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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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은 계속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따라오는 지환을 내버려 둔 채로 집으로 들어왔다. 따라 들어온 지환이 그 뒤에서 서진을 불안하게 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지환의 얼굴을 보거나, 이성적으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분명 지환과 약속을 잡은 카페에 갔는데, 막상 지환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데이트 날만큼은 서진에게 온전히 시간을 쏟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불만이 올라왔지만, 꽤나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라 우선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려 옆자리쯤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어째 들려오는 이야기가 이상했다.
사실 지금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건지.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서진아.”
화를 낼 일이 아니다. 서진은 화를 내면 안 됐다. 도대체 지환 같은 사람이 왜 서진을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지환이 서진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걸 믿었다. 왜인지는 지환 자신도 모르겠다지만, 그래도 좋아한다고 하니까. 다들 그렇게 연애하는 거라고 하니까. 그렇게 그냥 지환을 믿었던 건데, 정작 지환은 정말 서진을 다들의 범위에 넣었던 거구나.
좋아하는 이유 같은 거야 알 필요도 없었겠지. 어차피 지금은 서진을 좋아하다가 나중에는 또 다른 사람을 좋아할 테니까.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정말 당연한 사실인데, 서진은 지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한 번의 변덕이겠지.
“서진아.”
연이어 불린 제 이름에 서진은 결국 답했다.
“게이 아니라면서요.”
분명 지환이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나 빼고 다 안 된다고.”
그런데 카페에서 지환의 앞에 있던 남자는 뭐였지. 분명히 둘이 잤다고 하던데. 지환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랬으면서.”
지환에게 서진은 그저 다양한 시도의 하나일 뿐일까. 서진은 그래도 자신이 지환에게 뭐라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깊게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지환은 게이가 아니라고 했고 본인도 그걸 인정하는 게 어색해 보였지만, 그래도 서진을 좋아한다고 결국 인정했다. 그러니 그 어려움만큼의 의미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만큼도 아니었다고.
“그래서 그렇게 피했으면서.”
서진은 자신이 처음 지환에게 좋아한다고 했을 때를 기억한다. 충동적으로 나간 말이기는 했지만, 서진은 지환의 태도를 보며 정말 후회했다. 지환이 그렇게 서진을 피하게 될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참았어야 했는데. 지환은 불편한 티를 숨기지도 못하면서 서진을 잘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서진은 지환이 남자에게 고백을 받은 게 불편해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대상이 서진인 탓도 있겠지만, 더불어 그 고백을 한 게 남자여서. 지환은 게이가 아니니까.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다고.
“피했던 거 아니야.”
“피했던 거 맞아요.”
서진은 제 등 뒤로 지환이 다가온 걸 느끼며 꾹 눈을 감았다.
“제가 형한테, 뭐라도 되는 건 맞아요?”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그건 고작 몇 개월짜리였을까. 이제 한 달을 넘겼으니 나머지는 언제 지환이 질릴지를 불안해하며 기다리면 되는 건가. 아니, 서진이 지환에게 몇 개월짜리나 되기는 할까.
“나밖에 없다고, 다른 남자는 다 싫다고, 그랬으면서.”
분명히 지환이 그랬는데. 서진은 그걸 믿었다. 지환은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니까.
“너밖에 없는 거 맞아. 남자만 너뿐인 게 아니라 그냥 너밖에 없어. 그래서 사귀는 거잖아.”
지환의 목소리에는 꼭 불안이 담겨 있는 것 같았는데, 서진은 믿을 수 없었다.
“나한테는 그렇게 말했으면서, 어떻게.”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가뜩이나 서진은 지환에게 아무것도 아닌데, 더 질리게 만들 테니까.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 놓으려면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안다.
“가지고 노는 거예요?”
차라리 말이나 그렇게 하지 말지. 헤어지면 어떻게 하냐는 말에 왜 벌써 헤어질 생각을 하냐고 했으면서. 어차피 지환에게는 기정사실이라 생각할 필요도 없었을까.
“잠깐 가지고 놀다가, 익숙해지면 버릴 거예요?”
그 카페에서, 서진이 결국 도저히 참지 못하고 지환의 말을 막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환은 여전히 자신의 전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했을까. 지금 서진과 함께 있는 건 잠깐일 뿐이고 아직도 정말 좋아하는 건 그 사람이니까. 삼 일이면 다른 사람을 사귄다는 지환이 몇 개월이나 붙들고 있던 사람이었다.
“아니야.”
서진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는 손길이 느껴졌다.
“서진아,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아니야.”
그 목소리에 서진은 겨우 눈을 뜨며 지환을 바라봤다.
“그럼 뭔데요?”
“그게,”
지환의 표정에는 망설이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냥 말하지 마요.”
사실 듣고 싶지도 않았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서진은 그냥, 만일 지환이 정말 그렇다고 해도 덮고 싶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그렇다고 지환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랬으니 더 듣고 싶지도 않았고.
“서진아, 내가 무릎 꿇을까? 그럼 조금이라도 들어 줄래? 변명이든 뭐든 제발 조금만 들어 줘.”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요?”
그럼에도 지환은 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사람 무릎이 저렇게까지 싼지. 서진이 할 말을 잃자 지환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가치관의 차이도 아니야.”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랬겠지. 무릎을 한두 번 꿇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달랬겠지.
“그럼 뭔데요.”
서진의 말에 지환이 바로 참회하듯 말했다.
“걸레같이 굴어서 정말 미안해. 나도 내 과거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어. 너도 조금만 안타깝게 여겨 주면 안 될까.”
그 말에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환은 꼭 단어를 저런 식으로 골라서 서진이 이 와중에도 부정하게 했다.
“제가 언제 걸레 같다고 그랬어요.”
서진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더 안타까워요.”
안타깝기는 뭐가 안타까워. 다 자기가 좋아서 한 거면서. 거기다 지환은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예전 언젠가에 분명 그렇게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는데.
“그래, 그건 그래. 미안해.”
자기가 생각해도 그랬는지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하고 다시 사과한 지환은 이내 조심스레 서진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래도 과거는 과거고,”
지금 저런 말을 할 때인가? 서진은 차라리 지환이 입을 다물어 줬으면 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어차피 서진은 지환과 헤어지고 싶지도 않고 질리게 하고 싶지도 않으니 알아서 납득하고 어떻게든 덮을 텐데, 계속 말을 하니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저는 그런 과거 없어요.”
“그렇지. 나만 그렇지.”
서진은 계속해서 생각했다. 이럴 일이 아니다. 사실 별것도 아닌 일이다. 따지고 보면 지환의 말이 맞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지환이 지금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다.
“게이 아니라고 그렇게 밀어낼 때는 언제고.”
그래도 서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내가 싫었던 거면 그렇게 말하지.”
그랬으면 더 마음을 추스르기가 쉬웠을 텐데, 지환은 끝까지 서진을 더럽게 생각한다거나, 역겹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냥 지환이 게이가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는 것뿐이라고. 분명 그랬으면서.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 그렇게 된 거냐면,”
“듣기 싫어요.”
“응, 그렇겠지. 정말 내가 다 잘못했어.”
서진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초조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지환을 바라봤다.
“뭘 잘못했는데요?”
“그러니까 내가 과거에,”
서진이 묻기는 했지만, 도저히 듣고 싶지가 않아 눈을 감자 지환이 말을 끊어냈다.
“미안해. 닥치고 있을게.”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에 서진은 애써 말했다.
“일어나기나 해요.”
지환이 저러고 있어 봤자 뭐가 달라진다고. 어차피 서진은 지환을 용서해야 했다. 사실 용서받을 일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군대 제대하고 조금 진지하게 만난 여자친구가 있었어.”
그럼에도 지환에게서 나온 말에 서진은 애써 답했다.
“알고 있어요.”
서진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실제로 둘이 같이 있는 걸 한 번은 직접 보기도 했고 지환이 실연 후 술을 마실 때 거의 같이 있기도 했다.
“작년에 걔도 바쁘고 나도 바빠서 서로 천천히 어긋나기는 했어. 그러다가 권태기 같은 게 왔나 봐. 나는 그냥 우리가,”
“우리?”
헤어진 지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
“미안해. 내가 말실수가 좀 많잖아. 시정할게. 그러니까, 나는 그 친구랑 내가 어떻게 대화를 하면서 잘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는 그게 아니었나 봐. 그래서 헤어졌어. 그랬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내가 다시 붙잡았고.”
그간 다른 사람 만나는 기간이 그렇게나 짧았던 사람이 무려 다시 잡기까지 했다고. 얼마나 좋아했기에.
“그랬는데 그게 헤어지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거든. 걔는 그때 걔한테 관심 있다고 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고, 걔랑 나랑은 사실 끝내기 몇 달간은 거의 정리하는 것처럼 지냈으니까 마음이 가기는 했나 봐.”
지환이 그대로 슬쩍 서진을 바라봤다.
“오늘 카페에 있던 애가 걔야. 내 전 여친 지금 남친.”
서진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자신이 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지환과 대화를 나누던 사람까지도. 지환은 분명 그 사람과 잤다고 했는데. 지환의 취향은 원래 그랬을까. 앉아 있어서 제대로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우선 지환보다는 작아 보였다. 서진이 보기에 얼굴은 대강 평범한 것 같았는데, 지환이 보기에는 또 모를 일이었다. 나름대로 귀엽다고 여겨질 인상이던가.
“그런데, 왜 잤어요?”
그래서, 전 여자친구의 현 남자친구와 잘 이유는 뭐였을까.
“셋이서 사귀었어.”
기껏해야 바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진의 생각보다 더한 말이 나왔다.
“이상하게 들릴 거 아는데, 다자연애, 그거 했어. 한 달 정도. 처음에는 하늘이랑 걔랑 잘되려고 하는 거 내가 붙잡았어. 하늘이가 힘들어하니까 카페에서 본 걔가 그러면 차라리 둘 다 사귀라고 해서, 그렇게 됐어. 나도 아예 하늘이랑 헤어지는 것보다는 그게 나은 것 같았고.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하늘이가 양다리 걸치는 것처럼 되는 건데 그건 싫다고 하기도 했고, 그럼 차라리 다 같이 사귀면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왔어. 그런데 다자연애라는 게 말 그대로 다 같이 사귀는 거라서.”
지환이 불안한 시선을 가다듬지 못하며 서진을 바라봤다.
“나도 그 다른 상대를, 그러니까, 노력해야 한다고. 그리고 하늘이도 걔랑 내가 먼저 마음 터놓지 못하면 자기는 못 할 것 같다고 했고. 그래서 걔랑 나랑, 그랬던 거야.”
“그래서 잤구나.”
생각보다도 더 아무런 어조도 없이 목소리가 떨어졌다. 서진은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도 알 수 없었다. 지환이 저렇게 시선을 가다듬지 못하는 걸 보니 분명 좋은 꼴은 아니겠지만.
“형한테는 노력하는 게 자는 거예요?”
서진에게도 그랬던 모양이다. 물론 서진이야 지환과 닿는 것도, 뭐든 다 좋기는 했는데, 생각해 보면 지환은 처음 고백할 때부터도 키스했다. 몸이 되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 더불어 서진은 지환이 그 사람과 잘 때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도 대강 알아차렸다. 어쩐지 서진을 눕히는 게 그렇게 자연스럽더니.
“꼭 그렇지는 않지만.”
어떻게 들어도 변명하는 어투가 그대로 횡설수설 이어졌다.
“어쨌든 게이 아니라고 한 건 그래서 그랬던 거야. 어떻게 하기는 했는데 나는 남자랑은 잘 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다지, 그랬어. 그거 제외하고도 어쨌거나 좋아하기도 힘들 것 같고. 그래서 나는 못 하겠다고 하면서 그만뒀어.”
서진은 가만히 지환을 바라봤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게이가 아니라서 안 됐던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걔를 안 좋아해서 그랬던 거기는 한데, 그때는 그걸 몰랐으니까. 그러니까 정말 네가 싫어서 내가 게이 아니라고 했던 건 아니야. 나는 정말 내가 남자랑은 전혀 안 되는 줄 알았어. 이미 시도도 해 봤는데 그랬으니까.”
그런데 서진과는 되는 것 같으니 서진은 안심해야 하는 걸까. 그걸로 됐으니까.
“그래요. 거짓말한 적은 없네요.”
그래, 그걸로 됐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더 생각해서도 안 됐고.
“그냥 말 안 한 거지. 나한테는 그런 거 말할 필요도 없으니까.”
“아니야, 서진아.”
그 다급한 목소리에 서진은 그대로 말했다.
“형, 일어나요. 화 안 났어요.”
언제까지 무릎을 꿇고 있을 생각인지.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서진은 지환이 뭐라고 하든 어떻게든 납득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지환이 이런 식으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어차피 과거인데 네가 뭘 어쩔 거냐고 해도, 그래도 서진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서진아.”
서진은 지환이 자신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니까.
“말할 필요 없던 거 맞아요. 형이 저한테 꼭 말해야 되는 것도 아니었고.”
그 이외의 것은 서진이 가질 수가 없으니까.
“미안해.”
지환에게 서진의 존재는 고작 그 정도니까.
“미안할 거 없다니까요.”
차분한 서진의 목소리에도 지환은 빤히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아, 미안해.”
걱정스러운 표정과 미안함이 가득한 목소리에, 서진은 결국 말했다.
“사과하지 말라고.”
이러고 싶지 않았다. 서진은 지환을 질리게 하고 싶지 않았고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더 빨리 지칠 테니까. 그러니 이제 이런 대화는 그만하고 싶었다. 과거는 과거였다. 말해 봤자 뭐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서진이 이미 들어 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미안해. 잘못했어.”
지환은 이런 이야기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기거나, 아니면 더 능숙하게 그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떠날지도 모른다. 서진처럼 어수룩하고 제 감정 조절 하나 할 줄 모르며 고작 과거 이야기에 이렇게 힘들어하는 사람 대신에.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서진의 말에 지환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더니, 머뭇거리며 서진에게 손을 뻗었다.
“서진아.”
조심스럽게 닿은 손이 그대로 서진의 등을 감싸 안더니 다른 손으로는 서진의 뒷머리를 감싸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서진아, 제발 울지 마. 네가 그러면 내가 진짜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래.”
서진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울 일도 아닌데, 울고 싶지도 않은데, 눈물이 나왔다. 지환과 있으면 늘 그랬다. 뭐 하나 참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생각해 보면 지환이 미안할 일도 아니다. 어차피 서진과 사귀기 전의 일이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말을 안 한 거지.
따져 보자면, 다른 사람들도 사귈 때 자신이 과거에 누구와 사귀었는지를 세세히 모두 말하지는 않았다. 지환도 그냥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니 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마땅했다.
“형이 마음이 아프기는 해요? 어차피 형 죄책감 느끼기 싫으니까 적당히 달래고 끝낼 거잖아요. 내가 이러는 것도 귀찮으니까.”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이야 달래 주겠지. 지금이야 지환도 서진과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귀찮아도 달래 줄 수 있다. 하지만, 나중이 되면? 나중이 될 것도 없이 얼마 후에는? 지환은 이렇게 서서히 서진이 귀찮고 번거롭다고 느끼다가 다른 사람에게 시선이 갈 텐데.
“내가 어떻게 그래.”
지환은 언제든지 서진을 떠날 수 있다. 애초에 지금 서진과 함께 있는 게 이상한 사람이다. 지환은 얼마든지 자신과 더 잘 맞는, 더 편하고 무던한, 저 자신과 잘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갈 수 있다. 지금이야 지환이 잠시 새로운 걸 시도할 모양인지 서진과 있지만, 질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말 안 해서 미안해. 일부러 숨긴 건 아니야. 나도 말하기 무서웠어. 네가 나 이상하게 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정떨어질 만하고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래 산 사람들이라고 제 부모님들의 말이 맞았다. 서진은 뭐든지 열심히 해야 했다. 뭐든 잘해야 했고. 사람들은 다들 타고난 게 있기 마련인데, 그중에는 사람 관심을 끄는 것도 있다. 연우는 그걸 잘했다. 그러니 머리가 나빠도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서진은 다르다.
