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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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귀신이 고칼로리죠!]
지환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귀신이 고칼로리죠.”
대부분 발음하면 원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감이 오지 않았다. 지환은 가만히 그 글자를 바라보다가, 짧은 탄식과 함께 답을 보냈다.
[귀신이 곡할 노릇]
[고칼로리 말고 곡할 노릇이라고]
너 진짜 이럴 거냐. 얼굴 잘생긴 다른 애를 찾아봐라. 네가 생각해도 쟤는 아니지 않냐. 내가 공부 잘하는 애를 데려오라고 했냐, 그냥 알아듣게 문자 하는 애를 데려오는 게 그렇게 힘드냐. 내가 데, 대, 심문, 신문 이런 것까지 구별하는 애를 데리고 오라고 했냐. 아무리 그래도 육구시타리아는 좀 아니지 않냐. 되, 돼 틀리는 것까지도 봐줄 수 있다.
아무리 설득해도 지혜는 말을 들어 먹지 않았다. 그 고집과 함께 이제 벌써 지혜와 연우가 사귄 지도 1년이 되었는데, 어차피 사귈 거라면 헛짓거리하지 못하게 집에 와서 만나라는 지환의 말과 더불어진 감시로 이제는 지환과 연우도 꽤나 자주 보는 사이였다. 아무래도 거의 매일 보다 보니 익숙해지지 않기가 더 힘들었다.
[그게 그거죠ㅋㅋ]
아니야. 그게 그게 아니야. 그간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놀랍게도 연우의 취미는 독서다. 도대체 어쩌다 저 꼴이 난 거지?
[마침법좀 잘모쓴다고 죽는것도 아니고ㅋㅋㅋ]
차라리 마춤뻡이라고 해 줘. 그냥 다른 사람이랑 비슷하게 틀려 줘. 마침법이 도대체 뭔데. 지환은 당장 지혜에게 다시 왜 연우와 헤어지지 않냐고 설득하려는 충동을 애써 내리눌렀다. 그래도 연우가 이거 빼고는 다 괜찮았다.
착하기는 정말 착했고 일 년이 지났는데 지혜와는 아직도 손만 잡았다. 일 년이나 지났으니 뽀뽀까지는 봐주려고 했는데, 여전히 손잡는 거로도 수줍어하는 꼴을 보면 지혜에게 매일 연우와 헤어지라고 하는 게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그래 봤자 연락 한 번에 다시 없어지는 미안함이지만.
[죽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너를 죽여버리고 싶어 할 수 있어]
그 누군가가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환은 그대로 이어 메시지를 보냈다.
[너 데이트할 때 지혜한테 돈 못쓰게 한다며]
[너도 학생인데 그럴 필요 없어]
[지혜한테 내 카드 있으니까 그거 써]
어차피 고등학생들이 써 봤자 얼마나 쓰겠는가. 물론, 다른 고등학생이라면 고민을 해 봤겠지만, 지혜와 연우는 정말 얌전히 놀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설마하니 지환의 카드를 가지고 엄한 곳에서 놀지는 않을 테고. 거기다 내역도 알 수 있으니 안심도 됐다.
[아ㅋㅋ형ㅋㅋ]
[지혜랑 어떠케 덮집회의를해요ㅋㅋ]
덮집회의? 신조어인가? 하지만 연우는 의외로 신조어를 쓰지 않았다. 그럼 덮집에서 회의를 한다는 말인가? 덮밥집? 거기서 회의를 왜 하지?
“덮집회의, 덮집, 덮집회의, 덮집회, 더치페, 더치페이.”
몇 번 발음해 본 끝에 원 단어를 알아낸 지환이 착잡함에 그 어떠한 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이어 연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우리가 뭐 빛싼거 먹는 것두 아니고!]
그래. 너희가 비싼 걸 먹지는 않지. 이걸 고쳐 줘야 하나, 고쳐 줘 봤자 내일이면 원상복구일 텐데.
[근데 형은 수간신청 했어요? 우리 형도 그거 한다던데ㅋㅋ]
수간? 그딴 걸 내가 왜 해. 그런데 연우의 형이라고 한다면, 서진일 텐데.
[수강신청]
[간 떨어질 뻔 했잖아]
[형 어디 아파요?]
글자를 뚫고 느껴지는 걱정스러움에 지환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애가 착하기는 했다.
[아니야 안 아파.]
[형 그러면 이번에 저희집 오실래요?]
[부모님이 보고싶대요]
[지혜랑 같이]
지환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절로 떠올랐다. 연우가, 부모님이 없어서 서진과 같이 지낸다고 하지 않았나?
[너 부모님 없다며]
직설적으로 묻자 바로 연우의 답이 떠올랐다.
[그때는 부모님 돌아가셨죠ㅋㅋ]
돌아가셨, 그때는 돌아가셨는데 지금은 또, 이게 무슨 말이지. 지환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너 부모님 없어서 사촌이랑 지낸다며.”
[네. 그래서 이제 한국 왔어요.]
“뭐?”
[미국 사시거든요. 이번에도 아마 한 달 정도만 계시다가 다시 돌아가실걸요?]
없다는 게 그냥 지금 집에 없다는 소리였어? 그걸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데? 처음에 연우에게 부모님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괜히 상처를 줄까 봐 자세한 건 지금껏 묻지 않았는데, 그 오해가 벌써 일 년이었다.
“아니, 야, 너는 뭐 그렇게 사람을 오해하게, 아니다, 됐다.”
더 말할 기운도 없어 대충 말을 얼버무리자 연우의 밝기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그러면 이번 주말에 시간 돼요?]
“너희 부모님을 내가 만나서 뭐 해.”
[지혜 부모님은 저희 만나는 거 모르잖아요!]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설마,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매일 지환의 집에 왔으면서? 그게 벌써 일 년인데?
[왜요? 뭐 재밌는 일 있어요?]
헛웃음이 터진 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호기심이 드러나는 목소리에 지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지혜랑 얘기해 보고 알려 줄게.”
그래. 착하니 됐다.
