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치세요, 아가씨-92화 (92/100)

-외전 13-

외전 2

“애니카. 너 출장이다.”

“……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긋방긋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애니카가 급격하게 표정을 굳혔다. 말도 안 돼, 출장이라니.

“맥클라우드 왕국에 있는 상단이랑 이번에 계약을 맺었거든. 네가 우리 상단 대표로 좀 가 줘야겠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애니카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5년 전, 그녀의 친구가 사라졌다.

물론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10년 전에도 그녀의 친구는 이유도 제대로 말해 주지 않은 채 사라졌었고,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친구는 갑작스럽게 돌아왔다. 돌아왔을 당시에 모니카 공작과 함께 있기에 그와 결혼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이뤄진 사랑이라니. 당시의 애니카는 그들이 소설 속에 나오는 연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5년 전 모니카 공작가는 몰락했다. 상단에 들어가 승승장구를 하던 그녀에게 이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하던 일도 전부 내팽개치고 공작저로 달려갔으나, 어디서도 친구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경비병들이 출동해 무너진 공작저를 수색하고 있기에 가서 금발에 붉은 눈을 가진 여자는 없었냐고 물었다. 누구에게 물어도 돌아온 대답은 똑같았다. 그런 사람은 없었다.

오랜 친구를 만나고 싶어 공작저에 찾아갈 때마다 그녀는 이곳에 없다는 말만 돌아오기에 공작이 제 친구를 너무 사랑해 둘러댄 거짓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그것이 거짓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죽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애초에 공작저에 있었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친구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자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녀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잠시 마을을 떠난 것뿐이다. 애니카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이상한 점은, 친구가 사라진 시기에 맞춰 함께 사라진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이었다.

노아. 제 친구를 잘 따르던 어린아이.

10년 전 친구가 사라졌을 때 아이는 이상해졌다. 그녀가 스텔라와 친했던 탓이었을까, 애니카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예의만을 지키기는 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친구는 사라졌고 아끼던 아이는 변했다. 자신만을 제외하고 세상이 갑자기 변한 것 같다고, 애니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친구가 돌아오자 아이는 매우 기뻐했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둘 다 사라졌고. 불법적인 단체에 의뢰를 해서라도 그들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매번 찾을 수 없었다는 대답만 들려올 뿐이었다.

애니카가 상단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제국에 남아 있으려고 한 이유는 그들이었다. 언제까지고 그들을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출장이라니. 그렇게 되면 그들이 돌아왔는지, 돌아왔다면 언제 또 떠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상단주님.”

“어서 가서 짐 싸지 않고 뭐 해?”

“그, 트리센 마을 말인데요. 혹시 제가 맥클라우드에 가 있는 동안 트리엘 마을에 노아나 스텔라라는 사람이 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저한테 연락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상단주는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냐는 듯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애니카는 고개를 꾸뻑 숙여 인사한 후 방을 빠져나왔다.

***

챙길 물건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맥클라우드 왕국에서 사용할 돈과 입을 옷가지 조금. 그게 전부였다. 애니카는 가벼운 짐 가방을 들고 상단에서 운행하는 배에 올라탔다.

푸름을 넘어 시퍼렇기까지 한 바다를 보니 노아의 두 뺨을 쥐고 눈동자가 바다 같다며 신기해하던 제 친구가 떠올랐다.

맙소사, 이제는 바다만 봐도 스텔라를 떠올릴 지경이라니. 이쯤 되면 상사병이 아닐까. 애니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홀로 웃었다.

맥클라우드 왕국은 제국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배로 한 달은 족히 걸렸다. 그 한 달 동안 애니카는 배는 사람이 탈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다.

“아…… 으……. 배는 사람이 탈 만한 게 아니야…….”

웩. 애니카는 갑판에 걸터앉아 구역질을 했다. 맥클라우드 왕국의 항구가 멀지 않았으나 오랜 항해로 인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종이 인형처럼 비틀거리며 배에서 내렸다.

항구에서 내리자마자 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여자가 그녀를 맞았다. 맥클라우드의 상단에서 보내 준 사람인 듯했다. 애니카는 여자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그녀가 맥클라우드에 머무르는 동안 사용할 집을 고르러 갔다.

여자가 보여 준 애니카를 위해 준비된 집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조용한 곳을 좋아했기에, 애니카는 마을의 도시의 외곽에 있는 집을 보여 줄 것을 요구했다.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자 금방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 펼쳐졌다. 집은 아홉, 아니 열 채 정도일까. 대충 세어 봤기에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정도인 것 같았다.

