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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95화 (95/100)
  • -외전 16-

    외전 3

    “전하.”

    “…….”

    “……전하.”

    “아. 코르넬.”

    알베르트가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해 이런 것인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 이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그자가 저희를 쫓고 있습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사실 성력이 담긴 마력석도 거의 떨어져 가는지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마법사가 맹렬히 그들을 추격할 때 겨우 그들의 모습을 숨겨 주고 있던 것이 바로 그 마력석이었다. 그런데 마력석이 떨어져 간다니. 그 말은 그들에게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알베르트는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숨을 뱉었다. 날이 추웠다. 입 밖으로 뱉은 숨은 뿌옇게 변해 허공으로 사라졌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렇게 되었을까. 자신은 한때 누구보다 빛났었다. 젊은 나이에 공작위에 올라 얼마나 많은 눈길을 받았던가.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칭송했었다. 특히 수려한 얼굴은 사람들의 호감을 끌기에 최고의 무기였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여자마저도 그의 얼굴을 볼 때는 종종 멍청한 표정을 짓고는 했으니.

    ……그래, 그 여자. 스텔라.

    첫 만남은 여느 인연들이 그렇듯이 우연이었다. 후원하던 수도원에 방문했을 때, 우연히 만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풍기던 오묘하면서 기분 좋은 향을 따라가 봤더니 계단에 앉아 무료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를 만났다.

    우연, 그놈의 우연. 모든 후회는 이름만 들어도 짜증나는 그 우연에서 시작됐다. 평생을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서 살아왔던 탓에, 모든 게 만만하게 느껴졌던 탓에. 우연과 인연, 감정에 운명까지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이 죄였다. 향을 맡았던 즉시 그곳에서 도망칠걸.

    ……그래, 당신은 진짜 독이었구나. 그녀의 앞에서 가끔 당신은 독 같다며, 중독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이었구나.

    그녀를 쫓고 쫓고, 수 년 간 쫓다 보니 그녀가 옆에 없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지경까지 왔다. 마법사가 연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코르넬이 말했었지. 이번에는 정말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수십 년 만에 세상에 나타난 마법사에게 미움받은 젊은 공작. 그 칭호가 붙자마자 그를 칭송하던 사람들은 전부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다는 마법사에게 미움받은 그를 감히 도울 용기가 없었다는 말이 더 맞겠지.

    알베르트는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연한 금발, 그리고 붉은 눈……. 또 무슨 특징이 있더라. 어떻게 생겼더라. 그렇게 사랑했었으면서,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의 삶도 망쳐 버렸으면서 이제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니. 이 무슨 모순인가. 알베르트는 낮게 웃었다.

    뜨겁던 사랑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점점 식어 갔다. 아마 마법사가 공작저를 습격한 순간, 그쯤부터였을 테다. 자신이 왜 그런 사랑을 했었나, 스스로의 마음에 의심이 갈 정도로.

    그가 기억하기에 그녀에게서는 항상 특이한 향이 났었다. 그는 그 향을 참 좋아했었다. 맡으면 또 맡고 싶었고…… 하여튼 그러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기분은…… 약에 찌들어 있을 때와 기분이 비슷했다. 이제는 무슨 향이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코르넬이 옆에서 계속 그를 끌어당겼다. 가야 합니다 공작 전하, 가야 합니다 전하. 그는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다만 가야 한다고 중얼거리듯 말하는 그도 꽤 지쳐 보였다. 하기야, 며칠 간 쉬지 않고 달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힘을 주고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일어나서 무엇하나. 도망친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지나. 이미 가문은 몰락하여 사라지고 자신은쫓기는 신세가 되었는데, 계속 이렇게 살아 무얼 하지? 애초에 무얼 할 수 있긴 한가? 그 마법사가 계속 자신을 쫓을 것이 분명한데.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다고. 알베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코르넬도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전하, 제발……. 더 이상 남아 있는 마력석이 없습니다.

    그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코르넬이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것은 바닥에 흩부려진 핏자국…… 그리고

    거 봐, 코르넬. 도망쳐 봐야 소용이 없었다니까. 알베르트는 작게 웃으며 이미 사라져 없는 이에게 말을 건넸다.

    “죽을 때가 다 됐는데 뭐가 좋다고 웃어?”

    마법사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알베르트는 앉아 있는 데다가 마법사는 키가 꽤 컸기 때문에 마법사와 눈을 맞추려면 한참 고개를 들어야 했다. 알베르트는 굳이 고개를 들지 않고 마법사의 무릎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내가,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너 혹시 미친 건 아니니? 남의 인생에 간섭할 때는 그렇게 즐거워하더니.”