* * *
지환은 잠깐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문득 횡단보도에 서 있는 서진을 발견했다.
“한서진. 집 가는 중이야?”
창문을 내리고 묻자 서진이 지환을 확인하고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지환은 흘깃 서진을 훑어봤다. 처음 봤을 때도 지환과 키가 비슷했는데, 일 년이 지난 지금은 더 컸다. 앞으로 더 크려나.
“어, 그래. 안녕. 태워다 줄게. 타.”
반대편 문을 열어 주며 말하자 서진이 잠시간 지환의 차를 바라봤다.
“괜찮아요.”
“걸려 봤자 얼마나 걸린다고.”
지환은 연우가 지혜를 만나러 집에 왔다가 시간이 늦으면 종종, 사실 꽤나 잦게 데려다주느라 연우가 같이 사는 서진의 집을 안다. 어차피 서진의 집과 지환의 집은 멀지도 않았다.
“감사합니다.”
조수석에 탄 서진의 모습에 지환이 툭 하고 제 벨트를 건드리자 서진이 안전벨트를 맸다.
“나 연우 부모님 만난 건 알아?”
서진이 안전벨트를 맨 걸 확인하며 다시 차를 출발시키자 옆에서 단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네.”
연우를 데려다주느라 서진과도 꽤나 잦게 마주하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지환과 서진 사이에 어떤 친분이 있다고 하기는 애매했다. 애초에 대부분이 잠깐 마주친 게 고작이기도 했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너 왜 연우한테 부모님 없다고 했어?”
연우에게 왜 정정하지 않았냐고 물어봤자 눈치도 없는 게 뭘 알 리가 없었다. 거기다 따지자면 처음 연우에게 부모님이 없다고 한 건 서진이었고.
“거짓말은 아닌 거 아는데, 내가 어떻게 오해할지 알았잖아. 연우야 눈치 없어서 몰랐다고 해도 너는 아니고.”
“부모님께 알리면 일이 커지잖아요. 어차피 연우가 일 쳐 봤자 뭐 큰일도 아닐 텐데.”
그 목소리는 연우를 믿는다기보다는, 도리어 얼마간의 무시가 담겨 있었다. 지환은 흘깃 서진을 바라봤다. 여전히 어린 티가 나기는 하지만, 처음 봤을 때보다는 꽤나 그 기색이 옅어져 있었다.
연우와 서진은 얼핏 나이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잘생겼다는 것 빼고는 그다지 닮은 게 없어 보였는데, 자세히 살피면 전체적인 인상이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입 다물고 무표정하게 있으면 싸가지 없어 보인다는 게 그럴까.
“너 연우 싫어해?”
처음 만났을 때부터도 어렴풋이 하고 있던 짐작을 말하자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
“형은요?”
“동생 남자친구를 좋아하기는 쉽지가 않지.”
이제 와서는 연우의 맞춤법에 종종 웃기도 하지만, 애는 착하다는 걸 알기는 하지만, 연우가 지혜에게 뭐 하나라도 잘못하면 변명의 여지 없이 확실히 끊어낼 사이였다. 동생의 남자친구로 안 게 아니라면 나름대로 아끼는 동생이 됐을지도 모르겠지만.
지환은 짧게 서진을 바라봤다. 물은 건 지환이었는데, 졸지에 지환이 답을 했다. 지환이라고 해서 굳이 서진에게 답을 얻어내고 싶은 건 아니었던지라, 지환은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대수롭지 않게 말한 지환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너 우리 학교라며.”
“네.”
서진과 연우의 사이가 어떠하든 지환이 알 필요는 없었다. 만일 서진이 지혜의 남자친구였고 이렇게 묘하게 겉과 속이 다른 기색을 보인다면 진상을 알아내려 했겠지만, 실제 지혜의 남자친구는 겉과 속이 아주 동일한 연우였다. 서진과 연우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혜한테 영향만 가지 않는다면 상관도 없고.
“종종 보겠네. 통학?”
“자취해요.”
서진과 지환의 집이 있는 동네와 대학의 거리는 조금 애매했다. 자취하기에는 가깝고 통학은 괜히 싫고. 그래도 서진은 자취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도 자취했었는데.”
지환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학교도 좋은 곳에 들어갔겠다, 성인도 됐겠다, 자유를 누리듯 자취를 시작했었다. 그러다 군대 들어가면서 자취방을 빼고 지금은 통학 중이었고.
“들었어요.”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당연하게도, 지환은 서진과 대화랄 걸 나눈 적이 거의 없으니.
“연우한테?”
그럼에도 어디서 흘러간 정보인지는 쉽게 추측할 수 있어 묻자 서진이 답했다.
“네. 연우는 지혜한테 들었겠죠.”
“별 얘기를 다 하네.”
“별 얘기를 다 했죠.”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이기는 했는데, 지환은 찔리는 과거가 꽤 있었다. 지혜가 알고 있는 것이야 그중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고.
“또 무슨 얘기 했는데?”
그 물음에 서진은 그저 웃었다. 말해 줄 기색은 아니었다. 서진이 이제 스물이니 지환과는 네 살 차이가 나는데, 네 살이나 어린애에게 과거의 치부 한구석이 알려졌다니 조금 한탄스러우면서도,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기는 했다. 어차피 사람이야 다 정신 놓고 다니는 시절이 있다.
“수강 신청은 잘했어?”
말을 돌리며 묻자 서진이 답했다.
“네. 형은 이제 3학년이죠?”
“응. 갈려 나갈 운명이지.”
지환은 공대생 하면 체크 남방이라는 편견에 그다지 공감하는 편이 아니었다. 사실 그러면서도 주위에 체크가 많기는 했는데, 지환은 그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하지만 이제는 좀 들어가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언젠가 과방에 갔다가 지환을 제외한 모두가 체크 무늬를 입고 있던 걸 보고 왜 공대생은 체크를 좋아하는지를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의견은 여러 가지였지만, 구겨져도 티가 나지 않으며 뭘 흘려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답도 있었다.