얼굴 하나는 반반하니 다들 한번 관심을 가져 보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뭐 하나 눈에 띄는 게 없고 사람 잡아 놓을 줄도 몰랐다. 살가운 것도 아니고 어디 특별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서진은 사람 눈치를 잘 살펴야 했고 모두에게 친절하게 굴어야 했다.
더불어, 어차피 누굴 만나더라도 상대방은 서진의 겉모습을 보고 다가왔다가 금세 질릴 테니 괜히 끝이 뻔한 곳에 관심 쏟는 대신 그나마 서진이 잘하는 공부를 하는 게 나았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제대로 살 수도 없을 테니.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서진은 어쩌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는 있다. 그럴 조건들은 있으니. 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개인적으로 들어간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과 거리를 둔 것도 있었고 애초에 필요한 범위를 넘어서는 굳이 다가가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래도, 이미 좋아하게 되어 버렸는데.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데. 그래도 지환은 서진에게 곧 질리겠지. 서진에게 사람을 붙잡아 놓을 만한 점은 없으니까. 지환 같은 사람은 더더욱.
“그런 생각 안 해요. 제가 과민 반응한 거예요. 형 말대로 그건 어차피 과거 일인데.”
서진에게는 지환의 관심을 끌 요소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더 잘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런데도 질리게 만들어 버렸다.
“서진아, 왜 그렇게 말해. 뭐든 네가 마음에 안 들면 말하는 거야. 너는 그래도 돼. 너랑 나랑 지금 사귀잖아. 나는 네가 뭐든 말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화내고, 욕하고, 그렇게 해. 지금도 그래. 나한테 화를 내야지. 왜 혼자 참아. 차라리 화를 내, 서진아.”
서진은 지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그 등을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지환이 서진을 좋아하는 건 맞겠지. 귀찮은 걸 싫어하는 사람이니 좋아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러고 있지도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 봤자 서진은 좋아할 구석이 없는 사람이라서, 금방 질릴 텐데. 지환은 어떻게 하면 서진을 더 좋아해 줄까.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좋아해 줄까. 알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 *
서진은 지환의 얼굴에 로션을 바르며 찬찬히 그 얼굴을 들여다봤다. 지환은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대충 사는 사람으로서, 이런 얼굴을 달고 다니면서도 그다지 관리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또 운동은 열심히 하는 걸 보면 몸 관리에는 상당히 진심이던데.
“서진아.”
서진은 이미 로션을 다 발라 주고도 괜히 지환의 뺨을 문질거리며 답했다.
“네.”
이미 한차례 지환의 연애를 멀리서나마 보기는 했으니 알고 있었지만, 지환은 정말 성실한 연인이었다. 지환이 사과할 일도 아니고 무릎 꿇을 일은 더더욱 아닌 일에도 정말 성심성의껏 서진을 달래 준 이후 지환은 어쩐지 조심스럽게 굴었다. 지환은 아무렇지 않게 닿아 올 때는 언제고 그 이후로는 손잡는 것 하나도 눈치를 보며 동의를 구하듯 천천히 닿아 왔다.
그 조심스러움과 어울리지 않는 섬세함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조금이나마 더 서진을 신경 쓰니 좋은 일 같은데, 그렇게 신경 쓰다 금방 지쳐 버린다면 나쁜 일이겠지.
서진은 손을 조금 옮겨 지환의 속눈썹을 살짝 훑었다. 피부 밑으로 간질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어도 콧대와 같은 골격이 뚜렷해 어디를 보나 잘생기기는 했지만, 사실 그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며 눈동자가 드러날 때면, 외양의 객관적 기준은 모두 소용이 없어졌다. 바로 사로잡히고 마니. 왜 이 사람한테 이런 얼굴을 준 걸까. 가뜩이나 사람이 꼬이는데.
“뽀뽀 안 해 줄 거야?”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나온 목소리에는 장난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서진은 답하는 대신 그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심장은 터질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정말 좋은데, 이 사람은 왜 내가 이렇게 할 수 있게 해 줄까.
서진은 그대로 지환의 목덜미를 감싸며 지환의 표정을 살폈다. 지환은 이제 자신이 먼저 닿아 오기보다는 서진에게 무언가를 해 달라고 하는 경우가 늘었다. 그럼 서진은 당연하게도 그 목소리에 응하기는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환의 눈치를 살폈다.
지환이 먼저 해 달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분 나쁘지는 않겠지. 여자랑 키스하는 거랑은 다를 텐데, 그걸 느끼고 있을까. 달라서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달라도 괜찮다고 느꼈으면 좋겠는데. 서진이 잘 하고 있는 건 맞을까. 지환은 종종 키스하고 나면 서진에게 다 자기 덕에 서진이 키스를 잘하게 된 거라고 하던데, 그건 그럭저럭 괜찮기는 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혹시라도 불쾌해하는 건 아닌지 표정을 살피며 그 입안을 조심스럽게 쓸자, 문득 지환이 눈을 떴다. 시선이 마주치자 지환이 서진의 혀를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눈을 감으며 손을 들어 서진의 눈을 가렸다.
닿는 건 좋다. 하지만 지환의 익숙함을 깨닫게 될 때면 슬퍼졌다. 서진은 종종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속이 좁을까.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어야 하는데.
* * *
씻고 나오니 거실에서 뒹굴거리던 지환이 바로 고개를 들어 서진을 바라봤다.
“머리 말려 줄래.”
물음도 아니고 단정적인 어조였다. 언제 꺼내 온 건지 드라이기도 옆에 준비하고 있어 별다른 말 없이 지환의 앞으로 가자 지환이 바로 드라이기를 들며 서진을 앉혔다. 지환이야 종종 맥락 없는 행동을 했으니 이번 역시 단순히 하고 싶어져서 할 뿐이라고 생각했고 당연하게도 엉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서진의 머리를 말리는 지환의 손길은 능숙하기만 했다.
서진은 지환의 대수롭지 않음을 느낄 때면 종종 기분이 미묘했다. 누구 머리를 또 말려 줬기에 이렇게 익숙할까.
“나 머리 진짜 잘 말리지.”
뿌듯함이 묻은 목소리에 서진은 굳이 다른 것을 묻지 않으며 답했다.
“네.”
“지혜 머리는 항상 내가 말려 줬거든. 나 고3 때 낙이 그거였는데. 공부만 죽어라 하다가 지혜 머리 말려 주는 거.”
하지만 막상 지환에게서 나온 거라고는 서진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가정적이기만 했다.
“그마저도 평일에는 못 했지. 내가 고3이면 지혜는 초등학생인데 내가 나갈 때는 자고 있고 내가 들어올 때도 자고 있고. 그나마 주말에나 깨어 있는 거 봤어.”
슬쩍 고개를 올려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서진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애가 중학교 들어가니까 나보고 말리지 말라고 하는 거야. 자기 친구 중에 오빠가 머리 말려 주는 애 하나도 없다면서.”
그럴 만도 하기는 했는데, 지환의 목소리에는 정말 아쉽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이제 네 머리 말려 주면 되겠다.”
그 말과 함께 지환이 서진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서진은 어쩌지도 못하고 굳었다. 서로 닿는 게 조금 조심스러워진 기색은 있지만, 그래도 키스는 늘 했고 몸을 만지는 것 정도도 가볍게라면 꽤 했다. 그런데도 문득 이런 식으로 닿아 올 때면, 늘 낯설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 이후로는 지혜 머리를 자주 말려 준 건 아닌데, 그래도 가끔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이면 종종 말려 줬어. 따뜻하게 씻고 나와서 머리 말려 주면 그래도 기분이 좀 풀렸는지 얘기도 좀 해 주고 그랬거든.”
지환은 그대로 부드럽게 서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꽤나 자상한 어조가 느릿하게 이어졌다.
“전에 말했잖아. 나한테 바라는 거나,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말해 줬으면 좋겠다고. 네가 마음에 안 드는 걸 다 고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네가 말하면 나는 최대한 노력할 거야. 그러니까 너는 말만 하면 돼.”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서진은 지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싫은 소리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 없다. 서진은 지환이 지금처럼 다정한 게 좋았다. 지환이 서진에게 미안해서든, 다른 이유가 있든, 지금처럼 지내고 싶었다. 괜한 소리를 해 잃고 싶지는 않다.
“서진아.”
그 목소리와 함께 지환의 손이 부드럽게 서진의 귓가를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 따라 귓가가 서서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지환도 다 보고 있겠지.
“예쁜아.”
서진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을 담으면서도, 달기만 한 목소리였다.
“하지 마요.”
결국 붉어진 얼굴을 어쩌지도 못하고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답하자 지환이 웃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응.”
그러면서도 지환은 서진의 목덜미와 귓가를 손으로 간질였다. 결국 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환이 바로 따라붙었다.
“안아도 돼?”
서진이 시선도 맞추지 못한 채로 그저 고개를 끄덕이자 지환이 서진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확실히 키가 크네.”
그 말과 함께 손을 떼어내려 하는 것 같아 서진은 지환의 팔을 붙들어 계속 제 허리를 감싸게 했다.
“작은 게 좋아요?”
그러자 지환의 손이 서진의 허리를 얌전히 감싸 안고 있다가, 슬그머니 티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복근쯤을 천천히 어루만지는 손길에 서진이 오도 가도 못 하고 걸음을 멈추자 오히려 지환이 서진을 끌고 걸음을 옮겨 침실로 이끌었다.
“그래도 키는 큰 게 좋지 않나?”
배에 있던 손이 이제는 천천히 타고 올라가 가슴팍에 닿았다. 긴장에 숨까지 부자연스러워졌는데, 지환은 침대에 서진을 눕힌 후 그 위로 올라타며 꽤나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도 서진아, 키라든가 하는 겉모습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그보다 안에 있어.”
마음이라는 소리를 하겠지 싶었는데, 지환은 서진의 가슴팍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근육.”
진지하기만 한 어투였다.
“인생을 지탱해 주는 큰 힘이잖아.”
정말 그렇게 느낀다는 듯이 의심이라고는 하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너는 훌륭해.”
지환은 그대로 손을 옮겨 지환의 옆구리쯤을 쭉 훑고 내렸다.
“척추기립근이 잘 발달해 있더라. 자세도 곧기는 한데, 아무래도 코어 근육이 좋으면 상대적으로 디스크에서 안전한 게 있기는 하지. 가끔 자기를 지탱해 주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도 척추만큼은 몸을 지탱해 주는 법이야.”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몸을 만지면서 할 말인가 싶어 어이가 없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자 지환이 웃으며 서진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긴장 좀 풀어.”
처음에는 두어 번 짧게 입을 맞추던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지다가, 이윽고 지환이 서진의 입술 사이를 혀로 핥자 서진은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 몸을, 만져도 될까. 지환은 벌써 서진의 티를 올리고 있지만, 그래도 서진이 닿는 건 싫을 수도 있으니까.
“만져도 돼요?”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묻자 지환이 그대로 답했다.
“어.”
서진이 물으면 지환은 늘 아무렇지 않게 답해 줬다. 앞으로도 계속 긍정의 답이 나와야 할 텐데. 서진은 그대로 지환의 옷 속으로 손을 들여놓고 허리부터 그 척추 선을 찬찬히 훑어 올렸다. 닿았을 뿐인데 점점 손이 떨렸다.
서진은 그대로 지환을 제게 밀착시키며 그 뒷머리에 손을 넣어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왜 이렇게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을까. 멋대로 밀어붙여 버릴 것 같았다. 최대한 지환의 눈치를 보고 그에 따라야 하는데도.
서진은 지환의 혀를 빨아 당기며 등을 천천히 타고 올라가던 손을 그 옆구리쯤부터 조금 옮겨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애가 달았는데, 몸이 달은 건지 애달픈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서진은 모든 게 처음이라서, 조금 더 익숙했다면 좋았을 텐데.
서진은 지환이 제 티셔츠를 벗기기 쉽게 잠깐 상체를 일으키고는 그대로 지환의 티셔츠도 벗겼다. 아마, 하겠지. 이번에는 끝까지. 지금껏 키스 이상으로 넘어가는 건 둘 다 은근히 피하고 있었다. 몸을 만지더라도 옷을 벗기지는 않았고. 아무래도 지환은 더 생각할 필요가 있어 보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옷을 벗기고 있다는 건, 이제 고민하던 게 끝났을까. 어떤 결론이 났을까. 그런데 왜, 그거에 대해서는 말해 준 적이 없지. 그냥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애초에 다른 생각은 해 보지도 않은 사람이 그런 말을 들어서 번거로웠을까.
그냥 시간만 조금 끌어 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래서 지금쯤이면 타이밍이 맞는다고 생각한 거고? 지환이 서진의 바지 버클에 손을 댄 순간, 열기에 취해 멍한 머리에 갑작스레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이렇게?
“안,”
고개를 틀어 지환의 입술을 피한 채로 상체를 일으키자 지환이 얼떨떨하게 서진을 바라봤다.
“안 할래요.”
지환의 속도를 생각했을 때 이 정도면 서진을 많이 배려해 주고 있다는 거야 알았다. 거기다 요즘 들어 지환은 닿는 것도 늘 서진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러웠다. 그러니 지환이 충분히 서진을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서진과는 괜찮을 것 같다고 했지만, 애초에 지환은 남자와 한 번 자고 나서 별로 좋지 않았다며 자기는 게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 사람이랑도 자기 전에는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고 했다. 그럼, 서진과는?
서진은 처음이고 지환은 경험한 게 많다. 분명 지환의 기준에는 못 미칠 텐데, 그게 아니더라도 키스나 몸을 만지는 것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했다가 막상 섹스하면 아닐 수도 있고. 그러고 나면 지환은 다시 자신은 게이가 아니었다고 깨닫게 되는 건가.
“어, 그게.”
지환이 다시 서진에게로 몸을 숙이는 걸 피하자 지환은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지금 듣기로는 그게 지금 안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평소에는 그렇게 눈치가 없더니 침대 위에서 하는 뉘앙스만은 잘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당분간?”
서진이 아예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자 지환이 서진을 바라봤다.
“아예?”
차라리 지금이라도 괜찮다고 말할까. 잠깐 당황한 것뿐이고 이제는 괜찮으니까 이어서 하자고.
“아예?”
원래도 그다지 단정하지는 않지만, 서진이 헤집은 탓에 더 흐트러진 머리칼, 서진을 바라보는 시선, 열기에 달아오른 뺨, 계속 물고 빨아 당겨진 탓에 평소보다 붉은 입술, 쭉 뻗은 목선과 이어지는 곧은 쇄골, 어깨, 탄탄한 가슴, 선이 잘 잡힌 복근, 그리고 외복사근을 따라 내려가면, 아직 본 적은 없지만, 어쩌다 보니 닿은 적은 몇 번 있는,
“서진아, 아예?”
서진이라고 이러고 싶은 건 아니다. 얼마나 닿고 싶은데. 그나마 걸치고 있는 옷도 지금 당장 벗겨 버리고 맨살 그대로 깊게 맞닿고 싶은데. 지금처럼 참느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게 아니라, 정말 닿고 싶었다.
“진짜? 서진아?”
어째 지환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아예? 계속?”
지환이 섹스 없이 사람을 얼마나 오래 사귈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지금 당장 어떻게 되든 그냥 해 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안 그러면 지금 차일 텐데.
“아니, 서진아,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래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그냥, 나는,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과 있으면 닿고 싶은 게 당연한데, 닿았다가 그게 별로면 어떻게 되는 거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나.
“섹스 없이는, 못 만나요?”
그 물음에 지환이 서진을 빤히 바라봤다.
“나는 너랑 섹스하려고 만나는 거 아니야.”
당연히 서진을 회유하는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꽤나 단호한 어조였다.
“내가 궁금한 건 왜 네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게 궁금한 거야. 그리고 우리가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너 불안해할 거잖아.”
