부터 발끝까지 과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누구 보여 주지도 않으면서 이렇게까지 몸을 잘 가꿔 놓은 걸 보면 신기하기도 했고, 그 몸을 보여 주는 상대가 지금껏 지환뿐이었으며, 지환밖에 없다는 건 어쩐지 지환이 서진에게 더 잘해 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불러일으켰다. 그와 함께 미묘한 독점욕이 섞여 있을지도 몰랐고.

손을 뻗어 그 단단하고 곧은 어깨를 쓸 듯이 매만지자 천천히 내벽을 누르듯 움직이던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났다. 느릿하리만큼 시간을 들이고 있던지라 버겁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낯설어 눈가를 찡그리자 서진이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봤다.

괜찮다고 말해 줘야 하나 싶었는데, 막상 서진은 다시 고개를 숙여 지환의 장골 근처를 핥았다가, 그대로 그 성기를 입에 담았다.

“으, 한, 서진….”

당황스러움에 저절로 서진을 불렀는데, 서진은 내벽을 부드럽게 매만지던 손가락을 추삽질 하듯 옅게 움직이다가, 한구석을 그대로 비비듯 긁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기둥을 핥자 지환은 결국 앓듯이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지환에게 한번 빨아 달라고 하면 받아 보고 싶었구나 이해라도 하지, 서진은 어째 지환이 해 보려고 하면 부끄러워하는 걸 넘어서 저럴 일인가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거절하더니, 막상 자기는 또 했다.

고작 몇 번 해 봤다고 이제는 요령이 생긴 모양인지 귀두 밑을 살짝 핥았다가, 그대로 혀로는 기둥을 감싸고 입천장으로 선단을 비비듯 내려오는 걸 참고 있기가 힘들었다. 이런 것까지 빨리 배울 필요는 정말, 없지 않나.

겨우겨우 심호흡을 하고 있자 그 안으로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여기부터는 늘 조금 버거웠던지라, 반사적으로 몸이 굳자 서진이 고개를 뒤로 뺐다가, 귀두 끝부분을 입술로 비비며 핥았다.

“야, 진짜,”

서진은 꼭 입으로만 지환을 싸게 하겠다는 듯이 굴었는데, 지환은 가까스로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둘이 같이 섹스하는데 지환만 혼자 간다는 게, 그건 좀 아니었다. 정작 서진은 그런 지환의 사정은 봐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굴었지만.

서진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그 안의 손가락으로 내벽을 매만지듯 눌렀다. 정말 익숙해질 틈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제, 해.”

간신히 뚝뚝 끊기는 목소리 사이로도 내뱉자 서진이 그제야 지환의 성기를 뱉어내더니, 이번에는 손으로 훑었다.

“아직 안 돼요.”

서진은 이런 것까지 착실했다. 지환은 이쯤이면 된 것 같다고 느껴도, 서진은 늘 아직 안 된다며 더 공을 들였다. 이번 역시 다를 바 없이 부드럽게 내벽을 매만지며 종종 한 부분만을 꾹 누르고 비비듯 긁었다가, 부드럽고 넓게 문지르는 손길 그대로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이물감에 눈가를 찌푸리자 서진이 지환의 성기 기둥에 입을 맞췄다. 흘깃 서진을 바라보자 난잡하게 구는 주제에 얼굴만큼은 늘 그렇듯 단정했다. 그래 봤자 숨겨진 시선만큼은 흥분으로 끓어오르고 있다는 걸 알지만.

서진은 지환이 감당하기에는 꽤나 다채로웠다. 참는 법 같은 건 모른다는 듯이 몸을 밀어붙여 오면서도, 막상 제 흥분에 못 이겨 급하게 한 적은 또 없었다.

“형….”

어느덧 다시 지환의 위로 올라온 서진은 지환의 아래에 제 성기를 천천히 비비며 시선을 맞춰 왔다. 그 눈동자가 어쩐지 견디기 힘들면서도, 피할 생각은 없어 그대로 끌어당겨 입을 맞추자 서진이 선선히 끌려오며 혀를 섞었다.

