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치세요, 아가씨-94화 (94/100)

-외전 15-

“……스텔라? 노아?”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것인가, 하고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으나 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금방 오겠다고 했는데 성격 한번 급하네.”

애니카는 툴툴거리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지나갔다. 어차피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은 광장으로 모일 것이고, 그중에는 스텔라와 노아도 있을 것이다.

애니카는 맥클라우드에서는 통하지 않을 제국어로 지나가겠다는 말을 연발하며 광장으로 향했다. 해는 완전히 진 지 오래였지만 불꽃놀이는 아직 시작하지 않은 채였다.

“스텔라! 노아! 어디 있어?!”

광장에 도착한 후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스텔라와 노아의 이름을 외쳤지만 주변 사람들만이 그녀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 지나갈 뿐,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러다가 불꽃놀이가 끝날 때까지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덜컥 걱정이 됐다.

“진짜 어디 간 거야, 스텔라……. 자기도 불꽃놀이 보고 싶다고 했으면서. 스텔라! 노아!”

그때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애니카는 금방 그가 노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노아!”

“애니카 누나.”

“어디 있었어. 같이 불꽃놀이 못 보는 줄 알고 한참 찾았잖아. 스텔라는? 스텔라는 어디 있어?”

말하기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지, 노아는 잠시 말하기를 망설였다. 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왠지 그의 어렸을 적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스텔라 누나는, 아파서 먼저 들어갔어.”

“뭐라고?”

스텔라가, 아프다고? 애니카는 놀라 노아가 한 말을 또박또박 따라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그러자 노아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도 가 봐야 할 것 같아. 간호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잠깐만. 그럼 나도 같이 가.”

“아니, 스텔라 누나가 자기 때문에 걱정 끼치는 거 싫다고 누나는 불꽃놀이 마저 보고 들어오래.”

“스텔라가 아픈데 내가 어떻게 불꽃놀이를 계속 봐.”

“나는 먼저 들어가 볼게.”

“야, 잠깐! 노아!”

노아는 뒤돌아 집으로 가는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인파에 밀려 손은 미끄러지고 말았다. 몇 번이고 애타게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노아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애니카는 바보처럼 멍청하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화려한 불꽃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불꽃놀이를 함께 보지 못하면 어떡하나 그렇게 걱정했는데 현실이 되어 버렸다. 집에서 침대에 누워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한데 모여 다 같이 보고 싶다는 그녀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었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애니카는 사람이 드문 언덕으로 향한 후 물통을 바닥에 팽개치듯 내려놓은 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며칠간 일하는 시간마저 즐겁게 느껴질 정도로 기대하던 날이었다. 그렇게 기대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리다니.

언덕 위에 올라 광장을 내려다보니 사람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들 건국제를 잘 즐겼다는 듯 후련한 표정이었는데, 그녀만 아니었다. 그녀만 서운했고 그녀만 아쉬웠다.

“아으…….”

“흐으…….”

서러워 앓는 소리를 내며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팍 묻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조금 늦게 들려온 소리는 그녀가 낸 것이 아니었다. 애니카는 멍청하게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

분명 노아는 불꽃놀이가 시작하기도 전에 스텔라를 간호해야 한다며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했으니 그렇게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는 누구인지. 눈을 아무리 비비고 다시 봐도 저 검은 머리칼도 저 얼굴도 노아의 것이 맞았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군가를 끌어안고 상대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스텔라를 간호하러 가겠다면서. 지금 아픈 스텔라를 두고 저러고 있는 거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으려는 순간,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여자는 스텔라였다. 다시 말해 노아와 스텔라,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진득하게 혀를 섞고 있었다. 놀라 입이 절로 벌어졌다. 정말 저 두 사람이 스텔라와 노아인 것인가, 자신이 지금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했다.

하지만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둘은 자신이 알고 있는 스텔라와 노아가 맞았고 환각도 아니었다.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헤어져 있던 몇 년 동안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입만 벌리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스텔라가 제 입을 떼어 내며 물었다.

“애니카는 먼저 집에 들어갔다며.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프면 약이라도 사 가서 같이 있어 줘야 할 텐데…….”

게다가 자신은 여기 멀쩡하게 서 있는데 먼저 집에 들어갔다니. 그리고 스텔라는 아파서 먼저 들어갔다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야?

“아니, 그냥 피곤하다고 하더라. 며칠간 계속 피곤해 보였잖아. 피로가 쌓였나 봐.”

