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2권) (13/15)
  • 독해(Reading Comprehension) 2권 @czc

    정독

    그 온기가 제 목덜미에 닿은 순간, 멍하니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있던 지환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제게 닿은 서진을 밀어냈다.

    “나.”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이 뭘까.

    “게이 아니야.”

    지환은 방금 제가 내뱉은 말이 바로 그렇다는 걸 빠르게 깨달았다. 주위에 술 마시면 스킨십이 많아지는 후배가 하나 있다. 그 탓에 뽀뽀 정도는 징그러워하면서도 몇 번 받은 적이 있는데, 이렇게 입술은, 거기다 술을 마신 건 지환이지 서진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도대체 어쩌다 이 상황이 온 건지는 모르겠는데, 우선 방금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음을 알았다.

    “알아요.”

    뚝 하고 떨어진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은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은 어디 아픈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창백히 질려 있었다.

    “잠깐, 너,”

    “죄송해요.”

    서진은 지환의 목소리가 이어지기도 전에 말하더니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잠깐.”

    지환은 전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저대로 서진을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서진을 잡으려 했지만, 서진은 지환의 손이 서진에게 닿자마자 그 손을 뿌리쳤다. 서진은 자신이 해 놓고도 자신이 더 놀랐다는 듯이 몸을 굳혔다.

    “죄송해요.”

    꼭 겁에 질린 것 같은 그 표정과 목소리에 지환은 그 어떠한 말도 잊고 서진을 바라봤다. 도대체, 지금 무슨.

    지환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진 서진의 모습에 어정쩡하게 뻗었던 팔을 허탈하게 내렸다. 지금 쟤 어디 간 거지. 여기가 자기 집인데. 지환은 집 주인 없는 집에서 멍하니 상황을 정리해 봤다.

    요즘 들어 지환과 서진은 자주 만났고 주로 서진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환은 계절학기니 뭐니 하며 학점을 채운 덕에 마지막 학년을 이전보다는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고 남는 시간은 거의 서진과 함께했다.

    언제부터인가는 늘 벽을 치던 서진도 지환을 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고 서진이 느슨하게 구니 지환도 더 편하게 굴었다. 이제 나름대로 어디 가서도 친하다고 할 만한 사이가 됐다고 생각했고, 그랬는데, 왜 갑자기 그 친분이 키스로 갔을까.

    별다를 건 없었다. 서진의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난데없이 교수의 전화를 받았고 데이터를 누락시킨 친구에게 욕을 한 후 고칠 걸 고쳐서 교수에게 보냈다. 그쯤에 서진의 과제도 끝나서 같이 방에서 나온 후에 지환은 맥주를 마시며 서진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데 왜 키스였을까.

    서진이 혹시 지환을 좋아하나? 지환은 멍하던 표정을 심각하게 굳혔다. 그런 기색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도 역시 그런 기색은 없었다. 애초에 지환이 서진에게 장난을 치고 치대면 서진이 겨우 몇 번쯤 받아 주는 게 고작이었다. 이게 장족의 발전이기는 한데, 어쨌든 서진이 지환을 좋아한다는 기색은 느낀 적이 없는데.

    그럼 그냥 키스를 해 보고 싶었을까. 사실 그걸 키스라고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우선 입술을 맞댔으니 대강 키스는 키스겠지만, 서진은 키스를 한다기보다는, 정말 조심스럽기만 했다. 지환이 차마 빠르게 밀쳐내지도 못할 정도로.

    그래도 만약 그냥 키스를 해 보고 싶었다고는 해도, 왜 하필이면 지환일까. 얼굴 하나 믿고 놀아 봤던 입장에서, 서진은 지환 말고도 얼마든지 상대를 구할 수 있었다. 설마하니 서진이 게이일 수도 있겠고 지환은 게이들의 취향을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서진이면 성별 달라진다고 해도 인기가 있을 텐데 왜 지환이지.

    생각할수록 더 혼란스러워졌다. 서진이 가깝게 지내는 게 지환뿐이니까, 시도할 게 지환뿐이었을까. 사실 서진은 겉으로는 친절한 척 하면서도 모두에게 벽을 치는 편이니 다른 사람을 새로 사귀는 것보다는 그냥 옆에 있는 지환이 편했을 수도 있는데, 그 새끼가 진짜 그따위 새끼는 아니기를 바랐다.

    지환은 저 혼자 생각해 봤자 아무것도 결론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결국 핸드폰을 찾아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라고 할지는 정하지 않았는데, 우선 얼굴 보고 대화를 하는 게 우선이었다.

    서진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리던 지환은, 문득 들리는 진동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잘 들리지는 않았는데, 서진과 지환이 함께 과제를 하던 방에서 미약한 진동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방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발견했다. 지환은 조금쯤 허탈하게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핸드폰도 안 가지고 나갔네. 요즘 세상에 핸드폰도 없이 뭘 하려고 밖으로 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핸드폰도 없는데 지갑은 가지고 갔을까. 하다못해 카드 하나 정도는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알 수 없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결론을 낼 수 없기에 지환은 결국 서진을 기다리기로 했다. 생각할수록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제야 겨우 생각을 할 수 있는 정신 상태로 돌아왔는데, 그런데도 계속 서진의 표정이 떠올랐다. 따져 보자면 화를 내야 할 건 지환인데, 왜 서진은 자기가 더 겁을 먹은 표정이었는지.

    그래도 자기 집인데 언제든지 기어들어 오겠지 싶어 기다렸지만, 서진은 지환이 버티다 못해 다음 날 수업 때문에 학교에 갈 때까지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환은 그래서 도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 * *

    경영대 앞에서 죽치고 있어야 하나 싶었는데, 우선 잡아 놓은 약속이 있어 지환은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 왔어?”

    “다른 애들은?”

    축제 때 동기 몇을 불러서 같이 마시자는 약속을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야 자리를 마련하게 됐다. 지환은 시간에 딱 맞춰서 왔는데 왜 가연뿐인가 싶어 묻자 가연이 답했다.

    “혜린이는 갑자기 일 생겨서 늦는다고 하고 동규는 아직 안 왔어. 우리끼리 먼저 시키자.”

    “임동규 이 새끼는 휴학생이 뭐 바쁜 일이 있다고.”

    지환의 말에 가연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뉴판을 내밀었다.

    “어, 저기 임동규 온다.”

    메뉴판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나온 그 말에 고개를 들자 문 쪽에서 두리번거리던 동규가 그제야 지환과 가연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혜린 누나는?”

    혜린은 가연, 동규, 지환과 동기이지만 재수를 한 탓에 한 살이 위였다. 사실 가연도 재수를 하기는 했지만, 빠른 년생이라 나이는 대부분의 동기와 같았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은 빠른이라며 원래 알던 한 살이 많은 사람과도 친구를 먹은 탓에 호칭이 꼬였다.

    “박혜린 일 생겨서 늦는대. 너 뭐 먹을래.”

    지환은 친구의 친구는 친구이기도 하며, 어차피 동기끼리인데 굳이 말 높일 거 뭐 있나 싶어 이름을 부르는 편이었고 동규는 그래도 나이 많은데 호칭은 붙여야 하지 않냐며 혜린에게 꼬박꼬박 누나라고 했다. 이 덕에 호칭이 더 혼란스러워졌지만, 익숙해진 지가 오래였다.

    “그런데 임동규 너는 어째 변한 게 없네.”

    졸업 이후로 본 적이 없다고는 해도 그래 봤자 몇 개월인데 가연은 동규를 꼭 몇 년은 안 봤다는 듯이 말했다.

    “너는 얼굴 폈다?”

    동규의 말에 가연이 활짝 웃었다.

    “나 요즘 연애하잖아. 네 살 연하랑.”

    “양심 없기가 아주.”

    지환이 자연스럽게 말하자 가연이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어디서 애인 없는 놈이 말을 하나 잘 안 들리네.”

    그 말에 역시나 애인이 없는 동규도 입을 닫았다. 얌전히 메뉴를 고르고 주문하자 가연이 지환을 툭 쳤다.

    “어떻게 만났냐고 왜 안 물어봐.”

    아마 이게 만난 이유인 모양이었다. 연애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니 어지간히 자랑하고 싶기는 하겠지만.

    “우리 회사 앞에 편의점 있는데, 내가 아침마다 거기서 탄산수를 사거든.”

    물어본 적도 없는데 가연이 신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한 달쯤 됐나? 그 알바생이 오렌지 주스를 주면서 탄산수랑 섞으면 맛있다는 거야.”

    “누구 물어본 사람?”

    “그렇게 점점 몇 마디씩 더 하다가 밖에서도 만나고 그랬지. 걔는 아직 대학생인데 아침 수업 없어서 편의점 아침 알바한다더라.”

    지환의 심드렁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가연이 웃었다.

    “엄청 귀여워 진짜. 걔가 누나누나 거리는데 오빠 거리는 새끼들 대가리 깨고 싶었던 거 기억도 안 나더라.”

    “누구 물어본 사람?”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진짜.”

    동규를 노려봤다가, 짧게 심호흡을 하는 가연의 모습에 동규가 움찔하며 지환에게로 붙었다.

    “최지환이 할 때는 뭐라고 안 하다가 왜 나한테만.”

    “새끼들이 1절만 해야 될 거 아니야.”

    그 짜증스러운 목소리 뒤로 가연이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핸드폰을 꺼냈다.

    “현정이도 끼우자.”

    “걔 호주 있잖아.”

    “그냥 화상 켜 놓으면 되지. 현정이 안 본 지 너무 오래됐어.”

    여자가 유독 적은 과였던지라 학번이 달라도 여자들끼리는 대충 알고 지낸다던데, 가연이 늘 현정을 챙기며 같이 다니기는 했다.

    [언니!]

    통화가 연결되고 화면에 현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연이 핸드폰 위치를 조정해 받치자 현정의 반가운 목소리가 서서히 떨떠름해졌다.

    [그리고 최지환이랑 임동규도 있네.]

    이런 취급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던지라 동규와 지환이 나란히 손을 흔들어 주자 현정이 마주 손을 흔들었다.

    “얘 남친 생겼어. 4살 연하.”

    지환이 가연을 가리키자 현정이 바로 말했다.

    [나는 이미 아는데. 나랑 언니는 오빠들이랑 다르게 각별한 사이여서.]

    그 말에 동규가 현정을 향해 말했다.

    “너는 뭐 없어? 거기까지 갔는데.”

    [오빠는 내가 뭐 남자 만나러 여기 온 줄 알아? 물론 그 이유가 조금 있기는 한데, 아무튼 지금은 없어.]

    “아, 그 경대 친구랑은 안 된 거지?”

    “경대?”

    가연의 말에 지환은 현정이 아는 경대 친구가 또 누가 있나 생각해 봤다. 지환이 현정의 인간관계를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생각나는 거라고는 서진뿐이었다. 사실 가연이 4살 연하를 말할 때부터도 서진이 계속 생각나기는 했다. 서진도 지환보다 4살이 어리니 가연의 남자친구와 동갑이기도 하고.

    “네가 주점 데려왔던 그 친구가 현정이랑 썸 타던 분 아니야?”

    서진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는 한데, 가연이 그 이전부터도 서진을 알고 있었나 싶어 바라보자 가연이 그대로 말을 이었다.

    “나도 그전까지는 본 적 없는데, 현정이가 경대에 엄청 잘생긴 사람이랑 같이 수업 듣는다고 했던 거 기억은 하고 있었거든. 너랑도 아는 사이라고. 그런데 네가 주점 데려온 사람 보니까 아, 이분이 그분이구나 싶었지.”

    [근데 언니, 솔직히 양심 선언하자. 그건 썸이 아니었어. 그냥 나 혼자 설렜던 거지.]

    “왜? 썸도 아니야?”

    가연의 물음에 현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응.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언니 그 사람 얼굴 봤다고 했지. 솔직히 그 얼굴이면, 그런 얼굴 한 사람들은 인간적인 호의 그런 거 하면 안 되는 거거든.]

    현정이 문득 어딘가를 삿대질했는데, 대충 각도를 보아하니 지환인 모양이었다.

    [저거 봐 최지환처럼 싸가지 없게, 저렇게 해야지! 그런데 경대 그분은 너무 착하셨어. 진짜 오해할 구석 하나 없는데도 혼자 설레고 행복했지. 내 인생 최고의 학기였는데.]

    단어 하나하나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그런데 지금 그 경대 예쁜이 말하는 거 맞지?”

    “뭐?”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은 가연의 물음에 동규가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얘가 언제부터인가, 아마 작년인가? 그때부터 얘가 경대 예쁜이 얘기를 종종 하는 거야. 그러다가 언제는 어디 보면서 저기 경대 예쁜이 온다고 막 그러니까 존나 기대했는데 존나 건장하신 분이 보이시더라. 심지어 이 새끼보다도 키 크고.”

    “왜, 귀엽잖아. 거기다 작년이면 그때는 새내기였는데.”

    가끔 그렇게 부르면 질색하는 게 재미있어서 서진의 앞에서도 종종 부르기는 했다.

    [꼭 저런다니까. 지환 오빠 그분 꼭 좋아하는 여자애 괴롭히는 것처럼 건드리잖아.]

    무슨 말인가 싶어 현정을 바라봤는데, 정작 답은 동규에게서 나왔다.

    “근데 생각해 보면 이 새끼 원래 접근 방식이 좀 이상해.”

    “내가 뭘?”

    “내가 얘랑 나랑 친해진 계기 말했나?”

    “같은 반이었잖아. 우리 다 A반 아니었나?”

    가연의 말에 동규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는 한데, 엄청 초반에는 내가 얘를 알기만 하고 친하지는 않았었단 말이야, 그런데 새 학기에 나는 친구도 없으니까 공강에 그냥 피방 가서 시간 때우고 있는데 이 새끼가 나한테 존나 못한다는 거야.”

    [모르는 사이였는데?]

    “어. 인사도 안 해 봤었는데. 그러면서 갑자기 존나 못하네, 비켜 봐. 이러고 자기가 판 깨 주는데 진짜 존나 멋지더라고.”

    동규가 말하니 지환도 기억이 나기는 했다. 그게 벌써 몇 년이 지난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그러고 야, 너 박 교수 물리학 듣지. 나도 기공인데 제육 먹으러 가자.”

    목소리를 깔고 말하는 게 지환을 따라 하는 모양인데, 자리의 그 누구도 닮았다고 생각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러는데, 와. 싸가지도 없고 존나 눈이 그때는 삐었는지 멋져 보였지.”

    “허세 장난 없네.”

    떨떠름하게 나온 가연의 말에 지환이 바로 반박했다.

    “아니, 야, 김가연 너는 알 거 아니야. 임동규 발컨 장난 아니잖아. 누가 봐도 그건 구제해 주고 싶다니까.”

    가연과 지환은 같이 팀을 이뤄서 게임을 자주 했는데, 원래는 동규도 같이했다. 그러다가 동규는 도저히 구제가 안 된다는 걸 알고 손절했지만.

    “나는 그래도 모르는 애한테 그러지는 않아.”

    “야, 그럼 너 그때 제육 먹으러 가자고는 왜 했는데? 그게 꼬신 거지.”

    가연의 말 뒤로 나온 동규의 목소리에 지환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거기 한 사람은 포장만 된다잖아. 그래서 너 데려갔지.”

    “아니야, 아무튼 꼬셨어.”

    답할 가치도 없어서 굳이 반박하지 않자 동규가 말을 이었다.

    “경대 그 친구한테도 말은 맨날 경대 예쁜이라고 하면서 실제로 보면 몸통부터 박치고 봐. 그건 그 친구 몸이니까 살아남는 거다.”

    그거야 지환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서진 외에는 그렇게 치대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봤을 때는 그런 게 아니라, 얘가 그분한테는 되게 간질거리게 했어.”

    가만히 동규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온 가연의 말이 그대로 이어졌다.

    “얘가 주점에 그 친구 데려왔거든. 근데 잘생긴 사람 있으니까 또 새끼들이 힐긋거렸단 말이야. 나도 좀 민망하기는 했는데, 얘는 그거 얼굴 좀 흘깃거린다고 그 친구한테 모자 씌워서 데려가더라. 닳는다고.”

    그 말에 현정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말했다.

    [티 나게 구경한 거 잘했다는 건 아닌데, 잘생기기는 진짜 잘생겼지. 딱 학생회장 할 것 같이 생겼잖아. 분위기도 단정하고.]

    “근데 학생회장은, 나 고딩 때 생각하면 한숨밖에 안 나오는데.”

    정말 떠올린 건지 가연에게서 진심 어린 한숨이 나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냥 이미지가 그렇다는 거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은 학생회장. 우리 고등학교도 아니었지만.]

    “걔 진짜 학생회장이었어.”

    지환은 문득 말하고 조금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지환이 꼭 서진을 자랑하듯이 말한 것 같았다. 서진이야 자랑할 구석이 많은 사람이기는 했는데, 그래도 바로 어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하니 절로 어색해졌다.

    [어딘가에 있기는 했네.]

    그 감탄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두서없이 화제가 이어졌다. 가연의 회사 이야기를 하다가, 현정의 호주 생활을 이야기하다가, 동규가 휴학하고 뭘 하는지 이야기를 하고 지환의 졸업 준비를 이야기하는 종종, 지환은 핸드폰 액정을 계속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지금 전화하면 받을까. 어제는 자기 집을 버려 두고 도대체 어디서 잤을까. 본가는 가기 싫어하니 거기는 아닐 텐데. 그럼 어디에 갔던 걸까. 지환이 모르는 다른 친구가 있던 걸까. 아니면 핸드폰도 놓고 갔으면서 지갑은 용케 챙겨서 숙박 시설에라도 갔을까.

    “나 잠깐 한 대 피우고 온다.”

    “너 끊은 거 아니야?”

    “쟤 헤어지고 다시 피우잖아.”

    그 말을 들으며 술집 밖으로 나온 지환은 서진에게 전화를 걸며 담배를 피우려다가, 문득 머뭇거리며 담뱃갑을 다시 집어넣었다. 왜인지 괜히 서진이 생각났다. 종종 스트레스를 받고 늦게 흡연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거면 차라리 먼저 한 번 피워 보고 이건 피울 게 아니라는 걸 아는 게 나을 것 같아 서진에게 한번 피워 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서진은 첫 흡연자들이 다들 그러는 것과는 달리 기침 한 번 하는 법이 없었다.

    별것도 아닌데, 그런 게 생각나자 담배를 피우고 싶지 않아졌다. 더불어 본인은 담배를 피우지도 않으면서 언제부터인가는 지환이 담배를 피우면 그 옆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게 민망해서 점점 피우는 횟수가 줄어들기도 했는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너 집에는 들어가는 거지? 나 거기 없으니까 들어가]

    메시지를 보낸 지환은 혹시 몰라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되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최지환, 왜 나와 있어?”

    문득 들린 목소리에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일이 있어 늦어질 거라고 했던 혜린이 보였다.

    “담배 피우러 나왔는데, 안 피우려고.”

    “그래, 잘했어. 그거 피워서 뭐 하게.”

    지환은 다시 핸드폰을 들여놓으며 그대로 혜린과 함께 그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서진은 뭘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계속 한편에 남았다.

    * * *

    예전 언젠가에 경쟁자 성적 떨어뜨리는 방법 중 고백 공격으로 멘탈 부숴 버리기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서진이 지환의 졸업을 막기 위해 헛짓거리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니 근데 이 새끼는 그 이후로 변명이든 뭐든 뭐라도 해야지 잠적이었다. 혹시 몰라 연우에게도 연락했는데, 연우는 늘 그렇듯 서진의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언제 한번 지나가다가 서진의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건 봤던지라 집에는 들어가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지환이 집에 찾아가면 이제는 서진이 정말 자기 집에도 안 들어갈까 봐 찾아가지는 못했다.

    지환은 심각한 표정으로 강의실에서 나오는 학생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동안 붙어 다니느라 무슨 수업을 듣는지는 대충 알고 있으니 얼마 전에는 수업 시간을 맞춰서 찾아갔는데, 심지어 그 성실한 한서진이 수업에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팀 발표 수업이라고 하니 서진의 성격상 반드시 나올 걸 알아 지환은 마침 공강이겠다 강의실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런데 어째 서진이 나오지를 않아 지환은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가, 창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서진을 발견했다.

    지환이 잠시 문가에 가만히 서 서진을 바라봤다. 무심한 표정과 차분한 그 분위기는 서진에게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미묘함을 만들어 냈지만, 지환은 바로 걸음을 옮겨 그 앞으로 다가갔다.

    “잘도 숨었다.”

    지환을 발견하고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서진의 어깨를 꾹 누르자 서진의 시선이 이리저리 떨렸다.

    “수업까지 째고.”

    서진은 정말 지환이 본 사람 중에서도 몇 없이 모범적인 사람이라, 설마하니 수업까지 빠질 거라고는 정말 예상치 못했다.

    “야, 너는 씨발.”

    우선은 잡아 놓기는 했고 며칠간 찾아다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슨 말을 할 거라고 정해 놓은 바는 없어 한숨을 내쉬자 서진이 움찔하며 지환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너 패냐?”

    언제 장난으로라도 손 한 번 올린 적이 없는데 저러니 어이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날도, 그러니까, 다짜고짜 사고인지 뭔지 입술이 맞닿았던 그 날도 그랬다. 행동은 자기가 해 놓고 꼭 자기가 얻어맞은 것처럼 군 것도 서진이었다.

    “야. 행동을 했으면 책임도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냥 갖다 박고 미안하다고 하면 끝인 줄 아나.”

    “죄송, 해요.”

    언뜻 떨리며 나온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처연한 표정에 지환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꼴이 꼭, 지환이 서진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지 않나. 누가 보면 대학생이나 돼서 일진 짓 하나 싶을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의실에 있던 몇몇 학생들이 지환과 서진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야, 일단 일어나. 너 어차피 뒤에 수업 없지? 또 튀면 진짜 죽는다.”

    그 말에 서진이 머뭇거리며 일어났다. 그대로 그냥 지환에게 다가오려는 모습에 지환은 기가 차서 그 옆의 가방을 서진에게 들려줬다.

    “아니, 가방은 챙기고.”

    도대체 정신을 어디 빼놓고 다니는 걸까. 저번에는 자기 집을 나가지를 않나, 나가면서 핸드폰 하나를 안 챙기더니 이번에는 또 가방을 놓고 가려고.

    “죄송해요.”

    기분이 싱숭생숭해 그냥 계속 서진의 집을 향해 걷는데. 서진 역시 말 한마디 없이 고개를 숙이고 지환의 곁을 따랐다. 누가 보면 정말 지환이 서진을 패러 끌고 가는 줄 알 것 같았다. 걸으면 걸을수록 오히려 더 답답하기만 했다.

    그 적막 속에서 서진의 집에 도착하자 지환은 우선 찬찬히 얘기해 보자 싶어 소파에 앉았는데, 서진이 지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지랄 말고 그냥 소파에 앉아. 아니면 부엌 의자 가져오든가.”

    이 새끼가 진짜 뭐하나 싶었는데, 서진은 주춤거리며 겨우 일어나 또다시 머뭇거리며 소파 끄트머리에 겨우 앉았다.

    “왜 그랬어?”

    “죄송해요. 제 잘못이에요.”

    소파 끄트머리에 앉는 거 가지고도 시간을 끌더니 대답은 또 재깍 했다.

    “내가 지금 사과받자는 게 아니고 왜 그랬냐고.”

    “죄송,”

    또다시 나오는 사과에 지환은 그 말을 끊어냈다.

    “내가 쉬웠냐?”

    지환은 서진을 빤히 바라봤다.

    “너는 술 한 모금도 안 마셨잖아.”

    취해서 그랬다기에는 정당성이 부족했다. 애초에 취해서 그랬다고 해도 정당성이 없지만.

    “그런데 나는 좀 취한 것 같겠다 그래도 될 것 같았어?”

    지환 혼자 생각을 많이 해 봤다. 하지만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랬던 적이 없던 건 아니다. 고등학교 때는 몇 번 그랬던 적이 있다. 어차피 지환이 줏대 없이 사람을 만나는 거야 같이 노는 애들 사이에서는 비밀도 아니었고 어쩌다 술을 마시면 자제력도 풀어졌겠다 지환에게 키스하는 사람이 없던 건 아니다. 물론, 남자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데, 군대 다녀와서는 제대로 된 연애를 하며 정신을 차렸고 그게 벌써 꽤 오래전 일이었다. 그래서 지환도 이제는 술 마시고 생각 없이 키스하는 사람의 유형을 잘 알지는 못했다. 거기다 지환이 지금껏 느꼈던 바에 의하면 서진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 완벽히 파악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어쩌면 그저 지환이 사람을 잘못 봤을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그래서 서진을 찾았다. 혼자 생각하기보다는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기분 나쁜 거 알아요.”