이제 지환은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거나, 옷 갈아입을 시간만 있는 생활을 시작할 게 뻔하기에 슬슬 체크 동호회에 들어가야 하지 않나 싶기까지 했다.
“자취 안 하세요?”
그 생각도 안 한 건 아니다. 애초에 지환은 자취하다가 다시 본가로 들어온 셈이었으니.
“아무래도 당분간은 힘들겠지.”
지혜에게 남자친구가 없었으면 당연히 자취했겠는데, 지금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연우랑 지혜 때문에요?”
확실히 서진은 눈치가 빠르기는 했다. 사실 지금껏 지환의 행동을 보면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힘들기는 하겠지만. 물론, 연우는 눈치채지 못했다.
“말 나온 김에 좀 물어보자. 연우가 성교육은 제대로 배웠어? 학교에서 배우는 거 말고.”
알아봤자 적어도 졸업 전까지는 그걸 쓸 날이 오지는 않겠지만, 알면서도 안 쓰는 것과 아예 모르는 건 차원이 달랐다.
“알아서 하겠죠.”
그 여상스러운 답에 지환은 기가 찼다. 남동생을 둔 서진과 여동생을 둔 지환에게 사안의 중대성이 이렇게나 달랐다. 아니, 그래도 자기 남동생이 좆을 잘못 놀려서 남의 귀한 여동생 인생이 좆 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어야지.
“지금 네 동생은 남자라고 그러냐?”
어이가 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지만, 서진은 여전히 평온히 말했다.
“이제 열여덟이잖아요.”
“그러니까 문제지. 아는 건 없고 하고 싶은 건 많을 나이잖아.”
사실 서진은 이해 못 할 만도 했다. 서진이 이제 스물이라고는 해도, 아직 대학생보다는 고등학생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니 졸업식을 이미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혜는 생각할 줄 알잖아요.”
꼭 연우는 생각하는 법도 모른다는 목소리였다.
“그럼 설마 이 세상 모든 사고가 생각할 줄 몰라서 발생할까.”
생각지 못하게 발생하기에 사고가 사고였다.
“헤어지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라지는 않으시나 봐요.”
문득 나온 서진의 말에 지환은 잠시간 서진을 바라봤다. 헤어지기를 바라냐고 묻는다면, 헤어질 거면 지금 헤어졌으면 했다. 고3 때 헤어졌다가는 공부하기가 힘들 테니까. 학창 시절에 하는 연애의 문제를 연애하느라 정신 팔려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실상은 헤어진 후가 문제였다.
둘 다 공부를 열심히 할 경우에는 도서관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오히려 서로 모르는 걸 도와주며 공부에 방해되지 않게 조심히 잘 사귀는 경우도 꽤 있다. 하지만 헤어지고 나면 문제였다. 실연의 아픔에 몇 주, 길게는 몇 달간 앓고 나면 그동안 진도는 어떻게 따라갈 것이며 그 기간에 시험이라도 있었으면?
그렇기에 고3 때 헤어지는 게 최악이었는데, 그러니 지환은 연우와 지혜가 헤어진다면 지금 당장, 혹은 수능이 끝난 이후에 헤어졌으면 했다. 고3 때는 이례적으로 둘이 절대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겠고.
물론, 지환의 눈에 연우가 탐탁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지혜가 그렇게 좋다니 어쩔 수도 없었다. 애초에 지혜의 취향을 아는 이상 연우만 한 얼굴 구해 오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걸 모르지도 않았다.
거기다 연우의 하자는 나름대로 무해한 편이다. 적어도 얼굴값 하느라 헛짓거리하지는 않으니. 그 나이대 애 중 얼굴이 그만큼 생긴 애들은 보통 인성에 하자가 있기 마련이었다. 아닌 척 자기 얼굴 잘난 걸 잘 알고 있을 게 뻔했고. 연우는 적어도 그 얼굴 가지고 사람 휘두르는 일은 없으니 이 정도면 됐다고 지환은 저도 모르게 세뇌당한 것처럼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너한테 말할 일은 아니지. 말해야 하면 연우나 지혜한테 제일 처음 말할 거고.”
사실 지환은 지금도 되도록 빨리 지혜가 연우와 헤어졌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라고 있기는 했지만, 그 의견을 피력하는 건 당사자에게 직접 해야 했다. 지환은 정면의 신호를 확인하며 이어 물었다.
“너는 내가 편해?”
맥락 없는 질문에 서진이 지환을 보는 게 느껴졌다.
“지혜는 네 성격 잘 모르더라고. 애초에 지혜가 널 알 만큼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나보다도 더 모르는 것 같고.
이제 코너 하나만 돌면 서진의 집이었다.
“연우는 대충 아는 것 같기는 한데, 워낙에 눈치가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는 것 같고.”
지환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도 성격 좀 숨겨.”
이윽고 서진의 집 앞에 차를 멈추자 서진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걔들은 계속 볼 사이였고 형은 아니었잖아요.”
그럴 성의도 없었다는 말을 꽤나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숨기고 있는 거예요.”
서진이 평탄하게 말을 이었다.
“별것도 아닌데 꼰대처럼 군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역시 인성에 하자가 있네. 첫 만남부터 대강 인지하고 있던 사실을 또다시 확인받았다. 역시 지혜의 남자친구로 서진보다는 그나마 연우가 나은 것 같았다. 연우는 적어도 지혜한테 휘둘렸으면 휘둘렸지 휘두르지는 않으니.
“거기다 앞으로는 같은 대학 다녀야 하니까.”
서진이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바람직하고 예의 바른 인사에 지환은 대수롭지 않게 마주 웃었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
* * *
서진이 주로 있는 경영대와 지환이 지박령이 된 공대는 거의 끝과 끝이었는데도, 지환과 서진은 어쩌다 보니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었다.
“학교 가지?”
서진과 지환은 둘 다 사회봉사 과목을 듣고 있었는데, 우연히도 봉사 기관이 겹쳤다. 학교 근처 봉사 기관이 다 거기서 거기이기는 했지만, 지환은 그중에서도 사람 마주칠 일이 적은 봉사 기관을 택했는데 서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먼저 타 있어.”