    자신이 남의 인생에 간섭할 때 즐거워했던가. 사람을 죽이며 즐거워했던가, 사람을 고문하며 즐거워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영영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아니, 미래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겠다. 자신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눈앞의 마법사에게 죽을 테니까.

    “……뭐, 유언이라도 들어 줄까. 오늘이 지나면 어차피 잊어버릴 테지만. 들어 주기라도 한 테니.”

    “후회…… 후회해.”

    “후회?”

    “그래, 후회…….”

    “뭘 후회하는데?”

    무엇 하러 굳이 그런 것까지 묻나. 어차피 기억해 줄 것도 아니면서. 오늘이 지나면 잊을 거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제법 착실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것…….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텐데…….”

    힘이 없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법사가 잘 들은 것이 맞나. 기껏 말한 것을 바로 잊어버렸으면 큰일인데. 알베르트는 고개를 조금 더 들어 아리안과 눈을 맞췄다. 조금 고개가 아프기기는 했으나 대화하기에는 훨씬 수월했다.

    “그게 끝이야?”

    “그럼 무엇이 더 필요하지?”

    “다른 사람한테 한 행동이 후회스럽지는 않아? 너 사람 많이 죽였잖아. 너 도망치고 나서 저택 뒤지면서 기록으로 남은 것들 세어 본 것뿐인데도 못해도 수백 명은 되겠던데.

    알베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없어 느릿하게 행동한 것뿐이었으나 언뜻 보면 죄책감에 물든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이는 긍정의 표시였다. 그게 아니라면, 저것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답변.

    “……그럼 사람 죽인 건 후회 안 해? 아무 죄 없는 사람도 많던데. 그리고, 스텔라한테는? 네가 가장 많이 괴롭힌 게 스텔라인데 왜 스텔라한테는 안 미안할까.”

    “…….”

    “다시 한 번 물어볼게. 정말, 조금도 안 미안해? 스텔라한테 한 짓 정말 조금도 후회 안 해?”

    알베르트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후회를 한다면 그건 다른 이들을 위한 후회가 아니라 자기자신만을 위한 후회일 테다.

    “…….”

    알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표정하던 마법사의 얼굴에 경멸이 담겼다. 알베르트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저렇게 경멸할 만한 말을 했나. 그저, 유언을 들어 주겠다길래 마음에 담아 뒀던 말을 한 것뿐인데.

    “그래……. 네바에랑 보러 갔었던 연극도 이랬었지. 악당 놈들은 절대로 후회도 속죄도 사과도 안 하는구나. 딱 연극에 나왔던 악당 수준이야. 그때는 멍청하고 억지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생각보다 배울 게 많았다니까.”

    네바에? 연극, 악당? 마법사는 자신만 알아들을 것 같은 말을 중얼거리다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장검을 예상했으나 검은 생각보다 짧았다.

    마법사의 손에는 어두운 색상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손잡이의 중앙에는 보라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것이, 가문이 몰락하기 전 자신이 저책 홀에 전시해 뒀던 장식용 검처럼 보였으나 마법사는 실제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검의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것이 검이 장식용이 아님을 증명했다.

    “…….”

    게다가 그것은 단순한 단검이 아니었다. 마법사가 검을 휘두르자 검에서 보라색 빛이 뿜어져 나와 그의 몸을 갈랐다.

    검이 가르고 지나간 부분에서 시작해 따듯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정신이 몽롱했지만 그 따스한 액체가 자신의 피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마법사는 굳이 알베르트의 끝을 지켜보지 않았다. 마법사는 알베르트가 흘러나오는 피를 막을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시선을 거두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알베르트는 마법사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핏자국만 남기고 날아갔던 코르넬의 머리통이 보였다. 그의 머리는 눈을 번쩍 뜬 채 벽에 박혀 알베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섬뜩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아무리 봐도 자신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공작의 기사들이 전부 도망갔을 때 그만이 끝까지 공작의 옆에 남았다. 몰락한 공작의 옆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공작의 사냥개라고 불리더니 정말 마음까지 사냥개가 되어 버린 모양이야. 충성밖에 모르는 머저리 같으니라고. 알베르트는 그를 머저리라 욕했다. 자신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모든 것을 잃은 공작이 죽기 직전까지도 여전히 손에 쥐고 있을 수 있던 것은 기사 하나뿐이었다. 알베르트는 은은하게 웃으며 자신도 눈을 감았다.

    코르넬, 너는 내가 거둔 최고의 기사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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