그와 동시에 서진이 지환의 허리를 단단히 잡으며 천천히 삽입하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시간을 들여 풀었다고는 해도, 언제나 버거웠던지라 지환이 의식할 틈도 없이 숨을 멈추자 서진이 그대로 지환의 눈꺼풀과 그 눈가에 입을 맞췄다.

분명히 서진이 참는 게 더 힘들 텐데도, 서진은 지환이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도록 가만히 멈춘 채로 지환의 속눈썹을 살살 핥았다.

이 와중에도 그게 조금 어이가 없어 웃으며 눈을 뜨자 서진은 가만히 지환을 바라보다가, 이내 저 역시 옅게 웃으며 다시 입을 맞췄다.

“하아….”

옅게 흐른 서진의 신음에 지환은 그대로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서진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이 서진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조금 기다린다고 익숙해질 크기는 아니라 여전히 배 속이 가득 차 짓눌리는 것 같기까지 했지만, 이미 페팅을 하며 서진의 크기를 알았으면서도 해 보겠다고 한 제 죄였기에 지환은 그저 서진을 끌어당겨 안았다.

맞닿은 몸 사이로 지환의 성기가 서진의 배에 짓눌리듯 비벼졌다.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며 조여지는 근육이 살갗을 타고 느껴졌다. 맞닿은 몸은 단단하기만 했고 이런 식으로 흥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런 것보다는 닿아 있는 게 서진이라 그렇겠지만.

익숙해질 틈을 주듯 천천히, 느릿하게만 움직이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조금 더 강하게 안을 헤집고 들어왔다. 내벽을 짓누르는 것처럼 긁으며 들어오는 게 버거워 서진과 겹쳤던 입술을 떼어내며 고개를 틀자 서진이 그대로 쫓아오며 혀를 빨아올렸다. 분명히 알려준 건 지환인데, 지금 몰아세워지고 있는 것도 지환이라 어쩐지 억울했다.

그래도 겨우 헐떡이며 다시 입술을 겹쳐 주자 서진이 지환의 성기를 손으로 넓게 매만지다가, 손바닥으로 선단을 둥글게 문질렀다.

“아, 읏,”

내벽이 움찔거리며 조여드는 게 지환에게도 느껴져 괜히 이상했다.

“형….”

목소리까지 가득한 열기를 숨기지 못하며 앓듯이 나온 목소리에 지환은 겨우 눈을 떠 서진을 바라봤다.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로 시선만이 옭아매듯 달라붙었다. 흥분에 조금쯤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혈색이 돌았지만, 그 눈빛을 보자면 귀엽다기보다는 조금 더, 이제는 더 오를 곳도 없는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대로 내벽을 문지르듯 빠져나가자 문득 허리가 떨렸다. 서진은 그런 지환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로, 다른 손으로는 그 성기를 흔들며 깊게 허리 짓 했다. 귀두로 내벽 한 지점을 누르듯 들어왔다가, 그대로 뭉근하게 비비자 어쩐지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으, 잠깐, 아,”

접합부가 질척하게 찌걱거리며 살이 부딪히는 소리 속에서 점점 강하게 몸이 흔들려 입술이 엇나갔다. 제대로 입술을 맞추지도 못할 정도로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입술을 찾자 그 겹쳐진 사이로 드문드문 주인을 찾는 게 무의미한 신음이 맴돌다가, 그대로 사라졌다.

신음조차도 밖으로 내보내기보다는 서로의 안으로 삼키는 와중에 점점 더 시야가 흐릿했다. 눈을 꾹 감고 열기를 떨쳐내듯 살짝 머리를 시트에 비비자 서진이 그 뒷머리에 제 손을 넣고는 오히려 더 끌어당겼다.

더 닿을 수도 없이 맞닿은 사이로 서진은 지환의 성기를 비비며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강하게 그 내벽에 성기를 박아 넣었다. 저도 모르게 안이 움찔하며 그 성기를 꽉 조이는 게 느껴졌다.

