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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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쯤 뒤에 다시 오겠다고 한 지환은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않았다.

“뭐예요?”

서진은 제게 내밀어진 헬멧을 바라봤다. 지환은 한 시간은커녕 겨우 이십 분 뒤에 다시 서진을 찾아왔다. 연락을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어디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어느 미친놈이 재깍 안 지나가고 신경 거슬리게 저러고 있나 했는데, 지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려오지 않는다면 계속 그러고 있을 거라고 했는데, 이웃한테 피해 주기 싫으면 빨리 나오라는 말을 듣고는 정말 미친 건가 싶었다.

“헬멧.”

우선 받아 들기는 했는데, 서진이라고 제게 내밀어진 물건의 정체를 몰라서 물은 건 아니다. 도대체 지환이 왜 오토바이를 끌고 서진의 앞에 있냐는 걸 물은 거지.

“이것도 껴. 보온용은 아닌데,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번에 건네진 건 오토바이용 장갑이었다. 지금 보니 지환도 끼고 있었다.

“원래 오토바이 있었어요?”

보통 연우가 지혜의 집에 가기는 했는데, 지혜가 연우를 만나러 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종종 서진도 지혜를 봤고 연우와 지혜가 이야기하는 걸 몇 번 듣게 된 적도 있는데, 지환의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도 있다. 학교 다닐 때 꽤나 대단했다고 하던데 자세한 사정은 몰랐지만, 오토바이에 기대어 앉아 있는 폼이 정말 익숙한 걸 보니 대강 상상이 됐다.

“이거 내 거 아니야. 빌려 왔어. 나도 꽤 오랜만이기는 한데.”

헬멧을 한쪽 다리 위에 올려놓고 발을 살짝 까딱거리며 하는 말에 서진은 떨떠름하게 지환을 바라봤다.

“그런데 저를 태우겠다고요?”

“괜찮아. 내가 널 태우고 뭘 하겠냐, 어?”

그래 봤자 타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뭐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서진이 헬멧을 들고 가만히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 역시 서진을 바라봤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이유는 풀기 위해서야.”

사실 서진은 지환 같은 유형의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환처럼 무던하고 건강한 사람들과는 태생적으로 잘 맞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생활 반경이 겹친 탓에 주기적으로 보고는 있었지만.

“그럼 풀어야지.”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서진에게 어려웠다. 쌓인 걸 푼다고 뭐가 나아지나. 당장 괜찮아져 봤자 근본적으로는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진이 충동적으로 지환의 뒤에 타자 지환이 헬멧을 썼다. 그걸 보며 따라서 헬멧을 쓴 서진은 머뭇거렸다.

오토바이를 탄 게 처음이라 뭘 어떻게 타야 하는지는 아는 게 없었다. 그냥 위험한 것만 알았지. 보통은 운전자 허리를 잡는 것 같던데, 그렇다고 진짜 잡을 수는 없어 우선 타고 나서도 머뭇거리고 있자 지환이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은 채로 다른 한 손으로 서진의 무릎과 허벅지 중간쯤을 잡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저절로 움찔했지만, 지환은 그런 서진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했다.

“조금 더 앞으로 와서 다리로 나 제대로 잡아.”

그래 봤자 서진은 사람과 닿아 본 적이 그리 많지 않아 더없이 어색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내릴까 싶었는데, 지환이 그대로 오토바이를 출발시키며 서진의 손 한쪽을 제 허리춤으로 끌어왔다.

“한 손은 뒤에 잡고.”

얼떨결에 하라는 대로 했는데, 헬멧을 쓰기는 했지만, 전혀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흘깃 계기판을 보니 속도가 높지도 않았는데도 바람이 그대로 느껴져 더 불안했다.

“형, 그만해도 될 것 같아요.”

죽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서 겨우 말하자 지환이 바로 답했다.

“속도 높일 건데 불안하면 그냥 두 손 다 나 붙잡든가.”

길이 트이자 지환은 정말 속도를 올렸다. 서진은 지환의 뒤에서 제 인생을 곱씹었다. 지환에게 어쩌면 조금 싸가지 없게 굴었을 수는 있는데, 그래도 악의를 느끼게 할 만큼은 아니었을 텐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서진은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지환의 허리에 양손을 둘렀다. 살아서 내일을 맞이할 수 있겠지.

* * *

서진은 여전히 쿵쾅거리는 가슴팍에 손을 올려놨다.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는데, 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저는, 이제 갈게요.”

도대체 왜 데려온지도 모르겠지만, 저 오토바이로 다시 집에 가는 건 도저히 하고 싶지가 않았다. 택시라도 타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지환이 세워 놓은 오토바이 옆에서 담배를 입에 물며 라이터를 꺼냈다.

“가긴 어딜 가.”

지환은 손으로 입가를 가려 바람을 막으며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그대로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서진을 바라봤다.

“너 담배 피워 본 적 있어?”

“아니요.”

“와 봐.”

“싫어요.”

바로 답하자 헬멧 때문에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한번 턴 지환이 웃으며 서진을 향해 다가왔다.

“내가 너 잡아먹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진을 붙잡은 지환은 그대로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더 꺼내 서진에게 내밀었다.

“물어.”

“왜요.”

“해 본 적 없다며.”

아예 입술에 가져다 대 주는 걸 결국 물자 지환이 담뱃불을 붙여 줬다.

“형이 담뱃불도 붙여 주고 건방지기가 아주.”

장난스럽게 말하는 목소리를 그저 듣고 있자 지환이 웃었다.

“불붙일 때 빠는 거야.”

그냥 한번 해 주고 말자 싶어 한 모금 빨아들이자 지환이 바로 말했다.

“삼켜.”

그대로 연기를 삼키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걸 도대체 왜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연기가 몸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자 괜히 기분이 나빴다.

“기침도 안 하네.”

지환이 바로 서진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더니 그대로 포켓 재떨이에 넣었다. 자기가 피우라고 해 놓고서 또 뭐 하는 건가 싶어서 바라보자 지환이 조금 심각하게 서진을 바라봤다.

“너는 더 하면 안 되겠다.”

“형이 하라면서요.”

어이가 없어서 말하자 지환이 말했다.

“담배는 짧은 시간에 반복적으로 연기를 들이마시는 거잖아. 근데 원래 짧은 시간에 반복적인 작은 보상이 중독되기 쉽거든. 너는 처음인데 기침도 안 하는 거 보니까 중독되기 딱이다.”

“하라고 준 거 아니에요?”

그 물음에 지환이 담배 연기를 서진의 반대쪽으로 내뱉으며 말했다.

“한번 해 보라고 한 거지 누가 계속하래? 건강에도 안 좋은걸.”

그러는 본인은 그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경영대와 공대는 별다른 접점이 없으면서도, 창업 교육 같은 몇 개 겹치는 강의가 있었다. 주로 고학년이 듣는 강의이기는 했는데, 공대 건물에서 열리는 탓에 누군가 그쪽으로 다녀오면 종종 지환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주로 지나가는 이야기였는데, 기공 걔, 혹은 기공 그 선배. 이름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렇게 얘기하면 다들 그게 누군지를 어렴풋이 알았다.

지나다니면 다들 비슷한 몰골로 비슷하게 찌든 채로 다녀서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다는 그 공대생들 사이에서 유독 튀는 얼굴이니 무리도 아니기는 했는데, 사실 지환은 어디서든 눈에 띌 만한 사람이었다. 굳이 외적인 모습을 말한다기보다는, 뭐든 무던한 태도가 그랬다. 본인이 신경 쓰지 않아도 주위에 늘 사람이 붙어 있는 전형적인 유형이었고.

“그럼 왜 하라고 했어요?”

서진이 묻자 지환은 휴대용 재떨이에 재를 털며 시선을 내린 채로 말했다.

“남들이 스트레스 푼다고 하는 거 너도 다 해 봐. 안 맞으면 마는 거고 잘 맞으면 좋은 거고.”

그걸 왜 지환이 신경 쓸까. 서진과 지환은 어쩌다 보니 주기적으로 만나기는 했지만, 그다지 친하다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서진은 물끄러미 지환을 바라봤다. 편한 운동화, 트레이닝 바지, 날씨에 맞지 않게 얇은 스웨트 셔츠, 그 위에는 대충 걸친 패딩. 거기다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꾸민 거라고는 전혀 없는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심지어 옆에는 오토바이에.

영락없이 양아치였는데, 이 모습을 좋아할 사람이 많을 것도 알았다. 남고를 나왔다는데 분명 거기서도 인기가 많았겠지. 지금만 해도 확실히 지환은 성별 가릴 것 없이 인기가 있었다. 그러니 양아치가 인기 있을 나이에는 더 그랬겠지.

“형 담배 끊었잖아요.”

그 말에 지환은 어느새 짧아진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말했다.

“그랬었지.”

살짝 뭉개진 발음에 서진은 물었다.

“여자친구가 뭐라고 안 해요?”

지환은 여자친구를 만나면서부터 담배를 끊기 시작했다. 한 갑에서 반 갑으로, 작년쯤에는 하루에 한 대만 피우다가 일주일에 한 대까지도 내려갔다. 그러다가 가을쯤에는 아예 끊었다. 오늘을 제외한다면 서진이 지환을 가장 최근에 본 게 이 주쯤 전이었는데 그때도 금연을 성공적으로 유지했고. 그런데 왜 갑자기 다시 피울까.

“원래도 걔가 뭐라고 해서 끊은 거 아니야. 그냥 간접흡연이 더 나쁘다고 하니까 내가 끊은 거지.”

짧아진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넣으며 지환은 곧바로 담뱃값에서 한 대를 더 꺼내 불을 붙였다.

“졸업식 얼마 전에 헤어졌어.”

졸업식은 바로 며칠 전이었다. 다짜고짜 헤어졌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지라 서진이 가만히 지환을 바라봤는데도, 지환은 아무렇지 않게 슬쩍 서진을 바라봤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시선이었다.

“형은 뭐 하는데요?”

문득 나간 서진의 질문에 지환이 오토바이에 기댄 채로 되물었다.

“뭘?”

“스트레스 받으면 풀어야 한다면서요.”

서진의 말에 지환은 답을 생각하는지 입술에 문 담배를 까딱였다.

“그때그때 다른데, 나도 꼭 담배를 피우거나 오토바이를 타는 건 아니고. 담배는 그냥 습관이고 오토바이는 안 탄 지 한참 됐으니까.”

여상스러운 목소리가 그대로 이어졌다.

“작년에야 계속 학교에 갇혀 있었으니까 뭐 할 것도 없이 다 학교에서 해결하기는 했지. 농구 한판 뛰고 오든가.”

“이글루 만든 것도 그런 거였어요?”

“너도 봤어?”

의외라는 듯이 나온 말에 서진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우리 학교에서 그거 안 본 사람도 있어요?”

계절학기 기간에 중앙도서관 뒤편으로 만들어진 이글루는 같은 학교 학생이라면 모두가 알았다. 새벽까지 과제 하던 학생들이 미쳐서 같이 만들었다는데, 주로 공대와 미대였다. 거기서 굳이 중앙도서관까지 와서 만든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터가 제일 넓어서 그랬다고 했다.

“더 갇혀 있다가는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아서 애들이랑 나가서 눈사람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그거 얼마나 크게 만들 수 있을까 싶은 거야. 그래서 그 짓 하고 있는데 야작 하던 미대 애들이 와서 그걸로 조각해도 되냐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건축 애들도 와서 차라리 이글루 만들어 보자고 했고.”

“그럼 이글루 안에 오리는 왜 넣어놨어요?”

이글루 안에는 눈으로 만든 의자와 함께 오리가 가득했다. 서진은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커뮤니티다 SNS다 뭐다 하며 사진이 많이 올라간 탓에 동기들에게서 사진을 받아 보기는 했다.

“나는 강아지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만들기 힘들다면서 오리가 더 쉽다고 그거 만들더라고.”

지환은 그대로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가자. 더 어두워지면 우리 둘 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을 못 하겠다.”

“지금은 있어요?”

서진이 떨떠름하게 묻자 지환이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지금이야 괜찮지. 타.”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지환의 모습에 서진은 잠시간 지환을 바라보다가, 결국 그 뒤에 탔다. 서진이 헬멧을 쓴 걸 확인한 지환이 저 역시 헬멧을 쓰며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서진은 그 허리를 옅게 잡으며 주위를 바라봤다. 올 때는 그렇게 불안하기만 했는데, 그사이 적응이 된 건지 이제는 제법 주위를 살필 여유는 있었다.

서진은 제게 닿은 온기가 낯설기만 해서, 잠시 눈을 감았다. 서진은 제 가정사를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사실 말할 만큼 대단하지도 않다. 대한민국에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강요받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고 자식 압박하는 집안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중 서진이 경험한 건 큰일도 아니다. 다들 그만큼의 스트레스와 압박감은 가지고 살았다.

그걸 모두 알고 있고 굳이 이해받을 생각도, 무엇이든 설득할 생각도 전혀 없었기에 서진은 지금껏 입을 닫았다. 그럼에도 지환에게만 말한 이유는 별것이 없다. 직접 찾아와 준 건 지환뿐이라서. 어쩌면 지금껏 서진에게 이유를 물은 사람은 꽤 있겠지만, 진심으로 궁금했던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도 왜 서진이 모두와 연락이 되지 않는지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그 누구에게도 무언가를 말한 적은 없다.

서진은 지환이 서진을 걱정하는 것보다도 더 서진을 걱정하는 사람이 꽤 있을 걸 안다. 지금껏 잘 지내다가 덜컥 연락을 끊은 동기만 해도 그렇겠지. 애초에 서진과 지환은 같은 집에서 과외를 해 주기적으로 볼 뿐이지, 그 외의 어떠한 친밀감이나 유대감은 없었다.

