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6/15)

* * *

수업을 다 마치고 지환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서진은 저녁을 먹고 케이크를 잘라 지환의 그릇에 놓아줬다. 지환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너 단 거 안 좋아하지 않아?”

그러면서도 이번에는 지환이 케이크를 잘라 서진의 앞에 놓아줬다.

“그래도 이 정도는 먹어요. 형도 싫어하는 건 아니잖아요.”

거기다 케이크는 굳이 케이크를 먹는다기보다는, 생일을 축하한다는 상징적 의미였다. 뻔하든 아니든 서진은 지환과 그런 상징적인 것들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건 그렇지.”

그대로 케이크를 먹던 지환이 문득 물었다.

“밤에 영화 보러 나갈래?”

그러고 보니 지금껏 함께 영화관에 간 적이 없기는 했다. 같이 가 보고 싶기는 했는데, 막상 겨우 온종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에 어두운 곳에서 지환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 건 싫었다. 얘기도 못 하고 지환은 분명 스크린을 바라볼 텐데. 물론 옆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기야 하겠지만.

“보고 싶은 영화 있어요?”

서진의 물음에 지환이 슬쩍 서진을 바라봤다.

“그건 아닌데, 너 심심할까 봐.”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환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시선이 계속 따라갔다. 지환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애써 티를 내지는 않고 있는데, 잘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환이 뭐 별다른 걸 하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형이랑 있는데 왜 심심해요.”

바로 나간 서진의 답에 지환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많이 먹어, 서진아.”

왜인지 꽤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목소리와 그 웃음에, 서진은 슬쩍 지환의 옆을 바라봤다가, 다시 지환과 시선을 마주했다.

“옆으로 가서 먹어도 돼요?”

늘 그렇듯 맞은편에 앉아 있던지라 얼굴을 보기는 편했지만, 지금은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기도 했다.

“그래.”

그 선선한 답에 서진은 지환의 왼쪽으로 의자를 옮겨 앉았다. 지환은 한국 사회에서 드물게도 어떠한 식으로도 교정되지 않은 귀한 왼손잡이라, 무언가를 할 때 지환의 왼편에 앉으면 오른손잡이인 서진과 종종 몸이 닿았다.

부적절한 이유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우연히 스칠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붙어 앉자 지환이 서진을 바라봤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지환에게서는 서진이 선물한 향수 향기가 났다. 원래는 이제 입을 일이 많을 테니 정장을 맞춰 주고 싶었지만, 지환이 그건 절대 받지 않겠다고 해서 타협한 게 향수였다. 혹시 너무 붙었나 싶었는데, 막상 지환은 제 오른쪽을 눈짓했다.

“이쪽으로 오는 게 편하지 않아?”

확실히 그편이 서로 공간 더 넓게 쓰고 좋기는 하겠지만.

“불편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손잡으려고.”

제 오른손을 보여 주며 하는 지환의 말에 서진은 냉큼 지환의 오른쪽으로 의자를 옮겨 가 앉았다.

“잡아 주세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리를 옮긴 것 치고는 조심스럽게 말하자 지환이 살며시 서진의 손목을 쓸었다가, 그대로 그 손을 잡았다. 서진은 가만히 제 옆의 지환을 바라봤다. 한 손으로는 서진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가 먹는 그 모습을 지켜봤는데, 역시 미디어는 미디어인 듯 크림 하나 입가에 묻히지 않아서 닦아 줄 기회는 없었다.

그래도 그 입술이 움직이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지환이 문득 서진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하자 지환이 짧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게 꼭 왜 그렇게 보고 있었냐는 것 같아서, 서진은 맞잡은 지환의 손에 살짝 힘을 주며 제 쪽으로 조금 더 끌어당겼다. 그 행동에 지환이 서진을 빤히 바라보자 서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지환이 옅게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서진의 입술에 차가운 감촉과 함께 지환의 손가락이 닿았다. 반사적으로 눈을 뜨자 지환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서진의 입술에 크림을 펴 바르다가, 이내 그 입술을 핥았다.

지환은 살짝 혀를 내어 겉면을 핥았다가, 이내 서진의 아랫입술을 빨아 당긴 후 천천히 서진의 입안으로 혀를 들여놨다. 혀끝으로 단맛이 닿았다가, 머지않아 사라졌다.

“계속 보기에 언제 키스하려나 했는데, 이게 오히려 나를 꼬시네.”

그 말과 함께 지환이 서진에게 케이크를 먹여 줬다. 이것보다는 다시 키스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우선 입안에 든 걸 먹고 있자 문득 지환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서진이 흘깃 바라보자, 지환은 액정을 확인하더니 진동을 끊고는 다시 핸드폰을 내려놨다.

“안 받아요?”

그냥 스팸이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지환은 전화를 바로 끊지도 않았고 조금 생각하는 기색이 보였다.

“어. 안 받아도 돼.”

거기다 스팸이었으면 이 뒤에 어차피 스팸이라는 말이 붙었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누구 전화였기에?

“누구예요?”

그 물음에 지환이 슬쩍 서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 태도에 갑작스레 불안해졌다. 설마 전 애인이나, 아니면 저번 비 올 때의 그 후배면 어쩌지.

“정연우.”

막상 지환의 답은 예상 밖이었다. 최악은 아니어서 다행인데, 그래도 좋지는 않았다.

“원래.”

당연히 연우와 연락을 한다는 건 알았다. 지환은 지혜를 정말 많이 아끼고 연우는 지혜의 남자친구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일상적으로 연락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아니면, 혹시 연우는 오늘이 지환의 생일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연락 자주 해요?”

서진은 이번 연도에 들어서야 겨우 지환의 생일을 알게 됐지만, 연우는 그간 데면데면했던 서진보다 더 지환과 접할 일이 많았을 테니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동안은 연우도 지환의 생일을 챙겼을까. 서진은 모르고 있을 동안, 그래서 정이 들었나.

“아니. 그냥 지혜한테 무슨 일 있거나, 할 말 있을 때 아니면 연락 안 해.”

그 말 뒤로 다시 지환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왔는지 짧게 진동이 울렸다. 지환이 그 화면을 확인하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다시 전화가 왔다.

“받아도 되는데.”

지환은 서진의 말에 고민하는 기색으로 서진과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미안한 듯 살짝 눈가를 누그러뜨렸다.

“미안한데, 잠깐만 받을게.”

“네.”

서진은 그대로 일어나 밖에서 전화를 받으려는 지환을 알면서도,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지환은 그런 서진에게 왜 그러냐는 말을 하는 대신,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지혜가 왜?”

지혜에 관한 이야기라 전화를 받은 거겠지. 아니었으면 무시했겠고. 그게 아니라면, 서진이 받지 말라고 했다면 끝까지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래도 받았을 수는 있고. 지혜는 지환에게 정말 중요하니까.

“지금?”

그 말과 함께 지환이 제 시계를 확인했다.

“어딘데? 어. 거기 알아. 그런데 나 지금,”

지환이 슬쩍 서진을 바라봤다가, 다시 케이크를 담은 그릇쯤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 모의고사가 오늘 나왔구나.”

옆에서 대강 듣는 거로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이 9월이니 꽤나 중요한 모의고사 결과가 나왔겠고 지환의 목소리를 듣자니 그게 잘 안 나온 모양이지.

“나 지금은 안 되는데, 네가 달래기는 힘들 것 같아?”

전화 너머의 연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지환의 표정이 굳었다.

“운다고?”

서진은 결국 애써 한숨을 내리누르며 잡고 있던 지환의 손을 놓았다. 그 행동에 지환이 서진을 바라보자, 서진은 전화 속으로는 소리가 섞이지 않을 정도로만 목소리를 냈다.

“가요.”

“어?”

전화 마이크 부분을 막고 나온 지환의 물음에 서진은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가도 돼요. 신경 쓰이잖아요.”

“야, 그래도 오늘은 너랑 계속 있기로 했는데, 너랑 약속한 게 먼저잖아.”

사람에게는 모두 각자의 우선순위가 있기 마련이다. 지환이 그걸 자각하고 직접 고르는 것보다는, 서진이 먼저 지환이 선택할 필요도 없게 하는 편이 둘 모두에게 나았다. 어차피 답은 뻔했지만, 직접 확인받는 건 다른 이야기다.

“괜찮아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계속 같이 있었잖아요.”

“너는 내가 진짜 갔으면 좋겠어?”

서진이 뭔가를 바라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 답에 지환이 가만히 서진을 바라봤다.

“한서진, 나 진짜 가?”

도대체 뭘 원하는지를 알 수 없어 그저 그 시선을 마주하자, 지환이 잠시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서진을 바라봤다.

“그래. 그럼 아예 너도 같이 갈래? 갔다가 같이 돌아오자.”

그래도 지환은 계속해서 서진을 살폈다. 그걸로 됐다.

“아, 근데 정연우 있기는 할 텐데.”

애매하게 끝이 흐려진 목소리에 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알았어요. 같이 가요.”

어차피 이제는 일부러 연우를 피할 생각도 없었다. 굳이 만나러 갈 생각도 없었을 뿐이지. 서진의 여상스러운 목소리에도, 지환은 조금 걱정스러웠는지 서진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달래 주고 집에 보낸 다음 다시 돌아오자.”

이미 서진이 괜찮다고 했음에도 여전히 미안한 기색을 떨치지 못하는 목소리에 서진은 웃었다.

“네.”

그러니까, 조금 양보해서 지환이 서진을 오래 질리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게 더 나았다.

* * *

서진은 지환이 지혜에게 다가가는 걸 보며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연우에게 잠깐 빠져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환이 형은 왜 불렀어?”

어색하게 서진의 곁으로 오는 연우에게 묻자 연우가 시선을 땅바닥으로 내리며 답했다.

“지혜가 자기 가족 불러 달라고 해서.”

서진은 얼마간 떨어진 거리에서 지혜와 지환을 바라봤다. 지환과 서진이 도착했을 때는 조금 진정이 된 것처럼 보였는데, 지혜는 지환을 보자마자 울며 지환을 향해 무슨 말을 했다. 서진에게까지 그 이야기가 들리는 건 아니지만, 아마 모의고사를 꽤나 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래.”

지환은 벤치에 앉은 지혜의 옆에 앉는 대신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지혜를 올려다봤다. 서진은 그 표정을 볼 수 없지만, 분명 걱정스러워하고 있겠지.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 서진은 지환이 그 손을 뻗어 지혜의 뺨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는 걸 바라봤다. 지환은 그대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이내 몸을 일으켜 지혜의 옆에 앉아 가만히 지혜를 지켜봤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혜가 지환의 품에 안겼다.

“수능 볼 거야?”

서진은 여전히 지환을 바라보며 연우를 향해 물었다. 지환은 조심스럽게 지혜를 토닥였다. 나이 차이가 좀 나는 편이라 꽤나 애틋하게 군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다. 거기다 지환의 부모님은 주말 부부인 데다 맞벌이라 지환이 지혜를 살뜰히 보살폈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당연히 소중하게 아끼겠지. 모르지 않는다.

“응. 지혜 깔아 주려고.”

사람한테는 모두 우선순위가 있기 마련이고 서진은 지환의 우선순위를 뻔히 안다. 애초에 뭘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우습기도 했다. 서진은 그제야 지환에게서 시선을 떼어내며 제 옆의 연우를 바라봤다.

“선택과목 같다고 했지?”

“응.”

연우와 제대로 본 건 거의 반년 만이었다. 하지만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어서 그런지,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애초에 왜 피하게 됐더라. 그냥 그때는 모든 게 다 힘들었다. 모든 게 질렸고.

“형, 외삼촌이랑 외숙모가 걱정해. 연락 없다고.”

그제야 슬그머니 서진을 바라보며 말하는 목소리에 서진은 웃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슬슬 연락하려고 했어.”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자면, 원래도 서진은 이런 걸 힘겹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거기다 연우가 눈치를 볼 일도 아니었다. 서진이 어쩌다 그렇게 만들어 버리기는 했지만, 연우의 잘못은 없다. 그저 서진이 갑작스레 버티지 못했을 뿐이다.

“너는 잘 지내고 있어?”

지혜를 달래는 지환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지환은 중요한 게 꽤나 많다. 시간은 한정적이고 감정 역시 한도가 있다. 지환은 가진 것들을 우선순위에 따라 배분해야 한다. 지환은 과연 지환만을 바라보는 서진에게 언제까지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그러니 서진은 제 생활의 범위를 넓혀야 했다. 적어도 지환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기는 해야 했다. 지금처럼 서진이 지환만을 신경 쓰는 걸 지환에게 계속 들킨다면, 지환은 금세 서진을 부담스럽게 느낄 테니까.

“형은?”

“잘 지내.”

서진은 그대로 이어 물었다.

“일기 계속 쓰고 있어?”

“응.”

보통 문자를 주고받으며 맞춤법을 틀리는 경우에는 상대방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오탈자를 확인할 정성도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니. 하지만 서진은 연우가 연락할 때 얼마나 유심히 자판을 치는지를 안다.

“책은?”

연우는 난독증이 있다. 서진도 연우 덕분에 알게 되기는 했는데, 단어 우월 효과라는 게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인간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하나 읽는 게 아니라 단어별로, 의미 단위로 끊어 읽기 때문에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만 맞으면 중간은 틀린 글자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 의미를 이해한다. 하지만 연우는 글자 하나하나를 읽는다. 그래서 읽는 게 느리고 몇 번을 읽어야 겨우 이해했다.

철자를 틀리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연우는 소리 나는 대로 글자를 쓸 수밖에 없다. 자기가 조심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완벽하지는 않고. 그래서 연우가 쓰는 글은 소리 내서 읽어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서진이 그랬다면 그건 매우 큰 문제였겠지만, 연우는 그래도 괜찮다.

“읽어.”

살며시 눈치를 살피는 그 눈동자를 보자면 그렇다. 연우는 어떤 식으로든 사람 관심을 끄는 법을 안다. 서진의 부모님도 늘 하던 말씀이다. 연우는 살가우니 어디를 가도 예쁨을 받을 거라고.

그 증거로 연우는 지혜와 2년이 더 넘도록 사귀고 있었다. 거기다 지환도 연우의 맞춤법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밀어내지 않고 꽤나 챙겨 줬다. 연우에게 난독증이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그러니 서진과는 다르다.

“형, 내가 뭐 잘못했어?”

당연하게도, 연우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 거기다 서진도 연우를 싫어하지 않는다. 싫어할 구석도 없고.

“아니. 잘못한 거 없어.”

“그럼 왜 연락도 안 돼?”

지환을 사이에 두고 잠깐 봤을 때도 느끼기는 했는데, 연우는 그사이 키가 조금 더 큰 모양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지환보다는 작았는데, 이제는 비슷할까.

“일이 좀 있었어. 이제 연락될 거야.”

“진짜?”

연우는 사람 좋아하는 걸 숨기는 법을 몰랐다. 그러니 다들 싫어하기가 힘들겠지. 상대가 조금이라도 싫은 티를 내면 눈치를 보면서도, 그래도 자신은 상대를 좋아한다는 걸 감추지는 않았다.

서진도 연우처럼 겁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거절당할 생각을 먼저 하기보다는, 그대로 좋아한다는 걸 내비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면, 그럼 지환도 조금 더 편했을 텐데.

“응. 그러니까 이제는 나한테 직접 연락하고 괜히 지환이 형 귀찮게 하지 마.”

“형이 연락을 안 받았잖아.”

눈치를 살피면서도 서운함을 내비치는 것도 그랬다. 서진은 지환의 눈치만 보다가 혼자 삭이거나, 아니면 결국 지환이 알아차리고는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그래, 사정이 있었어도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그건 미안해.”

그 말과 함께 다시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지혜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지혜가 웃으며 지환의 어깨를 쳤다. 지환은 선선히 맞아 주며 지혜의 머리칼을 쓰다듬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지혜에게 손을 뻗었다.

지혜가 그 손을 맞잡고 일어나더니, 이내 서진과 눈이 마주치고는 울었던 게 민망했는지 지환의 허리춤을 잡고는 그 등 뒤로 살짝 몸을 숨겼다. 그 모습에 지환이 지혜를 제 옆으로 끌고 와 그 어깨를 감싸 안으며 차 근처에 있던 서진과 연우에게로 다가왔다.

“늦었는데 이제 가자. 정연우 너도 데려다줄 테니까 타고.”

먼저 연우와 지혜를 차에 태우는 걸 보고 있자 지환이 서진을 바라봤다.

“데려다주고 빨리 가자.”

그 말에 서진은 지환을 가만히 바라봤다.

“형, 그냥 집에 들어가도 괜찮아요.”

“뭐? 왜?”

“지혜 울던데, 옆에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

정말 그렇다고는 해도, 분명 계속 신경 쓸 게 뻔했다.

“그래도 신경 쓰이잖아요.”

