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치세요, 아가씨-90화 (90/100)

-외전 11-

르비아는 그저 맑게 웃을 뿐이었다. 아리안은 그녀를 보며 저 미소에 벨라프가 홀랑 넘어가 마법이고 뭐고 다 내팽개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말은 좋은 의도로 한 말이었어.”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 마법사님.”

“마법사님이라니. 너무 거창하게 들리잖아. 그냥 간단하게 아리안이라고 부르면 되지.”

“칙칙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름을 부르라는 건지…….”

“카일. 입을 좀 다물 수는 없니?”

카일이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얄밉던지, 아리안은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쥐어박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애가 점점 메릴을 닮아 가는 것 같아.”

내내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들을 노려보고만 있던 벨라프가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메릴? 갑자기 메릴이 왜. 당신 다른 놈들이면 몰라도 메릴은 꽤 좋아했잖아. 성격은 별로지만 일은 열심히 해서 좋다며.”

“너무 열정적이라 문제지.”

“무슨 일이길래.”

아리안이 눈을 굴려 르비아를 쳐다봤다. 메릴이 르비아를 보고서 다른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글쎄, 르비아의 앞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리안은 얼른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래도 너보다는 낫지 않겠어? 너는 성격도 별로고 일도 열심히 안 했잖아.”

“……괜히 내 성격에 트집을 잡는 걸 보니 할 이야기가 떨어졌나 본데. 그럼 이만 마탑으로 돌아가지 그래.”

“할 이야기가 떨어지긴 뭐가 떨어져? 아직 르비아한테 말해 주지 못한 네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데.”

연구에 진전이 없어서 답답하다면서 책상을 때려 부쉈던 일, 카일이 노트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카일이 작성했던 연구 일지들을 전부 불태워 버린 일…… 또 뭐가 있더라. 아리안이 손가락을 접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벨라프가 말없이 팔을 뻗어 옆에 놓여 있던 의자의 손잡이 부분을 세게 쥐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의자를 집어 들어 불청객들을 마구 두들겨 팰 기세였다. 카일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그냥 돌아가자며 아리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아리안은 굴하지 않고 그 큰 몸을 구겨 르비아의 뒤쪽에 숨었다. 카일도 뒤늦게 아리안의 의도를 알아채고 그 뒤로 숨었다.

“아가씨. 저놈 표정 보여? 저 험악한 놈 데리고 살려면 고생이 많겠어.”

르비아가 그 말을 듣고 벨라프를 돌아봤을 때 그는 이미 세상 그 누구보다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는데도 그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아리안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이제 주소도 알았겠다, 매일 찾아와야겠네. 마침 요즘 할 일도 없어서.”

“르비아. 우리 이사를 생각해 보는 건 어때?”

“글쎄, 벨라프.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을 뿐만 아니라 난 이곳이 꽤 마음에 드는걸.”

아리안은 또다시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그들에게서 벗어나려는 벨라프의 처절한 시도는 르비아의 거절에 가로막혔다.

그리고 그 후 매일 찾아오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아리안은 매일같이 그들의 오두막을 방문했다. 카일은 제 할 일을 하다가도 아리안이 부르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안녕, 르비아. 오랜만이네.”

“오랜만은 무슨. 대체 어떻게 하면 하루를 오랜만이라고 하는지.”

“누가 너 보러 왔대?”

아리안이 보기에 르비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막무가내로 연구를 진행하는 메릴에게 시달리던 차에 만난 것이 르비아였고, 이전에 벨라프를 통해 들었던 그녀의 과거사는 그녀에 대한 동정과 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리안에게 시간이란 의미 없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잠에서 깨어나고, 카일을 끌고 오두막을 방문한다. 그리고 항상 해가 지면 마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수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카일을 끌고 나가기 위해 방을 나서던 중 메릴을 마주친 것도 그런 날들 중 하루일 뿐이었다. 아리안은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메릴의 얼굴에 팍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본 메릴은 품에 아기를 안고 있었다. 너무 어려,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 하는 갓난아기였다.

동생, 동생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오래전 그녀가 말하기를, 자신은 외동이었으며 가족과는 연을 끊은 지 오래라고 했으니까.

“마을에서 데려왔어? 뭐, 마법사야? 이렇게 어린애가 마법사일 수가 있나.”

메릴의 얼굴에 차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수년 전과 비교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오랜만에 대화하네요.”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자고 말 건 거 아니야. 내 허락 없이 마탑에 새로운 마법사를 들였냐고 묻고 있는 거지.”

“아리안이 저한테 단단히 화가 났던 건 알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설마 며칠도 아니고 수년 간 모른 척을 할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나요.”

“…….”

