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
“그나저나 어디 다녀왔어? 어디 가기에 굳이 혼자 다녀온다고 했어?”
“도서관 좀.”
그러고 보니 스텔라의 손에는 두꺼운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대충 제목을 살펴보니 몽마에 관한 책이었다.
몽마에 관한 책은 왜……. 노아가 책을 보며 미간을 좁히자 스텔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더 늦기 전에 여관이나 가자.”
책의 내용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야심한 밤이었다. 노아는 스텔라가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가 자신을 끌어안은 게 불편한 모양이었다. 노아는 스텔라의 허리를 놓았다가 괜히 심술이 나 다시 끌어안았다.
항상 스텔라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잤고, 노아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자는 게 일상이었다. 노아는 여느 때처럼 스텔라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아. 이거 개 같다고 했었지. 그리고 뒤늦게 스텔라의 말이 떠올라 노아는 얼른 그녀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어 냈다.
가까이 붙어 있자니 머리칼에서 스텔라의 향이 났다. 언젠가부터 향의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지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향이 좋았다.
다시 잠이나 자자. 노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일어났을 때 스텔라는 자리에 없었다. 또 아침에 먹을 빵을 사러 간 거겠지. 나도 같이 가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노아는 입술을 꾹 깨물며 스텔라가 베고 자던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또다시 얼굴을 비비려다가 스텔라가 했던 말이 떠올라 베개를 밀어냈다.
그때 유리창에 무언가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스테판이 난간에 매달려 창문을 열어 달라며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여긴 분명 3층이 아니던가. 노아는 얼굴을 팍 구기며 창문을 열어 줬다.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칭찬입니까?”
“그럴 리가. 도둑놈 새끼 근성을 못 버렸다는 뜻이지.”
“칭찬이었군요.”
스테판이 두리번거리며 방 안을 살피더니 물었다.
“그분은요? 외출하셨나요?”
“……그래.”
“어째 같이 계시는 시간보다 떨어져 계신 시간이 더 많은 것 같군요.”
어떻게 하면 말을 저렇게 얄밉게 할 수가 있지. 매섭게 노려봐도 스테판은 하하 하고 태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같이 다니시기에 저는 드디어 연인이 되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누나 동생 사이였던 거군요.”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네? 섭섭하게 말을 왜 그렇게 하십니까. 저희 심심한데 미리엄 님께서 그분한테 무슨 짓을 했었는지 다시 하나하나 읊어 볼까요? 그리고 함께 도덕적으로 성찰이라도 해 볼까요?”
“평소에 네가 가진 도덕성이 얼마나 됐다고 도덕을 들먹이지?”
“제 도덕성이요? 미리엄 님께서 가지신 매력의 두 배 정도는 있습니다.”
원래 이렇게 얄미운 사람이었나. 암흑가에 있을 때는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치던 것이 어쩌다가 제 앞에서 이렇게 깝죽거리게 됐는지.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됐다. 네까짓 게 도움은 무슨. 애초에 도움 같은 거 필요 없다.”
“그러지 마시고 들어나 보시지요. 제가 마부로 위장하고 마차를 빠르게 몰고 가겠습니다. 빠르게 달려오는 마차를 피하면서 그분을 끌어안으시면 극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을까요?!”
스테판은 흥분해서 소리까지 지르며 말했다. 반면에 노아는 도저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미친 것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자기 입에서 얼마나 미친 소리가 나오고 있는지 자각은 하고 있는 건가? 노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스테판을 쳐다봤다.
“미친 거냐.”
“미쳤냐니, 너무하십니다.”
“그런 구식적인 방법을 대체 누가…… 그 미친 마법사가 자주 이야기하던 연극에서도 안 나올 것 같은 방법을……. 아니, 무엇보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드나?”
스테판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 목숨 아니니 상관없다, 뭐 이런 건가.
“저 근데, 미리엄 님. 누가 오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분 아닙니까?”
스테판의 말을 듣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정말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의 방향을 보니 스텔라가 분명했다. 노아는 창문을 열고 스테판을 밀었다.
“어서 가라, 어서.”
“예, 예. 그래야지요.”
스테판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텔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사람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스테판, 이 망할 것 때문에 자신이 무슨 고생인가. 노아는 스텔라에게는 보이지 않게 주먹을 세게 쥐며 애써 웃어 보였다.
“위층하고 헷갈린 거 아니야?”
“그런가?”
다행히 스텔라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스텔라가 아침 식사를 위해 사 온 빵을 먹은 뒤에는 곧바로 관광지로 향했다.
이번에 가는 곳도 스텔라가 가고 싶다며 찾아온 곳이었다. 여름에도 눈으로 덮여 있는 산이라나 뭐라나. 보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 건지, 잠자는 시간과 식사 시간은 제외하고 계속 돌아다녀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항상 스텔라는 노아의 손을 잡고 다녔다. 그 모습이 정말 동생을 챙기는 누나 같아서 왠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뭐야, 저 마차! 왜 인도로 들어오는 거야?!”