“야, 그래도 오늘은 너랑 계속 있기로 했잖아.”

그 말에 서진은 지환을 안심시키듯 웃었다.

“저는 괜찮아요. 저도 연우랑 같이 잠깐 집 들어가 볼게요.”

여상스러운 목소리에 지환은 차 안에서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혜와 연우를 잠시 들여다봤다가, 다시 서진을 바라봤다.

“가라고?”

지혜는 지환에게 하나뿐인 동생이다. 하지만 서진은 지환에게 하나뿐이지는 않다.

“네. 괜찮아요.”

그러니 괜찮지 못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 * *

서진은 연우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문득 거실에 나와 있던 제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연우의 물음에 아버지가 연우와 서진에게 차례로 말했다.

“늦었구나. 연우는 잘 준비 하고 서진이는 나 좀 보자.”

“네.”

얌전히 답하자 연우가 불안한 눈빛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은 별거 아니니 그냥 들어가라고 눈짓한 후 제 아버지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오랜만이구나. 요즘 연락도 안 하더니. 앉으렴.”

그 말에 따라 서진은 제 아버지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사정이 좀 있어서요. 죄송해요.”

어차피 제 아버지는 서진이 잘 지내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게 뻔했다. 연락하지 않은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교수들끼리는 동기니, 동문이니 하며 다들 알고 지냈고 서진의 지도교수도 서진의 아버지와 아는 사이였다.

인간관계를 정리했다고는 해도 학교는 여전히 잘 나가고 있으니 당연히 지도교수가 아버지에게도 소식을 전해 줬겠지. 그게 아니라면 연락이 되지 않는 서진이 불안해 아버지가 넌지시 제 아들은 요즘 어떠냐고 먼저 물어봤을 수도 있고.

어찌 됐건 제 부모님에게 중요한 건 서진이 얼마나 자신들의 기준에 맞게, 제 얼굴에 먹칠하지 않고 잘 지내는지다. 서진은 그 길에서 엇나가지 않았다.

“그래, 서진이 너야 알아서 잘하니 걱정은 없다만, 그래도 어머니가 걱정하니 종종 집에 들어오고 그러렴.”

“그럴게요.”

부모님이 서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늘 사랑했겠고 여전히 사랑하겠지. 부모님은 마땅히 사랑할 자식의 모습을 명확히 가지고 있고 서진은 늘 그에 걸맞았다.

하지만, 서진의 형도 그랬다. 분명 사랑받는 자식이었다. 그럼에도 길에서 벗어나자 어떻게 됐던가. 부모님이 여전히 형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어쨌거나 자식이고 지낸 기간이 있으니. 그간 건넸던 사랑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필요하지 않을 뿐이다.

“요즘은 별일 없고?”

“네.”

“김 교수가 너 착실하게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칭찬을 하던데, 이대로만 하다가 로스쿨 들어가면 되겠어.”

아니나 다를까 서진의 지도교수와 이미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서진이 그저 가만히 있자 아버지가 서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 다른 거 생각한 건 있니?”

그 평온한 어조에 서진은 어긋나지 않는 답을 했다.

“아니요. 준비는 천천히 할게요.”

서진은 자신이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는 걸 안다. 부유한 집안, 충분한 관심을 가지는 부모님. 거기다 부모님은 서진이 어떤 길을 갔으면 좋겠다고 유도했을 뿐이지 강요한 적은 없다. 그저 서진이 버티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 생각해 보면 서진이 너는 늘 좋아하는 게 없었잖니. 그럼 옳은 길로 가는 게 좋지.”

그 다정하기만 한 어조에 서진은 문득 물었다.

“제가, 좋아하는 게 없었어요?”

모든 게 서진의 선택이기는 했다. 부모님은 강요한 적이 없지만, 서진은 제 부모님이 말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 그대로 따랐다. 그러니 서진의 선택이기는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서진한테 정말 좋아하는 게 없었나.

“좋아하는 게 있었으면 어떻게든 부모님을 설득시키기라도 했겠지. 하지만 그럴 각오를 할 만큼 좋아했던 것도, 안전한 길을 포기할 만큼 확신이 있었던 것도 없었잖니.”

서진은 그저 제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어쩌면 서진에게도 좋아하는 게 있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제 부모님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해 본 적은 없다. 서진은 지금껏 자신이 뭔가를 하고 싶을 때, 그게 부모님의 생각과 다를 것 같다면 쉽게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정말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지금껏 그렇게 살았다.

“서진아, 재능이라는 건 말이야, 어떻게든 눈에 띄게 되어 있는 거란다. 그걸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다면 안전한 길로 가는 게 맞는 거고.”

거기다 이제 와서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다른 쪽으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네. 그렇게 할게요.”

그 단조로우며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답에 서진의 아버지는 서진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여자친구는 있니?”

“없어요.”

서진의 답에 아버지는 아닌 척하고 있던 긴장을 풀었다. 서진의 부모님은 서진이 제 형처럼 되는 걸 늘 긴장했다.

“그래. 아빠가 늘 말했지?”

서진은 항상 자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했다. 난독증 때문이든 뭐든, 연우에게는 서진이 필요하다. 부모님에게도 서진이 필요하다. 서진은 그 필요를 원한 적도 없고 그 자리를 만든 적도 없지만, 그럼에도 버텼다. 밀려난다면 서 있을 곳이 없으니.

그랬던 서진에게 지환은 처음으로 직접 만든 자리다. 서진은 지환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니 지환이 서진을 필요로 했으면 했다. 서진이 필요해야 버리지 않을 테니.

“겉모습은 3개월 가는 거야. 서진아, 결국 사람 계속 붙들어 놓는 건 다른 특별한 게 있어야 해.”

하지만 늘 불안했다. 서진은 특별한 게 없다. 각자에게 필요한 건 다르다. 지환에게 필요한 건 뭘까. 서진이 그걸 채울 수 있을까. 서진은 지환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지만, 그 방법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다들 어떤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진은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대로, 그에 걸맞은 존재가 되면 됐다. 하지만, 그 형식이 없는 사람의 곁에 있고 싶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결혼은 또 다른 거란다. 나이 차서 적당한 사람이랑 결혼하면, 그때는 안정적으로 살 수 있어. 그런데 지금 받을 필요도 없는 상처를 받을 필요는 없잖니. 아빠가 우리 서진이가 늘 나쁜 일 없이 잘 지냈으면 해서 하는 말인 거 알지?”

서진은 제 아버지를 바라봤다.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요가 더 클 뿐이다. 필요에서 비롯됐든 아니든 사랑은 사랑이다. 서진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을 뿐이지.

“네.”

그럼에도 서진은 얌전히 답했다.

* * *

어머니는 학회로 출장을 갔다고 하니 굳이 아침까지 있을 필요는 없었지만, 집으로 다시 갈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쯤 문득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환이었다.

“형.”

[어. 아직 안 자지?]

“네. 저 아버지랑 잠깐 얘기하고 들어왔어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지금껏 피해 다닌 게 무색하게도 평범한 대화였고 크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마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어서 그랬겠지만.

[너무 늦었다고 혼났어?]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서진은 옅게 웃었다.

“아니요. 저희 통금도 없는데.”

확실히, 지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충분히 서진을 신경 썼다. 원래 세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잘 알고 있으니, 지환 딴에는 서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럼 지금 나올 수 있어?]

“네?”

문득 나온 말에 되묻자 지환이 말했다.

[잠깐만 나와 봐.]

서진은 설마 하며 창문을 확인했다. 집 앞에 지환의 차가 있었다.

“지금 집 앞이에요?”

다급하게 바깥으로 나가며 묻자 지환이 답했다.

[응. 아직 오늘 안 지났잖아.]

그 말을 들으며 문을 열자 지환이 서진을 바라보며 웃었다.

“안녕.”

그 새삼스러운 인사에 서진은 조금쯤 멍하니 지환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지환이 슬쩍 주위를 살피더니, 서진의 손을 잡고 제 차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잖아. 그리고 지혜 진짜 괜찮아. 걔 모의고사 뭐 틀려서 운 것도 아니고 그냥 성적표 나온 거 자체가 불안해서 울었던 거래. 성적 자체는 평소보다 좋던데.”

지환은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애초에 걔 나 부른 것도 아니야. 그냥 울면서 엄마 보고 싶고 아빠 보고 싶고 오빠 보고 싶다고 그런 거나 얘기한 걸 정연우가 눈치 없이 진짜 부른 거지. 나보고 왜 왔냐더라.”

이어 운전석으로 들어온 지환이 그대로 서진의 표정을 살폈다.

“여기서 계속 얘기하기는 좀 그러니까, 조금만 옮길게.”

“네.”

서진이 근처 공터로 운전하는 지환의 옆모습을 바라보자 지환이 웃으며 살짝 손을 뻗어 서진의 뺨을 짧게 매만졌다.

“그래도 미안해. 내가 약속 못 지켜서 섭섭했어?”

차를 대강 세워 놓고 나온 물음에 서진은 그저 답했다.

“아니에요. 제가 가도 된다고 했잖아요.”

거기다 섭섭할 일도 아니었다. 지환은 서진이 바라는 것보다도 더 성실히 서진과의 관계에 임해 주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분명 서진이 먼저 지혜에게 가도 괜찮다고 했고 저 역시 집에 가겠다고 했는데도, 지환은 굳이 서진을 찾아왔다. 서진은 이걸로 만족했다.

“그건 그렇지. 그래도 한 번은 잡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허탈하게 떨어진 그 목소리에 서진이 지환의 표정을 살피려 했는데, 그보다 먼저 지환의 질문이 이어졌다.

“너 내일 아침에 없으면 부모님이 놀라시겠지?”

“아버지만 있으세요. 그리고 없어도 뭐, 그러려니 할걸요.”

애초에 부모님은 서진이 본인들의 뜻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그 외에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 말에 지환이 서진을 빤히 바라보며 서진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고작 손인데도, 지환이 만지는 손 끄트머리부터 열기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정작 지환은 별생각이 없어 보였는데도.

“그럼 너 진짜 안 돌아갈래? 나도 오늘은 계속 너랑 있고 싶은데. 생일이잖아.”

그 말과 함께 지환이 부드럽게 서진의 뺨을 감싸더니, 살짝 코끝을 비비고는 그대로 옅게 입을 맞췄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내 생일이니까, 소원 들어줘.”

어떻게 들어도 대놓고 꼬시고 있다는 걸 알았는데, 서진은 당연하게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아요?”

그 물음에 지환은 부드럽게 서진의 목덜미를 쓸며 그 입술을 살며시 깨물고 잠깐 빨아 당겼다가 놓았다. 짧게 물기 어린 소리가 울렸다.

“그렇다니까.”

“그럼.”

시선이 다시 마주했다.

“저도 돌아가고 싶어요.”

서진은 그제야 자신 역시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애초에 잠깐이라도 떨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서진은 지환을 독점하고 싶다. 하지만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잘 하지도 못하면서 거리감을 조절했을 뿐이다.

“그래.”

지환은 그 말과 함께 웃으며 짧게 서진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가, 서진의 양 뺨을 잡고 말했다.

“서진아, 내가 지혜를 많이 아끼기는 해. 아무래도 나랑 나이 차이도 꽤 나고 내가 거의 돌보기도 했고.”

그 얼굴에서 점점 웃음기가 걷히며 그 시선에 서진만이 담겼다.

“그렇기는 한데, 그렇다고 내가 지혜 때문에 너를 섭섭하게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잖아. 동생은 동생이고 애인은 애인인데. 그러니까 너도 괜히 양보하거나 그럴 필요 없어. 오늘도, 나는 네가 가지 말라고 했으면 안 갔을 거야. 그게 당연한 거니까.”

지환은 그대로 서진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다음에는 꼭 가지 말라고 말해 줘.”

그 진지하기만 한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을 끌어당겨 깊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얼떨떨해 보이는 지환의 입술을 열고 조금쯤 다급히 헤집은 서진이 그대로 말했다.

“얼른 가요.”

* * *

서진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지환을 침실 쪽으로 밀어 넣으며 입을 맞췄다. 침실로 들어가며 지환의 티를 벗겨내자 지환이 곧이어 침대에 앉으며 서진을 바라봤다.

“이리 와.”

그 말에 바로 지환을 끌어안자 지환이 서진의 뒷머리에 손을 넣고 끌어당기며 다시 입술을 맞붙였다. 깊게 닿은 사이로 지환이 서진의 입 안쪽을 살짝 건드렸다가, 혀뿌리를 짧게 간질였다. 서진은 제 허리에 닿은 지환의 손을 느끼며 스스로 티를 벗었다.

잠깐 떨어졌던 입술을 다시 겹치며 지환의 바지에 손을 가져다 대자 지환이 서진의 등을 넓게 쓸었다. 서진이 그대로 지환의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겨내자 곧이어 지환이 서진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형.”

“어.”

바지와 속옷을 벗고 다시 지환과 맨몸으로 맞닿자 지환이 서진의 얼굴을 천천히 제 손가락으로 덧그리듯 매만졌다. 서진은 지환의 장골쯤에 손을 대고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더 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그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옮기며 반쯤 발기한 지환의 성기를 바라보자 지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넣는 거?”

서진은 다시 지환의 얼굴을 바라봤다.

“네.”

서진의 콧대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지환의 손이 문득 멈췄다.

“그래.”

조금쯤 고민을 하다가 나온 그 목소리에 서진은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서진은 이제 정말, 어떤 식이든 상관없었다. 지환이 다른 남자랑 할 때 어떤 포지션이었는지는 알고 있다. 그냥 그게 편해서든,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든, 그저 지환이 좋은 대로면 됐다. 서진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환에게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고작 이런 거로 묶여 주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묶어 두고 싶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러니까, 내가 이거를 생각해 봤거든.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생각했어.”

“네.”

우선 답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서진은 지환에게 크게 바라는 게 없었다. 조금 더 닿을 수만 있다면 뭐든 괜찮았다.

“너는 어느 쪽이든 괜찮기는 한데, 조금 더 원하는 쪽이 있기는 한 거지?”

“형이 좋은 쪽이 좋아요.”

단번에 나간 목소리에 지환이 잠시 서진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좋은 쪽이라기보다는.”

지환은 다시 서진을 바라봤다.

“나는 네가 편하게 여겨야 할 것 같아.”

상황에 맞지 않게 꽤나 결연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해 봤는데. 어쨌거나 나는 너를 좋아해서 사귀는 거니까, 여기까지 와서 이쪽은 안 되겠고 이쪽은 괜찮다거나, 그러는 게 좀 비겁하다고 생각하거든.”

지환은 그대로 서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처음인데도 나를 믿고 맡겨 주는 거니까, 그럼 나도 그만큼은 생각해야 하는 거고.”

지환을 만나기 전까지의 서진은 제 성 경험 유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 아니었는데, 지금만큼은 자신에게 경험이 없는 게 나름대로 좋은 요소인 것 같았다. 우선 지환이 그걸 정말 많이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뭐냐면.”

지환은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가, 정말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위에서 할래?”

기껏해야 자기가 잘하겠다는 말이나 나올 줄 알았는데, 이런 말은 예상치 못했다. 서진은 가만히 지환을 바라봤다. 지금껏 그런 건 생각도 해 보지 않았을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일부러 생각해 보라고 했다. 지환이 평생 하지 않아도 괜찮았을 고민을 서진 때문에 해 봤으면 해서.

서진은 정말, 지환이 진지하게 서진을 생각하는 것 정도로 충분히 만족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환은 그걸 넘어서 기대하지도 않은 답을 내렸다. 지환이 생각하기에는 어색하고 어렵고 힘들, 그런 결정을 내릴 만큼 서진이 지환에게 의미가 있는 거겠지. 지환은 그렇게나 서진을 진지하게 생각해 주고 있었다.

“형.”

생각지도 못한 답에 꼭 무언가를 증명받기라도 한 것 같이 벅찼다. 서진이 그대로 지환에게 입을 맞추자 지환이 고개를 틀었다.

“야, 잠깐, 잠깐만.”

설마 역시 그건 좀 아니라고 하려나 싶어 지환을 바라보는데, 지환은 조금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서진을 바라봤다.

“이거 약간, 좀, 한번은 물어봐 줘야 되는 거 아니야? 정말 괜찮냐거나, 뭐 그런 거. 너무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목소리에 서진은 웃으려고 했지만, 차마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환이 그만큼이나 생각해 줬다는 게 뜻밖이었고, 그만큼이나 심장이 조여 왔다. 그러니까, 서진은 여전히 지환에게 유일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지환은 서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형이 그만큼 생각해 줬다는 게 너무 좋아요.”

꾸밀 것 없이 솔직한 말에 지환이 서진을 바라보며 살짝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처음에 내가 너무 쓰레기 같았던 거 반성하면서 나도 많이 생각했어.”