어차피 지환은 이제 요일 구분 없이 공대 건물에 살고 있기도 했고 여자친구도 자취하는지라 봉사가 끝나고 나면 늘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서진을 데려다주고는 했다.
“커피 드실래요?”
그 물음에 지환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가는 길이라니까.”
확실히 서진은 조건 없는 호의를 받으면 불편해하는 성격인지, 늘 저랬다. 심지어 몇 번은 선물 같은 걸 가져오기도 했고. 실제로도 가는 길이라 사람 하나 더 태운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도 그랬다.
“오늘은 사람 하나 더 태울 거야.”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차에 올라서며 말하자 서진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마 지나지 않아 후배를 태우기로 한 장소에 도착하자 후배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뒷좌석에 탔다.
“기다렸어?”
가볍게 묻자 현정이 고개를 저으며 살짝 조수석을 바라봤다.
“아니. 그리고 태워다 준다는데 좀 기다려도 되지. 지하철보다는 덜 기다렸을걸.”
현정의 시선에 지환이 다시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얘 학교 근처 사는데 사회봉사 같이해서 얘도 데려다주려고.”
“이거 스쿨버스야?”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에 조수석에 있던 서진이 짧게 웃자 지환도 따라 웃었다.
“그런데, 저기.”
서진을 부르는 현정의 목소리에 서진이 살짝 고개를 틀어 현정을 바라봤다.
“네?”
“혹시 서역문 듣지 않아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그거 듣거든요. 강의실에서 본 것 같았어요.”
서역문이라면 아마 서양 역사와 문화일 텐데, 그거 대형 강의 아닌가. 지환은 룸미러로 흘깃 서진과 현정을 확인했다. 그 사람 많은 강의실에서 어떻게 사람을 확인했을까 싶기는 하면서도, 확실히 서진이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얼굴이기는 했다.
“그럼 혹시 첫 주 리포트 화요일인지 수요일인지 기억나세요? 제가 그거 독강인데 제대로 못 들어서요.”
현정의 말에 서진이 핸드폰을 확인하며 말했다.
“수요일이에요. 교수님이 온라인 게시판에 올려 주신다고 했으니까 확인할 수 있으실 거예요.”
지환은 웃음을 참으며 애써 정면을 바라봤다. 설마 현정이 정말 그걸 몰랐을까. 분명히 교수가 수업 중에 자세한 사항은 게시판에 올리겠다고 했을 텐데. 거기다 현정은 3학년이었고 서진은 새내기다.
어떤 식으로든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지환은 현정이 서진을 만날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만들어 주기 위해 말했다.
“동규 저번 학기에 그거 들었을걸. 족보 달라고 해.”
“아, 진짜? 그럼 받아 와야겠다.”
현정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받으면 드릴게요. 이름이 어떻게 돼요?”
“한서진이에요. 이름 물어봐도 될까요?”
이름 물어봐도 될까요? 지환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 옆에서 서로 사이좋게 작업 거는 모습을 보자니 갑작스레 여자친구가 보고 싶어졌다.
“강현정이에요. 그런데 서진 씨는 몇 살이에요?”
“저 스무 살이에요.”
“아, 새내기셨구나. 저는 3학년이에요. 스물두 살.”
결국 지환이 참지 못하고 웃자 서진과 현정의 시선이 한 번에 지환에게로 향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계속 얘기해.”
그 말에도 현정이 지환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마지막 남은 일반인이 체크체크로 들어간 거야?”
체크체크는 지환의 과 학생들이 종종 뭔가를 하고 싶지만, 상대가 없을 때 번개식으로 사람을 모으는 단톡방 이름이었는데, 공대생의 상징인 체크를 따서 이름 지었다. 지금 지환이 입은 건 체크 셔츠였고.
“구겨져도 티가 안 나.”
거기다 뭐가 묻어도 티가 안 났다. 드디어 체크의 편함을 알아 버린 지환의 목소리에 현정이 물었다.
“하늘 언니는 뭐래?”
“하늘이 취향 몰라?”
지환의 여자친구인 하늘은 모범생 타입을 좋아했다. 그러면서 공부 열심히 할 것 같지만, 얼굴까지 그러면 안 된다는데 지환이 남자라 그런지 잘 가늠이 되지는 않았다.
“아, 우리만 아는 얘기 했구나.”
현정이 그대로 서진을 향해 말을 이었다.
“오빠 여친 제가 소개해 줬거든요.”
서진이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고등학교 같이 나왔다고 하더라고. 선후배.”
그때까지 지환은 현정과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심지어 인사도 하지 않는 사이였는데, 현정과 하늘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자마자 현정에게 연락해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피력하며 제발 하늘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 덕에 지환은 지금까지도 현정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있었다. 어떻게 사귄 여자친구인데 소개해 준 사람이 고마울 수밖에 없다.
“그러셨구나.”
남의 연애만큼 관심 없는 게 없는 법인데, 서진도 마찬가지인지 미묘하게 건성인 대답에 지환이 웃자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
“왜.”
짧게 묻자 서진과 지환을 바라보고 있던 현정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둘은 어떻게 알아요? 서진 씨 우리 과는 아닌데.”
“저는 경영학과예요.”
그 단정한 답에 지환이 뒤를 이어 말했다.
“내 동생 남친의 사촌 형이 얘야.”
“동생 남친도 아니고 동생 남친의 사촌 형? 복잡하네.”
그래 봤자 서진이 정말 지혜의 남자친구였으면 현정이 아쉬워했을 게 뻔했다.
“그런데 서진 씨 경영이면 혹시 과외 같은 거 해요? 아니면 과 선배도 괜찮은데.”
“왜?”
지환이 묻자 현정이 앞좌석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맞다, 오빠 민승이 과외 하지?”
지환이 수학 과외를 맡은 민승의 이름이 나오자 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소개해 준 게 현정이기는 했다.
“걔 형이 이제 고등학생인데 국어 과외 구한다고 하더라고. 영어도 같이 하면 좋고.”