애니카는 여자가 마지막으로 보여 준 집을 골랐다. 여자는 다음날 아침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애니카는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마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을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마을에 외지인이 왔는데도 나와 구경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맥클라우드는 먼 나라였다. 비교적 제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언어가 비슷한 아르엘 왕국과는 달리 맥클라우드의 언어는 제국과 정반대였다. 맥클라우드에 오기 전 이웃들과 말이 안 통하면 답답해서 어떻게 사나 걱정했던 시간이 왠지 부질없게 느껴졌다.

***

하루는 바쁘게 흘러갔다. 맥클라우드의 상단에 불려가 상단에 대한 소개를 주고받고 상단주가 전하라고 지시를 내린 제국 상단 측의 의견을 전하고 제국과 맥클라우드 간의 무역로에 대한 회의를 하고 무역 상품 가격에 대해 협상을 한다.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것 같은 일정이었다.

그녀는 달이 하늘 높이 뜬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애니카는 다음날 아침으로 먹기 위해 산 사과를 양손 가득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난관을 마주한 것은 집 문 앞에서였다. 열쇠가 가방에 들어 있는데 품에 가득한 사과들 때문에 열쇠를 꺼낼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구니를 챙길걸.

뒤늦게 후회해 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니카는 최대한 사과를 떨어뜨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고자 했다. 사과 중 일부를 입으로 무는 등 별짓을 다 해 봤으나 결국 사과들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중 하나는 빠르게 굴러가 옆집의 문을 쿵 하고 두드렸다. 애니카는 부디 이웃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기를 빌었다. 통역사도 없는 곳에서 어눌한 발음으로 이웃과 인사해야 한다니. 일에 찌든 지금의 상태로는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기도가 무색하게도 한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 없던 이웃이 드디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애니카는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긴 금발을 가진 이웃은 말없이 바닥의 사과를 함께 줍기 시작했다. 애니카는 묵묵히 사과를 주우며 맥클라우드어로 감사하다는 말을 어떻게 했었는지 떠올리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애니카는 암흑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어, 그러니까…… 맥클라우드어로 감사하다는 말이 뭐였더라…….”

“루마스요, 루마스.”

“아, 맞다. 그랬었지.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마스.”

애니카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루마스’를 외치고 한참 후에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웃이 제국 사람이었다는 것?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았다.

목소리가 익숙했다. 이런 먼 나라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리가 없는데, 애니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홀린 듯 눈앞의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마침 마법으로 만든 등불이 거리를 밝혔다. 애니카는 이웃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스텔라!”

“……애니카?”

역시나 이웃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금발에 붉은 눈. 그리고 익숙한 그 목소리. 그녀는 스텔라였다. 스텔라도 곧 그녀를 알아보고는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너 왜 지금까지 안 돌아왔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미안, 미안해, 애니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으나 애니카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옆집에서 누군가 스텔라를 따라 나왔다. 그 또한 익숙한 얼굴이라, 애니카는 바보같이 멍청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뭐야 노아 네가 여기 왜 있어!”

그러면서도 애니카는 얼른 달려가 남자의 흑색 머리카락을 문질러 헝클어뜨렸다. 남자의 짧은 짜증이 들렸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스텔라가 사라진 후부터 그가 꽤 자주 보여 왔던 반응이었으니까.

“……애니카?”

“애니카가 뭐냐, 애니카가! 누나라고 불러야지!”

“아, 그렇지. 애니카 누나.”

애니카가 꿱 소리를 지르자 헷갈렸다는 듯이 말을 정정하기는 했으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건 헷갈렸을 때의 표정이 아니었다.

“애가 못 본 사이에 왜 이렇게 능구렁이가 됐지.”

“칭찬으로 들을게.”

노아가 말 그대로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애니카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와는 상당히 분위기가 달랐다. 예민이 극에 달했던 그때와는 달리 그는 꽤 여유로워 보였다.

“근데 너희 왜 같이 살고 있어?”

“아, 이건.”

“너희 혹시 결혼했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역시 그렇게 보여?”

스텔라는 부정을, 노아는 긍정을 표했다. 함께 살면서 서로 다른 대답이라니. 애니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을 번갈아 봤다.

오래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모니카 공작과 스텔라가 함께 수도원을 찾아왔을 때 그녀는 비슷한 질문을 던졌었다. 그때는 정말 공작과 제 친구가 결혼하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품고 있었기에.

물론 그런 소설 같은 일을 상상하며 꺅꺅거리기는 무리였다. 이제 그녀는 너무 성장해 버렸다. 애니카는 노아의 말보다는 스텔라의 말을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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