그럼에도 서진이 저를 걱정하는 다른 사람들을 다 무시하고, 서진을 걱정한다고는 해 봤자 깊이는 얕기만 할 지환에게만 제 이야기를 했다. 지환은 직접 찾아와 줬으니까. 이유가 뭐든, 지환의 걱정이 얼마나 얕든, 직접 물으러 온 건 지환뿐이다. 찾아와서 물었으니 말해 준 게 전부였다. 거창한 건 없다.

서진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며 지나치는 바람이 선명했다.

* * *

서진의 자취방 앞에 도착하자 지환이 문득 서진을 붙들었다.

“오늘 이거 지혜한테는 비밀이야.”

“저 어차피 지혜랑 잘 모르는데요.”

당연한 말을 하자 지환이 물끄러미 서진을 바라봤다.

“그런 것 치고 너희 별 얘기를 다 하지 않아?”

지나가는 말로 지환의 과거를 몇 번 듣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그건 지혜가 연우의 여자친구여서 그랬을 뿐이다. 서진과 지혜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전혀 없다.

“왜 말하면 안 되는데요?”

어차피 말할 생각도 없으면서 묻자 지환이 별달리 망설이지도 않고 말했다.

“다행히도 고등학교 때 오토바이 타다가 사고 난 적이 있거든.”

“다행?”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저절로 되묻자 지환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지금 멀쩡히 살아 있잖아. 군대도 제대로 갔고.”

그 평이한 목소리가 그대로 이어졌다.

“오토바이 사고는 보통 사고로 안 끝나거든. 그런데 나는 사고로 끝났고 그것도 가벼웠으니까.”

지환이 오토바이를 탈 줄 안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으니 예전에 사고가 났던 적이 있다는 것도 당연히 처음 알았다.

“그때 사고 안 났으면 지금까지 타다가 나중에 크게 일 났을지 누가 알겠어?”

지환이 고등학생 때라면, 이제 적어도 5년은 지났을 일인데도 저절로 심각해진 서진과는 달리 정작 당사자인 지환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렇기는 한데, 그래서 그때 이후로 오토바이 안 타기로 약속했거든. 지혜 알면 난리 난다.”

“그런데 지금 또 타는 거예요?”

조금쯤 추궁하듯 나간 목소리에 지환이 바로 답했다.

“아니. 이거 돌려주고 나면 이제 안 탈 거야.”

“언제 돌려줄 건데요?”

“얘네 집 이 근처라 이제 가져다주려고.”

서진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지환이 서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또 뭐 할래? 너 술은 못 마시는 거야, 안 마시는 거야?”

얼핏 기대감까지 담긴 목소리에 서진은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그냥 형이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죠. 내 핑계 대고.”

처음부터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는데, 지환은 변명 하나 하지 않고 답했다.

“겸사겸사. 이러다 보면 너도 좋아하는 거 하나는 걸리지 않겠냐.”

그 말을 끝으로 지환이 다시 헬멧을 썼다.

“이만큼 놀았으면 오늘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빨리 자. 담배는 앞으로도 할 생각 하지 말고.”

그대로 핸들을 잡는 모습에 서진은 문득 물었다.

“왜요?”

그 물음에 지환은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이 서진을 바라봤다.

“몸에 안 좋으니까.”

“아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서진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왜 저한테 신경 쓰세요?”

“말투 싸가지 없는 게 마음에 드네.”

말 하나를 하는데 수없이 고민하고, 그러면서도 남이 듣기 싫을 것 같은 소리는 절대 하지 못하는데도 별다른 호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리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느끼는 바를 모두 말하면서도 적의라고는 전혀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 지환은 명백히 후자였다.

“내숭은 좋은 거야.”

그다지 맥락이랄 것도 없이 떨어진 목소리가 그대로 이어졌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열심히 해야지.”

지환은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너도 대충 아는 것 같은데, 나 중고등학교 때는 그렇게 공부만 열심히 하지는 않았거든.”

그냥 대단했다는 소리만 들었지 어떤 식으로 대단했는지는 아는 바가 없었는데, 이제 대강 알 것 같기도 했다.

“공부하면서 다 털기는 했는데, 어쨌든 그래서 그런가 지금도 별로 모범생 같은 분위기는 아니라고 하더라고.”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그렇다고 지환이 공부를 못할 것 같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었는데, 그냥 분위기 자체가 공부를 열심히 하더라도 공부만 열심히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 여친이, 지금은 전 여친인데, 어쨌든 걔는 공부 열심히 할 것 같은 애들 좋아한다고 하는 거야. 공부만 할 것 같은 애들.”

지환이 헬멧 위로 제 눈가를 툭 건드렸다.

“그래서 안경도 썼었어. 꼬시려고 별짓을 다 할 때였거든. 나는 눈 좋아서 안경 쓸 필요도 없었는데.”

지환은 그대로 서진을 바라봤다.

“그렇기는 한데, 내숭도 상대 봐 가면서 하는 거야.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한테만. 모든 사람한테 다 내숭 떨면 피곤해서 어떻게 사냐.”

여상스러운 목소리 끄트머리에 아주 옅게 담긴 걱정스러운 어조에, 서진은 말했다.

“형한테는 성격 숨기라고 그랬잖아요.”

지환은 처음부터도 그랬다. 지금에 와서는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마 그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 원래도 시간을 더 쥐어짤 구석이 없었는데 고3이 되자 어떻게든 시간을 더 쏟아야 했고 그 와중에 연우는 또 일을 만들었으니. 성의 없이 굴었다는 건 인정하는데, 지환은 그냥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그렇게 내 말 잘 들으면 이제는 좀 편하게 굴든가.”

별말을 다 한다는 듯이 말한 지환이 그대로 다시 핸들을 잡았다.

“간다.”

그리고 서진의 답은 듣지도 않고 떠나는 지환의 모습에, 서진은 다소 현실감 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평소처럼 핸드폰은 놔두고 산책하러 나갔다가 난데없이 지환을 만났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으면서 지환은 서진을 찾았다고 했다. 그대로 조금 언쟁을 벌이다가 지환이 서진의 집으로 왔고 서진은 제 집안 사정을 지환에게 얘기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도.

그러다 갑자기 지환이 오토바이를 끌고 와서 서진을 태우고 돌아다니다가, 담배도 피우게 했다. 그래 놓고 꼭 서진이 잘못이라도 했다는 듯이 더 피우지 말라고 하며 앞으로도 피우지 말라고 했고.

그러다 집에 돌아와서는 내숭은 좋은 거지만 자기한테는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지환은 자신에게도 성격 숨기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는데.

서진은 오늘 제게 벌어진 일을 찬찬히 되짚어 봤지만, 논리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어 도저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 *

지금껏 늘 일정 거리를 유지하다 갑작스레 맥락 없이 가까워진 채로 관찰하게 된 지환은, 조울증 같았다.

“와, 오늘 무슨 요일이냐. 화요일?”

“네.”

떨떠름하게 답하자 지환이 웃으며 말했다.

“화요일은 학교 가는 날이지.”

도대체 학교 가는 날이 뭐 어쨌다고 저렇게 좋아하는지 지환은 늘 요일을 물으면서 그날은 학교 가는 날이라고 좋아했다.

“주 5일 학교 가는 삶. 내가 얼마나 이걸 바랐는데. 드디어 이룬다.”

원래는 주 7일 학교에서 살다가 이제 그나마 졸업 학년이라고 주5일을 다니니 좋다고는 하는데, 서진으로서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공대가 사람을 망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지환이 원래 저랬던 걸까.

“내가 이걸 위해 계절을 들은 거야. 주 5일, 진짜 이게 사람 사는 거지. 안 그러냐?”

공강을 하루 넣고 주 4일 학교에 다니는 서진에게 묻기에는 심히 문제가 많았지만, 서진은 우선은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서 너 오늘 뭐 해. 끝나고 술 마시자.”

그 말에 서진은 아무런 답 없이 그저 학교를 향해 걸었다.

“내가 너 억지로 먹이는 것도 아닌데.”

보통 서진이 이렇게 입을 다물면 대부분의 사람은 서진이 그다지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알고 더는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하물며 그 눈치 없는 연우도 그랬는데, 막상 지환은 그러지를 않았다. 사실 지환은 서진이 싫어하는 기색을 다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고 밀어붙이는 거겠지만.

“피씨방 갔다가 술 마시러 가면 딱 맞네. 너 오늘 몇 시에 끝나냐? 경대 앞에 가 있게.”

“거기에 형이 왜 와 있어요.”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사람이 자기가 원래 있을 곳도 아닌 곳에 있으면 더 눈에 띌 게 뻔했다.

“안 그러면 너 튈 거잖아.”

서진은 어이가 없어 다시 입을 닫았다. 서진이 지환을 조울증이라 여기는 이유는 밤에 드러나는데, 개강하고 나서 지환은 하루가 멀다고 서진을 불러냈다.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하루가 멀다고.

이유는 실연의 아픔이었는데,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계속 술만 퍼마셨다. 그게 벌써 한 달이었고.

“너는 내가 네 시간표 못 알아낼 것 같아?”

그 말에 서진은 잠시 지환을 바라봤다. 여자친구가 있을 때는 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외출복 같은 걸 입더니 이제는 방금까지 자다 나왔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아예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녔다.

“못 알아내죠.”

작년에는 관성적으로 과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서진은 이제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고 지냈다. 그래도 여전히 연락이 오기는 했고 강의에서도 보기는 했지만, 조별 과제가 아니라면 늘 적당히 피하자 다들 서서히 서진을 혼자 있도록 해 줬다.

작년 같았더라면 다들 시간표를 공유했으니 지환도 서진과 같은 학년의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시간표를 알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 사람과 서진이 겹치는 강의가 있다면 딱 그 정도를 알아낼 수 있을 뿐이었다.

“그건 그렇지. 내가 경영 애를 또 누구 아냐.”

어느덧 정문에 도착하자 지환이 교내 셔틀버스 정류장을 눈짓하며 말했다.

“나 너희 집 아는 거 알지?”

툭하면 하는 소리가 저거였다. 언제는 그냥 끝까지 무시했더니 정말 집으로 온 적도 있다. 도대체 지환이 뭐 때문에 계속 서진에게 다가오는지는 모르겠는데, 지환은 서진이 적당히 눈치를 줘 봤자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직접 찾아오지 말고 연락하세요.”

결국 나온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이 웃었다.

“그래. 간다.”

서진은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수업이 있는 경영대로 걸음을 옮겼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지환과 함께 있으면 늘 휘말리기만 했다.

* * *

서진은 문과인지라 지환의 간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과 똑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면 분명 일찍 죽지 싶었다.

“왜 다른 사람이랑은 안 마셔요?”

안주가 나오기도 전인데 소주를 마시는 지환의 모습에 묻자 지환이 서진을 바라봤다.

“너 말고 내 전 여친 모르는 사람 없어.”

그 말에 서진은 작년 축제 때 잠깐 봤던 지환의 여자친구를 떠올렸다. 사실 요즘 지환을 만나면서도 종종 떠올리기는 했다. 어쩌다가 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당시에는 대충 봐도 서로 꽤나 좋아하고 있다는 게 시선으로도 보였다.

“저도 한 번 보기는 했잖아요.”

서진의 말에 지환은 제 잔에 소주를 따라 넣으며 답했다.

“너는 그게 끝이잖아. 다른 애들은 다 내 전 여친이랑 술도 마셔 보고 그랬거든. 그런데 내가 헤어졌다고 내 편 들고 그러면 좀, 기분 이상해.”

그러는 본인은 한 달째 술을 퍼마시면서도 헤어진 여자친구에 대한 걱정이 꽤나 살뜰했다.

“왜 헤어졌어요?”

사실 물으려면 한참 전에 물어야 했던, 꽤나 늦은 질문에 지환은 그 이유를 생각하는 듯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복잡한데.”

애매한 목소리가 그대로 이어졌다.

“가치관의 차이?”

흔하디흔한 답이었다.

“그리고 다른 새끼들은 꼭 나한테 다른 애 소개받으라고 그러거든. 새끼들이 친구가 실연을 당했으면 그냥 위로하고 끝내야지.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거라는데 상대도 없던 새끼들이 어디서 주워듣기만 해서.”

기가 찬다는 어조에 서진은 가만히 지환을 바라봤다. 제대하고 복학을 한 후에 사귀었다던데, 그러다 졸업식 얼마 전에 헤어졌으니 2년을 조금 못 넘긴 셈이었다.

“그런 이야기 하기에는 조금 빠르지 않아요?”

거의 2년을 사귄 사람과 헤어진 지 이제야 한 달이 조금 넘었는데 벌써 다른 사람을 만나라는 건 이르지 않나 싶어 묻자 지환이 되물었다.

“뭐가?”

“헤어진 지 두 달도 안 됐잖아요.”

그 말에 지환이 얼마간 가만히 서진을 바라봤다.

“그건, 아니지 않나?”

지환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내가 실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랑은 별개로, 지금 당장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딱히 빠른 건 아닐 텐데. 거의 두 달이잖아.”

지금껏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서 듣기에는 꽤나 이성적인 말이었는데, 애초에 서진은 본인은 물론이고 주위의 연애에 관심도 없어서 평균적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사람들이 새로운 연애를 하는지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럼 원래는 얼마 만에 다시 사귀었는데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대학 와서는 하늘이밖에 없었고 고등학교 때는.”

지환은 기억을 되새기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말했다.

“이삼일 정도?”

지금 뭘 들은 건가 싶어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이어 말했다.

“대략.”

제대로 들은 게 맞는 모양이다. 예수도 부활에 사흘은 걸렸는데. 연애에서 평균이라는 건 의미 없다는 거야 알고 있는데, 지환이 말한 그 기간은 평균에서 벗어나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근데 그게 그런 게 아니었어.”