“민혁이?”
“응. 걔.”
그러고 보면 지환이 과외를 끝나고 나갈 때 어머님이 혹시 국어 과외 할 만한 사람 있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기는 했다. 지환의 주위에는 다들 언어 능력이 다 퇴화한 공대생뿐이라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지만.
“너 국어 잘해?”
연우가 생각나 서진에게 묻자 서진은 그저 짧게 웃었다.
“못했으면 우리 학교 못 오지 않았을까? 문과는 우리보다 기준 빡세잖아.”
서진 대신 나온 현정의 말에 지환이 문득 말했다.
“그런데 연우는 왜 그 모양이야?”
저절로 나온 지환의 물음에 서진이 웃으며 답했다.
“제가 가르친 게 아니잖아요.”
“좀 가르치지 그랬어.”
“연우가 누군데?”
현정의 물음에 지환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있어. 잘생긴 애.”
“남자애야? 그런데 잘생긴 애가 있는데 나한테 소개는 왜 안 해 줘?”
자기만 소개받아서 사귀면 다냐는 말이 이어지자 지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 동생 남친이라서 그건 좀 그렇지.”
지환은 서진을 눈짓했다.
“얘 사촌 동생.”
“뭐야. 그런 건 미리 말을 해. 그럼 심지어 미성년자잖아.”
김이 빠졌다는 목소리에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
“연우가 잘생겼어요?”
꽤나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얘는 매일 봐서 모르나. 연우의 그 창의적인 맞춤법을 접할 때마다 있지도 않은 정이 떨어지는데도, 얼굴 보면 그래도 저래서 지혜가 사귀는구나 싶었다.
“걔가 안 잘생겼으면 나한테까지 오기도 전에 지혜가 안 사귀었지.”
지환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너랑 좀 닮았어.”
“아닐걸요.”
“원래 닮은 애들이 모르더라.”
서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지는 걸 보며 지환은 여상스럽게 말을 이었다.
“입 다물고 있으면 좀 닮았어.”
“정연우 입 안 다무는데.”
“그건 그렇지.”
그 감당하기 힘든 체력을 생각하며 웃자 서진이 잠시간 지환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이가 마냥 좋지는 않은 걸 알고는 있었는데, 괜히 연우가 생각났다. 연우는 서진을 많이 좋아하던데. 애가 눈치도 없고 착하기는 해서 그런지 미움 받는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그런데 민승이 집 여기서 좀 멀지 않나?”
잠시간 아무 말도 없다가 문득 나온 지환의 말에 현정이 답했다.
“아, 서진 씨 학교 근처 산다고 했죠? 그래 봤자 삼십 분이기는 한데, 자취생이면 근처에서 찾고 싶기는 하겠다.”
“삼십 분 정도 거리는 괜찮아요.”
서진의 자취방이 있는 골목 초입에 도착하자 지환이 속도를 줄이며 차를 멈췄다.
“그럼 번호는 내가 줄게. 그쪽 부모님한테도 연락해 놓고.”
“네. 감사합니다.”
그 말과 함께 서진이 차에서 내리며 살짝 현정에게도 눈인사했다.
“수업에서 봬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 말에 서진이 웃으며 다시 지환을 바라봤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그리고 문을 닫는 모습에 지환이 다시 차를 움직이자 현정이 창문 너머로 뒤를 돌아 걷는 서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런 애가 있으면 알려 줘야 할 거 아니야!”
앞좌석으로 몸을 기울이며 현정이 바로 말을 이었다.
“최지환, 이거 완전 자기만 소개받으면 끝이라 이거지?”
“벨트 제대로 하고 앉아.”
지환의 말에 현정이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잘생겼지.”
감흥 없이 말하자 현정이 바로 답했다.
“오빠보다 키 큰가?”
그 물음에 지환은 서진의 키를 가늠해 봤다. 그새 조금 더 큰 것 같기는 했다.
“아마도?”
“내가 이날을 위해 교양 학점을 남겨 둔 거였어.”
진심이 가득한 목소리에 지환이 웃자 현정이 말을 이었다.
“서역문에서 처음 봤을 때는 좀 다가가기 힘들어 보였는데 생각보다 잘 웃고 성격도 무던하네.”
“웃기는 꽤 잘 웃지.”
성격도 무던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격은 어때? 오빠랑 친해?”
“동생 남친 사촌 형이랑 친해 봤자 얼마나 친하겠어. 성격은 잘 몰라.”
지환이 보기에 저 정도면 조금 재수 없는 거 제외하면 나름대로 무난하기는 했는데, 여자친구나 다른 친구들한테 어떻게 하는지는 또 모를 일이었다.
* * *
어쩌다 보니 서진과는 공통점이 하나 더 늘었다. 서진과 지환은 이제 같은 집에서 같은 시간에 과외를 하게 됐는데, 지환은 하던 대로 민승에게 수학 과외를 했고 서진은 민승의 형인 민혁의 국어와 영어 과외를 맡게 됐다.
형제의 과외 시간이 같은 탓에 서진과 지환은 꼬박꼬박 주 2회는 얼굴을 봤다. 심지어 그중 하루는 사회봉사 시간 뒤라 그날은 아예 같이 차를 타고 왔고.
“홍삼이네.”
“네.”
어차피 가는 길인데 신경 쓰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서진은 종종 지환에게 여러 가지를 건넸다. 이번에는 홍삼 선물 세트였는데, 이 나이에 벌써 원기 회복을 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거 스틱이야?”
“네. 먹기 편하잖아요.”
그 말에 지환은 우선 상자를 열어 스틱 두 개를 꺼내고는 나머지는 뒷좌석에 놓고 하나를 서진에게 건넸다.
“형한테 준 건데요.”
“응. 고맙다. 근데 이제 내 거잖아. 그럼 누구한테 주는지는 이제 내 마음이지.”
지환도 홍삼 스틱 하나를 입에 물고 벨트를 매자 서진 역시 벨트를 맸다.
“원래 잘 태워 줘요?”
“가는 길 겹치면.”