    서진이 떨리는 시선을 들어 지환을 바라봤다.

    “때리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그게 아니면, 그냥 형 기분 풀릴 때까지 뭐든 하세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서진은 정말 차라리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여서, 지환은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진을 바라보다가, 겨우 말했다.

    “서진아, 형이 양아치였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진짜 일진 짓 하면서 사람 패고 그랬던 건 아니거든. 그냥 모범생은 아니었다는 소리야. 그렇다고 그게 꼭 사람 패고 다녔다는 뜻은 아니지 않냐.”

    그랬던 적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그쪽에서 먼저 건드렸을 뿐이고 다 친구들이었다. 그랬다고 잘했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원래 그 나이에는 좀 싸우기도 하면서 크는 거 아닌가.

    “나는 지금 너한테 왜 그랬는지를 묻는 거야.”

    지환의 말에 서진이 고개를 숙였다.

    “저 이제 안 보실 거죠.”

    지환은 조금 망설였다. 지환도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지환은 서진이 마음에 들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사건이 하나 터졌다. 그 정도는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있을 것 같으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나 싶기도 했다.

    “앞으로도 계속 보려고 묻는 거잖아.”

    그래도 역시, 아예 안 볼 거라면 그냥 그대로 끊어냈으면 됐을 일에 지금처럼 서진을 붙들고 있는 건 뭐라도 해결 방안을 내 보자 싶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 말에 서진은 아주 잠깐 지환을 바라봤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저 싫잖아요. 역겨운 거 알아요.”

    어째 분명 얘기를 하는데도 더 답답했다.

    “아니 근데 이 새끼는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다 안다고 말하지. 너 관심법 같은 거 쓰냐?”

    생각해 보면 저번 언젠가에도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눴던 것 같았다. 서진은 은근히 지환이 묻는 건 대답하지도 않고 자기가 할 말만 했다.

    “휴학할게요.”

    “이거 진짜 미친 새끼인가.”

    지환은 결국 참지 못하고 탄식하며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야, 한서진, 서진아, 너 때문에 돌겠다.”

    지환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랬냐고. 뭐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지환과 눈이 마주치자 서진이 다시 시선을 피했다.

    “네가 말 안 하면 내가 생각한 이유를 말해 줄까?”

    서진이 이렇게 나오면 지환은 알아서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

    “내가 좀 놀았다고 하니까 키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냐? 어차피 아무랑 뒹구는 새끼인데 키스 좀 한다고 해도 별거 아니라고 넘길 것 같았어? 그냥 한번 해 보고 싶었는데 마침 앞에 좀 구른 새끼도 있겠다 해 본 거고?”

    “아니에요. 형,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원래부터 굳어 있던 표정이 창백하게 질리기까지 하자 지환은 상황도 잊고 서진을 안쓰러워할 뻔했다.

    “절대,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어떻게 그래요.”

    오해받아서 억울하다기보다는, 괴롭다는 듯이 옅게 찌푸려진 표정에 지환은 물었다.

    “그럼 뭔데?”

    지환은 결국 저 역시 표정을 굳혔다.

    “한서진, 내가 너한테 나 좋아하냐고 직접 묻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내가 그것까지 직접 물어보는 건 좀 아니잖아.”

    쉽게 본 게 아니라면, 결국 지환이 생각할 수 있는 이유라고는 그게 고작이었다. 취한 것도 아니고 쉬워 보였던 것도 아니라면, 지환은 상상력이 없는 사람이라 그 외로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다.

    “형, 저는.”

    지환은 가만히 서진을 바라봤다.

    “제가 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건 다 잘못된 거예요.”

    서진은 지환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했다.

    “형은 저만 아니면 나쁠 일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데 저 때문에 괜히.”

    그 차분하고 단정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라고는, 이해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저는 제대로 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남들 하는 것만 따라 하면서, 어차피 뭐 하나 제대로 고를 줄도 모르니까 그러는 건데.”

    생각해 보면 서진은 원래도 저랬다. 객관적으로 뭐 하나 잘난 것 없는 새끼들도 자신감이 그렇게 대단한데, 왜 어디를 봐도 잘난 서진은 저럴까 싶을 정도로. 사실 서진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연우도 그랬다. 뭘 잘해서 잘한다고 하면 꼭 그렇지 않다고 하며 당황했는데, 겸손이나 민망함보다는 정말 곤혹스러움이 보였다.

    지환은 어차피 남자애들은 가만히 있어도 주위에서 추켜올려 주니 집안에서는 기를 좀 죽여 놓아야 한다는 제 어머니의 교육 철학에 공감하지만, 연우와 서진의 경우에는 그 경우가 좀 많이 심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남의 집 집안 환경이 절로 의심됐다. 그 이전에도 서진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으며 집안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다 제가 잘못한 거예요.”

    그 말에 지환은 서진을 살폈다. 진심이든 아니든, 나름대로 잘 웃던 그 얼굴은 이제 창백히 질려 있었다. 그래도 요즘에는 진심으로 웃기도 하고 지환과 같이 있을 때는 곧잘 짜증도 냈었는데.

    “한서진, 진짜 내가 직접 물어야 되겠어?”

    어쩌면 더 잘 이야기를 풀어낼 방법이 있겠지만, 지환은 어떻게 봐도 섬세한 사람은 전혀 아니었다.

    “너 나 좋아해?”

    말하기 힘들다면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지환은 고작 그러려고 서진을 찾은 게 아니다. 지환은 답을 원했다.

    “그건,”

    “변명하지 말고 다른 거 덧붙이지 말고 그냥 말해.”

    서진의 말을 끊어낸 지환은 이어 물었다.

    “너 나 좋아해?”

    “네.”

    문득 떨어진 말 뒤로 서진이 절박하게 말을 이었다.

    “원래 안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됐어요. 그러면 그냥 좋아해야 하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됐는데, 그게 안 됐어요.”

    지환은 그 말에 답을 하는 대신, 몸을 일으켰다.

    “어디, 형, 어디 가요?”

    “생각 좀 해 봐야겠어.”

    지환은 정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왜 그랬는지에 대한 전말은 들었으니 지환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가 남았다. 어떻게 할지는 이미 아는데, 서진을 위해서는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이제 저 안 보실 거죠.”

    “모르겠어.”

    지환은 일어선 채로 가만히 서진을 바라봤다.

    “네가 그랬었잖아. 관심 있던 사람이랑 어떻게 친구를 하냐고.”

    그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지금 지환과 서진이 이런 식으로 다시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는 나한테 관심 있던 사람이랑도 친구 할 수는 있어. 그런데 너는 잘 모르겠어.”

    애초에 지환은 남중, 남고, 공대, 군대 완벽한 엘리트 코스로 여자를 만날 일이 많지는 않지만, 그 와중에 여자친구를 꽤 사귀어 보기는 했다. 그 과정에서 거절해 본 적도 많은데, 그래도 다들 친구로 남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애초에 가벼운 감정이라 그랬던 게 아닐까. 그 시절에는 그랬으니까. 하지만 서진은, 그렇게 간단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그러니까,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하기는 하거든. 마음에 들고. 그건 알았어?”

    “몰랐어요.”

    지환은 상황도 모르고 어이가 없어졌다.

    “그걸 왜 모르냐.”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한 지환은 곧이어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런데 그게 그런 방식은 아니야.”

    확실히 지환이 서진을 꽤나 좋아하기는 했다. 서진은 모르는 모양인데, 서진은 생각하는 방식이 꽤나 바르고 깨끗했다. 그게 좀 심해서 강박적인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지환은 서진의 그런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신경이 쓰였고.

    “잘못했어요.”

    지환의 말 뒤로 바로 나온 그 목소리에 지환은 물었다.

    “뭐가?”

    “좋아해서.”

    떨림과 참담함이 섞여 나온 그 답에 지환은 잠시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서진을 내려다봤다. 서진도 고민이 많을 수는 있다. 첫사랑인지는 모르지만,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니 생각이 많기는 하겠지. 그건 충분히 혼란스러울 일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게 미안할 일은 아닐 텐데.

    “다짜고짜 입술부터 박은 거랑 그다음 잠수 탄 건 잘못 맞는데 네가 날 좋아하는 게 잘못은 아니야. 그러니까 그걸로 사과하지 마.”

    서진이 저러면 지환이 뭐라고 할 말도 없고 괜히 기분만 이상해졌다.

    “내가 널 안 받아 주는 것도 내 잘못은 아니니까 나는 사과 안 할 거거든. 미안하다고도 안 할 거야.”

    보통 고백에는 기본적인 요소가 있다. 좋아한다고 하면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기 마련이다. 고마워, 나도 너 좋아해. 혹은 미안한데, 받아 주지는 못하겠다. 받아 줄 때는 고마워, 거절할 때는 미안해. 종종 고마운데 받아 주지는 못하겠어 미안해와 같은 변형이 있기는 한데, 어쨌든 거절할 때는 주로 미안하다는 말이 들어갔다.

    하지만 지환은 서진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싶지 않았다. 서진의 마음을 받아 주지 못하는 건 지환이 미안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서진이 지환을 좋아하는 것도 지환에게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다. 지환은 서진에게 그에 관해 미안해하지 않을 테니, 서진도 미안해하지 말아야 했다.

    “제가 다 망친 거예요?”

    문득 떨어진 그 물음에 지환은 어쩌면 조금쯤 충격을 받으며 서진을 바라봤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걱정되게 만드는 거지.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돌겠다, 서진아.”

    지환이 결국 몸을 굽혀 쭈그려 앉으며 제 머리를 헤집자 서진이 말했다.

    “제가 망친 거 알아요.”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지, 덤덤한지조차도 확실히 구별할 수도 없었다. 지환은 고개를 들어 서진을 바라봤다. 얌전히 소파에 앉아있는 그 모습이 이 와중에도 정말 잘생기기는 했는데, 그 심각한 표정을 보면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잘생겼다고 놀릴 상황이 전혀 아니라는 게 체감됐다.

    “서진아, 나는 네가 걱정돼.”

    지금 이 상황에서 지환이 서진을 걱정하게 할 정도로 서진의 재능은 탁월했다. 본인이 뭘 하는 것도 아닌데, 막상 지환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네가 싫은 게 아니야. 네가 잘못을 하기는 했지만, 말했잖아. 네가 날 좋아하는 게 잘못은 아니라고.”

    지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 상대로 뭘 하나 싶기까지 했다.

    “빨리 사과나 해. 제대로.”

    서진은 보통 어른스러웠다. 차분한 분위기가 특히 그랬고 실제로 뭐든 자연스럽게 해결하는 것도 그랬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같은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도 어린 구석이 종종 보였다. 서진은 돌발 상황이 일어나면 아닌 척 당황했고 정리되지 않은 것들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사람마다 방식이야 다르겠지만, 삶이 정리되지 않으면 또 무슨 큰일이 난다고. 각자 부족한 부분은 있기 마련이고 종종 짜증스러울 수도 있다. 별것 아닌데 화가 날 수도 있고. 다들 그러고 사는데도, 서진은 자신은 그러면 안 된다는 듯이 굴었다. 그래서 지환이 보기에, 서진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몰랐다.

    “좋아해서 죄송해요.”

    그 답답한 말에 지환은 이제 헛웃음도 지을 수 없었다.

    “넌 내 말을 듣기는 하냐? 내가 언제 그거 사과하래?”

    “성추행한 거 죄송해요.”

    지환은 이제 아예 할 말을 잃었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맞는 말이기는 했고 자기 객관화가 상당히 잘 되어 있는 건 칭찬 받을 만 했는데, 어째 머리가 아팠다. 지환은 서진과 만나지 못하던 그 기간 동안 계속해서 서진의 그 표정을 생각했었다. 왜 그렇게 겁을 먹었을까.

    지환은 지금껏 고백을 받으며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다. 설렘이든, 안 될 걸 미리 알고 있는 체념이든, 민망함이든, 긴장이든, 그런데 왜 서진은 그 다양한 선택지를 놔두고 하필이면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그 이후로 피한 것도 죄송해요.”

    지환은 복잡한 머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시선을 내려 바닥을 바라봤다.

    “그래. 나도 그거 사과 받을지 안 받을지는 더 생각해 볼게.”

    서진이 경험한 게 얼마 없다는 거야 알고 있다. 지환과 서진의 대학에 오려면 고등학교 때 공부 이외의 것을 한 사람이 더 드물다는 거야 알고 있는데, 서진은 대학에 온 이후로도 새로운 경험에 낯을 가렸다. 서진은 접촉에 방어적이기만 했고 어쩌면 기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너는 그거 말고 다른 거로는 미안해하지 마.”

    지환은 그걸 다 알면서도 내버려 뒀다. 애초에 지환이 신경 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넓은 척하지만 실상 좁기만 한 서진의 인간관계에서 그나마 서진이 문을 열고 있던 건 지환이 고작인데, 뭐라도 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네가 그거 미안해하면 나도 너 안 받아 주는 거 미안해해야 해.”

    역시 서진은 지환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들을 신경 쓰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형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 이성적이기만 한 답에 지환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거 너한테도 해.”

    통계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는 자신보다 타인에게 박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에게 엄격해서 타인에게도 엄격하든가. 그런데 정작 서진은 타인에게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더없이 엄격했다. 어쩌면 본인에게 너무 엄격해서 타인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을지도 모르고.

    “네가 직접.”

    지환은 서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한서진, 나는 네가 걱정돼.”

    마주한 서진의 시선이 떨렸지만, 지환은 시선을 떼어내지 않았다.

    “너도 그건 알고 있어야 되는 거야.”

    지환이 서진을 걱정한다는 걸 알았다면, 서진은 최소한 말도 없이 사라지지는 말았어야 했다. 지환에게 해명하든 변명하든, 그건 둘째 치더라도, 우선 걱정할 걸 알았다면 차라리 뻔뻔하게라도 굴었어야 했다. 그러니 결국 서진은 지환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도 모른다는 소리겠지.

    “그리고 서진아, 너도 너를 걱정해야 해.”

    서운하다기보다는, 안쓰러웠다.

    “너랑 내 사이가 어떻게 될까 봐, 내가 화낼까 봐, 그런 거 말고 너를 걱정하라고.”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도 없었다. 지환은 그제야 종종 서진을 보며 느꼈던 위화감을 정의했다. 서진은 꼭 자신을 중심에 두는 법을 배우지도 못했다는 것처럼 굴었다.

    “물론 다른 것도 걱정하는 게 맞는데, 너도 걱정해.”

    지환은 가만히 서진을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하나하나 너 그때 왜 그랬냐, 지금은 왜 그러냐, 그런 말을 하며 분위기를 풀 수는 있다. 사실 지금도 바로 달래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환은 그러기보다는 서진을 가만히 놔두기를 택했다.

    “갈게.”

    문득 지환의 손목을 잡은 아주 옅은 온기가, 인식할 그 작은 틈만을 남기고 다시 사라졌다. 지환은 제게서 떨어진 그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서진을 뒤에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서진을 달래야 한다면, 그건 서진 자신이어야 했다.

    * * *

    어떻게 떼어 놓기는 했는데, 서진의 생각을 끊어낼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됐을까. 어쨌거나 달래 줘야 했던 건가. 지환은 서진처럼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들을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지환이 무언가를 잘못했을지도 몰랐다.

    “너 뭐 하는 거야, 이 새끼야!”

    동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 보니 지환이 양파 싹을 거의 뭉개듯 매만지고 있었다.

    “하나 사 줄게.”

    동규는 휴학을 하며 미쳐 버렸는지 방에서 양파를 키우고 있었다. 거기다 하루 한 번 좋은 말을 해 주고 있다는데, 이과의 수치였다.

    “그 양파는 내가 사랑한 양파가 아니야.”

    “지랄한다. 너 내가 이거 싹 잘라서 다른 양파 사이에 놔두면 구분 할 수 있어?”

    “존나 못 하지.”

    그 멀끔한 답에 지환은 만지고 있던 양파 화분을 내려놓으며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누웠다.

    “용케 복근 안 뭉개졌네.”

    누우며 티가 올라갔는지 지환의 배를 보는 동규의 말에 지환은 대충 티를 끌어 내렸다.

    “뭘 봐, 게이 새끼야.”

    늘 그렇듯 대수롭지 않게 말한 지환은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이런 얘기를, 이렇게 쉽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지금까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는데, 서진이 생각나니 갑작스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고 보면 서진의 앞에서도 이런 말을 꽤 했던 것 같은데. 서진은 원래 게이였을까. 그랬다면 그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에 지금껏 연애를 안 해 본 것도 이해가 가기는 했다. 그게 아니라 이제야 알아차린 걸 수도 있지만, 지환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함부로 할 때마다 상처를 받은 건 아닐까. 아무리 별 의미가 없이 하는 말이라도 이런 말을 쉽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뭔데.”

    갑자기 심각한 지환이 의아한지 지환을 바라보는 동규의 모습에 지환은 물었다.

    “동규야, 내가 말을 좀 함부로 하나?”

    “어.”

    “아니, 근데 그럼 지는,”

    망설임도 없이 나온 동규의 답에 지환이 즉각적으로 반박하다가, 이내 말을 흐렸다.

    “왜, 네 여친이 너 말 함부로 한다고 해?”

    “나한테 여친이 어디 있어.”

    헤어진 지가 벌써 몇 달이었다. 동규도 그걸 모르지 않는데 왜 갑자기 저러나 싶어 바라보자 동규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 연애 안 해?”

    “하늘이 이후로 안 하지.”

    사실 그대로의 말이었는데도, 동규는 의심의 끈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표정으로 드러냈다.

    “아니야, 너 연애할 때 그 특유의 정신 빼놓고 다니는 게 지금도 있는데.”

    “내가 무슨 정신을 빼놓고 다녀.”

    지환은 연애하면서도 학점도 다 챙겼다. 사실 하늘이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을 좋아해서 그렇게 된 거기는 하지만, 어쨌든 할 건 다 했다.

    “누군데 나한테도 말을 못 해?”

    “없는데 어떻게 말해.”

    단호하면서도 심드렁한 말에 동규가 유심히 지환의 얼굴을 살폈다.

    “네가 그렇게 봐 봤자 잘생긴 거 말고 또 뭘 찾게?”

    “봐. 말 막 하네.”

    그 뒤로 동규가 말을 이었다.

    “너 하늘이랑 헤어지고 한 달쯤 뒤인가, 그때부터도 좀 낌새가 있었어. 그래서 겁나 빠르네 싶었거든. 걔랑 잘 안됐냐?”

    “하늘이랑 헤어진 다음에 아무것도 없었다니까.”

    귀찮다는 걸 숨기지 않고 말하자 동규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심스러운 기색을 걷지는 않았다.

    “그러는 너는 누구 없냐.”

    없는 걸 뻔히 알면서 묻자 동규가 꽤나 심각하게 말했다.

    “야, 솔직히 나는 이제 여자가 좀 어렵다.”

    사실 지환의 주위에서 동규 같은 사람이 드문 건 아니었다. 주위가 다 남자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자가 낯설어지고 어려워지는 수순이야 흔했으니.

    “너 근데 여친 있었잖아.”

    “그거 새내기 때잖아. 지금 몇 년이 지났는데.”

    동규는 그대로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과는 딱 새내기 때 단 한 학기, 동아리 활동 할 수 있을 때 어떻게든 여친 사귀고 걔랑 끝까지 안 가면 두 번 기회는 없는 거야.”

    그 말에 지환은 새내기 때 동아리도 하지 않았고 연애도 하지 않았지만, 복학 후 여자친구를 사귄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말고 새끼야. 재수 없는 새끼.”

    지환이 짧게 웃자 동규는 재수 없다는 표정 그대로 말했다.

    “썸녀랑은 잘 되냐.”

    “없다니까.”

    도대체 저 이야기를 언제까지 할 생각일까.

    “곰곰이 생각해 봐. 진짜 없어?”

    그 말에 지환은 가만히 제 가슴팍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오래 감고 있을 것도 없었다.

    “가족 제외하고 내가 개강하고 한마디라도 말 섞은 여자는 김가연, 박혜린뿐이야. 통화도 쳐 주면 강현정 추가.”

    “뭐야, 진짜 없어?”

    “어, 전혀 없어.”

    애초에 요즘 만난 거라고는 서진뿐이기도 했다. 서진을 생각하니 또 착잡해졌다. 지금껏 지환이 서진에게 잘못한 게 한둘이 아닌 것 같았다.

    “야, 나는 좀 예민하고 섬세한 애들이랑 상성이 좀 안 맞나?”

    “이렇게 뜬금없이?”

    “말이나 해 봐.”

    지환의 독촉에 동규가 별다른 어려움도 없이 답했다.

    “너는 괜찮은데 상대가 속 터져서 죽지.”

    “그런 게 없지 않아 있겠지.”

    “없지 않아 있겠어. 그냥 확실히 있지.”

    그 단호한 말에 지환은 베개를 동규에게 던졌다.

    “말하래서 말했는데 지랄병이 도졌나.”

    “너 고백 받아 본 적 있냐.”

    문득 나간 지환의 말에 동규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나는 공학 나왔으니까.”

    중고등학교를 다 공학을 나온 탓에 난데없이 남대에 들어와 적응이 안 됐다는 소리는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거절하고 친구 한 적 있어?”

    “너 김가연, 혜린 누나, 강현정 말고 말 섞은 적도 없다며. 고백은 말 섞는 건 아니라 괜찮냐? 그냥 듣기만 하고 튀었어?”

    “아니, 새끼야, 진지하게.”

    인상을 찌푸리자 동규가 그제야 조금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는 거절한 적이 없어.”

    “그래,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왜, 걔랑 사귀기는 싫은데 친구는 계속하고 싶어? 희망 고문 하겠다 이거지? 쓰레기네.”

    지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 혼자 착착 논리를 쌓아가며 내린 그 결론에 지환이 어이가 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동규를 바라봤다.

    “그런 게 아니라, 걔가 좀 챙겨 줘야 할 것 같고 그런 게 있어.”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스타일이야? 청순가련?”

    지환은 곰곰이 서진을 생각해 봤다. 지환보다도 더 키가 커진 지가 꽤 되기는 했지만, 어째 가만히 두기 힘든 구석이 있기는 했다.

    “대충 비슷해.”

    “그런 스타일이면 너 말고 다른 애가 챙겨 주겠지. 걔 챙겨 주고 싶어서 안달 난 놈들 분명 주위에 더 있을 거다.”

    “그럴, 그럴 수는 있는데.”

    저절로 떨떠름한 목소리가 나왔다. 고작 얼굴 한번 잠깐 본 가연도 서진을 기억하고 한 학기 같이 수업을 들은 현정도 여전히 종종 서진의 이야기를 했다. 서진을 더 가까이서 더 오래 봤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서진을 좋아할 사람이 정말 많겠고.

    “걔가 주위에 벽을 쳐서 친한 게 나뿐이야. 아마도.”

    “그래도 이제 너랑 끝났으니까 다른 사람도 만나고 그러겠지.”

    “왜?”

    “왜냐니. 그럼 걔는 평생 너만 봐야 되냐? 너는 받아 주지도 않을 거라며.”

    꼭 지환을 파렴치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빛에 지환은 억울해졌다.

    “그게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썸 안 탄다면서.”

    “아니, 진짜 아니야.”

    차마 지금 말하는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말을 할 수는 없으니, 정말 아니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지금 말하는 게 서진인데, 지환은 게이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썸을 탄다고.

    “웬만하면 쓰레기 짓 하지 말고 그냥 받아 줘라. 그러다 걔가 너한테 관심 없어지면 후회하지 말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잘도 그런 거 아니겠다. 너는 진짜 딱 티가 난다니까?”

    “아니 씨발 상대가 없는데 썸을 어떻게 타냐고.”

    “그럼 상대가 없는데 고백은 어떻게 받냐? 적당히 튕기다가 잘 받아 주기나 해라. 그러다 너 다음 주에 또 전화 와서 술 마시자고 지랄하지 말고.”

    도저히 말이 통하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사건의 진상을 말할 수도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너 걔 안 좋아했으면 나한테 이런 소리도 안 할 거 아니야. 그냥 거절하고 끝냈지.”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한데, 어쨌거나 종류는 다르지만, 지환은 서진을 좋아했다.