정말 많이 생각하고 노력했구나. 서진을 위해서. 서진은 정말 그걸로 충분했다. 가만히 지환을 바라보고 있자 지환이 곧 눈을 감으며 서진을 끌어당겼다. 조금 전까지와 같은 다급한 입맞춤이 아니라, 느리고 조심스러운 접촉에 서진은 쿵쾅거리는 제 심장 소리가 지환에게 들릴지를 걱정하면서도 그대로 지환을 껴안았다.

“좋아해요.”

어쩌면 잠자리에서 하기에는 어수룩한 말일까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온 그대로의 벅참에, 지환이 살짝 고개를 틀어 서진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나도 좋아해.”

서진은 그대로 지환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반사적으로 감은 지환의 눈꺼풀에 숨겨져 있던 점 위로 입을 맞추자 입술 밑으로 속눈썹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정말 이대로 해도 돼요?”

이번에는 지환의 목선 위에 있는 점에 입을 맞추며 묻자 지환이 서진의 머리칼을 살살 흐트러뜨렸다.

“어.”

서진은 그대로 지환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단단한 어깨를 살짝 깨물고 그 끝의 도드라진 뼈를 핥자 지환이 조금 긴장한 듯 말했다.

“서진아,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나도 처음이거든. 그래서 나도 좀 어색할 수도 있고.”

가만히 그 가슴팍에 손을 대자 뛰는 심장이 그대로 느껴졌다. 서진을 향해 뛰는 게.

“네.”

열기가 차오른 시선을 숨기지 못하며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잠깐 서진의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마주하며 웃었다. 이윽고 뻗은 그 손이 서진의 뺨을 살짝 쓸었다.

“그래, 그렇다고. 참고해.”

“그럴게요.”

제게 닿은 손에 홀린 듯 고개를 돌려 그 손가락을 살짝 깨물고 핥자 입안에서 손가락이 움찔했다.

“왜요?”

어째 지환이 서진을 보고 있는 표정이 미묘해서 문득 정신을 차리고 불안하게 묻자 지환이 제 손가락으로 서진의 입술을 문질렀다.

“너 진짜 후회 안 하겠어? 충분히 준비된 거 맞아?”

“형, 우리 이미 섹스는 했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그거랑은 좀 다르지 아무래도.”

“그건 저도 아는데.”

서진은 살짝 지환의 시선을 피했다.

“형이면, 형이랑은 좋아요.”

정말 당연한 말을 한 건데도, 왜인지 귓가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지환에게서는 들리는 말이 없어, 서진은 다시 지환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좀 이건 죄책감이,”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서진은 그 말을 끊어내며 물었다.

“이제 와서?”

이미 할 거 다 한 이제 와서?

“이제라도가 맞지 않을까.”

드물게 말을 끄는 그 목소리에 서진은 어쩌면 숨기지도 못한 열망을 담아, 그렇게 문득 말했다.

“책임지면.”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은 걸까. 지환은 서진의 생각보다도 더 서진을 진지하게 여겨 주는 것 같았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괜찮지 않더라도, 그냥 해 본 말이었다고 넘길 수는 있으니까.

“형이 저 책임져 주면 되잖아요.”

“그거야 당연한데.”

고민도 거치지 않았는지 나오는 목소리가 빠르고 태연하기만 했다. 그냥 하는 말일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진심일까? 부단히도 지환의 눈치를 살피자 지환이 서진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그럴게.”

지환은 그대로 서진을 끌어당기며 입을 맞췄다.

“그 말 들으니까 좋다.”

나직하게 나온 목소리와 은근히 서진의 등허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순식간에 다시 열기가 차올랐다. 방금까지 죄책감 같은 걸 얘기한 주제에, 서진을 만지는 손은 의도가 너무 명백했다. 서진이 허리를 내려 성기를 맞닿게 하자 지환의 허리가 살짝 움찔했다.

서진은 그대로 지환의 턱을 빨았다가, 입술을 내려 그 쇄골을 문질렀다. 단단한 뼈가 입술을 타고 느껴졌다. 단순히 그 감각 때문이라기보다는, 서진은 제게 닿은 게 지환이라는 점에 흥분했다. 늘 그랬듯이.

손으로는 그 허리를 쓸며 가슴팍으로 입술을 내리자 지환이 서진의 머리를 옅게 흐트러뜨렸다. 서진은 자신이 지환에게 닿은 게 좋았지만, 지환이 직접 서진에게 닿아 주는 건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기묘한 충족감을 가져다줬다. 지환이 원해서, 스스로 닿아 오는 게.

가슴은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천천히 몸을 내리며 그 명치쯤을 핥자 닿은 살갗이 얼핏 떨렸다. 서진은 지환의 허리를 손으로 잡은 채로 그 복근에 입을 맞췄다. 갈라진 윤곽을 따라 입술을 내리자 문득 지환의 몸이 과하게 굳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슬쩍 시선을 올리자 지환은 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싫었, 싫은 걸까? 제대로 발기해 있다는 거야 알지만, 이건 자극에 의한 신체적 반응일 뿐이다. 감정적으로는 거북했을 수도 있다. 지금껏 거의 매일 같이 몸을 맞대기는 했지만, 오늘은 조금 더 해 보자고 한참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역시 그건 아니었을까.

“형.”

“어.”

얼굴을 가리고 있는 탓에 억눌린 목소리에 서진이 조심스레 그 손을 잡아 내리자 온통 새빨개진 지환의 얼굴이 드러났다. 서진이 할 말을 잃고 그저 그 얼굴을 바라보자, 지환이 작게 말했다.

“좀 쪽팔린 것 같아.”

그 말에 왜인지 서진의 얼굴 역시 달아올랐다. 괜히 시선을 맞추지 못하며 가만히 입을 다물자 서진의 턱에 지환의 손이 닿았다.

“너는 왜.”

몸이 닿은 건 꽤 잦았다. 그런데도 늘 긴장이 됐다. 사실 지환과 닿을 때면 항상 긴장했으니 새삼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몰라요.”

“우리 서진이, 몰라요?”

여전히 얼굴이 붉은 주제에 또 놀릴 구석은 잘 찾았다.

“하지 마요. 형도 똑같으면서.”

기어들어 가는 서진의 목소리와는 달리 지환은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이 당당하게 서진을 바라봤다.

“이건 당연한 거야. 난 너랑 할 때마다 엄청 긴장했어.”

그 안에 담긴 말과는 달리 내뱉은 목소리는 기세가 좋기만 했다. 서진은 그래서 지환이 좋았다. 숨길 만도 한데, 여유로운 척할 수도 있을 텐데, 지환은 서진에게 제 감정을 솔직히 드러냈다. 그래서 지환의 곁에 있으면 서진도 조금쯤은, 아주 조금쯤은 그에 말려들어 조금 더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이 느껴졌다.

“저도 그래요.”

“응.”

다시 입을 맞추고 있자니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콘돔은 언제 뜯어야 하지. 지환과 만나며 이제 콘돔 뜯는 건 꽤 익숙해졌는데, 지금만큼은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었다.

지금? 아니면, 조금 나중에? 서진은 확실히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컸다. 그렇다고 미리 경험해 봤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건 전혀 아니지만.

서진은 역시 제 처음이 지환이라 좋았다. 이왕이면 앞으로도 계속 그랬으면 했고. 그럼 지금 잘해야 했다. 서진은 입을 맞추는 그대로 손을 내려 지환의 가슴팍부터 복근까지 쭉 쓸어내렸다가, 그 옆구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바깥 허벅지를 쓸어내리자 지환이 무릎을 살짝 세우더니 무릎으로 서진의 다리를 살짝 쓸었다. 이게 경험의 차이라는 걸까.

서진은 애써 신음을 억누르며 손을 옮겨 허벅지 안쪽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 성기를 손에 담은 서진은 손바닥으로 넓게 성기를 쓸어 올렸다. 서진은 그대로 콘돔을 뜯어 지환의 성기에 씌우고는 몸을 내려 그 배에 한 번 입을 맞추고 제 손가락에도 콘돔을 씌운 후 지환의 성기와 그 아래에 젤을 펴 발랐다. 서진은 제 몸으로 지환의 허벅지를 벌리며 슬쩍 지환의 표정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어색하기는 한지 시선을 가만히 두지를 못했다.

“할게요.”

“어, 응.”

긴장이 가득한 목소리에 서진은 이미 충분히 긴장하고 있었음에도 더 긴장되는 것 같았다. 서진은 이미 충분히 질척거리는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젤을 손에 더 부은 후 그 밑을 조심스럽게 더듬다가, 이내 천천히 손가락 하나를 들여놨다. 고작 손가락 하나였는데도 내벽이 달라붙듯이 조여 왔다. 이거, 안 될 것 같은데.

우선 조심스럽게 그 안을 눌러 보면서도 회의감이 가득했다. 이렇게 좁은데 어떻게 여기에 성기를 넣지. 그럴 수 있다는 거야 안다. 그거야 아는데, 그건 사실 자극적으로 꾸며낸 포르노 업계의 음모인 게 아닌가.

“괜찮아요?”

낯선 이물감에 몸을 굳히고 있던 지환의 배를 손으로 토닥이듯 쓸어내리며 걱정스레 묻자 지환이 모호하기만 한 목소리를 냈다.

“아, 어, 음, 아마?”

표정도 미묘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것 같아요?”

전립선 같은 걸 찾아야 한다는데,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손가락을 하나 더 넣어 봐야 할까? 그런데 하나로도 이렇게 빠듯한데 하나를 더 넣어도 괜찮나?

“그냥 안에 뭐가 있구나 싶은데.”

늘 그렇듯 적나라한 답이었다.

“내시경 하면 이럴까 싶기도 하고.”

지환의 느낌을 물은 건 맞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듣고 싶은 답은 아니었다. 서진은 지환의 배에 입을 맞추며 손가락 하나를 더 들여놨다. 겨우 조금 풀어진 몸이 다시 긴장으로 굳었다. 서진은 지환의 성기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지환의 긴장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아파요?”

“아니. 아프지는 않아.”

아무래도 젤 덕분에 마찰은 없던 모양인데, 그래도 이물감은 있는 모양인지 지환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지환이 더 흥분하면, 조금 더 편하지 않을까.

서진은 손가락을 조금 더 깊이 들여놓으며 슬쩍 지환의 눈치를 살폈다. 지환은 서진이 제 성기를 입에 담는 걸 꽤나 싫어했다. 그래도 그러면 몸의 긴장을 푸는 게 조금 더 쉬울 것 같은데, 지환은 여전히 싫어할까.

서진은 손가락으로 내벽을 부드럽게 더듬으며 다시 시선을 내려 지환의 성기를 바라봤다. 서진의 손안에 잡힌 성기는 크기뿐만 아니라 모양도 곧게 잘 잡혀 있었다. 꽤, 예쁘지 않나. 서진은 다시 한번 지환의 눈치를 살폈다가, 살짝 그 성기를 핥아봤다.

“야, 안 돼.”

아니나 다를까 단번에 나온 목소리에 서진은 우선 다시 지환의 성기를 손으로 훑으며 물었다.

“왜요?”

아무리 생각해도 기준이 이상했다. 다른 건 다 돼도 구강성교만 안 되는 건 도대체 어떻게 된 기준인지.

“일 년 뒤에 해.”

“기준이 뭐예요?”

“나도 몰라. 그냥 일 년 정도 뒤는 괜찮을, 아,”

문득 그 입에서 신음이 터지자 지환과 서진 둘 다 얼떨떨하게 굳어 서로를 바라보다가, 서진은 방금 제가 건드린 내벽 한구석을 꾹 누르듯 긁었다.

“야, 그거, 좀.”

살짝 떨리듯 나온 목소리에 서진은 어느덧 전보다 부드러워진 내벽을 눈치채며 조심스럽게 세 개째의 손가락을 들여놨다. 사람 몸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성욕을 느끼게 하는 게 가능하구나. 물론, 그게 지환의 몸이기에 그렇겠지만.

손가락으로 그 안을 넓히듯 둥글게 매만지자 내벽이 살짝 움찔거렸다.

“이쯤이면, 괜찮지 않을까.”

단어 사이가 뚝뚝 끊기듯 나온 목소리에 서진은 손가락으로 그 안을 추삽질 하듯 움직였다.

“안 될 것 같아요.”

처음보다 안이 부드럽게 풀린 건 느끼고 있었지만, 아직 불충분했다. 서진은 어떤 식으로든 지환을 다치게 할 생각이 없다.

“그냥 대충,”

“그러다 다치면 병원 갈 수 있겠어요?”

지환의 말을 끊고 나온 서진의 물음에 지환은 단호히 답했다.

“아니.”

예상 그대로의 답에 서진은 그 내벽을 더듬으며 지환의 성기를 천천히 흔들었다. 손끝으로 살짝 누를 때마다 내벽이 움찔거리듯 손가락을 조였다. 손가락 하나도 버겁던 곳에 이제 손가락 세 개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정말 성기가 들어갈 수 있는 걸까.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좁은 것 같은데. 서진은 조심스레, 지환이 신음을 흘렸던 주위를 꾹 누르며 비볐다.

“으, 좀, 이상해.”

그와 함께 나온 지환의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의 표정을 살폈다. 귓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싫어요?”

지환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아픈 건 아니죠?”

성기를 쥔 손으로 귀두를 긁어내리며 묻자 지환의 허벅지가 떨렸다.

“그럭저럭, 괜찮아.”

애써 떨어진 그 목소리에 서진은 손가락 하나를 더 늘렸다. 안 그래도 조이던 접합부가 더 빠듯해졌다. 내벽 한 부분만 짓누르듯 비비자 손에 쥔 성기가 더 단단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쁘지는 않은 거겠지.

서진은 지환이 긴장을 풀도록 몸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며 기다리다가, 어느 정도 적응한 것 같아 보였을 때 다시 손을 움직였다. 부드러운 안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며 조여 왔다.

지환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는데, 지환은 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서진은 그 손을 내리는 대신, 손가락을 빼어내고는 제 성기에 콘돔을 씌우고 그 아래에 느릿하게 성기를 문질렀다.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게 그대로 살갗을 타고 느껴졌다.

“괜찮아요?”

그 물음에 지환이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그대로 뻗어 서진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서진은 그대로 혀를 섞으며, 그 허리를 손으로 잡아 지탱한 후 천천히 성기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 그, 만….”

뚝뚝 끊기는 목소리에 반쯤 성기를 밀어 넣은 채 가까스로 멈추자 지환이 입술을 떼어내고는 숨을 고르다가, 이내 눈가를 찌푸리고는 서진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참기가 쉬운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참아야 했다. 서진과 닿은 건 지환이다. 멋대로 굴면 안 된다.

“다, 안 들어온 거야?”

“네.”

그 답에 지환이 서진을 바라보며 가만히 숨을 골랐다. 몸에 힘을 빼려고 하는 모양인지, 숨을 쉴 때마다 내벽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좀 더 들어와도, 괜찮나?”

그 말에 서진 역시 얼핏 인상을 찌푸리며 조금 허리를 뒤로 뺐다가, 입을 맞추며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저런 말을 하면 서진에게 도대체 어떻게 참으라는 건지.

더 밀어 넣을 때마다 접합부가 빠듯하게 당겨오는 게 느껴지며 좁은 내벽이 성기를 꽉 감쌌다. 서진은 입술을 겹친 채로 그 입안을 조절 없이 헤집다가, 지환이 고개를 틀자 그제야 놓아줬다.

“형.”

서진이 지환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을 움직여 그 성기를 손에 쥐고 옆면을 긁어내리듯 매만지자 지환에게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움직이지, 마…”

서진은 지환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며 그저 그 몸을 토닥였다.

“이제,”

조금쯤 억눌린 지환의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의 목선에 입술을 묻고 물었다.

“움직여도, 괜찮을 것 같아요?”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들었다. 지환이 숨을 내쉴 때마다 내벽이 움찔거리는 것도, 서진의 손안에서 착실히 그 성기가 꺼떡이는 것도, 맞닿은 몸의 뜨거운 온기도, 힘겨운 기색을 보이면서도 피하지는 않는 시선도, 모든 게 벅찼다.

“응.”

그 말에 서진은 다시 지환에게 입을 맞추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서진은 지환의 성기를 쥔 손을 움직이며, 그 선단을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비볐다. 처음부터 삽입으로 느끼는 건 힘든 일이라고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환은 성기로 받는 자극이 익숙할 테니. 거기다 꼭 그 이유가 아니어도 우선 서진은 지환의 어느 부분이든 계속 만지고 싶었다.

몸이 닿았다고 마음까지 닿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환과 서진이 닿아 있었다. 그 사실은 머리끝까지 걷잡을 수 없는 열기가 잠식하도록 하는 데 충분했다.

“아, 읏….”