그건 맞는 말이었다. 서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할 때는 언제고 지환의 시선이 점점 내려가며 횡설수설 말이 이어졌다.
“그, 왜, 우리 그, 언제냐, 그때 있잖아. 거의 갔다가, 오늘같이, 알지? 그랬다가 안 했던, 어, 그때.”
지환이 당연히 서진을 밑으로 뒀던 그때를 얘기하는 건 알았는데, 어째 지환은 손까지 가만히 두지를 못했다.
“그때까지는 분명 너도 그, 우리끼리 소통의 부재, 그게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너도 하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하기 싫다고 하니까, 그게, 그 문제가 왜 생겼는지 생각하면, 그게, 그러니까.”
지환이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어색하게 시선을 내렸다.
“내 말은, 그사이에 우리 사이에 사건이, 사건 하나가 있는데, 그게 내가 잘못한 거니까. 그게 그렇게 따지기 힘들기는 한데, 그래도 그렇지, 내 잘못이지.”
서진이 답할 틈도 주지 않고 거의 숨도 쉬지 않으며 지환은 말을 이었다.
“그것 때문에 네가 기분이 좀, 나빴나 하는 거지. 그러니까, 그냥 나랑 하는 거에 대해서도. 좀, 찝찝하다거나, 그럴 수도 있고.”
신경 쓰이게 했구나. 그런 걸 알아차릴 때마다, 서진은 자신이 지환의 곁에 있어도 괜찮은지, 그런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다자연애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정도는 조금 놀라는 정도로 넘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지환이 이런 식으로 말할 리도 없는데.
서진은 예전 언젠가에 지환이 제 과거를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를 안다. 어쩌면 잘못됐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자신의 과거이니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 서진의 눈치를 보는 건 다 서진의 탓이겠지.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잖아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떨리고 늘 닿고 싶은데, 어떻게 지환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일단 그건 다행인데, 그러면 왜?”
지환의 시선이 그제야 다시 서진에게 닿았다.
“서진아, 나는 네가 말 안 해 주면 아무것도 몰라. 진심이야. 나는 진짜 아무것도 몰라. 정말, 아무것도.”
서진은 지환이 모르는 게 좋았다. 서진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지환의 탓도 아닌 걸 얼마나 신경 쓰는지, 얼마나 닿고 싶은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얼마나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하지만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더군다나 같은 남자가 그런다면 부담스러울 테니까.
“나는 네가 나를 답답해할까 봐 걱정돼. 솔직히 나는 기분 알아차리는 것도 잘 못 하니까 내가 모르는 새에 너한테 상처를 줬을 수도 있고. 네 생각이 바뀐 거에 내 탓이 있는 거야?”
그래도, 조금은, 조금쯤은 털어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불안한 건 서진 하나면 됐다. 지환은 그런 것과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니까. 서진은 어차피 불안과 익숙하니 서진이야 어찌 되든 괜찮지만, 지환은 서진 때문에 불안해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다.
“형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
막상 말을 하고 나니 별것도 아니었다. 서진이 잠자리를 피하는 이유가 지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나았다.
“형은, 형이 게이가 아닌 걸 남자랑 자고 나서 확신했다고 했잖아요. 별로 안 좋았다고.”
“그렇게 말하니까 나 진짜 쓰레기 같은데.”
지환은 그대로 표정을 굳히더니 말했다.
“맞기는 하지.”
“제가 언제 또 그랬어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말인데도 꼭 저런 소리를 했다.
“형이 저랑 자고 안 좋으면 어떻게 해요.”
이런 말을 하는 건 정말 싫었다. 그런 거에 연연하는 것 같으니까. 물론 연연하지만. 그래도 지환이 자신의 과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았다. 어찌 됐든 그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러면 이번에는 정말 게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이것까지는 말하지 말걸. 서진은 늘 고르고 골라서 말을 했는데, 어쩐지 가장 말을 골라야 할 지환의 앞에서는 종종 숨겨야 할 끄트머리가 튀어나왔다.
“저는 처음이니까 잘 못 할 텐데.”
말하고 나니 어이가 없었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할까. 정말 귀찮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자포자기한 채로 지환을 바라봤는데, 막상 지환은 왜인지 귓가까지 붉게 물들인 채로 서진을 조금쯤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인데 당연하지!”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나온 목소리라고는 그랬다.
“못 할 거라는 거네요.”
그거야 서진도 알고는 있었는데, 가장 알리고 싶지 않았던 상대에게 확인받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그게, 그게 왜 그렇게 돼?”
지환은 다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서진아, 그런데 그건 나도 똑같아.”
거짓말. 서진이 지환에게 닿는 거로도 손을 떨 때 지환은 태연히 서진의 척추기립근을 말했다.
“나도 남자는,”
거기다 지환에게 남자가 처음이 아니라는 거야 서진도 알고 지환도 알았다.
“어, 그게, 응, 미안.”
저 역시 깨달았는지 빠르게 사과하자 서진은 그저 답했다.
“네.”
그 답에 지환은 붉어진 제 귓불을 매만졌다. 지환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는 거야 늘 같았는데, 어쩐지 더 시선을 가눌 수 없었다. 꼭, 지환이 긴장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어쨌든, 내 말은, 나는 그냥 열심히, 열심히? 응, 아무튼 최선을 다해서, 이것도 이상한데, 어쨌든 그러는 거지. 그리고 너도 나랑 하고 나서 엄청 별로일 수도 있는 거잖아.”
“안 그래요. 형이랑 닿았다는 거로도 좋으니까.”
바로 답하자 지환이 물끄러미 서진을 바라봤다.
“그럼 나도 그렇지 않을까?”
얕게 떨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곧게 서진을 바라보는 시선과 잔뜩 붉어진 귓가, 그 모든 열기를 숨기지도 않는 지환의 모습이,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구나, 그런데 어떻게 지금 내 앞에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게 했다.
“나도 너 좋아하는데.”
왜 서진을 좋아하지? 어떻게 서진을 좋아할 수 있지? 더 좋은 사람을,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텐데.
“서진아, 좋아하는 사람이랑 닿는 건 늘 떨려. 거기다 못 보일 꼴 많이 보인 후면 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실패한 지 오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할 수 있다면 거리를 두고 싶었다. 서진이 지환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환이 서진을 피할 수 있도록.
“나도 너랑은 다 처음이고 내가 어떻게 하면 네가 좋아할지, 그런 건 전혀 모르잖아. 그거 맞춰 나가려고 사귀는 거고. 그렇다고 섹스를 꼭 해야 된다,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싫으면 안 하는 건데.”
그러면서도 여전히 닿은 시선에 서진은 결국 답했다. 애초에 답이라고 할 건 하나뿐이다.
“싫을 리가 없잖아요. 좋아한다고 했는데.”
지환은 자신의 말을 지킬까. 정말 서진이 얼마나 서툴든 괜찮다고 생각할까. 정말, 그 정도로 서진을 좋아할까?
“서진아, 그럼.”
지환이 그대로 다시 서진을 침대에 눕혔다.
“오늘은 조금만 해 볼래?”
서진은 얼떨결에 침대에 등을 대며 지환을 올려다봤다.
“조금만 하는 게, 가능해요?”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요즈음의 지환은 그저 가볍게 입만 맞추려고 떨어지려고 하기는 했다. 그런 지환을 따라가며 결국 질척하게 혀를 섞고 서로 몸을 만지게 되는 건 다 서진 때문이었고. 바로 방금 섹스는 안 하겠다고 한 것 역시 서진이기는 하지만.
“조금이 어느 만큼이에요?”
슬그머니 지환을 바라보며 하는 물음에 지환이 서진의 머리 양옆에 손을 대고 제 몸을 지탱하며 답했다.
“그냥, 뭐, 쌀 때까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적나라한 언어를 쓸 필요가 있나 싶어 가만히 바라보자 지환도 서진의 기색을 느꼈는지 이어 말했다.
“서로의 생식세포를 배출할 때까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정말 지환다워서 어쩐지 긴장이 풀렸다. 그와 동시에 제 위에 있는 게 지환이라는 게 또다시 너무도 적나라하게 와 닿아 다시 긴장됐지만.
“네.”
심장 소리가 들리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크게 뛰는 심장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지환은 제대로 들은 모양인지 그대로 서진의 바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서진은 지환이 제 바지 버클을 푸는 걸 불안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그 손을 잡았다.
“제가.”
서진은 거절이라고 생각하는지 몸을 물리는 지환을 다시 제게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할래요.”
말해 놓고도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는데, 막상 들려오는 말이 없었다. 역시 그건 싫은 걸까.
“그, 그래.”
불안한 시선을 겨우 들어 다시 지환을 보자 얼떨떨하게 나온 그 말이 그대로 이어졌다.
“내가, 내가 눕는 게 나은가?”
정말 지환도 서진과 닿는 게 조금은 떨릴까?
“네.”
서진은 그대로 지환의 등과 뒷머리를 손으로 받치고 천천히 지환을 눕혀 그 위로 올라탔다. 시선이 잠깐 어긋났다가, 다시 닿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맞닿은 모든 게 뜨거웠다. 서진은 지환의 가슴부터 복근까지 쭉 손을 내리다가, 조금 머뭇거리며 그 바지에 손을 댔다.
바지 버클을 풀자 지환이 바지를 벗기기 쉽게 허리를 들었다. 그 별것 아닌 움직임 하나하나에 손끝이 저렸다. 지환은 괜찮은 걸까. 서진은 이렇게나 휘둘리고 있는데. 적어도 불쾌하지는 않은 거겠지.
서진은 그대로 그 외복사근을 따라 손을 옮겨 지환의 골반쯤에서 손을 멈췄다. 확인하는 게 망설여졌다. 서진은 이미 과할 정도로 흥분하고 있는데, 지환은 아닐까 봐. 키스랑 몸을 더듬는 것 정도에는 흥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만약에 그렇다면 서진이 지환을 세울 수 있을까. 지환은 서진에게 그만큼 흥분한 증거를 보여 줄까.
머뭇거리며 그 배꼽쯤으로 손을 옮기자 문득 지환이 서진의 허리를 잡아 제게 밀착시켰다.
“미안한데, 내가 좀 급해서.”
닿은 몸 사이로 지환의 성기가 부풀어 오른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진으로도 괜찮구나. 그제야 안심이 되면서, 동시에 머리에 열기가 올랐다. 나로도 정말 괜찮은 거구나. 우선, 몸은.
“저도요.”
서진이 그대로 지환의 남은 속옷을 벗겨내자 지환이 문득 시선을 내렸다. 서진이 다급히 지환의 뺨을 잡아 그 시선을 들어 올리자 지환은 그대로 물었다.
“너는?”
“저는.”
서진이 머뭇거릴 틈도 없이 바로 서진의 바지에 손을 가져다 대는 그 행동에 서진은 겨우 말했다.
“제가, 할게요.”
서진은 그대로 다시 지환에게 입을 맞췄다. 차라리 이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애초에 서진이 하겠다고 한 이유도 그랬다. 지환이 서진의 몸을 봤다가 역시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냥 지환이 서진의 몸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서진은 결국 저 역시 바지와 속옷을 벗고 지환의 배에 손을 올렸다. 거리를 두지 않으면 바로 맞닿으려고 할 테니까.
“잠깐만.”
밑을 보려고 하는 지환의 행동에 서진은 잠시 떨어진 지환을 다시 쫓아가 입을 맞췄다. 지환이 지금 자신과 맞닿아 있는 게 남자라는 걸 자각하지 못할 수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래를 확인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그랬다가 정말 더는 못 하겠다고 할 수도 있는데.
“뭘 확인하려고요.”
“궁금하잖아.”
살짝 헐떡이는 숨 사이로 나온 답에 서진은 지환의 아랫입술을 빨아 당기며 그 눈을 바라봤다.
“얼굴 봐 주세요.”
그래 봤자 남자 얼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얼굴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거기다 지환도 서진의 얼굴은 익숙해졌을 테니, 차라리 얼굴을 보고 있는 게 그나마 낫겠지.
“왜? 부끄러워?”
그 말에 갑작스레 서진의 걱정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졌다. 지환과 서진은 생각하는 게 이렇게나 달랐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닌데. 그래도 아직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아 지환의 입가에 입을 맞추자 지환이 그대로 서진의 양 뺨을 손으로 잡았다.
“그래. 얼굴 볼게.”
서진은 지환의 입술 사이를 핥아 벌리며 여전히 그 복근에 가만히 놓여 있던 제 손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여기까지는 해 봤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 처음인데.
옆구리로 옮겨간 손이 천천히 장골을 훑자 지환이 서진의 혀를 빨아 당겼다. 서진은 그대로 손을 내려 탄탄한 허벅지를 훑었다가, 손을 그 안쪽으로 옮겨 허벅지 안쪽을 타고 손을 올렸다. 그리고 더, 위로.
서진은 제 손에 닿은 뜨거운 살갗을 손바닥으로 넓게 문지르며 유심히 지환의 표정을 살폈다. 서진의 손은 지금껏 지환이 닿았을 손과는 확연히 다를 텐데,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을까. 난데없이 큰 손이 닿아서 놀라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워야 하는데도, 점점 더 조심스럽게 구는 게 힘들었다.
그와 함께 생경한 사실을 깨달았다. 크구나. 그전부터 몸이 닿았던 전적으로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손에 쥐자 더 확실히 느껴졌다. 이 정도는 좀 적당해도 될 텐데.
눈으로도 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입술을 떼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서진은 조심스레 지환의 귀두 끝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조금 더 힘을 줘서 잡아도 될까.
기둥을 따라 조심스레 손가락을 움직이며 뿌리를 감싸 쥐자 문득 지환의 눈꺼풀이 들리며 서진과 시선이 마주했다. 혹시 뭘 잘못했나 싶어 저절로 움찔했는데, 지환이 서진의 혀를 살짝 깨물었다.
“야, 한서진, 이게 아니지.”
“네?”
아무리 서진이 못한다고 해도, 그걸 이런 식으로 말한다고?
“서로 쌀 때까지라니까?”
하지만 막상 지환에게서 나온 건 서진이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둘 다. 애초에 그럼 넌 왜 벗었는데.”
그거야, 지환이 벗으라고 했으니까.
“이러면 나만 싸잖아.”
그 말의 의미도 당황스러웠고 사용하는 단어도 당황스러웠다.
“형, 제발, 좀.”
서진이 잠시 손을 멈춘 사이 지환은 바로 시선을 내렸다. 그 시선은 서진이 잡은 제 성기를 한번 바라보고는, 한 것도 없이 꼿꼿한 서진의 성기로 옮겨갔다가, 그러고는 서진의 얼굴을, 또다시 시선을 아래로,
“그만.”
소리에도 색이 있다면 분명 붉게 달아올랐을 게 분명한 서진의 목소리에도 지환은 내려간 시선을 올리지 않았다. 역시 실제로 보는 건 싫은 걸까. 지환이 남자랑 잤다는 건 알지만, 그게 잘 안 됐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도 그렇게 되는 건가. 그래서 못 보게 한 건데, 지환도 서진의 얼굴만 보고 있겠다고 했으면서.
“아, 잠, 깐,”
분명히 서진은 정말 조심스럽게 주위를 어루만지다가, 그러고도 머뭇거리며 지환의 성기에 손을 댔는데, 그와 대비적으로 지환은 정말 덥석 서진의 성기에 손을 댔다.
“왜 너만 만져.”
이게 지금 그런 말을 할 때인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아는 거겠지. 둘 다 벗고 서로의 성기에 손을 대고 있는 건, 그건 알고 있겠지.
“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렇다고 내가 만지지 말아야 되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런데, 그렇다고 지환이 서진을 만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몸이라면 이미 꽤 만지기는 했는데, 그간 지환은 어쩐지 서진의 몸을 만진다기보다는 인체 근육 위치를 외우는 것 같았으니까.
“괜찮아요?”