애니카는 노아가 하는 말을 멍하니 듣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가 갑자기 와서 스텔라가 아프다고 했을 때 의심을 했어야 했다.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이게 감히 나를 속여? 애니카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달려 나가 노아를 바닥에 팽개치고 마구 짓밟으며 화를 풀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그들을 지켜봤다. 아니, 지켜보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친구랑 아는 동생이랑 언덕에서 입술 비비는 걸 봐서 무엇 하나. 애니카는 마차를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피곤한 몸을 겨우 침대까지 끌고 가 누웠다. 잠드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노아 이 망할 놈 하고 중얼거리다 보니 금방 의식이 흐려졌다.

***

“애니카!”

쿵쿵.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애니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꿈인가 싶어 무시했으나, 그 누군가는 집요하게도 애니카가 일어날 때까지 문을 두드려 댔다. 애니카는 잠결에도 어렵지 않게 그 누군가가 스텔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벽의 미약한 햇빛이 눈가를 간질였다. 애니카는 눈을 비비다가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전날 건국제가 끝나고 아주 푹 잔 모양인지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애니카! 애니카!”

아침 일찍부터 스텔라의 목소리와 함께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애니카는 미적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비틀 문으로 걸어갔다. 이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지.

“스텔라……? 이 이른 시간부터 왜…….”

“애니카!”

문을 열자마자 스텔라가 들이닥쳐 애니카의 뺨을 잡고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봤다. 어디 상처라도 있는지 살펴보고 열이 있나 손으로 이마를 짚어 보고, 그녀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스텔라는 그녀를 놓아줬다.

“어제 아프다고 미리 들어갔잖아. 혹시 혼자 쓰러져서 끙끙 앓고 있을까 봐 와 봤어.”

“아……. 맞다, 노아가 너한테 그렇게 말했었지.”

“노아가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도 그냥 혼자 들어가겠다고 했다며. 왜 그랬어? 가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뭐? 데려다주겠다고 해? 그놈이 그런 말까지 했단 말이야?”

목이 터져라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고 가 버릴 때는 언제고 저런 휘황찬란한 거짓말을. 애니카는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스텔라는 그런 놈이 뭐가 좋아서 어제 그렇게 쪽쪽대고 있었을까. 역시 얼굴인가. 스텔라는 예전부터 얼굴에 약했으니.

“애니카.”

“…….”

“애니카.”

“…….”

“애니카?”

“아, 응. 왜 그래?”

“무슨 생각을 하기에 부르는 것도 못 들어.”

차마 너희가 전날 입을 부닥치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 답할 수는 없었기에, 애니카는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노아 말 들어 보니까 많이 아팠던 거 같은데. 지금은 괜찮은 거 맞아?”

스텔라가 몇 번을 물어보든 애니카는 괜찮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애초에 아팠던 적이 없었으니.

“당연하지. 한숨 푹 자니까 다 나았어.”

스텔라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려는 듯 위아래로 매섭게 눈동자를 굴리더니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다행이네.”

애니카는 뒤늦게 자신들이 문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문을 잡아당겨 활짝 열며 말했다.

“들어와서 차나 마시고 갈래?”

“잠이나 깨고 말해.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것 같은데.”

애니카는 멋쩍게 웃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 눈앞에 있는 친구의 얼굴조차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으니.

“난 가 볼 테니까 조금 더 자. 너무 늦게까지 자지는 말고. 아픈 건 잘 쉬어야 나아.”

“으응.”

“식사도 잘 챙기고. 바쁘고 귀찮다고 대충 사과로 데우지 마. 잘 안 먹으면 아픈 것도 안 아나.”

도대체 지난 5년 사이에 제 친구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잔소리쟁이가 돼 버린 걸까. 그나저나 아침도 사과로 때우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나 갈게.”

애니카는 비몽사몽한 눈을 한 채로 스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애니카는 스텔라를 보내고 침대에 누워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던 동생은 은근히 걸리적거렸다.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과 스텔라 사이를 방해하려는 듯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노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스텔라에게 전부 말해 버릴까? 아니, 그래도 5년 전에 같이 사라졌었으니 같이 산 세월이 결코 적지 않을 테다. 스텔라가 노아의 그 성격을 모를 리가 없는데.

“…….”

애니카는 고개를 마구 저어 털어 버린 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다시 헤어지지 않고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쭉 함께 살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노아가 옆에 붙어서 깝죽거리든 말든, 자신이 더 달라붙으면 되는 것 아닌가. 못 보고 산 세월이 몇 년인데, 이거면 충분하지. 물론 노아 그놈이 옆에서 깝죽거리는 게 거슬리기는 하지만. 애니카는 눈을 감고 살포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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