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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93화 (93/100)
  • -외전 14-

    “하긴 노아 너는 옛날부터 스텔라를 많이 좋아했으니까 그런 망상을 할 법도 하지.”

    “망상이라니.”

    노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일그러진 얼굴이 조금 험악해 보였지만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수 년 간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고 살면서 는 것은 눈치밖에 없었다.

    애니카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한 번 친구를 세게 끌어안았다. 스텔라는 답답하다고 불평하면서도 애니카와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다.

    돌아오기만을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들을 맥클라우드에 와서야 만나게 되다니. 상단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애니카는 상단주를 떠올리며 제국이 있는 방향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노아와 스텔라가 혼자 꾸벅거리고 있는 그녀를 조금 이상하게 쳐다보기는 했지만 뭐 어떤가.

    애니카는 그들과 헤어져 침대에 누운 후에도 그녀에게 일어난 기적이 꿈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볼을 꼬집어보았다. 다행히도 세게 비틀어 꼬집힌 볼은 아팠다.

    ***

    맥클라우드 왕국에 온 첫날부터 통역사 역할을 해 주고 있는 여자가 애니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날과 금일 그녀의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어제는 되게 피곤해 보이셨는데. 어제는 오래 배를 타고 오시느라 힘들어서 그러셨던 걸까요?”

    “글쎄요. 어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보죠.”

    그리고 기분이 좋은 건 맞지만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일이 이렇게 힘든데 피곤하지 않을 리가.

    애니카는 뒷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삼켰다. 통역사의 귀에 들어가는 말은 전부 맥클라우드 왕국 상단주에게 전해질 것이다. 통역사의 앞에서는 그저 후후 기분 좋은 척 웃었다.

    그래, 오랜 친구를 만나 기분이 좋은 것까지는 좋았다. 다만 일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스텔라에 대한 생각이 떠나가지를 않았다. 스텔라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더라. 헤어져 있던 시간이 너무 길어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니, 애초에 스텔라가 가리는 음식이 있던가. 웬만하면 다 잘 먹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 옆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노아가 떠올랐다. 스텔라와 노아. 노아가 어렸을 때부터 스텔라를 따랐다고는 해도 의외의 조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봐도 결혼을 한 듯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모니카 공작을 피해 둘이 사랑의 도피라도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스텔라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또 그럴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노아는 그냥 순수하게 스텔라를 좋아하는 것뿐이었고, 스텔라가 어렸을 때부터 봐 온 꼬맹이를 사랑할 리가 없었다. 적어도 애니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적어도 건국제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스텔라를 만난 다음 날, 일을 마친 후 통역사가 함께 가 주겠다고 한 것까지 마다하고 애니카는 홀로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 언어로 겨우 사과를 사들고 스텔라의 집으로 향했다. 아침에 사과를 먹으면 좋다는 잔소리를 몇 마디 한 후에 어떤 음식을 좋아했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저기요, 저기. 저기에 내려 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루마스 루마스.”

    어색한 발음에도 마부는 허허 하고 흐뭇하게 웃으며 잘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어 줬다. 애니카도 마부를 향해 마주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제는 이야기도 제대로 못 나눠 봤는데 오늘은 어떨까.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까. 애니카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두꺼운 나무문을 두드렸다.

    “스텔라?”

    하지만 몇 번이고 문을 두드리며 스텔라를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창문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기에 그 너머가 보이지 않았으나, 빛이 새어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둘 다 잠든 듯했다.

    뭐,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오면 되지. 애니카는 바구니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날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한 것을 후회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상단이 위치한 도시까지 그녀를 태우고 갈 마차가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부랴부랴 가방에 사과를 쑤셔 넣고 집을 박차고 나왔다.

    다행히 집에서 나왔을 때 아직 마차는 출발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는 스텔라도 보였다.

    시간이 없어 사과의 효능을 설명할 새도 없이 스텔라의 손에 사과 한 알을 쥐여 주고 급하게 뛰어올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먹는 사과가 얼마나 좋은지는 저녁에 설명하도록 하자. 애니카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손을 흔들어 주는 스텔라를 뒤로한 채 마차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충 의미 정도는 전달이 되었기를 바라며 애니카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태운 마차는 빠르게 달려 상단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아슈르 씨. 좋은 아침이에요. 사과 한 알 드시겠어요?”

    “아, 감사합니다. 애니카 씨도 좋은 아침이에요.”

    애니카는 통역사에게 사과 한 알을 건네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제국 상단에서 그녀에게 보낸 서류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팔뚝을 쓰다듬어 스스로를 위로하고 옆에 앉아 있는 통역사에게도 위로의 눈빛을 던졌다. 애니카가 처리한 서류를 맥클라우드어로 번역하는 것은 아슈르의 일이었으니.

    애니카가 서류를 넘기면 아슈르는 그저 말없이 제국어를 맥클라우드어로 번역했다. 점점 말이 없어지다 보니 애니카는 왠지 이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심지어 주어진 일을 전부 끝내고 휴식 시간이 되었음에도 아슈르는 입을 열지 않았다.