사실 물을 여유 같은 건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물어야 했다. 지금을 놓치면 아예 끝나 버릴지도 모르니. 그럼에도 막상 지환은 서진이 얼마나 불안한지는 알지도 못하는 듯이 다시 시선을 내렸다.
“키도 크고 손발도 커서 클 것 같기는 했는데.”
“형, 제발 그만.”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아 다급히 뱉은 서진의 저지에 지환이 그제야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럼.”
어쩌면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얼굴에는 웃음기도, 장난기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만진다?”
이미 만지고 있으면서. 거기다 지환이 그렇게 말하면 서진은 싫다고 말할 수도 없는데. 애초에 서진은 이런 걸 바라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지환이 스스럼없이 서진에게 닿아 오는 건. 서진은 그저 자신이 지환에게 닿았을 때 지환이 굳거나, 피하지만 않았으면 했을 뿐인데. 지환은 늘 서진의 예상과는 다른 행동을 했다.
지환은 그대로 손을 움직여 서진의 기둥을 감싸 손바닥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손가락을 쥐는 힘이 가늠되지 않는 모양인지 살짝 찌푸린 표정에, 정말 어이없게도, 어쩌면 그냥 그 표정을 보는 거로도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겠지만.
서진은 저 역시 손에 쥔 지환의 성기를 천천히 쓰다듬다가, 그 뿌리부터 기둥을 넓게 잡아 쓸어 올렸다. 말없이 서로 손을 움직이는 소리만이 방 안을 울렸다. 서진은 지환의 손길에 착실히 흥분하면서도, 지환을 흥분시키려 노력하면서도, 슬쩍 지환의 얼굴을 살폈다.
어디를 보는지 뻔하게 시선을 내린 채 꽤나 열중한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당연하게도 서진은 남이 제 것을 만져 준 경험이 없지만, 그럼에도 확연히 알 정도로 지환은 정말 못했다. 물론 서진이라고 지금 잘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그게 좋았다. 남자랑도 했다던데, 그때는 이런 건 안 했을까. 그래도 서진과는 괜찮으니까 하는 거겠지.
그런 거나 생각하는 게 한심했는데, 그래도 어색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는 지환을 보면 또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서진은 그대로 지환의 선단을 비비며 기둥을 손끝으로 살짝 짓누르듯 긁어내렸다. 눈을 봐 줬으면 좋겠는데. 눈이 마주쳤으면.
시야까지 뿌연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가득한 열기 속에서 하는 생각이라고는 그랬다. 흘러나온 쿠퍼액으로 점점 움직임이 매끄러워진 사이로 기둥 옆면을 따라 긁자 문득,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눈이 마주쳤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할 때는 언제고 막상 그 곧은 시선이 닿자 서진은 고개를 숙여 지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이러면 표정을 볼 수 없는데, 그래도 시선을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눈을 보고 싶은데.
서진은 점점 더 미끈거리는 손을 더 빠르게 움직이며 겨우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또다시 시선이 마주했다. 지환은 계속해서 서진을 바라보고 있던 모양인지, 바로 마주친 그 눈동자는 서진이 피할 겨를을 줄 생각도 없다는 듯이 곧게 서진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기를 바랐던 이유는, 지환이라면 이렇게 서진을 봐 줄 것 같았으니까.
지환은 원래 사람을 이런 식으로 보는 사람이다. 서진만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서진에게 닿아 있다. 어쩌면, 조금 더 닿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서진이 그럴 수 있을까. 조금 정도는, 그래도 얼마간은, 조금 더 붙잡을 수 있을까.
서진은 그대로 지환에게 입을 맞췄다. 혀를 섞고 그 입안을 헤집으며 손으로는 열기가 오른 성기를 짓누르듯 비비고 흔들었다. 지환이 서진의 것을 보고도 흥분이 식지 않은 건 다행이다. 거기다 스스로 만지기까지 하고 있다는 건 예상 밖이고. 이미 충분히 과분한데도, 왜 계속 더 바라게 될까.
더 진지하게 여겨 줬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서진만을 진지하게 여겨 줬으면 했다. 지환은 대부분의 것을 무던히 해결하는 사람이지만, 실상 마음먹은 일에는 꽤나 진지하니까. 그런 일이, 사람이, 지환에게 하나뿐이지는 않은 것도 안다. 그중에 서진이 들어가 있다는 건 분명 서진이 바랄 수도 없는 행운이 맞는데, 서진에게는 행운이지만 지환에게는 일상이겠지.
지환과 닿으면 늘 그랬다. 더 닿고 싶지만, 버거웠다. 시선을 마주해 줬으면 하는데, 곧게 직시하지는 않았으면 했다. 웃는 모습이 좋지만, 여상스럽지는 않았으면. 서진만이 닿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왜 서진은 만족을 모르고 점점 더 얻지도 못할 걸 바라게 될까.
서진은 불안해할 자격이 없다. 서진이 불안해하면 지환까지 느끼게 된다. 그럴수록 지환은 서진에게 더 잘해 주는데, 그럴수록 서진은 더 불안해졌다. 지환은 서진을 좋아할까.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좋아하겠지. 그런데, 얼마나? 지금처럼 익숙하지도 않은 남자 몸에 닿을 수는 있을 정도로?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예민하게 구는 서진을 달래 줄 수는 있을 정도로?
점점 더 한계가 임박해 오는 게 느껴져 지환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는데, 지환은 오히려 서진의 성기를 감싼 손을 더 빠르게 흔들며 문득 혀로 서진의 입천장을 긁듯이 핥았다. 그러면서 다른 손을 들어 올려 서진의 척추를 손가락으로 더듬듯 올라가는 그 행동에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도대체 서진한테 어떻게 이렇게까지.
서진이 지환의 귀두 바로 밑을 엄지로 문지르며 기둥을 빠르게 훑자 맞닿은 입술 사이로 짧은 한숨 같은 신음이 흘러나오며 맞닿은 몸이 언뜻 경직됐다. 서진이 그대로 새어 나온 정액과 함께 그 성기를 넓게 짓누르자 곧이어 서진의 손안에 질척한 정액이 토해져 나왔다. 서진도 더는 버틸 수 없어 다시 지환의 손을 떼어내려 했는데, 지환은 오히려 서진의 척추 선을 따라 손가락을 타고 쭉 그 표면을 긁었다.
“놔, 으, 주세요.”
결국 말을 내뱉었는데도, 지환은 다시 서진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바로 혀를 강하게 빨아 당기며 선단 끝을 비비자, 서진은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사정했다. 서진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지환은 젖은 제 손과 더불어 지환이 아래에 있던 탓에 그 아랫배에 조금 튄 정액을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아, 내가 누워 있으니까.”
제 몸에까지 튈 줄은 예상치 못했다는 그 목소리에 서진은 바로 침대 옆에 놓여 있던 티슈로 제 손을 닦고 지환의 손, 그리고 그 아랫배를 닦아 줬다.
“놓으라고 했잖아요.”
그전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끝을 참지 못했다. 기분 나빴겠지. 눈도 마주치지도 못하고 있자 지환이 서진을 쭉 잡아당겨 제 옆에 눕게 했다. 서진이 그대로 지환의 표정을 살피자 지환이 손을 들어 서진의 눈을 가렸다.
“너 키스할 때 눈 뜨고 하더라.”
그거야, 지환이 싫어할 수도 있으니 표정을 살피느라 그랬다.
“나한테는 분위기 그렇게 찾더니 너도 좀 찾아봐.”
“싫었,”
싫었어요? 그 말이 나오기 전에 지환의 입술이 짧게 서진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무슨,”
또다시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형, 잠,”
그리고 다시. 이쯤 되면 지환이 일부러 서진의 말을 막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결국 서진이 입을 닫자 지환이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조금 전처럼 가벼운 접촉이 아닌, 부드럽게 서진의 입술을 벌리는 그 온기에 서진이 순순히 따르자 지환은 그저 조심스럽기만 한 태도로 서진의 입안을 느릿하게 쓸었다.
서진은 어느새 지환이 제 눈가에서 손을 거두어들였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눈을 떠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지환의 표정과 반응을 살피며 뭔가 잘못된 건 없는지를 알아내야 하겠지만, 서진은 그저 눈을 감은 채 조심스레 지환에게 응했다.
눈을 감으니 느껴지는 거라고는 정말 지환뿐이었다. 서진이 해 본 키스야 지환과 한 것뿐이라 비교 대상은 없지만, 조심스럽게 이어지는 입맞춤이 어딘지 간지러웠다. 혀를 빨고 입 안쪽 살을 건들며 살짝 헤집었다가 달래듯 닿아 오는 그 과정들이 더없이 무르고 녹녹하기만 했다.
서진은 닿았던 것만큼이나 조심스럽게 떨어지는 입술에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또다시, 피할 곳 없이 지환의 시선이 닿았다. 그러고는 그 얼굴에 온기가 퍼지듯 피어나는 웃음 사이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웃어 주라, 예쁜아.”
그 어이없는 호칭에 어쩔 수 없이 웃자 지환이 짧게 누르듯 서진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맞췄다.
“해 보니까 별거 아니지 않아?”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진의 입꼬리가 굳었다. 별 게 아니라는 말을,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다. 지환에게 이 정도야 별거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하필이면 지금이어야 했을까. 서진에게는 꽤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미안. 내가 또 뭐 잘못했구나.”
그럼에도 탄식처럼 나온 사과에 서진은 물끄러미 지환을 바라봤다.
“별거예요.”
서진의 방어기제 때문이라는 걸 안다. 지환의 과거가 어땠든, 지환은 제 과거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서진을 똑바로 마주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지환이 어떤 말을 하든 별다른 속뜻은 없다는 것도 아는데, 그럼에도 꼬아서 듣는 건 다 서진의 탓이었다.
“나도 그런 뜻으로 한 건 아닌데.”
역시나 서진 때문에 변명하듯 나온 그 말에 서진은 그저 답했다.
“알아요.”
“어?”
서진도 지환이 서진의 긴장을 풀어 주려 한 말이라는 건 안다. 다른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지환은 서진이 다른 식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 했겠지. 그런 방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닌 거 안다고요.”
서진의 말에 지환이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다시 편하게 침대에 등을 기댔다.
“나 말 진짜 못하지.”
“네.”
아무리 그래도 해석이 갈릴 수 있는 말을 꼭 지금 해야 했나 싶기는 해서 답하자 지환에게서 들리는 목소리가 없었다. 지환의 그 미묘한 표정을 보아하니 그래도 방금 한번 실수를 했다고 이번에는 참은 모양이었다.
“욕하려고 했죠.”
“아닌데.”
신빙성은 없지만, 서진은 별달리 반박하지 않으며 지환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그 입술을 살짝 물고 빨아 당기며 슬쩍 시선을 들어 올리자, 서진을 바라보고 있던 지환과 눈이 마주했다. 잠시간 빤히 서진을 바라보던 지환이 눈을 감았다.
오늘은 괜찮았을까. 사정이야 자극에 반응하는 생리적 현상이고 정신적인 건 또 다를 텐데. 그래도 지환은 싫은 건 싫다고 말해 주니까, 그런 말이 없는 지금은 괜찮은 거겠지.
서진은 저 역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뒷머리에 지환의 손이 닿은 게 느껴졌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을 안다. 이럴 때면, 꼭 아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게 없이 조심스러운 손길과 따뜻한 그 온기에.
“씻을 거예요?”
입술을 떼어내며 묻자 지환이 눈을 떠 서진을 바라봤다가, 방금 조심스러웠던 손길은 모두 잊었다는 듯이 아무렇게나 서진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어. 근데 조금 더 이러고 있다가.”
지환은 그대로 서진을 제 가슴팍에 기대게 했다. 서진이 지환보다 컸던 탓에 어디를 보나 안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서진은 그저 그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씻을 거야?”
머리를 쓰다듬다가 이제는 서진의 귓불을 매만지며 나온 물음에 서진은 살짝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봤다.
“조금만 나중에요.”
그런데 서진은 정말, 지금처럼 나른한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었는데, 몸은 도대체 왜 이럴까. 귓가를 매만지던 지환의 손이 그대로 서진의 목덜미로 내려가 닿았다. 물론 닿는 게 좋고 닿아 있는 게 좋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더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느낌이라는 게 좋은 건데. 그런데 몸은 왜.
정신과 신체의 괴리에 자괴감을 느끼며 들키기 전에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서진이 일어나기도 전에 지환이 상체를 살짝 일으키더니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야.”
지환은 의식하지 않으면 종종 격 없는 호칭을 썼다. 사실 그것도 좋기는 한데,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았다. 어쨌거나 서진의 의식한다는 뜻이니까. 그래도 역시 지금처럼 인식도 못 하고 서진을 부르는 것도 좋았고.
“이번에는 이거 써 보자.”
역시나 몸이 닿아 있었는데 모를 리가 없던 모양인지 지환이 꺼낸 건 이미 서로 거기 있다는 걸 알고 있던 젤이었다. 지환이 늘 콘돔을 가지고 다닌다는 걸 알자마자 서진은 제집에 섹스에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 놨다. 지환이 가지고 다니던 것들이 향해야 했던 대상이 우선 서진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조금 차갑나.”
젤을 손에 부었던 지환이 어느덧 다시 서 있던 서진의 성기에 젤을 넓게 펴 발랐다.
“제가 할게요.”
다급하게 나간 목소리에 지환이 제 손으로 서진의 손을 잡았다.
“네가 하는 건 좋은데.”
좋은데? 차마 그 질문도 하지 못하고 초조하게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그대로 서진을 바라봤다.
“그래도 나는 좀 더 닿고 싶어.”
지환은 그러면서 은근히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겨 제게 맞닿게 했다.
“이건 좀 빠른가?”
“좋아요.”
생각할 것도 없이 튀어 나간 목소리 뒤로 서진이 말을 이었다.
“좋아해요.”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은 너무 가벼워 보이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흘러나가는 목소리를 멈추지 못했다. 서진은 그대로 지환에게서 젤을 넘겨받으며 지환의 아랫배와 그 성기에 젤을 넓게 펴 발랐다. 차갑던 온도가 금세 뜨거운 살갗에 닿아 온기를 머금었다.
맨살이 닿았을 때와는 달리 미끈거리는 감촉을 그대로 손바닥으로 넓게 비비자 반쯤 힘을 받아 있던 어쩐지 모양이 예쁜 그 성기가 점점 더 단단해졌다. 몸은 몸일 뿐이지만, 그래도 몸도 안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증명받는 것 같아 더 잘하고 싶기도 했다.
서진은 지환의 표정을 살피며 천천히 허리를 내려 성기를 맞닿게 했다. 그러니까, 닿는다는 건 이런 의미가 맞겠지. 미끈거리고 뜨거운 감촉에 점점 더 서진이 지환과 맞닿아 있다는 게 느껴졌다.
서진은 지환과 제 성기를 맞닿게 잡은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맞닿은 성기가 짓눌리며 드문드문 서로의 복근에 닿았다. 서진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귀.”
열기에 붉어진 그 귓가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지환의 것이면 뭐든 그렇지만.
“물어도 돼요?”
“어.”
서진은 머뭇거릴 정신도 없이 지환의 그 귀에 입술을 댔다가, 그대로 귓바퀴를 핥았다. 마주 잡은 성기를 비비며 귓불을 빨아 당기자 지환이 문득 고개를 돌려 서진을 바라봤다.
“한서진.”
“네.”
멍하니 답하며 허리를 움직이자 지환이 흥분에 살짝 눈가를 찌푸린 채로 말했다.
“입술.”
원래 다들 목소리만으로도 쌀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걸까.
“뽀뽀.”
서진이 입을 맞추자 지환이 그대로 서진을 끌어안았다. 맞닿은 사이로 손을 움직이며 허리를 치대자 젤과 더불어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이 점점 새어 나오는 액체에 성기가 아무렇게나 손안에서 빠져나갔다가, 손끝에 긁히며 복근에 비벼졌다.