귀두 밑 부분을 엄지로 문지르며 성기로는 내벽을 짓누르듯 움직이자 지환의 허리가 얼핏 들어 올려지며 문득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픈 건, 하아… 아니죠.”

그 턱을 아프지 않게 물며 묻자 지환이 다시 입을 맞췄다.

“입.”

기꺼이 응하자 입안에서 드문드문 누구의 것인지 구별할 수 없는 신음이 흘렀다. 당연하게도, 여전히 익숙하지는 않은지 성기를 박아 넣을 때마다 맞닿은 허벅지가 떨렸다. 지환의 성기를 흔들고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젤 때문인지 질척한 소리가 울렸다.

움직임에 입술이 종종 떨어졌고 맞닿은 살은 뜨거웠으며 손가락도 힘겹게 받아들이던 좁은 내벽이 지금은 서진의 성기를 감싸고 있었다. 그 모든 자극이 과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과한 건, 지환이었다.

지환은 서진으로도 흥분하고 있었다. 물론 서진이 부족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지환이 갑작스레 역시 이건 안 되겠다며 거부하는 일은 없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다른 모든 것도 좋지만, 우선 지환이 서진과 닿아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좋았다.

문득 지환의 손이 서진의 뺨을 감쌌다. 마주 닿은 시선에 열기 때문인지 숨이 막혔다. 서진은 어쩔 수 없이, 그리고 당연하게도, 더없이 흥분했지만, 어쩐지 울고 싶기도 했다. 지환은 살짝 찡그린 표정 그대로 서진의 눈가를 조심스레 쓸었다.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은 그 손가락은 부드럽기만 했다. 정말 서진을 아끼기라도 한다는 듯이.

지환은 정말 서진을 아낄까. 직접 말했던 것처럼, 아끼기만 해 주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을까.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해 줄까.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지. 어떻게 이렇게 바라고 바라기만, 이렇게까지 바라도록 만들 수 있지.

“으….”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자 터져 나온 그 목소리에 서진은 다시 입을 맞췄다. 맞닿은 혀를 빨며 성기를 흔드는 손을 빠르게 하자 내벽이 조여들었다. 여전히 좁기만 한 그 안으로 움직임을 빠르게 하자 점점 맞닿은 몸이 흔들리며 온기가 더해졌다.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로 숨을 몰아쉬는 지환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눈가와 귓가가 평소보다 붉게 상기된 채로 서진의 밑에서, 서진 때문에 흔들리는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지환은 서진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서진이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는 그 몸을 바라보다가, 서진은 지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몸을 깊게 밀어 넣었다. 동시에 손으로 귀두 밑을 비비며 흔들자 지환이 다급히 숨을 들이켜는 게 맞닿은 몸 사이로 느껴졌다.

그대로 내벽을 긁듯 깊게 박아 넣자 곧이어 갑작스레 내벽이 조여지며 지환이 사정하는 게 느껴졌다. 그걸 깨닫자마자 이미 한계인지 오래였지만, 지환과 속도를 맞추고 싶어 가까스로 참고 있던 서진 역시 지환에게 몸을 묻은 채 사정했다.

잠시 그대로 지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있던 서진은, 지환이 어느덧 제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는 걸 느끼며 그제야 몸을 물려 지환의 안에서 빠져나오고는 제 콘돔을 벗어 버리고는 지환의 것까지 처리했다.

서진은 여태 여운에 열기가 남은 시선을 숨기지도 못하면서도, 지환을 바라봤다. 물론 서진이야 당연히 좋았지만, 서진이 얼마나 좋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환은 괜찮았을까.

지환은 그대로 숨을 고르다가, 슬쩍 서진을 봤다. 그러고는 어렴풋이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서진과 시선을 맞추며 손을 뻗어 서진을 끌어당겨 눕게 했다. 그 옆에 누워서도 지환의 표정을 살피자 지환이 그대로 서진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너무 빤히 보지 마.”

지환은 이어 서진의 머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네.”

서진은 그제야 긴장을 풀며 제게 맞닿은 몸을 끌어안았다. 붉어진 목덜미를 부드럽게 손으로 매만지며, 벅차기만 한 마음으로, 앞으로도 이런 나날이 계속될 수 있기만을 바랐다.

* * *

이미 나갈 준비를 다 마치고 양치질을 하던 서진과는 달리, 욕실로 들어오는 지환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서진은 칫솔에 치약을 짜 비몽사몽한 지환에게 건네줬다. 지환은 여전히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서진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칫솔을 건네받아 양치질을 시작했다.

지환은 생일에 잠깐이라도 떨어져 있던 게 계속 미안했는지 그 이후로는 종종 자고 가기도 했다. 지환은 아침에 유독 약했기에, 그럴 때면 잠에 덜 깬 지환을 볼 수 있었다.

서진은 저 역시 양치질을 하며, 여전히 눈을 감고 양치질하는 지환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 속에는 서진과 지환이 나란히 양치질하는 모습이 비쳤다. 이거 꼭, 동거라도 하는 것 같지 않나. 그 생각과 함께 갑작스레 귓가가 붉어지는 게 거울로도 보여 서진은 머쓱하게 제 귓가를 매만졌다.

지환과 함께 있으면 별것도 아닌 거로 계속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서진이 거품을 뱉고 입을 헹구자 느릿느릿 이를 닦던 지환이 입을 헹구느라 숙인 서진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손장난을 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서진이 양치질도 깨끗하게 잘하고 기특하네.”

느릿느릿한 그 목소리에 서진이 제게 닿아 있던 손을 입가로 가져와 살짝 깨물자 지환은 선선히 서진에게 손을 맡긴 채로 입을 헹궜다.

서진은 지환이 고개를 들자 그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젖은 입술 사이로 같은 치약 향이 느껴졌다. 지환의 머리에서는 서진의 샴푸 향이 나고, 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봤자 모든 건 하루면 씻겨 내려가겠지만, 계속 덧씌운다면 조금쯤 자취가 남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짧게 입을 맞춘 지환은 그대로 서진을 따라 욕실을 나서며 서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뒤에서 끌어안았다. 지환은 서진에게 닿을 때 충분히 세심히 서진을 배려하기는 했지만, 늘 자연스러웠다. 서진이 지환에게 닿을 때 항상 어색하게 구는 걸 생각해 보면, 지환이 서진을 너무 답답하게 여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서진이 그대로 지환과 함께 소파에 앉으며 그 손을 잡자 지환이 서진과 깍지를 끼며 빤히 바라봤다.

“왜?”

막상 바라보고 있던 것도 지환이면서, 서진이 묻고 싶은 걸 대신 말한 그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웃었다.

“좋아서요.”

그 답에도 지환은 얼마간 가만히 서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저 역시 웃었다. 요즘 들어 지환은 종종 그럴 때가 있었다. 서진이 뭔가를 잘못한 걸까. 이상한 말을 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너 생일은 어쩔 거야?”

눈치를 살피고 있자 문득 나온 물음에 서진은 잠시 지환의 말뜻을 생각했다. 바로 며칠 전이 지환의 생일이었으니 이제 곧 서진의 생일이기는 하겠지만, 생일을 신경 쓰고 살아온 적이 없어서 눈치채는 게 늦었다.

“아직 한참 남았는데요.”

문득 그 말과 함께 지환의 생일을 말할 때도 비슷한 대화를 나눴던 게 떠올랐다. 지환 역시 같은 감상이었는지, 꼭 어떤 답을 유도하듯 서진을 바라봤다.

“애인이.”

서진은 그대로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애인이 아직, 약속을 안, 안 잡아 줘서. 모르겠어요.”

이게 아닌데. 왜 말을 더듬었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환이 말할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왜 서진이 말하니 전혀 다를까. 낭패감과 창피함에 차마 시선도 마주하지 못했는데, 어째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불안하게 다시 시선을 올리자 지환이 제 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살짝 떨고 있었다. 그 모습에 빠르게 떨떠름해졌다.

“그만 해요.”

여전히 창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떨떠름함이 더 커 애써 말하자 지환이 고개를 들며 서진을 바라봤다.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던 모양인지 눈가가 찡그려져 있었다.

“차라리 그냥 웃든가.”

결국 나온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이 웃음을 터뜨리며 잘 정돈된 서진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쓰다듬으며 끌어안았다.

“너는 진짜 이 험한 세상 살기에 너무 귀엽다.”

방금 마구 머리칼을 헤집을 때는 언제고, 지환은 이제 꼭 갓 부화한 병아리를 만지듯 조심스럽게 서진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코끝에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지우지 못하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지환은 그대로 서진의 뺨에 꾹 입술을 누르더니 시간을 확인했다. 그에 저절로 시선이 따라갔다. 어느덧 서진이 수업을 위해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원래 지환과 서진은 수업 시간을 거의 비슷하게 맞췄는데, 지환의 수업은 휴강이라고 했으니 서진만 나가면 됐다.

그렇기는 하지만, 서진은 슬쩍 지환의 입가에 입을 맞췄다. 저번 학기에 잠시간이나마 지환을 피해 다니며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수업 한 번 빼먹는다고 크게 문제 되는 건 없었다. 수업에 가지 않고 이대로 지환과 조금 더 있는 것도 좋겠는데.

조금 더 같이 있자고 하면 어떻게 말할까. 어쩌면 지환도 그러자고 하지 않을까. 슬쩍 그 입술로 입술을 옮기자 지환이 웃으며 그저 한 번 서진의 입술을 짧게 깨물고는 고개를 뒤로 뺐다.

“너 지금 안 가면 지각하지 않아?”

“저 가요?”

서진을 멀뚱히 바라보는 지환의 모습에 서진은 애써 한 번 더 말했다.

“저 갈 거예요.”

그러면서도 일어나지는 않자 지환이 아예 일어나며 서진도 이어 일으켰다.

“우리 서진이 갈 거예요?”

다정한 어투가 좋기는 하면서도, 그 다정함이 꼭 아이를 어르는 것과 비슷해 기분이 모호했다. 분명 서진이 다정하게 대해 달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애 다루듯 대해 달라고는 한 적이 없다. 이건 묘하게 방향이 빗나간 다정함이 아닌가. 그럼에도 지환이 서진을 향해 웃으면 불만 같은 건 모두 녹아내렸다.

결국 서진이 가방을 챙기며 현관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현관까지 따라 나오며 문득 서진의 허리쯤을 살짝 건드렸다.

“다녀와.”

꼭 서진이 돌아오면 지환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듯한 말이었다. 실제로는 둘이 같이 돌아오겠지만, 어쨌든 지환과 서진이 돌아오는 장소가 같다는 게 문득 실감 났다. 서진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도 명확히 정의하지 못한 채로 가만히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정말 서진이 돌아왔을 때 지환이 있었으면 한다면, 오늘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랬으면 한다면, 지환은 어떻게 반응할까. 웃어 주기는 하겠지만, 그 말에 이어 이왕이면 지환이 바깥에도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그 말에는 웃어 주지 않겠지. 서진이 지환을 잘 붙들어 놓을 자신이 없어서 가끔은 차라리 가둬 버리고 싶다고 한다면, 분명 인상을 찌푸리겠고.

“돌아오는 말이 없네.”

말을 끌듯이 나온 느릿한 목소리와 그 여상스러운 웃음에 서진은 결국 웃으며 짧게 입을 맞췄다. 지환의 다정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지환이 서진을 싫어하게 되는 걸 서진이 버틸 리 없다.

“네. 다녀올게요.”

거기다, 지환이 다녀오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어 줬으니까. 서진도 다녀오겠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더더욱 잃을 수 없다.

* * *

서진의 생일이라고 특별히 뭘 하는 건 아니었다. 지환은 뭐 하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지만, 서진은 지환의 생일 때처럼 온종일 같이 있고 싶다고 했다. 서진에게 그 외로 필요한 게 있을 리 없다.

“서진아, 너 오늘 생일이라며?”

지환과 함께 학교에 가고 있는데 문득 들린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수업을 같이 듣는 동기가 보였다.

“응.”

생일을 어떻게 알았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작년에는 동기들에게 축하를 꽤 받았으니 아예 모를 일도 아니기는 했다.

“생일 축하해. 애들 모아서 술이라도 할래?”

그 밝은 목소리에 서진은 제 옆의 지환을 흘깃 바라봤다. 말해도 되겠지.

“고마운데, 오늘은 애인이랑 있기로 해서.”

이번에는 목소리가 꽤나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다. 이번에도 더듬었으면 조금 죽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생일 축하해.”

어차피 서진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거야 비밀도 아니었다. 서진이 제 연애 사실을 말한 건 과 동기 한 사람이었으나, 예상대로 모든 과 사람이 알게 됐다. 제 앞의 동기 역시 서진이 말해 준 적은 없음에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아쉬운 기색은 없었다.

“응. 고마워.”

서진의 말을 끝으로 동기가 원래 함께 있던 친구들에게로 돌아가자 서진은 제 옆에서 함께 걸음을 옮기는 지환을 바라봤다.

“고마워?”

그 평온한 어조와 함께 지환은 서진의 동기를 바라봤다. 서진은 자연스럽게 그 시선을 따랐다. 왜 저 사람을 보지. 서진은 지환의 전 여자친구라고는 하늘밖에 아는 사람이 없어 지환의 취향을 명확히 알지는 못했다. 설마 지환의 취향인 걸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 서진이 옆에 있는데.

“누구야?”

“동기예요.”

조금 시간을 두고 나온 서진의 목소리에 그제야 지환의 시선이 서진에게로 돌아왔다.

“너 잘 웃더라?”

서진은 천천히 그 말뜻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너 너희 과에서 썸 탄 적 있어?”

“아니요.”

거의 반사적으로 말한 서진은 유심히 지환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질투를 해 주는 걸까. 그러니까, 서진의 동기가 지환의 취향이라서가 아니라, 서진이 제 동기와 이야기를 하던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럼 됐어.”

그런데, 이게 끝인가. 왜 질투를 하다 말지. 그럼 됐다는 말로 끝나는 게 정상인가. 원래 다들 그런가. 혹시 말로만 그러는 건가 싶었는데, 지환의 표정은 깔끔하기만 했다. 정말 서진의 말을 믿는 모양이었다. 물론, 당연히 사실이 그렇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추궁해도 괜찮지 않나.

“형은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슬그머니 물어보자 지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서진을 바라봤다.

“절대 없지. 전혀 없어.”

단호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괜히 지환의 후배가 생각났다. 그쪽도 진지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환만 모를 뿐이지 일방향으로 진행된 기류는 꽤 많았을 게 분명했다.

“진짜로?”

“애초에 우리는 눈 맞을 정신이 없어.”

그래 봤자 그 와중에도 이어질 사람은 다 이어졌다. 지환은 복학하고 바로 전 여자친구를 만났으니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거야 알지만, 그럼 군대에 가기 전에는 어땠을까. 지환의 여자 동기들은 졸업한 사람도 있지만, 아직 학교에 있는 사람도 몇 있을 텐데.

“너희는 팀플 많이 하잖아.”

“그런 식으로 따지면 형네 과도 프로젝트 같이하잖아요.”

안 그래도 지환은 프로젝트 때문에 거의 죽으려고 하면서 온갖 욕을 했었다. 그렇게 매일 얼굴을 보다 보면 종종 감정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감정은 생기지.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대 정도는 어떻게 때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그 단호한 답에서는 그 이외의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서진은 잠시간 그저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물었다.

“그럼 그 후배는요?”

“누구?”

“비 올 때 만났던 후배.”

서진도 왜 계속 그 사람을 신경 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신경이 쓰였다. 지환이 다른 여자를 보면 혹시 저런 취향인가 싶었지만, 그 후배는 미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만일 지환이 누군가를 사귀게 된다면 꼭 그런 사람일 것 같았다.

“이다은? 걔는 번호도 없다니까.”

“그래서 연락 안 왔어요? 그날.”

비가 오던 날을 언급하자 지환의 얼굴에 조금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오기는 했더라.”

예상대로의 답이었다.

“근데 답장 안 했어.”

못 믿는 건 아니다. 애초에 지환은 핸드폰에 그 흔한 잠금 하나 걸어 놓지를 않는 사람이고 서진과 사귀게 되면서는 서진이 원한다면 마음대로 핸드폰을 봐도 괜찮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한번 보게 된다면 계속 간섭하고 싶어질 게 뻔해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지환이 그런 거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안다.

“그리고 그런 거로 치면 너도 오늘 생일이라고 축하 연락 많이 왔을 거 아니야.”

그렇게나 대수롭지 않은 연락이기는 했다. 서진이 괜히 속 좁게 굴고 있을 뿐이지 충분히 일상생활에서 나눌 수 있는 연락이라는 것도 안다.

“뭐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서진의 말에 지환이 슬쩍 서진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럼 너는 내가 다른 친구들 만나는 것도 좀 그래? 나도 뭐라고 하는 거 아니고 네가 싫다고 하면 조심하려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말에 어떤 감정을 느낄까. 상대가 자신을 이만큼이나 생각해 주고 있다는 만족감? 상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자괴감?