몸이 달아오른 와중에도 어색하기는 해 눈을 질끈 감자 서진이 지환의 눈꺼풀에 잘게 입을 맞췄다. 눈을 떠 달라는 그 명백한 의도에 지환이 겨우 다시 서진을 바라보자, 서진은 짓누르듯 내벽을 문지르며 지환의 귀두 밑 부분을 엄지로 비볐다. 그 행동에 따라 지환의 몸이 의지와는 다르게 떨렸다. 당연히 서진에게도 다 느껴지고 있겠지.

지환이 다시 서진을 잡아당기자 서진은 입을 맞추며 허리를 움직였다.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박아 넣을 때마다 배 속이 휘저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비비듯 귀두로 한 지점을 꾹 누를 때면 어쩔 수 없이 허리가 떨렸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성기를 흔들고 비비며 매만지는 게 착실히 흥분을 최고조로 몰아붙였다.

너무, 심했다. 숨이 막혀 헐떡이는데도, 서진은 끝까지 지환을 놓아주지 않았다. 배 속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닿은 모든 부분과 시선까지도 과하게 뜨거웠다.

“흐으, 아, 읏….”

점점 근육이 부자연스럽게 경직되는 게 자신도 느껴졌다. 유독 안의 어느 한 부분만을 짓누르는 걸 결국 더 버티지 못하며 지환이 몸을 굳힌 채로 사정하자, 곧이어 서진도 깊게 들어온 채로 그 안을 꽉 채우며 사정하는 게 느껴졌다.

이제 와서는 나름대로 익숙해져야 할 텐데, 어째 익숙해지지 않았다. 앞으로라고 익숙해질 리도 없을 것 같았고. 서진과 맞닿으면 이런 식으로, 이렇게 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비롯해 모든 게 너무 과했다.

지환이 가만히 눈을 감고 벅찬 숨을 고르자, 여전히 지환의 안에 있던 서진이 그제야 몸을 물리는 게 느껴졌다. 그게 고작이었는데, 묵직하게 안을 채우던 성기가 빠져나가자 살짝 몸이 떨렸다. 어이가 없었다.

탈력감에 가만히 누워 있자 서진이 지환의 콘돔까지 벗겨서 버리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슬그머니 눈을 뜨자 서진이 지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싶어 마주 바라보자 서진이 입을 맞췄다. 장난을 치는 것처럼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몇 번의 입맞춤 사이로 문득 웃음이 터졌다.

“허리 아파.”

슬쩍 허리를 확인해 보니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실 서진의 어깨도 지환이 방금까지 너무 꽉 잡고 있던지라 붉어져 있기는 했지만.

“풀어 줄게요.”

그 말과 함께 서진이 지환의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아무래도 지금껏 꽤나 몸을 섞기는 한 탓에 이제는 첫 섹스에 그랬듯이 다음 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근육통에 시달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좀 부서질 것 같기는 했다.

“엎드려 봐요.”

다음 날의 일상생활을 위해 얌전히 그 말에 따르자 등허리를 주무르는 손과 함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원래 좋아하면, 이렇게 끝도 없이 좋아지는 거예요?”

하는 말은 달기만 했는데, 어째 목소리가 조금 시무룩했다.

“얼만큼 좋아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형이 너무 좋은데.”

그 목소리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귀여워서, 지환은 다시 몸을 돌리며 서진을 바라봤다.

“왜 웃어요?”

여운 탓에 여전히 얼핏 온도가 높은 그 목소리가 어쩐지 평소보다 맹했다. 예민하기는커녕 물렁거리기만 하는 그 표정과 분위기에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워졌다. 결국 지환이 팔을 넓게 뻗어 주자 서진이 조금 머뭇거리면서도, 이내 품에 안겨 왔다.

서진은 지환보다도 몸이 크면서 끌어안기는커녕 비집고 들어와 겨우 안겼다. 솔직히 무겁기는 무거웠는데, 그래도 지환은 어쩔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만끽했다. 평소보다 발그레한 그 뺨을 쓸어 주자, 서진이 고개를 들어 올려 지환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입가에 입을 맞췄다.

방금까지 섹스도 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지금 같은 조심스럽고 옅은 접촉이 너무 간지러웠다. 결국 지환이 다시 웃자 서진이 그 입꼬리에 입을 맞췄다.