자취할 때는 차가 필요 없어서 누구 태워 준 적도 거의 없었는데, 통학을 시작하고 나서는 가는 길에 내려 줄 수 있으면 그러는 편이었다.
“너는 면허 있어?”
“네.”
“차는?”
“있어요. 그런데 자취하면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안 가져왔어요.”
서진이 그대로 말을 이었다.
“거기다 차 가지고 오면 분명 부모님이 차도 있는데 집에 자주 오라고 할 테니까.”
지환도 어쩌다가 연우를 집에 데려다줄 때나, 연우와 서진의 집에서 놀고 있던 지혜를 집으로 데려올 때 종종 서진의 부모님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서진의 부모님은 지환에게 뭐라도 먹고 가라며 붙들기도 했었는데, 그 몇 번으로 본 바로는 서진과 부모님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속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귀찮아서?”
그 물음에 서진이 창틀에 팔꿈치를 기댄 채로 웃으며 지환을 바라봤다.
“성격 숨기라면서요?”
“그래. 요즘은 잘 숨기더라.”
“이제 자주 보잖아요. 차도 얻어 타는데.”
확실히 그 덕에 지환과 서진이 이제는 꽤나 많은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친하다고 할 만하지는 않았다. 연우에게 당황스러울 정도로 벽이 없는 것에 비해 거의 같은 집에서 생활하며 자라 온 서진은 꽤나 벽을 쳤다.
“그래도 별로 아쉽지는 않잖아.”
서진이야 지환이 태워 주겠다고 하니 탈 뿐이지 그 외로 자신이 먼저 부탁하거나, 아쉬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지환이라고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아쉽고 말고 할 건 없죠. 저는 그냥 형의 호의를 받는 거잖아요. 늘 감사해요.”
역시나 언제 한 번 붙잡는 법이 없었다.
* * *
과외를 끝내고 종종 과외 학생의 부모님이 있으면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할 때가 있었는데, 이번 역시 그런 경우였던지라 저녁까지 먹은 지환은 서진과 함께 집에서 나오며 말했다.
“너 이제 집 가지?”
“네.”
“나도 다시 학교 갈 건데 데려다줄게.”
“저 진짜 괜찮아요.”
“어차피 가는 길인데 무슨 소리야.”
그 말과 함께 서진을 차로 데리고 가자 서진이 조금 난처한 얼굴로 지환을 바라봤다.
“형 진짜 돈은 안 받아요?”
서진의 물음에 지환은 차 문을 열며 서진을 바라봤다. 정말 새삼스러운 소리였는데, 저 말을 지치지도 않고 했다.
“네가 준 거로 이미 차비는 다 한 것 같은데.”
오늘은 홍삼이었는데, 그전에도 종종 선물을 가지고 왔다. 선물보다는 답례품에 가깝기는 했지만. 모르기는 몰라도 대강 합치면 기름값은 훨씬 넘을 게 뻔했다.
“형은 학교 왜 다시 가요?”
결국 차에 타며 하는 말에 지환은 서진이 안전벨트를 맨 걸 확인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여자친구 만나러.”
하늘이 자취하고 있다는 거야 서진도 알고 있었다.
“그 정도면 통학의 의미가 없는 거 아니에요?”
확실히 지환이 통학하고 있다고는 해도, 여자친구의 자취방에서 머무르는 날이 꽤 많았기에 서진의 말이 아주 완벽히 틀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예 자취하는 거랑은 다르지. 여친 오빠가 언제든 집에 들이닥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높을수록 조신하게 지낼 거 아니야.”
연우를 말하는 지환의 말에 서진은 이제는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봤다.
“연우 눈치를 너무 믿으시네요.”
“없는 걸 어떻게 믿어.”
연우는 눈치가 없었다. 없는 걸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너는 여자친구 있어?”
현정과 잘 되어 가는 것 같지는 않던데. 문득 나온 지환의 물음에 서진은 그저 창밖을 보는 채로 답했다.
“아니요.”
“왜?”
“여자친구 없는데도 이유가 있어요?”
“보통 이유가 있지 않나?”
못 사귀는 것에는 남들은 다 알지만 본인만 모르거나, 혹은 본인도 알지만 애써 모르는 척하는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안 사귀는 것에는 본인이 사귀지 않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서진은 아마 후자 쪽이지 싶었다.
“겨우 혼자 사는데 괜히 또 사람 끼워 넣기 귀찮잖아요.”
고작 스물이면서 인생 다 산 말투가 그대로 이어졌다.
“연애하면 뭐가 좋아요?”
큰 고저 없이 떨어진 어조에 지환이 답했다.
“연애해서 좋다기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연애하는 거 아닌가.”
고등학교 이후로 한동안 연애를 하지 않던 지환도 하늘을 만나서 연애를 다시 시작한 거지 그전까지는 크게 연애를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그렇다기에는, 다들 연애하고 싶다고 하고 상대를 찾잖아요.”
“그런 경우도 있기는 하지.”
확실히 제 동기들도 틈만 나면 상대도 없으면서 연애하고 싶다고 울부짖기는 했다.
“무성애자 같은 거야?”
스무 살이면 다들 연애하고 싶어 하던데 싶어 문득 묻자 서진이 웃었다.
“남한테 관심이 많으시네.”
크게 어조가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비꼬는 걸 모르지는 않을 만한 어투에 지환 역시 마주 웃었다.
“또 성격 보이네.”
“이 정도는 다들 하던데요.”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지환은 소개 안 해 줄 거면 닥치고 꺼지라는 말도 들어 봤으며 사실 한두 번 들어 본 것도 아니다. 서진이 워낙에 성자처럼 굴어서 그렇지.
“그건 그래. 거기다 내가 잘못한 것도 맞지 뭐.”
어쨌거나 무례했던 건 사실이라 말하자 서진이 여상스럽게 답했다.
“괜찮아요.”
“어, 그래. 용서해 줘서 고맙다.”
지환은 대강 답하며 흘깃 서진을 바라봤다.
“그래도 너 정도 성격이면 무난한데.”