“그런 건 아니에요.”

실제로도 그렇지는 않았다. 너무 친근해 보이는 건 싫었지만, 지환은 늘 거리 조절을 했다. 선 긋는 것도 확실했고. 그러니 그저 서진 혼자 불안해할 뿐이다. 지환은 의심받을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고 불안할 구석도 없는데.

“그럼 여자애들만 싫은 거야?”

“그것도 아닌데, 현정 누나나 형 친구들은 괜찮아요. 주점에서 봤던 그분도 괜찮은 것 같고.”

“김가연?”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는 했다.

“네.”

확실히 지환이 여자와 있다고 불안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지환이 누구와 있든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건 서진의 고질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충분히 참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의. 하지만 미묘한 거스러미가 있다.

“그런데 그냥, 그 후배분은 조금 그래요. 그분은 안 만났으면 좋겠어요.”

말하면서도 서진은 지환의 기색을 살폈다.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다. 지환은 오해받을 행동은 전혀 하지도 않는데 의심하는 것 같아 보였을까.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만나는 건 싫었다.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았던 거겠지.

“그래. 어차피 안 만나기는 하는데, 그럴게.”

서진은 지환의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에 안심하는 동시에 말했다.

“그래도 제가 형 인간관계에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 만나고 싶으면 어쩔 수 없지만.”

끝이 흐려진 목소리에 지환이 서진의 등을 살짝 토닥이듯 건드렸다.

“안 그런다니까. 그리고 네가 내 인간관계에 왜 뭐라고 못 해. 너랑 나랑 사귀는데.”

그거야 그렇지만, 그러니 더 조심스러웠다. 서진은 모든 게 지환이 처음이라, 일반적으로 사귀는 사이에 간섭할 수 있는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거랑은 또 다른 거잖아요.”

그 말과 함께 경영관에 거의 도착하자 지환이 잠시 걸음을 멈춰 서진을 바라봤다.

“예쁜아, 인생 너무 빡세게 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누가 들을까 걱정되는 호칭을 입에 담은 것치고는, 사용하는 단어가 꽤나 날 것 그대로인 것 치고는, 그 말뜻에 담긴 온기가 따뜻했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래도 돼. 그리고 내가 계속 말했잖아. 내가 해 줬으면 하는 거 있으면 말하라니까.”

더불어 아무렇지 않게 내어진 웃음까지도.

“네.”

서진이 결국 어쩔 수 없이 따라 웃자, 지환이 한번 서진의 머리를 한 번 꾹 누르고는 말했다.

“수업 끝나고 보자.”

서진은 제 수업이 있는 공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지환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왜 감정이라는 건 끝없이 쌓이기만 하는 걸까. 지환과 계속 함께 있으면 감정이 정리될 거라고 생각했다.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잘 정돈될 거라고 생각했다. 편안하고 안정적인 방식으로.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서진의 것은 그저 대중없이 쌓이고 쌓이며 벅차오르기만 했다.

* * *

서진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했다. 보통은 정문과 가까운 경영대로 지환이 서진을 데리러 오는데, 오늘은 서진이 지환에게로 가 볼까 싶었다. 그대로 연락을 하려는데, 수업 중에 이미 지환에게서 연락이 하나 와 있었다.

[나 수업 일찍 끝나서 먼저 가 있을게]

어차피 집에 가면 금방 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라 그 글자를 잠시간 보고 있자 문득 같은 수업을 듣던 동기가 서진을 불렀다.

“서진아, 이거 누가 너한테 전해 주래.”

그 말에 동기를 바라보자 동기가 포스트잇 하나를 서진에게 건넸다.

“누가?”

“남자분이었는데, 키 크고. 요즘 너랑 같이 다니던 분 아니야?”

이미 포스트잇을 받았을 때부터 글씨를 보아 대강 짐작이 가기는 했지만, 역시나 지환인 모양이었다.

“누군지 알겠다. 고마워.”

가볍게 웃으며 말한 서진은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 안에 적힌 글자를 바라봤다. lat과 lng 옆에 각각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래서 이게 뭐지. 서진은 곰곰이 생각하다 결국 검색을 했다. 위도와 경도의 약어라는 걸 알아낸 서진은 참 지환답다는 생각에 헛웃음을 짓고는 지도에 좌표를 검색했다. 학교 근처 꽃집의 이름이 나오자 서진은 바로 지환에게 전화하며 걸음을 옮겼다.

[어.]

“형, 어디예요?”

[너희 집 가는 길인데 쪽지 못 받았어?]

“받았어요. 제가 이거 끝까지 몰랐으면 어쩌려고 했어요?”

[요즘 세상에 그냥 검색만 하면 되는데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의 표정이 어떨지를 상상했다.

[아무튼 나는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너는 거기 들렀다 와.]

“네.”

들뜬 기색을 어쩔 수 없이 숨기지 못한 채 답하자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더 이상 들리는 소리는 없었지만, 서진은 끊긴 전화를 잠시간 그대로 들고 있다가, 문득 억울해졌다. 서진에게는 자기는 이벤트 같은 거 싫어하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 놓고서 막상 자기는 이런 걸 하고 있었다. 물론,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였지만.

* * *

꽃집에 가니 주인이 서진의 이름을 확인하더니 꽃다발 하나를 건넸다. 꽃다발에 카드가 있기에 확인했는데, 또 좌표가 있었다. 이번에는 근처 베이커리였다. 나도 이런 거 할걸. 역시 지환이 하지 말라고 했어도 뭐라도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낭만이 없었다. 지환이 뭘 좋아할지를 모르니까 케이크도 같이 골랐는데.

그래도 우선 베이커리에 가자 케이크 상자를 건네줬다. 이번에는 상자에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와 검색해 보자 서진의 집이었다. 서진은 우선 걸음을 옮기면서도, 제 손안에 들린 케이크와 꽃다발을 바라봤다.

이런 걸 받을 줄은 몰랐는데.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이건 너무, 너무 사귀는 것 같았다. 물론 서진과 지환이 사귀는 사이는 맞았지만, 그걸 넘어서 너무 사귄다는 걸 티 내는 선물이 아닌가 싶었다. 지환은, 이런 것도 하는구나.

서진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숨을 고르게 내쉬려 노력했다. 그래도 어쩐지 점점 귓가가 붉어지는 것 같았다.

* * *

평소대로 걸으려고 했지만, 어째 걸음이 점점 빨라져 평소보다 집까지 오는 게 빨랐는데, 집 앞에서 문득 지환을 발견했다.

“어.”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그새 반가워서 웃었는데, 막상 지환은 당황스러움이 가득 느껴지는 목소리를 내뱉고는 바로 말했다.

“야, 잠깐만.”

서진이 의아하게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5분, 아니다,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고. 1분만 있다가 들어와.”

그 말에 서진이 얼떨떨해하면서도 우선 가만히 있자, 지환이 빠르게 등을 돌려 공동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또 뭘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지환의 말대로 1분을 기다려야 하기는 했지만, 서진은 30초를 겨우 기다렸다. 서진이 그 안으로 들어가며 왜인지 그새 떨리는 손으로 현관을 열자, 바로 폭죽이 터졌다.

“생일 축하해.”

뛰어 들어왔는지 살짝 벅찬 숨 사이로도 활짝 웃는 얼굴에, 서진은 바로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와 꽃다발을 내려놓으며 지환을 끌어안았다.

“나한테는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지환이 자연스럽게 서진을 마주 안았다.

“나도 별거 안 했잖아.”

지환은 그대로 서진의 머리칼을 잠시 토닥이다가, 서진과 마주 보던 시선을 틀어 식탁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에 서진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따라갔다. 음식이 차려진 식탁 위에 초가 켜져 있었다. 진짜 작정했네.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초를 저렇게 놔둬도 돼요?”

“led라 괜찮아.”

그런 것도 있구나.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지환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자 지환이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나는 음식 다 샀어. 만드는 건 도저히 못 하겠더라.”

그 말에 서진은 다시 한번 짧게 지환에게 입을 맞췄다. 지환은 잠깐 잡혀 줬다가, 이내 고개를 틀었다.

“그런데 너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음식 담았던 거 분리 수거하고 오는데 마주쳐서 놀랐네.”

“그냥 놔두지. 제가 하면 되는데.”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이 스쳤다.

“내가 네 생일상 사 온 건데 네가 치우면 그건 좀 그렇지.”

지환이 또 고개를 틀었다.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요.”

어째 계속 피하는 게 아쉬워 다시 한번 입을 맞추며 그 허리를 매만지자 지환이 웃으며 서진의 손을 잡았다.

“먹고 해, 먹고.”

그러면서 서진을 끌어당기자 서진은 순순히 지환을 따라 식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아예 서진의 의자를 직접 빼주기까지 했다. 서진이 어색하게 앉자 지환이 서진의 맞은편으로 가 앉으며 서진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자면 물론 지금 지환이 이만큼 신경을 써 줬다는 게 감동스럽기는 했지만, 당장 닿고 싶기도 하고, 복잡한 기분이었다. 옆으로 붙어서 먹고 싶은데, 그건 좀 불편하겠지. 우선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지환을 빤히 바라보자 지환이 문득 제 핸드폰을 들어 전원을 종료하고 서진에게 보여 줬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지환의 생일에 갑자기 연락이 왔던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 말에도 지환은 이제 핸드폰을 만지지 않겠다는 듯이 식탁 위로 제 핸드폰을 올려놨다.

“좋으면 좋다고 말해.”

“좋기는 해요.”

숨기지 않고 바로 말하자 지환이 웃었다.

“너 뭐 하고 싶은 건 없어? 오늘은 생일이니까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야 되는데.”

“지금처럼 같이 있는 게 좋아요.”

“응. 그건 나도 좋아.”

조금 더 무던히 반응하고 싶었는데, 서진의 시선은 의지와는 달리 내려가기만 했다. 그래도 웃으며 다시 조심스레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은 어느덧 웃음을 지우고 서진을 빤히 바라봤다. 그 모습에 서진의 얼굴에서도 어색하게 웃음기가 걷혔다. 왜, 저렇게 보지?

“서진아, 그냥 하는 말 아니고 너 진짜 너무 귀여운데.”

서진에게로 반찬들을 밀어 주며 하는 그 말이 차라리 장난스러웠으면 좀 나을 텐데, 지환의 표정은 심각하기만 했다.

“무슨, 왜 그런 말, 왜 그래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서진의 목소리에도 지환은 그저 찬찬히 서진을 살폈다. 시선이 닿을 때마다 닿은 부분에 열이 올랐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너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러면 안 돼. 그러다 잡혀간다.”

“누가 저를 잡아가요.”

이제는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하자 지환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충분히 잡아가고 싶어.”

그 진지한 어조에 서진은 조심스레 지환의 표정을 살폈다.

“형은요?”

지환도 조금쯤은, 서진을 가지고 싶을까? 사귄다고 해서 서로를 구속하거나, 소유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걸 안다. 서진도 자신이 지환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환은 어떨까. 조금쯤은 서진을 제 것이라고 생각해 줄까?

“장난하냐. 나는 너 진짜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어.”

하지만 막상 나온 답은 당혹스러웠다.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지. 서진은 저런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저런 관용어가 있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냥 매체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저런 말을 한다고?

서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그저 애매하게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은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많이 먹어.”

“네. 형도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지환은 서진을 어떻게 보고 있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는데, 지환이 웃는 걸 보면 어련히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밥을 다 먹고 케이크를 꺼냈는데, 케이크 위에 생일 축하한다는 글자와 서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주문한 거예요?”

“어.”

서진은 불과 몇 주 전이었던 지환의 생일을 생각했다. 너무 성의가 없어 보였을까.

“한서진 씨 무슨 생각 하세요.”

“이런 건 어떻게 알았어요?”

“애인 생일이라니까 이런 거 해 보라고 하던데. 박혜린이랑 김가연이.”

“저도 내년에는 더 성의 있게 준비할게요.”

그 말에 지환이 서진의 말뜻을 생각하듯 가만히 서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케이크와 서진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봤다.

“서진아, 나는 이거 산 거야. 너는 만들어 줬잖아.”

“케이크는 샀잖아요.”

“그럼 그건 당연히 사야지. 어차피 나는 내년에도 너 먹일 거는 다 사야 돼. 매년 이번에는 요리 배워야지 노력해 봐도 안 되더라고.”

그 말과 함께 지환이 의자를 옮겨 서진의 옆에 붙어 앉은 채로 케이크를 잘라 접시 위에 놓아 줬다.

“우리 예쁜 서진이.”

이제 지환은 아예 서진에게 케이크를 떠먹여 주고 있었다.

“형,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우선 입가로 온 케이크를 먹으면서도 감동과는 별개로 떨떠름하게 말하자 지환이 물었다.

“왜?”

“제가 몇 살인지는 알죠?”

그 물음에 지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가끔, 네가 교복 입던 시절부터 알았다는 게 기억나면 죄책감이 좀 올라오는 게 있기는 하지.”

“그거랑 죄책감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물론, 서진이 고3 때 지환을 처음 만나기는 했다. 그런데 그때 보면 얼마나 봤다고 지금 저런 소리를 하지? 거기다 지환이 여전히 서진을 그때 그 시절의 모습으로 보고 있다고 해도 문제였다.

“그럼 형은 고등학생이랑 섹스해요?”

“미쳤어? 나 진짜 잡혀 들어간다. 그냥 가끔 생각난다고. 가끔.”

지환은 거의 질색하며 말을 이었다.

“고등학생이랑 섹스, 야, 그게 한 문장에 들어갈 수 있는 단어들이냐?”

그러는 본인은 고등학생 때 섹스했으면서. 그래도 확실히 고등학생 때 고등학생과 섹스하는 것과 졸업하고 고등학생과 하는 건 사안이 다르기는 했다.

“그럼 지금은? 대학생이랑 섹스는 한 문장에 들어가도 돼요?”

그 물음에 지환이 슬쩍 손가락으로 서진의 귓불을 살짝 쓸더니, 그대로 목선을 타고 목을 쓸어내렸다.

“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리며 나온 목소리에 서진이 바로 지환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자 지환이 웃으며 서진을 따라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왜 웃어요.”

자기가 그렇게 만졌으면서. 입을 맞추며 그 윗옷을 벗기자 지환이 서진의 옷 안으로 손을 넣어 복근부터 넓게 쓸어 올렸다가, 가슴팍에서 손가락을 세워 쭉 아랫배까지 긁어내렸다. 그러면서 바지 위로 성기를 짚는 그 손에 서진은 바로 지환을 침대에 눕히며 그 바지와 속옷을 벗겨내고 저 역시 윗옷을 벗었다.

“어떻게 잘 접으면 주머니에 들어갈 것 같기도 하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다시 입을 맞추자 지환이 서진의 바지 버클을 풀어냈다. 서진이 저 역시 바지와 속옷을 벗고 지환에게 몸을 맞대자 지환이 서진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더니, 그대로 목덜미를 타고 손을 내렸다. 척추 선을 타고 매만지듯이, 그러면서도 종종 힘을 줘 꾹 누르는 그 손길에 서진은 지환의 목선에 입을 맞췄다.

목선을 타고 내려가 쇄골을 살짝 빨았다가 놓은 서진은 그대로 지환의 성기를 손에 쥐고 손바닥으로 넓게 매만지며 그 가슴팍에 입술을 내렸다. 이번에는, 빨아도 괜찮을까. 서진은 지환의 귀두를 천천히 비비며 가슴팍 가운데에 몇 번 입을 맞추다가, 입술을 옮겨 그 유두를 살짝 핥았다. 그러자 맞닿은 몸이 얼핏 굳었다.

그래도 저번처럼 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서진은 그대로 유두를 입에 담고 빨았다. 이로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깨물자 서진의 뒷머리를 쓰다듬던 지환의 손에 옅게 힘이 들어갔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지환의 표정을 확인하니 지환은 애매한 듯이, 그냥 서진이 하겠다니 놔둔다는 게 분명한 표정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형.”

“어.”

대강 눈치채기로는, 아마 오늘이 서진이 생일이니 그냥 하겠다는 걸 놔두는 모양이었다.

“저 오늘 생일이니까 하고 싶은 거 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이 상황에서 그 말이 나오네.”

서진이 지환의 명치쯤에 입을 맞추자 지환이 서진의 귓바퀴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뭐 하고 싶은데?”

서진은 그대로 입술을 내려 그 옆구리를 핥고 짧게 빨았다가, 복근을 타고 아랫배에 입을 맞췄다. 물론 서진은 지환이면 뭐든 좋지만, 지환도 좋다고 했지만, 그래도 서진은 늘 지환이 더 좋았으면 했다.

“입으로 하는 거, 해 봐도 돼요?”