“왜 웃냐고.”

그 표정을 확인하니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서진도 웃고 있었다. 한껏 풀어진 분위기에 지환이 서진의 귀를 매만졌다.

“좋아서.”

사실 서진이 지환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말이야 늘 명확했다.

“저도 좋은데.”

거기다 듣고 싶은 말을 들으면 꼭 자신도 되돌려주는 게 귀여웠다.

“뭐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물어보자 서진이 조금 떨리는 시선으로도 지환을 똑바로 바라봤다.

“형이 좋아요.”

혈색이 좋던 피부가 점점 더 붉게 달아올랐다.

“형은요?”

방금까지 지환과 서진이 뭘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수줍은 기색에 지환은 가릴 것 없이 답했다.

“네가 좋아.”

그 답에 조금 쑥스러운 듯 지환을 바라보던 서진의 얼굴에 그만큼이나 부드럽고도 달기만 한 웃음이 떠올랐다. 사실 서진은 원래도 잘 웃는 편이기는 했다. 무표정할 때는 차가운 인상이기도 하고 키도 큰 탓에 사람들이 다가오기 힘들다는 걸 알아서 그렇다. 그래도 웃으면 인상이 단번에 달라지는지라, 서진은 늘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는 여상스럽게 웃어 줬다.

지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환은 그 사람 중 그 누구도 서진이 이런 식으로 웃는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걸 안다. 피상적인 친절 속에 정돈되지 않은 예민함이 있다는 걸, 그 속에는 또 이렇듯 무르기만 한 웃음이 있다는 걸, 지환만이 알고 있겠지.

지환은 달아오른 그 뺨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다른 사람들도 서진의 좋은 점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며 가끔은 지환도 서진을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운 모습은 계속해서 혼자만 보고 싶었다.

* * *

씻고 나오자 서진이 당연하다는 듯이 드라이기를 들고 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로 다가가 의자에 앉자 서진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드라이기를 켰다. 분명히 지환은 자신이 서진의 머리를 말려 주며 그 이야기를 듣는 일상을 기대했는데, 어째 뭔가가 조금 달라졌다.

그래도 지환은 얌전히 서진에게 제 머리를 맡겼다. 침대 위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왜인지 또 불이 붙어 결국 두 번을 더 하고 나니 온몸이 뻐근했다. 그대로 눈을 감자 드라이기 소리와 함께 서진이 지환의 머리를 부드럽게 헤집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냥 집일 뿐인데, 왜인지 서진의 집은 꼭 절간 같은 조용함과 편안함이 있었다. 비유가 이상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만큼이나 차분한 기운이 있었다. 꼭 그 주인처럼.

“귀가 예뻐요.”

“그러냐.”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답에 서진이 그대로 지환의 귓가를 살짝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오늘 있잖아요.”

천천히 흘러나온 그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지환은 눈을 감은 그대로 옅게 웃었다.

“어.”

드라이기를 든 사람과 앉은 사람이 지환의 예상과 바뀌기는 했지만, 나머지는 지환의 바람대로 이루어졌다.

“제가 형 데리러 갔던 거.”

“응.”

이제 지환과 서진 사이에서 머리를 말려 주는 건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됐다. 서진은 제 속마음을 말하는 걸 늘 힘겨워하지만, 이제 와서는 나름대로 잘 말해 주는 것 같기도 했고.

“저도 형 데리러 가고 싶은데, 형은 항상 저 데리러 오면서 저는 못 그러게 하잖아요. 그래서 그게 그냥, 저랑 같이 있는 거 형 아는 사람들한테 들키기 싫은가 싶어서. 그런데 제가 뭐 티를 내거나 그러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도 싫은 건가 싶기도 하고.”

어째 그때 미묘하게 군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제가 가면 꼭 얼굴 가리거나 아니면 빨리 데리고 나가잖아요. 뭐 잘못했나 싶어서요. 앞으로는 가지 말까요?”

그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지환은 고개를 돌려 서진을 바라봤다.

