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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91화 (91/100)

-외전 12-

쓰러져 있는 마법사들 중에서는 서로에게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폭발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아리안은 그들을 보고 자신이 신경을 안 쓰는 동안 마탑이 개판이 됐다며 그저 조용히 혀를 찰 뿐이었다.

그때 방 어딘가에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안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에는, 폭발을 일으킨 마법진의 한가운데에 메릴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가 누워 있었다.

“…….”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마법사인 그녀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아기의 목을 조르고 있는 붉은색의 빛이.

그것은 마치 아기를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기의 목을 조르고 있는 어두운 붉은색의 빛. 이는 메릴이 사용하는 마법의 색이었다.

맙소사, 메릴. 어떻게 죽어서도 그리 추악할 수가. 아리안은 손을 가볍게 휘둘러 아기의 목을 조르던 힘을 쫓아내고 아기를 품에 안았다.

아니, 자세히 보니 메릴의 마력뿐만이 아니었다. 가지각색의 마력들이 우는 아기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아리안은 벌레를 쫓듯 손을 휘둘러 그것들을 쫓았다.

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놈들. 아리안이 아기에게 달려드는 마력을 쫓아내며 중얼거렸다. 그들의 추악한 밑바닥을 보기 위해 마탑에 그들을 들여보냈었나. 아리안은 그나마 카일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음에 안도했다.

마력의 출처는 그들이 집필한 책들이 쌓여 있는 더미였다. 그들의 살아생전에 비하면 미약한 양이기는 했으나, 분명히 마력이 느껴졌다. 책들에 그들의 마력이 담겨 있었다.

아리안은 마력이 느껴지는 책들을 전부 모아 도서관에 차곡차곡 꽂았다. 그리고 마력이 도서관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방에 마법을 걸었다.

메릴이 벌려 놓은 일을 수습하는 것은 전부 아리안의 일이었다. 뒷수습이 전부 끝난 후에야 아리안은 허기를 느끼고 주린 배를 움켜잡았다.

마탑에 사람이 붐볐던 동안에는 느껴 본 적이 없던 허기에, 아리안은 괜히 카일을 떠올렸다. 그녀라면 몇 주쯤 굶어도 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아리안의 식사를 챙기려고 했었다. 카일이 지금의 그녀를 봤다면 당장 잔소리를 했을 게 분명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세상에 없었으니.

그때 다시 조그마한 아기 울음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생각해 보니 뒤처리에 몰두하느라 아기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리안은 우는 아기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전부 죽었다. 카일을 포함하여, 전부. 마탑에 남은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아리안과 아기, 이 둘이 전부였다. 지금의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마지막 인사도 없이 전부 떠나보내야 했기에, 그녀에게는 감히 남에게 신경 쓸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과연 제 몸 하나 챙기기도 힘들어하는 이가 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아기를 잘 돌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아기를 어딘가에 완전히 맡겨 버린다면 모를까…….

“…….”

아리안의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가라앉았다.

***

어두운 새벽, 아리안이 도착한 곳은 마탑에서 멀리 떨어진, 제국에 위치한 고아원이었다. 시간이 늦은 탓에 건물은 사람 소리 없이 고요했다.

그녀는 아기와 바구니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스텔라, 아리안이 유일하게 아기에게 준 것을 함께 담아.

미안, 미안해. 마탑의 마법사들이 네게 저지른 죄를 대신 속죄하지 못 해서 미안해. 아리안은 한참 동안이나 아기를 내려다보다가 겨우 발걸음을 뗐다.

그렇게 또 수년이 지났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의미 없는 일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아리안은 마탑에 틀어박혀 홀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벨라프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벨라프의 성격을 나타내는 듯한 깔끔한 편지지에 적힌 내용은 꽤 비참했다.

르비아가 세상을 떠났다. 원인은 전염병이라고 했다.

아리안은 즉시 겉옷을 걸치고 마탑을 나섰다. 참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개인의 비극과는 상관없이 세상은 잘만 굴러간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날이 따스했다.

오랜만에 본 벨라프는 흐른 시간에 비해 훨씬 더 늙어 보였다. 벨라프는 빠른 노화의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저 오래전 그가 르비아를 위해 사용했던 마법의 부작용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너도 참 무정하구나. 이런 큰일이 있어야만 나한테 연락할 생각을 하고.”

“지금이 장난이나 주고받을 상황이야?”

“장난친 거 아니었어.”