그 말과 함께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은 어쩐지 할 말을 잃은 듯 서진을 바라봤다. 그렇게 안 좋은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왜 저렇게 보지.

“서진아, 보통 반대 아닐까?”

얼마간의 침묵 끝에 나온 목소리에 서진도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를 냈다.

“그건 좀, 이상하잖아요.”

생일이니 그런 걸 해 달라고 하는 건, 그건 정말 이상했다. 거기다 서진은 자신이 지환에게 하고 싶을 뿐이지, 반대의 경우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왜?”

“그냥, 그건 별로….”

우선 지환이 저런 말을 한 것만으로도 이미 성기가 아플 정도로 부풀었는데, 실제로 시도하게 된다면 닿자마자 싸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런 건 지환이 거북해할 수도 있었다. 말하는 거야 아무렇지 않지만, 실제로 하는 건 또 다른 법이었으니까.

“제가 하고 싶어요.”

서진은 제 손안에서 발기한 지환의 성기를 바라보다가, 다시 지환과 시선을 맞췄다.

“싫어요?”

지환은 왜 싫을까. 정말 서진을 보면 고등학생이랑 하는 것 같은가. 그런데 그러면 그냥 다 안 돼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서진이 많이 못 할 것 같나. 물론, 잘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못하려나. 서진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어차피 그냥 입에 넣고 빠는 거 아닌가.

“싫은, 싫다는 게 아니고.”

지환은 잠시간 가만히 서진을 바라보다가,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가, 이내 결연히 말했다.

“그래.”

지금 상황과 어울리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된다는 소리였다. 서진은 지환의 눈치를 살피며 그 성기에 입을 내리려 했는데, 그보다 먼저 지환이 서진의 머리를 밀어냈다.

“콘돔.”

“아, 네.”

착실히 콘돔을 뜯어 그 성기에 씌우고 손으로 문지르자 맨살과는 다른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방금까지는 뭐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못하겠나 싶은 생각이었는데, 고작 콘돔을 뜯었던 그 시간이 뭐라고 갑작스럽게 긴장이 됐다. 그렇게까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서진은 우선 그 겉면에 입을 맞추고는, 살짝 핥아봤다. 그 짧은 접촉에 지환의 허벅지가 움찔했다. 서진은 그 허벅지를 제 손으로 눌러 벌리며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그 기둥을 쭉 핥았다가, 입을 벌려 끝부터 천천히 입안에 담았다.

서진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인 채로 조금 당황했다. 생각보다 넣는 게 힘들었다. 그거야 크기가 있으니까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이것보다는 더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서진은 대신 손으로 그 기둥을 훑으며 우선 고개를 뒤로 뺐다가, 조금 더 깊게 들여놓으려 노력했다.

귀두가 입천장을 긁으며 들어오는 걸 조금 더 깊게 고개를 숙이자 버겁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더 들여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서진은 그제야 그걸 깨달으며 고개를 뒤로 뺐다가, 기둥을 혀로 감싸고 천천히 다시 내려갔다.

“윽,”

잘못 내려갔는지 문득 목젖에 귀두가 닿아 신음이 흐르자 지환이 다급히 서진을 밀어내고는 얼굴을 끌어당겨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괜찮아? 야, 그러게 그걸 왜, 아니 뭐라고 하는 건 아닌데, 다쳤어?”

지환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감추지도 못하며 서진의 입을 벌리게 해 그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많이 못 했죠.”

지환에게 뺨이 잡힌 채로 말한 탓에 소리가 샜는데, 지환은 오히려 서진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나도 해 볼까?”

꽤나 진지한 목소리에 서진은 고민할 것도 없이 답했다.

“아니요.”

“답이 너무 바로 나온다?”

그 말에 서진은 지환의 입술에 짧게 두어 번 제 입술을 맞췄다. 실제로 해 보니 생각보다도 더 어려웠다. 서진은 그것도 좋았지만, 지환을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 번 해 봤으니까 됐지?”

“조금 더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원래 뭐든 연습을 해야 나아지는 법이었다. 생각보다 어렵기는 했지만, 감을 잡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럼에도 그 단호한 목소리에 서진은 우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뺨에 입을 맞췄다가, 손을 내려 다시 지환의 성기를 쓸었다. 서진은 콘돔을 뜯어 손가락에 씌우며 지환의 귀를 짧게 빨았다.

“해도 돼요?”

귓가에 바로 물으며 젤을 손에 부어 따뜻하게 하자 지환이 서진을 바라봤다.

“네.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그 말투는 뭐예요.”

지환의 입가에 입을 맞추며 그 밑에 젤을 펴 바르자 지환은 여전히 어색한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말했다.

“서진 씨는 나한테 말 놓을 생각 없나?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서진은 지환을 바라봤다.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지환은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게 생각나지. 서진은 지환만 보느라 정신이 없는데.

“조금만 이따가, 생각할래요.”

손가락 하나를 그 안으로 밀어 넣으며 말하자 지환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서진의 시선을 피했다. 서진은 조심스럽게 그 안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지환을 바라봤다. 왜, 눈을 안 마주치지?

“형.”

“어.”

서진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싶을 때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접합부가 벌어지며 손가락을 조여 왔다.

“형.”

처음 삽입을 한 이후로도 몇 번쯤 더 섹스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익숙하지는 않았다. 물론, 아무리 시간이 흐르더라도 서진이 지환에게 익숙해지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지환은 언제까지나 서진을 닿는 것만으로도 열이 오르게 만들겠지.

“형.”

“왜.”

그제야 나온 답에 서진은 그 내벽을 부드럽게 더듬다가, 한 지점을 꾹 누르며 비볐다.

“싫어요?”

서진은 흘깃 시선을 내렸다. 지환의 성기는 여전히 제대로 발기한 채였다. 그런데 왜 눈을 안 봐 주지.

“싫으면, 이러고 있겠어?”

그 말에 서진은 제 밑의 지환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서진의 밑에 있는 지환을.

“나도, 익숙하지가, 않으니까….”

확실히 이런 건 지환에게 익숙할 리가 없었다. 웬만해서는 자기보다 큰 사람을 본 적이 없었을 지환은 그런 지환보다도 더 큰 서진의 밑에서 서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만져진 적이 있었을 리도 없고.

“얼른 넘어가.”

머쓱한 목소리에 서진은 그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어쩌지, 사람을 이렇게까지 좋아해도 되는 건가? 벅찬 심장이 끊이지도 않고 부단히 뛰었다.

“네. 그럴게요.”

입술을 떼어내자 그 눈꺼풀이 올라가며 다시 눈동자가 드러났다.

“형도 익숙하지는 않구나.”

결국 웃음기가 묻은 그 목소리에 지환이 눈가를 찌푸렸다.

“넘어가라고.”

이제는 머쓱함을 넘어 짜증기가 맴돌고 있던지라, 서진은 바로 답했다.

“네.”

이러다가는 정말 화를 낼 것 같았다. 서진은 그 입술을 깨물듯 빨며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천천히 시간을 들인 덕에 내벽이 처음보다는 부드러워지기는 했지만, 손가락을 늘리면 익숙하지 않은 이물감에 다시 몸이 굳었다.

서진은 긴장에 굳은 지환의 가슴팍에 입을 맞추며 성기를 매만졌다. 선단을 비빌 때마다 내벽이 떨렸다. 서진은 네 개째의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다시 그 성기를 입에 담았다.

“아….”

당황스럽게 터져 나온 지환의 목소리에 서진은 이번에는 처음부터 제대로 혀로 기둥을 감싸며 고개를 내리는 동시에 내벽을 둥글게 매만졌다. 역시 이러는 게 조금 더 지환의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데 나을 것 같았다. 물론, 잘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손보다는 역시 입이 더 좋지 않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입으로 해 주는 거에 판타지를 가진 사람이 좀 있지 않나. 지환도 그러려나. 서진이 판타지를 만족시켜 줄 만큼 잘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연습하면 나아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왜 안 싸요?”

서진이 그렇게 만지고 지금은 심지어 빨고 있는데, 지금쯤이면 한 번 정도는 쌀 만하지 않나. 서진이 그렇게까지 못했던 건가.

“뭐 이 새끼야?”

가릴 것 없이 바로 나온 그 억눌린 말이 오랜만에 꽤나 날 것 그대로였다. 침대 위에서 들으니, 꽤 색다른 것 같기도 하고. 그 뒤로 바로 지환의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존나 참고 있는 거잖아.”

“왜?”

전혀 이유를 알 수 없어 묻자 지환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둘이 같이하는데 나만 싸면 좀, 내 기분이 좀 그렇지 않겠어?”

그래서 그게 어떤 기분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서진은 다시 지환에게 입을 맞추며 제 성기에 콘돔을 씌우고 천천히 그 안으로 삽입했다.

“그럼 같이하면… 그러는 거죠?”

“그러긴, 으, 뭘, 그래.”

이물감이 벅찬지 숨을 부자연스럽게 멈추며 나온 그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벅찬 게 분명한데도 지환은 서진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런 지환을 느끼고 있자면, 서진의 불안 같은 건 모두 아무것도 아니게 됐다. 지환은 서진을 위해 노력하고, 서진은 그런 지환과 맞닿아 있으니까.

서진은 지환이 조금이나마 익숙해질 때까지 가만히 멈춘 채로 간헐적으로 떨리는 지환의 배를 토닥이듯 어루만졌다. 지환이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다 집어넣으면 끝나고도 배가 조금 아픈 것 같기에 끝까지 밀어 넣지는 않았는데도 버거운지 그 근육이 잘게 경련했다.

“이건, 내가 널, 진짜 좋아하는 거야.”

지환이 그대로 서진의 뺨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알겠어?”

눈가를 찌푸리며 나온 그 목소리에, 서진은 홀린 듯 그 시선을 마주했다.

“알고 있어요.”

서진은 입을 맞추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알고 있다. 지환이 서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지환은 제 말을 어기지 않는다. 거기다 꽤나 사람을 성실하게 보기도 했다. 그런 시선이 지금은 서진에게 닿아 있다는 걸 안다. 지환은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빠지게 할 수 있지.

닿고 있는데도 더 닿고 싶었고 틈 없이 맞닿고 싶었다. 지환을 꽉 끌어안아 가슴이 맞닿은 채로 깊게 움직이자 서진의 배에 지환의 성기가 닿는 게 느껴졌다. 그 단단한 느낌에 서진은 손으로 그 선단부터 감싸 훑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맞닿은 몸이 굳었다가, 시선을 마주하면 얼핏 풀렸다. 그에 따라 서진의 성기를 물고 있는 내벽이 움찔거렸다. 부드럽게 성기를 감싸다가, 일순간 조여 오는 걸 참고 있기가 힘들어 결국 점점 움직임이 빨라지자 제 밑의 지환의 몸이 그에 따라 흔들렸다. 지환의 성기를 흔들고 문지르는 손을 함께 빠르게 하며 그 내벽 한 부분을 꾹 누르듯 긁으며 들어가자 문득 지환의 허리가 들렸다.

“읏, 그거, 아….”

“네.”

흥분으로 열기가 올라 멍하니 답하자 지환이 다시 입을 닫았다.

“목소리….”

왜 소리는 내주지 않을까. 움직일 때마다 접합부가 맞닿아 질척이는 소리와 더불어 살이 닿는 소리만이 귓가에 울렸다.

“뭐.”

그 비협조적인 어조에 서진은 결국 웃으며 그 귓가에 입을 맞췄다.

“좋아서요.”

뭔들 안 좋을까. 서진은 오락가락하는 지환의 기준을 알 수 없었지만, 뭐든 좋았다. 어떤 기준이든 지환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서진을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쯤이야 모를 수 없다. 지환은 무던하고 주위 시선에 관심이 없지만, 지환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서진의 예민함을 어떻게든 맞춰 주려 했다. 늘 성공적인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서진도 지환이 노력한다는 걸 안다.

멀리서 봤을 때의 지환은 자기만의 기준이 꽤나 확고해 다른 사람에게도 잘 맞춰 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본인이 그러기로 마음먹었다면 얼마든지 상대방에게 맞췄다. 서진은 그게 자신이 지환에게 특별해서가 아니라, 지환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지환의 상대는 서진이다.

허리를 움직이고 내벽을 짓누르듯 들어갈 때마다 안이 조이며 성기를 감쌌다. 서진은 손에 쥔 성기의 선단 밑을 빠르게 비비며 더 깊게 몸을 묻었다가, 빠져나가며 다시 귀두로 내벽을 긁어 짓누르듯 밀어 넣었다. 이미 더 오를 곳도 없는 열기가 시야까지 뿌옇게 가리는 듯했다.

그렇게 모든 게 흐릿한 와중에도 지환만이 또렷했다. 서진은 제 시야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지환에게 입을 맞췄다. 헐떡이듯 벌어진 입안을 더듬고 헤집으며 성기를 박아넣자 맞닿은 그 몸이 서진을 따라 움직이며 드문드문 서로의 혀를 깨물었다.

그렇게 짧은 통증이 오갈 때면 지환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다시 서진에게 더욱 깊게 닿아 왔다. 지환은 서진이 깊게 성기를 밀어 넣을 때마다 조금씩 몸을 굳히기는 하면서도, 서진에게 닿은 손을 떼어내지는 않았다.

그 손이 닿은 게 귓가든, 목덜미든, 뺨이든, 어깨든, 아니면 다른 그 어떤 곳이든, 지환은 서진에게서 작은 부분이나마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지환이 서진을 신경 쓰는 게 좋았다. 귀찮게 여기면 어쩌지 싶으면서도,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좋았다.

서진은 내벽을 문질러 긁듯이 추삽질 하며 손에 닿은 귀두를 둥글게 문질렀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대중없이 숨소리가 섞이며 점점 더 숨이 거칠어졌다.

“하아….”

문득 터져 나온 그 나직한 목소리 뒤로 지환이 맞닿은 서진의 입술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깨물며 손을 내려 서진과 손을 겹쳐 스스로 성기를 흔들었다. 그 행동에 이미 가득한 열기가 더 짙어졌다. 지환은 늘 서진에게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대로 함께 손을 빠르게 움직이자 맞닿은 몸이 굳으며 내벽이 꽉 조여졌다. 서진은 지환이 사정한 걸 느끼며 저 역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안에 깊게 몸을 묻은 채로 정액을 토해냈다. 벅찬 숨을 고르며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리자 맞닿은 지환의 몸이 흠칫 떨렸다.

서진이 콘돔을 처리하고 지환의 몸을 토닥이자 지환 역시 이어 콘돔을 버리고는 가만히 서진을 바라봤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 이미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더 보고 싶었다. 지환과 있으면 늘 불가능한 걸 하고 싶었다. 이미 닿아 있는데도 더 닿고 싶고,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이 그랬다. 이미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게 이루어져서 그럴까. 서진은 지환이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지금 지환은 서진을 좋아해 주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지환 딴에는 서진을 최대한 아끼려 노력하면서.

서진도 그만큼 지환을 아끼고 싶었다. 지환을 이룬 모든 걸 아끼고 싶었다. 곧게 직시하는 눈동자도, 무신경해 보이지만 사실은 자상한 말투도, 가릴 것 없이 주어지는 웃음도, 종종 우려를 숨기지 않으며 닿아 오는 손길도, 그 외의 모든 것들도. 아끼고 아껴서 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뭘 그렇게 봐.”

지환이 그 말과 함께 서진의 눈가를 제 손으로 가렸다. 서진이 그대로 지환에게 다가가 짧게 입을 맞추자 지환은 선선히 입술을 벌리면서도, 말을 이었다.

“너 나한테 말 놓는 거 어떻게 생각해.”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다. 서진은 지환과 닿느라 정신이 없었는데도 지환이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게 억울해 답을 미뤘는데, 지환은 또 그게 생각난 모양이었다.

“천천히 놓을게요.”

“너 그러고 안 놓을 거잖아.”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지금껏 존댓말을 하다가 갑자기 말을 놓는다는 게 어색하기도 했고 굳이 말을 놓아야 할까 싶기도 했다. 그저 멀뚱히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서진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이름 불러 봐.”

“네?”

서진이 고등학생이던 때가 생각난다고 말했으면서, 그 고등학생한테 이름 불리는 건 괜찮은 건가.

“원래 애인끼리는 나이 차이 나도 이름도 부르고 그러는 거야.”

생각해 보면 딱 한 번 봤던 지환의 전 여자친구도 호칭으로 지환의 이름을 섞어 부르는 것 같기는 했다.

“불러 봐.”

“최지환 님.”

딱히 못 할 건 없어 대수롭지 않게 나간 목소리에 지환이 말없이 서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서서히 인상을 구겼다.

“너 무슨 접수원이냐? 콜 센터야?”

“왜요?”

“너무 정이 없잖아.”

이름 부르는데 정이 있고 없고가 어디서 티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더 격식 없이.”