“아니, 내가 너 못 오게 하는 건, 근데 사실 못 오게 하지는 않았지. 어차피 내가 가야 되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한 건데.”

지환의 말에도 서진은 이미 다 마른 지환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가끔은 저도 형 데리러 가고 싶어요. 그럼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건, 그건 그런데, 그래도 좀 귀찮을까 봐 그랬지.”

“안 귀찮아요.”

그 목소리에 지환은 고개를 기울여 서진의 시선을 붙들었다.

“그리고 내가 너 빨리 데리고 나가는 건, 너도 주점 때 와서 알잖아. 애들 너 흘깃거리는 거. 너 사람들이 흘깃거리는 거 싫어하니까 그랬지. 네가 오는 게 왜 싫어. 잘못한 건 또 뭐고.”

그럼에도 답이 없는 그 모습에 지환은 손을 뻗어 그 뺨을 살살 문지르며 웃었다.

“진심으로. 진짜야.”

괜히 그 입꼬리를 들어 올려 주자 서진이 그제야 지환을 바라봤다.

“그럼 앞으로는 가도 돼요?”

“굳이?”

어차피 나가는 길에 지환이 경영관을 지나야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는데, 막상 서진의 시선이 서서히 식자 지환은 바로 덧붙였다.

“어, 미안. 그래, 그러자.”

황급히 나간 목소리에도 서진은 가만히 지환을 바라보기만 했다. 뭐지. 지환이 또 뭘 잘못했을까.

“형은 저한테.”

차분했던 목소리가 얼마간의 머뭇거림을 담아 그대로 이어졌다.

“질투 같은 거 안 해요?”

“왜 갑자기?”

오늘 무슨 일이 더 있었나 싶어 묻자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 말에 지환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지환은 애초에 크게 질투를 하는 편이 아니었다. 원래도 그랬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우선 습관이 그랬다. 상대가 질투하는 거야 지환이 그 말에 따라 불안하지 않게 해 주면 되는 건데, 지환이 질투하는 건 아무래도 구속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다.

원래 말이라는 건 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인데, 지환에게는 별거 아닌 질투가 상대방에게는 무섭게 여겨질 수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웬만하면 상대방이 아예 빼도 박도 못 하게 바람을 피우거나, 그 근처에 간 게 아니면 간섭하지는 않았다. 그게 습관으로 굳어진 지도 오래였고.

“네가 워낙에 잘해서 내가 굳이 뭘 할 게 없지 않을까.”

거기다 서진이라면 더 의심할 거리도 없었다.

“너 엄청 철벽 치고 살잖아.”

서진은 지환이 신경 쓰기는커녕, 인지하지도 못했던 것들까지도 세세히 신경 쓰며 살았다. 상대에게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만 아니라, 벽 치는 게 정말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질투할 게 있을 리가 없다.

“저는 형이 오해할 행동 안 하고 다니는 거 아는데도 질투한단 말이에요.”

그럼에도 나온 목소리에 지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진을 끌어안자 서진이 지환을 매달고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질투? 누구한테? 이다은 말고 더 있어?”

또 누가 있는지 생각해 봐도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애초에 이번 연도 들어서는 친구도 거의 없이 지냈는데.

“굳이 그분 말고도. 그냥, 저는 좀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지환을 매단 채로 밥상을 차리는 서진의 모습에 지환은 어쩐지 마음이 짠해졌다. 그냥 밖에서 먹어도 괜찮은데, 서진은 지환이 먹을 음식을 직접 만드는 시간이 좋다며 요즘 들어 부쩍 요리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과거의 지환이 이런 서진을 알았다면, 서진을 데려갈 사람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해했겠지만, 이제 지환은 그런 서진을 데려갈 게 자신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더 아껴 주고 잘해 줘야지. 그래도 요리는 정말 안 해도 괜찮은데.

지환은 요리에 흥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배워 봤자 결과가 안 좋았다. 그러니 요리만큼은 서진이 독박을 쓰게 되는 게 미안했는데, 서진은 막상 지환이 사 먹자거나, 밖에서 먹자고 하면 그걸 서운해했다.