그런 서진의 심정이 표정에서 드러났는지 지환이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지환이 말을 고르듯 고민하다가, 이내 서진을 바라봤다.

“너 남녀공학이니까 그런 거 알 거 아니야. 친구들끼리 돌려 사귀는 거.”

“모르는데요.”

단번에 말했지만, 지환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무튼 그냥 그런 거였어. 그냥 얘기하다가 자기가 나랑 헤어졌다고 하면 다른 애가 그럼 자기가 사귀겠다고 그러고.”

서진이라고 그런 경우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고 실제로 주위에서 일어나는 걸 몇 번 보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다들 이삼일 내에 새로운 사람을 사귀지는 않았다. 거기다 지환이 말하는 것처럼 꼭 순번제라도 있다는 듯이 굴었던 것도 아니고.

“그건 사귀는 게 아니지 않아요?”

그때마다 사귄 기간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환의 설명을 들어보면 사귄 기간들도 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귀는 건 사귀는 거지.”

“무슨 기준으로요?”

“그냥 사귀는 사이에 하는 것들 하면 사귀는 거니까.”

얼마 사귀지도 않았고 사귀게 된 계기는 고작 순번제 같은 의미였으며 다른 사람을 사귀는 것도 그렇게 빠른데 왜 그걸 당당히 연애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서진은 말했다.

“데이트 같은,”

사귀는 사이에 하는 것들이라고 하면 데이트 같은 걸 말하는 건지를 물으려다가, 서진은 이내 스스로 말을 끊어냈다.

“아니구나.”

문득 예상이 가는 게 있었다.

“성희롱이에요.”

이걸 왜 눈치챘을까. 본인도 중고등학교 때 놀았다고 했고 지혜도 자기 오빠가 고등학교 때 대단했다고 했는데, 그게 이런 의미도 되는 모양이었다. 그걸 가족까지 알게 될 정도면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 건지. 그게 아니라면 가족이라서 알게 된 걸 수도 있지만.

“뭐? 내가 너한테?”

“네.”

단호한 목소리에 지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뭘 했다고. 물어본 건 너잖아.”

서진이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자 지환은 그대로 말했다.

“그리고 그게 벌써 몇 년 전이냐. 지금 안 그러면 됐지.”

그 목소리에 서진은 문득 물었다.

“후회해요?”

순결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한다는 말이야 늘 있었다. 뒤처지는 것 같아서 준비가 안 된 채로 우선은 저질렀다가 나중에 후회했다는 사람도 많았고. 지환도 그럴까 싶어 물었는데 막상 지환은 그저 답했다.

“아니.”

서진도 남자이다 보니 남자들 사이에서 성 경험이 얼마나 떠받들어지듯 과시되는지를 모르지는 않았는데, 지환 역시 그런 부류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다른 놈들처럼 그걸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건 아닌데, 그냥 후회하지는 않아.”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떨어진 목소리가 꽤나 깔끔했다.

“그것도 다 있었던 일이잖아. 내가 한 일이고, 나만 한 일도 아니고. 같이한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후회한다고 하면 걔는 뭐가 돼.”

그런데 막상 지환에게서 나온 말은 서진의 예상과 달랐다. 과시할 것도 없다는 듯이, 오히려 그 부분은 고려할 요소도 아니라는 듯이 나온 말에 서진은 물었다.

“그 사람은 후회한다고 하면요?”

“그럼 내가 뭘 잘못했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뭐, 걔 인생인데 내가 뭐라고 할 건 없고.”

선선한 목소리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은 해도,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죄책감 느끼는 건 별로지. 그때는 분명 좋아했고 그렇게 철없게 군 것도 내가 한 짓인데. 후회한다고 없는 일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보통은 후회한다고 말했다. 과거의 자신과 선을 긋듯이.

“좋아하기는 했어요?”

문득 떨어진 서진의 물음에 지환이 서진을 바라봤다.

“진지했냐고 하면 그렇다고 하기는 힘든데, 좋아했냐고 물으면 좋아하기는 했지.”

“왜요? 그냥 그건 철없을 때 정신없이 그랬던 거고 진짜는 아니었다고 하는 게 더 편하잖아요.”

다른 사람이 다들 그렇듯 어린 시절의 일탈이며 지금은 후회한다고 말하는 게 힘들지도 않을 텐데.

“그게 더 쓰레기 같지 않나.”

살짝 인상을 찌푸린 지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하면 진짜가 어디 있어.”

확실히 지환은 서진에게 익숙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사귀다가 헤어지고 다시 다른 사람 만날 때마다 전에 만났던 걔는 사랑이 아니었어, 네가 진짜 내 사랑이야. 이러면 뭐가 더 나아?”

지환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해도 선을 긋지는 않았다. 오히려 과거든 실수든 뭐든 스스로 끌어안았다. 그러면서도 그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심지어 어떠한 합리화도 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그렇게 시간 바치고 노력했던 게 더 우스워지잖아. 그건 만났던 사람한테도 무례한 거고 자기한테도 무례한 거야.”

거리를 두고 지환을 알았을 때는, 무던한 사람이라 편해서 사람들이 지환을 찾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서 느끼기에는, 지환은 외부의 충격에는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사람이라 사람을 끌어당겼다. 지환은 자기만의 것이 확실한 사람이라, 자신만의 기준이 있고 자신만의 관점이 있다.

“그래도 형 여자친구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것 같아요.”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저만의 것이 있지는 않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은 저만의 것을 가지고 살아가겠지만,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의 것을 곁눈질하기 마련이다. 혹은 타인의 기준을 알아내어 인정을 받으려 하거나, 제 기준에 타인이 맞춰 주기를 바라거나.

“형 여자친구도 알았어요?”

지환은 무던하지만, 모두가 무던한 건 아니다.

“과거 연애사는 거의 말 안 했어.”

“기만이라고 느낄 수도 있잖아요.”

지환은 자신이 알리고 싶지 않은 부분을 다른 사람이 알아차릴까 봐 불안했던 적이 없을까. 속였다며 비난할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을까.

“물어봤으면 말했을 거야. 솔직히 내가 너한테는 이렇게 말하는데, 여친이 물어봤으면 무릎 꿇고 빌었겠지.”

그럼에도 지환의 목소리는 대수롭지 않게 이어졌다.

“그래도 뭘 말하고 말하지 않을지를 정하는 것도 나잖아.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그렇다고는 한들, 왜 네 그런 점을 미리 알려 주지 않았냐며 다들 비난했다. 굳이 큰 범위를 말하는 게 아니더라도, 아주 작고 사소한 점이라도 자신이 타인에게 씌운 이미지에 맞지 않으면 배신을 당했다는 듯이, 상대가 고의로 속였다는 듯이 배신감을 느끼기 마련인데.

“그래도 아마 걔도 대충 알기는 했을걸.”

지환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내가 내숭을 떨었다고는 해도 거짓말은 안 했거든. 물어보는 건 다 말했고 연애사도 자세히는 안 물어서 깊게 답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몇 명 사귀었냐거나 이런 건 말했으니까.”

“뭐라고 했었는데요?”

“고등학교 때는 많이 사귀었고 대학 와서는 처음이라고 했지.”

여상스럽기만 한 어투였다.

“얼마나 많았냐고는 안 물어봤어요?”

그 물음에 지환이 흘깃 서진을 바라봤다.

“돌려 사귄 것도 말했어.”

서진은 지환의 전 여자친구를 고작 한 번 본 게 끝이라, 그 전 여자친구가 그래서 지환에게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거의 2년을 사귀었으니 그런 점도 괜찮거나, 그런 점이 있기는 하지만 괜찮다고 생각했겠지. 설마하니 그런 점이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것도 모를 일이기는 했다.

“그래도, 뭐, 지난 일이니까.”

조금 머쓱하다는 듯이 떨어진 말에 서진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

“그런데 형 남고 나왔잖아요.”

지혜가 자기 오빠는 자신과 같은 고등학교가 아니라 남고를 다녔다고 했던 건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돌려 사귈 만큼 많은 사람을 도대체 어디서?

“그럼 여자 못 만나?”

정말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건 아닌데.”

떨떠름하게 끊어진 목소리에 지환은 제 잔에 직접 술을 따라 넣고는 그대로 마셨다. 신기하게도, 지환은 제멋대로 하면서도 그다지 강요하는 법은 없다. 지금만 해도 늘 서진을 술집에 데려오면서도 마시라는 말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그게 아니더라도, 예전의 지환은 서진과 만나면 공통 화제인 연우의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연우를 이름을 입에 담지도 않았다. 지환이 그렇게 세세하게 서진을 배려할 정도의 사람이라는 확신은 전혀 없었지만, 이유가 뭐든 지환이 서진의 앞에서 크게 거슬리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었다.

서진은 물끄러미 지환을 바라봤다. 빤히 바라보는데도 지환은 그저 왜 보냐는 듯이 한번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릴 뿐이었다. 신기한 사람이기는 했다. 원래 서진은 지환 같은 사람을 꽤나 싫어했는데도, 지금 멀쩡히 이야기도 하고 자주 만나는 걸 보면 서진도 신기했다.

지환은 늘 서진이 가지고 싶었던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서진이 되고 싶었던 종류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중심이 확실하고 그렇기에 타인에게도 무던할 수 있는, 자신만의 것이 확실한 사람.

하지만 서진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가진 사람을 오히려 미묘하게 피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이제 서진은 굳이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안 된다는 걸 아는데 굳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걸 가진 사람을 피해 봤자 피곤하기만 하지 뭐가 더 있을까. 서진은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닐 뿐이다. 인정하기까지 꽤나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이제는 안다. 서진은 그렇게 될 수도 없다.

* * *

과외를 마치고 밥까지 먹고 가라는 걸 결국 먹고 나오는데, 서진의 옆을 함께 걷던 지환이 문득 서진을 바라봤다.

“근데 너 다른 사람이랑 밥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아?”

“네?”

반사적으로 되물었다가, 서진의 표정이 얼핏 굳었다. 그렇기는 했다. 서진은 대부분의 사람이 모두 그렇듯 불편한 사람과 밥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서진은 대부분의 사람을 불편하게 여겼고.

“불편하면 안 먹어도 되는데.”

그저 앞을 보며 걷는 지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쟤네 부모님은 그런 거 가지고 기분 상하시지도 않고.”

서진은 늘 어른이 권하는 건 거절하지 않는 거라는 교육을 받았다. 지금에 와서는 강박을 버리겠다고 하면서도 그 잔재를 쉬이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었고.

“나 과외 처음 할 때 그때가 딱 전 여친 열심히 꼬시고 있을 때였거든. 그래서 밥 먹고 가라는 거 계속 거절했는데도 안 잘리고 지금도 잘 해 주시잖아. 그런 거 신경 안 쓰셔.”

계속 앞을 보며 걷던 지환이 그제야 흘깃 서진을 바라봤다.

“불편해?”

늘 그렇듯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면 될 텐데도, 지환의 그 곧은 시선에 서진은 잠깐 시선을 내렸다.

“조금이요.”

생각보다도 아무렇지 않게 나온 목소리였다.

“그래.”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은 그 답에 서진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티가, 났어요?”

요즘 조금 정신을 놓고 다니기는 하지만, 사실 일부러 조금이라도 더 느슨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건 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까지 티가 났나 싶었다.

“그건 아닌데, 그냥 그럴 것 같더라.”

이제 곧 지환이 차를 주차하는 곳이 나왔다. 헤어지고 나서부터 지환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않는지라, 이대로 지환은 제 차로, 서진은 지하철역으로 각자 걸어가게 되어 있다.

“저를 보고 있었어요?”

문득 내뱉어진 질문에 지환은 뭔가를 밟았는지 잠시 땅바닥을 바라봤다. 그 발밑에는 아스팔트에 눌어붙은 전단이 있었다.

“어.”

간지럽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든가, 어쨌거나 그런 종류의 말과 타박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지환에게서는 그런 기색이 없었다.

“보이잖아.”

지환은 잠시간 아주 짧게, 그만큼이나 대수롭지 않게 서진을 바라봤다.

“간다.”

그대로 제 갈 길을 가는 걸음이 참 여상스럽기만 했다.

* * *

“오늘은 얘랑 저랑 같이 어디 갈 곳 있어서요. 다음에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그 말과 함께 과외 학생의 부모님이 밥 먹고 가라는 걸 거절한 지환이 서진과 함께 집을 나섰다. 서진은 얼떨결에 그 집 밖으로 함께 걸음을 옮기면서도, 계속 지환을 바라봤다.

“뭐하냐?”

그건 서진이 물을 말이었다.

“뭐예요?”

서진과 지환에게 약속 같은 건 없다.

“불편하다며.”

그러면서도 지환은 그제야 서진의 기색을 살폈다.

“앞으로는 하지 마?”

우선은 저질러 놓고 이제야 자기가 뭘 잘못했나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냥 먹는 게 나았어?”

어른에게는 거절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게 서진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는 했고 굳이 함께 밥을 먹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먹지 않는 편이 더 편했고.

“그건 아닌데.”

그럼에도 그걸 왜 지환이 신경 쓰는지의 문제가 남았다.

“집으로 가지?”

그래서 서진이 대체 지환에게 뭘 더 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쯤 나온 지환의 목소리에 서진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말에 지환은 역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던 서진을 끌어와 제 차가 주차된 곳으로 이끌었다.

“태워 줄게.”

“왜요?”

올해 들어서는 지환도 늦은 시간에 학교에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우선, 헤어지기도 했고.

“물건 가져가라더라.”

그대로 차 문을 열어 그 안에 타는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고 있자 지환이 안 타고 뭐 하냐는 듯이 서진을 바라봤다.

“형 전 여자친구가요?”

결국 얌전히 조수석에 타서 벨트를 맸다가, 흘깃 지환을 바라보며 묻자 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냥 버리라고 했는데, 자기가 내 물건 버리는 거 좀 그렇다면서 가지고 가래.”