“최지환 씨?”

“그래. 지금 당장 팀플 해야 될 것 같고 좋다. 예쁜아, 너는 자료 조사할래?”

그 떨떠름한 목소리에 지금껏 여운에 잠겨 있던 서진 역시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럼 뭐 어쩌라고요.”

“다 떼고 부르라는 소리잖아.”

“최,”

어째 그냥 이름 부르는 게 맞는데, 막상 부르려니 왜인지 조금쯤 망설여졌다.

“최지환.”

정말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 그럼에도 괜히 기분이 이상해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 역시 서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웃었다. 꼭 뭔가를 종용하는 것 같아 서진은 잠시 그 시선을 피했다가, 겨우 다시 마주했다.

“지환아?”

얼떨결에 묻는 것처럼 내뱉어진 그 목소리에 지환이 웃는 그대로 서진의 눈가를 매만졌다.

“왜, 서진아.”

고작 이름을 부르고 이름을 불리는 것뿐인데도, 꼭 수많은 의미가 담긴 것 같았다. 아마 서진을 부르는 사람이 지환이라서, 그리고 서진이 부르는 이름이 지환이라서 그렇겠지만.

“앞으로도 종종 부르고 말도 놓자. 알겠지?”

그러면서 서진을 끌어당기는 손길에 서진은 선선히 끌려가 그 품 안에 안기며 지환을 꼭 끌어안았다.

“네.”

지환이 서진의 머리를 토닥이는 게 그대로 전해졌다. 서진은 늘 자신이 지환에게 익숙해져서 조금 더 능숙하게 굴었으면 했지만, 사실 낯선 것도 좋았다. 이름 하나에 이렇게 쩔쩔매는 것도, 모든 건 상대가 지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뭐든 좋았다.

* * *

[오늘은 언제까지 공부할 거야?]

시험 기간이라고는 해도 신체 리듬을 망칠 생각은 없어 이제 슬슬 돌아가려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마침 떠오른 지환의 문자에 서진은 그대로 답했다.

[저 이제 나가려고요]

서진은 이미 메시지를 보내 놓고도 괜히 그 액정을 매만졌다. 지환에게서 어떤 답이 올까.

[그럼 잠깐만 기다릴래? 데리러 갈게]

그 답에 서진은 밝아진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면서도, 애써 답을 보냈다.

[안 그래도 되는데]

지환은 서진이 늦어지는 날이면 종종 서진을 데리러 오고는 했다. 너무 잘해 주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우리 서진이 누가 잡아갈까 봐 그러지]

여전히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떠올랐다가, 그 바로 뒤로 문자가 이어 도착했다.

[금방 갈게]

지환도 오늘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겠다고 했던지라 혹시나 했는데, 정말 같이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사실 둘 다 학교에 오래 남아 있는 날에는 늘 지환이 데리러 오기는 했으니 대수로운 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서진에게는 언제나 대수로웠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응 도착하면 전화할게]

서진은 그 글자가 적힌 액정을 잠시간 손으로 문질렀다. 가끔은 서진이 데리러 가고 싶었는데, 지환은 어차피 집 가려면 서진이 있는 곳을 지나야 하는데 왜 굳이 서진이 오냐며 만류했다. 서진은 오히려 그게 더 좋았던 건데. 더 오래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서진은 우선 짐을 챙겨 바깥으로 나가 지환을 기다렸다. 안에서 기다려도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환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었다.

서진은 벤치에 앉아 지환을 기다리다 고민했다. 지환은 추위를 잘 타지 않는 편이기는 했지만, 이제 슬슬 추워지고 있는 데다가 밤이 되면 더 기온이 낮아졌다. 지환은 늘 그렇듯 옷을 가볍게 입었을 테니 따뜻한 음료라도 가져오는 게 나을까.

혹시 그사이에 지환이 올까 봐 지환에게 미리 연락하려 했는데, 마침 지환의 전화가 왔다. 벌써 왔나 싶어 늘 지환이 오는 길을 바라봤지만,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네, 형.”

[서진아, 진짜 미안한데 나 지금 갑자기 후배가,]

그 말이 문득 끊기더니 곧바로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 야!]

그러고는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방금 후배 하나 수거했거든. 진짜 미안한데 먼저 갈래? 나도 금방 갈게. 얘 어차피 기숙사 살아.]

서진도 작년에는 종종 취한 동기들을 정리해 준 적이 있었다. 거기다 지환도 주량이 강한 편이라 취한 사람들을 데려다준 적이 꽤 있다는 것도 알고. 그런데 이제 곧 시험인데 지금 그렇게 취할 때까지 마셨다니 그 상대가 조금 놀랍기는 했다.

“형 어디예요?”

혼자 가는 것보다는 지환을 도와주고 함께 가고 싶어서 묻자 잠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지환이 말했다.

[지금 공대. 야, 너 진짜 정신 안 차릴래?]

아무래도 취한 후배가 좀 힘들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 목소리에 숨길 생각도 없는 짜증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서진이 우선 공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이어 지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 얘만 처리하고 바로 전화할게, 들어가 있어.]

그러고는 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는지 들리는 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그런데, 전화 안 끊었는데. 원래 서진과 지환이 전화하면 끊는 건 늘 지환이었다. 서진은 조금이나마 지환의 숨소리라도 더 들으려 괜히 미적거렸고. 그러다 종종, 당연히 서진이 전화를 끊을 거라고 생각하고 지환은 그저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가 있었는데, 이번 역시 그랬다.

서진은 한숨을 내뱉는 그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전화를 끊을까, 아니면 조금 더 붙들고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어지는 목소리에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다은, 너 진짜 안 일어날래. 나한테 왜 이러냐. 너는 진짜 대용량 쓰레기봉투만 있었으면 그거 덮어 줬을 거야.]

이다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면전에서 귀찮은 티를 내?]

누가 들어도 술에 취한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느릿느릿, 발음이 다 풀린 그 목소리에 바로 짧은 답이 이어졌다.

[귀찮으니까.]

지금 취해서 지환이 기숙사로 데려다주고 있다는 후배가, 그게 다은이었다고.

[그럼 승찬 오빠가 데려다준다고 할 때 그냥 버리든가!]

[야, 김승찬은, 걔는, 아무리 취해도 걔는 아니지. 너는 그 새끼 모르지도 않으면서.]

[나도 그 새끼 개새끼인 거 알아.]

서진은 거의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별거 아닌 걸 안다. 지환은 어떻게 들어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쩌다 만난지는 모르겠지만, 후배가 취했고, 그런 후배를 이상한 사람이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당연히 걱정됐겠지. 서진이라도 그랬을 게 분명하다. 그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니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때 지나간 게 다은이고, 그걸 발견한 게 지환이지. 왜, 굳이 그래야 했지.

[너 진짜 못 걷겠어? 나 너 빨리 데려다주고 갈 곳 있어.]

[여친?]

[어. 원래 걔 데려다주기로 했단 말이야. 근데 지금 꼴이 이게 뭐냐.]

[그럼 그냥 가세요.]

[돌겠다, 진짜. 내가 널 업을 수는 없잖아.]

한숨과 함께 지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고 가는 거 누가 보면 어쩔 거야. 지금 나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네가 문제잖아.]

[오빠, 사실 나 요즘 힘든 일 있어.]

확실히 취하기는 했는지 지환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온 그 두서없는 화제에 지환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학교 상담센터 가라. 아니면 친구한테 말해. 나 말고.]

어디지. 서진은 공대 건물이 모여 있는 입구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봤다. 지환은 과방에서 할 게 있다고 했으니, 그 근처일 텐데.

[사람이 왜 그렇게 매정해?]

[나는 너 때문에 돌겠는데 너는 왜 웃냐.]

[왜 여기서는 별이 안 보이지? 오빠, 키 크면 별이 보일까? 오빠는 별 보여?]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그게 기공이 할 소리냐? 넌 전과해라.]

서진은 벤치에 누워서 하늘을 보는 다은과 그 앞에 쭈그려 앉아 한숨을 내쉬는 지환을 발견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야, 일어나. 네가 일어나야 내가 빨리 애인한테 갈 거 아니야. 가뜩이나 볼 시간도 없는데.”

“나도 연애하고 싶어.”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일어나라니까.”

“인성….”

그 목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형.”

이윽고 나온 서진의 부름에 지환이 빠르게 고개를 들어 서진을 확인하고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 서진아. 그냥 가라니까.”

“혼자서 힘들 것 같아서요. 전화 안 끊겨서 조금 들었어요.”

서진이 그대로 벤치에 누운 다은을 바라보자 지환이 서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얘는 내 후배인데.”

“우산, 우리 봤죠.”

다은은 지환의 말을 끊고 말하며 그대로 웃었다. 술기운에 상기된 얼굴로도 웃는 게 꽤나 자연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비 오던 날도 지환에게 거의 무시를 당하다시피 하면서도 막상 지환을 보자 바로 웃었지. 원래도 다은이 잘 웃는 사람이라는 걸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네. 안녕하세요.”

“와, 저 기억하세요?”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서진이 지금껏 잘못한 것도 없는 다은을 얼마나 신경 썼는데. 지금조차도.

“네. 형 후배시죠? 괜찮으세요?”

“야, 서진아.”

서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을 안심시키듯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실제로도 별일은 아니었다. 서진이 어떻게 생각하든, 객관적인 사실이 그랬다.

“형, 이분 물이라도 마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가 있는 것보다는 형이 있는 게 나을 테니까, 제가 자판기 갔다 올게요.”

바로 근처에 있는 건물을 눈짓하자 지환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걸 네가 왜 해.”

“목마르세요? 저 물 있어요.”

그 말과 함께 다은이 자신이 베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초코우유.”

물을 꺼내겠다더니 난데없이 초코우유를 꺼낸 다은이 서진에게로 손을 내밀었다가, 그대로 힘없이 제 무릎 위로 떨어뜨렸다.

“추워.”

중얼거리듯 나온 그 말에 서진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다은에게 건넸다. 어차피 지환은 가벼운 옷차림이라 벗어 줄 것도 없었다. 있었더라도 서진이 말렸겠지만.

“괜찮으시면 입으세요.”

서진은 다은이 꾸벅이듯 인사하며 외투를 주섬주섬 입는 걸 바라봤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네.”

갑작스레 힘이 빠진 모양인지 멍하니 답한 다은이 몸을 일으켰다가, 두어 걸음 걸으며 또 멈췄다.

“오빠.”

그 말과 함께 다은이 쥐고 있던 가방을 툭 떨어뜨렸다.

“근데 나 진짜 졸려.”

지환이 그 가방을 대신 주워 주자 다은은 지환을 바라보다가, 이내 서진을 흘깃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정말 취한 걸 어김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지환이 다시 다은에게 가방을 건네주려 했지만, 다은은 비틀거리며 지환을 퍽 치고 걸었다.

“아니, 저게 진짜.”

황당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지환의 목소리 뒤로 바로 다은이 비틀거리자 그나마 다은과 가깝던 서진이 다은을 우선 잡아 주며 지환을 바라봤다.

“형이 잡아 주세요. 모르는 사람이 닿으면 기분 나쁠 수도 있잖아요.”

별거 아니니까. 사실 지금도 서진은 충분히 과하게 관여하고 있었다. 어차피 부축 정도였고 서진도 옆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았다. 지환이 다은에게 어떤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은은 취해서 도움이 필요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 맞아요.”

그럼에도 가만히 서진을 보는 지환의 모습에 서진이 말을 이으며 다은을 똑바로 세워 주고는 손을 떼어내자, 다은이 서진과 지환을 한 번씩 번갈아 올려다봤다.

“죄송한데 저한테서 냄새나요? 왜 다들 나를 피하지?”

다은은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내뱉고는 저 혼자 또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결국 지환이 한숨을 내쉬며 다은이 중간중간 휘청일 때마다 잡아 줬다.

“다른 사람한테까지 민폐 끼치지 말고 나에서 끝내자.”

서진은 지환의 그 짜증스러운 표정을 바라봤다. 이게 맞았다. 어차피 이외에는 별 방법도 없었고.

“야, 자지 마.”

서진은 걸으면서도 조는 다은의 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환과 꽤 체격 차이가 나는 작은 몸, 지환이 아무리 무신경하게 굴어도 개의치 않는 무던함, 살가운 웃음. 서진을 만나기 전의 지환에게 어울리는 모든 것들.

“그냥 업어 주지 그래요?”

혼자 다은을 업고 가는 걸 누가 봤을 때 소문이 나는 걸 염려했다면, 이제는 서진도 있으니 괜찮았다. 차라리 그편이 시간 단축에는 좋겠고. 그럼에도 지환은 바로 답했다.

“싫어.”

취해서 졸고 있다고는 해도 다은이 기억할지도 모르는데 사람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게 거침없었다.

“나도 싫어.”

“잘됐네. 그럼 좀 잘 걷든가.”

지환은 오해할 짓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지금도 다은을 데려다주기는 하지만, 다은이 걱정이 돼서 데려다준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데려다줘야 하니 데려다주는 것뿐이라는 걸 다은에게도 계속 티를 냈고 오해할 여지를 주지도 않았다. 서진도 안다.

“이다은, 오늘 너 때문에 힘들었던 건 맞는데 그렇다고 내일 일어나서 나한테 미안하다고 연락할 필요 없어. 고맙다는 인사도 됐고 기프티콘도 필요 없어. 그냥 앞으로는 정신 차리고 다녀. 취하면 네 여자 동기들 부르든가 하고 김승찬 같은 새끼가 데려다준다고 해도 듣지 마.”

드디어 기숙사 입구에 다다르자 지환은 다은을 향해 그대로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연락 안 하면 예의 없어 보일까 봐 걱정하지 말고 내가 됐다면 진짜 괜찮은 거니까 일어나서 연락하지 마.”

지환이 말을 할 동안 다은이 주섬주섬 서진의 겉옷을 벗었다. 이 와중에 그럴 정신은 또 있는 모양이었다.

“들어가라.”

지환은 그대로 서진의 옷을 건네받고 다은의 가방은 다은에게 꼭 쥐여 준 채로 다은을 기숙사로 들여보냈다.

“이게 무슨 난리냐.”

다은을 돌려보낸 후,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옮기던 지환이 슬쩍 서진의 눈치를 살폈다.

“서진아.”

“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그러니까.”

서진은 전혀 화난 기색이 없었고 실제로도 화가 나지 않았는데, 막상 지환은 괜히 서진의 화를 풀어 주듯 서진의 허리쯤을 살짝 건드렸다가 놓았다.

“아니, 일단 미안해. 너 내가 쟤랑 만나는 거 안 좋아하는데, 근데 우연히 만난 거기는 하거든. 그래도 미안해.”

“괜찮아요. 취한 사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거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대수롭지 않은 서진의 기색에도 지환은 조심스럽게 이어 말했다.

“과방에 있다가 너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쟤가 술 마시고 과방 들어온 거야. 뭐 가져갈 거 있다고. 그런데 딱 봐도 애가 취해 있으니까 얘를 어쩌나 했는데, 심지어 여자애들이 하나도 없었거든.”

어디서 만났나 했는데, 과방이었던 모양이다.

“근데 갑자기 쓰레기 새끼 하나가 데려다주겠다는 거야. 나랑 동기인데, 소문 거지 같아서 휴학했다가 여자애들 졸업하니까 이제야 다시 복학한 새끼 있어. 근데 걔는 소문만 거지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도 행실이 안 좋아.”

그 사람이 바로 대화에 종종 등장하던 승찬인 모양이었다.

“그 새끼가 데려다준다고 하니까 애들이 이다은 나한테 떠넘긴 거야. 나 어차피 나가려고 한 거 아니까 가는 길에 데려다주라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갔다. 그 자리에서 지환이 거절할 수도 없었을 테고. 아무리 지환이 주위 눈치를 보지 않는다고 해도, 위험할 수도 있는 후배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알았어요. 그리고 화도 안 났어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래도 내가 쟤 룸메를 불러내든가, 그랬어야 했는데. 그거 이제야 생각났어.”

그거야 서진도 지환이 말해 주고 나서야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걸 기억해냈으니 그 역시 서진이 지환에게 뭐라고 할 건 아니었다.

“서진아.”

다은과 함께 걷는 지환을 보면서, 서진은 생각했었다. 왜 다은을 그렇게 불안하게 여겼을까. 왜 그렇게 신경이 쓰였지. 지환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생각 해?”

“별 생각 안 해요.”

그럼에도 계속 서진을 바라보는 지환의 시선에 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예요.”

그 말에도 지환은 여전히 서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서진은 제 옆에서 걷는 지환을 느끼며, 잠시 땅을 바라봤다. 왜 그랬는지는 안다. 언제고 지환이 떠날 것 같았으니까. 다은과 같은 사람과. 지환을 의심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지환은 지금 서진의 곁에 있지만, 지환과 어울리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떠나지 않을까. 서진에게는 지환을 붙들어 놓을 방법이 없으니.