    “받아 주는 거랑 별개로 걔랑 나랑 친해서 그래. 나 없으면 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그 말에 동규가 정말 어이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지환아, 자의식 과잉 예방하고 건강한 삶을 되찾자.”

    동규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청순가련 친구는 다른 사람이 도와줄 거야. 아니면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어쨌든 성인일 거 아니야.”

    “그건 맞는데.”

    “솔직히 그냥 너 말고 다른 사람이 걔 도와주는 게 싫다고 하지 그러냐.”

    “그런 거 아니야.”

    떨떠름한 지환의 말에 동규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봤다. 물론 지환은 서진을 걱정하고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하고 보러 가고 싶기는 했는데, 그래 봤자 지환이나 서진이나 똑같이 남자였다. 애초에 지환이 게이가 아닌데 뭐가 성립하겠는가. 그냥 후배한테 마음이 쓰이는 거야 드문 일도 아닌데.

    “그래, 됐다. 네가 고생하지 내가 고생하냐.”

    그 말을 끝으로 동규는 지환에게 무언가를 더 캐묻는 것 없이 화분 속 양파를 아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차라리 개를 저렇게 만졌으면 뭐라고 하지를 않겠는데, 양파를 쓰다듬는 걸 보자니 기분이 정말 모호했다.

    “차라리 내가 좀 그럴듯하게 키울 만한 거 사 줄까? 화분 같은 거.”

    “그런 거 있으면 분명 내가 죽일걸.”

    “양파는 죽여도 되냐?”

    “죽으면 먹지 뭐. 양파 싹 맛있다더라.”

    사랑하는 양파 어쩌고 할 때는 언제고 매정한 답이었다. 서진이었다면 식물도 성실하게 키울 텐데. 그 단정한 집에서 단정한 서진이 단정하게 식물을 키우는 걸 상상하기는 정말 쉽기만 했다. 그 생각과 함께 지환은 기분이 미묘해졌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 * *

    한서진 보러 갈까.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기는 한데, 지환이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말들은 사과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고 지금 지환이 서진을 찾아가는 게 맞는 일인지를 고민하며 강의가 있던 건물을 벗어나다가, 지환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형.”

    예상치 못한 얼굴이라 지환은 상황도 모르고 조금쯤 반갑게 서진에게로 다가갔다가, 이내 자신과 서진의 상황을 깨닫고 어정쩡하게 걸음을 멈췄다.

    “어, 안녕.”

    반가움과 머쓱함을 미묘하게 담아 인사하자 서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다시 지환을 바라봤다.

    “저 보기 싫은 건 아는데, 사과하려고 왔어요.”

    “내가 언제 보기 싫다고 했어.”

    지환은 즉각적으로 답하며 자연스럽게 서진을 잡고 걸음을 옮기려다가, 그 손목을 잡자마자 어색하게 놓았다.

    “여기는 좀 그러니까 내 차로 가자.”

    보통 지환과 서진이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서진의 집으로 가는 편이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그러기가 힘들었다. 지환은 그저 걸으며 흘깃 서진을 바라봤다. 고작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새 살이 좀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이전보다 불안해하는 기색은 덜하다는 게 나름대로 다행인 점일까.

    “뒤에 수업 없지?”

    데려다주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안 데려다주셔도 돼요.”

    어차피 가는 길인데 정말 새삼스러우면서도, 꼭 예전 같았다. 요즘 들어서는 서진이 지환을 거절하는 일이 없었는데.

    “제가 그렇게 하면 안 됐어요.”

    서진을 데리고 우선 차에 타기는 했으면서도 시동을 걸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자 서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분 나쁠 것도 알고 제가 더러워 보일 수도 있는 것도 알아요. 제가 그런 거랑은 별개로 형 기분까지 나쁘게 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내가 널 더럽다고 생각해?”

    당황스러워 가릴 것도 없이 묻자 서진이 시선을 내린 채로 말했다.

    “그렇게 느낀다고 해도 그건 당연한 거예요.”

    “아니, 아니야. 한서진, 너는 도대체 내가 한 말은 뭐로 들었어?”

    지환은 분명 서진에게 본인을 스스로 걱정하라고 했다. 그런데 왜 막상 나온 거라고는 이런 말일까.

    “제대로 사과하러 온 거예요.”

    “사과 이미 했잖아.”

    지환이 서진에게 들어야 할 사과는 멋대로 키스를 한 것과 그 이후에 잠적한 것뿐이다. 받아들일지 어떻게 할지는 아직도 정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사과를 듣기는 했다.

    “한서진, 나도 너한테 사과할 게 있는데.”

    지환의 말에 서진의 시선에 불안한 기색이 가득 들어찼다.

    “내가 말을 세심하게 고르지는 않잖아. 내가 그래서 종종 게이 새끼라거나,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는 건 알아. 그런데 그게 꼭 비하의 의미였다는 건 아니거든, 너도 알 거 아니야. 그냥 남자애들끼리 종종 하는 말인 거. 별생각 없이.”

    말을 하다 보니 그게 바로 비하였다는 걸 깨닫기는 했는데, 지환은 애써 변명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내가 실제로 게이에 대해서 편견이 있다거나, 악감정이 있다는 건 전혀 아니거든. 그냥 다른 사람이 남자 좋아한다고 하면 좋아하는구나 싶은 게 끝이야.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건 여자니까 받아들이지는 못한다는 거지 네 성적 취향 자체를 비난하는 게 아니야.”

    “그래도 형은 저를 그런 식으로는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그렇, 그렇기는 하지.”

    얼떨결에 머뭇거리며 답하자 서진이 그대로 말했다.

    “그런데 제가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불쾌했을 거 아니에요. 형 말대로 성별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형은 전혀 관심 없던 사람이 난데없이 그랬던 거니까.”

    하는 말이 참 이성적이기는 했는데, 세상사가 늘 이성적으로만 돌아가던가.

    “너 고백 받은 적 많지.”

    문득 나간 지환의 목소리에 서진이 지환의 의도를 파악하듯 잠시간 지환을 바라봤다.

    “많지는 않아요.”

    그 뻔한 거짓말에 답하지 않고 그저 서진을 바라보자 서진이 결국 말을 이었다.

    “그럭저럭.”

    많다는 소리였다. 다른 놈들은 두 번만 넘어가면 많다고 하던데, 두 번은 훨씬 넘을 서진은 막상 저랬다.

    “너는 그때마다 불쾌했어?”

    서진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친절하기는 하지만, 선을 확실히 그었다. 거기다 지금껏 애인을 사귄 적도 없으니 그 고백들은 모두 서진의 뜻과는 달랐을 텐데.

    “당황스러웠던 적은 있는데, 불쾌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나는 왜 불쾌할 거라고 생각해?”

    “그거야.”

    서진이 조금 참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고백했으니까.”

    그래 봤자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나 게이 혐오하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래도 형은 저 싫어하게 된 거잖아요.”

    지환은 이과, 특히 공대 남자들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알아먹지를 못했다. 그러니 지금 서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감이 오지도 않았고.

    “안 싫어한다니까?”

    지환은 돌려 말하는 법을 잘 몰랐다. 이만큼 직설적으로 말하는데 왜 서진은 알아듣지를 못할까.

    “제가 잘못해서,”

    “야, 한서진.”

    결국 답답함에 말하자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

    “나 너 안 싫어한다고.”

    “그래도 제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어요.”

    “네 생각에는 네가 지금 제대로 사과하는 것 같아?”

    지환이 보기에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건 서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는 지금 네가 뭘 사과해야 하는지도 모르잖아.”

    애초에 서진은 사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이미 너한테 사과 들었어. 그걸 받을지 안 받을지는 이제 나한테 넘어온 거고 너는 이제 할 일 없는 거야.”

    지환이 듣기에도 매정한 건지 달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이기는 했다.

    “그런데 뭘 또 사과해?”

    그 말에 서진이 잠시간 아무 말 없이 지환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리며 차 문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네. 시간 뺏어서 죄송했어요.”

    지환은 그대로 문을 열려는 서진의 행동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문을 잠갔다. 지환은 얼떨떨하게 자신을 보는 서진을 저 역시 얼떨떨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여 핸들에 이마를 댔다.

    “생각 좀 하자.”

    솔직해지자면, 애초에 답은 하나뿐이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하면 사과 받아 줄 수는 있어.”

    계속 걱정되고 신경 쓰였는데 그 이외의 답이 있을 리가 없다.

    “내가 받아 주면 너는 어쩔래?”

    당황스럽기는 정말 당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서진이 말한 것처럼 역겹지는 않았다. 애초에 무슨 감정을 느낄 새가 없기도 했고. 상황 파악을 하고 화가 나기는 했지만, 그건 이후에 서진이 연락 두절된 탓이 더 컸다. 그러니 사과를 받아 주는 건 문제가 아닌데, 그래서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당연한 소리였다. 좋아한다고 입술 먼저 들이대는 건 지환에게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하면 안 되는 짓이었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너는 괜찮겠냐고.”

    지환도 물론 서진이 어색하겠지만,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지낼 수는 있었다. 문제는 서진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정리되면 다시 본다고는 해도, 그 정리할 시간도 없이 다시 붙어 있으면 더 힘들지 않을까.

    “정리할 시간 필요하지 않아?”

    그 물음에 서진은 어떤 말을 하려는 듯 지환을 바라봤지만, 막상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날 불편하게 만들지만 않으면 괜찮아. 네가 날 좋아하는 그 자체가 불편한 건 아닌데, 드러내면 좀 그렇고.”

    무조건 배려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고 지환이 배려할 일도 아니라 지환은 차라리 솔직히 말했다. 물론 지환이 서진을 지금껏 그런 식으로는 인식해 본 적이 없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인식에서부터 피어나는 감정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서로의 성별이 달랐을 때나 가능성이 있다. 지환은 게이가 아니고 서진은 남자다. 뭘 어떻게 인식해 볼 수도 없다.

    “한서진, 말했듯이 나는 널 진짜 마음에 들어 하고 웬만하면 이렇게 연 끊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대강이라도 정리되면 그때 다시 만나자. 너한테도 그러는 게 낫지?”

    말하면서도 괜히 미묘했다. 이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최대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미묘한 찝찝함이 계속 거슬렸다.

    “제가 티 안 낸다고 하면, 그러면 예전처럼 같이 있어도 괜찮아요?”

    당연히 서진에게서 정리되면 연락하겠다는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온 말은 예상과 달랐다.

    “형은 어차피 눈치 못 챘잖아요.”

    정말 확신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렇기는 한데.”

    반박할 수도 없어 답한 지환은 그대로 이어 물었다.

    “너 진짜 괜찮아?”

    지환은 거절당해 본 적이 없다. 애초에 고등학교 때는 사귀기는 많이 사귀었지만, 사귄다고 보기도 애매할 정도로 가볍게들 사귀었다. 그 이후로 하늘과는 진지하게 만났지만, 처음부터 지환이 호감을 표했고 하늘도 받아 줬다. 물론 헤어지기는 했는데, 합의하에 헤어진 거라 누가 거절당했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거기다 헤어진 건 하늘의 졸업식 얼마 전이었다고는 해도, 실상 삐걱거린 건 몇 달이 더 됐으며 완전히 헤어지기 얼마 전에도 이미 잠깐이나마 한번 헤어졌던지라 따지자면 마음 정리는 그전부터도 이미 하고 있던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지환은 거절당한 후 어떻게 해야 더 빨리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안다고 해 봤자 지환과 서진은 성향이 꽤나 다른 만큼, 지환의 경우가 서진에게는 쓸모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네. 그게 마음 정리 더 빨리 될 것 같아요.”

    보통 반대 아닌가 싶어 지환은 서진을 바라봤다.

    “내가 붙어 있으면 정 털리는 타입인가?”

    지환이야 서진이 언제부터 지환을 좋아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니 혹시 원래도 서서히 마음 정리하던 중이었나 싶기도 했다. 원래 멀리서 좋아하다가 이번 연도부터 친해져서 붙어 다니니까 점점 정이 떨어졌나. 그래서 조금 남은 정이라도 떨어뜨리기 위해 붙어 있는 게 낫다는 걸까.

    “그냥, 저는 안 될 거 아니까요.”

    우선 지환이 붙어 있을수록 정떨어지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지만, 그저 사실을 말한다는 듯이 단정한 서진의 목소리를 들으니 지환 역시 마음이 가라앉았다. 지환은 핸들을 꾹 잡았다가, 이내 손의 힘을 풀었다.

    “일단 데려다줄게.”

    어쨌거나 지환은 사과를 받아 주겠다고 했으니, 나머지는 서진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다.

    * * *

    그렇기는 하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정말 예전처럼 지낼 수는 없었다. 서진과 지환은 다소 어색해졌지만, 아닌 척 굴었다. 서진은 나름대로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꾸미는 것과는 영 거리가 먼 지환은 뭐만 하면 어색하게 굴었다.

    분명 서진에게 티 내지만 않는다면 괜찮다고 했던 건 지환인데도 정작 누구보다 신경 쓰는 것처럼 구는 것도 지환이었다.

    “저렇게 작은 애는 내 손에 다 들어오나?”

    강아지 어질리티를 보며 강아지 크기를 가늠하고 있자 동규가 자신 역시 손으로 크기를 가늠해 봤다. 그래 봤자 지환이나 동규나 개를 키워 본 적이 없어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너 결과 언제 나온다고 했지?”

    그간 붙어 다니던 서진과 어색해진 지환은 동규와 꽤나 자주 보고 있는데, 동규가 얼마 전에 영어 시험을 봤다는 걸 생각하며 묻자 동규는 화면 속 강아지를 보는 그대로 답했다.

    “다음 주. 근데 대충 점수는 맞출 것 같아. 너는 겨울 방학 때 땄지? 차이고.”

    “필요치 않은 정보 되새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이기는 했다. 작년에는 지환이나 하늘이나 정말 바빴고 그 탓인지 뭔지 그전부터도 계속 삐걱거리기는 했다. 그러다가 종강하고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며 헤어졌는데, 실연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지환은 꽤나 열심히 공부했다. 그것만 따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다시 하늘을 잡고 조금 더 사귀다가 결국 졸업식쯤에 완전히 헤어지기는 했지만.

    “저 작은 몸으로 저기를 들어가네. 진짜 용감하다.”

    작은 강아지가 터널로 들어갔다 나오는 걸 감탄하며 말하자 동규가 옆에서 감동하며 손뼉을 쳤다. 지환도 강아지를 응원하며 집중하다가, 기록이 나오며 주인에게 뛰어들어 안기는 강아지를 보며 문득 물었다.

    “너는 네 아내가 강아지 싫다고 하면 어쩔 거야?”

    “포기해야지 어떻게 해.”

    지환과 동규의 인생 목표는 마당 딸린 집에서 가족과 오순도순 강아지를 키우며 사는 것이었다.

    “포기, 포기해야지.”

    그러면서도 고뇌에 가득 찬 목소리에 지환이 동규를 바라보자 동규가 심각하게 말했다.

    “그런데 솔직히 내가 결혼은 할 수 있을까.”

    그 말에 지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나도 그 생각 안 하는 건 아니야.”

    솔직히 지환은 아이는 있으면 사랑스럽기는 하겠지만, 아내에게 부담이 될 게 뻔하니 낳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아내와 이야기를 잘 해 봐서 강아지를 키우며 둘이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게 가장 큰 목표인데, 우선 그러려면 아내가 있어야 했다. 과연 선택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와 닿지 않던 때야 막연히 언젠가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겠지 싶었는데, 슬슬 이십 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은, 과연 자신이 선택받을 수 있을지의 문제가 됐다.

    “이제부터라도 요리도 좀 배워 보고 그럴까?”

    “나 청소는 진짜 잘하는데.”

    그래도 요리도 배우기는 해야겠지 싶어 동규를 바라보자 동규가 말했다.

    “우리는 여자 만날 일이 없잖아. 언제든 준비되어 있어야 해. 뭐든 다 어필을 해야 눈길 줄까 말까잖아.”

    확실히 지환과 동규의 상황에서는 언젠가는 좋은 인연이 찾아온다는 말이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주위에 여자라고는 전혀 없었으니 직접 인연을 개척해야 했다.

    “솔직히 나 같아도 공대남은 안 만나.”

    지환도 공감하기는 했다. 여자 없이 지내는 애들은 딱 티가 났는데,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우리 진짜 결혼 못 하는 거 아니냐.”

    “서른다섯까지 사람 못 만나면 나는 강아지 키울래.”

    동규의 말대로라면 이제 십 년이 남아 있었다.

    “왜 서른다섯인데?”

    “지금부터 키웠다가 나중에 결혼할 사람 생겼는데 그 사람이 강아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해. 강아지를 다른 곳으로 보낼 수도 없고.”

    “그래서 왜 서른다섯?”

    “그쯤 되면 나는 안 되겠구나 느낌이 오지 않을까.”

    그 말에 지환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가, 자신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웃을 때가 아니었다.

    “그랬다가 서른여섯에 결혼하고 싶은 사람 만나면?”

    “지금도 못 만나는데 그때라고 만날까?”

    상당히 현실적인 답이었다.

    “야, 그럼 우리 중에 누구 하나는 결혼하고 누구 하나는 못 했는데 결혼한 사람이 개 못 키우는 상황이면 다른 쪽이 꼭 강아지 사진 많이 보내 주자. 데리고 산책도 같이 시켜 주고.”

    지환의 말에 동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과 동규가 만나면 보통 이렇듯 어차피 지금 말해 봤자 알 수 없는 묘하게 생산성 없는 이야기들을 했는데, 또 추상적인 인생 계획을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서진이 생각났다.

    서진은 정말 좋은 남편이 될 텐데. 요리도 잘했고 정리정돈도 완벽했다. 늘 깔끔하고 예의도 바르다. 거기다 친해지면 예민한 것 같으면서도 꽤나 물렀다. 해 달라는 거 한 번 거절하는 법도 없었다. 입으로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는데, 막상 그래서 안 해 줄 거냐고 하면 그런 말은 안 했다며 다 들어줬다.

    거기다 섬세하기도 했다. 지환처럼 직설적으로 말해 줘야 겨우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먼저 알아차려 줄 테니 상대방도 편하겠지. 심지어 놀리는 재미도 있어 심심하지도 않았다. 누가 데려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누가 데려가 주기는 할까 고민하는 지환과는 달리 데려가겠다는 사람도 많겠지.

    “한서진 진짜 예쁘지 않냐.”

    그런 애를 도대체 누가 데려갈까 궁금했다. 결혼을 하기는 할까. 결혼하면 지환을 불러 주기는 할까. 어쩌면 연우의 지인으로 참석할 수는 있지 않으려나. 그때까지 지혜가 연우랑 사귀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지만.

    “존나 뜬금없다, 진짜.”

    어이가 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 동규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자 동규가 그대로 물었다.

    “그분이 그 경대 예쁜이?”

    그 목소리에 지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 멀쩡한 이름 두고 뭐 그따위로 불러.”

    “네가 부르셨어요.”

    그렇기는 한데, 그건 친해지기 전이었다. 지금이야 서진이 자기 얼굴 가지고 이야기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아주 가끔 직접 놀릴 때를 빼면 그 호칭을 입에 담지 않았고.

    “잘생기셨지.”

    동규의 말에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예쁜데.”

    모두가 아는 걸 왜 자기는 모른다는 듯이 굴까. 지환은 늘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다 요즘은 꼭 주눅 든 것처럼 굴기도 했다. 예전처럼 잘 웃기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지환의 앞이라 힘든 걸까. 그래도 마음 정리하는 데는 예전처럼 지내는 게 더 낫다고 한 건 서진이었는데, 사실 아니었던 걸까.

    “그분은 여자친구 있어?”

    “아니.”

    “그럼 소개 안 받으신대?”

    문득 나온 그 물음에 지환은 동규를 바라봤다.

    “왜? 남한테 여자 소개를 해 줄 거면 너부터 챙겨야 하지 않을까?”

    “누가 소개해 준대?”

    “그럼 왜 말하는데.”

    “소개해 주려고.”

    그 당당한 목소리 뒤로 동규가 말을 이었다.

    “고딩 때 친구랑 말하다 보니까 얘기 나와서. 소개 교환하기로 했거든. 근데 우리 과 애들은 좀 아니잖냐. 걔랑 연 끊을 거 아니면.”

    확실히 그렇기는 했지만, 설마 지환도 그 범위에 들어가는 건가 싶어 자기 자신을 가리키자 동규가 새삼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너 소개 안 받잖아.”

    맞는 말이기는 했다.

    “어. 그래도 물어는 봐야지. 혹시 모르잖아.”

    “받을래?”

    그러면서도 기대라고는 전혀 없는 목소리에 지환은 바로 답했다.

    “아니.”

    이미 예상했으면서도 구겨진 동규의 표정에 지환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서진도 안 받아. 걔 그런 거 안 좋아해.”

    그런데, 정말 서진이 그런 걸 안 좋아했던가? 서진은 여자친구 사귈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그게 애인을 사귈 생각이 없다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여자는 사귀지 않는다는 뜻이었을까. 서진이 연애해 본 적이 없는 건 알지만, 이제는 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거기다 어쩌면 서진은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유형일 수도 있다. 지환에게 차였으니 이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을까.

    “그런데 너 그 썸녀랑은 어떻게 됐냐.”

    문득 나온 동규의 물음에 지환은 답했다.

    “없다니까.”

    “고백까지 받은 썸녀랑 어떻게 됐냐고.”

    썸녀는 아니었지만, 아니라고 해 봤자 듣지도 않을 게 뻔했다.

    “그냥 친구 하기로 했어.”

    “쓰레기네.”

    “걔가 그러자고 했어.”

    “그런 말까지 걔가 하게 만들고.”

    후진 없는 비난에 지환이 동규를 바라보자 동규가 말했다.

    “너 그러다 걔 남친 생기면 어쩔래.”

    서진에게 남친이 생길지 여친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지환은 고민할 것도 없이 말했다.

    “어쩌긴 뭘 어째. 걔가 그 사람 좋다고 하면 그런 거지.”

    이 새끼는 지금 지환이 어장관리를 하는 줄 아나. 그럼에도 동규는 퍽이나 그렇겠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쿨한 척하네.”

    “못 그럴 이유는 뭔데?”

    “그렇게 쿨하셔서 헤어진 다음 미련 남았으면 얘기라도 해 보라고 할 때는 헤어진 건 헤어진 거니까 됐다고 하시다가 한 달도 못 버티고 다시 붙잡으러 가셨어요?”

    반박할 수가 없어 지환은 그저 동규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저 새끼는 지환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았다.

    “너 이만 죽어 줘야겠어.”

    지환이 일어나자 동규가 몸을 움츠렸다.

    “이번에도 쿨한 척하다가 질질 짜지 말고 좀 때에 맞춰서 행동하라는 뜻이지. 나 같은 친구가 어딨냐?”

    지환이 그 목덜미를 아프게 주무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오는 얄미운 목소리에 지환이 결국 그 등을 주먹으로 한번 적당히 치자 동규가 등을 매만지며 지환을 바라봤다.

    “내가 언제 질질 짰어?”

    혹시 하늘에게 그새 남자친구가 생겼을까 조언을 구하기는 했지만, 질질 짰다고 할 만하지는 않았다. 그런 걸 말해 봤자 더 놀리기나 할 테니 강아지나 보자 싶어 영상을 고르고 있자 동규가 지환의 옆에서 모니터를 손가락질했다.

    “저거 보자. 쟤 진짜 귀엽다.”

    지환이 보기에도 귀여워서 그 영상을 틀자 건장한 남자 둘이 금세 집중하며 말이 없어졌다. 홀린 듯이 영상을 보고 있는데, 서진이 생각났다. 서진은 강아지를 크게 좋아하는 기색은 없지만, 그러면서도 지환이 서진 옆에 붙어서 강아지 영상을 보고 종종 강아지 사진을 보내 주면 귀찮다는 기색 하나 없이 잘 받아 줬다.

    서진과 같이 보면 굉장히 재미없고 평화로웠다. 거기다 서진이라면 강아지도 잘 키울 게 분명했다. 생활 습관부터가 규칙적이니까 서진이 키우는 강아지라면 분명 건강하겠지. 거기다 착실하니 강아지도 정말 살뜰히 보살피겠고. 지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화면 속 열심히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바라봤다.

