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9-
외전 5
“누나.”
“으응.”
“내 말 듣고 있어?”
“응, 으응.”
“내가 뭐라고 했는데?”
“…….”
“봐, 말 못하잖아. 내 말 안 들었지?”
스텔라는 눈을 감고 어깨를 으쓱였다. 저 뻔뻔한 모습 좀 보라지. 다만 그녀의 뻔뻔한 모습, 그러니까 단점까지도 사랑하는 자신이 미울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해 줘.”
“마부가 마을에 10분 뒤에 도착한대.”
“그렇구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졸려.”
스텔라는 고개를 기울여 노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노아는 그녀가 좀 더 편하게 머리를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살짝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약하게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
“자?”
혹시라도 잠들었다가 꺨까 봐 소근소근 말하는 제 꼴이 우스웠다. 스테판이 지금 제 꼴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 스테판은 암흑가와 함께 죽어서 보지 못하려나.
노아는 스텔라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자신도 눈을 감았다.
***
마을에 도착한 후 스텔라는 손짓 발짓을 활용하여 최선을 다해 길을 물었다. 그나저나 길을 묻는 것뿐인데 저렇게 활찍 웃을 필요가 있나. 노아는 스텔라와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뒤에서 스텔라를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얘가 또 왜 이래.”
“…….”
“야, 나 길 물어보고 있잖아.”
어깨에 달라붙어 있는 노아가 부담스러웠는지 스텔라는 평소와 달리 버벅거렸다. 덕분에 평소보다 시간이 배로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텔라는 남자가 설명을 끝내고 갈 때까지도 방긋방긋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나 남자가 가자마자 그녀는 냉랭한 표정을 하고서 앞서갔다. 노아는 다급하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혹시 자신이 귀찮게 굴어서 화라도 난 것일까.
“……미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러자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왜 자신만 이렇게 조급한지. 그렇게까지 예쁘게 웃을 필요가 있었나? 그냥 잔잔한 미소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던 것 같은데.
“……남들한테 막 웃어 주지 마. 착각하잖아.”
“내가 언제 막 웃어 줬다고.”
“방금도, 아까도, 어제도.”
“꼬맹이.”
“뭐라고?”
“아. 이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미안. 원래 그냥 어린애라고만 하려고 했어. 아리안하고 같이 지낸 시간이 꽤 길어서 무의식적으로 입에 붙었나 봐.”
이러니저러니해도 하여튼 결국 자신을 어리게 봤고 얕봤다는 말 아닌가. 노아는 홀로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다섯 살, 다섯 살이면 그리 많이 차이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사랑한다고 해 줄 때는 언제고 또 동생 취급이라니. 이 정도면 그냥 동생으로서 사랑한다는 말을 아니었을까.
“빨리 안 오고 뭐 해?”
누나는 나를 동생으로서 사랑한다.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이제는 스텔라가 자신을 향해 뻗는 손도 동생을 챙기는 누나의 손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노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손은 작고 동글동글하고 부드럽고…… 그리고 따듯했다. 따듯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아주 어렸을 적 잡았던 어미의 손은 차가웠고, 아비는 한 번도 손을 잡아 준 적이 없었으니.
노아는 스텔라의 손을 세게 잡아다 놓기를 반복하며 손장난을 했다. 그게 거슬렸는지 걷다 말고 스텔라가 그를 돌아봤다.
“요즘 부쩍 애처럼 구네.”
“……나도 알아.”
“알면서 왜 그래.”
알면서 왜 그러느냐니.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인가.
“왜겠어, 당연히…….”
“미리엄 님!”
노아는 자신의 말을 끊고 들려온 익숙한 호칭에 얼굴을 구겼다. 반 미리엄. 얼마 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던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은 과거 암흑가에서 자신을 보좌하던 스테판임이 분명했다. 공작이 암흑가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죽였다고 들었는데, 아직 살아 있었나.
노아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돌아보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나 스텔라는 익숙한 언어를 듣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리엄 님! 여기 계셨습니까!”
“…….”
“미리엄 님!”
“…….”
“미리엄 님? 미리암 님!”
“…….”
“이 망할 사람아, 암흑가가 망했는데 당신은 여기서 평화롭게 여행이나 즐기고 계셨습니까!”
“…….”
주먹이 꿈틀거리기는 했으나 애써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자 스테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미리엄 님이 아니신가. 이런 말을 듣고도 미리엄 님께서 가만히 계실 리가 없는데.”
스테판은 부러 모자란 척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노아는 최대한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저 간악한 게 저런 멍청한 말투를 쓸 리가 없다고.
“노아, 아는 사람이야?”
“아니, 이거 대화를 듣자하니 제국어를 쓰고 계시는군요. 제국 분들이십니까?”
스테판은 자연스럽게 다가와 노아의 옆에 섰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연기를 해 대는 꼴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낯선 이국에서 제국 분들을 만나뵙게 되니 너무 반갑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찾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어라. 잠시만요. 이거이거, 미리엄 님 아니신가요?!”
“…….”
“……미리엄 님. 이런 먼 곳까지 오셔서 뭐 하고 계십니까. 암흑가는 잊으셨습니까?”
“……스테판. 그 역겨운 말투 한 번만 더 쓰면 목을 꺾어 버릴 테니 그리 알아라.”
