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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100화 (외전 완결) (100/100)
  • -외전 21-

    외전 6

    요즘 이상하게 노아가 부쩍 개처럼 행동했다.

    ……어감이 좀 이상하기 하지만 정말이었다. 스텔라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어 노아를 쳐다봤다. 그는 그녀의 발치에 앉아,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자고 있었다.

    암흑가로 돌려보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이후에는 더 심해졌다.

    “노아. 잘 거면 침대에서 자.”

    “으응…….”

    “어리광 부리지 말고 빨리. 네가 앤 줄 알아?”

    “그냥 여기서 자는 게 좋은 거야…….”

    구부정하게 자는 게 좋기는 뭐가 좋다고. 스텔라는 노아를 노려보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고집을 부리더니 이제야 허리가 슬 아파 오기 시작했는지, 노아가 몸을 뒤척였다. 스텔라는 그것 보라는 듯이 헹, 하고 웃었다.

    “불편해서 잠 다 깼지?”

    마침내 슬며시 눈을 뜬 노아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며 뻐근한 몸을 풀었지만, 그녀의 발치에서 몸을 치우지는 않았다.

    “불편할 텐데 뭐 하러 그러고 있어.”

    “안 불편해.”

    “너 아까도 그렇게 말했어.”

    “왜, 누나는 나 이러고 있는 거 싫어?”

    노아가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매달렸지만 스텔라는 대수롭지 않게 책장을 넘겼다. 말만 저렇게 하지,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노아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에 스텔라는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그대로 뿜을 뻔했다.

    “누나 예전부터 내 얼굴 좋아했잖아. 오랜만에 나 봤을 때 내 얼굴에서 눈을 못 떼던 게 아직도 기억 나는데.”

    “……가서 잠이나 자.”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스텔라가 노아의 얼굴을 밀자 그는 힘없이 밀려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의 말이 맞기는 했다. 오래전, 5년 만에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그가 자신이 아주 잘 알던 동생이라던 것도 잊고 멍하니 그의 얼굴만 바라보기도 했으니.

    수도원에 있을 때 애니카가 항상 그녀에게 하던 말이 있었다. 너는 얼굴에 너무 약하다고.

    젠장. 스텔라는 책을 덮고 이마를 짚었다. 짜증나게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노아를 쳐다봤다. 잠 다 깼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아주 잘만 자고 있었다.

    스텔라는 조용히,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앚아 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어느 집 자식인지 참 잘생기기는 했다. 스텔라는 손을 뻗어 노아의 뺨을 살살 간질였다.

    그 순간, 노아가 번쩍 눈을 떴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고 어느새 노아가 그녀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스텔라는 살짝 얼굴을 구겼다.

    “어린 게 까불어.”

    무슨 말을 해도 노아는 기분 좋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촛불을 후, 하고 불자 금방 어둠이 찾아왔다. 스텔라는 옷에 손을 집어넣는 노아의 손을 때리며 눈을 감았다.

    ***

    아침이 밝자 맑은 공기라고 쐴까 싶어 나간 광장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스텔라는 분수대에 걸터앉아 노점에서 산 음료를 마시며 멍하니 아이들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진한 갈색 머리칼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개구지게 웃더니 그녀에게 다가왔다.

    “누나누나, 우리 쳐다보는 거, 재미있어 보여서 그런 거죠? 우리랑 같이 놀래요?”

    재미있어 보였다기보다는 그냥 딱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 아무데나 쳐다보고 있던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열두 살, 아니 열세 살 정도이려나. 스텔라는 아이의 외형으로 나이를 유추했다. 대략 그녀가 공작을 처음 만났을 때의 노아 나이 정도인 것 같았다.

    다만 당시 또래에 비해 얌전하고-겉보기에는-순했던 노아와는 달리, 아이들은 매우 거칠게 놀고 있었다. 빠르게 달려가 몸통으로 상대를 박는 게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리고 같이 놀자고 제안한 아이는 여전히 눈을 빛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애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저 사이에 끼어들었다가는 뼈가 부러질지도 모르겠다. 스텔라는 상냥하게 웃으며 옆에 앉아 있던 노아의 등을 떠밀었다.

    “으응, 누나는 좀 힘이 들어서 안 될 것 같고, 이 형이 대신 놀아 줄 거야.”

    “누나?”

    노아는 배신감에 물든 목소리로 스텔라를 부르며 아이에게 끌려갔다. 아이들은 노아에게 놀이에 대해 설명해 주는 듯하더니, 냅다 노아에게 달려들었다. 노아는 초반에는 날래게 아이들의 공격을 피하더니 공격이 계속 쏟아지자 곧 해탈한 듯 몸에 힘을 빼고 아이들에게 맞아 줬다. 그나저나 대체 저게 무슨 놀이람.