“앞으로 그럴 때마다 말해. 그럼 내가 더 조심하겠지.”

“형이 잘못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이상해서 그런 건데.”

꽤나 여상스럽게 나온 그 말에 지환은 서진을 돌려세워 자신을 보게 했다. 서진은 이제 부쩍 제 속에 있는 말을 잘하게 됐다. 지환은 웬만하면 그 말들을 모두 잘 들어 주고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었다.

“서진아, 원래 연애하면 다 이상해지는 거야. 왜 그런 소리를 해?”

거기다 서진 정도면 질투를 심하게 하는 편도 아니었다. 물론 서진이 저 혼자 어느 정도 숨기고 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지환이 보기에 서진은 정도에 어긋날 정도로 질투를 하지는 않았다.

지환은 상대가 제 핸드폰을 관리하기 시작해야 좀 집착하는가 보다 싶다. 그런데 서진은 지환의 핸드폰을 관리하기는커녕, 봐도 괜찮다고 해도 보지 않았다. 그리고 뭐, 질투가 심하면 그 나름대로 귀엽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프로필 사진 같은 걸 말하던 서진도 정말 귀여웠다. 그걸 넘어서 집착한다고 해도 다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쉽게 생각하나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말 감당할 수 있었다. 지환이 생각하기에, 연애라는 건 자신도 모르는 모습을 발견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자기 자신조차도 낯설어지고, 상대에게만 내비치는 모습이 생기고, 그런 게 아닐까.

“형도 그래요?”

“어.”

고민할 것도 없이 답한 지환은 조금쯤 생각하다가, 이내 천천히 말했다.

“왜, 저번에 언제 한번 네가 그랬잖아. 항상 내가 먼저 전화 끊는다고.”

그러고 보면 다은과의 일이 있던 날도, 서진은 끊기지 않은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늘 지환이 먼저 끊는 탓에, 서진은 자신이 먼저 끊지는 않는다고 했다. 어쩌다 지환이 종종 깜빡하면,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그 전화를 붙들고 가만히 있을 때도 있다고 했고.

“네 말대로 나는 용건 끝나면 그냥 전화 끊거나, 아니면 당연히 상대방이 끊었을 거라고 생각해서 놔두거든. 그쪽에서 안 끊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하고.”

지환은 그렇게 정적을 듣고 있을 서진을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왜 서진은 먼저 전화를 끊지 않는지, 그런 것들을 궁금해하게 됐다.

“그런데 사실, 요즘은 나도 잘 안 끊잖아.”

그렇게 말 없는 통화 시간이 이어졌다. 할 말은 모두 했는데도, 이따가 보자, 잘 자. 그렇게 명확히 전화를 끊을 타이밍을 만들어 놓고도, 그럼에도 전화기를 쥐고 있게 됐다.

“그렇게 되는 거야.”

정적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그러다 할 말이 생기면 문득 내뱉고, 가만히 듣다가, 답할 게 있으면 답하고.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이 길어졌다. 종종 그런 새벽이 찾아오면, 뭘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맥락 따위는 전혀 없는 이상한 대화가 이어지기도 했다.

서진이 방금 사용한 표현을 빌려 보자면, 그건 지환에게 이상한 일이다. 서진을 만나기 전에는 그랬던 적이 없으니.

“다들 그렇게 자기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하면서 연애해.”

하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지환은 어느덧 그 의도 없는 시간들을 사랑하게 됐다. 지환은 이제 왜 서진이 쉽게 전화를 끊지 못하는지를 안다. 그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어도, 붙들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을 때도 있다는 것 역시 안다.

“그런데, 어차피 다들 그러면 결국 그건 평범한 거 아닌가?”

만약 이상한 일이라고 해도 별 상관은 없다. 오히려 그런 걸 같이 할 수 있다는 게 꽤 좋지 않나. 우선 지환은 그랬다. 그 말과 함께 서진을 바라보며 웃자 서진은 그대로 지환을 빤히 바라봤다.