노아가 자신이 그가 찾는 사람임을 인정하자마자 스테판은 어서 암흑가로 돌아가셔야 한다고 조잘거리며 노아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암흑가에서 봐 왔던 딱딱하고 조용했던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 어쩐지 괴리감이 느껴졌다.
“태도가 많이 달라졌구나. 부산스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그야 그때는 주인님께서 암흑가에 계셨고,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태도가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돌아가셔서 함께 암흑가 재건에 힘써 주신다면 그때와 같은 진중하고 과묵한 태도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미 전부 무너진 곳에 돌아가서 뭐 해. 돌아갈 생각 없으니 혼자 돌아가서 실컷 암흑가 재건하도록.”
노아는 스테판을 떼어 내기 위해 한참을 용을 쓰다가 스텔라를 쳐다봤다. 아마 그녀도 둘의 대화를 통해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암흑가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테다. 그래도 그녀는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저 이 난장이 언제 끝나나 생각하며 시계와 노아, 그리고 스테판을 차례대로 번갈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스테판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스텔라가 줄곧 보고 싶어했던 공연의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스테판이 애타게 노아에게 매달릴수록 스텔라의 인내시도 점점 바닥이 났다.
그녀는 시계와 그들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노아.”
“응, 누나.”
“급하니까, 안 보내 줄 것 같으면 그냥 지금 당장 목 꺾어 버려.”
“응.”
곧바로 노아의 매서운 시선이 스테판을 향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목을 꺾어 버릴 것 같은 기세였기에, 스테판은 침착한 얼굴을 하고선 빠르게 도망쳤다. 내일도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스테판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노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안 돌아갈 거야.”
“어디에. 암흑가에?”
“응.”
“나도 알아. 너는 나 없으면 안 되잖아. 너 나 때문에 암흑가 버리고 나한테 온 거잖아.”
그걸 아는 사람이 자신이 옆에서 두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도 아무나한테 방긋방긋 웃어 준단 말인가. 자신은 멀쩡히 굴러가던 암흑가를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상대에게만 매달리고 있는데……. 노아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스텔라가 자신의 이런 생각을 안다면 또 꼬맹이라고 부를 것이 분명했다.
“공연 시작 얼마 안 남았어. 빨리 가자.”
제 처지 때문에 왠지 억울했으나 노아는 입을 꾹 다물고 스텔라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
스테판은 정말 다음날에도 찾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스텔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온 것 정도일까.
분수대에 걸터앉아 스텔라를 기다리고 있던 노아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미간을 좁혔다. 네가 왜 또 여기 왔냐고 따지는 듯이.
그럼에도 스테판은 슬그머니 그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는 손으로 분수대에 고여 있는 물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홀로 장난을 치기도 했다.
“뭐 하자는 거지? 왜 또 왔나?”
“몰라서 물으십니까. 당연히 설득해서 암흑가로 끌고 가려고 왔지요.”
그놈의 암흑가. 이제는 듣기만 해도 지겨울 지경이었다.
“저라고 다 버리고 도망친 미리엄 님이 어디가 예쁘다고 이러고 있겠습니까. 모니카 공작 때문에 웬만한 고위급 간부들은 다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건 저뿐이라는 말입니다. 근데 얼마 전에 모니카 공작가가 몰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잖습니까.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기회는 무슨 기회. 노아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으쓱이고 스스로도 놀랐다. 스텔라가 했던 행동과 비슷했다. 그녀의 태도를 보고 뻔뻔하다느니 뭐라느니 해도 결국을 자신도 닮아 가고 있었던 건지.
“아, 그나저나 방금까지 계속 같이 계셨던 분 말인데요, 예전에 그분 아니십니까?”
“……맞다.”
스테판의 말을 들어 보면 마치 그가 계속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들렸다. 경비대에 자신들을 쫓아다니는 이가 있다고 하면 좀 떨쳐 버릴 수 있을까.
“정말 미치셨군요. 그때 미리엄 님께서 어떤 미친 짓까지 하셨는지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아직도 저분 옆에 뻔뻔하게 달라붙어 계시다니.”
“스테판. 정말 목이 꺾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입 다물어라.”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꼽아 보라면 저는 납치극을 고르겠습니다.”
목을 꺾어 버리겠다는 섬뜩한 협박에도 스테판은 꿋꿋했다.
“맞는 말을 한 것뿐인데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때 멀리서 스텔라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노아는 잠시 굳어 있다가 얼른 가라며 스테판의 등을 밀었다. 암흑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스테판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면 스텔라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물론 스텔라는 자신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빨리, 빨리. 누나가 오고 있는 게 안 보이는 거냐. 들키기 전에 빨리 가거라.”
“아니, 굳이 저랑 있는 걸 들키면 안 되는 이유가 대체 무엇…….”
스테판은 말 한 마디를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노아에게 등을 떠밀려 쫓겨났다. 노아는 스텔라가 오자마자 얼굴에 미소를 방긋 띄웠다.
“다녀왔어?”
노아가 스텔라의 손을 잡아끌어 얼굴을 비비자 스텔라가 눈을 오묘하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어째 요즘 점점 개를 닮아 가는 것 같은데. 얼굴 비비는 걸 왜 이렇게 좋아해?”
“농담이지?”
“글쎄.”
스텔라가 짓궂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