살갗이 비벼지며 점점 질척이는 소리가 커졌다. 귓가에 난잡하게 소리가 울리는 걸 줄일 생각도 하지 못하며 손바닥으로 지환의 선단을 문지르자 맞닿은 입술 사이로 헐떡임이 전해졌다. 숨을 몰아쉬는 소리조차도 새어 나오지 못하게 잠깐의 숨을 내보내고는, 다시 입술을 찾았다.
혀를 비비고 빨아 당기며 손을 움직이고 맞닿은 성기를 짓누르자 점점 더 열감이 치솟았다. 성욕을 가장 돋우는 건 뭘까. 어쩌면 직접적 자극일 수도 있겠고 어떤 사람은 시각, 또 다른 사람은 청각, 그렇게 모두 다른 기준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서진의 것이라고 한다면 역시, 제게 닿은 사람이 누군지. 그 하나만으로 모든 게 빠듯했다. 아니, 사실 넘쳐흘렀다.
“형.”
“응.”
눈을 감고 뜨는 것 하나만으로도, 지환의 속눈썹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는 건 정상적인 범위가 맞을까.
“아,”
평소보다 나직하게 가라앉은 그 목소리에 기둥을 훑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허리를 움직이자 맞닿은 지환의 몸이 꽉 조여지듯 굳는 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걸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이러니까 할 거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지환이 흥분한 걸 느끼는 게 서진의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지환이 서진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서진을 향해.
손안에서 미끄러져 그 배에 성기가 비벼질 때면 근육이 조여드는 것도, 입술 사이로 벅찬 숨을 내뱉는 것도, 입을 맞추는 서진의 목덜미를 주무르듯 쓰다듬는 것도, 떨리는 속눈썹도, 질척하게 젖은 입술도, 어깨에 닿은 손끝도, 맞닿은 살갗도, 그 하나하나가 모두 감당할 수 없이 버거웠다.
그대로 빠르게 손을 움직이자 지환의 다리가 살짝 들리며 서진을 바짝 잡아당겼다. 그 사이로 서로의 복근에 아무렇게나 성기를 치대자, 곧이어 서로를 틈 없이 끌어안은 채로 그 배에 지환과 서진이 거의 동시에 사정했다.
서진은 문득 제 배쯤을 바라봤다. 맞닿아 있던 탓에 서진의 배에도 정액이 눌어붙었다. 분명 이 중에 지환의 것도 있겠지 싶어 숨을 몰아쉬면서도 가만히 배에 손을 대 보자 지환이 살짝 헐떡이는 숨으로 말했다.
“이러니까 둘 다,”
지환이 그대로 서진의 배로 손을 뻗었다.
“묻었네.”
그 모습에 서진은 그제야 다급히 제 배와 지환의 배에 튄 정액을 닦아냈다.
“왜 너만 만져.”
“그거 만져서 뭐 하게요.”
“그럼 넌 뭐 했는데.”
“저는, 그냥.”
지환의 몸에서 나왔으니까 만져 보고 싶었다고 하면 이상하게 볼까. 어디까지가 말해도 괜찮은지를 알 수 없어 대강 말을 끊자 평소보다 피부가 달아올라 있던 지환이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지금 깨달은 건데.”
“나쁜 거예요?”
나쁜 거면 말하지 말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지환은 고민하는 듯 서진을 바라봤다. 설마하니 지금 이 상황에서 나쁜 걸 깨달았다고 하지는 않겠지. 손으로 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직접 닿는 건 거북했다거나, 심지어 지환이 이렇게 하자고 한 건데.
“이게 조금은 아니잖아. 어쨌든 섹스는 한 건데.”
설마하니 지환은 삽입이 없으면 섹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걱정을 조금 하기는 했는데, 다행히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너는 안 하겠다고 한 걸 내가 조금만 하자고 꼬셨는데 이건 이미 조금이 아니고.”
지환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내가 분위기를 조성한 건가. 거절 못 하게?”
“아니요. 저는,”
이미 할 거 다 해 놓고 서진은 왜인지 제 얼굴이 붉어졌으리라 확신했다. 지환도, 이런 걸 묻는구나. 서진을 신경 쓰고 있구나. 서진이 흥분할 만큼 흥분했다는 걸 지환도 당연히 알겠지만, 신체적 반응과는 별개로 혹시 모르니 걱정을 해 주는구나. 그런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저는 좋았는데.”
어떻게 들어도 쑥스러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서진은 슬그머니 지환의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까지 어색하게 굴 필요는 없는데, 어째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나도.”
다행이다. 서진이 그대로 지환에게 입을 맞추자 지환이 문득 서진의 혀를 살짝 깨물며 떨어졌다.
“야, 근데 원래 이런 거 물으면 안 돼. 좋았냐, 막 이런 거. 근데 나는 그거 물어본 건 아니기는 했는데.”
지환은 그대로 서진과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그래도 괜찮았으면 됐다.”
그 말에 서진은 결국 지환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그 허리를 감싸 안으며 몸을 맞댔다.
“괜찮은 게 아니라, 좋았어요.”
지환과 함께 있으면 불안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았다. 그래서 계속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알고 싶었다. 그 모든 모순은 모두 지환을 향했다.
“나도.”
물론 그 말도 충분히 좋기는 한데, 가만히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은 서진이 자신을 왜 보는지 알지 못하는 듯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말했다.
“이 상황에서 미안한데, 나는 네가 말 안 해 주면 아는 거 하나도 없다니까?”
지금까지 지켜봐 온 바로 지환은 그 말만큼은 확실히 지켰다. 본인도 그것만큼은 정말 잘 알고 있었고.
“더 자세히 말해 주세요.”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말하자 지환이 서진의 말뜻을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서진의 머리칼을 헤집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
그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의 그 목선을 바라봤다. 그와 함께 문득 목 옆선과 목덜미 사이의 점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늘 보고 있으니 문득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네.”
서진은 그 점 위로 입을 맞췄다. 아예 안 보이는 곳은 아니니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알아차릴 수는 있겠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겠지만, 서진보다 먼저 알아차렸을 무수한 사람들이 있겠지만, 아마 앞으로도 꽤나 많은 사람의 시선이 닿겠지만, 그래도 입을 맞출 수 있는 건 서진뿐이었으면 했다.
* * *
서진은 수업이 끝난 강의실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환과 서진은 이미 서로의 시간표를 알고 있었다. 끝나는 시간은 거의 맞춰 놨는데, 서진도 지환도 이 뒤에는 수업이 없었다. 지환에게 우산이 있을까. 지환은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는 편이니 없을지도 몰랐다. 방학 때는 늘 붙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개강을 하니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 어색했다. 고작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형 우산 있어요?]
그 메시지를 보내고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지환이 읽었다는 표시가 뜨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형.”
[어. 너 우산 없어?]
서진이 받자마자 내뱉어진 지환의 목소리에 서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은 있어요?”
[과방에 몇 개 굴러다녀.]
우산이 있다니 다행이었는데, 그럼에도 실망스러웠다. 함께 있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들고 싶었는데.
[너는?]
“없어요.”
접이식 우산을 멀쩡히 챙겨오기는 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답하자 지환이 말했다.
[내가 데리러 갈까?]
서진이 답하기도 전에 웃음기가 섞인 지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데리러 가고 싶은데.]
그 말에 서진은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조금 쑥스러워져 괜히 목덜미를 매만졌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서진은 한동안 지환의 이름이 적힌 그 액정을 바라보다가, 건물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앞에서 지환을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 끝에 지환이 걸렸다. 지환 역시 서진을 발견한 모양인지 그대로 서진에게 다가왔다. 서진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려 지환의 손을 바라봤다.
“우산이 두 개네.”
보통 이럴 때는 한 우산을 쓰고 같이 가는 걸 생각하지 않나. 우선 서진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몇 개 굴러다닌다고 했잖아. 거의 공용이지. 이제 원래 누구 거였는지도 몰라.”
하지만 지환은 서진과 생각이 달랐던 모양인지 아무렇지 않게 우산을 내미는 모습에 서진은 그 우산을 받아 들어 펼쳤다.
“형, 생일에 뭐해요?”
우산이 맞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만을 남긴 채 묻자 지환이 답했다.
“한참 남아서 아직 모르겠는데.”
한참 남은 건 아니지 않나. 개강한 지 며칠 지나지 않기는 했지만, 지환의 생일은 이달 17일이었다. 그래도 아직 약속은 없다는 말이겠지. 그날 서진과 함께 있자고 해도 괜찮을까.
“애인이 아직 약속을 안 잡아 줘서.”
이어진 지환의 말에 서진은 잠시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말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이게 바로 경험의 차이인 모양이었다. 서진은 그날 지환에게 다른 약속이 있을지, 서진과 만나도 괜찮을지, 그런 걸 어떻게 물어야 할지를 고민했는데 막상 지환은 당연하게도 그날을 서진과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진이 지환의 애인이니까.
“누구 만날 약속 없어요?”
그럼에도 한번 물어보자 지환이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보통 사귀는 사람 있으면 그날은 비워 놓지 않나?”
서진은 사귀는 사람이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환은 그런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 상황은 굳이 알고 싶지 않으니 서진은 그저 지환만 그러면 됐다.
“그럼 저랑,”
드디어 그럼 그날은 서진과 함께 있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문득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환 오빠!”
그 목소리에 서진과 지환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건물에서 어느 사람이 우산이 없어 오도 가도 못 하고 있던 모양인지 지환을 간절하게 바라봤다. 지환과 아는 사람인가.
서진이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은 그저 자리에 선 그대로, 자신을 부른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하지도 않으며 다시 서진을 바라봤다.
“너랑 뭐?”
“오빠!”
“형 부르는데요.”
굳이 지환이 지금 저 사람에게 갔으면 하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인데 이렇게 대해도 되나 지환의 인간관계가 대신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정작 지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근데 나 너랑 얘기하잖아. 지금 좀 중요한 얘기 나올 것 같아서.”
서진은 지환의 이런 점이 좋았다. 우선 객관적으로 불안할 일은 거의 없었다. 다른 일은 제쳐 두고 서진에게 집중해 주었으니.
“생일에 저랑 같이 있어요.”
지환이 멍석을 깔아 줬으니 서진도 빼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자 지환이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 말 뒤로 지환이 그제야 뒤를 돌아 자신을 부른 사람에게 다가갔다.
“이다은 여기서 뭐 하냐.”
지금껏 지환이 대놓고 무시했던 건 신경 쓰지도 않는 모양인지, 다은이 활짝 웃으며 지환을 바라봤다.
“오빠, 나 정문 편의점까지만 씌워 줘. 우산 사게.”
서진은 그저 지환과 다은이 대화를 나누는 걸 바라봤다. 불안할 이유는 없다. 지환은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처신을 과할 정도로 잘했다. 방금만 해도 지환은 서진의 말을 듣자고 다은의 부름을 무시했다.
그렇기는 해도, 싫은 건 싫은 거라 지금이라도 제게 우산이 있으니 그걸 다은에게 주자고 할까 했는데, 지환은 그대로 제 우산을 다은에게 건넸다.
“너 써.”
“응?”
다은이 가만히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은 안 받을 거냐는 듯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쓰고 나중에 과방 가져다 놔. 나도 거기서 가져왔으니까.”
“오빠 정문 쪽으로 가는 거 아니야?”
“거기 지나기는 하지.”
다은이 결국 우산을 받아들자 지환은 그대로 서진의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레 줄어든 거리에 서진이 지환을 바라보자 다은은 비좁은 지환과 서진의 우산을 한번, 그리고 제 우산을 한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오빠가 이쪽으로 오는 게 넓지 않아?”
확실히 서진과 지환은 둘 다 체격이 있는 탓에 한 우산을 쓰면 둘 다 젖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환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 다은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슬쩍 지환의 티셔츠 허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자 지환이 짧게 웃으며 말했다.
“나 다른 여자랑 한 우산 쓰면 안 돼. 애인이 싫어해.”
여자뿐 아니라 서진 이외의 남자와 한 우산 쓰는 것도 안 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맞는 말이었다.
“아, 그러세요.”
서진은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며 떨떠름하다는 듯이 나온 그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섞인 얼마간의 놀라움과 민망함, 실망을 눈치챘다. 지환도 알아챘을까. 어차피 그 정도야 깊은 감정도 아니기는 하지만, 지환을 향한 관심은 얼마나 옅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 그래.”
그럼에도 정말 성의 있는 대꾸조차 필요하지 않다는 듯 답하는 지환을 보자면, 이렇게 가차 없는 태도를 계속 유지했으면 했다. 이왕이면 모두에게.
“근데 오빠,”
다은이 우산을 들고 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발이 미끄러진 모양인지 휘청이자 바로 옆에 있던 지환이 반사적으로 다은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아 지탱했다.
“조심.”
다은이 우산을 들고 있는 데다가 지환보다 키가 훨씬 작은 탓에 지환이 다은의 우산 겉면에 살짝 부딪혔다. 서진이 반사적으로 지환을 끌어당기자, 지환은 그래도 어디 다치지는 않은 모양인지 젖은 제 얼굴을 한번 손으로 대충 닦아냈다. 그 모습에 다은이 걱정스럽게 지환을 올려다봤다.
“아, 어떻게, 오빠, 미안해.”
미안해하는 게 당연했는데, 서진은 문득 심장이 덜컹이는 기시감을 느꼈다. 뭔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 지환의 전 여자친구, 하늘이랑 비슷하지 않나. 분명 생긴 게 비슷하지도 않고 말투도 꽤나 다른 것 같은데, 왜인지 갑작스레 그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면 똑바로 걷기나 해.”
여상스럽게 않게 말한 지환이 그대로 걸음을 옮기자 서진은 살짝 다은과 눈인사를 하며 그 옆을 걸었다. 정문까지는 같이 갈 게 뻔하니 둘이 얘기하는 걸 들어야 하나 신경이 거슬렸는데, 막상 지환은 뒤에서 따라오는 다은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속도를 전혀 맞춰 주지 않으며 서진과 함께 평소대로 걸음을 옮겼다.
둘 다 키 탓에 보폭이 큰 편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은은 한참 뒤로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남 신경 안 쓰는 점이 마음에 들기는 했는데, 그래도 계속 다은이 생각났다. 지환이 너무도 쉽게 그 어깨를 감쌀 정도로 작은 몸도, 지환이 무신경하게 대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웃던 표정도.
“과 사람이에요?”
“어. 새내기.”
“그런데 어떻게 알아요?”
“과방에서 몇 번 봤어.”
고작 과방에서 몇 번 봤는데 서로 이름도 알고 벌써 반말을 하는 사이인가? 겨우 몇 번 봤다고는 해도 당연히 서로 얘기도 했겠지.
“번호 알아요?”
“아니.”
그 답이 단호하기는 했지만, 서진은 오늘 지환에게 다은의 연락이 올 걸 확신했다. 서진이라고 그런 일이 없던 것도 아니니 어떤 식으로 연락이 올지도 모르지 않는다. 어차피 다은과 지환은 같은 과이니 번호 알아내기 힘들지도 않겠고 분명 오늘 우산 빌려줘서 고마웠다, 그리고 넘어질 뻔한 거 잡아 준 거 고맙다, 그런데 어디 다치지는 않았냐, 그런 걸 물으면서 연락을 하겠지. 어쩌면 고마우니 음료라도 사 주겠다고 할 수도 있고.
지환이야 당연히 만나자고 하면 거절할 테고 그 이전에 연락을 제대로 받아 주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싫었다. 서진이라고 해서 지환의 친구 관계까지 모두 싫은 건 아니었는데, 다은은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닮은 건 전혀 없는데도 왜인지 지환의 전 여자친구를 떠오르게 하는 것부터도.
“그런데 좁긴 좁다.”
웃음기가 섞인 그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을 바라봤다. 혹시 다은을 생각하고 있을까. 다은과 함께 우산을 쓰는 편이 편하기는 했겠지만.
“저 사실 우산 있어요.”