    * * *

    지환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걸음을 옮겼다. 서진에게 연락해 볼까. 이제 자정이 넘었으니 슬슬 막차 탈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나올 때가 됐다. 서진은 막차를 탈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생활 습관 유지를 잘하는 편이니 내일도 일찍 일어나면 지금은 학교를 벗어나야 할 때였다.

    “형, 태건이 역까지 가기 무서운데 태워 주세용.”

    방금까지 같이 과제를 하다가 막차를 타겠다며 나온 태건의 목소리에 지환은 가릴 것도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 나갔냐?”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짜증 나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고작 역까지 가는데 뭘 태워 줘.”

    거기다 잠깐이기는 했지만, 역에 들르려면 골목 하나를 돌아야 했다.

    “형 3출 쪽으로 지나면 되잖아.”

    “내가 널 위해 그렇게 해 줄 것 같아?”

    지환은 그대로 태건의 머리를 꾹 눌렀다.

    “그리고 무슨 집에 가려고 해. 내일 일찍 다시 와야 하는데 그냥 이은혁 집에서 자고 아침에 와. 걔도 아침에 온다고 했잖아.”

    태건은 지금도 원래대로라면 밤을 새워야겠지만, 이미 사흘을 학교에서 살았던 탓에 이제 더는 못 하겠다며 잠깐이라도 침대에 누워야겠다고 탈출한 참이었다. 그 귀한 시간을 왜 지하철에서 버리려고 하나 싶어 지환은 말을 이었다.

    “걔 모닝콜 해 달라고 계속 지랄하던데 네가 하면 되겠네.”

    같은 수업을 듣는 채팅방에서 한참 징징거렸던 걸 말하자 태건이 고민하며 말했다.

    “근데 걔네 집 가면 꼭 병 걸릴 것 같아.”

    지환도 한 번 가 봤다가 그 더러움에 질려 나왔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태건의 상황이면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바라는 게 많다.”

    “그건 그렇지.”

    결국 시간을 버리기보다는 위생을 버리기로 택한 태건이 지환에게 손을 흔들며 후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 내일 봅시다.”

    “어, 간다.”

    태건을 보내고 차에 올라탄 지환은 시동을 걸기 전에 서진에게 전화했다.

    [네, 형.]

    오래 지나지 않아 서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환은 말했다.

    “너 아직 도서관이야?”

    [방금 나왔어요. 이제 집 가려고요. 형은 어디예요?]

    “나도 이제 갈 건데 데려다줄게. 도서관 후문 가 있으면 되지?”

    [피곤하지 않아요?]

    “운전은 어차피 해야 되잖아.”

    그 말과 함께 시동을 걸자 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저 진짜 괜찮아요. 그냥 가셔도 돼요.]

    어차피 가는 길인데 데려다주는 게 뭐 어쨌다고 요즘 들어 서진은 또 저랬다. 생각해 보면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었는데, 괜히 오래된 일 같기만 해서 거절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언제부터인가는 데려다주겠다는 말도 없이 당연히 데려다주는 게 일상이었고 그대로 서진의 집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거기다 가끔은 서진이 먼저 오늘은 안 데려다주냐고 장난처럼 물어오기도 했고.

    “그래, 그럼 조심히 들어가.”

    [네. 형도 운전 조심히 하세요.]

    정말 별것 아닌 대화였는데도, 전화를 끊고 나자 가슴 한구석이 뭔가 거슬렸다. 지환은 우선 시동을 걸었다가, 자연스럽게 도서관 쪽으로 차를 몰았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가는 길에라도 만나면 만난 김에 타라고 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지금쯤이면 후문에서 내려가는 골목쯤에 있으려나 싶었는데, 딱 후문에서 서진을 발견했다. 서진은 어떤 프린트를 서진에게 보여 주는 남자와 함께 있었는데, 이 시간에 사이비한테 걸렸나 싶었다가, 이내 서진의 표정이 꽤나 편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친구인가. 서진은 꽤나 바쁘게 살던 작년과는 달리 이제는 굳이 사람과 교류하지도 않고 살던데. 그래도 또 친구를 사귀었을 수는 있었다. 서진이야 그러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테니. 사실 서진은 사람 다루는 걸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가까이 곁을 내주지를 않을 뿐이지.

    친구랑 같이 있는데 부르기가 좀 그래서 그냥 지나갈까 했는데, 때마침 서진이 지환의 차를 발견하고 놀란 듯이 바라봤다가, 이내 제 옆의 친구에게 뭐라고 말하더니 차로 다가왔다. 지환이 서진을 바라보며 창문을 내리자 서진이 물었다.

    “형, 그냥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가는 길이니까 혹시 몰라서 한 번 와 봤어. 저분은 친구야?”

    서진의 옆에 있던 학생을 눈짓하며 말하자 서진이 답했다.

    “네, 고등학교 친구.”

    고등학교 친구가 같은 학교에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나. 과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없었다. 애초에 서진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지환에게 모두 해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저 친구도 이제 가? 역 가면 같이 태워 줄 수 있는데.”

    “쟤 오늘 밤새워요. 아니어도 형이 태워 줄 필요는 없고.”

    서진이 그대로 지환을 바라봤다.

    “저 데려다주러 온 거예요?”

    “응.”

    맞는 말이라 말했는데, 서진은 세심하지 않은 지환으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더니, 이내 웃었다.

    “네.”

    그 말과 함께 조수석에 타 벨트를 매는 모습에 지환은 잠시간 서진을 바라보다가, 다시 차를 움직였다.

    “같이 대학 온 친구 있었어?”

    “방금 걔는 학점 교류 온 거예요. 다른 학교고.”

    별 건 아닌데, 서진과 친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어색했다. 그 모습이 어색한 게 아니라, 그냥 지환이 어색함을 느꼈다.

    “친해?”

    “그때는 적당히 친했죠. 대학 오고 나서는 연락 안 하기는 했지만.”

    친구랑 같이 있는 게 뭐 별거라고 왜 어색하게 느꼈을까. 지환은 경험해 본 적 없지만, 사실 친구끼리 질투하는 건 꽤나 흔한 일이었다. 지혜도 초등학교 때였나, 중학교 때였나 수학여행 가는 버스에서 자기랑 제일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랑 앉게 됐다고 집에서 울었던 적이 있다.

    “그럼 방금은 뭐 했어?”

    지환은 지금껏 그랬던 적이 없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못 그럴 건 뭔가 싶기도 했다. 한창 잘 붙어 다니다가 이제 아닌 척 조금 어색한 사이가 됐는데 막상 상대는 다른 친구랑 노는 것 같으니 서운했을 수도 있고. 생각하면서도 지환이 언제 그렇게 감성적인 사람이었나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럴 수는 있다.

    “걔가 이번에 듣는 교양이 제가 작년에 들었던 거라 설명해 주고 있었어요.”

    “요즘 자주 만나?”

    “건물이 같아서 종종 만나요. 걔는 아는 사람 저밖에 없다고 하기도 하고.”

    지환은 흘깃 서진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서진은 게이일까.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고백을 받기 전에는 당연히 물어본 적이 없었고 지금은 물어보기가 이상했다. 서진이 지환을 좋아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남자만 좋아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여자도 좋아하고 남자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까.

    서진은 어떤 사람을 좋아할까. 아는 바가 없었다. 첫눈에 반하는 유형은 아닐 것 같은데, 그것도 모르는 일이기는 했다. 실상 서진과 지환은 서로의 취향에 관해서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 더 알 수 없었다. 안다고 해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피곤해요?”

    그대로 지환이 아무 말이 없자 나온 서진의 물음에 지환은 그저 답했다.

    “조금.”

    그나마 이번에는 사정이 낫다고는 해도, 시험 기간이라 피곤한 건 여전했다. 전처럼 죽을 만큼은 아니지만.

    “운전할 수 있겠어요?”

    지환은 잠시 서진을 바라봤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곧바로 닿았다. 그러고 보면 중간고사 때는 거의 서진의 집에서 사는 것처럼 지내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상황이 꽤나 달랐다.

    “그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아.”

    별것 아닌 말이었는데도, 어쩐지 굳은 목소리가 나왔다. 서진의 말이 불편했던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지금 지환이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도 이상했다.

    “네.”

    예전이었으면 서진이 지환에게 말투가 왜 그렇게 싸가지 없냐고라도 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이 얌전히 답하는 목소리에 더 답답해졌다. 그렇다고 한숨을 쉴 수도 없어서 지환은 그저 정면을 바라봤다. 이렇게 어색할 일이 아닌데, 왜 이럴까.

    * * *

    시험이 끝나고 과제까지 제출한 김에 지환은 과제를 같이한 과 후배 몇과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밤샘하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지환을 제외하고는 이미 정신이 나가 있었다.

    “형, 우리 잘생긴 지환이 형!”

    술주정이 스킨십인 은혁을 태건 쪽으로 치우자 은혁이 태건과 눈을 마주치더니 제 입을 막았다.

    “우욱. 얼굴 좀 치워 봐. 쏠려.”

    그 적나라한 반응에 지환은 그저 제 후배들이 하는 꼴을 관람하다가, 문득 물었다.

    “너는 네 취향 전혀 아닌 사람이랑 키스할 수 있어?”

    은혁은 들러붙는 게 술주정이고 지환은 그때마다 소름이 돋았는데, 생각해 보면 그것보다 심한 짓을 한 서진과는 크게 불쾌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물론, 그런 걸 느낄 새도 없이 당황하기는 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도 당황스러웠던 게 떠올랐을 뿐 불쾌하지는 않았다.

    “형, 나는 취향이라는 게 없어.”

    “맞아. 형, 우리는 그런 거 따질 주제가 아니야. 나 요즘 여자 보이면 돌아가잖아. 공대생 보고 불쾌해할까 봐.”

    나란히 나온 은혁과 태건의 말에 지환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기서 남자가 키스하면 어떨 거 같냐는 소리를 할 수는 없고.

    “나이 엄청 많은 사람은?”

    “얼마나?”

    “뭐, 어머니뻘이나.”

    은혁에게 말한 것이었는데, 정작 답은 태건에게서 나왔다.

    “가능. 나 얼마 전에 드라마 보다가 함연희 님 나오시는 거야. 진짜 너무 아름다우시더라. 검색해 보니까 우리 엄마보다 두 살 많았어. 아니다, 네 살인가?”

    “예쁘면 된다는 거야?”

    지환의 물음에 태건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 그럼 남자는? 존나 예쁜 남자면? 아니면 엄청 잘생겼거나.”

    막상 정말 그걸 묻고 싶었던 지환은 묻지도 못했는데, 취향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게 나이와 성별뿐이었는지 은혁이 태건에게 물은 말에 태건이 답했다.

    “말이라고 하냐? 존나 안 되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즉각 튀어나온 목소리에 은혁이 지환의 얼굴을 삿대질했다.

    “근데 얼굴이 막 최지환이야.”

    “얼굴만 최지환? 성격은 아니고?”

    “어. 성격은 완전 좋아. 해 달라는 것도 막 다 해 줘.”

    이 새끼들이 사람 앞에 두고 뭐 하는 짓인가 어이가 없었는데, 태건이 진지하게 지환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럼 생각을 좀 해 봐야겠는데.”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던 태건이 곧이어 입을 열었다.

    “형, 미안한데 이건 형이라도 안 되겠다.”

    그 말에 옆에서 저도 덩달아 고민을 하던 은혁 역시 말했다.

    “맞아. 나도 그건 좀 그렇다.”

    “너희가 무릎이라도 꿇는다고 내가 보기나 할 것 같냐?”

    지환은 태건과 은혁이 무릎 꿇고 한 번만 봐 달라고 빌어도 단호하게 싫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막상 지환이 뭘 했다고 차였다.

    “나는 남자랑은 손잡는 것만 생각해도 좀 그래.”

    술주정으로 뽀뽀를 하는 은혁의 말이었다.

    “근데 그건 지환이 형이 제일 심하지 않냐? 저번에 네가 기대니까 진짜 표정 싹 굳어서 나는 형이 너 죽이는 줄 알았어.”

    이어진 태건의 말에 지환은 은혁을 바라봤다. 술 취해서 치댄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그때마다 소름이 돋기는 했다. 그래도 서진은 기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히려 그 까탈스러운 서진이 기댄다는 게 뿌듯할 것 같은데. 서진이라면 손을 잡는 것 정도야 별것도 아니었고 키스는, 이미 했는데, 그걸 키스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기는 했는데.

    “아, 씨발, 좆 됐다.”

    고개를 숙여 이마를 짚으며 탄식과 함께 나온 지환의 말에 은혁과 태건이 한 번씩 지환의 어깨를 토닥였다.

    “형, 괜찮아. 어차피 시험지 냈는데 지금 생각해서 뭐해.”

    이 기간에 다들 그러듯 시험에서 실수한 게 생각났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게 아니었다. 지환은 바로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진의 시험이 언제 끝나는지는 모르지만, 과제까지 하면 대부분 공대가 가장 늦게 끝났으니 서진은 이미 종강했을 수도 있다.

    “먼저 간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서진을 만나야 했다.

    * * *

    [자?]

    우선 서진의 집까지 오기는 했는데, 시간이 늦어서 자고 있을지도 몰라 전화 대신 문자를 하자 서진은 아직 깨어 있었는지 금세 답이 왔다.

    [아니요]

    [왜요?]

    [너 시험 다 끝났어?]

    [네 화요일에 끝났어요]

    [형은요?]

    [나는 오늘 다 끝났어]

    지환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어 문자를 보냈다.

    [지금 집이야?]

    [네]

    [형은요?]

    여기까지 왔는데 숨길 거 뭐 있겠나 싶어 지환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 너희 집 앞인데 잠깐 나올래?]

    서진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전화가 왔다.

    [형, 저희 집 앞이라고요?]

    전화를 받자마자 나온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은 괜히 긴장돼 손을 쥐었다 펴며 답했다.

    “어. 잠깐 할 말 있어서. 지금 피곤하면 내일 올까?”

    언제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묻자 서진이 바로 답했다.

    [아니에요. 피곤하고 그런 게 아니라.]

    잠깐 끊겼던 목소리가 그대로 이어졌다.

    [내려갈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응.”

    말을 하고 나서도 전화를 끊지 않았는데, 그건 서진도 마찬가지였는지 급하게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지환은 공동현관을 바라봤다.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오지 뭐가 급하다고 계단으로 내려올까. 애써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자 곧이어 서진이 현관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전화는 왜 안 끊어.”

    그제야 전화를 끊으며 말하자 서진이 제 핸드폰을 바라봤다. 끊지 않은 것도 모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항상 형이 끊으니까….”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산 적이 없어서 원래 어땠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그럼 서진은 늘 그걸 알고 있었다는 소리일까.

    “자고 가려고요?”

    지환을 유심히 살피며 하는 소리가 겨우 저거였다.

    “내가 너희 집을 무슨 모텔로 보냐.”

    그런 것 치고는 신세 진 적이 많기는 했지만.

    “할 말 있어서.”

    그 말에 서진이 불안한 시선을 감추지 못하며 지환을 바라봤다. 지환은 잠시간 가만히 서진을 바라봤다. 하늘과 헤어지고 나서는 늘 집에서 자다 나온 것처럼 입고 다니는 지환과는 달리 서진은 늘 단정하고 깔끔했는데, 지금은 집에 있다가 나온 탓에 꽤나 편한 차림이었다.

    지환이야 그런 서진도 자주 보기는 했지만, 사건이 터지고 나서는 서진의 집에 간 적이 없어서 괜히 오랜만인 것 같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지환은 오래 망설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진짜 이상한 거 아는데.”

    정말 이상한 건 알지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요즘 들어서는 온종일 서진의 생각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키스를 당한 흔치 않은 경험 때문인가 여기기에는, 지환은 그 정도쯤은 그랬던 일도 있었다며 넘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서진과의 일은 계속해서 문득문득 생각났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갑자기 생각났고 미묘한 기분이 됐다. 정말, 계속 생각났다. 서진은 뭘 하고 있을까, 운동하는 것만큼 열심히 챙겨 먹지는 않던데 밥은 잘 먹고 있을까, 생활 습관은 잘 지키지만 일이 생기면 자는 시간에서 빼던데 혹시 지금도 그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계속해서 궁금하고 걱정이 됐다. 그러다가 깨달은 거라고는, 사실 생각해 보면 지환은 꽤 이전부터도 그랬다. 이제야 궁금해진 게 아니었다. 서진이 여자였다면 지환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뭔지는 당연히 정의할 수 있을 텐데, 서진은 남자였다. 지환도 남자고. 서진은 남자인데, 그러니 이건 불가능한 일인데.

    “손 한 번만 잡아 보자.”

    결심과 함께 내뱉어진 목소리에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

    “싫,”

    채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며 뒷걸음질 치는 서진의 목소리가 그대로 이어졌다.

    “싫어요.”

    그 말과 함께 바로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모습에 지환은 지금 자신이 뭘 들었나 생각할 새도 없이 정신이 아득해졌다. 싫다고? 저렇게 단호하게 싫다고? 저렇게 생각 한번 안 하고 싫다고? 생각은, 생각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저렇게 재깍 답하나 싶어 지환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서진을 붙잡으려고 했는데, 서진은 붙잡을 새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문 안으로 사라진 서진의 모습에 지환은 다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잠시간 멍하니 서진이 사라진 현관을 바라보던 지환은 빠르게 어이가 없어졌다. 사람 면전에서 저따위로 행동하는 게 말이나 되는 건가? 지환은 바로 핸드폰을 들어 서진에게 전화했다. 어차피 비밀번호도 다 알겠다 받지 않으면 직접 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다행인지 뭔지 조금 느리기는 했지만, 서진이 전화를 받았다.

    “야, 잠깐만, 내가 지금 좀 어이가, 어이가 없는데.”

    지환은 서진이 답할 시간도 없이 말을 이었다.

    “너는 입술도 박아 봤으면서 나는 손도 안 돼?”

    거기다 심지어 서진은 그때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지환은 미리 말까지 해 줬는데. 물론 그래도 서진의 몸이니 거절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절할 때 하더라도 고민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저렇게까지 단호하고 즉각적으로?

    “한서진, 듣고 있으면서 왜 말이 없어? 나 비밀번호 다 알거든?”

    지환의 말 뒤로 갑자기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꿨어요.]

    지환의 말을 듣고 집 비밀번호를 바꾼 모양이었다.

    “와.”

    이제는 기가 찰 지경이라 술이 다 깼다.

    “손 좀 잡히면 닳냐? 내가 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그래.”

    손 한번 잡아 보면 지금껏 느끼는 이 미묘하고도 이상한 감정들이 이해가 갈 것 같아서 한번 잡아 보자고 한 건데, 이유도 한번 안 묻고 이렇게 내빼?

    [왜, 잡고 나서 역시 역겨워서 이제 얼굴 보는 것도 안 되겠다고 하게요?]

    “이 새끼는 피해망상이 있나. 그런 거 아니라고.”

    지환은 서진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 나 좋아한다며? 그럼 손 정도는 잡아 줘도 되는 거 아니야? 그새 나 안 좋아해?”

    그 생각이 들자 빠르게 억울함이 치밀었다. 키스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안 좋아해? 같이 있는 게 마음 정리에 도움이 될 것 같다더니 정말 그랬던 건가? 지환이 그렇게까지 같이 있으면 질리는 유형이라고?

    [좋아하지 말라면서요.]

    “이거 완전 웃기는 새끼네. 내가 언제 그랬어?”

    즉각적으로 나간 지환의 말에도 서진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지환은 가릴 것 없이 말했다.

    “야, 너 이제 잠수 안 탈 거라며!”

    사과 받아 주면 다시는 잠적도 안 할 거라고 했는데, 어째 제 말을 지키지를 않았다.

    [안 그랬잖아요.]

    전화만 안 끊으면 다인 줄 아는 결백한 목소리였다.

    “나 진짜 올라간다?”

    [번호 바꿨다니까요?]

    “너 나 오토바이 타고 지랄한 거 기억 안 나냐? 또 못 할 것 같아?”

    [오토바이 이제 안 탄다면서요.]

    “그럼 너 나올 때까지 문 두드리고 있을까? 이웃들이 좋아하겠지?”

    이제 종강도 했겠다, 문 두드리기 빌런으로 명성을 얻든 말든 그래 봤자 지환은 한 학기만 더 다니면 끝이었다. 어차피 공동현관 비밀번호는 알고 있으니 서진이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싶은 마음으로 정말 서진의 집 문을 두드릴 생각이었는데, 문득 지환의 앞에 택시 하나가 멈췄다.

    “학생, 전화하려고 했는데 딱 찾았네!”

    “네?”

    이번에는 또 뭔가 싶어 얼떨떨하게 되묻자 택시 기사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며 지환을 바라봤다.

    “택시 불렀잖아.”

    “저 택시 안 불렀는데요.”

    “파란색 티 입고 있는 거 학생 아니야? 여기 주소가 맞는데.”

    지환은 제 옷을 바라봤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네이비색 반팔 티가 맞기는 한데. 사람을 잘못 보셨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껏 말이 없던 서진에게서 목소리가 나왔다.

    [택시 왔어요? 회색 5896이면 제가 부른 거예요.]

    “잠깐만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지환은 잠시 택시 기사에게 말하고는 바로 서진에게 물었다.

    “네가 불렀다고?”

    [네. 형 취했잖아요.]

    너 때문에 술이 다 깼다는 소리를 하려고 했는데, 택시 기사가 점점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봤다.

    “야, 너는 진짜, 내가 너를 진짜.”

    지환은 그러면서도 결국 택시에 올랐다.

    [탔어요?]

    “어.”

    짜증스럽게 답하자 서진이 말했다.

    [주소는 제가 먼저 보냈으니까 그냥 타고 가면 돼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매정하게 전화가 끊겼다. 지환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끊긴 핸드폰 액정을 바라봤다. 요즘 들어 보지 못한 싸가지 없는 모습을 봤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아니 그런데 이 새끼는 늘 지환이 전화를 먼저 끊는다고 하더니, 지금 자기가 이렇게 단호하게 끊은 건 또 뭔데?

    거기다 지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간 건 또 뭐고? 이건 우선 사람 사이의 예의범절의 문제가 아닌가 싶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도 계속 생각이 수백 번 뒤집혔다.

    우선 집에 가고 내일 다시 찾아가자. 아니 근데 쟤가 이제는 나를 안 좋아하는 건가? 아니 근데 지금 키스한 지 얼마나 됐다고? 섹스하면 식는 새끼들이 있던데 저 새끼는 키스하면 식는 새끼였던 건가? 아니 근데 다른 건 다 집어치워도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거절하고 뒤도 안 돌아봐? 아무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역시 안 되겠다. 다시 차를 돌려서 직접 얼굴을 보고 뭘 말하든 해야,

    “학생, 도착했어요.”

    끝없이 생각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어느새 집에 도착했는지 기사의 말이 떨어졌다. 지환이 지갑을 꺼내자 기사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결제는 연결된 카드로 됐어요. 그냥 내리면 돼요.”

    서진이 택시를 부르면서 결제도 자기가 하는 거로 설정을 해 놓은 모양이다. 그렇게 매정하게 사람을 놓고 사라질 때는 언제고 이런 건 또 신경을 썼다. 지환은 영혼은 택시에 둔 채로 육체만 바깥으로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 좀 잡아 보자는 게 그렇게 힘든 부탁이었을까. 손 좀 잡는다고 닳나? 아니면 지환의 꼴이 좀 더러워 보였을까? 소독제는 담배 피우고 늘 닦느라 가지고 있었는데 그거로라도 먼저 손을 닦고 손잡아 보자고 말해야 했던 걸까? 지환은 무거운 걸음을 옮겨 집 문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매정한 새끼였다.

    * * *

    너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잠도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사람 몸이라는 게 뭔지 며칠 밤샘을 했다고 자기는 또 잤다. 지환은 일어나자마자 바로 씻고 밖을 나서려다가, 제 꼴을 확인하고는 그나마 정상적인 옷을 골라 갈아입었다. 최소한 트레이닝복은 조금 그랬다.

    종강도 했고 계절학기도 듣지 않는데 다시 학교로 차를 끌고 온 지환은 서진의 집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나 멀쩡하고 취하지도 않았으니까 나와.”

    서진이 전화를 받자마자 꽤나 전투적으로 말하자 서진 역시 바로 답했다.

    [저 지금 집 아니에요.]

    “그럼 어딘데.”

    [그냥 어디 있어요.]