“오늘 술 마실 거예요?”

지환은 한 달을 꼬박 술을 마시다가, 이제는 조금 괜찮은 모양인지 술을 마시고 있지 않았는데, 설마 다시 시작일까.

“글쎄.”

나직한 목소리가 그대로 이어졌다.

“미련이 남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좀 생각할 게 많아서 복잡했던 거지.”

답지 않게 꽤 진지한 태도였다.

“가치관의 차이였다고 했잖아요.”

헤어진 모두가 그런 것처럼 지환의 이유도 그랬다.

“그랬는데, 왜 그 차이가 튀어나오게 됐을까 싶었던 거지. 그 가치관을 확인하게 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뭐였는데요?”

그 물음에 지환은 답을 생각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내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다지 섬세한 편은 아니니까, 어쩌면 내가 걔 신호를 다 무시하고 그 지경으로 끌고 갔을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꽤나 진지하게 나온 그 답에 서진은 가만히 지환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핏 무심해 보이는 표정은 실상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와 마주치지 않을 때의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똑같은 표정인데도, 눈을 마주치면 꼭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같이 사려 깊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실제로도 그럴까.

“고칠 기회가 있으면 그러고 싶어요?”

“미련 남은 건 아니라니까.”

지환은 그대로 짧게 웃으며 서진을 바라봤다.

“다시 시작하기에는 이미 글렀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그런 것 치고 서진이 보기에 지환은 지금껏 고민이 많아 보였다.

“싫어진 거예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수용까지 가는 데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개의 단계가 있다고 했다. 부정은 진작 끝난 것 같았는데, 서진은 지환이 도대체 어느 단계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분노를 건너뛰고 바로 우울로 넘어간 건지, 수용 뒤에 또 우울이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노와 타협은 이미 겪은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지금껏 이제야 분노로 넘어가는 중일지도 몰랐다.

“글쎄. 사실, 안 맞는 부분은 많았지. 그렇다고 그게 싫어질 이유는 아니었는데, 헤어지면 그게 싫어질 이유로 바뀌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나도 제대로 된 연애는 이번이 처음이라.”

그럼에도 상대에 대한 비난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 어조를 보면, 여전히 서진은 지환이 어느 정도의 단계를 지나는지 알 수 없었다. 지환이야 항상 서진이 알기에는 역부족인 사람이었으니 이번 역시 혼자만의 단계를 혼자만의 과정으로 지나가고 있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야, 저거 봐.”

문득 떨어진 지환의 목소리에 서진은 자연스럽게 그 말에 따라 창밖을 바라봤다.

“진짜 귀엽다.”

빨간불인 탓에 차가 잠시 멈춰 있었는데, 횡단보도로 하얀 솜뭉치 같은 강아지가 지나갔다. 지환은 그 모습에서 눈도 떼지 못하고 강아지가 횡단보도를 다 지난 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눈에서 보이지 않자 그제야 아쉽다는 듯이 서진을 바라봤다.

“너는 강아지 안 좋아해?”

꼭 어떻게 강아지를 안 좋아할 수 있냐는 듯한 어투였다. 생각해 보면 지환은 종종 서진과 함께 있다 강아지를 보면 늘 눈을 못 떼기는 했다.

“별생각 없어요.”

“키운 적 없어?”

“네.”

거기다 서진은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서진은 자신이 무언가를 책임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형은 키운 적 있어요?”

지환이 강아지를 키웠다면 분명 연우가 지혜네 집에 강아지가 있다고 얘기를 했을 텐데, 그런 적은 없었다.

“아니. 지혜한테 알레르기 있어.”

지환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결혼하면 키우려고.”

“결혼?”

어떻게 생각하면 다들 말하는 주제이기는 했는데, 서진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결혼하고 아내랑 상의한 다음 강아지도 같이 키우고 싶어. 경기도에라도 마당 딸린 집 사려면 진짜 몸 갈리게 일해야겠지만, 그래도 가족을 위해서 그 정도를 못 하겠나 싶은 거지. 근데 어차피 생각해 보면 나는 지방으로 내려갈 확률이 높기는 하니까, 집값이 좀 더 싸려나?”

서진은 종종 지환과 이야기를 하면 이런 위화감을 느꼈다. 서진은 미리 생각하고 빠르게 포기하는 모든 것들을 지환은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았다. 지환은 여상스럽게 미래를 준비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책임지는 걸 오래 고민해 본 적이 있어요?”

결국 떨어진 서진의 물음에 지환이 서진을 바라봤다.

“책임감 없다고 돌려 까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서진은 그저 궁금했다. 왜 지환은 서진이 아무리 노력해도 얻어낼 수 없는 걸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지.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을 무의미하게 여기기에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말 그대로 그 사람들에게는 무가치하니까.

사람은 원래 자신에게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할수록 조심스럽게, 어렵게 여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환은 자신이 말하는 모든 미래를 저 역시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가정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나만 하는 거 아니잖아.”

종종 지환은 결론 먼저 말하고 이유를 붙이고는 했는데, 공대에서는 깔끔하게 답만 쓰면 되기에 말하는 것도 그렇게 버릇이 붙었다고 했다. 하지만 서진이 보기에 그건 그냥 지환이 본인의 원래 없는 말재주를 변명하는 말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결혼한다고 하면 나 혼자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니잖아. 상대가 있어야 하는 거니까. 책임을 진다고 하면, 그 결혼은 같이 책임을 지는 거고. 그러니까 그 사람을 믿는 거야. 누가 될지는 나도 아직 모르지만, 내가 어련히 좋은 사람을 고르지 않았을까? 결혼까지 하고 싶다고 한 사람이면 좋은 사람이겠지. 그런 사람이랑은 괜찮을 거야.”

“사람을 믿는 거예요?”

사람이 어떻게 바뀔지는 어떻게 알고. 거기다 지환이 말했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는다.

“너도 사람이잖아. 나도 사람이고. 다들 사람인데.”

그럼에도 나온 지환의 목소리는 타인을 믿는다기보다는, 그 타인을 고를 자신을 믿는다는 듯이 단단했다.

“형은 본인을 믿어요?”

다른 사람을 믿는 것보다 더 힘든 게 자기 자신을 믿는 게 아닌가. 거기다 자신을 믿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정말 아무도 탓할 수 없다.

“믿으니까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 아닌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불안하다는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지환의 목소리가 그대로 이어졌다.

“너 내 핸드폰 배경화면 알아?”

갑작스러운 물음에 서진은 의아해하면서도, 우선은 답했다.

“모르죠.”

그 말에 지환이 제 핸드폰을 서진에게 건넸다. 이제 보니 잠금도 걸려 있지 않았다.

“이게 뭔데요?”

지환이 건네준 배경 화면을 보는데, 도저히 그게 뭔지 알아볼 수가 없어 묻자 지환이 말했다.

“키네신.”

“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라 되묻자 지환이 답했다.

“키네신이 단백질을 운반하는 걸 캡처했어.”

그래 봤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키네신이 미세소관을 타고 단백질을 운송하는 영상을 보는데, 너무 감동적인 거야. 내 몸에서 나를 위해 부지런하게 일하고 있잖아. 물론 면역세포도 의욕 향상에 좋기는 한데, 그냥 키네신이 더 귀여워서 걔를 배경으로 했어. 면역세포가 싫다는 뜻은 아니야.”

들어 보니 또 이과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지환이 면역세포를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그런 것까지 서진이 알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러시구나.”

어떻게 들어도 건성이었는데, 지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 혼자 벅차서 말했다.

“ATP를 가수분해시킬 때 생성되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건데 미세소관 양성 끝으로 이동을 해서 세포 중심에 있는 물질을 세포막 주변으로 옮기거든. 얘들이 부지런히 안 움직이고 활동을 못 해서 ATP를 분해 못 하면 알츠하이머가 유발될 수도 있는 거야.”

이제 서진은 답도 하지 않으며 대강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저번 언젠가에는 손난로 원리를 삼십 분간 설명하더니 이번에는 키네신인 모양이다. 서진은 그게 뭔지도 모르지만.

“이 애들이 지금 내 몸에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지. 그거 생각하면 얘들이 노력하는 만큼 열심히 살고 싶더라고. 이렇게 내 몸에서 셀 수도 없는 세포들이 내가 살아 있을 걸 믿으면서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나도 나를 믿어야지.”

어째 계기와 결과의 괴리가 꽤나 심했다. 그러니까, 본인에 대한 믿음이 자신을 이룬 세포에서 왔다는 거지. 지금껏 여러 이야기를 들어 봤지만 이런 이야기는 또 처음이라 어쩐지 맥이 빠졌다. 너무 생각 외라 그런지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런가 봐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을까.

* * *

“어, 한서진이네.”

문득 들린 목소리에 서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지환이 웃으며 서진에게 다가왔다.

“술 마셨죠.”

떨떠름하게 나온 서진의 목소리에도 지환은 성큼성큼 서진의 앞으로 다가와 다짜고짜 팔을 잡았다.

“너 여기서 뭐해.”

그건 서진이 할 말이었다.

“형은 여기서 뭐 하세요.”

서진과 지환이 있는 곳은 경영대 앞이었다. 당연히 서진에게는 익숙했고 지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곳이니 누군가 왜 여기 있냐고 물어야 한다면 그건 서진이 할 말이었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축제인데 여기서 뭐 해.”

“축제면 수업 안 해요? 수업 듣고 왔는데요.”

서진은 슬쩍 지환을 훑어봤다. 여전히 트레이닝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 쓴 모습이었다.

“그러는 형은 지금이 몇 시인데 취했어요?”

“안 취했는데.”

“술 마신 건 맞잖아요.”

서진이 보기에도 지환이 그다지 취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지환이 술 마신 걸 정말 자주 보게 된 서진은 지환이 술을 마셨을 때 모습을 알았다. 크게 티가 나지는 않지만, 우선은 웃음이 헤퍼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이 딱 그랬다.

“아니, 애들이 칵테일 계속 먹이잖아.”

“어디서요?”

봉지 칵테일은 흔한 메뉴라 파는 곳이 꽤 많았다. 그 물음에 지환은 서진을 끌고 걸음을 옮기며 답했다.

“화학 애들이.”

“자대에서 여기까지는 왜 왔어요?”

공대와 자연과학대학은 나름대로 가까운 편이지만, 자연과학대학에서 경영대까지는 꽤 멀었다.

“너 찾으러.”

“저를, 왜?”

사람이 묻는데도 지환은 답은 하지 않고 그저 서진을 잡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는데요?”

“기공 주점.”

“거기를 제가 왜 가요?”

그러면서도 끌려가다 보니 그 많은 인파에 문득 작년이 생각났다. 공대 건물에는 서진이 듣는 교양도 없어 갈 일이 없었지만, 친구가 오라고 해서 한 번 갔었다. 그게 작년의 축제였는데, 거기서 지환을 만났다. 정말 잠깐 대화를 나눴고 지환은 제 여자친구에게, 서진은 제 친구에게로 각각 떨어졌다.

그날과 지금은 뭐가 그렇게 다를까. 다른 게 있기는 할까. 차이점이 뭔지도 모르면서, 지금의 서진은 지환과 같이 걷고 있었다. 서로의 곁에서, 따로 만날 누군가도 없는 채로. 그걸 깨달으니 갑작스레 낯설었다. 언제 이렇게 됐지.

“애들이 계속 주점 오라는 거야. 일 안 할 거면 팔아 주기라도 하라고.”

기분이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취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지환의 걸음걸이는 늘 그렇듯 곧았다.

“근데 나 이제 친구 없거든. 너밖에 없어. 다 휴학하고 졸업하고.”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학교 안을 오가다 가끔 지환을 만나면 늘 지환의 옆에 있던 지환의 동기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휴학했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래 봤자 지환이 무슨 얘기만 하면 맨날 동규가 어쨌고 이건 동규가 못 하고 그런 말을 하는지라 인사도 안 해 본 서진에게도 그 이름이 익숙하기는 했지만.

“현정 누나는요?”

서진이 직접 이야기를 해 본 지환과 같은 과 사람이라고는 현정뿐이라 묻자 지환이 흘깃 서진을 바라봤다.

“걔도 휴학했어. 걔 지금 호주 외노자야. 자기 분명 홀리데이로 왔는데 워킹만 존나 한다면서.”

그러면서 슬그머니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는 현정이랑 연락 안 해?”

“안 하죠.”

그걸 왜 묻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서진이 현정을 알게 된 계기도 지환이기는 했다.

“왜?”

“왜냐니.”

서진은 어이가 없어 지환을 바라봤다. 현정이 서진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서진은 예나 지금이나 연애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었으니 선을 그었을 뿐이다.

“그냥 친구 하면 되잖아.”

서진과 현정 사이에 있던 애매한 기류를 알고는 있던 모양인지 나온 말에 서진이 답했다.

“저한테 관심 있던 사람이랑 친구를 어떻게 해요.”

둘 다 뻔히 기억하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는 한들 불편했다.

“야, 내 친구 중에 버스 타면 내릴 때까지 적어도 세 명이랑은 썸 타고 그중 제일 괜찮아 보이는 한 명이랑은 애한테 한자를 시킬지 말지 고민하는 애가 있거든. 근데 걔한테 이성 친구가 몇인지는 아냐.”

갑작스레 극단적인 이야기에 서진은 지환을 바라봤다.

“형도 그중 하나예요?”

“응.”

그 답이 선선하기도 했다.

“연락 안 한 지는 한참 되기는 했는데. 여친 사귀고 다른 여자애들은 안 만나서.”

“여자친구가 그러라고 했어요?”