“그럼 제가 지금,”

꽤나 거리낌 없던 지환의 태도와는 달리, 서진의 목소리는 얼핏 깊게 이어졌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지환은 그저 그 목소리를 들었다. 서진을 보자면, 그 눈빛이 문제였다. 그렇게나 모든 걸 숨기면서도, 시선만큼은 감정을 숨기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옭아매고 싶다는 듯이 깊고 맑은 눈동자를 부딪쳐 오자면 피할 길이 없었다. 애초에 피하고 싶지도 않았으니 사로잡히는 게 당연했다.

“그것도 이상한 건 아니죠?”

서진은 어떤 답을 원할까.

“그건 특별하지.”

거창하고 의미 있는 말을 어떻게든 잘 꾸며서 예쁘게 전해 주면 좋겠지만, 말주변이라고는 없던지라 이유는 다 건너뛰고 느끼는 것만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어차피 이유를 찾아낼 수도 없다. 지환이 서진을 사랑하고 있으니, 서진도 지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게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뿐이다.

이 세상 다른 사람들의 연애 대부분이 그러하듯, 뻔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게 본인의 일이라면 더없이 특별해지는 법이다. 지금 지환이 서진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처럼.

“잠깐만.”

난데없이 입술을 맞춰 오는 걸 짧게 입술을 꾹 누르듯 가볍게 응해 주고는 고개를 뒤로 빼자 서진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 들어찼다. 지환은 그 눈가를 손가락으로 옅게 쓸어 주고는, 그대로 서진을 의자에 앉혔다.

“기껏 만들었는데 이제 슬슬 먹지?”

어째 만든 사람 앞에 두고 괜한 사람이 생색내는 꼴이 됐지만, 그래도 서진이 기껏 열심히 만든 음식을 식게 할 수는 없었다. 지환도 그대로 의자에 앉자 서진은 먹으라는 음식은 안 먹고 그저 지환을 빤히 바라봤다. 예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서진은 지환이 먼저 먹어야 저 역시 먹었다.

지환은 우선 손을 움직여 한 수저 떠먹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서진은 갈수록 요리 실력이 늘었다.

“맛있네.”

맛이 없어도 당연히 맛있다고 했겠지만, 어쨌거나 그대로의 진심을 말하자 서진이 그제야 안심한 듯이 웃었다.

“많이 드세요.”

그렇게 말해 놓고도, 종종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면 서진은 조금쯤 쑥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다시 흘깃 지환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결국은 옅게 웃었다. 꼭 사랑스러움이 피어나는 것 같은 그 분위기에 지환은 저 역시 웃었다. 평범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처럼, 앞으로의 서진과 지환을 상상하는 것 역시 평범하고 자연스럽기만 했다. 시간이 꽤나 흐른 뒤에도 지환이 서진과 여전히 함께 밥을 먹고 있을 걸 생각하기란 쉽기만 했다.

“너도 많이 먹어.”

아직 서진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지환은 제 상상이 그토록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다는 걸 처음 알아차렸을 때, 제 부모님을 생각했다. 지환의 부모님은 스무 살 때 처음 만났는데, 지환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처음 보자마자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 우선 참았다고 했다. 심지어 결혼까지 하고 싶은 사람이었으니 더더욱 조심스러웠고. 더불어 당시에는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어렸으니 부담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다고도 했다. 그러다가, 그렇게 숨겨둔 지 10년째 되는 날 청혼했다.

아버지는 첫눈에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미래를 알았지만, 사실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8년쯤이 지나서야 이 사람이라면 결혼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던데.

같은 결론을 간직하더라도, 각자의 속도는 다른 법이다. 지금의 서진은 너무 어리니까, 우선은 9년쯤 뒤에 말해 줘야지. 그때쯤이 되면, 서진도 지환이 보고 있는 게 뭔지를 알게 되겠지. 지환이 서진을 얼마나 아끼려 노력하고 있는지, 서진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그리고 그때쯤이 되면, 서진 역시 지환이 그토록 아끼는 걸 같이 아껴 줄 게 분명했다. 서진은 머뭇거리면서도, 불안해하면서도, 결국 한 발짝을 내딛는 걸 포기하지는 않으니.

“사랑해요.”

“밥이나 잘 드세요.”