지환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성격 숨기라고 한 건 왜 다른 사람한테는 다 숨기면서 자신한테는 덜 숨기나 싶은 의아함일 뿐이었고 실제로 지환은 서진이 굳이 숨길 만한 성격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애초에 그랬으면 현정이 서진에게 관심을 가질 때 넌지시 언질을 줬겠고.
서진은 유독 다른 사람들에게 저는 흠집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듯이 착하게 굴었는데, 어렴풋이 눈치챈 실제 성격은 당연히 그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크게 상종 못 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웃으며 하는 말에 지환은 말했다.
“너는 잘생겨서 웬만하면 재수 없어도 다들 참아 줘.”
“재수 없다는 소리 면전에서 듣는 건 또 새롭네요.”
“잘생겼다는 소리 면전에서 들은 건 꽤 있나 보네.”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서진이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형도 눈 있고 저도 눈 있잖아요. 다른 사람이라고 눈 없을까요.”
저렇게 말해도 누가 반박할 거리가 없기는 했는데, 지금껏 들어온 거랑은 꽤나 달랐다.
“너 민승이네 부모님이 잘생겼다고 했을 때는 아니라고 그러지 않았나?”
종종 과외를 마치면 같이 식사를 했던 적이 있고 민승과 민혁의 부모님은 지환에게나 서진에게나 어쩜 그렇게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겼냐면서 칭찬을 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서진이 얼마나 겸손을 떨었는지를 아는데.
“네. 그렇죠. 제가 잘생기기는요. 형이 더 잘생겼는데 무슨 말씀 하세요.”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겠다는 듯이 겸손하게 나온 목소리에 지환이 웃자 서진 역시 마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얼굴이 다는 아니잖아요.”
“이렇게 원론적인 얘기를 하는 애가 있네.”
원래 저런 말은 못생긴 애들이 하는 말인데.
“얼굴만 잘생기면 뭐해요.”
서진의 목소리는 별 다를 바가 없었는데도, 어쩐지 그 어조가 뚝 떨어진 것 같이 무미건조했다.
“얼굴만 반반한 놈 되는 거지.”
그대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른 것도 다 잘해야 다른 것도 잘하는데 심지어 얼굴도 잘생겼다고 되는 거잖아요.”
저 정도면 얼굴이 충분히 특출하게 잘하는데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남자한테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정신적으로 무리가 있어 지환은 그저 입을 닫았다.
그대로 별것 아닌 이야기들을 나누다 서진의 자취방이 있는 골목쯤에 거의 도착하자 서진이 지환을 바라봤다.
“돈은 정말 안 받아요?”
“설마 기름값 얘기 아직도 해?”
지환은 차를 멈추고 그대로 서진을 바라봤다.
“너는 연우 친구들한테 뭐 해 준 다음 돈 받을 수 있어?”
그 말에 서진이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요?”
“동생 친구한테 돈을 어떻게 받냐는 말이지.”
“저는 지혜 친구 아닌데.”
“대충 비슷하잖아. 지혜 선배고.”
따지자면 서진은 지환보다 지혜와 더 나이가 비슷하기도 했다. 지혜와는 겨우 두 살 차이고 지환과는 네 살 차이이니. 거기다 지환이 서진을 처음 봤을 때도 서진은 교복을 입고 있었던지라, 지금도 그 모습이 첫인상으로 박혀 있었다.
“그런데 내가 너한테 받기는 뭘 받아. 어차피 다 가는 길이라 태워 주는 건데.”
실제로도 그랬다. 지환이라고 뭐 자선사업을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남자 후배를 꼬박꼬박 데려다주겠는가. 지환은 심지어 자신이 갈 길에서 벗어나지도 않는다. 그냥 가는 길에 내려 줘서 서진은 골목 초입부터 걸어가면 되는 건데 그게 뭐 별거라고.
“그러니까 앞으로 뭐 챙겨 오지 마. 내가 너 눈치를 줄 것도 아니고.”
“그래도요.”
“너 안 태우면 내가 운전하면서 뭘 또 하겠냐? 라디오나 듣겠지.”
“혼자서 가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그 말에 지환이 웃었다.
“너는 내가 네 눈치 보느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 하는 사람 같아?”
“그건 아니에요.”
“알았으면 괜한 거 걱정하지 마.”
“걱정했다고는 안 했는데요.”
멀뚱히 떨어진 말에 지환이 물끄러미 서진을 바라봤다. 할 말은 그리 참지 않는 게 답답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럼 이제 가. 다음 주에 보자.”
“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환은 차 문을 열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서진에게 손을 흔들어 줬다. 연우에게 듣기로 연우의 부모님은 외국에서 생활해서 연우가 거의 서진의 집에서 함께 자랐다고 하던데, 같은 집에서 자란 것치고 성격이 꽤나 달랐다.
생각해 보면 지환이 서진을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의 서진도 꽤나 달랐다. 처음에는 모범적인 모습을 완벽히 유지하면서도 은근히 예민한 기색이 있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거의 해탈한 것처럼 굴었다. 지환은 그대로 잠시 서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차를 움직였다.
* * *
지환은 부엌에 서 있기에는 너무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는 말에 축제 부스 바깥에 나와 호객 행위를 하게 됐다. 그래 봤자 팻말을 들고 어슬렁거리는 게 전부이기는 했지만. 대강 사람을 피해 걷던 지환은 문득 시선 끝에서 서진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여기서 뭐 해? 경대는 저 끝이잖아.”
“구경 왔어요. 친구가 이 근처라고 해서.”
“너는 주점 안 해?”
“네.”
생각해 보면 전에 한 번 지환이 서진에게 대학에서도 학생회를 하냐고 물었을 때 하지 않는다는 답을 듣기는 했다. 그래도 주점 일은 도와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어쩌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늘 주위에 사람을 잔뜩 달고 다니기에 부탁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우리 주점 올래? 너 있으면 합석 보장이다.”