    비협조적이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내가 직접 너 찾으면,”

    [뭐 어쩔 건데요.]

    지환이 무슨 말을 더하기도 전에 나온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은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뭐 어쩔 건 없었다.

    “아무튼 나한테 안 걸리게 잘 숨어라? 너 갈 곳 뻔하거든. 집 아니면 도서관, 공원 둘 중 하나겠네.”

    [거기 아닌데요.]

    “그래 봤자 기껏해야 이 근처겠지.”

    서진이야 늘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데다가 이동 범위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선은 학교부터 뒤져 봐야 하나 싶었는데, 지환은 움직이기 전에 우선 물었다.

    “너는 내가 너 왜 찾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지환이었다면 우선 왜 그러냐고 묻기는 했을 것 같은데, 서진은 그런 것도 없었다.

    [네.]

    이번 역시 고민 한번 없이 즉각적으로 떨어진 답에 지환은 바로 물었다.

    “고민이라는 걸 좀 해 보지 그래?”

    [고민하면 뭐가 달라져요?]

    듣는 사람 기분이 달라진다는 소리를 꼭 지환이 해야 하는 걸까?

    [그러는 형은 꼭 그래야겠어요? 어차피 이제 한동안 못 보잖아요. 그런데도 못 참겠어요?]

    “무슨 소리 하는 건데 또.”

    지환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사실 어제부터도 계속 걸리는 말이 있는데, 전화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직접 만나서 하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직접 만나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널 좋아할 수도 있는 거잖아.”

    가능한 일인가, 그게 가능한가? 쟤도 남자고 나도 남자인데, 거기다 지환은 게이가 아닌데.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안 될 텐데? 그 생각이 정말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그래도 계속 서진이 생각났다.

    그러고 나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좋아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서진과 지환이 둘 다 남자라는 것만 제외해 본다면, 사실 그게 정말 많이 중요한 요소이기는 했는데, 그것만 잠시 잊어 본다면 지환이 서진을 향해 느끼는 건 분명 좋아한다는 감정이 맞았다.

    지환은 어떤 친구도 서진을 걱정하는 것처럼 걱정하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시선이 가고 괜히 혼자 놔두기 싫고 챙겨 주고 싶고 늘 궁금하고. 지환은 관심이 호감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서진과 지환은 남자인데, 그냥 조금 유별난 우정이나 형제애 같은 게 아닌가 싶어서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보려고 했다. 그러면 뭐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형제 같은 친구와 육체적으로 닿고 싶어 할 리는 없으니까.

    [아니에요.]

    그런 지환의 복잡한 심경과 달리 서진의 목소리는 단호하기만 했다.

    “뭐?”

    [그럴 리가 없어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지환도 확신이 없기는 하지만, 막상 서진에게 정면으로 부정당하자 반발심이 올라왔다.

    [그럼 형은 좋아하는 여자한테 술 취해서 다짜고짜 손 한번 잡아 보자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막상 서진의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다음 피하면 비밀번호도 아니까 그냥 들어가겠다고 할 수는 있고?]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게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를 아는데. 거기다 무서워할 게 뻔하고.

    [어차피 어디 있는지 안다고 잘 숨으라고 해요?]

    반박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계속 서진이 생각났다. 그래서 어쩌면 좋아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막상 지환은 자신이 정말 상대를 좋아했다면 전혀 하지 않았을 일을 서진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겨우 서진이 지환을 피했다는 이유만으로.

    [안 그러는 거 알아요.]

    단정적으로 떨어진 목소리 끝이 조금 흐렸다.

    [제가 그렇게 쉬워요? 좋아한다고 하니까 아무렇게나 대해도 될 것 같아요?]

    지환은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또 잘못했구나. 왜 지환은 나아지는 게 없을까. 말하고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좀 하는 게 뭐 그렇게 힘들다고.

    [맞는데, 그건 맞는데.]

    억울하다는 기색도 없이 떨어진 목소리에 지환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저한테 왜 이래요.]

    어떻게든 사과를 해야 했다. 이건 아니었다.

    “한서진, 너 집에 있지.”

    처음부터도 대충 예상은 했던 걸 말하자 서진이 이번에는 회피하지 않고 답했다.

    [네.]

    “들어갈 테니까, 문 열어 줘.”

    [싫어요.]

    지금 서진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사과할 건 사과하고 지환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제대로 잘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설프게라도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쉽게 본 거 아니야.”

    적어도 서진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도록.

    * * *

    서진을 어르고 달래 겨우 집으로 들어온 지환은 어색하게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은 전화로 그렇게 계속 싫다고 한 것치고 차분한 기색이라, 지환은 어설프게 말문을 열었다.

    “야, 그거 그런 거 아니었어.”

    “뭐가요.”

    “그러니까 내가 왜 그런 거냐면, 그때 내가 뭐라고 해야 하냐.”

    말을 할 기회가 왔는데도 도저히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과 애들이랑 술 마시다가 걔가 치댔는데 역겹더라. 그런데 너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리고 네가 계속 생각났는데, 그래서 이게 뭔가 싶어서 확인해 보려고 왔던 거다. 이렇게 말하면 이거 꼭 고백 같지 않나? 하지만 지환은 고백하려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취해 있어서?”

    꼭 그 외에는 답이 없다는 듯이 단정적인 어조에 지환은 서진을 바라봤다. 가만히 지환을 바라보던 서진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내렸다. 서진이 지환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지자 괜한 조급함이 일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지환이 말을 고르고 있는데도 서진은 지환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말 그냥 한번 건드려 본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그랬던 건 미안해. 내가 잘못했는데, 쉽게 보고 그런 건 아니야. 그건 진짜 아니야.”

    서진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답도 없었다. 그럼 왜 그런 거냐고 물을 만도 했는데, 그런 것도 없었고.

    “내가, 네가 계속 생각나.”

    지환은 결국 제 마음을 가리기보다는, 드러내기를 택했다. 저 혼자만의 마음이라기에는 향하는 사람이 있었고 어차피 지환은 숨기는 걸 그렇게 잘하지도 못했다. 언젠가 들킬 거라면 직접 말하는 게 나았다.

    “네가 뭘 하고 있을지, 누구랑 있을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기분은 어떨지, 잠은 잘 자는지, 그것 말고도 다른 것들이 다 궁금하고 걱정되고 생각나. 그런데 나는 게이가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이게 뭔지 잘 모르겠어. 내가 널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마음이 쓰이는 건지. 그런데 또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데 신경 쓸 만큼 포용적인 사람은 아니거든. 그래서 잘 모르겠어.”

    지환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서진에게 눈을 뗄 수 없는 점이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고 신경이 쓰인다는 걸 피할 수도 없기는 한데, 어떻게 봐도 서진은 남자였다. 지환이 장난으로 경대 예쁜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누구에게 물어도 예쁘다기보다는 잘생겼다고 할 얼굴이었다.

    정말 예쁜 얼굴이었다면 그런 별명이 꼭 희롱 같으니 애초에 부르지도 않았겠고. 물론 그렇다고 보호 본능을 일으킬 수 없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지환은 서진에 한해서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내가 어쩌면, 나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쩌면 너를 좋아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일반적으로는 이 감정을 좋아한다고 여기지 않던가. 그 종류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지환은 서진에게 지금껏 남자에게는 전혀 느껴 본 적 없는 종류의 좋아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에요.”

    그럼에도 지환도 하지 못하는 확신을 가득 담아 나온 목소리에 지환은 저절로 물었다.

    “뭐?”

    “형은 저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요. 그냥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난데없이 제가 좋아한다고 하니까. 형은 게이가 아닌데 남자가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래서 신경 쓰이는 것뿐이에요.”

    “그걸.”

    잠시간 얼떨떨하게 서진을 바라보던 지환은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존나 나도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차라리 그건 지환이 서진을 좋아하는 게 맞다고 확신했으면 귀엽게 보기라도 하지, 이건 뭐, 왜 저런 말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형은 저를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제는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누가 이유 찾고 좋아하는데? 모쏠이 이래서 안 된다니까?”

    연애 안 해 본 애들이 꼭 저랬다. 이유가 있어야 사람을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냥 좋으니까 좋은 거지 뭐 그렇게 이유를 찾지. 그럼 그 이유가 사라지면 더 안 좋아할 건가?

    “그 얘기가 왜 나와요?”

    옅게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지환은 답했다.

    “네가 지금 그 얘기 나오게 하고 있잖아.”

    어차피 서진이 연애를 안 해 본 건 사실이라 반박할 건 없었다.

    “그럼 넌 내가 왜 좋은데?”

    사람 좋아하는 데는 꼭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진의 이유는 뭐였나 들어나 보자 싶어 물었는데, 서진은 짜증스럽게 지환을 바라봤다.

    “좋아하지 말라면서요.”

    그 말에 지환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내가 언제 그랬어? 불편하게 티 내지 말라고 한 거지.”

    “그런데 지금은 왜 물어요?”

    아니 그런데 저게 지금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둔 사람의 태도인가? 갑작스러운 질문이 머릿속에 들어찼다.

    “너 아직 나 좋아하기는 하지?”

    그러고 보니 지환이 정말 서진을 좋아하는 것이든 아니든, 서진이 이제 지환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환이 서진을 따라다니며 꼬셔야 하는 건가? 그런데 지환은 게이가 아닌데? 아니, 서진을 좋아한다는 결론이 나면 그때부터는 게이인 건가?

    스스로 불러온 혼란스러움에 지환은 입을 닫았다. 거기다 서진에게서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얘가 진짜 안 좋아하나. 얼마나 됐다고? 시험, 과제와 함께 지환에 대한 마음도 다 날려 보냈다 이건가?

    “진짜.”

    침묵 끝에 나온 목소리에 지환은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은 꼭 노려보듯이 지환을 빤히 바라보다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말했다.

    “진짜 싫어.”

    그리고 그 투명하고 검은 눈동자에서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들은 말을 인식하기도 전에 지환은 자동반사적으로 말했다.

    “야, 미안, 미안해.”

    의미도 모른 채로 우선 서진에게로 뻗었다가, 닿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멈춘 손을 어찌할 바도 모른 채 지환은 나오는 대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형이 뭘 잘못했어요.”

    그러면서도 채 흐르지 못한 눈물이 속눈썹에 매달려 있었다.

    “내가 그냥 다 잘못했어. 진짜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어. 미안해.”

    누가 들어도 지금 지환이 당황했다는 걸 알 정도로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였다. 왜 울지? 왜 우는 거지? 분명 지환이 뭘 잘못하기는 했겠지. 그렇기는 한데, 그래서 왜 울지? 어떻게 하면 그치지?

    “미안해, 진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내가 다 잘못했어.”

    휴지라도 가져와야 하나? 지환이 직접 닦아 주면 안 좋아하겠지? 그러면 더 울까?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구간 반복처럼 말하고 있자 서진이 눈을 꾹 감았다.

    “무서워요.”

    그 말과 함께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또 떨어져 그 매끈한 볼에 자취를 남겼다.

    “무섭단 말이에요.”

    그래,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환은 새벽에 깽판 아닌 깽판을 쳤으며 보기에 따라 진상 짓을 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상대에 따라 협박이라고 느낄 수 있는 말도 했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지금 자신의 집에 들어와 있으면 무서울 만했다.

    거기다 지환은 사과의 목적이었다고는 해도, 서진은 계속해서 싫다는 걸 지환이 설득해서 집에 들어왔다. 그냥 우선 사과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서 몰랐는데, 서진은 사과 받는 것도 무서울 수 있었다.

    “내가, 어, 미안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형이 이러는 게 무섭다고요.”

    그 말에 지환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내가 뭐, 뭐 어떻게 할까? 잠깐 나가 있을까? 아니면 전화로 할까? 그게 낫겠어? 너 비밀번호 다시 바꿀래?”

    아예 나가 주려고 했는데, 서진이 지환의 옷을 잡아끌었다. 지환은 그 손길에 이끌려 어정쩡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가, 무슨 말을 해도 서진의 신경을 거스를 것 같아 그저 불안하게 서진을 바라봤다.

    입은 꾹 다물고 시선을 내린 채로 눈물만 떨어뜨리는데, 그 모습을 보자니 심장이 조여들었다. 차라리 좀 시원하게 울면 나을까 싶을 정도로 얌전히, 눈물만 뚝뚝 흘리는 모습이 더 안타깝고 저 눈물을 그치게 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렇게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한 채로 서진을 바라보자 문득.

    “이 타이밍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하지 마세요.”

    울고 있는 주제에 하는 말만큼은 이성적이었다.

    “어, 응. 그렇지. 응, 미안해.”

    더 울릴까 무서워 다시 입을 닫자 서진이 지환의 옷 끄트머리를 잠깐 놓았다가, 머뭇거리며 다시 잡았다. 별것도 아닌 행동이었는데, 지환은 어쩐지 그 움직임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정말 부정할 수가 없는 수준인데, 지금 말하면 서진이 또 울 것 같았다.

    “형은,”

    문득 떨어진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은 서진을 바라봤다. 눈물에 젖어 유독 반질거리는 눈동자와 조금쯤 붉어진 눈가, 젖은 뺨, 미묘하게 차분하고 처연한 분위기, 입술을 짓씹느라 붉어진 입술. 무엇보다, 체념처럼 나온 그 목소리.

    “좋아해.”

    숨길 것도 없이 나온 말이었다.

    “좋아하는 것 같아.”

    왜 그렇게 신경이 쓰였지. 언제부터였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더라도 늘 서진의 이야기를 했다. 뭘 보면 이건 한서진이 안 좋아하는데, 이건 한서진도 좋아하겠다, 그런 말을 했고 늘 서진의 생각을 했다. 정말 일상적으로.

    서진을 조금 더 잘 알게 된 후에는, 서진이 가만히 놔두기 힘든 유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지? 서진이 방어적인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혼자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편인 것 같기는 하지만, 혼자 견뎌내는 법을 아주 모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왜 계속 서진을 살폈더라. 답은 정말 간단했는데.

    “아니, 좋아해.”

    그 말에 서진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그대로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왜, 도대체 저한테 왜 그래요.”

    도대체 어디에 저렇게 많은 눈물을 숨기고 있었을까. 살짝 목소리가 떨리는 걸 제외하면 울음소리 하나 없이 말이 이어졌는데도, 눈물은 수도 없이 떨어졌다.

    “사람 그렇게 피 말리게 해 놓고, 그렇게 나랑 있는 것도 싫다는 것처럼 굴었으면서, 그렇게 눈치를 줬으면서.”

    그 말에 지환은 저절로 자기가 언제 그랬냐고 반박을 할 뻔했지만, 그저 가만히 서진을 바라봤다. 지금은 울게 놔둬야 할 것 같았다.

    “착각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어쩌면, 너는 나 때문에 울던 날이 또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울지도 못했던 날이 있지는 않을까. 네 말대로 내가 눈치가 없어서. 그럼 지금은 네가 말해 주지 않을까. 왜 그렇게 네가 불안한지.

    “그냥 제가 신경 쓰이는 걸 착각하는 건데,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지환은 지금껏 좋아하면 사귀고 아니면 헤어지는 평범한 연애를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조금쯤 다사다난했을 수는 있지만, 그거야 안 그런 사람이 없다. 사귀기 전에는 다들 설레발도 치고 민망해하기도 하고 눈치가 있든 없든 자기 딴에는 최대한 눈치도 보고 내숭도 부리고 그러는 법이다.

    그러다가 사귀게 되면 또 맞춰 가며 싸우기도 하고 정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으면서도, 저녁 뭐 먹을지 얘기하다가 어이없게 기분이 풀리기도 하고.

    다들 그렇게 사는 게 아닌가. 지환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서진은 그 한 발을 내딛는 게 조심스럽기만 했다. 잘못 내디딘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넘어지면 또 어떻다고.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다. 그러면서도 사실, 지환은 서진의 그런 면들이 좋았다. 그 조심스럽고 신중한 면들이.

    점점 더 서진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걸 직접 보고 싶었다. 분명 섬세하게 숙고해서 골랐을 테니, 아끼고 소중히 여기겠지. 그렇게 고른 게 뭔지를 보고 싶었고 그 과정도 보고 싶었다. 서진 같은 사람은 어떤 걸 좋아할까. 언제부터인가 늘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저는 형이 좋은데, 형은 착각이라고 하면 저는 어떻게 해요.”

    “착각 아니야.”

    지환은 서진의 불안을 공감할 수는 없다. 왜 이게 착각이라고 하는 거지. 이렇게 너를 궁금해하는데. 인정하고 나니 이제는 쉬웠다. 지환은 서진이 궁금하고, 그건 좋아하기 때문이다.

    “형은 저를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요.”

    서서히 눈물이 걷히며 나온 목소리에 지환은 서진을 빤히 바라봤다.

    “그럼 넌 날 왜 좋아하는데? 너는 이유가 있어서 나를 좋아해?”

    “네.”

    역시 얼굴인가. 그걸 빼면 생각나는 게 없었다. 물론, 지환은 자신의 성격이 그렇게까지 애인 삼기 별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친구와 애인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다르기도 하고.

    하지만 서진에게는 너무 성격을 다 털어놨다. 더불어 애인에게는 절대 알려서는 안 될 과거도. 그런데도 좋아한다는 건 역시 얼굴이겠지.

    “형은, 남 신경 안 쓰잖아요.”

    하지만 정작 나온 답은 지환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게 지금 칭찬이냐?”

    배려심 없고 눈치 없다는 말을 돌려 하는 건가. 차라리 얼굴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빠르게 떨떠름해진 지환의 어투에도 서진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형은 하고 싶은 것도 있고 아끼는 거 있으면 아끼고 좋아하는 데 망설이지도 않고 힘들어도 그게 형을 간섭하게 놔두지는 않잖아요.”

    “그럼 넌 그런 다른 사람이 있으면 갈아탈 거냐?”

    지환은 자신의 말투가 꽤나 양아치 같았다는 걸 깨닫고는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면 내가 멘탈 거지 되면 나 안 좋아할 거야?”

    서진의 표정을 보아하니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그랬으면 벌써 형 안 좋아했어요. 말투 왜 이래 진짜.”

    서진의 표정에 빠르게 짜증이 서렸다.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사과하고 고백하고 울고 짜증 내고 서진과 지환은 아주 가지가지 하는 중이었다. 지환은 한 대 맞을 각오로 서진에게 손을 뻗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다 싶기도 하고 사실 그냥 지환이 하고 싶기도 했다.

    “나도 한번 봐줬으니까 너도 한번 봐줘야 돼.”

    붉어진 눈가에는 서러움과 짜증이 가득하고 평소보다 붉어진 입술은 용케도 말을 뱉어냈다. 방금 울었는데 그래도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 게 기특했다. 한번 자각하고 나니 예전에는 어떻게 그걸 맨정신으로 보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지환은 그대로 그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입술에도 눈물기가 아직 남아 있었는지 살짝 젖은 온기 뒤로 지환은 제 손으로 잡은 서진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혀로 그 입술을 벌리려고 하다가, 애써 참았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른 남자 새끼들이랑은 손잡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데, 서진과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기는커녕, 심지어 더 닿고 싶기까지 했는데, 이걸 어떻게 지금껏 몰랐을까.

    지환이 그대로 입술을 떼어내자 서진이 멍하니 지환을 바라보다가, 눈을 꾹 감았다. 눈물로 젖은 속눈썹이 떨리는 걸 보며 지환은 다시 입을 맞췄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지환이 닿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나는 네가,”

    지환은 그제야 살짝 거리를 벌리며 서진을 바라봤다. 때로는 좋아한다는 걸 스스로 아는 것도 힘들지만, 자신이 좋아한다는 걸 타인이 알도록 하는 건 언제나 힘든 법이다.

    “신경 쓰이게 만들어서 좋아. 그런데 그냥 좋아해서 신경 쓰이는 걸 수도 있어.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순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네가 신경 쓰이는 이유는 많지만, 그 이유가 사라져도 상관없어. 너라서 좋은 거니까.”

    지환은 이어 물었다.

    “너 나 아직 좋아해?”

    “네.”

    떨리듯 나온 목소리에 지환은 진지하게 말했다.

    “근데 내가 게이는 아니거든.”

    그 말과 동시에 서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지환은 서진이 무슨 생각을 하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가 남자끼리는 뭐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 너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면 사귀는 게 맞겠지?”

    남자끼리도 사귀는 게 맞겠지. 남자끼리라고 안 사귀지는 않을 테니까. 인권 수업을 좀 제대로 들을걸, 이제 와서 후회가 됐다. 물론 거기서도 게이의 연애 방식을 알려 주지는 않았겠지만.

    “한서진, 대답 좀 해 줄래?”

    분명 지환이 물어봤는데도 아무런 답이 없는 서진의 모습에 결국 묻자 서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은, 좋아하면 바로 키스해요? 다른 사람한테도 이럴 수 있어요?”

    지환은 열심히 서진의 표정을 살폈다. 그래 봤자 뭘 잘 알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을 왜 얘기해. 나도 이런 경우는 네가 처음인데. 남자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서진이 남자만 아니었으면 지환은 아마 몇 달 전에 이미 서진에게 작업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선 한 달 전에는 분명히 그랬을 텐데.

    “착각이면 어떻게 해요?”

    지환이라고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는 착각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착각은 아니지 않을까. 키스까지 했는데.”

    “형은 마음 없어도 키스할 수 있잖아요.”

    사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환은 단호히 답했다.

    “남자랑은 못 해.”

    정말 그랬다. 이것만큼은 확신했다.

    “형이 저를 좋아한다고는 해도.”

    그 말을 끝으로 이어지는 목소리가 없었다.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는 법은 두 가지가 있다는데, 첫 번째는 말을 하다 중간에 끊는 방법이고.

    “응?”

    결국 지환이 묻자 서진이 정말 말하기 싫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또 뭘까. 그런 걸 척도로 가늠할 수 있었던가.

    “헤어지면 어떻게 해요? 그럼 이제 못 보잖아요.”

    사귀는 게 맞냐고 물었을 뿐이지 지환은 아직 사귀자는 말을 한 적도 없다. 그런데 서진은 벌써 헤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지환은 서진을 위해 우선 같이 고민했다.

    “그건 이미, 이 정도로 했으면 어차피 그렇지 않을까?”

    이미 키스도 하고 좋아한다고 말도 하고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울기도 했는데, 여기까지 온 이상 어차피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서진에게서는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이, 세상 무너지는 목소리가 나왔다.

    “말도 안 돼. 우리가 뭘 했다고요?”

    그 말에 지환은 즉각 반박했다.

    “너한테 키스는 뭣도 아니냐? 너 심지어 나랑 한 게 처음이잖아.”

    지환이 키스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데. 거기다 이건 지환이 이미 확립했다고 생각한 성 정체성인지 지향성인지, 아무튼 그게 흔들리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형은 아니잖아요. 잊으면 끝인데.”

    “그럼 너한테는 뭐가 달라? 첫 키스도 잊으면 그만인 건 똑같아.”

    “그걸 어떻게 잊어요.”

    “왜 못 잊어?”

    서진은 별 이상한 걸 가지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키스든 뭐든 의미를 가지지 않으면 잊히는 건 금방이었다. 지환만 해도 첫 키스가 언제였는지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였던 건 분명한데, 걔랑 먼저 했던가, 아니다, 걔가 먼저였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그랬다.

    “아니, 근데 지금 이런 얘기 하는 게 아니야.”

    지환은 다시 진지하게 서진을 바라봤다.

    “남자끼리도.”

    이제 그 눈동자에는 눈물기가 다 걷혀 있었는데도, 그 여운 때문인지 평소보다 눈동자가 더 반질거렸다.

    “사귀지?”

    지환은 애매하게 말을 이었다.

    “아마?”

    역시 사귀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럼 우리도, 그러는 건가?”

    지환의 말에도 서진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너 나 좋아한다며. 나도 너 좋아하고. 그럼 사귀는 거 아니야?”

    지환은 조금 심각해졌다. 지환의 사고방식으로는 그 외의 답을 낼 수가 없었다. 한 명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둘 다 좋아하고 그걸 서로 아는데, 그럼 사귀는 거 아닌가?

    “나는 너 계속 보고 싶고 뭐 하고 있나 궁금하고 요즘에는 또 계속 걱정됐는데 너는 안 그래?”

    지환의 말에 서진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이제는 귀까지 빨개졌는데도 말 한마디 없이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나랑 사귀기 싫어?”