“그건 아닌데, 좀 그런 분위기 있잖아. 누구 만났냐고 했는데 여자 이름 대기 뭔가 애매한, 가끔 그런 게 있지. 그리고 현정이가 걔 이성 친구 많은 남자는 안 좋아한다고 알려 줬었거든. 걔가 직접 나한테 말하지는 않았지만.”

본인한테 직접 말하지도 않은 걸 알아서 조심했다는 소리라 꽤나 의외였다.

“불편하지 않았어요?”

사람을 사귄다는 것에는 필수적으로 얼마나 사소한 범위든 상대에게 자신을 맞춰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겉으로 보기에 지환은 그런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싫어할 것 같은데.

“딱히 눈치를 준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그런 건데 뭐. 그거로 싸운 적도 없고.”

그래도 어쨌거나 여자친구 눈치를 보느라 친구와의 연락을 알아서 끊었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형 여자친구보다는 친구를 더 오래 알고 지냈을 거 아니에요.”

거기다 친구는 많아도 상관없다. 일반적으로는 서로를 구속하지도 않고. 지환은 그저 편하게 지내면 됐을 텐데, 왜 굳이 번거롭게 그랬을까.

“사람이 딱 그렇게 알고 지낸 시간으로 갈리지는 않잖아.”

지환은 늘 서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도 지환은 아무렇지 않게 이해하는 이야기들을.

“그리고 직접 안 만난 거지 단체로 연락은 몇 번 했어. 내가 갈려 나가고 있어서 동창회를 못 간 거지.”

“형 남고잖아요.”

분명 이성 친구를 이야기하는데 왜 갑자기 동창회 이야기가 나오나 싶어 묻자 지환이 말했다.

“나 고등학교 때 다녔던 학원 애들이랑도 따로 모이거든.”

“그럼 오래 알고 지낸 거 아니에요?”

“그렇다고 걔들이랑 다 친했겠냐.”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공대 건물이었다. 지환은 그중 기계공학 주점에 들어가며 말했다.

“그리고 원래 성별 다른 애들끼리는 애인 생겼다고 하면 알아서 조심하고 그래.”

지환은 그대로 주점을 쭉 둘러보더니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서빙 학생에게 말했다.

“여기는 군대냐?”

그 말에 서진도 한번 주위를 둘러봤는데, 확실히 거의 남자이기는 했다.

“형, 왔어?”

아마 지환의 과 후배일 학생이 지환을 테이블로 이끌자 지환은 서진을 이끌었다.

“어, 그래. 수고한다.”

“가연 누나도 오셨던데.”

그 말에 지환은 서진을 먼저 앉혀 놓고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걔 졸업했잖아.”

“박 교수님 보러 오셨다는데 잠깐 들르셨어.”

지환을 칭할 때와는 달리 그 공손한 어투에 지환이 후배를 빤히 바라봤다.

“근데 걔가 너 팼냐? 왜 이렇게 군기가 들었지.”

“어, 최지환 거지꼴이야!”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요리를 준비하던 곳에서 나온 사람이 지환을 향해 다가왔다.

“김가연, 너 아직 버릇 못 버렸어? 아직도 후배 패고 다녀?”

그 장난스러운 어투에 서진은 그 사람이 지금껏 얘기하던 가연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았다.

“동기 패고 다니던 버릇은 아직 남아 있는데.”

그러면서 지환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자 지환은 아프지도 않을 게 뻔하면서도 한번 살짝 밀려나 줬다.

“교수님 볼 겸 애들도 보러 왔는데 다 휴학했더라.”

“어. 그래서 나 혼자 다니잖아.”

그 말에 가연이 서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에 사람 놔 놓고 말 심하게 하네.”

멀쩡히 서진을 앞에 둬 놓고 왜 혼자 다닌다고 말하냐는 타박 뒤로 가연이 서진에게 물었다.

“얘 진짜 말 막 하지 않아요?”

그 말에 서진이 그저 웃자 지환이 서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는 경영. 스물하나. 진짜 어리지 않냐?”

“안녕하세요.”

여상스럽게 인사하자 지환이 이번에는 누가 봐도 성의 없이 가연을 눈짓했다.

“얘는 나보다 한 살 위인데 저번에 졸업했어.”

“저 지환 씨랑 동갑인데요.”

“빠른이라고 꼰대질하고 다닐 때는 언제고.”

심드렁한 척하면서도 장난기가 깔린 목소리에 가연이 지환의 등을 약하게 툭 쳤다.

“그래서 네가 나한테 한 번이라도 누나라고 한 적이 있어?”

가연은 웃으며 말하고는 그대로 서진을 바라봤다.

“아무튼 안녕하세요. 복학생이랑 놀아 주려면 고생 많으시겠어요.”

“아니에요. 형이 저 많이 챙겨 주세요.”

반사적으로 말하자 지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서진을 바라봤지만, 서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야, 근데 너 여성분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어? 애들 다 너는 분명 여자 손님 데려올 거라고 믿고 있던데.”

문득 나온 가연의 말에 지환이 눌러 쓴 제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가연을 바라봤다.

“내가 이만큼 잘생겼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는데?”

그 뻔뻔한 말에 가연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서진을 바라보고는 신기함을 그대로 내보였다.

“어떻게 얘가 이렇게 깔끔한 친구를 사귀었을까.”

가연은 그대로 다시 지환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지환 군은 친구 보고 배우는 것 없나? 꼴이 왜 그러나? 자다 나왔나? 나 때는 강의실 TPO가 말이야.”

서진은 기계공학과에 아는 교수라고는 전혀 없지만, 가연이 교수 중 하나를 흉내 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강 교수 안식년이다. 그리고 나는 얼굴이 TPO 충족이라 됐어.”

지환은 그대로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 흘깃거려.”

서진은 주점에 들어오면서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지환은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마도 새로운 얼굴이라.”

서진을 가리키는 말에 지환이 이번에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 새끼들이?”

“잘생긴 남자한테 제일 관심 많은 건 남자 아니냐. 어떤 의미든.”

남초과에서 온갖 역경을 다 겪어 남자에는 통찰한 것 같은 가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너희들 이럴 때 진짜 정 털리더라. 내가 친구 하나를 못 데려왔어. 너희가 구경할 거 알아서.”

가연은 그대로 조금 민망하다는 듯이 서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해요. 공대놈들이 타과생을 못 봐서 그런가 사회성이 없어서.”

“저는 괜찮아요.”

실제로도 서진이 시선을 받는 일이야 흔했고 익숙했기에 말했는데, 문득 지환이 제 모자를 벗어 서진에게 씌웠다. 그냥 씌우는 것도 아니고 거의 모자를 얼굴에 덮은 수준이라 얼떨결에 시야가 차단됐다. 그 사이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도 보지 마. 닳는다.”

모자챙을 살짝 들어 올리자 지환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가게?”

“어차피 이제 교수들 올 거잖아. 얼굴 비추러 온 거야.”

지환이 서진에게 일어나라는 듯이 눈짓하는 걸 보면서도 왜 저러나 싶어 멀뚱히 바라보자 지환이 가연을 향해 말했다.

“넌 연락해. 애들 불러서 따로 마시자.”

“임동규랑 혜린이?”

“어.”

대수롭지 않게 답한 지환이 이번에는 서진에게 직접 말했다.

“가자.”

그 말에 결국 일어나며 가연에게 인사를 하자 가연이 초연한 태도로 손을 흔들며 웃었다. 어째 지환은 친구들도 묘하게 범상치 않았다.

* * *

갑작스레 서진을 데려갈 때는 언제고 막상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서진을 데리고 빠져나온 지환은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서진은 도대체 뭔가 싶어 지환을 바라보다가, 모자를 벗어 지환에게 건넸다.

“형, 모자.”

그 말에 지환이 모자를 받더니 다시 서진에게 씌웠다.

“그냥 너 가져. 앞으로도 좀 가지고 다니고.”

그 말에 서진은 지환의 옆을 따라 걸으면서도 지환이 왜 이러는지를 생각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 이거, 미안해하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었다면 바로 알아차렸겠는데, 상대가 지환이라 알아차리는 게 조금 늦었다.

“형, 저한테 미안해요?”

“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답이 나올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지환의 목소리는 선선하기만 했다.

“왜요?”

“애들이 너 구경했잖아.”

그거야 그랬지만, 그게 지환이 미안해할 만한 이유는 아니었다. 멋대로 서진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건 한번 미안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면서. 서진은 지환의 기준을 알 수가 없었다.

“그게 왜요?”

거기다 서진이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지환도 같은 처지일 게 뻔하고.

“너 그런 거 안 좋아하니까.”

그러면서도, 아마 지환은 자신이 서진을 데려갔다는 것에 마음을 쓰는 모양인데, 그렇게 따지면 지환은 이미 서진을 데리고 이곳저곳 많이 다녔다. 확실히 기준이 종잡을 수 없었다.

“제가 그런 거 한두 번 당했을 것 같지는 않지 않아요?”

뭐 굳이 그런 거로 그러나 싶어 애써 가볍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지환은 드물게 진지한 태도로 서진을 바라봤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지. 익숙하다고 뭐가 나아져?”

그 말에 얼핏 서진의 표정이 굳었다. 익숙해져도 싫은 건 싫은 거라는 걸, 어쩌면 익숙하기에 더 싫다는 걸 지금껏 서진에게 직접 말해 주는 사람이 있었던가. 그냥 어떤 일이든 익숙해지면 괜찮아진다고 생각하는 게 더 편할 텐데.

“이제 집으로 가요? 아직 공연 안 했는데.”

문득 떨어진 서진의 물음에 지환이 번잡한 캠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볼 거야?”

“아니요.”

원래도 서진이 그런 것에 관심이 있던 적은 전혀 없다. 서진은 그대로 이어 물었다.

“그럼 다른 건 안 해요?”

“내가 4학년인데 뭘 하겠냐.”

심드렁한 목소리에 서진은 자신이 뭘 원해서 말하는지도 알지 못하며 말했다.

“저는 2학년인데.”

그 말에 지환이 그제야 서진을 바라봤다.

“그럼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없죠.”

서진은 이어 말했다.

“사람 많은 것도 싫어하고.”

그 말에 지환이 물끄러미 서진을 바라봤다.

“너 그냥 내가 너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

서진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몰랐는데, 서진은 지환이 말한 대로의 말을 하고 싶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형, 그런 거로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그 말에 지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알았다.”

한층 꺾인 그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그래도 미안하죠.”

“너 계속 지랄하면 안 미안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웃는 얼굴에 서진은 저도 모르게 그 표정을 따라 웃었다.

“제가 언제 그랬다고.”

서진의 말에 지환이 서진이 쓴 자신의 모자챙을 꾹 눌렀다.

“넌 내가 너한테 미안한 게 좋냐?”

“모르겠어요.”

서진은 그대로 다시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려 지환을 바라봤다. 어쩌면, 지환이 미안해하는 게 마음에 드는지도 몰랐다. 원래 좋아하는 것보다는 미안해하는 게 더 오래 남는 법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조금 다른 이유인 것 같았다. 지환은 자신이 미안해할 필요도 없는 거로 미안해했다. 그게 괜히 마음에 담겼다.

“형, 차 가지고 왔어요?”

“응.”

“운전 못 하잖아요.”

“지하철 타고 가야지.”

애초에 지환은 한 잔이라도 마시면 절대 운전대를 잡지 않았으니 이 역시 예상한 답이었다.

“재워드릴까요?”

“어?”

지환은 서진의 제안을 전혀 예상치 못한 모양인지 얼떨떨하게 서진을 바라봤다. 사실 서진은 제가 말했으니 놀랄 건 없으면서도, 저 자신이 조금쯤 낯설기는 했다. 지환은 지금껏 그렇게 서진을 불러내 술을 마셨으면서도 한번 서진에게 재워 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서진 역시 취한 지환이 근처 다른 친구의 자취방에 가거나, 집으로 가는 걸 그냥 내버려 뒀고.

“형도 저 죽으면 형 재수 없어질까 봐 찾아온 적 있잖아요.”

문득 그 말을 하자 지환이 옅게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지환의 목에 시선이 갔다. 저런 곳에 점이 있었구나. 목 옆선과 목덜미 사이의 점을 잠시 바라보고 있자 지환이 그대로 물었다.

“내가 길 가다 뒤지기라도 할 것 같다는 소리야?”

무슨 말을 또 저렇게 하나 싶어 서진도 조금 인상을 구겼다.

“그건 아닌데 취했잖아요.”

“그럼 지금까지 이것보다 더 취했을 때는 그냥 보낸 건 길 가다 뒤지기를 바라서였다는 거야?”

물론 서진이 지금껏 제집에서 누군가를 재운 적이 없기는 하지만, 술 마시고 자취하는 친구 집에서 자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서진은 그런 건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듯이 구는 걸 보니 짜증스러움이 올라왔다.

“형, 짜증 나게 왜 이래요.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선심 쓰는데.”

역시 지환은 서진이 감상에 젖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방은 다른 방에서 주무세요.”

“그럼 내가 게이 새끼도 아니고 멀쩡히 방 두 개 있는데 굳이 한방에서 자겠다고 할까.”

지환이 그 말과 함께 서진에게 다가와 다시 모자를 꾹 눌렀다.

“까탈스러운 새끼.”

시야가 가려져 짜증스럽게 모자를 올리자 지환이 웃으며 이번에는 서진에게 제대로 모자를 씌워 줬다.

“귀엽기는.”

“취했어요?”

저절로 나간 목소리에 지환은 고개를 저으며 걷기나 하라는 듯 걸음을 옮겼다. 늘 가던 길이었는데도, 괜히 낯선 기분이 들었다.

* * *

“형, 칫솔은 욕실 선반에 새것 있으니까 쓰세요.”

욕실로 들어가는 지환을 보며 말하자 지환이 언제 꺼낸 건지 제 손에 들린 칫솔을 보여 주며 말했다.

“나 칫솔 있어. 맨날 처박혀 살면 가지고 다니기 마련이지.”