밥 먹다 나온 그 뜬금없는 말에 대수롭지 않게 답한 지환은, 그대로 서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랑해.”

그렇게 9년쯤 뒤에는, 특별하고도 대수롭지 않은 나날들을 너 역시 확신하게 되겠지.

“저도 사랑해요.”

“밥 먹으라니까.”

어이가 없어 웃자, 서진은 지환을 따라 웃었다. 표정이 풀려 있는 걸 보니 그냥 지환이 웃으니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을 뿐이지 서진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자각도 못 하고 있을 게 뻔했다.

“형, 있잖아요.”

이제는 표정만 보면 대강 어떤 얘기를 할지 예상이 갔다. 서운했거나, 싫었던 점을 이야기할 때면 말을 시작하는 것부터도 긴장하고 지환의 눈치를 봤는데, 좋았던 걸 얘기할 때는 그 말을 하는 것조차도 꽤나 들뜬다는 듯이 굴었다.

“오늘 형이 소원 이뤄진다고 쓰레기 던져 보라고 했을 때.”

지환은 책을 좋아하기는커녕, 수업 자료가 아니라면 읽어 본 지도 꽤 오래라 독서법을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믿기지 않게도, 연우가 책을 열심히 읽는다는 건 알았다. 도대체 어떻게 읽기에 책을 그렇게 읽으면서도 맞춤법이 엉망인지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다.

“안 들어가니까 형이 대신 넣어줬잖아요.”

연우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너무 어려워 읽기 힘들더라도 시간을 들이면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우선은 읽고 싶은 부분만 뽑아서 적독하다가, 전후 사정을 알고 싶으면 가볍게 속독하고, 훑어보며 통독한 후에, 흥미가 붙어 점점 더 그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으면 천천히, 자세히 뜻을 새겨가며 정독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열중하며 탐독하게 되는 게, 그렇게 이해하는 게 독해라면.

“형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저는 좋았어요.”

시선을 만질 수 있다면, 아마 지금 서진의 시선은 닿기만 해도 녹진하고 부드럽게, 그만큼이나 달게 달라붙어 감싸이지 않을까. 그런 시선을 받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너를 읽는 법이 아닐까.

“형이 소원 이뤄질 거라고 했잖아요.”

서진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지환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 가득한 설렘에 어째 지환의 가슴팍까지도 간질거렸다.

“사실 형이 대신 넣어준 순간 이뤄진 것 같아요.”

네가 보여 주는 부분만을 보다가, 문득 네가 발췌해 준 부분이 아니라, 다른 부분까지도 궁금해지고. 그렇다고는 해도 처음부터 깊게 들어갈 생각을 한 건 아니라 대강 빠르게 훑어봤다가, 짧게 훑어서는 알지 못할 부분들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지고. 그렇게 이미 훑어 온 부분마저도 새로운 관점과 마음가짐으로 찬찬히 읽다가, 결국은 네게 열중하게 되는 게. 그렇게 너를 독해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지금도.”

시간과 관심을 들인다고 모든 게 잘 되지는 않는다는 걸 안다. 지금은 이렇게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분위기를 즐기지만, 사실 뭐 그렇게 오래갈까 싶기도 했다. 분명 머지않아 싸우고 섭섭해하고 답답해하며 불안해하겠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뭐 그렇게 큰일인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점점 고쳐가며 더 나아질 테니까. 모든 노력은 쓸모없어질 수 있지만, 노력이 없다면 이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밥 같이 먹어서 좋아요.”

아무리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였다고는 해도, 결국 도출해낸 해석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역시 괜찮다. 나는 분명 나의 해석을 너와 공유할 테고, 만일 내 해석이 틀렸다면 내 곁의 네가 고쳐 줄 테니.

“응. 나도 사랑해.”

그러니 아마 9년쯤 뒤에,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마주하며 밥을 먹고 있지 않을까. 분명 지금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달라진 모습을 평범하게 생각하면서. 그토록 자연스럽고 여상스럽게, 서로를 이해하는 걸 멈추지 않으며, 너를 읽어나가는 나날들을, 그렇게 이어 나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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