    좋아하는데 사귀기는 싫은 건 또 뭘까. 지환은 꽤나 단순한 사람이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서진은 정말 지환과 사귀기가 싫은 걸까? 지환은 나름대로 괜찮은 애인이었다. 친구로 지낼 때랑은 정말 다른데. 그걸 지금이라도 열심히 설득해 봐야 하나 싶었는데, 서진이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형은 저랑 사귈 이유가 없잖아요. 저랑 있어서 도움 될 것도 없는데.”

    “연애를 무슨 그런 거 따지고 해? 좋아하면 사귀는 거지.”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히 나간 목소리에 서진이 그제야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저를 좋아해요?”

    어렴풋한 열기를 띤 시선과 목소리였다.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한 건 고백이 아니라 존나 공갈 협박이었을까?”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진의 시선이 빠르게 식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렇게 말한다고?”

    “그건, 미안하다. 근데 우리는 좀 특수성이 있잖아. 둘 다 남자인데.”

    지환이 생각해도 반박할 여지는 없어 지환은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이내 말했다.

    “아무튼, 너도 더 생각해 봐.”

    지환만 해도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따지자면 먼저 좋아한다고 한 건 서진이기는 한데, 그래도 남자끼리 이 이상 뭘 하는 건 고민되는 일이겠지 싶었다. 지환은 서진이 생각할 시간을 주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그보다 앞서 서진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사귀면.”

    서진의 시선이 지환에게 닿았다.

    “사귀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건 지환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게 나도 좀 고민스럽기는 해. 뭐 달라지는 게 있어? 우리가 원래 하는 거랑.”

    어색해지기 전에는 원래 붙어 다녔고 서로 세세하게 거의 일정 보고처럼 일상을 공유했다. 시험 기간에는 지환이 서진의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지환이 칫솔을 따로 가지고 다녔지만, 그와는 별개로 언제부터인가 서진의 욕실에 아예 따로 지환의 칫솔이 준비되어 있을 정도였으니. 거기서 뭐 더 달라질 게 있을까.

    “그래도 싫으면 우선은 시간을 좀 가져 볼까?”

    지환으로서는 이미 마음 확인을 다 했는데 사귀지는 않는 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서진이 원한다면 그럴 수는 있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을 만나지는 않겠지.

    “사귈래요.”

    하지만 결국 지환을 바라보며 내뱉어진 서진의 말에 지환은 정말 그래도 괜찮겠냐고 묻는 대신, 웃으며 답했다.

    “응.”

    말하고 나니 갑작스럽게 어색해졌다. 지환은 얌전히 앉은 자세부터 거슬리기 시작했다. 지환은 한번 무릎을 제 손으로 문질렀다가, 슬쩍 서진을 바라봤다. 저쪽도 말이 없는 건 여전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야.”

    “네.”

    그냥 부르고 싶어서 불렀는데, 고분고분 대답하니 할 말이 없었다. 원래 지환과 서진이 함께 있으면 무슨 말을 했더라. 원래도 그렇게 대화가 많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처럼 숨 막히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어. 앞으로 열심히 할 테니까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말해 주고.”

    말하고 나서 지환은 제 입을 꿰매고 싶었다. 뭔가 이상했다.

    “마음에 안 드는 거 없어요.”

    “너 방금도 나한테 말투 왜 그러냐고 했잖아.”

    “그건, 그냥.”

    서진도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지환과 서진은 한동안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이대로 저녁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지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진이 고개를 들어 지환을 올려다봤다.

    “그럼 나는 이제 집에 갈게.”

    들어올 때는 기세가 좋았는데, 어째 나갈 때는 어정쩡하기만 했다.

    “왜요?”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서진은 그 눈을 제 손으로 잠깐 가리고는 떼어냈다.

    “원래 사귄 첫날은 같은 집에 있는 거 아니야.”

    실제로도 지환은 지금껏 늘 그랬다. 확실히 지환은 진도가 빠른 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귄 첫날만큼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얌전히 헤어졌다. 그런데, 그럼 앞으로 서진과도 더 나아간 스킨십을 하게 되는 걸까. 사실 이미 서진과 키스는 했지만, 앞으로 그 외의 더 나아간 걸 할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그럼 데려다주는 건요?”

    지환은 고민했다. 원래는 여자친구가 배웅하려고 하면 늘 현관까지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럼 얘한테도 그래야 하나.

    “차까지만 데려다줘.”

    하지만 그러기에는 서진이 지환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직설적이었다. 지환의 말에 서진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지환을 따라왔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배웅한다는 일반적 의도와는 달리 아무 말 없이 차에 도착하자 나온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은 차 문을 열며 답했다.

    “어. 너도 들어가.”

    그대로 좌석에 올라타 벨트를 매자 서진이 열린 창문 사이로 말했다.

    “형.”

    “응?”

    지금 혹시 떠나기 전에 뽀뽀할 타이밍인가 싶었는데, 서진이 조금 머뭇거리며 물었다.

    “밤에 전화해도 돼요?”

    아, 그거. 지환은 손을 뻗어 서진의 뺨을 한번 쓸어 주며 웃었다.

    “어. 아무 때나 해도 돼.”

    그래, 꽤나 다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귀는 첫날이라는 거지. 괜히 가슴팍이 간질거렸다. 어색한 건 어색한 건데, 그래도 귀엽기는 정말 귀여웠다.

    * * *

    사귀고 나서 생긴 변화라고 한다면, 많이 어색해졌다. 그리고 왜인지 서진은 지환의 눈치를 더 봤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사실 지환은 서진이 그러지 않았으면 했는데도, 서진은 그랬던지라 뭐라고 하지를 못했다.

    “설거지 내가 할게.”

    “앉아 계세요.”

    더불어 지환이 뭐라도 하려고 하면 꼭 말렸다. 생각해 보면 예전부터도 그러기는 했는데, 지환은 괜히 서진의 주위를 얼쩡거리며 물었다.

    “나 뭐 시킬 거 없어?”

    “네.”

    역시나 고민하는 법도 없었다. 지환은 정리 하나는 정말 잘했는데, 그런 거라도 도와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자 서진의 집은 이미 모든 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맞다, 민승이 여자친구 생겼더라.”

    연우 이야기를 하는 건 싫어하니 또 다른 공통 화제, 서로의 과외 학생을 입에 담자 서진이 답했다.

    “민혁이는 없는 것 같던데.”

    그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민혁이는, 걔는, 없는 게 나아.”

    “왜요?”

    “나 민승이 처음 과외 맡았을 때, 2년 전이지, 그때 민혁이 여자친구 있었거든, 그런데 딱 그때 헤어졌어. 아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그때는 민혁이 아직 중학생일 때였는데, 인상적이었다. 민혁의 과외 선생도 아니고 민승의 과외 선생인 지환까지 기가 질릴 정도로 울고불고 언제 봤다고 지환에게까지 떠나간 여친은 어떻게 잊을 수 있냐고 물어봤다. 물론, 정신 차린 지금, 민혁은 여전히 지환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지환은 은근슬쩍 서진의 허리를 건드려 봤다. 고작 잠깐 닿았을 뿐인데 서진이 흠칫했다. 그러면서도 묵묵히 설거지하는 모습에 지환은 서진을 불렀다.

    “야.”

    그 말에 서진이 흘깃 지환을 바라봤다. 일단 부르니 보기는 하겠다만, 불만스러운 게 있다는 게 뻔한 눈초리에 지환은 그 호칭을 바꿨다.

    “서진아.”

    건드리는 대로 반응하는 게 정말 귀여웠다. 그런데 귀엽다고 느껴도 되는 걸까. 잠깐 닿은 허리는 예쁘게 빠져 있기는 했지만, 정말 단단하기만 했다. 어쩌다가 한번 옷 갈아입는 걸 모르고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때도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하나 싶을 정도로 몸이 좋았고. 거기다 얼굴도 예쁘다고 하기보다는 골격이 잘 잡혀서 누가 봐도 잘생겼다는 게 적합한 얼굴인데.

    그런데도 왜 귀엽지. 딱히 귀여운 짓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럴까. 어려서 그런다기에는, 서진과 같은 나이의 후배들은 징그럽기만 했다. 꼴에 후배라고 밥 사 달라고 엉겨 붙을 때는 먹고 떨어지라며 배달시켜 주고 끝낼 때도 있을 정도인데.

    “네.”

    그런데도 그 얌전한 답을 듣자면 역시나 귀여웠다. 원래 귀여워 보여서 좋아했는지, 연애를 시작하니 더 귀여워 보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귀엽다는 게 중요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네?”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진은 지환에게 신뢰라고는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서진은 예전부터도 지환이 말을 할 때면 이번에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나 보자는 식으로 바라볼 때가 있었는데, 이번 역시 그랬다.

    “너는 나랑 잘 수 있을 것 같아?”

    중요한 질문이었다. 물론 서진이 처음이기도 하고 지환도 남자와는 마음의 준비든 뭐든 해야 하니 아무래도 평소보다 진도가 느리기는 하겠지만, 언젠가는 키스보다 더한 걸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답을 해야 할 서진은 할 말을 잃은 것처럼 지환을 바라보더니, 다시 그릇을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그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는 걸 보며 지환은 살짝 서진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제는 목까지도 붉었다.

    도와줄 건 없으니 서진의 옆에서 서진이 설거지를 다 하는 걸 지켜보고 있자 서진은 정말 느리게 설거지를 마치더니 지환을 소파에 앉히며 저 역시 옆에 앉았다.

    “형은, 어떤데요?”

    여전히 귓가를 붉게 물들인 채로 하는 물음에 지환은 서진을 바라봤다. 확실히, 지환도 고민해 봐야 하는 일이기는 했다. 그러니까, 키스까지는 괜찮았다. 오히려 꽤 좋았다. 그런데, 그래서 그 이상을 할 수 있을까.

    “아니에요. 말하지 마세요.”

    지환이 생각을 이어 나가기도 전에 나온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은 빠르게 변명했다. 서진은 가만히 놔두면 자기 혼자 별생각을 다 했다.

    “아니, 그러니까 이건 내가 왜 묻는 거냐면, 지금은 좀 이르다고는 해도 우리가 언젠가 그런 상황이 올 수도 있잖아. 그런데 한쪽이 준비가 안 됐다거나 그러면 분위기 좀 이상해지니까, 미리 말해 두는 게 어떤가 싶은 거지.”

    “그런 상황은 어떻게 오는데요?”

    어떻게 오냐니. 지환은 서진이 지금껏 그런 상황에 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상기하고는 양심이 조금 간지러워졌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은 그냥 오는 건데. 술 마시면 더 쉽기는 한데, 아니어도 때 되면 오기 마련이다.

    한창 말 잘하고 있다가 갑자기 드문드문 끊기고 유독 눈이 자주 마주치거나, 그러면서도 피하거나, 그러다가 결국 어색하게 말이 없어지면, 그때부터 시작인 거 아닌가. 나중에는 더 자연스러워지기 마련이지만, 보통 관계의 처음에는 그랬다.

    “그걸, 그걸 내가 말하는 건 이상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지환이 서진에게 자신의 경험상 그랬다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 이미 까발릴 만큼은 까발렸지만, 그때는 이런 사이가 아니었고 지금은 이런 사이다. 경우가 달랐다.

    “형은 제가 애인 같아요?”

    조금쯤 머뭇거리다 나온 서진의 물음에 지환은 되물었다.

    “우리 사귀는 거 아니야?”

    사귀자고 한 이후로 서로 많이 어색하게 굴고는 있었다. 어쩌다 보니 첫날에 키스하기는 했고 사실 따지자면 그전에도 한 번 하기는 했는데, 그 이후로는 손도 잡지 않았다.

    “맞는데, 제가 사귀자고 하니까 받아 준 거잖아요.”

    지환은 곰곰이 기억을 되새겨 봤다.

    “내가 사귀자고 하지 않았어?”

    지환이 먼저 사귀자고 해서 서진도 사귀자고 한 거 아닌가? 그게 아니라 지환이 직접적으로 사귀자고 하지는 않았던가? 사귀기 싫냐고 한 건 고백에는 들어가지 않는 건가?

    “제가 좋아해서 형이 받아 준 거니까.”

    분명 지환도 서진을 좋아한다고 했을 텐데. 그걸 말하려다가, 지환은 말하는 대신 서진을 바라봤다. 차분하던 서진의 눈동자가 지환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떨리기 시작했다.

    “서진아, 그냥 나한테 너 좋아한다고 말해 달라고 하면 더 쉽지 않을까?”

    설마하니 서진이 여기서 지환에게 그래, 네가 좋다니까 그냥 받아 줬다는 답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럼 그냥 좋아한다고 말해 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미 좋아한다는 말도 들었으면서.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내가 며칠 만에 쉽게 감정이 바뀔 정도로 가벼워 보여?”

    거기다 지환도 쉽게 자각한 마음은 아니었다. 서진의 마음에 찰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환은 최대한 좋은 애인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서진이 바라기만 한다면. 그런데 왜 막상 서진은 뭐 하나 말해 주는 게 없을까. 심지어 지환의 연인으로서 부적절한 언어 태도도 드문드문 못마땅한 기색을 보일 뿐 직접 말하는 건 아니었다. 말만 한다면 지환은 얼마든지 고치려 노력할 텐데.

    “형이 문제인 게 아니라, 저는 그렇게 눈에 띄지도 않고.”

    지환은 저도 모르게 경악에 차 서진을 바라봤다. 이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서진은 어디에 가져다 놔도 눈에 띄었다. 애초에 올 초 서진이 잠시간 연락 두절이 되었을 때 찾아낸 것도 서진의 저 한번 보면 잘 잊히지도 않는 외양 덕이었는데.

    “금방 질리게 하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서진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폄하하고 있었다.

    “저는 그냥 한번 보면 끝이잖아요. 뭐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사람 시선 끄는 법도 모르고 살갑지도 않고.”

    서진이 그대로 시선을 내렸다.

    “지금도 형한테 이런 말이나 하고 있고.”

    체념처럼 뚝 떨어진 목소리 끝에 지환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서진의 뺨을 감쌌다.

    “서진아, 정말 미안한데 나는 돌려 말하는 법도 잘 모르고 네가 돌려 말하는 거 눈치채지도 못해.”

    지금도 서진이 하는 말을 열심히 듣고는 있는데, 의도가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설마 저게 진심은 아니었으면 간절하게 바라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그러니까 그냥 말하는 건데, 나는 너 좋아하고 네가 질리는 타입이라는 생각 한 번도 안 해 봤어. 그리고 너는 생일부터가 특별하다니까?”

    지환은 정말 서진의 생일을 들었을 때부터 어떻게 이런 애가 생일까지 그렇게 특별할까 싶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잖아.”

    그럼에도 서진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일 뿐 아무런 답이 없었다. 지환은 서진 대신 말을 이었다.

    “너 잘생긴 거야 너도 알고 공부도 잘하잖아. 심지어 운동도 잘하지. 너 뭐든 못하는 거 없지 않아?”

    주관적으로 말하면 끝도 없지만, 객관적인 것만 단편적으로 말해도 이만큼이었다. 충분히 자랑할 만했는데, 왜 정작 서진은 전혀 모른다는 듯이 굴까.

    “그래도 그거랑 좋아하게 되는 건 다르잖아요.”

    그거야 그렇기는 했다. 지환은 서진이 잘생겨서 좋아하게 된 것 같지는 않았고 성적이야 좋든 말든 상관도 없다. 운동을 잘하는 것도 어쩌다 보니 알게 됐을 뿐 고려 요소는 전혀 아니었고.

    “저는 정연우처럼, 그렇게 살갑지도 않은데.”

    정말 말하기 싫다는 듯이 나온 그 목소리에 지환은 가만히 서진을 바라봤다. 연우는 또 왜 나오는 걸까. 생각해 보면 연우도 그랬던 것 같기는 했다. 저번 언젠가에는 스도쿠를 꽤 잘하기에 그걸 칭찬해 줬는데 정말 당황스러워했다. 그런 건 서진이 잘하는 거지 자기는 아니라면서. 그런데 이번에 서진은 또 연우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걔는 별거 안 해도 다들 좋아하고 챙겨 주고 싶어지잖아요. 계속 관심이 가고. 걔는 잘하는 거 없어도 괜찮아요. 어차피 다들 좋아하니까.”

    서진은 여전히 지환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연우가 그런 면이 있기는 했다. 저 새끼 또 사고 치는 거 아닌가 예의 주시하게 되는 면이 있기는 했는데, 이 새끼가 이번에는 또 어떤 기상천외한 실수로 정신을 빼놓을까 관심을 가지게 되는 면이 있기는 한데, 그러면서도 크게 미움 받지는 않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환이 보기에 그건 연우가 눈치를 많이 살피기 때문이다. 뭐 하나 잘못하면 별것도 아닌데 자기가 더 눈치를 보고는 하니까. 뭐 저런 걸 가지고 저렇게 눈치를 보나 싶어 괜히 안쓰러워지는 면이 있었다. 지혜도 그걸 알아서 지환이 연우와 이야기라도 하고 있으면 뭐 하지도 않았는데 애한테 못되게 굴지 말라고 했고.

    “그런데 저는 그런 건 없으니까, 다른 걸 잘해야 그나마 사람 취급받으니까, 그래서 그냥 열심히 하는 건데.”

    전부터도 알고는 있었는데, 연우나 서진이나 그런 면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서진이 더 잘 숨기고 더 잘 처신한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어떻게 해야 더 오래 좋아해 줄 거예요?”

    서진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이런 말도 안 할게요. 듣기 싫으니까.”

    왜 저런 식으로 말을 할까. 지환이 너무 가볍게 굴었을까. 서진이 원래도 이것저것 걱정을 많이 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지금 이 대화는 그와 더불어 지환이 서진을 충분히 안심시키지 못했기에 발생했다. 생각해 보면 고백 자체가 엉망진창이기는 했고.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가 없다고 했던 게 널 불안하게 만드는 거야?”

    방금만 해도 서진은 자신은 좋아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말했다. 애초에 지환은 좋아할 이유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싶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서진에게는 그 이유가 넘쳐났다.

    “그래 봤자 내가 널 왜 좋아하게 됐는지는 나도 모르니까 그건 말 못 하는데, 그래도 내가 네 어떤 것들을 좋아하는지는 알아.”

    지환은 찬찬히 서진을 살폈다. 얼굴이야 물론 잘생겼는데, 지환은 그것보다는 서진의 표정이 좋았다.

    “내가 개소리하면 네가 꼭 나 보는 표정이 있거든,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개소리는 아닌데 네가 듣기에는 그런 모양인지 딱 그 특유의 표정으로 나를 보는데, 그게 꽤 귀여워서 좋아해. 짜증 나면 한숨 쉬면서 한 번은 참는 것도, 그런데도 짜증 나면 나한테 짜증 나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좋고.”

    “아니, 형.”

    미묘하게 떨어진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가끔 데려다 달라고 할 때 있었잖아. 당연히 데려다줄 거 알면서도 일부러 묻는 것도 좋아했고, 다른 사람이랑 밥 먹는 거 싫어하면서 나랑은 꼬박꼬박 잘 먹는 것도 좋고. 불 꺼 달라고 하면 눈으로 욕하면서도 꺼 주는 것도 좋았고, 나중에는 그냥 나 자는지 확인한 다음 알아서 꺼 주는 것도 좋았어.”

    그냥, 그런 소소한 것들이 좋았다. 그렇다고 그런 것 때문에 서진을 좋아하게 됐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나 맨날 강아지 영상 보는 거, 너는 관심도 없으면서 내가 같이 봐 달라니까 정말 같이 보는 것도 좋아. 너 은근히 열심히 보거든.”

    그럴 때면 지환은 종종 서진의 얼굴을 지켜볼 때도 있었다. 꼭 나중에 리포트라도 써야 한다는 듯이 열심히 보는 게 신기했었다. 서진은 하기 싫은 건 절대 안 할 것처럼 굴면서도, 사실 지환이 하자고 하면 늘 따라 줬다. 그냥 시늉만 하면 될 텐데, 심지어 늘 성실했다.

    “뭐든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좋았어. 나는 요령 부려도 되는 건 대충하다가 나중에 망한 거 알고 처음부터 다시 할 때도 몇 번 있었거든. 그런데 네가 그랬잖아. 결과적으로 보면 정석대로 하는 게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지환이 생각하기에, 서진은 쌓아 나가는 걸 잘하는 사람이었다. 뭐든 빨리하려는 세상에서 오랜 시간 공들이는 걸 아깝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너는 뭐든 그렇게 해. 뭐든 열심히 하고 뭐든 세심히 살피고. 언제 한번 게으른 법이 없더라고. 너는 왜 그게 아무렇지 않은 거라고 생각해?”

    서진은 자기 자신에게 너무 엄격했다. 서진이라고 사람에게 쉴 틈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제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서진아, 그건 정말 특별한 거야.”

    지환은 살며시 서진의 뺨을 쓸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널 왜 좋아하는지는 모르는데, 내가 널 좋아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이해해. 좋아할 만한 사람이니까.”

    지환은 정말 그랬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미묘하기는 했지만, 분명 서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지환 말고도 몇은 더 있을 게 뻔했다. 그럴만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솔직히 나는 네가 날 왜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네가 나 좋아하는 것 자체는 이해하거든.”

    직접 말하려니 민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실이기는 했다. 만일 서진 아닌 누군가가 지환을 좋아한다고 해도 분명 당황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지환을 좋아하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분명 지환의 어떤 부분을 보고 좋아했겠지. 사실, 애초에 좋아할 만한 부분이라는 건 없다. 다들 끌리는 점은 다르기 마련이니.

    “그럼 너도 그래야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있겠지만, 이미 좋아한다는 사람의 감정까지 의심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었다. 향하는 사람이 서진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지환의 감정이다.

    “그리고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듣기 싫다고 생각할 일 없어. 사귀는 사이에 이런 얘기 하지 그럼 넌 기사식당 아저씨랑 이런 얘기 할래?”

    지환은 제 말끝이 다소 무신경했다는 걸 깨닫고 빠르게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무슨 얘기를 하든 다 좋은데, 그냥 헤어진다거나 질린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쉽게 안 했으면 한다는 소리야.”

    아무래도 그간 항상 서진과 대화하던 게 있어서 태도를 고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데, 그래도 얘는 한서진인데. 그래도 애인한테 예전과 같은 말투를 쓰는 건 아무래도 아니겠지. 어떻게 하면 서진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고 빠르게 고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데, 문득 서진이 조심스럽게 지환의 손을 잡았다.

    “그럼 우리 진짜 사귀는 거죠?”

    그걸 이제야 알다니. 그래도 이제는 아는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어.”

    그 하얀 피부에 조심스럽게 열기가 돌며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지환은 그 쑥스러움과 늦자란 온기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이런 말 나온 김에 물어보는 건데, 너는 내가 뭐 해 줬으면 하는 거 없어? 지금 말해야 빨리 고치지.”

    이제야 좀 대화가 될 것 같아서 서진을 거의 홀린 듯 바라보던 지환이 겨우 정신을 차리며 묻자, 서진은 꼭 부끄러운 것처럼 지환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저는 없는데, 형은 저한테 바라는 거 있어요?”

    서진은 꼭 자기가 지환의 손을 열심히 주무르고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지환은 우선 가만히 서진에게 손을 맡긴 채로 고민했다. 아무래도 이런 건 미리미리 말해 두는 편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았다.

    “최대한 직설적으로 말해 줘. 나는 돌려 말하면 못 알아들어.”

    “알고 있어요.”

    대답이 빠르기도 했다.

    “어, 그래, 알고 있다니 다행이다.”

    알고 있는 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 다소 떨떠름하게 답한 지환은 그대로 말했다.

    “그리고 불만 있거나 서운한 거 있어도 바로 말해 줘.”

    서진은 할 말을 다 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말 불만이 있어 보이는 건 말하지 않았다. 경향성은 요즘 들어 더 심해졌는데, 지환은 직접 말해 주지 않으면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했다. 서진이 서운함을 느낀다면 그건 분명 지환 때문일 텐데, 그럼 지환도 역시 알아야 했다. 그래야 변명을 하든 사과를 하든 하지.

    “형, 그런데 원래 당시에는 화났다가도 차분하게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 일이 많잖아요. 저는 괜히 휩쓸려서 화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 두다가 크게 터지는 거야.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하는 것도 둘이 같이하면 되지.”

    지환의 말에 서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우리 둘이, 그걸 할 수 있어요?”