“벨라프랑은 오래전에 화해한 것 같던데……. 어땠나요? 그 여자랑은 아직도 잘 지내던가요?”

그녀는 지난 몇년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라면 이전보다 좀 더 간사해 보인다고나 할까.

아리안의 시선이 쭉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메릴이 그쪽으로 주제를 돌렸다.

아기의 동그란 머리 위로 솜털 같은 옅은 노란색의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었다. 아기가 힘겹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짙은 빨간색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리안. 아기의 이름을 대신 지어 줄래요? 제가 작명에는 영 재주가 없는지라.”

저 뱀 같은 것이 나한테 왜 저런 부탁을 하지. 아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메릴을 쳐다봤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오래 카일과 어울려 다니느라 그의 버릇이 옮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

그래도 설마 아기의 이름을 짓는 것뿐인데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겠나. 아리안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메릴을 보고도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스텔라. 진짜 마탑에서 키울 거면 스텔라로 지어.”

“스텔라……. 그래요. 고마워요, 아리안. 아기도 기뻐할 거예요.”

스텔라. 특별히 좋은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은 아니었다. 그 이름은 그저 아리안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옆집에 살던 한 여자의 이름일 뿐이었다.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는 저것에게도 아기는 귀엽게 보이나 보지. 아리안은 메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해 그렇게 결론지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비극은 항상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시간에 벌어지는 법이었다.

아리안은 메릴의 연구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으며,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메릴이 아기를 데려온 것은 결코 순수한 의도로 행해진 것이 아니었으며 그들이 다른 세계와 연결된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날이 그날이었음을.

단순한 사고였을까, 혹은 신이 그들에게 내린 벌이었을까.

메릴이 만든 마법진은 폭발했다. 물리적인 폭발이라기보다는, 마법진에 응축되어 있던 마력의 폭발이었다.

당시 아리안은 침대에 누워 희미한 빛에 의존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돌연 온몸에 퍼져 있던 마력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끓어오른 마력은 폭발하듯 몸 밖으로 터져 나왔다. 동시에 울컥 하고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느껴 본 적이 없던 끔찍한 고통이 그녀를 덮쳤다.

“……아.”

알마스. 무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리안은 바닥에 얼룩진 핏자국을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고 의식을 잃었다.

***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다락방 창문이 열려 그 사이로 찬 밤공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항상 연구로 분주하던 마탑이 이토록 조용한 건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으나 바닥과 그녀의 옷에 묻은 피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의식을 잃은 시간이 짧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리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죽을 만큼 끔찍했던 고통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눈앞의 핏자국이 허상인 것처럼.

“……카일.”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카일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메릴.”

그리그 그토록 미워하는 이의 이름도 불러 봤다.

마찬가지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리안은 비틀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통증은 없었으나 이상하게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다락방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계단 앞에 쓰러져 있는 카일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오다가 쓰러진 것으로 보였다.

“카일.”

카일에게서는 마을사람들을 죽이고 고대 제국을 멸망시켰을 때 실컷 맡았던 시체 썩는 내가 나지 않았다.

“일어나 봐.”

그러니 죽은 것이 아닐 텐데. 그냥 의식을 잃은 것일 뿐일 텐데.

“카일, 카일…….”

아리안은 그저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부르다가 그의 몸을 등에 업고 다른 마법사들이 있을 곳으로 갔다. 지금 카일이 쓰러져 있는데 치료하지 않고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

다른 곳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법진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 책상 앞에 엎어진 여자……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잠든 듯이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메릴.

아리안은 빠르게 메릴에게 다가갔다.

“메릴. 일어나 봐.”

메릴에 대한 감정 따위는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녀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이었다.

“메릴.”

“…….”

“메릴.”

일어나, 일어나라고.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메릴이 눈을 뜨는 일도,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일도 없었다.

사실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었다. 계단 앞에 쓰러져 있는 카일을 발견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아, 또 나는 혼자 살아남았구나.

이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냈는데도, 이제는 몇 번이고 반복된 그 상황이 익숙해져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아리안은 그저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있던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중에는 메릴의 필체로 추정되는 글씨들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낸 쪽지인 듯했다.

[대상은 어린 아기로. 괜히 어른 몸에 넣었다가 날뛰면 귀찮아지잖아.]

[이왕이면 부모가 없는 애가 좋겠어. 부모가 애를 찾겠다고 귀찮게 할 수도 있잖아.]

[마법진 가동은 내일 밤. 올 때 애 데려오는 거 잊지 마.]

“…….”

아리안은 더 이상 종이를 넘기지 잃고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잠든 듯 죽어 버린 메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잠시지만 죽었다는 이유로 너한테 동정을 품은 내가 머저리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수백, 혹은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며 깨달은 것은 어리석게도 그것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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