불편하다고 하면 따로 우산을 쓸 생각으로 말하자 지환이 슬쩍 서진을 바라봤다.
“알아. 너 매일 일기예보 확인하잖아.”
그 답은 예상치 못해 그저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냥 내가 데리러 오고 싶었어.”
그 말에 지금껏 계속 신경 쓰고 있던 모든 것들이 갑작스레 녹아내렸다. 정말, 이래서 연애를 미리 해 봐야 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서진이 좋아할지를 뻔히 알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데도, 서진은 아주 뻔하게 넘어갔다.
“그런데 우산은 왜 두 개 가져왔어요.”
그러면서도 묻자 지환이 답했다.
“무의식중에 효율을 추구해 버리고 말았던 거지. 나도 네가 우산 두 개라고 말하고 정신 차렸다.”
그 말에 서진은 슬쩍 지환의 티셔츠를 제게로 잡아당겼다.
“후배한테서 연락 오면 어쩔 거예요?”
“씹을게.”
고민하는 기색도 없는 목소리에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해요.”
곧이어 서진의 집에 도착하자 지환이 젖은 머리를 한번 털어내며 곧바로 티셔츠를 벗었다.
“어깨 다 젖었네.”
그 말 그대로였다. 거기다 서진도 우산을 쓴 보람 없이 거의 젖었다. 서진은 가만히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곧은 어깨와 이어지는 근육이 깔끔하게 다듬어진 등, 움푹 들어간 척추선, 얇은 허리를 찬찬히 바라보던 서진은 그대로 지환에게 다가가 그 바지의 허리춤을 잡았다.
“바지도 젖었어요.”
서진이 그대로 지환의 젖은 바짓단을 눈짓하자 지환이 아무렇지 않게 제 바지 버클을 풀었다.
“우리 서진이 꼬시는 게 늘었네.”
서진이 지환을 그대로 침실에 밀어 넣자 지환이 바지를 대충 벗으며 침대에 앉았다. 그러면서 서진을 끌어당기는 손길에 입을 맞추자 지환이 서진의 허리 안으로 손을 넣으며 티셔츠를 벗겨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로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다시 서진에게 입을 맞추며 서진의 바지 버클을 풀어냈다. 서진 역시 바지를 벗고 지환에게 몸을 붙이자 지환이 입술을 맞댄 채로 서진의 어깨를 잠깐 잡았다가, 그대로 천천히 손을 내려 등과 옆구리, 허리를 쓸고는 바로 속옷 위로 서진의 성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살짝 손으로 쓸었다가 속옷 밴드에 손을 가져다 대는 행동에 서진은 잠시 입술을 떼어내며 말했다.
“너무.”
“어?”
“너무 빠른 것 같아요.”
지환의 표정에 단번에 의아함이 들어찼다. 서진은 지환의 손을 가져와 깍지 껴 잡으며 그 턱선에 입을 맞췄다. 물론, 이런 것도 좋기는 했다. 당연히 좋은데, 그래도 서진은 지환을 조금 더 천천히 보고 싶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너무 눈 맞고 바로 몸을 비비는 게 끝이었으니까. 서진에게 지환 외의 경험은 없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전희라는 걸 한다는 건 알았다.
“보통 조금 더, 좀 다른 곳을 만진다거나, 그러잖아요.”
사실 보통 어떤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런다고는 했다. 서진은 지환과 되도록 더 오래 닿아 있는 편이 좋았고.
“그건 그렇지.”
그럼 된다는 소리겠지. 서진이 슬쩍 지환의 눈치를 보며 그 목선에 입을 맞추자 지환이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네가 누울래?”
“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저 지환을 보며 눈을 깜빡이던 서진은 이내 그 의미를 눈치채고는 잠시 제 밑의 지환의 몸을 바라봤다.
“제가 만지는 건, 그건 싫어요?”
그 말에 지환이 서진을 빤히 바라봤다.
“이미 우리 그런 거 싫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지 않나.”
“그래도 싫을 수는 있잖아요.”
지환이 익숙한 것과는 다를 테니까. 거기다 닿는 사람에 따라서도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 좀 어색한 거지. 아무래도 조금 드무니까.”
없었던 게 아니라, 드물어? 어색할 거라고는 생각했다. 지환은 자연스럽게 서진을 눕혔으니, 그 반대의 경우는 어색하겠지. 그런데 어색한 건 어색한 거고 그런 경우가 아예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럼 해도 돼요?”
괜히 물어서 좋을 것 없는 이야기를 하는 대신 지환의 허리를 쓸며 묻자 지환이 물끄러미 서진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래.”
서진은 바로 그 입꼬리에 입을 맞췄다. 그대로 지환의 속옷을 벗겨내며 천천히 턱선을 타고 입술을 내리자 지환이 서진의 목덜미를 매만지다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서진은 지환의 목선을 살짝 핥았다가, 그 목선과 목덜미 사이의 점에 입을 맞췄다.
“너 그거 되게 좋아하네.”
“네. 좋아요.”
사실 서진은 지환의 모든 부분이 좋았다. 단단한 어깨도, 곧은 쇄골도, 탄탄한 가슴도, 하나하나 입을 맞추던 서진이 지환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그 유두를 입에 담자 지환의 몸이 잠깐 굳더니, 이내 살짝 서진을 밀어냈다.
“그건, 좀.”
그 미묘한 반응에 서진은 지환의 복근 선을 따라 긁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싫어요?”
의외로 가슴은 만지는 사람만 좋을 뿐이지 만져지는 사람은 크게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던데, 지환도 그런가.
“어. 좀.”
꽤나 단호한 어조라 서진은 조금쯤 아쉽게 지환의 가슴을 바라보면서도, 순순히 입술을 더 내려 그 명치에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출 때마다 근육이 풀리고 조여드는 게 살갗을 타고 느껴졌다. 서진은 조금 옆으로 입술을 옮겨 그 갈비뼈와 옆구리쯤에 입을 맞췄다가, 그대로 타고 내려가 장골에, 그리고 그 복근에 입을 맞췄다. 움푹 들어간 배꼽을 핥으며 외복사근의 라인을 따라 손으로 쓸자 평소보다 뜨거운 온기가 손끝에 닿았다.
“잠깐만.”
그 말과 함께 지환이 콘돔을 꺼내려는지 서랍 쪽으로 손을 뻗었다. 서진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제가 해도 돼요?”
“그래, 뭐.”
그 답에 서진은 서랍에서 콘돔을 꺼내 지환의 성기에 씌웠다. 모양이 곧은 성기를 손으로 잡고 일부러 그 옆면을 손가락으로 긁듯이 콘돔을 씌우자 지환이 한숨을 내쉬며 서진의 귓가를 매만졌다.
“너도 벗고.”
나직한 한숨 사이로 나온 말에 서진은 저 역시 남아 있던 속옷을 벗고 제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서진은 지환이 끌어당기는 대로 입을 맞추며 서로의 성기를 맞잡았다가, 슬쩍 아래를 바라봤다. 물론 지금도 좋기는 한데, 당연히 좋은데, 지환도 그럴까.
뭔가, 더 해 보고 싶었다. 서진은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을 움직여 그 허벅지 안쪽을 쓸었다가, 몸을 내렸다.
“뭐,”
망설임이 없었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못 할 게 뻔했으니. 그래도 의외로 나쁘지 않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깊게 넣는 건 무리라고 해도 핥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정도면 너무 어색하지는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진이 그대로 지환의 성기 끄트머리를 살짝 입에 담았다가 그 옆면을 핥자 지환의 허리가 움찔했다.
“아,”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 뒤로 지환이 아예 상체를 살짝 일으키며 바로 서진을 밀어냈다. 그렇게, 그렇게 싫었나. 조금 충격적이라 표정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서진을 바라봤다.
“야, 뭐 하는 거야?”
“싫어요?”
얼핏 불안과 서러움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에 지환은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듯이 머뭇거리다가, 이내 서진을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한서진,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야.”
그런 게 뭐지. 아직 못 한다고 판단할 만큼 하지도 않았는데.
“왜요?”
지환을 꼭 끌어안으며 말한 탓에 목소리가 살짝 웅얼거리듯 나왔다.
“네가 그런 걸 하면 내가 너무,”
복잡한 심경이 담긴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어 그 표정을 바라봤다. 마주한 표정 역시 고뇌에 차 있었다.
“못 할 짓을 시키는 것 같아.”
어째 서진이 생각하는 이유는 아닌 것 같아 가만히 응시하자 지환이 제 가슴팍에 손을 대며 상황에 맞지 않게 경건히 말했다.
“양심이 아파져 온다고.”
서진은 지환을 빤히 바라봤다. 더불어 그 손을 얹은 지환의 가슴도. 빠는 건 별로라고 했어도 만지는 건 싫어하는 것 같지 않던데. 서진은 지환의 손 위에 제 손을 얹고 쭉 그 가슴을 쓸었다.
“아플 것도 많네요.”
거기다 기준이 이상했다. 패팅은 괜찮고 구강성교는 양심이 아프다는 건 도대체 무슨 기준일까. 거기다 생각해 보면, 실제로 하지는 않았지만, 삽입 성교도 하려고 하지 않았나. 그것도 괜찮으면서 구강성교만 안 되는 이유는 뭐지.
서진의 혼란스러움이 드러났는지 지환이 서진의 허리를 끌어당겨 다시 성기를 맞닿게 했다.
“아무튼 그냥, 그냥 해.”
지환은 그 말과 함께 언제 꺼낸 건지 젤을 부어 서로의 성기에 펴 발랐다. 이러면 서진이 당연히 거부하지 못하는 걸 알고 있을 게 뻔했다. 맞닿은 그대로 허리를 움직이자 지환이 서진과 지환의 성기를 맞닿게 손에 쥐었다.
서진이 허리 짓 하는 걸 맞춰 성기를 손으로 문지르고 종종 긁는 손길에 서진이 지환의 입술을 살짝 깨물자 지환이 막혀 있던 숨을 내뱉었다가, 입술을 벌렸다. 숨을 섞으며 그 안의 녹진한 혀를 빨아 당기자 지환이 서진의 선단을 엄지로 꾹 눌렀다. 그 자극에 문득 몸을 굳히자 지환이 살짝 고개를 틀어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나도, 이제 나름….”
밑으로 시선을 내렸던 지환의 시선이 서진과 마주했다.
“손으로 잘, 아, 하는 것 같은데.”
그건 그랬다. 처음에는 어째 서진만큼, 어쩌면 서진보다도 더 남자와의 행위에 어색했던 손길이 이제는 꽤나 능숙해지기는 했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듣는 건 조금 무리였던지라 서진은 다시 지환에게 입을 맞추며 그 입을 막았다.
“형, 입.”
“응.”
입술이 맞닿자 그 안에서 소리가 울렸다. 지환은 중간중간 신음이 흐르면 혀를 깨무는 버릇이 있었다. 젤 때문인지, 허리 짓을 하는 대로 살이 닿는 질척한 소리가 숨소리와 섞여 울렸다. 서진은 지환의 허리를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가, 애써 힘을 빼며 그 성기를 저 역시 겹쳐 잡았다.
어째 지환이 너무 서진의 성기만 문지른다 싶어 지환의 귀두 밑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가 조금 힘을 줘 누르자 옅은 신음과 함께 지환의 허리가 살짝 들어 올려졌다. 서진은 그대로 더 빠르게 그 성기를 흔들며 허리를 움직였다.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틈 없이 섞인 숨이 난잡하게 흘렀다. 이미 질척해진 손으로 지환의 배를 넓게 매만지자 손 아래로 근육이 움츠러드는 게 느껴졌다. 서진은 그대로 손을 올려 지환의 가슴을 타고 올라가 그 쇄골에 손을 댔다. 단단하고 곧은 뼈를 꾹 누르자 지환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으….”
갈라지듯 흐른 신음에 서진은 그 쇄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가, 그대로 빨았다.
“아, 하지, 마.”
“자국, 하아… 안, 남겨요.”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 사이로 지환이 서진의 뒷머리에 손을 넣고 토닥였다. 서진의 머리를 토닥이느라 지환이 한 손으로만 잡고 있던 성기가 미끈거리며 손안에서 빠져나와 복근에 이리저리 치대졌다. 성기에 닿은 근육이 어떤 식으로 조여지는지가 생생했다.
다시 그 성기를 맞닿게 손안에 가둔 채로 점점 더 빠르게 흔들자 숨이 가빠지며 가슴팍이 맞닿았다. 짓누르듯 움직이자 지환이 조금 숨이 막힌 듯 눈가를 찌푸리면서도, 그대로 다시 입을 맞췄다.
위로는 혀를 빨아 당기며 비비고 아래로는 허리 짓 하며 손을 흔들자 점점 더 난잡하게 소리가 섞였다. 어지럽게 열기가 들어차면서도, 막상 눈에 담기는 거라고는 지환뿐이었다.
그대로 지환이 서진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더 깊이 입을 맞추며 사정하자, 서진 역시 곧이어 사정하며 여운에 그 맞닿은 배에 두어 번 더 성기를 비볐다. 지환이 숨을 몰아쉬는 게 살갗을 타고 그대로 느껴졌다.
서진이 콘돔을 벗겨 버리자 지환 역시 콘돔을 처리한 후 다시 털썩 침대에 누웠다.
“이리 와.”
유달리 살가운 그 목소리에 서진이 지환을 끌어안자 지환은 얌전히 서진에게 안겨 있다가, 슬쩍 서진을 밀어냈다. 조금은 더 안고 있어도 괜찮지 않나 싶어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조금 미묘한 표정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이거 좀, 어색하지 않냐.”
“뭐가요?”
그 물음에 지환이 이번에는 자신이 서진을 안았다. 서진이 지환보다 체격이 있던지라 안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얌전히 그 가슴팍에 기대 안겨 있자 지환이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건 이거 나름대로 좀 불편한가.”
역시 한 품에 들어오는 사람이 더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봐 불안하게 지환의 표정을 확인했는데, 막상 지환은 웃으며 서진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익숙해지겠지, 뭐. 그렇지?”
그 웃음에 서진은 저도 모르게 그 표정을 따라 웃으며 답했다.
“네.”
어떤 식이든 지환과 맞닿을 수만 있다면 좋았다.
* * *
서진은 씻으러 들어간 지환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저녁상을 차렸다. 오늘은 밥을 먹고 가라고 해 볼까. 그리고 저녁을 먹으면서는 자고 가도 괜찮냐고 물어보면, 자고 가 줄까. 생각해 보면 요즘의 지환은 서진과 함께 밥을 먹은 적도, 섹스가 아니고서는 그냥 같이 잔 적도 없었다.
지혜의 야자 후에 지환이 지혜를 데려다주니 잠을 자고 가지 않는 거야 이해했는데, 그래도 종종 밥은 같이 먹어 줘도 괜찮은 거 아닐까. 물론 지환이 요즘 취직 준비로 바쁘다는 거야 알았다. 그래도 예전에는, 심지어 사귀기 전에도 밥은 같이 먹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으로 밥을 뜨려고 하는데, 샤워를 마친 지환이 마침 욕실에서 나왔다. 서진은 그대로 지환에게 밥 먹고 갈 수 있냐고 물으려 했는데, 막상 지환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어, 지혜야.”
그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지환이 서진에게 다가와 한번 머리를 쓰다듬고는 바로 등을 돌려 티를 찾아 들었다.
“오빠 지금 학교 근처야. 아직 집 안 갔어.”
지환은 그대로 티를 입으며 말했다.
“응. 가면서 사 갈게. 어, 괜찮아. 뭐 사 가면 돼? 케이크?”
정말 다정하기만 한 목소리였다. 서진이라고 지환의 가족에게까지 질투한다는 건 아니었다. 물론, 실제로는 조금 하기는 하는데, 어쨌든 충분히 이해는 했다. 지혜는 이제 곧 수능이고 지환에게 많이 의지하니까, 지혜에게 지환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서진에게도 지환이 필요한데.
“아, 케이크 아니라고? 뭐? 그게 뭔데?”