아리안은 꽤 오래 그의 오두막에 머물렀다. 식사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벨라프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이고, 이따금 마당에 나가 르비아의 이름이 적힌 묘비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그리고 벨라프가 카일의 부재를 알아차린 것은 며칠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카일은 어디 있냐는 그의 말에 아리안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마탑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그에게 전했다.

벨라프가 눈을 크게 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는 꽤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그 흔들리는 눈동자를 통해 묻고 있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말한다고 해도 달라진 것 무엇 있었겠는가. 오히려 르비아가 살아 있을 때 그 사실을 알렸더라면 그건 그것대로 좋지 않은 일이었을 테다.

벨라프가 어느 정도 안정됐다고 판단한 후에야 아리안은 마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마탑에 돌아온 후부터 더 이상 마탑에 찾아오는 마법사들을 받아 주지 않았다. 받아 주고 정이 들어 봤자 언젠가 떠나갈 이들이었다. 찾아온 이들을 문전박대하는 일이 반복되니 방문객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마탑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잊혀졌다. 한때는 사람들에게 마법사들이 악마들의 수하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졌다. 악마라고 부르기에 마법의 힘은 너무나도 유용했다. 왕국에 마법 왕국이라는 명예를 쥐여 줬던 마탑은, 점차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

사실 여태껏 마탑의 도서관은 이름뿐인 장소였다. 도서관의 책은 점점 불어났으나 이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도서관을 어떻게 도서관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연구를 통해 집필된 책은 후대를 위하여 도서관에 남겨졌다. 물론 마법사들은 대부분 각자의 연구에 미쳐 있던 까닭에 선대가 남겨 준 책을 읽어 볼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아리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그녀가 몽마에 대한 책을 펼친 것은, 마탑에 남은 사람이 그녀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에게 시간은 충분하다 못 해 넘칠 지경이었다.

책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몽마에 대한 전설, 그리고 그 전설에 대한 진실.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별것 없는 내용들. 내용에 대한 흥미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빠르게 종이를 넘기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던 아리안이 돌연 손을 멈췄다.

몽마의 검. 그곳에는 몽마의 검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글씨가 매우 작아 읽기 힘들기는 했으나, 아리안은 오랜 시간을 할애해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해 책을 읽었다.

아리안은 검에 대한 장을 읽자마자 생각했다. 아, 이거라면 벨라프가 잃었던 마법을 다시 되돌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검이 생성되는 조건을 읽자마자 포기했다. 몽마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만 몽마의 검이 생성된다.

그녀 또한 악마나 몽마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 그것들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족속들인지라,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간만에 영양가 있는 책을 발견했나 싶었더니, 이번에도 꽝이었다. 아리안은 거칠게 책을 덮었다.

“이걸 알아낸 놈도 대단하네. 그 이기적인 것들이 남을 위해 희생한 사례가 없었을 텐데. 이 책 대체 누가 쓴 거야?”

책의 표지에 적힌 저자를 확인했지만 이름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물론 이게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먼저 그녀를 찾아왔던 헬렌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으니까. 첫 방문자였기에 특별하다고 인식했던 그녀의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오죽할까.

그 후로 아리안은 간간이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하며, 대부분의 시간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죽은 마법사들의 마력이 담긴 책들이 원망할 상대를 찾아 덜컹덜컹 움직였기에 도서관에 오래 머무르는 일은 줄어들었고, 대신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다락방으로 가지고 올라왔다.

그날도 매일 똑같은 날들 중 하나였다. 아니, 책을 읽던 그녀의 눈앞에 갑자기 마법진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테다.

“……이게 무슨.”

마탑에 아직 남아 있는 마법사가 있었던가. 그럴 리가 없었다. 수십 년이 흐르도록 마탑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마법진은 누가 그린 것인지.

“…….”

다만 그녀가 마법진을 향해 발을 뻗은 것은 마법진 너머로 어렴풋이 몽마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저 마법진 속으로 들어가면 몽마의 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찾기는 했다. 다만 그녀가 아닌 다른 이의 손에 들려 있기는 했지만.

검을 손에 쥐고 있는 이는 아직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금발에 붉은색 눈. 어딘가 익숙했다. 그리고 후에 여자는 자신을 스텔라라고 소개했다.

스텔라.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아리안은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녀가 직접 지어 주었던 이름인데.

스텔라가 자신의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그때 못한 속죄를 하라는 의미인가. 벨라프, 네가 마법을 포기할 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래, 속죄. 이것은 속죄를 하라는 의미이다. 메릴을 대신하여, 아무 죄 없는 이를 이 꼴로 만든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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