    확신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 목소리에 지환 역시 잠시 말이 없어졌다. 지환과 서진의 성격상, 그게 가능할까. 그래도 그때야 가릴 것 없던 사이고 지금은 조금 다르니까, 괜찮지 않을까. 지환은 되는대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우선 해 보고 안 되면 그때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그 말에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형도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 주세요.”

    “그래.”

    어차피 지환은 원래도 그러고 있던지라 고민할 것도 없었다. 지환은 고작 그거 말했다고 정말 큰 걸 말했다는 듯이 구는 서진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사귄다고는 해도 남자끼리 손잡는 건 좀 간지럽지 않나 싶었는데, 막상 서진이 지환의 손을 잡고 있는 건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너 진짜 나한테 바라는 거 없어? 네가 뭐 말하면 내가 꼽 주냐?”

    “저는 형이.”

    지환의 말에 서진이 문득 말을 내뱉었다가 잠시 끊어냈다. 이제야 뭘 말하려나 싶어 기다리는데, 서진이 지환과 시선을 맞췄다.

    “저한테 조금만 더 다정했으면 좋겠어요.”

    지환은 제 행적을 되새겨 봤다.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말투만 좀, 어떻게, 그냥 조금만 더 어떻게, 해 보면 안 돼요?”

    정말 겨우 말한다는 목소리였다. 정말 힘겹게라도 말하는 걸 보니 정말 많이 싫었던 모양이다.

    “아, 어, 그거. 그건 나도 신경 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너랑 나랑 지내던 게 있으니까 이게 잘 안 고쳐져서.”

    사귄 지 고작 며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환도 나름대로 의식은 하고 있었다. 지환은 슬그머니 말을 이었다.

    “내가 안 고치겠다는 건 아니고 고칠 건데, 진짜 꼭 고칠 거기는 한데, 아무래도 우리는 남자끼리니까 좀 일반적인 거랑은 다르지 않을까? 너랑 나랑 원래 지내던 게 있으니까.”

    조금 봐주면 안 되냐는 뜻을 피력하자 서진이 가만히 지환을 바라봤다.

    “저는 뭐든 형이 다 처음이라 일반적인 게 뭔지 잘 몰라요.”

    지환은 바로 답했다.

    “어. 그렇지. 서진아, 미안해. 앞으로 형이 잘할게.”

    첫 연애인 애한테 무슨 정신으로 이 정도는 네가 좀 참아 달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을까. 첫 연애면 하고 싶은 거 다 해야 하는 법이었다. 지환이 이렇게 생각이 짧았다.

    “정말요?”

    “어. 노력해 볼게. 진짜 열심히 노력할 수 있어.”

    지환은 그래도 나름대로 좋은 애인이기는 했다, 아마도. 주위 평가에 따르면, 지환은 연애에서 자아상실형으로 애인이 하라는 대로 다 따랐다. 그렇다고 지금 서진에게 어차피 지환은 애인 말이면 다 듣는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을 하면 분명 예전에도 그랬냐는 물음이 나올 게 뻔하니 지환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고치는 거 힘들면 말해 주세요. 사실 안 고쳐도 돼요.”

    별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어째 서진의 뺨이 더 달아올랐다. 그 모습에 왜인지 지환 역시 어색해졌다.

    “그거 뭐 어렵다고 그래. 나도 고치려고 했어.”

    요즘은 늘 이랬다. 대화하다가도 문득문득 분위기가 굳었고 할 말이 없어졌다. 기묘한 침묵이 이어지다가, 서진이 슬그머니 지환을 바라보더니 이내 그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눈을 감았다.

    지환은 지금 이게 설마 그건가 싶어 잠시 멍하니 서진을 바라봤다. 달아오른 귓바퀴와 빽빽한 속눈썹, 유려한 입술을 시선으로 훑은 지환은 그대로 서진에게 다가갔다가,

    “어….”

    입술이 닿기 전에 다시 서진이 눈을 뜨며 그 입술 사이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지환은 황급히 얼굴을 뒤로 뺐다.

    “아, 나는, 그 타이밍, 그건 줄 알고.”

    사귄 첫날에도 키스했는데 아직 키스는 이를까? 따지자면 첫날에 한 건 지환이 멋대로 한 거고 서진은 첫 연애니까 아무래도 진도가 조금 더 느려야 할까?

    “그럼, 저는 좋아요.”

    하지만 막상 서진이 그 말과 함께 다시 눈을 감자 지환은 바로 서진에게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뺨을 감싸고 그 입가를 손가락으로 쓸자 서진이 머뭇거리면서도 입술을 벌렸다. 그 순종적인 태도에 지환은 왜인지 죄책감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그 입안을 혀로 살며시 건드렸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녹녹한 입안을 천천히 헤집자 서진이 지환의 옷 허리쯤을 조심스럽게 붙잡는 게 느껴졌다. 지환은 서진의 목덜미를 감싸 제게로 끌어당기며 서진의 손을 제 등에 올려 끌어안도록 해 줬다.

    키스도 괜찮다는 거야 알고 있었는데, 깊게 닿는 건 거부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부감은커녕, 조금 더 닿고 싶기까지 했다. 지환은 입술을 맞댄 채로 천천히 서진을 소파에 눕혔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 헤어지고 나서도 콘돔은 늘 가지고 다녔다. 그 덕에 콘돔은 문제가 아니었는데, 젤이 있나. 아마 팩 젤 정도는 차에 있을 텐데.

    물론 이제야 사귄 지 며칠이고 특히나 서진은 처음이니 굳이 지금 당장 쓰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준비는 늘 되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형.”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숨을 몰아쉬는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은 서진의 머리 옆에 팔을 지탱한 채로 서진을 바라봤다.

    “응.”

    발갛게 달아오른 서진의 뺨을 살며시 쓸자 서진이 그대로 지환을 올려다봤다.

    “괜찮아요?”

    그새 또 불안감이 묻어 있는 눈동자에 지환은 그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너는?”

    애초에 물으려면 지환이 물어야 하는 게 맞기도 했다.

    “저는, 좋은데.”

    “나도.”

    그 말에 서진이 지환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지환은 선선히 끌려가며 지갑에 콘돔이 몇 개 있던가를 생각했다. 어차피 지금은 쓰지 않을 테니 괜찮았지만, 그래도 지금 지갑에 있는 건 넣고 다닌 지가 조금 됐으니 오늘은 집에 가서 새로운 콘돔을 지갑에 새로 넣어야 했다.

    * * *

    사귄다고는 해도 남자 둘이서 어디 갈 곳이 있는 건 아니라 지환은 그저 서진과 함께 공원을 걸었다. 그래도 이제 사귄 지 몇 주쯤이 된 덕인지 서진도 마냥 어색하게 굴지는 않았다.

    “걷는 건 원래 좋아해?”

    그 물음에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

    “네. 생각할 거 있으면 자주 걸어요. 생각 정리하기도 좋고.”

    서진이 그대로 이어 물었다.

    “형은 걸으면서 무슨 생각 해요?”

    “나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걸으면 그냥 걷는 거 아닌가.

    “그냥 걷지.”

    그 맥 빠지는 답에 서진도 할 말이 없던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 뒤로 대화가 끊기기는 했는데, 지환은 정말 걸을 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럼 너는 지금 무슨 생각하는데?”

    지환이 묻자 서진은 걸음을 옮기며 답했다.

    “저는 그냥 형이 무슨 생각하는지 궁금하다는 생각 했어요.”

    그러고는 평온한 어조가 이어졌다.

    “그런데 아무 생각도 안 하네.”

    애초에 별 기대도 안 했다는 그 목소리에 지환은 말했다.

    “안 할 수도 있지 너 지금 나 꼽 주는,”

    지환은 평소처럼 말하다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나는 서진이 생각했지.”

    황급히 말하자 서진이 애쓴다는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봤다. 그 표정에 지환은 억울해졌다.

    “근데 솔직히 너도 표현 많은 편은 아니잖아.”

    “저는 그래도 꼽 준다고 하지는 않아요.”

    이러면 또 할 말은 없었다.

    “그건 그렇지.”

    지환은 이제는 제게도 익숙한 공원을 쭉 둘러봤다. 방학에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은 얼마 없었는데, 꽤나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방학에 계절학기를 듣지 않은 게 얼마 만인지. 거기다 이렇게 느긋한 데이트를 한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작년에도 연애를 하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지환은 학교생활에 치여 바빴고 수학 교육과였던 하늘은 임용 준비다 뭐다 하며 바빴으니.

    “너 뭐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어? 멀리 데이트하러 나가고 싶다거나.”

    생각해 보니 지환이야 뭐든 상관없었는데, 서진은 좀 다를 수도 있었다. 서진이야 원래 이동 반경이 넓지는 않았지만, 연애에서는 다를 수도 있었고.

    “데이트?”

    “나는 이런 것도 좋기는 한데, 너는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거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것도 데이트예요?”

    어디를 가고 싶다거나, 지금도 좋다거나, 그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정작 서진에게서 나온 건 그보다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그럼 아니야?”

    정말 당연하게 말하자 서진의 시선이 천천히 떨리더니, 이내 그 시선이 내려갔다.

    “맞아요.”

    쑥스러움이 가득한 그 목소리와 태도에 지환은 괜히 저 역시 잠시간 머쓱해졌다가, 슬쩍 주위를 바라봤다. 사람은 거의 없고 방학이라 주위에 아는 사람도 없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밖이니까.

    “한서진.”

    지환은 그대로 말했다.

    “집 가자.”

    그 말에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

    “손잡고 싶어.”

    이어 떨어진 지환의 말에 서진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른 가요.”

    그러면서도 하는 말이 꽤나 다급했다.

    * * *

    한창때의 남자 둘이 붙어 있다는 건, 필수적으로 성생활과 연결됐다. 키스하다가도 몸을 만지게 되는 거고. 그러다 보면, 뭐.

    “아, 잠깐.”

    현관으로 들어오자마자 가릴 것 없이 입술을 맞붙였다가, 문에 지환의 머리가 부딪치자 서진이 지환의 뒷머리에 손을 넣어 감싸며 다시 입을 맞췄다.

    “죄송해요.”

    지환은 저 역시 서진의 목덜미를 끌어당기며 대충 신발을 벗고는 서진을 안으로 끌어당겼다. 한번 입술을 부딪치고 나서는 점점 더 눈만 마주치면 입술이 맞는 게 생활화되고 있었는데, 장소는 대부분 소파였다. 침대로 갔다가는 그대로 끝나지 않을 게 뻔했으니.

    “만져도 돼요?”

    이미 소파에 지환을 거의 눕히며 허리를 손으로 쓸고 있으면서도 서진의 목소리만큼은 얌전한 척 나왔다.

    “어.”

    거의 즉각적인 지환의 답과 함께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지환은 제 허리쯤을 만지는 서진의 손길을 느끼며 저 역시 서진의 티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옷 속에서 몸을 만진 적은 있는데, 막상 아예 벗긴 적은 없었다. 그래도 손으로 서진의 몸을 천천히 더듬으면 그 몸이 얼마나 잘 짜여 있는지 아는 게 어렵지 않았다. 지환은 서진의 허리부터 옆구리까지 쓸어 올리며 맞닿은 서진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네.”

    열기가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아주 조금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입술이 스쳤다. 지환은 그대로 서진의 견갑골 안쪽과 갈비뼈쯤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너 운동 뭐 해?”

    전거근이 꽤 잘 느껴졌는데, 전거근은 근육만 있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더불어 체지방률도 낮아야 만들어지는 근육이라, 보기 좋은 것과는 별개로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원래 안 좋은 것도 좀 먹어 주고 해야 하는데, 서진은 건강하게만 먹었다. 며칠 좀 엉망으로 먹는다고 망하는 것도 아닌데.

    “체지방은 좀 올려도 되겠는데.”

    물론 근육도 좋기는 하지만, 역시 사람이 어느 정도는 체지방도 있어야 오래 건강한 법이었다.

    “형, 분위기 좀.”

    “응.”

    쑥스러움과 떨떠름함이 대중없이 섞인 그 목소리에 지환이 웃으며 답하자 서진이 그대로 다시 지환에게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가만히 입술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닌 척 긴장하고 움찔거리더니, 이제는 얼마나 됐다고 꽤나 능숙해졌다. 사실 그간 지환과 서진이 있으면 눈 마주치고 바로 입술 마주하기는 했으니 연습량은 꽤 됐지만.

    거기다 이제 서진은 입을 맞추는 걸 넘어서 지환에게 몸을 부딪쳐 오기도 했다. 키스하면서 지환을 거의 짓누르듯 몸을 붙였는데, 서진도 딱히 자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꼬박꼬박 얼굴을 붉히는 걸 보면 귀엽기는 참 귀여웠고.

    하지만 서진이 지환보다도 큰 건 사실이고 무거운 건 무거운 거라 지환이 답답함에 살짝 다리를 움직이자, 서진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 피부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서진아.”

    지환도 방금 제 다리에 닿은 게 뭔지 모르지는 않았다. 사실 이런 상황이 처음도 아니었다. 보통 서진이기는 했는데, 종종 지환도 그랬던 적이 없지는 않다. 그럴 때면 어색하고 민망한 분위기 속에서 그냥 서로 알아서 가라앉혔는데, 지환은 잠시간 서진을 바라봤다.

    “네.”

    붉어진 그 귓가를 보던 지환은 그대로 물었다.

    “침대로 갈래?”

    지금껏 키스와 몸을 조금 만지는 것 이상으로 가지 않은 이유에 서진의 속도를 맞춰 주려는 의도가 분명 있기는 했지만, 더불어 지환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이유도 없지는 않았다. 서진이 남자라는 거야 잊을 수가 없고 방금까지 만지던 단단한 몸도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부정하려고 한 적도 없지만.

    지환은 자신이 남자인 서진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기는 했지만, 같은 거 달린 남자라는 걸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직접 그 같은 걸 확인하는 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좋아하는 거랑은 별개의 문제였는데, 막상 의도치 않게 닿았을 때도 당황한 걸 제외하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익숙해진 지금은 더 나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아, 그게,”

    그래도 역시 중요한 건 서진의 의견이지 싶어 물었는데, 서진은 머뭇거리며 지환의 시선을 피했다.

    “너무 빨리하면 안 된다고, 그래서.”

    지환은 자신과 서진이 사귄 기간을 생각해 봤다. 이제 삼 주쯤이었다. 물론 아직도 서로 알아갈 건 많겠지만, 이미 알고 지낸 기간이 있으니 한 달 내외면 딱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람마다 다른 거지. 네가 괜찮은지가 중요한 거야.”

    하지만 그거야 지환의 생각이었고 서진이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면 얼마든지 시기는 늦출 수 있었다. 어차피 섹스하려고 사귀는 것도 아닌데. 애초에 그러려고 사귀는 거였으면 남자를 사귈 리도 없다. 그렇다고 사귀는 사이에 섹스를 아예 안 해도 괜찮냐고 한다면, 시도해 본 적이 없어 확답은 할 수 없겠지만.

    “형은요?”

    서진은 그제야 다시 조심스럽게 지환과 눈을 맞췄다.

    “형은 게이 아니라고 계속 그랬잖아요.”

    그걸 지금 말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온 게 아닌가 싶었지만, 지환이 그 말을 꽤나 많이 한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지환은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괜찮다니까.”

    다른 남자는 다 안 되지만 서진과는 괜찮으니 이러고 있는 거였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지환은 그러면서도 슬쩍 서진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서진은 게이인가. 그걸 아직도 묻지 않고 있었다. 잊는 물어봐도 되겠지.

    “그런데 그럼 너는 게이야?”

    지환의 물음에 서진이 얼마간 생각하는 기색이더니, 그리 오래 시간을 끌지 않고 말했다.

    “형밖에 좋아한 사람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그 말에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아마 양심이라는 곳인 모양이다.

    “그럼 나는 될 것 같아?”

    지환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나는 될 거 같은데.”

    지환은 최대한 서진의 속도에 맞추고 싶었다. 지환이야 뭐, 어떻게든 하면 되는 거고.

    “부담 주는 건 아니고 그냥 네가 준비되면, 네가 천천히 하고 싶으면 나는 그것도 좋아.”

    네 살이나 어린 데다가 심지어 연애 한 번 안 해 본 애랑 만나는데 그런 것도 못 하면 쓰레기였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상대방 속도 하나 못 맞추면 쓰레기였고. 지환이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자 서진이 조금쯤 수줍게 지환을 바라봤다.

    “저는 형이 좋으면, 좋아요.”

    “나도 네가 좋으면 좋은데.”

    거의 자동으로 말한 지환은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도 부끄러운지 귓가가 붉어진 서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양심이 너무 아팠다.

    “그래도 아니야, 잠깐만.”

    지환의 말에 서진의 눈초리가 서서히 차가워졌다.

    “뭐가 아닌데요?”

    얼핏 날카로운 목소리에 지환은 반쯤 누워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서진을 바라봤다.

    “대화를 좀 해 보자. 이건 중요한 일이니까.”

    물론 서진도 서진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하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지환은 서진이 더 깊이 생각했으면 했다.

    “그러니까, 너는 처음이잖아.”

    “네.”

    주저 없이 나온 답에 지환은 두서없이 말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할까, 고민을 좀 더 해 봐야 하는 거야. 그냥 할 때 됐으니까, 남들 다 하니까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정말 준비가 됐다는 확신이 있어야 해. 처음이잖아.”

    다들 처음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했고 서진은 지금까지 지켜왔으니 정말 확신이 있을 때를 알았으면 했다. 처음은 딱 한 번뿐인데.

    그 말에 지환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서진이 지환으로서는 쉽게 정의하지 못할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봤다.

    “형, 진짜 보수적이네요. 이건 뭐 열린 것도 아니고 닫힌 것도 아니고.”

    서진은 그대로 이어 물었다.

    “제가 정말 남들 하니까 하는 거면 연애도 진작 해 보지 않았을까요?”

    그거야 그렇기는 한데, 그거랑 첫 경험은 또 다르지 않나.

    “그건 그렇지.”

    그래도 우선 답한 지환은 서진의 말을 잘 생각해 봤다. 그러니까, 남들 다 하니까 하려는 건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럼 자기도 확신은 있다는 거고.

    “그럼 할래?”

    그럼 하겠다는 건가 싶어 묻자 서진이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원래 이게 이렇게 묻는 게 맞아요?”

    미묘한 당황스러움과 떨떠름함이 담긴 목소리에 지환은 답했다.

    “촛불에 불이라도 붙여 줄까? 근데 지금 내가 불붙일 게 담배뿐 이기는 한데.”

    분위기 같은 거 말하나 싶어 말했는데, 서진이 지환을 빤히 바라봤다.

    “형은 될 수 있으면 말하지 마요. 듣는 사람 속 터지니까.”

    그 말에 지환이 분위기도 모르고 웃었다가,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구나.

    “서진아, 진짜 괜찮겠어?”

    분위기는 이미 다 깨진 것 같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중요한 것이니 묻자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은 괜찮아요?”

    답은 정말 단호했는데, 물음은 정말 조심스럽기만 했다.

    “응.”

    지환의 답은 이미 서진에게 침대로 가자고 할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콘돔 있어?”

    그 물음에 서진이 잠깐 굳었다가, 겨우 말했다.

    “없, 없는데.”

    드물게 말까지 더듬는 모습에 지환은 그대로 말했다.

    “그럴 것 같더라.”

    서진이 미리 준비했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해 본 적도 없다. 거기다 방금 얘기하다 보니 서진은 지금이 빠르다고 생각하던 모양이었고.

    “내가 있으니까 그건 됐어.”

    헤어진 이후로도 지갑에서 콘돔을 빼 본 적은 없지만, 원래 넣고 다니던 건 벌써 몇 달이 지난지라 혹시 몰라서 새것으로 갈았다. 그러니 콘돔은 됐고 휴대용 젤도 가지고 있으니 그것도 됐다.

    “왜요?”

    그런데 막상 서진에게서 물음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지라, 지환은 자연스레 되물었다.

    “어?”

    뭘 묻는지 알 수가 없어 얼떨떨한 지환의 목소리에도 서진은 가만히 지환을 바라봤다.

    “그게 왜 있어요?”

    콘돔의 이유는 뻔하지 않나.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고.

    “그냥, 원래 가지고 다니니까.”

    말하고 나서 지환은 제 실수를 깨달았다. 원래 가지고 다닌다고 말해서는 안 됐다. 너랑 쓰려고 준비했다고 해야 했는데.

    “왜요?”

    그래 봤자 일은 저질러진 이후라, 서진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혹시 모르니까.”

    지환이 어정쩡하게 답했지만, 서진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뭘 혹시 모르는데요?”

    슬프게도 귀에 바로 꽂히는 나직하고 발음 좋은 목소리에 지환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물론, 그래 봤자였다.

    “아니, 사람 일이라는 게, 그런데 내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나 진짜 안 그래.”

    말하다 보니 정말 억울해졌다. 헤어지고 나서도 콘돔을 가지고 다닌 건 예기치 못한 사태를 대비해서가 맞기는 한데, 그렇다고 정말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일으키려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랬던 적이 없냐고 하면 말은 못 하는데, 그래도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그리고 결과적으로 지금 도움이 됐으니까 된 거 아니야?”

    아예 뻔뻔하게 말하자 서진이 불만스러운 얼굴로도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렸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맞췄다.

    “네.”

    아무래도 더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지환은 분명 불만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작 서진은 지금껏 하나도 말한 게 없다. 말투 바꿔 달라는 거 빼면. 그렇다고 지금 지환이 왜 싫은 걸 얘기해 주지 않냐고 하면, 서진은 앞으로 표정까지 숨길 것 같아 그건 또 조심스러웠다.

    “우리 일단 자리 옮길까?”

    지금 이 분위기에서 뭘 하겠다는 건 아닌데, 우선은 자리라도 옮기는 게 이야기를 하기 편할 것 같아서 묻자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이 그대로 서진의 손을 잡고 서진의 방으로 향하자 서진이 지환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착실히 같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내 말은,”

    침대에 앉은 지환이 무슨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진이 지환에게 입을 맞췄다. 뭐지. 지금 그 분위기는 다 깨지고 사과 분위기가 다시 조성된 게 아니었나. 섹스로 푸는 건 습관 들면 안 되는데.

    지환이 서진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적극적으로 응하지도 못하며 어정쩡하게 있자 서진이 지환의 혀를 살짝 깨물었다. 그게 꼭 집중하라는 것 같아서, 지환은 서진의 뒷머리에 손을 집어넣고 살살 쓸었다. 그래, 얘기야 다 끝나고 하면 되고. 그때는 분위기도 풀려 있을 테니 오히려 더 좋은 대화가 이어질 수도 있다.

    지환이 그대로 서진의 입천장을 살짝 간질이듯 핥자 서진이 잠깐 움찔하더니, 그대로 지환의 등에 손을 대고는 천천히 지환을 침대에 눕혔다. 지환은 침대에 등을 댄 채로 서진의 허리쯤부터 티셔츠를 쓸어 올렸다. 움푹 들어간 장골부터 시작해 탄탄한 외복사근을 지나쳐 천천히 티를 올려 벗겨내자 서진이 티를 벗느라 잠깐 떨어져 있던 순간조차도 싫다는 듯이 다시 입술을 붙여왔다.

    지환은 자연스럽게 서진의 뒷머리와 등에 손을 대고 천천히 서진과 제 자리를 바꿨다. 서진의 위에 올라탄 지환은 그대로 제 티셔츠를 벗으며 서진을 바라봤다.

    “분위기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싫으면 바로 말해. 싫지는 않더라도 불안하다거나, 그런 것도 바로 말하고.”

    “네.”

    그 조신한 답에 지환은 우선 제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그 속의 콘돔을 꺼내고는 침대 옆 서랍에 올려놨다. 서진의 시선이 콘돔에 닿는 게 느껴지자 지환은 다시 서진에게 입을 맞췄다. 둘 다 상의를 벗은 탓에 맨살이 그대로 느껴졌다. 확실히 익숙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닿은 게 서진이라는 생각을 하면 예상보다도 더 거부감이 없었다. 어쩌면 잘 안 될지도 모르겠다는 지환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서진이 지환의 허리부터 쓸어 올리며 척추를 손으로 천천히 타고 올라가는 손길이 느껴졌다. 지환은 서진의 가슴팍부터 옅게 쓸어내리며 손으로만 만져도 잘 짜인 걸 느낄 수 있는 복근을 지나 그 바지에 손을 댔다. 그대로 버클을 풀려는데, 아무래도 지금껏 풀어 본 바지 버클과는 반대라 그런지 손이 조금 엇나갔다. 물론 지환 본인의 것도 같은 방향이기는 한데, 그래도 남의 바지는 이 방향으로 풀어 본 적이 없었다.

