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
“……벨라프.”
“벨라프가 왜요.”
“……쫓.”
“쫓…… 뭐요. 말을 끝까지 해야 알아듣죠.”
“……아냈어. 내가…….”
카일은 아리안의 입에서 나온 문장들을 더듬더듬 이어 붙였다. 그녀가 한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되뇌어 본 그의 눈이 곧 크게 뜨였다.
“제가 잘못 들은 거죠?”
“…….”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내 귀는 멀쩡한데.”
손바닥으로 귀를 통통 두드리면 머릿속이 통통 울린다. 분명 그의 귀는 멀쩡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뜻인데.
“아리안이 벨라프 쫓아냈어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였다. 아니, 믿을 수 없다기보다는 믿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목소리에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그나저나 내가 왜 얘한테 추궁당하고 있는 거지. 아리안은 이 상황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그의 질문에 답했다.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카일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얼핏 보니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리안이 미처 카일에게 우느냐고 묻기도 전에 카일이 그녀의 말을 자르고 길고 긴 문장들을 입 밖으로 뱉어 냈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아무리 아리안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오래 살아왔다고 해도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닐 텐데. 그때 인생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애가 마법을 더 이상 못 쓰게 돼서 축 처져 있었는데, 불쌍하지도 않았어요?”
“……너 벨라프한테 잔소리 옮은 것 같아.”
“옮기는 뭐가 옮아요!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메릴이 아리안한테 무정한 성격을 옮긴 것 같은데.”
“그건 좀 기분 나쁜데. 말도 안 듣는 그것하고 내가 뭐가 비슷하다고.”
지금 요점이 그게 아니잖아요! 카일이 갑자기 꿱 소리를 지르자 아리안은 몽롱했던 정신이 한순간에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 얌전하던 애가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런대.
“지금 당장 벨라프를 찾으러 가요. 저도 같이 갈 테니까. 아리안한테 시간은 많다 못해 넘쳐나잖아요. 애초에 마탑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한 건 아리안이었고.”
“……내가 뭐 하러 걔를 찾으러 가?”
“그야 벨라프를 쫓아낸 게 아리안이니까요!”
이 자식 시끄럽다고 했는데도 또 소리 지르네. 아리안은 두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카일이 옆에서 뭐라고 앙알거렸으나 아리안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의 잘못된 행동을 거론하며 잘잘못을 따져도 상대가 듣지 않으면 쓸모가 없는 법이었다. 카일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상대를 보며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리안은 모든 마법사들에게 칭찬이 박했다. 그러나 벨라프에게는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이렇게 짙은 마력을 가진 이는 마법사가 된 이래로 처음 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듯 벨라프는 아리안이 가장 아끼는 마법사이자 동료였다. 물론 이는 벨라프가 딱 마법을 잃기 전까지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카일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들은, 마탑에 사는 마법사들에게 있어 서로라는 존재는 겨우 그것밖에 되지 않았나. 오랜 시간 정을 쌓고 쌓아 만든 가족이 아니라 이익과 손해로 이루어진 집단일 뿐이었나.
카일은 몸을 낮추고 바닥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마력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훑고 지나갔다. 카일에게는 마력이 지나가는 길이 밝은 노란빛으로 보였다.
이는 아리안이 카일에게 너는 그나마 그 마법이 가장 봐 줄 만하다며 칭찬 아닌 칭찬을 했던 마법이었다. 실제도 물건이나 사람을 찾을 때 꽤나 유용하게 쓰이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의 마법은 벨라프를 찾을 때만은 항상 말썽이었다. 벨라프가 마법을 잃었던 그날에도, 그리고 지금도.
“또 벨라프의 기운은 하나도 안 느껴져요. 아리안도 알다시피 둘 중 하나죠. 죽었거나 너무 멀리 갔거나. 벨라프가 죽었을 리는 없고…… 어디로 갔을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아리안. 잘 생각해 봐요. 정말로, 그냥 단순히 벨라프가 천재라서 좋았어요?”
“응.”
아리안의 단호한 대답에 카일이 혀를 내둘렀다. 저런 지독한 사람 같으니라고.
하지만 그녀는 진심이었다. 벨라프 그가 다른 마법사들처럼 쭉정이 같은 마력을 가졌었다면 그녀는 그를 칭찬하지 않았을 테고, 그를 아끼지 않았을 테다.
“시간이 늦었어. 이제 들어가자.”
“그렇게 가자고 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아리안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마탑의 다락방으로 이동했다. 아래층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아하니 카일도 도착한 듯했다.
아리안은 메릴이 다른 세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후 자신의 방을 다락방으로 옮겼다. 메릴과 그 동료들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몸에 두르고 있던 낡은 망토를 구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렇게 누워서 잠들지도 못 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카일 이 망할 놈.”
그놈의 벨라프, 벨라프. 카일 그놈은 성질도 더러운 놈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자꾸 벨라프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럴 거면 벨라프가 떠날 때 붙잡았어야지.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눈을 감아도 의식이 또렷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술집에서 탁자에 코 박고 잠들어 버릴걸.
아리안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카일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문이 쾅 하고 굉음을 내며 벽에 부딪히자 카일이 부은 눈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안 되겠다, 카일.”