서진은 종종 지환을 어디로도 떠날 수 없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래 봤자 정말 지환이 떠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그 주위나 맴도는 게 고작이겠지. 그마저도 지환이 기분 나쁘다면 할 수 없을 테고.

서진은 이미 지환이 자신을 바라볼 때 얼마나 따뜻한 온기를 가질 수 있는지 안다.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고르는 그 배려심도, 최대한 다정하게 내뱉으려 노력하는 그 목소리도, 자연스러우면서도 부드럽게 닿아 오는 그 손길도, 그 외의 모든 노력을 안다. 그런 지환이 서진을 싫어하게 된다면, 서진이 버틸 리가 없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지환을 떠나보내게 되겠지. 미움 받고 싶지 않으니.

“형은, 만약에 다른 사람 만나고 싶어지면 어떻게 할 거예요?”

지환은 서진을 좋아하지만, 서진이 필요하지는 않다. 지환이 서진을 필요로 한다면 서진은 그 쓸모가 유효할 때까지는 언제까지나 지환의 곁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환은 서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좋아할 뿐이다.

그리고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 분명 지환은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지금 서진을 보듯, 이렇게나 조심스럽게 다른 사람을 시야에 담게 되겠지.

“뭐?”

“그럴 수도 있잖아요. 형이 저 좋아하는 건 알아요. 그런데, 그래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되면 서진은 어떻게 해야 하지? 서진은 늘 그런 걸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 지환은 분명히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지금이야 서진이 좋겠지만, 그게 얼마나 갈지는 모른다. 분명 서진이 질리게 할 테니까. 서진에게는 지환을 붙잡아 놓을 만한 게 없다.

“서진아, 네가 날 얼마나 믿을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바람은 절대 안 피워. 애초에 그건 예의 문제기도 하고. 그리고, 그건 바람은 아니었지만, 만약 합의했다고 해도 똑같아. 경험해 봐서 더 잘 아는 거야. 나는 한 번에 두 명 좋아하는 건 절대 못 해. 이거 하나는 정말 확신시켜 줄 수 있어.”

서진도 알고 있었다. 이미 지환에게 한차례 듣기도 했다. 지환은 사귀게 되면 그 사람을 정말 신경 썼다. 그 사람만을. 그러니 누군가와 사귀며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는, 그런 건 하지 못한다. 기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지환은 만일 다른 사람에게 끌리게 된다면, 원래 만나던 사람을 정리할 게 뻔했다. 지환은 이도 저도 아닌 마음으로 우선 보험을 들어 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 저랑 헤어질 거예요?”

그때 정리당할 사람이 누구인지야 뻔했다.

“한서진. 너 안 괜찮지.”

언뜻 굳은 표정과 서진을 살피는 그 시선에, 서진은 그저 지환을 바라봤다.

“그 후배분 때문에 이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정말 괜찮아요. 그것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언젠가는 해야 할 얘기였잖아요.”

굳이 다은을 말하는 게 아니기도 했다. 설마 서진이 다은만 불안해할까. 이번에는 다은일 뿐이다. 다음번에는 다른 사람이겠지. 지환과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면 모두 같았다.

“이게 왜 언젠가는 해야 할 이야기야? 이건 헤어지기 전까지는 할 필요 없는 얘기야.”

지환에게는 그럴 걸 안다. 헤어지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것 같다는 말을 한 후 그대로 헤어지겠지. 하지만 서진은 그렇다 한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저는 형이, 다른 사람 만나도 괜찮아요.”

차라리,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어차피 지환이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게 된다면, 그 때문에 서진이 아예 정리당하는 것보다는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편이 훨씬 낫다. 기다리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서진이 아쉽게 느껴지면, 그러면 돌아오지 않을까.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돼요.”

들키지는 말았으면 한다는 말은 할 필요도 없다. 지환이 티를 내든, 숨기든, 서진은 어차피 모르는 척할 테니.

“저는 형을 탓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돼요.”

몇 번을 반복하든 괜찮다. 서진은 그저, 지환이 알아줬으면 했다. 서진은 그 자리에 계속 있으리라는 걸. 서진은 정말, 지환이 서진을 제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했다. 그거면 정말 충분했다. 정말 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가끔이라도 다시 돌아와 주겠지.

하지만 막상 지환에게서는 되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서진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지환을 확인했다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지환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가만히 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진아, 내가 지금 이 말을 듣고.”

그 건조한 어조가 그대로 이어졌다.

“좋아해야 되는 거지.”

잘못된 걸 알았다. 하지만 서진이 뭔가를 고치기도 전에, 지환은 말을 이었다.

“너 정말 편하다. 바람피워도 모르는 척해 주겠다는 거지? 아니, 다 알아도 그냥 덮어 주겠다는 건가. 그거 진짜 쉬워서 좋겠네.”

“형.”

서진의 부름에도 지환은 그저 한 번 헛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말했다.

“네가 보기에는 내가 그렇게 가벼워? 내가 너한테 가벼워 보일 수 있는 건 알아. 그건 나도 너한테 뭐라고 못 하지. 네가 날 못 믿는 건, 그래, 그럴 수 있어.”

서진은 지환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 건 정말, 그런 게 아닌데.

“그런데, 그래서 넌? 너는 너를 그따위로 취급하는 게,”

뚝 끊긴 목소리가 이내 이어졌다.

“넌 날 믿을 생각이나 해 봤어?”

건조하던 목소리가 점점 더 끓어오르듯 이어지다가,

“네가 아는 나는, 내가 널 그따위로 취급해?”

그만큼이나 빠르게 식었다.

“형, 그게 아니에요. 형 못 믿어서 한 말이 아니라,”

하지만 지환은 서진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이 말을 끊어냈다.

“오늘은, 내가 잘못한 건 알겠어. 내가 쟤를 데려다줄 게 아니라 룸메든 뭐든 쟤 아는 사람을 불러야 했던 것도 알겠고, 정 안 되겠으면 나 혼자 나오는 게 아니라 과방에 있는 애 하나라도 더 데리고 나왔어야 하는 것도 알겠어. 그건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건 알겠는데.”

깊게 가라앉은 시선이 곧게 서진에게 닿았다.

“그렇다고 내가 너한테 이런 소리 들어야 하는지는, 그건 모르겠다.”

잘못된 걸 안다. 하지만, 뭐가 잘못됐지? 명확히 알 수가 없어 초조했다. 이대로는, 이렇게는 안 되는데. 서진이 결국 지환을 화나게 해 버렸다. 의심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지환은 그런 의심을 받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괜히 서진이 비꼬는 것처럼 보였을까. 그래서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다.

“그런 거 아니었어요. 형 의심하는 거 아니에요.”

“네 생각에는 내가 지금 그걸 말하는 것 같아? 너는 도대체,”

그게 아니라면, 왜? 서진은 숨조차 멈춘 채로 그저 지환의 말을 기다렸다. 실수는 쌓이고 쌓여 큰 실망을 만들어 낸다. 지금 지환은, 서진에게 실망을, 실망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질렸겠지. 어쩌지. 어떻게 해야,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좋아해요.”

서진은 절박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형을 좋아하는 거예요.”

답할 말을 전혀 고를 수 없던 지환의 목소리에서, 유일하게 답할 수 있는 말이었다. 좋아해서, 좋아해서 지환이 편했으면 했던 건데. 좋아해서, 그래서 지환이 서진을 버리지 않았으면 했던 건데. 버리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돌아올 테니까, 잠깐이라도 봐 줄 테니까, 그게 욕심이 났던 건데. 역시 서진이 욕심을 부린 게 잘못이었을까?

“알고 있잖아요.”

불안에 목소리 끝이 흐려졌다. 서진은 지환의 표정을 살폈다. 이미 실망했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 주지 않을까. 이번 한 번 정도는 괜찮다고, 그렇게 말해 주지 않을까.

“그거로는 안 돼.”

하지만 지환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좋아하는 거로 안 되면 서진은 어떻게 해야 하지. 서진에게는 그 외에 지환을 끌어당길 게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종종 너를 서운하게 만들 거야. 그건 어쩔 수 없어. 나도 그러기 싫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그래서 이미 여러 번 말했잖아. 내가 그러면 말해 달라고. 나는 그걸 고치고 싶어. 너를 상처 받게 하고, 서운하게 하고,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싸늘히 식었던 어조가 다시 천천히 온기를 머금었다.

“너는 그게 너한테만 힘들 것 같아? 나도 힘들어. 나는 네가 나 때문에 상처 받는 게 힘들다고. 그래, 내가 더 잘하면 되겠지. 그런데 내가 잘하는지 아닌지 네가 말을 안 하는데 내가 뭘 어떻게 알아?”

처음이 아니다. 지환은 지환의 말대로, 이미 여러 번 말했다.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하고, 서운한 게 있으면, 불안하면 말하라고. 서진은 늘 회피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쌓여 갔다. 이미 너무 많이 쌓여 버린, 그런 것 같은데.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고쳐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정작 너는 한번 말해 준 적도 없어. 그냥 너 혼자 생각하고 끝나니까. 너 내가 기다려 봤자 말할 생각도 없지?”

그 말을 끝으로 지환은 가만히 서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조금쯤 괴로운 듯 눈가를 찌푸렸다.

“네 생각에는 내가, 고쳐 줄 가치도 없어? 어차피 바뀔 것 같지도 않으니까 그냥 놔두는 거야?”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다. 다급한 서진의 답에도 지환은 서진과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

“한서진, 너는, 나랑 연애한다는 건 알고 있어?”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믿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만큼이나 소중했다. 너무 과분해서 차마 제 것이라고 믿지도 못할 만큼. 믿고 나면, 그다음은 없어질 것 같았다.

“네 연애에 내가 있기는 해? 정말 그랬으면, 뭐라도 말을 해 줬겠지.”

그 목소리가 그대로 이어졌다.

“너 나랑 있으면서 좋기만 하지는 않은 거 알아. 불안해하는 것도 알고. 그런데 네가 뭘 불안해하는지는 몰라.”

서진은 살피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수가 쌓여 실망을 만들어 내지 않기 위해, 질리지 않도록 살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말하는 모든 건, 나 좋으라고 하는 말이잖아. 내가 너한테 불편한 거 있으면, 바라는 거 있으면, 뭐든 말해 달라고 한 건, 내가 그만큼은 감당할 수 있어서 한 말이야.”

왜 정작 지환의 말은 살피지 못했지.

“너는 도대체 뭘 보는 거야? 네가 보는 게 뭔지 말을 안 해 주면, 내가 어떻게 알아?”

서진이 지환을 힘들게 했다. 질리게 했다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지환은 정말, 힘겹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믿음을 주지는 못했을 수는 있어. 그랬겠지. 그런데 그래서 더 나아지고 싶은 거잖아. 뭐라도 해 보고 싶은 거라고, 너랑. 그런데 너는 그런 건 필요도 없어?”

그런 게 아닌데. 필요 없는 게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라, 차마 바라지도 못했다. 바라게 된다면 지환이 피곤해질 테니까. 지환은 이미 더 나아질 필요도 없이 완벽한데, 서진이 귀찮게 굴어서 점점 더 피곤해진다면, 그건 서진도 버틸 수 없었다. 그러니, 필요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그저, 바라지도 못했다.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네가 나를 못 믿는 거랑은 별개로, 나를 믿고 싶기는 해? 도대체 너는 나랑 뭘 하고 싶은 거야?”

그 어조가 어떤지조차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귓가가 아팠다.

“형 못 믿는 거 아니에요. 믿어요. 제가 형을 왜 못 믿어요.”

스스로 내뱉는 목소리마저 먹먹하게 들려왔다.

“한서진, 너는 이런 게, 우리가 하는 게, 너만 어려운 것 같아?”

잘못되고 있는 걸 아는데, 어떻게 고쳐야 하지. 가슴팍이 아릴 정도로 심장이 조였다. 손끝이 차가웠는데, 고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왜 늘 망치기만 하고 고칠 수는 없지? 망칠 수 있다면, 고치는 법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망치게 된다면, 그게 소중해서는 안 되잖아. 소중한 건 망칠 수 없도록 단단히 만들어야 하는데, 서진의 것들은 왜 하나같이 무너지지 않을 만한, 버틸 만한, 그만한 힘도 없어서.

“나도 그래. 나한테도 어려워. 나한테도 너는 다 처음이잖아.”

붙잡고 싶었다. 붙잡으면, 잡혀 줄까?

“나도 아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맞춰 가고 싶은 거야. 더 알고 싶은 거고.”

미안하다고 하면, 용서해 줄까?

“그런데 너는 그럴 생각도 없잖아.”

서진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지환이 상처 입었다는 것이다. 서진 때문에.

“나한테 네 모든 걸 털어놓으라는 게 아니야. 무조건 믿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그냥, 기다려 달라는 말은 할 수 있잖아. 그거면 나는 정말 너를 기다려 줄 수 있는데.”

서진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서진은 기다리겠다고 하는 게 고작인데, 어떻게 감히 지환에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있지. 서진은 지환이 기다릴 만한 사람이 아닌데.

“사실 이런 말 할 필요도 없지. 어차피 넌 뭐든 말할 생각도 없는데.”

지환은 그대로 서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말했다.

“내가 이성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다. 나머지는 생각 정리하고 연락할게.”

“안 돼요.”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목소리가 나갔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됐다. 생각을 정리한다는 게 어떤 의미지. 이성적으로 말할 수 없는 다른 말이 뭐기에, 왜 지금은 말할 수 없는 거지. 그 생각들을 정리하면 어떤 결론이 나오기에.

“형,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었는데.”

서진은 그 어떠한 말도 정리하지 못하고 횡설수설 우선 지환을 붙들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우리 처음 사귈 때 네가 그랬잖아. 별거 아닌데 싸우는 것보다는 머리 정리하는 게 좋다고.”

왜 그런 말을 했지. 어떻게든 옆에 있어야 하는데, 왜 그런 말을 했던 거지.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서진이 겨우 지환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지환은 그대로 제게서 서진의 손을 떼어놨다. 지환은, 붙잡혀 주지 않았다.

“정리하고 연락할게.”

서진은 지환에게서 떨어진 제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렸다. 어둑한 땅바닥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겨우 시선을 올리자 서진에게 등을 보이고 걷던 지환이 문득 우뚝 서더니, 다시 뒤를 돌아 성큼성큼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서진이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절박하게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이내 말했다.

“방금은 내가 말이 좀 심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너한테 뭐라고 한 거 아니야. 네 탓 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 일은 내 잘못 맞아. 미안해. 그런데, 너도 그런 말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아무리 그래도,”

지환은 튀어 나가려는 말을 참는 듯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내 답답한 듯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런 말 하려던 게 아닌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지환은 서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미안해. 방금은 나도 좀, 심하게 말했어. 내가 화낼 일도 아니고, 지금 이런 식으로 할 얘기도 아니었어.”

언뜻 차분해진 그 목소리에 서진은 다급히 답했다.

“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해요. 제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됐어요. 죄송해요.”

지환이 그런 말을 하게 만든 서진이 문제였을 뿐이지, 지환은 어떤 말을 해도 괜찮았다. 이걸로 된 걸까. 이번 한 번은 봐주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지금 지환의 표정이 그리 후련해 보이지는 않았다.

“서진아.”

지환은 그대로 서진의 머리칼로 손을 뻗어 짧게 토닥였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내가 장담하는데, 어차피 너 지금 네가 왜 나한테 미안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거든. 알지도 못하는 걸 미안해할 수는 없잖아.”

나무라는 투도, 답답하다는 투도 아닌 그 목소리는 그저 평온히 이어졌다.

“한서진, 너 괜히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집으로 조심히 들어가. 나도 생각 좀 더 해 보다가 연락할 테니까.”

서진은 지금껏 늘 지환의 눈치를 살폈다. 지환이 뭐라도 불편해할까 봐, 조금이라도 질린 기색을 보일까 봐, 서진을 불쾌하게 여길까 봐. 그게 아니라면 다른 식으로, 지환이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기색을 발견할까 봐. 그도 아니면 그저 습관처럼. 서진은 그렇게 부단히도 지환의 눈치를 살폈다.

“걱정하지 마.”  

그 말과 함께 떨어져 나간 온기에, 서진은 다시 제게 등을 보여 걸음을 옮기는 그 뒷모습을 차마 붙잡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봤다.

사실 서진은 알고 있었다. 지환이 어떤 사람인지는, 늘 알았다. 지환은 서진이 지환을 화나게 한 와중에도 다시 돌아와 서진을 달래 줬다. 지환은 그런 사람이다. 어떻게든 서진을 배려하고 아껴 줬다.

그걸 진작 알고 있었는데,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서진은 지금껏, 도대체 뭘 살피고 있었지.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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