    노아는 하도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가 된 후에야 터덜터덜 돌아왔다. 스텔라는 책을 읽다 말고 그를 반겨 줬다.

    “……누나.”

    “아, 왔어? 노는 건 어땠어, 재미있었어?”

    “어렸을 때도 저렇게 거칠게 논 적이 없는데 지금에서야 해 보다니.”

    “잘 됐네. 좋은 경험이었겠어.”

    ” 지금 나 놀리는 거야?”

    “그럴 리가.”

    스텔라는 부정하면서도 힘겨운 숨은 뱉으며 분수대에 걸터앉는 노아를 보며 낄낄 배를 잡고 웃었다. 노아가 어린아이들에게 맞아 저렇게 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때 노아와 함께 놀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노아를 불렀다. 힘이 다 빠져 주저앉아 있는 노아와는 달리 아직 아이들은 쌩쌩했다.

    “안녕, 형! 다음에 또 놀자!”

    “그때는 좀 잘 피해 봐!”

    노아는 아이들을 마주보며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스텔라는 그 모습을 보고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재미있지 않았어?”

    “재미있었냐니. 내 표정 못 본 거야? 그냥 힘들었어. ……어렸을 때도 저렇게 놀아 본 적은 없었는데.”

    “응? 그건 너 친구 없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

    “…….”

    “……아.”

    스텔라는 자신을 보는 노아의 눈동자에 원망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얼른 말을 돌렸다.

    “아, 아니야. 괜…… 괜찮아, 괜찮을 거야 노아. 그래도 너는 어른들이나 누나 형한테 예쁜 많이 받았잖아.”

    스텔라가 그렇게 말하며 노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자 노아가 조그맣게 ‘전부 그런 것도 아니었어’ 하고 중얼거렸다. 전부 그런 것도 아니었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전부 그런 게 아니면, 뭐 널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어?”

    “……필립.”

    필립? 스텔라는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머릿속에 넣고 굴리며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했다.

    “아, 필립.”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서 수녀에게 필립은 어디 갔느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났다. 트리센 마을의 수도원에서 적응을 못하길래 다른 곳으로 보냈다는 대답만 돌아왔었지.

    지나서 생각해 보니 꽤 이상한 일이었다. 적응을 못했다니. 분명 애니카와 그녀는 필립과 꽤 재밌게 놀았던 것 같은데…….

    스텔라는 깊게 생각하려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다 지난 이야기일 뿐이었다.

    “가자, 노아.”

    노아는 앞서가는 스텔라의 뒷모습을 보며 희맑게 웃었다. 안타깝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그의 미움을 사 수도원에서 쫓겨났던 소년은 스텔라에게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

    “누나. 언제까지 이 마을에 있을 거야? 벌써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우리가 안 가 본 데가 있나?”

    “몇 군데 남아 있기는 하지. 볼 만한 건 없는 곳들이지만.”

    “슬슬 여행은 끝내고 정착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디에?”

    노아가 지도를 펼쳐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스텔라는 지도를 쭉 훑어보다가 어느 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위에는 작게 맥클라우드 왕국이라고 적혀 있었다.

    “맥클라우드. 맥클라우드 왕국.”

    “맥클라우드 왕국? 엄청 먼데. 굳이 거기로 가려고?”

    “그냥. 거기가 마음에 들어.”

    이상하게도 다른 곳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꼭 맥클라우드로 가야 한다는 것처럼. 다만 문제는 사람들이 맥클라우드로 가는 배를 많이 찾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운이 안 좋으면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다.

    “배편은 내일 내가 찾아 볼게.”

    다행히 며칠 후 노아는 맥클라우드로 가는 표를 두 장 들고 돌아왔다. 스텔라는 표를 보며 좋아하다가 얼른 짐을 싸기 시작했다.

    ***

    “배에 타면 아침부터 먹자.”

    “맞다, 오늘은 빵 안 사 왔네.”

    “배 타러 가야 하는데 빵 사 올 시간이 어디 있어.”

    스텔라가 핀잔을 주자 노아가 맑게 웃었다. 요즘 그는 뭐든 웃음으로 넘기려고 해서 문제였다. 또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순간, 한 노인이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을 떄 이미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

    “누나? 왜 그래?”

    “……방금.”

    아리안 아니었나. 스텔라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스텔라는 노인이 사라졌음에도 노인과 마주쳤던 그 자리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털어 냈다. 방금 지나간 이는 노인이었다. 애초에 아리안은 늙지 않는데, 아리안일 리가 없지.

    “가자, 노아. 배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손을 내밀자 노아가 얼른 손을 맞잡았다.

    스텔라는 노아의 손을 잡고 항구를 향해 뛰었다.

    -도망치세요, 아가씨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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