“……예? 한참 자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벨라프, 찾으러 가야겠어. 당장.”
“뭐라고요……? 농담하지 마요. 이 오밤중에 어딜 가겠다고.”
하하. 카일은 아리안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며 멍청하게 웃었다. 그러나 카일이 얼른 가서 자라며 손을 흔들어도 아리안은 꿋꿋하게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아리안……. 농담이죠……? 지금은 새벽이에요. 당장 벨라프를 찾으러 가겠다니. 벨라프를 찾으러 가자고 그렇게 사정을 할 때는 듣지도 않더니 이 새벽에 갑자기 깨워서 하는 말이 그거예요?”
“가자. 옷 갈아입어. 그대로 가도 좋고.”
그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굳이 그가 아니라도 아리안의 고집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딱 한 사람 있나. 메릴. 아리안이 반대했어도 메릴은 연구를 진행했으니까. 카일은 궁싯거리며 몸에 망토를 둘렀다.
“일주일간은 마탑으로 돌아올 생각 하지 마. 쉴 생각도, 잠잘 생각도 하지 말고.”
“…….”
“아무 말도 안 하네? 불평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무 힘없는 저한테 무슨 거부권이 있겠나요.”
그녀의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의미였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아리안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카일의 뒷목을 쥐고 그를 잡아끌었다.
그 후로 하루가 지나가고 이틀이 지나, 일주일도 가뿐히 지나갔다. 그들이 마탑을 떠나온 지 거의 이 주일 정도 지났을 때, 그들은 드디어 벨라프가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오두막을 찾아냈다.
“여기 있는 것 같은데. 들어갈까.”
“아리안. 벨라프 성격 더러운 거 잘 알잖아요. 함부로 문 부수지 말고 노크, 제발 노크.”
“도대체 너는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아리안은 큼큼거리며 목을 푼 뒤 주먹을 쥐고 문을 세게 두드렸다. 뒤쪽에서 노크를 할 거면 목은 뭐 하러 푼 거냐는 잔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지금 나가요.”
문 너머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 본 사이에 벨라프가 성격을 고쳤나.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벨라프가 아니라 한 여자였다.
아리안과 여자는 서로를 마주보며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오두막에서 나온 이는 벨라프가 아니었다. 하지만 벨라프의 흔적은 이곳에서 끊겨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로 간 건지.
“아, 설마 얘가 걘가? 르, 뭐더라. 걔?”
“르비아요.”
카일이 얼른 아리안의 귀에 속삭였다. 아, 그래. 르비아. 르비아였지.
아리안은 성큼성큼 다가가 르비아를 살폈다. 눈앞의 여자가 르비아가 맞는지. 과연 자신이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는지, 이 집에 벨라프가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그러자 르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리안을 올려다봤다. 아리안이 그녀보다 키가 훨씬 컸던 탓에, 르비아는 한참이나 고개를 올려야 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맑았다.
“근데 얘가 원래 이런 애였나? 분위기가 다른 것 같은데. 전에는 좀 더 칙칙했고…….”
그때 철로 만들어진 단단한 냄비가 날아와 아리안의 옆구리를 스치고 벽에 처박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얼굴을 마구 구긴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벨라프가 보였다.
“뭐? 방금 뭐라고 했어. 칙칙? 미쳤어? 죽고 싶어?”
“이제 마법도 못 쓰는 게 죽이기는 누굴 죽여? 야, 카일. 네가 그렇게 찾던 벨라프다. 성질 더러운 거 보니 벨라프 맞나 보네. 마탑 떠날 때는 그렇게 아련하게 인사하더니.”
카일이 벨라프를 향해 돌진하자 그는 옆으로 피하며 카일의 포옹을 피했다. 그럼에도 카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벨라프를 쫓았고, 결국 그를 끌어안는 데 성공했다.
“벨라프! 나 카일이야.”
“알아, 아니까 떨어지기나 해.”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 불쌍한 벨라프! 못된 아리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저게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막 지껄이네.”
아리안은 작은 오두막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창문으로는 따스한 햇살이 들어왔고 침대에서는 포근한 냄새가 났다.
“벨라프. 손님이 왔는데 차라도 대접해야지.”
“쫓아낼 때는 언제고 손님은 무슨.”
“아가씨. 아가씨는 저런 성격 더러운 놈하고 어떻게 같이 사는 거야?”
아리안이 르비아를 돌아보며 묻자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가씨는 저놈한테 코 꿰인 거야. 성격 더럽고 가진 것 없고……. 아, 유일하게 가진 건 마법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없고!”
아리안이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웃긴 이야기가 아니었으나 르비아는 그냥 그녀를 따라 웃었다. 안절부절못하며 가만히 앉아 분위기만 살피던 카일이 아리안의 팔을 툭툭 치며 속삭였다.
“아리안, 제발……. 눈치 바닥인 거 티 좀 내지 마요. 벨라프가 왜 마법을 못 쓰게 됐는지 생각하라고요. 그 이유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아.”
아리안은 어색함을 이기지 못 하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다가 얼른 말을 바꿨다.
“아…… 니. 그래도 진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랑만 있으면 충분할 수도 있지. 아가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내가 어쩌겠어.”