서진이 지환의 젖은 머리를 건드리자 지환이 웃으며 서진의 손을 잡았다.
“그럼 뭐 사면 돼? 아니면 야자 끝나고 같이 가서 지혜가 고를래? 아, 그때까지 안 열어? 어. 오빠가 사다 놓을게.”
지환은 분명 서진에게 성실하다. 어디를 가면 어디를 간다고 꼬박꼬박 말해 주고 누구와 만나기라도 하면 그것도 모두 얘기해 줬다. 거기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 몇 시간은 서진을 봤고 자기 전에는 잠깐이라도 전화를 해 줬다. 어쩌다 시간이 맞지 않아 서진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면 나중에 확인하고 꼭 연락을 되돌려줬고.
그러니까, 서진에게는 연애 경험이 없지만, 그래도 지환이 꽤나 성실한 연인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런데도 더 바라게 되는 건 왜일까. 그래도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어디를 갔다고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함께 가고 싶었다. 누구와 만난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자신이 함께 있었으면 했다. 자기 전에 전화하는 건 좋지만, 가끔은 함께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연락하는 건 늘 설레지만, 연락할 필요도 없이 직접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래그래. 지금 갈게.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그래도 그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겠지. 지환에게는 지환의 일상이 있다. 서진에게는 지환뿐이더라도, 지환에게는 다른 중요한 게 많으니까.
“밥 먹으려고?”
식탁을 바라보며 말한 지환이 그대로 서진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렸다.
“우리 서진이 많이 먹고 쑥쑥 크자.”
장난스러운 말과 그 웃음 뒤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니다. 더 크지는 말고. 아니, 뭐, 더 커도 되기는 하는데. 어쨌든 많이는 먹어.”
지환은 그대로 몸을 돌려 제 가방을 찾아 들더니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화할 때부터도 지환이 갈 거라는 걸 알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붙잡을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나는 지혜가 무슨 타르트? 아무튼 뭐 사라는데 그거 파는 곳 이제 닫을 시간이라고 하네. 가 봐야겠다.”
신발을 신는 그 모습에 서진은 결국 웃으며 그 앞으로 다가갔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붙잡을 명분이 없으니까.
“내일 보자.”
짧게 서진에게 입을 맞추고 사라진 지환의 모습에 서진은 이미 지환이 사라진 그 현관을 바라보다가, 이내 걸음을 옮겨 다시 식탁으로 향했다. 아직 밥을 뜨기는 전이었지만, 지환은 왜 수저가 두 개였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서진은 밥을 제외하고는 모두 차려진 식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환이 서진을 피하지만 않는다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분명 그때의 생각은 거짓이 아니었다. 닿을 수만 있다면 어찌 되든 좋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런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심지어 사귀고 있고 분명 지환은 서진을 과분할 정도로 신경 써 주고 있는데, 그런데도 왜 더 바라게 되는 걸까.
서진은 모든 게 지환이 처음이라, 어느 정도가 보통의 범위인지, 보편적이라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원래 사귄다는 건 이렇게, 곁에 있어도 내 것 같지는 않은 걸까?
* * *
“한서진?”
서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작년에는 나름대로 몇 번 만났던 것 같은데, 괜히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는 걸 그만두면서는 연락해 본 적이 없는 동기였다.
“요즘 연락 안 돼서 휴학한 줄 알았어.”
사람들과 연락을 안 하고 살 뿐이지 수업에는 나가고 있으니 서진이 휴학하지 않았다는 걸 뻔히 알 텐데도 나온 말이었다.
“휴학 안 했어.”
서진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동기가 서진의 앞에 앉았다. 앉으라고 한 적도 없는데.
“한서진, 너 미팅 나갈래?”
작년에 이어 또였다. 어째 다들 서진을 찾는 목적이 달라지지를 않는지. 그나마 이번 연도에는 거의 모든 연락을 무시하고 있어서 좀 살 만했는데, 그렇다고 아예 제의가 없지는 않았다.
“나 만나는 사람 있어.”
작년에는 바쁘다거나, 관심이 없다며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그보다 더 마땅한 답이 있었다.
“와, 진짜?”
서진도 자신이 지환과 사귀고 있다는 게 여전히 놀랍기는 했지만, 서진이 누구와 사귀는지도 모르는 동기까지 놀랄 일인가.
“응.”
그 답에 동기가 바로 물었다.
“누구야? 내가 알아?”
“아니.”
사실, 어쩌면 알 수도 있기는 했다. 지환이야 종종 공대 걔, 기공 그 선배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니.
“예뻐? 네가 사귀면 당연히 예쁘기는 하겠지.”
알아서 답한 동기가 그대로 이어 물었다.
“몇 살이야? 동갑?”
“네 살 위.”
“그럼 스물다섯? 대학생? 우리 학교? 근데 너 뭔가 연상 사귈 것 같기는 했어. 어른스러운 사람이 어울리기는 하지.”
점점 더 질문이 많아졌다. 내일이면 아마 서진의 과 사람 대부분이 서진의 연애를 알게 될 걸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적어도 그러면 더 이상 소개를 받으라는 소리는 안 할 테고 왜 여자친구가 없냐는 말도 더 이상 듣지 않게 되기야 하겠지만.
“그냥, 많이 예뻐.”
지환은 예쁘다기보다는 누가 봐도 잘생겼다는 말이 어울리기는 했지만, 예쁜 거랑 잘생긴 건 한 끗 차이라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엄청 좋아하나 보네. 어떻게 만났어? 근데 연상이면 좀 신경 쓸 거 많지 않아? 뭔가 좋은 곳 가야 할 것 같고.”
연상이라고 해도 겨우 4살 차이라 그런지 크게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연상이 아니더라도 사귀면 당연히 모든 걸 신경 써야 하는 법 아닌가.
“그냥,”
서진은 문득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데이트를, 요즘 들어서 한 적이 있나? 그전이라고 이렇다 할 데이트를 한 건 아니다. 그래도 종종 같이 공원이라도 걷거나, 식당이라도 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만나면 아예 집 밖을 나가지도 않게 됐다.
물론, 지환이 바쁘다는 거야 알고 있었다. 아침에는 지혜를 데려다주고 점심에는 취직 스터디를 하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점심도 해결했다. 그리고 수업이 다 끝나면 서진을 만났다. 만나서 섹스를 하고 시간이 조금 남으면 이야기를 하다가, 지혜를 데리러 갔다. 그러니까, 지환과 서진이 만나서 하는 거라고는 섹스가 처음과 끝이라는 소리였다.
싫다는 건 아니다. 당연히 좋았다. 지환과 하는 게 뭐든 싫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지환과 서진은 이제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침대로 직행했다. 정말 자연스럽게. 이건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범해.”
서진은 그 말과 함께 시계를 확인했다.
“그런데 나 다음 수업 때문에 먼저 일어나야겠다.”
“어, 그래. 나중에 보자.”
굳이 나중에 볼 생각은 없지만, 서진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지환에게 연락해 볼까. 보통 이런 경우에는 상대가 자신의 몸만 보고 만나나 싶은 생각을 하기 마련이겠지만, 서진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 몸만 보고 사귈 거라면 지환은 남자인 서진을 만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그건 아니겠지.
지환을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던 서진은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별것도 아니었다. 서진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갖는 관심이 싫었다. 늘 그에 부응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쌓이기도 했고 나중에는 서진의 행동이 만들어진 건지, 아니면 실제 서진의 행동인지조차도 모호해질 때가 있었으니.
하지만 막상 오늘의 대화는 각종 질문과 추측이 난무할 뿐만 아니라 이 대화가 곧 꽤나 넓은 범위로 퍼질 것을 예상하면서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기는 서진의 뭘 보고 당연히 예쁜 사람을 사귈 거라고 생각할까. 만약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을 사귄다면 그걸 가지고 생각보다 눈이 낮다느니 이야기를 하겠지. 물론, 이 경우에는 서진이 이미 제 상대가 예쁘다고 했으니 서진의 눈이 예상대로 높다고 하겠지만.
서진은 전처럼 왜 다른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쉽게 평가할 수 있는지, 그 평가를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리고 그에 피곤해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분명 이전의 서진은 그 어쩔 수 없음에 피곤을 느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뭘까. 그때의 서진은 아마 그 피곤을 어떤 식으로든 끌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겠고, 지금은 아니다. 서진은 그저 지환을 생각했다. 정말 중요한 건 그랬으니, 다른 곳에 나눌 신경이 없었다.
* * *
어차피 시간 되면 만나기는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일찍 보고 싶어 지환이 수업을 마칠 시간에 공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 머지않아 건물에서 지환이 나왔다.
“형.”
다가가며 지환을 부르자 지환이 잠깐 놀란 듯 서진을 바라봤다가, 그대로 웃으며 다가왔다.
“어차피 내려가야 되는데 여기는 왜 왔어?”
혹시 싫었을까 싶었는데, 고민할 틈도 없이 나온 반가운 목소리에 서진 역시 가릴 것 없이 답했다.
“보고 싶어서요.”
사실 그대로의 말에 지환이 문득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서진에게 씌웠다.
“잘했어.”
한번 푹 눌러 씌웠다가 적당히 챙을 올려 주며 나온 말에 서진은 괜히 부끄러워져 잠시간 가만히 지환의 곁을 따라 걷다가, 지환을 바라봤다. 하필이면 그 목선의 점이 보이는 방향이었다. 서진이 슬쩍 지환의 목선에 손을 가져다 대자 지환이 서진을 바라봤다.
“형 생일에는 언제부터 만날 수 있어요?”
이제 곧 지환의 생일이었다. 이미 그날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그사이에 계획이 생기지는 않았겠지. 아니면 서진과는 특정 시간에만 만날 수 있고 다른 약속도 잡아 놨을까?
“왜? 너 그날 뭐 있어?”
“아니요. 그건 아닌데.”
서진은 슬쩍 지환을 바라봤다. 다른 약속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형 그날 오전 수업 없잖아요.”
“무슨 요일이더라.”
지환은 그대로 제 시간표를 확인하는 듯 핸드폰을 바라봤다가,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어. 없네.”
그거야 서진은 진작 알고 있었다. 지환의 시간표는 이미 외운 지 오래였으니.
“그럼 아침에 지혜 데려다주고 저희 집에서 저랑 있으면 안 돼요?”
오전 수업도 없고 어차피 학교는 와야 하니까, 먼저 와서 서진과 함께 있어도 되는 게 아닐까?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하루 정도는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아예 그날은 엄마한테 지혜 데려다 달라고 하고 전날에 자고 갈까?”
생각보다도 더 희망적인 말에 서진은 바로 물었다.
“그래도 돼요?”
“어차피 우리 가족 나 애인 있는 거 다 알아.”
좋기는 한데, 조금 기분이 미묘했다. 가족들이 애인 있는 걸 아는 것과 생일 전날 밤 애인의 집에서 자는 게 당연히 가족에게 받아들여질 이유의 연관성은 뭘까. 늘 그래 왔으니까? 서진은 괜한 걸 묻는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그럼 그날 밤에는요?”
물론, 그 전날도 자고 가겠다고는 했지만, 생일만큼은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눈뜰 때는 이미 해결됐으니 그렇다면, 눈 감을 때도 지환이 옆에 있었으면 했다. 이 정도는, 괜찮은 거겠지?
“그날도 자고 갈까?”
“네.”
가릴 것 없이 튀어나온 즉답에 지환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래.”
그 목소리에 서진은 웃으며 지환의 티셔츠를 살짝 끌어당겼다가 놨다.
“선물 뭐 가지고 싶은지는 여전히 생각 안 나요?”
대충 생각해 놓은 게 있기는 한데, 지환이 원하는 걸 주고 싶어서 묻자 지환이 흘깃 서진을 바라봤다.
“안 줘도 돼. 내가 너한테 뭘 받겠냐.”
어째 취급이 서진이 처음 과외 하며 차를 같이 타고 다닐 때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 반박하려다가, 서진은 좋은 기분을 계속 유지하고자 물었다.
“먹고 싶은 건 없어요?”
지환은 한식을 좋아하니까 미역국을 비롯한 생일상은 차릴 생각이었는데, 또 먹고 싶은 게 있지 않을까.
“치킨이나 시켜 먹자.”
그 말에 결국 조금 떨떠름해졌다. 지환이 먹고 싶다면 좋기는 했는데, 어째 내뱉는 말마다 묘하게 성의가 없지 않나. 자기 생일인데.
“케이크 같은 건?”
“케이크는 무슨 케이크야.”
아니나 다를까 성의가 없는 게 맞았다. 물론, 서진이라고 단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지환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기는 하는데, 그래도 생일이라는 특수성이 있었다. 달지 않은 케이크도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을 거고. 거기다 지환은 지금 케이크가 달아서 싫다기보다는, 번거롭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중요한 날인데, 서진과는 처음 같이 있는 생일인데, 조금 더 의욕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지환을 빤히 바라보자 지환이 서진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말했다.
“그래. 먹자. 케이크 먹자. 촛불도 불고 다 하지 뭐.”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옅게 묻었던 서운함이 순식간에 모두 녹아내렸다. 서진은 그저 지환을 빤히 바라봤다. 기분이 좋은 듯 매끈하게 끌려 올라간 입꼬리를 비롯한 그 자연스러운 표정과 둘러싼 모든 분위기까지도.
지환은 이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서진을 서운하게 하고 의식도 하지 않은 채로 풀게 했다. 지환에게는 평소와 같이 애인과 보내는 생일이겠지만, 그래도 서진과 보내는 생일이 조금이나마 특별했으면 했다.
* * *
서진은 지환을 깨워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저 가만히 잠든 지환을 바라봤다. 서진의 침대 위에서 잠이 든 지환은 오랜만이었다. 서진의 잠옷을 입고 서진의 침대 위에서, 서진의 이불을 덮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형, 일어나서 아침 먹어요.”
그래도 밥은 먹여야 하니 조심스럽게 그 어깨를 쓸자 지환이 잠시 눈가를 찌푸리더니, 겨우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조금만 더.”
그 말과 함께 지환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가, 손만 내밀어 더듬더듬 서진을 잡았다. 서진을 잡은 채로 그대로 끌어당기는 손길에 서진이 선선히 끌려가며 지환을 이불째로 끌어안자 그 이불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차렸어?”
“네.”
“뭐?”
“미역국이랑 불고기도 있고 계란말이도 했어요. 장조림이랑 갈비찜도 있는데.”
지환이 뭘 좋아할까 싶어서 우선 많이 만들어 놓기는 했는데, 입맛에 맞으려나 걱정이 됐다. 지환은 기본적으로 음식 투정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서진이 조심스레 말하며 이불을 살짝 걷자 지환이 눈이 부신지 눈가를 찌푸렸다가, 서진이 그 눈가를 손으로 가려 주자 표정이 풀렸다.
“뭘 그렇게 많이 샀어.”
“만들었어요.”
그 말에 지환이 눈을 떴다. 갑작스레 졸음기가 없어진 시선이 바로 서진에게 닿았다가, 이내 지환이 꾸물거리며 이불 위로 팔을 내놨다.
“네가 만들었다고?”
“네.”
나름대로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사 오기를 바랐던 건가 싶어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몸을 일으켰다. 그 탓에 서진이 지환과 함께 껴안은 이불이 벗겨지자 지환은 부스스한 머리 그대로 서진을 바라봤다.
“그래, 일단 먹으러 가자.”
지환은 그 말과 함께 침대 밖을 벗어나더니, 그대로 서진에게 손을 뻗었다. 서진이 그 손을 잡고 저 역시 일어나자 지환은 서진의 손을 제 허리에 두르게 하며 걸음을 옮겼다.
“사 온 게 아니라 만들었다고?”
식탁을 보며 하는 말에 서진은 지환의 표정을 살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네.”
조금 놀란 것 같아 보이는 지환의 표정에 서진은 이어 물었다.
“왜요?”
“아니야. 고마워서.”