지환은 그대로 칫솔질을 하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그 새끼들이랑 지내면, 너는 상상도 못 할 거다.”

아마 제 과 사람들을 말할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일순간 굳었다.

“그 꼴은 안 돼야지 싶더라고.”

서진이야 잘 모르지만, 다들 꽤나 심각한 모양이었다.

“나 잠옷만 빌려줘.”

그 말에 서진은 지환의 옷을 훑었다.

“그 옷 입고 자도 되겠는데요.”

“그건 그렇지.”

그러면서도 우선 지환이 입을 만한 옷을 찾고 오자 어느새 닫힌 욕실 문 사이로 물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그 문을 짧게 두드리고는 말했다.

“문 앞에 옷 놨어요.”

지환에게 재워 주겠다고 한 건 분명 서진이었는데도, 어쩐지 어색하기만 했다.

* * *

서진이 씻고 나왔는데, 지환은 거실 소파에 거의 드러눕듯이 앉아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왜 안 들어가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씻었으면 자러 들어가지 왜 이러고 있나 싶었는데, 지환은 오히려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서진을 바라봤다.

“벌써 잘 시간 아니지 않아?”

벌써 잘 시간은 아니지만, 거실은 소통의 공간이라는 말에 한 번도 공감해 본 적이 없는 서진에게 있어서는 딱히 할 것도 없는데 대화나 나누자고 서로의 방에 들어가는 대신 거실에 있는 건 꽤나 어색한 일이었다.

“그런데 너 키 몇이냐?”

그럼에도 지환은 남의 집 거실이 어색하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너 고3 때 처음 만났을 때는 나랑 비슷했던 것 같은데.”

“2년 지났잖아요.”

결국 그렇게 답하며 지환의 앞으로 다가가자 지환이 서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몇인데?”

“189였을걸요.”

곰곰이 기억을 되새겨 나온 서진의 말에 지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믿을 소리를 해. 내가 187인데.”

“고3 때 쟀을 때는 그랬어요.”

그 말에 지환이 유심히 서진을 살폈다.

“지금은 190 넘었겠네.”

“그럴 수도 있죠.”

애초에 어느 정도 크고 나서는 키에 별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 감흥 없이 떨어진 서진의 말에 지환이 서진을 잡아당겨 앉히며 말했다.

“너는 혼자 있으면 뭐 하고 놀아?”

“공부하고 과외 준비하고 책도 읽고 운동도 하고.”

그다지 고민이랄 것도 없는 서진의 답에 지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뭐 하고 노냐고.”

“그러면 시간 다 가던데요.”

시간 운용은 늘 중요하다. 어차피 시간이 있어도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데, 그 사이사이에 일정을 끼워 넣는 게 중요했다. 서진은 늘 그렇게 살았고.

“그건 그런데, 그럼 넌 놀지는 않아?”

서진이 말한 것들만 해도 시간은 채워졌기에 서진은 지환의 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형은 뭐 하고 노는데요?”

도리어 나온 서진의 물음에 지환이 툭 말했다.

“요즘에는 나도 하는 건 없지.”

그러고 보니 그렇기는 하다며 지환이 말을 이었다.

“여친도 없고 너 말고는 학교에 친구도 없고.”

지환은 의외로 애인에게 매우 많은 시간을 쏟는 사람으로, 지금 애인이 없으니 시간이 비는 모양이었다.

“여자친구는 이제 안 사귈 거예요?”

예수도 아니고 사흘이면 여자친구를 새로 사귄다는 사람이 이제 두 달인 데도 혼자였다.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사귀겠지. 나는 굳이 연애하고 싶어서 상대 찾고 그러지는 않아. 사실 전 여친 사귈 때도 굳이 사람 사귈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걔 만나고 나니까 연애를 해야겠다 싶던 거거든. 또 그런 사람 생기면 연애를 할 수는 있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가 그대로 이어졌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싱숭생숭하기도 하고.”

* * *

그대로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정말 잘 시간이 다가와 각자 방으로 들어갔는데, 서진이 침대에 누웠을 때쯤 문득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금 이 시각에 전화할 사람이 없을 텐데 싶어 액정을 보자, 그 위에 떠 있는 건 바로 옆방에 있을 지환의 이름이었다.

[야, 한서진.]

“네.”

다짜고짜 나온 그 목소리에 의아해하면서도 답하자 지환이 다급히 말했다.

[내 방 와 봐.]

“그거 형 방 아닌데요.”

[아무튼 와 봐.]

또 무슨 짓을 하나 싶으면서도, 목소리가 다급해 서진은 저절로 표정을 굳혔다. 상식적으로 이 집에서, 그것도 바로 옆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요?”

[좀 오라면 와 보라니까? 진짜 급해.]

“무슨 일인데요.”

결국 뻔히 속아 주며 지환이 있는 방문을 열자 얌전히 누운 지환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서진을 바라봤다.

“안 급해 보이는데.”

여유롭기만 한 모습에 말하자 지환이 문가를 눈짓했다.

“불 좀 끄고 가.”

미안하다는 기색이라도 좀 있으면 나을까 싶은데, 지환은 뻔뻔하기만 했다.

“이제 진짜 자야겠다.”

서진은 가만히 지환을 바라봤다.

“형 진짜 싫은 거 알아요?”

정연우도 안 하는 짓을 하고 있었다.

“어. 걔는 너 좋대.”

아무렇지 않게 나온 지환의 말에 서진은 결국 헛웃음과 함께 불을 꺼 줬다.

“내일 보자.”

순식간에 어두워진 시야 사이로 나온 목소리에 서진은 마찬가지로 답했다.

“주무세요.”

방문을 닫고 나온 서진은 제 방으로 가기 전, 잠시 지환이 안에 있을 방문을 가만히 바라봤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계속 이야기를 했고 방금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눴는데, 저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게, 그 안에 들인 게 자신이라는 게, 그 외의 모든 것들이 괜히 낯설었다.

* * *

[야야야방금 존잘생고딩 경영학과 어떻게 가야되냐고 물어봐서 알려줌]

[누나가데려다줄까 가까스로 참았다ㅋㅋㅋㅋ]

[근데 경영관 물어본거 맞겠지? 과방 말고]

여기 공지 방인데. 그 글자를 읽었다는 표시로 메시지 옆의 숫자는 빠르게 사라졌지만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진은 학년이 바뀌며 관성적으로 관리하던 인간관계에서 모두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공지 방에는 남아 있어야 했으니 남아 있었는데, 아마 메시지를 보낸 선배는 친구들끼리 있는 곳에 보내야 할 메시지를 잘못 보낸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방 착각했습니다]

3분간 얼마나 생각이 많았을까. 서진은 핸드폰 액정을 끄고 책을 챙겨 자리를 옮기려다가, 문득 불쾌한 기시감을 받았다. 잘생긴 고등학생이 한둘도 아닌데 그 고등학생이 경영학과 가는 길을 물어볼 수도 있기는 하겠지. 경영관도 아니고 과방도 아니고 경영학과를 갈 방법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물어본 게 이상했지만, 고등학생은 그런 걸 모르니 그랬을 수도 있다.

그래 봤자 기분이 이상한 게 끝이니 서진은 우선 집으로 가려 걸음을 옮겼다. 별것도 아닌데 찝찝한 기분으로 정문에 도달한 서진은, 문득 싸늘히 표정을 굳혔다.

왜 정연우가 여기 있지. 그것도 지환과 함께.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나갔다. 서진은 곧바로 지환의 어깨를 잡아 제게 돌렸다.

“뭐 하는 거예요.”

그제야 서진을 발견한 모양인지 지환과 연우의 시선이 한 번에 서진에게로 향했다.

“뭐해요.”

우발적이기는 했지만, 논리적인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니지만, 지환이 원한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진은 제 이야기를 지환에게 했다. 그리고 더는 제 집안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지환은 그저 듣고 끝내면 될 이야기였지만, 그 이후로는 더 잦게 서진을 만나면서도 서진의 집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연우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꼭 서진을 신경 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도 연우와 연락을 하고 있었을 수는 있다. 동생의 남자친구니까, 제 동생에 관한 일로라도 연락을 할 수는 있었겠지. 그거야 이미 알고 있었고 짐작은 했는데, 이렇게 대놓고 서진이 보는 앞에서.

“형.”

서진을 향해 내뱉어진 연우의 목소리에도 서진은 지환만을 바라봤다. 꼭 신경 쓰는 것처럼 굴어 놓고는. 그렇게 서진이 밀어내고 벽을 세워도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으면서.

“야, 내가 너 모르게 하려고 했는데.”

“모르게?”

저절로 비꼬는 어투가 나가자 지환이 다급히 덧붙였다.

“나중에 말하려고 했지.”

그 말에 서진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연우의 목소리가 나왔다.

“지환이 형은 나랑 볼일 있어.”

어째 그다지 바르지는 않은 그 목소리에 서진은 순간 기가 차서 연우를 바라봤다. 방금까지는 서진을 보며 반가워하는 기색이던데, 그새 그 눈매에 반항기를 매달고 있었다.

“형, 우리 얘기하고 있었잖아요.”

지환의 팔을 잡으며 하는 목소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먼저 얘기하고 있던 건 우리였는데 형이 왜 끼어?”

“정연우.”

짜증스레 그 이름을 내뱉자 연우가 반사적으로 흠칫하면서도, 지환을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형, 가요.”

지환을 이끌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는데, 연우가 지환을 잡으며 가지 못하게 막았다.

“형은 나랑 있을 거야.”

그 말에 서진이 인상을 찌푸리자 지환이 각각 제 어깨와 팔을 잡은 서진과 연우의 손을 떼어냈다.

“진짜 이딴 말 하는 거 내 입이 더러워지는 것 같아서 싫은데, 지금 이거 꼭 게이 치정극 같으니까 나는 좀 빼 줄래. 진짜 존나 싫다.”

그 말과 함께 진저리를 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지환의 모습에 서진은 그제야 주위에서 자신들을 아닌 척 흘깃거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네, 기사님. 지금 정문인데, 아, 네, 보여요. 5641 맞죠?”

때마침 전화를 받은 지환이 연우를 잡더니 질질 끌고 걸음을 옮겼다. 그 꼴이 짜증스러워 서진이 지환의 손목을 잡자 지환이 전화를 끊더니 제 손목을 잡은 서진의 손을 잡았다. 순간 당황스러워 손을 떼어 냈는데, 지환은 아무렇지 않게 택시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연우를 집어넣었다.

“형!”

“나중에 얘기해. 연락도 안 하고 오면 다 이 꼴 되는 거야.”

지환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연우의 입을 제 손으로 눌러 막으며 택시 기사를 향해 말했다.

“찍었던 대로 가 주시면 되고 얘가 중간에 내린다고 해도 꼭 집까지 데려가 주세요. 동생인데 야자 뺀 거라 부모님께 가야 해서요.”

그 말에 택시 기사가 흘깃 연우를 바라봤다.

“학생, 착해 보이는데 왜 그랬어. 학생 때는 공부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아무튼 알았어요. 꼭 집까지 데려다줄게.”

“네. 감사합니다.”

“아니, 형!”

지환은 연우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연우를 나오지 못하게 더 집어넣고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바로 택시가 출발하자 지환은 제 손목을 한번 돌리고는 어깨를 주물렀다.

“너희 힘만 무식하게 주는 건 존나 닮았네.”

그 말과 함께 지환이 서진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가, 자신이 서진의 손을 잡았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거의 내팽개치듯 서진의 손을 놨다.

“뭐야, 씨발.”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가만히 지환을 보자 지환이 이번에는 서진의 손목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말 안 해?”

“제가 할 말인데요.”

서진은 표정을 굳히고 말을 이었다.

“뭐예요?”

싸늘하게 나간 목소리에 지환이 답했다.

“걔 너 찾아온 거야. 내가 아니라. 아니, 근데 내가 뭘 했다고 둘 다 나한테만 지랄이야.”

갑자기 억울해진 모양인지 지환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야, 아니다. 일단 내가 말할 테니까 잠깐만 닥쳐 봐.”

애초에 서진이 답할 틈도 주지 않았으면서, 지환은 그대로 말했다.

“걔 경대 간다고 했는데 자대에 있더라. 경대 가려다가 길을 잃었다고 자대에 오는 게 도대체 있을 수는 있는 일인가 싶은데, 언덕을 오를 때부터 이거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니야? 하다못해 사대였으면 길 잃었구나 하지 어떻게 목적지가 경대인데 자대에서 발견되냐.”

서진은 지환을 바라봤다. 열심히 변명하는 지환을 보자니 문득 손끝이 저렸다. 서진은 왜, 화가 났던 걸까. 연우 때문은 아니다. 연우를 봐서 화가 났다기보다는, 연우가 지환과 함께 있는 게 싫었다.

“어쨌든 자대에 볼일 있어서 갔다가 걔 발견했는데 걔가 너 만나러 갈 거라는 거야. 걔가 너 연락 안 된다고 나한테 알아봐 달라고 했던 건 너한테 말했었잖아.”

그리고 지환은 왜 이렇게 열심히 변명할까. 꼭 서진이 기분 상하기라도 했을까 봐, 그게 신경 쓰인다는 듯이.

“네.”

겨우 나온 서진의 답에 지환이 흘깃 서진을 바라봤다.

“그런데 네가 안 좋아하니까 나도 걔한테 네 소식 잘 모른다고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자기 딴에는 직접 찾아온 거지. 집은 모르니까 그냥 학교 오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고.”

지환은 변명하는 대신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내도 괜찮았다. 따져 보자면 서진이 무례했던 게 맞다. 연우가 서진을 찾아온 것이든, 처음 서진이 생각했듯이 지환을 찾아온 것이든, 지환의 인간관계는 서진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서진이 다짜고짜 지환을 붙들고 화를 냈으니, 서진의 잘못이 맞았다. 지환은 기분이 나빠야 할 일이 마땅했고.