    바지를 벗기기 쉽게 지환이 서진의 허리에 손을 받치고 들어 올리려 하자, 문득 서진이 고개를 틀어 입술을 떼어냈다.

    “잠,”

    몰아쉬는 숨 사이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잠깐, 잠깐만요.”

    “어?”

    지환이 바로 손을 떼어내자 서진이 상체를 반쯤 일으키며 지환을 바라봤다.

    “이상한데.”

    눈가를 찌푸리고 중얼거리듯 나온 말에 지환은 서진을 조심스레 살폈다. 너무 급했나.

    “그만할까?”

    그 물음에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그러니까.”

    서진이 그대로 얼마간의 혼란스러움을 담아 물었다.

    “이게 지금,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해도 뭘 말하는지는 알 수 없어 지환이 가만히 서진을 바라보자 서진이 이어 물었다.

    “제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밑이에요?”

    한 번도 예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어, 그게.”

    지환은 슬쩍 서진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말했다.

    “어.”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정말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환도 당황스러워졌다.

    “고민도 안 해요?”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에 지환은 우선 서진의 위에서 비키며 말했다.

    “남자끼리는 아무래도 다칠 확률이 조금 더 높을 수도 있잖아.”

    그 말에 서진이 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지환을 바라봤다.

    “그런데 너는 처음이니까.”

    정말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서진의 입장에서는 아닌 모양이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래도 당연히 지환이 위인 편이 낫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게 어디로 보나 합리적이지 않나.

    “저라고 꼭 모르라는 법 있어요?”

    이제는 얼핏 짜증이 서린 목소리에 지환은 말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기도 하고.”

    지환은 최대한 서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서로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능숙한 사람이 이끄는 게 낫지 않아?”

    지환은 정말 단 한 번도 그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다. 그냥 자신이 남자랑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을 뿐이지, 그 외의 포지션이라든가, 그런 건 정말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인체를 조금이라도 더 잘 아는 사람이 낫지.”

    “형도 그 전공은 아니잖아요.”

    바로 나온 서진의 반박에 지환 역시 바로 답했다.

    “그래도 문과보다는 배운 게 더 있으니까.”

    거기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섹스든 게이 섹스든 당연히 서진보다는 지환이 더 잘 알지 않을까.

    “이건.”

    잠시간 생각을 하는 듯 말이 없던 서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고민이 좀 필요해요.”

    어째 서진이 꽤나 쉽게 자기는 괜찮다고 하기는 했다. 그럼 서진은 도대체 뭘 생각한 거지? 물론 삽입이 필수적인 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그 정도를 생각한 걸까. 그것도 괜찮기는 한데, 아니면 지환이 너무 급했나?

    “이건 조금 더 의논이 필요한 문제잖아요. 그리고 생각해 보니 우리 이 얘기 한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당연하게 된 거예요?”

    확실히 그간 이런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기는 했다. 그냥 지환은 당연히 자신이 위라고 생각했으니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는데, 당연해도 이야기를 하기는 해야 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게 나으니까.”

    지환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서로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는 편이 낫잖아.”

    그 말에 서진이 눈가를 굳히며 물었다.

    “형은 정말 단 한 번이라도 다른 식으로는 생각 안 해 봤어요?”

    당연히 생각한 적 없다.

    “내가 깔리는 거?”

    말하기도 어색했는데, 정작 서진은 이제 아예 짜증스럽게 말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해요.”

    또 지환이 뭘 잘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내가 표현을 잘 모르니까.”

    그냥 뭐 그게 그건데 중요한가 싶으면서도 변명하자 서진이 여전히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지환을 바라보다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듯 한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무튼,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없어.”

    지환이 이 정도로 빠르게 답할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서진은 잠시 할 말을 잃은 것처럼 지환을 바라봤다. 설마 그럼 서진은 지환이 밑인 상황을 가정해 봤다는 건가?

    “그럼 넌 생각해 본 거야?”

    설마 하며 묻자 서진이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말했다.

    “해 보기는 했죠. 형이 어떨지를 모르니까.”

    이번에는 지환이 할 말을 잃었다. 그게, 아무리 그래도 그게 아니지 않나. 그리고 지환이 어떨지를 모른다니. 그건 양쪽의 상황을 생각해 봤다는 거겠지.

    그럼 지환이 밑이기를 바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는 건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가정에 잠시 충격에 빠진 지환은 이내 겨우 정신을 다잡고 서진을 바라봤다.

    “그럼 생각 안 해 본 나보다 생각해 본 네가 하는 게 맞지 않아?”

    어쨌든 서진은 양쪽 다 생각을 해 봤다는 뜻이었다. 지환은 전혀 아니었고.

    “그게 왜 맞아요? 이제라도 형도 생각해 보는 게 맞는 거지.”

    그게 맞는 건가? 그게 왜 맞지? 지환은 서진과 섹스하는 게 괜찮다는 확신이 있는 거지 지환이 생각하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의 섹스까지 생각한 적은 없다.

    “아니, 근데, 내가 그걸 생각을, 생각을 그걸.”

    더듬더듬 말한 지환은 애써 이성적으로 물었다.

    “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이 나올지 벌써 무서웠다.

    “네가 나한테 박고 싶어?”

    설마 하며 물었는데, 막상 서진에게서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아니, 야.”

    밀려들어 오는 당혹감에 말하자 서진이 조용히 지환을 불렀다.

    “형.”

    이 와중에도 그건 챙겨야 하는 모양이었다. 지환은 순순히 호칭을 바꿨다.

    “그래, 서진아. 아니 근데 내가 일평생 게이가 아닌 채로 살았단 말이야.”

    “그럼 저는 뭐가 달라요? 저는 아예 다 처음인데?”

    맞는 말이었다. 정말 다 맞는 말인데, 그래도 지환은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아무래도 그냥 처음 시도하는 게 익숙한 걸 바꾸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는 맥락에서,”

    “남들 다 하니까 해 보는 식으로 첫 경험 하는 건 안 되고 어차피 처음이니까 형이 편한 대로 따르는 건 돼요?”

    지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온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은 급박하게 답했다.

    “그런 말은 아니었지.”

    그렇게 들렸다니 아연했다. 그런 뜻은 아니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서진이 듣기에는 아무래도 똑같을 걸 깨달았다. 그렇기는 한데,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제 와서 지환이 뭘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지환은 웬만해서는 서진의 말을 다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 문제는 곤란했다. 정말 많이.

    “생각이라도 해 봐요. 그냥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는 건 괜찮잖아요.”

    “근데 이게 지금 오래 생각한다고 해서 바뀔 것도 아니고.”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요?”

    생각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아니니까. 그 당연한 답을 말하려고 했는데, 그보다 먼저 서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싫어요?”

    언제부터였는지 서러움이 섞인 목소리에 지환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는 형이면 뭐든 좋으니까, 어느 쪽이든 형이 저한테도 흥분할 수 있다고 하면 그걸로 충분히 다 좋으니까, 그래서 저도 형이 하고 싶다는 대로 하고 싶은 건 맞아요. 그런데 결론이 어떻게 나든 형도 생각 정도는 해 보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지환도 저랬어야 했는데. 결론이 어떻게 나든 어쨌거나 깊게 생각은 해 봐야 했는데, 너무 당연하게 서진에게 제 입장을 강요했다. 지환은 쓰레기가 맞았다.

    “형이 게이 아닌 것도 알고 지금 저랑 이만큼이라도 하는 것도 힘든 일인 거 알아요. 그래도 조금만 더 생각해 주면 되잖아요. 제가 형한테 뭘 강요할 것도 아니고 그냥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건데.”

    당연하게 생각한 적 없다고 말해야겠지만, 지환이 당연하게 생각한 건 맞아서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기는 했다. 진짜 그렇게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우선 생각이라도 해 보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도 한번 한 적 없이 몸을 맞댔을까. 지환이 그런 생각을 거북하게 여기는 만큼 서진도 그랬을 텐데.

    거기다 심지어 서진은 어떤 식으로든 아무런 경험도 없었다. 지환보다 서진이 더 힘들었을 텐데, 서진이 그 어색함과 거북함을 모두 견디며 결국 지환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다는 결론을 낼 동안 지환은 어련히 할 때 되면 하겠지 싶은 속 편한 생각이나 했다. 그것도 굉장히 지환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내가 생각이 짧았어.”

    결국 미안함과 착잡함이 얽혀 나온 그 목소리에 이어 서진의 물음이 들려왔다.

    “화났어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도중 들려온 목소리에 지환은 서진을 바라봤다.

    “화 안 났어. 왜 화가 나.”

    서진은 다 맞는 말을 해 놓고서 또 지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네 말이 맞아. 그냥 내가 편하니까 그렇게 하자고 하는 건 안 되는 거지. 너라고 안 힘든 것도 아닌데.”

    지환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이건 네 말대로 좀 더 고민해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그 말과 함께 지환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쳐져 있던 서진의 옷을 건네주며 저 역시 옷을 입었다. 그런데 고민을, 뭘 해야지. 좋아하는 건 맞았다. 좋아하는 건 정말 맞는데, 그래서 포지션까지 자유롭게 할 수 있냐고 하면, 그건 정말 깊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럼 지환이 쉽게 할 수 없는 포지션을 서진에게는 하라고 하는 게 맞는 건가. 그건 정말 아닌데. 역시 삽입은 하지 않는 편이 나은가. 삽입 섹스가 섹스의 전부도 아니고 그거 아니더라도 즐길 방법은 많으니까.

    생각하다 보니 점점 더 생각이 많아져 멍하니 있었는데, 문득 서진이 지환의 티셔츠 허리쯤을 잡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고민해요?”

    본인이 고민하라고 했으면서 막상 지환의 고민이 길어질 기색이 보이니 그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그래, 얘도 한창 몸 달을 나이지. 그 모순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이 와중에도 또 귀여워서 지환은 결국 허탈하게 웃으며 대충 침대에 몸을 누웠다.

    “네가 고민하라며.”

    지환은 그대로 서진을 올려다봤다.

    “오늘 자고 갈까?”

    “그래도 돼요?”

    지환은 지금껏 늘 연애 초기에는 집에서 자고 가는 거 아니라며 늦을라치면 재깍 집으로 갔다. 그러니 서진의 물음이 타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방금까지 서진과 지환이 이 침대에서 뭘 했는데.

    “그런 말 하기에는 이미 단계가 좀 지나지 않았을까?”

    지환은 그대로 서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사귀니까 같은 방에서 자도 되지?”

    그 말에 서진이 방금까지 몸을 밀어붙일 때는 언제고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지환의 손을 잡았다.

    “네.”

    서진은 답과 함께 지환의 옆에 나란히 누워 지환을 바라보다가, 지환이 서진을 바라보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래, 오늘은 손만 잡고 자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머리가 복잡했다. 분명 지환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게 맞았고 실제로도 그럴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껏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었다.

    “서진아.”

    “네.”

    “손에 힘 조금만 풀자.”

    생각하려고 했는데 손이 너무 저려서 말하자 서진이 그제야 자신이 과하게 힘을 주고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지 힘을 뺐다. 지환은 그 손을 적당히 깍지 껴 잡으며 서진을 바라봤다. 빤히 보고 있을 때는 언제고 지환이 고개를 돌려 마주하자 아닌 척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지환은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착잡함과 사랑스러움은 별개였다.

    * * *

    너무 집에만 있는 것 같아 오늘은 바깥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래 봤자 학교 근처이기는 한데, 아무래도 계속 집에서 만나니 하는 게 스킨십밖에 없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야 거기에 대해서도 별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이미 진지한 이야기가 오간 후였다. 그렇다고 그 이후로 지환과 서진이 스킨십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 이전과 같이 키스가 끝이었다. 그 이상으로 가는 건 아직 생각해 볼 문제였으니.

    지환은 카페 안에서 창을 통해 바깥을 바라봤다. 지환이 서진에게 약속 시각을 딱 맞춰 나오라고 했으니 이제 곧 서진의 모습이 보이겠지. 서진은 지환이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꼭 일찍 나왔다. 그냥 시간 계산 잘못해서 좀 일찍 나온 정도가 아니라 30분은 더 일찍.

    하지만 이번에는 서진에게 일찍 나오지 말라고 해 놓고 막상 지환이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조금 일찍 나왔던지라, 지환은 그저 평화로운 분위기를 즐겼다. 시간 맞춰서 오라고는 해도 서진은 보통 10분 전에는 도착하니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생각지 못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같은 학교라 어쩌면 마주칠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어도, 학기 중에는 전혀 마주치지 않다가 방학에 이렇게 마주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대로 어정쩡하게 굳어 있자 당황스러움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상대방도 시선을 피하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가만히 지환을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지환에게 다가왔다.

    아니, 왜 오는데? 지환이 알기로 상대방과 지환은 오가다 인사할 사이는 전혀 아니었다.

    “형, 오랜만이에요.”

    현우를 겨울 방학 때 보고 안 봤는데 지금이 여름방학이니 나름대로 오랜만이기는 했다. 그렇기는 한데.

    “어, 그렇지.”

    우선은 답하자 현우가 지환을 바라봤다. 무슨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멀리서 봤을 때는 얼굴이 잘 안 보여서 혹시 했는데 진짜 형이었네요. 형이 저랑 있는 거 어색할 거 아는데, 그래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지금 안 하면 앞으로도 못할 것 같아요.”

    현우는 지환의 전 여자친구인 하늘의 현재 남자친구였다. 지환이 알기로는 그랬는데, 그 몇 달 사이에 헤어진 게 아니라면 여전히 남자친구가 맞겠지. 하늘의 전 남자친구인 지환이 현 남자친구에게 들을 말이 도대체 뭐가 있나 싶으면서도, 지환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말 까지 않았나? 그냥 말해.”

    지환과 현우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하늘을 통해 알게 된 사이인데, 꽤 복잡했다. 안 그래도 어색한데 왜 더 어색하게 존댓말까지 쓰나 싶어 말하자 현우가 머쓱한 듯이 웃었다.

    “아, 응.”

    그래 봤자 어색한 분위기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굳이 없애고 싶지도 않았고. 앞에 앉으라고 말이라도 해야 할까 싶었는데, 문득 현우가 입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현우에게는 조금 헐렁한 티셔츠가, 저거 내 거 아닌가.

    “그 티셔츠.”

    그 말에 현우가 제 티셔츠를 바라봤다.

    “응?”

    “하늘이가 줬어?”

    “누나 동생 거라는 것 같던데.”

    하늘은 편하게 입는 용도로 하늘에게는 한참 큰 동생이나 지환의 티셔츠를 입고는 했는데, 아마 그게 섞인 모양이었다. 하늘은 원래도 정리정돈을 잘하는 편은 아니라 늘 지환이 대신해 주고는 했는데, 헤어졌으니 지환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랬다면 당연히 옷들이 다 섞였겠고.

    “혹시 이거 형 거야?”

    이윽고 현우가 대강 눈치챈 듯 묻자 지환은 그저 답했다.

    “그런 것 같은데, 원래 옷은 다 섞이니까.”

    “진짜 미안해. 몰랐어.”

    그럼에도 당황이 섞인 목소리에 지환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현우가 미안할 일은 아니었다.

    “하늘이도 몰랐을걸.”

    “돌려줄게.”

    “됐어. 어차피 내가 안 챙긴 건 다 버려질 거였고.”

    아무리 몰랐다고는 해도 여친의 전 남자친구의 티셔츠를 입고 있는 건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싶어 지환은 이어 말했다.

    “너만 기분 안 나빴으면 됐지.”

    그 말에 현우는 도리어 지환을 보며 되물었다.

    “형은 괜찮아?”

    “나는, 뭐.”

    괜찮고 말고 할 건 없고 그냥 기분이 조금 미묘할 뿐이었다. 지금이야 지환에게도 애인이 따로 있었고 하늘에게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다. 애초에 미련이 남을 수도 없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써 본 후 확실히 헤어졌고.

    “너 그런데 하늘이랑 아직 사귀는 건 맞아?”

    하늘의 집에 있던 지환의 옷을 입을 정도면 그새 헤어진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몰라서 묻자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는 계속 사귀어.”

    그대로 말이 이어졌다.

    “우리만.”

    그렇게 될 것 같기는 했는데, 정말 그랬던 모양이다.

    “그렇게 됐어.”

    그러면서도 떨어진 현우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미안할 일도 아닌데.

    “그래.”

    지환은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학교 근처이기는 했지만, 방학인 데다 계절학기도 끝난지라 사람은 없었다. 그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이제 곧 서진이 올 시간이었다.

    “할 말은 뭐야?”

    서진이 오기 전에 이야기를 끝내야지 싶어 묻자 현우가 시선을 내렸다.

    “형, 나 형 원래 알고 있었어.”

    “뭐?”

    지금 말하는 원래라는 게 하늘과 함께 만난 걸 이야기하는 건 아닐 텐데.

    “형 군대 가기 전에, 클럽이랑 술집 모여 있는 곳 있잖아, 거기 자주 갔었지.”

    군대 가기 전이라면 한창 막장을 달리던 때였는데, 술집 거리까지 나오자 자동적으로 불안해졌다.

    “지하철역 쪽 피자집, 거기서 가끔 주말 아침 알바했거든. 우리 고모 가게라.”

    지환은 가까스로 탄식을 참았다. 꽤나 열심히 놀던 지환은 고3이 되며 모든 걸 정리하고 정말 죽은 듯이 공부만 하고 살았다. 그러다 대학에 합격하자 그동안 놀지 못한 걸 보상받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해방감을 만끽했다. 거기다 합법적인 성인이기도 했고.

    술집 거리 지하철역 피자집이라면 지금도 기억나는 곳이 있었는데, 밤새 달리고 숙취로 시달리다 술도 깰 겸 조각 피자를 먹던 곳이었다. 아니면 술집에서 만난 사람과 함께 얘기하며 배를 채우던 곳이었고. 거기가 위치가 제일 좋았고 새벽에도 운영한 데다가, 또 다른 선택지인 국밥집보다는 나았다.

    “형 자주 봤어.”

    그래, 자주 봤겠지. 정말 자주 봤을 거다. 지환은 아찔한 정신을 다잡으며 물었다.

    “하늘이도 알아?”

    그거 말했으면 지환에게 정을 떨어뜨려 놓기에는 정말 좋았을 텐데. 하지만 현우는 망설일 것도 없이 답했다.

    “내가 그런 걸 왜 말해. 그냥 그래서 형 알고 있었다고.”

    그 말에 지환은 현우를 바라봤지만, 현우는 여전히 시선을 내린 채였다.

    “형 아니었으면 나도 안 그랬을 거야. 그렇다고 형을 좋아했던 건 아닌데, 그러니까, 그때만 잠깐 좋아했고 그거 벌써 몇 년 전이니까. 하늘 누나랑 만났을 때는 안 좋아했어. 누나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런데, 어쨌든 형 아니었으면 나도 안 그랬을 거야. 그래도 형이랑은 될 수도 있을 줄 알았어.”

    현우가 여자와 남자 둘 다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지환을 좋아한 적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애초에 현우가 지환을 원래 알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고.

    “그런데 형은 그냥, 솔직히 형이 별로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거 알고는 있었어. 그런데 그래도 나는 잘될 줄 알았지. 그렇게까지 엉망일 줄 어떻게 알았겠어.”

    지환은 답답함에 제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 이런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다시 한번 나온 직설적인 물음에 현우가 답했다.

    “형이랑 잔 거 후회하고 있어. 밀어붙인 거 알고 있고, 미안해.”

    그러니까, 현우는 지환이 게이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게 해 준 사람이었다. 현우가 아니었다면 지환은 자신이 서진에게 관심을 가질 때, 한 번도 남자한테 관심을 가진 적이 없는데 왜 서진에게는 관심이 가는지를 생각하다 보다 빠르게 마음을 인정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환에게는 자신이 게이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으니.

    그래서 계속 생각이 돌았다. 지환은 분명히 게이가 아닌데, 그러니 서진에게 관심을 두는 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지환은 게이가 아니니까. 그리고 그렇게 확실히 지환이 게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이유는, 지환은 현우와 잤다.

    “나도 동의한 거야. 그래도 잘못된 거면 내 생각이 짧았던 거고. 솔직히 내가 그때 너한테 좀 좆같이 군 것도 있고. 그건 미안했다.”

    지환은 현우와의 섹스가 잘 될 거라는 생각은 없었으면서도, 해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되기는 했지만, 긍정적이지는 않았고. 실제로도 지환은 당시 현우에게 거북한 티를 숨기지도 않았고 배려도 없었다. 어쨌거나 지환도 자의로 동의했다면 그러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매너는 확실히 없더라. 싫은 티를 그렇게 내고.”

    애써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한 말 같았는데, 점점 현우의 고개가 더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지. 미안했어.”

    지환은 여전히 지환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현우를 보며 물었다.

    “너희 나중에 권태기 같은 거 오면, 다시 할 거야?”

    “아니.”

    현우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형이랑 헤어지고 누나랑 말해 봤거든, 그런데 누나도 자기는 못 하겠다고 말하더라. 애초에 그렇게 사귄 것도 그냥 자기가 둘 다 못 놓아서 그렇게 된 것 같다고.”

    애초에 사귈 때부터도 하늘이 꽤나 힘들어하기는 했다. 지환도 힘들었고. 아마 현우도 힘들었겠지. 그 와중에 결국 지환이 먼저 포기했다. 애초에 지환과 하늘은 이미 끝난 관계였던 걸 지환이 억지로 이어 붙여 놓은 셈이었으니 그게 맞기도 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다 써 본 이후라 이제 더는 정말 안 되겠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미련은 없었다.

    “걔 잘못은 아니지. 따지자면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고. 애초에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것도 안 됐는데. 너무 늦게 알았어.”

    “따지고 보면 내가 먼저 제안한 거잖아. 그러니까, 나는 분명히 누나가 형한테 갈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아. 안 그러면 분명 내가 버려질 것 같았거든.”

    지환은 그에 대해 그리 길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환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전 연애를 생각하며 이랬으면 어땠을까, 그럼 조금 더 나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먼저 제안했든 나도 동의한 거니까 이런 얘기는 그만하자.”

    현우가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지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환도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했어야 했는데. 지환은 보통 부딪히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종종 먼저 생각해야만 했던 일들은 있기 마련이다.

    “형은 그럼 아직 누나,”

    설마하니 지환이 예상하는 질문이 나오지는 않겠지 싶어 그 목소리를 기다렸는데, 문득 지환은 피가 싸늘히 식는 기분이 들었다.

    “어….”

    테이블 앞으로 다가온 발소리에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지환은 차마 제 테이블 앞에 온 사람이 누군지를 확인하지도 못하고 굳었다. 언제부터지.

    “형.”

    그 목소리에 지환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인상이 꽤나 차가운 편인 서진의 그 얼굴은 어떠한 것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더 잘 살폈어야 했는데, 현우와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시간을 잊고 있었다.

    “한서진?”

    지환이 겨우 목소리를 내자 서진이 차분한 시선으로 지환과 현우를 한 번씩 번갈아 봤다가, 그대로 등을 돌려 걸었다. 지환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자 순간적으로 지환과 부딪힌 테이블이 덜컹했다.

    “형, 내가 아웃팅 시킨 거야? 형은 심지어 바이도 아닌데?”

    현우의 그 불안한 어조에 지환은 빠르게 답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고, 아무튼 다 알겠어.”

    방금껏 현우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두 다 잊은 채로, 사실 그걸 잊지 못해서, 지환은 바로 카페를 뛰쳐나와 서진을 붙잡았다.

    “한서진!”

    다급하게 서진을 붙들자 서진은 꽤나 굳은 표정 그대로 자신을 붙든 지환의 손을 바라보더니, 이내 그 손을 제게서 떼어냈다.

    “너 어디부터 들었어?”

    조급함이 묻은 말에도 서진은 아무 답이 없다가,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는 걸 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디를 들으면 됐는데요?”

    지환은 답하지 못했다. 그 어디도 들으면 안 됐다.

    “어디를 들으면 되는데?”

    차라리 화라도 내고 추궁이라도 하는 게 나을 만큼, 서진은 무표정했으며 그 어조 역시 평탄했다.

    “어차피 나한테 말해 줄 생각이었던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서진은 여전히 지환을 바라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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