과에서는 비율 좀 맞춰 보게 여자 손님을 데려오라고 했지만, 지환은 의욕이 전혀 없었다. 현재 지환의 과 부스에는 과 사람들과 그 친구들이 다수 포진해 있어 누구를 데려가면 지환이 욕을 먹을 수질이었다. 그래도 서진이 있으면 여자 손님을 데려가도 최소한 미안해하지는 않아도 됐다.
“친구도 데려와. 안주도 계속 줄게. 너는 그냥 앉아 있기만 해.”
“저 술 안 마시는데.”
“뭐? 그럼 뭐 하러 살아?”
지환이 알기로 서진은 담배도 안 피웠고 연애도 안 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까. 절로 나간 물음에 서진이 웃었다. 별 거 안 해도 잘난 그 얼굴에 지환은 바로 말했다.
“아니다. 너는 술 안 마셔도 돼. 그냥 앉아 있기만 해.”
설득을 이어 가려고 했는데, 문득 누군가 지환의 허리를 살짝 건드렸다. 뭔가 싶어 시선을 돌리자 지환의 여자친구, 하늘이 지환의 티셔츠 허리쯤을 옅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주점 갔는데 없어서 찾았잖아.”
웃으며 하는 목소리에 지환은 자연스럽게 마주 웃으며 그 손을 끌어와 제 허리에 감게 했다.
“그래도 어떻게 찾았네? 사람도 많은데 그냥 연락하지. 데리러 갔을 텐데.”
“전화하려고 했는데 마침 찾았어.”
하늘이 그대로 슬쩍 서진을 바라봤다.
“근데 호객 행위를 왜 하다 말아? 최지환, 이거 완전 빠져가지고.”
지환의 허리를 살짝 찌르며 하는 말에 지환이 서진을 눈짓하며 말했다.
“얘는 후배. 경대 새내기.”
“안녕하세요. 지환이 형 여자친구이신가 봐요. 얘기 몇 번 들었어요.”
“네? 제 얘기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했냐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에 지환 역시 얼떨떨해졌다. 지환이 서진에게 하늘의 이야기를 한 적이, 아마 없을 텐데. 그러면서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냥 일상적인 얘기를 하다가 분명 몇 번 얘기하기는 했을 것 같기도 하고.
“제가 현정 누나랑 같은 강의 듣거든요. 현정 누나가 지환이 형이랑 여자친구분 소개해 줬다고 그러더라고요.”
“아, 현정이랑 서역문 같이 듣는 분이시구나.”
하늘은 또 서진을 어떻게 아나 싶었다가, 어련히 현정이 말을 했겠지 알아서 납득했다.
“지환 오빠가 호객 행위는 잘했어요?”
이어진 물음에 서진이 웃으며 말했다.
“잘하셨는데 제가 친구랑 저희 과 주점 먼저 가기로 해서요. 나중에 시간 봐서 갈 수 있으면 갈게요.”
서진이 그대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가 볼게요. 나중에 봬요.”
“어. 늦게라도 올 거면 연락해. 자리 빼놓게.”
“그럴 필요는 없는데.”
주점의 수익을 위해 그럴 필요가 있었다. 짧게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기는 서진을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하늘이 지환의 허리를 살짝 간질였다.
“아쉽다. 주점 간다고 했으면 현정이 불러 주는 건데.”
하늘이 그대로 말을 이었다.
“저분 경대 주점 가는 거지?”
“아마도.”
“그럼 그냥 현정이한테 경대로 가라고 할까?”
“걔도 그거 알지 않을까.”
사람이 많은 탓에 다른 사람에게 닿지 않게 하늘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걸음을 옮기자 하늘이 말했다.
“현정이한테 들을 때는 잘생겨 봤자 얼마나 잘생겼겠나 싶었는데 잘생기기는 진짜 잘생겼네.”
남자친구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다른 남자가 잘생겼다고 하는 말에 지환이 웃었다.
“저런 취향이시면 경대를 가셔야지 왜 공대에 있으세요.”
공대에는 서진처럼 깔끔하게 하고 다니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기도 했다. 지환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하늘이 웃으며 지환을 올려다봤다.
“갈까?”
그 말에 지환이 하늘을 조금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절대 안 되지.”
그대로 하늘을 끌어안고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가득한 인파 사이로 머리통 하나가 튀어나와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근처에 친구가 있다던 말대로 친구를 찾은 모양인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서진의 모습에 지환은 잠시 그쪽으로 시선을 뒀다. 다들 고만고만한 키 중에 하나만 툭 튀어나와서 시선 두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서진의 친구로 보이는 사람은 서진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다가, 어깨동무하듯 서진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래 봤자 키 차이가 꽤 나는지라 어정쩡했지만. 그런데, 쟤 닿는 거 안 좋아할 텐데.
아니나 다를까 서진이 제 어깨 위에 닿은 팔을 잠시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일순간 무미건조한 표정이 지나갔는데, 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다시 제 친구와 이야기를 했다. 그걸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쟤도 인생 꽤 피곤하게 사는구나.
“사람 진짜 많다.”
질린다는 듯 나온 하늘의 말에 지환은 하늘이 다른 사람에게 닿지 않도록 더 단단히 끌어안으며 물었다.
“거절 못 하는 성격도 아닌데 굳이 싫은 걸 참는 이유는 뭘까?”
둥그런 하늘의 머리를 살짝 받치며 묻자 하늘이 그대로 답했다.
“사람마다 다르기는 한데, 나 같으면 귀찮아서.”
“거절하면 귀찮은 일 없잖아.”
이해가 가지 않아 말하자 하늘이 말했다.
“뒤에서 싸가지 없다는 소리 듣는 것보다는 잠깐 참는 게 덜 귀찮은 경우가 꽤 있지.”
하늘을 보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리자 문득 서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싫은 건 다 거절하는 지환이는 그런 거 모르겠지만.”
그 시선이 지환과 지환이 껴안고 있는 하늘에게 닿았다가, 짧은 눈인사와 함께 다시 사라졌다. 지환 역시 다시 시선을 거두고 하늘을 바라봤다. 서진도 그럴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야 하겠지. 어느 쪽이 덜 피곤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귀찮아 보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