“네가 만나면 안 좋아할 것 같아서 그냥 내가 돌려보내려고 한 거야. 어쨌든 너 찾아온 건 맞으니까 나중에 너한테 말하려고 했고.”

그럼에도 지환은 서진이 무례했던 일을 따지기보다는, 도리어 서진의 기분이 나쁠까 봐 변명하듯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런데 새끼들이 나를 가운데에 놓고 쪽팔리게 만들잖아. 이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나?”

그 말과 함께 서진의 손목을 잡고 있던 지환의 손이 떨어졌다. 아무렇지 않게 잡았듯이, 그만큼이나 대수롭지 않게 떨어졌는데도 괜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했어요?”

이제는 나름대로 차분하게 나온 서진의 목소리에 지환이 서진을 바라봤다.

“뭘?”

“그냥 저한테 보냈어도 됐잖아요. 정연우 저 보러 온 거라고 하면.”

“네가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이미 한번 한 이야기를 하며 지환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서진은 문득 지환의 소매를 옅게 잡아당겼다.

“오늘은.”

“응?”

서진은 조금쯤 머뭇거리며 물었다.

“오늘은 안 데려다줘요?”

원래 지환은 서진과 만나는 날이면 바로 학교 앞인 서진의 집까지 데려다주고는 했다. 서진이 항상 어차피 가까우니 괜찮다고 해도 늘 데려다주겠다고 말을 했는데.

아닌 척해도 지환이 화가 난 건 아닐까.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그렇게 굴었는데 당연히 싫었겠지. 지환은 엮일 필요도 없는 일에 엮였고 귀찮은 거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

“데려다주면 나 너네 집에서 놀고 가도 되냐?”

그 말에 서진은 조금쯤 떨리는 시선으로 지환을 바라봤다.

“네.”

서진의 답에 지환이 잠시간 서진을 바라보다가, 짧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서진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밀쳤다.

“그럼 그러지 뭐.”

* * *

“한 대만 피우고 갈게.”

주차하고 골목으로 들어가며 나온 말에 서진이 지환을 따라가자 지환은 살짝 눈썹을 들어 올리면서도, 굳이 서진을 말리지는 않았다.

“피우고 싶은 거 아니지?”

“아니에요.”

“그래. 피우지 마. 너 피우면 나 때문인가 싶을 것 같으니까.”

지환은 그대로 담배를 입에 물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담배를 입에 문 탓에 살짝 발음이 뭉개진 목소리가 그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너 나한테 미안하지.”

지환은 불을 붙이느라 입가에 손을 대 바람을 가린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서진을 바라보지도 않고 나온 그 말에 서진은 지환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네. 형한테 화낼 일도 아니었고 형 인간관계는 제가 뭐라고 하면 안 되는 건데.”

그 말에 지환이 서진의 반대편으로 연기를 내뱉었다.

“나한테 좆같이 구는 건 좀 고치는 게 좋기는 한데, 뭐 네가 화낸 거 가지고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

“제가 언제 좆같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군 적은 없는 것 같아 반박하려고 했는데, 지환이 바로 제 어깨를 부여잡았다.

“어깨 멍들 것 같다, 새끼야.”

“죄송해요.”

바로 나온 서진의 말에 지환이 손가락으로 담배를 살짝 까딱거리며 말했다.

“예전에, 새내기 때였나? 그때 동기랑 싸운 적이 있거든. 왜 싸웠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술 처마시고 싸웠을 거야, 아마. 진짜 주먹질했었거든.”

서진이 지환에게 미안한 상황은 맞지만,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뭔가 싶어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바로 덧붙였다.

“지금은 안 그래. 그리고 걔가 먼저 쳤어. 나는 선빵은 안 친다.”

본인이 생각해도 머쓱하기는 했던지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동기면 겹치는 인간관계가 꽤 있잖아. 걔 지금은 반수해서 어디 의대 들어갔다고는 하는데.”

지환은 그대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휴대용 재떨이를 꺼내 재를 털어 넣었다.

“어쨌든 그러면 솔직히 나도 알지. 나랑 걔랑 싸웠다고 다른 애들까지 걔랑 연 끊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건 다 알고 걔들이 나랑 싸운 애랑 논다고 화가 나고 그런 것도 아니기는 한데, 내 앞에서 은근히 걔 편들거나 화해시키려고 하면 그게 그렇게 빡치더라고.”

지환은 그제야 서진을 바라봤다.

“이성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는데, 이해하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니 근데 그건 좀 아니지 싶은 거야.”

심드렁한 목소리가 그대로 이어졌다.

“사람 다 그래. 그러니까 그거 가지고 미안할 필요 없어.”

지환은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말이 없다가, 이내 조금쯤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래도 내 어깨는 미안해해라.”

조금쯤 끌어 올려진 그 입꼬리를 가만히 보고 있자, 지환이 문득 물었다.

“생일 언제야?”

“네?”

“생일 언제냐고.”

그러고 보니 알고 지낸 지 2년인데 아직도 생일을 몰랐다. 서진은 그제야 지환이 어쩌다 보니 진지해져 버린 분위기를 풀어내려 말을 돌렸다는 걸 깨닫고 답했다.

“10월 1일이요.”

“와.”

지환의 의도에 맞도록 대수롭지 않게 답했는데도, 막상 지환의 반응은 꽤나 대수로웠다.

“너 진짜 좋은 날에 태어났구나?”

감탄이 섞인 목소리에 서진은 물었다.

“왜요? 그날 무슨 날이에요?”

“대칭이잖아.”

“네?”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해 되묻자 지환이 말했다.

“1001 완벽한 대칭이잖아.”

“그게 뭐 어쨌다고.”

상상 밖의 이유라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리자 지환이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냐는 듯이, 서진을 설득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말했다.

“생각을 해 봐. 1년 365일 중에 그렇게 완벽하게 대칭인 날은 고작 6번밖에 없어. 6/365 하면.”

이제 지환은 핸드폰까지 꺼내서 계산하고 있었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새삼스러운 감상이 들었다.

“대충 0.016이니까 너는 온 세상 사람 중 1.6%의 확률을 뚫은 날에 태어난 거야.”

그래서 도대체 그게 뭐 어쨌다고 지환이 저렇게 집중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는데, 서진은 장단을 맞춰 주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진짜 특별한 거니까 자부심을 가져.”

그리고 이어 나온 그 목소리에, 서진은 물었다.

“고작 그런 게 특별해요?”

“그럼 뭐가 특별해야 하는데?”

도리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지환의 말에 서진은 조금 고민하다가, 이내 말했다.

“그건, 제가 얻은 게 아니잖아요.”

생각해 보면 서진이 직접 얻은 건 아무것도 없다. 얼굴이야 늘 이야기를 듣지만, 서진이 뭘 잘해서 얻은 건 아니다. 공부를 꽤 잘하기는 하지만, 이것도 서진 자체의 노력이라기보다는 집안 분위기가 큰 몫을 했다. 그 외의 모든 것도 그렇다. 다른 사람이 서진을 보며 칭찬하는 모든 것들은, 서진이 얻어낸 게 아니다.

“그럼 특별하면 안 돼?”

그럼에도 지환의 목소리에는 의아함만이 가득했다.

“그건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기는 했다. 지환은 굳이 겉모습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다. 지환을 잘 모를 때도 이미 느꼈으며 꽤나 자주 붙어 다니는 요즘에는 더 잘 깨달은 거라고는, 모든 사람이 지환에게는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 대수롭지 않음과 무던함이, 그 단단하고 무게 있는 중심이, 회피하지 않는 그 안정감이, 명확히 이름 지을 수는 없더라도 지환을 얼마간 알고 지낸다면 다들 느끼는 어떤 특별함이 지환에게는 있다.

그러니 지환은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어떤지는 잘 알지 못할 수도 있겠지.

“그럼 그냥 즐겨. 나는 생일 9월인데 9월은 대칭인 날 아예 없잖아.”

여전히 무던한 그 목소리에 서진은 겨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9월이 생일이에요?”

“어. 17일. 거기다 아무래도 9월생들은 자기 생일을 느낄 때마다 조금 미묘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고.”

“왜요?”

“생물학적으로.”

“네?”

“수정일을 생각하면 대강 크리스마스 베이비인 거지.”

“와.”

이번에는 또 왜 생물학적 이유가 나오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유독 9월에 생일인 사람이 많았던 것 같기도 했다. 저절로 탄식 같은 감탄을 뱉은 서진은 말을 이었다.

“정말 알고 싶지 않은 정보 감사해요.”

그 떨떠름한 목소리에 지환이 웃음을 터뜨렸다가, 이내 꽁초를 재떨이에 넣으며 말했다.

“특별한 건 특별한 거야. 이유 붙일 필요 없어.”

손가락에 냄새가 밴 모양인지 잠깐 손 냄새를 맡아본 지환이 이번에는 가방을 뒤적거려 손 소독제를 찾아내 손을 소독했다. 늘 느꼈던 거지만, 흡연자치고는 꽤나 준비성이 좋았다. 여자친구 때문에 버릇이 들었다고 하던데.

“앞으로 다른 사람이 생일 물어보면 자랑하고 다녀.”

지환은 냄새를 빼려는 듯 그대로 머리카락을 두어 번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였으면 사람 만날 때마다 생일 물어보고 다닐걸.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제 생일은 1001이에요. 완벽한 대칭인 거 아시죠? 이러면서.”

정말 가볍기만 한 목소리였는데, 서진은 어쩐지 지환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다른 사람한테 별거 아니면 또 어때. 너한테만 특별하면 됐지.”

분명 지환에게는 별것 아닌 말일 텐데, 서진은 절대 할 수 없는 생각과 말이라서.

“네 거잖아.”

지환과 함께 있으면 종종,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네가 특별하게 여겨.”

특별한 사람이 특별하게 여겨 준다면, 실상 특별하지 않더라도 뭐라도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 * *

지환은 원래부터도 어떤 의미로든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이기는 했다. 원래부터도 그런 사람이기는 했지만, 왜인지 요즘 따라 이전보다는 조금 더, 크게 설명할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조금 더 시선이 갔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편해졌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불편해졌을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고.

“아, 뭔데 왜 전화하지?”

서진이 과제를 할 동안 옆에서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지환에게서 문득 나온 목소리에 서진은 지환을 바라봤다. 지환은 떨떠름함을 그대로 내비치며 전화를 받았다.

“네, 교수님.”

착하고 단정한 목소리에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는데, 지환은 얌전히 교수와 이야기를 하며 서진에게 웃지 말라는 듯 서진의 머리를 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환은 예의 바른 목소리와는 정반대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내 왔다.

“네, 네. 알겠습니다. 시정해서 최대한 빨리 보내겠습니다.”

술을 마시지도 않는 서진의 집 냉장고 한 칸에는 언제부터인가 맥주가 가득했다. 누가 마시는지는 뻔했고. 전화를 끊은 지환이 바로 맥주를 쭉 들이켜더니, 이내 다른 곳에 전화를 걸었다.

“야 이 씨발놈아, 박 교수 나한테 전화 왔잖아. 나 졸업 못 하면 네가 등록금 낼 거냐?”

상대가 받자마자 욕을 쏟아낸 지환은 그제야 잠깐 서진을 보더니 이번에는 전보다 조금 약하게 서진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시킨 적도 없는데, 언제부터인가 새삼스럽게도 지환은 욕을 할 때면 밖으로 나가서 서진에게 들리지 않도록 하고 왔다. 그래 봤자 서진의 앞에서도 욕을 하면서.

“뭐 잘못된 거 있어요?”

꽤나 빠르게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지환에게 묻자 지환이 남은 맥주를 마시며 답했다.

“큰 건 아니고 다 했는데 누락된 게 있어서. 그거만 추가하면 되니까 별거 할 건 없어.”

그러면서 게임을 끄고 서진은 봐도 모르는 프로그램을 확인하는 지환의 모습에 서진은 물었다.

“학교로 가요?”

“아니. 데이터 나한테 있어서 그냥 추가하고 교수한테 메일 보내면 돼.”

그래 봤자 저번에도 저래 놓고 거의 세 시간을 앓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큰일은 아니었는지, 한 시간쯤 지나자 지환이 노트북을 덮었다. 마침 서진의 과제도 그럭저럭 끝난지라 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환이 서진을 따라 일어서며 서진의 뒤를 쫓아왔다.

“왜요?”

“너는 술 안 마셔?”

지환은 그 물음과 함께 이미 두 캔을 마셔 놓고 또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형은 건강하게 살 생각은 없나 봐요.”

그나마 운동을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그 외로는 생활 습관 자체가 엉망이었다.

“맥주가 무슨 술이야, 음료수지.”

답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형 운전은 어떻게 하려고요.”

지혜가 고3이 되면서는 지혜의 귀가가 늦어져 지환이 학교로 데리러 갔다. 우선 술을 마셨다가 이제야 그게 생각난 모양인지 맥주 캔을 따던 지환의 손이 애매하게 굳었다.

“야, 진작 말해 주지.”

“말할 시간은 줬어요?”

아니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는 모양인지 지환이 시간을 확인했다.

“애매하네.”

“뭐가요?”

“넉넉하게 5시간쯤 잡으면, 아니다 안 되겠다.”

술이 깨는 시간을 계산하고 있던 모양인지 나온 말에 서진 역시 말했다.

“그냥 안전하게 운전대 잡을 생각 하지 마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지혜는 오늘만 엄마한테 데려와 달라고 해야지.”

그럼 오늘은 자고 가려나 싶어 지환을 바라보자, 이제 데리러 갈 사람도 없겠다 그냥 술을 마시려는지 지환이 캔 맥주를 따며 말했다.