그때 옆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그쪽으로 향했고, 노아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향해 웬 마차가 빠른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부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는 스테판이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노아의 머릿속에 아침에 스테판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그 짧은 사이에 마차는 어떻게 구한 거야. 문제는 마차의 속력이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빨랐다는 것이었다. 스테판 저것은 정녕 생각이 없는 걸까. 피할 수 없을 정도의 속력으로 마차를 몰아 놓고, 도대체 어떻게 스텔라를 끌어안고 피하라는 말인가!
노아는 일단 스텔라를 품에 끌어안았다. 스테판이 의도한 상황이었다기보다는, 정말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나온 행동이었다.
부하 하나 잘못 둬서 죽을지도 모른다니. 끔찍한 일이었다. 마차에 부딪힐 거라고 생각하고 누나라도 살리자 하며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오히려 그를 잡아끈 것은 스텔라였다.
스텔라는 노아의 허리를 끌어안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덕분에 둘은 거리 위를 거하게 굴렀다. 바닥을 구르는 순간에도 노아는 스텔라를 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스텔라는 아으, 하고 신음을 내며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바로 눈앞에 있는 노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몸을 벌떡 일으켜 마차를 향해 소리쳤다.
“악! 뺑소니범이 도망가잖아!”
“뺑…… 뭐?”
“그런 게 있어. 아니, 지금 이럴 게 아니고 저놈 잡아야지!”
스테판은 힐끗 뒤를 돌아보더니 얼른 마차를 몰아 도망쳤다. 스텔라는 마차를 쫓아가다가 도저히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멀어지는 스테판의 뒤통수에 대고 뭐라고 욕설을 지껄였다.
스텔라는 그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한참 동안 식식거렸다.
그리고 해가 지고 거리에 어둠이 깔려, 여관에 돌아왔을 때 그를 침대에 앉혀 놓고 묻기를.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아니.”
스텔라는 조심스럽게 노아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자애로운 얼굴을 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왠지 익숙한 표정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노아.”
“……응.”
“예전부터 내가 말해서 알고 있잖아.”
“……뭘.”
아. 노아는 그제야 스텔라의 그 표정이, 수도원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수녀들의 그것을 닮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인가. 누가 봐도 훈육의 현장이었다. 젠장. 노아는 조용히 욕을 뱉었다.
“내가 너 거짓말하는 걸 제일 싫어한다는 거.”
“…….”
“말해 봐. 뭐 숨기는 거 있지? 아까 마차도 그렇고.”
“……스테판이 계속 찾아와.”
“아, 그때 그 남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노아는 스텔라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기만 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스텔라였다.
“암흑가로 돌아가고 싶어?”
“아니.”
“하긴. 이제 가고 싶다고 해도 안 보내 줄 건데.”
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텔라를 쳐다봤다. 평소의 스텔라가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자 스텔라는 빙긋 웃으며,
“뭘 놀래, 네가 예전에 맨날 나한테 하던 말인데.”
하고 말했다. 노아는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점점 유해지고 있는데, 그녀는 점점 과거의 자신을 닮아 가고 있었다.
……물론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노아는 스텔라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스텔라가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
“…….”
“……스테판.”
“……예, 미리엄 님. 미리 말씀드리는데, 절대 미리엄 님을 죽이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제발 그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 정말 그것 하나뿐이었다.
“……스테판.”
“예, 미리엄 님.”
“어떻게 해야 좀 그만 찾아오겠나.”
“암흑가를 이끌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역할을 네가 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에이, 그럴 리가요!”
스테판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사이에 노아는 그의 눈동자에서 진심을 읽었다.
“아니다, 그 역할에 어울리는 것은 너밖에 없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미리엄 님이 이렇게 앞에 계신데!”
“스테판. 부디 네가 암흑가를 책임져 줬으면 좋겠다.”
이 무슨 웃음도 나오지 않는 어이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암흑가를 가지고 싶어 하는 이에게 제발 암흑가를 가져 달라 빌빌 기고 있다니.
스테판은 마침내 샐쭉 웃으며 속삭였다.
“그럼 확실히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고위급 간부들은 의심이 많아서 말입니다.”
“너를 제외한 고위급 간부들은 다 죽었다고 할 때는 언제고…… 하여튼. 뭐, 증명서에 도장이라도 찍어 주랴?”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지요.”
스테판은 미리 준비해 둔 증명서를 품에서 꺼냈다. 노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문서를 내려다봤다. 이렇게 될 것을 어떻게 알고 증명서를 준비해 온 걸까.
노아는 도장을 꾹 찍고 창문을 통해 스테판이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멀어지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창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