    “…….”

    “…….”

    “……저, 아슈르 씨.”

    애니카가 조심스럽게 아슈르를 부르자 그녀가 뭐냐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소중한 휴식 시간을 방해했기 때문일까. 그녀의 눈빛은 어쩐지 매서워 보였다.

    “왜 그러시나요?”

    “아, 다름이 아니고. 제가 온 지 며칠 안 된지라 이곳 지리도 잘 모르잖아요. 혹시 가 볼만한 곳 추천해 주실 수 없나 해서요.”

    “……아.”

    “근데 피곤하실 텐데 제가 괜히 방해한 건…….”

    “괜찮아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방해가 아니라는 말은 안 하는구나. 애니카는 어색하게 웃었다.

    “근데 멀리 가지 않는 이상 이 주변은 전부 도시예요. 빽빽한 건물들을 보고 싶으신 게 아닌 이상 특별히 가 볼만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아. 그런가요.”

    “그래도 다음 주부터 일주일 간 광장에서 불꽃놀이를 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네요. 건국제 때문이었나.”

    “건국제요?”

    애니카가 얼른 반색하며 물었다. 애니카의 과하도록 환하게 웃는 얼굴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아슈르는 끝까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꽃놀이라니. 불꽃놀이는 그녀의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기억할 수 있었다. 수도원에 있을 때, 매년 마을 축제가 열릴 때면 스텔라는 항상 마을에 내려가 불꽃놀이를 구경하자며 그녀의 치마를 잡아끌곤 했었으니까.

    “고마워요, 아슈르 씨. 제가 지금 가진 게 없어서 보답으로 드릴 건 사과밖에 없는지라, 일이라도 좀 도와 드릴까요?”

    아슈르는 그저 하하 하고 웃을 뿐이었다. 물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맥클라우드어도 모르면서 돕긴 뭘 도와요. 애니카는 그 의미를 대강 알아채고 그냥 아슈르를 따라 하하 웃었다.

    ***

    애니카는 전날과 같이 손에 사과가 가득 든 바구니를 든 채 문은 두드렸다.

    “스텔라?”

    소리 내어 스텔라의 이름을 부르자 안쪽에서 사람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활짝 열렸다. 키가 그녀와 비슷한 것을 보니 스텔라인 듯했다.

    또 일찍 잠에 들려던 건지 집 안이 어두웠다. 밤인 데다가 불까지 켜지 않아서 스텔라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건 그녀가 말할 때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입모양뿐이었다.

    마차에서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연습했으면 무엇하나. 막상 말을 할 때가 되니 걱정이 돼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헤어져 있던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이제 친구가 불꽃놀이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여?”

    반면에 그녀의 반응은 수 년 전과 같았다. 애니카가 무슨 말을 하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줄 것처럼. 그래, 그냥 말하면 되지 이런 쓸데없는 걱정해서 무엇하겠나.

    “스텔라. 불꽃놀이 아직도 좋아해? 그, 예전에는 네가 막 같이 불꽃놀이 보러 가자고 조르고 그랬었잖아. ……비록 내가 그때는 같이 안 가 주긴 했었지만…….”

    “불꽃놀이?”

    “다음 주에 광장에서 불꽃놀이를 한다길래.”

    “당연히 아직 좋아하지. 잠시만, 노아한테도 물어보고 올게.”

    스텔라는 잠시 후 돌아와 ‘노아도 가겠대’라는 답을 가져왔다. 아아, 다행이다. 둘 다 1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았구나. 애니카는 표정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빙긋 웃었다.

    ***

    건국제 당일.

    “애니카! 저기! 저기 가 보자!”

    “누나, 같이 가.”

    같은 집에 사는데도 노아와는 달리 유난히 피곤해 보이던 스텔라는 광장에 나오자마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서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오히려 항상 쌩쌩하던 노아가 그녀를 따라다니느라 진땀을 뺄 지경이었다.

    오히려 집에서 더 쌩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쉼터가 되어야 할 공간에서 더 힘이 없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집에서 노아가 스텔라한테 노동이라도 시키는 건가.’

    애니카는 꼬치를 입에 욱여넣으며 둘의 모습을 지켜봤다. 노아가 스텔라를 졸졸 따라다니며 챙기는 모습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정말 뭘까, 저 둘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둘의 관계는 너무도 오묘하게 변해 버렸다.

    “아, 잠시만. 오래 걸었더니 목마른 것 같아. 나 물 좀 사 올게.”

    “내가 같이 가 줄까?”

    애니카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문이 뭐 별것이겠는가. 손짓 발짓으로도 충분히 해결 가능한 것을. 스텔라가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애니카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녀가 괜찮다고 우기니 따라오지는 않았다.

    “금방 올게!”

    해맑게 외치며 가게로 들어갔으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섯 가지 사이즈로 물통들이 그녀의 앞에 놓여 있었다. 애니카가 손짓 발짓에 최선을 다해 물을 사왔을 때 노아와 스텔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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