“그런데 그래서 너는 술 왜 안 마셔? 종교?”

이제야 묻기에는 꽤나 늦은 질문이기는 했지만, 서진은 별다를 것 없이 답했다.

“그건 아닌데, 자제력을 잃을 수도 있잖아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서진 역시 술을 안 마시더라도 완벽히 이성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더한 위험 부담은 지양하고 있었다.

“한두 잔 가지고는 잘 안 그러지 않나. 그래도 싫으면 싫은 거지만.”

“그럼 형은 술이 왜 좋아요?”

“그냥.”

지환은 그것 외에 또 무슨 답이 필요하냐는 듯이 서진을 바라봤다.

“그냥 좋은데.”

“무슨 일 있을 때마다 마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원래 술은 좋은 일 있으면 좋아서, 나쁜 일 있으면 나빠서 마시는 거야.”

확실히 지환은 그래 보이기는 했다. 지환은 과제를 하면 과제를 하니 마셔야 한다고 했고 수업이 일찍 끝나면 기념이니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럼 힘들어서 마셨던 거예요? 그때는.”

문득 지환이 거의 한 달 내내 술을 마셨던 때를 말하자 지환이 물끄러미 서진을 바라봤다.

“그때는 생각이 많아서.”

“어떤 생각이요?”

“내가 내 생각보다도 더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지.”

꽤나 의외의 말이 나왔다.

“너는 좀 신중하잖아. 나는 아니고.”

서진은 신중하다기보다는, 우유부단하며 결단력이 없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지환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부딪혀 보고 아니라는 걸 알 때가 있는데, 가끔은 부딪히기 전에 알았어야 할 때도 있잖아. 나도 나름대로 사람도 가려 사귄다고 하고 뭐 하기 전에 생각도 하려고는 하는데.”

그 말에 서진은 문득 물었다.

“형이 사람을 가려 사귀어요?”

“응.”

“별로 안 그래 보여요.”

“뭐? 엄청 가리는데.”

당당하기만 한 목소리에 서진은 물었다.

“그런데 그런 말 하면 사람들이 안 좋아하지 않아요?”

서진도 사람을 꽤나 가리기는 했다. 서진의 부모님은 서진의 인간관계까지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았다. 미래를 위한 거라고는 하는데, 어쨌든 그 습관은 지금껏 이어졌다. 사실 요즘 들어서는 가리기는커녕 그냥 사람을 잘 사귀지 않기는 하지만.

“왜? 사람은 원래 가려 사귀는 게 맞아. 안 가렸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 친구도 잘 사귀고 나쁜 애들 멀리하고. 그냥 다 받아 줬다가 나중에 보증 서고 인생 망하는 거야.”

“경험이에요?”

꽤나 대단했었다는 지환의 고등학생 시절을 생각하며 묻자 지환이 가볍게 웃었다.

“친구 탓만 할 수는 없지.”

그 말 뒤로 지환이 그대로 서진을 향해 물었다.

“그럼 너는 친구는 그렇다 치고 여자친구는 계속 안 사귈 거야? 그냥 관심 가는 애도 없어?”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은 꽤 많은데, 서진은 늘 별생각이 없었다. 우선 좋아하는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는 늘 불안정했기에 다른 사람을 사귈 여유가 없었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도 없고.

“형은요?”

서진은 이어 덧붙였다.

“원래 없던 사람은 계속 없는 거고 있는 사람은 계속 있던데.”

주위를 둘러보면 그렇기도 했다. 서진은 애초에 애인을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애인이 있으면 뭐가 좋은지, 왜 사귀는지도 딱히 아는 게 없었다.

거기다 주위를 둘러보면 서진처럼 지금껏 애인이 없던 사람들은 다들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계속 없는 채로 다녔다. 그에 반해 한 번이라도 사귀고 나면 그 느낌을 잊지 못하는지, 곧잘 사귀었고.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서진은 늘 그렇듯 없는 것이었고 지환은 원래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셈이다.

“그런 경향성이 있는 거야, 맞는 말인데.”

지환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말했다.

“주 5일이 너무 편해서 그런가 그냥 지금이 좋기도 하고.”

지환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 과에서는 노력하지 않으면 여자를 만날 수가 없어.”

그거야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지환이 여자친구를 사귈 수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남고에서도 여자친구를 잘 사귀고 다녔는데.

“그럼 전 여자친구분은 어떻게 만났는데요?”

혹시 아직 그리워하고 있을까 싶어 말하고 나서도 지환의 눈치를 살폈는데, 막상 지환은 평탄히 말했다.

“나 복학하고 처음으로 학교 갔었는데, 그때 걔가 동아리 홍보하고 있더라고. 무슨 설문조사 하라고 해서 하는데 그러면서 좀 얘기를 했었지. 별 얘기도 아니었어. 그냥 무슨 과냐, 몇 학년이냐, 그런 말밖에 안 했는데.”

덤덤히 말하던 지환의 얼굴에 천천히 옅은 웃음이 담겼다.

“그냥, 계속 보고 싶더라고.”

지금도, 그럴까? 그 웃음에 서진이 생각한 거라고는 그랬다.

“생각해 보면 나 원래 그런 설문조사도 안 하거든. 처음부터도 좀 끌렸을 수는 있지. 과는 알고 있어서 그냥 그 앞에서 죽치고 있을까 했는데 마침 학생 식당에서 강현정이랑 걔랑 같이 있는 거 보여서 소개해 달라고 했었고.”

서진이 저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까. 서진이 물은 질문인데도, 막상 답할 말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럼 이번에도 그렇게 만날 수 있잖아요.”

그나마 무난하다고 생각해서 한 말인데도, 왜인지 그 말을 내뱉는 게 싫었다.

“너도 그렇게 만날 수 있잖아.”

“저는, 안 그럴 것 같아요.”

“왜?”

“지금까지 안 그랬으니까.”

할 말이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나도 그때가 스물셋이었어. 진지한 연애는 그게 처음이었고. 너는 이제야 겨우 스물하나잖아. 나보다 가능성 큰데.”

스물셋의 지환이라면 서진도 알고 있다. 서진과 지환이 처음 만난 게 그쯤이었으니. 정말 딱 그쯤이었다. 서진과 처음 만났던 그즈음에 지환은 연애를 시작했겠지.

“왜 연애를 하고 싶었어요?”

진지한 연애는 처음이라고 했다. 기회가 없던 것도 아닐 텐데 그랬다는 건 그전까지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는 건데, 왜 그때는 그럴 마음이 생겼을까. 뭐가 달라서.

“같이 있고 싶었으니까. 계속 보고 싶고 이유 없이 연락하고 싶고.”

지환은 이제 미련이 없다고 했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그래서 지금처럼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오히려 반대라서?

“친구는 안 돼요? 친구도 그거 다 할 수 있잖아요.”

친구여도 충분히 같이 있을 수 있었고 이유 없이 연락할 수 있다. 거기다 애인보다는 훨씬 더 편할 게 분명하고 행동의 제약도 없을 텐데, 왜 하필이면 애인이어야 했을까. 단순히 성별의 문제 때문에?

“종류가 좀 다르지.”

지환은 그대로 서진을 바라봤다. 피하지도 못할 정도로 곧은 시선이었는데, 어쩌면 서진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고, 사실은 모든 사람이 받은 시선일지도 몰랐다. 지환은 원래 사람을 이런 식으로 보니까.

“너도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알 거야.”

그걸 서진이, 지금 알고 있는 걸까. 알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뭐, 생기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겠지만. 사실 연애 안 해도 다들 잘 살기는 하잖아.”

그리고 지환에게는 곧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겠지. 그건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야, 나 오늘 재워 줄래?”

물으면서도 지환은 당연히 서진이 자신을 재워 줄 거라는 듯이 말했다. 사실 지환이 한번 서진의 집에서 잔 이후로 지환이 재워 달라고 했을 때 서진이 거절한 적은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지만.

“소주 사 와도 돼?”

이제 잘 곳도 있겠다, 운전할 일도 없겠다, 술을 더 마시려는지 주섬주섬 지갑을 찾아 몸을 더듬는 지환의 모습에 서진은 문득 말했다.

“목에 점 있어요.”

지환의 목 옆선과 목덜미 사이쯤에는 점 하나가 있었는데, 술을 마신 탓에 평소보다 조금쯤 붉어진 그 피부 위의 점이 유독 눈에 박혔다.

“아, 여긴가?”

그 말과 함께 점이 있는 조금 앞에 손을 대는 모습에 서진은 물었다.

“다른 사람도 말했어요?”

본인이 보기에는 힘든 부분인데도 지환은 이미 점의 위치를 대강이나마 알고 있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았다.

“아예 안 보이는 곳은 아니잖아.”

그 말과 함께 지환이 웃었다.

“은근히 드러나는 포인트지.”

장난스러운 말투와 함께 지환이 서진을 향해 얼굴을 돌리며 눈을 감았다.

“나 여기도 점 있어.”

웃으며 제 눈꺼풀을 가리키는 모습에 서진은 그저 지환이 가리킨 대로 그 눈꺼풀을 바라봤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발견하지 못할, 속눈썹 조금 위쪽에 점이 있었다.

“너한테만 보여 줄게.”

거짓말. 서진에게만 보여 주는 것도 아니면서. 그쯤이야 당연히 알았다. 그럼에도, 서진은 그 눈가로 손을 뻗었다. 점이 있는 눈꺼풀을 살짝 건드리고 그 밑의 속눈썹을 훑자 손끝에 닿은 속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지환이 눈을 떴다.

직접 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곧은 시선이 바로 서진에게 향했다. 서진은 가만히 그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이내 시선을 내려 그 입술쯤을 바라봤다가, 그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왜 지환은 서진을 신경 쓰는 걸까. 관심 없으면 무시하는 걸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면서. 왜 곁에 있어 주는 걸까. 시간이 남아 돌지도 않는 걸 아는데. 왜 아무렇지도 않게 서진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걸까. 심지어 서진도 자신이 어떤 걸 원하는지 몰랐는데 지환은 그걸 어떻게 알고. 왜 너한테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까. 거짓말이라는 걸 뻔히 아는데.

그래 봤자 서진은 지금 지환과 닿아 있으면서도 심장이 뛴다기보다는, 속이 싸늘한 이유를 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는 건 모두 서진의 탓일 뿐이다. 지환의 행동만 봤을 때는 오해할 구석이 없다. 결국 당신이 먼저 그랬으니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방어기제일 뿐이다.

지환은 원래부터도 서진에게 얼마간의 신경을 쓰기는 했다. 동생 남자친구의 사촌 형이니까. 거기다 서진이 구구절절 지환에게 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걸 듣고 지환이 서진을 걱정했다는 것도 안다. 곁에 있어 주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럴 만한 여건이니까. 지환이 서진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준다는 건 선후 관계가 잘못됐을 지도 모른다. 지환의 말이니 뭐든 다 좋았겠지. 뭐든 다 의미 부여를 했을 게 뻔하다. 지환이 너한테만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사실 다들 그랬다. 별 신경 쓰지 않고 하는 말이니까. 단어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며 말하는 사람은 없다. 지환 역시 그럴 뿐이다.

좋아한다고 느꼈던 적은 없다. 그런 적은 없는데, 시선이 갔다. 언제부터였을까. 왜 눈치채지 못했지. 그랬다면 이런 상황이 오기 전에 먼저 끊어냈을 텐데. 그런데 정말, 눈치채지 못한 게 맞을까. 아니, 이미 눈치챘을 텐데. 그래, 눈치챘다.

지환을 서진의 공간에 들어오도록 하고 다른 사람과 있는 걸 신경 쓰고 지환이 무언가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되도록 자신이 선택받았으면 했다. 그리고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

사람은 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걸까. 왜 행동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걸까. 바라는 대로 해석할 뿐이라는 걸, 완벽히 틀린 해석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확인할 자신도 없이, 확인받고 싶지 않아서 감춰 두다가, 이런 식으로.

“어,”  

짧게 닿았던 입술을 떼어내고 지환을 바라보자 그 입술 사이로 멍하면서도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조차도 깜빡이지 못하고 흔들리는 시선을 바라볼 수가 없어 서진은 눈을 감으며 다시 입술을 맞댔다.

좋아한다고 느꼈던 적은 정말, 한 번도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서진의 이야기를 한 적은 있지만, 화낼 일도 아닌 걸 알면서도 화낸 적이 있지만, 혹시라도 지환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눈치를 살핀 적이 있지만, 너무도 예상이 가는 지환의 미래가 싫다고 생각했지만, 모두에게 다 그러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에게 한 행동에는 더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그 작은 말 한마디를 소중히 여긴 적이 있지만,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다른 사람보다는 나를 더 우선시하는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어수선했던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을 좋아한다고 느꼈던 건 아니다.

지환은 자신만의 것이 확실한 사람이라서, 서진이 바랐지만 이제는 포기했던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사람이라서, 곁에 있으면 늘 헛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서진도 늘 자기만의 것이 가지고 싶었다. 지환을 보고 있자면, 서진도 저만의 것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봤자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지환은 아니라는 걸 안다.

가슴이 뛰었고 속이 아팠다. 설레지 않았다. 그보다는 손끝부터 저렸다. 충동은 제거해야 한다. 움직이지 않으면 시간이 지난 후 그런 충동을 뒀다는 것조차도 잊게 된다. 그러니까, 이번 역시 그랬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이러면 안 되는데. 그 생각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건 아니었다. 그것쯤은 확실히 안다.

이제, 나를 싫어하겠구나. 당연하게도. 끌려 다니는 건 그렇게도 우유부단했으면서 왜 망치는 것만 이렇게 주도적인 걸까.

그럼에도, 서진은 지환의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며 그 몸을 끌어당겼다. 어차피 서진이 하는 것 중에 제대로 된 건 아무것도 없다. 늘 그렇듯이.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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