답은 바로 나왔고 지환이 고개를 틀어 서진에게 웃어 주며 뺨을 매만져 주기는 했지만, 어쩐지 그 표정이 조금 복잡해 보이는 것 같았다.
“뭐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어요?”
그 물음에 지환이 서진을 의자에 앉히며 말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들 게 뭐 있어?”
그러면서도 지환을 빤히 바라보자 지환은 저 역시 자리에 앉으며 서진을 바라봤다.
“준비하느라 힘들었던 거 아닌가 싶은 거지.”
서진은 식탁을 바라봤다. 힘들지는 않았다. 지환의 생일이고 지환이 먹을 음식이니까. 그냥 지환의 입에 맞을지가 걱정스러웠지 다른 건 문제가 아니었다.
“부담스러워요? 이런 건 싫어요?”
서진이 무언가를 해 봤자, 지환이 싫어하면 의미가 없었다. 서진은 지환이 뭘 좋아하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최소한 서진이 지환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할 뿐이다.
“무슨 그런 말을 해. 일단 먹기나 하자.”
서진은 잠시 밥그릇에 손을 대 봤다. 다행히 식지는 않았다. 그저 그 상태로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은 뭘 보냐는 듯 한 번 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국을 떠먹었다.
“맛있네.”
웃으며 나온 그 목소리에 서진은 그제야 안심했다.
“다행이에요.”
서진이 지환의 생일 아침을 망친 건 아닌 모양이다.
* * *
아침을 먹고 수업을 들으러 가기 전까지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던 지환은 제 옆에 앉은 서진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문득 말했다.
“서진아.”
서진은 조금 더 태연하게 굴고 싶었지만, 지환이 서진을 빤히 볼 때부터도 점점 제 목덜미가 붉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거기다 귀를 건들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의심의 여지 없이 귓가까지 붉어지고 있었다.
“네.”
서진이 겨우 답하자 지환이 귓바퀴를 조물거리며 말했다.
“아침 진짜 정말 고마웠는데, 앞으로는 안 그래도 괜찮아.”
그 말에 서진은 바로 지환을 바라봤다. 역시 부담스러웠을까. 직접 뭘 해 주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서진은 정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환의 기준은 다를 수 있다. 지환은 직접 음식을 하는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걸까.
“싫었어요?”
이번에 실수했다고 해도, 앞으로는 잘하면 되겠지. 보통은 실수가 쌓이고 쌓여서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쌓이기 전에 제대로 행동해야 했다. 아직 그렇게까지 많이 쌓이지는 않았겠지.
“싫은 거 아니라니까.”
서진은 찬찬히 지환을 살폈다. 지환이 빈말하지 않는 성격이기는 했지만, 연인 관계에서 어떨지는 몰랐다. 사람은 모두 관계에 따라 태도가 달라졌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냥 빈말을 해 주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네가 나 때문에 힘든 게 싫은 거야.”
지환의 손이 살며시 내려와 이제는 귓불을 느릿하게 쓸었다. 지환의 반응을 살피려 집중하느라 그나마 되찾았던 피부의 색이 다시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좀 그렇잖아. 네 살이나 어린 애를 부려먹는 것 같고.”
지환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지환은 서진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는데. 가만히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서진과 시선을 맞췄다.
“나는 너를 조금 더,”
지환은 종종 이렇게 말을 고를 때가 있었다. 서진의 요구에 맞춰 주듯, 지환은 서진이 들어도 괜찮을 단어를 고르는 시간이 늘었다. 그 시간만큼은 지환도 온전히 서진만을 생각하겠지.
“아껴 주기만 하고 싶다고 해야 하나. 조금 더 어리광도 부리게 하고 싶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올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얼마간의 당황을 담아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은 멋쩍은 듯이 시선을 맞췄다.
“아무튼 그래.”
서진은 그대로 지환을 바라보다가, 결국 숨기지 못하고 웃었다. 조심해야 한다는 건 알았다. 지환이 서진을 신경 쓴다는 건, 그만큼 지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환이 서진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기분이 들떴다.
“어떻게 아껴 줄 거예요?”
서진은 아낀다는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지환은 알고 있을까? 서진으로서는 의미를 알지도 못하는 그 단어 하나에 서진은 불안을 품에 안고도 웃을 수밖에 없다는 걸. 지환의 단어이기에 그랬다.
“어떻게 아껴 줄까?”
마주 나온 웃음에 서진은 조금쯤 머뭇거리다가, 몸을 기울여 지환의 입가쯤에 짧게 입을 맞췄다. 슬쩍 눈치를 보자 지환이 짧게 눈가를 찡긋거렸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서진은 저 역시 눈을 감으며 조심스레 그 입술을 벌렸다.
선선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빨아올리자 지환이 천천히 서진의 목덜미를 제 손으로 감쌌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좋았다. 지환은 늘 서진을 섬세하게 다루려 노력했다. 그쯤은 모를 수가 없다.
“저랑 조금 더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형이 바쁜 건 아는데, 그래도 조금만 더.”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겠지? 지환은 작년, 한창 바쁠 때 전 여자친구와 연애를 했다. 그러면서도 과외가 끝나면 늘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그때 서진이 지환에게 피곤하지 않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의 지환은 어차피 다들 바쁜데도 좋아하고 보고 싶으니까 시간 쪼개서 만나는 거라는 답을 했다.
그렇다고 지환이 그때처럼 피곤함을 무릅쓰고 자신과 함께 있어 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지환은 그때 이미 전 여자친구를 1년은 넘게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서진은 이제야 고작 몇 개월이었다. 더불어, 그때는 지환이 먼저 반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기적적으로 지환도 서진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건 서진이 먼저 지환의 동정을 끈 탓이다.
그러니 애초에 비교 대상도 아니었고 상황도 달랐다. 하지만, 그래도 지환이 먼저 물어봤으니까, 조금쯤은 원하는 걸 바라봐도 괜찮지 않을까.
“적어도 오늘은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수업 전에도 지금처럼 계속 같이 있다가, 수업 끝나고 잠들 때까지도 계속.”
혹시 지환에게 다른 약속이 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 지환이 곤란하지 않은 범위에서라면 함께 있고 싶었다.
“그래.”
조마조마한 서진의 심경과 대비되는 그 깔끔한 목소리에 서진이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은 소파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다른 건 없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 달라거나.”
어느덧 장난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로, 지환은 서진의 손을 가져와 그 손바닥의 손금을 제 손가락으로 간질이듯 훑었다.
“사실 그건 이미 늦기는 했는데, 그래도 너 요리 잘하더라. 맛있게 잘 먹었어. 고마워.”
서진은 제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지환의 손가락을 홀린 듯 바라봤다. 곧은 손가락의 단단한 뼈마디와 둥근 손끝이 유독 도드라졌다.
“연습했어요. 어차피 요즘 형이 저녁에 없으니까, 그때 연습했거든요.”
깜짝 선물로 할 생각은 없었는데, 요즘 지환과 저녁을 함께하는 일이 없다 보니 결국 오늘에야 연습한 결과를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요즘 지환이 저녁을 같이하지 않은 걸 탓하는 것처럼 들렸을까 조심스러웠는데, 막상 지환은 비꼬아 들은 기색이 없었다.
“나는 요리는 전혀 못 하는데.”
그거야 서진도 익히 알고 있었다. 시도를 안 해 본 건 아닌데, 재능도 없고 재미도 없다고 했다. 자취할 때도 거의 바깥에서 사 먹었다고 했고.
“괜찮아요.”
서진의 즉답에 지환이 웃으며 서진을 끌어당겼다.
“그래. 대신 다른 건 내가 다 할게. 청소, 빨래랑 설거지도 다. 너는 요리만 해.”
지환은 서진을 끌어안아 그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쓰다듬는 채로 말을 이었다.
“나중에 같이 살면.”
그 목소리에 서진은 바로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봤다.
“나중에, 같이 살아요?”
같이 산다고 해도 지환은 다른 사람도 만나고 제 일상생활을 유지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같이 살면 지환이 늘 돌아오는 건 서진이 있는 집이었다. 늘 눈을 뜨는 것도, 감는 것도 같은 곳이겠고. 서진은 제 목소리가 어떤 식으로 나왔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다급히 말했는데, 막상 지환은 가볍게 답했다.
“그냥 해 본 소리야. 겁먹으라고 한 말 아닌데.”
그 말에 서진의 표정이 빠르게 식었다.
“그냥 해 봤다고요?”
어떻게 같이 살자는 말을 그냥 할 수가 있지. 같이 살자는 건 정말 의미가 깊은 말이 아닌가. 같이 눈을 떠서 같이 눈을 감는다는 건데, 끼니를 같이 먹고 서로의 일상을 밀접하게 공유하게 된다는 뜻인데, 그게 어떻게 그냥 할 수 있는 소리지.
“왜?”
그 얼떨떨한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을 빤히 바라봤다.
“형은 그런 말을 그냥 해요?”
다른 사람한테도 이랬던 걸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어떻게 같이 살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 서진이 입을 꾹 다물고 지환에게 답을 요청하듯 바라보자 지환이 그대로 다시 서진을 끌어당겨 제 가슴팍에 기대게 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그냥 한 말 아닌데, 말하고 나니까 네가 너무 어리더라. 좀 봐주라.”
서진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리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그러고 보니 지환은 방금도 네 살이나 어린애 부려먹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이 차이가 나면 얼마나 난다고? 따지자면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의 차이였으며 학교에 다니는 지금이야 좀 차이가 나 보일 수는 있지만, 대학만 벗어나면 별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걸까. 원래는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 사람을 만났지? 서진이 알기로 지환의 전 여자친구는 지환보다 딱 한 살이 어렸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는 친구들을 사귀었다고 하니까, 그때도 자기 나이와 비슷했겠고. 지환은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람은 취향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이는 서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환이 서진의 나이를 인식할 수 없도록 최대한 어른스럽게 구는 게 고작이었는데, 그래 봤자 지환이 계속 서진의 나이를 떠올린다면 그것도 쓸모가 없었다.
“네가 생각해도 스물 초반에 동거는 좀 아니지 않냐. 나는 너 부담 줄 생각 없어.”
“그게 왜 부담이에요?”
그런데 그래서, 이건 동거를 하자는 말일까. 스물 초반은 조금 그러면 시간이 흐른 후에는 동거하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이것도 그냥 하는 말인가. 그런데 정말 지환이 동거를 할 생각이 있다면, 왜 지금은 안 되지.
사귀기 전이기는 했지만, 직전 학기의 중간고사 기간에는 지환이 서진과 거의 함께 살다시피 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안 되지.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으니 괜찮았지만, 지금 그러면 서진이 너무 큰 의미를 가지고 질척거릴 것 같나? 하지만 애초에 같이 산다는 건 큰 의미가 맞는 거 아닌가?
“너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뭐 말한다고 다 들어주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생각을 이어 나가는 도중 나온 지환의 목소리에 서진은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저한테 형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좋아했던 사람도 없다. 애초에 서진에게는 지환이 모두 유일한데. 왜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이 바라보자 지환이 서진의 머리칼을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그래서 최대한 조심히 아껴 주려고 노력 중이야.”
꽤나 무르기만 한 태도에 서진은 쉽게도 기분이 풀렸다. 왜 그렇게 말을 쉽게 하냐고 따질 마음도 모두 녹아내린 채로 가만히 지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자 지환이 그대로 서진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럼 더 신경 써 주세요.”
시선을 맞추지도 못하고 작게 나온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이 어르듯 서진의 뺨을 살살 문지르며 시선을 맞추게 했다.
“어떻게?”
“저한테도.”
서진은 그제야 지환과 시선을 맞췄다.
“저한테도 더 다정하게 말해 주세요.”
서진은 이미 지환이 제 연인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직접 봤다. 그렇게 다정한 눈으로, 그렇게나 다정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지환과 이미 다 끝난 걸 알면서도 생각하면 속이 뒤집어지는 지환의 전 애인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종종 지환이 지혜에게 대하는 것도 그랬다.
전화라도 받으면 정말 녹을 것 같은 목소리를 냈다. 해 달라는 건 다 해 주고 얼마나 시간이 늦든 그건 상관도 하지 않았다. 말하는 어투부터,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까지 평상시와는 다른 걸 서진이 이미 아는데.
어린 동생을 대한다는 게 너무 확실히 티가 나서 서진에게까지 그렇게 해 달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 더 서진을 신경 써 줬으면 했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신경 쓰고 노력해 주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노력은 하고 있는데 그래도 우리 서진이가 그것 때문에 섭섭했구나? 미안해. 앞으로 더 잘할게.”
노력하고 있다는 건 이미 느끼고 있다. 지환은 점점 더 서진의 앞에서 단어를 고르고 의식적으로 말투를 바꾸고 있었다. 그게 좋으면서도 불안했다. 서진이 해 달라는 대로 노력해 주는 지환이 정말 좋았는데, 혹시 그게 지환에게 과한 요구일까 봐. 그래도,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좋았다.
“너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어? 요즘 계속 집에만 있던 것 같은데 나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자.”
서진이 더 이상의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나온 그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맞닿았다.
“형은 가고 싶은 곳 있어요?”
더 깊이 닿고 싶어서 그 등을 더 힘을 줘 끌어안자 지환이 잠시 부자연스럽게 숨을 멈췄다. 서진이 급하게 힘을 풀자 지환은 그제야 다시 편하게 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없지. 그래도 너는 첫 연애잖아. 뭐 하고 싶은 거나 그런 거 없었어?”
연애에 대한 환상은커녕 연애를 할 거라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던지라, 딱히 답할 말은 없었다.
“형은 첫 연애 때 뭐 하고 싶었는데요?”
그 물음에 맞닿은 몸을 타고 지환이 웃는 게 느껴졌다.
“그건 네가 질투할 것 같아서 말 못 하겠는데.”
틀린 말이 아니라 반박할 수 없었다. 지환이 뭐 하나만 말해도 서진은 속으로 그걸 가지고 온갖 생각을 다 했다. 첫 연애에 관한 걸 들으면 더 하겠지.
“형은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이건 말해 주겠지? 서진은 이미 지환의 이상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성별을 조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머지는 최대한 맞춰 볼 수 있었다. 가만히 지환을 껴안고 답이 들려오기를 기다리는데, 지환이 서진의 뒷머리에 그대로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응. 우리 서진이.”
“거짓말.”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풀려 버린 무른 목소리에 지환은 웃음기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정말인데.”
남자 안 좋아하면서. 그걸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 말이 어쩔 수 없이 좋았다.
“그러는 너는?”
분명 또 붉어졌을 게 당연한 귓가에 지환의 시선이 닿은 게 느껴졌다.
“저는 형 말고 사람 좋아해 본 적 없어요.”
목소리가 유독 웅얼거리듯 나온 것 같았다. 조금 더 자신 있게 말했어야 했는데, 괜히 부끄러웠다.
“그거랑은 별개로 이상형은 있잖아.”
지환은 그럴까? 이상형은 당연히 여자겠고 지금 사귀는 건 남자인 서진이니 그렇기는 하겠지만.
“형은 그래요?”
“아니.”
서진은 지환의 그 단호한 답이 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서진은 조금 고민하다가,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중을 위해 결국 물었다.
“원래는, 어떤 사람을 좋아했어요?”
고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지환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 지환도 서진을 조금 더 오래 좋아해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는데, 지환은 아무런 답 없이 그저 서진을 제게서 살짝 떼어내고는, 그대로 서진의 뺨을 제 양손으로 감싸 짧게 입을 맞췄다.
“형은 원래,”
다시 물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서진이 무슨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시 지환이 또 짧게 입을 맞췄다.
“형은,”
말을 할 때마다 잠깐씩 닿고 떨어지는 입술에는 서진의 말을 막겠다는 의도가 선명했다. 결국 서진이 입을 다물자 지환이 그대로 서진의 뺨에서 손을 거두어들이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서진은 결국 그 뻔한 유도에 걸려 들어가며 눈을 감고 그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맞닿은 온기만이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